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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국악신문 연재소설 '흙의 소리' 전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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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11>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3> '난계유고'부록에 시장諡狀 신도비명神道碑銘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시장은 유현儒賢 공신功臣 들의 시호諡號를 내릴 때 미리 세 가지를 의정議定하여 임금에게 올리고, 그 중에서 하나를 결정하였는데 그 시망諡望을 상주할 때 생존시의 한 일들을 적은 글발이다. 박연의 시장은 영조英祖 때 문신(이조판서) 홍계희洪啟禧가 찬撰하였다. 여기에 그 시장을 간추려 일대기一代記를 되돌아보는 것으로 박연의 생애 이야기를 맺고자 한다. 1378년 박연은 나면서부터 자질이 뛰어난 데다가 총명하였고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덕기德器가 침착하고 진중하여 어릴 때부터 하는 일이 성인과 다름 없었다. 어려서 아버님을 잃고 어머님 봉양을 극진히 하면서 뜻을 어기는 일이 없이 곁을 떠나지 않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약관의 나이에 문장을 이루었다. 박연은 개연慨然히 예악에 뜻을 두고 널리 유적遺籍을 구하여 강토講討하면서 종률鍾律에 정진하였다. 어릴 때부터 앉으나 누으나 마음 속으로 계획한 바가 있어 악기를 치는 형용을 하며 휘파람을 불다가 입을 다물고 율려律呂의 성음聲音을 입술로 불기도 하였다. 대개 스스로 그 묘리妙理를 얻은 것이다. 부모상을 당하자 죽을 마시면서 여묘廬墓하여 몸이 여위어 피골이 상접되었다. 3년상을 마친 뒤 또 3년 동안 여묘하니 효감소치孝感所致로 토끼가 따르고 범이 호위하는 이상한 일이 있어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자 정려旌閭하라는 명을 내렸다. 140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22년 진사시험 제일로 발탁되어 태종왕은 크게 포상을 하였고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간원헌부춘방諫院憲府春坊을 거쳤고 세종이 왕위에 오르고 예악과 문물을 갖추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박연은 규칙을 세워 왕에게 건의하였으며 조의朝儀를 일신하도록 주청하였다. 그때 기장이 해주에서 생산되고 경석이 남양에서 생산되었는데 세종은 박연이 음률에 정통한 것을 알고 율악律樂을 맡아보게 하였다. 박연은 기장을 거두어 푼 촌을 적분積分하여 옛 제도에 의거 황종율관을 만들어 불어보니 그 소리가 중국 황종의 음보다 조금 높았다. 이에 다시 기장의 입자 형태를 밀랍을 녹여 조금 크게 만들어 적분하여 율관을 만들었다. 한 톨이 푼이 되고 열 톨을 쌓아 촌을 삼는 법으로서 9촌으로 황종의 길이를 삼아 삼분손익하여 12율을 산출하였다. 이듬해에 편경을 새로 완성하였는데 중국의 성음을 따랐으나 유빈이 도리어 임종보다 높고 이칙은 반대로 남려와 같았으며 응종 또한 무역보다 낮았다. 그 까닭을 알고 중국의 제도를 약간 변통한 뒤에 율에 맞추었다. 왕이 중국에서 준 편경과 박연이 새로 만든 율관을 맞춰보고 가상히 여겨 마지 않았다. 중국의 편경이 음률에 맞지 않고 새로 만든 편경의 성음이 맑고 아름다웠다. "귀국의 악률이 바른 소리를 얻었으니 아마도 이인異人이 나와서 악률을 주관하지 않습니까.” 중국사신이 왔다가 음률을 듣고 찬탄하여 말하기도 하였다. 박연의 명성은 높았고 왕의 총애는 더욱 두터워 이조 병조 두 판서를 역임하였고 사법관으로 있을 때는 재판을 공명하게 하였다. 문종 때는 중추원사 보문각제학을 역임하였고 또 예문관 대제학을 제수받아 한 때의 사명詞命이 박연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세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아들이 육신六臣과 함께 화를 당하였고 박연은 삼조三朝의 기구耆舊로 연좌連坐를 면하였다. 1458년 81세로 생을 마쳐 영동 고당高塘, 부인(정경부인 여산송씨)의 묘 뒤에 있다. 3남 4녀를 두었는데 맹우孟愚는 현령을 역임하였고 중우仲愚는 군수를 지냈으며 계우季愚는 육신의 화란禍亂을 당하였다. 1녀는 목사牧使 조주趙注의 아내가 되고 2녀는 사직司直 권치경權致敬의 아내가 되었으며 3녀는 감찰監察 방순손房順孫의 아내이고 4녀는 선비 최자청崔自淸의 아내가 되었다. 박연이 살던 곳에 난초가 많이 생장하여 난계선생이라 일컫는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은 선생의 정통한 학식과 정직한 도술道術은 우리의 사표가 된다고 하였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은 도덕은 해동海東에 높았고 명성은 중국에까지 현양顯揚되었다고 하였으며,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효성은 하늘에 닫고 덕행은 세상에 뛰어났으며 경륜經綸을 세워 국가를 도와 흥성하게 다스렸다고 하였다. 시장을 마무리하면서 찬자는, 아들이 6신과 함께 돌아갔으니 큰 소나무 밑에 맑은 바람이 일고 있는 것이라고 쓰고 있다(與六臣同歸 則長松之下 果有淸風). 송설당松雪堂이라는당호堂號를 쓰기도 하였는데 박연의 생애는 한 마디로 큰 소나무 아래 불고 있는 맑은 바람소리 같은 것이었다. 흙의 소리였다. 아련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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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10>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2> 그리고 이선생도 그래서 여기를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선비가 살던 마을을 뜻하는 거사리, 거기에 박연의 유배 모습을 담아 보자. 어떤 기록이 나올 때까지. 이날 제2 제3의 마을을 찾아 그 가능성을 더듬어 보았다. 옥포리玉浦里, 백도리百島里, 옛 이름은 온섬 원셈 마을, 붉은 바위가 있는 자암紫巖마을, 평지마을 등. 아무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잠간 얘기한 대로 이선생은 박연이 고산 귀양지에서 쓴 가훈을 소개하고 그 배경을 설명하였다. 가훈을 먼저 보자. 열 일곱 항목을 17단락으로 발체 요약하였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면 곧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아침저녁으로 항상 소학小學을 스승으로 삼고 이 책을 정숙精熟 관통한 후에 사서四書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바라건대 내 자손들은 형제간에 과오가 있으면 서로 경계하고 노여운 생각을 마음에 품어두지 말며 항상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꾸짖는 말로써 대하지 말라. 집을 다스리는 데는 화순和順이 제일이다. 서로 다투는 불상사는 첩을 두는 데서 일어난다.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여 축첩하는 경우라도 한계를 엄격히 세워야 한다. 불행히 상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처의 자식이 조상을 받들 자가 있으면 후처를 얻지 말고 단산斷産한 여자를 택하라. 가문을 보존하는 하나의 절도節度인 것이다. 일가 중 때가 지나도록 출가出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 분수에 맞게 금전과 재물을 내놓아 때를 잃지 말게 하여라. 이것도 우리 가문의 미사美事가 될 것이다. 상례 장례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도록 하고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과음 포식 송사 여자관계 등 8가지 금기사항을 말하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아침 저녁으로 전奠을 지내고 삭망朔望으로 제사를 지내면 된다. 제물은 살았을 때와 같이 정결하고 간략하게 주안하여 3년을 마치면 된다. 효도 우애 충성 신의 예의 염치로써 가정의 법을 삼고 마음을 맑게 하여 욕심을 적게 하며 남을 해치지 말고 탐하지도 말며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 남의 급한 것을 도와주며 남의 어려움을 구제할 것이며 성훈聖訓의 가르침에 따르라. 거문고와 비파와 같은 악기는 옛날부터 군자가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성정을 길렀으니 손수 어루만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풍명월 아래서 술을 나누면서 시를 짓는 것은 좋은 일이나 늘어지게 취하여 노래하며 춤추는 것은 안 좋다. 매와 개로 사냥을 일삼는 일은 다른 동물의 생명을 죽이게 되니 잔인하고 의리를 상하는 일이다. 내 자손들은 삼가 몸을 보존하여 문호門戶를 잃지 않도록 하여라. 친척이나 벗이 소첩에 빠져 있는 집 미망인 과부 집에는 경솔히 드나들지 말아라. 여색女色은 가장 명예와 절조에 관계되는 문제다. 경박하고 소흘히 하지 말아라. 이 늙은이의 뜻을 명심하여 선조의 유풍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공사 간 연희 등 환락의 자리에서 기생들과 의혹될 일을 조심하며 오래 머물지 말고 핑계를 만들어 물러나라. 삼가고 삼가라. 몸을 다스리는 하나의 큰 절도이다. 판관判官이나 대사간大司諫의 임무를 맡게 되었을 경우 사족士族의 문제 흔적이 애매하거나 부녀의 간통 사건일 경우 경솔하게 판결해서는 안 된다. 증거가 없으면 재판을 물리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집은 청렴하여 후손에게 전해줄 재물이나 보배는 없다. 다만 내가 평생 겪은 일들과 원하는 바를 기록, 가범家範을 만들어 장래에 영원히 전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렇게 조목 조목 쓰고 끝으로 결연히 덧붙였다. "을해乙亥 맹추孟秋 상한上澣 78세 늙은이 병을 무릅쓰고 써서 전하노라.” 세조 1년(1455) 음력 7월이다. 고통스런 귀양살이,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박연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었을까. 꼭 그의 가정 자녀손에게만 전하고 싶은 덕목德目이었을까. 귀양 전의 박연과 그 이후의 박연의 생生을 나누어 본다. 앞의 생은 먹물로 썼다면 뒤의 생은 피는물로 쓴 것이다. 이선생의 칼럼에 쓴 대로. 「난계선생 문집文集」 「난계선생 유고遺藁」에 수록되어 있다. 가훈家訓-17칙서十七則序라고 되어 있는데 서문은 영조英祖 때의 문신文臣 이재李縡가 쓰고 있다. 앞 부분이다. "박공(박연)이 음률에 정통하였으므로 수백년을 지나 지금에 이르도록 소년들조차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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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9>흙의 소리 이 동 희 못다한 이야기 <1> 2020년 9월 17일 시작하여 이제 마무리를 하면서까지 2년이 넘는 동안 난계 박연 이야기에 매달려 썼다. 세종실록을 비롯한 몇 왕조실록 난계유고 등을 많이 인용하였고 박연에 대한 다른 두 세 소설을 참고를 하였는데 말년에 대한 사항은 새로 제시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영동 박연이 태어나고 자란 길을 국악로라고 명명命名하고 있고 그곳에 난계국악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거기에 마지막 생애의 부분이 추가되고 고쳐지도록 해야 할 것이다. 박연은 생을 마감하기 직전 고산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고 거기서의 고통스럽지만 귀중한 삶이 있었다. 앞에서 잠간 얘기했지만 그 부분 답사를 통하여 조금 더 써 본다. 수소문 끝에 연결된 전주 이승철 선생과의 만남은 행운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인 93세의 이선생은 완주향토문화연구소장으로 있으면서 완주 문화와 역사에 대한 글을 많이 썼고 완주 전주신문 <대문 앞 너른 마당> 칼럼에 최근 악성樂聖 박연이 고산 귀양지에서 피눈물로 쓴 가훈家訓 17조를 집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동안 사료史料에 많은 도움을 준 영동 심천深川의 이규삼李揆三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과도 아는 사이었다. 이승철 선생과 몇 차례 전화 통화를 하다가 6월 11일 만났다. 이선생은 박연의 유배지를 정확히 일 수 없다고 하였고 몇 군데의 가능성이 있는 곳을 답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선생의 경륜을 볼 수 있는 많은 전적典籍이 꽂혀 있는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답사 브리핑을 하고 출발하였다. 거실에 ‘박연 연고 찾아/고산 여기 오다/영동문사!’라고 달필로 큼직하게 환영 문구까지 써붙여 놓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선생이 살고 있는 전주에서 완주군 고산면까지는 거리가 꽤 되었고 여러 골짜기를 가게 되었는데 동행한 이명건 소설가의 승용차로 다 돌아볼 수 있었다. 가면서 이선생은 멀리 바라보이는 마이산馬耳山이라든지 고산의 입지와 주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설명을 줄곧 하였다. 그러나 박연이 안치되어 있던 유배지가 어디였던지, 바로 여기라고 지적해 주지는 못하였고 두 세 군데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이는 것이었다. 제일 가능성이 높은 장소는 거사리居士里였다. 운제산雲梯山이 바라보이는 만경강萬頃江 상류 물 속에 잠긴 마을이었다. 운제리 돌다리꼴 황꼴 쪽골 등 수몰水沒된 지역이었다. 언제 수몰이 되었는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너무 황당하고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갈 수는 없었고 멀리 바라만 보았다. 이승철 선생은 여기 저기 전망과 앉음새를 찾아서 자리를 잡는다. 그 지점이 바라보이는 비봉면 대아리 물가 언덕 위였다. 차를 세우고 가방 속에 챙겨가지고 온 제물과 막걸리 그리고 한지에 몇 줄 한시漢詩가 적힌 닥종이를 귀티가 나는 봉황문양의 봉투 속에서 꺼내어 축문祝文처럼 들고 있는 것이었다. 막걸리를 종이컵에 따르고 600년 전-정확히는 560년-박연 선생께 간단한 예를 올리자고 하는 것이었다. 같이 저쪽 운제산 쪽 물 가운데를 바라보며 큰절을 두 번씩 하였다. 그리고 이선생이 말하였다. "이 시는 90여 년 전 우리 조부(이성근李成根)께서 지으신 것인데, 언젠가 영동에서 사백詞伯이 이곳에 올 것이라고 예견을 하신 것이여. 가보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 시편을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옳을까, 아니면 조부님의 예견대로 찾아오신 영동 사백에게 주어 난계 박연선생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마땅할까를 고민하고 또 고민한 끝에, 오늘 이 자리에서 박연 선생의 연고를 찾아 영동에서 오신 선생께 주기로 결심을 했어.” 그렇게 말하고 그 시를 필자에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이제 이 시는 내 손에서 떠났으니 이사백께서 잘 보관해 주시오.”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의 손이 떨리었다. 마치 박연 선생 그리고 명여 선생이 바라보고 있는 듯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시는 황음况吟이라 제題하였다. 永同詞伯不遠來 蘭溪流謫何處在 薰風日域白顔紅 雲梯沈川添淚哀 대략 옮겨보면, 영동에서 사백이 머지 않아 올 것이다 / 난계 선생이 귀양 살다 간 곳은 어디쯤 있는가 / 훈훈한 바람 불고 햇빛 비치어 흰 얼굴이 붉어지고 / 운제산 밑 냇물에 잠겨 슬픈 눈물만 더하네. 시 뒤에 임신壬申 유월榴月 명여明汝라고 씌어 있는데 유월은 석류꽃이 피는 6월을 말하는가. 명여는 이선생 조부의 자字이다. 이로 볼 때 이 시는 90년 전 이선생이 4세 때 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그때 이선생 조부도 악성 난계 선생이 이곳에서 귀양살다 간 곳이 어디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것이 죄스러워 운제산 아래 냇가를 바라보며 부끄럽고 죄송스러움에 눈물을 흘리며 슬퍼한다는 뜻인 것 같다. 아니면 여기 이 부근인데 정확한 지점을 몰라서 그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어느 집터라든지 바로 여기가 박연 선생이 살던 곳이었다고 추념追念도 하고 그런 것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이곳이 수몰되지 않고 마을이 존재하고 있을 때 말이다. 올곧은 선비의 마음이 근엄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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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8>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5> 셋째 계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가 되어 투옥 되고 종내에는 교형絞刑에 처해진 것이다. 청천벽력이었다. 단종 1년(1453)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사건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남지가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한 이후 좌의정은 김종서, 우의정은 정분鄭笨이 맡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두 아들과 함께 죽였다.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고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혔다. 그리고 2년 뒤 강제로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조이다. 계우는 이런 사태를 막아보려고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김문기金文起 등의 혈맹血盟에 가감하여 단종 복위復位를 시도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에게 안겨준 슬픔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단종 2년 9월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교형에 처한 정분 박계우 등에게 연좌緣坐된 사람을 청컨대 모두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법대로 하라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다 열거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봉교奉敎하였다. "부모 아들 출가하지 아니한 딸, 처첩妻妾 조부모 손자 형제,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자매, 아들의 처첩은 원방遠方의 관노비官奴婢로 영속永屬시키고 백부伯父 숙부叔父와 형제의 아들은 원방에 안치安置하되, 나이가 아직 16세가 되지 못한 자는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예例에 의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이어서 봉교, 왕명을 받들었다. "박계우의 아비 박연은 자원에 따라 외방外方에 안치하라.” 원방은 먼 지방, 먼 곳으로의 귀양을 말하고 외방은 서울이 아닌 지역을 말하며 안치란 글자 그대로 편안하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양 간 죄인의 거주를 제한하던 형벌을 말한다. 박연은 삼조三朝에 걸쳐 공을 세운 것이 참작되어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고 관노가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죄를 받고 귀양가기를 자청한 것이었다. 그것도 서울만 벗어나면 되었지만 먼 지방을 자원하였다. 전라도 고산高山 땅, 산 설고 물 선 오지奧地 골짜기였다. 메투리를 한 죽 걸머지고 실신한 아내 송씨를 부축한 채 몇날 며칠을 걸어서 걸어서 남으로 남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멀리로 내려 갔던 것이다. 가다가 쓸어지기도 하고 들어눕기도 하였다. 계속 걸어서 땅 끝까지 가려 하였지만 그래서 마음만으로라도 그에게 베풀어준 은혜을 갚으려 하였지만 더는 갈 수가 없어 주저 앉은 곳이 고산 골짜기였다. 물가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영동 지프내보다 훨씬 외지고 험한 곳이었다. 현재 전주全州를 둘러싸고 있는 전북 완주完州군 고산면이다. 귀양 가서 산 마을 이름은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몇 군데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 속에 물 속에서나 박연의 자취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세조 1년(1455) 8월 고산에 내려와 거처한 지 1년도 안 되어 아내 송씨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박연은 죽은 아내를 고향 영동에 돌아가 장사 지내게 해 달라고 상언하여 허락 받았다. 그러나 안치를 벗어나지 못한 지아비는 장례에 참석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뒤 8월 박연은 경외종편京外從便, 서울 외에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 결정되어 방면放免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영동 고향 땅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도 숨을 거두었다. 향년 81세(1378. 8. 20.∼1458. 3. 23.) 모진 대로 여한 없이 산 생애였다. 올곧은 한 선비의 쓸쓸한 죽음 뒷 얘기 두 가지만 추가한다. 하나는 고산에서 지낸 3년 동안 그는 가훈 17장을 썼다. 아들 손자가 죽거나 다 뿔뿔히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터에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그리고 또 하나는 여러 왕자들을 비롯한 뭇 한량들의 애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다래가 부음을 듣고 멀리 영동을 향해 땅바닥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선생님 선생니임 선생니이임!” 몇날 며칠 식음을 끊고 은사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일어날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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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7>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4 셋째 아들 계우季雨로 하여 생긴 일이었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림학사를 역임하고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등과 도의道義 충의忠義의 의誼를 다지고 있었던 것인데 늘 꽁생원 아버지에게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하고 입찬 소리를 하였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보다 못한 자식이 되면 쓰느냐고, 불초不肖 얘기만 하였다. 좌우간 얼마 뒤의 일이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박연은 매일 매일 자신의 주어진 일에 매달려 있었고 끊임 없이 상언을 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하루는 영의정 김종서金宗瑞가 아뢰었다. 여악女樂에 대해서였다. 세종께서 연향宴享과 회례會禮에는 처음부터 여악을 사용하지 않고 남악으로 대체시켰었는데 유독 중국 조정의 사신에게만 구습을 따라 개혁하지 못했으니 미편未便하다고 하였다. 임금(문종)도 같은 생각이었다. "비록 여악이 정수精粹하고 남악은 정수하지 못하더라도 정수하지 못한 남악을 사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 박연 같은 사람은 또한 얻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그로 하여금 다시 절차를 의논하여 그 음악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영의정이 다시 아뢰자 임금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명하였다. "만약 대신 사용할 만한 음악이 있으면 변경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음률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관장管掌할만하다. 세상에는 사광師曠 같운 사람이 없으니 잠정적으로 박연으로 하여금 강구講究하게 하라고.” 사광은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로 음율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종은 그로부터 한 달 뒤 붕어하여 단종에게 모든 국사國事를 물려주었다. 단종端宗 즉위년(1452) 박연은 행중추원부사行中樞院副使로 배임拜任되었고 악학제조樂學提調 때의 「세종어제악보世宗御製樂譜」를 발간하였다. 이듬해 다시 중추원부사로 그리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제수除授되었다. 또한 의정부 좌찬성 겸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의 명을 받았다. 그동안 여러 직책과 부서에서 일을 하였지만 내심 가고싶은 자리 오르고 싶은 자리였다. 관직이란 가고 싶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있고 싶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문각은 경연과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아로 마음대로 책을 보고 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영의정 좌의정 정승 같은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고 책을 마음대로 읽고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리가 편하고 원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언저리에 또 하나의 일이 있었다. 일이라고 할까 책무責務였다. 단종1년 7월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가 경연에서 음악을 익히는 일과 악공에게 직을 제수하는 일을 계청하였으니 정인지의 말을 듣고 의정부에서 의논하게 하라고 하였다. 정인지는, 예전에 세종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예禮보다 중한 것이 없으나 악樂의 소용 또한 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는 중히 여기나 악은 소흘히 하여 한탄할 일이다 하시고 곧 명령하여 오례五禮를 찬정撰定하였고 정대업定大業을 제정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악보를 선정하여 무동舞童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무동이 늙으면 다시 쓸 수 없다하여 구폐救弊할 계획을 다시 꾀하였다 하면서 말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안가晏駕하시고 문종께서 사위嗣位하여 세종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음률을 알기 때문에 도제조都提調로 삼으시고 신臣을 명하여 참정參政케 하시며 하교하시기를……” 뒤의 얘기는 생략하지만 그런 연유로 해서 수양대군이 정인지에게 글을 보내었다. 그 글 중에 있는 말이었다. "어제 판서가 여러 정승들과 이 일을 의논한 것을 들으니 심히 기쁘다. 나와 판서 그리고 박부윤朴府尹 등 두 세 구신舊臣만이 맡아야 할 바는 선왕들의 뜻을 이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판서는 정인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박부윤은 박연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을 연결하고자 한 것인데, 잘 아는 대로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世祖로 그 이전부터 세력을 구축하고 또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박연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꼽고 있었고, 이제 마땅히 정대업 보태평의 춤을 속히 익혀야 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에 이어 문종 단종 세조까지 그를 아끼고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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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6>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3 어려 황황자화 남산유대 녹명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들이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시儀式詩에 풍風 아雅 송頌이 있고 아에는 소아 대아가 있다. 정악正樂의 노래말이다. 앞에서도 몇 번 얘기하였지만. 중추원부사 박연은 또 다른 일로 상언하였다. "태봉胎峯 아래에 백성들의 오두막집을 철거하고 그 전토田土를 폐지하니 지극히 통석痛惜합니다.” 태봉 아래 여사廬舍를 철거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안타깝다고 아뢴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닭이 울고 개가 짖고 저자가 열리고 마을에 연기가 나면 은연중에 융성하고, 장법葬法을 상고해 보아도 고금의 경험이 모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신라의 능묘陵墓는 대개 왕성王城 안에 있었고 중국 사람들의 묘는 전원田園의 두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인연人煙이 모인 것도 길吉한 기운이 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태실胎室이 인연을 꺼려할 것이 없는데 어찌 태봉의 천 길 아래에 있고 평지 땅인 전원田園과 제택第宅을 모두 남김 없이 철수한 뒤에야 길하겠는가. 이것은 심히 이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법규를 세운다면 나라의 전토는 줄어들어 민생의 원망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백성들이 번성하여 사람이 많아지고 땅이 좁아지면 한 조각의 빈 땅도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도 왕정의 급한 바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구업舊業을 그대로 허락하시고 옛 사람의 태실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박연의 상언은 바로 풍수학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며 태봉 근방의 인가와 토전土田의 거리 등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고 태봉의 주혈主穴 산기슭 외에는 일찍이 경작한 토전과 태봉 주변의 사사寺社는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듣게 된다. 박연은 다시 성주星州 태봉 밑의 민가民家를 철거하지 말도록 상언한다. "백성을 해롭게 함은 중한 일인데 성상聖上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천총天聰을 어지럽게 합니다. 소신小臣의 명예룰 요구하는 계책이 아니고 성상의 덕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쳐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고자 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 시행하소서.” 백성을 위한 간곡한 이 청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연의 상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악의 종鍾과 경磬의 소리는 처음으로 만들 때에 오로지 죽률관竹律管에 따라서 교정校正하였습니다. 죽률은 가볍고 가운데가 비어서 추위와 더위에 쉽게 감응하므로 볕이 나고 건조하면 소리가 높고 흐리고 추우면 소리가 낮습니다. 이 이치가 미묘하여 일찍이 미리 헤아리지 못하다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사유를 갖추어 동률관銅律管으로 고쳐 만들어 가지고 교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미精微함을 다 하지 못하여 무릇 6년 동안 교정한 소리가 조금 높기도 하고 조금 낮기도 한데 역시 추위와 더위 때문에 변화가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아악의 소리가 태반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종 1년(1451) 4월에 올린 상언이었다. 종과 경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소리를 교정할 것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지난 무오년戊午年 4월에 제향祭享과 조회악朝會樂의 종과 경을 다 모아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철에 모두 교정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이에 ‘올 가을에 다시 아뢰어 시행하라’고 명하셨는데 지금까지 시일을 미루어 왔으니 참으로 작은 흠결이 아닙니다. 빌건대 금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모름지기 바로잡아서 길이 후세에 전하도록 하소서.” 무오년이면 1438년, 14년 전이다. 세종 임금의 명이었다. 그것을 이제라도 실현시키고자 그 아들 임금 대에 다시 아뢰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고 예조에서는 가을까지 기다리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연으로서는 마지막 상언이었다. 참으로 길고 끈질긴 상언 상소 상주의 행진이었다. 예악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잡박한 개혁의 의지 바로세우고자 하는 집념의 표출이었다. 마당 가운데 넘어진 지게 작대기를 일으켜 세워 놓고자 하는 시골 촌뜨기의 욕망이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의욕이 넘치고 너무나도 집요한 그의 그칠 줄 모르던 행진도 멈출 때가 되었다. 그 해 9월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박연의 병세를 진맥하고 말미〔休暇〕를 주는 일로 인하여 우참찬 허후許詡가 이른 것이 문종실록(9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병 때문이 아니고 일흔 넷 다섯의 늙은 나이 때문도 아니고 아 참, 너무도 엄청난 비운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의 한 가운데로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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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5>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2 "가동歌童이 끊겨지지 않는 것은 전날 무동舞童의 남은 풍습에 인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를 폐지한다면 원묘原廟에서 송덕頌德하는 음音이나 공적으로 빈객을 연향宴享하는 악樂이 어찌 되겠습니까. 신의 망견으로는 가동은 폐지할 수 없으며 세종께서 무동은 혁파한 것은 오로지 계속하기 어려운 때문이라고 하였을 뿐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에 없애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계속할 수 있어 오래 할 수 있는 대책을 얻게 되면 전의 법규를 수복修復하는 성주의 계술繼述하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언필층 신의 망령된 의견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의견을 말하였다. 박연의 세종 때 이루지 못한 제도를 기어이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집념도 대단하지만 의지가 참으로 강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양인良人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을 추쇄推刷하여 입속入屬하게 하면 잇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가동의 임무는 반드시 용모 성음聲音 성품 생리生理로 골라야 하므로 사람 수가 많은 곳에서 무리를 모아놓고 간택揀擇하여야 하는데 무동을 처음 설치한 법에 의하여 가동을 세운다면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다. 외방外方 각 고을에 숫자를 책임 지우고 경상도 66 전라도 56 충청도 53 총 175고을에서 3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58인이 될 것이며 경기도 41 황해도 25 강원도 23 총 87고을에서 5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17인이 될 것이니 합하면 75인이 되는데 이로써 액수를 정하고 경외에 장부를 비치하고 윤차輪次로 숫자를 충당하면 될 것이다. 대개 동기童伎를 바꾸어 세우는 기한이 7, 8년 뒤에 있으니 만약 세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반드시 21, 2년이 걸려서 도로 처음 세운 고을로 돌아가고 다섯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모름지기 38, 9년이 걸린 뒤에 처음 세운 고을에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바꾸어 대신하게 하는 기간이 매우 넉넉하여 동기의 숫자가 항상 찰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며 양인良人의 남편에게 시집 가서 낳은 사람이나 여기女妓 무녀巫女의 자식을 이에 더하면 가동을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이 창립한 회례연會禮宴 양로연養老宴의 악樂이 자연히 옛날로 복구하여져 오늘날 거듭 새로워지고 길이 후세에 전하여져 일거에 만전萬全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는 계책이었다.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누가 있어 이렇게 주도면밀한 생각을 실현하는 묘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예와 악의 분야 악의 분야, 그것도 그 하부 구조라고 할까 악과 관련한 세세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대처하는 그리고 너무나 전문적이고 자상한 방안이었다. 정말 박연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왕前王이 하지 못한 것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를 한번 시험하여 보소서.” 끈질기고 간곡한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셋째 중국에서는 공공 연회에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고 태종 임금은 연향에 여악을 쓰지 말라고 하였고 세종 임금은 여러 대 내려오는 유풍遺風이기 때문에 가볍게 고치는 것을 무겁게 여겼으나 새 황제가 등극하고 마침 성주城主가 즉위하는 초기를 당하여 덕德을 새롭게 하는 바로 그러한 때에 구습舊習을 따라서 여악을 쓴다면 적의適宜한 바가 아니다. 넷째 악부樂部의 악에는 제향악祭享樂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악祭樂은 봉상시奉常寺 십이궁보十二宮譜와 20여 장章이 있어서 이습肄習한 지가 오래이나 연악宴樂은 세종 임금이 주문공朱文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중에서 아악시장雅樂詩章 12편의 악보를 얻어 표제表題하여 내었고 보법譜法이 크게 갖추어졌으며 그 중에서 성음聲音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 양로연으로 들이었으며 보법 전체를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출印出하도록 전한 지 지금까지 21년이나 아직도 인행印行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으면 이미 퍼진 금석金石의 음音도 소종래所從來를 알지 못할 것이니 융안지보隆安之譜가 어려魚麗 제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가 황황자화皇皇者華 제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가 남산유대南山有臺 제3장에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이 녹명鹿鳴 제1장에서 나온 것과 같은 사실을 후세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원컨대 전하께서 거듭 인행하도록 명하고 미루어 두지 말도록 한다면 심히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박연의 상언을 의정부에 내려서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등이 의논한 결과 모두 그대로 따르고 여악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 구습舊習을 따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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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4>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1 세종 32년(1450) 정월 인수부윤 박연을 응교應敎 김예몽金禮蒙 수찬修撰 유성원柳誠源과 함께 불러 내약방內藥房에서 의학에 관한 서적을 7일간 상고하여 보게 하였다. 그것이 세종 때 마지막으로 한 일이었다. 세종 임금에 이어 문종 단종 임금 때에도 박연은 같은 자리에서 하던 일을 전과 같이 하였다. 일흔을 넘은 노구老軀는 말을 잘 듣지 않았지만 마음과 필력筆力은 변함이 없었다. 문종 즉위년(1451) 3월 박연은 풍수학제조 이정녕李正寧 공조판서 정인지鄭麟趾와 함께 상언을 하였다. "대행왕大行王의 교지敎旨에 대부大夫 3월 제후諸侯 5월 천자天子 7월로 하는 법은 진실로 구기拘忌로 하여 변경하여 바꿀 수 없고 그 중간의 자세한 절차는 마땅히 분변分辨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오는 6월은 국장의 정한 기한이니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음양서陰陽書를 상고하여 본다면 5월 6월 7월은 모두 묘룡墓龍이 무덤에 있는 달이니 만약 음양서에 따른다면 지금 마땅히 합장해야 할 것이므로 이달에 능을 허물어야 되고 마땅히 4월에 시작해서는 안 되며 6월 12일에 이르러 장사한다면 꺼리는 데에 어긋나지 않고 5개월의 제도에 합당할 것입니다.” 문종 임금은 이에 대하여, 바로 의정부에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같은 해 8월 박연은 행첨지중추원사行僉知中樞院事로 임명되었다. 행은 품계가 낮은 직책을 맡을 때 붙인다. 그리고 같은 해 9월에는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배수拜受되었다. 10월에는 우승지 정창손鄭昌孫이 아뢰었다. 박연이 상소한, 여러 사단祀壇을 돌로써 축조하고 난원欄園을 설치하고 연향宴享에는 여악女樂을 사용하지 말게 하자는 데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우사단雩祀壇만을 돌로 쌓고 있었고 다른 사단은 다 흙으로 쌓아 만들고 있는 것에 대하여 그리고 여악의 문제는 새 임금에게 다시 창원하는 것이었다. 문종은 사단에 대하여는 고제를 상고하여 아뢰고 여악의 문제에 대하여는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해 11월 박연은 체계를 세워 다시 상언하였다. "삼가 신臣이 봉직한 이래로 어명御命을 받고 아직 이루지 못하였으나 중지할 수 없는 일들과 개수改修하고 경장更張하여야 할 것으로서 일임一任할 수 없는 일들을 다음에 조목별로 갖추어서 우매愚昧한 것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예의를 갖추어서 하나 하나 말하였다. "첫째 향사享祀는 나라의 큰 일이요 단묘壇廟는 신神의 의지하는 바이므로 제왕帝王은 모두 이를 중하게 여겼습니다. 우리 조정에서도 도읍都邑을 정하던 초기에 여러 사당에 단을 설치하였으나 대개 고제古制와 같지 않았습니다. 세종 때에 이르러 신의 망견妄見으로 유윤兪允을 받을 수가 있었는데 명을 내리던 처음에 먼저 종묘 사직을 바로잡았으나 그 나머지 여러 사당의 단은 그대로 두고 거행하지 못한 지금까지 20여년인데 구폐舊弊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행사를 당할 때마다 헌가軒架와 무일舞佾이 다 베풀어지지 못하고 등가登歌와 준소樽所가 그릇된 곳에 설치되어 예禮를 행하고 악樂을 쓰는 것이 모두 그 의례儀禮를 잃어서 설만褻慢하기 짝이 없습니다.” 상언은 만지장서였다. 단소壇所는 흙이 성기어 무너지기 쉬워 비가 오면 즉시 허물어지고 또 난장欄墻이 없어서 사람이 지킬 수가 없으니 소 양 개 돼지가 함부로 더럽히므로 그것이 온전하지도 못하고 깨끗하지도 못하게 됨이 심하다. 그 중에 소사小祀 7, 8곳 중사中祀 4단壇 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세종 임금이 그에게 명하여 역대 단의 제도를 고증하게 하였으므로 주周나라로부터 송宋나라에 이르기까지 찾아 아뢰었고 임금은 옛 사람이 돌을 쓴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세종의 명命이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둘째 세종은 원묘原廟와 문소전文昭殿의 제악祭樂을 정하여 초헌에는 당악唐樂으로 하고 아헌 종헌에는 향악鄕樂으로 하되 모두 조종祖宗의 공덕을 노래하여 읊은 것을 주로 하게 하였다. 만약 노래하여 읊조리는 소리가 맑지 못하면 비록 사죽絲竹의 악기가 조화되어 울리고 금석金石의 악기가 울리더라도 가물假物의 음音이 족히 귀하게 될 수 없다. 가동歌童이 없을 수 없는 첫째 이유이다. 세종이 이웃나라 객인客人에게 연락宴樂하는 기예技藝를 정하였는데 노래도 있고 춤도 있고 정재呈才도 있으니 이것은 어린아이가 아니면 노래가 소리를 이루지 못하고 춤이 모양을 이루지 못하며 또 그 정재도 기예를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가동이 없을 수 없는 두 번째 이유이다. 정재는 대궐 잔치 때에 쓰던 노래와 춤이었다. 제례 제악 기예에 대한 박연의 식견은 누구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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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 흙의 소리 <103>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5> 누가 명한 것이겠는가. 박연의 괴로움은 말할 수가 없고 부끄러움은 하늘을 덮었다. 사실이 그렇고 아니고를 따질 염치도 없었다. 그저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나이이고 체면이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았다.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하지 않았던가. 공자의 말씀이다. 일흔 살에는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그가 성현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주야로 수신修身을 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 하였는데 조정이나 사회에는 아니 임금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일흔 두 살이 되었다. 아직 눈은 밝고 귀는 잘 들렸다. 마음도 변치 않았다. 매일 아침 뉘우치며 매일 새로 다짐을 하며 글을 읽고 썼다. 파직되고 다시 인수부윤에 임용되어 하던 일은 멈추지 않았다. 상언할 글을 계속 썼고 예악 분야의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에 대한 정리를 하고 상언 준비를 하였다. 그의 일은 쉰 때나 일흔 때나 여일하였다. 그런데 큰 나무 그늘과 같은 세종 임금은 그의 옆에 오래 있어주지를 않았다. 임금은 박연에게 명하여 종률鍾律을 정하게 하였다. 박연이 일찍이 옥경玉磬을 올렸는데 임금은 쳐서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이칙夷則의 경소리가 약간 높으니, 몇 푼〔分〕을 감하면 조화가 될 것이다.” 박연이 가져다 보니 경쇠공〔磬工〕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임금의 말과 같았다. 임금은 음률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박연은 너무나 감탄하였고 몸둘 바를 몰랐다. 정말 너무 놀라웠고 황송하였다. 임금의 너무도 정확한 음감音感 너무도 정확한 지적에 대하여 참으로 송구스럽긴 하였지만 그렇게 흔쾌한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두렵고 하늘 같은 존재감이 가슴 가득히 안기는 것이었다. 자신은 참으로 행복한 신하로구나 참으로 훌륭한 왕을 모시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너무나 극적인 대목에 대하여 앞에서도 얘기를 하였지만 실록에는 세종31년 12월, 선어仙馭 1년 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한 두 기록을 더 옮겨본다. 불당佛堂의 경찬慶讚 때에 정랑正郎 김수온金守溫이 글을 지어 부처의 공덕과 귀의歸依 존숭尊崇의 지극함을 말하고 여러 대군大君과 판서 민신閔伸 부윤 박연 도승지 이사철李思哲로부터 환시宦侍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분향하고 부처와 맹세하고 함께 계를 맺고 한 것에 대하여 사헌부에서 금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였다. "계를 맺는 것은 성심이 있으면 귀의하는 것이고 성심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대관臺官의 아랑곳할 것이랴.” 윤허하지 아니한 것이다. 대관은 벼슬아치들을 이르는 말이다. 임금은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황보인皇甫仁 등에게 또 말하였다. "나의 안질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들도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중략… 예전에 괴이하던 일이 내 몸에 이르렀다. 박연 하위지河緯地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지만 경들도 목욕하고서 병을 떠나게 함이 있었는가.” 세종 임금은,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임금은 붕어崩御하였다. 그것이 임금과의 마지막 관계였다. 박연이 온천을 갔다가 온 것 그리고 무슨 병인지 차도가 있었던 것, 또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를 다 알고 있었다. 스므살 정확히는 열 아홉 살 아래인 임금은 박연보다 8년 전에 명을 다한 것이었다. 비보를 듣고 박연은 왕궁을 향하여 계속 큰절을 하였다. 백배 천배 헤아릴 수도 없었다.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헤어짐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좀 더 잘 할 것을 좀 더 마음에 차게 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서러웠다. 다시 고쳐 할 수 없으니 후회가 되고 더욱 슬펐다. 그리고 그립고 아쉬웠다.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어 되돌아볼 때는 슬픔을 가시었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찾아 갔는가 (雲衢若許乘槎客 直欲尋源上碧穹) 난계선생 유고집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의 마지막 구절이다. 참으로 많은 업적을 쌓고 더러 같이 하다 떠나서 좋은 데로 잘 갔기를 빌고 또 빌었다. 송설당은 박연의 당호堂號이고 한양 살던 그의 집 이름이겠는데, 어디에 그 규모를 얘기해 놓은 데가 없지만, 삼남사녀三男四女가 복닥거리고 살던 집 어디에 가령 눈 맞고 있는 소나무를 뜻하는 당호 편액을 걸어놓았던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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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2>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4> 참으로 민망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고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천금을 잃은들 그보다 더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다. 도의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죄 짓는 일 악하고 추한 일을 절대로 하지 않고 제 정신으로 길이 아닌 데를 가지 않고 말이 아닌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늙고 쇠하니 볼성 사나운 일이 자꾸 생기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어찌 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임금 앞에 보이게 되어 괴로웠다. 자신을 생각해 주고, 그것이 총애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껴주고 존중해 주는 임금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슴 아팠다. 나이가 들고 늙으니 그런 마음이 더 하였다. 그런데 자꾸 그런 일이 생기고 그렇게 보기 싫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아들의 일이었다. 전 현감縣監 정우鄭瑀가, 행사정行司正 박연의 아들 朴自荊으로 사위를 삼았는데 자장資裝을 갖추지 못한 것을 불만족하게 여기고 또 여자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므로 실행失行하였다고 핑계를 대고 버린다고 하므로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국문鞫問하고 있으나 오래도록 정상情狀을 얻지 못하였다고 고하였다. 자장은 시집갈 때 가지고 가는 혼수이다. 그리고 실행은 도의에 어그러진 좋지못한 행실을 말한다. 박연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식의 일이지만 너무나 죄스러웠다. 그런데 임금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어 말하는 것이어서 더욱 황송하였다. "대저 옥獄을 결단하는 데는 대강을 잃지 않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한다. 의금부에서 한갓 자형이 술에 만취하여 술주정을 한 것 등의 일로써 판결을 하려고 하니 모두 끝이다. 그 여자가 만일 참으로 실행을 하였다면 자형이 그날 밤에 당연히 곧 버리고 갔을 것이다. 그대로 그 집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 유모乳母가 정가鄭家에 오매 예물을 주어 보냈으니 혼례는 이루어진 것이다. 자형이 이불 요와 의복이 화려하지 못한 것을 보고 빈한貧寒한 것을 싫어하여 실행하였다고 청탁하여 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세종 임금은 사안을 잘 알고 있었다. 정우의 편을 들지 않고 박연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다. 의금부에서 다시 국문하니 임금의 말대로였다. 자형이 무고誣告에 좌죄坐罪되어 장杖 60에 도徒 1년에 처하고 다시 완취完聚하게 하였다. 완취는 흩어진 가족이 함께 모여 산다는 뜻인데 두 사람이 갈라서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다. 박연은 더욱 송구하고 죄스러웠다.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식을 특별히 가르친 것은 없었지만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았었다. 늘 아침 저녁으로 밥상에서나 특별한 날에 중뿔나지 말고 쳐지지 말고 절대로 과욕 허욕은 부리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말하였다. 가난하고 빈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의로운 일을 하는 것보다 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물려준 것은 그런 중언부언밖에 없었다. 그러나 늘 불만이고 아버지를 답답하게 생각하였지만 거역하지 않고 따라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다들 제 앞 가림은 하였다. 큰아들 맹우는 현령으로 정5품 둘째 중우는 郡守로 정4품 세째 계우는 집현전 한림으로 정9품으로 시작을 하여 잘 못 되긴 하였지만 아버지 박연은 자식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었다. 늘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자형은 어느 자식의 별호인지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족보를 뒤져보면 정우의 딸인 며느리가 나올 것이다. 좌우간 그리고 얼마 후의 일인데 불미스러운 일로 파직을 당하였다. 정말 다른 무엇보다 악학제조樂學提調는 그동안의 어떤 일보다도 마음에 들고 맡고 싶었던 직위로서 스스로 참으로 대견스럽게 여기던 자리가 아니었던가. 덕이 부족하고 늙고 불민한 탓이었던가. 정말로 비뚫어지고 영악해지기 시작한 것인가. 사헌부에서, 박연이 휴가를 얻어 귀향하더니 누이가 죽으매 서울에 돌아갈 날이 급하였다고 핑계하여 나흘만에 장사 지내고 드디어 재선을 나누어 짐바리에 싣고 왔으며 또 악하제조로서 사사로이 악공樂工을 데리고 영업행위를 하게 하였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죄를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명하여 그 직을 파罷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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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1)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3> 같은 해 앞에서 말한 조하의절朝賀儀節을 꾸미었다. 왕세자王世子조하의절 군신君臣조하의절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는데 줄곧 상언하고 있는 글과 달리 두 조하를 예의에 맞게 악절樂節을 기록하여 전범典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난계선생 유고』에는 가훈家訓과 함께 잡저雜著로 구분 정리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은 문서로 청정淸正 조회악율소朝會樂律疏와 함께 박연의 조회朝會음악에 대한 족적으로 조하의식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종 25년(1443) 9월에 박연은 다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제수되었고 지경연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중임重任되었다. 집현전교리 사간원정언 의영고부사로부터 시작해서 악학별좌 봉상판관 봉상소윤 대호군 상호군 별감 판봉상시사 중추원부사 첨지중추원사 공조참의 예조참의 등 참으로 많은 여러 직을 맡아 신명을 다하여 일을 하였고 맡았던 일을 다시 맡아 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꼭 승진 승급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중간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예악에 관한 일 악학에 관한 일이면 더욱 성과도 내고 신명도 나고 하였지만 무엇이 됐든 다른 생각을 갖지 않고 직무에 충실하였고 어떤 일을 하든 예와 악의 실현을 위해 심혈을 쏟았다. 그러나 나라의 녹祿을 받고 헌신함에는 늘 조신操身을 하지만 칭찬보다는 원성을 들을 때가 많았다. 생각의 차이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세종 임금은 그의 편에서 생각하였고 편을 들어 주었다. 어쩌면 정확하게 평가하였는지도 모른다. 박연이 병조판서 정연鄭淵을 방문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분경奔競하는 것이라고 탄핵하고 죄 주기를 청하는 일이 있었다. 중추원부사인 박연은 자신이 맡은 궁궐 숙위宿衛 군국기무軍國機務 등의 임무를 위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벼슬을 위하여 엽관獵官 운동이나 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연이 미복微服으로 집정執政한 사람의 집에 분경하였으니 마음가짐이 비루합니다.” 헌부에 법대로 논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다시 한번 박연의 손을 들어주었다. "연堧이 이미 늙었는데 연淵에게 청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임금은 두 사람을 이름을 떠올리며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하물며 정연은 대신大臣인데 어찌 작은 일로써 처벌하겠는가.” 세종임금은 그 뒤 박연에게 경사京師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賀禮하게 하였다.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에서 표문表文을 배송拜誦하였다. 그때 임금이 박연에게 말하였다. "지금 나이 10여세 된 자를 뽑아 무동舞童을 삼았지만 노래와 춤을 익히고 장성하면 쓰지 않으니 장차 계속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며 일렀다. "경이 경사에 가서 연향宴享의 풍악에 소년과 장년의 공인工人을 섞어 쓰는 것과 잡희雜戲를 아울러 베푸는 일을 하고 않는 것을 듣고 보고 오도록 하오.” 박연은 명을 받들고 하복下服, 사실대로 낱낱이 보고하였다. 어느 자리에 있든 박연에게 맞는 일이었다. 그것을 임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구러 나이를 자꾸 보태어 60 중반을 넘은 늙은이가 되었지만 무슨 일이든 마다 하지 않았고 자꾸 자리가 추가되었다. 인순부윤仁順府尹의 임무를 거듭하도록 하였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용되기도 했다. 10월 잡신雜神 산귀産鬼 등을 제사하였다. 여제厲祭 귀신에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은 귀신은 들어있지 않으니 거기 첨가하게 하라고 청원을 하여 예조에서 실시하였다. 세종 27년(1445) 4월에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연향宴享 때 음악으로 제정하라는 글을 올렸다. 8월에는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경明京에 갔다왔다. 절일사節日使 박연이 처음에 회동관會同館을 출발할 때 부험符驗을 잃었던 것을 관부館夫가 찾았는데 박연이 통사通事 김자안金自安을 시켜 달려들어가서 찾아왔다. 복명復命할 적에 박연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으나 서장관書狀官 김중량金重良이 아뢰었다. 부험은 중국에 가는 사행使行의 표로 갖고 다니던 신물信物이다. 임금은 정부에 대고 일렀다. "부험은 조정에서 내려준 것이므로 관계가 경輕하지 않다. 만일 잃어버렸다면 사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누累를 끼침도 컸을 것이다.” 드디어 박연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종사관들에게도 죄를 차등 있게 주었다. 이럴 때의 세종은 박연에게 냉정하고 엄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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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0)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2> 세종 24년(1442) 10월 박연은 예조참의로 제수되었다. 다음 해 정월 예조참의 박연은 최양선崔揚善이 말한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의논해서 이뢰라는 명을 받았다. 직집현전直集賢殿 남수문南秀文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과 함께였다. 세종 임금은 호기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런 심리를 과학적으로 전환시키기 일쑤였다. 장영실의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그런 과학자 세종의 뒷받침이 있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15세기 과학시대를 이끌었던 합리주의 군주 세종은 최양선이라는 풍수지리 술사術士에게 귀를 열고 많은 국가 토목사업을 맡겼다.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종 앞에 최양선이 나타나 풍수 논쟁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풍수는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동양의 고유사상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자연관인데 박연은 음양오행에 대하여는 누구 못지 않게 천착하고 있었지만 풍수에 대하여는 조예가 깊지 못한 대로 심혈을 쏟아 명에 충실하였다. 늘 하는 대로 전적을 뒤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자문을 구하였다. 왕세자가 또 도승지都承旨 조서강趙瑞康 우부승지右副承旨 강석덕姜碩德 그리고 앞에 말한 남수문 정창손과 그에게 여러 풍수 술자術者들을 불러 수릉산혈壽陵山穴의 길흉을 질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최양선은 헌릉獻陵(태종太宗의 능) 앞을 지나는 고개 천천현穿川峴을 막지 않으면 산맥이 끊겨 길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삼남으로 내려가는 대로大路를 패쇄하고 흙으로 산을 쌓아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엄청난 물의를 일으킨 주장이었지만 세종은 선왕의 해로운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고 풍수설에 대한 호기심으로 의정부와 육조六曹하여금 이에 대한 논의를 하라고 했다.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산은 기복起伏이 있어야 좋으니 길이 있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발자취가 있어야 맥이 좋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생각이 달랐고 몇 년을 끌며 여러 예조 집현전 등에 계속 검토를 지시했던 것이다. 결과는 박연 뿐 아니라 여러 관료들이 옳지 않다는 의견을 내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직격 상소문을 올렸다. 풍수지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최양선은 계속 같은 주장을 했고 세종의 집착도 여전했다. 세종은 마침내 고개 길을 없애고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양선에게 경복궁을 비롯한 궁성 건축과 남대문 보토補土 공사 등을 하게 하고 경기 충청에서 인부 1,500명을 징발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등 끝이 없었다. 그러다 세종이 스스로 묻힐 자리로 정해 둔 수릉의 혈 방위를 틀리게 주장하다가 구속되었다. 박연의 의견도 일조를 하였다. 그제야 세종은 최양선에 대하여 선언하였다. "앞으로 최양선이 국정에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다시는 저 허망한 술사를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어명에 의해 승정원은 그동안 최양선이 올린 보고서를 다 불태웠다. 풍수 얘기가 길었다. 천천현은 그 뒤 월천현月川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달래내고개가 그곳이다. 성남시 판교,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지금도 교통 요지의 고갯길이다. 매일 아침 그 길의 교통사정이 뉴스가 되고 있는 곳이다. 그 길을 막는다고 상상해 보라.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종임금이 직접 교지敎旨를 지어서 승지들에게 내어보이며 말하였다. "나는 본래 병이 많았는데 근래에 와서 병이 더욱 심하고 또 왕위에 30년 동안이나 있었으므로 부지런해야 할 정사에 게으름을 피운 지 오래 되었다. 임금이 늙고 병들면 세자가 정사를 섭행攝行하는데…” 앞으로는 세 차례의 대조하大朝賀와 초하루 열엿새 조참朝參은 친히 받들 것이나 그 외의 다른 조참은 모두 세자를 시켜 조회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세자는 뒷날 문종文宗이다. 그리고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참판 허후許詡 참의 박연을 불러서 일렀다. "경들은 연향燕饗하는 데에 모두 남악男樂을 쓰도록 하였는데…” 세종은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당唐나라 태종太宗 같은 사람은 어진 임금이라 일컬었는데도 모두 여악女樂을 이용하였다고 하고, 만약 남악만 쓴다면 여덟 살 이상된 사람을 써야 하고 장성해지면 쓸 수 없게 되며 그들의 치장〔資粧〕도 나라에서 공급해야하는데 만약 여악을 쓴다면 치장을 준비하고 모습도 오랫동안 늙지 않으며 또 부인들의 방중房中의 풍악도 어찌 없음이 옳겠는가. 먼 후일을 염려해서 말하는 것인데 경들이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무엇이 어렵겠느냐고 하였다. 세종의 간곡한 의중을 읽은 모두는 고개를 조아렸다. "연향하는 예는 모두 남악을 쓰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나 방중의 풍악에 여악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박연의 주장도 왕의 뜻을 바꿀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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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99>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1> 이듬해 정월에 박연은 다시 제악祭樂에 관한 글을 올리었다. "제악은 천신天神을 제사할 경우 강신降神함에 4궁宮을 쓰는데 악樂은 6성成으로 변합니다. 육변六變을 쓰는 것은 천제天帝가 진震에서 나옴을 취함이요 진은 묘위卯位에 자리하였으니 묘의 수는 여섯인 것입니다. 따라서 환종궁圜鍾宮을 사용해야 하니 협종夾鍾 2성 황종각黃鍾角 고선궁姑洗宮 2성 태주치太蔟徵 남려궁南呂宮 1성 고선우姑洗羽 대려궁大呂宮 1성이고, 송신送神에는 협종궁 1성을 사용합니다.” 천신을 제사하고 묘악廟樂에는 사성四聲을 쓰라는 것이었다. 제에 따르는 악에 관하여 박연만큼 조예가 있기도 힘들지만 그만큼 관심을 갖고 마음을 쏟아붓기도 어려웠다. 다른 사람-관리 신하 대신-들도 얘기하였지만 그렇게 자세하고 분명하게 낱낱이 의견을 끊임없이 올리고 바로잡자고 청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연은 예에 어긋나지 않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었기도 하였지만 거기 합당한 악을 사용하고자 하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박연이 집착하는 제악의 원칙이었다. 예악의 실천이었다. 청원은 계속되었다. 지기地祇를 제사할 경우는 강신함에 4궁을 쓰는데 악은 8성으로 변한다. 팔변八變을 쓰는 것은 곤坤이 만물을 기르는 것을 취함이요 곤이 미위未位에 자리하였으니 미의 수는 여덟인 것이다. 따라서 함종궁函鍾宮을 사용하여야 하니 임종林鍾 2성 태주각太蔟角 유빈궁蕤賓宮 2성 고선치姑洗徵 응종궁應鍾宮 2성 남려우南呂羽 유빈궁 2성, 송신에는 임종궁 1성을 사용한다. 인귀人鬼를 제향할 경우는 강신함에 4궁을 쓰는데 악은 9성으로 변한다. 구변九變을 쓰는 것은 금金의 수를 취함이요 금의 물건됨이 잘 화化하되 변하지 않으니 귀신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황종궁黃鍾宮 3성 대려각大呂角 중려궁仲呂宮 2성 태주치太蔟徵 남려궁南呂宮 2성 응종우應鍾羽 이칙궁夷則宮 2성을 사용한다. "이상과 같이 제사할 때마다 4궁에 강신함과 악무樂舞가 변하는 수는 각각 의거하는 바가 있어 망령되게 더하고 덜하는 것은 불가한 것인데 우리 연간에 모두 다 개혁하였으나 종묘에 친히 제향하는 날을 당하여 강신하는 악무 6성을 권도로 감하여 3성으로 사용하매 4궁이 불비하고 변수마저 결여되어 온당치 못합니다.” 제사 제향에 관하여도 그렇지만 거기에 부합하는 소리와 춤 음音과 성聲의 조합 그리고 변하고 화하여 이루어지는 조화를 누가 그렇듯 맞출 수가 있겠는가. 그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이 틀리지 않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듯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끊임 없이 상언을 하여 옳지 못함을 지적하고 바로 세우고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그것이 무슨 역사적이고 국가 대계의 사업이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나라에 있어서든 백성에 대해서든 기본적이고 바탕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며 거기에 생을 걸었던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뒤의 일이지만 박연은 전라도 땅 오지 산골 고산高山 유배지流配地에서도 가훈家訓 17조를 써서 남겼던 것이다. 아들은 교형絞刑을 당하고 쓸쓸히 말년을 보내면서 가훈이란 무엇이었던가. "신臣이 이제 다시 전대前代를 상고하여보니…” 당나라 태종 때에 태상시太常寺에 조칙을 내려 ‘천신을 제사하고 지기를 제사하고 종묘를 제향함에 궁의 등급을 올리는 것은 강신할 때마다 사곡四曲, 송신할 때는 일곡一曲을 연주한다’하였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고, 제악고祭樂鼓는 주례周禮의 지관地官 고인조鼓人條에 ‘뇌고雷鼓는 신사神祀에 쳐서 천신을 제사한다’하였고 정사농鄭司農은 팔면고八面鼓라고 하였으나 진양陳暘은 육면六面의 영고靈鼓라고 고쳤다. 사제社祭에 치는 것은 지기를 제사함인데 정씨는 육면이다 하였으나 진씨는 팔면이라고 고쳤다. 노고路鼓는 귀신에게 치는 것으로 인귀人鬼를 제향함인데 정씨와 진씨가 다 같이 사면四面의 진고晉鼓로 금주金奏를 치게 되면 주악이 시작되니 금주는 편종編鐘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씌어 있다고 박연이 말하였다. 여러번 얘기하였지만 철저히 문헌 전적典籍에 의거하여 말하였다. 그것이 무기였다기보다 기본 자세가 그랬다. 그저 본 만큼 아는 만큼 말하는 것이다. 그가 논리를 펴는 방법이었다. 박연은 다시 주관周官 운인조韗人條 진양도설陳暘圖說 등을 인용하여 앞에서 말한 뇌고 영고 노고 외에 진고인 도고鼗鼓를 말하며 천신의 제사 지기의 제사 인귀의 제향에 어떻게 뇌도雷鼗 영도靈鼗 노도路鼗를 만들게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다고 하였다. 예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상언한 것을 다 기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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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8>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5> 박연의 상언은 아주 세세하며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연속부절로 이어졌다. "금년 납향臘享부터 모든 제향에 전奠 찬饌 메〔飯〕국 떡 흰떡〔餌〕등을 미리 진설하지 말게 하고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의거하여 임시에 진설하게 하되 경점更點에 따라 그 시간을 한정하고 장찬掌饌을 세워서 그 임무를 맡게 하고 기장 피 벼 수수 국 떡 등의 제물들을 뜨거운 것으로써 때를 맞추게 하여 향내가 오르게 한 뒤에 제사를 행하기를 청합니다.” 박연의 청원은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정부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황희 등이 의논한 결과 박연의 의견과 다른 것은 없고 제사 준비 시간 등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송나라 때 제향하는 의식에 의거하는데 전前 5각刻에 종묘령宗廟令과 전사관典祀官이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찬구饌具를 담는 것이 축전丑前 1각이고 행사하는 것은 4경更 1점點인데 그 사이에 시각이 매우 촉박하여 메 국 떡 흰떡을 만약 임시하여 진설하면 시간에 못미쳐서 실례失禮하기에 이를까 두려우며 더군다나 소, 양의 창자, 위, 허파와 돼지고기를 임시하여 익혀서 올리고 또 종묘에는 날 것으로 희생犧牲을 올리므로 원묘原廟와 같지 아니하니 옛 제도에 따라서 3경 3점에 들어가서 찬구를 담게 하되 전 드리는 물건들을 먼저 담게 하고 메 국 떡 흰떡은 맨 나중에 진설하게 하여 전날 저녁에 미리 진설하지 말게 하라는 것이었다.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박연은 정중히 읍하며 상언한 것에 추가로 기록하였다. 조금 의견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토를 달지 않았다. 소용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박연은 세종 21년(1439) 4월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용되었다. 다음 해 7월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재임再任되었다. 예순 셋이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었다. 그는 무슨 자리든 천명으로 알고 무슨 일이든 천직으로 여기고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 하였다. 공조참의로 있을 때 일이었다. 공조란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선營繕 도야陶冶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데 예악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의 재질과 적성에 맞는 일이라면 그 기량을 더욱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는 대로 맡기는 대로 거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하였다. 그리고 어디서나 맞지 않고 옳지 않은 부분을 고치고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런데 공조 분야 뿐 아니라 모든 관직을 대상으로 한 대단히 실용적인 방안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상 준다는 계획, 납속상직지책納粟賞職之策이었다. 이에 대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안순安純이 상서上書하여 부각되었다. "공조참의 박연이 말한 납속상직지책이 시무時務에 합할 것 같습니다.” 의정부는 안순에게 호조戶曹로 하여금 의창義倉을 보충할 방법을 강구하게 하였던 것이다. 의창은 고려 때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을 당하거나 비상시에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대여하던 기관이다.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상 준다는 계획은 예를 들면 품계가 없는 자에게는 정9품에서 종3품에 이르기까지 10석마다 한 자급資級)을 올리게 하는 것이다. 정곡正穀 잡곡雜穀을 묻지 말고 10석을 바친 자에게는 종9품이 되고 (중략) 2백석을 바치면 종3품이 되고 그 관직이 있던 자는 본직의 품계에 따라서 역시 10석으로 한 자급을 올려주되 정3품에서 그치게 하고 또 그 중에서 제수除授할 수 없는 주현州縣의 아전으로서 2백석을 바친 자에게는 본 구실에서 영영 제적하여 주고 50석을 바친 자는 자기 몸에 한하여 면역하게 하는 것이다. 이같이 하면 경법經法과 권도權道의 두 가지를 다 얻게 되고 인仁과 의義가 똑같이 병행되어 인심이 순하고 기뻐할 것이요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다 펴져서 의창이 충실할 뿐 아니라 성은聖恩이 소낙비처럼 내리게 되어 이를 행하면 폐단이 없고 크게 도움이 있을 것이다. "이 소소한 보첨補添의 방법은 전부터 있는 것이지만 온 나라의 주현에다가 의창을 두어 넉넉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연의 이 방책은 소신小臣의 뜻에 합하나 그 곡식 바치는 것의 많고 적은 것과 관직으로 상 주는데 높고 낮은 것은 위에서 살피시어 시행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안순의 상서는 바로 의정부에 내리었다. 조선 시대에 나라의 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면역免役 또는 면천免賤하여 주던 정책으로 박연은 그 일을 건의하였고 그것은 그의 인의仁義 도경道經을 추구하는 일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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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97>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4>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종묘 사직에 관한 너무도 간곡한 청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천신에게 제사하는 제례가 있어서 원단의 의식을 세우고 여려 해 동안 제사를 거행하다가 제후국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까닭으로 그만두고 시행하지 아니한 지 이미 여러 해이다. 오직 이 풍운뇌우의 단만은 왕(성상聖上)이 천신을 공경하여 제사하는 곳이므로 더욱 급급하게 개정하고 시일이 지나기를 기다리지 말 것이다. 왕년에 신이 이런 폐단을 고치기를 청하였으나 정부의 의논이 합치되지 아니하여서 윤가允可를 얻지 못한 지 이미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고 분함이 쌓여서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다가 이제 영선하는 것이 조금 뜨음하고 또 연사年事도 풍년이 들었으니 제단을 개정하기에 알맞은 때인 것 같다. 하물며 신의 몸이 제단 일을 맡고 있어 뜻이 조두俎豆 사이에 있으므로 끝내 침묵하고 있으면 두 번째 천총天聰을 모독하는 것이다. 구구 절절 호소하는 요구 청원의 심도가 높아갔다. 깊어졌다고 할까.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상하고 분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뜻을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의 표현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상언을 끊어 나누어서 평어체로 옮겨 번거로움을 피한다. 앞에서도 그랬다. 조두는 제사 때 음식을 담는 제기의 하나이다. 천총은 무엇인가. 글자대로라면 天聰은 중국의 한 때(1626∼1636) 연호인데, 임금의 사랑 天寵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풍사 우사의 단을 세우는 곳은 옛 사람이 왕도王都에서 성수星宿의 방위로 정하였으나 이제 만약 험하고 막히어서 단을 세울 수 없다고 하면 원단을 세웠던 고을이 수목이 우거지고 사람 사는 곳과 떨어졌으며 고을 안이 넓고 깊어 단을 세우기에 마땅한 장소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하늘에 제사하던 곳에 그대로 천신의 단을 세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같이 한다면 세 단壇이 제기 두는 곳으로서 한 창고를 같이 세우게 되며 단지기〔壇直〕와 마지기〔奴子〕들이 합력해서 제사를 받드는 것이 편하고 합당하다고 본다. 그 단소壇所를 바르게 하고 각각 전奠 드리기를 전담하게 한다면 도성都城 한 모퉁이를 점령하고 단을 설치하여 신神이 그 제사를 흠향하게 하는 것에 비할 수가 없다. 예전에 제사 지내던 곳은 그대로 수축하여 산천의 단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원하옵건대 성상께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자문諮問하지 마시고 한 시대의 제도를 모두 일신一新하게 하시어 만세 후대에 남겨 주신다면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연의 상언은 대단히 간곡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단호하였다. 소신이 있고 아집도 대단하였다. 신충은 임금의 마음이다. 소신인지 과욕인지, 여러 사람과 의논하지 말고 임금의 뜻대로 하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의 상언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 임금은 예조로 하여금 정부와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결과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나이가 많고 병이 깊다고 하며 병조판서의 직사職事를 면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던 중추원사中樞院事 이견기李堅基는, 풍운뇌우를 역대 사전祀典에 의하면 각기 방위를 두고 제사하였다고 하니 상언한 것에 의하여 시행하고 단유도 역시 고문古文에 의하여 축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상언은 물론 박연의 의견이었다. 다른 여러 중신重臣 들도 의견을 말하였다. 집현전 대제학 안숭선安崇善 예문관 대제학 신인손辛引孫도 같은 의견이었다. 홍무예제의 같은 단에서 치제致祭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준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경솔하게 고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며 문헌통고文獻通考 지정조격至正條格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등 문헌의 제례를 들어 아뢰었다. "역대로 다 그러하였으니 상언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그리고도 많은 논의를 하였다. 신개申槪 민의생閔義生 정인지鄭麟趾 심도원沈道源 최사강崔士康 그리고 황보인皇甫仁 하연河演 허조許稠 등 각기 의견들을 내놓았다. 특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의견들을 보태었다. 다 소개하지는 않는다. 정인지는, 풍운뇌우는 예전대로 홍무예제에 의거하여 산천단에 합제하게 하고 단유壇壝와 위판位版의 법제만은 다시 상고하여 엄정하게 수식修飾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영의정 황희黃喜도 여러 가지 얘기를 하였지만 홍무예제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예조는 의논을 마치고 황희 등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박연의 상언에 격조를 갖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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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6>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3> 종묘 사직에 관한 간곡한 청원이었다.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제단을 개정하는 일은 마땅히 뒤로 미룰 일이 아니고 또 공사는 전우殿宇를 화려하게 건축하는 사치도 없는 것이고 깎고 단청 칠하는 사치도 없으며 단지 돌을 포열布列하여 단을 쌓고 바깥으로 난간과 담장을 마련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불긴不緊한 것으로 보고 여러 해 동안 지체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양심이 있는 선비로서 첨지중추원사 일을 맡은 관리로서 부당하고 온당치 못함을 사안의 옳고 그름을 밝혀 건의하는 것이다. 대차고 격하였다. "이제 만일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후세에 전하면 제소祭所가 적의適宜함을 잃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선잠先蠶 산천의 두 단은 잡석으로 지경地境을 이루었으므로 무너지는 것은 겨우 면하였으나 그 나머지 여러 단은 모두가 흙 언덕이 될 뿐입니다. 또 단소壇所에 난간으로 보호하는 것이 없어서 소 양 개 돼지가 마구 드나들어 더럽게 만들며 아울러 좁고 막히고 또 많이 기울어지고 쓰러져서 예를 행하고 음악을 쓰는 데 모두 그 의례대로 못하게 됩니다. 지금 예악이 바야흐로 성盛하고 제도가 닦여 밝은데 사전祀典에는 결함이 이와 같이 있으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더군다나 일찍이 미신微臣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어찌 세월을 구차하게 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여 창성한 시대의 날로 새로워지는 성덕聖德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너무도 간곡하게 너무도 지당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청원하였다. 어구가 지나치고 심할 정도였다. 통분하기까지 했다. 맡은 직을 걸고 지식과 문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그러면서 한껏 스스로를 낮추었다. 거기에 어디 하나 맞지 않고 합당하지 않은 사항이 있는가. 박연은 항상 그런 자세였다. 언제나 그랬다. 하늘이 자신에게 명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상관에 앞서 왕에게 앞서 높은 곳에서 하늘이 내려준 직이며 사명이라고 철칙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연의 상언은 그대로 따랐다. 그는 계속해서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을 바로잡자는 방안을 아뢰었다. "단유壇壝가 제도에 어긋나니 그 전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박연의 상언은 그 강도가 높아졌다. 예순, 천명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인가. 두려움도 없어졌다. 논어를 딸딸 외는 그의 체질에는 인자仁者는 불우不憂하고 지자知者는 불혹不惑하고 용자勇者는 불구不懼하고 하는 신조가 배어 있었다. 옳은 일 바른 일을 위하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궁행躬行을 하여온 평생이었다. 그런 그의 몸짓을 알아주고 지켜주는 고불古佛 세종 같은 음우陰佑가 있음으로 가능하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는 늘 행운, 천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러 신사神祀가 다 그러한데 풍운뇌우단이 더욱 심합니다. 이 신神은 자연의 조화가 가장 관계가 깊어서 걸핏하면 재앙과 상서祥瑞를 가져옴으로 옛 사람은 그 제사를 중하게 여기어 각각 단유를 세우고 받들었습니다. 예법은 그 성대함을 지극히 하였고 풍악風樂도 역시 합당하게 하였습니다. 천자天子는 궁현宮懸의 연주를 사용하였고 헌가軒架의 악을 거행하였는데 역대 모두 그렇게 하여서 봉숭奉崇하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역대 제후왕諸侯王의 통행하던 제도를 상고하지 아니하고 단지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거하여 정하였는데 신臣이 그 제도를 살펴보니 오등제후五等諸侯를 위하여 마련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홍무 초년에 반포하여 주부군현州府郡縣의 경내에서 행할 수 있는 제사에 실행하게 한 것이며 그것은 정당한 예법이 아닙니다.” 박연은 계속 제단 제례 그리고 예악의 부당함을 하나 하나 지적하였다. 우선 마땅치 않은 것으로 심한 것은 풍 운 뇌 우를 같은 단에서 제사지내는 것이며 산천 성황의 신을 천신과 더불어 모두 남향하게 하니 대단히 설만褻慢하고, 풍사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 우사雨師의 사師를 빼고 풍운뇌우 네자를 한 목패木牌에 써서 신주神主로 삼고 단지 한 위位의 찬수饌需를 진설하여 제사 지내니 네 위의 천신이 같이 한 그릇의 음식을 흠향하는 것이다. 풍사 우사의 사는 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여러 제사의 단에는 여러 위를 합해서 한 신주로 하고 한 가지로 한 그릇의 제수를 흠향하는 데가 없는데 천신에게만 그 명호名號를 깎고 그 전물奠物을 감쇄減殺하니 이것은 심이 모만侮慢하고 불경不敬하다. 또 악에는 제후국 헌가의 성대함을 사용하면서 제사에는 주현州縣의 간략한 의식을 쓰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깎아내리기 위해서 주현의 의식을 쓰는 것이라면 악에서 제후국의 제도를 쓰는 것은 크게 상반되는 것이다. 악에 헌가를 쓰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데 주현의 의식에 스스로 비의比擬함은 부당하다. 예와 악이 상반되어 전도顚倒되고 모순됨이 이러하니 우리 성조에 이런 잘못된 일이 있으리라 여겼겠는가. 봄에 빌고 가을에 보시報施하는 제향이 또한 음양이 고르고 순하는 징험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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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95>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2> 애초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소장되었던 은찬銀瓚은 종묘에서 임금이 친히 제향하는데에만 쓰던 것인데 도둑에게 잃어버리자 왕은 바로 박연에게 다시 주조鑄造하게 하였다. "우순虞舜은 종묘 제향을 옥가玉가(잔盞의 뜻인 가)로 하고 하후씨夏后氏는 식玉式(옥과 식이 합자된 것임)을 썼다 하니 식은 곧 작爵이며 옥玉으로 만든 것입니다. 주례周禮에 태제太帝가 선왕을 제향할 때에 옥작이라 불렀고 천자는 종묘 제향에 규찬圭瓚을 썼다 했으며 송나라 시대에 와서는 황제가 친히 태묘太廟에 제향하는데 옥가로 술을 올리고 아헌과 종헌은 은가銀가로 썼으며 음복에는 금가金가를 썼고 태묘 제향에는 금과 은을 칠한 잔을 쓰고 유사有事가 행사할 때에는 구리로 만든 잔을 썼으니 무릇 역대의 찬과 작이 모두 옥과 은을 썼습니다.” 어명으로 집현전에서 찬 작의 제도를 상고詳考하여 아뢴 것을 예조에 전하였다. 왕은, 고제古制를 따라서 친향親享할 때의 잔과 작은 모두 은을 쓰고 섭행攝行(대행代行)할 때의 잔과 작은 모두 구리를 쓰며 친향할 때의 아헌과 종헌도 역시 은작을 쓰기를 항식恒式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박연으로 하여금 은작銀爵과 동찬銅瓚을 주조하게 하면서 하교하였다. "이제 작을 은으로 만들었으니 목점木坫을 쓰는 것은 옳지 않소. 점(술잔을 얹어두는 대)도 구리로 만드는 것이 좋겠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종묘와 산릉山陵의 친향과 섭행할 때의 찬 작과 점을 명에 의하여 옛 제도대로 따르게 되었다. 박연은 악기를 제작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악장을 만들고 제기를 만드는 데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쏟았다. 예악이라고 할까, 예와 악의 모든 분야의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깊었다. 집현전의 의견이었지만 그도 다 상고한 바였다. 제향 때 친향 친제 때의 술은 어떤 잔에 어떻게 올리고 섭행 대행 때에는 어떻게 하고 또 초헌 아헌 종헌 때는 어떻게 하고 하는 절차 규식이 다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학식이라고 할까 지식뿐 아니고 그것을 부어 만드는 주조 기술도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교한 기능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부지런히 쉬임없이 책을 읽었고 조금이라고 의문이 나면 그것을 며칠이고 생각하여 풀려고 하였고 책으로 해결이 안 되면 몇백리고 찾아가고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묻고 이야기하여 해결하였다. 기술 기능적인 것도 그랬다. 악기를 만들 때나 술잔을 만들 때나 그는 목수가 되고 토기장이가 되었고 도가니에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드는 공정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기술을 터득하는 공장工匠이 되어야 했다.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탁백이를 같이 마시고 하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있다는 말을 더러 듣기도 했다. 짚신을 모양 있게 삼았고 물수제비를 남들보다 많이 떴다. 피리를 잘 분다고 하였고 글을 잘 왼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러나 노력이 더 많았다. 시골 마을에 짚신을 잘 삼는 친구가 있었다. 나이가 위였다. 아무리 잘 삼아도 그 친구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잘 삼아도 모양이 나지 않았고 째가 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무슨 말을 해도 그 기술을 알으켜 주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에게 배운 비밀이라고 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무슨 천기天機라도 되는 듯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들려주었다고 하였다. 별의별 얘기를 다 하고 아무리 술을 받아줘도 고개를 흔들었다. 박연은 그와 코가 삐뚫어지도록 술을 마시고 자신도 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고 홀애자식이라고 하고 무슨 소리를 해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의 밑천을 보여주며 자신의 것은 짝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그 사람의 손을 끌어다 만지게 해주자, 자기 것도 만져주게 해주며 자기도 짝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구 웃어대다가 그 비밀을 알으켜 주는 것이었다. 잔 털을 뽑으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짚신의 잔털을 뜯어내자 째가 났다. 박연이 짚신을 잘 삼는 데는 그런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매사에 그랬다. 편경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인 것같이 은잔 동잔 하나를 만드는 데도 젖먹던 힘을 다 기울였다. 그리고 박연은 끊임없이 상언을 하였다. "제향은 나라의 큰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제단祭壇이 모두 그 제도가 틀렸으므로 지난번에 신이 청하여 모두 개정하도록 명하셨고 특별히 제단감조색祭壇監造色을 세워 그 건설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 때에 종묘 사직만을 개정하고 나머지 중사中祀 소사小祀 그리고 10여 단壇은 역사役事도 시작하지 않은 채 이제까지 8, 9년이 되도록 국가의 영선營繕이 호번浩煩하다 하여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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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4>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天命 <1 > 공자는 오십에 천명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박연은 쉰을 훨씬 넘도록 천명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저 주어진 자리 부닥친 일을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알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정신을 거기 다 쏟았다. 그런 10년이었다. 그 전이나 그 후나 다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쉰 아홉이 되는 박연은 정초부터 늘 그 자리에서 생각난 것을 먹을 갈아 썼다. "천신天神에게 제사 지내면 폐백을 요대燎臺에서 불사르고 지기地祇에게 제사 지내고 인귀人鬼에게 제향하면 폐백을 예감瘞坎에 묻는데 이것은 신의 돌아가게 하는 예로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禮에, 사람을 보내어 지켜본다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제사에 내단소內壇所의 제사는 지금 단壇을 쌓지 아니하고 또 구덩이를 설치하지 않아서 임시로 땅을 파서 망예望瘞를 겨우 마치자 마자 곧 훔쳐 취하여 신을 업신여기고 예를 빠뜨리게 되니 편하지 아니합니다.” 세종 18년(1436) 정초 1월 9일, 제사 후의 폐백 처리 등의 상언上言을 하였다.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 자리를 맡고서 올리는 청원이었다. "그러나 단을 만들기 전에는 구제하기가 실로 어려우니 영녕전永寧殿과 종묘 사직 등의 제사는 이미 예감을 설치하고 또한 문단門壇도 있으며 관속官屬이 구비하였지만 예감에는 문단 속의 봉封한 것도 없고 관리에게는 심찰히는 법이 없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매양 제사 지낼 때를 당하면 기일 전 3일에 종묘와 사직의 관원이 전사관典祀官과 함께 예감을 수리하여 깨끗이 하고 전일에 넣어둔 폐백을 살펴서 노예의 도적질하려는 마음을 막게 할 것이며 폐백이 만일 썩었으면 꺼내어 불사르고 만약 썩지 않았으면 따로 저장하여 신주神廚의 닦는 수건과 시루띠〔甑帶〕의 소용에 제공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박연의 언제나와 같은 자상한 상언에 대하여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예조에서 아뢰었다. 위 항의 각 곳에는 이미 맡은 관원 간수看守가 있으니 자물쇠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감찰점시監察點視하게 하고 씻고 소제할 때에는 맡은 관원과 함께 예감을 열어보고 만약 도적질해 가져간 사람이 있으면 죄를 과하게 하고 하는 등의 의견을 첨가하였다. 제사에 따른 폐백의 구체적 관례 규칙이 그렇게 만들어졌고 정착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는 것보다 없어서는 안 될 시행 세칙들이었고 그것을 자발스럽게 아니 너무도 자상하게 빈틈 없이 만든 것이다. 그것이 무슨 업적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의 땀흘린 행적이었다. 그는 여러 자리로 옮겨 앉아서 일을 하였다. 무슨 자리나 임명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떤 자리 무슨 일을 맡게 되든 예와 악에 관련되는 일을 찾아서 하게 되었다. 이번 상언도 그런 것이었다. 그해 12월에는 왕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제수除授하였다. 제수란 천거에 의하지 않고 직접 임명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며 정3품 당상직이었다. 중추부가 관장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문 무관 가운데 소속이 없는 경우 이에 소속시켜 우대하였다. 박연은 첨지중추원사로서 임무를 맡자마자 다시 상언하였다. "주례周禮를 상고하건대, 천자天子는 규찬圭瓚이니 규圭로 자루를 만들고 제후諸侯는 장찬璋瓚이니 장璋으로 자루를 만들고 모두 조繰가 있다고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조는 자藉이니 장에 까는 것이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잡문雜文이라 하였습니다.” 규는 옥이며 규찬은 옥으로 만든 술잔이고 장은 반쪽 서옥瑞玉이며 장찬은 장으로 만든 술잔이다. 조는 야청으로 검은 빛깔을 띤 부른 빛이며 자는 깔다는 뜻이다. 설명이 더 어려운 것 같은 대로 왕실의 의식, 제물 기명器皿의 재질과 색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대개 찬은 종묘에서 강신降神하는 그릇인데 옛 사람의 찬의 제도가 아래에는 받치는 쟁반이 있고 자루에는 자조藉繰가 있으니 신臣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관계됨이 지극히 중하여 감히 손으로 범할 수 없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낮추고 주장할 것은 다 주장하였다. "도형圖形을 보건대, 조의 모양이 수건과 같은 데가 있고 또 잡문을 그렸는데 지금 중국의 수건은 흔히 잡문이 있는 비단을 쓰기 때문에 그림 수건이라고 일컬으니 찬 자루의 자조로 임시 사용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잡문 자조, 설명이 잘 안 된다. 잡문은 글의 종류가 아닌 것 같은데… 박연의 상언은 예조에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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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93>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 <5 > 박연은 왕에게 충성을 하였고 왕은 박연은 총애하였다.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하고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왕이 신하를 총애한 것은 행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총애는 유난히 사랑하는 것이다. 왕이 신하를 그 누가 됐든 사랑하는 것은 또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특별히 유난히 사랑하는 것은 드문 일이요 귀한 일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기도 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인 것이고 박연의 경우는 언제나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알아서 행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몰랐겠는가. 몸소 주고 받아 정이 들었고 그 큰 경륜을 협찬하였다고 토로한 난계 선생 유고의 첫 번째 글인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에 씌인 대로, 천 길 샘을 파던 그 의지 삼태미 흙을 쌓아 산을 이뤘다. 세종임금에 대한 정이요 그 결과였다. 일에 대한 열정 그것을 이룩한 성취감 또 그로 인한 책임과 사명감으로 이어지는 업적, 그것이 빛이 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귀중한 것이며 값진 것이다. 사랑이었다. 항상 사랑하고 그리며 몽매夢寐에도 잊을 수 없는 정이 맺어진 것이었다. 연결戀結이었다. 박연의 일과 꿈과 삶은 그런 것이었다. 하나의 피리를 불 듯 거문고를 타듯 글을 써서 올리고 악기를 만들고 악장을 만드는 것들이 다 그랬다. 예악, 예학 음악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많은 공력과 조예와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것인지에 대하여는 또 평가하기에 달렸지만 그저 평범하였고 특출한 것이 없었다.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쉽게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할까 천성을 타고 났는지는 모른다. 스물 여덟에 생원과에 급제하였고 서른 넷에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마흔 둘에 집현전 교리에 배수되어 직무를 시작하였다. 박연은 주어진 자리와 그가 해야 될 일에 대하여 전심 전력을 다 하였고 자신이 맡은 일을 천직으로 알았다. 무슨 일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 생각하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의 자리에 임명되고 세자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 하는 것이었다. 그가 아는 지식이고 예의이고 능력을 다 쏟아 놓는 것이다. 다른 일에도 그랬다.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로 있으면서 젊은 의녀醫女들의 교육을 철저하게 하였고 약재藥材 생산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볼 때도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였다. 그리고 마흔 여덟, 등과 후 2십년이 되어 악학별좌樂學別坐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서부터 박연의 음악에 생을 바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어렵고 막중한 예악의 실천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특별한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음악적 재질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어릴 때 산에 올라 피리를 불면 산새들이 모여서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고 토끼와 너구리가 한 편에서 춤을 추었다. 부모님 묘 앞에서 시묘를 할 때 피리를 불어 산짐승들을 다 불러모은 중에 호랑이도 와서 같이 지내지 않았던가. 지금 그 호랑이는 그의 내외 무덤 앞에 같이 묻혀 있지만. 정말 그에게 그런 기질이 있었는지 모른다. 금수禽獸까지 감화시킨 재질이라고 할까 능력이라고 할까.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실 때 가례家禮와 제례祭禮를 성실하게 행하고 조상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 신종愼終과 추원追遠을 극진히 행하였던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든 그는 자리를 맡자 마자 악서樂書를 찬집纂輯하고 악기와 악보법樂譜法을 만들도록 예조에 수본手本을 올리었다. 참으로 기개가 대단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鄕樂 당악唐樂 아악雅樂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만 악서찬집은 이루어지지 않아 문종 즉위년에 청인행악보소淸印行樂譜疏를 다시 올리고 있다. 용기도 대단하지만 참 끈기도 대단하였다. 좌우간 그렇게 시작된 박연의 집념은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 예악 음악의 집념이었다. 쉰 여덟, 태평악을 짓기까 10년간이었다. 그동안 모든 정수를 다 쏟아 부은 헌신이며 연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