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수)

[연재소설] 흙의 소리(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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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1)

  • 특집부
  • 등록 2022.08.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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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3>

같은 해 앞에서 말한 조하의절朝賀儀節을 꾸미었다.

왕세자王世子조하의절 군신君臣조하의절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는데 줄곧 상언하고 있는 글과 달리 두 조하를 예의에 맞게 악절樂節을 기록하여 전범典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난계선생 유고에는 가훈家訓과 함께 잡저雜著로 구분 정리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은 문서로 청정淸正 조회악율소朝會樂律疏와 함께 박연의 조회朝會음악에 대한 족적으로 조하의식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종 25(1443) 9월에 박연은 다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제수되었고 지경연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중임重任되었다.

집현전교리 사간원정언 의영고부사로부터 시작해서 악학별좌 봉상판관 봉상소윤 대호군 상호군 별감 판봉상시사 중추원부사 첨지중추원사 공조참의 예조참의 등 참으로 많은 여러 직을 맡아 신명을 다하여 일을 하였고 맡았던 일을 다시 맡아 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꼭 승진 승급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중간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예악에 관한 일 악학에 관한 일이면 더욱 성과도 내고 신명도 나고 하였지만 무엇이 됐든 다른 생각을 갖지 않고 직무에 충실하였고 어떤 일을 하든 예와 악의 실현을 위해 심혈을 쏟았다.

그러나 나라의 녹祿을 받고 헌신함에는 늘 조신操身을 하지만 칭찬보다는 원성을 들을 때가 많았다. 생각의 차이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세종 임금은 그의 편에서 생각하였고 편을 들어 주었다. 어쩌면 정확하게 평가하였는지도 모른다.

박연이 병조판서 정연鄭淵을 방문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분경奔競하는 것이라고 탄핵하고 죄 주기를 청하는 일이 있었다. 중추원부사인 박연은 자신이 맡은 궁궐 숙위宿衛 군국기무軍國機務 등의 임무를 위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벼슬을 위하여 엽관獵官 운동이나 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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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이 미복微服으로 집정執政한 사람의 집에 분경하였으니 마음가짐이 비루합니다.”

헌부에 법대로 논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다시 한번 박연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이미 늙었는데 연에게 청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임금은 두 사람을 이름을 떠올리며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하물며 정연은 대신大臣인데 어찌 작은 일로써 처벌하겠는가.”

세종임금은 그 뒤 박연에게 경사京師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賀禮하게 하였다.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에서 표문表文을 배송拜誦하였다.

그때 임금이 박연에게 말하였다.

"지금 나이 10여세 된 자를 뽑아 무동舞童을 삼았지만 노래와 춤을 익히고 장성하면 쓰지 않으니 장차 계속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며 일렀다.

"경이 경사에 가서 연향宴享의 풍악에 소년과 장년의 공인工人을 섞어 쓰는 것과 잡희雜戲를 아울러 베푸는 일을 하고 않는 것을 듣고 보고 오도록 하오.”

박연은 명을 받들고 하복下服, 사실대로 낱낱이 보고하였다. 어느 자리에 있든 박연에게 맞는 일이었다. 그것을 임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구러 나이를 자꾸 보태어 60 중반을 넘은 늙은이가 되었지만 무슨 일이든 마다 하지 않았고 자꾸 자리가 추가되었다. 인순부윤仁順府尹의 임무를 거듭하도록 하였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용되기도 했다.

10월 잡신雜神 산귀産鬼 등을 제사하였다. 여제厲祭 귀신에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은 귀신은 들어있지 않으니 거기 첨가하게 하라고 청원을 하여 예조에서 실시하였다.

세종 27(1445) 4월에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연향宴享 때 음악으로 제정하라는 글을 올렸다.

8월에는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경明京에 갔다왔다.

절일사節日使 박연이 처음에 회동관會同館을 출발할 때 부험符驗을 잃었던 것을 관부館夫가 찾았는데 박연이 통사通事 김자안金自安을 시켜 달려들어가서 찾아왔다. 복명復命할 적에 박연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으나 서장관書狀官 김중량金重良이 아뢰었다. 부험은 중국에 가는 사행使行의 표로 갖고 다니던 신물信物이다.

임금은 정부에 대고 일렀다.

"부험은 조정에서 내려준 것이므로 관계가 경하지 않다. 만일 잃어버렸다면 사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누를 끼침도 컸을 것이다.”

드디어 박연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종사관들에게도 죄를 차등 있게 주었다.

이럴 때의 세종은 박연에게 냉정하고 엄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