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연재소설] 흙의 소리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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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0)

  • 특집부
  • 등록 2022.08.0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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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2>

세종 24(1442) 10월 박연은 예조참의로 제수되었다.

다음 해 정월 예조참의 박연은 최양선崔揚善이 말한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의논해서 이뢰라는 명을 받았다. 직집현전直集賢殿 남수문南秀文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과 함께였다.

세종 임금은 호기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런 심리를 과학적으로 전환시키기 일쑤였다. 장영실의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그런 과학자 세종의 뒷받침이 있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15세기 과학시대를 이끌었던 합리주의 군주 세종은 최양선이라는 풍수지리 술사術士에게 귀를 열고 많은 국가 토목사업을 맡겼다.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종 앞에 최양선이 나타나 풍수 논쟁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풍수는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동양의 고유사상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자연관인데 박연은 음양오행에 대하여는 누구 못지 않게 천착하고 있었지만 풍수에 대하여는 조예가 깊지 못한 대로 심혈을 쏟아 명에 충실하였다. 늘 하는 대로 전적을 뒤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자문을 구하였다. 왕세자가 또 도승지都承旨 조서강趙瑞康 우부승지右副承旨 강석덕姜碩德 그리고 앞에 말한 남수문 정창손과 그에게 여러 풍수 술자術者들을 불러 수릉산혈壽陵山穴의 길흉을 질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최양선은 헌릉獻陵(태종太宗의 능) 앞을 지나는 고개 천천현穿川峴을 막지 않으면 산맥이 끊겨 길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삼남으로 내려가는 대로大路를 패쇄하고 흙으로 산을 쌓아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엄청난 물의를 일으킨 주장이었지만 세종은 선왕의 해로운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고 풍수설에 대한 호기심으로 의정부와 육조六曹하여금 이에 대한 논의를 하라고 했다.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난계-흙의소리100회.JPG

 

"산은 기복起伏이 있어야 좋으니 길이 있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발자취가 있어야 맥이 좋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생각이 달랐고 몇 년을 끌며 여러 예조 집현전 등에 계속 검토를 지시했던 것이다. 결과는 박연 뿐 아니라 여러 관료들이 옳지 않다는 의견을 내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직격 상소문을 올렸다. 풍수지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최양선은 계속 같은 주장을 했고 세종의 집착도 여전했다. 세종은 마침내 고개 길을 없애고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양선에게 경복궁을 비롯한 궁성 건축과 남대문 보토補土 공사 등을 하게 하고 경기 충청에서 인부 1,500명을 징발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등 끝이 없었다. 그러다 세종이 스스로 묻힐 자리로 정해 둔 수릉의 혈 방위를 틀리게 주장하다가 구속되었다. 박연의 의견도 일조를 하였다.

그제야 세종은 최양선에 대하여 선언하였다.

"앞으로 최양선이 국정에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다시는 저 허망한 술사를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어명에 의해 승정원은 그동안 최양선이 올린 보고서를 다 불태웠다.

풍수 얘기가 길었다. 천천현은 그 뒤 월천현月川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달래내고개가 그곳이다. 성남시 판교,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지금도 교통 요지의 고갯길이다. 매일 아침 그 길의 교통사정이 뉴스가 되고 있는 곳이다. 그 길을 막는다고 상상해 보라.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종임금이 직접 교지敎旨를 지어서 승지들에게 내어보이며 말하였다.

"나는 본래 병이 많았는데 근래에 와서 병이 더욱 심하고 또 왕위에 30년 동안이나 있었으므로 부지런해야 할 정사에 게으름을 피운 지 오래 되었다. 임금이 늙고 병들면 세자가 정사를 섭행攝行하는데

앞으로는 세 차례의 대조하大朝賀와 초하루 열엿새 조참朝參은 친히 받들 것이나 그 외의 다른 조참은 모두 세자를 시켜 조회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세자는 뒷날 문종文宗이다. 그리고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참판 허후許詡 참의 박연을 불러서 일렀다.

"경들은 연향燕饗하는 데에 모두 남악男樂을 쓰도록 하였는데

세종은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한나라 고조高祖와 당나라 태종太宗 같은 사람은 어진 임금이라 일컬었는데도 모두 여악女樂을 이용하였다고 하고, 만약 남악만 쓴다면 여덟 살 이상된 사람을 써야 하고 장성해지면 쓸 수 없게 되며 그들의 치장資粧도 나라에서 공급해야하는데 만약 여악을 쓴다면 치장을 준비하고 모습도 오랫동안 늙지 않으며 또 부인들의 방중房中의 풍악도 어찌 없음이 옳겠는가. 먼 후일을 염려해서 말하는 것인데 경들이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무엇이 어렵겠느냐고 하였다.

세종의 간곡한 의중을 읽은 모두는 고개를 조아렸다.

"연향하는 예는 모두 남악을 쓰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나 방중의 풍악에 여악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박연의 주장도 왕의 뜻을 바꿀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