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수)
흙의 소리
이 동 희
박연은 왕에게 충성을 하였고 왕은 박연은 총애하였다.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하고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왕이 신하를 총애한 것은 행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총애는 유난히 사랑하는 것이다. 왕이 신하를 그 누가 됐든 사랑하는 것은 또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특별히 유난히 사랑하는 것은 드문 일이요 귀한 일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기도 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인 것이고 박연의 경우는 언제나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알아서 행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몰랐겠는가.
몸소 주고 받아 정이 들었고 그 큰 경륜을 협찬하였다고 토로한 난계 선생 유고의 첫 번째 글인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에 씌인 대로, 천 길 샘을 파던 그 의지 삼태미 흙을 쌓아 산을 이뤘다.
세종임금에 대한 정이요 그 결과였다.
일에 대한 열정 그것을 이룩한 성취감 또 그로 인한 책임과 사명감으로 이어지는 업적, 그것이 빛이 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귀중한 것이며 값진 것이다. 사랑이었다. 항상 사랑하고 그리며 몽매夢寐에도 잊을 수 없는 정이 맺어진 것이었다. 연결戀結이었다.
박연의 일과 꿈과 삶은 그런 것이었다. 하나의 피리를 불 듯 거문고를 타듯 글을 써서 올리고 악기를 만들고 악장을 만드는 것들이 다 그랬다. 예악, 예학 음악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많은 공력과 조예와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것인지에 대하여는 또 평가하기에 달렸지만 그저 평범하였고 특출한 것이 없었다.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쉽게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할까 천성을 타고 났는지는 모른다. 스물 여덟에 생원과에 급제하였고 서른 넷에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마흔 둘에 집현전 교리에 배수되어 직무를 시작하였다.
박연은 주어진 자리와 그가 해야 될 일에 대하여 전심 전력을 다 하였고 자신이 맡은 일을 천직으로 알았다. 무슨 일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 생각하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의 자리에 임명되고 세자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 하는 것이었다. 그가 아는 지식이고 예의이고 능력을 다 쏟아 놓는 것이다. 다른 일에도 그랬다.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로 있으면서 젊은 의녀醫女들의 교육을 철저하게 하였고 약재藥材 생산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볼 때도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였다.
그리고 마흔 여덟, 등과 후 2십년이 되어 악학별좌樂學別坐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서부터 박연의 음악에 생을 바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어렵고 막중한 예악의 실천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특별한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음악적 재질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어릴 때 산에 올라 피리를 불면 산새들이 모여서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고 토끼와 너구리가 한 편에서 춤을 추었다. 부모님 묘 앞에서 시묘를 할 때 피리를 불어 산짐승들을 다 불러모은 중에 호랑이도 와서 같이 지내지 않았던가. 지금 그 호랑이는 그의 내외 무덤 앞에 같이 묻혀 있지만. 정말 그에게 그런 기질이 있었는지 모른다. 금수禽獸까지 감화시킨 재질이라고 할까 능력이라고 할까.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실 때 가례家禮와 제례祭禮를 성실하게 행하고 조상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 신종愼終과 추원追遠을 극진히 행하였던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든 그는 자리를 맡자 마자 악서樂書를 찬집纂輯하고 악기와 악보법樂譜法을 만들도록 예조에 수본手本을 올리었다. 참으로 기개가 대단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鄕樂 당악唐樂 아악雅樂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만 악서찬집은 이루어지지 않아 문종 즉위년에 청인행악보소淸印行樂譜疏를 다시 올리고 있다. 용기도 대단하지만 참 끈기도 대단하였다.
좌우간 그렇게 시작된 박연의 집념은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 예악 음악의 집념이었다. 쉰 여덟, 태평악을 짓기까 10년간이었다. 그동안 모든 정수를 다 쏟아 부은 헌신이며 연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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