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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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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6>

  • 특집부
  • 등록 2022.09.1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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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3

어려 황황자화 남산유대 녹명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들이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시儀式詩에 풍이 있고 아에는 소아 대아가 있다. 정악正樂의 노래말이다. 앞에서도 몇 번 얘기하였지만.

중추원부사 박연은 또 다른 일로 상언하였다.


"태봉胎峯 아래에 백성들의 오두막집을 철거하고 그 전토田土를 폐지하니 지극히 통석痛惜합니다.”


태봉 아래 여사廬舍를 철거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안타깝다고 아뢴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닭이 울고 개가 짖고 저자가 열리고 마을에 연기가 나면 은연중에 융성하고, 장법葬法을 상고해 보아도 고금의 경험이 모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신라의 능묘陵墓는 대개 왕성王城 안에 있었고 중국 사람들의 묘는 전원田園의 두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인연人煙이 모인 것도 길한 기운이 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태실胎室이 인연을 꺼려할 것이 없는데 어찌 태봉의 천 길 아래에 있고 평지 땅인 전원田園과 제택第宅을 모두 남김 없이 철수한 뒤에야 길하겠는가. 이것은 심히 이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법규를 세운다면 나라의 전토는 줄어들어 민생의 원망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백성들이 번성하여 사람이 많아지고 땅이 좁아지면 한 조각의 빈 땅도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도 왕정의 급한 바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구업舊業을 그대로 허락하시고 옛 사람의 태실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박연의 상언은 바로 풍수학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며 태봉 근방의 인가와 토전土田의 거리 등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고 태봉의 주혈主穴 산기슭 외에는 일찍이 경작한 토전과 태봉 주변의 사사寺社는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듣게 된다.

박연은 다시 성주星州 태봉 밑의 민가民家를 철거하지 말도록 상언한다.


난계-흙의소리106회수정.JPG

 

 

"백성을 해롭게 함은 중한 일인데 성상聖上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천총天聰을 어지럽게 합니다소신小臣의 명예룰 요구하는 계책이 아니고 성상의 덕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쳐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고자 함입니다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 시행하소서.”

 

백성을 위한 간곡한 이 청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연의 상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악의 종과 경의 소리는 처음으로 만들 때에 오로지 죽률관竹律管에 따라서 교정校正하였습니다. 죽률은 가볍고 가운데가 비어서 추위와 더위에 쉽게 감응하므로 볕이 나고 건조하면 소리가 높고 흐리고 추우면 소리가 낮습니다. 이 이치가 미묘하여 일찍이 미리 헤아리지 못하다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사유를 갖추어 동률관銅律管으로 고쳐 만들어 가지고 교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미精微함을 다 하지 못하여 무릇 6년 동안 교정한 소리가 조금 높기도 하고 조금 낮기도 한데 역시 추위와 더위 때문에 변화가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아악의 소리가 태반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종 1(1451) 4월에 올린 상언이었다. 종과 경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소리를 교정할 것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지난 무오년戊午年 4월에 제향祭享과 조회악朝會樂의 종과 경을 다 모아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철에 모두 교정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이에 올 가을에 다시 아뢰어 시행하라고 명하셨는데 지금까지 시일을 미루어 왔으니 참으로 작은 흠결이 아닙니다. 빌건대 금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모름지기 바로잡아서 길이 후세에 전하도록 하소서.”


무오년이면 1438, 14년 전이다. 세종 임금의 명이었다. 그것을 이제라도 실현시키고자 그 아들 임금 대에 다시 아뢰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고 예조에서는 가을까지 기다리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연으로서는 마지막 상언이었다.

참으로 길고 끈질긴 상언 상소 상주의 행진이었다. 예악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잡박한 개혁의 의지 바로세우고자 하는 집념의 표출이었다. 마당 가운데 넘어진 지게 작대기를 일으켜 세워 놓고자 하는 시골 촌뜨기의 욕망이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의욕이 넘치고 너무나도 집요한 그의 그칠 줄 모르던 행진도 멈출 때가 되었다.

 

그 해 9월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박연의 병세를 진맥하고 말미休暇를 주는 일로 인하여 우참찬 허후許詡가 이른 것이 문종실록(9)에 기록되어 있는데 병 때문이 아니고 일흔 넷 다섯의 늙은 나이 때문도 아니고 아 참, 너무도 엄청난 비운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의 한 가운데로 몰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