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흙의 소리
이 동 희
셋째 아들 계우季雨로 하여 생긴 일이었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집현전 학림학사를 역임하고 경연經筵에 출입하면서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등과 도의道義 충의忠義의 의誼를 다지고 있었던 것인데 늘 꽁생원 아버지에게 ‘저는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습니다’하고 입찬 소리를 하였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보다 못한 자식이 되면 쓰느냐고, 불초不肖 얘기만 하였다.
좌우간 얼마 뒤의 일이었다.
한 치 앞을 알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박연은 매일 매일 자신의 주어진 일에 매달려 있었고 끊임 없이 상언을 하고 그 준비를 하였다.
하루는 영의정 김종서金宗瑞가 아뢰었다.
여악女樂에 대해서였다. 세종께서 연향宴享과 회례會禮에는 처음부터 여악을 사용하지 않고 남악으로 대체시켰었는데 유독 중국 조정의 사신에게만 구습을 따라 개혁하지 못했으니 미편未便하다고 하였다. 임금(문종)도 같은 생각이었다.
"비록 여악이 정수精粹하고 남악은 정수하지 못하더라도 정수하지 못한 남악을 사용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지금 박연 같은 사람은 또한 얻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그로 하여금 다시 절차를 의논하여 그 음악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
영의정이 다시 아뢰자 임금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명하였다.
"만약 대신 사용할 만한 음악이 있으면 변경하기가 무엇이 어렵겠는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음률에는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니 관장管掌할만하다. 세상에는 사광師曠 같운 사람이 없으니 잠정적으로 박연으로 하여금 강구講究하게 하라고.”
사광은 춘추春秋 시대 진晉나라의 악사樂師로 음율을 잘 아는 것으로 유명하다.
문종은 그로부터 한 달 뒤 붕어하여 단종에게 모든 국사國事를 물려주었다. 단종端宗 즉위년(1452) 박연은 행중추원부사行中樞院副使로 배임拜任되었고 악학제조樂學提調 때의 「세종어제악보世宗御製樂譜」를 발간하였다. 이듬해 다시 중추원부사로 그리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大提學으로 제수除授되었다. 또한 의정부 좌찬성 겸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의 명을 받았다.
그동안 여러 직책과 부서에서 일을 하였지만 내심 가고싶은 자리 오르고 싶은 자리였다. 관직이란 가고 싶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있고 싶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보문각은 경연과 장서藏書를 맡아보던 관아로 마음대로 책을 보고 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 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없는 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영의정 좌의정 정승 같은 자리는 바라지도 않았고 책을 마음대로 읽고 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자리가 편하고 원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런 자리에 원한다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언저리에 또 하나의 일이 있었다. 일이라고 할까 책무責務였다.
단종1년 7월 승정원承政院에 전교하기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정인지鄭麟趾가 경연에서 음악을 익히는 일과 악공에게 직을 제수하는 일을 계청하였으니 정인지의 말을 듣고 의정부에서 의논하게 하라고 하였다. 정인지는, 예전에 세종대왕께서 나라를 다스림에 예禮보다 중한 것이 없으나 악樂의 소용 또한 큰 것인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예는 중히 여기나 악은 소흘히 하여 한탄할 일이다 하시고 곧 명령하여 오례五禮를 찬정撰定하였고 정대업定大業을 제정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악보를 선정하여 무동舞童으로 하여금 익히게 하고 무동이 늙으면 다시 쓸 수 없다하여 구폐救弊할 계획을 다시 꾀하였다 하면서 말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안가晏駕하시고 문종께서 사위嗣位하여 세종의 뜻을 이루고자 하여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음률을 알기 때문에 도제조都提調로 삼으시고 신臣을 명하여 참정參政케 하시며 하교하시기를……”
뒤의 얘기는 생략하지만 그런 연유로 해서 수양대군이 정인지에게 글을 보내었다. 그 글 중에 있는 말이었다.
"어제 판서가 여러 정승들과 이 일을 의논한 것을 들으니 심히 기쁘다. 나와 판서 그리고 박부윤朴府尹 등 두 세 구신舊臣만이 맡아야 할 바는 선왕들의 뜻을 이루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판서는 정인지를 가리키는 것이고 박부윤은 박연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것을 연결하고자 한 것인데, 잘 아는 대로 수양대군은 단종의 왕위를 찬탈簒奪한 세조世祖로 그 이전부터 세력을 구축하고 또 휘두르고 있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 아니고 그가 박연을 꼭 필요한 사람으로 꼽고 있었고, 이제 마땅히 정대업 보태평의 춤을 속히 익혀야 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세종에 이어 문종 단종 세조까지 그를 아끼고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무슨 소용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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