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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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108>

  • 특집부
  • 등록 2022.09.2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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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5>

셋째 계우가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연루가 되어 투옥 되고 종내에는 교형絞刑에 처해진 것이다. 청천벽력이었다. 단종 1(1453)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빼앗은 사건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短命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남지가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한 이후 좌의정은 김종서, 우의정은 정분鄭笨이 맡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문종의 유탁遺託을 받은 삼공三公 중 지용智勇을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두 아들과 함께 죽였다. 수양대군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 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 후에 사사賜死하였다. 수양대군은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고 의정부영사와 이조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鄭麟趾를 좌의정 한확韓確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敎書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혔다. 그리고 2년 뒤 강제로 단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하였다. 세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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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우는 이런 사태를 막아보려고 김종서 성삼문 박팽년 김문기金文起 등의 혈맹血盟에 가감하여 단종 복위復位를 시도하였으나 돌아온 것은 죽음 뿐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족에게 안겨준 슬픔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단종 29월 의금부에서 아뢰었다.

"교형에 처한 정분 박계우 등에게 연좌緣坐된 사람을 청컨대 모두 율문律文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법대로 하라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은 다 열거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과 같이 봉교奉敎하였다.

"부모 아들 출가하지 아니한 딸, 처첩妻妾 조부모 손자 형제, 아직 출가하지 아니한 자매, 아들의 처첩은 원방遠方의 관노비官奴婢로 영속永屬시키고 백부伯父 숙부叔父와 형제의 아들은 원방에 안치安置하되, 나이가 아직 16세가 되지 못한 자는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서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

그리고 이어서 봉교, 왕명을 받들었다.

"박계우의 아비 박연은 자원에 따라 외방外方에 안치하라.”

원방은 먼 지방, 먼 곳으로의 귀양을 말하고 외방은 서울이 아닌 지역을 말하며 안치란 글자 그대로 편안하게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귀양 간 죄인의 거주를 제한하던 형벌을 말한다.

박연은 삼조三朝에 걸쳐 공을 세운 것이 참작되어 목숨은 부지하게 되었고 관노가 되는 것을 면하게 되었다. 죄를 받고 귀양가기를 자청한 것이었다. 그것도 서울만 벗어나면 되었지만 먼 지방을 자원하였다.

전라도 고산高山 , 산 설고 물 선 오지奧地 골짜기였다.

메투리를 한 죽 걸머지고 실신한 아내 송씨를 부축한 채 몇날 며칠을 걸어서 걸어서 남으로 남으로 될 수 있으면 멀리 멀리로 내려 갔던 것이다. 가다가 쓸어지기도 하고 들어눕기도 하였다. 계속 걸어서 땅 끝까지 가려 하였지만 그래서 마음만으로라도 그에게 베풀어준 은혜을 갚으려 하였지만 더는 갈 수가 없어 주저 앉은 곳이 고산 골짜기였다. 물가였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영동 지프내보다 훨씬 외지고 험한 곳이었다.

 

현재 전주全州를 둘러싸고 있는 전북 완주完州군 고산면이다. 귀양 가서 산 마을 이름은 기록된 것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없고 몇 군데 가능성이 있는 장소를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바람 속에 물 속에서나 박연의 자취를 찾아야 할 것이다.

세조 1(1455) 8월 고산에 내려와 거처한 지 1년도 안 되어 아내 송씨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숨을 거두자 박연은 죽은 아내를 고향 영동에 돌아가 장사 지내게 해 달라고 상언하여 허락 받았다. 그러나 안치를 벗어나지 못한 지아비는 장례에 참석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리고 그로부터 3년 뒤 8월 박연은 경외종편京外從便, 서울 외에 다른 곳에서 사는 것이 결정되어 방면放免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 영동 고향 땅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그도 숨을 거두었다. 향년 81(1378. 8. 20.1458. 3. 23.) 모진 대로 여한 없이 산 생애였다.

올곧은 한 선비의 쓸쓸한 죽음 뒷 얘기 두 가지만 추가한다.

하나는 고산에서 지낸 3년 동안 그는 가훈 17장을 썼다. 아들 손자가 죽거나 다 뿔뿔히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터에 누구를 위해서였던가.

그리고 또 하나는 여러 왕자들을 비롯한 뭇 한량들의 애욕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다래가 부음을 듣고 멀리 영동을 향해 땅바닥 엎드려 통곡을 하였다는 것이다.

"선생님 선생니임 선생니이임!”

 몇날 며칠 식음을 끊고 은사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일어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