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수)

[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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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5>

  • 특집부
  • 등록 2022.09.08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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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2

"가동歌童이 끊겨지지 않는 것은 전날 무동舞童의 남은 풍습에 인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를 폐지한다면 원묘原廟에서 송덕頌德하는 음이나 공적으로 빈객을 연향宴享하는 악이 어찌 되겠습니까. 신의 망견으로는 가동은 폐지할 수 없으며 세종께서 무동은 혁파한 것은 오로지 계속하기 어려운 때문이라고 하였을 뿐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에 없애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계속할 수 있어 오래 할 수 있는 대책을 얻게 되면 전의 법규를 수복修復하는 성주의 계술繼述하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언필층 신의 망령된 의견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의견을 말하였다. 박연의 세종 때 이루지 못한 제도를 기어이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집념도 대단하지만 의지가 참으로 강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양인良人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을 추쇄推刷하여 입속入屬하게 하면 잇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가동의 임무는 반드시 용모 성음聲音 성품 생리生理로 골라야 하므로 사람 수가 많은 곳에서 무리를 모아놓고 간택揀擇하여야 하는데 무동을 처음 설치한 법에 의하여 가동을 세운다면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다.


외방外方 각 고을에 숫자를 책임 지우고 경상도 66 전라도 56 충청도 53 175고을에서 3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58인이 될 것이며 경기도 41 황해도 25 강원도 23 87고을에서 5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17인이 될 것이니 합하면 75인이 되는데 이로써 액수를 정하고 경외에 장부를 비치하고 윤차輪次로 숫자를 충당하면 될 것이다


대개 동기童伎를 바꾸어 세우는 기한이 7, 8년 뒤에 있으니 만약 세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반드시 21, 2년이 걸려서 도로 처음 세운 고을로 돌아가고 다섯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모름지기 38, 9년이 걸린 뒤에 처음 세운 고을에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바꾸어 대신하게 하는 기간이 매우 넉넉하여 동기의 숫자가 항상 찰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며 양인良人의 남편에게 시집 가서 낳은 사람이나 여기女妓 무녀巫女의 자식을 이에 더하면 가동을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이 창립한 회례연會禮宴 양로연養老宴의 악이 자연히 옛날로 복구하여져 오늘날 거듭 새로워지고 길이 후세에 전하여져 일거에 만전萬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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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앞날을 내다보는 계책이었다.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누가 있어 이렇게 주도면밀한 생각을 실현하는 묘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예와 악의 분야 악의 분야, 그것도 그 하부 구조라고 할까 악과 관련한 세세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대처하는 그리고 너무나 전문적이고 자상한 방안이었다. 정말 박연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왕前王이 하지 못한 것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를 한번 시험하여 보소서.”


끈질기고 간곡한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셋째 중국에서는 공공 연회에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고 태종 임금은 연향에 여악을 쓰지 말라고 하였고 세종 임금은 여러 대 내려오는 유풍遺風이기 때문에 가볍게 고치는 것을 무겁게 여겼으나 새 황제가 등극하고 마침 성주城主가 즉위하는 초기를 당하여 덕을 새롭게 하는 바로 그러한 때에 구습舊習을 따라서 여악을 쓴다면 적의適宜한 바가 아니다.


넷째 악부樂部의 악에는 제향악祭享樂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악祭樂은 봉상시奉常寺 십이궁보十二宮譜20여 장이 있어서 이습肄習한 지가 오래이나 연악宴樂은 세종 임금이 주문공朱文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중에서 아악시장雅樂詩章 12편의 악보를 얻어 표제表題하여 내었고 보법譜法이 크게 갖추어졌으며 그 중에서 성음聲音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 양로연으로 들이었으며 보법 전체를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출印出하도록 전한 지 지금까지 21년이나 아직도 인행印行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으면 이미 퍼진 금석金石의 음도 소종래所從來를 알지 못할 것이니 융안지보隆安之譜가 어려魚麗 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가 황황자화皇皇者華 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가 남산유대南山有臺 3장에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이 녹명鹿鳴 1장에서 나온 것과 같은 사실을 후세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원컨대 전하께서 거듭 인행하도록 명하고 미루어 두지 말도록 한다면 심히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박연의 상언을 의정부에 내려서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등이 의논한 결과 모두 그대로 따르고 여악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 구습舊習을 따르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