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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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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8>

  • 특집부
  • 등록 2022.07.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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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5>

박연의 상언은 아주 세세하며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연속부절로 이어졌다.

"금년 납향臘享부터 모든 제향에 전국 떡 흰떡등을 미리 진설하지 말게 하고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의거하여 임시에 진설하게 하되 경점更點에 따라 그 시간을 한정하고 장찬掌饌을 세워서 그 임무를 맡게 하고 기장 피 벼 수수 국 떡 등의 제물들을 뜨거운 것으로써 때를 맞추게 하여 향내가 오르게 한 뒤에 제사를 행하기를 청합니다.”

박연의 청원은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정부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황희 등이 의논한 결과 박연의 의견과 다른 것은 없고 제사 준비 시간 등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송나라 때 제향하는 의식에 의거하는데 전5에 종묘령宗廟令과 전사관典祀官이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찬구饌具를 담는 것이 축전丑前 1각이고 행사하는 것은 41인데 그 사이에 시각이 매우 촉박하여 메 국 떡 흰떡을 만약 임시하여 진설하면 시간에 못미쳐서 실례失禮하기에 이를까 두려우며 더군다나 소, 양의 창자, , 허파와 돼지고기를 임시하여 익혀서 올리고 또 종묘에는 날 것으로 희생犧牲을 올리므로 원묘原廟와 같지 아니하니 옛 제도에 따라서 33점에 들어가서 찬구를 담게 하되 전 드리는 물건들을 먼저 담게 하고 메 국 떡 흰떡은 맨 나중에 진설하게 하여 전날 저녁에 미리 진설하지 말게 하라는 것이었다.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박연은 정중히 읍하며 상언한 것에 추가로 기록하였다. 조금 의견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토를 달지 않았다. 소용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박연은 세종 21(1439) 4월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용되었다. 다음 해 7월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재임再任되었다.

예순 셋이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었다. 그는 무슨 자리든 천명으로 알고 무슨 일이든 천직으로 여기고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 하였다.

공조참의로 있을 때 일이었다. 공조란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선營繕 도야陶冶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데 예악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의 재질과 적성에 맞는 일이라면 그 기량을 더욱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는 대로 맡기는 대로 거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하였다. 그리고 어디서나 맞지 않고 옳지 않은 부분을 고치고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런데 공조 분야 뿐 아니라 모든 관직을 대상으로 한 대단히 실용적인 방안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상 준다는 계획, 납속상직지책納粟賞職之策이었다.

이에 대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안순安純이 상서上書하여 부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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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조참의 박연이 말한 납속상직지책이 시무時務에 합할 것 같습니다.”

의정부는 안순에게 호조戶曹로 하여금 의창義倉을 보충할 방법을 강구하게 하였던 것이다. 의창은 고려 때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을 당하거나 비상시에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대여하던 기관이다.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상 준다는 계획은 예를 들면 품계가 없는 자에게는 정9품에서 종3품에 이르기까지 10석마다 한 자급資級)을 올리게 하는 것이다. 정곡正穀 잡곡雜穀을 묻지 말고 10석을 바친 자에게는 종9품이 되고 (중략) 2백석을 바치면 종3품이 되고 그 관직이 있던 자는 본직의 품계에 따라서 역시 10석으로 한 자급을 올려주되 정3품에서 그치게 하고 또 그 중에서 제수除授할 수 없는 주현州縣의 아전으로서 2백석을 바친 자에게는 본 구실에서 영영 제적하여 주고 50석을 바친 자는 자기 몸에 한하여 면역하게 하는 것이다.

이같이 하면 경법經法과 권도權道의 두 가지를 다 얻게 되고 인과 의가 똑같이 병행되어 인심이 순하고 기뻐할 것이요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다 펴져서 의창이 충실할 뿐 아니라 성은聖恩이 소낙비처럼 내리게 되어 이를 행하면 폐단이 없고 크게 도움이 있을 것이다.

"이 소소한 보첨補添의 방법은 전부터 있는 것이지만 온 나라의 주현에다가 의창을 두어 넉넉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연의 이 방책은 소신小臣의 뜻에 합하나 그 곡식 바치는 것의 많고 적은 것과 관직으로 상 주는데 높고 낮은 것은 위에서 살피시어 시행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안순의 상서는 바로 의정부에 내리었다.

조선 시대에 나라의 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면역免役 또는 면천免賤하여 주던 정책으로 박연은 그 일을 건의하였고 그것은 그의 인의仁義 도경道經을 추구하는 일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