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흙의 소리
이 동 희
그리고 이선생도 그래서 여기를 택한 것이 아닌가 싶다. 선비가 살던 마을을 뜻하는 거사리, 거기에 박연의 유배 모습을 담아 보자. 어떤 기록이 나올 때까지.
이날 제2 제3의 마을을 찾아 그 가능성을 더듬어 보았다. 옥포리玉浦里, 백도리百島里, 옛 이름은 온섬 원셈 마을, 붉은 바위가 있는 자암紫巖마을, 평지마을 등. 아무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잠간 얘기한 대로 이선생은 박연이 고산 귀양지에서 쓴 가훈을 소개하고 그 배경을 설명하였다. 가훈을 먼저 보자. 열 일곱 항목을 17단락으로 발체 요약하였다.
아이들이 서너 살이 되면 곧 학업에 힘쓰도록 하라. 아침저녁으로 항상 소학小學을 스승으로 삼고 이 책을 정숙精熟 관통한 후에 사서四書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
바라건대 내 자손들은 형제간에 과오가 있으면 서로 경계하고 노여운 생각을 마음에 품어두지 말며 항상 은혜와 사랑을 베풀고 꾸짖는 말로써 대하지 말라.
집을 다스리는 데는 화순和順이 제일이다. 서로 다투는 불상사는 첩을 두는 데서 일어난다. 후사後嗣를 두지 못하여 축첩하는 경우라도 한계를 엄격히 세워야 한다.
불행히 상처하는 일이 있더라도 전처의 자식이 조상을 받들 자가 있으면 후처를 얻지 말고 단산斷産한 여자를 택하라. 가문을 보존하는 하나의 절도節度인 것이다.
일가 중 때가 지나도록 출가出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거든 분수에 맞게 금전과 재물을 내놓아 때를 잃지 말게 하여라. 이것도 우리 가문의 미사美事가 될 것이다.
상례 장례는 주자가례朱子家禮를 따르도록 하고 지나치게 슬퍼하여 몸을 상하게 하면 안 된다. 그리고 과음 포식 송사 여자관계 등 8가지 금기사항을 말하고 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아침 저녁으로 전奠을 지내고 삭망朔望으로 제사를 지내면 된다. 제물은 살았을 때와 같이 정결하고 간략하게 주안하여 3년을 마치면 된다.
효도 우애 충성 신의 예의 염치로써 가정의 법을 삼고 마음을 맑게 하여 욕심을 적게 하며 남을 해치지 말고 탐하지도 말며 남의 과실을 말하지 말며 남의 급한 것을 도와주며 남의 어려움을 구제할 것이며 성훈聖訓의 가르침에 따르라.
거문고와 비파와 같은 악기는 옛날부터 군자가 곁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여 성정을 길렀으니 손수 어루만져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청풍명월 아래서 술을 나누면서 시를 짓는 것은 좋은 일이나 늘어지게 취하여 노래하며 춤추는 것은 안 좋다.
매와 개로 사냥을 일삼는 일은 다른 동물의 생명을 죽이게 되니 잔인하고 의리를 상하는 일이다. 내 자손들은 삼가 몸을 보존하여 문호門戶를 잃지 않도록 하여라.
친척이나 벗이 소첩에 빠져 있는 집 미망인 과부 집에는 경솔히 드나들지 말아라.
여색女色은 가장 명예와 절조에 관계되는 문제다. 경박하고 소흘히 하지 말아라. 이 늙은이의 뜻을 명심하여 선조의 유풍을 욕되게 하지 말아라.
공사 간 연희 등 환락의 자리에서 기생들과 의혹될 일을 조심하며 오래 머물지 말고 핑계를 만들어 물러나라. 삼가고 삼가라. 몸을 다스리는 하나의 큰 절도이다.
판관判官이나 대사간大司諫의 임무를 맡게 되었을 경우 사족士族의 문제 흔적이 애매하거나 부녀의 간통 사건일 경우 경솔하게 판결해서는 안 된다. 증거가 없으면 재판을 물리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 집은 청렴하여 후손에게 전해줄 재물이나 보배는 없다. 다만 내가 평생 겪은 일들과 원하는 바를 기록, 가범家範을 만들어 장래에 영원히 전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렇게 조목 조목 쓰고 끝으로 결연히 덧붙였다.
"을해乙亥 맹추孟秋 상한上澣 78세 늙은이 병을 무릅쓰고 써서 전하노라.”
세조 1년(1455) 음력 7월이다. 고통스런 귀양살이, 성하지도 않은 몸으로 박연은 왜 이런 글을 쓰고 있었을까. 꼭 그의 가정 자녀손에게만 전하고 싶은 덕목德目이었을까. 귀양 전의 박연과 그 이후의 박연의 생生을 나누어 본다. 앞의 생은 먹물로 썼다면 뒤의 생은 피는물로 쓴 것이다. 이선생의 칼럼에 쓴 대로.
「난계선생 문집文集」 「난계선생 유고遺藁」에 수록되어 있다. 가훈家訓-17칙서十七則序라고 되어 있는데 서문은 영조英祖 때의 문신文臣 이재李縡가 쓰고 있다. 앞 부분이다.
"박공(박연)이 음률에 정통하였으므로 수백년을 지나 지금에 이르도록 소년들조차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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