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흙의 소리
이 동 희
누가 명한 것이겠는가.
박연의 괴로움은 말할 수가 없고 부끄러움은 하늘을 덮었다. 사실이 그렇고 아니고를 따질 염치도 없었다. 그저 펑펑 울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는 나이이고 체면이라는 것을 스스로 너무나도 잘 알았다.
칠십이종심소욕불유구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 하지 않았던가. 공자의 말씀이다. 일흔 살에는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였다. 물론 그가 성현의 발뒤꿈치도 따라갈 수 없을지 모르지만 주야로 수신修身을 하고 마음을 고쳐 먹고 하였는데 조정이나 사회에는 아니 임금의 눈에는 차지 않았던 것 같다. 일흔 두 살이 되었다. 아직 눈은 밝고 귀는 잘 들렸다. 마음도 변치 않았다. 매일 아침 뉘우치며 매일 새로 다짐을 하며 글을 읽고 썼다.
파직되고 다시 인수부윤에 임용되어 하던 일은 멈추지 않았다. 상언할 글을 계속 썼고 예악 분야의 고치고 바로잡아야 할 문제점에 대한 정리를 하고 상언 준비를 하였다. 그의 일은 쉰 때나 일흔 때나 여일하였다.
그런데 큰 나무 그늘과 같은 세종 임금은 그의 옆에 오래 있어주지를 않았다.
임금은 박연에게 명하여 종률鍾律을 정하게 하였다. 박연이 일찍이 옥경玉磬을 올렸는데 임금은 쳐서 소리를 듣고 말하였다.
"이칙夷則의 경소리가 약간 높으니, 몇 푼〔分〕을 감하면 조화가 될 것이다.”
박연이 가져다 보니 경쇠공〔磬工〕이 잊어버리고 쪼아서 고르게 하지 아니한 부분이 몇 푼이나 되어 모두 임금의 말과 같았다. 임금은 음률을 깊이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
박연은 너무나 감탄하였고 몸둘 바를 몰랐다. 정말 너무 놀라웠고 황송하였다. 임금의 너무도 정확한 음감音感 너무도 정확한 지적에 대하여 참으로 송구스럽긴 하였지만 그렇게 흔쾌한 눈물이 날 수가 없었다. 두렵고 하늘 같은 존재감이 가슴 가득히 안기는 것이었다. 자신은 참으로 행복한 신하로구나 참으로 훌륭한 왕을 모시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너무나 극적인 대목에 대하여 앞에서도 얘기를 하였지만 실록에는 세종31년 12월, 선어仙馭 1년 전에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한 두 기록을 더 옮겨본다.
불당佛堂의 경찬慶讚 때에 정랑正郎 김수온金守溫이 글을 지어 부처의 공덕과 귀의歸依 존숭尊崇의 지극함을 말하고 여러 대군大君과 판서 민신閔伸 부윤 박연 도승지 이사철李思哲로부터 환시宦侍 공장工匠에 이르기까지 분향하고 부처와 맹세하고 함께 계를 맺고 한 것에 대하여 사헌부에서 금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하여 임금이 말하였다.
"계를 맺는 것은 성심이 있으면 귀의하는 것이고 성심이 없으면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어찌 대관臺官의 아랑곳할 것이랴.”
윤허하지 아니한 것이다. 대관은 벼슬아치들을 이르는 말이다.
임금은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황보인皇甫仁 등에게 또 말하였다.
"나의 안질은 이미 나았고 말이 잘 나오지 않던 것도 조금 가벼워졌으며 오른쪽 다리 병도 차도가 있음은 경들도 아는 바이지만 근자에는 왼쪽 다리마저 아파져서… 중략… 예전에 괴이하던 일이 내 몸에 이르렀다. 박연 하위지河緯地가 온천에서 목욕하고 바로 차도가 있었지만 경들도 목욕하고서 병을 떠나게 함이 있었는가.”
세종 임금은, 나도 또한 온천에 목욕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 해 임금은 붕어崩御하였다.
그것이 임금과의 마지막 관계였다. 박연이 온천을 갔다가 온 것 그리고 무슨 병인지 차도가 있었던 것, 또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를 다 알고 있었다. 스므살 정확히는 열 아홉 살 아래인 임금은 박연보다 8년 전에 명을 다한 것이었다.
비보를 듣고 박연은 왕궁을 향하여 계속 큰절을 하였다. 백배 천배 헤아릴 수도 없었다. 마구 눈물이 쏟아졌다. 헤어짐의 슬픔도 슬픔이지만 좀 더 잘 할 것을 좀 더 마음에 차게 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안타깝고 서러웠다. 다시 고쳐 할 수 없으니 후회가 되고 더욱 슬펐다. 그리고 그립고 아쉬웠다.
옷깃을 여미고 마음을 가다듬어 되돌아볼 때는 슬픔을 가시었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찾아 갔는가
(雲衢若許乘槎客 直欲尋源上碧穹)
난계선생 유고집 제일 앞에 실려 있는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의 마지막 구절이다. 참으로 많은 업적을 쌓고 더러 같이 하다 떠나서 좋은 데로 잘 갔기를 빌고 또 빌었다.
송설당은 박연의 당호堂號이고 한양 살던 그의 집 이름이겠는데, 어디에 그 규모를 얘기해 놓은 데가 없지만, 삼남사녀三男四女가 복닥거리고 살던 집 어디에 가령 눈 맞고 있는 소나무를 뜻하는 당호 편액을 걸어놓았던지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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