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
[연재소설] 흙의 소리<102>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4> 참으로 민망하고 얼굴을 들 수가 없고 말할 수 없이 괴로웠다. 천금을 잃은들 그보다 더 가슴이 아플 수가 없었다. 도의적으로 또 인간적으로 죄 짓는 일 악하고 추한 일을 절대로 하지 않고 제 정신으로 길이 아닌 데를 가지 않고 말이 아닌 것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늙고 쇠하니 볼성 사나운 일이 자꾸 생기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어찌 할 수가 없는 일이지만 임금 앞에 보이게 되어 괴로웠다. 자신을 생각해 주고, 그것이 총애가 아니라 하더라도, 아껴주고 존중해 주는 임금에게 못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가슴 아팠다. 나이가 들고 늙으니 그런 마음이 더 하였다. 그런데 자꾸 그런 일이 생기고 그렇게 보기 싫은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아들의 일이었다. 전 현감縣監 정우鄭瑀가, 행사정行司正 박연의 아들 朴自荊으로 사위를 삼았는데 자장資裝을 갖추지 못한 것을 불만족하게 여기고 또 여자가 뚱뚱하고 키가 작으므로 실행失行하였다고 핑계를 대고 버린다고 하므로 의금부義禁府에 내려 국문鞫問하고 있으나 오래도록 정상情狀을 얻지 못하였다고 고하였다. 자장은 시집갈 때 가지고 가는 혼수이다. 그리고 실행은 도의에 어그러진 좋지못한 행실을 말한다. 박연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식의 일이지만 너무나 죄스러웠다. 그런데 임금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밝히어 말하는 것이어서 더욱 황송하였다. "대저 옥獄을 결단하는 데는 대강을 잃지 않는 것으로 주장을 삼아야 한다. 의금부에서 한갓 자형이 술에 만취하여 술주정을 한 것 등의 일로써 판결을 하려고 하니 모두 끝이다. 그 여자가 만일 참으로 실행을 하였다면 자형이 그날 밤에 당연히 곧 버리고 갔을 것이다. 그대로 그 집에서 자고 아침이 되어 유모乳母가 정가鄭家에 오매 예물을 주어 보냈으니 혼례는 이루어진 것이다. 자형이 이불 요와 의복이 화려하지 못한 것을 보고 빈한貧寒한 것을 싫어하여 실행하였다고 청탁하여 버리는 것이 분명하다.” 세종 임금은 사안을 잘 알고 있었다. 정우의 편을 들지 않고 박연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를 말하고 있었다. 의금부에서 다시 국문하니 임금의 말대로였다. 자형이 무고誣告에 좌죄坐罪되어 장杖 60에 도徒 1년에 처하고 다시 완취完聚하게 하였다. 완취는 흩어진 가족이 함께 모여 산다는 뜻인데 두 사람이 갈라서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다. 박연은 더욱 송구하고 죄스러웠다.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자식을 특별히 가르친 것은 없었지만 말썽을 일으키지는 않았었다. 늘 아침 저녁으로 밥상에서나 특별한 날에 중뿔나지 말고 쳐지지 말고 절대로 과욕 허욕은 부리지 말라고 타일렀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말하였다. 가난하고 빈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의로운 일을 하는 것보다 의롭지 못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물려준 것은 그런 중언부언밖에 없었다. 그러나 늘 불만이고 아버지를 답답하게 생각하였지만 거역하지 않고 따라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정말 다행스럽게도 다들 제 앞 가림은 하였다. 큰아들 맹우는 현령으로 정5품 둘째 중우는 郡守로 정4품 세째 계우는 집현전 한림으로 정9품으로 시작을 하여 잘 못 되긴 하였지만 아버지 박연은 자식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해 준 것이 없었다. 늘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자형은 어느 자식의 별호인지 필자로서는 알 수가 없다. 족보를 뒤져보면 정우의 딸인 며느리가 나올 것이다. 좌우간 그리고 얼마 후의 일인데 불미스러운 일로 파직을 당하였다. 정말 다른 무엇보다 악학제조樂學提調는 그동안의 어떤 일보다도 마음에 들고 맡고 싶었던 직위로서 스스로 참으로 대견스럽게 여기던 자리가 아니었던가. 덕이 부족하고 늙고 불민한 탓이었던가. 정말로 비뚫어지고 영악해지기 시작한 것인가. 사헌부에서, 박연이 휴가를 얻어 귀향하더니 누이가 죽으매 서울에 돌아갈 날이 급하였다고 핑계하여 나흘만에 장사 지내고 드디어 재선을 나누어 짐바리에 싣고 왔으며 또 악하제조로서 사사로이 악공樂工을 데리고 영업행위를 하게 하였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죄를 주기를 청하였다. 그러자 명하여 그 직을 파罷하였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101)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3> 같은 해 앞에서 말한 조하의절朝賀儀節을 꾸미었다. 왕세자王世子조하의절 군신君臣조하의절로 나누어 기록하고 있는데 줄곧 상언하고 있는 글과 달리 두 조하를 예의에 맞게 악절樂節을 기록하여 전범典範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난계선생 유고』에는 가훈家訓과 함께 잡저雜著로 구분 정리되어 있다. 세종실록에도 기록되지 않은 문서로 청정淸正 조회악율소朝會樂律疏와 함께 박연의 조회朝會음악에 대한 족적으로 조하의식 절차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세종 25년(1443) 9월에 박연은 다시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로 제수되었고 지경연知經筵 성균관사成均館事에 중임重任되었다. 집현전교리 사간원정언 의영고부사로부터 시작해서 악학별좌 봉상판관 봉상소윤 대호군 상호군 별감 판봉상시사 중추원부사 첨지중추원사 공조참의 예조참의 등 참으로 많은 여러 직을 맡아 신명을 다하여 일을 하였고 맡았던 일을 다시 맡아 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꼭 승진 승급만은 아니었던 것 같고 중간에 파직되기도 하였다. 예악에 관한 일 악학에 관한 일이면 더욱 성과도 내고 신명도 나고 하였지만 무엇이 됐든 다른 생각을 갖지 않고 직무에 충실하였고 어떤 일을 하든 예와 악의 실현을 위해 심혈을 쏟았다. 그러나 나라의 녹祿을 받고 헌신함에는 늘 조신操身을 하지만 칭찬보다는 원성을 들을 때가 많았다. 생각의 차이가 많았다. 그럴 때마다 세종 임금은 그의 편에서 생각하였고 편을 들어 주었다. 어쩌면 정확하게 평가하였는지도 모른다. 박연이 병조판서 정연鄭淵을 방문하였는데 사헌부에서 분경奔競하는 것이라고 탄핵하고 죄 주기를 청하는 일이 있었다. 중추원부사인 박연은 자신이 맡은 궁궐 숙위宿衛 군국기무軍國機務 등의 임무를 위한 것이었는데 자신의 벼슬을 위하여 엽관獵官 운동이나 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박연이 미복微服으로 집정執政한 사람의 집에 분경하였으니 마음가짐이 비루합니다.” 헌부에 법대로 논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임금은 다시 한번 박연의 손을 들어주었다. "연堧이 이미 늙었는데 연淵에게 청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임금은 두 사람을 이름을 떠올리며 말하고 고개를 저었다.. "하물며 정연은 대신大臣인데 어찌 작은 일로써 처벌하겠는가.” 세종임금은 그 뒤 박연에게 경사京師에 가서 성절聖節을 하례賀禮하게 하였다. 세자는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에서 표문表文을 배송拜誦하였다. 그때 임금이 박연에게 말하였다. "지금 나이 10여세 된 자를 뽑아 무동舞童을 삼았지만 노래와 춤을 익히고 장성하면 쓰지 않으니 장차 계속하기 어렵지 않을까.” 우려를 표하며 일렀다. "경이 경사에 가서 연향宴享의 풍악에 소년과 장년의 공인工人을 섞어 쓰는 것과 잡희雜戲를 아울러 베푸는 일을 하고 않는 것을 듣고 보고 오도록 하오.” 박연은 명을 받들고 하복下服, 사실대로 낱낱이 보고하였다. 어느 자리에 있든 박연에게 맞는 일이었다. 그것을 임금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구러 나이를 자꾸 보태어 60 중반을 넘은 늙은이가 되었지만 무슨 일이든 마다 하지 않았고 자꾸 자리가 추가되었다. 인순부윤仁順府尹의 임무를 거듭하도록 하였고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에 임용되기도 했다. 10월 잡신雜神 산귀産鬼 등을 제사하였다. 여제厲祭 귀신에 아이를 낳다가 난산으로 죽은 귀신은 들어있지 않으니 거기 첨가하게 하라고 청원을 하여 예조에서 실시하였다. 세종 27년(1445) 4월에는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연향宴享 때 음악으로 제정하라는 글을 올렸다. 8월에는 하성절사賀聖節使로 명경明京에 갔다왔다. 절일사節日使 박연이 처음에 회동관會同館을 출발할 때 부험符驗을 잃었던 것을 관부館夫가 찾았는데 박연이 통사通事 김자안金自安을 시켜 달려들어가서 찾아왔다. 복명復命할 적에 박연은 이 사실을 숨기려고 하였으나 서장관書狀官 김중량金重良이 아뢰었다. 부험은 중국에 가는 사행使行의 표로 갖고 다니던 신물信物이다. 임금은 정부에 대고 일렀다. "부험은 조정에서 내려준 것이므로 관계가 경輕하지 않다. 만일 잃어버렸다면 사신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누累를 끼침도 컸을 것이다.” 드디어 박연의 고신告身을 빼앗고 종사관들에게도 죄를 차등 있게 주었다. 이럴 때의 세종은 박연에게 냉정하고 엄격하였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 (100)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2> 세종 24년(1442) 10월 박연은 예조참의로 제수되었다. 다음 해 정월 예조참의 박연은 최양선崔揚善이 말한 풍수설風水說을 가지고 의논해서 이뢰라는 명을 받았다. 직집현전直集賢殿 남수문南秀文 응교應敎 정창손鄭昌孫과 함께였다. 세종 임금은 호기심이 많았다. 그 호기심이라고 할까 그런 심리를 과학적으로 전환시키기 일쑤였다. 장영실의 과학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데는 그런 과학자 세종의 뒷받침이 있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15세기 과학시대를 이끌었던 합리주의 군주 세종은 최양선이라는 풍수지리 술사術士에게 귀를 열고 많은 국가 토목사업을 맡겼다. 호기심을 풀어야 직성이 풀리는 세종 앞에 최양선이 나타나 풍수 논쟁에 몰아넣었던 것이다. 풍수는 땅과 공간의 해석과 활용에 대한 동양의 고유사상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한 자연관인데 박연은 음양오행에 대하여는 누구 못지 않게 천착하고 있었지만 풍수에 대하여는 조예가 깊지 못한 대로 심혈을 쏟아 명에 충실하였다. 늘 하는 대로 전적을 뒤지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고 자문을 구하였다. 왕세자가 또 도승지都承旨 조서강趙瑞康 우부승지右副承旨 강석덕姜碩德 그리고 앞에 말한 남수문 정창손과 그에게 여러 풍수 술자術者들을 불러 수릉산혈壽陵山穴의 길흉을 질의하도록 하기도 하였다. 최양선은 헌릉獻陵(태종太宗의 능) 앞을 지나는 고개 천천현穿川峴을 막지 않으면 산맥이 끊겨 길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삼남으로 내려가는 대로大路를 패쇄하고 흙으로 산을 쌓아 올려야 한다고 하였다. 엄청난 물의를 일으킨 주장이었지만 세종은 선왕의 해로운 일을 그냥 넘길 수 없었고 풍수설에 대한 호기심으로 의정부와 육조六曹하여금 이에 대한 논의를 하라고 했다. 의견들이 분분하였다. "산은 기복起伏이 있어야 좋으니 길이 있어도 해로울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발자취가 있어야 맥이 좋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생각이 달랐고 몇 년을 끌며 여러 예조 집현전 등에 계속 검토를 지시했던 것이다. 결과는 박연 뿐 아니라 여러 관료들이 옳지 않다는 의견을 내었고 사헌부司憲府에서는 직격 상소문을 올렸다. 풍수지리에 대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최양선은 계속 같은 주장을 했고 세종의 집착도 여전했다. 세종은 마침내 고개 길을 없애고 흙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 그리고 최양선에게 경복궁을 비롯한 궁성 건축과 남대문 보토補土 공사 등을 하게 하고 경기 충청에서 인부 1,500명을 징발하는 대규모 토목공사를 하는 등 끝이 없었다. 그러다 세종이 스스로 묻힐 자리로 정해 둔 수릉의 혈 방위를 틀리게 주장하다가 구속되었다. 박연의 의견도 일조를 하였다. 그제야 세종은 최양선에 대하여 선언하였다. "앞으로 최양선이 국정에 끼어들면 용서하지 않겠다. 다시는 저 허망한 술사를 국정에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어명에 의해 승정원은 그동안 최양선이 올린 보고서를 다 불태웠다. 풍수 얘기가 길었다. 천천현은 그 뒤 월천현月川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달래내고개가 그곳이다. 성남시 판교,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으로 지금도 교통 요지의 고갯길이다. 매일 아침 그 길의 교통사정이 뉴스가 되고 있는 곳이다. 그 길을 막는다고 상상해 보라. 6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같은 해 4월에는 세종임금이 직접 교지敎旨를 지어서 승지들에게 내어보이며 말하였다. "나는 본래 병이 많았는데 근래에 와서 병이 더욱 심하고 또 왕위에 30년 동안이나 있었으므로 부지런해야 할 정사에 게으름을 피운 지 오래 되었다. 임금이 늙고 병들면 세자가 정사를 섭행攝行하는데…” 앞으로는 세 차례의 대조하大朝賀와 초하루 열엿새 조참朝參은 친히 받들 것이나 그 외의 다른 조참은 모두 세자를 시켜 조회를 받도록 할 것이라고 하였다. 세자는 뒷날 문종文宗이다. 그리고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참판 허후許詡 참의 박연을 불러서 일렀다. "경들은 연향燕饗하는 데에 모두 남악男樂을 쓰도록 하였는데…” 세종은 매우 좋은 생각이라고 하며 한漢나라 고조高祖와 당唐나라 태종太宗 같은 사람은 어진 임금이라 일컬었는데도 모두 여악女樂을 이용하였다고 하고, 만약 남악만 쓴다면 여덟 살 이상된 사람을 써야 하고 장성해지면 쓸 수 없게 되며 그들의 치장〔資粧〕도 나라에서 공급해야하는데 만약 여악을 쓴다면 치장을 준비하고 모습도 오랫동안 늙지 않으며 또 부인들의 방중房中의 풍악도 어찌 없음이 옳겠는가. 먼 후일을 염려해서 말하는 것인데 경들이 이 법을 시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 무엇이 어렵겠느냐고 하였다. 세종의 간곡한 의중을 읽은 모두는 고개를 조아렸다. "연향하는 예는 모두 남악을 쓰는 것이 진실로 아름다운 일이나 방중의 풍악에 여악이 없을 수 없습니다.” 박연의 주장도 왕의 뜻을 바꿀 수가 없었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 <99>흙의 소리 이 동 희 순명順命 <1> 이듬해 정월에 박연은 다시 제악祭樂에 관한 글을 올리었다. "제악은 천신天神을 제사할 경우 강신降神함에 4궁宮을 쓰는데 악樂은 6성成으로 변합니다. 육변六變을 쓰는 것은 천제天帝가 진震에서 나옴을 취함이요 진은 묘위卯位에 자리하였으니 묘의 수는 여섯인 것입니다. 따라서 환종궁圜鍾宮을 사용해야 하니 협종夾鍾 2성 황종각黃鍾角 고선궁姑洗宮 2성 태주치太蔟徵 남려궁南呂宮 1성 고선우姑洗羽 대려궁大呂宮 1성이고, 송신送神에는 협종궁 1성을 사용합니다.” 천신을 제사하고 묘악廟樂에는 사성四聲을 쓰라는 것이었다. 제에 따르는 악에 관하여 박연만큼 조예가 있기도 힘들지만 그만큼 관심을 갖고 마음을 쏟아붓기도 어려웠다. 다른 사람-관리 신하 대신-들도 얘기하였지만 그렇게 자세하고 분명하게 낱낱이 의견을 끊임없이 올리고 바로잡자고 청원하는 사람은 없었다. 박연은 예에 어긋나지 않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었기도 하였지만 거기 합당한 악을 사용하고자 하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그것이 박연이 집착하는 제악의 원칙이었다. 예악의 실천이었다. 청원은 계속되었다. 지기地祇를 제사할 경우는 강신함에 4궁을 쓰는데 악은 8성으로 변한다. 팔변八變을 쓰는 것은 곤坤이 만물을 기르는 것을 취함이요 곤이 미위未位에 자리하였으니 미의 수는 여덟인 것이다. 따라서 함종궁函鍾宮을 사용하여야 하니 임종林鍾 2성 태주각太蔟角 유빈궁蕤賓宮 2성 고선치姑洗徵 응종궁應鍾宮 2성 남려우南呂羽 유빈궁 2성, 송신에는 임종궁 1성을 사용한다. 인귀人鬼를 제향할 경우는 강신함에 4궁을 쓰는데 악은 9성으로 변한다. 구변九變을 쓰는 것은 금金의 수를 취함이요 금의 물건됨이 잘 화化하되 변하지 않으니 귀신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황종궁黃鍾宮 3성 대려각大呂角 중려궁仲呂宮 2성 태주치太蔟徵 남려궁南呂宮 2성 응종우應鍾羽 이칙궁夷則宮 2성을 사용한다. "이상과 같이 제사할 때마다 4궁에 강신함과 악무樂舞가 변하는 수는 각각 의거하는 바가 있어 망령되게 더하고 덜하는 것은 불가한 것인데 우리 연간에 모두 다 개혁하였으나 종묘에 친히 제향하는 날을 당하여 강신하는 악무 6성을 권도로 감하여 3성으로 사용하매 4궁이 불비하고 변수마저 결여되어 온당치 못합니다.” 제사 제향에 관하여도 그렇지만 거기에 부합하는 소리와 춤 음音과 성聲의 조합 그리고 변하고 화하여 이루어지는 조화를 누가 그렇듯 맞출 수가 있겠는가. 그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이 틀리지 않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렇듯 바로잡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끊임 없이 상언을 하여 옳지 못함을 지적하고 바로 세우고 바로잡고자 하는 사람이 또 누가 있는가. 그것이 무슨 역사적이고 국가 대계의 사업이랄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나라에 있어서든 백성에 대해서든 기본적이고 바탕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며 거기에 생을 걸었던 것이다.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켜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뒤의 일이지만 박연은 전라도 땅 오지 산골 고산高山 유배지流配地에서도 가훈家訓 17조를 써서 남겼던 것이다. 아들은 교형絞刑을 당하고 쓸쓸히 말년을 보내면서 가훈이란 무엇이었던가. "신臣이 이제 다시 전대前代를 상고하여보니…” 당나라 태종 때에 태상시太常寺에 조칙을 내려 ‘천신을 제사하고 지기를 제사하고 종묘를 제향함에 궁의 등급을 올리는 것은 강신할 때마다 사곡四曲, 송신할 때는 일곡一曲을 연주한다’하였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고, 제악고祭樂鼓는 주례周禮의 지관地官 고인조鼓人條에 ‘뇌고雷鼓는 신사神祀에 쳐서 천신을 제사한다’하였고 정사농鄭司農은 팔면고八面鼓라고 하였으나 진양陳暘은 육면六面의 영고靈鼓라고 고쳤다. 사제社祭에 치는 것은 지기를 제사함인데 정씨는 육면이다 하였으나 진씨는 팔면이라고 고쳤다. 노고路鼓는 귀신에게 치는 것으로 인귀人鬼를 제향함인데 정씨와 진씨가 다 같이 사면四面의 진고晉鼓로 금주金奏를 치게 되면 주악이 시작되니 금주는 편종編鐘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씌어 있다고 박연이 말하였다. 여러번 얘기하였지만 철저히 문헌 전적典籍에 의거하여 말하였다. 그것이 무기였다기보다 기본 자세가 그랬다. 그저 본 만큼 아는 만큼 말하는 것이다. 그가 논리를 펴는 방법이었다. 박연은 다시 주관周官 운인조韗人條 진양도설陳暘圖說 등을 인용하여 앞에서 말한 뇌고 영고 노고 외에 진고인 도고鼗鼓를 말하며 천신의 제사 지기의 제사 인귀의 제향에 어떻게 뇌도雷鼗 영도靈鼗 노도路鼗를 만들게 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다고 하였다. 예조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다. 상언한 것을 다 기록하지 않는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98>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5> 박연의 상언은 아주 세세하며 구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리고 연속부절로 이어졌다. "금년 납향臘享부터 모든 제향에 전奠 찬饌 메〔飯〕국 떡 흰떡〔餌〕등을 미리 진설하지 말게 하고 문소전文昭殿의 예에 의거하여 임시에 진설하게 하되 경점更點에 따라 그 시간을 한정하고 장찬掌饌을 세워서 그 임무를 맡게 하고 기장 피 벼 수수 국 떡 등의 제물들을 뜨거운 것으로써 때를 맞추게 하여 향내가 오르게 한 뒤에 제사를 행하기를 청합니다.” 박연의 청원은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정부와 더불어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황희 등이 의논한 결과 박연의 의견과 다른 것은 없고 제사 준비 시간 등을 더 구체적으로 밝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송나라 때 제향하는 의식에 의거하는데 전前 5각刻에 종묘령宗廟令과 전사관典祀官이 그 소속 관원을 거느리고 찬구饌具를 담는 것이 축전丑前 1각이고 행사하는 것은 4경更 1점點인데 그 사이에 시각이 매우 촉박하여 메 국 떡 흰떡을 만약 임시하여 진설하면 시간에 못미쳐서 실례失禮하기에 이를까 두려우며 더군다나 소, 양의 창자, 위, 허파와 돼지고기를 임시하여 익혀서 올리고 또 종묘에는 날 것으로 희생犧牲을 올리므로 원묘原廟와 같지 아니하니 옛 제도에 따라서 3경 3점에 들어가서 찬구를 담게 하되 전 드리는 물건들을 먼저 담게 하고 메 국 떡 흰떡은 맨 나중에 진설하게 하여 전날 저녁에 미리 진설하지 말게 하라는 것이었다.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박연은 정중히 읍하며 상언한 것에 추가로 기록하였다. 조금 의견에 맞지 않는 것이 있더라도 토를 달지 않았다. 소용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박연은 세종 21년(1439) 4월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임용되었다. 다음 해 7월에는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재임再任되었다. 예순 셋이 되었다. 적지 않은 나이었다. 그는 무슨 자리든 천명으로 알고 무슨 일이든 천직으로 여기고 시키는 대로 최선을 다 하였다. 공조참의로 있을 때 일이었다. 공조란 산택山澤 공장工匠 영선營繕 도야陶冶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아인데 예악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의 재질과 적성에 맞는 일이라면 그 기량을 더욱 발휘할 수 있는 것이었지만 무슨 일이든지 주어지는 대로 맡기는 대로 거기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하였다. 그리고 어디서나 맞지 않고 옳지 않은 부분을 고치고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런데 공조 분야 뿐 아니라 모든 관직을 대상으로 한 대단히 실용적인 방안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상 준다는 계획, 납속상직지책納粟賞職之策이었다. 이에 대하여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안순安純이 상서上書하여 부각되었다. "공조참의 박연이 말한 납속상직지책이 시무時務에 합할 것 같습니다.” 의정부는 안순에게 호조戶曹로 하여금 의창義倉을 보충할 방법을 강구하게 하였던 것이다. 의창은 고려 때 곡식을 저장했다가 흉년을 당하거나 비상시에 가난한 백성에게 곡식을 대여하던 기관이다. 곡식을 바치면 관직을 상 준다는 계획은 예를 들면 품계가 없는 자에게는 정9품에서 종3품에 이르기까지 10석마다 한 자급資級)을 올리게 하는 것이다. 정곡正穀 잡곡雜穀을 묻지 말고 10석을 바친 자에게는 종9품이 되고 (중략) 2백석을 바치면 종3품이 되고 그 관직이 있던 자는 본직의 품계에 따라서 역시 10석으로 한 자급을 올려주되 정3품에서 그치게 하고 또 그 중에서 제수除授할 수 없는 주현州縣의 아전으로서 2백석을 바친 자에게는 본 구실에서 영영 제적하여 주고 50석을 바친 자는 자기 몸에 한하여 면역하게 하는 것이다. 이같이 하면 경법經法과 권도權道의 두 가지를 다 얻게 되고 인仁과 의義가 똑같이 병행되어 인심이 순하고 기뻐할 것이요 원통하고 억울한 것이 다 펴져서 의창이 충실할 뿐 아니라 성은聖恩이 소낙비처럼 내리게 되어 이를 행하면 폐단이 없고 크게 도움이 있을 것이다. "이 소소한 보첨補添의 방법은 전부터 있는 것이지만 온 나라의 주현에다가 의창을 두어 넉넉하게 한다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박연의 이 방책은 소신小臣의 뜻에 합하나 그 곡식 바치는 것의 많고 적은 것과 관직으로 상 주는데 높고 낮은 것은 위에서 살피시어 시행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안순의 상서는 바로 의정부에 내리었다. 조선 시대에 나라의 재정난 타개와 구호 사업 등을 위하여 곡물을 나라에 바치게 하고, 그 대가로 벼슬을 주거나 면역免役 또는 면천免賤하여 주던 정책으로 박연은 그 일을 건의하였고 그것은 그의 인의仁義 도경道經을 추구하는 일심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 <97>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4>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종묘 사직에 관한 너무도 간곡한 청원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천신에게 제사하는 제례가 있어서 원단의 의식을 세우고 여려 해 동안 제사를 거행하다가 제후국의 법도에 어긋난다는 까닭으로 그만두고 시행하지 아니한 지 이미 여러 해이다. 오직 이 풍운뇌우의 단만은 왕(성상聖上)이 천신을 공경하여 제사하는 곳이므로 더욱 급급하게 개정하고 시일이 지나기를 기다리지 말 것이다. 왕년에 신이 이런 폐단을 고치기를 청하였으나 정부의 의논이 합치되지 아니하여서 윤가允可를 얻지 못한 지 이미 1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마음이 상하고 분함이 쌓여서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다가 이제 영선하는 것이 조금 뜨음하고 또 연사年事도 풍년이 들었으니 제단을 개정하기에 알맞은 때인 것 같다. 하물며 신의 몸이 제단 일을 맡고 있어 뜻이 조두俎豆 사이에 있으므로 끝내 침묵하고 있으면 두 번째 천총天聰을 모독하는 것이다. 구구 절절 호소하는 요구 청원의 심도가 높아갔다. 깊어졌다고 할까. 뜻이 이루어지지 않아 마음이 상하고 분하기까지 하였다. 물론 뜻을 이루고자 하는 적극적인 마음의 표현이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상언을 끊어 나누어서 평어체로 옮겨 번거로움을 피한다. 앞에서도 그랬다. 조두는 제사 때 음식을 담는 제기의 하나이다. 천총은 무엇인가. 글자대로라면 天聰은 중국의 한 때(1626∼1636) 연호인데, 임금의 사랑 天寵을 뜻하는 것 같기도 하다. 풍사 우사의 단을 세우는 곳은 옛 사람이 왕도王都에서 성수星宿의 방위로 정하였으나 이제 만약 험하고 막히어서 단을 세울 수 없다고 하면 원단을 세웠던 고을이 수목이 우거지고 사람 사는 곳과 떨어졌으며 고을 안이 넓고 깊어 단을 세우기에 마땅한 장소가 한 두 군데가 아니다. 하늘에 제사하던 곳에 그대로 천신의 단을 세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이같이 한다면 세 단壇이 제기 두는 곳으로서 한 창고를 같이 세우게 되며 단지기〔壇直〕와 마지기〔奴子〕들이 합력해서 제사를 받드는 것이 편하고 합당하다고 본다. 그 단소壇所를 바르게 하고 각각 전奠 드리기를 전담하게 한다면 도성都城 한 모퉁이를 점령하고 단을 설치하여 신神이 그 제사를 흠향하게 하는 것에 비할 수가 없다. 예전에 제사 지내던 곳은 그대로 수축하여 산천의 단으로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원하옵건대 성상께서 신충宸衷으로 결단하시고 여러 사람의 의논에 자문諮問하지 마시고 한 시대의 제도를 모두 일신一新하게 하시어 만세 후대에 남겨 주신다면 큰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박연의 상언은 대단히 간곡하기도 했지만 참으로 단호하였다. 소신이 있고 아집도 대단하였다. 신충은 임금의 마음이다. 소신인지 과욕인지, 여러 사람과 의논하지 말고 임금의 뜻대로 하라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의 상언대로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종 임금은 예조로 하여금 정부와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결과는 또 어떻게 되었는가. 나이가 많고 병이 깊다고 하며 병조판서의 직사職事를 면하여 달라고 청원하였던 중추원사中樞院事 이견기李堅基는, 풍운뇌우를 역대 사전祀典에 의하면 각기 방위를 두고 제사하였다고 하니 상언한 것에 의하여 시행하고 단유도 역시 고문古文에 의하여 축조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상언은 물론 박연의 의견이었다. 다른 여러 중신重臣 들도 의견을 말하였다. 집현전 대제학 안숭선安崇善 예문관 대제학 신인손辛引孫도 같은 의견이었다. 홍무예제의 같은 단에서 치제致祭하는 것을 우리나라에서 준행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경솔하게 고치기 어려울 것 같다고 하며 문헌통고文獻通考 지정조격至正條格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등 문헌의 제례를 들어 아뢰었다. "역대로 다 그러하였으니 상언한 것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그리고도 많은 논의를 하였다. 신개申槪 민의생閔義生 정인지鄭麟趾 심도원沈道源 최사강崔士康 그리고 황보인皇甫仁 하연河演 허조許稠 등 각기 의견들을 내놓았다. 특별히 반대하는 것은 아니고 의견들을 보태었다. 다 소개하지는 않는다. 정인지는, 풍운뇌우는 예전대로 홍무예제에 의거하여 산천단에 합제하게 하고 단유壇壝와 위판位版의 법제만은 다시 상고하여 엄정하게 수식修飾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영의정 황희黃喜도 여러 가지 얘기를 하였지만 홍무예제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예조는 의논을 마치고 황희 등의 의견을 따르기로 하였다. 박연의 상언에 격조를 갖춘 것이었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96>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3> 종묘 사직에 관한 간곡한 청원이었다. "그러나 신이 생각하건대, 제단을 개정하는 일은 마땅히 뒤로 미룰 일이 아니고 또 공사는 전우殿宇를 화려하게 건축하는 사치도 없는 것이고 깎고 단청 칠하는 사치도 없으며 단지 돌을 포열布列하여 단을 쌓고 바깥으로 난간과 담장을 마련하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불긴不緊한 것으로 보고 여러 해 동안 지체하는 것은 매우 불가한 일입니다.” 양심이 있는 선비로서 첨지중추원사 일을 맡은 관리로서 부당하고 온당치 못함을 사안의 옳고 그름을 밝혀 건의하는 것이다. 대차고 격하였다. "이제 만일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후세에 전하면 제소祭所가 적의適宜함을 잃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선잠先蠶 산천의 두 단은 잡석으로 지경地境을 이루었으므로 무너지는 것은 겨우 면하였으나 그 나머지 여러 단은 모두가 흙 언덕이 될 뿐입니다. 또 단소壇所에 난간으로 보호하는 것이 없어서 소 양 개 돼지가 마구 드나들어 더럽게 만들며 아울러 좁고 막히고 또 많이 기울어지고 쓰러져서 예를 행하고 음악을 쓰는 데 모두 그 의례대로 못하게 됩니다. 지금 예악이 바야흐로 성盛하고 제도가 닦여 밝은데 사전祀典에는 결함이 이와 같이 있으니 통분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더군다나 일찍이 미신微臣에게 명하여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어찌 세월을 구차하게 끌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여 창성한 시대의 날로 새로워지는 성덕聖德에 누가 되게 하겠습니까.” 너무도 간곡하게 너무도 지당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청원하였다. 어구가 지나치고 심할 정도였다. 통분하기까지 했다. 맡은 직을 걸고 지식과 문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고 그러면서 한껏 스스로를 낮추었다. 거기에 어디 하나 맞지 않고 합당하지 않은 사항이 있는가. 박연은 항상 그런 자세였다. 언제나 그랬다. 하늘이 자신에게 명한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상관에 앞서 왕에게 앞서 높은 곳에서 하늘이 내려준 직이며 사명이라고 철칙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연의 상언은 그대로 따랐다. 그는 계속해서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을 바로잡자는 방안을 아뢰었다. "단유壇壝가 제도에 어긋나니 그 전대로 할 수는 없습니다.” 박연의 상언은 그 강도가 높아졌다. 예순, 천명을 아는 나이가 되어서인가. 두려움도 없어졌다. 논어를 딸딸 외는 그의 체질에는 인자仁者는 불우不憂하고 지자知者는 불혹不惑하고 용자勇者는 불구不懼하고 하는 신조가 배어 있었다. 옳은 일 바른 일을 위하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워하지 않고 물러서지 않는 궁행躬行을 하여온 평생이었다. 그런 그의 몸짓을 알아주고 지켜주는 고불古佛 세종 같은 음우陰佑가 있음으로 가능하였는지 모른다. 그것은 그는 늘 행운, 천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여러 신사神祀가 다 그러한데 풍운뇌우단이 더욱 심합니다. 이 신神은 자연의 조화가 가장 관계가 깊어서 걸핏하면 재앙과 상서祥瑞를 가져옴으로 옛 사람은 그 제사를 중하게 여기어 각각 단유를 세우고 받들었습니다. 예법은 그 성대함을 지극히 하였고 풍악風樂도 역시 합당하게 하였습니다. 천자天子는 궁현宮懸의 연주를 사용하였고 헌가軒架의 악을 거행하였는데 역대 모두 그렇게 하여서 봉숭奉崇하는 것이 지극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역대 제후왕諸侯王의 통행하던 제도를 상고하지 아니하고 단지 홍무예제洪武禮制에 의거하여 정하였는데 신臣이 그 제도를 살펴보니 오등제후五等諸侯를 위하여 마련한 것이 아니고 이것은 홍무 초년에 반포하여 주부군현州府郡縣의 경내에서 행할 수 있는 제사에 실행하게 한 것이며 그것은 정당한 예법이 아닙니다.” 박연은 계속 제단 제례 그리고 예악의 부당함을 하나 하나 지적하였다. 우선 마땅치 않은 것으로 심한 것은 풍 운 뇌 우를 같은 단에서 제사지내는 것이며 산천 성황의 신을 천신과 더불어 모두 남향하게 하니 대단히 설만褻慢하고, 풍사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 우사雨師의 사師를 빼고 풍운뇌우 네자를 한 목패木牌에 써서 신주神主로 삼고 단지 한 위位의 찬수饌需를 진설하여 제사 지내니 네 위의 천신이 같이 한 그릇의 음식을 흠향하는 것이다. 풍사 우사의 사는 신을 의미한다. 우리나라 여러 제사의 단에는 여러 위를 합해서 한 신주로 하고 한 가지로 한 그릇의 제수를 흠향하는 데가 없는데 천신에게만 그 명호名號를 깎고 그 전물奠物을 감쇄減殺하니 이것은 심이 모만侮慢하고 불경不敬하다. 또 악에는 제후국 헌가의 성대함을 사용하면서 제사에는 주현州縣의 간략한 의식을 쓰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만약 깎아내리기 위해서 주현의 의식을 쓰는 것이라면 악에서 제후국의 제도를 쓰는 것은 크게 상반되는 것이다. 악에 헌가를 쓰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한다면 그 제단을 세우고 제사를 받드는 데 주현의 의식에 스스로 비의比擬함은 부당하다. 예와 악이 상반되어 전도顚倒되고 모순됨이 이러하니 우리 성조에 이런 잘못된 일이 있으리라 여겼겠는가. 봄에 빌고 가을에 보시報施하는 제향이 또한 음양이 고르고 순하는 징험이 있겠는가.
-
[연재소설] 흙의 소리 <95>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 <2> 애초에 봉상시奉常寺에서 소장되었던 은찬銀瓚은 종묘에서 임금이 친히 제향하는데에만 쓰던 것인데 도둑에게 잃어버리자 왕은 바로 박연에게 다시 주조鑄造하게 하였다. "우순虞舜은 종묘 제향을 옥가玉가(잔盞의 뜻인 가)로 하고 하후씨夏后氏는 식玉式(옥과 식이 합자된 것임)을 썼다 하니 식은 곧 작爵이며 옥玉으로 만든 것입니다. 주례周禮에 태제太帝가 선왕을 제향할 때에 옥작이라 불렀고 천자는 종묘 제향에 규찬圭瓚을 썼다 했으며 송나라 시대에 와서는 황제가 친히 태묘太廟에 제향하는데 옥가로 술을 올리고 아헌과 종헌은 은가銀가로 썼으며 음복에는 금가金가를 썼고 태묘 제향에는 금과 은을 칠한 잔을 쓰고 유사有事가 행사할 때에는 구리로 만든 잔을 썼으니 무릇 역대의 찬과 작이 모두 옥과 은을 썼습니다.” 어명으로 집현전에서 찬 작의 제도를 상고詳考하여 아뢴 것을 예조에 전하였다. 왕은, 고제古制를 따라서 친향親享할 때의 잔과 작은 모두 은을 쓰고 섭행攝行(대행代行)할 때의 잔과 작은 모두 구리를 쓰며 친향할 때의 아헌과 종헌도 역시 은작을 쓰기를 항식恒式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박연으로 하여금 은작銀爵과 동찬銅瓚을 주조하게 하면서 하교하였다. "이제 작을 은으로 만들었으니 목점木坫을 쓰는 것은 옳지 않소. 점(술잔을 얹어두는 대)도 구리로 만드는 것이 좋겠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종묘와 산릉山陵의 친향과 섭행할 때의 찬 작과 점을 명에 의하여 옛 제도대로 따르게 되었다. 박연은 악기를 제작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지만 악장을 만들고 제기를 만드는 데도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쏟았다. 예악이라고 할까, 예와 악의 모든 분야의 세밀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조예가 깊었다. 집현전의 의견이었지만 그도 다 상고한 바였다. 제향 때 친향 친제 때의 술은 어떤 잔에 어떻게 올리고 섭행 대행 때에는 어떻게 하고 또 초헌 아헌 종헌 때는 어떻게 하고 하는 절차 규식이 다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학식이라고 할까 지식뿐 아니고 그것을 부어 만드는 주조 기술도 생각만 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정교한 기능이 뒷받침 되어야 했다. 부지런히 쉬임없이 책을 읽었고 조금이라고 의문이 나면 그것을 며칠이고 생각하여 풀려고 하였고 책으로 해결이 안 되면 몇백리고 찾아가고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묻고 이야기하여 해결하였다. 기술 기능적인 것도 그랬다. 악기를 만들 때나 술잔을 만들 때나 그는 목수가 되고 토기장이가 되었고 도가니에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만드는 공정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기술을 터득하는 공장工匠이 되어야 했다. 같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탁백이를 같이 마시고 하였다. 그런데 그에게는 눈썰미가 있고 손재주가 있다는 말을 더러 듣기도 했다. 짚신을 모양 있게 삼았고 물수제비를 남들보다 많이 떴다. 피리를 잘 분다고 하였고 글을 잘 왼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것도 같았다. 그러나 노력이 더 많았다. 시골 마을에 짚신을 잘 삼는 친구가 있었다. 나이가 위였다. 아무리 잘 삼아도 그 친구를 따라 갈 수가 없었다. 아무리 잘 삼아도 모양이 나지 않았고 째가 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무슨 말을 해도 그 기술을 알으켜 주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에게 배운 비밀이라고 했다.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고 하였다. 무슨 천기天機라도 되는 듯이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들려주었다고 하였다. 별의별 얘기를 다 하고 아무리 술을 받아줘도 고개를 흔들었다. 박연은 그와 코가 삐뚫어지도록 술을 마시고 자신도 아버지가 세 살 때 돌아가셨다고 하고 홀애자식이라고 하고 무슨 소리를 해도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그의 밑천을 보여주며 자신의 것은 짝짝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그 사람의 손을 끌어다 만지게 해주자, 자기 것도 만져주게 해주며 자기도 짝짝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구 웃어대다가 그 비밀을 알으켜 주는 것이었다. 잔 털을 뽑으라는 것이었다. 바로 그것이었다. 짚신의 잔털을 뜯어내자 째가 났다. 박연이 짚신을 잘 삼는 데는 그런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매사에 그랬다. 편경을 만드는 데 노력을 기울인 것같이 은잔 동잔 하나를 만드는 데도 젖먹던 힘을 다 기울였다. 그리고 박연은 끊임없이 상언을 하였다. "제향은 나라의 큰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제단祭壇이 모두 그 제도가 틀렸으므로 지난번에 신이 청하여 모두 개정하도록 명하셨고 특별히 제단감조색祭壇監造色을 세워 그 건설하는 일을 맡기셨습니다. 그 때에 종묘 사직만을 개정하고 나머지 중사中祀 소사小祀 그리고 10여 단壇은 역사役事도 시작하지 않은 채 이제까지 8, 9년이 되도록 국가의 영선營繕이 호번浩煩하다 하여 거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94>흙의 소리 이 동 희 천명天命 <1 > 공자는 오십에 천명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박연은 쉰을 훨씬 넘도록 천명이 무엇인지 그런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저 주어진 자리 부닥친 일을 하늘이 내려준 기회로 알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정신을 거기 다 쏟았다. 그런 10년이었다. 그 전이나 그 후나 다를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쉰 아홉이 되는 박연은 정초부터 늘 그 자리에서 생각난 것을 먹을 갈아 썼다. "천신天神에게 제사 지내면 폐백을 요대燎臺에서 불사르고 지기地祇에게 제사 지내고 인귀人鬼에게 제향하면 폐백을 예감瘞坎에 묻는데 이것은 신의 돌아가게 하는 예로서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禮에, 사람을 보내어 지켜본다는 글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여러 제사에 내단소內壇所의 제사는 지금 단壇을 쌓지 아니하고 또 구덩이를 설치하지 않아서 임시로 땅을 파서 망예望瘞를 겨우 마치자 마자 곧 훔쳐 취하여 신을 업신여기고 예를 빠뜨리게 되니 편하지 아니합니다.” 세종 18년(1436) 정초 1월 9일, 제사 후의 폐백 처리 등의 상언上言을 하였다.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 자리를 맡고서 올리는 청원이었다. "그러나 단을 만들기 전에는 구제하기가 실로 어려우니 영녕전永寧殿과 종묘 사직 등의 제사는 이미 예감을 설치하고 또한 문단門壇도 있으며 관속官屬이 구비하였지만 예감에는 문단 속의 봉封한 것도 없고 관리에게는 심찰히는 법이 없으니 원컨대 지금부터는 매양 제사 지낼 때를 당하면 기일 전 3일에 종묘와 사직의 관원이 전사관典祀官과 함께 예감을 수리하여 깨끗이 하고 전일에 넣어둔 폐백을 살펴서 노예의 도적질하려는 마음을 막게 할 것이며 폐백이 만일 썩었으면 꺼내어 불사르고 만약 썩지 않았으면 따로 저장하여 신주神廚의 닦는 수건과 시루띠〔甑帶〕의 소용에 제공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박연의 언제나와 같은 자상한 상언에 대하여 예조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그러자 예조에서 아뢰었다. 위 항의 각 곳에는 이미 맡은 관원 간수看守가 있으니 자물쇠를 설치하고 제사를 지낼 때마다 감찰점시監察點視하게 하고 씻고 소제할 때에는 맡은 관원과 함께 예감을 열어보고 만약 도적질해 가져간 사람이 있으면 죄를 과하게 하고 하는 등의 의견을 첨가하였다. 제사에 따른 폐백의 구체적 관례 규칙이 그렇게 만들어졌고 정착되었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하냐 하는 것보다 없어서는 안 될 시행 세칙들이었고 그것을 자발스럽게 아니 너무도 자상하게 빈틈 없이 만든 것이다. 그것이 무슨 업적이 될지는 모르지만 그의 땀흘린 행적이었다. 그는 여러 자리로 옮겨 앉아서 일을 하였다. 무슨 자리나 임명하는 대로 갈 수밖에 없는 일이지만 어떤 자리 무슨 일을 맡게 되든 예와 악에 관련되는 일을 찾아서 하게 되었다. 이번 상언도 그런 것이었다. 그해 12월에는 왕이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제수除授하였다. 제수란 천거에 의하지 않고 직접 임명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며 정3품 당상직이었다. 중추부가 관장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문 무관 가운데 소속이 없는 경우 이에 소속시켜 우대하였다. 박연은 첨지중추원사로서 임무를 맡자마자 다시 상언하였다. "주례周禮를 상고하건대, 천자天子는 규찬圭瓚이니 규圭로 자루를 만들고 제후諸侯는 장찬璋瓚이니 장璋으로 자루를 만들고 모두 조繰가 있다고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조는 자藉이니 장에 까는 것이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잡문雜文이라 하였습니다.” 규는 옥이며 규찬은 옥으로 만든 술잔이고 장은 반쪽 서옥瑞玉이며 장찬은 장으로 만든 술잔이다. 조는 야청으로 검은 빛깔을 띤 부른 빛이며 자는 깔다는 뜻이다. 설명이 더 어려운 것 같은 대로 왕실의 의식, 제물 기명器皿의 재질과 색감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대개 찬은 종묘에서 강신降神하는 그릇인데 옛 사람의 찬의 제도가 아래에는 받치는 쟁반이 있고 자루에는 자조藉繰가 있으니 신臣의 망령된 생각으로는 관계됨이 지극히 중하여 감히 손으로 범할 수 없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언제나 자신의 생각을 낮추고 주장할 것은 다 주장하였다. "도형圖形을 보건대, 조의 모양이 수건과 같은 데가 있고 또 잡문을 그렸는데 지금 중국의 수건은 흔히 잡문이 있는 비단을 쓰기 때문에 그림 수건이라고 일컬으니 찬 자루의 자조로 임시 사용하는 것이 어떠합니까.” 잡문 자조, 설명이 잘 안 된다. 잡문은 글의 종류가 아닌 것 같은데… 박연의 상언은 예조에 내려졌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 <93>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 <5 > 박연은 왕에게 충성을 하였고 왕은 박연은 총애하였다.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하고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왕이 신하를 총애한 것은 행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총애는 유난히 사랑하는 것이다. 왕이 신하를 그 누가 됐든 사랑하는 것은 또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특별히 유난히 사랑하는 것은 드문 일이요 귀한 일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기도 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인 것이고 박연의 경우는 언제나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알아서 행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몰랐겠는가. 몸소 주고 받아 정이 들었고 그 큰 경륜을 협찬하였다고 토로한 난계 선생 유고의 첫 번째 글인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에 씌인 대로, 천 길 샘을 파던 그 의지 삼태미 흙을 쌓아 산을 이뤘다. 세종임금에 대한 정이요 그 결과였다. 일에 대한 열정 그것을 이룩한 성취감 또 그로 인한 책임과 사명감으로 이어지는 업적, 그것이 빛이 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귀중한 것이며 값진 것이다. 사랑이었다. 항상 사랑하고 그리며 몽매夢寐에도 잊을 수 없는 정이 맺어진 것이었다. 연결戀結이었다. 박연의 일과 꿈과 삶은 그런 것이었다. 하나의 피리를 불 듯 거문고를 타듯 글을 써서 올리고 악기를 만들고 악장을 만드는 것들이 다 그랬다. 예악, 예학 음악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많은 공력과 조예와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것인지에 대하여는 또 평가하기에 달렸지만 그저 평범하였고 특출한 것이 없었다.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쉽게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할까 천성을 타고 났는지는 모른다. 스물 여덟에 생원과에 급제하였고 서른 넷에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마흔 둘에 집현전 교리에 배수되어 직무를 시작하였다. 박연은 주어진 자리와 그가 해야 될 일에 대하여 전심 전력을 다 하였고 자신이 맡은 일을 천직으로 알았다. 무슨 일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 생각하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의 자리에 임명되고 세자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 하는 것이었다. 그가 아는 지식이고 예의이고 능력을 다 쏟아 놓는 것이다. 다른 일에도 그랬다.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로 있으면서 젊은 의녀醫女들의 교육을 철저하게 하였고 약재藥材 생산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볼 때도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였다. 그리고 마흔 여덟, 등과 후 2십년이 되어 악학별좌樂學別坐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서부터 박연의 음악에 생을 바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어렵고 막중한 예악의 실천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특별한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음악적 재질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어릴 때 산에 올라 피리를 불면 산새들이 모여서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고 토끼와 너구리가 한 편에서 춤을 추었다. 부모님 묘 앞에서 시묘를 할 때 피리를 불어 산짐승들을 다 불러모은 중에 호랑이도 와서 같이 지내지 않았던가. 지금 그 호랑이는 그의 내외 무덤 앞에 같이 묻혀 있지만. 정말 그에게 그런 기질이 있었는지 모른다. 금수禽獸까지 감화시킨 재질이라고 할까 능력이라고 할까.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실 때 가례家禮와 제례祭禮를 성실하게 행하고 조상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 신종愼終과 추원追遠을 극진히 행하였던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든 그는 자리를 맡자 마자 악서樂書를 찬집纂輯하고 악기와 악보법樂譜法을 만들도록 예조에 수본手本을 올리었다. 참으로 기개가 대단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鄕樂 당악唐樂 아악雅樂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만 악서찬집은 이루어지지 않아 문종 즉위년에 청인행악보소淸印行樂譜疏를 다시 올리고 있다. 용기도 대단하지만 참 끈기도 대단하였다. 좌우간 그렇게 시작된 박연의 집념은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 예악 음악의 집념이었다. 쉰 여덟, 태평악을 짓기까 10년간이었다. 그동안 모든 정수를 다 쏟아 부은 헌신이며 연결이었다.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대한민국, “문화정책 없는가?”
- 2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93)<br>강원도아리랑
- 3제1회 '김법국국악상' 후보 3인, 심사
- 4‘2024 광무대 전통상설공연’
- 5국립남도국악원, 불교 의례의 극치 '영산재', 특별공연
- 6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5)<br>한국 최초 '도깨비 학회', 아·태 도깨비 초대하다
- 7국립민속국악원, '제6회 2024 판놀음 별별창극'
- 8춘향국악대전 판소리 명창부 대상에 이소영씨
- 9서울문화재단, 클래식부터 재즈까지 '서울스테이지 2024' 5월 공연
- 10제3회 대구풍물큰잔치 ,19일 디아크문화관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