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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2>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 <4> 박연은 그 자신이 맡은 일에 대하여 무엇이든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며 혼신의 힘을 다 하였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일이고 스스로 찾아서 하는 일이었다. 누구의 시선을 의식해서 하는 일도 아니요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위하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는 신념이었다. 자신을 위해서였다. 왕(세종)을 위하여 왕을 의식하고 말하자면 왕에게 보이기 위해서 잘 보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 모른다. 자신도 모르게 그런 때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비쳤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 눈에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무의식적으로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정신을 똑 바로 차리고는 그런 적이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게 배웠다. 모든 삶의 근본이고 학문의 근본이었다. 예기 사서삼경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모든 학문은 삶의 바른 길을 가르쳤다. 그가 학문에 통달하고 삶의 이치에 얼마나 밝다고는 말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나 부족함이 있으면 채우려 하고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고 또 그것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것이 선비의 도리이기 이전에 사람이 마땅히 해야될 도리라고 배웠다. 세 살 때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만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외로운 아이가 되어 어머니는 외삼촌에게 그를 의탁하였다. 외삼촌은 많은 서책으로 가르치기도 하였지만 일상의 주고 받는 이야기를 통하여 일거수 일투족의 행동거지를 통하여 가르쳤고 스스로 느끼게 하였다. 사람이란 어때야 하며 왜 사는 것이며 왜 배워야 하고 실천하여야 하는지를 깨닫게 하였다. 외삼촌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선생은 십리 정도 거리의 심천 각계리 마을에 살았다. 지금도 김자수 고가古家가 그 자리에 있다. 거기 각계제覺溪霽 선지당先志堂에서 무자기毋自欺 신독愼獨을 배웠다. 사실은 그 때는 그 뜻을 잘 몰랐다. 가르쳐 주는 대로 달달 외어 대답을 하였을 뿐 진정한 뜻은 그 뒤 외삼촌이 세상을 뜬 뒤에 알게 되었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덕녕부주부德寧府注簿가 되었고 뒤에 전교시판사典校寺判事 좌상시左常侍 충청도관찰사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이르렀으나 정세가 어지러워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이숭인李崇仁 정몽주鄭夢周 이색李穡 등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목은牧隱 이색은 순중純仲이라고 자字를 지어 주기도 했다. 순수의 가운데 순수 그 자체란 뜻인가. 문장이 뛰어나 시문詩文이 동문선東文選에도 실려 있다. 조선 개국 후 태종 때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고려가 망한 것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신하가 되어 나라가 망하면 함께 죽는 것이 의리이다. 나는 평생 동안 충효에 스스로 힘썼는데, 지금 만약 지조를 지키지 못한다면 무슨 얼굴로 지하에서 군부君父를 볼 수 있단 말인가.” 길을 나서 광주廣州 추령秋嶺에 이르렀을 때에 자손들에게 당부하여 일렀다. "나는 지금 죽을 것이다. 오직 스스로 신하의 절개를 다할 뿐이다. 내가 여기에서 죽을 것이니 바로 이곳에 묻고, 묘도문자墓道文字를 짓지 말아라.” 그리고 이어서 절명사絶命詞를 읊었다. "평생 동안 충효에 뜻을 두었건만 오늘날에 누가 알아주랴?” 상촌 선생은 마침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손들은 유명遺命에 따라 추령에다 묘를 쓰고 끝내 비문은 쓰지 않았다. 의리를 굳게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마음 속의 부끄러움을 없이하고자 한 것이다.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신현리 산 120번지, 상촌 김자수 선생의 무덤에 묘도문자를 쓰지 마라고 하였지만 후손들은 그럴 수만은 없었다. 유언으로 묘비는 세우지 않았고 신도비는 땅에 묻었다. 1926년에 후손들이 신도비를 발굴하였으나, 마모가 심하여 새로운 신도비를 제작하여 옛 신도비와 함께 세웠다 외삼촌의 절명은 전날 가르침을 주었던 것을 한꺼번에 깨우치게 하였다. 삶의 구석구석 전신의 통증처럼 아프게 와 닿는 것이었다. 왜 사느냐 산다는 것은 무엇이냐 무엇을 위하여 사는 것이냐 영원히 사는 것이란 무엇이며 죽음이란 무엇이이냐. 그 모든 것을 일시에 되묻게 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자기를 속이지 않는다 홀로 있을 때 자기를 삼간다는 그 때의 가르침이 몸부림쳐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진심盡心, 성의를 다 하고 마음을 다 하여 살아야 함을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인간성을 최대한으로 실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그 동안의 덕목들이 가슴에 와 꽂히는 것이었다. 그것이 맹자의 사단四端의 가르침이라는 것도 알게 하였고. 인간의 본성이 시키는 대로 행하는 것이었다. 외삼촌 상촌 선생의 절명과 박연의 관직 생활의 시작은 같은 시기였지만 진정한 삶의 시작이었다. 최선을 다 하는 삶이었다. 그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었고 어쩌면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위하는 일이 되었는지 모른다. 왕을 위한 일도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왕은 그를 총애하였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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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1>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 <3> 그해(세종 15년) 1월 1일 세종은 근정전에서 왕세자와 여러 신하에게 신년하례를 받은 후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다. 몇 번 얘기한 대로 그 때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왕은 아악을 만든 박연에게 말하였다. "내가 조회 아악을 창제創制하고자 하는데 입법立法과 창제가 예로부터 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서 모두 하고자 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한 때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 졌고 국가가 무사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오.” 이 대목을 상기시키며 회례악을 연주하는 날 세종이 말하는 조회아악이란 무엇일까, 소설은 용비어천가에 답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이 창제하자고 하는 조회아악은 박연이 마음을 다 하여 이룩해야 하는 훈민정음과 그리고 용비어천가를 의미하고 마음을 다하여 이루어야 할 훈민정음은 둘만의 은밀한 약속이었고 당시는 아직 용비어천가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조회아악이라고 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며 애초에 박연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를 비슷한 시기에 구상하였다고 쓰고 있다. 종묘제례악의 발전된 형태가 용비어천가로 볼 수 있고 육룡六龍은 태조 태종과 태조의 4대조이며 앞에 얘기한 박연의 1번 소疏의, 오음五音 정성正聲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는 것과 세종 9년 6월 23일에 박연이, 사대부는 사조四祖까지 제사 지내기를 청하였는데, 이와 맥락이 같다. 박연은 이 때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제작을 제안하였다고 소설은 쓰고 있다. 그러면서 두 프로젝트가 서로 맞물려서 진행되었고 뒤에 전개되는 과정에서 박연은 훈민정음을 백성의 교육에 필요한 것으로서 생각했고 세종은 훈민정음을 조선왕조의 안정에 기여할 용비어천가 재작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결론을 내렸다. 박연은 훈민정음을 창제創製하였고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創制하였다. 훈민정음은 박연의 제안과 개발 그리고 세종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創製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고 創制는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제정制定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목적 원리를 말하고, 왜 세종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하였나, 세종의 언문청 박연의 정음청에 대하여 말한 다음 훈민정음 창제자는 박연이라고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또 하나의 얘기, 신미대사信眉大師 창제설에 대하여는 가능성이 없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신미란 이름이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도 훈민정음 창제 3년이 지난 세종 28년이고 신미는 불경의 훈민정음 번역에 관여하면서 훈민정음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박연과 신미의 관계를 밝혀 박연의 조부 박시용朴時庸은 신미의 고조부 김영이金令貽의 사위이며 김영이의 후손 신미는 박연 때문에 훈민정음의 존재를 잘 알았을 터이고 우리 글로 불경을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부대중에게 불경의 내용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유추하기도 하였다. 소설 『박연과 훈민정음』은 그러나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말하지 않고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 서문序文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이 능히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히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세종임금의 서문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 다음에 본문이 있고 그 뒤에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 발문跋文이 아니고 서문이라고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자는 진정 누구인가, 그러나 정인지는 천기를 누설할 수 없었다. 소설은 정인지의 서문 중 ‘그 글의 오묘한 뜻에 대하여는 신들이 언급할 일이 아니다’(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라고 해석한 글도 제시하하여 논리를 세웠다. 글쎄. 논리는 정연하였다. 비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어디 꼬투리를 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왜 일까. 공감이 가지는 않는 것은. 스스로 그 논리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닌데.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박연의 악장의 창작 여부를 추적하려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근본을 흔드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소설론에 의탁하여 결론를 맡기고자 한다. 소설은 사실을 넘어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은 말없이 존재하며 영원한 것이다. 무지개 빛깔이라기 보다 하늘빛이다. 아니 빛도 없이 의미만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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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0>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戀結 <2> 그 소설은 얘기를 바로 하지 않고 이리 저리 둘러 대고 있다. 왜 그러는지 이유는 알 것 같다. 소설을 쓴다 소설을 쓰고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대개 거짓말을 하고 있다 허위 날조다 허구다 라고 할 때 그런다. 소설은 그런 것이 아니다. 허구라는 말은 픽션fiction이란 뜻이다. 픽션이란 말은 소설이란 말로도 쓴다. 그러나 허구란 말을 소설이란 말로 쓰지는 않는다. 소설은 그냥 허구가 아니라 허구의 진실이라고 말한다. 가능의 세계를 그리는 것이다. 소설은 사실이 아니지만 진실을 쓰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실이 아닐 수는 있지만 진실을 말하려는 것이다. 허구도 아니고 허위나 날조도 아니다. 물론 거짓말도 아니고. 사실과 진실의 차이이다. 이리 저리 둘러대고 있는 가운데 그것은 박연이 지었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고 있다. 창작자 창제자가 박연이라는 것을 그렇게 우회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인가 과연 그런 것일까 되물어진다.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기록은 사실이고 진실은 하늘이나 알고 있는 것이다. 좌우간 이 정도의 소설론小說論 가설假說로 기대하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자 한 것이다. 연역법演繹法이다. 왜 이렇게 연설을 하고 있느냐 하면 참으로 하기 어려운 얘기이기 때문이다. 하늘 같은 존재에 대한 거론이 아닌가. 어려운 얘기는 어렵게 푸는 것이 방법인지도 모른다. 다시 좌우간 박연의 연보의 기록을 이리 저리 연결하고 규정해 보는 것이다. 결론이라기보다 가정이다. 여기에 다시 과정을 되풀어 놓지는 않는다. 여러 개의 가설은 하나의 정설이 될 수 있다. 여기서는 두 가설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하나의 논문과 하나의 소설. 그런데 박연의 여러 번 수없이 올린 소 가운데 제일 처음 올린 청반행가례소학삼강행실훈민오음소請頒行家禮小學三綱行實訓民五音疏, 널리 가례와 소학 그리고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의 바른 소리로 풍속을 바로잡자는 상소의 끝에 이하 누락(此下缺)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과연 박연이 의도적으로 그 다음 부분을 버린 것인지, 무슨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인지, 자의적인 것인지 도무지 궁금하기만 하다. 관리로 하여금 세상을 현혹시키는 불교와 교화를 해치는 풍습들을 금하게 하여야하고 관혼상제에 있어서 주자가례朱子家禮를 행하여 국가의 예의를 바로 잡게 하고 소학을 널리 강의하여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를 가르쳐 선비들의 습속을 바로잡도록 하고 백성들에게 삼강행실을 가르쳐 미풍양속을 이루게 할 것이며 그렇게 아뢰었다. 그리고 오음의 바른 소리를 가르쳐 민풍을 바로잡도록 해야 된다고 아뢰었다. 성조聖朝에서 새 왕조를 열고 예악을 일으켜 바르게 다스리려 하나 개혁의 초기라 세속의 풍습들이 이전과 다를 바 없어 개탄하며 올린 상소上疏이다. 예악의 시대를 여는 대단히 획기적이고 개혁적인 행동이었다. 그런데 왜 뒷부분을 누락시켰는지 그보다 그 누락된 내용에 정말 훈민정음 창제와 관련된 부분이 있는지 그래서 그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앞에서 박연의 연보와 관련한 얘기를 하였는데 거기(연보)에는 또 이것(1번 소)에 대하여는 한 마디도 적혀 있지 않다. 다른 것은 다 있는데 왜 이 첫 번째로 상소한 사항은 기록하지 않은 것인가. 어쩌면 대단히 중요할 수도 있는, 소를 올리기 시작한 사항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의아스러웠다. 또 한 가지 연보에 상소한 기록이 세종 7년(1419)부터로 되어 있는데 그 1번 소를 시간적 순서 대로 올린 것이라고 할 때 훈민정음 창제(1443) 반포(1446) 시기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지적된다. 앞의 가설의 가능성이 희박한 것은 아닌가. 글쎄. 말이 되는지 모르겠는데 어떻든 이런 일련의 얘기들은 몇 번 말한 대로 박연의 업적이라고 할까, 글을 써서 상소하고 악기제작을 하고 하는 외의 음악적 족적足跡을 더듬어 밝히고자 하는 것이었다. 문소전 악장을 짓고 태평악을 짓고… 그러다 용비어천가의 작사 작곡 훈민정음 창제까지 얘기가 된 것인데 이 소설(『박연과 훈민정음』)은 세종25년(1443) 박연은 훈민정음을 개발 완성하였다고 쓰고 있다. 너무도 충격적이고 믿어지지 않는 사건이지만 자료와 논리가 뒷받침되고 있어 계속 이야기를 따라가 보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소설론 가설을 기억하기 바라며 이야기의 책임 글의 책임을 같이 공유共有하게 되기를 주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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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9>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戀結 <1> 연戀은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며 어떤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하고 즐기는 것이다. ᄉᆞ랑ᄒᆞ하다는 생각하다의 옛말이다. 박연은 예악을 즐기고 음악을 소중히 여기며 주야로 추구하였다. 왕을 어릴 때 세자 때는 귀중히 여기고 왕이 되어서는 받들어 모시며 어려워하였다. 다래는 아끼고 애틋하게 생각하였다. 무엇이나 맡은 일을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고 즐기며 끔직히 생각하였다. 한 시도 반 시도 해찰을 하지 않았다. 사랑이었다. 소중한 생각으로 맺어진 생生이었다. 어느 악장을 누가 지었느냐, 박연이 지었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 일환이다. 박희민의 소설 『박연과 용비어천가』(2016, 도서출판 그루)의 ‘용비어천가의 작사 작곡’을 보면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2일 기사를 인용하면서, 문무 두 춤곡의 제작과 환환곡 미미곡 유황곡 유천곡 등 속악의 이름은 박연이 지었다.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은 세종이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용비어천가의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을 세종이 지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쓰고 있다. 세종실록 기사는, 성악聲樂의 이치는 시대 정치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지금 관습도감慣習都監의 향악鄕樂 50여 노래는 모두 신라 백제 고구려 때의 이어俚語로써 당시의 정치적 잘못을 상상해 볼 수 있어서 권장할 것과 경계할 것이 되는데 본조本朝가 개국한 이래로 예악이 크게 시행되어 조정과 종묘에 아악과 송頌의 음악이 이미 갖추어 졌으나 민족 노래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이 없으니 고대의 노래 채집하는 법(采詩之法)에 의거하여 각도의 고을에 명하여 노래로 된 악장이나 속어임을 막론하고 오륜五倫의 정치에 합당하여 권면할 것과 간혹 짝없는 사내나 한 많은 여자의 노래로서 정치에 벗어난 것까지라도 모두 샅샅이 찾아 내어서 매년 세말에 채택하여 올려보내자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대로 따랐다고 예조에서 아뢴 내용이었다. 그리고 박연이 아악과 향악 50수를 정리하였다는 기록을 「용재총화慵齋叢話」(성현成俔)에서 찾아 관습도감 제조提調가 되어 음악을 관장한 사실로 입증해 보이었다. 소설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세종은 세종27년(1447) 9월 용비어천가에서 사용할 음악의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때 세종은, 내가 병이 있어 깊어 궁중에 있으므로 음악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세종이 제작하였다는 것은 신화 같은 이야기다. 세종 29년 6월 향약과 당악唐樂을 관현악에 올려 용비어천가를 연주하였다. 소설은 그리고, 앞에 소개한 단종실록 기사를 이어서 붙이고 있다. 볼만한 것은 다 박연의 힘이었다고 한 말을 인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 설명을 붙이지 않으려 한다. 공감이 갔다고 할까. 그러나 다음 대목에서는 한 동안 눈을 의심하고 전후 관계를 다시 보았다. 박희민의 ‘훈민정음 창제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글이다. 그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박연과 훈민정음』을 출간한 뒤에 『역주 난계유고』를 지은 다산연구소 김세종 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세종 박사도 ‘박연이 「율려신서」의 음악이론을 기초하여 훈민정음을 개발하였다’는 논문을 몇 년 전에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계유고」의 소疏 1번은 차하결次下缺이란 표시로 상소문 일부를 박연이 의도적으로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남은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훈민정음 창제의 단서가 남아 있다. 이젠 ‘개발’이 아니고 ‘창제’였다. 소설은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서가 훈민오음정성訓民五音正聲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장하였다. 박연은 오음정성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바른 삶을 살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의 처음 이름은 훈민오음정성이었다. 오음은 훈민정음 자음 17자요 정성은 훈민정음 모음 11자다. 필자는 앞에서 훈민오음정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그것과 훈민정음에 대하여는뒤에 다시 이야기하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에 대한 고구考究는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훈민오음정성이 담긴 제일 첫번째 소에 대하여 말한 것인데, 박연은 의도적으로 1번 소를 버렸다고 하니 그 사실도 더 알아보아야 하겠다. 박희민은 『박연과 훈민정음』(2012, Human & Book)도 냈다. 거기의 주장을 여기(『박연과 용비어천가』)에서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쓰고 있다. 니체의 학설은 박연에게도 적용된다. ‘죽어서도 자기의 작품이 칭송을 받고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건 예술가들의 꿈이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가 세상의 몫이듯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세상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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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8>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6> 또 문文은 보태평이라 하고 무武는 정대업定大業이라 하였다.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에서 연주하는 악무로 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줄여서 정대업이라 부른다. 모두 11곡과 이에 해당하는 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역시 세종에 의하여 원래 회례악으로 창제된 것이고 직접 간접으로 공을 끼친 역대 왕들과 선조들의 무덕武德을 찬양안 내용이다. 창제 당시에 15곡이던 정대업은 세조 때 개작되면서 보태평과 같이 11곡으로 되었다. 소무昭武(인입장) 독경篤慶 선위宣威 탁령濯靈 신정神定 영관永觀(인출장) 등. 이 중에서 소무와 영관 두 악장을 보자. 황천皇天이 이 나라를 돌보시사 우리의 성군을 낳게 하시니 / 거룩할사 우리의 성군님네 크게 일어나 천명을 받으셨도다 / 여러 세대 명철한 덕이 내리내리 이으셔서 높으신 무덕으로 큰 공을 정하시고 / 큰 터전을 마련하사 우리 나라 보전하니 / 거룩하신 막대한 업적 길이 드리워 끝이 없으리 / 이에 노래하며 춤을 올리니 간척干戚이 번득이고 찬란하외다 장하실사 여러 성군 이 나라를 다스릴새 / 왕가를 안정함에 대대로 무공일새 / 무공이 왕성하고 덕화가 높은지고 / 우리의 춤에 차례가 있어 적이나마 형용해 보이도다 / 간척을 거두오니 / 나아가고 그침이 법도가 있어 씩씩하고 평화롭다 / 큰 성과를 길이 보오리 皇天眷東方 篤生我列聖…… 한자 한문으로 된 것을 조선왕조실록 번역으로 보았다. 앞에 들은 것들도 같다. 11곡 15곡을 다 보지는 않으려 한다. 보태평도 부분적으로 보았다. 그가 곡명을 명명한 환환곡 유황곡 등도 보았다. 태평춘지곡太平春之曲이 또 있다. 여민락與民樂의 다른 이름이다. 여민락은 원래 봉래의鳳來儀라는 대곡大曲 가운데 한 곡으로 여민락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등은 용비어천가를 노랫말로 썼다. 박연이 태평악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그 지은 바의 흔적을 찾고자 여러 조선 음악 자료들을 섭렵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 자취도 보지 못하였다. 태평악에 앞서 박연은 문소전 악장도 지었다고 하였지만 그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악성 난계 박연』1집 연보는 무엇을 근거로 작성하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있지도 않는 행적을 올려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책임한 서책은 아닌 것으로 알고 인용해 왔다. 『난계 선생 유고』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몇 번 얘기한 문소전 악장을 새로 짓고 태평악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좌우간 그래서 여러 기록과 저서를 끌어대어,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설을 세워본다. 세종이 손수 지었다는 보태평 정대업의 곡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은 아니고 조선 초기의 향악 고취악을 바탕으로 창제한 것이라고 한 창제의 논리를 발전시켜 보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은 아니고’ ‘……을 바탕으로 창제한 것’ 속에 박연을 넣어 보는 것이다. 세종 임금은 회례 때의 문무文舞 무무武舞 두 가지 춤에 연주할 악장에 대하여 박연의 말을 인용하여,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제작하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서 만세에 통용할 제도로 하는 것이 마땅한데 무를 문보다 먼저 하는 것이 온당한지 역대의 제도 중에도 문부다 무를 먼저 하는 것이 있는지 세대를 계승하는 임금은 다 그를 위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그들의 공덕이 다 찬가를 부를 만한 것이겠는지 박연과 같이 의논하라고 명하였고, 문과 무 두 가지 춤의 가사 1장으로는 태종 태조의 공덕을 다 찬송하기에 미진함이 있으니 다시 1장을 더함이 어떻겠느냐고, 임금이 박연에게 묻고 박연이 옳다고 대답하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박연은 다시, 1장 가운데에 태조 태종의 공덕을 겸하여 기림은 미흡하니 각각 공덕을 따로 1장씩 찬송하여 모두 2장의 가사를 만들어 각각 8박자로 하고 춤을 출 때에 제1변變은 태조를 기리고 제2변은 태종을 기리어 서로 차례대로 송덕頌德하고 제6변에 이르러 태종에서 끝마치되 악이 끝나면 물러가게 하라고, 악장 구성을 말하였고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 박연이 지었다는 얘기는 없다. 어디에도 없다. 찾을 수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제한 것… 속에서 박연의 흔적을 더듬어 볼 뿐이다. 하나의 부회를 더 추가하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0월 1일 기사를 옮겨본다. 박연은 사람됨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우며 사치스러움이 없었다. 음률에 정통하여 세종의 인정을 받고 종률鍾律을 만들었다. 일대의 음악이 찬연하여 볼만한 것은 모두 박연의 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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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7>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5> 보태평保太平이 있다. 종묘 제례의 영신迎神과 전폐奠幣 초헌례初獻禮의 악무樂舞인데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를 줄여서 그렇게 부른다. 모두 11곡과 그에 해당하는 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음악과 악장은 세종대왕에 의하여 회례악會禮樂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건국에 공을 끼친 역대 왕들과 선조들의 문덕文德을 찬양한 내용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創作은 아니고 조선 초기의 향악鄕樂을 바탕으로 하여 창제創制한 것이다. 창제는 새로 만들거나 제정하는 것으로 훈민정음訓民正音 서문의 新制二十八字 (새로 스물여듧 자를 맹가노니)라고 한 맹글다 만들다의 제制이며 처음 만들었다는 뜻에서 創制이다. 보태평은 뒤에 세조 때에 개작되어 종묘제례악으로 채택되었고 최항崔恒에게 명하여 손질하게 하여 악장 가사歌詞가 축소되고 곡명이 바뀌기도 하였다. 영조 때 왕명에 의하여 편찬된 서명응徐命膺의 대악후보大樂後譜에는 곡이 합쳐지고 인조 때에 첨입添入된 후 별다른 변화 없이 후대까지 전해 내려왔다. 이 몇 줄 요약 설명을 위해, 세종실록 문종실록 세조실록 악학궤범 대악후보 속악원보俗樂源譜 시용무보時用舞譜 등과 장사훈張師勛의 『세종조 음악연구』 『종묘제례악의 음악적 고찰』을 참고하였음을 밝힌다. 그러면 보태평 11곡을 보자. 대저 하느님은 명命하심이 쉽지 아니하매 덕이 있으면 흥하나니 / 높으신 우리 여러 성군님네께서 크게 아름다운 명을 받으시어 / 신령하신 계획과 거룩하신 공업이 크게 나타나고 크게 이으시도다 / 운수에 응하여 태평을 이루시고 지극한 사랑으로 만백성을 기르시며 / 우리의 뒷세대를 열어주고 도우시매 / 억만 대 영원까지 이어가고 이어가리 / 이렇듯 장한 일을 무엇으로 나타낼꼬 / 마땅히 노래하여 찬송을 올리오리 첫 곡 희문凞文이다. 인입장引入章이다. 여러 성군들의 문덕文德을 노래하고 있다. 다음은 제1변變 계우啓宇이다. 목조穆祖의 칭송이다. 하늘의 위에 계시사 백성의 소리부터 들은 지라 / 백성의 돌아오는 데에 큰 명을 정하여 주셨네 / 크시도다 거룩하신 목조께서 높으신 그 덕으로써 / 동으로 바다를 건너시어 경흥慶興에 자리를 정하셨도다 / 인심이 모두 사모하여 돌아와 붙은 자 날로 왕성하며 / 크게 문호를 개방하여 영구한 운명을 터 잡았도다. 다음은 제2변 의인依仁인데 익조翼祖의 업을 노래하고 있다. 하느님 밝으시사 백성 살 데 구하여서 / 덕원德源의 깊은 곳에 밝은 덕화德華 내리시니 / 백성들이 따른 지라 어진 이를 잃을 손가 / 꾸역꾸역 몰려드니 저자거리 같았도다 / 저자거리 같았으니 하늘의 준 바로다 / 크신 업을 열었으니 우리 나라 만만세 제3변 형광亨光은 익조 도조度祖가 고려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어 임금이 총애하고 가상히 여기는 사연이다. 크시도다 거룩하신 익조께서 거룩한 덕을 밝히시와 / 공손하고 경건하게 그 임금을 섬기셨고 / 거룩하신 도조께서 그 뜻을 이어 맡아 / 처음부터 나중까지 변함이 없으시매 / 고려왕이 총애하여 돌보고 의지하기 더욱 긴밀하였으니 / 충성으로 아름답고 공적으로 빛나도다 다음은 제5변 융화隆化이다. 태조의 위엄과 사랑 평안을 노래하고 있다. 크시도다 거룩하신 태조께서 그 덕을 밝히시와 / 사랑으로 안유하고 의리로 복종시켜 덕화가 남과 북에 퍼지니 / 먼 섬의 되족속과 산 속의 오랑캐들이 면목을 깨끗이 고쳐 모두 모두 잇따른다 / 산 넘고 물을 건너 보물을 바치면서 사방에서 모여 오니 / 빛나는 생명들이 가까운데 평안하고 먼 데까지 조용하였다 제9변은 대동大同이다. 조종祖宗들이 대대로 문덕과 예악으로 문화가 빛나리라고 노래한다. 크시도다 우리 조종들께서 천명을 받으심이 이미 넓고 크시도다 / 대대로 문덕을 펴시어서 이로써 사방을 안유하셨네 / 자리를 기울이어 어진 이들을 구하여서 / 문덕을 숭상하고 유술儒術을 중히 여기매 / 미려함을 정하여 좋은 교육을 시행하니 / 정치와 교화가 흡족하게 펴이도다 / 예의와 음악이 극진히 제작되매 / 빛난 문화가 융창하게 열리니 / 자손만대 위한 일 장할사 길이 빛나오리 그리고 11번 째 곡 역성繹成은 인출장引出章이다. 4 6 7 8변의 악장은 생락하였다. 하늘이 여러 성군을 나게 하시니 이 나라를 사랑하고 안유하셨네 / 여러 대의 덕화로 애써서 구한 것이 어루만진 공을 잇따라 하심이니 / 공이 이룩되고 정치가 안정되매 신령한 교화가 널리 두루 퍼지도다 / 예의와 음악이 밝게 갖추이매 문덕이 이에 찬란하게 빛나도다 / 왼 편에는 피리이고 오른 편엔 꿩 깃이라 / 노래 곡조가 아홉 번 변하오매 태평하고 화락하옴 아름답고 선善하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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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6>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4> 세종실록 56권에 있는 기록이다. 세종 14년 5월 임금의 영令이었다. "이제 회례 때의 문무文舞 무무武舞 두 가지 춤에 연주할 악장은, 마땅히 현금現今의 일을 가영歌詠하여야 한다고, 박연이 말하였으나 내가 생각해 보니 대체로 가사歌辭라는 것은 성공을 상징하여 성대한 덕을 송찬頌讚하는 것이오.” 임금은 좌우 신하들에게, 주무왕周武王이 천하를 평정하였고 성왕成王 때에 이르러 주공周公이 대무大武를 지었고 역대 다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말하였다. "나는 다만 왕위를 이었을 뿐인데 무슨 가송歌頌할만한 공이 있겠오. 태조께서는 전조前朝의 쇠잔한 말기를 당하여 백번 싸웠으나 백번 이겨 공덕이 사람들에게 흡족하였으며 어지러운 것을 제거하여 세상을 바른 데로 돌리고 왕업을 창건하여 왕통王統을 후손에게 전하였오. 태종께서는 예악을 새로 제작하셔서 교화가 퍼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으며 안과 밖이 또 편안하도록 하셨오.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제작하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서 만세에 통용할 제도로 하는 것이 마땅하나, 무를 문보다 먼저 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오. 역대의 제도 중에도 문부다 무를 먼저 하는 것이 있는지. 만약 현금의 세상 일로 노래를 지어야 한다면 세대를 계승하는 임금은 다 그를 위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그들의 공덕이 다 찬가를 부를 만한 것이겠는지. 그것을 박연 정양鄭穰 등과 같이 의논하여 물어보도록 하시오.” 임금의 말에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 등이 아뢰었다.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만들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만들 것이며 겸하여 현금의 일도 노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좌부대언左副代言 권맹손權孟孫도 아뢰었다. "마땅히 임금의 말씀과 같이 태조 태종을 위하여 나누어 문무 두 가지 춤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시대의 일은 뒷세상에서 반드시 가영歌詠할 것입니다.” 세종실록 58권의 세종 14년 10월의 기록이다. "문과 무 두 가지 춤의 가사 1장으로는 그 가운데에 태종 태조의 공덕을 다 찬송하기에 미진함이 있으니 다시 1장을 더함이 어떨까.” 임금이 상호군上護軍 박연에게 이르자 박연이 아뢰었다.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옳습니다.” "마련磨鍊하시오.” "1장 가운데에 태조 태종의 공덕을 공덕을 겸하여 기림은 미흡하오니 원컨대 각각 공덕을 따로 1장씩 찬송하여 모두 2장의 기사를 만들어 각각 8박자로 하고 춤을 출 때에 제1변變은 태조를 기리고 제2변은 태종을 기리어 서로 차례대로 송덕頌德하고 제6변에 이르러 태종에서 끝마치되 악이 끝나면 물러가게 하옵소서.” 박연은 악장의 구성을 다시 아뢰었다. 세종실록은,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두 기록과 박연의 연보를 연결해 보았다. 나라에서 대업을 이루니 태평악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나라의 대업이란 새 나라가 들어서고 새로운 통치가 자리를 잡음으로써 혼란한 시대가 가고 안정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그 때 시기를 말한 것이리라. 세종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때라고 한다면 그 꽃이 피는 화려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 15년 전후 박연의 50대 중반 그의 생의 절정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의례 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편찬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농업 과학 예술 의학 기술의 발전,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민족 국가의 기틀이 확고해졌고 날로 융성하였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의 안정 기반 위에 소신 있는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정치는 예악 정책으로 대변되는 도덕과 문화의 정치였다. 박연에게는 향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짓고 편경과 편종 등의 악기를 제작하게 하는 등 음악 중흥에 이바지하게 하여 예악의 시대를 꽃피게 하였다. 세종시대의 후반을 열매의 시대라고 한다면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한 이 때는 국가 대계 나라의 대업을 이룬 시기이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런 것 같다. 그러면 태평악은 어떤 것인가. 기록들을 다 뒤졌지만 태평악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 임금이 마련하라고 하였던 그 악장은 어디 있는 것인지. 태평지악太平之樂은 영조英祖 때 연례악宴禮樂의 한 곡명이다. 태평악지곡太平樂之曲은 순조純祖 때 연례악의 또 한 곡명이고. 태평년지악太平年之樂은 세종 13 14 15년 실록에도 나오고 다른 곳에서도 보이는데 박연이 지은 것이 물론 아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2009년 공연한 국립국악원 제작 「태평지악-세종, 하늘의 소리를 듣다」까지 뒤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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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5>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3> 박연은 계속하여 상언하였다. "제향이나 조회 때의 주악奏樂에 사용하는 기구와 예복과 의식용儀式用 물품은 국가의 경비가 적지 않은 것인데, 맡아 지키는 관리가 보관 수호하기를 즐겨하지 않으면 오래 가지 않아서 파손되고 헐어질 것이 염려됩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주무관아로 하여금 불시에 검찰하게 하여 그의 공과 허물을 기록하였다가 포폄褒貶에 증빙으로 삼게 하소서. 이러한 조항에 대하여서는 상언한 바에 따라 조曹의 전향사典享司의 낭청郎廳으로 하여금 불시에 가서 살피게 하소서.” 이에 대하여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앞에서 문소전 악장을 새로 지었다고 하였는데 『악성 난계 박연』1집 연보에 세종 15년 12월 21일 ‘경오일庚午日에 문소전 악장을 새로 지었다’고 적고 있고 ‘세종실록 62권 세종 15년 21일 경오’ 박연이 건의한 악호 곡명의 정립과 제향 조회 때의 예법… 기사 내용과 시간이 일치하고 있어 그렇게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환환곡 유황곡 등 악장의 곡명만 얘기하였고 악장 내용은 없었다. 같은 62권 세종 15년 12월 7일, 예조에서 회례에 사용할 문무文武의 악장을 올린 기사가 있어 여기 그 악장을 옮겨 본다. 태조와 태종을 칭송한 악장이다. 아아, 빛나는태조太祖시여 / 착한 덕을 몸에 지니시고 천명에 순응하고 인심에 순종하여 / 드디어 큰 동쪽 나라 가지셨네 / 무력의 위세威勢 이미 거두시고 / 문치文治를 높이셨네 / 어짊은 깊으시고 은택恩澤은 후하시어 / 넉넉함을 무궁하게 드리우시네 태조를 칭송한 문무文舞 악장이다. 다음은 무무武舞의 악장. 굳센 성조聖祖시여 / 하늘이 주는 왕업을 받으셨네 / 이미 납씨納氏를 달아나게 하고 / 또한 운봉雲峯에서 승리하셨네 / 위화도威化島에서 의로운 기치旗幟 돌아오시니 / 저 흉잔凶殘한 무리를 숙청하였네 / 무공武功을 세워 왕업을 정하시니 / 동쪽 나라 백성이 안정하였네 그리고 태종을 칭송한 문무무文武舞 악장을 보자. 아아, 밝으신 태종이시여 / 왕의 차례 이어받아 공 더욱 높이셨네 / 덕화는 공경하기 때문에 밝아지고 / 정치는 어질기 때문에 높이 뛰어났네 / 천명을 두려워하며중국황제 섬기기에 /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정성이었네 / 억만년에 걸쳐 길이 풍부하고 형통함을 누리시겠네 아아, 빛나도다 태종이시여 / 크게 부왕父王의 무열武烈함을 계승하였네 / 어지러움 다스리어 사직을 정하시니 / 모든 백성의 마음 서로들 기뻐하였네 / 야인은 징계하고 / 섬오랑캐는 명령을 받들기에 분주하였네 / 사방에 근심 없으니 / 공업功業이 오직 성대하도다 이 악장 들을 박연이 지은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 전하는 환환곡 유황곡 악장 가사도 옮겨본다. 느름하신 태조께서 / 천명을 받으심이 광대하도다 / 공이 옛날에 빛나고 / 부는 아름다운 상서祥瑞에 응하였도다 / 하늘과 사람이 협찬하여 / 문득 동방을 두셨다 / 계책計策을 남기시어 후손에 복을 주시니 / 우리에게 은혜 주심이 한이 없도다 황천이 동방을 돌보사 / 성왕聖王을 내셨도다 / 덕德과 인仁을 쌓아 / 후인後人을 도와주시어 / 지금에 이르러서도 천명이 새롭도다 / 엄숙한 신궁神宮이 청정淸淨하여 / 신주神主를 모시니 / 신이 편안하시도다 / 조종祖宗의 신이 이에 오르내리시사 / 상제上帝의 좌우에 높이 계시니 / 신神은 내격來格 생각할 수 있게 하여 주시니 / 열광烈光이 있도다 / 변두籩豆가 진열됐고 / 제물이 향기로우니 / 신령은 강림하사 흠향하시어 / 내 제사를 돌아 보실진저 / 복을 두루 내리시되 / 이에 만이며 이에 억으로 하시니라 / 자자손손에 이르도록 끝없이 보전하시리 그리고 미미곡 유천곡 악장도 보자. 강면强勉하신 태종 진실로 하늘이 내셨도다 / 태조를 도우사, 대업을 이루셨도다 / 무공을 선양하시고, 크게 문명을 밝혔으니 / 신공神功과 성덕聖德이 길이 태평성세를 여셨도다 오직 천심天心이 덕 있는 사람을 돌보아서 / 창성昌盛할 기회를 열어주시고 / 도다히 성철聖哲을 내시어 / 임금과 스승으로 삼으시니 / 이미 제왕의 복조福祚를 받아 비기丕基를 높이었네 다시 말하지만, 박연이 문소전 악장을 지었다고 하여 옮겨보았다. 그가 악호를 명명한 네 악장과 함께. 원문은 한자로 되어 있고 세종실록 악학궤범의 국역에 따른 것이다. 세종 17년에는 다시 나라에서 대업大業을 이루니 태평악太平樂을 지었다고 연보에 적혀 있다. 58세가 되는 해이다. 나라의 대업은 무엇이고 태평악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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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84>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2> 파직은 되었으나 하던 일은 멈추지는 않았다. 며칠 실의에 빠져 헤매다가 생각을 고쳐 더욱 힘을 내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생각하면 한 번도 그는 무엇을 잘 못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실수를 해 본 적이 없었는지 모른다.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그렇게 자만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늙어갈 뻔하였다. 다시 또 한번 진심으로 임금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일이 이렇게 된 운명 같은 횡액에 대하여 감사를 하였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은, 아무 불행이 없다는 것은 발전이 없는 것이었다. 언행에 조심하고 길을 걷는 것도 조심하고 글을 쓸 때도 한 자 한 자 더 힘을 주고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잠을 덜 자고 생각을 더 하고 하찮은 일에도 신중을 기하였다. 그날 이후 새 각오를 갖고 책상 앞에 앉아 새롭게 일을 하였다. 악학樂學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제향 때 사용되는 영고靈鼓 뇌고雷鼓 노고路鼓에 관한 글을 다듬었다. 그리고 악장樂章을 짓는 일에 몰두하였다. 문소전文昭殿 악장이었다. 문소전은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조성한 인소전仁昭殿을 태조가 승하하고 태조의 혼전魂殿으로 사용하면서 바뀐 이름이다. 문소전은 태조와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함께 봉안하면서 진전眞殿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본래 창덕궁 북쪽에 위치하였으나 세종 14년 광효전廣孝殿과 합하여 경복궁 북쪽에 조성되었다. 태조와 신의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다가 원묘제原廟祭에 따라 태조와 그 위로 4대의 신위를 모셨다. 세종 15년 12월 21일 세종실록 62권 기록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상호군 박연이 상언한 조항을 상정소와 더불어 의논하였다고 되어 있다. 문소전 악장 얘기였다. "음악에는 반드시 칭호가 있고 곡에는 반드시 이름이 있어서 다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서 훌륭한 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 문소전의 제례에 새로 악장을 제작하여 그 절주節奏는 초헌 때에는 당악唐樂 중강령中腔令을 쓰고 아헌에는 향악鄕樂 풍입송조風入松調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박연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아뢰었다. "그러나 악호樂號와 곡명曲名이 정립定立되지 않아서 옛 제도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원컨대 아름다운 칭호를 명명命名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 하나 악호 곡명을 제시하였다. "태조의 제향 초헌의 악곡명은 환환곡桓桓曲 아헌의 악곡을 유황곡惟皇曲이라고 하고 태종의 초헌의 악곡명을 미미곡亹亹曲, 아헌은 유천곡惟天曲이라고 하소서.” 그 사건이라고 할까 파직 선고를 받은 것이 세종 15년 6월 9일이니 여섯달 뒤의 일이었다. 좌우간 그렇게 상언한 다음 문소전 악장과 관련하여 또 자상하게 너무도 청간스럽게 설명을 하였다. 건의 제안이었다. 제향의 예절에 있어서 재숙齋淑은 중요한 행사이다. 요사이 악공들의 재계齋戒하는 법을 보니 제사하기 2일 봉상시奉常寺에 합숙하고 제사하기 1일 앞서 모두 제소祭所에 나아간다. 이미 재계라고 한다면 마땅히 출입을 금하고 그 정성이 전일專一하게 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아침 저녁의 식사 때문에 그 재숙하는 곳을 버리고 마음대로 출입하게 되어 사사로운 곳으로 내왕하면서 더러움에 감염하는 일을 범함이 많으니 지극히 온당하지 못하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음식의 제공이 없기 때문이다. 또 제삿날에 향관享官과 집사執事들은 다 임시臨時하여 관세盥洗함으로써 청결하게 하지만 당상 당하의 노래하고 춤추는 가공歌工들은 그 수가 매우 많고 관세소를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명의 공인工人들은 밤중에 일어난 채 전연 세수하지 않아서 더럽고 무례하여 불경함이 더할 수 없다. 지금부터 공인들의 재계하는 날에는 반드시 음식을 제공하고 출입을 금지시켜 재숙을 엄중하게 하며 또 단壇이나 묘廟의 밖에 세수 도구를 마련하여 여러 공인들로 하여금 모두 세수하게 하여야 하고, 원묘原廟 제향 때의 영인伶人들도 세수하는 설비가 있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 하나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었다. "공인들에 대한 음식 제공은 전례에 따라 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관장하고 세수 시설의 준비는 제소마다 나무통 각 1개 목기木器 각 50개씩 만들어 보관하게 하고 전수자典守者로 하여금 물을 길어다가 공급하게 하소서.” 이와 같은 박연의 상언에 대하여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악호 곡명의 정립과 제향 때의 예법 등의 건의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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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3>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1> 박연은 정초鄭招 김진金鎭 등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올렸다. 세종15년(1433) 6월 9일, 세종실록 60권 기사이다. 정초는 대제학으로 과학 사업에 중요한 소임을 맡아 정인지와 함께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연구, 「칠성내편七星內篇」을 편찬하고 간의대簡儀臺를 제작 설치하는 일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 전 후가 되지만 「농사직설農事直說」「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편찬하기도 했다. 혼천의는 서전書傳 「순전舜典」의 선기옥형도璇璣玉衡圖를 본 떠 만든 천체관측기구로서 북극고도(관측자의 위도)와 더불어 동지와 하지, 춘분 추분에 태양의 북극으로부터 떨어진 각角 거리에 대한 정보와 28수宿 24방 12지支 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간의는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처음 만든 천문의기天文儀器로 천문관측을 하기 위한 적도의赤道儀 형태의 기기器機이다. 혼천의에서 적도환赤道環과 백각환百刻環 사유형四游衡만을 따로 떼어서 만든 것으로 행성과 별의 위치인 적경赤經과 적위赤緯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고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혼천의가 실제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기구로 사용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실내에 두어 천문시계로서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었고 천체의 위치 관측에는 간의가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는 세종 14년(1432)부터 자주적인 역법을 편찬하고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나무 재질로 간의를 시험 제작하여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측정한 후, 역법을 연구하고 천체를 관측하였다. 그리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국립 천문대인 간의대와 천문의기, 그리고 계시의기들을 만들게 하여 간의대 위에 청동으로 제작한 간의를 올리고 사용하였다. 혼천설渾天說에 의하면 하늘은 북극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전하고, 해와 달이 하늘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인다. 하루에 한 바퀴씩 하늘이 돌기 때문에 해가 땅 위로 올라와 있는 시간이 낮이고 해가 땅 아래로 내려가고 달이 뜨는 시간이 밤이다. 하늘은 365.25도이고 반은 땅 위를 덮고, 반은 땅 아래에 있어 28수 가운데 절반만이 항상 보인다. 땅 아래에는 물이 고여 있어 땅이 우주 한가운데에 떠 있도록 해 주고, 땅 위에는 기氣가 가득 차 있어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다. 이 덕분에 하늘은 안정성을 가질 수 있다. 혼천설은 후한後漢 시대의 인물인 장형張衡이 지은 책 「혼천의」에 처음 소개된 이후 서양의 우주관이 동양에 수입될 때까지 동양의 표준 우주관으로 여겨졌다. 다만 초기에는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우주의 구조와 우주의 생성 원리를 하나로 연결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송나라 이후 등장한 성리학자들이 혼천설을 수정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론을 만들었다. 우주는 본디 기의 회전에 불과하였으나 회전이 빨라지며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들이 한가운데로 모여 땅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혼천설이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해와 달과 하늘이 다 같이 동에서 서로 움직인다고 주장하여 기존의 설을 근본적으로 뒤엎지 않았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수입해 왔으며, 조선시대부터 세종대왕이 정인지 등과 함께 설계하고, 장영실蔣英實이 우리나라의 하늘에 맞는 혼천의를 만들었다. 설명이 길었다. 혼천의 간의에 대한 자료들을 끌어 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박연이 혼천의를 올린 것에 대한 의미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간의대를 제작 설치하는 일을 관장하던 정초가 혼천의를 만들어 올리는 것은 그 자리로 보아 의당 할 일을 한 것이었지만, 악기를 제작하고 연주하고 행사의 각본을 짜고 미세한 음율 고저장단을 가리고 예리한 색감 소리의 작은 차이를 중히 여기고,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런 기량을 발휘하고 추구하던 박연이 어떻게 우주 천체의 원리를 제어하는 일에 가담하였는지, 계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거기서 무슨 역할을 어떻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위의 단 한 줄로는 알 수가 없지만 혼천의에 대한 문헌상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다. 세종실록에는 그 두달 후 대제학 정초 제학 정인지 등이 혼천의를 올리매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강문講問하였다고 하였고 그 다음해 세종 16년 장영실이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제작하여 올렸으며 5년 뒤흠경각欽敬閣을 짓게 하고, 이곳에 혼천의를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어떻든 박연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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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2>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5> 며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은 대로 서성거리며 하던 일은 놓지 않았다. 책을 보고 글을 쓰고 생각하고 그러기만 하였다. 묻는 말에만 대답을 하고 대답도 네 아니오 그리고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기만 하였다. 다래를 만난 것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의 괴로움이라고 할까 횡액이 그렇게 이동해 갔던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발길이 그쪽으로 닿았던 것이다. 그만큼 그녀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봐야 지난번 불러내어 행군을 하며 얘기하다 돌려보낸 후 처음으로 만난 것이지만 정말 마음이 아팠다. 도대체 그러다 어떻게 될려는지 걱정이었다. 딸이 당하는 불행이 그보다 더 할 수가 있을까. 아내가 당하는 고통이 그보다 더 할 수가 없었다. 그날 그녀를 뿌리치고 오긴 했지만 줄곧 마음이 거기서 떠나지 않았다. 다시 불러내어 얘기를 더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꾹 참았고 그녀에게도 오히려 그렇게 마음이 걸리고 괴롭게 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고쳐서 생각을 하였다. 몇 줄 그의 마음을 적어 보내고자 썼다 지웠다 하였지만 다시 구겨버렸다. 그냥 참았다. 스스로 당하는 고통에 그녀에게 닥쳐올 고통이 겹치며 몸부림을 쳤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박연은 스스로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이 아니었다. 그가 크게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하여 두 가지로 고쳐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대로 악학에 출사하도록 하라.” 임금은 그에게 제기된 문제를 가르고 명하였다. 대신들 누구 하나 다른 의견을 내지 않았다.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요망스러운 말이 어떻고 사람들을 현혹하게 한 것이 어떻고 죄니 벌이니 하는 말들은 하나의 수사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런 것이었다. 핵심은 변함 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연은 벼슬을 파직하고…에만 정신이 꽂혀 실의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랬었다. 도대체 벼슬은 무엇이고 직이란 무엇인가. 문과 초임으로 생원과에 급제하고 다시 6년 피 말리는 각고 끝에 진사과에 급제, 관직 생활을 하기 시작한 후 몇 년이 되었던가. 스물 여덟 살 때부터이던가. 그 때까지는 또 숨이 넘어가도록 과거 시험 공부를 하였었다. 그 합격 급제의 기쁨도 잠시였고 한 발 한 발 한 단계 한 단계 숨도 크게 못 쉬며 앞만 보고 달려 승승장구乘勝長驅 오늘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빠르게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아주 승진이 느리고 말직에만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균적이라고 할까 일반적으로 봤을 때 빠른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말도 들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어떻든 자신의 자리 그것을 벼슬이라고 하지만, 벼슬 직職이라고 하지 않는가, 관직의 토속어인 벼슬은 전통적으로 우리 생활에 깊은 영향을 끼쳐 왔다. 벼슬을 차지하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했던 것도 사실이다. 좌우간 그 자리에 대하여는 불만이 없었고 또 직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그것이 솔직한 것이 아니란다면 그런 내색은 전혀 한 적이 없었다. 조금도 그런 내색을 한 적도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것을 신조로 삼고 있었다. 묵묵히 자신의 일만 하였다. 그것도 스스로 찾아서 하였다. 또 직이란 직무이기도 하다. 일이다. 일을 하기 위한 자리이다. 벼슬이란 결국 직책이며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파직을 당하는 것이 괴로웠던 것이다. 말이 안 되었다. 그게 말이 되는가. 왕은 그에게 벼슬은 떼고 일은 하라고 한 것이다. 그는 참으로 자신이 부끄러웠다. 세종 임금은 그 자신을 구해준 것이다. 권도의 제소가 얼마나 합당한 것이었던지 부당하고 사감이 개재 되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그 여부가 어떻든 세종은 박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를 아끼고 사랑하여 그랬는지 그것이 대단히 정당하고 아니고도 중요하지 않다. 일을 하게 해 준 것이다. 그것을 며칠이 지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엎드려 사죄하였다.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고 눈물을 철철 흘리었다. "더 잘 하겠습니다.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이런 깨달음의 기회를 준 주군 세종 임금께 눈물을 흘리며 감사를 드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벼슬을 파직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고통이라면 그리고 불편이라면 오히려 그것에 대하여 감읍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고통과 불편이 은혜를 알게 하였고 그것이 현실을 직시하게 한 것이다. 그 횡액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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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81>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4> 그날 이후 말 수를 줄이고 자신이 할 일만 하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 다른 사람과 어울리지도 않았다. 상언할 글을 정리하고 전적을 뒤지며 집무실 귀퉁이에서 앉지도 않고 서성거렸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 살아온 궤적을 되돌아보기도 하였다. 자리를 탐하고 이권을 추구하고 불만을 표하고 한 적이 없었다. 한 번도 그러지를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탓하고 원망하고 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지 모른다. 늘 현안으로 되어 있는 문건을 읽고 쓰고 퇴고하고 다시 쓰고 다시 읽고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앞에서도 얘기하였지만 시를 쓰거나 어떤 작품을 쓰고 논문을 쓴 것이 아니고 제도의 개혁이나 새로운 시책 방법 들을 건의하고 상언하고 한 것이었다. 몇 편의 시문詩文 외에는. 주로 예악에 관한 것이고 악률 악기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악기 제작에 관한 것이고 직접 악기 제작을 한 것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술을 한 잔 하는 것인데 그럴 때도 하던 일을 생각하고 풀리지 않는 꼬투리를 풀고 있었다. 다래와 같이 잔을 나누며 소리를 듣고 또 같이 소리를 하고 대금을 불고 할 때도 그랬다. 문득 생각나는 요체가 있으면 그것을 매듭을 짓고 갑자기 떠오르는 기발한 생각 번득이는 찰라의 상想이 스치면 그것에 대하여 골돌히 생각을 하거나 쪽지에 적고 또 손에도 적고 어떨 때는 소매 끝에다 표시를 해 두기도 하여 너덜거렸다. 지필묵紙筆墨을 내오랄 때도 있었다. "해해 참 선생님도. 술집에 무슨 그런 것이 있습니까요?” "그러면 치부책은 뭘로 적나?” "칼로 그어 놓지요.” "그럼 칼이라도 가지고 와 봐.” "괜히 그러다 사람 잡지 마시고 저한테 말씀하세요. 제가 기억했다 말씀드릴께요. 제 머리는 인정하시지요? 그런데 여자를 앞에 놓고 뭐 하시는 기라요? 제가 그냥 치마 저고리로만 보이셔요?” "허허 그랬던가?” 술을 마시면서도 여자 앞에서도 일 생각만 하고 있었다. 좌우간 다래는 그런 일이 있은 후 늘 먹을 갈아 놓고 있었다. 집안 일 돌아가는 것도 몰랐다. 밥만 먹고 잠만 자는 곳이 집이었다. 밥상 머리에서 그렇게 해라, 그러면 안 된다 하는 것으로 자녀 교육을 하였고 그보다 앞서 스스로 솔선하고, 으음 기침을 하는 것으로 가장의 역할을 하였다. 위로 딸이 둘이고 맏아들(孟愚) 둘째 아들(仲愚) 셋째 딸 셋째 아들(季愚) 넷째 딸 7남매가 작은 집에서 복대기를 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아버지 말을 거역하지 않았다. 첫딸은 알성급제를 하고 나주목사羅州牧使가 되는 사위를 보았지만 남편은 하늘이다, 시집을 가면 그 집 귀신이 되는 것이다, 두 마디밖에 한 것이 없다. 아들들에게는 늘 욕심을 부리지 말고 분수를 지키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본을 보인다고 생각하고 늘 삼가고 면려勉勵하였다. 옷과 신을 기워서 착용하고 그런 것에 오히려 자부심을 가졌다. 지켜지지 않는 것이 술이었지만 자제하려고 노력하였다. 늘 과음을 하고 주사를 늘어놓는 계우를 가르치기 위하여 한번은 양껏 먹게 하고 술 시합을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가 이겼다. 그 때부터 주도酒道가 통하였다. "대개 술이 화가 됨은 심히 크다. 어찌 곡식을 없애고 재물을 허비할 뿐이랴. 안으로는 심지心志를 어지렵히고 밖으로는 위의威儀를 잃어서 혹은 부모의 봉양을 폐하고 혹은 남녀의 분별을 문란하게 하며 크게는 나라를 잃고 집을 망치고 작게는 성품을 해치고 생명을 잃어버리어 강상綱常을 더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다. 이것은 내 얘기가 아니고 세종 임금의 계주교서戒酒敎書를 들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유언처럼 말하였다. "불초不肖란 말이 있다. 부모의 덕망에 미치지 못하는 아들을 이르는 말이다. 그런 말을 듣지 않도록 하여라.” 삼남 아이들은 모두 숙연하였다. "물론 꽁생원 아버지보다야 더 나아야지요.” 계우가 말하였지만 형들은 고개를 흔들었다. 뒷날 맹우는 임강현령臨江縣令(정5품) 중우는 벽동군수碧潼郡守(정4품) 그리고 계우는 집현전集賢殿 한림翰林(정9품)을 거쳐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교형絞刑, 증贈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종1품)이 되었는데 글쎄 아버지 박연은 아들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었다. 일밖에는 몰랐다. 나라를 위한 일이었고 시대를 위한 일이었던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은 아니었다. 악성樂聖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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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80>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3> 전에 불러내어 알아듣게 얘기한 후 돌아갔는데 다래는 그 뒤 소식이 없었다. 소문에는 아직도 그러고 있었다. 소문도 보통 소문인가, 장안이 떠덜썩하였고 왕실이 시끄러웠다. 한량들이 목을 메는 데다가 세종의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 여섯 째 아들 금성대군錦城大君, 배가 다르긴 하였지만 나이가 한 살 많은 형 화의군和義君, 세 왕자가 서로 차지하려고 사랑 싸움을 하고 제일 나이가 어린 평원대군이 먼저 다래를 들여앉힘으로 치정 싸움은 더욱 치열하였다. 형제간에 말하자면 제수와 형수를 서로 빼앗고 빼돌리고. 춤을 잘 추는 다래는 허리가 가는 초나라 미녀라는 뜻으로 초요갱楚腰䡖이라 불리었다. 평원대군이 붙여준 이름이었다. 초楚나라 왕이 허리가 가는 사람을 좋아해서 궁정에는 가는 허리를 만들려고 굶어죽는 사람도 있었다는 고사古事를 들먹이며. 좌우간 왕자들은 죽기살기로 쟁탈전을 벌이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옥고를 치르고 또 하나는 유배를 가는 말로를 치닫는다. 초요갱은 한량들에게는 하늘의 별과 같은 존재였다. 다래는 평범한 집에서 태어나 어느 양반댁의 첩으로 들어갔다가 그 집안이 역모逆謀와 연관되면서 술집 기생이 되었다. 빼어난 미모에다 날렵한 몸매의 춤으로 뭇 사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느날 박연 앞에서 술을 따르며 노래를 부른 것이 그녀의 운명을 바꾸었다. 천운이었던지 비운의 시작이었던지. "좋은 재주를 너무 천하게 쓰는 구나!” 다래는 자신의 노래와 춤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처음 보았다. 누구나 열이면 열 백이면 백, 찬사를 보내거나 감탄을 하였다. 침을 흘리거나 넋을 놓았고 그것을 또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허줄구레한 서생 박연은 고개를 저으며 한탄스럽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래는 박연에게 술을 곱게 따르면서 정중히 묻는다. "제 소리가 마음에 안 드십니까요?” 너무도 깎듯하고 겸손하여 박연이 다시 보았다. 일어나다 앉았다. "소리도 잘 하고 춤도 잘 추는데 좀 아쉬운 데가 있네. 그게 문제가 아니고…” "또 뭔가요?” "노래면 노래고 춤이면 춤인 게지.” "왜 너스레를 떠느냐 이거지요.” 박연은 무릎을 탁 쳤다. "아네!” 다래는 박연 앞에 무릎을 꿇고 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기는 그저 들은 대로 본 대로 하는 것 뿐이라고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알으켜 달라고 하였다. 그런 다래가 너무도 마음에 들었다. 너무 예뻤다. 박연은 노래를 다시 해보라고 하였다. 춤도 다시 한 번 춰 보라고 하였다. 다래는 시키는 대로 하였다. "훨씬 좋아졌네.” 갈 때마다 달라졌다. 갈 때마다 하나씩 둘씩 지적을 하여주고 칭찬을 해 주고 하였다. 거문고도 배우게 하고 새 곡목이라고 할까 레퍼토리를 늘리게 하였다. 다래는 하나를 얘기하면 둘을 알아들었다. 재예才藝가 뛰어나고 머리가 영민하였다. 열성이 또 대단하였다. 그래 봐서인가 일취월장 발전하였다. 노래다 춤이다 거문고다 하는 것도 그랬지만 박연에게 너무나 극진하였다. 다래도 그랬지만 박연도 그랬다. 그녀의 노래 춤도 좋았고 사람됨이 마음에 들고 사랑스러웠다. 밤을 새워 술을 마시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그러나 절도를 지키었다. 번번히 흐트러지는 것을 박연이 잡아주었다. "선생님은 너무 선생님 같애요.” "그러면 됐네.” 그녀를 관기官妓가 되도록 하고서부터 박연은 정말 하늘 같은 스승이 되었다. 다래는 일약 일류 기생이 되었다. 조선초에 유명한 4대 기생이 있었다. 옥부향玉膚香 자동선紫洞仙 양대陽臺 초요갱, 그 중에도 초유갱은 세종이 만든 궁중무용을 익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극한 스승 박연이 만들어 준 것이었다. 그리고 평원대군 이임의 총애를 받아 나라에서 새로 제정된 악무樂舞를 배우고 세종 임금의 눈에도 들게 되었다. 박연은 여악을 폐하라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지만 다래의 행운은 무수한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박연은 비틀거리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속 걸었다. 얼마를 더 걷다가 혼자말처럼 다시 말하였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살 도리를 해야지. 몸이 무너지면 무슨 소용이 있나.” 어둠 속을 계속 걸었다. 모처럼 어쩌면 처음으로 자신의 한 일에 질책을 받고 스스로 위안을 하고자 찾아간 곳이 다래였고 그녀에게 질책 아닌 당부를 하고 가는 것이다. 다시 한 번 경고를 한 것이었다. 죽음의 질주를 하고 있는 다래의 사랑의 행각에 그의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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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9>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2> 박연이라는 것이었다. "상호군(上護軍) 박연이 신한테 말하기를, 승문원承文院의 터를 살펴본 것은 필시 호걸이 날 것을 막으려고 그런 것이리라, 하기에 신이 그 말을 듣고 상소한 것입니다.” 박연이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권도의 말을 듣고 즉각 박연을 불러서 물었다. 박연이 어리둥절하며 엎드려 대답하였다. "한漢나라 역사에 동방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東方有天子氣)라고 한 말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승문원 터를 살펴본 것을 신의 망령으로 호걸이 날 것을 의심하여 살펴본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에 권도에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그대로 솔직히 아뢰었다. 승문원은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아로 태종때 설치가 되었다. 모두들 표정들이 굳어 있었고 임금은 대단히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하는 것이었다. "그대도 또한 서생으로서 어찌 사리의 근본을 알지 못하고 망령되게 간사한 생각을 내었단 말인가.” 청천벽력이었다. 한 번도 그런 일이 없었다. 한 번도 임금을 실망시킨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좌우간 스스로 자초한 일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잘 못 된 일인지 몰랐던 것 뿐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의외의 일이었다. 너무나 황공하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의정 좌의정 여러 대신들이 도열해 박연을 바라보며 임금의 다음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박연은 무엇보다도 맹사성 대감 앞에서 왕궁에서 질책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황공하고 면구스러웠다. 다른 대신들에게나 임금에게도 그랬지만 고불대감 앞에서 정말 몸둘 바를 몰랐다.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요망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게 한 죄로 벌하는 것이 마땅하나 그러나…” 세종 임금은 주저 없이 말하였다. 추상 같았다. 늙은 서생이 경중을 모르고서 망발한 것이고 또 아악雅樂을 전문으로 맡아서 공이 없지 아니하므로 다만 벼슬만을 파직하고 그대로 악학樂學에 출사出仕하도록 하라. 임금의 말에 모두들 눈을 감았다. 다만 고불만은 박연의 거동을 연민 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좀 더 잘 하라, 더욱 신중히 하라고 충고하며 안도의 숨을 쉬는 것 같았다. 정말 너무나 죄스러웠다. 임금에게는 더 말할 것이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어떻게 운신을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못 다 한 일 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비 오듯하였다. 앞이 보이지 않아 누굴 볼 수도 없었다. "혼신을 다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굽신거리며 물러나와 궐 밖으로 나오는 대로 무작정 걸었다. 넋이 나간 것인가 바람이 든 것인가, 한 없이 헤매다 당도한 곳은 다래가 있던 술집이었다. 거기 다래는 없었다. 술을 스스로 따라 몇 잔 마시고 다래에 대해서 물었다. 만나기가 힘들거라고 하였다. 왕자들에게 몸이 쌓여 있다고 했다. 아리따운 기녀가 다래 대신 술을 따른다. "술은 내가 따를 터이니 노래나 불러봐요.” 노래를 있는 대로 부르고 춤도 있는 대로 춘다. 용모가 뛰어나고 노래도 잘 불렀다. 박연은 노래를 잘 부르고 춤도 잘 춘다고 칭찬을 하였다. 그리고 거문고를 뜯을까 묻는 것을 사양하고 계속 독작을 하였다. 해가 졌는지 날이 새었는지도 몰랐다. 계속 자작으로 술을 마시고 떡이 되어 있는데 다래가 왔다. "그래 왔어, 잘 있다며?” "선생님! 아닙니다.” 다래는 꿇어앉아 있었다. "그럼 뭐여?” "선생님!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됩니다. 갈수록 수렁으로 빠집니다.” 그녀가 꿇어앉은 채 술을 따라 두 손으로 바친다. 그것을 바라만 보고 있자 다래는 계속 그러고 있는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계속 노력해 보겠습니다.” 박연은 몸을 가누고 앉으며 술을 받아 마신다. 그리고 반배를 하며 말한다.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봐. 난 자네를 믿어.” 그리고 박연은 일어나 정신을 차리며 비틀거리었다. 박연은 그 말을 하러 온 것처럼 아무리 말려도 뿌리치며 비틀비틀 걸어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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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8>흙의 소리 이 동 희 되돌아 보다 <1> 왜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가. 세종 임금은 영의정 황희 좌의정 맹사성 우의정으로 물러난 권진權軫을 불러 강녕전康寧殿 경회루慶會樓 경복궁景福宮 수리 등에 관하여 의논하다가 일어난 일이었다. "강녕전은 나만이 가질 것이 아니고 만대에 전할 침전寢殿인데 낮고 좁고 또 어두워 늙어서 이 침전에 거처하면 잔 글씨를 보기 어려워 정무를 처결할 수가 없을 것이니, 내가 고쳐 지어서 후세에 전해 주고자 하는데 어떻겠소.” "좋습니다.” 임금의 뜻에 모두들 좋다고 아뢰었다. "경회루는 영건營建한 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처마를 받친 도리가 벌써 눌리어 부러졌으니 처마 받침을 수리하고자 하는데…” 대신들은 그러면 당연히 수리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일일이 의견을 듣고자 하였던 것이다. 전사政事에 관한 것 뿐 아니라 집을 수리하고 짓는 일 등 모든 것을 그렇게 하였다. 그것이 세종 임금의 자세였다. 예로부터 제왕은 다 역상曆象을 중하게 여기어서 요堯임금은 희羲씨 화和씨에게 명하여 백공百工을 다스리었고 순舜임금은 선기옥형璿璣玉衡에 의거하여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다. 그 사실을 말하고 임금은 또 의견을 물었다. "내가 간의簡儀 만드는 것을 명하여 경회루 북쪽 담 안에 대臺를 쌓고 설치하게 하였는데 사복시司僕寺 문 안에 집을 짓고 서운관書雲觀에서 번들어 숙직을 하면서 기상을 관측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소.” 역상은 해 달 별 천체가 나타내는 여러 가지 현상이다. 선기옥형은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데 쓰던 기구이고 서운관은 조선시대 천문 역일曆日 측후測候 등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대신들은 그냥 좋습니다 옳습니다고만 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학구적이고 진취적인 임금의 의지 앞에 고개가 수그러졌다. 허리까지 굽혀졌다. "너댓간 집을 짓는 것이 좋겠습니다.” 황희 등은 그렇게 말하였다. 계속 그렇게 찬의贊意만 표한 것은 아니었다. 장의동藏義洞에 있는 태종太宗 잠저潛邸의 옛터가 이제 더부룩한 풀밭이 되어서 차마 볼 수 없으니 다시 궁전을 지어서 부왕父王의 진영眞影을 모시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임금이 물었을 때 모두 안 된다고 아뢰었다. 잠저는 태종의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인 것 같다. "원묘原廟를 세워서 만대에 이르도록 법전法典을 정하였으니 따로 궁전을 지을 수는 없습니다. 다만 소나무나 심도록 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임금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계속 말하였다. 묻는 것이었다. "경복궁에 4대문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태조 때에 북문을 두고 목책을 설치한 것을 뒤에 막아버리고 성을 쌓았는데, 내가 다시 북문을 낼까 하는데…” "좋습니다.” "근자에 글을 올리어 지리地理를 배척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우리 조종께서 지리로써 수도를 여기다 정하였으니 그 자손으로서 쓰지 않을 수 없소. 정인지鄭麟趾는 유학자儒學者인데 역시 지리를 쓰지 않는 것은 매우 근거 없는 일이라고 말하였고, 나도 생각하기를 지리의 말을 쓰지 않으려면 몰라도 만일 부득이하여 쓰게 된다면 마땅히 지리의 학설을 따라야 할 것인데, 지리하는 자의 말에, 지금 경복궁 명당에 물이 없다고 하니 내가 궁성의 동서쪽과 내사복시內司僕寺의 북쪽 등 몇 곳에 못을 파고 도랑을 내어서 영제교永濟橋의 흐르는 물을 끌고자 하는데…” "좋습니다.” 위에서 물어본 것들 외에도 여러 가지를 묻고 의견을 들었는데 다 좋다고 하였다. 다만 이런 공사들을 한 목에 시행하는 것이 불가하니 그 선후 완급을 참작하여 순차로 처리해야 할 것이라고 아뢰기도 하였다. 그러자 임금은 황희 신상 등이 지리 아는 사람을 데리고 못을 팔 곳과 소나무 심을 곳을 가 보게 하라고 하였다. 위에서도 말한 지리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말하는 것이었다. "권도權蹈가 상서上書하여 말하기를 ‘혹시 호걸이 난다면 나라의 이익이 아니다’ 하고 이 말을 ‘남에게서 들었다’ 하였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도(권도)에게 묻는 것이 어떻겠소.” 임금이 또 그렇게 의논해 묻자 모두가 그렇게 하시라고 아뢰었다. "도가 자기 생각을 가지고 말씀 올린 것이라면 비록 옳지 않더라도 묻지 않는 것이 가하지만 근거 없는 말을 남에게서 전해 듣고서 글을 올렸을 것 같으면 그 말했다는 사람을 묻는 것이 가합니다.” 그래서 권도를 불렀고 권도가 말하였다. 그 사람은 누구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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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7>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7> 여기에 다 옮기지 않는다. 이러한 의절들이 지금은 물론 사용되지 않고 있다. 다 지나간 시대의 제도이고 절차일 뿐이다. 그것도 지금 시대에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일 수도 있다. 특히 임금을 하늘처럼 하느님처럼 받들던 제도와 사례들이 이제 무엇인가, 구시대적인 하나의 유물일 뿐인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이고 역사적인 사실이고 기록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것인데 그것은 또 무엇인가, 어떻든 박연은 거기에 모든 생을 바쳤다. 그가 할 수 있는 능력과 마음을 다 쏟아부었다.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그의 천성을 다 한 것이다. 임금을 위한 것이고 나라를 위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를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순 것은 아니었다. 쌍청의 정각길 굽어보니(雙淸小閣俯長程) 명리에 달리는 사람도 많구나(朝暮閒看走利名) 개인 달빛은 언제나 가득하고(霽月滿庭非假借) 맑은 바람은 저절로 불어오네(光風拂檻豈招迎) 찬 술잔에 금 물결 일고(冷侵酒斝金波灩) 시원한 경내에 구슬 잎사귀 날리네(涼掃雲衢玉葉輕) 이 경치 이 마음 한결같거니(此景此心同意味) 다시야 어느 곳에 집착할 소냐(更於何處役吾形) 그 무렵일까. 「제쌍청당題雙淸堂」에서 그의 심경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쌍청당은 송유宋愉의 당호이다. 박연보다 늦게 나서 일찍 세상을 떠난 선비이고 그의 정사精舍 쌍청당에서 쓴 시이다. 천성이 강직하고 효성이 지극하며 독서를 좋아하여 열두 살 미관未冠의 나이로 부사정副司正이 되었다. 태조왕후太祖王后가 태조太祖廟에 말부末附, 합사合祀되지 않음을 통탄하여 글을 써서 올린 뒤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그 후배이자 동료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되돌아본 것이다. 난계유고의 두 번째 실린 시이다. 첫 번째 시는 앞에서 소개했지만 그 뒤에 쓴 「제송설당題松雪堂」인데 자신의 당호인 송설당에서이다. 공중에 소리 없이 오른 님 하늘나라 무사히 갔는가, 세종 임금의 승하昇遐를 보고 죽음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읊은 것이었다. 고향 회덕懷德으로 돌아와 학문에 정진하며 조그만 정사를 짓고 박연에게 청하여 ‘雙淸堂’이라 편액扁額하였는데 거기서 쌍청처사雙淸處士로 불리며 필연筆硏과 금기琴碁로 여생을 보냈다. 박연이 한 올곧은 선비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러면서 쌍청당 송유가 난계 박연에게 편액을 청한 마음이 그려진다. 한다는 인물들이 많은 가운데 박연에게 청한 것은 왜일까. 회덕 아래 영동, 인접한 지역적인 인연 때문인가. 거기 지프내 강촌의 시골내기 난계의 흙내 풀내가 풍기는 인정 때문인가. 어쩌면 강직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조그만치도 사욕을 취하지 않는 삶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늘 재능이 미치지 못함을 아쉬워하고 학문이 짧음을 인정하면서 누구에게나 번번이 물어보고 그것을 인용하고 확인하고 하던 자세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른다. 편액의 그림을 떠올려 본다. 청淸은 무엇이고 쌍雙은 무엇인가. "너무 과합니다. 가당치도 않는 칭송이어요.” "그러면 거문고를 뜯어 답례를 하시오.” "예?” "허허허허… 왜 어려워요?” "불합격이면 어떡하지요?” "그거야 안 되지요. 허허허허…” 너무도 열심히 거문고를 뜯고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듣고 있는 쌍청당과 난계의 그림을 떠올려본다. 박연은 그 답례로 허리춤의 피리를 꺼내어 또 열심히 불었다. 그 후하던 일에 대한 신념을 더욱 굳게 가지고 임하였다. 시에 쓴 대로 다시 어느 다른 곳에 집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중 예조참판 권도權鞱의 참소讒訴를 입어 파직을 당하였다. 그 경위가 어떻든 달리던 말이 멈추어 서고 말았다. 그동안 아악을 전문으로 맡아서 일을 하였고 공을 많이 쌓았으므로 악학에 출사하도록 하였다지만 준마의 앞다리가 부러진 것이다. 답답하고 안타까왔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숨을 쉴 사이도 없이 뒤로 되돌아봐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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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6>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6> 임금이 정월 초하루와 동짓날에 군신, 여러 신하들의 조하를 받는데 기일期日의 전날 예조에서는 내외간에 맡은 직무를 충실히 할 것을 선포하여 각각 그 직분을 다하게 한다. 그날 밝기 전에 임금이 군신을 거느리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고 나면 내전으로 환궁還宮하며 군신들도 물러난다. 유사有司가 임금의 자리를 근정전 북벽 남향에 설치하고 향로 두 개를 앞 기둥 밖의 좌우에 놓아둔다. 전악은 남쪽에 가까운 북향으로 현헌〔軒懸〕을 정전에 베푼다. 협률랑의 지휘 자리를 전상殿上 서쪽 동향하는 자리에 마련하며 사복이 어연과 말을 뜰에 벌여 놓는다. 전의는 1품 이하의 문관 자리를 전정殿庭 길 동쪽에 종실宗室과 1품 이하의 무관의 자리를 길 서쪽에 관등官等마다 자리를 달리하여 겹줄로 북향하여 서로 마주 보게 설치한다. 감찰監察 두 사람은 문무반 뒤 북향으로 자리하고 판통례 전의 독전관讀箋官 치사관의 자리를 현헌 동쪽에 마련한다. 통찬 한 사람은 남쪽에서 약간 뒤로하여 모두 서향하고 통찬 또 한 사람은 현헌의 서북에서 동향하게 한다. 봉례랑奉禮郎은 문 밖의 자리를 홍례문弘禮門 안에 설치하고 문관은 길 동쪽에 종실 및 무관은 길 서쪽에 마련 품계品階에 따라 자리를 달리 하여 겹줄로 서서 북쪽 위(北上)를 위位가 되게 한다. 군신 조하의절은 그렇게 시작된다. 왕세자 의절과 같은 것도 있지만 의식 절차가 서로 다르다. 몇 번 말한 대로 여러 신하들의 의식 하나하나의 세세한 절차 동작 위치 방향 등을 기록한 행사 대본이다. 물론 같은 부서의 협력이 있고 도움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을 해보지만 박연이 숱한 전적을 뒤지며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퇴청을 하지 않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등잔불 심지를 돋우며 날밤을 새우기가 일쑤이고 집에 가서도 저녁 숟갈을 놓자마자 책상으로 물러 앉아 닭이 울도록 날이 새도록 먹을 갈아 쓰고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사맆문을 나서곤 한 것이다. 집의 얘기 다른 말은 한 마디도 않을 때가 많았다. 글을 읽고 쓰고 청서淸書를 하고 할 때도 그랬고 악기를 뜯고 두드리고 소리를 비교할 때도 그랬다.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체면이 볼만했다. 한두 해가 아니고 이십 년 삼십 년 평생을 그렇게 살았다. 왕에게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받았다고 하였는데 상을 받고 칭찬을 듣고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였다. 힘들고 고통스러움이 익숙해졌고 오히려 그게 편하였다.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려서 이름을 남긴 것도 아니고 자기를 내세운 것도 아니었다. 제도를 바로잡고 의식과 절차를 바로 세우기 위한 작업을 끊임없이 쉼 없이 하였다. 누가 시킨 것이 아니었다. 누가 해도 해야 될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한 것이었다. 천명이었고 천직이었다. 좌우간 그랬다. 현헌은 궁중의 제례 때 악기 배설排設, 원래는 제후諸侯의 악기 배설을 말한다. 감찰은 조선 사헌부의 정 6품 벼슬로 사제祠祭 조정회의朝廷會議 과거 등에서 백료百僚를 규찰糾察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풍속을 바로잡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리하여 엄고가 처음 울리면 병조에서 모든 시위의 줄과 의장을 정돈하여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문과 전정殿庭에 베푼다. 그리고 유사는 전문箋文을 올려놓을 탁자와 방물方物을 올려놓을 탁자를 계단 위에 설치한다. 모두 의식은 평상시와 같이 한다. 예조정랑禮曹正郎은 조복을 입고 용정龍亭에 여러 도에서 올린 전문을 받들며 고악鼓樂이 앞에서 인도하여 서문으로 들어가서 근정전에 이르면 악이 그친다. 영사令史는 푸른 공복을 입고 전문이 든 함函을 마주 든다. 정랑은 서계西階로부터 올라가 탁자 위에 올려놓는다. 여러 도에서 올라온 사신使臣 들은 각기 방물을 가지고 동서 문으로부터 들어가서 탁자 위에 놓는다. 다시 엄고가 울리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전문은 나라의 대사가 있을 때 신하가 임금께 써 올리던 사륙체四六體의 글, 방물은 감사나 수령守令이 임금에게 바치는 그 고장의 산물이다. 예조정랑은 조선조 육조六曹에 딸린 정6품 벼슬이다. 이조吏曹 호조戶曹 공조工曹에 3명씩 형조刑曹 병조兵曹에 4명씩을 두었다. 용정은 나라의 옥책玉冊 금보金寶 등을 실어 나르던 교여轎輿, 수레이다. 이윽고 엄고가 두 번 세 번 울리면 행하여지는 의식 절차들이 빼곡히 기록되어 있다. 치사관이 서계로부터 올라와서 임금의 앞에 나가 북향하고 꿇어앉으면 통찬은 여러 신하들을 꿇어앉게 한다. 여러 관원들이 모두 꿇어앉으면 치사관이 하례를 하고 임금은 선교를 한다. "전하의 지극히 어진 덕으로 천지 원기를 체험하시어 큰 복을 받으소서.” "새로움을 맞이하는 경사를 경들과 더불어 함께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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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75>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5> 조하의절을 더 보자. 엄고嚴鼓가 처음 울리면 병조兵曹에서는 여러 시위의 줄과 의장들을 정돈하여 문과 전정殿庭에 베풀되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 좌중호左中護는 중엄中嚴을 청하며 궁관이 각기 제자리로 나가는 것을 돕는다. 우중호右中護는 어인御印을 짊어지고 의식대로 나오면 시위관은 모두 문(閤門)에 나가서 봉한다. 임금이 거동할 때에 엄숙한 위의威儀를 보이고 백관과 시위군사가 제자리에 대기하도록 큰 북을 울리었다. 좌중호는 내금위內禁衛 충의위忠義衛 충순위忠順衛 별시위別侍衛 갑사甲士 등을 이끌고 식장에 들어와 시위侍衛를 도맡아 지휘하던 관원이다. 우중호는 좌중호보다 낮은 직위이고. 엄고가 두 번째 울리면 좌중호는 외판外辦을 정돈시켜 왕세자가 조복朝服을 갖추고 나오게 하되 좌우 시위는 평상시의 의식과 같이 한다. 좌중호가 인도하여 근정문 밖의 위치에 나아가 앉게 한다. 판통례判通禮가 중엄을 청하여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오되 원유관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입는다. 전악이 공인工人을 거느리고 자리에 나오면 협률랑이 지휘하는 자리에 나가고 모든 시위관은 각기 기복器服을 입고 있고 상서관上瑞官이 보(御寶)를 받들고 나오면 시위관은 모두 문에 나가 봉영한다. 외판은 임금의 거동 때의 의장이고 통판례는 나라의 큰 의식에서 절차에 따라 임금을 인도하여 모시던 관원이다. 원유관은 왕과 왕세자의 조견복朝見服인 강사포에 쓰던 관이다. 엄고가 세 번 울리면 전의는 치사관의 통찬을 통솔하여 먼저 자기 위치에 나가고 봉예랑奉禮郎은 3품 이하의 여러 신하들을 인솔하여 위차位次에 나아간다. 첨지僉知와 통례通禮가 왕세자에게 위차에 나가 서향하고 설 것을 청하고 판통례가 외판을 정돈시키고 중금中禁에게 말하여 엄嚴을 전하면 지휘봉을 들어 보인다. 그러면 임금이 여연을 타고 나오는데 산선繖扇 시위는 평상시와 같이 한다. 임금이 나가려고 의장이 움직이면 협률랑이 수그리고 엎드렸다가 지휘봉을 들고 일어나고 악공은 축柷을 쳐서 융안지악을 연주한다. 봉예랑은 나라의 큰 의식 때 문무백관을 인도하던 집사관이다. 통례는 통례원의 정3품 벼슬, 좌우에 각 한 사람씩 있다. 중금은 액정서掖庭署의 별감 밑에 두는 심부름꾼. 산선은 임금이 행차 할 때 따르는 의장의 하나로 베로 우산 같이 만들었는데 임금 앞에 서서 간다. 임금이 자리에 올라 향로에 불을 피워 연기가 오르면 상서관이 보를 임금 자리 앞에 평상시와 같이 놓아둔다. 그 때 협률랑은 지휘봉 휘麾를 눕히고 어敔를 긁어 악을 그치게 한다. 휘는 음악을 연주할 때 협율랑이 그 시작과 그침을 지휘하던 기旗이다. 누런 바탕에 용을 그렸는데 휘를 들면 음악이 시작되고 휘를 누이면 음악이 그치게 된다. 통찬은 왕세자를 인도하여 자리에 나가 선다. 전의가 사배四拜 하라 하면 통찬은 찬자贊者에게 전하여 왕세자가 몸을 굽히면 서안악이 울린다. 사배 후 흥興(일어나다) 평신平身(엎드려 절한 뒤 몸을 본디대로 펴다)하면 악이 그치고 치사관이 서계西階로부터 올라와서 임금 앞에 이르러 북향하고 꿇어앉으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꿇어 앉게 한다. 왕세자가 꿇어앉으면 치사관이 ‘왕세자 신 아무개는 삼양三陽이 열리고 만물이 모두 새로워지는 때를 만나 공손히 생각하건대 전하의 지극히 어진 원기를 몸에 받아 큰 복을 성대히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칭賀稱을 한다. 하례가 끝나고 부복俯伏(고개를 숙이고 엎드리다) 흥興하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부복 흥 사배 평신하게 한다. 왕세자가 부복 흥하면 악이 시작되고 왕세자가 사배 흥 평신하면 악이 그친다. 그러면 치사관은 본 위치로 돌아온다. 대언代言이 임금 앞에서 교명을 받고 뜰로 물러나 서향하고 서서 왕의 교지가 있으면 통찬은 왕세자를 도와 꿇어앉게 한다. 왕세자가 꿇어앉으면 대언이 ‘새해를 맞는 경사를 세자와 더불어 함께 하리라.’ 하고 선교宣敎한다. 선교가 끝나면 대언은 임금 시위 자리로 돌아오고 통찬은 부복 흥 사배 평신을 도와 왕세자가 부복 흥하면 악이 시작되고 사배 흥 평신하면 악이 그친다. 첨지와 통례가 왕세자를 인도하여 나가면 종실宗室과 문무백관들은 조종에 들어가서 별의別儀와 같이 하례한다. 정말 너무도 주도면밀周到綿密하게 짠 각본이다. 이러한 기록들이 어디 다른 데에는 없고 전 시대 제도나 고래의 전적을 참조해 만든 것 같은데 참 너무도 많은 노력, 세세한 공력功力을 기울인 것이다. 악기를 만들고 음률의 고저 장단 청탁을 바로잡는 기능 못지 않게 예의 절차 제도 양식 등을 악과 절차와 조화를 이끌어낸 구성은 종합예술이었다. 그 각본이었다. 왕세자 조하의절에 이어 군신群臣 조하의절에 대하여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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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74>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4> 박연은 악서樂書의 자료를 모아서 찬집纂輯하고 향악 당악 아악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樂譜法을 그리고 써서 책으로 만들자고 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 같다. 앞에서 그러한 박연의 수본手本에 의하여 계한 것을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 27권 7월 27일자 기사 대로 썼는데 실제로는 이루어지지 않았던지 그의 나이 74세 문종文宗 원년에 악보를 간행하자는 청인행악보소淸印行樂譜疏를 다시 올리고 있다. "삼가 생각하건대 아악의 악에는 제향악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향악은 봉상시奉常寺에 구본舊本인 십이궁보十二宮譜와 아울러 20여 악장이 있어 익혀온 지 이미 오래 되었으나 연향악은 우리나라에서 일찍이 보고 듣지 못하다가 경술년(세종 12, 1430)가을에 임금께서 주문공朱文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중에서 연향아악 시장詩章 12편과 보법을 얻었으나 보법이 미숙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옛 사람이 이미 이루어 놓은 규례를 살펴 몸소 부연한 뒤에야 보법이 크게 갖추어졌습니다. 따라서 부연한 보법 중에 그 성음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과 양로연養老宴의 음악에 넣었습니다. 또한 보법 전부를 주자소에 명하사 인쇄하여 세상에 전하게 한 지 2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인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세종 임금의 명을 거슬리는 것 뿐만 아니라 잊어버려 폐기될까 두렵습니다.” 박연은 그렇게 해야 될 근거를 조목 조목 제시하였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어버린다면 이미 금석金石에서 입혀져 나온 소리라도 어디서 나온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융안지보隆安之譜는 어리魚麗 제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는 황황자화皇皇者華 제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는 남산유대南山有臺 제3장에서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은 녹명鹿鳴 제1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후세 사람들이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고. 어리는 사방이 평정되고 만물이 풍성하여 신명神明에게 고하며 칭송하는 내용이다. 황황자화는 임금이 여러 신하와 귀한 손님에게 잔치를 베풀고 사신을 송영하는데 쓰인 음악이고 남산유대는 어진 사람을 얻음을 즐거워하는 내용이며 녹명은 어리와 같으나 그 뒤 연례宴禮와 향음주鄕飮酒에서 쓰였다. 다 「시경」소아小雅 6편 중의 한 곡이다. "원컨대 전하께서 인행印行을 하도록 명을 내려 지체하지 말고 의정부에 의논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문종 임금은 이를 허락하여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우찬성 정분鄭芬 등에게 아악보를 주자소에서 간행하도록 하였다. 참으로 집요하였다. 박연의 집념은 식을 줄을 몰랐다. 박연은 그러한 일련의 상소 청원과는 달리 앞에서도 말한 대로 조하의절 같은 글을 써서 예악을 바로 세우고자 하였다. 먼저 ‘왕세자 조하의절’을 보자. 임금이 원정元正과 동지에 왕세자의 조하를 받는데 그 전날 예조에서는 내외관에게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행할 것을 선포하여 각각 그 직분을 다 하게 한다. 충호위忠扈衛에서는 왕세자 위차位次를 근정문勤政門 밖의 길 동쪽, 북쪽에 가까운 서향으로 설치하고 동궁문東宮門 밖에 궁관宮官의 위차를 규칙대로 설치한다. 말 그대로 왕세자의 조하를 행하는 의례의 절차 규범을 상세하게 기록해 놓았다. 세종 12년(1430) 예조에서 아뢴 것으로 박연이 지은 것인지 정리한 것인지 「난계선생유고」에 가훈家訓과 함께 잡저雜著 편에 수록되어 있다. 충호위는 종친의 자제로 조직하여 호위와 제사 때에 제관의 자리를 준비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그날 유사有司가 임금의 자리를 근정전 북벽 남향으로 설치하고 향로 두 개를 앞 기둥 밖의 좌우에 놓아 두며, 전악典樂은 헌현軒縣을 전정에 베풀되 남쪽에 가까운 북향으로 진열하고, 협률랑協律郎의 지휘하는 자리를 전상 서계의 서쪽으로 동향하는 자리에 마련하며, 사복司僕은 여연輿輦과 말을 뜰에 진열한다. 전악은 조선조 악관직의 하나로 정5품, 협률랑은 음악을 지휘하던 악관으로 정7품이다. 사복은 궁중의 가마나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어연은 임금이 타는 수레이고. 전의典儀는 왕세자 자리를 전정의 길 동쪽으로 북향하게 마련하고 전의 치사관致詞官의 자리를 헌(헌현) 동북쪽에 마련하되 통찬通贊 한 사람은 남쪽에서 약간 뒤로 모두 서향하고 또 통찬 한 사람은 헌현 서북쪽에 동향을 하게 한다. 궁관이나 익위翊衛는 그 시각에 모두 제 자리에 모이되 각기 기복器服을 입고 의장과 호위는 평상시와 같이 베풀어 놓는다. 전의는 나라의 큰 의식이 있을 때 모든 절차를 도맡아 진행시키던 집사관이고 치사관은 경사가 있을 때 임금께 올릴 송덕의 글을 맡은 관리이며 통찬은 전의의 명을 받아 의식의 절차를 큰소리로 외쳐 진행시키는 관리, 익위사翊衛司는 세자의 호위를 맡은 관청이었다. 예와 악의 절차를 치밀하게 연출하여 그 전범을 적어 놓은 것이다. 어디에도 없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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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73>흙의 소리 이 동 희 말을 멈추고 <3> 박연이 음악을 정비하기 위하여 먼저 율관律管 제작을 하였다. 얘기한 대로 해주에서 나는 거서로 제작한 율관은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결국 남양의 경석과 함께 악기 제작에 정열을 쏟았다. 율관 제작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박연의 음악적 생애에 닥친 제일 과제였다. 박연은 그 자신이 만든 악기의 소리의 높이에 따른 정당성을 찾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박연의 악기 제작은 그의 귀로 들어서 음고音高를 판별하였던 것이고 그의 정확한 판별력은 자타가 인정하였다. 세종임금도 박연이 음률音律에 밝음을 인정하였는데 그것은 임금 스스로 뛰어난 음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일화를 얘기하였었는데 박연의 율관 제작 악기 제작은 그런 믿음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다. 박연의 악기 제작에 대하여 상언 상소한 글을 다시 보자. 생황笙篁의 원료인 바가지를 본래의 제도에 의거하여 만들자는 상소 훈塤을 옛 제도에 따라 개조하자는 상소 축柷을 옛 제도에 따라 바르게 고치자는 상소 토음土音인 부缶라는 악기를 분원分院에서 제조하자는 상소 대고大鼓를 제조하자는 상소 대나무로 만든 독牘이라는 악기를 개조하자는 상소 건고建鼓를 개조하자는 상소 종鍾 경磬의 소리를 올바르게 교정하자는 상소 편종編鐘을 주조鑄造하자는 상소 방향方響을 추가로 더 만들어야 한다는 상소 말이 상소이지 거기에 악기 제작의 당위성 제작의 원리 방법이 다 제시되어 있었다. 세종 12년 2월에 올린 것이었다. 13년 말에 올린 상소 하나 외에는. 이 악기 제작에 대한 상소로 한 해를 다 보낸 것이다. 악기 제작에 생애를 바친 절정기라고 할 수 있겠다. 52세 때이다. 생 훈 축 부 대고 건고 독 편종 편경 방향 등의 악기를 주례周禮와 진양陳暘 악서樂書 등의 기록 악리樂理에 근거하여 개정하고 제작하자는 청원이었다. 그의 정열적인 상소는 대부분 성과를 거두었고 제향祭享 회례會禮 조회朝會 등에 이러한 악기들이 사용되었다. 그의 상언 상소는 하나 하나 너무나 절절하였다. 마음에 와 닿았고 핵심을 얘기하였다. 그리고 언제나 전적을 바탕으로 고서 고사를 인용하였다. 부라는 악기는 요堯 임금 때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역대로 폐지하지 않았다. 진秦나라 때에는 더욱 널리 사용되어 악현樂懸의 악기로 사용되었고 세간에서도 모두 좋아했다. 방향이란 악기는 양梁나라 때 상하가 통용하던 것으로 편종과 편경의 소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었다. 8음 중에 오직 경의 소리만이 사시에 변치 않는 것인데 방향 또한 그렇다. 그 나머지는 속이 비고 구멍이 뚫린 악기이므로 몸체가 얇고 속이 비어 음향의 기운에 감화되기 쉬우므로 한여름에는 건조해서 소리가 높고 한겨울에는 막혀 소리가 낮으니 반드시 경성磬聲에 의해 고른 연후에 음이 어울리는 것이다. 「시경」에 ‘내 경성에 따른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훈이란 악기는 옛 말에 길이가 세 치 반이요 둘레가 다섯 치 반이라고 하였다. 진양陳暘이 말하기를 밑이 평평하면 구멍이 여섯 개인데 이는 수水의 수數를 택한 것이요 속이 피고 위가 뽀족한 것은 화火의 형상을 본받은 것이다. 훈이란 악기는 이와 같이 물과 불이 서로 어울리는 소리를 이룬다. 그런 제작의 법을 모두 근거할 바가 있어 함부로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축은 네모난 악기로 그 넓이가 한 자 네 치이고 속이 비고 사면을 빈틈 없이 기워 합치고 가운데에 한 구멍만을 내어 참나무 자루가 드나들게 했을 뿐 다른 구멍이 없는 악기이다. 그런데 오늘날-물론 그 당시를 말하는 것이다-사용되는 축은 참나무 자루가 들어갈 구멍이 있는데도 한쪽 곁에 둥근 구멍이 뚫리어 주먹이 들어갈만하다. 도설圖說을 상고해 보아도 이런 모양은 없다. 박연의 악기를 만들자고 청원하는 논리 이유들이었다. 고사와 고서를 인용할 뿐 아니라 음과 악의 이치를 말하였다. 일상의 감성으로 얘기하기도 했다. 생이란 악기는 간방艮方에 속하는 소리인데 그 제도는 길고 짧은 여러 개의 관들이 가지런하지 않게 참차參差, 하나의 바가지 속에 꽂혀 있어 봄볕에 만물이 소생하는 뜻이 담겨 있으므로 생笙이라 하였다. 또한 바가지를 몸으로 삼아 악기를 이루므로 박〔匏〕이라 하였다. 그런데 반드시 바가지로 만드는 것은 박덩굴이 땅에 뻗는 식물이기 때문에 간방에 속한 연유이다. "대저 흙으로 만들어진 악기는 두드려서 소리가 나지 않는 것도 있고 소리가 매우 맑아 조화로운 것도 있으며 소리가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습니다.” 흙의 소리 토음인 부라는 악기 제작에 대한 설득이었다. 박연 다운 논리였다. 산골 시냇물 소리 같은 사랑방 부엌에 활활 타는 장작불길 같은 조선 악기 제작 원리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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