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2>
파직은 되었으나 하던 일은 멈추지는 않았다. 며칠 실의에 빠져 헤매다가 생각을 고쳐 더욱 힘을 내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생각하면 한 번도 그는 무엇을 잘 못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였다. 실수를 해 본 적이 없었는지 모른다.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면 그냥 그렇게 자만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늙어갈 뻔하였다.
다시 또 한번 진심으로 임금에게도 감사를 드리고 일이 이렇게 된 운명 같은 횡액에 대하여 감사를 하였다.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은, 아무 불행이 없다는 것은 발전이 없는 것이었다. 언행에 조심하고 길을 걷는 것도 조심하고 글을 쓸 때도 한 자 한 자 더 힘을 주고 유심히 들여다 보았다. 잠을 덜 자고 생각을 더 하고 하찮은 일에도 신중을 기하였다.
그날 이후 새 각오를 갖고 책상 앞에 앉아 새롭게 일을 하였다. 악학樂學을 정비하는 일이었다. 계속 추구하고 있는 것이었지만 제향 때 사용되는 영고靈鼓 뇌고雷鼓 노고路鼓에 관한 글을 다듬었다. 그리고 악장樂章을 짓는 일에 몰두하였다.
문소전文昭殿 악장이었다.
문소전은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인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의 신주를 모시기 위해 조성한 인소전仁昭殿을 태조가 승하하고 태조의 혼전魂殿으로 사용하면서 바뀐 이름이다. 문소전은 태조와 신의왕후의 초상화를 함께 봉안하면서 진전眞殿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본래 창덕궁 북쪽에 위치하였으나 세종 14년 광효전廣孝殿과 합하여 경복궁 북쪽에 조성되었다. 태조와 신의황후의 혼전으로 사용되다가 원묘제原廟祭에 따라 태조와 그 위로 4대의 신위를 모셨다.
세종 15년 12월 21일 세종실록 62권 기록에, 예조에서 아뢰기를 상호군 박연이 상언한 조항을 상정소와 더불어 의논하였다고 되어 있다. 문소전 악장 얘기였다.
"음악에는 반드시 칭호가 있고 곡에는 반드시 이름이 있어서 다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서 훌륭한 덕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금 문소전의 제례에 새로 악장을 제작하여 그 절주節奏는 초헌 때에는 당악唐樂 중강령中腔令을 쓰고 아헌에는 향악鄕樂 풍입송조風入松調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박연이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아뢰었다.
"그러나 악호樂號와 곡명曲名이 정립定立되지 않아서 옛 제도에 어긋남이 있사오니 원컨대 아름다운 칭호를 명명命名하여 후세에 전하게 하소서.”
그리고 하나 하나 악호 곡명을 제시하였다.
"태조의 제향 초헌의 악곡명은 환환곡桓桓曲 아헌의 악곡을 유황곡惟皇曲이라고 하고 태종의 초헌의 악곡명을 미미곡亹亹曲, 아헌은 유천곡惟天曲이라고 하소서.”
그 사건이라고 할까 파직 선고를 받은 것이 세종 15년 6월 9일이니 여섯달 뒤의 일이었다.
좌우간 그렇게 상언한 다음 문소전 악장과 관련하여 또 자상하게 너무도 청간스럽게 설명을 하였다. 건의 제안이었다.
제향의 예절에 있어서 재숙齋淑은 중요한 행사이다. 요사이 악공들의 재계齋戒하는 법을 보니 제사하기 2일 봉상시奉常寺에 합숙하고 제사하기 1일 앞서 모두 제소祭所에 나아간다. 이미 재계라고 한다면 마땅히 출입을 금하고 그 정성이 전일專一하게 하여야 할 것인데 도리어 아침 저녁의 식사 때문에 그 재숙하는 곳을 버리고 마음대로 출입하게 되어 사사로운 곳으로 내왕하면서 더러움에 감염하는 일을 범함이 많으니 지극히 온당하지 못하다. 이것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음식의 제공이 없기 때문이다. 또 제삿날에 향관享官과 집사執事들은 다 임시臨時하여 관세盥洗함으로써 청결하게 하지만 당상 당하의 노래하고 춤추는 가공歌工들은 그 수가 매우 많고 관세소를 설치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명의 공인工人들은 밤중에 일어난 채 전연 세수하지 않아서 더럽고 무례하여 불경함이 더할 수 없다. 지금부터 공인들의 재계하는 날에는 반드시 음식을 제공하고 출입을 금지시켜 재숙을 엄중하게 하며 또 단壇이나 묘廟의 밖에 세수 도구를 마련하여 여러 공인들로 하여금 모두 세수하게 하여야 하고, 원묘原廟 제향 때의 영인伶人들도 세수하는 설비가 있어야 한다.
언제나 그렇듯이 어디 하나 보탤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었다.
"공인들에 대한 음식 제공은 전례에 따라 예빈시禮賓寺로 하여금 관장하고 세수 시설의 준비는 제소마다 나무통 각 1개 목기木器 각 50개씩 만들어 보관하게 하고 전수자典守者로 하여금 물을 길어다가 공급하게 하소서.”
이와 같은 박연의 상언에 대하여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악호 곡명의 정립과 제향 때의 예법 등의 건의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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