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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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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3>

  • 특집부
  • 등록 2022.04.07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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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1>

박연은 정초鄭招 김진金鎭 등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올렸다.

세종15(1433) 69, 세종실록 60권 기사이다. 정초는 대제학으로 과학 사업에 중요한 소임을 맡아 정인지와 함께 대통통궤大統通軌를 연구, 칠성내편七星內篇을 편찬하고 간의대簡儀臺를 제작 설치하는 일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 전 후가 되지만 농사직설農事直說」「회례문무악장會禮文武樂章을 편찬하기도 했다.

혼천의는 서전書傳 순전舜典의 선기옥형도璇璣玉衡圖를 본 떠 만든 천체관측기구로서 북극고도(관측자의 위도)와 더불어 동지와 하지, 춘분 추분에 태양의 북극으로부터 떨어진 각거리에 대한 정보와 28宿 2412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간의는 중국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郭守敬이 처음 만든 천문의기天文儀器로 천문관측을 하기 위한 적도의赤道儀 형태의 기기器機이다. 혼천의에서 적도환赤道環과 백각환百刻環 사유형四游衡만을 따로 떼어서 만든 것으로 행성과 별의 위치인 적경赤經과 적위赤緯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고 고도와 방위, 낮과 밤의 시간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혼천의가 실제로 천체의 위치를 관측하는 기구로 사용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실내에 두어 천문시계로서의 목적을 위하여 사용되었고 천체의 위치 관측에는 간의가 주로 사용되었다. 조선에서는 세종 14(1432)부터 자주적인 역법을 편찬하고 천체의 위치를 측정하기 위해 나무 재질로 간의를 시험 제작하여 한양의 북극고도(위도)를 측정한 후, 역법을 연구하고 천체를 관측하였다. 그리고 정확한 시간을 측정하기 위한 국립 천문대인 간의대와 천문의기, 그리고 계시의기들을 만들게 하여 간의대 위에 청동으로 제작한 간의를 올리고 사용하였다.

혼천설渾天說에 의하면 하늘은 북극을 중심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회전하고, 해와 달이 하늘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움직인다. 하루에 한 바퀴씩 하늘이 돌기 때문에 해가 땅 위로 올라와 있는 시간이 낮이고 해가 땅 아래로 내려가고 달이 뜨는 시간이 밤이다. 하늘은 365.25도이고 반은 땅 위를 덮고, 반은 땅 아래에 있어 28수 가운데 절반만이 항상 보인다. 땅 아래에는 물이 고여 있어 땅이 우주 한가운데에 떠 있도록 해 주고, 땅 위에는 기가 가득 차 있어 하늘이 무너지지 않도록 한다. 이 덕분에 하늘은 안정성을 가질 수 있다. 혼천설은 후한後漢 시대의 인물인 장형張衡이 지은 책 혼천의에 처음 소개된 이후 서양의 우주관이 동양에 수입될 때까지 동양의 표준 우주관으로 여겨졌다. 다만 초기에는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었지만, 우주의 구조와 우주의 생성 원리를 하나로 연결시킬 수 없었기 때문에 송나라 이후 등장한 성리학자들이 혼천설을 수정하여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우주론을 만들었다. 우주는 본디 기의 회전에 불과하였으나 회전이 빨라지며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들이 한가운데로 모여 땅이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 바로 혼천설이었다. 그런데 이와 더불어 해와 달과 하늘이 다 같이 동에서 서로 움직인다고 주장하여 기존의 설을 근본적으로 뒤엎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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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을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수입해 왔으며, 조선시대부터 세종대왕이 정인지 등과 함께 설계하고, 장영실蔣英實이 우리나라의 하늘에 맞는 혼천의를 만들었다.

설명이 길었다. 혼천의 간의에 대한 자료들을 끌어 대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박연이 혼천의를 올린 것에 대한 의미를 말하고자 한 것이다. 간의대를 제작 설치하는 일을 관장하던 정초가 혼천의를 만들어 올리는 것은 그 자리로 보아 의당 할 일을 한 것이었지만, 악기를 제작하고 연주하고 행사의 각본을 짜고 미세한 음율 고저장단을 가리고 예리한 색감 소리의 작은 차이를 중히 여기고,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런 기량을 발휘하고 추구하던 박연이 어떻게 우주 천체의 원리를 제어하는 일에 가담하였는지, 계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거기서 무슨 역할을 어떻게 하였는지 모르겠다. 위의 단 한 줄로는 알 수가 없지만 혼천의에 대한 문헌상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이다. 세종실록에는 그 두달 후 대제학 정초 제학 정인지 등이 혼천의를 올리매 임금이 세자와 더불어 강문講問하였다고 하였고 그 다음해 세종 16년 장영실이 물시계 자격루自擊漏를 제작하여 올렸으며 5년 뒤흠경각欽敬閣을 짓게 하고, 이곳에 혼천의를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어떻든 박연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