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수)

[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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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8>

  • 특집부
  • 등록 2022.05.12 07:30
  • 조회수 700

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6>

또 문은 보태평이라 하고 무는 정대업定大業이라 하였다. 아헌례亞獻禮와 종헌례終獻禮에서 연주하는 악무로 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줄여서 정대업이라 부른다. 모두 11곡과 이에 해당하는 춤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역시 세종에 의하여 원래 회례악으로 창제된 것이고 직접 간접으로 공을 끼친 역대 왕들과 선조들의 무덕武德을 찬양안 내용이다. 창제 당시에 15곡이던 정대업은 세조 때 개작되면서 보태평과 같이 11곡으로 되었다. 소무昭武(인입장) 독경篤慶 선위宣威 탁령濯靈 신정神定 영관永觀(인출장) .

이 중에서 소무와 영관 두 악장을 보자.

황천皇天이 이 나라를 돌보시사 우리의 성군을 낳게 하시니 / 거룩할사 우리의 성군님네 크게 일어나 천명을 받으셨도다 / 여러 세대 명철한 덕이 내리내리 이으셔서 높으신 무덕으로 큰 공을 정하시고 / 큰 터전을 마련하사 우리 나라 보전하니 / 거룩하신 막대한 업적 길이 드리워 끝이 없으리 / 이에 노래하며 춤을 올리니 간척干戚이 번득이고 찬란하외다

장하실사 여러 성군 이 나라를 다스릴새 / 왕가를 안정함에 대대로 무공일새 / 무공이 왕성하고 덕화가 높은지고 / 우리의 춤에 차례가 있어 적이나마 형용해 보이도다 / 간척을 거두오니 / 나아가고 그침이 법도가 있어 씩씩하고 평화롭다 / 큰 성과를 길이 보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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皇天眷東方 篤生我列聖…… 한자 한문으로 된 것을 조선왕조실록 번역으로 보았다. 앞에 들은 것들도 같다.

1115곡을 다 보지는 않으려 한다. 보태평도 부분적으로 보았다. 그가 곡명을 명명한 환환곡 유황곡 등도 보았다.

태평춘지곡太平春之曲이 또 있다. 여민락與民樂의 다른 이름이다. 여민락은 원래 봉래의鳳來儀라는 대곡大曲 가운데 한 곡으로 여민락 치화평致和平 취풍형醉豊亨 등은 용비어천가를 노랫말로 썼다.

박연이 태평악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그 지은 바의 흔적을 찾고자 여러 조선 음악 자료들을 섭렵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 자취도 보지 못하였다. 태평악에 앞서 박연은 문소전 악장도 지었다고 하였지만 그런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악성 난계 박연1집 연보는 무엇을 근거로 작성하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으나 있지도 않는 행적을 올려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무책임한 서책은 아닌 것으로 알고 인용해 왔다. 난계 선생 유고도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몇 번 얘기한 문소전 악장을 새로 짓고 태평악을 지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좌우간 그래서 여러 기록과 저서를 끌어대어, 견강부회牽强附會가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가설을 세워본다. 세종이 손수 지었다는 보태평 정대업의 곡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은 아니고 조선 초기의 향악 고취악을 바탕으로 창제한 것이라고 한 창제의 논리를 발전시켜 보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창작은 아니고’ ‘……을 바탕으로 창제한 것속에 박연을 넣어 보는 것이다. 세종 임금은 회례 때의 문무文舞 무무武舞 두 가지 춤에 연주할 악장에 대하여 박연의 말을 인용하여,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제작하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서 만세에 통용할 제도로 하는 것이 마땅한데 무를 문보다 먼저 하는 것이 온당한지 역대의 제도 중에도 문부다 무를 먼저 하는 것이 있는지 세대를 계승하는 임금은 다 그를 위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그들의 공덕이 다 찬가를 부를 만한 것이겠는지 박연과 같이 의논하라고 명하였고, 문과 무 두 가지 춤의 가사 1장으로는 태종 태조의 공덕을 다 찬송하기에 미진함이 있으니 다시 1장을 더함이 어떻겠느냐고, 임금이 박연에게 묻고 박연이 옳다고 대답하자,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박연은 다시, 1장 가운데에 태조 태종의 공덕을 겸하여 기림은 미흡하니 각각 공덕을 따로 1장씩 찬송하여 모두 2장의 가사를 만들어 각각 8박자로 하고 춤을 출 때에 제1은 태조를 기리고 제2변은 태종을 기리어 서로 차례대로 송덕頌德하고 제6변에 이르러 태종에서 끝마치되 악이 끝나면 물러가게 하라고, 악장 구성을 말하였고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물론 거기에 박연이 지었다는 얘기는 없다. 어디에도 없다. 찾을 수가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창제한 것속에서 박연의 흔적을 더듬어 볼 뿐이다.

하나의 부회를 더 추가하는 것이 될지 모르지만 단종실록 4권 단종 즉위년 101일 기사를 옮겨본다.

 

박연은 사람됨이 진실하고 정성스러우며 사치스러움이 없었다. 음률에 정통하여 세종의 인정을 받고 종률鍾律을 만들었다. 일대의 음악이 찬연하여 볼만한 것은 모두 박연의 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