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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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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6>

  • 특집부
  • 등록 2022.04.28 21:23
  • 조회수 636

                                                                                                    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4>

세종실록 56권에 있는 기록이다. 세종 145월 임금의 영이었다.

"이제 회례 때의 문무文舞 무무武舞 두 가지 춤에 연주할 악장은, 마땅히 현금現今의 일을 가영歌詠하여야 한다고, 박연이 말하였으나 내가 생각해 보니 대체로 가사歌辭라는 것은 성공을 상징하여 성대한 덕을 송찬頌讚하는 것이오.”

임금은 좌우 신하들에게, 주무왕周武王이 천하를 평정하였고 성왕成王 때에 이르러 주공周公이 대무大武를 지었고 역대 다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말하였다.

"나는 다만 왕위를 이었을 뿐인데 무슨 가송歌頌할만한 공이 있겠오. 태조께서는 전조前朝의 쇠잔한 말기를 당하여 백번 싸웠으나 백번 이겨 공덕이 사람들에게 흡족하였으며 어지러운 것을 제거하여 세상을 바른 데로 돌리고 왕업을 창건하여 왕통王統을 후손에게 전하였오. 태종께서는 예악을 새로 제작하셔서 교화가 퍼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으며 안과 밖이 또 편안하도록 하셨오.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제작하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서 만세에 통용할 제도로 하는 것이 마땅하나, 무를 문보다 먼저 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오. 역대의 제도 중에도 문부다 무를 먼저 하는 것이 있는지. 만약 현금의 세상 일로 노래를 지어야 한다면 세대를 계승하는 임금은 다 그를 위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그들의 공덕이 다 찬가를 부를 만한 것이겠는지. 그것을 박연 정양鄭穰 등과 같이 의논하여 물어보도록 하시오.”

임금의 말에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 등이 아뢰었다.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만들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만들 것이며 겸하여 현금의 일도 노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좌부대언左副代言 권맹손權孟孫도 아뢰었다.

"마땅히 임금의 말씀과 같이 태조 태종을 위하여 나누어 문무 두 가지 춤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시대의 일은 뒷세상에서 반드시 가영歌詠할 것입니다.”

세종실록 58권의 세종 1410월의 기록이다.

"문과 무 두 가지 춤의 가사 1장으로는 그 가운데에 태종 태조의 공덕을 다 찬송하기에 미진함이 있으니 다시 1장을 더함이 어떨까.”

임금이 상호군上護軍 박연에게 이르자 박연이 아뢰었다.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옳습니다.”

"마련磨鍊하시오.”

"1장 가운데에 태조 태종의 공덕을 공덕을 겸하여 기림은 미흡하오니 원컨대 각각 공덕을 따로 1장씩 찬송하여 모두 2장의 기사를 만들어 각각 8박자로 하고 춤을 출 때에 제1은 태조를 기리고 제2변은 태종을 기리어 서로 차례대로 송덕頌德하고 제6변에 이르러 태종에서 끝마치되 악이 끝나면 물러가게 하옵소서.”

박연은 악장의 구성을 다시 아뢰었다.

세종실록은,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두 기록과 박연의 연보를 연결해 보았다.

나라에서 대업을 이루니 태평악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나라의 대업이란 새 나라가 들어서고 새로운 통치가 자리를 잡음으로써 혼란한 시대가 가고 안정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그 때 시기를 말한 것이리라.

세종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때라고 한다면 그 꽃이 피는 화려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 15년 전후 박연의 50대 중반 그의 생의 절정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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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의례 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편찬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농업 과학 예술 의학 기술의 발전,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민족 국가의 기틀이 확고해졌고 날로 융성하였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의 안정 기반 위에 소신 있는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정치는 예악 정책으로 대변되는 도덕과 문화의 정치였다.

박연에게는 향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짓고 편경과 편종 등의 악기를 제작하게 하는 등 음악 중흥에 이바지하게 하여 예악의 시대를 꽃피게 하였다. 세종시대의 후반을 열매의 시대라고 한다면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한 이 때는 국가 대계 나라의 대업을 이룬 시기이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런 것 같다.

그러면 태평악은 어떤 것인가. 기록들을 다 뒤졌지만 태평악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 임금이 마련하라고 하였던 그 악장은 어디 있는 것인지.

 

 

태평지악太平之樂은 영조英祖 때 연례악宴禮樂의 한 곡명이다. 태평악지곡太平樂之曲은 순조純祖 때 연례악의 또 한 곡명이고. 태평년지악太平年之樂은 세종 13 14 15년 실록에도 나오고 다른 곳에서도 보이는데 박연이 지은 것이 물론 아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2009년 공연한 국립국악원 제작 태평지악-세종, 하늘의 소리를 듣다까지 뒤져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