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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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5)<br> 분청명문접시편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이규진(편고재 주인) 성탄절 연휴에 집에서 TV를 돌리다 현역가왕이라는 프로를 잠시 보았다.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니어서 유행가의 제목도 원래의 가수도 알 수는 없었는데 그 날은 경연에 참가한 김소유라는 가수가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노래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나는 그 구절 앞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엄마라는 그리운 이름 앞에 가슴 먹먹함 말고 또 무슨 감정이 있으랴.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여년이 되어 온다. 밥술깨나 뜨던 집안에서 삼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우리 집으로 시집을 오면서 고생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전사를 하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 위로는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어린 나와 동생, 그리고 삼촌도 없는 집안에 여섯이나 되는 고모들,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하고 암담하셨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꿋꿋하게 일어서서 우리 집을 흔들림 없이 지키셨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하지만 내가 성장을 해서도 가정이 온전치 못하다 보니 어머니를 모시기는커녕 따뜻한 밥 한끼 제대로 해드리지를 못했다. 그런 회한이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라는 유행가 구절 앞에서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던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후회가 없으랴. 살아오는 동안의 마디마디가 어찌 아픔 아닌 것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만은 그 마디마디가 더욱 아프고 시린 것만 같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왜 이런 노래 구절이 있어 내 마음을 울리고 또 울리려 드는가. 나는 사실 어머니뿐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고모들의 사랑을 너무도 분에 넘치게 받고 자랐다. 세상에 나와서도 그런 인복(人福)이 지속된 탓인지 주변에 척을 지고 살거나 미워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내가 도편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을 것을 알고 도와주려는 지인들 또한 내게는 인복이지 안았을까. 지인으로부터 일찍 선물로 받은 분청명문접시편 또한 그런 인복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분청명문접시편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태기리(台機里)에서 지인이 직접 습득한 것을 얻은 것이다. 울주군 삼동면에는 태기리와 하잠리 분청 가마터가 있는데 이 곳은 과거 언양현에 속했던 곳으로 언양인수부(彦陽仁壽府)와 장흥고(長興庫) 등 관사명이 출토되고 있어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분청명문접시편의 글자가 온전치 않다는 점이다. 글자는 백상감으로 양(陽)자가 분명한데 앞의 부수가 떨어져 나가고 역(易)자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언양현 소속이었던 태기리에서 지인이 직접 습득한 것이 확실하고 보면 언양<彦陽)의 양(陽)자 중에서도 역(易)만 남았지만 언양에서 만들어 중앙 관서에 납품을 하고자 했던 공납용 자기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때 아닌 유행가 가사 한 구절 때문에 잊고 지냈던 가족들의 사랑과 지인들의 관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랴. 어느날 문득 애절한 선율 속에 가슴을 파고들던 아!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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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4) <br>청자귀면장식편소박함과 정겨움 때문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에 위치한 칠갑산을 언제 찾아보았던가, 아니 넘어 보았던가. 칠갑산 휴게소에서 차를 마셔 보았던 적은 또 언제였던가. 휴게소에서 고지대에 위치한 천장호 저수지를 우측으로 끼고 급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면 좌우로 길게 형성된 계곡을 만나게 된다. 이 계곡을 우측으로 올라가면 몇 채의 민가가 어우러진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천장리다. 천장리 끝 민가와 밭 경계를 이루는 턱이 진 곳에 돌무더기가 있는데 이곳이 가마터인 듯 도편들이 보이고는 했었다. 이 천장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아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천장호 저수지에는 그새 출렁다리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고 보면 가마터를 찾아보았던 것이 언제쯤이었는지 이제는 가늠조차 쉽지가 않다. 청자귀면장식편은 천장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만난 것이다. 청자 하면 우선 고려 시대를 떠올리게 되지만 조선 시대에도 만들어졌다. 조선청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입힌 이른바 백태청자라고 하는 것과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분청 태토에 분을 안 입힌 채 만들어 지는 청자가 그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는 고려 시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 지는 청자와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천장리에서 만난 청자귀면장식편 또한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청자귀면장식편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는 내면은 무문이고 외면에는 파도문 같은 음각이 있고 위로 꺽이는 부분에는 돌대가 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도대체 어떤 기형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향로일까 수반일까. 그러나 더욱 궁금한 것은 입술 부위에 붙어 있는 귀면장식이다. 편리한대로 귀면장식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간략화 된 뿔인지 귀인지에 입과 코가 있고 가로로 쭉 찢어진 입이 있는 이 것은 도깨비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토끼 같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이 또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조선 시대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청자귀면장식편. 귀면인지 무엇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간략환 된 표정만은 여간 애교스럽고 정겨운 것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귀면을 그릇에 올린 도공의 마음은 또 얼마나 여유로워 보이는지 그 넉넉한 심성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여하튼 기형을 알 수가 없는 청자귀면장식편. 발굴조사보고서 같은 것을 보면 용도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이형청자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지만 그렇게 얼버무리기에는 무언가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청자귀면장식편이 주는 그 소박함과 정겨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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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3) <br> 청자양각동자문완편고질병도 이런 고질병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강진과 쌍벽을 이루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는 젊은 시절 여러 번 답사를 해본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변산반도 해안도로가 지금처럼 포장이 잘 되어 있어 관광도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포장의 마차길 밖에 없을 때였다. 줄포에서 유천리를 들어가는 길 또한 마찬 가지였다. 그런데 유천리 청자 가마터를 여러 번 답사를 해본데 반해서는 기억에 남는 도편이 별로 없다. 그런 가운데 구지 기억에 남는 것을 찾아본다면 아마도 그 중 하나가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자에서 포도에 동자를 곁들인 문양은 생각보다 아주 보기 힘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포도와 동자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포도넝쿨은 이어지는 줄기로 인해 연속성을 의미하고 포도송이는 다산을 상징한다는 것이 속설이다. 따라서 연속적인 다산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거기에 동자를 곁들이니 미래 세대에 대한 꿈과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출산율이 낮아져 인구 절벽을 걱정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새롭게 관심을 가져보아야 할 문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청자에 포도와 동자를 곁들인 문양은 병이나 주전자 그리고 잔 등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 흑백상감이지만 개중에는 포도송이를 동화로 처리하고 있어 아름다움이 배가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동자는 주로 포도넝쿨 사이를 뛰어놀거나 포도송이를 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청자에서 보이는 인물 자체가 귀한 것이다 보니 동자라고는 하지만 이런 문양이 있으면 비교적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동화라도 첨가된다면 그 가치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청자에서 보이는 포도와 동자가 보통은 흑백상감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했지만 도범으로 찍어낸 압출양각의 것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적 제14161호 청자동자무늬조각이 바로 그런 종류다. 그런데 문제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에서 오래 전에 인연을 맺었던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이 바로 이와 같은 양식의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도편은 강진 것인데 반해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은 유천리 것이니 지역을 달리하는 것에 비슷한 양식의 것이 있다는 것은 여간 주목을 요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은 포도와 동자가 들어간 일반적인 문양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외면은 무문이고 안쪽만 압출양각의 문양인데 우선 이 도편에서는 포도가 보이지 않는다. 연꽃 사이를 뛰어놀고 있는 동자의 모습이 보일 뿐인 것이다. 안과 밖 모두 녹청색의 유약이 두껍게 입혀져 있으며 굽에는 내화토 받침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내저에는 내화토 받침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포개어 굽는 과정 중에서 맨 위에 놓고 소성을 한 고급품으로 보여 진다, 강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 이제 이곳에는 반갑게도 박물관 까지 들어서 있어 그동안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조망해 볼 수 있는 명소로 등장했다. 몇 해 전 이곳을 방문해 보았는데 내 눈길을 끈 것은 청자종에서 떨어져 나온 양각의 부처님상과 청자바둑판편이었다. 아무리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더니 온전한 것은 젖혀놓고 깨진 도편에만 눈길이 가니 고질병도 이런 고질병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눈과 마음이 그리로만 향하니 나 또한 이를 어쩌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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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2)<br>분청양산명접시편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우리가 고미술을 아끼고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옛것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자는데 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미술이라는 것이 재화와 관련이 있다 보니 생각보다 불미스러운 일이 흔치 않게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름다움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고미술 때문에 오히려 심성이 망가지고 생활이 어지러워 질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겠는가. 고미술을 좋아는 하대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고미술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모았던 고미술품으로 인해 끝내는 송사까지 벌려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결론 없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 일 때문에 크게 실망을 했는지 선배는 그 후 고미술계와는 완전히 발을 끊고 산과 들로 사진을 찍으로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그마저 끝내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 선배에게서 오래 전 선물로 받았던 것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있다. 상리마을 뒤편 계곡과 호포부락 뒤편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가 바로 그 것이다. 두 곳 중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호포가마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는 다양한 종류의 분청사기는 물론이거니와 명문도 발견이 되는데 양산장흥고(梁山長興庫)와 장흥고 등이 그 것이다. 이로 보아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양산에서 중앙 관서에 상품을 납품하던 중요한 공납용 자기 제작소였음을 알 수 있다. 분청양산명접시편은 훼손이 심해 작은 조각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호포가마터를 찾아 직접 습득한 것인 듯 95.2.9라는 날자와 양산이라는 글자가 명기되어 있어 출토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접시편은 굽부터 몸체로 거칠게 인화분청이 시문되어 있다. 접시 내저에는 국화문이 상감되어 있는데 이 또한 거칠어 문양은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접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내저 중앙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양산(梁山)명이다. 비록 삼수변은 훼손되고 없으나 선배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양산명을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선배와 소식이 끊긴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선배는 지금도 카메라를 메고 산과 들을 누비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나 나보다 손 위인 선배의 나이를 생각하면 장담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 양산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선배보다도 내가 더 일찍 답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건네 준 것이 바로 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따라서 훼손이 심해 아주 작은 도편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가슴을 스쳐지나가고 또 지나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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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1)<br> 청자사자형문진편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에서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는 아주 보기 드문 동물은 아니다. 주로 향로나 베개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하다고나 할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형뚜껑향로(靑磁獅子形蓋香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의 것으로는 근래 들어 눈길을 끌고 있는 청자사자형뚜껑향로 2점이다. 2007~2008년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수중발굴을 통해 출수된 것으로 지금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보물 청자사자형뚜껑향로는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앞발은 두 개의 보주를 밟고 있다. 몸에는 소용돌이 털이 새겨져 있고 벌린 입 사이로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내민 혀가 보이고 있다. 다소 파격적이고 거칠게 표현된 형상은 세련된 조형성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이질적이며 해학적인 자태는 고려인들의 또 다른 미감을 엿볼 수 있는 것이어서 여간 흥미로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뚜껑향로가 보물로 지정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간 등을 통해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출수된 도자기들이 강진에서 만들어져 개경으로 가다 난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제작 시기와 출토지 및 사용처를 분명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해학적이고 독특한 조형미,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산예출향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 고려청자의 다양성과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 제60호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사자형뚜껑향로의 사자가 모두 향로의 뚜껑이고 여타의 사자들이 베개와 같은 유물들에서 장식용으로 몸체에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반해 청자사자형문진편(靑磁獅子形文鎭片)은 이런 것들과는 유형을 달리 하고 있어 주목된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은 현재 몸체의 앞부분만 살아 있고 뒷부분은 망실되고 없다. 말하자면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 부분이 훼손되고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은 형체만으로도 어떤 기물에 부착시켜 장식되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사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의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몸체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다리가 무척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크게 벌린 입으로는 가지런한 이빨이 보이고 들창코 같은 코에 튀어나온 두 눈알에는 검은 점을 찍고 있다. 옆으로는 소용돌이 모양의 갈기 흔적이 보이고 머리 위로는 없어진 뒷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꼬리 일부분이 붙어 있다. 거기에 온몸에는 비색의 유약이 두텁게 입혀져 있다. 반 토막이 나 앞부분만 살아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어떤 기물에 장식용으로 붙어 있던 것이 아닌 독립된 한 마리 사자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편리한대로 청자사자형문진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보기 좋게 청자로 만들어진 장식용 사자였을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특수한 형태의 것이어서 주목을 요하는 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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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0) <br> 청자귀면장식기대편즐겁고 황홀해 지는 심사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기대(靑磁器臺)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그러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도편들 중에는 의외로 청자기대편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문제는 완형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용도에 대해서도 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화병이나 매병 그리고 향로 등을 받쳤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청자기대의 도편만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청자기대는 부안의 유천리 청자가마터에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강진 사당리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여기서도 도편들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천리에서 볼 수 없는 귀면이 장식된 청자기대 도편이 사당리에서 두 점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는 점이다. 귀면은 기대의 하단부 옆면에 붙어 있는데 부릅뜬 눈과 벌름거리는 코 그리고 입술 밖으로 내민 이빨 등이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귀면 중에서도 다른 것은 생략된 채 안면만이 노출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청자기대편에 대해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양식이 비슷한 도편을 한 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자귀면장식기대편은 아래쪽으로 풍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여의두형 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위에는 연판문을 장식하고 있고 위로 올라가며 투각이 있는 원통형의 대가 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손상이 있어 원형을 유추해 보기는 쉽지 않다. 귀면은 여의두형 다리와 연판문 장식 경계에 걸쳐 양각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눈알을 검게 칠해 액센트를 주고 있다. 두드러진 코도 인상적이지만 이 귀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넓게 벌리고 있는 입을 가득 메우고 있는 돋을무늬의 날카로운 이빨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편은 산화가 심한 편이어서 원래의 색감을 알 수 없지만 언뜻언뜻 내비치는 푸른빛의 유색이며 귀면장식으로 보아 강진 사당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자기대는 아무래도 독자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그 위에 올려놓는 기물의 모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자기대는 여의두형 다리에 투각이 있는 대가 단을 이루는 등 그 자체로 정성을 들여 만든 고급품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그 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물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이었을까. 따라서 청자귀면장식기대편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위에 올리고자 했었을 기물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분이었을까 매병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향로였을까. 그 것이 어떤 기물이요 기종이 되었던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을 뽐냈을 것이 분명하고 보면 이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황홀해 지는 심사를 금할 수가 없다. 아,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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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9)<br> 청자상감국화문발편가을의 냄새 가을의 정취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 중에서도 발(鉢)은 완(碗)과 더불어 흔히 볼 수 있는 기종이다. 발은 무문도 있지만 도범으로 찍어낸 양각도 있고 상감도 있다. 흑백상감의 경우 여의두문과 국화문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청자상감국화문발편 또한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문양이 복잡한데다 다른 발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 여간 주목되는 것이 아니다. 청자상감국화문발편은 내저의 원 안에 국화를 배치하고 이를 여의두문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입술에 이르는 안쪽으로 휘어진 완만한 곡선 안에는 6등분한 칸을 만들고 백상감과 흑상감의 국화문을 교차해 넣고 있다. 외면을 보면 접지면의 유약을 훑어낸 자리에 내화토 받침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전면에 걸쳐 당초문을, 그리고 그 안에 원으로 둘러싸인 흑백상감의 국화문이 네 곳에서 보이고 있다. 약간 흐트러진 문양이며 전성기의 비색을 벗어난 듯한 녹청색의 유약 등 13C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근래 나는 사정이 있어 병원에서 한 일주일 정도를 쉬고 나왔다. 커텐으로 둘러싸인 병실 한가운데 자리가 위치해 있다 보니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아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시절은 천지가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이 무슨 감옥살이인가 하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하였다. 이제 퇴원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치고 단풍 구경을 나설 처지는 아니다. 그런 아쉬움이 더욱 도편 중에서도 눈길이 간 것이 국화문이 들어간 청자상감국화문발편이었을까. 사실 국화야말로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다. 지금이야 온실에서 키운 국화들로 인해 사시사철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 이름 모를 산기슭이나 들녘에 함초롬히 피어 있는 청초한 들국화의 매력에 비할 수 있으랴. 사군자 중의 하나인 국화는 송나라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국화를 은자(隱者)로 지칭하면서부터 고결한 인격과 품격의 상징으로 보편화 된 느낌이다. 이름 모를 산기슭이나 쓸쓸한 들녘에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피어 향기를 풍기고 있는 그 고아한 모습은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한 한가함을 즐기고 있는 은일군자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우리 같은 장삼이사의 삶속에서 은일한 삶만이 능사일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해보게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다 보면 자연적으로 알던 사람도 자연 멀어지거나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년은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귀중한 시간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생일이었는데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30년도 더 전에 같은 직장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후배인데 평소에는 죽은 듯이 소식이 없다가 나도 잊고 지내는 생일만 되면 해마다 안부 전화를 해주니 고맙다 못해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무슨 사람 냄새가 난다고 이런 인복(人福)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지울 수가 없다 아, 바야흐로 천지는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발이 묶인 아쉬움을 일부는 찌그러지고 일부는 깨져 손상을 입은 청자상감국화문발편에 제주도 친구가 보내 준 노란 귤이나 두어 점 얹어놓고 깊어지는 가을의 냄새 가을의 청취나 마음으로나마 마음껏 소리쳐 느껴 볼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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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8) <br>청자상형용문편(靑磁象形龍文片)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용(龍)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강력한 왕권(王權)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이 이처럼 왕권을 상징하다 보니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요 왕의 평상은 용상(龍床)이요 왕의 옷은 용포(龍袍)로 불리기도 한다. 왕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龍飛)라고 하는데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은 왕권만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용은 민간신앙에서는 비를 가져오는 우사(雨師)이고, 물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수신(水神)이며,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벽사(辟邪)의 선한 신으로 인식되어 용신제 및 용왕굿 등이 행해지기도 한다. 용은 또 무소불위의 권능과 천변만화의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상징성을 보이다 보니 그 모습도 다양하다. 중국의 삼정구사설(三停九似說)에 의하면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개구리의 배, 잉어의 비늘, 매의 발톱 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라 자유자재한 초월적인 존재를 암시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운룡문(雲龍文)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용은 순수한 우리말로는 미르라고 하며, 용이 되려다 못되고 깊은 물속에서 사는 큰 구렁이를 이무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용은 조선조에서는 백자항아리에 청화로 운룡문이 많이 그려지지만 청자와 분청에서도 보이고 있다. 비색청자나 상감청자의 문양이나 상형청자의 용은 대개 최상급의 품질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물결과 함께 표현된 수룡(水龍), 용두구신(龍頭龜身)의 구룡(龜龍), 용두어신(龍頭魚身)의 어룡(魚龍) 등이 그 것들이다. 조선조 백자청화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운룡문은 청자에서는 후기에 와서야 상감청자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라면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 중 용이 장식된 대표적인 기명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 청자는 적잖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품 중의 명품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일본의 야마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靑磁陽刻濤文九龍淨甁)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어느 고분 석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정병은 고려 12C 것으로 높이가 33.5Cm나 되는 당당한 크기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첨대(尖臺)와 목 그리고 주구{注口)에 아홉 마리의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입을 크게 벌려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효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이 정교하고도 정성스럽게 조각을 해 형상화 되어 있다. 몸체 전면에도 용이 휘감기는 모습을 음양각 기법으로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청자를 통 틀어서도 명품중의 명품으로 꼽을만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에서 보이고 있는 아홉 마리의 용이다. 아홉 마리의 용중 목이 보이는 것은 주구와 첨대에 장식된 것뿐이다. 다른 것들은 용머리가 몸체에 바짝 붙어 있다 보니 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구의 것도 흔적만 보일 뿐 비늘에 덮인 목을 제대로 뽑아 올리고 있는 것은 첨대에 장식된 용뿐이다. 왜 아홉 마리 용중에서도 첨대에 장식된 이 용머리가 내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그 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청자상형용문편 때문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뽑아 올린 목, 쩍 벌리 입, 뒤로 날리고 있는 갈기, 거기에 눈이며 비늘 등을 음각으로 처리한 점, 비색의 색감 등이 동일한 양식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청자상형용문편이 정말이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의 첨대에서 보이고 있는 용머리 조각과 같이 청자정병첨대에 붙어 있던 장식이라고 하면 이 얼마나 귀하고도 희한한 자료인가. 하지만 나로서는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추측을 떠나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고 보면 오로지 신나고 즐겁고 감격스럽기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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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7) <br> 청자사자향로뚜껑편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일찍이 고려의 개경을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비색(翡色)이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하는데 그 대상이 비색소구(翡色小甌) 과형주존(瓜形酒尊) 산예출향(狻猊出香)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산예출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산예출향 역시 비색이다. 위에는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벌어진 연꽃 문양이 이를 받치고 있다. 여러 물건 가운데 이 물건만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산예란 원래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로 연기를 좋아하여 앉아 있기를 잘하고 사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하면 산예출향에 걸 맞는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산예출향에 근접한 것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蓋香爐)다. 뚜껑은 사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를 받치고 있는 대좌에는 꽃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 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 있는 자세이며 두 눈은 검은 점을 찍고 있다.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과한 후 벌려진 입을 통해 내뿜도록 된 구조다. 이 청자사자유개향로는 기형도 기형이지만 유색 또한 비색으로 맑고 깔끔하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주목해 볼만한 상품의 청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예출향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가 한 점 있다. 향을 피우는 몸체는 없지만 둥근 받침 위에 향의 연기를 뿜어내게 속을 비운 사자 형태를 하고 있는 청자 뚜껑이 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와 동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색도 녹청의 비색이 곱게 입혀져 있어 서긍이 언급한 비색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색감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손상이 있어 수리를 했던 것이다. 도자기 수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손상 부분을 알 수 있게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충 보아서는 아예 모르도록 정교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후자 쪽으로 이른 바 호마이카 수리라고 해서 고가로 수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점이 못마땅한데다 어느 정도의 손상이 있는 것인지 궁금도 해 수리 부분을 모두 제거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래턱이 없어지고 꼬리부분이 잘려 나갔는가 하면 다리와 엉덩이 쪽에 뚫린 부분이 있었다. 사자를 지탱하고 있는 받침 부분은 훼손할 수가 없어 그대로 두었는데 여기에는 돌려가며 장식한 음각의 뇌문이 보이고 있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의 수리한 부분을 제거한 후 나는 몹시도 즐거웠다. 그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손상이 적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소의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원형의 받침대 위에 몸을 세우고 있는 사자는 금방이라도 사자후를 토해낼 듯 당당하고도 위엄이 있는 모습이 아닌가. 거기에 유색 또한 비색을 보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즐겁고도 감사한 일이랴. 소장 중인 적지 않은 도편 중에서도 그야말로 애지중지해야 할 귀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자는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중국도 서식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우리나라 공예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의 관련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향로편 또한 예외는 아니어 불단에 향을 피우기 위해 만들어진 기물은 아니었을까. 비록 향을 피우던 몸체는 없어지고 향을 뿜어내던 사자 뚜껑은 손상이 있지만 그래도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을 보고 있노라면 현세와 내세에 대한 염원이랄까 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형태와 빛깔로 나타난 듯싶어 마음이 숙연해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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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16)<br> 백자음각지석편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로 만든 지석이 중요한 것은 제작 연도를 알 수 있어 편년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흥녕부대부인묘지석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지석은 윤번(1384~1448)의 부인인 인천이씨(1383~1456)의 묘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인천이씨는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의 모친인 흥녕부대부인으로 지석은 6장이 석함에 담긴 채로 2001년 5월18일 묘역을 사초하던 중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덮개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순백자 지석 2장과 청화 글씨가 새겨진 4장의 백자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태 7년(병자년)인 1456년 7월14일 대부인이 사망 10월8일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보이는 1456년은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백자청화의 제작 시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1467년경의 관요 설치 이전에 이미 높은 수준의 백자청화 제작기술이 실재하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자기 지석이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는 이 뿐이 아니다. 청자에서 진사(동화)가 사용된 것은 12세기 후반 경으로 중국보다 백여 년이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조로 넘어 와서는 실물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다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숭정후갑자명(1684년) 백자진사접시형지석 3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17세기 후반 경부터는 백자에서 진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자기로 만들어진 지석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편년 자료로서 귀중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따라서 도자기에 관심이 있다면 어찌 한 점의 지석인들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백자음각지석편은 상단에 장일(張一)이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장 중 첫째장임을 알 수 있다. 지석 중에는 한 장짜리도 있지만 여러 장짜리도 있는데 여러 장 중에서는 마지막 장이 중요한 것은 간기가 있어 제작 연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첫째장이어서 제작 연도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듯싶다. 백자음각지석편은 유명조선통훈대부사섬시정조공묘지명(有明朝鮮通訓大夫司贍寺正趙公墓誌銘)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주인공은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평양조씨 유형(有亨)이라는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섬시(司贍寺) 정(正)이라는 것이다. 사섬시란 태종1년(1401년)에 설치한 사섬서(司贍署)를 세조6년(1460년)에 개칭한 것으로 저화(楮貨)의 제조 및 지방 노비의 공포(貢布)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여기서 정(正)이란 사섬시에서 가장 높은 정 3품의 직위를 말하는 것으로 백자음각지석편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섬시를 총괄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서는 평양 조씨 인물들이 몇몇 보이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무래도 6대조 인규(仁規)다. 조인규라고 하면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세해 충선왕의 장인으로 권문세가의 반열에 올라 문하시중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조인규는 이런 사실 외에도 한국 도자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주목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화금청자를 원나라 세조에게 가져가 받치며 대화를 나누었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자음각지석편은 기본적으로는 세로로 된 장방형이지만 네 모서리를 약간씩 눌러 각을 죽인 형태다.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두께에 평저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세로로 기준을 잡기 위해 가는 선을 긋고 그 위에 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선명하게 새기고 있다. 관요가 아닌 지방 가마에서 제작한 것으로 깔끔한 맛은 없어도 오히려 묵직해 보이는 것이 위엄과 품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실제 부장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 첫 장만 남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과 아래 위가 깨져 분리되어 있는 것을 수리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에서 건너 왔다는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가마터에서 부적격으로 판단되어 폐기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지만 음각의 글씨나 지석의 형태로 볼 때 조선 전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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