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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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0)꼿이 안 폇다고 죽은 나물가 뿌리는 살앗네 꼿 피겟지. 약산 동대 진달래 꼿도 한 폭이 피며는 따라 피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어서 넘자. 감상 사람살이에는 절망스런 경우가 다반사다. ‘산 넘어 산’이란 말까지 있다. 그러나 음지가 양지되고,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는 법. 쨍 하고 해 뜰 날 돌아온다지 않던가. 세상에서 제일 높은 고개가 보릿고개라고 하여 허기진 배가 등에 붙는 궁핍한 시절도 있었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은 놓지 않았다. 희망만이 삶을 이어 주는 끈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찾아 올 화창한 봄날, 온 산을 붉게 물들인 꽃동산을 그리며 아리랑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그 때의 우리네는.....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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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한 깊은 시인의 숨결에 묻어나는 삶의 성찰과 인문학적 상상력", "남도 문화의 숨결과 고전 계승을 담은 토속적 시편들", 이번에 펴낸 졸저 에 붙인 출판사와 서점들의 카피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송기원 선생은 이런 표사(表辭)를 써주셨다. "이윤선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고여 자칫 글자를 놓치고는 하였다. 일자무식으로 평생을 살아낸 늙은 아버지와 일찍이 홀어미가 되어 세 남매를 거느리고 선창의 주모 노릇을 하다가 씨받이까지 된 어머니, 그 씨를 받아 금이야 옥이야 소중하게 길러낸 큰어머니, 배다른 누이들이며 뼈 다른 형들까지, 시에 나오는 이들 모두가, 나에게는 하늘에서 쫓겨온 적선(謫仙)들이며 그이들이 만든 신화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 작은 눈의 눈물샘을 건든 것은 다름 아닌 시인이며, 시인이 살을 에어 빚은 시였다. 요즘처럼 시가 추악한 기형이 되어버린 흉한 시단에, 아직도 이런 아름답고 고귀한 시인이며 시가 한 송이 꽃으로 야생화 들판에 숨어 피다니...." 땔나무꾼에게는 과도한 헌사라 한없이 부끄러울 따름이다. 목포대학교 김선태 시인 또한 장문의 시평을 붙여주셨다. 그저 고개 숙여 감사드릴 뿐이다. 민망하게도 이 귀한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는 것은 내 자랑을 하기 위함이 전혀 아니다. 오로지 남도인문학이라는 컨텍스트를 드러내고자 함이다.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라는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이를 변명할 수 있으려나. 다른 것은 내버려 두더라도 왜 남도라는 공간에서 남도의 말과 남도의 몸짓으로 시를 쓰고 노래하고 이야기하는지, 남도인문학이라는 표제를 걸어 글을 쓰는지, 에둘러 그 내력을 말하고자 할 따름이다. 여러분들의 해량을 구하며 김선태 시인의 시평 일부를 옮겨둔다.흰그늘과 곰삭음팁에 부기한 시, "'콩대를 태우며'는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을 육화시킨 명편이다. 1연과 2연에서는 타들어 가는 콩대에서 나는 소리를 판소리의 '계면조(界面調) 선율'로 연결시킨다. 판소리가 몸에 배인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감각적 발견이다(이윤선은 고수이자 소리꾼이다. 참고로 필자는 발견이 있는 시를 높게 친다). '따닥따닥' 소리가 마치 고수의 북장단 같다. 2연의 '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도 마찬가지다. 다만 선율이 '그윽'할 수 있는 것은 '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과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임을 적시하고 있다. 이는 수많은 신산고초를 겪은 후에야 비로소 '그늘'(한)이 있는 소리를 얻을 수 있다는 판소리 득음의 과정을 의미한다. 3연도 '봄가뭄 여름장마'를 겪은 '콩알'이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전라도 사투리 중에 표준어로도 등재된 '게미'라는 독특한 말이 있다. 이 말은 판소리로 치면 앞에서 말한 '그늘'과 맞먹는다. 이는 오랜 발효(숙성)의 과정을 거쳐야만 '게미'(깊은 맛)가 있는 남도음식이 만들어짐을 의미한다. '반성'(발효) 없는 소리는 그냥 '떡목'에 불과할 것이다. 4연은 콩대가 마지막까지 '한 몸 불살라' 나온 '콩재'와 '니람'(천연 쪽 염료)을 섞어 '쪽물'을 들여야만 숭고한 '남빛'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것을 '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하늘)이 내려왔다'라고 표현한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듯 이윤선은 소리나 음식이나 색깔이 모두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시련의 과정이 반드시 필요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곧 남도문화의 본질인 곰삭음의 미학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그윽이 내 몸에 이르신 이는 시에서처럼 아버지이기도 하고, 내가 찾아 헤매던 사랑, 열정, 그리움 따위의 그 무엇이기도 하고, 남도인문학의 본질, 어쩌면 우주에 충만한 신령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김선태 시인의 시평으로 소개를 대신한다."'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모국어라는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는 반만년 이어져온 인간과 자연의 모습, 전통, 역사, 문화, 예술의 혼이 살아 숨 쉬고 있다고 했다. 여기에서 '모국어'는 방언(전북 사투리)을 가리킨다. 방언은 그 지역 공간에 사는 가족과 친구와 동네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지역 토착어인 방언을 통하여 서로 연대감과 동질감을 느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면서 살아간다. 특정 지역의 정서를 드러내기 위한 문학작품의 창작에 있어서 방언의 활용은 어쩌면 필수적이다. 방언이 아닌 표준어로 그 지역의 독특한 정서나 문학적 리얼리티를 제대로 살려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은 전라남도 방언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남도 정서와 문화적 숨결을 잘 드러낸 데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전라도 사투리의 경연장이라고 할 만하다. 이윤선의 이번 시집에는 "고전과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에 깐 우주적 상상력과 초연한 삶의 태도"가 엿보이는 시 63편이 실려 있다. 시인이라면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사의 기억에서 출발해 지금껏 살아온 삶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남도의 정서적 숨결과 앞으로 남은 생에 대한 성찰을 고스란히 담았다. 가족사 다음으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고전의 차용 혹은 인유이다. 고전 민속을 전공한 그답게 고전 시가의 율격과 말투를 충실하게 따르며 탄탄한 기본기를 드러낸다. 이윤선이 시로 풀어내고 있는 남도의 설화는 주로 '섬'에 집중돼 있다. 〈내 삶의 마지막 여행지〉는 고향 진도의 부속 섬들의 탄생 설화를 자세히 들려주면서 자신도 마지막엔 그 근원으로 돌아가 섬이 되고 싶은 소망을 드러낸다."따닥따닥 타들어간다고저장단 그윽하니 계면조(界面調)의 선율이다눈 내리지 않던 지난 겨울 때문일 것이다아버지 헛기침하시던 불규칙 리듬때때로 밑둥거리 타다가 튀어 오르는 리듬대삼소삼 장단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필시 뒤늦은 여름장마 때문일 것이다어머니 정재서 딸그락거리시던 소리봄가뭄 여름장마 한 몸에 겪고도반성 한 되 콩알 만들어낸 것이 가상하다콩알 모여 간장 되고 된장 되고 고추장 된다껍질은 모여 외양간 쇠죽솥으로 간다마지막 남은 콩대 모아 태운다니람에 콩재 섞고 무명배 풀어 쪽물 들였더니쪽빛보다 그윽한 남빛 가을이 내려왔다한 몸 불살라 만드신 그윽함 때문일 것이다-「콩대를 태우며」 전문.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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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해외춤기행 동아프리카, 탄자니아 역사문화와 동아프리카 부족춤마사이족에 밀려 산속 땅굴에 사는 차가족 마을과 킬리만자로 동아프리카 여행 6일째(1월10일) 6시 기상하여 조식하고 7시 반에 중형버스로 짐은 지붕 위에 싣고 케냐를 떠나 탄자니아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다. 12시에 탄자니아 국경에 도착하여 비자 발급(50불)을 마치는데 2시간이나 걸려 2시에 출발하였다. 4시간 만에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MT.Kilimanjaro, 5896m) 등정을 준비하는 거점도시 모시(Moahi)의 YMCA호텔에 도착하였다. 장장 11시간이나 걸린 장시간 버스여행이라 모두들 지쳤다. 1월 11일 7일째 아침 6시 반에 호텔조식으로 가볍게 해결하고 킬리만자로 등정팀(140달라)과 수영 및 휴식팀, 씨티투어팀(50달라)에서 선택하는데 나는 씨티투어팀, 4명이 합류하였다. 킬리만자로 등정 입구인 마랑구(marangu, 1970m) 게이트에 가까이 올라가니 바나나나무숲을 이루고 있는 밀림지대가 나타났다. 협곡에 폭포가 있어 절벽 같은 흙 계단을 한참동안 꼬불꼬불 내려가니 폭포가 보였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협곡밀림 속의 진풍경이었다. 다시 올라오는 길에 차가족들이 가내농업으로 바나나와 커피를 경작하는 곳을 들러 잠깐 살피고 차가족(Chagga족-농업, 커피, 사이잘삼(麻), 사탕, 옥수수, 바나나) 동굴 속 생활을 볼 수 있었다. 200년 전 마사이족들이 쳐들어와 소와 사람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 때문에 땅굴을 파고 들어가 숨어살게 되었는데, 방과 부엌, 곡식 창고와 외양간 등과 죽은 가족들을 조상신으로 모시고 목각 모습으로 세워 놓고 영원히 함께 사는 것처럼 살고 있었다. 그 길이가 몇 km씩 연결되어 있고 중간 중간에 지상으로 통풍구를 뚫어 공기와 햇빛을 받고 살았다고 한다. 또한 지상에는 차가 하우스라는 삼각형 움집에 나무에 바나나잎과 풀잎을 얹어놓고 살고 있었다. 이어서 킬리만자로(아프리카 대륙에서 최고 높이, 세계 다섯 번째 높이. 뜻은 ‘빛나는 산’ 혹은 ‘하얀 산’) 등정의 관문인 1800m 위치에 있는 마랑구 게이트에 다다라 소풍처럼 도시락을 먹고 기념촬영을 하고 오후 4시경에 숙소로 돌아왔다.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에서 환상의 잔지바르섬으로 1월 12일(8일째) 7시30분 모시(Moahi) YMCA호텔에서 탄자니아 옛 수도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평화의 땅. 현 수도: 도도마Dodoma)으로 12시간을 버스로 달려왔다. 터미널 공용버스임에도 비용을 더 주니 다른 아프리카 승객이 있음에도 호텔까지 와서 짐까지 실어주었고 다르에스살람 터미널에서도 승객을 내려주고 팁의 위력으로 우리의 숙소 이코놀로지(Econolodge)호텔까지 데려다주고 갔다. 리무진 장거리 대형버스로 아래층 짐칸이 커서 승객들은 2층 버스를 탄 기분이었고 아프리카에 와서 처음 에어컨 혜택을 맛보았고 승차감도 좋았다. 그런데 이코놀로지호텔은 우리 예전 여인숙 수준으로 5층은 옥상층이라 밤12시가 되어도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열대야가 심했다. 하는 수 없이 일층 로비로 내려오니 모두들 쇼파에 앉아 카톡을 하고 있었다. 1월13일(9일째) 7시30분에 식사하고 짐정리를 다시 하면서 배낭여행은 배낭은 큰 것으로 하고 여행가방은 대형 아닌 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사이마라 국립공원 갈 때도 첫날 나이로비 썬라이즈(Sunrise) 호텔에 큰 가방은 맡기고 배낭에 3일 동안 외출분을 나눠 들고 가야해서 공간이 부족했는데 역시 다르에스살람에서도 큰 가방 맡기고 작은 배낭으로는 한계가 있어 먹거리와 옷 종류를 별도로 비닐 백에 담아 물 끓일 포트까지 담아들고 나섰다. 페리호를 타고 잔지바르(Zanzibar: 검은 해안)로 떠나기 전에 환전하는데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육수가 줄줄 흘렀다. 페리호 승선 11시30분까지 1시간이 남아 일행 몇몇이 해변 씨푸드 시장으로 택시타고 나가 오징어를 사서 데쳐 아주 맛있게 먹고 승선했다. 엄청 더워 쓰러질 지경이었지만 생전에 이렇게 맛있는 데친 오징어 별미가 그나마 위안이었다. 이윽고 잔지바르에 도착했다. 4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 햇볕에 나갈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숙소배정을 마치자 바닷가로 나갔다. 여기저기에 씨푸드 노점상들이 눈에 띄었다. 문어, 갑오징어, 소라, 게 등을 즉석에서 구워 팔고 있어 문어를 주문하고 사탕수수를 즉석에서 수동기계로 짜내는 주스를 사먹었다. 그리고 즉석에서 구워 만든 문어피자를 먹으니 고소한 버터 맛에 한 끼 밥이 되었다. 잔지바르 노예무역전시장과 잔지바르 전통춤 공연 1월14일 10일째를 맞았다. 오늘은 잔지바르의 식민지시절 노예감옥소와 노예로 팔려나가던 슬픈 역사를 간직한 프리즌섬(Prison island)에 배를 타고 나갔다. 인도양의 쪽빛바다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석양에 해떨어질 때까지 시원함과 씨푸드를 만끽했지만 오늘도 바닥까지 훤히 들여다보이는 바다 속을 쳐다보며 일행은 작은 섬 모래사장에 내렸다. 먼저 바다거북과 공작새가 서식하는 곳에 가니 백오십년 이상 된 대거북(Giant Tortoise)부터 어린 거북까지 수많은 거북이들을 사육하고 있었다. 짝짓기를 하면서 내는 소리가 공룡소리 같았다. 노예감옥소와 쇠사슬 고문장과 경매장, 곧바로 바닷가로 승선시켜 팔려나가던 부둣가가 슬픈 아프리카인들의 역사의 현장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잔지바르로 배를 타고 돌아와 바오밥나무 그늘아래 식당이 사람들이 많아 찾아와 먹는 차이니스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식후 프리즌 박물관에 가서 노예의 역사와 생활, 문화 등 사진과 그림을 곁들인 전시관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이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생존하며 자신들의 역사와 문화를 지켜온 내력이 전시되어 아이러니한 그들만의 자존감마저 느꼈다. 다시 스톤타운(Stone Town)이라는 미로의 집들과 상점들을 둘러보다가 예전 성곽 안에서 공연이 있다하여 5 달러를 내고 공연을 관람하였다. 〈zanzibar school of acrobatic sports〉단의 주최로 잔지바르 음악과 전통춤, 그리고 아크로바틱 조립체조와 텀블링, 무술대련체조 등이었다. 1월15일(11일째) 조식 후 9시 셔틀버스로 능귀(Nunggui)로 출발하였다. 해안도로를 따라 1시간 30분 달려온 능귀는 유명한 휴양지로 에메랄드빛 바다와 백사장과 별장들이 즐비하였다. 드디어 일행들은 수영복차림으로 백사장에서 돛배를 타고 처음엔 엔진으로 출발했다. 한참 해안선 따라 절경을 감상하고 물안경, 구명조끼, 오리발을 착용하고 바다 속으로 풍덩풍덩 빠져 물고기들을 관찰하며 수영을 즐겼다. 돌아오는 길에는 돛을 내려 낙조에 낭만이 깃들어 모두 숙연해지고 있었다. 올드 팀들만 모여 유명한 씨푸드 맛집을 찾아나서 랍스타와 킹피쉬 등과 맥주와 와인을 곁들여 늦은 저녁을 즐겼다. 오늘은 아프리카 여행 중 가장 여유있고 낭만적인 하루를 즐겼다. 탄자니아 국립박물관과 부락박물관의 부족춤 1월16일(12일째) 10시에 다시 잔지바르로 셔틀버스를 타고 떠나 중간쯤에 스파이스 농장에 들러 여름과일, 향신료 재배농장 견학과 향내체험을 하고 과일시식에 이어 식사에서도 다양한 과일을 나눠줘 먹고 식사도 맛있게 먹었다. 다시 출발하여 2시 잔지바르 선착장에 도착하여 고속페리 티켓을 받아 입국사증을 받고 기다렸다가 승선하였다. 같은 국내에서 입국사증을 받는 것은 현재의 탄자니아로 탄생하게 된 1964년 이전에 탕가니카(수도 다르에스살람)와 잔지바르가 각기 독립국가에서 통합한 역사의 잔재로 남아있는 것이다. 다르에스살람에 도착하자마자 몇 명만이 탄자니아 국립 박물관으로 향했다. 역시 탄자니아 동물화석과 인류진화를 밝혀주는 인류화석, 그리고 수많은 암각화와 노예매매로 끌려가고 핍박받던 시기의 자료들이 주로 전시되어 있었다. 1월17일(13일째) 30도가 넘어 찌는 듯한 여름 날씨는 일행들의 행동반경을 위축시켜 휴식이나 가볍게 재래시장을 다녀오는 정도로 오전 일정을 마치고 시내근처에 부족춤도 보여주는 부락박물관이 있다하여 주소를 가지고 몇몇이 택시를 타고 나섰다. 하지만 주소지에는 부락박물관(Village museum)이 없어진지 오래고 외곽 멀리 옮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되돌아왔다.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동아프리카 마지막 여정을 그냥 끝낼 수 없는 아쉬움이 뇌리 속에 맴돌고 있어 다시 용기를 내어 혼자서 새로 찾은 주소를 가지고 입장료보다 열배나 많은 택시비를 지불하면서 부락박물관을 찾아갔다. 허름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박물관이지만 별도공연비까지 지불했다. 박물관 내부와 소수부족 가옥을 민속촌처럼 전시한 마당 한구석에는 가족팀 같은 공연자들이 반주악기를 설치하고 이동식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원으로 배치한 가운데 앉았다. 관객은 나 혼자지만 캠코더와 사진촬영 준비를 마치니 드럼과 실로폰 반주에 맞춰 광란의 요동춤을 추기 시작한다. 한참을 보고 있을 때 서양인 관객들이 10여명이 입장하여 함께 감상을 하였다. 한 가족들이 다양한 춤을 선보이기는 하는 것 같지만 여러 부족의 특성을 찾아볼 수 없는 춤들이어서 아쉬웠다. 1월18일 23명중 30일간 여행팀 18명은 기차로 서아프리카와 빅토리아폭포와 남아공 희망봉을 거쳐 귀국하는데 중간 귀국자 5명은 다르에스살람 공항에서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국제공항에서 환승하여 19일(15일째) 저녁7시25분에 인천공항으로 귀국하였다. 동아프리카 춤의 특성 동아프리카 춤은 다른 지역 춤보다 동작이 폭발적이고 격렬함이 특징이다. 그들의 외향적 문화기질을 잘 나타내 보이는 것으로 남성들의 뜀뛰기춤, 발차기춤, 여성들의 전신요동춤, 엉덩이춤 등이 동아프리카의 춤 패턴에 속한다. 또한 동아프리카춤의 반주악기는 아주 다양하지만 그중 타악기 종류가 가장 많으며 복잡한 리듬과 2박자와 3박자의 중복되는 리듬도 많아 아프리카 춤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다. 물론 아프리카 춤의 일반적인 특징은 빠른 비트의 타악반주와 광란에 가까운 몸짓으로 흥미진진하며 원초적인 무형식으로 표현이 다양하고 풍부하다. 춤의 근원적 특성도 활력과 삶을 고양시키는 수단과 목적을 지니고 있다. 이는 부족 간의 적대적인 환경과 맹수와 수렵의 위험 속에서 삶을 보호하고 삶을 증대시키는데 주로 관여한 부족민들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원래 춤이란 사회적 문화적 연관뿐만 아니라 신앙과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춤은 한 공동체를 결속시키고 동시에 그 집단의 사회구조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연결고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프리카 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축제에는 사냥, 수확, 출생, 성인식, 결혼, 질병과 치유, 죽음 등이 포함된다. 중요한 축제나 의식 때 아프리카 부족들의 춤에는 트랜스(trance) 또는 심할 경우 엑스터시(ecstasy) 지경의 열광적인 주술적 샤머니즘적 춤에서부터 장례식 때의 차분한 춤까지 다양하다. 그리하여 중앙아프리카 수도 방기지방의 반다족 가자(gaza)춤은 소녀들의 성인식 때 한데 어울려 격렬한 동작으로 트랜스에 이르기까지 장시간 계속 춘다. 또한 베냉 솜바(somba)족의 풍년제 ‘쿠브워티(kubwoti)’는 마을의 청년들이 농사와 관련한 여러 가지 형태의 상징물을 머리와 등에 걸치고 나무껍질에 붉은 칠한 옷으로 치장하여 흥겹게 춤을 춘다. 또한 다산, 성공적인 사냥, 비, 풍작 등 희망적인 춤들은 기우제의 레인 댄스(rain dance)에서처럼 일반적으로 상징적 주제와 부합되는 모방적인 춤 패턴을 포함하고 있다. 춤들의 일부 혹은 전부에 나오는 기본적 패턴(pattern)은 추상적(abstract)이거나 모방적(mimetic)인 것이다. 많은 춤들은 단순히 사회적 표현 충동과 움직이고 리드미컬하게 운동하고 스스로 즐겁게 하려는 집단적인 욕구로부터 기인한다. 그래서 저녁에 중부 아프리카의 음부티(Mbuti) 피그미족은 북을 치고 동시에 한발 한발 뛰며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밤새껏 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마사이족 문화와 춤 마사이족이란 좁게는 케냐와 탄자니아에 걸쳐 있는 그레이트 리프트밸리 지역에 사는 유목 마사이족을 말하나, 넓게는 케냐의 삼부루족, 탄자니아에서 반유목생활을 하는 아루샤족과 바라구유족도 포함해서 나타내기도 한다. 이들은 남자 중심의 사회이며 모든 씨족은 남자들이 우선권, 결정권을 가지고 움직인다. 또한 일부다처제로서 씨족외혼이 이루어지며 같은 연령집단에 속한 남자들끼리 아내를 빌려주는 풍습(Swapping)이 있다.마사이족과 가축과의 관계는 탄생신화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은가이(Ngai, Enkai)와 킨동오이(Kindongoi)라는 신이 하늘나라에서 마사이족을 지상으로 내려 보낼 때 소와 양, 염소를 같이 내려 보냈다는 것이다. 소를 중시하는 마사이 전사는 소를 약탈하고 다른 종족으로부터 이를 지키는 것이 임무로 긴 창으로 상대를 위험하며 용맹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마사이족은 타고난 전사로서 호전적이고 용맹해서 노예상인들에 끝까지 저항하여 죽거나 죽이거나 하자 마사이족 노예사냥을 포기했기 때문에 마사이족이 노예로 끌려간 경우도 거의 없었다. 보통 마사이족의 남자들은 열두 살에 이르면 할례와 성인식을 치른다. 그리고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병사촌에 들어가 일정 기간 창과 칼로 야생동물을 잡는 방법, 소를 기르는 방법 등을 배우며 부족을 지키는 전사로 태어난다. 오늘날 마사이족이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 남자의 성인식이나 여성의 할례, 다른 부족의 가축 약탈 등의 전통은 많이 사라져 가고 있다. 마사이족의 전사들을 '모란(Moran)'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에게는 가사를 면제받을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지지만, 마을에 위급한 상황이 생기면 즉시 모여야 할 뿐만 아니라 전쟁터에도 나가야 한다.케냐나 탄자니아 마사이족 남성들은 막대기를 들고 차례로 돌아가며 하늘 높이 뛰면서 춤을 추고, 여자들은 무릎만 살짝 구부린 채 춤과 노래를 부른다. 남자들이 껑충껑충 하늘로 뛰는 춤을 추는 데에는 용맹을 과시하면서 하늘과 가까워지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남성미를 과시하여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몸짓이라고도 한다. 젊은 전사들의 점핑춤(adumu, 또는 aigus)은 일렬로 투스텝으로 전진하며 원무로 돌다가 멈추고 한두 명이 점프를 시작하기 위해 중앙으로 들어가 점핑춤을 추는데 발뒤꿈치가 땅바닥에 닿지 않게 춘다.은노토(Eunoto)는 10살 또는 그 이상에서 전사의 성인식에서 행하는 노래와 의식춤이다. 이때는 젊은 여자들도 가장 화려한 의상을 입고 함께 추며, 전사(moran)의 어머니들도 아들의 용기와 대담성을 찬양하며 노래하고 춤을 춘다. 젊은 남녀들의 집단춤은 서로 줄을 서서 부드러운 저음으로 "하 우아"라고 내뱉으며 하체를 밀어냈다 당긴다. 여자들은 남자들 앞에서 서서 골반을 튀게 하고, 남자들과 대등하게 "오이 요요”라고 화음으로 맞춘다. 노래를 부르며 숨을 내쉴 때 머리를 앞으로 기울였다 들이쉴 때 뒤로 살짝 젖히며 가벼운 목춤을 춘다. 동아프리카 춤기행 후기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내내 인류역사 700만년의 여정을 겪으면서 생사의 갈림길을 넘고 넘어 포식자인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로 진화한 요람의 땅이었는데 오늘날 궁핍한 원시모습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래서인지 아프리카의 춤과 음악은 원시시대처럼 생존의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예를 들어 사냥 나가기 전에 사냥성공을 기원하면서 절실하게 수렵춤을 추었고, 사냥성공 후에는 배고픔을 해결한 기쁨의 춤을 추고 노래 부른 것도 알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미래는 어두운 것만은 아니었다. 광활한 대자연과 자연 그대로의 동물들, 원시춤과 음악, 무궁한 가능성을 지닌 젊은 대륙 같은 긍정적인 요소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모두를 하나가 되게 해주었던 마력의 힘을 지닌 그들만의 다양한 춤과 음악이 있었기에 아프리카에 대한 동경과 친근함을 느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인 미지의 세계는 한층 더 새롭게 다가왔으며 기회만 된다면 또다시 문화탐사를 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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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촛불 켜는 밤 / 이해인12월 밤에 조용히 커튼을 드리우고 촛불을 켠다. 촛불 속으로 흐르는 음악 나는 눈을 감고 내가 걸어온 길, 가고 있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이들의 수없는 얼굴들을 그려본다. 내가 사랑하는 마루나무를, 민들레 씨를, 강, 호수, 바다, 구름, 별, 그 밖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생각해본다. 촛불을 켜고 기도하는 밤, 시를 쓰는 겨울밤은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추천인: 김경순(KBS방송작가) "오늘 국내외 동포대상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 시상식이 있었다. 디아스포라에 대한 가족사, 동포들의 눈물에 대한 이야기를 서사시로 승화시켰다. 얼마나 아름다운 축복인가. 내가 걸어온 길, 가고 있는 길, 그 길에서 만난 이들의 수없는 얼굴들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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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2)<br>분청양산명접시편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우리가 고미술을 아끼고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옛것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자는데 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미술이라는 것이 재화와 관련이 있다 보니 생각보다 불미스러운 일이 흔치 않게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름다움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고미술 때문에 오히려 심성이 망가지고 생활이 어지러워 질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겠는가. 고미술을 좋아는 하대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고미술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모았던 고미술품으로 인해 끝내는 송사까지 벌려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결론 없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 일 때문에 크게 실망을 했는지 선배는 그 후 고미술계와는 완전히 발을 끊고 산과 들로 사진을 찍으로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그마저 끝내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 선배에게서 오래 전 선물로 받았던 것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있다. 상리마을 뒤편 계곡과 호포부락 뒤편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가 바로 그 것이다. 두 곳 중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호포가마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는 다양한 종류의 분청사기는 물론이거니와 명문도 발견이 되는데 양산장흥고(梁山長興庫)와 장흥고 등이 그 것이다. 이로 보아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양산에서 중앙 관서에 상품을 납품하던 중요한 공납용 자기 제작소였음을 알 수 있다. 분청양산명접시편은 훼손이 심해 작은 조각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호포가마터를 찾아 직접 습득한 것인 듯 95.2.9라는 날자와 양산이라는 글자가 명기되어 있어 출토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접시편은 굽부터 몸체로 거칠게 인화분청이 시문되어 있다. 접시 내저에는 국화문이 상감되어 있는데 이 또한 거칠어 문양은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접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내저 중앙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양산(梁山)명이다. 비록 삼수변은 훼손되고 없으나 선배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양산명을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선배와 소식이 끊긴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선배는 지금도 카메라를 메고 산과 들을 누비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나 나보다 손 위인 선배의 나이를 생각하면 장담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 양산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선배보다도 내가 더 일찍 답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건네 준 것이 바로 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따라서 훼손이 심해 아주 작은 도편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가슴을 스쳐지나가고 또 지나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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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16>이필기의 대금 – 국가무형문화재 <강백천류 대금산조> 지난 달에 소개한 이필기 연주자의 첫 음반 <김동진류 대금산조>는 판매용으로, 이 음반은 비매품으로 출반한 음반이다. 사실은 이 음반이 먼저 나온 것이다. 이필기 대금 연주자는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한양대학교 음악대학원을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일반대학원 국악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으로 현재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부수석으로 재직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강백천류 대금산조 이수자이다. 음반에는 강백천류 ‘긴산조’ 2곡이 수록되어 있다. 한 곡은 ‘강백천류 대금산조’, 한 곡은 김동표 가락의 ‘강백천류 대금산조’이다. 장구는 이영섭 교수(영남대학교 음악대학 국악전공)가 맡았다. 강백천 명인은 전북 남원 출신이다. 17세부터 박준필에게 대금과 정악풍류를, 전용선에게 단소, 가야금, 시조를 배웠다.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받았으며 그 후 부산에 정착하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었다. 김동진과 김동표 명인이 그의 제자이다. 그의 산조는 남도민요에서 터득한 시나위풍의 새가락을 중심으로 짜여져 있다. 2 곡의 ‘강백천류 산조’는 많은 연구의 산물로 강백천류를 공부하는 연주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이 음반도 PC에서 제작되었다. 해설서에는 ‘강백천류 대금산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수록되어 있다. 국악재즈소사이어티 <사물놀이 판타지 : 계절> 이 음반은 9인조 앙상블 국악재즈소사이어티(The Gugak Jazz Society)의 두 번째 음반이다. 국악재즈소사이어티는 한국, 그리스, 미국 출신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다국적 앙상블로 2019년 보스턴에서 조미나의 작품, 재즈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판소리 칸타타 프로젝트 ‘길령전’의 초연을 준비하며 모이게 된 그룹이다. 이 음반 <사물놀이 판타지 : 계절>은 2022년 미국 보스턴에서 국악재즈소사이어티에 의해 초연된 조미나의 창작음악극이다. 한국 전통 연희에서 영감을 받아 사물놀이와 판소리를 중심으로 선보이는 현대적인 음악극으로써, 재즈와 블랙 가스펠 등 다양한 장르를 접목하여 세계인과 소통하는 연희를 구현하고 있다. 이 음반에는 조미나 작곡으로 ‘달빛기도’ 등 음악극의 이야기와 음악전개에 핵심이 되는 11곡을 담았다. 이색적인 음반이지만 너무 비싸게 출반되었다. 해설서는 보통으로 우리말과 영어로 된 해설서가 따로 들어 있다. 그레이스비트퀄텟 <Beat Mirage>-환상비트- 그레이스비트퀄텟(Grace Beat Quartet)는 위 음반에서 소개한 국악재즈소사이어티 조미나의 프로젝트그룹이다. 국악재즈소사이어티는 지난 몇 년간의 음악적 여정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친 그들의 프로젝트에서 한국 전통음악과 재즈를 결합한 리듬 형태를 주로 창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통 음악가와 재즈 음악가들이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교류하며 작품을 창조적으로 조율하는 연주를 추구하게 되었고 여기에 4명의 뮤지션이 뭉친 것이다. 피아노 조미나, 국악타악 김인수, 드럼 김영진, 더블베이스 맥스 리들리이다. 작곡은 모두 조미나 피아노 연주자이지만, 4명의 연주자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낙송’(우리의 무속장단이 낙궁에서 영감을 받은 곡) 등 7곡을 담았다. 곡들은 악보에는 표시되지 않지만 문화적 전통적 영향을 받는 유연한 리듬으로 표현되고 있다. 연주자들의 다양하고 흥미로운 ‘비트에 대한 순간적인 해석’이 마치 음악적 미라주(Mirage)처럼 느껴져 이 앨범을 ‘환상비트 (Beat Mirage)’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한국의 전통과 재즈의 자유로움으로 채워진 음반이다. 해설서는 우리말과 영어로 수록되어 있으며 음반 가격은 좀 높게 책정되어 있다. Coree <Kim Hae-Sook Gayageum Sanjo>-김해숙- 이 음반은 2012년 프랑스에서 출반한 음반으로 최근에야 수입되어 현재 구할 수 있는 음반이다. 2011년 국내 녹음으로 김해숙 교수가 연주하는 <최옥삼(최옥산)류 가야금산조> 한바탕이 수록되어 있다. 장구는 윤호세 고수가 맡았다. Ocora Radio France는 세계적인 민족음악 레이블이다. 김해숙 연주자는 부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성장하였으며 국립국악중학교 입학을 계기로 가야금을 시작했다. 국립국악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70년대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하여 40여 년간 가야금 명인으로서 높은 명성을 지켜오고 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악과에서 수학하였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4년부터 최옥삼류 가야금산조의 유일한 계승자였던 함동정월 명인을 사사하였다. 뛰어난 음악해석을 바탕으로 논리정연한 연주력을 갖추었고 매력적으로 선율을 표현한다는 평가와 더불어 절제된 감정으로 품격 있는 연주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립국악원 원장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퇴임 후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 음반에 담긴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는 ‘최옥삼-함동정월-김해숙’으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정교한 짜임새와 논리적 진행을 가진 작곡자의 산조로서 잘 알려져 있는 곡이다. 최옥삼 명인은 전라남도 장흥 출신이며, 가야금, 대금, 단소, 아쟁 등 여러 악기에 능통했으며, 최승희 무용음악 등 작곡도 다수 남겼다. 그의 산조는 또한 성애순, 김일륜, 윤미용, 정회천 명인 등 여러 제자들을 통해 전승되고 있다. 해설서는 우리말, 영어, 불어로 설명되어 있으며 DVD케이스 크기로 고급스럽게 제작된 음반이다. 반가에 한 장 세워놓기에 좋은 가야금산조 음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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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가치‘찬미가’는 1908년 6월 광학서포의 활자본으로 발행한 찬송가집이다. 윤치호는 12편을 번역하고, 3편을 창작하여 번역과 편찬까지 하여 발행하였다. 평신도로서 활동하는 윤치호의 신념대로 실용성을 중시하여 소박하게 서문도, 목차도 없이, 소규모 책자로 만들어 2전5리 염가로 판매하였다. 찬송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가장 아름답고 선한 길 중의 하나다.”라고 하여 신앙에서 매우 중요하다. 윤치호는 신앙고백에서 확인이 되듯이 충실한 기독교인이다. 깊은 신앙심과 애국심에 의해 역술하여 발행한 찬송가집이다. "상오 10시에 삼가 세례를 받다. 이날 하늘은 맑고 날씨는 따뜻한데 바람도 잔잔하고 구름도 걷히어 근일에 제일 좋은 날씨이다. 이날부터 나는 삼가 교(敎)를 받들고 주(主) 믿을 것을 맹세하였으니 가히 일생에 있어 제일 큰 날이라 하겠다.” 1887년 4월 3일 보낼 목사로부터 세례(洗禮)를 받았다. 이날 일기에 남긴 신앙고백이다. 이러한 절실함에서 최초의 한국인 편찬 찬송가집을 발행할 수 있고, 애국적 찬송가 3편을 작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윤치호 역술 ‘찬미가’의 가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첫 째 가치는 현 애국가를 제14장에 수록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1980년대부터 2000대에 이르는 기간 서지학자이며 순흥안씨 후손인 안춘근 교수에 의해 ‘애국가류’ 필사 자료 3종 공개를 통해 1907년 이전에 유사한 ‘애국가’가 존재하여 ‘자필 가사지’의 "1907년 윤치호 작”이란 기록은 문제가 있다고 논의된 바 있다. 이 세 가지 자료를 근거로 SBS <그것이 알고 싶다>라는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세 가지 자료를 객관적으로 검증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오히려 조작된 자료임이 확인되었다. 결국 1907년 이전에 현 애국가 가사와 유사한 것이 없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로서 윤치호가 1907년 작사한 것이 사실이며, 이를 최초로 ‘찬미가’에 수록하였다는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다음 두 번째 가치는 윤치호의 충군애국적 신앙이 그대로 담긴 출판물이란 점이다. 당시 기독교의 신앙 목표가 구국과 독립임을 입증하는 것인데, 3편의 창작 ‘애국적 찬송가’의 각 명명(命名)에서 확인된다. 이는 한국 찬송가 연구사에서 3편의 곡명을 명명한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이에 대한 첫 연구 결과는 민경배의 ‘한국교회 찬송가사’(韓國敎會 讚頌歌史)에서는 제1장을 ‘皇帝頌’, 제10장을 愛國頌, 제14장은 ‘愛國歌’라고 규정한 것이다. 제1장은 1897년 고종황제의 칭제건원(稱帝建元)을 기점으로 대한제국의 발전을 기원하는 내용을 근거로 하였다. 제10장은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조국의 독립부강을 기원한 내용에 근거한 명명이다. 제14장은 1919년 3. 1운동까지 수많은 애국적 노래 중에 대표적인 애국가로 민중의 지지를 받은 사실에 따른 것이다. 세 번째 가치는 한국 찬송가 역사에서 갖는 것으로, ‘찬미가’가 한국인에 의해 편찬된 최초의 찬송가집이라는 점이다. 개신교 선교사의 한국선교 13년만의 일이다. 이 기간에 3종의 찬송가집이 발행되어 사용되었다. ① 1892년 미국 감리교 선교사 존스(G. A Jones)가 27편의 무곡(無曲) 가사를 수록하여 펀찬 한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찬미가’ ② 1894년 117편의 찬송가를 4성부 악보로 표기한 언더우드(H. G. Underwood) 편찬의 장로 교 복음찬송 ‘찬양가’ ③ 1895년 북장로교 선교사 그레한 리(G. Lee)가 편찬하여 58편의 악보 찬송을 발행한 장로 교 번역 ‘찬셩시’ 이상의 세 가지가 모두 외국 선교사에 의해 편찬, 발행되었다. 여기에는 한국인에 의해 작사된 찬송가는 ‘찬성시’에 단 1편이 수록되었을 뿐이다. 이런 사실에서 윤치호 역술 ‘찬미가’는 을사늑약으로 기독교가 항일성향으로 가는 것을 우려하여 공식적인 찬송가집으로 채택하지는 않았지만 이후 한국 찬송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첬다. 당연히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 내의 서정시인(敍情詩人)이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했듯이 윤치호 같은 "계관 시인”이 등장함으로서 가능한 것이었다. 윤치호는 기독교가 가진 현실적인 힘, 일을 해 낼 수 있는 기독교, 현실을 변혁시킬 수 있는 기독교, 살아있는 기독교로 인식하였다. 애국과 충군의 열기로 충만한 시기에 교회와 민족의식을 구조적으로 동일시한 세례 교인으로서, 가사를 짖고, 보편적인 곡을 붙여 출판물로 보급할 수 있는 인물이 윤치호를 제하고 없었다는 것이 된다. 네 번째는 세 작품에 부곡된 두 곡조를 역사성과 민중성을 담보한 것으로 채택하였다는 점이다. 제1장 의 곡명(Tune Name) ‘AMERICA’는 세계 찬송가나 영미의 음악상황을 고려하여 택했다는 것이 된다. 이 곡은 영국의 국가(國歌) 곡조이다. 1740년에 발행된 ‘Saurus Musicus’에 수록되었는데, 이를 채택하여 ‘God savr our glrious King(Queen)의 곡조로 썼다. 또한 미국의 사무엘 스미스(S. Smith)가 지은 애국시 ’My country, tis of thee’(‘나의 조국, 주님의 나라’)에 붙여져 미국인들이 가장 애창하는 애국가요가 되게 했다. 이와 함께 덴마크, 러시아, 독일 등에서도 애국적인 가사에 부곡되어 널리 불렸다. 바로 이 곡의 세계성과 애국적 성격을 인식하고 대한제국 황제의 만세와 국가의 독립 부강을 기원하는 가사의 곡조로 택한 것이다. 동시에 대한제국의 위상을 의미상 영국과 미국에 견준 것이기도 하다. 다음 제10장과 14장의 곡조 ‘AULD LANG SYNE’도 특징이 있다. 즉 단순하면서도 호소력이 있는 멜로디 진행으로 4.5도 도약진행과 동음을 반복하여 민중들에게 쉽게 받아드릴 수 있는 곡을 택하였다는 것이다. 이 곡이 처음 알려진 것은 영국의 음악가 쉴드(W. Shield, 1748~1829)가 스코틀랜드 구전민요인 이 곡을 오페라 ‘Rosina’에 서곡으로 사용하여 널리 알려지게 했다. 그런데 이 곡은 5음 음계를 사용한 선율로 우리 국악 체계(오음선율임)와 맞는다. 곧 민중성과 보편성을 갖는 곡으로, 이를 윤치호가 채택하여 두 노래를 널리 보급시킬 수 있었다. 윤치호의 높은 식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섯 번째는 12편 번역이 뛰어나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이미 발행한 세 가지 찬송가집에 수록된 것들로서, 윤치호는 이를 모두 새로 번역하여 수록하였다. 그런데 이 영미 양국 고전시와 낭만시 계열 12편의 번역이 기존 번역과 비교할 때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다. 1897년 5월 3일자 일기에서 이 시기 불리는 찬송가의 번역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 바 있다. 작사자의 뜻에서 멀게, 또는 지나치게 의역을 한 경우를 들았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한국말 찬송가들은 이로 말할 수 없이 그 번역이 미약해 부끄럽다” 찬송가학계에서 비교 분석한 결과로는 ‘찬미가 12편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고 세련되게 번역하여 시적(詩的)이게 했다”고 밝혔다. 이런 탁월한 번역으로 ’절대의존 고백찬송‘ 4편, 애국적 찬미가’ 3편, ‘선교에 대한 사명찬송’ 3편, 행군적 찬송 2편, ‘찬양과 예배의 찬송’ 2편, ‘성도의 교제 찬송’ 1편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찬미가’는 민족교회로서의 틀을 갖춘 반일과 충군애국의 교회 시대에 윤치호의 애국적 신앙을 반영한 찬송가집으로서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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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69)동학란노래 개남아 개남아 진개남아 수많은 군사를 어데 두고 전주야 숲에는 유시했노 봉준아 봉준아 전봉준아 양에야 양철을 짊어지고 놀미 갱갱이 패진했네 동학란노래를 쓰다. 계묘년가을 한얼이종선 감상 *진개남: 김개남(金開南)이다. 전봉준과 더불어 동학란을 이끌었다. *유시(遺屍): 시체가 되다. *패진(敗陣): 패전. 전투에서 지다. *놀미: 논산, 갱갱이: 강경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며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나라는 혼란하였다. 1894년 고부군수 조병갑의 수탈에 항거하여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증폭되어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 동학란, 동비의 난, 갑오농민운동으로 불린다. 동학농민운동은 교조 신원운동에서 시작되어 고부 봉기, 그리고 제2차 전주성 봉기에 이어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들과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12월 패배함으로서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결국 실패하였다. 이 노래는 동학란 실패에 대한 백성들의 회한을 담고 있다. 고체로 가로쓰기 하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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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1)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말라카 황징항(皇京港)에서 마조해협까지 오래전 중국 복건성 천주시에 갔을 때 깜짝 놀랐던 것이 있다. 신라여관, 신라 주유소, 신라 다리 등 신라라는 수식을 건 간판이나 이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적화원이라는 절을 복원하여 관광지가 된 산둥반도 석도진을 포함해 신라관, 신라방, 신라소, 신라원의 거점이 천주시를 위시한 복건성 지역이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내가 3년여 오가며 현장조사를 했던 절강성 주산군도의 보타도 앞에는 심지어 '신라초'라는 이름의 암초가 있다. 얼마나 많은 신라의 배들이 이곳에 부딪혔으면 신라초(新羅礁)라는 이름을 붙였겠는가. 혹은 얼마나 많은 신라 사공(선장)들이 배를 몰고 이곳을 지나다녔으면 이같은 이름을 붙였겠는가. 물론 신라초에는 신라로 싣고 오려던 관음불과 관련된 몇 가지 설화들이 있다. 보타도의 조음동(潮音洞)은 낙산사 홍련암과 설화 맥락이 거의 동일하다. 아쉽게도 일본에서 먼저 이곳에 사찰을 세우기는 했지만, 관음보살을 넘어서는 고대로부터의 아시아적 네트워크 흔적임에는 틀림없다. 이곳 복건성과 절강성을 횡단하는 마조(媽祖)해협으로부터 말레이시아 말라카해협은 단순한 물길이 아니다. 시진핑이 정화(鄭)의 원정 내력을 들어 일로(一路)의 비전을 세운 것도 이 해양실크로드가 가진 중요성 때문이다. 심지어 주산군도에서 시작한 어민화(어민들이 그리는 민화)도 실크로드의 기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중국이 투자해 짓고 있는 말레이시아 말라카 황징항(皇京港)도 맥락이 같다. 나는 오래전 말라카해협의 정화박물관에 들러 이곳을 오고 갔을 고대의 한반도인들을 떠올리곤 했다. 신라초니 신라방이니 하는 거점의 신라인들이 필경 정화 못지않은 선박운영을 하였을 것이고 종교적인 맥락으로만 말하더라도 불교의 관음 네트워크를 넘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혹은 더 이전의 브라만교나 시바교에까지 닿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 가야 방면의 여러 사찰에서 산견되는 요니와 링가 등의 힌두교 흔적들은 가야국 수로왕과 허황옥 전설을 넘어서는 상상들을 가능하게 해준다. 변산반도 죽막동 출토 유적들이 오키노시마와 양자강 하류의 유적과 동일하다는 점을 비롯해 해남 등 서남해에 출토되는 중국발 유물들을 통해 이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다. 신라인이라는 호명은 백제로 마한으로 아니 더 이전의 한반도인들로 거슬러 오른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중국의 해양실크로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해양과 관련된 지정학적, 철학적 아젠다를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아니 중국에 비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말이다. 해경표(海經表)의 새로운 구상 해경표란 무엇인가? 내가 오랫동안 제안해온 갱번론(gengbone theory)의 하나다. 해항도시니 강항도시니 하는 사람 중심의 지정학을 넘어선 생태학적 포지셔닝이기도 하다. 지난주 이미 갯벌이 'Getbol'이라는 우리 고유명칭으로 세계자연유산에 등재된 바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Gengbone'(본 칼럼에서 수차례 제안했으므로 더 이상의 설명은 피한다)이라는 명칭이 가지는 의미에 관해서다. 신경준(1712~1781)이 썼던 <산수고(山水攷)>와 <강계고(疆界考)> 등을 토대로 우리 국토를 산맥 중심으로 해석한 것이 이른바 <산경표(山經表)>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을 대간(大幹)으로 읽고 거기에 12지류를 정맥과 정간으로 읽으며 그 안의 도시와 강과 섬들을 배치하는 국토 인식론이다. 설정해둔 산이나 도시들을 보면 중앙중심, 수도 중심의 사고와 12지라는 철학적 사고가 직조해낸 철학 체계임을 알 수 있다. 중심으로 설정한 한양이나 개성 등은 백두산에 이르고 심지어 마고산에 이른다. 실증을 중시하는 주류사학계든, 일종의 관념을 투사하여 인식의 범주를 넓히려는 비주류 사학계든 이 산맥 중심의 사고는 서로 대립적이지 않다. 이들의 관념에는 단군신화의 동굴도 백두산에 있고 환웅이 천부인을 갖고 하늘에서 내려온 신단수와 신시도 백두산에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전제하는 이 지정학적 지향임에도, 급기야 백두산을 넘어 히말리야에 이르고 마고여신과 마고산이라는 정점으로 치닫는다. 산경표의 인식 또한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다. 나는 거꾸로 해경표(海經表)를 제안한다. 지면상 짧게만 언급하면, 적도 상간의 흑조(黑潮, 크로시오해류)로부터 한반도를 향해 거슬러 올라오는 물골(해류와 조류 포함)론이다. 흑조의 본류는 일본의 동쪽을 거슬러 올라 태평양을 횡단한다. 여러 개의 지류 중 황해난류(한국연난류)가 한해륙 서해로 올라오는데 그 정점 혹은 기점에 흑산도(黑山島)가 있다. 흑조의 끝이어서 흑산도다. 이 지류는 내륙으로부터 내려오는 물길 좇아 큰골과 작은골들을 만들고 갯벌 먼 끝에서 내륙 깊은 곳에 이르러 회합한다. 갱물과 민물이 만나는 지점, 시대가 어려울 때마다 향나무 묻어 천년 후 오실 메시아를 기원하던 바로 그 지점이다. 이 권역을 통칭해 조간대(潮間帶) 이른바 갯벌이라고 한다. 불교의 관음과 미륵이 그렇고 기독교의 메시아가 그러하며 1900년 어간 900여 개에 달하던 신종교의 몸부림들이 그러하다. 근자에 일어나고 있는 코로나의 범람은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보다 더한 시대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패러다임의 변화, 생활 태도의 변화, 마음의 변화, 아니 모든 것을 통째로 바꿀 것을 요구하고 있다. 중국처럼 일대일로의 욕심까지는 아니더라도 이제는 섬과 바다와 해양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거기에 시대적 비전도 있고 희망도 있으며 심지어 먹거리도 있다. 해경표에 주목하기를 권유한다. 한해륙 4대 물골론(中灣, Middle Bay)과 6대 작은물골론(小灣, Small Bay) 갯벌의 철학적 인유(引喩)이자 해정학(海政學)적 포지셔닝이다. 남도인들의 인식 범주, 바다를 강으로 생각하고 강을 바다로 생각하는 대대적(對待的) 사고의 형상화다. 출처는 강변(江邊, reverside)이되 조하대의 보이지 않은 물길까지 포괄하는 갱번이다. 강항(江港)이나 해항(海港)보다 강포(江浦)라는 용어를 채용하는 것은 개(갱번)의 어귀라는 생태적 입지 때문이다. 한해륙을 4대 물골로 설정하고 6대 작은물골로 구성한다. 첫째는 무안만(務安灣)이다. 지금의 영산강이 본래 바다였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삼면의 바다, 삼대 중사(中祀)였던 영암 남포로, 광주와 담양으로 오르는 물골과 법성포 고창으로 오르는 물골을 포괄하는 만(灣)이다. 기점에는 흑산도가 있고 정점에는 마한 문화권이 있다. 둘째는 금강만이다. 부여, 공주, 논산으로 오르는 금강, 백강 물골과 김제, 전주 물골을 포괄한다. 기점에는 위도와 고군산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부여, 공주 백제 등이 있다셋째는 경기만이다. 예성강, 임진강으로 북한강, 남한강으로 흐르는 한해륙 가장 중요한 물골이다. 기점에는 덕적군도가 있고 정점에는 고구려, 신라를 포괄하는 개성 고려, 한양 조선 등이 있다. 넷째는 발해만이다. 범주가 너무 넓어 황하만(베이징, 톈진), 요하만(다렌, 창다오), 압록만(단둥, 신의주), 남포만(대동강, 평양), 해삼위만(블라디보스토크)으로 다시 나눈다. 이외 6대 작은물골(small bay)로 강진만, 여자만, 김해만, 울산만 외 발해만의 중만(middle bay)으로 설정했던 남포만, 압록만을 포함시킨다. 김해만은 가야의 네트워크, 울산만은 경주 신라의 네트워크 물골이다. 6대 작은물골은 다시 작은 강과 하천으로 올라 백두산 천지연과 삼지연에 이른다. 거꾸로 보면 보인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불에서 물로, 서양에서 동양으로, 지난 1~2세기 동안 현자들이 이구동성 외쳐왔던 후천개벽, 새로운 시대의 기점을 마련하는 방안이다. 그 시작에 적도(赤道)를 둔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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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해외춤기행 스리랑카의 불교문화와 전통춤(2)불치(佛齒) 수호의 문화유산과 캔디안 댄스 스리랑카가 우리나라에서 가깝지 않고 외모도 사뭇 다른데 친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양국이 고대부터 불교문화를 꽃피웠다는 공통점 때문인 것 같다. 스리랑카는 기원전 6세기쯤 북인도의 신할리족(Sinhalese)이 이주해 처음으로 왕조를 세운 나라로서 일찍이 인도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곳곳에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 담불라(Golden Temple of Dambulla, 黃金寺院) 중세시대의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Polonnaruwa) 기행을 오전에 마친 일행들은 전용버스로 3시간을 이동하여 스리랑카 최대의 석굴사원과 황금사원이 있는 담불라로 갔다. ‘담불라(Dambulla)’는 ‘바위(Damba)’와 ‘샘(Ulla)’이 합쳐진 말로 기원전 1세기에 180m 높이의 바위산 중턱의 자연동굴에 승려들이 기거하며 조금씩 다듬어 만든 사원이다. 바위를 파낸 5개의 석굴 안에는 불상과 신상(神像) 157개가 안치되어 있고, 천장과 벽에는 화려한 빛깔의 벽화가 빽빽이 그려져 있다. 석굴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제2굴인 마하라자 비하라(위대한 왕의 사원)이다. 제1굴에는 열반에 드는 불타, 제3굴에는 바위를 깎아서 만든 불좌상이 모셔져 있다. 제4굴에는 2,000년 전에 보석을 넣었다는 불탑이 보관되어 있고 제5굴에는 조각상과 20세기 초에 그린 벽화가 있다. 1991년 유네스코(UNESCO)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시기리아(Sigiriya) 바위산 궁전에 얽힌 왕위 계승에 관한 전설과 압사라 댄스 시기리아(Sigiriya) 고대 도시는 카사파 1세(Kassapa I, 477~495)의 치세 동안 실론(Ceylon) 문명을 보여 주는 유일한 유적이다. 특히 바위산 정상에 건설한 시기리아(Sigiriya) 궁전은 현지어로 Sigiri(Lion사자)와 Ya(Rock 바위)라는 두 낱말이 합해진 ‘사자 바위(Lion's Rock)’란 뜻이다. 이 유적은 가파른 경사면과 사방을 에워싼 정글을 내려다보며 서 있는 높이 370m의 화강암 봉우리 정상에 있는 왕궁터에 요새화된 궁전, 폐허가 된 건물들, 저수조들, 암각 조각들이 있다. BC 5세기에 요새왕궁으로 건축된 이 성채는 1982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가치가 있는 보물이지만 명성만큼이나 슬픈 사랑과 사연을 품고 있다.5세기 스리랑카의 다투세나 왕(Dhatusena King)은 왕위를 계승하기 전 한 여인을 사랑했다. 그 여인은 왕족이 아닌 천민이었기에 슬픈 사랑의 얘기는 여인이 아들을 낳으면서부터다. 그러나 다투세나왕은 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족은 천민과의 결혼이 용납되지 않는 나라의 율법 때문에 다른 왕족의 여인과 결혼하게 된다. 다투세나왕에겐 천민 여인이 낳은 맏아들 카샤파 왕자와 왕족출신의 왕비가 낳은 둘째 아들 목갈라나(Moggallana)왕자가 있었는데 천민출신 큰아들이 후일 카샤파 1세 왕자가 된다. 그러나 천민출신 성분 때문에 왕족 혈통인 이복동생 목갈라나에게 왕위를 빼앗길까 봐 늘 우려 하다가 절대권력자인 왕이 되기를 결심하고 아버지인 다투세나 왕을 감옥에 가두고 왕위를 찬탈했다. 이에 분노한 동생 목갈라나는 형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고 몇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인도로 망명한다. 왕좌에 오른 카샤파 왕은 이들 후환이 두려워 부하를 시켜 아버지 부왕까지 살해하고 만다. 카샤파 왕은 아버지를 살해한 죄의식과 인도로 망명한 동생의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난공불락인 시기리아 정상인 해발 370m 바위산 꼭대기에 7년의 긴 세월을 들여 철통같은 요새 시기리아 궁전을 지었다. 그러나 망명 11년 후 복수를 위해 세력을 키워 돌아 온 이복동생 목갈라나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하자 카샤파 왕은 쓸쓸하고 비참한 자결을 택한다. 이 궁전을 짓는데 걸린 기간이 7년, 입궁하여 꾸미는데 4년, 도합 11년의 긴 세월을 공들였으나 그가 완성된 궁전에서 기거했던 기간은 고작 반년이었다.결국은 비극으로 끝난 한 왕가의 운명적인 몰락의 역사가 서려있는 시기리야 바위산 왕궁 폐허를 답사하고 내려오면서 신분, 권력, 사랑, 영화에 대한 애달프고 인생무상한 이야기는 인도 무굴 제국의 황제였던 샤 자한(Shah Jahan, 1592~1666)이 끔찍이 사랑했던 왕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하여 만든 타지마할 역사 이야기보다 더 서글프고 안타까워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웠다. 내려오는 서쪽 암벽 중간쯤에 알려지지 않은 18명의 여인들 모습이 그려진 ‘시기리아의 여인(Sigiriya Lady)’, ‘천상의 여인들(Maidens of the Clouds)’ 또는 ‘천상의 무희(Apsara)’로 불리는 바위그림이 있었다. 아잔타(Ajanta)의 가장 아름다운 벽화와 비교할 만한 이 바위그림으로 인해 시기리야 고대 도시는 세계 고고학 미술계에 찬사를 받게 되었다. 본래는 시기리아 바위산에 500명의 여인 벽화가 있었다지만 지금은 18명의 벽화만 겨우 남아있다. 여기서 귀가 쫑긋해지는 이야기는 정상 왕궁터 대리석 옥좌(Throne)에 카샤파왕이 앉아서 무희(Apsara)들의 춤을 감상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옥좌 등받이 뒤로 물이 흘러가도록 만든 수로를 두어 왕의 더위를 식혀주었다고 한다. 압사라(舞姬, 妖精, 飛天, 仙女, 天使)의 범아시아적 특징 시기리야 벽화 속의 수많은 여인들의 체형은 건강하게 살이 오른 풍만한 관능미를 가진 예사롭지 않은 미인들이다. 그리고 허리 아래가 구름 속에 떠 있는 듯한 모습과 상반신을 벗은 채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모습은 힌두교와 불교의 천상세계의 여인, 즉 압사라(천상의 요정)를 그린 것으로 보인다. 압사라는 일단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벽화의 춤추는 요정을 떠올리는 크메르족의 전통춤을 뜻한다. 그러나 인도와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보이는 왕실무희들이며 힌두의례와 관련한 천상의 요정이다. 역시 불교국가에서도 이를 비천(飛天, 樂天 : apsara)이라 하여 항상 음악을 연주하고 꽃을 뿌리며 하늘을 떠도는 천인(天人)으로 1세기 전후부터 널리 조형화하고 있다. 인도 전래의 한국불교 사찰 벽화나 범종 부조에 나타난 비천상(飛天像, 주악비천, 공양비천, 무용비천) 역시 압사라의 맥을 같이하고 있다. 상의를 벗고 있는 모습은 열대지방의 보편적인 고대사회의 풍습이다. 이러한 탈의(脫衣) 모습은 한중일 등 온대지방마저도 불상이나 비천상의 대부분이 상체는 벗거나 가사를 걸친 정도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시기리야 압사라 벽화에는 대체로 꽃을 받치는 형상은 불교 비천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림이다. 또한 압사라들은 팔과 손과 손가락의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불상마다 손과 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불교 수인법(佛敎 手印法)과 같은 모습들이라고 볼 수 있다. 힌두교 창세신화 〈우유바다 휘젓기〉와 압사라 탄생과 춤 압사라(Apsara)는 원래 인도의 탄생 신화에 나오는 요정으로, 그 어원은 '물 위(apsu)에서 태어났다(sara)'는 뜻이다. 이는 힌두교의 천지창조신화 ‘우유의 바다 휘젓기(Sagara Manthan, The churning of the sea of milk)’에서 비롯한 것으로 신화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항상 힘이 약한 데바(Devas, 善神)들은 아수라(asuras, 惡神)들과의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여 모두 죽을 위기에 처한다. 이에 데바들은 우주와 질서의 신 비슈누(Visnu)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비슈누는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암리타(Amrita, 영생의 약)를 먹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데바들의 힘만으로 우유의 바다 깊은 곳에 있는 암리타를 꺼내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비슈뉴가 꾀를 내어 아수라들에게 암리타를 나누어 줄 테니 함께 우유의 바다를 휘젓자고 제안한다. 아수라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마침내 선신과 악신들이 우유의 바다를 천 년 동안 함께 휘젓는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조각과 그림들은 세상의 중심인 만다라산(Mount Mandarachala)을 중심으로 비슈누가 가운데 있으며 양쪽으로 데바와 아수라들이 나누어 마치 줄다리기를 하듯 거대한 뱀의 왕(Vasuki)의 몸통을 함께 휘젓는 모습이다. 이렇게 우유의 바다를 휘젓는 과정에서 발생한 거품 속에서 약 6억 명의 압사라(apsara, 선녀)가 탄생하였다.특히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제3회랑 동쪽 벽의 거대한 천지창조 장면에는 우유바다를 휘젓는 물결 속에서 수많은 압사라가 태어나 하늘을 나는 신비로운 장관을 볼 수 있다. 크메르 정권 때 파괴되었다가 복원한 압사라 댄스(Apsara dance)는 우리의 궁중춤처럼 정적이며 지루하다 할 정도로 움직임이 느리고 행동반경도 제한적이며 절도가 있고 엄숙한 춤이다. 우아한 전통음악에 맞추어 진행되는 유연하고 섬세하게 움직이는 다양한 손가락춤과 손목춤이나 발목 꺾음과 뒤로 들기 같은 말초부위 춤사위는 남방춤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부처의 진신 치아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1월 8일 아침 두 번째 수도 담불라 답사를 마친 일행들은 다시 세 번째 수도 캔디로 출발하였다. 이번 춤기행에서의 핵심이 캔디안 댄스를 관람하고 스리랑카 전통춤의 종류와 춤사위를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었기에 가장 기대가 컸다. 캔디에서 부처의 진신 치아 사리(佛齒)를 모신 ‘불치사(佛齒寺, Temple of the Tooth. Dalada Malgawa)’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관광요지이다. 치아 사리는 기원전 543년 인도에서 석가모니 다비식(화장)때 입수한 것으로 서기 362년 인도 남부의 작은 나라 칼링가(Kalinga)왕국의 왕자가 머리카락 속에 숨겨온 사리를 스리랑카 왕에게 바쳤고, 이후 불치는 독실한 불교국가이기에 왕권의 상징이 되었다. 개방되는 불치사 참배는 자유롭지만 치아사리가 있는 방이 열리는 것은 하루 세 번(오전 6시, 11시 30분, 오후 6시 30분) 공양을 올리는 푸자(Puja)의식 때이다. 이때 참배객들은 꽃을 들고 두 손을 모은 채 기도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불치사 참배는 스리랑카인들의 평생소원으로 스리랑카 사람 마음속에 불치사가 간직되어 있다. 캔디 불치사를 중심으로 펼치는 에살라 페라헤라 축제 스리랑카에서 가장 큰 규모인 캔디의 에살라 페라헤라(Esala Perahera)는 불치사에 있는 성스러운 불치사리를 옮기는 의식을 재현하는 축제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선정되었다. ‘에살라’는 ‘음력 7월’을 뜻하며 그래서 이 축제는 음력 7월 중에 약 11일간 매일 밤 열린다. 이 축제는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스리랑카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그 당시를 재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이다. 캔디안 댄스 극장에서 선보인 전통춤들 불치사 근처에 있는 캔디안 댄스극장(Oak-Ray Kandynn Dance)은 빌딩 공간을 개조한 간이 소극장으로 옹색하였고 이미 외국인들로 만원이었다. 할 수 없이 가운데 통로 맨 앞자리에 허락과 양해를 구하며 의자를 옮겨 자리 잡았다.마굴 베라(Magul Bera, Ceremonial Drums): 시작을 알리는 나각(螺角, 소라나팔)을 불면 격렬한 드럼(BERA)연주 의식을 하는데 이는 고대 토지의 수호신에 알리는 의례 관습에서 비롯되었고 전통적인 환영 연주이다.푸자의식춤(Puja Naturna, Pooja Dance): 오일 램프를 들고 있는 여인들이 부처에게 제물로 바치며 기도하는 의식을 표현하며 우아한 춤을 춘다. 락샤춤(Raksha Natuma, Devil Dance): 락샤(Raksha)는 축귀(逐鬼), 치유(治癒), 악령(惡靈), 악마(惡魔) 등을 뜻하며, 18개의 남쪽 스리랑카 가면을 쓴 춤은 악한 기운을 물러가게 하고 환자들을 치유할 목적으로 춘다. 이 춤은 귀신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사용되며 여전히 스리랑카에서 효과적인 정신과 치료로 여겨지고 있다. 뱀춤(Naga Raksha, Cobra Snake)은 잡신의 위협과 퇴치의 뜻이며, 새춤(Gurulu Raksha, Mythical Bird Dance)은 신화 속의 독수리로 이를 상징하는 탈을 쓰고 공연하는 춤이다.판테루 나투마(Pantheru Natuma, 出征舞): 판테루는 탬버린과 유사한 악기를 들고 드럼반주에 맞춰 흔들며 활발한 곡예기술(공중돌기, 회전무)과 손재주를 보이며 춤을 춘다. 이 춤은 전장에 나가는 전사들을 표현한 것으로 출정무(出征舞)라 할 수 있으며, 캔디안 댄스 중에서 가장 박력 있는 남성춤이다. 마유라 나투마(Mayura Natuma, Peacock Dance): 화려한 공작의 모습을 보여주는 마유라 나투마는 신화에 따르면 스리랑카 전쟁의 신으로 불교와 힌두교가 경배하는 ‘스칸다(Skanda)’를 운반하는 공작새로 고맙게 묘사하는 여성춤이다. 또한 공작새는 보편적으로 평화와 조화를 가져 오는 상징성으로 밝은 흰색과 파란색 의상을 입는다.라반 나투마(Raban Naturma): 라반춤은 손북(Ath-Rabana, Hand Tambourine)을 들고 추기도 하고, 한국의 버나(남사당 접시돌리기)처럼 손가락이나 막대를 받쳐 회전시키는 다양한 곡예무로 발전한 전통 민속춤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 살루 팔리야(Salu Paliya)는 악령에 사로잡힌 환자에게 여신(Pattini)의 축복과 치유를 가져다주기 위에 흰목도리를 걸치고 등장한다. 여신 파티니(Pattini)는 스리랑카의 힌두교와 불교 공동체 모두에게 경배를 받는 신이다. ‘살루 팔리야(Salu Paliya)’가 광대처럼 행동하여 환자의 영혼을 고양시키고 두려움을 없애주는 제 2단계의 치유의식으로 우스꽝스런 가면춤을 춘다.베스 나투마(Ves Natuma): 베스춤(ves Natuma)은 캔디안 댄스 형식에서 가장 중요하고 대표적인 춤이다. 이 춤의 기원은 고대 퇴마의식춤인 ‘코호모 칸카리야(Kohomba Yakuma, Kohomba Kankariya)’에서 유래 된 것으로 가장 인기가 있는 춤이다. 춤은 저주의 악령을 달래는 의식으로 남성에 의해서만 수행되었다. 〈전설 내용은 1편 캔디안 댄스 참고〉 이들은 태양의 광선을 상징하는 반짝이는 60개의 장식품으로 된 전통적인 베스(ves)복장을 입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는 헤드기어(head gear)모자를 쓰고 게타베라야(Getanderaya,Kandyan Drum)라는 북소리에 맞춰 역동적이고 정교한 춤을 춘다. 이 춤의 댄서가 되려면 몇 년간의 혹독한 훈련을 거쳐야만 인정받고 춤을 출 수 있다. 특이한 춤사위로 한국농악의 채상모놀이처럼 헤드기어의 긴 띠를 휘돌리기, 점핑춤, 공중돌기, 치맛자락 잡고 춤추기, 한국 강신무처럼 왼쪽으로 빠르게 돌기 등이 있었다. 쿨루브 나투마(Kulub Natuma, Harvest Dance): 쿨루브춤(Kulub Natuma, Harvest Dance)은 농부들이 곡식이나 실론 차잎을 수확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부녀자들이 행한 민속춤으로 키춤, 차잎 뜯기춤(Tea Plucking Dance) 등이 있다. 반주는 가벼운 드럼 비트와 플루트 연주이다.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 드럼은 캔디안 댄스에 ‘게타 베라(Geta Bera)’, 저지대춤에 ‘야크 베라(Yak Bera), 사바라가무와춤에 ’다불라(Davula)‘ 반주로 춤을 춘다. 드럼 오케스트라(The Drum Orchestra)에서는 주로 게타 베라야(Geta Beraya), 야크 베라야(yak Beraya), 탐마타마(Thammattama)로 리듬 연주했으며 그밖에 시작할 때 소라연주가 있었고, 연주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밖에 스리랑카 악기에는 우데키야(Udakkiya), 타빌(tavil), 플루트(floot), 라바나(rabana) 등이 있다. 지니 시칠라 불춤(Gini Sisila, Fire Dance): 지니 시칠라(Gini Sisila, Fire Dance)는 불을 뛰어 넘는 마력과 인간에 해를 끼칠 수 있는 27개의 악령과 불에 대항하는 신성한 퇴마의 힘을 보여주는 남부지방 불춤이다. 불에 대한 절대적인 신앙으로 화염으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며, 이 댄스에는 불을 먹는 아찔한 묘기춤(Fire Eating Dance)도 춘다.불판걷기(Fire walking): 맨발로 불판걷기의 근원은 라마(Rama) & 시따(Seetha)의 서사적인 사랑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실론의 왕 라와나(Rawana)는 인도의 공주인 시따(Seetha)를 인도에서 납치했다. 시따는 자신의 순결을 입증키 위해 화장의례에 사용되는 장작을 쌓아 불을 붙이고 불속에 들어가자 불의 신 아그니(Agni)신이 나타나 시따를 들어 올려 라마에게 시따의 순결을 입증해주었다. 그 후 라마는 왕이 되어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보냈다는 이야기에서 불판걷기가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스리랑카 마지막 여정들(핀나왈라, 콜롬보, 갈레포트) 1월 9일 아침 핀나왈라 코끼리 고아원(Pinnawala Elephant's Orphanage)을 방문했다. 이곳은 정글에서 부모를 잃어버렸거나 또는 다치거나 병든 코끼리들을 보호하는 시설로 건강을 회복한 코끼리들은 사찰이나 코끼리 사육사(조련사)들에게 넘겨진다고 한다. 코끼리들을 아침 10시와 오후 2시에 반씩 나누어서 목욕을 시키기 위하여 40-50마리를 데리고 강으로 나온다. 1월 10일 드디어 스리랑카 여정의 마지막 날이 왔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오전 호텔에서 전통 혼례식을 볼 수 있었다. 캔디안 댄스에서 봤던 베스댄스를 혼례 의식춤으로 축하를 하며 전통 결혼식을 오전부터 오후까지 진행하였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옛 수도 콜롬보(Colombo)에 도착하여 해양박물관과 갈레포트(Galle Fort)와 전통낚시(stilt fishing)을 보는 것으로 일정을 마치고 콜롬보의 반다라나이케 국제공항(Bandaranaike International Airport)으로 향하여 밤 비행기로 귀국하였다. 스리랑카를 떠나면서 스리랑카 왕조 유적을 답사하는 과정에서 부처의 진신(眞身) 치아(齒牙)를 모셔온 1800년 동안은 불치 수호의 역사였으며, 불치(佛齒)는 왕조의 존재 가치를 담을 만큼 소중한 왕권의 상징인 ‘국새(國璽)’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동아시아 지배계층에서 불교를 널리 받아들인 것은 ‘왕즉불(王卽佛) 사상’, ‘호국불교’를 이용한 것이긴 해도 스리랑카 국민들(70%)이나 왕들은 지나치리만큼 지극한 불심(佛心)으로 현재까지 살아온 것 같았다. 또한 스리랑카의 전통춤은 3개 문화권으로 전승되고 있었으며, 그중 캔디지역이 가장 대표적인 춤문화권이며 세부적으로 여러 종목의 춤들이 전승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스리랑카의 고전춤이라고 할 수 있는 베스댄스(ves Natuma)는 여러 타악반주와 채상돌리기, 땅재주 등 다양한 기법이 한국의 농악과 유사성이 많았고, 오랜 동안 불치를 지켜온 페라헤라축제는 스리랑카의 전통문화의 전승의 요람이었고 민족의 자존심이었다. 이병옥용인대학교 무용학과 교수로 25년간 재직 예술대학원장을 역임하다 정년퇴임 종신 명예교수이다. 한국무용사학회와 한국동양예술학회,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경기도와 서울시문화재위원을 거쳐 현재 이북오도청 문화재위원이다. 1985년 객석 예술평론상을 수상, 무용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2018.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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