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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못 잊도록 생각이 나거든 이십오여 년 전 언론인 L씨로부터 시인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이 쓴 엽서와 편지 이십여 통을 얻었다. 이 편지는, 평북 철산(鐵山) 출신으로 중국 상해와 봉천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주필·부사장을 지낸 유봉영(劉鳳榮, 1897-1985)에게 보낸 것들이다. 안서는 고향 정주(定州)에서, 철산과 경성, 중국 봉천으로 옮겨 다닌 친구 유봉영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냈는데, 1919년 편지에는 ‘안서용고(岸曙用稿)’라는 글자가 인쇄된 오백칠십육 자(24×24) 전용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다.(*사진 42~43) 또 다른 이백사십 자(12×20) 원고지에 쓴 1922년 3월 23일 편지에는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의 「못잊어」를 연상케 하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다.(*사진 44) 「못잊어」풍의 시가 들어 있는 안서의 편지는 모두 넉 장이다. 안서는 여기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다고 시시콜콜하게 적고 있다. 문제의 시는 안서가 친구에게 자신의 심각한 고민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면서 소개됐다. 狂人? 泥醉? 戀愛熱中? 이 세 가지만이 現實世界의 모든 苦痛에서 自由롭게 하여 주는 듯합니다. 眞正한 告白을 하면 나는 그 동안 웃읍은 로맨쓰를 가젓읍니다. 그것은 아모것도 몰으는 十七歲의 所謂 生離別리와 놀앗읍니다. 한데 그것이 郭山一周에 갓득히 所聞이 낫읍니다. 하고 저 便에서는 共同生活을 請하여, 참말로 ᄯᅡᆨ하엿읍니다. 만은 그것도 이제는 지내간 ᄭᅮᆷ되고 말앗습니다. 온갖 힘을 다하야 다른 곳으로 살님 가도록 하엿읍니다. 罪를 지엇읍니다. 그러나 엇지합닛가. 사람의 맘이란 물과도 갓고 바람과도 갓튼 것이매. 그것을 엇지합니가. 日前에 이러한 말을—그말은 쓰지 안읍니다—듯고 卽興으로 詩하나 지여주엇읍니다. 안서가 열일곱 살짜리 애인을 떠나 보내며 즉흥으로 지은 시에는 제목이 없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못닛도록 사모차게 생각이 나거든, 야속하나마 그런데로 살으십시구려, 그려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못닛도록 살틀하게 그립어오거든 설으나마 세월만 가라고 합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럿케 말하겠지요, "사모차게 생각나는 못니즐 당신을 그대로 생각을 안는다고 니저바리며, 살틀하게 그립어오는 못니즐 당신을 그런대로 세월을 보낸다고 닛겠읍닛가?” 소월은 이와 비슷한 시를 1923년 5월에 발간된 『개벽』 35호에 처음 발표했다. 발표 시기는 안서의 편지보다 두 달가량 늦다. 『개벽』에 발표된 시는 「사욕절(思慾絶) I,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라는 제목으로, 『진달래ᄭᅩᆺ』에 수록되기 전의 작품이다.(발표 당시 제목)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歲月만 가랍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닛치겟지요, 아수운대로 그러케 살읍시구려. 그러나 당신이 니르겟지요, "그립어 살틀이도 못닛는 당신을 오래다고 생각인들 떠지오릿가?” 그리고 이는 다시 1925년 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에 「못니저」(발표 당시 제목)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니칠날 잇스리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니저도 더러는 니치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럿치요, "그립어 살틀히 못닛는데, 어찌면 생각이 떠지나요?” 안서의 편지에 실린 시와 『개벽』에 발표한 소월의 시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 그리고 『진달래꽃』에 수록한 「못잊어」는 시어와 리듬에서 차이가 날 뿐, 같은 시가 개작을 통해 변모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만큼 내용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안서는 소월에게 특별한 스승이다. 안서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소월의 시재(詩才)를 발굴해 키웠으며, 그를 문단에 데뷔시키고, 소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안서는 소월이 쓴 대부분의 시를 미리 받아 첨삭(添削)·정서(正書)한 다음 잡지사에 넘겼다. 이런 작업은 소월 사후에까지 이어져, 소월의 유고를 손질해 각종 잡지에 발표하고, 『소월시초』(1939), 『소월민요집』(1948)을 펴내기도 했다. 안서가 편지에 쓴 문제의 시는 소월이 『개벽』에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를 발표했을 때보다 두 달가량 앞섰고 시를 쓴 동기가 분명한 만큼 원작자가 안서일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점은 안서의 또 다른 편지에 실린 시 「사향(思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5월 15일 경성에서 쓴 이 시는, 안서의 첫 시집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에 같은 제목으로 조금 변형되어 실려 있으며, 『진달래꽃』에 수록된 소월의 시 「제비」와 비슷하다. 「사향」의 첫 행 "공중(空中)에 나는 제비의 몸으로도”와 「제비」의 첫 행 "하눌로 나라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는 거의 똑같다.(*사진 45) 소월의 대표작인 「못잊어」와 「제비」의 원형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점 외에도, 안서의 편지들은 근대문학사와 관련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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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8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1) 눈감 땡감 "이게 무슨 책이오?” "잘 모르겠소.” "얼마면 되겠소?” "십만 원만 주시오.” "눈감 땡감, 오만 원만 합시다.” "좋소, 눈감 땡감. 가져가시오.”고서나 골동의 세계에는 ‘눈감 땡감’이란 말이 있다. 가치를 잘 모르는 물건을 사고팔 때 쓰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아주 묘한 뉘앙스를 갖고 있다. 사고파는 사람 모두가 그 가치를 잘 모르면 답답하기도 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시원시원하다. 사실 눈감 땡감이란 말에는 깊은 속내가 깃들어 있다. 사는 사람은 혹시 이 물건으로 ‘땡’잡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고 있고, 파는 사람은 별로 신통치 않은 물건을 모른 척하고 잘 파는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전혀 답답할 이유가 없다. 서로의 속내를 눈감 땡감이란 말로 합리화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물건치고 제대로 된 것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잘 모르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또한, 정말 잘 모르면서 파는 물건이라면 주인에게도 문제가 있다. 그러나 주인은 나름대로 알아볼 것은 다 알아봤을 수도 있다. 눈감 땡감은 얄팍한 상술과 헛된 욕심이 만들어낸 저속한 거래 방식이다. 예컨대, 고서를 잘 모른다면서 버젓이 고서를 파는 고서점 주인이 있는데, 이들에게 이런 거래 방식은 대개 겸손이 아니라 유치한 상술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러한 고서점이 장사가 잘된다. (2) 조 노인과 『추사서첩(秋史書帖)』 책값을 깎는 데 그 수법이 남다른 수집가도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고서 거간꾼 조성호 노인은 특히 글씨를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 고서계에서는 신용만 있으면 고가의 물건이라도 위탁으로 내주는 것이 상례다. 조 노인은 골동품 가게에서 물건을 위탁받아 다른 가게나 수집가에게 판매하는 일을 했다. 그는 일단 물건을 입수하면 내게 제일 먼저 보여주곤 했다. 한번은 내가 노인에게 추사의 글씨를 위탁으로 내준 적이 있었다. 십여 장의 글씨가 붙어 있는 작은 서첩이었다.(*사진 38) 며칠 후 노인은 이것을 K씨에게 판매했다. 그 후 물건 값을 받아 와 모든 거래를 끝냈다. 그러고 얼마 후 노인이 찾아와, 판매한 서첩에 문제가 생겼으니 반품할 수 없겠느냐는 것이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노인이 또 다른 물건을 역시 K씨에게 판매하고 약속한 날에 돈을 받으러 갔더니, 물건 값을 대폭 깎아 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구입한 『추사서첩』이 가짜이니 그만큼의 값을 깎아 주든지, 아니면 『추사서첩』을 반품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노인은 K씨에게, 『추사서첩』을 구입하기 전에 나름대로의 감정을 거쳤고, 또 그 대금은 주인에게 이미 지불한 상태라 반품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한다. 그러나 K씨는 어찌 되었든 『추사서첩』 대금을 갖고 와야 물건 값을 내주겠다고 막무가내로 버텼던 것이다. 『추사서첩』은 그렇다 치고 그 물건은 조 노인이 다른 가게에서 위탁받은 것이라 물건 임자에게 가부간에 결정을 해주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추사서첩』은 내게 다시 돌아왔고 조 노인과 K씨의 문제도 해결되었다. 물론 나와 조 노인은 이 서첩이 진품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방 쪽에서 가짜라고 하면서 돈을 내놓으라니 조 노인의 입장에서는 난감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이처럼 수집가 중에는 거간꾼들이 가져온 물건을 얼마에 사기로 결정해 놓고는, 막상 셈을 할 때는 다시 또 얼마를 깎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아주 고약한 버릇이다. 그후 서첩은 다른 곳으로 팔렸고, 몇 년 후 한 전시장에서 이 서첩을 다시 볼 수 있었다. 사고 싶었지만 이미 가격이 많이 뛴 상태였다. (3) 『나한사전(羅韓辭典)』 1990년 10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국제고서전 때의 일이다. 영국의 ‘한산당(寒山堂, HAN-SHAN TANG)’이란 고서점 부스에 『나한사전(羅韓辭典, Parvum Vocabularium Latino-Coreanum)』이 눈에 띄었다.(*사진 39)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라틴-조선어사전으로, 1891년 홍콩 파리외방전교회에서 펴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한두 해 전 서울의 어느 고서점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당시 생각보다 가격이 비싸 망설이다가 마침 가진 돈도 부족하여 다음에 다시 오기로 했는데, 며칠 후 서점에 들러 보니 그 책은 이미 팔리고 없었다. 그때의 서운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사실 그 책은 당시 가격으로는 매우 비쌌기에 그런 비싼 가격에 쉽게 팔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평소 서점 주인하고도 잘 아는 사이라 외상은 물론 예약만 했어도 살 수 있었던 책을 놓친 것이다. 서운함도 잠시, 나는 그 정도의 돈을 주고 그 책을 사 간 사람이 과연 누굴까 생각해 봤다. 그러나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웬만한 고서 수집가들의 성향까지도 거의 알고 있는 나로서는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바로 그 책을 일본에서 만난 것이다. 그 대가로 나는 서울에서 본 가격의 대여섯 배를 주고 그 책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대구의 한 고서점에서 이와 똑같은 책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가격은 일본에서 산 것의 수십분의 일 수준. 그것도 일본에서 산 책은 표지가 떨어져 나가 수리해야 했는데 이 책은 상태가 완전한 것이었다. 이때의 기분을 표현한다면, 일본에서는 제값을 주고 샀지만 대구에서는 ‘땡잡은’ 것이었다. 어쨌든 둘 다 기분 좋은 일이다. 이것이 바로 고서의 가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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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7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옛날에 준마를 팔려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흘 내내 그 말을 시장에 내놓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준마임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이에 말 주인은 백락(伯樂)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내게 준마가 있어 팔려고 하는데, 사흘 동안이나 시장에 내놓았는데도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선생께서 제 말을 한번 살펴봐 주십시오. 그리고 자리를 떠나시다가 아까운 듯한 표정으로 한번 뒤돌아봐 주십시오. 그렇게 해주신다면 제 하루 벌이를 그 대가로 드리겠습니다.” 이에 백락이 말을 살펴본 후 그 자리를 떠나다가 한번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하루아침에 말의 가격이 열 배로 올랐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이야기다. 춘추시대 진(秦)나라 사람 손양(孫陽)은 말 감정에 조예가 깊은 명인으로, 그의 탁월한 안목과 식견에 탄복한 사람들은 천마(天馬)를 주관한다는 별의 이름을 따 그를 본명 대신 ‘백락’이라 불렀다. 어찌나 정평이 높던지 그의 품평 한마디에 말 값이 순식간에 몇 곱절씩 뛰어오를 정도였다. 고서 수집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고서에 뛰어난 안목을 가진 사람이 어떤 책에 관심을 보이면 그 책은 비싼 가격으로 팔리기도 한다. 언젠가 청계천에서 있었던 일이다. 평소 친분 있는 지인으로부터, 지금 막 모 서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책을 보았으니 서둘러 가보라는 전화를 받았다. 곧장 달려가니 주인이 책을 내놓았다. 그러나 책값은 방금 전화로 전해들은 값의 두 배를 불렀다. 아무 말 않고 돈을 건넨 뒤 책을 들고 나왔다. 불과 한 시간도 안 되어 책값을 두 배로 올렸는데, 이처럼 고서점 주인이 손님에 따라 가격을 달리 부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손님이 책의 내용을 잘 알아보는 듯하거나 꼭 필요해서 살듯 한 경우에는 이런 수법을 쓰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것을 따지고 들면 서로 관계만 어색해지니 그냥 모른 척한다. 그날 구입한 책은 『홍전시략(紅田詩略)』 필사본이었다. ‘홍전시략’은 표제이고 속표제는 ‘자하시집(紫霞詩集)’이라고 씌어 있었다. 자하는 조선 후기 문신이자 화가·서예가로 유명한 신위(申緯)의 호다. 책 윗부분이 조금 손상됐지만 됨됨이가 반듯한 것이 첫눈에 귀물이었다. 시종일관 단아한 글씨로 아주 정성스레 만든 필사본이었다. 대부분의 필사본이 그렇지만 문제는 누구의 친필인가 하는 것이다. 잘 만들어진 필사본 중에는 해서(楷書)로 쓴 글이 많은데, 이 경우 누구의 글씨라고 단정하기가 쉽지 않다. 이 책의 글씨가 그랬다. 일점일획을 정확히 독립시켜 쓴 것으로, 파세(波勢)가 없고 방정하게 정서(正書)했다. 또 목판 괘선지의 판심(版心) 아래 어미(魚尾) 상부에 안경 모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어 이채로웠다. 순간 나는 자하의 친필임을 직감했다. 그러니 책값을 두 배로 불러도 안 살 도리가 없었다. 그날 N씨가 호산방에 들렀다가 이 책을 보더니 갖고 싶다고 했다. 당시 그는 청량리 근처에서 꽤 규모있는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시골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어려서 찢어지게 가난한 탓에 책을 사 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늦게나마 책을 사 본다고 했다. 그는 고서에는 문외한이었지만 내 말이라면 그대로 믿고 따랐다. 그리하여 결국 이 책은 그의 손으로 넘어갔다. 일 주일쯤 후, 나는 우연히 어떤 책을 보다가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몽홍선관시초(夢紅仙館詩抄)』를 발견했다. 이 책은 자하의 친필로 알려진 책이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괘선지의 판심에 『홍전시략』의 안경 그림과 똑같은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N씨에게 보낸 『홍전시략』 괘선지의 문양과 연세대 소장본 『몽홍선관시초』의 그것은 분명 일치했다. 이 괘선지는 바로 자하의 전용지였던 것이다. 또 한번은 한 서점에서 이삼십 권의 책을 골라 놓고 각 권에 대한 가격을 셈하는데, 주인에게 가격을 물었더니 처음에 말했던 것과 달랐다. 조금 전에 부른 가격을 주인도 헷갈려 하는 것이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고서에는 가격이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고서점 주인의 재량에 따라 가격이 정해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터무니없이 비싸게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설령 터무니없이 비싸게 불렀다 하더라도 손님과 주인의 관계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 고서점의 생리다. 가령 손님이 "이것은 그렇게 비싼 책이 아니고 이 정도면 적당할 것 같소” 하면 주인은 못 이기는 체하고 적당한 선에서 고객의 요구에 응한다. 이러한 예가 고서점에서 관례가 된 풍경이다. 어찌 보면 이렇듯 같은 책이라도 고서점마다 가격이 다 다른 것이 고서 수집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고서점 주인은 고서를 입수한 후 가격을 정하기까지 나름대로의 고민과 연구를 거듭한다. 가격을 정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다. 그 중에는 평소 잘 알고 지내는 손님에게 책을 보여 주면서 눈치를 살피는 경우도 있다. "이거 소장자가 팔아 달라고 맡긴 건데, 얼마에 사면 되겠소?” 그러면 자연스레 얼마에 팔면 되겠다는 계산이 나오게 된다. 그런데 만약 그 과정에서 손님이 그 책을 욕심내면 주인 입장에서는 머쓱할 수밖에 없다. 손님이 되레 주인에게 "그래, 소장자가 꼭 얼마를 받겠답디까?” 물으면, 주인이 "이거 소장자가 얼마를 받아 달라는데” 하면서 아주 높은 가격을 던져 보기도 한다. 이처럼, 서점 주인들은 낯선 책의 가격을 알아보는 데 나름대로 여러 가지 요령을 가지고 있다. 설령 자신이 제시한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도 민망해 할 까닭이 없다. 이미 ‘소장자가 맡긴 물건’이라고 복선을 깔았기 때문이다. 또 심상치 않은 고서를 입수하면 일단 가게 한구석에 무심한 척 놔두고는 손님이 물어 올 때를 기다린다. "이거 얼마요?” "그건 팔 물건이 아닌데….” "…….” "굳이 필요하시다면, 얼마나 주겠소?” 이때 손님은 책이 욕심나면 나름대로 가격을 제시하는데, 그러면 십중팔구 그 책을 사지 못한다. 주인이 생각했던 가격보다 높으면 혹시 이것이 아주 귀한 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쉽게 팔지 않을 것이고, 생각했던 가격보다 낮으면 적당히 거절한 뒤 다른 손님에게도 똑같은 방법을 쓴다. 나는 이런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가격을 잘 몰라서 나보고 얼마면 사겠냐고 물었을 텐데, 그럼 내가 제시하는 값에 무조건 팔 겁니까? 그렇다면 성의껏 말하겠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꼭 받고 싶은 값을 먼저 말하십시오. 값이 적당하면 사겠습니다.” 나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절대로 가격을 먼저 말하지 않는다. 저렇게 묻는 것은 얼마가 되더라도 애당초 나에게 물건을 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그 가치를 알아보기 위해 잔꾀를 부린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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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6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 수집가 중에서 가장 원숙한 경지에 이른 수집가는 자기주도형 수집가라 할 수 있다. 이런 수집가 중에 A선생이 있다. 그에게 고서 수집은 취미이자 연구이자 생활 그 자체였다. 그는 철저히 자신의 안목에 따라 책을 수집했고, 조금이라도 비싸다 싶은 책은 결코 사지 않았다. 굳이 비싸게 주고 살 이유도 없고, 그가 고서 수집에 지출하는 돈은 그의 형편에서는 매우 벅찼기 때문이다. 그는 수십 년간 하루가 멀다 하고 청계천·장안평·인사동을 순례하면서 책을 수집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A선생은 허름하게 널려 있는 고서 더미 속에서 책 몇 권을 골라 놓고는 헐값에 잘 사기로 소문난 분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의 고서점 주인이 그의 성격을 잘 아는 탓에 가격을 비싸게 부르고 싶어도 주눅이 들어 헐값에 팔곤 했던 것이다. 특히 필사본에 관심이 많아, 이렇게 수집한 책 가운데는 유명인의 친필본이 더러 섞여 있기도 했다. 물론 그만한 안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수집한 고서를 바탕으로 연구도 하고, 책도 여러 권 냈다. 평생 수집한 장서를 유명 연구기관에 양도한 대가로 집도 장만했으니, 평생 고서 수집에 들인 열정이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A선생과 비슷한 경우로 Y교수가 있다. Y교수는 주말이면 인사동과 청계천, 장안평으로 고서점 순례에 나선다. A선생과도 절친한 사이로, 수집 스타일도 상당 부분 비슷했다. 그 역시 결코 비싼 책을 사는 일이 없었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책을 많이 사기로 유명한데, 주로 허름해 보이는 고서를 많이 수집했다. 호산방에 들렀을 때나 길에서 만날 때면 곧바로 아무 데서고 가방을 풀어헤치고 구입한 책에 대해 품평하곤 했다. 간혹 욕심나는 책이 있기는 하지만 거의 섭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서 수집에는 안목도 중요하지만 어느 정도 경제력이 따라야 하는데 Y교수는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렇게 수집한 책 중에도 가끔 귀중본이 있었다. 이렇게 소장하고 있던 희귀본 몇 권을 팔아 딸을 시집보낸 일화는 지인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고서점가의 큰손으로 통하는 수집가 L선생. 젊어서 한때 고서점을 운영하기도 했던 그는 건장한 체구에 일흔이 넘어서도 왕성한 수집의욕을 보이는 분이었다. 마음에 드는 고서를 만나면 가격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무조건 입수하기로 소문난 분이기도 하다. 그는 지도와 영토 관련 자료를 집중적으로 수집했는데, 이 방면에서라면 그 컬렉션의 양과 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오래 전부터 일본에서 많은 자료를 수집해 오기도 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은 그를 ‘수원 독립군’이라고 불렀다. 그의 집이 수원이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그는 수집한 자료를 여러 차례에 걸쳐 D기념관·H기념관·D박물관 등 여러 곳에 기증했다. 특히 D박물관은 선생의 기증자료로 설립되었으며, 그곳의 초대 박물관장을 지내기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념관이나 박물관에 자료를 기증하는 것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할지 모르나 실은 그렇지만도 않은 것이 현실이다. 일단 기증한 후에는 자료의 관리와 활용에 관한 모든 일들이 기증처의 사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면에서, 기증자료가 기증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관리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또 기증받는 입장에서는 별로 필요치 않은 유물을 마지못해 받는 경우도 있는데, 심지어 고서 같은 것은 일일이 목록을 작성해야 하는 부담을 이유로 기증받는 일조차 꺼리기도 한다. L선생은 자료를 기증한 후에도 이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았다. 기껏 기증했더니 관리도 제대로 되지 않고 전시장에 진열도 되지 않아 섭섭하다는 말을 내게 자주 하곤 했다. 그러나 기증받은 쪽에서는 자신들의 입장은 이해하지 못하고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요구하는 L선생에게 되레 불편함을 느끼기도 하는 것 같았다. 하긴, 어떻게 자신이 직접 관리하는 것과 같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어떤 자료든 돈을 주고 산 사람이 관리를 제일 잘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그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은 그렇다. L선생은 말년에 몇 년간 개인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영인 출판 등의 활동을 하는 듯했으나,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는 결국 박물관 설립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사후에는 나머지 자료들이 S시로 기증되었다. 또 다른 수집가 L씨는 고위 공직에 오래 있던 분이다. 고서를 보는 안목이 탁월해서 좋은 책을 보고 놓치는 일이 없었다. 그의 관심 분야는 지방행정에서부터 가요·꽃·기생에 이르기까지 매우 폭넓어, 그 컬렉션을 보면 가히 박물관 수준이다. 사실 자료를 폭넓게 수집하다 보면 깊이가 없게 마련인데, L씨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내가 만나 본 수집가 중에서 최고의 안목을 갖춘 몇 사람 중의 하나였다. 고서를 구입할 때의 매너 역시 최고의 신사라 할 만했다. 그는 호산방에서 그 많은 책을 구입하면서 한번도 가격에 관해 얘기한 적이 없었다. L씨는 구입한 책에서 얻은 내용을 국정(國政)에도 참고하고 저서도 여러 권 냈다. 고서 수집의 전범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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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5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자기만족형 수집가는 철저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고서를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어찌 보면 자신만의 철학과 주관을 갖고 수집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는 어느 정도 이상 고서를 보는 안목이 따라 줄 때 얘기지, 그렇지 않다면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계룡산 기슭에 한 도인이 있었는데, 바둑을 잘 두어 근처 백 리 안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었다. 도인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바둑을 두고 있는 젊은이를 보고는 대국을 청했다. 내리 세 판을 진 도인은 도무지 그 결과가 믿기지 않아, 다음날 다시 그 젊은이를 찾아가 바둑을 두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 어디선가 들은 얘기다. 이 이야기 속의 도인은 자신의 바둑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자기보다 실력 있는 고수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 본인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도 그의 바둑 실력이 천하제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서 수집가 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많아, 그들의 모습에서 저 계룡산 도사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소장한 장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방식대로 고서를 수집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혼자 흥겨워하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에 고서를 전혀 모르는 주위 사람들이 끼어들어 자연스레 한몫 거든다. 바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수집가들이다. 이런 부류의 수집가들은 대개 다른 수집가들과 교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설령 교류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관심 분야 이외에는 애써 외면한다. 어찌 보면 고서를 보는 안목이 있고 주관이 뚜렷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유형의 수집가는 앞의 정보탐색형 수집가와는 달리 다른 수집가들과 정보교환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고서 수집에 관한 자신의 실력이나 컬렉션의 수준이 알려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소위 우물 안 개구리 격이라고 할까. 장안평 호산방 시절, 하루는 젊은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고서가 있으니 한번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다. 찾아가 보니 작은 연립주택이었는데, 거실부터 집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안방과 작은방에도, 창문마저 가릴 정도로 온통 책이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보다 쌓여 있는 책이 더 많았다. 주로 양장본이었고 한적도 약간 있었다. 한적은 주로 칠서(七書) 낙질이었고, 양장본은 상당수가 일서(日書) 전집류 낙질들로, 상태는 모두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가져가라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을 책들이었다.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도 금방 자리를 뜨기가 민망해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주인이 말을 건넸다. "선친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책들은 선친이 수집한 거예요. 선친께서는 평생의 꿈이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자식 된 도리로 선친의 꿈을 이루어 드리고 싶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이 책들을 처분해 아파트라도 하나 마련할까 해요.” 고인이 된 책 주인의 따님과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의 말이다. 한마디로, 이 책들을 제대로 평가해 준다면 팔겠다는 얘기였다. 이런 경우 참으로 난감하다. 유족들은 선친이 남긴 고서를 천하의 보물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 가치가 별것 아니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낙담할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그저 싸게 사려는 장사치의 수작이라 생각할 터였다. 어떻게 호산방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 물으니, 고서를 정리하다 『호산방도서목록』이 눈에 띄어 전화를 했다고 한다. 혹시 고인이 내가 아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으니, S씨다. S씨라면, 호산방에는 두어 번 들렀지만 다른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분이었다. 자그마한 키에 쥐색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별로 말이 없는 차분하고 온화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고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그 양과 질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어, 그렇잖아도 궁금해 하던 차였다. 그러나 장서들을 본 순간 나의 머리는 혼란에 빠졌다. 평생 고서를 수집한 분의 장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서 중 일부를 빼돌린 것 같지도 않았다. 다시 책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언젠가 그와의 대화 중에 ‘왕지(王旨)’를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교지(敎旨)’가 아니라 ‘왕지(王旨)’라고 씌어 있습니까?”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관작(官爵)·자격·시호(諡號)·토지·노비 등을 내려 주는 문서로, 조선 초기에는 왕지라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의 교지는 그 수가 많이 남아 있어 고서점이나 골동품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지는 매우 귀해, 그것을 내린 인물에 관계없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유족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왕지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아버님이 왕지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비디오로 찍어 놨습니다.” 비디오 화면을 통해 본 왕지는 바로 구한말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교지였다. 화면 속에서 교지를 설명하는 S씨는 자못 진지했다. S씨의 설명만 들으면 교지의 가치는 천하의 보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왕지를 한번 볼 수 있느냐고 청하니 잠시 망설이다가 커다란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방금 비디오 화면에서 본 바로 그 교지를 포함해 지금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호구단자(戶口單子)와 토지문서 몇 장 그리고 신문과 상표 등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고인은 이 책들을 수십 년에 걸쳐, 주로 고물상과 동네 고서점에서 수집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이렇게 전혀 쓸모없는 고물만 수집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두세 달 후에 이 책들을 청계천에서 다시 만났다. 결국은 고인이 생전에 이 책들을 수집했던 것처럼, 이것들은 다시 고물상을 통해 청계천으로 나온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계룡산 도사 생각이 났다. 노련한 고서점 주인이라면 수집가의 말 몇 마디만 듣고도, 그 사람의 수집 경력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어느 분야의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몇 년 정도 수집을 했는지, 소장한 장서의 양과 질은 어느 정도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웬만한 수집가의 머릿속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속내를 알 수 없는 수집가가 있다. C회장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다. 건설업에 종사했던 그는 고서계 일부에서 ‘C회장’으로 통했다.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수집한 분야는 천세력(千歲曆)이었다. 천세력은 백중력(百中曆)과 만세력(萬歲曆)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매년 매 음력월의 대소(大小), 이십사절후의 입기일시(入氣日時), 매월 초일일·십일일·이십일일의 간지(干支)가 실려 있는 책이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세력 이야기로 화제를 끌고 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슨 얘길 하는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서치고 귀하지 않은 책이 어디 있겠는가. 고서 수집은 수많은 종류의 책 가운데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릴 만한 분야를 정해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C회장은 그것을 천세력으로 정한 것 같았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천세력을 수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세력에 쏟은 그 열정을 다른 분야의 고서에 쏟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보곤 했다. 근 3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고서를 좋아하는 지인 몇 분과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방마다 책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장서를 보고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것은 평생을 고서 수집에 열중한 사람의 장서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애서가의 서재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누구라도 그 오랜 세월 고서를 수집했다면 그 정도의 서재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다. 그의 장서에서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고민하고 애쓴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장서를 폄하하려는 말이 아니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과 열정으로 책을 수집하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수집에만 급급했지, 수집 목적과 이에 대한 활용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장서에서 천하의 진본이라든가 고가의 귀중본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오랜 세월 고서를 수집했다면, 적어도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귀중본 몇 권 정도는 눈에 띄었어야 했다. 그것을 천세력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고서보다는 주로 고서화나 골동 수집가 중에서 수집을 잘못해 패가망신하는 사람을 더러 보았다. 골동을 수집하는데 어떻게 패가망신하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30여 년 전쯤에 K씨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고서 수집가가 그렇듯이, 현관에 들어서자 벽에는 온통 고서화가 걸려 있고 집 안에는 고서와 골동이 즐비했다. 반닫이에서 서첩과 간찰첩 등을 꺼내 보여주는데, 퇴계·율곡·다산·추사 등 눈에 띄는 인물들의 작품이 한다발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하나같이 모두가 가짜인 것을. 명인의 것은 가짜투성이고 누군지 알 수 없는 그저 그런 작품들은 진짜이니, 결국 모두가 가짜라는 말이 아닌가. 더 보여주겠다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러고 몇 년 후, 그의 소장품 중 일부가 유명 기관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에 출품됐다. 물론 가짜 글씨도 여러 점 섞여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가짜 그림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평생 쌓아 온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수집품이 가짜라고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정말 그 소장품들을 가짜인 줄 모르고 수집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사진 32) 특히 서화 골동 세계에서 가짜를 사고파는 행위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몰라서 사고팔고, 알면서도 사고판다. 서로 가짜인 줄 알고 사고파는 것으로 그친다면 모르겠으나 이것들이 언젠가는 진짜로 둔갑해 세상에 돌아다니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다.(*사진 33) 가짜 고서화와 관련해서, 대부분의 고서화 수집가에게는 고약한 버릇이 하나 있다. 살 때는 가짜라도 좋다며 싼값에 산 물건이라도, 일단 자기 것이 되면 혹시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K씨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40여 년 전 고서화 수집가로 꽤 알려진 궁정동 P사장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집에 초대받아 갔더니 방마다 온통 고서화로 그득했다. 역대 유명 서화가의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값이 나갈 만한 것들은 첫눈에도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이런 수집가를 이미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고서화를 수집하는 사람 중에는 거짓말처럼 가짜만 일관되게 수집해 놓은 수집가가 더러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서화를 수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가짜를 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가짜보다는 진짜가 더 많아야 할 게 아닌가. 일부러 가짜만 수집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원인은 수집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개 이런 수집가일수록 고서화에 대한 지식은 얕으면서 무조건 유명 서화가의 작품만 수집하려 한다. 일단 이런 수집가들은 남의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안목을 과신한다. 또한 이런 수집가 주위에는 불량한 거간꾼이 항상 끼어들게 마련인데, P사장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이런 거간꾼들은 수집가와 연결된 사업적 소통관계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 철저하게 가짜만 수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수집가가 자신의 수집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소장품을 처분하려고 할 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중간에 끼어 있던 거간꾼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모든 상황은 끝난 후다. P사장도 그랬다. 그후 그는 몇 년 동안 이 물건들을 처분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분을 삭이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소장품들이 마치 진품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앞의 K씨와 비슷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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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4수집가 천태만상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 수집의 목적은 사람마다 모두 제각각이다. 또한 고서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다르다 보니 수집하는 방식이나 태도 역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는 고서 수집의 태도를 유형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나는 정보탐색형·자기만족형·패가망신형·자기주도형 등으로 분류하곤 한다. 정보탐색형 수집가는 대체로 고서 수집보다는 고서가 매매되는 여러 가지 주변 정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전시회며 경매전 등 각종 고서 모임은 물론 여러 서점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고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또 여러 수집가와 교류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매우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다 정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들 중에는 도리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고서를 수집하면서도 자신의 수집 분야와 컬렉션의 질에 항상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이며 다른 수집가의 눈치를 살핀다. 소신이 없기 때문에 구매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망설이기 일쑤다. 이런 수집가들은 귀하고 좋은 책을 만나더라도, 이 책이 정말 귀하고 좋은 책이라면 다른 수집가가 놔두고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리기도 한다. 또 지금 막 고서점에 입수된 책을 자신이 제일 먼저 만났어도 이를 구입해야 좋을지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수집 초기의 한 과정으로 일시적으로 하는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큰 문제다. 호산방을 15년 넘게 드나들었으면서 단 한 차례도 고서를 구입한 적이 없는 C씨. 그는, 호산방에는 소위 고서의 대가들과 전문연구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니, 좋은 책은 자신의 차례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곤 했다. 그리고 어쩌다 살까 말까 망설이던 책이 팔린 뒤에야 두고두고 후회하곤 했다.(*사진 30)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도 좀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이따금 청계천이나 변두리 고서점에서 그와 심심찮게 마주치곤 한다.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떤 분야의 책을, 왜 수집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어떤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든 간에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는 정보 수집에만 관심을 쏟다가 그 때문에 도리어 스트레스만 받는 것 같았다. C씨와 비슷한 경우로 은행 임원 P씨가 있었다. 내가 그를 안 지는 35년도 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고서에 관심을 갖고 몇몇 고서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고서에 관해 이것저것 묻곤 했다. 금융인답게 고서 수집도 경제논리로 이해하려는 것 같았다. 또한 그는 고서의 유통구조에 심한 불신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같은 책이라도 서점마다 가격이 제각각인 고서의 유통형태를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고서 수집에 적극성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차라리 고서 수집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찾아와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려고 하는데 좋은 책을 권해 달라고 했다. 취미생활 겸 노후를 위한 투자로 고서를 수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책을 사 갔는데 주로 50~60년대 창간호와 문학 서적이었다. 나는 이왕이면 육이오 이전의 책으로 수집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책들은 가격이 비싸니 그냥 50~60년대 책을 수집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10~20년 후에는 이것들도 비싸질 것 아니냐는 얘기도 했다. 그때 나는 ‘개 꼬리 삼 년 묵어도 황모(黃毛) 되지 않는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이후 그는 여러 고서점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듯 보였다. 이따금 나를 찾아와서 다른 서점에서 구한 책을 평가해 달라곤 했다. 이런 경우 나는 대부분 잘 샀다고 말해 준다. 그러나 값에 대해서만큼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고서 수집을 포기했다. 그가 고서 수집을 그만둔 까닭은, 그때까지도 고서계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고서 수집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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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3고서 수집 십계명(2)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여섯번째, 일단 구입한 책은 물르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한번 구입한 책을 다시 물러 달라고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물론 책에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그래야겠지만, 너무 비싸게 주고 산 것 같다고 물러 달라면 정말 어이가 없다. 만약, 구입한 책이 나중에 아주 귀중본으로 판명된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한번 구입한 고서는 가짜거나 주인이 설명한 내용과 많이 차이가 나지 않는 한 물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집가는 결코 좋은 고서를 수집할 수 없다. 25여 년 전 일이다. L씨가 호산방을 방문했다. 그는 평소 고서에 관심을 갖고 있기는 했지만 호산방에서 고서를 구입한 적은 없었다. 『호산방도서목록』(*사진 27)에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보고 왔다며, 이래저래 살피더니 구입하겠다 했다. 모두 열 책이 한 질이고 가격은 이백만 원으로 결코 만만치 않은 값이었다. 『목민심서』는 다산 정약용의 저술로 목민관(牧民官)이 지켜야 할 지침을 밝히고 관리들의 폭정을 비판한 내용의 책이다. 이 책은 1901년 광문사에서 출간되기 이전에는 필사본으로만 전해져 왔다. 『목민심서』 필사본은 지금도 가끔 고서점에서 눈에 띄지만 필체가 좋은 것은 그리 흔치 않다. 호산방에 있던 것은 필체도 좋고 책의 됨됨이가 제법 괜찮은 편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날 L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열 책 한 질 중에 한 책이 『목민심서』가 아닌 다른 책이라는 것이었다. 사연인즉 이러했다. 문제의 『목민심서』 제삼책인가가 『흠흠신서(欽欽新書)』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흠흠신서』 역시 열 책이 한 질인 다산의 저술이다. 원래 이 필사본들은 『목민심서』와 『흠흠신서』가 각각 한 질로 되어 있었는데, 『목민심서』 제3책이 낙질되어 누군가가 『흠흠신서』 제3책을 끼워 넣어 눈속임을 했던 것이다. 나는 이 사실을, 구입 당시는 물론 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있었다.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는 책 모양과 장정은 물론 필체까지도 똑같아 겉으로 봐서는 다른 책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게다가 각 책의 표지에는 ‘목민심서 1’ ‘목민심서 2’…라는 제목이 각각 붙어 있어 당연히 완전한 한 질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면 ‘흠흠신서’가 어떻게 ‘목민심서’로 바뀌었을까. 『목민심서』 표지에는 각 책마다 붓글씨로 표제가 씌어 있었다. 문제의 책에는 ‘목민심서 3’이라고 씌어 있었는데, 다른 책과는 달리 ‘牧民心書’ 네 글자를 한지에 써서 덧붙인 것이었다. 그러니 수년 동안 갖고 있으면서도 책이 바뀌었을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L씨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본의 아니게 실수를 하게 되어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로 나를 몰아세웠다. 나 같은 전문가가 어찌 이같은 사실을 수년 동안이나 몰랐을 수가 있냐는 것이었다. 자기는 책을 산 지 단 하루 만에 알아보았는데, 고서점 주인이 책을 살 때 책장도 안 넘겨 보았겠냐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판 게 분명하다는 얘기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고서를 구입할 때 여러 권이 한 질로 된 것은 권수만 헤아려 보고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목민심서』의 경우도 그랬다. 책의 겉모습이 반듯하니 중간에 다른 책으로 바뀌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L씨는 책을 구입하고, 기쁜 마음에 그날로 모든 책에 장서인을 찍었다. 이 과정에서 그와 같은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L씨는 자기에게도 약간의 과실이 있을 수 있고 이미 모든 책에 자신의 장서인을 찍었으니, 자신도 일부 손해를 볼 테니 환불해 달라고 했다. 나는 모든 게 내 실수로 일어난 일이니 설령 장서인을 찍었다 하더라도 환불해 주겠다 하고 그 즉시 전액을 돌려주었다. 그래도 그는 오해가 풀리지 않은 듯, 그후로 호산방을 다시 찾지 않았다. 그렇다고 더 이상 오해를 풀 방법도 없어 지금까지 두고두고 마음이 무겁다. 그날로 나는 문제의 『목민심서』의 가격을 3백만 원으로 조정했다. 2백만 원에 팔았던 책이 위와 같은 이유로 반환되었으면 가격을 낮추어야지 도리어 가격을 올리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이 책이 호산방에 진열된 지는 약 칠 년가량 되었다. 호산방에서는 한동안 팔리지 않은 책의 일부는 가격을 상향 조정하여 판매하기도 한다. 그렇지 않아도 가격을 올리려던 참이었는데, 퍽 잘되었다 싶었다. 그러나 그 이유보다는, 설령 한 권이 낙질되었다 해도 그 가치가 3백만 원은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석 달 후 K교수가 이 책을 사 갔다. 그의 전공은 법학으로 평소 고문서에 관심이 깊었다. 물론 나는 그에게 이 책이 반환되어 돌아온 경위와 장서인이 찍힌 사연을 모두 얘기해 주었다. 사실, 앞서 소개한 경우는 책을 반환할 만한 충분한 사유가 된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이와 비슷한 일을 종종 경험하게 된다. 됨됨이가 온전한 것 같아 구입한 책 중에는 가끔 훼손되거나 낙장된 것들이 있다. 이런 경우, 안타깝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비록 훼손되긴 했어도 책의 가치가 크게 떨어지지는 않는다. 귀중본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만약 내가 L씨였다면 그 책, 『목민심서』를 그냥 소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L씨에게 서운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일곱번째, 섭치 백 권보다 귀중본 한 권을 산다. 고서 중에서 변변치 못한 책을 섭치라고 한다. 섭치도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유독 섭치를 좋아하는 수집가도 더러 있다. 물론 싼 맛으로 사는 것이겠지만 "지금의 섭치는 영원히 섭치다.” 결코 싼 것이 아니다. 섭치 백 권을 사느니 차라리 귀중본 한 권을 사는 것이 여러 면에서 낫다. 여덟번째, 알면 사고 모르면 사지 않는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좋은 책을 아주 싼값에 사게 되는 경우가 있다. 또 반대로 아주 비싸게 사는 경우도 있다. 좋은 책을 비싸게 사는 것은 별 문제가 없지만, 사지 말아야 할 것을 샀을 때는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좋은 책은 아무리 비싸게 주고 샀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잘 샀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지만 가짜라든가 신통치 않은 책을 사면 평생 후회하게 되기 때문이다. 고서를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주고 사거나 가짜 고서화를 사는 수집가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안목을 과신하거나 욕심이 앞서 있다. 한마디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고서를 사는 것이다. 반대로, 안목이 있는 사람은 어디서든 좋은 물건을 놓치지 않는다. 근 40년 전의 일이다. 골동 거간꾼 최씨의 별명은 ‘최따로’다. 그는 C시와 O시, G시 등을 무대로 고서와 골동을 수집하여 서울 등지에 내다 팔았다. 보통 거간꾼들은 시골을 직접 다니면서 집안에서 내려오는 옛 물건을 수집해 파는데, 최따로는 주로 가짜 골동품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별난 이였다. 그래서 별명도 ‘가짜’라는 뜻의 ‘최따로’다. 물론 그 아류로, ‘김따로’ ‘이따로’도 있다. 그가 취급하는 가짜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글씨를 비롯하여, 민화·민속품 등 매우 다양했다. 그는 가짜 물건을 내놓으면서 일체의 설명을 하지 않았다. 추사의 가짜 글씨를 내밀면서도 능청을 떨었다. "이거 쓰는 거요?” 그러고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흘렸다. 어떤 때는 제법 그럴듯한 가짜를 내놓기도 했다. 그가 다녀간 며칠 후 그 물건이 다른 고서점에 나도는 게 눈에 띄었다. 그는 호산방에 물건을 팔러 오기보다는 물건을 구하러 오곤 했다. 그가 구하려는 물건은 옛 종이였다. 가짜 그림과 가짜 글씨를 만드는 데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최따로도 가끔은 진짜 고서와 고문서를 들고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이 섭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최따로가 고문서 한 뭉치를 내놓았다. 필사본과 시문·간찰 등이 마구 섞여 있었다. 이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흔적이 보였다. 그러나 글씨의 됨됨이가 빼어나,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물건이라 생각되었다. 최따로에게 물건을 구입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시문의 주인공들은 조선 후기의 시인 홍세태(洪世泰)와 최승태(崔承太)·정내교(鄭來僑) 등으로, 소위 위항시인(委巷詩人)들이다. 이 시문들은 모두 이들의 친필이었다. 그 중 홍세태는 17세기말 18세기초의 문단에서 중인층뿐 아니라 사대부들 사이에서도 명망있는 시인이었다. 이때 ‘선명(善鳴)’이란 제호의 필사본도 함께 입수했는데, 이 책은 홍세태의 시문을 모아 놓은 필사본으로 그의 친필본이었다.(*사진 28) 주인이 먼저 묻지도 않은 가격을 말한다. 그런데 그 가격이란 것이 가짜일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비쌌다. 그래야 팔리나 보다 생각하고 있을 때, 어지럽게 널려 있는 물건들 사이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그림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6절지보다 작은 크기에 새 한 마리가 수묵으로 그려져 있었다. 어느 가난한 선비의 벽장 문에 붙어 있던 그림인지 땟물도 그만이다. 첫눈에 격이 있어 보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표암(豹菴)’이란 기명(記名)과 ‘광지(光之)’라는 낙관이 흐릿하지만 분명하게 드러났다. 각(刻)도 훌륭했다. 표암은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인 강세황(姜世晃)의 호로, 광지는 그의 자(字)이다. 한성부판윤과 병조참판을 지냈으며, 서화로 북경에까지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다. "이건 얼마요?” "지금 막 시골에서 사 온 건데 이만 원만 주시오.” 이처럼 가짜를 취급하는 가게에도 가끔은 귀물(貴物)이 섞여 있다. 그러나 이를 감별해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모르고 사는 물건 중에도 가끔은 귀물이 섞여 있을 수 있겠지만, 이를 바라고 고서를 수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일부 수집가들은 잘 모르면서도 주저 없이 사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사지 말아야 할 물건만 골라 사고, 정작 사야 할 물건은 놓치곤 한다. 고서를 잘 모르면서 고서를 사겠다는 마음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고서는 열 번 잘 사는 것보다 한 번 실수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홉번째, 구입처와 구입 가격을 말하지 않는다. 고서 수집가끼리는, 어떤 책을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다는 등 자랑도 할 겸 정보를 교환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나쁠 것은 없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그 평가가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정보교환이 고서 수집에 그다지 유익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이런 정보들이 왜곡되어 수집가나 고서점 주인 모두에게 불편한 요소로 작용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수집가 중에는 단골 서점의 책값이 너무 비싸다고 비방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비싸면 사지 않을 일이지 기껏 사 놓고 비싸다고 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반대로 어느 고서점 주인은 손님에게 고서를 팔아 놓고는 아무개는 책값을 깎는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이 역시 깎으려 하면 팔지 않으면 될 일이지, 기껏 물건을 팔아 놓고 손님을 흉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화근은 말에서 비롯되는 법이다. 고서 수집에서도 입이 무거워 나쁠 것은 없다. 대부분의 이름난 수집가나 고서점 주인들이 그러했다. 그래야 좋은 책을 수집하게 되는 법이다. 열번째, 이 서점 저 서점 다니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여기저기 순례하듯 다니는 사람이 있다. 물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이 서점 저 서점 다니다 보면 많은 책을 구경하게 되고 또 많은 정보를 얻게 마련이다. 이러한 고서점 순례는 고서 수집을 취미로 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수집 목적을 세웠다면 이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의 유통구조는 깔때기와 흡사해서 좋은 책은 한곳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서 수집의 성공 여부는 파트너 선택에 달려 있다. 다만 파트너의 자질에 관한 평가는 순전히 수집가의 몫이다. 파트너의 자질을 판단하는 기준은 우선 고서를 보는 그의 안목이다. 다음으로 인간관계가 고려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파트너십은 고서 수집에만 그치지 않고, 장서의 활용이라든가 혹 나중에 있을지 모를 장서의 처분 때에도 원만한 역할을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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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2고서 수집 십계명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수집하려면 우선 고서를 판매하는 곳의 정보를 알아야 한다. 고서를 판매하는 곳으로는 고서점과 골동품점, 중간상인을 들 수 있으며, 최근에는 인터넷 서점과 인터넷 경매 사이트도 등장했다. 이 외에도 개인 소장가나 수집가가 고서를 판매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고서 수집가들은 나름대로의 수집 요령을 갖고 있다. 어떤 수집가는 전국의 고서점과 골동품점을 순회하기도 하는데, 이런 수집가 중에는 주인에게 일일이 명함을 돌리며 이러이러한 고서가 나오면 알려 달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소위 저인망 전술이다. 물론 다리품을 팔다 보면 의외로 맘에 드는 것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이는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나는 이러한 수집가를 여럿 보았는데, 이 방법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여러 고서점을 상대로 하니 수집의 폭이 넓어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어느 수집가가 어떤 분야의 고서를 수집한다고 여러 고서점에 알렸다면, 고서점 주인들은 수집가가 부탁한 고서를 구하기 위해 주위의 동업자에게 알릴 것이 뻔하다. 결국 그 고서를 찾는 수집가는 한 사람인데, 그것을 팔려는 사람은 여럿이 되는 꼴이다. 자연히 서점 주인끼리 경쟁이 붙고, 가격은 순식간에 뛰어오른다. 그렇다고 그 물건이 반드시 그 수집가의 손에 들어온다는 보장도 없다.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관심 분야를 고서점 주인에게 일체 내색하지 않고 찾아다니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는 자신이 관심 갖는 분야의 고서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고서점 주인 입장에서는 언제 팔릴지도 모르는 책을 모두 갖춰 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조율해 주는 파트너가 필요하게 되는데, 이럴 때는 맘에 드는 고서점 주인이 그 상대가 되게 마련이다. 같은 조건에서 수집하더라도 어떤 파트너를 만나느냐에 따라, 수집 기간은 물론 고서의 질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다. 국·공립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의 자료 수집에는 소위 전문가로 구성된 자문위원이나 기획사가 관여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료를 평가하는 안목과 그 활용 가치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가치 평가의 기준을 확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이런 전문가들과 고서점 주인 사이에 묘한 갈등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갈등은 고서 수집에 커다란 걸림돌이 된다. 고서에 대한 감식안을 갖고 전체적인 계획을 주도하면서 차후 박물관 운영까지도 예상할 수 있는 기획력을 갖춘 파트너와 손잡는 것이 중요하다. 훌륭한 파트너는 뛰어난 감식안으로 수많은 고서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갖고 있다. 이런 능력은 마치 깔때기의 원리와도 같다. 또한 훌륭한 파트너란 바로 맥을 잘 짚는 사람을 말한다. 따라서 마음에 드는 고서를 수집하려면 고서가 모이는 깔때기의 목 부분만 지키고 있으면 된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파트너를 만난다면 이미 수집의 절반은 성공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수집가와 그 파트너인 고서점 주인 사이의 끈끈한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순전히 수집가가 판단할 문제다. 앞에서 언급한 여러 가지 요소를 두루 갖추었다 하더라도 좋은 고서를 만나려면 운도 따라야 한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거나 몇 안 되는 희귀한 자료를 만나는 데 운이 따르지 않고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아무리 운이 좋다 하더라도, 평생 동안 좋은 책은 그리 쉽게 만나지지 않는다. 좋은 뜻을 가지고 성실한 마음으로 수집하다 보면 좋은 책을 만나게 되려니 하고 기대해 보는 것도 좋다. 다음은 고서 수집 10계명을 소개한다. 첫번째, 책을 뒤적거리지 않는다. 대형 서점에서는 독자가 책을 한참 살펴본 후 구입하는 것이 보통이다. 서문과 목차를 확인하고 내용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읽던 책은 그대로 놔두고 서가에서 새 책으로 바꾸어 간다. 이렇게 뒤적거린 책들은 대개 상품가치를 잃게 된다. 그런데도 점원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이런 책은 출판사로 반품하면 그만이기 때문인데, 그로 인한 손실은 고스란히 출판사의 부담으로 돌아간다. 고서의 경우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고서는 물건의 특성상 다루기가 매우 조심스러운 것들이 대부분이다. 더욱이 고서는 신간도서와 달라, 그냥 놓여 있는 상태에서는 책의 내용은 물론 제목조차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러니 됨됨이를 살피려면 책을 뒤적거리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더라도 유별나게 책을 뒤적거리는 수집가가 있다. 그러나 ‘겉볼안’이라는 말이 있듯이 노련한 수집가는 책의 겉모습만 보고도 종류며 간행 연대, 내용까지도 알아차릴 수 있다. 다시 말해, 책의 됨됨이는 한눈에 들어오는 것이지 책을 뒤적거린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수집가치고 좋은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다. 습관적으로 책을 뒤적거리는 수집가를, 고서점 주인은 결코 좋아하지 않는다. 두번째, 사려는 책을 흠잡지 않는다. 수집가 중에는 마치 마음에 없는 책을 마지못해 사는 듯한 내색을 하면서, 사려는 책을 흠잡는 사람이 더러 있다. 아마 그러면 주인이 책값을 좀 싸게 부르겠지 하는 마음에서인지는 몰라도 이 얼마나 우스운 노릇인가. 맘에 안 드는 책을 굳이 왜 산단 말인가. 흠잡을 게 아니라 칭찬을 해 보라. 주인이 얼마나 기분 좋아하겠는가. 주인하고 사이가 좋으면 분명 귀한 책을 얻게 될 것이다. 세번째, 책값이 비싸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이 책 저 책 가격만 묻고 사지 않는 것까지는 좋다. 한술 더 떠, 책값이 비싸다고 주인의 심사를 뒤집어 놓는 사람이 간혹 마주치게 된다. 다음은 통문관 주인 이겸로 선생의 일화다. 쉰 살 정도의 신사가 와서 『사문유취(事文類聚)』를 찾았다. 보여주었더니 한참을 보고 나서 판(板)이 나쁘다고 가 버렸다. 몇 달 뒤에 그 신사가 다시 나타나 『사문유취』를 찾기에 내주었더니 이번에도 얼마 동안 뒤적거려 보고 비싸다고 가버렸다. 그러기를 너댓 번이나 반복했다. 어느 날 그 신사가 예전처럼 『사문유취』를 한참 보고 나서 또 무슨 흠을 잡으면서 나가려고 할 때, 이겸로 선생은 "선생, 미안하지만 좀 앉으시죠” 하고 의자를 내놓았다. 그 신사가 앉은 뒤에 "선생께서는 선생의 생존 시에 『사문유취』를 못 살 것이니, 임종 시에 아드님에게 내가 평생을 두고 『사문유취』를 사려고 하다가 못 사고 가니 네 대에는 꼭 『사문유취』를 사서 내 소원을 풀어 다오” 하고 유언을 하라고 했다.(『통문관 책방비화』 중에서) 네번째, 책값을 깎지 않는다. 리진호 지적박물관장은 「학촌 리진호 책 사냥·관리 십대 지침」이라는 글에서, "고서점에서는 삼십 퍼센트 정도 깎아서 흥정을 한다. 꼭 필요해서 산다는 눈치를 보이지 않고 참고삼아 산다는 인상을 준다”고 자신의 수집 비법(?)을 공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수법을 모를 고서점 주인이 어디 있겠는가. 삼십 퍼센트를 깎아서 사려 하는 수집가에게는 오히려 가격을 사십 퍼센트 정도 올려 부를 것이다. 고서는 다른 물건하고는 달라, 사고파는 과정에서 고서점 주인과 손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심리전이 펼쳐지곤 한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좀 비싸 보이는 책도 있게 마련이다. 또 알게 모르게 서점 주인이 바가지를 씌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까짓 바가지 좀 쓴들 어떠한가. 책값이 비싸다는 소리는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냉정히 말해, 값이 비싸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또 책값이 비싼 것은 사려는 사람의 입장이지 고서점 주인의 입장은 다를 수 있다. 책 가격을 깎지 않는 것이 되레 좋은 흥정이 될 수 있다. 이 정도의 요령을 익히면 분명 좋은 책을 수집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번째, 진본(珍本) 한두 권은 무리를 해서라도 구입한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좋은 책은 그리 많지 않고, 또 쉽게 만날 수도 없다. 때문에, 평소 구하려고 마음먹었던 책을 만났을 때는 어느 정도 값이 비싸더라도 과감하게 구입하는 결단력이 필요하다. 물론 그 책을 당시의 값보다 훨씬 싼 가격에 다시 만날 자신이 있다면 구입을 미뤄도 좋다. 그러나 그런 행운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천하의 진본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평생에 한두 번은 만나게 된다. 이럴 때 그 가격이 엄청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망설이게 마련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단호하게 마음을 접지 않고 망설일 정도의 값이라면 무조건 구입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 가격이 본인에게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된다면 당연히 포기해야겠지만, 망설여질 정도라면 결단을 내려도 좋을 것이다. 물론 진본을 구입한 대가로 오랫동안 후유증에 시달려야겠지만, 만약 그것을 취하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 속에서 살아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이런 일은 한두 번으로 그쳐야 하며, 그 결단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30여 년 전 어느 날, 키가 자그마하고 귀티가 나는 노신사가 호산방을 들렀다. 그는 한참 동안 서점 안을 유심히 살피더니 아무 말 없이 그냥 나갔다. 그리고 열흘쯤 후에 다시 찾아왔다. 그날도 예전처럼 아무 말 없이 서점을 둘러보고는 그냥 나가는 것이었다. 다시 며칠 후에 그 노신사가 또 들렀다. 이번에는 자리에 앉더니 말을 건넸다. 나는 한참 동안 그와 차분히 얘기를 나누었다. 노신사의 집에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간찰첩(簡札帖)이 여러 권 있는데, 어디 적당한 곳이 있으면 처분하려 한다는 얘기였다. 물론 물건을 보기 전에는 진위 여부를 단정지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의 말로 미루어 보아 매우 호감 가는 물건이었다. 그는 내일 다시 들리겠다고 약속을 하고 갔다. 다음날 약속한 시간에 맞춰 노신사가 잘 정리된 사진을 가지고 왔다. 김시습을 비롯하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석봉 한호 등 수백 명의 간찰이었다. 모두 단번에 알 수 있는 명인들이었다. 그날부터 내 머릿속엔 온통 간찰 생각뿐이었다. 얼마를 주고 살 것이며, 그 목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물건을 사고팔 경우, 일반적으로 팔려는 쪽에서 값을 제시한다. 그러나 고서를 사고팔 때는 소장자가 그 적정한 가치를 모르고 터무니없이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일이 많다. 이런 경우 소장자를 설득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십 원에 사고 싶은데 백 원을 부른다면 흥정의 여지가 없어지고 만다. 이럴 경우에는 차라리 사는 쪽에서 먼저 가격을 제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고가의 물건은 가격의 단위가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에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특히 간찰같이 아무나 쉽게 알아볼 수 없는 물건일 경우에는 구입하고자 하는 쪽에서 먼저 값을 제시하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도리어 상대에게 자신있게 먼저 가격을 제시함으로써 흥정의 주도권을 잡고 소장자에게 신뢰감을 줄 수도 있다. 달포 후, 나는 노신사의 집을 방문했다. 집 안에는 고화(古畵) 몇 점이 걸려 있었는데, 모두 격이 있는 작품들이었다. 대물림한 유물들로 보였다. 간찰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노신사가 간찰첩을 내왔다. 간찰첩은 모두 열두 권으로 낡은 오동나무 궤(櫃)에 들어 있었다. 간찰첩을 사이에 두고 노신사와 마주 앉았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심스레 간찰첩을 꺼내 보았다. 첩의 외관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크기가 두 가지였다. 조금 작은 것은 모두 여덟 권이었고, 그보다 조금 큰 것은 네 권으로 되어 있었다. 첩이 만들어진 연대는, 여덟 권짜리는 이백 년이 좀 넘어 보이고 네 권짜리는 이백 년이 채 안 되어 보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나는 첫번째 첩을 열었다. 김시습의 글이 제일 먼저 보였다.(*도판 24) 순간 심장이 요동치고 손끝이 떨렸다. 김시습이 누구인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오백여 년 전의 인물이 아닌가. 사실 이 정도 인물의 진적(眞跡)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계속해서, 퇴계·율곡의 간찰(*도판 25)이 줄을 이었다. 모두 사백여 장으로 된, 명인(名人) 삼백예순다섯 명의 간찰첩이었다.(*도판 26) 나는 이것들을 짧은 시간에 일별했지만 모두가 진품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내렸다. 나는 간찰첩을 조심스레 한쪽으로 밀어 놓았다. 이제는 내 쪽에서 무어라 답을 해야 할 차례였다. 노신사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 살펴본 소감이 어떻습니까?” "네, 모두 진품이 틀림없어 보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간찰첩은 처음 봅니다.” "젊은 분이 이것들을 한눈에 알아보다니 대단합니다.” "…….” "그래, 이것들을 얼마나 평가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나는 노신사가 사진을 맡기고 간 뒤 이를 평가하기 위해 여러모로 검토해 보았다. 고심 끝에 나름대로 구입하고픈 가격도 정해 놓았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가격을 제시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가격이 높고 낮고 간에, 상대가 고서의 생리를 잘 알지 못할 경우에는 흥정이 깨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노신사에게 고서의 매매 과정과 수집가의 생리에 대해 짧은 시간 동안 진지하게 설명했다. 노신사는 내 말을 모두 진실되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봉투를 조심스레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제가 성의껏 평가한 것입니다. ○○원입니다.” "…….”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허허, 젊은이 정말 대단합니다. 이 물건의 임자는 젊은인가 봅니다. 네 흔쾌히 드리겠습니다.” 거래는 불과 몇 분 만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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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1고서 수집의 모델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 수집의 목적과 주제, 수집 범위가 정해졌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집에 들어가도 좋다. 고서의 문헌적 자료적 미적 가치를 파악하는 안목은 고서 수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고서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없으면서 곧바로 수집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직접 접해 보고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고서를 직접 사고 파는 것일 수 있다. 수집가는 구입하기만 하지만, 자료를 구입해서 이를 다시 필요로 하는 수집가에게 팔아넘기는 일을 하는 고서점 주인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오랜 세월 고서점을 운영한 고서점 주인의 안목이 가장 좋아야겠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따르는 문제다. 안목을 넓힌다는 점에서는 수집가가 고서점 주인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서점 주인은 자신이 취급하는 자료만 접하게 되지만, 수집가는 여러 서점과 수집처를 드나들며 많은 자료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서를 수집하기에 앞서, 어떠한 식으로든 고서를 평가할 수 있는 나름대로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수집가는 오랜 세월 발품을 팔기도 하고, 때로는 별 가치 없는 고서를 고가로 구입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한 이십 년 전 일이다. K씨는 개화기 이후 근대 자료에 탁월한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신문·잡지와 문학 관련 자료에 조예가 깊어 이 방면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루는 퇴계(退溪)의 간찰 복사본을 가지고 와서 한번 봐 달라고 했다. 이름난 한학자(漢學者)인 L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인데 자신의 다른 자료와 교환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복사본은 한 눈에도 가짜 글씨가 분명했다. 나의 설명에 K씨는 몹시 상심한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아직 물건을 교환한 것도 아닌데 그냥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않으냐고 했더니, 이미 구두로 결정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L교수의 소장품이라면 그 명성으로 미루어 진품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며칠 후에 K씨는 문제의 간찰을 들고 나를 다시 찾아왔다. 역시 가짜 글씨였다. 이처럼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필사본이나 간찰·문서 등을 감식하거나 판별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류의 자료들도 고서의 한 분야로 감식하는 안목을 익혀야 한다. 일이십 년 이상의 수집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생전 처음 접하는 고서가 수두룩하고, 또 그때마다 고서 앞에서 당황해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리 걱정할 문제만은 아니다. 단순히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는 것이라면, 마음에 드는 고서를 수집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단,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려 한다면 귀중본이나 유일본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귀중본 같은 고가의 자료를 욕심낸다면 이는 이미 취미생활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귀중본 몇 권, 명인의 필적 몇 점쯤은 아주 헐값에 만나는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다. 만약 귀중본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차라리 그런 행운을 기다리는 것이 진정 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 수집 태도다. 투자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투자가 목적이라면 더더욱 고서에 대한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고서를 감식하는 눈이 없으면서 고서에 투자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고서가 투자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투자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것이 증권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귀중한 고서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판매하는 데는 또 다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경력의 고서점 주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수집가가 그것을 터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연구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설령 처음에는 고서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가 되게 마련이다. 또 자신의 연구 분야에 한해서만 수집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큰 문제가 없을 터이다. 박물관이나 자료실을 설립할 목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라면 이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다른 목적에 비해 더 오랜 시간과 투자가 요구됨은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질적 가치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박물관 설립의 목적에 걸맞은 유물을 갖추어야 하며, 개관 이후 지속적인 전시와 연구 주제를 생각하고 자료 수집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고서를 수집하는 데는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간다. 물론 그 비용은 수집 목적과 주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취미로 고서를 수집한다고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서에 대한 안목과 열정이 있다면 어느 정도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술 담배를 끊는다든가, 골프와 여행을 줄인다든가, 그 밖의 다른 여가생활을 고서 수집과 바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해 볼 만하다. 그렇지 않고 남들 하는 것을 다 따라 하면서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또 일정 수준 이상의 고서를 수집하는 데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분야에서 웬만한 수준의 컬렉션을 갖추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오 년에서 십 년 정도는 걸린다. 물론 한 분야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일정 수준의 컬렉션을 갖추는 데 걸리는 시간 역시 수집 대상의 주제와 수집가의 안목, 경제력 등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국·공립 기관에서는 먼저 예산을 세우고 그 범위 안에서 자료를 수집한다. 자료를 수집하는 기간은 고작 일 년 남짓인데, 이렇게 운영되는 박물관은 애당초 많은 문제점을 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어도 지속적으로 자료 구입에 관심을 갖고 수집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결국은 누가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공공기관 중에서는 기증을 받아 박물관 설립을 구상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관료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료 수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지난 11월 11일부터 내년 5월까지, 삼례 책박물관에서 열리는 「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 에 전시중인 유물 3점. 이 전시 주제는 필자가 40여년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고 수집한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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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0수집도 알아야 한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취미와 기호를 갖고 있다.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는 사람, 낚시·골프·여행을 즐기는 사람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이처럼 취미란 마음이 끌려 특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흥미를 말한다. 다시 말해 취미란 본업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때때로 그 대상의 아름다움과 멋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우표 수집이나 화폐 수집처럼 무언가를 수집하는 취미도 있는데 고서 수집도 그 중 하나다. 고서를 수집하면서 교양과 지식을 높이고 삶의 풍요로움과 멋을 느끼는 것이다. 또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귀한 책을 자신만이 소장하고 있다는 데서 강한 자기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 정도 단계에 이른 수집가라면 단순히 취미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이는 고서 수집이 이미 취미를 넘어서 어느 정도 전문가의 안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어떤 분야의 책을 오랫동안 꾸준히 수집하다 보면 특별히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그 방면의 지식이 쌓여서 전문가가 되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 책을 수집하지 않는 그 방면의 전공자나 학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도 있다. 수집한 고서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수집한 고서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저술을 내는 일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박물관이나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도 사회적인 봉사에 속한다. 한편, 수집한 고서를 매도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했다기보다는 취미와 연구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다. 또한 고서점 주인처럼 고서의 수집과 판매를 직업으로 하면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 이처럼 고서 수집에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따른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총을 다루고 쏘는 법을 익혀야 함은 기본이다. 이에 앞서 자신이 왜 전장에 나가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을 때 사기는 충천할 것이다. 고서 수집도 이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수집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갖춰야 할 것들이 있다. 고서를 수집하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이고, 또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과 적지 않은 돈, 그리고 열정이 따라야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만나 본 대다수의 수집가들은 수집 목적이 분명치 않아 보였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컬렉션은 십중팔구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애써 모은 책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고서를 수집하는 목적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그저 책이 좋아서 수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읽기 위해, 저술을 위해, 박물관이나 자료실 설립을 위해, 또는 투자 등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라도 좋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하고 수집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고서를 수집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게 되는 일이 보통이다. 여기에는 대개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고서 수집가가 어느 정도 고서에 눈을 뜨면 자신의 컬렉션을 되돌아보게 마련이다. 이때 대부분의 수집가는 자신의 컬렉션을 보고 깊은 회의에 빠진다. 그동안 내가 정성 들여 수집했다는 게 고작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실망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고서 수집 경력이 십오 년이 넘은 Y씨는 이십 대 시절부터 수집을 해 왔다. 젊은 시절에는 왕성한 활동력으로 서울 변두리 헌책방을 이틀이 멀다 하고 부지런히 다녔다. 수집 대상은 잡지 창간호였다. 대부분의 수집가가 그렇지만,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자신의 관심 분야 외의 책도 사들이게 마련이다. 책이 좋아서 구하기도 하고, 모처럼 들른 서점에서 그냥 나오기가 뭐해서 한두 권 사기도 한다. 그 역시 이렇게 모은 책이 칠팔천 권이 넘었다. 말이 칠팔천 권이지 집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어 움직일 틈도 없었다. 대부분의 수집가가 이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호산방이 장안평에 있던 시절, K씨에게서 잡지 수천여 권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해방 이전의 창간호와 귀중본 잡지가 상당수 포함된, 매우 수준 높은 컬렉션이었다. 이 책들을 본 Y씨가 의기소침해진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장서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맥이 빠졌겠는가.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얼마 후 고서 수집을 그만두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찌 보면 그로서는 그만한 시점에서 결심을 잘한 것이라 생각한다. 수집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수집하다 보니 수천 권이 된 책을 어찌할 것인가. 관리도 그렇고 활용 방안도 마땅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장서의 질이었다. 수천 권의 장서 가운데 육이오 이전의 희귀 잡지는 불과 몇 권 안 되었으니, 고서 수집가의 장서로 내세우기에는 빈약한 수준이었다. 나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취미로 시작했다 해도 수천 권을 수집했다면 이것은 이미 취미가 아니다. 취미란 여가를 이용하여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취미로 하기에는 애당초 잡지 창간호라는 주제부터 목적에 적합하지 않았다. Y씨는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나는 수집 목적이 분명치 않다면 고서 수집을 그만두라고 단호하게 권하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목적이 분명치 않은 수집은 질 좋은 컬렉션을 기대할 수 없고, 컬렉션의 질이 좋지 않으면 활용 효과 역시 기대할 수 없다. 또 이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막심하여 결국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수집의 목적이 정해졌으면 그에 맞는 수집 방향으로 철저하게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큰 기관이라도 여러 분야의 책을 동시에 수집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개인의 경우 수집과 보관에 따르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을수록 좋고, 주제는 독특할수록 좋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어떤 분야의 책을 수집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과 상황에 알맞은 주제의 선정이다. 한 연구자가 연구논문의 주제를 무엇으로 정하느냐가 그 논문의 성과를 결정짓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집 대상의 주제를 정해 놓았어도 수집하다 보면 범위가 자꾸만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애당초 이런 계획 없이 수집을 시작했다면, 어느 시점을 넘긴 다음부터는 수집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자신과 연관 있는 주제라면 더욱 좋다. 직업·고향·종교·취미·전공 등과 관련짓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령 박물관 설립 같은 큰 목표를 세우고 고서 수집의 뜻을 두었다면 주제를 정하는 단계부터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어떤 주제의 박물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미 누군가가 수십 년 전부터 이와 유사한 주제의 박물관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어떡하겠는가.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기에 전문가라면 이러한 정보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 앞에 예로 든 것처럼 주제를 출판미술 또는 출판디자인 등으로 정했다면, 다음은 수집 대상의 범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한정 지어야 한다. 우선 수집 대상을 1950년대 이전 자료로 한정하고, 그것을 다시 조선시대 자료와 개화기 이후의 근대 자료로 구분한다. 조선시대 자료는 도서와 비도서로 나누고, 도서는 또다시 판화가 실린 도서, 목판 지도, 활자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도서는 판화가 실린 목판과 시전지판(詩箋紙板), 능화판(菱花板) 등 판화 관련 실물자료와 인쇄 관련 유물 따위로 구분한다. 근대 자료도 도서와 비도서로 구분하여, 도서는 장정가가 표기된 도서와 편집디자인이 우수한 도서, 교과서 삽화 등으로 나누고, 비도서는 포스터·광고지·증명서 등 일상 속의 출판디자인 자료로 다시 구분한다. 특히 장정에 사용한 표지그림이나 삽화의 원화 등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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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9고서의 운명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인쇄된 책은 낱권으로 흩어져 있어도 내용이나 출처를 파악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필사본이나 문서, 간찰은 지금껏 보관되어 내려온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는 마치 수사관이 초동수사에서 사건현장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과 같은 이치로, 매우 주의해야 할 사항이다. 이러한 원칙은 수집가뿐만 아니라 고서점 주인에게도 역시 적용된다. 설령 자료가 매매되어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이 원칙은 철저히 지켜져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고서점 주인들은 이 원칙의 중요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료를 따로따로 팔기 일쑤다. 심지어 고활자본의 경우에는 분책(分冊)하여 팔기도 한다. 한적은 보통 여러 권이 모여 한 책을 이루고 있다. 이것을 서지학적으로 표현하면 ‘3권 1책’ ‘4권 1책’ 등으로 말할 수 있다. 즉 세 권이 한 책 또는 네 권이 한 책으로 되어 있다는 뜻이다. 장삿속으로는, 이것을 ‘1권 1책’으로, 즉 세 권이나 네 권으로 분책하여 팔면 그만큼 팔기도 쉬울뿐더러 이익이 더 남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고서 수집가들이 고서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유형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하나는 수집한 자료를 그때그때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꼼꼼히 정리하는 사람, 또 다른 하나는 수집에만 열을 올렸지 정리와 보관은 뒷전으로 미루어 놓는 사람이다. 이 두 부류 중에서 어느 쪽이 더 옳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어떤 경우든 자료가 손상되지 않도록 보관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수집가는 제 딴에는 정리를 잘한다고 스카치테이프나 본드 같은 화학풀 등으로 찢어진 부분을 수리하기도 하는데, 이는 절대 금해야 한다. 더 이상 손상되지 않게 잘 보관하다가 전문가에게 수리를 맡기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다. 고서를 입수하여 보관하는 일련의 과정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부드러운 솔이나 거즈 등으로 먼지를 제거한다. ② 구겨진 부분을 바로 편다. ③ 찢어진 곳은 밀가루풀을 사용하여 한지(韓紙)로 보수한다. 단, 손상 부위가 심각한 귀중본의 수리는 전문가에게 의뢰한다. ④ 실온에서 통풍이 잘 되는 곳에 보관한다. ⑤ 일 년에 한두 번 책을 볕에 쬐고 바람에 쐬는 폭서(曝書)를 하며, 곰팡이나 해충의 피해가 심할 경우에는 전문업체에 의뢰해 훈증소독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정에서의 보관이라면 서가에 책을 꽂아 두는 정도로도 별 문제가 없다. 사람이 생활하기에 적당한 정도의 조건이라면 책에도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는 않는다. 다만 지하실처럼 습기가 많은 곳이나 너무 건조한 곳은 피해야 한다. 평생 동안 수집하고 연구해 온 장서나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장서를 처분하게 됐을 때는 어떤 수집가나 소장자라도 고민하게 마련이다. 평소 이럴 때를 대비해 대책을 마련해 놓거나 미리 생각해 놓는 수집가나 소장자는 거의 없다. 이는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일인데, 만약 소장자가 갑자기 세상을 뜨게 되면 그 장서의 운명은 매우 불행해진다. 갑작스런 죽음에 유족들이 소장자의 생전 의지를 이어 나가기도 어렵거니와, 남은 가족에게는 커다란 짐을 안겨 주게 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소장자가 생전에 장서를 미리 적당한 곳으로 양도 또는 이전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철저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다.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에 기증해서 기념관을 세우거나 문고를 설립하는 것도 바람직한 방법 중 하나다. 이 과정에서 보통 기증과 매도(賣渡)가 이루어진다. 기증이란 책을 무상으로 주는 것이고, 매도는 팔아넘김을 의미한다. 도서관이나 기관에서는, 실제로는 개인의 장서를 매입하면서 겉으로는 기증받는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이는 소장자에게서 책을 매입했다는 것보다 기증받았다고 알려지는 편이, 소장자나 공공기관 모두의 체면과 위상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평생 어렵게 수집한 보물들을 그냥 넘겨받는 것은 소장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내부적으로 응분의 사례를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고서를 기증하는 형식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고서를 파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사례는 적당한 금액으로 내약(內約)하여 정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장서의 질이 박물관이나 공공기관에서 욕심낼 정도의 수준이어야 하고, 다음으로 소장자에 대한 사례가 합당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기증 후에는 그 자료들의 적절한 관리와, 활용에 대한 안전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 중에는 국내는 물론 세계 유명 도서관의 장서인이 찍혀 있는 것들도 있다. 이것들이 어떠한 경로로 내 손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상세하게는 알 수 없다. 어떻게 보면 공공기관보다는 안목 있는 고서점으로 양도되어, 그 책을 필요로 하는 연구자나 수집가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 더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장서는 어떤 경우라도 언젠가는 이곳 저곳으로 흩어지게 마련이다. 고서의 운명은 이런 것이다. 평생 수집한 고서를 어디론가 보내야 하는 뼈아픈 심정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수집가가 언젠가 겪어야 할 운명이다. 이렇게 흩어진 책들은 고서점으로 다시 나오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소장자 자신이 평소에 가장 신뢰하던 고서점을 통하게 마련이다. 이런 식으로 고서는 돌고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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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8‘운생’과 ‘척하생’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다루는 과정에서 특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자료 중에는 책뿐만 아니라 문서나 메모 등도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때, 원래 보관되어 있던 상태를 결코 흐트러뜨려서는 안 된다. 특히 문서나 간찰(簡札)의 경우, 봉투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봉투와 분리해 놓아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또 차례를 뒤섞어서도 안 된다. 차례가 뒤섞여 버리면 나중에 그 순서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간찰의 경우, 글쓴이가 ‘부(父)’ 또는 ‘자(子)’ ‘제(弟)’로 표시된 것이 많은데, 이런 간찰이 달랑 혼자 떨어져 있다면 글쓴이가 누군지를 밝히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간찰이나 문서는 한 집안에서 보관되어 내려온 것이기 때문에, 만약 다른 간찰이나 족보가 함께 있다면 그 아비〔父〕가 누구고 아우〔弟〕가 누군지를 간단하게 밝힐 수 있다. 또 책갈피에 메모지나 문서 같은 것이 끼어 있기도 한데, 이것 역시 그 자리에 그대로 놔두는 것이 자료를 고증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판 18) 1985년 조성호란 노인이 고문서 한 다발을 가지고 왔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그는 고서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고서 중개인이었다. 성품이 바른 데다 고서화를 보는 감식안이 매우 높아 나는 노인과 가까이 지냈다. 그날 노인이 내놓은 자료는 첫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간찰과 시문들이었다. 글씨며 종이 됨됨이까지도 아주 빼어났다. 특히 『다산문답(茶山問答)』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서첩은 지금까지도 기억이 또렷하다. 손바닥보다 조금 큰 크기의 고운 비단에 당먹으로 쓴 글씨는 지금까지 접해 본 글씨 중에서 최고 명품의 하나로 꼽는 작품이다. 이 서첩은 다산 선생의 강진 유배 시절, 그곳까지 찾아온 문산(文山) 이재의(李載毅, 1772-1839)에게 써 준 서첩으로 문산과의 문답시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당시 문산은 영광군수로 있는 아들 종영(鍾英)에게 와 있던 중이었다. 문산은 다산보다 열 살 아래였지만 이들은 학문적으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면서도 돈독한 우의를 다진 것 같다. 지금은 다산과 문산에 대한 학계의 관심이 많아졌지만 내가 이 자료들을 접할 때만 해도 문산과 그의 아들 종영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조 노인이 가져온 고서 중에는 『다산문답』 이외에도 다산의 장남 학연(學淵)의 간찰 여러 점이 함께 있었다.(*도판 19) 학연의 간찰 중에는 이름 대신 ‘척하생(戚下生)’이라고 표기한 것도 있었다. ‘척하(戚下)’란 성(姓)이 다른 겨레붙이를 상대하여 자기를 낮추어 이르는 말이다. 이처럼 이름이 명기되어 있지 않은 간찰을 학연의 것으로 단정지을 수 있었던 것은 다른 자료가 함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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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7고서는 유전한다니까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수집하다보면 유명인의 장서인이 찍혀있거나 저자 또는 책 주인의 서명이 들어있는 책을 심심치 않게 만나게 된다. 여기에는 수백 년 전의 역사적 인물은 물론 지금의 유명인도 있게 마련이다. 나는 이러한 책을 여러 권 소장하고 있다. 지난번에 소개한 『선영산도』 필사본은 조상의 묏자리를 지도로 그려 정성껏 만들어 놓은 책으로 장정이 매우 아름답다. 표지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자손만대에 잘 간수하라(敬覽守而勿失)”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지만 지금은 내손에 들어와 있다. 다음에 소개하겠지만 1955년 산호장에서 발행한 박인환의 『선시집』은 저자가 시인 장호강에게 증정한 책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유일한 초판본이다. 이처럼 집안의 가보나 저자가 직접 서명하여 증정한 책이 더러 고서점으로 흘러들어오기도 한다. 이러한 것들은 박물관이나 고서수집가들에게 특별히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책의 운명이란 이처럼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뀔 수도 있다. 이렇게 고서는 돌고 도는 것이다. 2013년 12월 8일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다. 도올 김용옥(65) 한신대 석좌교수가 홍준표(59) 경남도지사에게 선물한 책 ‘동경대전’이 난데없이 헌책방에서 발견돼 논란이 일자 홍 지사가 트위터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한 네티즌은 7일 자신의 트위터에 "헌책방에서 산 책”이라며 김 교수가 쓴 책 ‘동경대전’의 사진을 올렸다. 공개된 사진 속에는 김 교수가 홍 지사에게 책을 선물하며 남긴 ‘홍준표 의원님께’라는 친필 사인이 담겨 있다. 이어 이 네티즌은 "도올 선생님이 새누리당 홍준표 의원에게 선물한 것 같은 동경대전이 헌책방을 통해 나에게로, 참 우리 정치인들 격도 없고 예도 없구나”라며 "이 책이 헌책방으로 흘러들게 된 데는 분명 여러 사정이 있을 겁니다. 허나 부주의함도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 중 하나겠지요”라고 적었다. 또 "자신의 저작을 선물한다는 의미는 그 글을 쓰기 위해 살아온 삶 전체를 선물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모두 돌아봐야할 부분”이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해당 사진과 글은 하루 만에 수천 건의 리트윗(RT·재전송)으로 확산됐고, 이를 접한 일부 네티즌들은 ‘선물 받은 책을 팔아버린건가?’ ‘읽어보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등 홍 지사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반면 또 다른 네티즌들은 ‘또 비판건수 하나 잡았나 보다…일부러 버릴 리가 있겠나’ ‘책 정리과정에서 일어난 단순 실수 아니겠느냐’는 등의 옹호론을 펼쳤다. 한편 해당 논란을 접한 홍 지사는 8일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국회의원을 그만두게 되거나 연말에 책 정리를 직원들이 할 때 쌓인 책을 도서관에 기증하거나 헌책으로 버리게 됩니다”라면서 "도올 선생의 책은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해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라고 유감을 표명했다. 동양학자 도올 김용옥 교수가 10년전 국회의원이던 홍준표 경남지사에게 증정한 책 『도올심득 동경대전』이 헌책방에서 나왔다. 발견한 사람이 책 사진을 트위터에 올려 논란이 일자 홍지사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김교수는 책 앞장에 붓글씨로 ‘홍준표 의원님께’라고 썼다. 받을 땐 고맙게 책을 받았더라도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책과 헤어져야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면 어떤 이들은 저자가 서명한 페이지를 잘라내기도 한다. 그게 책과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나는 이와 비슷한 서명본들을 수없이 수집해보았다. 또 나의 저서에 서명하여 기증한 책을 헌책방에서 내가 다시 구입한 기억도 있다. 대개 이러한 책들은 그렇지 않은 책 보다 훨씬 호감이 가고 정이 느껴지게 마련이다. 이는 고서에 웬만큼 눈을 뜬 사람이라면 다 공감하는 이야기로 고서 유통에서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일이다. 책이 주인의 손을 떠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겠지만, 대개는 헌책방이나 고서점에 판매하는 경우 이외에도 도서관 등에 기증하거나 이사 등의 이유로 짐정리를 하다가 무심코 버리기도 한다. 이 중 상당수는 폐지 공장에서 책으로서의 일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설령 누구에게서 기증받은 책이라 하더라도 위의 경우에서 특별히 벗어날 수는 없다. 물론 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기증한 서명본이 헌책방에 팔려간다면 서운하기도 하겠지만 이것이 염려된다면 애당초 기증을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경우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저자가 서명한 페이지를 잘라 내거나 낙관 등을 오려내는 일이다. 그것은 소중한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를 온전한 상태로 헌책방이나 고서점에 보내는 것이 뭐가 잘못된 일이고, 뭐가 부끄러운 일인가. 활용을 끝마친 책이거나 내게 필요치 않은 경우, 이를 필요로 하는 후학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이다. 헌책방이나 고서점이 바로 이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그런데 위의 기사에서 기자는 저자가 서명한 페이지를 잘라 내는 것이 "책과 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오도하고 있다. 비록 서명본이라도 고서점에서 새로운 주인을 만난다면 저자는 이 또한 기쁜 일로 받아들이면 된다. 이때의 서명은 역사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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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6고서는 유전한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사람뿐만 아니라 고서의 세계에도 운명이 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고서들은 그래도 복 받은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수의 고서들이 전란으로 소실되기도 하고, 도배지로 쓰이기도 하고, 심지어는 불쏘시개가 되거나 화장실에서 사라졌다. 그런 와중에서도 장서인(藏書印)이 찍혀 있는 고서를 이따금 만날 수 있다. 장서인이란 책의 임자를 표시하기 위해 찍은 도장이다. 뿐만 아니라 잘 만들어진 장서인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예술품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유명인의 장서인일 경우 그 책의 품격도 그만큼 올라간다. 선인의 손때와 숨결이 묻어 있으니 이 얼마나 귀한 책이겠는가. 이런 책을 ‘수택본(手澤本)’이라고 하는데, 이런 경우 거의가 좋은 책임에 틀림없다. 때문에 고서 수집가들이 이러한 책들을 선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사진 13)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다른 문중의 자료를 심심찮게 접하게 된다. 『선영산도(先塋山圖)』란 제목의 필사본은 이름 그대로 조상이 묻혀 있는 산의 지도다. 지도에는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진관외리”라는 선산의 소재지와, "이천상의 산(李天祥山)”이라는 주변 산의 주인, 경계가 될 만한 지형지물, 수십 기(基)의 묘가 표시되어 있다. "부당정사(芙塘精舍)에서 후손 현각(顯珏)이 기사년(己巳年, 1869)에 수정(修正)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그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지도를 그린 재주가 매우 빼어나 도화서(圖畵署) 화원(畵員)의 솜씨로 보인다. 이 지도는 손바닥만 한 수진본(袖珍本)이지만, 펼치면 가로 26.5cm, 세로 24.5cm 크기가 된다. 수진본이란 유생(儒生)이 늘 익혀야 하는 경서나 시문을 작은 책에 옮겨 적어 소매에 넣고 다니면서 수시로 읽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옷소매 속에 넣고 다닐 수 있을 만한 작은 책을 말한다. 『선영산도』는 수진본 중에서도 그 장정이 특이하여 접으면 마치 지갑처럼 아름다운 모양이 된다. 앞서 고서의 분류에서 설명한 축절첩장본의 한 종류로 그 장정이 매우 특이하다. 표지에는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자손만대에 잘 간수하라(敬覽 守而勿失)”고 당부하고 있다.(*사진 14~15) 이처럼 개인이나 집안에서 소중하게 간직하던 고서들이 어느 순간 생면부지의 새 주인에게 넘어가게 된다. 여기에는 도난당한 고서도 있고, 집안의 내력과 가계(家系)를 기록한 족보나 『선영산도』 같은 문중의 유물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책들은 한결같이 자자손손 전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귀중한 책이라도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치면서 유전하는 운명으로 살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고서 유통의 한 과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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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5헌책방과 고물장수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는 유전(流轉)하는 물건이다. 오늘 갑이 샀다가 내일 을에게 넘기는가 하면, 모레는 다시 병의 손에 들어간다. 이처럼, 지금 내가 소장하고 있는 고서도 언젠가는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된다. 다만 지금 내가 잠시 보관하고 있을 뿐이다. 고서는 일반적인 생활용품과는 달라서 구입처와 판매처가 일정하지 않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똑같은 고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팔고 사는 사람에 따라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고서가 유통되는 경로는 매우 다양하나, 그 중에서 고서점을 통한 유통이 가장 일반적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점차 인터넷 고서점과 경매를 통한 고서 매매가 고서 유통의 새로운 축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적인 현상이겠으나, 고서의 특성상 인터넷을 통한 유통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고서는 직접 눈으로 보고 구입하는 것이 일반적이라 하겠다. 또한, 지금은 고물장수를 통해 고서가 유통되는 경우가 많이 줄었지만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유통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다. 변두리 헌책방에서는 아직도 고물장수에 의존해 책을 구입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1974년경 하루는 원효로 부근의 한 헌책방에 들렀다. 책방 주인은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군대 가는 대신 감옥에 갔다 올 정도로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이었다. 직장생활하기에도 마땅치 않아 헌책방을 차렸다고 했다. 당시 나는 군입대를 앞둔 때라, 군대 대신 감옥을 다녀왔다는 그의 말이 그저 영웅담처럼 들렸다. 웬일인지 그의 가게에는 고물 장사꾼들이 끊임없이 리어카를 끌고 오곤 했다. 그들은 수집한 책들을 가게 앞 골목길에 부려 놓고 책방 주인이 필요한 책을 고르면 나머지는 다시 자루에 담아 고물상으로 가져가곤 했다. 책값은 책방 주인이 치러 주는 대로 두말없이 받아 가면서 연신 고맙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파지 값만 받는 고물상보다는 헌책방에 파는 것이 훨씬 이문이 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예전 헌책방 사업의 성패는 동네 고물장수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그런 면에서 그 책방 주인은 제법 수완이 좋아 보였다. 그날도 고물장수가 리어카를 끌고 왔다. "오늘은 뭐 시꺼먼 책이 좀 나왔는데….” "어디 좀 볼까.” 책방 주인이 자루 속의 책을 확 쏟았다. 최근의 잡지·소설 등과 함께 고서 한 무더기가 쏟아졌다. 『현해탄』 『문학의 논리』 『지용시선』 등 수십여 권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말로만 들었지 모두 실제로는 처음 보는 책들이었다. 옆에서 쳐다보는 내 가슴이 다 뛰었다. 그런데 주인은 잡지와 소설 등 최근에 나온 책들만 남기고 모두 자루에 담더니 못쓰는 거라며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고서 수집에서는 몇 가지 불문율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서점 주인이나 다른 사람이 흥정하는 도중에는 절대로 끼어들거나 참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그 정도의 눈치는 있었기에 처음부터 못 본 체했다. 저 귀한 책들을 못쓴다고 하니 주인더러 사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내가 사겠다고 나설 수도 없어 어떻게 하면 좋을까 망설이고 있는데, 고물장수는 벌써 저만치 가고 있었다. 나는 얼른 책방 주인에게 말을 건넸다. "아까 그 책들 중에 필요한 책이 있는데 내가 사도되겠습니까?” 주인은 흔쾌히 그러라고 하면서, 막 골목을 벗어나려는 고물장수를 불러 세웠다. 그렇게 해서 그 책들을 모두 헐값에 구할 수 있었다. 『현해탄』은 임화(林和, 1908-1953)의 대표 시집으로 1938년 동광당서점에서 발행했으며(*사진 9~10), 『문학의 논리』 역시 임화가 1940년 학예사에서 발행한 문학이론서이다.(*사진 11)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임화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 서기장을 지냈고, 1947년 월북했다. 『지용시선』은 정지용(鄭芝溶, 1903-?)의 시집으로 1946년 을유문화사에서 발행되었다.(*사진 12) 정지용은 6.25때 납북된 시인이다. 그날 내가 구한 십여 권의 책은 모두 소위 월북작가의 책이었다. 1988년 7월에 이 책들이 모두 해금되어 지금은 마음 놓고 구해 볼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이러한 책은 사고팔기는 고사하고 작가의 이름조차도 거론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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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4고서의 분류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자세하게 분류하자면 끝이 없지만 그 대강을 살펴보면, 나라별 또는 지역별로는 한국본(韓國本)·일본서(日本書)·당판본(唐版本)·서양서(西洋書) 등으로 나뉘고, 시대별로는 고려본(高麗本)·송판본(宋版本)·개화기간본(開化期刊本) 등으로 나뉘며, 발행소를 나타내는 판원별(版元別)로는 서원판(書院版)·사찰판(寺刹版)·관판(官版)·방각본(坊刻本) 등으로 나뉜다. 방각본은 조선 후기에 상업적인 목적으로 민간에서 출판된 도서를 말한다. 원래는 중국 남송(南宋) 이후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서점에서 출판한 사각본(私刻本)이란 말에서 유래되었다. 한국에서는 앞서 언급한 일본 서지학자 마에마 교사쿠에 의해 방각이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 방각본이 출현한 시기는 조선 중기 이후로, 발행 장소에 따라 경판본(京板本)·완판본(完板本)·안성판본(安城板本) 등으로 구분된다.(*사진 6) 간사별(刊寫別)로는 인본(印本)·사본(寫本)·목판본·활자본으로, 간순별(刊順別)로는 초간본(初刊本)·후쇄본(後刷本)·복각본(覆刻本)으로, 제판별(製版別)로는 탁본(拓本)·영인본(影印本)·석판본으로 나뉜다. 활자별로는 목활자본(木活字本)·철활자본(鐵活字本)·동활자본(銅活字本)·도활자본(陶活字本)·석활자본(錫活字本)·포활자본(匏活字本)·연활자본(鉛活字本)으로, 사본별(寫本別)로는 친필본·사경(寫經)·원고본·초본(抄本)·정사본(淨寫本)·미간본(未刊本)·수정본(修正本)으로 나뉜다. 가치별로는 진본·귀중본·희귀본으로 나뉘며, 내용별로는 문학서·법률서·병서(兵書)·문집으로 나뉜다. 책의 상태에 따라서도 분류를 하는데, 완전본·영락본(零落本)·결본(缺本)·섭치본·파본(破本)·선본(善本)으로 나눌 수 있다. 영락본이란 볼품없는 책을 초목의 꽃이나 잎이 시들어 떨어짐에 비유하여 일컫는 말로, 섭치본과 비슷한 말이다. 이와 반대로 보존 상태가 좋거나 오래된 희귀한 책, 또는 내용이 뛰어나고 제본이 잘 되어 있는 책을 선본이라 한다. 유통별로는 내사본(內賜本)·진상본(進上本)·어람본(御覽本)·한정본·기증본·복장본(伏藏本)으로 분류된다. 내사본이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린 책으로, 그 유래를 기록한 ‘내사기(內賜記)’가 적혀 있다. 이 외에도 고서의 종류는 분류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하고 그 수가 늘어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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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 이야기 3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와 마에마 교사쿠의 『고선책보』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지난 회에서 언급한 이야기는 쿠랑의 『한국서지(Bibliographie Coréenne)』 서론의 기록들이다. 서지(書誌)란 고문헌이나 희귀본의 체제·내용·가치·보존상태 따위를 조목 조목 밝힌 기록을 말한다. 따라서 서지 연구는 모든 분야의 학문 연구에서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중요한 기초 작업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한국 고서의 서지 연구에서 가장 훌륭한 책을 둘만 꼽으라면 바로 쿠랑의 『한국서지』와 마에마 교사쿠(前間恭作, 1868-1942)의 『고선책보(古鮮冊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쿠랑의 『한국서지(韓國書誌)』는 모두 네 권으로, 1894년부터 1901년까지 프랑스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의 동양학자 겸 외교관으로 1890년 5월 조선에 입국하여 조선 주재 프랑스 부영사 겸 통역사로 2년간 근무했다. 이 책의 편찬에는 1887년 조선의 첫 번째 프랑스 외교관으로 온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Victor Collin de Plancy)와 프랑스 카톨릭 선교사 뮈텔(Mutel) 주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 책은 고려시대의 『고금상정예문(古今詳定禮文)』에서부터 구한말의 『한성순보(漢城旬報)』(*사진 4)에 이르기까지 3,821종의 도서를 교회(敎誨)·언어·유교·문묵(文墨)·의범(儀範)·사서(史書)·기예(技藝)·교문(敎門)·교통의 아홉 부로 분류하고, 각 문헌에는 불어로 해제를 붙였다. 책머리에는 장문의 서론이 있는데, 여기서는 조선 도서의 성격과 특징을 언급한 데 이어 언어와 문자, 유·불·도 사상을 비롯하여 역사·지리·전례(典禮)·정법(政法)·수학·천문학·병법·의술·점성술·예술 등을 문화사적 시각에서 개관했다.『한국서지』는 그 첫째 권이 출간되고 100년이 되어서야 한국어 번역본 『한국서지』(이희재 역, 일조각, 1994.)가 출판되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이희재 교수는 이 책의 번역작업에 평생을 매달렸는데 언젠가 나에게 "모리스 쿠랑을 짝사랑하다 시집도 못갔다”고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마에마 교사쿠는 일본의 한국어학자로, 1891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를 졸업한 뒤 유학생으로 내한하여 1894년부터 인천영사관에 근무하다가 1900년 시드니로 전임했으나, 이듬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공사관의 이등 통역관이 되었다. 1910년에는 총독부 통역관으로 일하다가 1911년 귀국했다. 그는 한국에 머무는 동안 한국 고서의 수집과 연구에 전념했고, 수천 권의 고서를 수집하여 이를 바탕으로 『고선책보』(*사진 5)를 출간했다. 『고선책보』는 46배판 크기에 2천 쪽이 넘는 분량을 세 권으로 나눈 책이다. 첫번째 권이 1944년, 두번 째 권이 1956년, 그리고 세번째 권이 1957년에 나왔으니, 완간되기까지 12년이 더 걸린 셈이다. 첫번째 권은 일본의 도요분코(東洋文庫)에서 출간했으나 일본이 패망한 뒤 그 후속 권을 출판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다 일본 문부성의 지원으로 완간을 보게 되었지만 저자는 생전에 자신이 쓴 책의 완간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어느 분야의 서지를 정리하는 작업은 서지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자료수집,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학계에서는 이러한 공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인색해 보인다. 서지작업을 업적이라 생각하기보다는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아주 고약한 마음이다. 우리나라 고서의 특색으로는, 첫째 오래된 고서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지금도 고서점이나 골동품 가게에 가면 고서가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질과는 상관없이 수적으로는 대단히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이 많았던 나라다. 가깝게는 6.25전쟁을 겪으면서 이전의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나라가 황폐화했다. 또 개화기부터 6.25를 전후한 시기까지 우리의 전적(典籍)과 고서화가 무차별적으로 약탈당하거나 또는 헐값에 외국으로 팔려 나갔다. 수없이 많은 전쟁의 참화를 겪고도 이만큼 고서가 보존되어 온 것을 보면 우리 출판문화가 매우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1960-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주택개량사업으로 인해, 수백 년 동안 집안 대대로 전해 내려오던 온갖 고서들이 막 쏟아져 나왔다. 이런 고서들은 전국의 유명 박물관과 도서관에 소장되거나 수집가들의 손에 들어가고도 아직도 심심찮게 나돌고 있다. 둘째, 한글은 우리 민족 고유의 문자로 이는 우리나라 출판 인쇄물에서만 볼 수 있는 특성이다. 셋째, 한국 특유의 활자본과 필사본이 많다. 물론 활자본이나 필사본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고활자 본이 우리나라처럼 발달한 나라는 없다. 특히 우리나라 고서 중에는 필사본이 많다. 인쇄본을 찍어내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가야 하므로 수요가 많지 않은 분야의 책들은 자연 출판이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분야에서 필사본이 만들어졌고, 그것들이 지금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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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 이야기 2고서는 헌책이 아니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은 ‘도서(圖書)’ 또는 ‘서적(書籍)’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도서는 ‘하도낙서(河圖洛書)’의 준말로, 중국 성대(聖代)에는 "황하(黃河)에서 그림이 나오고, 낙수(洛水)에서 글씨가 나왔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책이란 한자의 ‘책(冊)’자에서 비롯된 말로, 옛날에 댓가지나 나무에 글을 새겨 그것을 나란히 꿰맨 데서 그 모양을 본뜬 글자이다. 『한국서지학사전』(1974)에는 "어떤 사상이나 사항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한 종이를 겹쳐서 꿰맨 물체의 총칭”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그러나 비록 사람의 사상이나 감정을 나타낸 것이라 하더라도 내용 면에서 어떤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국제적인 규정은 49면 이상의 분량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요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휴대나 열람에 적당치 못하다면 진정한 의미의 책이라 말할 수 없다. 이처럼, 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보다 구체적이고도 논리적으로 풀어내기는 쉽지 않다. 국어사전에서는 고서를 ‘옛 책, 고서적’ 또는 ‘헌책’이라 정의하고 있다. 이는 모두 옛날 책, 즉 오래된 책을 뜻하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헌책’이라 하면 낡은 책 또는 오래되어서 허술한 책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굳이 옛 책(고서적)과 헌책을 구분한다면, 비교적 가치가 있으면서 오래된 책을 옛 책 즉 고서라 할 수 있고, 비교적 가치가 덜하면서 오래 되지 않은 책을 헌책이라 말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고서동우회(현 한국고서연구회)에서는 "1959년 이전에 출판된 책을 고서라고 할 수 있다”고 규정한 바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실정으로 미루어 볼 때 "그때까지 출판된 책을 도서관이나 그 밖의 수집가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상당히 타당성 있는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1959년을 기점으로 역사적으로나 출판사적으로 어떤 뚜렷한 사고나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나는 6․25 전쟁이 끝난 1953년을 기점으로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본다. 6․25는 우리 근대사의 커다란 사건으로 이 당시 수많은 책이 소실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쟁 중에는 출판활동에 많은 제약이 따라 이 기간 중에 출판된 책의 수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기준들은 어디까지나 고서를 규정짓기 위한 최소한의 편의일 뿐 어떤 구속력이나 절대성을 갖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점 이전의 책은 귀하고 그 이후의 책은 귀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책임에도 불구하고 고서로서 가치가 덜한 것이 있고, 그다지 오래되지 않은 책이라도 매우 귀한 가치를 지닌 책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오래 되었다고 해서 모든 책이 고서로 대접받는 것은 아니다. 양서(良書)라야 고서로서 대접받는 법이다. 그렇다면 양서란 어떤 책일까. 요즘의 출판과 비교해 보면 흥미로운 답을 얻을 수 있다. 출판된 지 50년, 100년 후에도 고서 수집가가 찾을 만한 책이라면 양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지금의 베스트셀러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간의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과는 좋은 대조다. 한적(漢籍)은 한지에 인쇄 또는 필사를 하여 꿰맨 책으로, 우리의 전통적인 출판 방식으로 만들어진 책을 말한다. 모리스 쿠랑(Maurice Courant, 1865-1935)은 우리 옛 책의 인상에 대해, "볼품없는 것들로 크기는 보통 8절판에서 12절판이고 별로 두껍지 않으며, 표지는 견고하지 못한 노란 살굿빛 조잡한 종이에, 무늬를 조각한 목판으로 눌러 새긴 반들거리고 빽빽한 양각(陽刻)의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것은 구한말 서울 광교 부근이나 시골 장터에서 좌판을 벌려 책을 판매하던 모습을 보고 기록한 것이다.(*사진 2) 당시는 이제 막 서양의 신식 인쇄술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우리의 전통 인쇄술과 뒤섞여 일견 조잡한 인쇄물이 많이 출판되던 시기이기도 하다. 쿠랑이 위에서 설명한 책들은 구한말의 저급 상업출판물로서의 한적을 이르는 것이다. 쿠랑은 우리 책의 제본 방식에 대해, "책들은 홍사(紅絲)로 다섯 혹은 여섯 군데를 꿰매 놓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나 일본의 고서는 네 군데나 여섯 군데를 꿰매는 데 비해 우리나라 고서는 보통 다섯 군데를 꿰매는 ‘오침안정법(五針眼釘法)’으로 제본되어 있음을 이른 것이다.(*사진 3) 또 종이의 질과 인쇄 상태에 대해서는, "종이는 잿빛을 띠고 아주 얇고 부드러운데, 지푸라기나 자그마한 먼지 또는 흙 알갱이가 낀 구멍들이 있어 자연히 이런 곳에는 인쇄가 되지 않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사실 우리 한적에 사용된 종이의 질은 매우 우수한 편이다. 쿠랑이 이르는 것은 구한말의 상업출판물 중에서도 그 됨됨이가 조악한 인쇄물이다. 쿠랑은 이러한 책 외에도 "완전치 못하거나 닳거나 더러워진 것, 뜯어졌거나 좀먹은 것들도 있었다”고 했다. 이것으로 미루어 좌판이나 전방(廛房)에서는 신간 서적뿐만 아니라 고서도 판매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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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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