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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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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5

우물 안 개구리

  • 특집부
  • 등록 2020.12.16 07:30
  • 조회수 1,731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자기만족형 수집가는 철저히 자신만의 스타일로 고서를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어찌 보면 자신만의 철학과 주관을 갖고 수집을 하는 듯이 보이지만 이는 어느 정도 이상 고서를 보는 안목이 따라 줄 때 얘기지, 그렇지 않다면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계룡산 기슭에 한 도인이 있었는데, 바둑을 잘 두어 근처 백 리 안에서는 당해낼 자가 없었다. 도인이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바둑을 두고 있는 젊은이를 보고는 대국을 청했다. 내리 세 판을 진 도인은 도무지 그 결과가 믿기지 않아, 다음날 다시 그 젊은이를 찾아가 바둑을 두었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래 전 어디선가 들은 얘기다. 이 이야기 속의 도인은 자신의 바둑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모르고 있다. 자기보다 실력 있는 고수를 만나 본 적이 없으니 본인은 물론 그 주변 사람들도 그의 바둑 실력이 천하제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아직도 이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고서 수집가 중에도 이와 비슷한 사람이 많아, 그들의 모습에서 저 계룡산 도사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이 소장한 장서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자신의 방식대로 고서를 수집하고, 가치를 부여하며, 혼자 흥겨워하면 그만인 것이다. 여기에 고서를 전혀 모르는 주위 사람들이 끼어들어 자연스레 한몫 거든다. 바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수집가들이다.

 

이런 부류의 수집가들은 대개 다른 수집가들과 교류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설령 교류가 있다 하더라도 자신의 관심 분야 이외에는 애써 외면한다. 어찌 보면 고서를 보는 안목이 있고 주관이 뚜렷한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이런 유형의 수집가는 앞의 정보탐색형 수집가와는 달리 다른 수집가들과 정보교환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한편으로 고서 수집에 관한 자신의 실력이나 컬렉션의 수준이 알려지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소위 우물 안 개구리 격이라고 할까.

 

사진 32.JPG
[사진 32] 위작 「조선 의병가」. ㄱ씨 소장. ㄱ씨는 이 자료를 자신의 연구서에 인용하기에 앞서 내게 진위를 물어왔다. 지금도 이런 류의 가짜 글씨가 진품으로 연구서에 인용되기도 한다.

 장안평 호산방 시절, 하루는 젊은 여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집에 고서가 있으니 한번 방문해 달라는 내용이다. 찾아가 보니 작은 연립주택이었는데, 거실부터 집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했다. 안방과 작은방에도, 창문마저 가릴 정도로 온통 책이었다. 책꽂이에 꽂혀 있는 것보다 쌓여 있는 책이 더 많았다. 주로 양장본이었고 한적도 약간 있었다. 한적은 주로 칠서(七書) 낙질이었고, 양장본은 상당수가 일서(日書) 전집류 낙질들로, 상태는 모두 좋지 않았다.

한마디로, 그냥 가져가라 해도 마음이 내키지 않을 책들이었다. 불과 오 분도 지나지 않아 더 이상 책을 보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래도 금방 자리를 뜨기가 민망해 머뭇거리고 있으려니 주인이 말을 건넸다.

  

"선친께서 얼마 전에 돌아가셨는데, 이 책들은 선친이 수집한 거예요. 선친께서는 평생의 꿈이 도서관을 만드는 것이었어요. 자식 된 도리로 선친의 꿈을 이루어 드리고 싶지만,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이 책들을 처분해 아파트라도 하나 마련할까 해요.”

 

고인이 된 책 주인의 따님과 며느리로 보이는 젊은 여인의 말이다. 한마디로, 이 책들을 제대로 평가해 준다면 팔겠다는 얘기였다. 이런 경우 참으로 난감하다. 유족들은 선친이 남긴 고서를 천하의 보물처럼 생각하고 있는데, 그 가치가 별것 아니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낙담할 것인가. 아니, 그 이전에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고 그저 싸게 사려는 장사치의 수작이라 생각할 터였다.

 

어떻게 호산방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해 물으니, 고서를 정리하다 호산방도서목록이 눈에 띄어 전화를 했다고 한다. 혹시 고인이 내가 아는 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심스레 물으니, S씨다.

S씨라면, 호산방에는 두어 번 들렀지만 다른 모임에서 여러 차례 만난 적이 있는 분이었다. 자그마한 키에 쥐색 두루마기를 즐겨 입고 별로 말이 없는 차분하고 온화한 분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고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얘기만 들었지 그 양과 질에 대해서는 들은 바가 없어, 그렇잖아도 궁금해 하던 차였다.

 

그러나 장서들을 본 순간 나의 머리는 혼란에 빠졌다. 평생 고서를 수집한 분의 장서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장서 중 일부를 빼돌린 것 같지도 않았다. 다시 책들을 꼼꼼히 살펴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그때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언젠가 그와의 대화 중에 왕지(王旨)’를 소장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 그에게 몇 번이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교지(敎旨)’가 아니라 왕지(王旨)’라고 씌어 있습니까?”

 

교지는 국왕이 신하에게 관직·관작(官爵자격·시호(諡號토지·노비 등을 내려 주는 문서로, 조선 초기에는 왕지라고 했다. 조선 중기 이후의 교지는 그 수가 많이 남아 있어 고서점이나 골동품점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왕지는 매우 귀해, 그것을 내린 인물에 관계없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나는 유족에게 다시 물었다.

 

"혹시 왕지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그렇잖아도 얼마 전에 가족이 모두 모였을 때 아버님이 왕지에 대해 설명하시는 것을 비디오로 찍어 놨습니다.”

 

비디오 화면을 통해 본 왕지는 바로 구한말에 흔히 볼 수 있었던 교지였다. 화면 속에서 교지를 설명하는 S씨는 자못 진지했다. S씨의 설명만 들으면 교지의 가치는 천하의 보물이 되기에 충분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왕지를 한번 볼 수 있느냐고 청하니 잠시 망설이다가 커다란 스크랩북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방금 비디오 화면에서 본 바로 그 교지를 포함해 지금의 주민등록등본에 해당하는 호구단자(戶口單子)와 토지문서 몇 장 그리고 신문과 상표 등이 스크랩되어 있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자료는 하나도 없었다.

고인은 이 책들을 수십 년에 걸쳐, 주로 고물상과 동네 고서점에서 수집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렇지 어쩌면 이렇게 전혀 쓸모없는 고물만 수집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씁쓸한 마음으로 그 집을 나왔다. 그리고 두세 달 후에 이 책들을 청계천에서 다시 만났다. 결국은 고인이 생전에 이 책들을 수집했던 것처럼, 이것들은 다시 고물상을 통해 청계천으로 나온 것이다. 앞서 언급한 계룡산 도사 생각이 났다.

 

노련한 고서점 주인이라면 수집가의 말 몇 마디만 듣고도, 그 사람의 수집 경력을 꿰뚫어 볼 수 있다. 어느 분야의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몇 년 정도 수집을 했는지, 소장한 장서의 양과 질은 어느 정도인지 알아맞힐 수 있다. 이러다 보니 웬만한 수집가의 머릿속은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아주 드물게 속내를 알 수 없는 수집가가 있다. C회장이 바로 그 중 한 사람이다.

건설업에 종사했던 그는 고서계 일부에서 ‘C회장으로 통했다. 그가 오랫동안 관심을 갖고 수집한 분야는 천세력(千歲曆)이었다. 천세력은 백중력(百中曆)과 만세력(萬歲曆)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매년 매 음력월의 대소(大小), 이십사절후의 입기일시(入氣日時), 매월 초일일·십일일·이십일일의 간지(干支)가 실려 있는 책이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천세력 이야기로 화제를 끌고 갔다. 그러나 나는 그가 무슨 얘길 하는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서치고 귀하지 않은 책이 어디 있겠는가. 고서 수집은 수많은 종류의 책 가운데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릴 만한 분야를 정해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C회장은 그것을 천세력으로 정한 것 같았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천세력을 수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천세력에 쏟은 그 열정을 다른 분야의 고서에 쏟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혼자서 해 보곤 했다.

 

30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고서를 좋아하는 지인 몇 분과 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방마다 책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장서를 보고 많은 아쉬움을 느꼈다. 그것은 평생을 고서 수집에 열중한 사람의 장서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애서가의 서재에 지나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누구라도 그 오랜 세월 고서를 수집했다면 그 정도의 서재를 갖추는 것은 기본이다.

 

그의 장서에서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고민하고 애쓴 흔적이 별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장서를 폄하하려는 말이 아니다. 결코 적지 않은 시간과 열정으로 책을 수집하면서, 정작 중요한 사실을 놓치고 있었다. 수집에만 급급했지, 수집 목적과 이에 대한 활용 등이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장서에서 천하의 진본이라든가 고가의 귀중본을 기대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오랜 세월 고서를 수집했다면, 적어도 자기만의 색깔이 있어야 했다. 그리고 눈을 즐겁게 하는 귀중본 몇 권 정도는 눈에 띄었어야 했다. 그것을 천세력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고서보다는 주로 고서화나 골동 수집가 중에서 수집을 잘못해 패가망신하는 사람을 더러 보았다. 골동을 수집하는데 어떻게 패가망신하느냐고 하겠지만 그렇지가 않다.

30여 년 전쯤에 K씨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고서 수집가가 그렇듯이, 현관에 들어서자 벽에는 온통 고서화가 걸려 있고 집 안에는 고서와 골동이 즐비했다. 반닫이에서 서첩과 간찰첩 등을 꺼내 보여주는데, 퇴계·율곡·다산·추사 등 눈에 띄는 인물들의 작품이 한다발이었다. 그러나 이를 어쩌랴, 하나같이 모두가 가짜인 것을. 명인의 것은 가짜투성이고 누군지 알 수 없는 그저 그런 작품들은 진짜이니, 결국 모두가 가짜라는 말이 아닌가. 더 보여주겠다는 그의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그러고 몇 년 후, 그의 소장품 중 일부가 유명 기관에서 주최하는 전시회에 출품됐다. 물론 가짜 글씨도 여러 점 섞여 있었다. 그러다 얼마 전 가짜 그림 사건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평생 쌓아 온 명예가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수집품이 가짜라고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그가 정말 그 소장품들을 가짜인 줄 모르고 수집했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사진 32)

 

 

사진 33.JPG
[사진 33] 위작 「최익현 간찰」. 이 글씨는 내가 15년 전쯤에 구입한 가짜 글씨다. 물론 가짜인줄 알면서 구입한 자료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한다.

 특히 서화 골동 세계에서 가짜를 사고파는 행위는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몰라서 사고팔고, 알면서도 사고판다. 서로 가짜인 줄 알고 사고파는 것으로 그친다면 모르겠으나 이것들이 언젠가는 진짜로 둔갑해 세상에 돌아다니게 된다면 그것은 분명 심각한 문제다.(*사진 33)

 

 

가짜 고서화와 관련해서, 대부분의 고서화 수집가에게는 고약한 버릇이 하나 있다. 살 때는 가짜라도 좋다며 싼값에 산 물건이라도, 일단 자기 것이 되면 혹시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K씨가 바로 그런 경우였다.

 

40여 년 전 고서화 수집가로 꽤 알려진 궁정동 P사장이 있었다. 하루는 그의 집에 초대받아 갔더니 방마다 온통 고서화로 그득했다. 역대 유명 서화가의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값이 나갈 만한 것들은 첫눈에도 모두 가짜였다. 그러나 이런 수집가를 이미 여러 번 봤기 때문에 나에게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고서화를 수집하는 사람 중에는 거짓말처럼 가짜만 일관되게 수집해 놓은 수집가가 더러 있다. 나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서화를 수집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쩔 수 없이 가짜를 사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가짜보다는 진짜가 더 많아야 할 게 아닌가.

 

일부러 가짜만 수집하지는 않았겠지만 그 원인은 수집가 자신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대개 이런 수집가일수록 고서화에 대한 지식은 얕으면서 무조건 유명 서화가의 작품만 수집하려 한다. 일단 이런 수집가들은 남의 말을 곧이들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안목을 과신한다.

 

또한 이런 수집가 주위에는 불량한 거간꾼이 항상 끼어들게 마련인데, P사장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이런 거간꾼들은 수집가와 연결된 사업적 소통관계를 자신이 통제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놓는다. 그러니 철저하게 가짜만 수집할 수밖에 없다. 이런 수집가가 자신의 수집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소장품을 처분하려고 할 때이다. 그러나 그때는 중간에 끼어 있던 거간꾼은 이미 자취를 감추고 모든 상황은 끝난 후다. P사장도 그랬다. 그후 그는 몇 년 동안 이 물건들을 처분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런데 처음에는 분을 삭이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자신의 소장품들이 마치 진품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는 앞의 K씨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