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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다, 배 한 척이 격랑 속의 나뭇잎처럼 거칠게 흔들리며 파도와 파도를 간신히 타넘어 간다. 키 잡는 방이 배 위에 작은 집처럼 솟아오른 어선이다. 그 배의 밑바닥은 잡은 고기를 가두어놓는 곳이다. 사람이 허리를 펴고 앉아 있을 수조차 없는 낮은 천장 아래 바닥에는 물이 찰박거리며 차올랐다. 거기 꾸물꾸물 움직이는 사람들이 보인다. 열 스물 서른 남짓의 남녀와 아이들이 보인다. 뱃전을 울컥이며 넘어간 물결이 갑판을 휩쓸고 어물칸에 쏟아져 들어간다. 아이들과 여자가 허우적거리며 기어 나온다. "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2007)에서 탈북소녀 '바리'가 밀항하는 장면이다. 군더더기 미장센이 장치될 틈이 없다. 긴박하다. 하지만 망망대해에 놓인 개별 존재로서의 고독들이 마주하는 리얼리즘으로서의 씨줄은 꿈과 환상이 뒤섞인 날줄과 촘촘히 얽혀있다. 현실이 환상이 되고 환상이 현실이 되는 서사의 교직과 변주라고 할까. 그런데 왜 내게는 이 잔혹한 풍경들이 낯설지 않게 느껴졌던 것일까. 마치 요나의 물고기처럼 어디선가 보거나 들었던 풍경들, 아니면 당금애기의 여정이었을까. 이 소설에 대한 내 상상의 이미저리다. 바다에 던져지는 시신들, 강간당하는 처절한 장면들을 구원에 대비한 복선(伏線)들로 읽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나는 이를 그간의 <손님>(2001), <심청, 연꽃의 길>(2003) 등 우리 신화 풀어내기 방식들이 비로소 안착되는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소설의 제목이 표방하듯, 무조신화 <바리데기>의 서사에 <손님>에서의 남북과 종교적 갈등, <심청>에서의 여성을 탈북소녀를 통해 얹어낸 방식 말이다. 황석영은 이 소설에서 밀항선의 물고기 저장고를 통해 참혹하고도 긴박한 존재의 투쟁을 그려내고 재생의 복선들을 깔아두었지만, 정작 원전신화 <바리데기>는 수많은 은유와 상징들을 어쩌면 무덤덤하게 그려낼 뿐이다. 하지만 배후의 아우라는 깊고 넓다. 문자 그대로 정중동이랄까.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와 무조신화 '바리데기' 홍태한이 주도하고 이경엽 등이 부가한 '서사무가 바리공주전집'(민속원, 1997~2001)에는 무려 90여 편에 가까운 바리데기 무가가 정리되어 있다. 지금도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므로 언젠가는 100여 편이 넘는 무가가 정리되어 나올 것이다. 홍태한은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바리데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의 망자천도굿인 서울지역 진오기굿의 말미거리, 호남지역 씻김굿의 오구풀이거리, 동해안지역 오구굿 발원에서 구연되는 장편서사무가다." 바리공주는 서울지역에서 부르는 말이고 호남이나 동해안지역에서는 바리데기라 부르기 때문에 황석영의 소설 <바리데기>는 은연중 호남이나 동해안의 무속서사를 차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무속서사 <바리데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다. 하지만 공통적인 줄거리는 같다. 이를 중핵 혹은 핵심줄거리라 한다. 대강은 이러하다. 바리데기 부모가 혼인을 한다. 바리데기 부모가 연이어 딸을 낳는다. 딸 여섯을 낳고 여러 가지 공을 드렸는데도 일곱 번째 또 딸을 낳는다. 바리데기를 버린다. 이후 세월이 흘러 바리데기 부모가 병에 걸린다. 목숨을 구할 약이 서천서역국의 환생초 약수임을 알게 된다. 바리데기가 부모를 만난다. 여섯 딸들에게 약을 구해올 것을 요청하지만 딸들은 모두 핑계를 대고 거절한다. 버림받았지만 효성이 지극한 막내딸이 약수를 구하러 길을 떠난다. 바리데기가 약수를 지키는 이를 만난다. 약수를 얻기 위해서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산값, 길값, 물값 삼년씩을 살아주고 혼인하여 아들을 낳고 약물을 구해 와서 부모를 살려낸다. 아버지가 죽어서 상여 나가는데 약물을 마시고 살아나는 등 갖가지 버전이 있다. 이윽고 바리데기는 부모를 살린 공을 인정받아 오구신으로 좌정하거나 아들들과 함께 시왕으로 봉해진다. 바리데기 이름은 바리덕이, 바리공주, 벼리데기, 비리데기, 버르댁이, 보르데기 등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이름이나 신분은 덕주아와 수차량, 업비대왕마마, 오귀대왕과 길대부인, 천별산 대장군과 검탈에 병오 등으로 나타난다. 바리데기는 연구자들에 따라 남성중심주의의 극복, 죽음의 극복 등을 주도하는 캐릭터로 분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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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서종원은 그의 글 "위도 띠뱃놀이에 등장하는 띠배의 역사성과 본연의 기능에 관한 고찰"(무형유산 제8호, 2020)에서 괄목할 만한 정보를 추적한 바 있다. 띠배를 띄워 보내는 것과 인당수의 인신공희를 역사적 자료를 통해 분석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항해자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적지 않다. 항해 도중에 특정 해역에 도착하면 신앙물(의례 도구)을 바다에 빠뜨리거나, 무사 항해를 위해 암초 등에 불상을 올려놓고 간략하게 경을 읽었다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유독 물살이 센 곳이나 해상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 지점에 도착하면 항해자들은 특별한 의례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화랑세기(花郞世記)』와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때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인명은 지극히 중한 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하였다. 그때 양도 또한 선화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안전하면 함께 안전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신시 후에 합굴에 당도하여 정박하였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고 주민도 역시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사(龍祠)가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고 가고 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데 바닷물이 이곳에 이른다> 순조로운 항해를 희구하는 뜻으로 어전(御前)에서 내린 풍사용왕첩(風師龍王捷)과 지풍위(止風位) 등이 적힌 부적 13부(符)를 바다에 던졌다는 내용도 곁들여진다. 여기서의 위(位)를 위패나 나무 조각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기록과 설화들을 견주어 살펴보면 인당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거타지와 작제건 설화를 비롯한 심청전의 인당수 이야기가 포획하고 있는 동아지중해로서의 물길과 거센 파도, 그 안에 담은 희망과 소망의 투사다. 고대로부터의 연안항로와 사단항로 중 유독 물길이 험한 곳들이 있었고 이 장소를 매개 삼은 사고체계나 대응방안들이 실제 의례는 물론 문화적으로 재해석되어 각종 모티프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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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심청이 빠져 죽은 인당수 "한 곳을 당도하니 이는 곧 인당수라. 대천바다 한 가운데 바람 불어 물결 쳐, 안개 뒤섞여 젖어진 날, 갈 길은 천리만리나 남고, 사면이 검어 어둑 정그러져 천지적막한데, 까치뉘 떠들어와 뱃전머리 탕탕, 물결은 와그르르 출렁 출렁 도사공 영좌(領坐)이하 황황급급(遑遑急急)하여 고사지제를 차릴제, 섬 쌀로 밥 짓고 온 소 잡고 동우술 오색탕수 삼색실과를 방위차려 갈라 궤고 산돗 잡아 큰칼 꽂아 기는 듯이 바쳐놓고 도사공 거동 봐라 의관을 정제하고 북채를 양손에 쥐고 북을 두리둥 두리둥 둥 둥~(하략)" 판소리 심청가 중, 심청이 인당수에 빠지는 대목이다. 엇모리장단으로 긴박하게 노래하다가 느린 자진모리로 한자성어 투의 긴 사설을 읊어낸다. 급기야 휘모리장단으로 물에 빠지는데, 북소리를 뒤로 하며 마지막 사설이 이어진다. "심청이 거동 봐라 샛별 같은 눈을 감고 치맛자락 무릅쓰고 이리 비틀 저리 비틀 뱃전으로 우루루루 만경창파 갈매기 격으로 떴다 물에가 풍~" 심봉사가 눈을 뜨는 장면을 포함하여 인당수 빠지는 대목이 심청가 중 가장 극적인 장면이랄 수 있다. 큰 소 잡고 술항아리 가득 맑은 술 담그고 오방색으로 구비된 탕을 끓여내며 삼색의 과일들을 차려놓은 풍경을 자세하게 그려낸다. 산 돼지를 잡아 큰 칼을 꼽아놓으니 돼지가 기어가는 듯하다. 무속의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도사공(都沙工)은 우두머리 선장이다. 제사 복식을 갖추고 북채를 들었다. 큰 북을 울리며 지내는 제사였던 모양이다. 제사 풍경도 그러하려니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도대체 인당수가 어딜까 하는 것이다. 전제가 되는 것은 심청전이라는 고소설, 심청가라는 판소리다. 백령도를 비롯하여 전남 곡성, 충남 예산, 전북 부안 등 심청의 고장이라고 주장하는 곳들이 많다. 단적으로 말하면 설화를 이야기나 소설로 보지 않고 역사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들이다. 이야기의 지극한 은유를 애써 외면하는 발상이라고나 할까. 소설 심청전은 연대나 작가 미상일뿐더러 주요 줄거리는 거타지 설화와 작제건 설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관련하여 장성의 홍길동과 곡성의 심청을 주제로 한 졸고 '설화기반 축제 캐릭터의 스토리텔링과 노스탤지어 담론(남도민속연구, 2007)'이 있으니 참고 가능하다. 소설이나 판소리에서 묘사하는 인당수(印塘水)의 본래적 의미는 깊은 물이다. 사람을 제물로 바쳐야 배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다고 알려진 장소다. 전국 여러 지역의 제방 축조 설화에서도 유사한 구성들을 볼 수 있다. 인신공희(人身供犧)로 주로 처녀가 언급되는 것은 생식(生殖)과 관련된 고대로부터의 관념에서 비롯된다. 거타지(居陀知)와 작제건(作帝建)의 항해 삼국유사 권2 기이편의 내용이다. 진성여왕 막내아들 아찬 양패(良貝)가 당나라 사신으로 가게 되었던 모양이다. 함께 가는 무리 중 거타지라는 인물이 궁사로 뽑혀 따라가게 되었다. 도중에 곡도(鵠島)라는 섬 인근에서 풍랑을 만난다. 양패가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다. "섬 안에 신령한 연못이 있다. 여기에 제사를 지내야 풍랑이 멎는다"는 점괘가 나왔다. 그 못에 제물을 차리고 제사를 지냈더니 못물이 높이 치솟는 게 아닌가. 그날 밤 양패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났다. "활을 잘 쏘는 사람 하나만 이 섬에 놔두고 가면 순풍을 얻을 것이다"고 했다. 섬에 남겨둘 자를 고르기 위해 제비를 뽑기로 했다. 각자의 이름을 적은 50쪽의 목간(木簡, 종이가 나오기 전 글을 쓰던 나무막대기)을 물에 넣었더니 거타지라고 쓴 목간만 물에 잠겼다. 모두 당나라로 떠나고 거타지만 섬에 홀로 남았다. 못 가운데서 한 노인이 홀연히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西海若)이다. 매일 해 뜰 때마다 하늘에서 한 중이 내려와 진언(眞言)을 외며 못을 세 바퀴 돌기만 하면 가족들이 모두 물 위에 뜨게 되고 그 때마다 그 중이 자손들의 간을 하나씩 빼어먹었다. 지금은 아내와 딸만 남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 그 중이 나타나면 활로 쏴 달라." 이튿날 아침 중이 간을 빼먹으려고 내려왔다. 거타지가 활을 쏘았더니 여우가 떨어져 죽었다. 노인이 보답으로 자기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 했다. 딸을 꽃으로 변하게 하여 거타지 품속에 넣어주었다. 또한 두 마리 용에게 명하여 앞서간 사신 일행들에게 데려다주었다. 신라의 배를 두 마리 용이 받들고 있는 것을 보고 당나라에서 성대히 대접을 하였다. 고국 신라에 돌아와 행복하게 잘 살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라는 작제건 설화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항해 도중 풍랑이 사나워져 점을 쳤다. 고려 사람이 배에서 내려야 한다는 점괘가 나온다. 작제건이 섬에 내렸다. 홀연히 서해용왕이 나타나 부처의 모습을 한 자를 퇴치해달라고 요청한다. 작제건이 활로 쏘았는데 부처는 늙은 여우였다. 이후 용왕의 딸과 결혼하여 잘 살았다. 꽃으로 변하여 거타지 가슴 속에 들어가는 처녀나 작제건의 아내가 되는 용녀 모두 심청이 인신공희물이 되었다가 연꽃 속에서 환생하여 황후가 되는 스토리와 닮아있다. 괴물 퇴치의 맥락도 있지만 여기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서해의 물길이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과 오고갔을 물길 중 가장 파도가 험한 장소 혹은 풍랑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심청전으로 확대된 이 이야기의 모티프를 어느 한 곳을 특정하여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장강(양쯔강) 이북 서해(황해)의 어딘가 물길을 사례 삼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유사한 이야기들이 설화로만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니다. 화랑세기나 고려도경을 통해서도 맥락을 추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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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기행(83)"동냥왔네 동냥왔네 산골의 중놈이 동냥왔네/ 동냥이사 안 내리마는 줄 이가 없어서 몬 주겄네/(중략) 왜 우리가 이러다가 애기를 배며는 어쩔것네/ 애기배면 여려운가 뒷동산천 올라가서/ 벅누눈을 긁어다가 정술에다가 타묵으며는/ 속절없이도 떨어지네." 임동권이 수집했던 남해지방 중타령의 한 대목이다. 비슷한 버전들이 또 있다. "동냥왔네 동냥왔네 산골 중이 동냥왔네/ 동냥은 있네만은 줄 이 없어 몬주겄네/ 울어매는 장에 가고 울아부지 들에 가고/ 우리올캐 친정 가고 우리오빠 처가가고(중략) 청우에라 섰던 중이 달라든다 달라든다/ 못방으로 달라듬서/ 우리 둘이 이러다가 아가 배면 우쩌겄네/ 딸이라도 놓거덜랑 물이라꼬 이름짓고/ 아들이라 놓거덜랑 산이라꼬 이름짓게/ 산에 가서저 부르니 물이 와서 대답하고/ 물이라꼬 저 부르니 산이 와서 대답하네." 이 무슨 상황인가? 스님이나 중이란 호명은 어디로 날아가고 중놈이라는 상스런 호칭이 난무한다. 시주를 나온 땡중이 혼자 집을 지키는 소녀를 농락하는 장면을 그리기 때문이다. 민요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있는 맏딸애기(당금애기를 부르는 호칭 중 하나) 노래 중 일부다. 류경자는 그의 글 "무가 <당금애기>와 민요 '중노래, 맏딸애기류'의 교섭양상과 변이"(한국민요학 제23집)에서 민요 중타령을 인용하며 이렇게 분석한다. "현실에 기반을 둔 민요는 신화와는 다른 세계이다. 신화적 기반이 없거나 약화된 상황과 마주쳤을 때, 민요는 신화의 서사구조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게 되며, 자신들이 당면한 현실에 이끌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외양상 신화와는 서사구조가 전혀 다른 파격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파격 치고는 상당히 난해하다. 중의 농락 혹은 소녀와의 음탕한 정사를 노래한 것일까? 하지만 중타령이 제석의 계보를 잇는 신화에서 파생되었음을 주목하면 현상적인 노랫말만으로 이면을 톺아보기 어렵다. 불교의 쇠락과 중에 대한 비하가 기표라면 그 안에 숨은 보다 근원적인 기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금애기 설화의 이미저리 당금애기 이야기는 60여 편의 각편이 있다. 그만큼 다양하다. 지역에 따라 시주 스님이 하룻밤 자고가면서 딸아기가 구슬 세 개를 품에 받는 꿈을 꾸고 잉태하는 버전, 시주를 받아가지고 나가면서 딸아이에게 쌀 세 톨을 먹게 하거나 손목을 잡고 혹은 머리를 만져 잉태하는 버전 등으로 각양각색이다. 맏딸아기가 토굴에 감금되어 그 안에서 잉태하는 사례도 있다. 제주도의 경우는 삼형제가 과거를 봤다가 중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낙방하고 여차여차하여 무제(巫祭)를 받는 신이 되기도 한다. 처한 환경에 따라 종속된 신앙체계나 종교에 따라 스토리를 취사한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단군신화나 주몽신화와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눈치 챌 수 있다. 천상의 양(陽)과 지상 음(陰)의 교합, 지함 혹은 토굴 등 동굴이나 알을 통한 출산과 성장 스토리가 키워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지극한 비유와 상징을 통한 잉태와 출산 혹은 탄생에 이르는 구도여행이다. 우리나라 무속의 양대 신화인 오구굿의 바리데기, 나아가 세경본풀이의 자청비까지 유사한 이야기 구성이다. 심청가에서 물에 빠진 심봉사를 구출하는 장면, 흥보가에서 명당터를 잡아주는 도승, 심지어 저자거리에서 맏딸애기를 유혹하여 잉태시키므로 민중들의 비난 대상이 되는 땡중의 이미지까지 그 안의 알고리즘은 사실 다르지 않다. 이 이야기는 초상 마당에서 벌어지는 다시래기굿과 판소리, 무속의례의 제석굿, 각종 문학과 예술행위들을 횡단하며 다시 태어남과 거듭남이라는 거대 이미지를 재구성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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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2)이윤선/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문화 자치시대의 한국 지역학 "지역이라는 개념은 서울과 진도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따라서 지역학이라 함은 중앙에 예속된 특정 지역을 연구하거나혹은 순수하게 어떤 지역을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선다. " "한국에서는 근래에 와서야 국가와 중앙에 종속된 지방사 연구에 대한 비판이 본격화되었다. 지리지와 읍지, 지방지 편찬의 오랜 역사가 강고한 지방사의 전통을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권위주의 체제 아래서는 중앙집권적 질서에 대해 의문을 가질 여지가 별로 없었고, 민족과 국가를 중심으로 결집하되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무시하도록 강요했던 시대적 분위기의 영향도 컸다.” 허영란의 「지방사를 넘어, 지역사로의 전환-한국 근대 지역사 연구의 현황과 새로운 모색」(지방사와 지방문화, 2017)이란 글의 시작 대목이다. 국어사전에는 지방(地方)을 서울 이외의 지역 혹은 중앙의 지도를 받는 아래 단위의 기구나 조직을 중앙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고장이나 시골이라고도 한다. 이에 반해 지역(地域)은 일정하게 구획된 어느 범위의 토지 혹은 전체 사회를 어떤 특징으로 나눈 일정한 공간 영역을 말한다. 서울도 하나의 지역이요 내 고향 진도도 하나의 지역이다. 지방이라는 개념이 서울을 상위 영역으로, 진도를 하위 영역으로 설정한 것이라면, 지역이라는 개념은 서울과 진도가 동등한 권위를 갖는다. 따라서 지역학이라 함은 중앙에 예속된 특정 지역을 연구하거나 혹은 순수하게 어떤 지역을 연구하는 차원을 넘어선다.지방학을 넘어 지역학으로, 문화 자치시대의 한국지역학지역학은 세계지역학 한국지역학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동아시아학, 유럽학, 중국학, 일본학 등 각 나라와 세계 지역을 망라하는 연구를 말한다. 후자의 지역학은 현재 우후죽순 범람하고 있는 각 시도, 군, 면 단위의 연구 움직임까지 포괄하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초에 지역학과 정맥(靜脈)도시라는 개념을 본 지면에 소개했다(2023. 1. 6). 좌계 김영래 선생의 제안을 담론화하기 위한 전략이라고 할까. 아직은 반향이 없는 듯한데, 대도시 중심으로 재편되는 동맥 사회의 폐단을 극복하고 광범위하게 연결된 네트워크 중심의 사회를 재구성하는 데 매우 긴요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관련 논의들을 모아 펴낸 책이 「문화자치시대의 한국지역학」(다할미디어)이다. 전국 석학 13분이 참여하였다. 2021년과 2022년 무안문화원에서 주최한 학술회의 발표자료와 관련 논고들을 모은 것이다. 나를 포함해 이해준(공주대 명예교수), 윤명철(동국대 명예교수), 나승만(전 목포대 교수), 이창식(세명대 교수), 강진갑(전 경기대 교수), 송화섭(전 중앙대 교수), 허남춘(제주대 교수), 천득염(한국학호남진흥원장), 강신겸(전남대 문화전문대학원 교수), 박상일(지방분권전남연대 이사장), 김희태(전 전남도문화재위원), 윤여정(나주문화원장)이 참여하였다. 집필진의 구성이 흥미롭다. 연구자, 현장운동가, 전문가 등이 고루 협업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탁상공론을 앞세우는 학자들만의 주장이 아니요, 이론 없는 현장운동가들의 메아리만도 아니다. 장차 지역학이 이끌고 가야 할 한 모델일 수 있을 것이다. 무안문화원장은 발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출간을 주도한 이윤선은 『무안만에서 처음 시작된 것들』(다할미디어)에서, 지도를 거꾸로 놓고 보면 한해륙의 첫 관문이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며 남도지역이고 무안이라고 정리했다. 반도를 해만(海灣)으로 바꾸어 읽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물골을 따라 시선을 바꾸어 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다. 그런 점에서 작은 고을 무안에서 전국으로 발신하는 이 책의 의미가 크다.” ‘물 아래 무안에서 발신하는’이라고 부제를 걸어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디 무안뿐이겠는가. 각 지역을 무안에 대입해보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지역학 한국의 지역학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공동저자 김희태의 원고 「전남의 지역학 연구, 성과와 전망」편을 인용하고 내가 좀 더 추가하여 아래에 정리해뒀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지역학회들이 우후죽순 만들어졌고, 현재도 만들어지고 있다. 1963. 전남대 호남학연구원-호남학/ 1978. 제주도연구회-제주학/ 1983. 전라문화연구소-전북학/ 1986. 전라남도-남도학/ 1993.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서울학/ 1994. 강원발전연구원-강원학/ 1994. 장흥학당-장흥학/ 1997, 경주학(개별 논의로 시작)/ 1998. 연세대 원주갬퍼스 메지연구소-원주학/ 1998, 1999. (재)충북개발연구원-충북학/ 1999, 2002. 인천학연구소, 인천대 인천학연구원-인천학/ 2000. 진도학회-진도학/ 2000. 성결대 안양학연구소-안양학/ 2000. 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영남학/ 2001. 한남대 대덕학연구소-대덕학/ 2001. 관동대 인문과학연구소-강릉학/ 2001, 2002. 신라대 부산학연구센터-부산학/ 2003 한국국학진흥원-안동학/ 2004. 대전학연구회-대전학/ 2004. 순천시-순천학/ 2004. 수원문화원 수원학연구소-수원학/ 2004. 강남대 용인발전연구센터-용인학/ 2005. 대구경북연구원-경북학/ 2005. 전주역사박물관-전주학/ 2006. 울산학연구센터-울산학/ 2006. 경남학연구센터-경남학/ 2007. (재)충남역사문화연구원-충청학/ 2008. 천안발전연구원-천안학/ 2011. 여수시-여수학/ 2012. 군산시, 군산대학교-군산학/ 2012. 정읍학연구회-정읍학/ 2012. 부여군-부여학/ 2013. 수원시정연구원, 경기대학교-수원학/ 2014. 충남평생교육진흥원-충남학/ 2014. 곡성문화원-곡성학/ 2015. 연세대 국학연구원 부설 강진다산실학연구원-강진학/ 2015. 공주대 공주학연구원-공주학/ 2016. (사)보성학연구소-보성학/ 2016. 상주학(개별 논의로 시작)/ 2016. 충주중원문화재단-충주학/ 2016. 광양문화원 과양학연구소-광양학/ 2017. 청주학(개별 논의로 시작)/ 2017. 원광대 익산학연구소-익산학/ 2018. 광주시문화재단-광주학/ 2018. 목포시-목포학/ 2018. 화순향교-화순학/ 2019. 해남군-해남학/ 2000. 나주학회(나주문화원)-나주학......2021. 무안문화원-무안학 등이다. 여기에 정리한 것보다 훨씬 많은 지역학이 속속 생성되는 중이므로, 이 데이터는 계속 업데이트 되어야 한다. 제3의 장소, 관계로서의 지역, 고향사랑기부제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역은 굳이 행정구역이나 고향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제3의 장소’, 관계로서의 지역을 포괄한다. 이시야마 노부타카 편저, 『로컬의 발견-제3의 장소와 관계인구』(더가능연구소, 2021)에서 인용하여 설명했다. 이시야마는 지역을 이렇게 정의한다. "참여하고 싶은 애착을 느끼고, 역사와 문화 등에서 통일성 있는 일정한 구역” 즉 첫째는 거주지이고 둘째는 고향이며 셋째는 거주지나 고향은 아니어도 무언가 관계있거나 응원하는 곳을 ‘지역’이라 말한다. 느슨하게 관계하는 지역인 셈인데 이 중에서 더 강조하는 것은 ‘자신이 응원하는 지역’이다. 옛날에 비해 대도시 출생자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시대이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올해부터 시행하고 있는 <고향사랑기부제>도 유사한 개념이다. 개인의 자발적 기부를 통해 지방재정을 확충하거나 지역간 재정 격차를 완화하고, 지역특산품 등을 답례품으로 제공하여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 제도다. 물론 지역의 정체성은 중요하지만,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도 죽을 때는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머리는 둔다는 뜻으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말함)의 애착이 관계로서의 고향으로 바뀌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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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중의 뒤를 따라 간다. 이 모롱 지내고 저 고개를 넘어서서 고봉정상 두루봉에 저 중이 가다가 접붓 서며 이 명당을 알으시오. 천하지제일강산 악양루 같은 명당이니 이 명당에다 님좌병향오문으로 대강 성주를 하였으면 명년 팔월 십오일에는 억십만금 장자가 되고 삼대 진사 오대 급제 병감사가 날 명당이니 그리 알고 명심하오." 박봉술 바디 흥보가 중 집터잡이 대목이다. 신재효가 정리한 사설로 재구성된 예들은 더 풍부하다. "감계룡 간좌곤향 탐낭득 거문파 반월형 일자안에 문필봉 창고산이 좌우에 높았으니~" 풍수적으로 재물과 벼슬을 잉태하는 명당터를 한자어 투성이로 장황하게 읊어나간다. 심청가의 화주승이 심봉사를 물에서 살려내고 종국에는 눈을 뜨는 대목의 복선으로 기능하는 캐릭터임에 반해 흥보가의 중은 도승으로 출현하여 명당을 점지해주는 캐릭터로 기능한다. 훨씬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할까. 하지만 무속의례에 나타나는 중은 명당터를 비롯하여 대궐 같은 집을 지어주고 벼슬도 하게 해주며 온갖 이승의 복락을 만들어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중이 제석천(帝釋天)이고 이 신격이 등장하는 거리가 제석굿이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제석신앙이 불교적인 신으로 출발하여 민속신앙으로 수용되고 가신신앙과 접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보가의 도승이나 심청가의 화주승을 제석에 비유하는 이유는 이런 확장된 제석의 서사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석이 도도하고 고고한 위치에 좌정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거리에 나오게 되면 구겨지고 비틀어져 희화화된다. 불교가 배척되었던 시대 탓도 있겠지만 판소리와 무속의례, 가신신앙까지 두루 포획하고 있는 불교적 제석이 내동댕이쳐진다. 당금애기를 매개 삼는 민요 중타령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금애기가 동쪽으로 오신 까닭 아들 아홉에 딸이 없던 한 가정에서 딸 낳기를 기도하던 중 얻은 딸 이름을 '당금애기'라 짓는다. 당금애기가 자라 소녀가 되었을 때 마침 부모와 오라비 등이 출타하게 되어 집에 혼자 남게 된다. 그때 서역에서 불도를 닦은 스님이 당금애기를 찾아와 시주를 청하였는데, 이러저러한 에피소드를 거쳐 소녀가 잉태를 하게 된다. 서역에서 오신 스님이라니. 혹시 달마가 동쪽으로 오신 까닭과 관계된 것일까?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해진 조주스님의 문답 중 하나가 연상된다. '달마조사가 서쪽에서 동쪽 당나라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묻자,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한다. 선문선답이니 이해하기 힘들다. 어쨌든 집에 돌아온 가족들은 당금애기가 스님의 씨를 잉태한 사실을 알고 지함(地陷, 큰 구덩이) 속에 가두거나 쫓아낸다. 열달 후 당금애기는 세 쌍둥이를 출산하게 된다. 이후 아비 없는 자식으로 놀림 받던 삼형제는 일곱 살이 되자 당금애기와 함께 서천국으로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서천국은 표면상으로는 인도라는 나라를 말하지만 서쪽하늘이라는 불교적 혹은 토착신앙적 세계관으로 풀이해야 한다. 어떤 절에 다다르니 한 스님이 친자 확인 시험을 한다. 종이옷 입고 청수에서 헤엄치기, 모래성 쌓고 넘나들기, 짚북과 짚닭 울리기 등이 그것이다. 최종적으로는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 스님과 세 아들의 피가 합쳐지는 것을 통해 친자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후 아들들에게 신(神)의 직분을 부여하여 제석신이 되었고 스님과 당금애기는 승천하였다. 오늘날 전국에 분포하는 무속의례 제석굿의 전거가 여기에 있다. 다시 주목할 것은 당금애기의 서사를 신화코드로 읽어내야 한다는 점이다. 맏딸애기가 중의 씨를 받아 잉태했다는 가십(gossip)거리가 아니라, 당금애기가 낳은 삼중제석이 성주오가리, 성주단지 등 조상신의 자격으로 좌정하게 된 행간까지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환인(桓因)으로 인식하기도 했던 제석천보다 그 컨텍스트를 장식하는 당금애기 서사에 귀를 기울일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 욕망의 배후에는 드라마로 영화로 그리고 각종 SNS에 범람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당금애기 이야기 또한 수많은 의례와 문학과 예술을 통해 끊임없이 재구성되고 있다. 이야기는 늘 당대의 욕망 혹은 소망을 숨겨둔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은밀한 스토리텔링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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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심청가의 올라가는 중 흥보가의 내려가는 중 "중 올라간다. 중 하나 올라간다. 다른 중은 내려오는디 이 중은 올라간다. 저 중이 어디 중인고, 몽은사 화주승이라. 절의 중창 하랴하고, 시주집 내려왔다. (중략) 죽장을 들어 메고 이리끼웃 저리끼웃 끼웃거리고 올라갈제 한 곳을 살펴보니 어떤 사람이 개천 물에 풍덩 빠져 거의 죽게 되었구나." 익히 알려진 판소리 심청가의 '중 올라가는 대목'이다. 판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강의 서사는 비슷하다. 가사 중의 개천물에 빠져 죽게 된 어떤 사람은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다. 심청을 기다리던 중 더듬더듬 문밖으로 나갔다가 개천물에 빠져버린 상황이다. 심청전이라는 거대 서사는 곽씨부인의 죽음과 심청의 출생으로부터 시작하지만 봉사가 물에 빠지는 장면, 중이 올라와 구하는 장면 등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수상한 복선(伏線)은 반복된다. 판소리라는 노래로 변환된 이후에도 리듬이나 선율의 변별을 통해 암시는 확장된다. 신격이나 기이한 캐릭터의 등장에 사용한다는 엇모리장단이 그 중 하나다. 흥보가에도 중이 나와 집터를 잡아주는 광경이 묘사되는데 엇모리장단을 사용한다. 다른 점은 흥보가의 중은 내려오고 심청가의 중은 올라간다는 점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흥보가의 흥보는 지상의 어떤 존재로, 심청가의 심청은 천상의 어떤 존재를 암시한다고나 할까. 판소리의 중요한 패트런(후원자)이었던 조선후기 양반들의 기호 때문이기도 하지만 난해한 한문 투의 사설, 중국 고사의 원용 등 우리 같은 서민들은 이해하기 힘든 용어들이 즐비하다. 그나마 장단과 선율에 얹어 이면을 그려주니 다행이랄까. 심청가 중타령에 나타난 암시와 복선(伏線) 몇 가지만 짚어본다. 몽은사(夢恩寺)라는 사찰 이름부터 심상찮다. 문자 그대로라면 꿈속의 은혜, 꿈속의 사찰이다. 통상 은혜를 입은 절이라고 풀이한다. 화주승(化主僧)이야 걸식을 토대 삼은 비구(比丘, 남자승려) 탁발승의 일원이니 특별한 해석이 필요치 않겠지만 사찰의 중창(重創)이라는 코드도 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암시다. 어떤 사건이나 건물을 헐기도 하고 고쳐서 새롭게 짓는 일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외역(馬嵬驛)은 중국 섬서성의 지명이다. 당나라 현종이 안녹산의 난을 맞아 피난을 가면서 어쩔 수 없이 양귀비 곧 양태진(楊太眞)을 죽인 곳이다. 고사를 인용한 심학규의 상황 설정, 이 또한 암시로 읽어야 한다. 주목할 것은 화주승의 행색이다. 벼슬한 중이 쓰는 굴갓을 썼다거나 도가 높은 스님이 짚고 다니는 육환장(六環杖)을 들었기 때문이다. 비범한 도사 혹은 천계의 인물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실제로 심청의 인당수 희생과 연꽃 환생에 이르기까지 암시와 복선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심청가에서 화주승으로 묘사된 이 캐릭터는 어디에서 비롯된 인물일까? 흥보가의 도승(道僧)에서 무속의례 제석(帝釋)까지 "중의 뒤를 따라 간다. 이 모롱 지내고 저 고개를 넘어서서 고봉정상 두루봉에 저 중이 가다가 접붓 서며 이 명당을 알으시오. 천하지제일강산 악양루 같은 명당이니 이 명당에다 님좌병향오문으로 대강 성주를 하였으면 명년 팔월 십오일에는 억십만금 장자가 되고 삼대 진사 오대 급제 병감사가 날 명당이니 그리 알고 명심하오." 박봉술 바디 흥보가 중 집터잡이 대목이다. 신재효가 정리한 사설로 재구성된 예들은 더 풍부하다. "감계룡 간좌곤향 탐낭득 거문파 반월형 일자안에 문필봉 창고산이 좌우에 높았으니~" 풍수적으로 재물과 벼슬을 잉태하는 명당터를 한자어 투성이로 장황하게 읊어나간다. 심청가의 화주승이 심봉사를 물에서 살려내고 종국에는 눈을 뜨는 대목의 복선으로 기능하는 캐릭터임에 반해 흥보가의 중은 도승으로 출현하여 명당을 점지해주는 캐릭터로 기능한다. 훨씬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식이라고 할까. 하지만 무속의례에 나타나는 중은 명당터를 비롯하여 대궐 같은 집을 지어주고 벼슬도 하게 해주며 온갖 이승의 복락을 만들어주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중이 제석천(帝釋天)이고 이 신격이 등장하는 거리가 제석굿이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제석신앙이 불교적인 신으로 출발하여 민속신앙으로 수용되고 가신신앙과 접맥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흥보가의 도승이나 심청가의 화주승을 제석에 비유하는 이유는 이런 확장된 제석의 서사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석이 도도하고 고고한 위치에 좌정한 것만은 아니다. 저자거리에 나오게 되면 구겨지고 비틀어져 희화화된다. 불교가 배척되었던 시대 탓도 있겠지만 판소리와 무속의례, 가신신앙까지 두루 포획하고 있는 불교적 제석이 내동댕이쳐진다. 당금애기를 매개 삼는 민요 중타령을 통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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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이들이 상징으로 내세운 '치우천왕기'는 2002년 월드컵을 정점으로 전국화 되기에 이른다. 국가에서 채택하지 않았을 뿐, 일반인들에게는 한국을 나타내는 엠블렘(emblem, 전형적인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뉴밀레니엄을 기점으로 급변한 관광문화 측면의 국가적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붉은악마 치우천왕의 이미지가 얼마나 현격하게 부상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1970에서 1980년대 산업부흥기에는 아리랑, 고궁, 전통춤 등의 이미지들이 한국을 상징했다. 199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밀레니엄 말기에는 레져, 스포츠, 쇼핑 등 체험과 관광형태의 이미지로 변화된다. 이것이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악마, 축구, 정보기술, 태극기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등으로 재구성되기에 이른다. 때마침 한 천년이 가고 새 천년이 오는 기점이었다니 이 얼마나 오묘한 조화란 말인가. 국가 이미지로 등극한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매우 현저하게 밀레니엄을 가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명징한 장면 전환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손꼽아보면 '다시 천년'을 충족할 그 무엇이 부상할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한 편의 드라마 서사라도 어떤 분기점을 지날 때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구성하지 않는가 말이다. 일 년의 한 기점 설날을 보내기 위해서는 설빔을 입고 조상에게 제례하며 묵은 한 해를 씻어 보낸다. 하물며 일백년도 아니고 천년이 가고 다시 천년이 오는 기점이지 않은가. 자연발생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알지 못할 기운들의 추동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이때 '치우천왕기'가 나타나고 '붉은악마'를 외쳤던 것이다. '도깨비'들을 능가하는 명실상부한 도깨비 같은 획기적인 장면전환, 이보다 더한 장면이 있을까 싶을 만큼 스펙터클한 장면들이었다. 이전의 레드콤플렉스를 순식간에 벗어 제치며 새로운 시대 패러다임으로 부상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현상은 분명히 '다시천년'을 가르는 장면 전환이었다. 헌 천년을 보내고 새 천을 맞이하는 통과의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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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뉴밀레니엄의 변화들이야 각계각층 각 장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나현신,김현주의 "뉴밀레니엄시대 패션에 나타난 '페이크 펀(fake fun)' 디자인"을 참고한다. 2000년 이후 기성복 컬렉션을 보면 오브제의 쓰임새를 엉뚱한 위치로 이동시키거나 착용 위치를 뒤바꾼 스타일 등의 위치 왜곡, 의복의 일반적 형태를 왜곡하고 정상적인 착장 형식을 파괴하는 형태 왜곡, 눈속임 기법 등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조합과 부조화를 통한 일탈 등이 일상화된다. 보는 이에게 유쾌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페이크 펀'이 뉴밀레니엄 시대의 주요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했을까? 기왕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거나 희화화 시키는, 그래서 새 시대를 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맞이하는 태도들이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마치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들의 심성이라고나 할까. 이제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권세에 주눅 들지 않으며, 기성의 양식과 제도를 비틀어 조롱하거나 비판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패션이나 각 장르들의 전면에 내세우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월드컵 축구 응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사 분란한 동원 체제를 강조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페이크 펀에서 보여주는 놀이의 수단이기도 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월드컵 응원에 놓인 이 중층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는 이후 벌어질 촛불집회로 승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러나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한 복합적인 존재의 의미를 거리낌 없이 쏟아낼 수 있는 준비를 하였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기왕의 좌파, 우파의 구분법을 뛰어넘어, 붉은 치장을 두르고 붉은악마가 되었다가 광장의 촛불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제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이하고 두 번의 십년을 보내고 있다. 이전의 천년과 새로 온 천년은 시간의 분절이라는 관습적 기점의 어떤 비전들을 설정하였나? 만약 설정하였다면 그 비전은 어떻게 이행되고 있나? 한국의 크고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우면서 뉴밀레니엄을 열었던 붉은악마와 함께 분노의 여신, 페이크 펀, 내셔널리스트 치우의 등장을 다시 주목해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붉은 흐름이 어찌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톺아보는 것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왜 '다시천년'의 기점에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 의미는 또 무엇일지 추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보려 한다. 거듭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통과의례였다는 것, 이 의례를 통과하지 않으면 뉴밀레니엄을 도저히 열 수 없었던 불가피한 놀이였다는 점이다. 고작 일 년이 그렇고, 한 세기도 그럴진대 아무려면 한 천년이 그냥 올수야 있겠는가. 나는 지금 유쾌한 반란, 다시천년 벽두의 붉은악마를 애틋하게 추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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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민요를 포함한 한국의 민요는 대개 일을 하면서 부르는 노동요, 놀면서 부르는 유희요, 의식을 치루면서 행하는 의례요, 여기도 저기도 포함되지 않는 기타노래 등으로 나눈다. 일종의 연구 관행이다. 고위민은 1941년 '춘추지'에 '조선민요의 분류'라는 글을 기고했다. 고정옥은 1949년 '조선민요연구'를 통해 민요를 11항목 71형으로 분류한 바 있다. 이외 여러 학자들이 민요의 갈래를 연구했다. 1992년 제주도를 시작으로 1976편의 전국민요 음원을 수록한 MBC민요대전의 분류가 가장 주목할 만하다. 최상일 PD의 업적이다. 노동요, 의례요, 유흥요, 기타요로 분류해두었다. 소모는 소리나 말 모는 소리를 비롯해 애기 어르는 소리 등 음영가요까지 민요의 범주에 포함시켜두었다. 나는 이를 민요의 일생사 혹은 연령층별 민요 부르기로 재편하여 논의한 바 있다. 일생 의례적 불가역성에 대응하는 즉, 한번 죽으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인생에 대응하여, 민요의 순환성을 드러내보고자 하는 취지로 쓴 글이다. 민요를 포함한 노래는 수많은 분화과정을 거쳐 다양한 장르와 분야로 특화되어 왔다. 트로트니 힙합이니 하는 장르 이름들이 그러하다. 하지만 민속놀이니 여흥놀이니 따위로 호명되는 통칭 '놀이'는 노래 이전의 정보 즉, 노래와 놀이가 분화하기 이전의 정보들을 다루고 있다.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하(1872~ 1945)가 일찍이 인간을 '호모루덴스' 즉 놀이하는 인간으로 규정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심지어 종교와 전쟁까지도 놀이로 해석했다. 나는 남도의 소리 중심으로 견해를 정리하면서, 궁극적으로 이 놀이정신을 회복하는 것이 이익관계 중심으로 재편되어버린 인류사의 질곡을 헤쳐 나갈 방편과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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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흥그레타령으로부터 발전한 육자배기가 근대기를 거치면서 전문가들에 의해 재창작되는 과정을 거친다. 이를 통속민요 혹은 남도잡가 등으로 호명한다. 토속민요나 향토민요와 구별하기 위해 지은 이름이다. 토리권을 주장했던 이보형의 연구에 의하면 남도잡가 육자배기는 '흥그레타령-김매기 산타령-옛 육자배기-근대 육자배기'의 변천과정을 거친다. 나도 이 견해를 받아들여 흥그레에서 육자배기로의 변이를 주장해왔다. 김혜정 교수도 향토형 육자배기와 잡가 육자배기로 나누어 접근한바 있다. 19세기 말이나 20세기 초반에 경서도 잡가의 유행에 영향을 받아 잡가로 변화되었다. 흥그레타령에서 출발한 향토민요 육자배기가 당시 유행하던 유랑패들의 영향을 받아 잡가로 재창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남도잡가 '흥타령'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천안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하는 흥타령이 있다. 이것은 '천안삼거리'에서 유래한 노래로 일명 '경기민요 흥타령'이라 한다. 후대에 와서는 잡가 <흥타령>으로 재창조되어 널리 불렸고 특히 시조형식으로 재창조되어 시가문학의 한 유파를 이룬바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듣는 "아이고 대고 허허~응 허~성화가 났네 헤~"하는 <남도잡가 흥타령>은 어떤 노래인가? 손인애 교수는 이 노래의 형성 시기 및 그 과정이 사당패소리에 근거한 경서도 통속민요와 흡사하다는 점, 따라서 남도 사당패 계승집단 또는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집단이 형성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한다. 잡가 육자배기의 재창조과정과 같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남도잡가 흥타령의 정서와 한(恨)의 세계는 육자배기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재창조의 과정에 보렴, 화초사거리, 긴육자백이, 자진육자배기, 흥타령, 새타령, 성주풀이, 개고리타령 등이 함께 한다. 오늘날 남도잡가 메들리로 통칭되는 노래들의 존재가 근대기를 거치면서 완연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진도아리랑을 덧붙이는 형태로 고정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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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소리란 무엇일까? '한국호남학진흥원' 주관으로 '남도학'이라는 교재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간 써두었던 기록들을 병합해 '남도소리' 항목을 집필하였다. 여기 그 일부를 소개하여 '남도소리'가 무엇인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은 무엇인지 밝혀두고자 한다. 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잡가'를 말한다. 1928년 평양 권번에서 예기(藝妓)들을 가르치기 위해 김구희가 엮었던 '가곡보감(歌曲寶鑑)'에 보면, 가곡, 가사, 시조,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성잡가 등이 실려 있다. 남도잡가라는 이름이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잡가라 풀이해두었다. 전라도지역의 보렴, 새타령, 화초사거리와 경상도지역의 골패타령, 성주풀이 따위로 설명한다. 하지만 문화권역으로서의 남도는 호남의 이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호남지역의 잡가로 범주를 좁히는 것이 유용하다. 그런데 육자배기, 농부가, 진도아리랑, 흥타령 따위를 거론하게 되면 잡가의 범주를 넘어선다. 토속민요을 포함하는 호명방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남도지역의 '창(唱)'이라는 뜻으로 '남도창'이라 한다. 판소리를 포함하는 인식이다. 여기에서 광의의 남도소리에 대한 개념이 대두된다. 민요, 잡가를 포함해 판소리, 시조, 가곡, 무가, 나아가 남도에서 노래했거나 남도를 노래한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개념 말이다. 따라서 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의 모든 노래를 포섭하는 개념이다. 이들 모두를 대표하는 곡목이 육자배기다. 흥그레타령에 토대한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따지면 민요와 잡가를 거쳐 가요까지 연결된다. 한(恨)과 흥(興)의 정서가 어떤 장르들까지 파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은 연구가 무르익지 않았지만, 재창조 100여년을 앞두고 있는 트로트 또한 남도소리의 한 분파로 개념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남도학'이 씨줄 날줄의 시공을 교직하는 현재적 어떤 정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마땅히 남도소리의 개념범주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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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소리란 무엇일까? '한국호남학진흥원' 주관으로 '남도학'이라는 교재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간 써두었던 기록들을 병합해 '남도소리' 항목을 집필하였다. 여기 그 일부를 소개하여 '남도소리'가 무엇인지,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은 무엇인지 밝혀두고자 한다. 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잡가'를 말한다. 1928년 평양 권번에서 예기(藝妓)들을 가르치기 위해 김구희가 엮었던 '가곡보감(歌曲寶鑑)'에 보면, 가곡, 가사, 시조, 서도잡가, 남도잡가, 경성잡가 등이 실려 있다. 남도잡가라는 이름이 일찍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의 잡가라 풀이해두었다. 전라도지역의 보렴, 새타령, 화초사거리와 경상도지역의 골패타령, 성주풀이 따위로 설명한다. 하지만 문화권역으로서의 남도는 호남의 이칭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호남지역의 잡가로 범주를 좁히는 것이 유용하다. 그런데 육자배기, 농부가, 진도아리랑, 흥타령 따위를 거론하게 되면 잡가의 범주를 넘어선다. 토속민요을 포함하는 호명방식이기 때문이다. 흔히 남도지역의 '창(唱)'이라는 뜻으로 '남도창'이라 한다. 판소리를 포함하는 인식이다. 여기에서 광의의 남도소리에 대한 개념이 대두된다. 민요, 잡가를 포함해 판소리, 시조, 가곡, 무가, 나아가 남도에서 노래했거나 남도를 노래한 모든 장르를 포괄하는 개념 말이다. 따라서 광의의 남도소리는 남도의 모든 노래를 포섭하는 개념이다. 이들 모두를 대표하는 곡목이 육자배기다. 흥그레타령에 토대한 이 노래는 문학적으로 따지면 민요와 잡가를 거쳐 가요까지 연결된다. 한(恨)과 흥(興)의 정서가 어떤 장르들까지 파급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은 연구가 무르익지 않았지만, 재창조 100여년을 앞두고 있는 트로트 또한 남도소리의 한 분파로 개념화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남도학'이 씨줄 날줄의 시공을 교직하는 현재적 어떤 정체라고 정의할 수 있다면 마땅히 남도소리의 개념범주는 미래지향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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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나주신청문화관 복원은 전라도 천년정원 조성사업 중 하나다. 2018년 전라도 정도천년을 기념하여 기획된 것으로 전남과 전북이 함께 하는 사업이다. 천년정원은 나주향교와 나주읍성 서성문을 중심으로 오향(五香)마당 즉 판소리 등 전통음악, 전통 차, 음식, 서책, 서예와 공예 마당으로 구성된다. 전남도에서 나주시에 제안을 하여 공동 예산으로 편성된다. 첫째 마당은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가 나주신청이라는 점, 사실은 나주시에서 이미 기획했던 사업이라는 점에서 의미부여를 하고 싶다. 둘째 마당은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나주사람 초의선사가 출가했던 사찰이 나주 운흥사라는 점 외에도 불갑사보다 14년이나 앞선 불교전래지 불회사나 차를 진상했던 다소면(지금의 다도면)이 아예 차를 표방하는 지명이라는 점 등을 주목할 수 있는 마당이다. 셋째 마당은 발효음식으로 이름난 전라도 음식 전반을, 넷째 마당은 유네스코 지정 서원 등 수많은 문학작품 등을 겨냥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다섯째 마당은 서화와 공예를 포괄하는 미술정원으로 계획된다. 나주신청문화관 개관으로 전라도 천년 소리정원의 첫 삽을 뜬 셈이니 2022년까지 단계적으로 조성될 천년마당에 거는 기대가 크다. 단순한 정원이 아니라 역대의 신청처럼 문화적 거점이자 미래지향적 모티프를 제공할 공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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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 나주에서 뜻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 행사였다. 이경엽 교수와 윤종호 나주시립국악단 예술감독의 발표를 통해 그간 묻혀있던 보물 같은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토론을 통해 그 의미와 역사를 짚어봤다. 이경엽은 1937년 발간된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공저 '조선무속연구'를 통해 나주신청에 보관되어 있던 여섯 종류의 문서를 설명해주었다. 선생안(1800년)과 절목(1882년), 대동보안(1899년) 등이 그것이다. 이 자료들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서울대박물관에서 유리건판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선생안에 수록되어 있는 정원길(1834~1903)과 정원실(1838~?)이다. 정원길은 정재근의 아버지다. 정재근은 박유전을 시조삼고 있는 서편제를 보급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 정응민 대에 이르러 판소리의 중흥기라고나 할까, 이른바 보성소리라는 유파로 불리는 서편제의 큰 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선생안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판소리 후기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종 40주년 칭경식의 대표를 맡아 행한 업적들이 다대하기 때문이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협률사가 설립되었는데 전국의 판소리 명창, 가기(歌妓), 무동(舞童) 등 170여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만들고 공연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때 합류하거나 소속되었던 예인들의 창발이 오늘날 전통음악을 재구성하는 큰 흐름이었다는 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협률사와 이후 연계되는 원각사의 명암들이 짙은데, 무안사람 강용안과 더불어 만든 창극이며 삼현육각 등 관련한 자료와 인물연대기는 따로 후술하겠다. 어쨌든 정원길의 대를 이은 정재근이 정응민과 정권진으로 다시 안채봉,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으로 이어지고 또 한 사람의 획기적인 인물 정창업의 예술을 정학진과 김창환이 이어받아 김봉이, 김봉학으로 다시 오수암, 정광수, 임방울 등으로 이었다는 점 괄목할 만한 풍경이다. 가히 서편제의 맥을 나주신청에서 총괄하고 확산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뿐인가,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를 잇는 안기옥과 정남희 등은 월북하여 북한 전통음악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의 트로트나 가요로 확산된 맥락도 흥미롭다. 천년도읍지라는 점을 떠나서도 나주신청의 개관이 갖는 현대적 의미가 막중하다.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맥을 좇아 전남도립국안단은 물론, 진도, 여수, 무안 등지의 예술단과의 네트워크, 미래전략으로서의 연구와 공연 확장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을 누구보다 축하한다. 남도의 음악을 넘어 우리나라 나아가 아시아의 음악을 총괄하고 확산하는 센터로 기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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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신청은 전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昌才都廳案)'과 '경기재인청선생안'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건륭 사십구년에 작성되었으므로 1784년이다. 남도지역에서는 나주장악청, 장흥신청, 여수 악공청, 진도장악청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내가 참여해 이경엽 교수와 함께 연구 출판했던 '여수 영당 풍어굿, 악공청'(민속원, 2007)을 참고해보면 여수악공청의 중건은 1939년이다. 신청의 선생들 내력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이 1928년에 작성되었으므로 여수 또한 역사를 조선시대로 올려 잡을 수 있다. '선생안'은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이경엽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장흥신청은 1832년(순조 32)에 '신청완문(神廳完文)'이 작성되는 것으로 보아 그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해체되었다가 1919년 중건되었고 1921년에는 외청 세 칸을 더 지어 신청 기능을 복원하게 되었다.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갹출하여 음악전수를 할 수 있게 된 내력을 적은 장악청중건기가 전한다. 악공청, 장악청, 신청 등의 용어가 병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동아일보 기사는 진도 장악청 정보를 전해준다. 당시로부터 약 300여 년 전부터 진도읍 성내리 장악청(?樂廳) 속칭 신청(神廳)이 있어 일반 광대들에게 조선음악을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한자표기는 달라도 속칭 신청이라 했다는 언술이나 기타 내용들은 모두 신청(神廳) 관련 정보들이다. 이 언급을 적용해보면 신청의 존재가 1630년대로 소급된다. 광해군 일기 10년(1618) 10월 16일 기사도 참고가 된다. 재인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산주재인(山主才人), 도산주(都山主)라는 호칭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호명은 재인 집단의 존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재인청, 신청, 광대청 등 전문음악인들의 집단과 생활을 추정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정보들을 보면 신청이 전국적으로 존재했으나 전라도지역이 가장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청의 역사를 고려말 진도 장악청으로 올려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추적이 필요해보이지만, 이른바 무계들의 집단이자 공사의 음악업무를 담당했던 신청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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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신청(神廳)을 알기 쉽게 말하면 전통시대 민간연예인협회 정도일 것이다. 무업을 하고 공연활동을 하거나 각종 음악을 연마하고 전수하는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예인협회보다는 훨씬 기능이 막중한 단체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적인 단체였으면서 공적인 기능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천민 집단에 속하는 무계였지만 중앙이나 지방 관아에 악공, 취고수, 세악수 등 공적인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고, 선생안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예술 선배이자 조상격인 선대들의 제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필영 교수가 집필한 위키실록에서는 신청(神廳)을 신당(神堂)과 동일한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대에 신청(神廳)이라는 이름이 3건 확인되는데, 무당이 여러 신령을 모시고 굿을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숙종대 장희빈의 인현황후 저주 사건에 등장하는 활과 화살 등을 신청 내부 물건들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신청은 이 굿당과는 다른 개념이다. 나주의 역사를 기록한 '금성읍지'(1897년)에 보면 통인청, 훈련청 등의 이름과 함께 교방청(敎坊廳)과 신청(新廳)의 이름이 나온다. 특이한 것은 귀신 신(神)자를 쓰지 않고 새로울 신(新)자를 썼다는 점이다. 교방청은 춤, 검무 따위를 가르치던 기녀양성 기관이고 신청은 악공소(樂工所)라는 설명이 따로 붙어 있는 것처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공적인 공연을 연행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무계 집단의 공간이자 협회적 성격이라는 점에서 통칭 신청(神廳)이라 호명하는 것을 두고 무굿을 하는 굿당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권문세족들의 다양한 전통에 견주어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판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통음악이 신청이라는 공간과 관련 선생들을 통해 보존되고 전승되었음을 이해한다면, 나아가 천한 것으로 이해되던 문화들이 오히려 장대한 전통으로 전승 보존되는 시대정신을 주목한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굿당도 존재 가치가 인정되고 존중받는 공간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인청, 장악청 등의 신청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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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도리 기둥을 한 여섯 간(약 20평)의 조선 기와집이었다. 방이 셋이고 봉당, 대청, 정지 등이 있었다. 주위에는 26~27호 정도의 당골 집안이 살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집지을 때의 각서가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 무신도나 초상들이 걸려있지는 않았다. 조선말엽에 이 건물을 중수하기 위해 헌금을 한 한참사, 임참사, 박참사 등의 이름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지난 토요일 나주 신청문화관 개소식에서 발표한 목포대 이경엽 교수의 "왜 신청인가, 무엇을 어떻게 주목할까"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신청을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다는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인용한 정보다. 설명은 이어진다. 장악청에 출입하던 사람들을 '고인, 공인, 재인'이라 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다. 주야를 막론하고 항상 십여 명이 모여 예능을 닦고 놀이를 하였다. 당골 무계이기 때문에 무업에 종사한 것도 주요 일과 중의 하나였다. 장악청의 대동계를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석하여 음악기량을 익혔다. 신청에서 사용했던 악기는 북, 장구, 쇠,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젓대, 해금 등이었다. 향유한 노래는 판소리 단가를 비롯해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등이었다. 전북대 정회천 교수가 흥미로운 발상을 추가했다. 다른 지역에서 신청이라 부르던 공간을 왜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을까? 삼별초에 의해 또 하나의 정부가 세워졌던 곳이기에 고려 이래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제기였다. 장악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음악을 담당하던 국가기관 장악원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악원(掌樂院)은 고려시대에는 태악서(太樂署)라 하다가 전악서로 바꾸었고, 조선 초기 아악서, 전악서, 악학, 관습도감을 합쳐 세조 12년(1466)에 장악서로 통합하였다. 예종 원년에는 다시 장악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청을 재인청, 광대청, 공인청, 공인방, 악공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던 내력을 상기해보면 진도의 장악청을 고려 말까지 소급하는 상상이 그리 엉뚱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 현재 진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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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벌교와 목포 사람들은 은연중 ‘부용산’을 애창하곤 했다. ‘부용산’을 모르면 벌교나 목포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목포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벌교사람 박기동 때문일까,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에 곡을 붙인 나주사람 안성현 때문일까. 구례사람들 나아가 여순 사람들에게는 산동애가가 그러할까? 사실은 노래 자체를 언급하는 것을 터부시하고 애써 잊으려 노력해왔던 굴곡의 시간들이 너무 길었다. 불온한 시대는 애창은커녕 발설 자체를 금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연구들에 의해 실상이 밝혀지고, 세상 또한 개명의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목 놓아 불러도 좋을 시절이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절명가인 ‘산동애가’의 가사는 어딘지 모르게 ‘부용산’을 빼닮았다. 스물 안팎의 누이들이 대상이라는 점이 그렇고 비운에 죽은 청춘들이라는 점이 그러하며 지리산의 흉중을 횡단한다는 점이 그렇다. 어찌 노고단의 계곡이며 벌교의 들판이며 목포의 부잔교들뿐이겠는가. 고깃배 가득하던 여수앞바다며 순천의 들녘이며 아니 남도 천지의 올망졸망한 터전들뿐이겠는가. 미처 못다 부른 절명의 풍경들이 ‘산동애가’의 행간에 가득 찬 것을 그 누구라고 보지 못하랴. 시대의 무엇이 이 많은 이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때때로 대신 죽어야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으로 몰아갔는가. 문제는 지금부터다. 다시 아린 눈으로 백부전의 가족사진을 본다. 무심한 듯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이 맞닿아 있는 곳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가슴일지 모른다. 이름도 빛도 없이 집단 매장된 무덤가를 흐르는 노래일지 모른다. 풀어야 할 숙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피해자들에 비해 소수이지만 가해자들과 공존하고 있다는 점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덮어놓고 상생과 화합을 앞세우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다. 이제는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고 대응을 해가는 일들이 남아있다. 지금 부용산 봉우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있고 산수유 진 지리산 산동에는 무심한 녹음만 우거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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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2019)를 펴낸 도올 김용옥의 고백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여순반란이라고 들은 것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지창수 상사 등의 빨갱이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 현대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은 반란이 아니고 제주에서 서청(서북청년회)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힘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가라고 국가에서 명령하니까 지창수 등 14연대의 의식 있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나서 시가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쫓기어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 사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는 여순반란이 아니고, '여순항명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 인식되고 명명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반란-항명-항쟁으로 인식의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철희도 여순항쟁으로 호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름을 옳게 정하는 것을 정명(正名)이라 한다. 명칭이 실재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당한 호명을 하려면 이런 주장들을 수용해야할까? 위키백과는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군경에 의해 2,50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왕의 '반란'이라는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상들이 밝혀졌고 지금도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주철희는 여순항쟁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1948년 10윌 19일부터 지리산 빨치산 토벌이 완료된 1955년 4월 1일까지를 포함해야하고 특히 4천명에서 5천명까지 전국의 감옥에 흩어져 수감되었던 관련자들이 6.25가 발발하면서 처형당하였으므로 이 숫자를 당연히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2만에서 3만에 이른다는 제주 4.3 희생자 숫자에 육박하는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도올이 책 제목을 '우린 너무 몰랐다'라고 지은 까닭이기도 하다. 비로소 연구가 시작되었으니 실상들이 더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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