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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65) <br>청자굽다리잔편이 예쁘고 귀엽고 앙징맞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예쁘다 귀엽다 앙징맞다 등등은 작은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가령 도자기에서 백자달항아리처럼 큰 기물을 두고 예쁘다 귀엽다 앙징맞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큰 것들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청자굽다리잔편이야말로 예쁘다 귀엽다 앙징맞다라는 말이 거부감 없이 꼭 들어맞는 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굽다리잔편은 우선 크기가 아주 작다. 크기가 작을 뿐만 아니라 생김새 또한 묘한 매력이 있다. 청자굽다리잔편은 전체적인 크기에 비해 굽이 상당히 높다. 그리고 높은 굽다리 위에는 반파된 잔이 붙어 있다. 이와 비슷하게 높은 굽 위에 완이나 접시를 얹은 형태의 그릇은 그 역사가 아주 오래다. 오래 전에는 이런 기물을 두고 두(豆)라고 불렀기 때문에 무문토기 단계에서는 두형(豆形)토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삼국시대 토기에 와서는 고배라고도 하고 굽다리접시라고도 하는데 남부 지역에서 주로 제작이 되었다. 4세기 전반 경 가야지방에서 도질토기가 제작된 후 가야와 신라에서 경질 토기로 5~6세기 전반까지 유행한 기종이다. 원래는 뚜껑이 없는 무개고배로 제작되다가 유개고배로 발전한 양식이다. 고배처럼 높은 굽에 완이나 접시가 달린 기종은 청자나 분청이나 백자에서도 보인다. 이를 두고 고족배(高足杯)나 마상배(馬上杯)로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고족배는 이해가 되지만 마상배는 아무래도 이름 자체가 의심스럽다. 굽이 높아 손으로 말아 쥐기가 편해 말 위에서 사용하는 잔이라는 뜻인데 과연 그럴 여지가 있는 것일까. 옆구리에 차거나 말에 부착했다가 사용하는 편병 정도는 이해가 가지만 마상배는 아무래도 나로서는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명칭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굽다리잔편은 약간의 오목굽 형태인데 유약을 흝어내 붉은빛의 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굽으로 벌어졌던 다리는 좁아지며 올라가다가 다시 벌어져 잔으로 연결된다. 유색은 비색에 가까우며 잔 안에는 중앙의 흑점을 중심으로 주변에 다섯 개의 백점을 퇴화로 찍어 꽃문양을 나타내고 있다. 작은 형태에 퇴화의 꽃문양은 잔이 깨져 달아나는 바람에 오히려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따라서 손상된 부분마저도 커버를 하며 이래저래 예쁘고 귀엽고 앙징맞다라는 느낌이 절로 들게 만들고 있다. 이 예쁘고 귀엽고 앙징맞은 청자굽다리잔편은 언제 어디서 구한 것일까.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주 오래 전에 인연을 맺어 내게 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이 청자굽다리잔편은 어디에 사용되었던 것일까. 생김새로 보아 모르면 몰라도 술잔이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볼 뿐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처럼 아름다운 술잔에 어울리려면 여기에 따라 마셨을 술 또한 그야말로 구하기 힘든 감로주라도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던 박인환 시인의 시 '목마와 숙녀'는 아니더라도 이 술잔에 한 잔의 술을 마시는 상상이라도 해보며 나는 고려인들의 애틋한 꿈과 감미로운 사랑 이야기라도 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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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64)<br> 백자청화초화문편17세기 관요 백자의 청화라니 이규진(편고재 주인) 임진왜란은 조선 삼천리강토를 초토화 시켰다. 그 단적인 예가 토지의 변화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등록된 전국의 토지가 150만결에서 50만결로 급격히 줄어든다. 1769년 조사에서 131만결로 조사되었지만 실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토지는 80만결에 불과했다. 임란 후 150여년이 지난 후에도 임란 전 수준의 경작지를 회복 못했으니 그 여파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1결은 사방 640척의 장방형 농지를 말하며 이는 15,447.5제곱미터가 된다). 변동이 쉽지 않은 농지의 피해가 이럴진대 다른 분야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처럼 임진왜란은 전국 방방곡곡에 그 피해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조선사회를 뒤흔든 엄청난 재난이었다. 왕실 관요 백자 역시 그 피해는 컸다. 그런 가운데 가장 큰 특징이 국가 재정의 고갈로 인한 청화 수입의 어려움이었다. 이전 시기만 해도 사용이 거의 없었던 철화가 그 대용으로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백자 제작은 경기도 광주의 관요를 중심으로 서서히 재개되는데 17세기 초의 탄벌리를 시작으로 번조를 위한 화목을 따라 가마터를 10년 주기로 옮겨 다니게 된다. 따라서 18세기의 남종면 금사리에 이르기 까지 그 이동경로를 대충 파악해 볼 수가 있다. 앞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국가 재정의 고갈로 인한 청화의 수입이 어려워짐에 따라 17세기 백자 문양은 그 대용으로 사용된 철화의 시대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17세기라고 해서 청화가 귀하기는 하지만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운용문호와 여타의 지석들과 같은 실물이 더러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가마터에서는 이 시기의 청화가 아주 극소수가 보일 뿐이다. 발굴조사보고서를 통해 선동리 2호에서 출토된 원안에 제(祭)자가 들어간 것과 송정동에서 초화문 흔적이 있는 것을 서너 점 볼 수 있을 뿐이다. 간지를 통해 선동리가 1640년부터 10여 년간 운영된 가마로 볼 때 17세기도 중기에 와서야 비로소 청화가 조금씩 재개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전의 송정리는 현재 송정동으로 바뀌었는데 이곳에는 넒은 면적을 차지 광주시청이 위용을 뽐내며 새롭게 들어서 있다. 이 광주시청 뒤쪽의 주차장 후문을 나서면 바로 소로를 만나게 된다. 야트막하게 뻗어 내린 능선을 절개해 소로를 낸 것인데 절개 부분이 바로 송정리 1호 요지다. 과거 광주시청이 들어서기 전만해도 이 곳은 인근에 농가가 한 채 있었을 뿐 주변에 능선을 뒤로 하고 앞으로 밭들이 널려 있는 한적한 시골 풍경이었다. 소로의 절개 부분은 퇴적층으로 보이는데 여기서는 간지명이 있는 접시나 완편 등이 소로로 흘러내리고는 했었다. 아주 오래 전 일로서 이곳에서 만났던 것이 바로 백자청화초화문편이다. 백자청화초화문편은 크기가 작아 기종이 불분명하다. 입술이 밖으로 둥글게 말린 것으로 보아 푼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볼 뿐이다. 그런데 이 도편에서 중요한 것은 외면의 청화다. 미처 만개하지 못한 꽃봉오리와 잎인지 줄기인지가 조금 남아서 보일 뿐이다. 청화 발색은 탁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맑은 고운 빛깔도 아니다. 그러나 사실 색깔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송정동 2호 가마터 발굴조사보고서에서 흔적만 보이는 초화문 청화 보다는 훨씬 의미가 있는 크기이자 문양이기 때문이다. 약간 회색빛을 머금은 백자 바탕에 선명한 청화의 초화문은 남은 부분이 너무도 작아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17세기 관요 백자의 청화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흔적이랴. 15, 16세기보다도 더 귀할 수밖에 없는 17세기 그 것도 중기의 백자청화초화문편 앞에서는 인연의 소중함과 감사함에 더 이상 할 말을 잃게 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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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63)<br> 백자상감어문접시편초벌구이편의 어문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를 구울 때 고려 초기 벽돌가마에서는 초벌구이를 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 탓인지 한 점 한 점을 갑발에 넣어 굽는데도 불량품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면 청자든 분청이든 백자든 초벌과 재벌을 거치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왜 번거롭게 초벌구이를 하는 것일까. 그 것은 태토의 적절한 강도를 통해 유약 시유시 적당한 흡수율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초벌구이는 700~800도 정도에서 굽게 되는데 이처럼 1차 소성을 거친 도자기는 잘 부서기지는 하지만 흡수율은 높은 편이다. 초벌구이를 하는 이유는 이처럼 태토의 강도를 높이고 흡수율을 제고해 유약 시유를 용이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초벌구이를 하지 않을 경우 흡수율이 거의 없어 시유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초벌구이는 재벌구이보다도 소성 과정이 어렵다. 초벌구이시 조금이라도 서둘러 화목을 많이 넣게 되면 온도가 급상승해 기물이 터지거나 금이 가는 등 손상을 입게 된다. 따라서 초벌구이야말로 오랜 경험과 숙련된 기술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재벌구이는 1250~1300도 정도에서 시유된 유약을 녹여 줌으로서 기물을 완성시키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상회구이라고 해서 3차 소성 방법도 있지만 중국의 삼채나 오채 등에서 보일 뿐 우리 도자기에서는 전혀 시도되지 않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상감어문접시편은 초벌구이편이다. 말하자면 시유를 해 재벌구이를 하지 않은 전 단계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상감도 자토 그대로 남아 붉은색을 띠고 있다. 여기에 유약을 시유해 고온에서 다시 재벌구이를 하면 상감의 붉은색이 검은색으로 변해 흑상감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이 백자상감어문접시편은 흔치 않은 상감이 들어간 초벌구이편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편의 고향은 도마리4호백자가마터다. 지금은 흔적이 거의 없지만 도마리4호백자가마터에서는 도편 중 사(司)자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관요 이전의 공납용 자기를 만들던 도요지가 아닐까 생각되는 곳이다. 반파된 백자상감어문접시편은 초벌구이편이라 흙기운이 남아 있어 못 같은 것으로 긁으면 태토가 긁혀지는 연질이다. 커다란 원을 그리고 그 안에 물고기를 배치하고 있는데 달아난 반대편에도 물고기가 있는 쌍어문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남아 있는 물고기는 자토 그대로 붉은색을 띠고 있는데 입과 커다란 눈, 지느러미와 꼬리 등 사실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백자상감어문접시편을 재벌구이를 해 눈부시게 흰빛깔의 바탕에 검은색의 물고기가 살아난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일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도편이 아닐 수 없다. 물고기는 우리 민속품에서 많이 보이지만 도자기에서도 더러 응용되고 있다.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뜨고 자 벽사의 의미가 강하며 많은 알을 낳기 때문에 다산의 상징성도 있다. 민속품이나 도자기에서 물고기 문양이 들어가는 것도 이런 벽사와 다산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자기에서 흑상감 된 물고기도 보기 어려운 것이거니와 자토 그대로인 초벌구이편의 어문은 더욱 더 보기가 힘든 것이어서 참으로 귀하고 신비롭기만 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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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62) <br>분청양산인부수명편양산 호포요지가 고향 이규진(편고재 주인) 분청양산인수부는 양산에서 만들어 인수부에 납품했던 공납용 자기다. 공납용 자기는 충청도와 전라도 그리고 경상도에 집중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지방명은 주로 경상도에서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인수부는 정종 2년(1400) 이방원의 세지부로 설치되었다가 폐지된 후 세조 3년(1457) 다시 설치되는 등 기복은 있었지만 명종 11년(1556)까지 존속했던 관청이다. 그러나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된 후에는 공납용 자기가 없어짐으로 인해 분청인수부명은 15세기 중반 전후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여 진다. '세종실록' 지리지 경주부 양산군에는 고려 태조 23년부터 유래된 양주라는 지명이 조선 태종 13년에 양산군으로 바뀐 것과 자기소 하나가 군 남쪽 금음산리에 있는데 중품이라는 내용이 있다. 현재 양산읍 남쪽에 위치한 양산시 동면 가산리 호포요지가 금음산리 중품 자기소로 추정되며 분청인수부명편은 바로 이곳에서 출토된 것이다. 젊은 시절 도요지 답사를 다닐 때 호포요지를 가본 것도 같은데 확실한 기억은 없다. 분청양산인수부명편도 내가 직접 습득한 것이 아니라 전에 지인으로부터 양도를 받아 간직해 오던 것이다. 공납용 분청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보면 관사명으로는 공안부 경승부 인녕부 인수부 덕녕부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 시선서 장흥고 등이 있다. 인수부명 분청은 외면에 별도의 구분 없이 글자만 새긴 경우도 있지만 원 안에 한 글자씩 새겨 넣은 것도 있다. 내저에는 글자만 들어 가는데 인수부만 있는 것도 있고 지방명 등과 함께 새겨진 것도 있다. 인수부명 관사명은 공안부 경승부 인녕부 등에 비하면 더러 보이는 편이지만 내섬시나 장흥고 등에 비하면 흔치 않은 편이다. 양산인수부명편은 외면이 모두 손상되어 확실한 기종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두께가 두툼한 것으로 보아 접시는 아니고 사발이나 대접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이 될 뿐이다. 굽은 모래받침에 굽 주변에도 원문을 상감하고 있으며 몸체로 이어지면서도 상감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안쪽을 보면 실타래 같은 인화문이 둘러싸고 있는 가운데 원 안에 양산인수부가 백상감 되어 있다. 글자는 크기가 고르지 않아 수자는 인자에 비해 배 이상이 큰 느낌이다. 남은 부분이 작아 기종도 불분명 하지만 양산인수부명이 확실하게 들어가 있는데다 출토지 또한 양산의 호포요지가 분명해 자료적 가치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사명은 물론이거니와 관사명과 함께 지방명이 들어간 분청에 대해서는 그동안 관심은 많았지만 가지고 있는 것은 몇 점 되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양산인수부명 도편은 이번에 소개하는 것이 유일한 것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애정이 가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애정의 척도가 그 도자기의 가치와 정비례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이 끌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해보게 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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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61)<br>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백자청화추초문의 진실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근래 후배에게 넘겼던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을 다시 찾아 왔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당시 무슨 심뽀로 마음을 비웠던 것인지는 기억이 없다. 다만 그 후 후배 집을 방문할 때마다 이 도편이 눈에 밟혀 조르고 조른 끝에 다시 찾아 온 것이다. 후배는 그동안 정이 들었다고 안 내놓는다 것을 구미가 당길만한 것을 내주고 빼앗다시피 되찾아 온 것이다. 내가 이처럼 이 도편에 대해 공을 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마도 추초문으로 일컬어지는 백자청화초화문이 내게 단 한 점도 없다는 사실과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중부고속도로 경안 나들목을 빠져나와 번천리에서 고개를 넘으면 도마리다. 좌측의 도마리 제1호 백자가마터를 지나면 바로 삼거리인데 여기서 우측의 퇴촌 방향을 버리고 조금 더 직진을 하면 고개에 이르기 전에 좌측으로 도랑을 낀 골짜기가 나온다. 골짜기 우편 끝 산사면에 면한 밭이 있는데 여기가 이른바 도마리4호 백자가마터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은 관요인 도마리 제1호 백자가마터와는 달리 그 이전 시기의 것이다. 따라서 흑상감도 보이고 사옹원을 뜻하는 듯싶은 사자명 같은 것도 보인다. 그러니까 이곳은 관요 이전의 백자가마터로 청화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먼 곳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이 이곳에서 발견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가 흔히 추초문이라고 하는 청화초화문은 18세기 전반 그러니까 금사리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면 깨끗한 설백의 유색에 사대부 문인들의 정신적인 고양감을 드러내기라도 하려는 듯 간략하게 청화로 초화문이 그려진다. 그런데 이 초화문은 대개가 대지를 의미하는 듯싶은 밑줄을 긋고 그 위에 그림이 전개된다. 하지만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의 초화문은 밑줄이 없다. 이처럼 밑줄이 없는 초화문으로는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아타카켤렉션) 소장의 백자청화초화문면취병이 있다. 높이가 24Cm나 되는 당당한 크기에 적당한 비례로 면을 친 몸체에 초화문을 넣고 있다. 밑줄이 없는 것은 청화초화문으로서는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두 점 모두 굽이 안굽인 것도 흥미롭다. 자,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한번 생각을 해보자.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도마리 제4호 백자가마터는 관요 이전의 가마로서 청화와는 전혀 연관성이 없는 곳이다. 그런데 왜 이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이 이곳에서 보였을까. 논밭에서 농부가 일을 할 때면 때에 맞추어 음식을 내가게 된다. 술도 곁들일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하면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은 술을 내가던 술병이 여기서 손상을 입었던 것일까. 하지만 금사리 시기에 만들어진 술병에 청화로 초화문이 들어갈 정도면 보통 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귀한 술병을 농부의 일터에 술을 내갈 때 사용했다는 것은 아무래도 상상이 되지 않는다. 도대체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의 진실은 무엇일까.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자료가 있다. '미술사학연구' 제294호에 게재된 타시로 유이치로의 `추초수를 통해 본 근대 일본의 조선백자 인식`이라는 글에 나온 내용이다. 1942년에 간행된 입정주일랑의 '이조염부'와 전중풍태랑의 '이조도자보'에는 각각 추초문 도편을 도마리 가마터에서 찾았다고 발표한 바 있는데 이를 15~16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호암컬렉션 전시와 '동양도자'에 실린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관장의 인터뷰를 통해 초기 것이 아닌 것으로 수정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도마리에서 추초문이 발견된 것만은 사실로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나 또한 도마리에서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 실물을 실견했으니 이를 어쩌랴. 백자청화초화문각병편은 현재 남은 부분이 비교적 작은 편이다. 안굽에 모래받침을 하고 있으며 유약은 설백색에 고운 빙렬이 있다. 면은 세 면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 발색이 좋은 청화로 초화문을 넣고 있다. 초화문은 밑줄이 없으며 난초 같은 몇 줄의 선에 꽃이 보이기는 하지만 부분만 남아 있어 종류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면을 쳐 뽑아 올린 각병에 청화로 초화문이 어울린 원래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을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출토지와 관련해 미스터리가 너무도 많은 이 청화백자초화문각병편을 후배로부터 되찾아 와 나는 왜 다시 궁금증으로 인한 마음고생을 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잘 알 수가 없는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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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60)<br>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편백자달접시로 부르고 싶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전이 수평으로 넓게 달린 초선 초기의 백자전접시는 아름답다. 조금의 일그러짐도 없이 둥근 형태에 티 하나 없는 순백의 눈부신 색감을 보고 있노라면 대형의 백자항아리를 일컫는 백자달항아리에 비견해 백자달접시로 부르고 싶어진다. 그런 전접시에 귀한 청화로 시문이라도 들어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온전한 전접시와 도마리1호에서 출토된 전이 일부 훼손된 전접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 나는 평소 백자 중에서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중 하나가 달덩이 같이 둥근 순백의 초기 백자전접시다. 그러나 이는 귀한 기종인데다 온전한 것도 드물고 값 또한 만만치 않아 언감생심 넘볼 처지가 아니라고 체념해 오던 처지였다. 그런 중에 다소의 위안이 있다면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편을 한 점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운 모래받침에 넓은 전이 달린 이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편은 일부만 남아 있는데다 시문도 두 글자와 흔적만 보이는 것이 있을 뿐이어서 여간 아쉬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조선 초기 일급의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을 정도는 되니 이 얼마나 고맙고도 감사한 일이랴.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편은 경기도 광주 번천리9호산이다. 번천리9호는 현재 밭으로 경작되고 있는데 한쪽이 개천에 인접해 있다. 지금은 개천 쪽으로 일부 축대가 쌓여 있지만 전에는 그냥 단애로 이루어져 있어 비라도 내리면 흙이 무너져 내리며 더러 도편이 보이고는 했었다.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편은 바로 이처럼 개천으로 흘러내린 것을 수습한 것이다. 당시 얼마나 반갑고 기분이 좋았던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심정이었다. 오래간만에 깊이 간직해 두었던 것을 다시 꺼내 보니 그날의 그 감격이 오롯이 되살아나는 느낌이다. 백자에서 청화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그 시기 추정이 쉽지 않다. 가장 이른 시기 편년자료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정통 10년(1445)명 백자청화평원대군묘지석이 있지만 이 것은 청화 발색이 좋지 않다. 이에 비해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의 경태 7년(1456)명 백자청화인천이씨묘지석은 비교적 청화의 발색이 좋은 편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청화의 사용이 익숙해 보여 조선에서도 청화의 제작이 나름대로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자청화시문명전전십편은 고운 모래받침에 전이 넓은 전접시편인데 빙렬이 없이 고운 순백의 색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청화로 뚜렸한 두 글자와 머리만 약간 흔적만 남은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래는 오언절구나 칠언절구의 한시가 들어 있었겠지만 아쉽게도 모두 달아나고 일부만 남은 것이다. 청화의 발색은 검은 빛을 많이 함유한 가운데 군데군데 뭉친 흔적이 보여 초기 청화의 발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조선 초기의 청화는 말 그대로 여간 귀한 것이 아니다. 실물은 물론이거니와 도편 또한 흔치 않기는 마찬 가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청화는 회회청이라고 해 중국이 아랍에서 어렵게 구해 온 것을 조선에서 또 다시 구해 온 것이니 당시에는 금보다도 더 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처럼 귀한 청화를 이용해 자기를 굽는데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할 수 있었겠는가. 갑반을 씌워 가마 안에서도 가장 안정된 자리에 두었었을 것이 분명하니 불량품이 나올 가능성이 그만치 희박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실물은커녕 백자청화도편 또한 보기가 쉽지 않은 것은 바로 그런 이유들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조각만 남은 것에 청화도 일부만 보여 아쉽기는 하지만 이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편을 어찌 귀하고 소중히 여기지 않을 수 있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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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9)<br>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우동리산 분청의 특색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소식이 끊긴 지인의 소장품이 분명해 보이는 도편들이 어쩐 일인지 고미술상에서 보여 서너 점을 구입했다. 그 중 하나가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이다. 출토지를 밝힌 라벨이 붙어 있지 않았더라도 면상감의 모란문은 우동리산임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사실 부안 우동리산 분청들은 여러 가지 특색이 있지만 가장 돋보이는 것이 면상감이다. 그런데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은 그런 특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소식이 끊긴 지인의 소장품이 분명해 보이는 도편들은 어쩌다가 고미술상까지 흘러오게 된 것일까?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의 부안 우동리 출토 분청사기 중에는 편병이 여러 점 보이지만 면상감으로 모란문을 장식한 편병은 두 점 뿐이다. 한 점은 주구 쪽이 손상된 것이고 또 한 점은 결손 부분을 복원한 것이다. 복원된 편병을 보면 앞뒤 면에 모두 백토의 면상감으로 모란문을 시원스럽게 새겨 넣고 있다. 흑상감은 측면에 도식화된 연판문이 약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면상감의 모란문은 넓은 4개의 잎으로 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줄기와 잎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식이다. 편병은 조선조에 들어 와 분청과 백자에서 새롭게 보이는 기형이다. 도자기의 양 쪽 면이 평평하고 납작하며 상단에 주구가 하단에 다리가 달린 모양이다. 전기에는 분청과 순백자에, 후기에는 철화와 청화백자 등에서 보인다. 분청은 물레를 돌려 항아리를 만든 후 양면을 두드려 납작하게 만들며 백자는 아예 처음부터 두 개의 접시 모양을 만들어 접합하는 형식이다. 문양은 17세기 이전에는 대나무나 화문이, 18세기 이후에는 산수화가 전면에 시문되는 경우가 많다. 후기에는 몸체 측면에 다람쥐 같은 짐승이나 고리 등을 만들어 붙여 장식하는 경우도 있다.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은 현재 평평한 부분 일부와 측면이 약간 남이 있을 뿐이다. 평평한 부분에는 백토의 면상감으로 모란문이 전면을 가득 메우고 있다. 그러니까 현재 남아 있는 도편에서는 백상감 뿐 흑상감은 전혀 볼 수가 없다. 유약은 녹청색에 가는 빙렬들이 보이며 안쪽으로는 물레자국이 선명하다. 평평한 부분과 꺽인 측면으로 인해 이 도편이 편병의 부분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 뿐 아니라 면상감으로 인해 우동리산 분청의 특색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의 원래 소장자인 지인은 일찍부터 고미술품에 매료되었던 분이다. 범위도 광범위해 도자기와 서화는 물론 민속품 등 안 좋아하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평생을 수집한 온갖 물건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소장품과 관련해 어떤 소송까지 가는 다툼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에는 고미술품에 대한 매력을 상실했는지 이쪽과는 아예 손절을 하고 말았다. 그 후에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를 메고 산과 들로 사진을 찍으러 다닌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그 후 소식을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가 소장했던 것으로 보이는 도편 일부가 시중으로 흘러 나왔으니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는 일이다. 여하튼 지인의 경우처럼 많은 사람들이 좋아서 수집했던 물건들도 나중에는 분쟁에 휘말리거나 유명무실하게 산일되어 버리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고미술품을 좋아는 하더라도 스스로 경계하고 삼가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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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8)<br>청자상감사이호뚜껑편아쉬움이 비록 남아 있다 해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근래 인연이 있어 청자사이호를 한 점 구했다. 몸체 앞뒤로 국화절지문이 들어간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를 구한 것이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의 특징은 어깨에 달려 있는 네 개의 고리다. 청자사이호의 특징은 이름 그대로 어깨에 네 개의 고리가 달려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네 개의 고리가 달려 있다고 해서 큰 자랑꺼리는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에 달려 있는 고리의 형식이다. 청자사이호는 더러 보이는 형식이지만 네 개의 고리는 대부분이 세로로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는 고리가 가로로 되어 있어 주목된다. 청자사이호 중 고리가 가로로 되어 있는 것이 없을까 해서 도록을 뒤져보았다. 고려청자(대판시립동양도자미술관) 3점, 천하제일비색청자(국립중앙박물관) 2점, 고려청자명품특별전(국립중앙박물관) 4점, 청자(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2점, 동원선생수집문화재(국립중앙박물관) 3점, 송암미술관소장품(송암미술관) 1점, 고려도자의 초대(해강도자미술관) 3점 등 총 18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중 고리가 가로로 되어 있는 것은 전무하고 4점뿐인 뚜껑 또한 많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고리가 가로로 되어 있는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는 보기 힘든 상당히 귀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특징이 있는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이기는 하지만 아쉬운 것은 뚜껑이 없다는 점이다. 청자사이호는 사실 네 개의 고리와 십자형 고리가 있는 뚜껑을 한 세트로 만드는 것이보통이다. 이는 몸체와 뚜껑을 고정시키기 위한 방편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청자사이호는 몸체는 매병과 비슷하나 구경이 넓고 목이 짧은 것이 특징이다. 청자상감사이호뚜껑편은 이런 청자사이호 중 몸체는 없고 뚜껑만 남은 것이다. 그 것도 반파가 된 불완전품이다. 그런데 청자상감사이호뚜껑편은 반 이상이 달아난 불완전품지만 대단한 고급품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뚜껑 중앙에는 십자형 고리가 달려 있어 이 도편이 사이호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고리 주변으로는 돌아가며 연판문을 새기고 있는데 그 사이에는 역으로 백상감을 하고 있어 흡사 분청의 박지문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꺽여져 내려간 옆으로는 흔적만 남아 있지만 돌아가며 운학문을 새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뚜껑 안쪽 깊숙이는 태토빚음돌 흔적이 남이 있으며 전체적인 유약은 맑고 투명한 가운데 고운 빙렬이 나 있다. 한 마디로 아름답고도 귀한 고급품임을 알 수 있는 명품이다. 이 청자상감사이호뚜껑편은 근래 구입한 뚜껑이 없는 청자상감국화문사이호 때문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두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막상 깊숙이 넣어 두었던 청자상감사이호뚜껑편을 찾아놓고 보니 도록 등에서 볼 수 있는 온전한 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느낌이었다. 깨져 달아나 흔적만 남은 옆 부분의 운학문마져 제대로 살아 있었더라면 얼마나 눈부신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었을까. 하지만 아쉬움이 비록 남아 있다 해도 지금의 상태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스스로 증명하는 데는 전혀 손색이 없는 명품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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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57) <br> 분청상감모란문발편구름이 되고 싶은 꽃 이야기 이규진(편고재 주인) '구름이 되고 싶은 꽃'은 초정 김상옥 시인의 작품이다. 빼곡히 들어찬 격자무늬 바탕에 먹선으로 백자항아리를 그리고 여기에 청화로 꽃을 그려 넣은 그림이다. 구름이 되고 싶은 꽃이라는 제목이 말해 주듯이 꽃은 구름과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두리뭉실하게 그린 것이 특징이다. 살아생전 유별나게 백자를 좋아했던 초정 시인의 그림 맛이 제대로 살아 있는 득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그림과 관련해서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초정 시인은 1974년 미도파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에는 <구름이 되고 싶은 꽃>도 출품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하루는 초정 시인이 전시장에 나와 쉬고 있는데 소설가 박완서 여사가 다가와서는 불쑥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학교 이름이 인쇄된 월급봉투였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초정 시인에게 박여사가 옆에 서 있는 앳된 숙녀를 가리키며 ‘딸입니다 얘가 선생님 그림을 갖고 싶답니다’ 하는 것이 아닌가. 딸은 대학 졸업과 함께 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는데 첫 월급을 탓다는 것이었다. 그 귀한 돈으로 내 그림을 사겠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따라서 초정 시인은 그 날의 그 감격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유치원에서 대학까지 장장 20여년의 형설의 공을 쌓아 얻은 그 첫 수확으로 이 문외한의 그림을 사다니, 내 생애에 전무하고 또 후무할 감격이었다. 이 어찌 천만금엔들 견줄 수 있는 감격이랴. 보라! 저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현대의 화웅 피카소도 당대 귀족과 부호들의 품삯은 받았을망정 이토록 귀한 화료는 받아보지 못했을 것이 아닌가. 이 내용은 초정 시인의 '구름과 박쥐무늬 항아리'라는 수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이제는 글을 쓴 초정 시인이나 소설가 박여사도 이 세상 분들이 아니다. 그러나 '구름이 되고 싶은 꽃'만은 박여사 따님의 방 어딘가에 걸려 있어 그 옛날의 추억을 상기시키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 어찌 아름다운 인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렇다고 하면 나는 사회에 나와 첫 월급으로 무엇을 했던가. 아름다운 인연은커녕 아무런 기억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의미 있게 사용치 못했을 것이라는 자괴감으로 인해 남는 것은 서글픈 마음뿐이다. 차제에 초정 시인의 구름이 되고 싶은 꽃은 아니지만 꽃 한 점을 소개해 볼까 한다. 분청상감모란문발편이 그 것이다. 사방으로 몸체와 입술 부분 등이 달아나 가운데만 오롯이 남은 도편이다. 원을 돌린 선 밖으로는 백상감의 연판문 흔적이 보이고 중앙에는 큼직하게 흑백상감으로 변형된 모란문을 장식하고 있다. 굽은 죽절굽에 태토빚음받침이며 전체적인 유색은 담청색에 미세한 빙렬들이 보인다. 주목되는 것은 아무래도 중앙의 변형된 모란문이다. 그런데 편의상 모란문이라고 하는 것이지 기존에 알려진 문양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꽃은 중앙에 씨방이 있고 큼직한 네 장의 잎 사이로는 작은 잎들이 보여 겹꽃임을 알 수 있다. 초정 시인의 꽃이 구름을 지향했다면 이 분청상감모란문발편은 무슨 꽃을 염두에 두었던 것일까. 줄기도 잎도 없이 오직 꽃잎만 큼직하게 강렬한 인상으로 어필하고 있는 이 분청상감모란문발편을 보고 있노라면 내 첫 월급에 대한 쓸쓸한 추억처럼 마음은 석연치가 않아 답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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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6) <br>백자청화초화문발편방산자기박물관도 아직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단풍이 곱게 물들어 산색이라도 붉게 타오르는 가을날이면 양구에서 평화의댐으로 이어지는 길은 호젓하면서도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이 길 중간쯤에 방산자기박물관이 있다. 2006년에 설립된 방산자기박물관은 지방 백자 전시를 위한 전문 박물관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어서 주목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방산에는 고려부터 시작해 20세기 초까지 오랜 기간 지속된 가마터들이 40여 곳이나 산재해 있다. 광주 분원에서 백토를 가져다 쓸 정도로 이 곳의 흙이 좋은 것도 이 지역에서 다양한 도자 문화가 꽃 피울 수 있었던 요인 중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방산 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금강산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이성계 발원사리구다. 백자대발인 사리구에는 방산사기장 심룡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양구가 제작지임을 추정케 하고 있다. 이 것 말고도 방산에서는 공안부 예빈시 등 관사명이 보이고 있어 일찍부터 도자기가 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중앙 관서와의 연관성도 주목된다. 14세기부터 시작해 조선초의 가마로는 금악리 장평리 송현리 상무룡리 등이 있으며 17~18세기에는 금악리 칠전리 장평리 현리 오미리, 18~20세기에는 금악리 칠전리 장평리 현리 송현리 상무룡리 등이 있다. 방산면 일대의 가마에서 발견된 도편들은 주로 무문이지만 장식으로는 청화백자가 가장 많고 철화백자가 드물게 보이고 놀랍게도 진사백자가 출토된 바도 있다. 이대박물관의 지표조사보고서에 의하면 송현리에서 대접 안 바닥에 진사로 무늬가 들어간 것이 발견된 바 있는데 아쉬운 것은 이 곳이 군부대 안이어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하튼 우리가 현재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사자기라고 해 뽀얀 흰빛깔의 백자에 약간 진한 색의 청화가 들어간 기물들은 주로 조선 후기에서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젊은날 방산 일대의 가마터들을 돌아보았던 적이 있었다. 당시의 기억으로 가장 많은 도편들이 보였던 곳은 아무래도 후기 가마인 칠전리였던 것 같다. 민가 뒤쪽 밭 일대에 청화백자편들이 널려 있었는데 당시 기념으로 가져왔던 것이 백자청화발편이다. 구연은 직립하였고 몸체는 하단에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사선으로 올라간 형태다. 굽은 역삼각형에 굵은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외면보다 굽 안이 깊으며 구연부 쪽 두 줄의 선과 아래 초화문은 청화로 시문을 하고 있다. 유색은 담청색이며 굽 안은 손상을 입어 뻥 뚫려 있다. 크기는 다완으로는 좀 작고 녹차잔으로는 약간 큰 발형이다. 칠전리 가마터에서는 청화당초문을 전사기법으로 사용한 백자편이 출토된 바 있다고 한다. 또 분원 스타일의 문양과 기형이 보여 이곳과의 연관성이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실제 1884년 분원이 민영화 된 후 분원사기장들이 흙을 찾아 양구로 이동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하재일기>에는 1901년 임금님 수랏상에 올라가는 만들기 어려운 그릇 외에는 양구에 주문하여 궁궐에 보냈다는 기록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근대로 이행되면서 양구 지역 도자기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백자청화초화문발편은 바로 이런 시기에 만들어진 도자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다. 요즘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가 하면 장대비가 쏟아지기도 하는 등 막바지 여름 날씨가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입추도 지났으니 이제는 가을 또한 멀리서나마 서서히 다가오고 있는 느낌이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산색이라도 붉게 타오르는 가을이 깊어지면 양구에서 평화의댐으로 이어지는 호젓하면서도 고즈넉하고 아름다운 그 길을 나는 또 다시 찾아 볼 수 있을까. 방산자기박물관도 아직은 보지 못해 꼭 한 번 다시 찾아보고 싶지만 이제는 차도 없어 기동력이 없다 보니 생각처럼 쉽지 많은 않으리라는 예감에 조금은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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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5) <br>백자흑상감모란문병편석양을 등지고 멀어져 가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동양화는 기본적으로 먹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림이다. 물론 동양화에도 채색화가 있기는 하지만 그 것은 예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먹이 주는 검은색의 무늬와 흰 종이 바탕이 주는 여백의 미야말로 동양화가 추구하는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미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동양화에 가장 근접한 미감의 도자기는 무엇이 있을까. 흰바탕에 흑상감이 들어가는 백자흑상감이 흑과 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나마 동양화에 가장 근접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해보게 되고는 한다. 백자흑상감모란문병편은 조선 초기 백자병이다. 입술이 손상되었지만 초기 백자병이 그렇듯이 주구는 밖으로 벌어지며 마무리가 되었었을 것이 분명하다. 몸체는 어깨 부분에서 서서이 내려가며 벌어져 무게 중심을 아래에 두어 안정감을 취하고 있다. 굽은 약간 외반된 형태며 접지면은 유약을 훑어낸 노태로 모래받침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몸체는 대파되어 뒤에서 보면 병 속이 시원스럽게 훤히 들여다보인다. 어쩌다 이처럼 뼈대만 남은 것일까. 그래도 앞뒤로 흑상감이 들어 있으니 손상이 심해도 흔치 않은 물건임을 알 수 있다. 백자흑상감모란문병편은 앞뒤로 모란문이 흑상감 되어 있다. 회백색의 유색 바탕에 흑상감으로 모란문을 상감하고 있어 흑백의 대비가 뚜렸하다. 꽃잎 끝은 칠을 하듯 여기에도 면상감을 하고 있으며 간략한 모양의 잎과 줄기는 꽃잎에서 사방으로 흩어지듯 전개되어 시원스런 맛을 더하고 있다. 그러나 모란문 또한 원형대로 남아 있지는 못하고 부분적으로 훼손된 상태다. 그러나 늘씬하면서도 당당한 크기에 흑상감의 모란문을 새기는 등 이런 종류로는 상당히 공들여 만든 흔치 않은 귀한 기물임을 알 수 있다. 백자흑상감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경기도 광주 일대의 초기가마에서 보이는 경질과 연질의 지방 가마 것이 그 것이다. 백자흑상감모란문병편은 연질인 것으로 보아 지방 가마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자 기명에 오목새김을 한 후 산화철이 많이 포함된 자토를 감입하고 초벌구이를 한 후 유약을 씌워 재벌구이를 한 백자흑상감은 광주 일대의 초기 것이라 해도 관요보다는 그 이전의 15세기 전반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마찬 가지로 지방가마 것들이라 해도 대부분 조선 초기의 이른 시기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온전히 남아 있으면 꽤나 세간의 주목을 받았을법한 백자흑상감모란문병편은 어쩌다 불구의 몸을 이끌고 어디를 돌고돌다 편고재까지 흘러오게 된 것일까. 깨져 달아난 부분이 많아도 원형을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는 남아 있어 반듯하게 서 있을 수도 있으니 이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나 해야 하는 것일까. 깨지고 금가고 망가진 도자기들을 보면 세월의 무게가 주는 아쉬움에 늘 마음이 짠해지고는 한다. 백자흑상감모란문병편 또한 그런 점에서 본다면 수묵화 속의 석양을 등지고 멀어져 가는 한 마리 외로운 사슴의 뒷모습이라도 보는 듯싶어 애잔한 느낌을 금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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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4)<br>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내 모습은 정상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가는 실금만 있어도, 작은 알팀만 있어도 타박이 심하다. 고미술계 특히 도자기에 대한 요즘의 시중 풍속도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그런 시중의 풍향계를 무시하고 일을 저질렀다. 새로 구입한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이 그 것이다. 사진을 보면 금간 부분을 땜질만 한 것 같은데 잔편이라니 무슨 이야기인가. 완형같이 보이는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사실 손상이 심해 몸체의 1/3정도는 남의 살을 붙인 것이다. 그러니 도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도편이라고 해도 귀한 것이다. 귀한 정도가 아니라 도자기를 좀 안다면 탐을 내야할 물건이다. 분청덤벙의 매력은 특이하다. 그것은 다른 기종에 비해 변화의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분청덤벙의 완이나 잔으로 차나 술 등을 마시며 계속 사용할 경우 색깔이 배어들어 경색의 미가 발생한다. 따라서 분청덤벙은 다른 기종처럼 가마에서 완성되어 세상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나온 후 사람과 세월과 더불어 새롭게 만들어 가는 기물이라는 점에서 남다른 것이다. 일본인들이 덤벙분청에 대해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것도 그런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경색의 미를 높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귀한 분청덤벙에 간혹 철화가 들어간 것이 있으니 세상에서도 보기 드문 귀물이 아닐 수 없다.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은 입지름이 9~9.5에 굽지름이 4이고 높이가 5Cm 크기다. 술잔으로 사용해도 좋지만 녹차잔으로도 적격이다. 죽절굽에 태토받침이며 입술은 약간 벌어진 형태다. 굽부터 입술까지 몸 전체를 백토로 분장한 분청덤벙이다. 여기에 간략한 초화문을 철화로 그리고 있다. 문제는 몸체의 1/3정도가 없어져 남의 살을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남의 살도 덤벙에 철화가 들어가 있다. 색깔도 비슷한데다 크기도 얼추 맞는 것을 골라내 붙여서 완형잔을 만들어 낸 원 주인의 안목이 대단하다는 느김이다. 땜질은 옷칠을 한 것인데 아직은 세월이 짧은 탓인지 검게 변색을 않고 누르스럼한 빛깔이다. 옷칠이 숙성되어 검게 변하면 철화와 어울려 오히려 맛깔스럽지 않을까도 생각되는 점이다. 분청덤벙 요지로는 보성 도촌리와 고흥 운대리가 알려져 있다.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의 초화문은 가는 형태의 것이 운대리 것과 비슷한 양상의 문양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굽이나 약간은 거친 덤벙의 형태를 보면 도촌리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원 소장자도 도촌리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가는 실금만 있어도, 작은 알팀만 있어도 타박이 심한 세상에서 남의 살을 뒤섞은 분청덤벙철화초화문잔편 앞에서 마냥 즐거워하고 있는 내 모습은 정상일까. 정상이 아니더라도 나는 오히려 즐겁기만 하니 이를 어쩌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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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3)<br> 청자흑상감초화문병편청자를 백자로 상상해 보면 이규진(편고재 주인) 송원이라는 사람이 어드메 누구였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몇 장의 소품들을 바라보노라면 맑고 조촐한 필의 속에 속기랄 것이 사뭇 스며있지 않은 것이 좋다. 흔히 세상에 이름 높은 화가의 속기 넘치는 그림에서 받는 역겨움에 비하면 욕심도 거드름도 정말 없는 간결하고 담담한 맛이 소리도 없이 화폭 속에 넘치는구나. 임자 우수절 오수당 주인. 오수당은 전 국립중앙박물관 최순우 관장의 당호다. 송원이라는 사람의 그림 소품 몇 장을 보고 느낌을 붓글씨로 남긴 것이다. 그런데 그림은 몇 장이고 최관장의 글씨는 한 장뿐이니 이를 어쩌랴. 그래 소장가는 최관장의 글씨를 복사해 여러 장을 만든 후 그림 한 장씩에 곁들여 표구를 했다. 근래 이 것 중 한 점을 구했다. 고미술품에 대한 최관장의 글을 몹시 좋아하는 나는 평소 이 분의 글씨를 한 점 갖고 싶었는데 복사이기는 하지만 소원을 이룬 것이다. '죽편'으로 널리 알려진 서정춘 시인은 젊은 후배 시인들이 기념시집을 낼 정도로 시단에서는 듬직하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이다. 이 서시인과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저녁을 먹고는 한다. 지난 번 뵈었을 때 분청인화문접시편 한 점을 드렸더니 그 위에 찻잔을 올려놓고 그림을 그려 보내왔다. 서시인은 물론 화가도 아니고 그림 공부를 해본 적도 없는 분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림은 그림 냄새가 나지 않는다. 최순우 관장의 표현대로라면 속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담담함이 묻어나는 소박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최관장의 글과 서시인의 그림을 보며 도자기에 표현된 문양 중 속기가 없다고 하면 어떤 것이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우선 떠오르는 것이 백자에 청화로 그려진 추초문이다. 18세기 전반 금사리 시기 하얀 바탕에 푸른색의 청화를 아껴 쓴 듯 간결하게 그려진 추초문은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대표적인 조선의 도자기인 동시에 이름 또한 그들이 붙인 것이다. 여하튼 추초문, 즉 가을풀이라고 하면 그 것이 연상되는 의미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감미로운 느낌이다. 하지만 추초문은 통칭이지 개별적인 명칭이 아니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서는 한국 도자기들을 품목별로 기획전시를 하고 도록을 펴낸 것이 20여 권이 넘는다. 그 중 13권째로 나온 것이 <이조의 추초>다. 추초문을 모아놓은 도록이다. 하지만 내용으로 들어가면 추초문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말하자면 백자초화문 호나 병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다. 이로 보아도 추초문은 18세기 전반 금사리 시기에 만들어진 청화백자에 초화문이 들어간 것을 통칭하는 의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추초문은 조선조 청화백자에서 보이는 초화문이다. 그런데 이런 추초문, 아니 초화문이 고려청자에서 보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그러나 청자흑상감초화문병편을 보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푸른색 청자 바탕에 흑상감으로 상감 자체를 아낀 듯 갈대 같기도 한 몇 줄의 가는 선이 조촐하게 새겨져 있다. 푸른 바탕을 흰색으로 바꾸고 흑상감을 청화로 바꾸어 청자를 백자로 상상해 보면 영낙 없는 추초문이자 초화문인 것이다. 최순우 관장과 서정춘 시인의 속기와 관련된 글과 그림, 그리고 청자흑상감초화문병편 속 문양의 속기 없는 무심함을 보고 있노라면 가을 들꽃을 흔들고 가는 가녀린 바람이 내 마음마저 어루만지고 지나가는 느낌이다. 이제 그만 욕심도 탐욕도 내려놓고 무심하게 살라고 가만 가만이 속삭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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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2)<br> 분청상감모란문장군편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이규진(편고재 주인) 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고 예용해 선생의 글을 어디서 본 것인지 기억이 아득하다. 따라서 오래 되다보니 기억의 신빙성도 100% 담보를 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소개를 해보자면 이런 내용이다. 어느 해였던가 일본 시골로 하마다 쇼지를 찾아간다. 하마다라면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론을 가장 작품으로 잘 구현시켰다고 하는 일본의 유명한 근대 도예가. 그런데 만나보니 쓰고 있는 뿔테안경이 너무도 눈에 익은 것이었다. 그래 물어 보았더니 과거 경성을 방문시 구입한 것이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종로 거리를 산책하다보니 어느 허름한 가게 껌벅이는 등불 아래 앉아 안경테를 만들고 있는 노인의 모습이 너무도 진지해 보여 구입을 한 후 계속 사용하고 있다는 설명이었다. 그런 하마다는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작가들이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일본의 풍토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 이것에 대해 질문을 하자 하마다가 이렇게 대답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내 작품이 조선의 이름 없는 도공들이 만든 작품을 뛰어넘는 수준이 되면 그 때 가서 사인을 하겠노라고. 그러나 하마다는 그 후에도 자신의 작품에 사인을 하지는 않았다고 하니 조선 도자기에 대한 흠모가 대단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하마다가 언급한 조선의 무명 도공들. 우리는 이름이 지워진 그들이 만든 작품 앞에서 세월의 간극들 뛰어넘어 감탄과 찬사를 보내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조선의 도자기들이 지닌 장점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 것은 익명성이 주는 자유스러움에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익명성이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인터넷에서 익명성 뒤에 숨어 자행되는 불의와 폭력은 얼마나 사회를 어지럽히던가. 하지만 조선의 무명 도공들의 익명성은 이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들에게는 구지 이름을 숨겨야 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익명성은 순수한 자유와 직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유가 주는 무심함과 일탈과 해학 등 우리 도자기에서는 바로 그 무한대의 상상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점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마도 분청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 도편 한 점이 있다. 분청상감모란문장군편이다. 분청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꽃은 모란문과 연화문이다. 이 꽃들은 흑백상감으로 처리한 것도 있고 면상감으로 장식한 것도 있다. 조화나 박지나 철화도 있다. 꽃 모양도 다종다양해 어떤 것은 모란문이나 연화문이라고 꼭 집어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변형된 것들도 많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분청상감모란문장군편의 모란문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모습이다. 도공은 어떻게 이런 꽃 모양을 생각한 것일까. 익명성 뒤에 숨은 자유가 주는 무한대의 상상력이 이런 꽃을 만들고 창조할 수 있었던 것일까. 분청상감모란문장군편은 몸체의 일부만 남아 있는데 배가 부르다. 장군이 원래 둥근 형태이니 당연한 일이다. 몸체 전체에는 인화문이 촘촘히 찍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모란문을 상감하고 있다. 모란문의 줄기와 잎과 꽃을 상감하고 있는 것인데 이 모두가 면상감이다. 이 정도면 흑백상감을 사용할 만도 한데 백상감 뿐인 것도 특이하다. 그러나 이 분청상감모란문장군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아무래도 꽃 모양이다. 여섯 장의 꽃잎이 씨방을 둘러싸고 벌려 있는데 꽃잎이라기보다는 흡사 팔랑개비를 보는 느낌이다. 무심함이 주는 천진함, 그것이 아니라면 무명 도공의 손에서 어떻게 이런 순진무구한 모란꽃이 빚어질 수 있었을 것인가. 참으로 신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꽤 많은 도편에 탐닉을 해왔고 도자기 관련 책자들도 아파트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이런 모양의 모란문은 일찍이 실물은 물론이거니와 도록에서도 만나 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특이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저러나 하마다 쇼지를 생각하면 함께 활동한 야나기 무네요시를 비롯해 버나드 리치, 가와이 간지로, 아사카와 다쿠미와 노리타카 형제 등을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모두가 조선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이다. 이들의 민예론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옮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우리 문화와 도자기에 대해 가졌던 애정만큼은 결코 폄하되거나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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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1) <br>청자상감팔각형향로편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규진(편고재 주인) 근래 중고서점에서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이라는 책을 구했다. 저자인 요나스 요나손에 대해서 아는 바가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 대해서도 소설이라는 것 외에는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구한 것은 오로지 제목이 주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우선 100세라는 흔치 않은 나이도 나이지만 왜 하필이면 창문으로 도망을 쳤으며, 왜 도망을 치지 않으면 안 되었으며, 어디로 도망을 쳤을까 등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궁금증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궁금증과 호기심은 나에게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집에 와 판권을 보니 초판을 찍은 지 2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100쇄본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100쇄를 찍은 해로부터도 7년이 또 경과되었으니 그동안 얼마나 더 많은 책을 찍었을지 가늠하기조차 힘든 일이었다. 이 모든 것이 제목이 주는 궁금증 때문이었다고 하면 이는 너무도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고미술 애호가 중에도 궁금증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어디에 무슨 물건이 있다고 하면 불원천리 마다않고 달려가 눈 맞춤이라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나도 고미술을 좋아는 하지만 그런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재미난 도편 자료가 있다고 하면 귀기 솔깃해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청자상감팔각형향로편 또한 그런 궁금증 때문에 만나게 된 것이다. 몇 년 전 인사동엘 들렸더니 지인들이 어느 가게에 재미난 도편이 있다고 귀띰을 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 이야기를 듣고 궁금증이 발동해 찾아가 만난 것이 바로 이 청자상감팔각형향로편이다. 도편은 팔각 중 한 면만 남은 것으로 양쪽에 양각의 연주문이 있고 사각의 백상감 테두리 안에 흑백상감의 모란절지문을 배치 액자 속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상감팔각형향로편의 원형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현재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는 호림박물관의 청자상감노국문팔각향로와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상감국모란문팔각형향로가 있다. 두 점은 같은 형식이지만 괴수형 다리가 있는 호림박물관 소장품이 조금 더 상품으로서 기준이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 이를 살펴보면 팔각형 입술 부분에는 평평한 전이 달려 있고 바닥에는 네 개의 귀면이 장식된 다리가 있다. 몸체의 각 면은 백상감 선과 연판문으로 구획 후 그 안에 갈대와 국화를 번갈아 가며 흑백상감으로 장식하고 있다. 각 면의 모서리에는 양각의 연주문을 부착하고 있으며 전에는 백상감의 선문과 당초문을 넣고 있다. 이러한 양식의 청자상감팔각형향로는 고려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기형으로 조선 전기에도 청자나 분청에서 보이고 있어 그 지속적인 연관성이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청자상감팔각형향로편은 앞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좌우로 양각의 연주문이 있고 사각의 백상감 안에 흑백으로 모란절지문을 상감하고 있다. 잎과 줄기는 흑상감이고 활짝 핀 꽃과 꽃봉오리는 백상감이다 꽃잎은 넓직한 면상감을 보는 느낌이다. 유약은 담녹색으로 그 위에 새겨진 모란절지문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시킨다. 없어진 부분이 너무도 많고 남은 부분도 유가 있는 등 흠이 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그대로의 모습만으로도 감상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궁금증과 도편의 만남. 이 도편을 보고 있노라면 궁금증은 결국 호기심이고 호기심이야말로 삶을 역동적이게 하는 추진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궁금증 때문에 만난 청자상감팔각형향로편과 그 궁금증 때문에 또 만나게 된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도편과 책이라는 이질적인 존재가 궁금증이라는 호기심으로 인해 다 내 것이 되었으니 그 인연이 참으로 재미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책에 대해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제목이 주는 궁금증과 호기심에 버금갈 정도로 내용이 재미난 소설이다. 작가의 기상천외한 상상력과 차고 넘치는 유모어 감각은 이 책의 장점인데 그렇다고 해서 결코 가벼운 읽을거리만은 아니다. 내용은 자신의 백세 축하연이 준비되고 있는 양로원 창문을 뛰어넘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모험을 떠나는 노인의 이야기다. 노인이 한 발짝씩 내딛을 때마다 마주치는 인물들과 기상천외 하면서도 어처구니 없는 사건들은 나이가 들고 힘이 빠져도 전혀 주눅 들지 않는 열정을 느끼게 한다. 지난 시절을 돌아보아도 노인의 삶 자체가 그런 좌충우돌의 여정이여서 더욱 흥미롭다. 푹푹 찌는 이 무더운 여름에 책을 통해 재미를 느끼며 더위를 잊어보고 싶다면 한 번쯤 일독을 권해보고 싶은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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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50)<br> 청자사자머리편동물이 웃지 않는다는 속설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 사이에서 있었던 치열한 논쟁 중 하나가 인물성동이론논쟁이다. 인성(인간의 성품)과 물성(사물의 성품, 특히 금수 도는 동물의 성품)이 같으냐 다르냐를 두고 다툰 것인데 같다고 본 쪽을 낙론, 다르다고 본 쪽을 호론이라고 해 이를 호락논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논쟁은 철학적 관점뿐이 아니라 오랜 관계를 유지해온 저무는 명과 의리를 지키느냐 아니면 오랑캐로 불리는 떠오르는 청과 실리를 챙기느냐 하는 것과도 관련되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따라서 인성과 물성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이 논쟁은 서로의 입장이 너무도 팽팽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하면 인간과 동물은 다른 점이 없는 것일까.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일찍이 인간을 웃는 동물로 규정 웃음이야말로 호모사피엔스(인간)와 짐승을 구분 짓는 중요한 단서라고 갈파 인간만이 다양한 웃음을 표현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라고 역설한 바 있다. 쉽게 말해 인간만이 웃을 줄 알고 동물은 웃을 줄 모른다는 이야기다. 이 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다. 웃는다는 것은 결국 즐겁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험난한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때로 웃을 수 있는 즐거움마저 없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고단하고 삭막한 것이겠는가. 정말이지 인간만이 동물과 달리 웃을 수 있는 존재라면 이는 축복이요 큰 은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웃음이 없는 동물도 울기는 한다.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종종 듣는 이야기다. 불가피한 사정으로 헤어진 후 어미를 찾는 새끼나 새끼를 찾는 어미의 애절한 울음소리도 가끔은 들을 수 있다. 슬픔과 기쁨 중 동물도 슬픔은 느끼고 울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희로애락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는 울음은 알아도 웃음을 동물이 모른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납득이 잘 가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학들이 여러 가지 증거들을 통해 밝혀낸 사실이니 믿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웃음은 사실 건강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웃음은 혈관을 이완시켜 혈류량을 늘려 혈관 건강에 도움을 준다고 한다. 웃을 때는 얼굴 근육 80가지 중 16개의 안면근육과 몸에 있는 230여개의 근육이 동시에 움직인다고 하니 자연적인 전신 운동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건강을 위해서는 수시로 웃고 볼 일이다. 그런데 내 자신을 가만히 돌이켜 보면 웃음에는 별로 소질이 없는 것 같다. 타고난 유전자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자라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소리를 내어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어머니와 고모들도 하하호호 숨이 넘어 갈 정도로 허리를 잡고 웃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집은 결국 웃음이 차고 넘치는 집안은 못 되었던 것 같다. 동물은 웃지 않는다고 하는데 여기 예외가 있다.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는 도편 중 청자사자머리편이 그것이다. 머리 부분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기형은 알 수 없지만 대체적으로는 기존의 청자사자향로를 따르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이런 청자사자향로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뉴개향로가 널리 알려져 있다. 뚜껑 상단에 사자가 조각된 원통형 향로로서 밑짝은 괴수머리의 삼족 다리를 하고 있다.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나온 3만 여점의 청자 중에도 청자사자장식향로가 있다. 삼족다리가 있는 밑짝과 사자머리로 향이 나오게 한 윗짝이 있는데 사자의 모양이 너무도 보지 못하던 이질적인 모습이어서 이채롭다. 신안선 발굴 유물 중에도 향로는 아니지만 사자 모양의 고려시대의 청자연적이 있는데 모양은 청자사자머리편과 가장 근접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청자사자머리편은 목 위 머리 부분만 남아 있어 아쉽다. 하지만 12세기 전성기의 비색이 완연하며 갈기와 눈 코 그리고 벌린 입과 이빨이 선명하면서도 깔끔하다. 눈동자는 점을 찍은 듯한 검은색으로 액센트를 주고 있다. 한 마디로 잘 생긴 사자머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청자사자머리편은 그런 생김새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사자가 입을 딱 벌리고 웃고 있는 것이다. 그 것도 미소 정도가 아니라 마음껏 온몸으로 웃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청자사자머리편을 보고 있노라면 괜시리 나도 마음이 즐거워지며 기분이 좋아진다. 혈통 때문인지 비교적 웃음에 서툰 내게 이 청자사자머리편은 나를 웃음 속으로 빠져들게 하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겠는가. 청자사자머리편 앞에서만은 동물이 웃지 않는다는 속설은 따르지 말아야 할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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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9) <br>백자흑상감화문편정약용의 죽란시사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초등학교 동기생들이 일 년이면 한 두 번씩 모인다. 경조사가 있으면 더 모이기도 한다. 모이는 인원은 대략 20여명. 한 학년에 한 반씩 밖에 없었던 작은 시골 학교였으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모임의 2/3정도가 여성들이라는 사실이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들은 대개가 지나간 시절의 추억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6년을 한 반에서 동거동락한 친구들로서 함께 어울려 순진무구하기만 했던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일이 그렇게도 유쾌하고 기분들이 좋은 모양이다. 이 초등학교 친구들이 얼마 전 백령도를 다녀왔다. 코로나 때문에 모임이 없었는데 약간 풀리는 기미가 보이자 잽싸게 단체로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참가를 못했다. 기침 때문에 내 자신이 불편한데다 친구들에게 누를 끼질 것만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친구 중 한 명이 여행을 다녀온 후 도라지와 은행 등 기침에 좋다는 약재들을 직접 달여 팩으로 만들어 한 박스를 보내왔다. 고맙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 정성 때문에라도 기침이 멎고 가슴이 시원스럽게 펑 뚫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초등학교 동기생들의 모임도 좋지만 모임,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모임을 이야기 하자면 아무래도 정약용의 죽란시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죽란시사 규약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ㅇ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ㅇ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ㅇ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ㅇ 초가을 서늘할 때 연못의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ㅇ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ㅇ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ㅇ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o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해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데 불편이 없도록 한다. 정약용의 죽란시사 모임은 참외가 익을 때와 큰 눈이 내린 때를 제외하면 모두가 꽃이 필 때다. 꽃 피는 시절에 정자나 전망 좋은 곳에 지인들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담소를 나누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상상만으로도 그 정겨운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이다. 꽃과 관련해 근래 백자흑상감화문편을 한 점 구했다. 고려청자의 특징 중 하나인 상감은 분청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백자에서는 간혹 보이는 흑상감이 유일하다. 청자와 분청에서는 흑백상감이 보이지만 백자에서는 흑상감만 보이는 것은 백자의 바탕 자체가 흰색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흑상감은 백자 바탕에 무늬를 파낸 후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붉은색의 흙인 자토를 감입 초벌구이를 한 후 그 위에 유약을 씌워 구워 만든 자기다. 그러나 이런 흑상감도 백자에서는 조선 초기에서만 보일 뿐이다. 초기에서도 관요 이전에 많이 보일 뿐 관요 시기에는 소량이 보이다 사라진다. 여하튼 흑상감은 초기 백자에서 청화와 더불어 유일하게 문양을 장식하는 기법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근래 구입한 백자흑상감화문편의 기종은 무엇이며 흑상감의 무늬는 무슨 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을까. 백자흑상감화문편은 아래 위와 좌우가 모두 잘려나가 기종을 추정해 보기가 쉽지 않다. 내 추측으로는 안쪽에도 유약이 살아 있고 외면에 꽃무늬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어림잡아 큰 제기의 일종인 세의 옆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단언하기는 어렵다. 세는 큰 대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제례 때 손을 닦는 제기의 일종이다. 백자흑상감화문편의 남은 부분을 보면 아래위로 선을 두르고 그 사이에 줄기에 매달린 큼직한 꽃문양을 한 점 새기고 있다. 유약은 거칠고 꽃을 새긴 흑상감은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한 느낌이다. 하지만 회색빛 바탕과 어울려 검은색의 꽃문양이 소박하면서도 대범하고 엉성해 보이면서도 신비로운 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아마도 흑상감으로 이런 문양이 없는데다 꽃의 크기 또한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크다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면 정약용의 죽란시사처럼 꽃 필 때 모이는 아름다운 모임은 불가능한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평생 공식적인 모임에 참가를 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동기생 모임도 날자나 일정한 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형편대로 모이는 것이니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떠들고 하는 것들이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꺼려 온 것이다. 그런 가운데 딱 하나 대여섯 명이 모여 저녁을 먹는 정기적인 모임이 있다. 매월 첫째 주 월요일 모임인데 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의 발단은 원로 사진작가이신 육교수님의 발의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아시고 오래 못 보면 어떻게 지내나 걱정이 되니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모임도 어느새 근 20여년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모임을 발의했던 육교수님이 연세가 많으신 데다 건강이 안 좋아 일 년 전부터 거동을 못해 모임이 반 조각이 나버렸다는 사실이다. 죽란시사에 비견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학과 예술과 인생을 논하던 즐겁던 모임이 시들해지니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평소 내게 도자기에 대한 글쓰기를 강력히 권했던 육교수님이 건강이 안 좋아 모임도 모임이지만 연재 중인 <도자의 여로>를 못 보고 계신 점은 나로서는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다. 어서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해 다시 뵐 수 있기만을 이 자리를 빌어 간절히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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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8)<br> 분청제기보뚜껑편충효동인지 아닌지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편을 지인의 핸드폰에서 사진으로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굽에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하는 점이었다. 하지만 실물을 대하고 보니 굽이 아니라 제기 뚜껑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굽에 문양이 들어갈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속단은 금물이라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하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은 사라졌지만 문양이 아름답고 기형이 특이한 것만은 사실이다. 근래 만난 도편치고는 여간 흥미로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제기 중에는 보가 있다. 땅은 네모졌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반영 사각형으로 만들어지며 하늘은 둥글다는 의미를 지닌 둥근 형태의 궤와 짝을 이룬다. 따라서 보는 음의 성격인 반면 궤는 양의 성격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제기들은 동으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나 동 대신 도자기로 만든 경우도 더러 있다. 다른 제기들도 마찬가지지만 도자기로 만든 보는 흔치 않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있는 분청이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외에는 흔치 않은 기종이라 알려진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 저간의 사정이었다. 그러나 충효동 분청사기요지에서 도편들이 대거 출토되고 호림박물관이 2010년 개최한 '분청사기제기'전에서 무려 12점의 보를 소개함으로서 주목을 끈 바 있다. 제기보는 벼와 기장 등 마른 제수물을 담아 진설하는 용도로 쓰이며 도자기에서도 보이나 원래는 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형은 외면이 네모나고 내면은 둥근 형태다. 뚜껑에는 네모진 산형장식이 있으며 두 곳에 손잡이형 고리가 달려 있는 것이 있다. 동체의 구연부 네 곳에는 괴수형의 머리가 있는 것이 있으며 굽다리는 반원형으로 여러 곳이 파여 있다. 문양은 상감으로 뇌문 파수문 당초문 등이 장식된다. 분청제기보뚜껑편을 처음 본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지인이 보낸 준 문자 메시지 사진에서였다. 처음 본 순간 굽에 어떻게 이처럼 아름다운 문양이 들어갈 수 있을까 .놀라웠다. 그러나 그 것은 지레짐작이었을 뿐 굽에 그런 문양이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실물을 보자 그 것은 바로 판명이 되었다. 분청제기보는 일반적으로 밑짝과 윗짝의 양식이 비슷한 모양이다 보니 윗짝인데도 불구하고 밑짝의 굽처럼 보였던 것이다. 분청제기보뚜껑편의 내면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무문이다. 장식과 문양은 외면에서 볼 수 있는데 백상감의 무늬들이 여간 정교한 것이 아니다. 남은 부분을 살펴보면 뚜껑에는 흡사 굽처럼 생긴 사각의 산형이 있고 여기에 연결된 고리 흔적이 있다. 산형 밖으로는 약간 경사져 내려가던 기형이 끝 부분에서 안으로 꺽여 마무리 되고 있다. 문양으로는 사각의 산형 안에는 화문과 원문을 그 밖의 경사진 부분과 꺽여 마무리된 부분은 당초문과 뇌문 등을 장식하고 있다. 특히 사각의 산형 안의 화문과 원문은 상감이 무척 정교하면서도 아름답다. 분청제기보로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의 분청사기덤벙보가 있다. 뚜껑은 없고 몸체만 있는 것이지만 일본인들이 다완과 관련해 좋아하는 덤벙분청이다보니 일찍부터 유명세를 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는 분청제기보뚜껑편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으로 여기서는 논외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청사기덤벙보 말고도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는 분청제기보뚜껑편과 비슷한 성격의 분청사기선상감뇌문보도 한 점이 있다. 하지만 학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아무래도 충효동에서 출토된 분청사기뇌문보편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분청사기보편은 우동리에서도 출토된 것도 있지만 이 것은 양식이 달라 아무래도 분청제기보뚜껑편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충효동과 관련이 있지 않나 추측된다. 호림미술관에서 선 보였던 분청사기상감보 12점도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충효동과 더 연관이 있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충효동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제기들이 보이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기본이 되는 것은 보와 궤이며 여러 가지 준과 작과 상형제기들이 출토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궤 뚜껑 안에 최상이라는 사기장의 이름이 보이는 것도 있다는 점이다. 분청제기보 정도라면 국가적인 제례 정도가 아니면 일반에서는 사용을 할 수가 없는 기물이다. 그러니 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분청제기보뚜껑편 또한 많은 부분이 손상된 도편이라고는 해도 그런 점에서 본다면 귀하기는 마찬 가지다. 도편에 관심을 가져온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이런 '분청제기보뚜껑편'은 나로서도 처음 만나 본 것이다. 그러니 잠시나마 뚜껑을 몸체의 굽으로 오인한 경우도 생길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깨진 부분을 잘 살펴보면 설익어 흙 기운이 많이 남아 있는 부분이 보인다. 그런 정황들로 미루어 보아 이 분청제기보뚜껑편은 도요지에서 나온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그 고향이 충효동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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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7)<br>청자흑백상감병편박수근의 그림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내 고등학교 시절은 꿈도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였다. 가정 형편을 고려해 일찍 진학을 포기하고 나니 할 일이 없었다. 더구나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포기한 학생이 할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 암울한 시절에 그래도 내게 위안을 주었던 것이 있었다면 다방면에 걸친 책 읽는 습관뿐이었다. 하지만 책 사볼 돈 또한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 신간서점 주인의 양해를 구한 후 책을 빌려다 보았다. 빌려 온 책은 표지를 싸서 곱게 본 후 돌려주어야 했다. 이 때의 습관으로 인해 나는 지금도 내 책에 낙서나 메모를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때 익힌 속독의 기술 덕분에 지금도 남보다 조금은 책을 빨리 볼 수 있는 편이다. 고3 때 KBS 라디오 게임에 문학 부문 학교 대표로 나가 볼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당시의 독서 덕분이었다. 하지만 새 책을 취급하는 곳이라고는 하지만 읍내의 작은 책방에 입수되는 책들은 한계가 있어서 내 독서욕을 채우기에는 미흡했다. 따라서 오죽하면 당시 유일한 여성지였던 '여원'잡지까지 매월 구독을 하고는 했었다. 여성지라고는 하지만 교과서 크기의 여원은 당시만 해도 꽤 괜찮은 인문학적 내용들이 실리고는 했었다. 그 중 기억나는 것이 매월 화보에 그림 한 점 씩을 소개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박수근 화백의 그림을 처음 본 것도 이 책에서였다. 잎 떨군 앙상한 고목나무 밑에 아이를 등에 업은 아주머니가 서 있고 그 앞을 지나가는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있는 여인 등 전형적인 박수근 스타일의 그림이었다. 그런데 당시 내가 특이하다고 생각한 것은 일반적인 그림들에서 볼 수 없었던 마티엘 때문이었다. 물감을 여러 번 덧발라 화강암 같은 마티엘을 나타내는 것이 박수근 그림의 장점인데 이 그림에서도 그런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고목과 애기를 업은 아주머니와 광주리를 이고 지나가는 여인을 그린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내게는 흡사 점을 찍어 만든 듯한 느낌으로 다가왔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박수근이 점묘법 화가는 아니다. 그러나 덧칠을 하고 덧칠을 하는 그 기법은 점묘법과 상통하는 점이 아주 없다고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박수근의 그림은 그린다는 느낌보다는 덧칠을 하다 보니 찍는다는 느낌이 더 강렬하기 때문이다. 그런 느낌은 이대원의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서양화에서는 점을 찍어 그림을 그리는 점묘법이라는 것이 있다. 10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신인상파 화가들이 사용한 기법으로 조루주 쇠라가 처음 개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박수근이나 이대원이 이 점묘법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물감을 덧칠하는 그 기법은 점묘법과 아주 동떨어진 것이라는 생각되지 않는다. '청자흑백상감주병편'은 기록을 보니 1919년에 답십리에서 구입해 두었던 것이다. 입술 일부가 달아나고 밑부분이 뭉텅 잘려나가 상반신만 남은 불구의 병편이다. 주구는 약간 밖으로 말린 듯 마무리를 하고 있으며 목은 상당히 긴 편이다. 유약은 담녹색에 작은 빙렬들이 보인다. 그런데 이 병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상감의 문양이다. 그린 듯 문양을 파내고 상감을 한 것이 아니라 특이하게 무언가 뾰죽한 것으로 점을 찍듯 파낸 후 흑백으로 상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양은 확실치 않지만 고려청자에서 많이 보이는 국화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문양만을 놓고 보면 퇴화기법 같기도 하지만 깨진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감을 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세상의 모든 만물은 분해하고 분해하면 결국은 원자로 귀결된다. 그처럼 그림의 3대기본인 점선면 또한 따지고 보면 결국은 점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닐까. 이 청자흑백상감병편을 만든 도공은 그런 사물의 원리를 체득하고 실험적으로 상감에 적용해 본 것일까. 그럴 리야 없겠지만 꿈도 희망도 없던 좌절의 시대에 내게 신기하게 느껴졌던 박수근의 그림처럼 특이한 문양의 청자흑백상감병편 또한 오늘의 내게는 어쩔 수 없이 너무도 흥미롭게 다가오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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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6) <br>백자호편청자고 분청이고 백자고간에 이규진(편고재 주인) 기침을 많이 하는 터라 선배의 권유로 체질검사를 받아 보았더니 목양체질로 나왔다. 이 체질은 근본적으로 폐가 약하다고 한다. 내 경우에 꼭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체질에 따른 음식 조절도 필요하다고 하는데 나는 육식을 많이 해야 하고 해물은 피하고 잎채소도 멀리 하고 뿌리채소를 가까이 해야 한다고 한다. 해물과 잎채소를 피해야 한다고 하니 갑자기 먹을 음식의 태반이 줄어든 느낌이다. 초밥과 회 등을 좋아 하고 특히 김을 좋아 해 밥상에서 떠날 날이 없었는데 계속 복용시 몸에 안 좋다고 하니 이제는 가급적 피해 보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하면 체질에 맞는 도자기의 선호도는 없는 것일까. 도자기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좋아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이런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하지만 청자면 청자, 분청이면 분청, 백자면 백자를 가려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좀 더 세분화된 취향 때문일 것이다. 통설에 의하면 대개 초보자는 청자로 시작해 연륜이 깊어지면 백자로 마무리 되는 것이 순서라고 한다. 정치한 청자는 그 아름다움이 아무래도 공예적인 느낌이라고나 할까. 그에 반해 분청을 거쳐 백자에 이르면 정치한 면은 줄어들지만 대체로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느껴진다. 그런 편안한 느낌이 정치한 청자보다 더 친근한 느낌으로 다가오기 때문일까. 여하튼 내 개인적인 느낌으로도 청자보다는 백자에서 더 그윽한 울림이라고 할까 깊은 맛이 느껴지고는 한다. 백자의 기종도 여러 가지지만 근래 가장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은 달항아리다.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이 백자달항아리는 크기가 40Cm가 넘는 대형이다보니 한 번에 못 만들고 아래 위를 따로 만들어 붙인다. 그런데 이 백자달항아리는 무문이다. 색감도 일색이 아니라 여러 가지 백색을 섞어놓은 느낌이다. 기형도 반듯하지 않고 좌우가 약간씩 일그러져 있다. 한마디로 완벽에 대한 조급성이나 초조함 같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짧은 입술은 사선으로 작은 각을 이루며 맵시 있게 꺽인 항아리는 입술 아래부터 목 없이 자연스러운 곡선을 그리며 벌어지다 몸체 중앙의 접합부분을 지나 다시 좁아져 입술 지름과 거의 비슷한 크기의 굽으로 마무리 된다. 설명을 해놓고 보면 굽이 좁아 불안정해 보일 것 같은데 실물을 놓고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고 의젓하고도 듬직해 보인다. 왜 그런 것인지, 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여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백자호편은 경기도 광주시 실촌읍 신대리에서 나온 것이다. 신대리 백자가마터는 17세기 중반경에 관요가 있던 곳이다. 따라서 시기로 보아 백자달항아리가 만들어지기 직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백자호편은 이른 시기 달항아리처럼 입술이 예각으로 벌어지며 꺽이지를 않고 말려있다. 이처럼 입술이 말리는 현상은 15세기부터 17세기까지에서 보이는 백자항아리들의 특징인데 이는 중국 도자기에서는 볼 수 없는 조선 특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호편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신대리 가마터가 고향이다. 신대리 하면 곤지암에서 개울 건너로 보이는 마을이다. 무려 29곳이나 되는 대단위 백자가마터가 운집한 곳이다. 물론 29호처럼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초에 운영된 가마터도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은 17세기 것들이다. 따라서 광주 일대의 17세기 관요 가마터들 중에서는 가장 많은 수량을 자랑한다고 할 수 있다. 이곳은 출토된 간지명과 <승정원일기>의 관요 이설 기록 등으로 보아 1665년에서 1676년에 운영된 가마터들로 추정되고 있다. 많은 가마터들 중 두 곳이 발굴되었지만 청화는 발견되지 않고 철화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임란 이후 청화 대용으로 철화가 많이 사용된 사실을 입증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백자호편은 과거 신대리 김해김씨 묘역 인근에서 만난 것이다. 회색이 많이 가미된 백색에 굽은 모래받침이다. 구연은 외반 되며 말린 형태다. 조선 초기부터 시작된 이런 구연부가 말린 형식은 신대리에 와 줄어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왜냐하면 달항아리에서 보이듯 17세기 후기로 가면 입술은 사선으로 작은 각을 이루며 맵시 있게 꺽이는 것이 보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18세기로 가면 구연부는 직립을 하게 된다. 백자호편은 많은 부분이 깨어져 달아나고 없기도 하지만 남은 부분 또한 굽는 과정에서 주저앉아 구연부와 몸체가 안바닥에 들러붙어 입맞춤을 하고 있는 일그러진 모습이다. 몸체 옆에는 작지만 다른 그릇의 입술도 일부 붙어있다. 태토의 질이나 수비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참으로 안쓰러운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목양 체질이라고 해서 음식을 가려먹게 되었지만 도자기까지 구지 이것저것 가려서 좋아하고 싶지는 않다. 물론 개인적으로 청자보다는 백자가 더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사실이지만 청자는 또 청자 나름의 미감과 매력이 있는 것이다. 문제는 청자고 분청이고 백자고간에 두루두루 좋아할 수 없는 주머니 사정이 문제지 체질별로 가는 것도 아닌데 도자기까지 어찌 편식을 해야 할 이유가 있으랴. 백자호편을 두고 안쓰러움 때문인지 오늘은 너무도 쓸데없는 사설이 길어진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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