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정약용의 죽란시사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초등학교 동기생들이 일 년이면 한 두 번씩 모인다. 경조사가 있으면 더 모이기도 한다. 모이는 인원은 대략 20여명. 한 학년에 한 반씩 밖에 없었던 작은 시골 학교였으니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재미있는 것은 모임의 2/3정도가 여성들이라는 사실이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들은 대개가 지나간 시절의 추억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6년을 한 반에서 동거동락한 친구들로서 함께 어울려 순진무구하기만 했던 동심으로 돌아가 보는 일이 그렇게도 유쾌하고 기분들이 좋은 모양이다. 이 초등학교 친구들이 얼마 전 백령도를 다녀왔다. 코로나 때문에 모임이 없었는데 약간 풀리는 기미가 보이자 잽싸게 단체로 여행을 다녀온 것이다. 그러나 나는 참가를 못했다. 기침 때문에 내 자신이 불편한데다 친구들에게 누를 끼질 것만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그랬더니 친구 중 한 명이 여행을 다녀온 후 도라지와 은행 등 기침에 좋다는 약재들을 직접 달여 팩으로 만들어 한 박스를 보내왔다. 고맙고 감사할 뿐만 아니라 그 정성 때문에라도 기침이 멎고 가슴이 시원스럽게 펑 뚫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초등학교 동기생들의 모임도 좋지만 모임, 그중에서도 아름다운 모임을 이야기 하자면 아무래도 정약용의 죽란시사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그 죽란시사 규약 중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ㅇ 살구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ㅇ 복숭아꽃이 처음 피면 한 번 모인다.
ㅇ 한여름에 참외가 익으면 한 번 모인다.
ㅇ 초가을 서늘할 때 연못의 연꽃을 구경하러 한 번 모인다.
ㅇ국화꽃이 피면 한 번 모인다.
ㅇ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한 번 모인다.
ㅇ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꽃을 피우면 한 번 모인다.
o 모일 때마다 술과 안주, 붓과 벼루 등을 준비해 술을 마시며 시를 읊는데 불편이 없도록 한다.
정약용의 죽란시사 모임은 참외가 익을 때와 큰 눈이 내린 때를 제외하면 모두가 꽃이 필 때다. 꽃 피는 시절에 정자나 전망 좋은 곳에 지인들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담소를 나누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상상만으로도 그 정겨운 풍경들이 손에 잡힐 듯한 느낌이다.
꽃과 관련해 근래 백자흑상감화문편을 한 점 구했다. 고려청자의 특징 중 하나인 상감은 분청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백자에서는 간혹 보이는 흑상감이 유일하다. 청자와 분청에서는 흑백상감이 보이지만 백자에서는 흑상감만 보이는 것은 백자의 바탕 자체가 흰색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백자흑상감은 백자 바탕에 무늬를 파낸 후 산화철이 많이 함유된 붉은색의 흙인 자토를 감입 초벌구이를 한 후 그 위에 유약을 씌워 구워 만든 자기다. 그러나 이런 흑상감도 백자에서는 조선 초기에서만 보일 뿐이다. 초기에서도 관요 이전에 많이 보일 뿐 관요 시기에는 소량이 보이다 사라진다. 여하튼 흑상감은 초기 백자에서 청화와 더불어 유일하게 문양을 장식하는 기법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근래 구입한 백자흑상감화문편의 기종은 무엇이며 흑상감의 무늬는 무슨 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었을까.
백자흑상감화문편은 아래 위와 좌우가 모두 잘려나가 기종을 추정해 보기가 쉽지 않다. 내 추측으로는 안쪽에도 유약이 살아 있고 외면에 꽃무늬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어림잡아 큰 제기의 일종인 세의 옆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단언하기는 어렵다. 세는 큰 대반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인데 제례 때 손을 닦는 제기의 일종이다. 백자흑상감화문편의 남은 부분을 보면 아래위로 선을 두르고 그 사이에 줄기에 매달린 큼직한 꽃문양을 한 점 새기고 있다. 유약은 거칠고 꽃을 새긴 흑상감은 정교하지 못하고 투박한 느낌이다. 하지만 회색빛 바탕과 어울려 검은색의 꽃문양이 소박하면서도 대범하고 엉성해 보이면서도 신비로운 것이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아마도 흑상감으로 이런 문양이 없는데다 꽃의 크기 또한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크다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면 정약용의 죽란시사처럼 꽃 필 때 모이는 아름다운 모임은 불가능한 것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평생 공식적인 모임에 참가를 해본 적이 없다. 초등학교 동기생 모임도 날자나 일정한 룰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형편대로 모이는 것이니 공식적인 모임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이 떼로 몰려다니며 떠들고 하는 것들이 생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꺼려 온 것이다. 그런 가운데 딱 하나 대여섯 명이 모여 저녁을 먹는 정기적인 모임이 있다.
매월 첫째 주 월요일 모임인데 주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이 모임의 발단은 원로 사진작가이신 육교수님의 발의에 의한 것이었다. 내가 혼자 있는 것을 아시고 오래 못 보면 어떻게 지내나 걱정이 되니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보면 어떻겠느냐고 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 모임도 어느새 근 20여년이 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모임을 발의했던 육교수님이 연세가 많으신 데다 건강이 안 좋아 일 년 전부터 거동을 못해 모임이 반 조각이 나버렸다는 사실이다. 죽란시사에 비견할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문학과 예술과 인생을 논하던 즐겁던 모임이 시들해지니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평소 내게 도자기에 대한 글쓰기를 강력히 권했던 육교수님이 건강이 안 좋아 모임도 모임이지만 연재 중인 <도자의 여로>를 못 보고 계신 점은 나로서는 여간 속상한 일이 아니다. 어서 하루 빨리 건강을 회복해 다시 뵐 수 있기만을 이 자리를 빌어 간절히 빌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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