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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독후감 공모전 시상식사단법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는 한국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유공자이며,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하게 건국공로훈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수훈하신 헐버트(Homer B. Hulbert) 박사 일대기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독후감 공모전(2020년) 시상식을 개별 시상 방식으로 거행했다. 이번 독후감 공모전의 무궁화상(국가보훈처장상) 수상자 김기도 님은 그의 작품〈나를 조선 땅에 묻어주오〉를 통해 헐버트 박사를 단순한 한국 독립 운동을 넘어 현재 대한민국이 당면한 미래 문제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한 숨겨진 독립운동의 거두(巨頭)라고 평가했다. 그 외 백두상(기독교대한감리회 회장상) 2명, 한라상(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상) 3명, 아리랑상(서울YMCA 회장상) 5명이 수상했다. 시상식은 정부의 코로나 방침에 따라 세 차례에 걸쳐 개별 시상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수상자는 다음과 같다. 독후감 공모전(2020년) 수상자 명단 무궁화상(국가보훈처장상) ---------- 김기도(디자이너/만화제작자) 백두상(기독교대한감리회 회장상) --- 김다혜(이화여자대학교 국문학과 4학년) 외 1인 한라상(독립유공자유족회 회장상) --- 곽영숙(초등학교 방과후 교사) 외 2인 아리랑상(서울YMCA 회장상) ------- 김 영규(회사원-굿모닝이엔씨) 외 4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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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자 을사늑약 115주년(11월 17일)사단법인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회장 김동진金東珍)는 을사늑약(1905년) 115주년을 맞아 고종 황제와 대미 특사 헐버트(Homer B. Hulbert)가 을사늑약을 막아보고자 분투한 내용이 담긴 < 뉴욕타임스 > 1905년 12월 13일 자와 14일 자 기사 전문을 발굴하여, 최초로 기사 원문과 번역문을 공개합니다. 이 기사들에서 고종 황제가 을사늑약은 자신이 서명하지 않았기에 무효라고 선언하였음이 밝혀졌다. 더욱이 대미 특사 헐버트를 통해 미국을 설득해서라도 을사늑약을 막아보고자 최선을 다했음이 밝혀졌다. 고종에 대한 평가는 다양합니다. 망국의 군주로 비난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종의 을사늑약을 저지하기 위한 노력은 평가되어야 합니다. 또한, 이 기사들에서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헐버트의 한국 주권수호를 위한 충정이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헐버트는 최초의 한글 교과서를 저술하며 잠자고 있던 훈민정음을 깨운 한글자강운동의 선구자이자, 대한민국 역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건국훈장과 금관문화훈장 두 훈장을 수훈한 민족의 은인입니다. 이번에 발굴하여 공개하는 기사는 < 뉴욕타임스 > 1905년 12월 13일 자 < 대한제국 조약을 부인하다(Korea Repudiates Treaty) >와 14일자 < 대한제국 황제의 특사, 미국 국민에 호소(Appeals to the Public for Emperor of Korea) >입니다. 헐버트 특사 파견 배경 고종 황제는 1905년 10월 을사늑약을 막아보고자 일본 몰래 헐버트를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였습니다. 특사 파견은 헐버트를 통해 고종의 친서를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에게 전달하면서 일본의 보호조약 시도를 막아달라고 호소하는 목적이엇습니다. 이는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 ‘만약 제3국이 조약 일방에게 부당하게 또는 강압적으로 간섭할 때에는 조약상대국은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한다.’는 소위 선위조처 조항에 근거한 것입니다. 헐버트는 여행 도중 일본이 친서를 강탈할까봐 친서를 미국공사관 외교행랑 편에 워싱턴으로 미리 보냅니다. 이때 미국 공사(Edwin V. Morgan)는 헐버트와의 약속을 배신하고 헐버트의 방미 목적을 일본에게 알려버립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 당황한 일본은 을사늑약을 하루빨리 해치우기로 결심합니다. 헐버트는 1905년 10월 21일 비밀리에 서울을 출발하여 일본 요코하마에서 배편으로 샌프란시스코에, 이어서 기차로 워싱턴으로 갑니다. 백악관에 들러 대통령 면담을 요청했지만 백악관은 국무부를 통하라며 면담을 거절합니다. 국무부 역시 핑게를 대며 헐버트 면담 요청을 거절합니다. 백악관과 국무부는 서로 핑퐁을 치며 헐버트를 외면하다가 일본이 서울에서 울사늑약을 해치운 뒤인 1905년 11월 25일에야 미국 국무장관이 헐버트를 만나줍니다. 이때는 이미 미국이 일본이 발표한 을사늑약의 완결에 대한 성명을 접수한 뒤이며, 미국은 제일 먼저 공사관을 서울에서 도쿄로 철수합니다. 헐버트를 만난 국무장관(Elihu Root)은 헐버트에게 되레"당신은 미국이 일본과 문제가 있기를 바라오?”라고 호통을 칩니다. 헐버트는 이는 국가 간 조약에 대한 신의의 문제라고 항변하지만 국무장관은 헐버트의 항의를 묵살해 버립니다. 고종 황제는 을사늑약 직후 워싱턴에 있는 헐버트에게 전보를 쳐 자신은 을사늑약에 서명하지 않았기에 조약이 무효이니 미국을 설득하여 을사늑약을 뒤집으라고 요청합니다. 고종은 전보를 중국 지푸(지금의 엔타이)에서 칩니다. 일본이 전보 내용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중국에 사람을 보낸 것입니다. 헐버트는 이 전보를 1905년 12월 11일 날 받아 12월 14일에 미국 국무부에 제출합니다. 이 전보는 을사늑약이 고종의 의사가 아니라는 증거로서 을사늑약은 국제법적으로 무효라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 뉴욕타임스 > 12월 13일 자 및 14일 자에 의한 역사 발굴 < 뉴욕타임스 > 12월 14일 자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 즉 헐버트도 고종에게 답신 전보를 쳤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전보에서 헐버트는 미국 행정부가 대한제국 황제의 친서 수령을 거부하고 황제의 특사인 자신을 무시한다며 지금까지 자신은 비밀하게 행동하였으나 이제부터는 자신의 방미 목적을 언론에 알리겠다고 고종에게 전합니다. 그러면서 앞으로 미국 행정부가 아닌 미국 국민에게 직접 보호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하겠다는 의중도 밝힙니다. 또한, 헐버트는 < 뉴욕타임스 >와 회견하며 일본이 한국에서 저지르는 만행을 고발합니다. 특히 일본인들이 강압적으로 한국인들의 부동산을 빼앗자 한국인들이 부동산 권리증을 들고 헐버트를 찾아와, 부동산 명의를 헐버트 이름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했다는 사실도 밝혔습니다. 헐버트는 그리하여 자신 명의로 된 부동산이 자그마치 5만 에이커라고 했습니다. 헐버트는 또 일본은 사실상 한국을 지배하고 있으며 한국인들에게는 어떠한 인권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일본의 횡포를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한국인은 당분간 노예처럼 복종하면서 살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대한제국의 앞날을 불길하게 예고합니다. 역사적 의미 이번에 발굴한 < 뉴욕타임스 > 기사는 고종 황제가 헐버트를 미국에 특사로 보내 미국을 움직여 보호조약을 막아보려고 끝까지 투쟁하는 고종의 의지를 증언합니다. 또한, 고종이 자신은 보호조약에 서명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무효라는 점을 헐버트를 통해 미국에 통고하고 헐버트가 < 뉴욕타임스 > 등 언론을 통해 조약이 불법이라는 사실을 국제사회에 공표함으로써 을사늑약이 국제법적으로 명백히 무효라는 사실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새삼 확인시켜 주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것은 고종 황제와 헐버트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서울과 워싱턴에서 눈물의 전보를 통해 을사늑약을 막아보려 몸부림치는 모습입니다. 특히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하고 한국을 냉대하자 이에 저항하며 분노하는 헐버트의 뜨거운 한국 사랑은 우리 역사에 마땅히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할 것입니다. 을사늑약을 저지하기 위한 고종과 헐버트의 눈물 어린 전보 교환이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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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헐버트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한국과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서명하였다. 한일의정서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1905년 11월 총칼로 위협하며 오늘날 우리가 을사늑약이라 부르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보호국임을 자처했다. 2년 뒤 1907년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을 원천무효라고 세계만방에 선언하며 일본의 보호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그해 7월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다시 2년 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해 쓰러뜨렸다. 얼마 전까지 조선통감이고 조선 침략의 수괴였던 그를 한민족을 대신해서 처단한 것이다. 이 한발의 총성은 한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동아시아를 진동시켰다.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 안중근이 뤼순(旅順)감옥으로 이송된 지 달포가 지나서다. 취조실 한편에 난로가 놓였지만 마루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안중근은 코끝이 시렸다. 일본경찰에서 꽤 높은 경시 계급장을 단 사카이(境喜明)도 손이 곱은지 틈만 나면 손가락을 호호 불어댔다. 사카이는 끊임없이 안중근의 거사에 배후를 캐내려고 전방위적 심문을 이어갔다. 사카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들이댔다. "미국 사람 ‘하루바토’를 아는가?” 안중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자가 왜 갑자기 헐버트(Homer Hulbert)의 이름을 꺼내는가? 안중근이 대답에 뜸을 들이자 사카이가 "하루바토를 만난 적이 있소, 없소?”라고 다그쳤다. 안중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헐버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1909년 12월 2일의 일이다.(일본 경찰에 공술한 내용이 담긴 통감부 기밀문서) 왜 안중근이 한 이방인에게 예를 갖추어 최상의 존경을 표했을까? 둘은 잘 아는 사이였을까? 헐버트는 과연 안중근에게, 그리고 한민족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고종황제의 특사 헐버트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1886년 7월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가 되기 위해 조선 제물포에 도착했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책임감으로 조선 말글을 공부했으나 한글을 접하자마자 한글에 매료되었고, 배운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다. 1889년 조선 말글의 우수성에 대한 최초의 글 ‘조선어’를 <뉴욕 트리뷴>지에 기고했고, 1891년에는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했다. 1893년 배재학당 삼문출판사 책임자가 되고,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을 도왔다. 1895년 일본군이 심야에 궁궐에 진입해 민비를 살해한 직후, 미국인 언더우드, 애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1905년 고종황제의 대미 특사로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에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1907년 5월 고종황제의 특사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를 방문해 한국인 3인 특사를 지원했고,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했다. 헤이그 특사로 활약한 탓에 고종황제의 퇴위와 더불어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9년 가사 정리를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상해 소재 독일은행에 예치된 고종황제의 내탕금 인출을 위한 위임장을 받았다. 독일은행을 찾아가 인출을 요구했으나 이미 이완용과 짜고 일본 통감부가 불법 인출해 간 뒤였다. 1903년에는 YMCA창립준비위원장 및 총회의장으로 한국YMCA 창립을 선포했다. 1903년 조선왕조 역사서 <대동기년>을 출간했고, 1905년 <한국사 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했다. 1906년 한국의 역사, 문화를 집대성한 <대한제국의 종말 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의 험난한 시대상황을 함께 겪은 동시대인으로서 여기까지 기록된 헐버트의 우국충정과 활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카이 경시가 "미국인 하루바토를 아는가?”라고 심문했을 때, "헐버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헐버트 그 이후 헐버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 프랑스에서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4년 미국 전역 220곳을 방문해 강연하며 식어가는 한국독립운동 열기를 되살렸다. 1919년 이후 1945년까지 ‘한국친우회’와 ‘구미위원부’ 등 한국 독립운동단체에서 중심 연사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을 맞아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국빈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내한했으나, 86살 노구로 긴 항해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8월 5일 서거했다. 정부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양화진에 안장했다. 한국으로 출발하면서 그는 어느 기자에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한국인이 기억하는 헐버트 대학을 졸업하고 1886년 23살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이후, 그의 삶은 한국과 한국인 공동체 속에 온전히 담겼다. 63년 동안 한민족과 영욕을 함께 한 헐버트 박사의 삶은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아리랑 채보자, 선교사, 황제의 밀사, 독립운동가로 점철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 헐버트에게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기려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4년 10월 9일 헐버트에게 한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2015년 10월 7일,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하여 영원한 한민족의 노래로 발전케 한 공로를 인정하여 헐버트에게 제1회 ‘서울아리랑 상’을 추서하였다. 헐버트는 1906년 역사서 <대한제국의 종말> 헌사에서 "비방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흔들리지 않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호머 헐버트” 라고 썼다. 한민족은 반드시 부활해서 독립 국가를 쟁취할 것이라는 ‘대한 독립’의 열망과 신념을 피력했다. 그리고 헐버트는 끝내 한국이 독립하는 환희의 역사를 우리와 함께 맞이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를 기억한다. - 김동진 저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에서 발췌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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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KBS ‘한민족상’...사할린동포 박승의, 공노원 수상제22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한민족상’ 수상자와 5개 분야 수상자가 발표되었다. 10월 9일 한글날 오전 7시 KBS 한민족방송(AM 972, 1170KHz/ 라디오전용 애플리케이션 Kong)을 통해 북방 동포사회에 방송되었다. 발표 결과는 이번 신설 지역으로 관심을 집중시킨 ‘한민족상’ 수상자는 전 사할린사범대학 박승의 교수와 사할린한국어교원협회 공노원 부회장이 공동 수상했다. 박교수는 체험수기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 공노원 여사는 ‘영주 귀국한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로서의 공적이 평가 되었다. 또한 5개 분야 체험 및 공적상은 청소년부문 대상에 용정 김윤주의 <색 바래져 가는 우리 언어>, 성인 부문 대상에 안도현 리련옥 <내 생애에 제일 잘한 세 가지 일>, 영상/오디오콘텐츠 부문에 영등포구 전길운씨와 연길시 박미령씨가 각각 선정되었다.또한 지도교원상에 조선족중학교 신영애 교사와 제4소학교 유춘란 교사가 선정되었고,단체상에는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조선족중학교가 선정되었다. KBS 한민족방송이주최하는 이상은 북방동포의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은 물론 타민족과 더불어 살아가며 문화와 전통을 전승하고 우리말과 글을 보존하는 이들을 격려, 포상하는 시상제도다. 금년이 21회로 지난 1998년부터 실시해 왔다. 특히 금년은 한러수교 30년 기념으로 러시아 고려인 및 사할린 동포를 대상으로 한 ‘한민족상’을 신설하였다. ‘한민족상’ 첫 수상자인 박승희교수는 사할린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에 영주귀국하여 경기도 파주시에 거주하고 있다. 수상작인 <가라후토로 팔려간 이쁜 고모>는 일제 강제동원과 사할린 이주와 억류, 그리고 미귀환 되면서 사할린에서 3대가 뿌리를 내린 가족사를 그렸다. 공동 수상자인 공로원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은 인천광역시 남동구에 영주귀국하였다. 수상 공적은 영주귀국한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 활동상이다. 제출한 동영상에 의하면 한국 이름과 무국적으로 살다간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기 위해 현재 한국에서도 고려인 학생들에게 한국어와 한글을 가르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한편 시상식은 11월 23일 KBS홀에서 한민족방송 대표 프로그램인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의 20년 장수MC인 방송인 이소연의 사회로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무산되어 수상자들이 아쉬워 했다. 올해에도 300여 편이 응모되었다. 22주년을 맞은 올해는 동포 2세, 4세들이 다수 참여했고 국내에 거주하는 동포들의 참여가 작년보다 줄었다. 그러나 올해는 러시아 동포들이 처음으로 참여하여 하바롭스크한국교육원과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관계 동포들이 참여했다는 것이 큰 의의가 있다. 기타 수상 관련 정보는 본보 보도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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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br>아리랑’의 전형, 그 첫 모습# "아리랑은 남북한 양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한국과 중국의 자국무형문화유산, 3국에서 4개의 위상을 부여 받은 문화유산이다. 세계 유일의 유산이다.” "적어도 민요의 역사, 전승형태, 미래 전망을 말할 경우 아리랑의 각주(註)에 불과하다.”라는 말이 있다. 민요의 일반적 속성을 아리랑이 집약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기는 해도 일정 부분 공감하게 된다. 1930년대 이후 인문학 분야에서 아리랑만큼 깊고 넓은 담론이 있었던가를 각인하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아리랑은 ‘문제적 유산’이다. 해답보다는 그에 대한 질문을 더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질문 중에 오늘의 ‘아리랑’ 전형화(典型化) 과정에 대한 궁금증이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각 시대 문제의식을 아리랑을 통해 대변하고 대응하여 왔다. 그 결과로 얻어진 정체성의 확립 과정이다. 아리랑의 자기변혁 사례는 경복궁 중수 토목공사 7년의 상황이다. 1929년 음악가 이상준이 연극<아리랑> 감상평에서 제시한 경복궁 관련설이다. "경복궁을 이룩할 때에 인민을 강제로 잡어다가 부역을 시키여 사랑하는 사람을 여의고 정든 고향을 떠나서 채찍 밑에서 고역을 할 때에 그들에 입에서 스시로 흘러나와 아리랑이라는 민요가 시작된 것이니 이것이 전해나려 오고 또한 여러 곳으로 퍼져 지금에는 동서남북의 아리랑의 그 정서는 같으면서도 다 각기 그 지방색을 띠게 되었다. 물론 아리랑이 시작된 때는 경복궁 부역 시대라 해도 이것은 그 뒤로도····” 전국의 젊은이들이 모이고, 머물며 어울리는 과정에서 ‘아리랑’은 형성되고 고향으로 돌아간 부역군들에 의해 확산되었다는 주장이다. 이러한 결과가 황현(黃玹)이 『매천야록』에 적시한 궁중의 아리랑 상황이다. "임금은 매일 밤마다 전등불을 켜놓고 광대들을 불러 ‘신성염곡’(新聲艶曲)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아리랑타령’이라 일컫는 것이었다. 타령이란 부르는 노래를 일컫는 우리말이다. 민영주(閔泳柱)는 원임각신으로서 뭇 광대들을 거느리고 아리랑타령 부르는 것을 전담하여 광대들의 실력을 평가해 상방궁에서 금은을 내어 상으로 주도록 하였다.” 이 사실에서 아리랑은 경복궁 중수 이후 임금님과 일반 백성이 함께 공유하고 기억하는 노래가 되고, 전국에서 남녀노소가 부른 노래이다. 이 전국적 향유 현상은 어떤 노래가 갖지 못한 위상을 획득했다. 위의 고종시대 말 아리랑 상황은 선교사 H. B. 헐버트(Hulbert)가 1896년 확인시켜 준다. 구한말의 역사 현장을 목격한 증인의 기록으로, 동시에 거의 유일한 서양식 채보 가능자이며 아리랑 관심자이다. 그는 "1883년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이 보다 더 정확하게 밝혀낼 수 없다고 본다.” 라고 증언한다. 이 시기는 당시 아리랑을 언급한 일본 정치인, 예컨대 인천 이사청 근무자 외교관 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1871~1962) 등의 기록을 인용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자신감을 부연한 것은 수년간 관심을 가지고 크로스 채킹(Cross checking)을 했다는 증거이다. 경복궁 중수 후 8년 후이고, 황현의 기록 13년 전이니 믿을만한 정황이다. 결국 하나의 노래가 ‘아리랑’으로 전형성을 확보하게 된 것은 '경복궁 중수'라는 7년간의 노래문화 접변 결과로 민중은 물론 궁중에서 임금까지 함께 향유 한 정황으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분과 지역을 초월해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공존하는 문화공동체에서 ‘하나의 노래 ‘아리랑’으로 부상한 사실, 이것이 확인 가능한 아리랑의 전형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첫번째 양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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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새재아리랑 송옥자, KBS 진품명품 출연문경새재아리랑 송옥자 전승자가 오는 8월 16일 일요일 11시 KBS1 ‘TV쇼 진품명품(1236회)’에 ‘일본 아리랑엽서’(본지 7월 28일 보도)를 갖고 출연한다.의뢰품은 ①‘조선민요 아리랑(朝鮮民謠 アリラン)’ ②‘아리랑타령(アリラン打令)’ ③‘최신조선풍속 아리랑타령(最新朝鮮風俗 アリラン打令)’ ④‘조선민요 아리랑패(朝鮮民謠 アリラン唄)’ ⑤‘조선정서 아리랑패(朝鮮情緖 アリラン唄)’으로, 이 중에는 문경새재아리랑이 1930년대 전국적으로 널리 불렸음을 알려주는 두 장의 엽서가 있다. 의뢰품 엽서(하가끼-は-がき)는 세로 14cmx가로 9cm로, 사진과 사설을 넣은 형태이며, 여인들의 ‘널띠기’와 ‘다듬이질’을 담고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 간다”를 담았다. 이 두 각 편은 현재 문경새재 2관문 위에 있는 ‘문경새재아리랑비’의 1절과 2절이다. 또한 첫 번째 대표사설은 옛길박물관 옆에 있는 ‘H. B. 헐버트 아리랑악보비’에 있는 사설이다. 이를 통해 문경새재아리랑이 가장 오랫동안 널리 불린 노래임을 알 수 있다. 송옥자 전승자는 직접 문경새재박달나무로 만든 다듬이를 가져와 임이순 전수생과 함께 위의 두 사설을 소개한다. 방송일이 8월 15일 광복절 이튿날이라 아리랑이 일제강점기에 어떤 기능을 하였는지, 그리고 오늘의 위상은 어떠한지도 감정과 해설로 소개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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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독후감 공모전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박사 일대기 <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에 대한 독후감 공모전을 아래와 같이 실시한다.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 '는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로부터 '국민참여 기념사업'으로 선정되었다. 이 책을 통해 헐버트 박사의 정의(justice), 인간애(humanity), 올바른 애국심(right patriotism)의 가치가 국민 모두에게 전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독후감 공모전을 계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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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힘으로 ‘코로나’ 고개를 넘다아리랑의 힘으로 ‘코로나’ 고개를 넘다 안상윤 /편집위원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과거 길’로 부르던 곳이었다. 영남의 수재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새재(鳥嶺)를 넘어 충청북도를 거쳐 경기도 이천으로 들어갔다. 당시 사람들은 삼삼오오 패를 이뤄 하루에 30km 정도 걸었다고 전한다. 부지런히 걸으면 한양까지는 대략 경남에서 20일, 경북에서는 보름 정도 걸렸을 것으로 계산된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희소식은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소문이 먼저 전해졌다. 그래서 지명이 ‘경사를 듣는다’는 의미로 ‘문경(聞慶)’이라 정해졌다. ‘문경새재’는 기쁨 외에 슬픔과 고난의 의미도 지닌다. 민요 ‘아리랑’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아리랑의 노랫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고난을 극복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고개를 넘어가는 힘든 과정이 고생을 견디며 마침내 이겨내는 모습과 닮은 까닭일 것이다. 아리랑 민요에서 ‘고개’는 수난을 상징하고 그것은 어김없이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런 연유로 모든 아리랑 노래의 후렴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가 붙는다. 아리랑은 노래 그 이상의 역할을 해 왔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1930년 대에 천연두가 온 나라를 덮쳤을 때, 민중은 아리랑 가사에 "종두(種痘)를 맞고 천연두를 이겨내자.”는 내용을 담아 전파한 선례가 있다. ‘아리랑 고개’는 문경새재를 일컫는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졍 오기를 기다린다.” 등의 기록에서 보듯, 아리랑의 역사를 다룬 문헌에 문경새재가 언급되면서 문경새재가 아리랑의 실지(實地)임을 확인한다. 아리랑의 시초는 경복궁과 관련이 있다. 1865년 고종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98)이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 세도가문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상징적 조치로 경복궁 중건에 나선다. 국가 재정이 어렵던 시절 대원군은 7,225칸 규모의 왕궁을 지으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땡전(當錢) 한 푼 없다.”는 유행어를 야기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해 실질가치보다 백 배나 높은 명목가치를 지니게 만들어 그 차액으로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려는 계산에서였다. 이 시기 문경 새재의 박달나무들이 있는대로 베어져 경복궁으로 공출된다. 공사장 각종 도구의 자루로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반강제적으로 부역인들도 동원되었다. 이들이 모두 1017m 높이의 조령산(鳥嶺山)과 1106m 높이의 주흘산(主屹山) 사이에 난 새재를 넘어갔다. 조령산은 ‘새도 쉬어갈’ 정도로 높고, 주흘산은 ‘중악(中嶽)’이라는 별칭답게 나라의 기둥이 되는 산'이다. 이 새재를 넘어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향하면서 ‘문경아리랑’이 만들어졌다. 경복궁 공사에 동원된 삼남 출신들이 고단함을 덜기 위해 부른 이 노동요 성격의 ‘문경아리랑’이 일꾼들 사이에 퍼지면서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아리랑고개’는 경복궁 중건을 매개로 문경새재에서 연유한 시어(詩語)인 것이다. 1896년 고종의 외무 특사이던 H. 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 박사는 서양 악보에 가사를 채록해 알파벳으로 남겼다. "문경새재 물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라는 노랫말이었다. 이후 새로운 아리랑들이 생겨나 나라 전체로 파급시켰다. 정든 조국땅을 떠나 이역만리를 헤매야 했던 디아스포라(Diaspora)들도 ‘광복군 아리랑’, ‘북간도 아리랑’, ‘치르치크 아리랑’ 등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노랫말을 지어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민족으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게 해준 힘이었다.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경시가 수집한 국내외 아리랑 노랫말은 10,068 수에 이른다. 최근 문경시는 단산에 아리랑기념관을 지어 아리랑의 모든 역사를 보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마다 아리랑 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개최된다. ‘문경새재아리랑제’도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 상황임을 감안해 아리랑의 힘으로 역병을 이겨내자는 취지로 6월 13일에 축제 행사를 가짐으로써 다른 축제들과 차별화를 보였다. 새재도립공원에 마련한 야외공연장에서 고구려 부여 동예 등이 하늘에 지내던 ‘동맹영고무천(東盟迎鼓舞天)’ 유습(遺習)을 빌려 쑥을 피운 채 춤추고 노래하고 땅을 밟으며 힘을 구하는 의식이었다. 2020년을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19’ 고난을 다시 아리랑 정신에 기대 이겨내자는 몸부림이었다. 한민족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집단 정서를 가동해 상생의 기운을 얻어온 저력의 중심에는 늘 아리랑이 있었음을 반영한 기획이었다. 지금 추세로라면 조만간 90년 전 ‘종두선전(種痘宣傳) 아리랑’의 경우처럼 ‘코로나 극복 아리랑’이 등장할 수도 있어 보인다. 아리랑은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상황에 맞게 자기 복제를 계속하는 프랙탈Practal 이론의 전형에 속한다. 앞이 뒤를 끌어주고 뒤가 앞을 밀어주는 모양새다. 아리랑은 노래 그 이상이다. 한국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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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br>아리랑, 한국인에겐 쌀연재를 시작하며 구한말 H. B. 헐버트는 "아리랑은 조선인에게 쌀이다"라고 정의했다. "782소절의 아라렁(A-ra-rung)은 한국음식에서 쌀을 빼 놓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아라렁은 한국 사람들에게 쌀과 같다. (중략) 즉흥곡의 명수인 조선인에 의해 수많은 곡으로 대치되었기 때문인데 곡과 사설을 바꾸기도 했지만, 후렴은 일정하게 다음과 같이 불린다." ‘아라렁 아라렁 아라리오 아라렁 얼싸 배띄어라’ ”아라렁의 뜻은 사랑하는 낭군을 뜻하는 ‘애랑’(愛郞)의 음역이라고도 하고, 러시아를 이르는 ‘아라’(我羅)에서 유래했다고도 한다.(중략) 이 아라렁은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3,520여 일간 지속되어 왔으며 1883년 대중적인 애호를 받게 되었다. 나는 어느 누구도 이 보다 더 정확하게 밝혀낼 수 없다고 본다.”(『THE KOREA REPOSITORY』에 아리랑을 논한 <Korea Vocal Music> 중에서) 1896년 2월 서양 선교사 H. B. 헐버트가 쓴 글이다. 아리랑론으로는 아리랑 역사 첫 머리에 위치하는 이 글은 많은 아리랑 이야기를 함축하고 있다. 미국 의사로 한국관계사에 의하면 서양과의 외교사 23년(1882~1905)간 알렌, 데니와 함께 3 주역(主役) 중 한 사람으로 우리 근대사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1906년 발행한 「대한제국멸망사」를 펴냈고, 고종 임금의 밀사로서의 활동 일화는 그의 한국 사랑을 알 수 있게 한다. 전해지기로는 그가 1905년 11월 16일,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 대통령 루즈밸트를 만나러 갔을 때 비서관들이 한국에 대해 어떤 나라인지 모른다며 면담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때 헐버트는 "만일 이 노래를 들으면 당신은 오늘 저녁 당신 부인에게 꽃을 사가지고 갈 만큼 사랑스런 노래 ‘아리랑’이란 노래가 있다”고 하며 불렀고, "이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라고 하여 설득시켰다고 한다.(서울대 외교학과 고 강덕동 교수와 1992년 3월 談) 그는 1886년 7월 한국 최초의 관립외국어학교 육영공원(育英公院)교사로 와서 1891년 귀국했다가 1893년 다시 선교사로 파견되어 감리교출판사(Trilingual Press)를 운영했고, 선교잡지『THE KOREA REPOSITORY』에 아리랑을 논한 <Korea Vocal Music>을 쓰는 등 우리문화를 외국에 널리 알렸다. 시조와 같은 상류층이 즐기는 노래를 클래식형(classic style)이라고 했고 아리랑을 일반 대중이 증가는 양식(the hachi or popular style)의 성악곡<vocal music>의 대표라고 했다. 이 글은 아리랑의 유행 시점, 어원, 해외 전파 경로 등을 파악하는데 유용한 글이다. 특히 아리랑을 쌀에 비유한 소중한 글이다. 다만 선교사로서의 한계를 갖는 글이라서 서양 음악계 작품으로 연주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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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도움, 관객도움, ‘아리랑고개 함께 넘었다’'고개를 넘는다'는 노랫말이 '고난을 극복한다'라는 의미임을 되살려 '아리랑으로 ‘코로나 19’ 상황을 이겨내자'는 취지의 문경새재아리랑제가 6월 13일 경북 문경새재도립공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렸다. 올해로 13 회째를 맞은 이번 새재아리랑 축제는 ‘코로나19’로 실내 집회가 어려워진 상황에서 첫 야외형 공연으로 치러졌다. 이날 행사는 아리랑 전문가 김연갑 아리랑학교교장과 문경 초등학교 2학년생인 김규랑 양의 공동사회로 새재를 찾은 관람객 수백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후 3시 55분부터 두 시간 동안 진행됐다. 주최 측은 아리랑을 최초로 서양식 악보로 채보한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박사에게 헌정하는 '헐버트 아리랑' 합창을 시작으로, '삼대목' 고유제, 땅밟기 플래시 몹 등 식전행사를 비롯해 본행사를 '맞이', '함께', '보냄' 등 3개의 무대로 나누어 모두 4개의 소주제로 진행함으로써 관객의 집중력을 높였다.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회장 송옥자) 와 통일앙상블(음악감독 윤은화), 주흘무용단(단장 황금순) 그리고 문경문화원 풍물단(단장 함수호) 등이 펼친 다채로운 공연은 관객들을 고양시켰다. 특히 올해는 국내에서 유학중인 일본 중국 베트남 등의 예술인들이 동참해 자리를 빛냈다. 초대가수인 '청년가객' 조명섭이 '추풍령 고개'와 '울고 넘는 박달재' 등 고개를 소재로 한 가요로 축하무대를 가졌고, '피날레 가수' 지현이 '아름다운 강산'을 불러 축제의 열기를 더했다. 이날 축제는 통일앙상블이 공연한 '문경아리랑 판타지'에 이어 전 출연진의 아리랑 합창을 마지막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가사짓기기와 경창대회도 병행, 농바우 합창단 장원 한편 공연과 병행한 문경아리랑 경창과 가사짓기 대회는 농암면 농바우 합창단과 윤대순 씨가 각각 장원을 차지했다. 문경문화원(원장 현한근)이 지난 13년 간 주관해 온 새재아리랑 축제는 그동안 노랫말에 등장하는 ‘아리랑 고개’가 문경새재임을 확인함으로써 새재아리랑의 역사적 위상을 계승하고, 문경인들의 공동체성을 강화하는 데 주안점을 두어왔다. 주최 측은 새재아리랑이 "토속 아라리를 보편적 아리랑으로 변혁시켰을 뿐 아니라, 이를 민족의 발자취를 따라 나라 안팎으로 확산하는 데 기여해왔다.”라고 했다. 주최 측은 이 축제를 매개로 "산과 고개의 정서를 공유하는 동북아시아 한자권(漢字圈) 예술인이 아리랑의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라고 자부했다. 올해 문경새재아리랑제는 ‘코로나19’ 상황임을 감안해 함께 모여 춤과 노래로 액을 풀어냈던 고대의 ‘영고동맹무천‘ 유습 재현 의례를 현대화 해 ‘코로나 19’로 지친 국민의 피로감을 해소한다는 소임을 담음으로써 축제의 의의를 더했다. 인사말에서 고윤환 문경시장은 "문경을 고난과 역경 극복의 새로운 전환 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며, 그 노력의 일환으로 "문경 단산 일대에 아리랑의 모든 것을 담아낼 '아리랑 기념관'을 금년 내 착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이자 의원은 "역사 속에서 사라진 신라의 민요집 삼대목(三代目)을 재현한 ‘서예로 담은 아리랑 1만 수’를 만나 순수 한글로 편찬한 곳이 문경시임을 알리고 싶다.”라고 자부했다. 김인호 문경시의회 의장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와 "할미성 꼭대기에 진을 치고 왜병정 오기를 기다린다.” 등을 거론하며 아리랑의 역사를 기술한 최초의 기록에 ‘문경새재’가 등장함을 강조했다. 문경문화원과 문경시는 이번 문경새재아리랑제를 통해 "타지역 아리랑 관련 행사와 변별력을 보였다.” "전형적인 아리랑 축제로 확립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아리랑 도시’로서의 문경의 인지도를 높여 관광자원 다변화를 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고 축제의 성과를 표현했다. 객석을 지킨 서울에서 온 한 전문가는 "옥에 티도 보였으나 주제에 동의해 의미있게 보았다.”고 평했다. 이 평가는 많은 출연진과 다국어 통역의 곤란으로 진행이 다소 거칠었음을 지적한 것으로 야외공연과 짜여진 시간에 마쳐야 하는 생중계의 한계도 겹친듯하다. 그럼에도 이번 행사의 성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유튜브 채널(문경시/국악신문TV)에 의한 실시간 중계방송 사실이다. 여러 기술적 어려움에도 성공적이었다. 다른 지역 대형행사에 벤치마킹이 될 가능성이 보였다. 문경: 안상윤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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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노래, 세계의 노래 아리랑」기획전시 개최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서 최초의 아리랑을 들어보세요! 「겨레의 노래, 세계의 노래 아리랑」기획전시 개최 음반과 악보에 기록된 최초의 ‘아리랑’부터 2012년 유네스코에 등재된 ‘아리랑’까지 오는 8월 30일부터 6개월간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에서 무료 관람 □ 국립국악원(원장:이동복, www.gugak.go.kr)은 오는 8월 30일(금)부터 2014년 2월 28일(금)까지 6개월간 국악박물관에서「겨레의 노래, 세계의 노래 아리랑」기획전시를 개최한다. □ 이번 전시는 음원과 악보를 활용해 ‘아리랑’의 음악적 특징을 이해하고, 민초의 노래를 예술적 가치로 승화시킨 명인, 명창들의 각종 유물 75점을 공개한다. 또한 음반과 악보로 기록된 최초의 ‘아리랑’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 □ 총 3개 주제로 구성한 이번 전시는 ‘아리랑’의 음악적 특징을 소개하는 도입부를 지나, ‘아리랑’ 기록으로 만나다(1부), ‘아리랑’ 명인에게 듣다(2부), ‘아리랑’ 우리의 노래, 세계의 노래로 태어나다(3부)로 나누어 소개한다. (1부) □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기록된 아리랑을 만날 수 있다. 1896년 7월 24일, 미국인 인류학자 플레처(Fletcher)가 기록한 현존하는 최초의 ‘아리랑’ 음원을 공개한다. 같은 해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ulbert)가 월간지「한국소식(Korea Repository)」에 게재한 최초의 ‘아리랑’ 오선보도 전시한다. □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아리랑’ 음원도 공개한다. 1913년에 녹음된 유성기 음반 ‘경성아르렁’을 비롯해 1916년 독일인 포로가 된 한국인의 ‘아리랑’도 직접 들을 수 있어 100여 년 전의 초기의 ‘아리랑’을 비교해 볼 수 있다. (2부) □ 2부에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부르던 ‘아리랑’을 가장 아름다운 소리로 세상에 들려주고자 했던 명인 ? 명창들의 다양한 모습들을 공개한다. 민요의 대중화에 앞장섰던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등의 ‘서울?경기 아리랑’과 김옥심의 ‘정선아리랑’을 음반과 음원, 사진 자료와 함께 전시한다. 민속악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지영희 ? 성금연이 반주한 ‘아리랑’ 음원과 이들이 직접 연주한 악기와 악보도 확인 할 수 있다. (3부) □ 마지막 3부에서는 온 국민의 노래로 거듭난 ‘아리랑’을 조명한다. 어린이의 정서함양을 위해 교과서에 수록한 ‘아리랑’을 비롯해 굴곡진 현대사로 조국을 떠나야만 했던 해외교포들의 ‘아리랑’, 국가적 행사가 있을 때마다 온 국민을 하나로 묶어준 ‘아리랑’ 등을 다채롭게 소개한다. 재즈와 탱고로 변주되는 ‘아리랑’의 색다른 모습과 해외 유명 음악인들이 참여한 ‘아리랑’ 연주 모습도 영상으로 공개한다. □ 2012년 12월 파리 유네스코본부에서 ‘아리랑’의 다양성과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당시 현장 영상과 이춘희 명창의 공연 모습도 볼 수 있다. □ 이번 전시 기간 동안에는 부대행사로 어린이 관람객을 위해 ‘아리랑 학습지’ 풀기와 ‘아리랑 노래 부르기 대회’ 등을 개최할 예정이다. □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의 기획전시는 올해로 13회째 진행하고 있으며, 특별한 주제로 매년 예술적 가치가 높은 소중한 국악 유물을 엄선해 전시한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며, 관람은 무료다. □ 이동복 국립국악원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음악적인 측면에서 본 ‘아리랑’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가치가 널리 전해졌으면 한다.”고 밝히면서 “세계가 인정한 우리의 문화유산 ‘아리랑’을 들어보고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언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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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V 『국악콘서트 울림』창극 ‘나운규, 아리랑’ 10.30KTV 『국악콘서트 울림』창극 ‘나운규, 아리랑’ 1. 일시 : 2016년 10월 30일(일) 오후5시 10분(방송) 2. 문의 : 044-204-8208 3. 소개 KTV 국민방송(원장 류현순)의 국악 전문 프로그램 『국악콘서트 울림』(해설 박애리, 연출 심봉근)에서는 오는 30일 낮 5시 10분, 영화 ‘아리랑’과 춘사(春史) 나운규 감독의 삶을 담은 창극 ‘나운규, 아리랑’을 방송한다. 영화 ‘아리랑’은 일제강점기인 1926년 제작된 흑백무성영화로 일제의 토지수탈로 지주와 앞잡이들의 횡포가 극심한 시대에 고통받던 국민들의 가슴을 어루만져준 수작이었지만, 원본 필름이 유실된 상태다. 영화의 주제가 아리랑은 온 국민에게 전파돼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가락으로 불리고 있다. ‘나운규, 아리랑’은 지난해 제1회 창극 소재 공모전을 시작으로 2년여에 걸쳐 완성한 국립민속국악원의 브랜드 창극이다. 영화 ‘아리랑’이 또 다른 영화나 드라마 등으로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창극으로는 이번이 처음이다. 연출 정갑균, 작창 안숙선, 작·편곡 양승환, 극본 최현묵 등 국내 최고의 제작진이 수차례의 제작회의와 배우 선정을 거쳐, 지난 9월 남원 초연을 시작으로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에서 관객들을 만났다. 이날 방송은 지난 14~16일 대전시립연정국악원 공연 중 첫날 실황을 생생하게 담아 안방에 전한다. 본조아리랑, 구아리랑, 헐버트 아리랑(1896년 미국인 호머 헐버트 박사가 오선보로 채보한 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상주아리랑 등 모두 6곡의 아리랑이 민족의 아픔과 함께 했던 나운규의 삶과 어우러지며 감동의 무대를 선사한다. 한편 지난 14일, 나운규 감독은 영화 ‘아리랑’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민족혼의 불씨를 되살린 공로로 제2회 서울아리랑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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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방송, <아리랑의 재발견> 방송위 최우수상 수상국악방송, 방송위 최우수상 수상 지난 3월 2일 국악방송 개국 5주년 기념일은 겹경사로 잔치를 뜻 깊게 했다.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진행된 기념공연 이 무르익을 무렵 사회자 이금희씨가 “5주년 생일 잔치에 자랑을 하나 해야 하겠다”며 프로그램 이 방송위원회 대상 우수프로그램 부문 최우수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전해 축하 박수를 받았다. 은 2005년 광복 60주년 3부작 다큐맨타리로, 연출 이주연PD, 글·구성 김연재·서주연로, 제1부는 아리랑의 시원이 강원 정선아라리로, 이로부터 전국의 모든 아리랑을 형성·확산 시켰음을 밝혔고, 제2부에서는 남북단일팀 단가이며 월드컵 현장에서 부른 본조아리랑이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의 주제곡으로, 이는 나운규가 14세 때 회령 철도노동자들로부터 들은 ‘자즌아리랑’(헐버트 채보‘아르렁’)임을 밝혔고, 제3부에서는 아리랑이 어떤 경로로 세계로 확산되었는가와 이를 어떻게 한류 차원에서 세계화 할 것인가를 국악계 오피니언 리더들로부터 진단하였다. 이 프로그램이 2005년 5월 ‘이 달의 좋은 프로그램’ 수상에 이어 방송위의 최고상을 수상 할 수 있었던 것은 종래의 음악 다큐 프로그램과 다르게 분석적인 시각과 과학적인 재현에 역점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정선의 아라리가 모든 아리랑의 시원인가?’라는 식의 분석과 ‘나운규가 들은 아리랑이 1896년 선교사 헐버트가 채록한 ‘ar-rung’으로 보는 이유는? 이란 의문을 제시하고 중앙대학교 국악연구소 김대진(작곡가·중대 강사)연구원의 선율 분석을 통해 제시하였고,한, ‘어떻게 세계화 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박범훈총장, 황병기교수, 김명곤극장장 등이 전문적 방안을 제시한 것이 그렇다. 다음은 세계 음반 메니아들에게 전설적인 콘트라베이스트로 알려진 오스카 패티포드의 1952년 작품 ‘아-디-동부르스’ 같은 희귀 음반을 추적해 자료로 쓴 것과 1970년대 초 녹음된 태백산 심메마니의 아라리 등을 소개한 노력 등도 주목된 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강점을 작가의 다큐적인 속도감을 프로듀서 특유의 차분함과 진지함으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리고 각 부에서 방송된 자료는 국악방송의 장점인 희귀한 자료로 는 길을 끌 만했다. 앞으로 국악방송은 새롭게 기획하는 진로 문제에서나 구체적인 프로그램 편성에서 기존의 ‘특집성’ 프로그램을 지양, 수준 높은 다큐와 특집성 드라마를 비중을 두리라고 채치성 방송본부장은 밝혔다. 개국 5주년, 최고 작품상 수상은 겹경사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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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 아리랑'[일 시] 2005년 03월 16일 오후 7:30 ~ 9:00 [주 최] 국악신문사, 02-922-1411 [장 소] 국립국악원우면당 신나라와 아리랑연합회가 공동기획으로 발매된 바 있는 정선 토박이 김연수 가족 3대의 정선아리랑 초청공연 김순녀 1978. 2. 10. 정선여고 졸업 1979. 김병하 사사 1980. 4. 6 KBS 라디오 민요백일장 최우수상 수상(정선아리랑) 1981. 8. 20 김뻑국 예술단 입단 1981. 8. 20 (사)한국국악협회 회원 1985. 10. 6 제2회 전국민요경창대회 대상 대통령상 수상 1987. 8. 14 독립기념관 준공 전야제 MBC 출연 1988. 5. 12 제4회 세계적십자의 날 기념공연 1988. 10. 3 MBC, KBS 합동방송 88올림픽 메달선수 축하공연 1989. 4. 28 한·미 연합야전군 사령부 축하공연 1991. 8. 14 8·15 광복기념 재일교포를 위한 전국순회공연 1992. 2. 4 요코하마, 나고야, 오사카, 히로시마 재일교포 위문공연 1992. 대한민국 육·해·공군 문선단공연 및 KBS 위문열차 출연 3년 1992. 10. 18 SBS 후원 제1회 할아버지, 할머니 합동 고희잔치 (장충체육관) 출연 1993. 8. 7 93‘ 대전엑스포 대공연장 및 대전관 3개월 공연 1994. 94‘ 국악의해 국립극장 공연 1997. 3. 1 김뻑국 예술단 주최 만담 보존회 창설기념공연 (국립극장) 1998. 세종문화회관 국악공연 2000. 10. 14 중국 심양시 조선족 동포 위문공연 8.1극장 2002. 5. 18 안면도 국제 꽃박람회 공연 2002. 6. 25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공연 2003. 7. 18 운현궁 명인 명창의 밤 공연 2004. 4. 25 KBS 국악 한마당 출연 2004. 8. 15 삶의소리 천년의 노래 정선아리랑(신나라 뮤직 CD 8매 )취입 현 재 아카데미 정선아리랑 연구회 운영 1 _ 한오백년 2 _ 긴아라리 3 _ 자진아라리 4 _ 엮음아라리 _우정출연:정명자(춤의소리) 5 _ 강원도아리랑 6 _ 김옥심제정선아리랑 정선아리랑, 아라리와 춤, 경기민요, 팔도아리랑 일반적으로 아리랑을 말 할 때는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서울·경기의 본조아리랑(경 토리), 전라도의 진도아리랑(육자백이 토리), 경상도의 밀양아리랑(경상도메나리 토리)을 일러 우리나라 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그리 마뜩한 규정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타의 아리랑과 정선아리랑과는 동류의 하나로 병렬시키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 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 이유는 소위 인지도(認知度) 또는 통속성을 제외한 어떤 경우에도 정선아리랑이 절대적인 비교 우위에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우선 형성 시기를 들어 보면, 밀양아리랑이 1920년대 초에, 본조아리랑이 1920년대 중반에, 진도아리랑이 1930년대 초에서나 오늘의 모습으로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분명하다. 나아가 전승체계의 견고성과 사설(4천여수)의 적층현상과 전승지의 광역성, 특히 아직도 구비문학적 현장성과 전승력이 유지되어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노래로 하여 일체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간과 할 수 없는 것은 세 가지 아리랑 모두는 정선아리랑에 연원을 두고 있다는 주종 또는 선후 관계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딱히 음악학적인 결론은 아니지만 문화적으로는 무리가 없는 정론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정선아리랑은 모든 ‘아리랑의 아리랑’인 셈이다. 다음은 이를 계보화 한 것이다. 뫼‘아리’ ∥ 아라리 ∥ 1.강원(강릉)자진아라리(북한강계) - 강원도(인제)아리랑 2.강원(정선)긴아라리(남한강계) - 중원아라성 - 한오백년 - 강원(정선)엮음아라리 ∥ 3. 경기긴아리랑 4. 경기자진아리랑(H·B. 헐버트·이상준 채보) ∥ 주제가‘아리랑’→본조아리랑(신·서울·경기아리랑) 정선군이 17판을 거듭 펴낸《정선아리랑》과 최근 성균관대학교 김시업교수가 펴낸 조사보고서 《정선의 아라리》에 수록된 사설 3천여수에는 여타 아리랑 사설의 많은 부분이 동일형 또는 변이형으로 나타나고 있어 사설면에서도 정선아리랑은 ‘모천(母川)의 노래’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정선아리랑이 모든 대상을 수용하는 ‘열린 소리’로 시공의 제한 없이 뻗어가고 올 수 있게 한 것도 여기에 기인 한 것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때문에 가장 민중적이고 생활적인 소리인 정선아리랑에 수심(愁心)과 산수(山水)편으로 분류 할 만큼 유형화 되었다거나 다른 어떤 서정민요에서는 볼 수 없을 만큼 한문투 사설이 하나의 유형으로 존재한다든가, 고려말의 역성혁명 같은 역사적 사실과 그에 의해 출현한 의 충절혼이 사설화 되어있는 연유도 이에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 역사(歷史) 우리는 아리랑을 말 하면서 은연중에 두 가지 측면을 강조해 오고 있다. 그 하나는 되도록 오랜 유래를 지닌 노래라고 말하려는 성향이고, 또 하나는 비장감을 부각시켜 민족사의 아픔과 함께 하여온 노래임을 말하려는 성향 이 그것이다. 전자는 기원설의 역사주의(歷史主義)라고 말 할 수 있고, 후자는 비장지향성(悲壯指向性) 또는 역사의 원상의식(原傷意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정서는 곧 정선민들이 아리랑(아라리)의 연원을 고려유신 에 기대어 오고, 그 어원(語源)을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나 ‘마음이 아리고 쓰리다’(疼痛說)라고 인식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정선군에서 공시(公示)하고 있는 역사는 역시 려말선초의 고려유신들, 특히 정선 서운산(瑞雲山)에 은거했던 이들과의 관련 전설에 근거한다. 즉, “처음 불리어지기 시작된 것은-(중략)-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짐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으로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세하며 입지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곁들여 고난을 겪어야 하는 심정을 읊은 것이 정선아리랑의 시원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 때의 선비들은 이러한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듣고 한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오늘에 전하여 지고 있는 아리랑의 가락”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일부이기는 하지만 정선인들이 자부심으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래서 “눈이 올라나···”와 같은 연관되는 사설을 첫 소리로 앞세워 부르고, 한문투 사설들을 수용하는 특징을 보이게 되었다. 굳이 말 한다면 이는 전설(傳說)이다. 그래서 존중되어야 하지만 이는 시원(始原)을 이루었다기 보다는 이미 있어온 소리에 그들의 회한(悔恨)이 사설로 수용되어 공동체에 연대감을 촉발시켜 전승에 기여했을 수 있다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 어원(語源) 강원도 음악 문법의 기층성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메나리’나 ‘아라리’의 존재와 ‘메나리토리’란 말에서 이 대두되었다. 이 설은 산(山)의 우리말 ‘뫼’와 ‘소리’ 또는 ‘노래’의 의미인 ‘아리’가 결합한 것으로 산악인의 원초성을 지닌 신호 또는 언어이면서 또한 음악인 산소리 ‘메+아리’가 ‘아리’만 확대되어 3음절의 ‘아라리’로 되고, 이에서 다시 ‘ㅇ’음이 첨가되어 ‘아리랑’으로 확대·변화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정선 지역민들이 외견상으로는 표출하지 않지만 무의식적으로는 수용하고 있다고 본다. 은 앞에서 살핀 기원설의 하나인 과 상통되는 설이다. 이는 정선 지역에서 유일하게 공시(公示)된 설인데, 1977년 정선읍 비봉산에 세워진 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구체화 되어 있다. 즉 “본래는 아라리라고 일컫던 것이 세월이 흘러감에 어느새 보편적인「아리랑」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니, 아리랑이란 누가 나의 처지와 심정을「알리」에서 연유된 듯 하더라”라고 되어 있고, 교육자료 “원로들은 아리랑이 아니라 아라리라고 강조한다. ‘누가 나의 이 억울한 심정을 알리오, 알아주소서.’라는 뜻”이라는 것에 근거한 것이다. 으로 변해왔음을 말 한 것이다. 이는 여말선초의 변혁기 역성혁명에 항거했던 절의파 구성원을 총칭하는 의 처지를 염두에 둔 주장이기도 하다. 사실 “누가 내 마음을 알리오”라며 비통하게 애소 할 그릅은 우리 역사에서 이들을 제외 하고는 내세우기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이렇게 본다면 고려말 상황이 지역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특히 이들이 남긴 시문, 특히 누구보다도 정선에 연고가 깊은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시에서 ‘누가 알리오’라는 뜻의 ‘수지’(誰知)를 쓰는 시가 유독 많다는 사실에서 주목할 만한 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다면 이 두 가지 어원설은 어문학적인 논의를 떠나 정서적으로는 매유 공감하는 바이고, 결과적으로는 정선아리랑을 이해하는데 유용하다고 보게 된다. ◎ 10대 특징 ① 창곡 중심이 아니라 사설 중심이다. 창곡은 원초성을 유지, 변화가 거의 없고 사설은 시대마다 확대되어 뚜렷한 적층현상을 보인다. 창에 대한 부담이 적어 자신의 심사를 표출하려는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데에 안성마춤이기 때문이다. ② 단일 민요로는 물론, 전 구비문학 자료 중에 사설이 가장 방대하다. ③ 초(超)기능적이다. 기본적으로 내면을 다스리고 표출하려는, 그래서 노래 자체를 즐기려는 ‘놀이적 성격’이 내재해 있음은 물론 지극히 생활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④ 음악적 형태나 사설의 구조상 원초성과 토착성이 유지되어 있다. ⑤ 한문투(漢詩形) 사설이 유형형화 되어 있다. 이는 과 의 한 배경으로 볼 수 있고, 이로서 ‘정선’아라리로 특화 된다. ⑥ 구비문학적 현장성과 전승력이 어느 정도 유지되는, 거의 유일한 민속음악이다. 또한 음악 공동체가 아직 존속되어있어 정체성과 통합성이 유지 되고 있다. 그래서 지역민들이 정선아라리로 일체감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⑦ 전체적인 정조는 애잔함과 소박함을 특징으로 한다. 진도아리랑이 흥청거림과 신명성이, 밀양아리랑이 투박함과 남성적임이 특징인 것과 비교 되는 점이다. ⑧ 토속민요로 전승지가 가장 넓다. 강원도 전역과 경상·충청일부 그리고 경기 한강수계가 그 전승지이다. ⑨ 군(郡) 차원에서 전수·전승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군의 상징으로 까지 삼아 보존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대중매체와 인터넷을 통한 대중음악과의 접촉으로 토속민요의 전승체계가 급격히 위축되어 가는 현실에서 바람직한 방안일 수 있다. ⑩ 40여년 간 군 차원의 보존·발굴 상황이 축척된 가집(歌集)을 갖고 있다. 바로 1968년 이후 17판을 거듭해 온《정선아리랑》인데, 공식적으로 증보·축차 되고 있는 것으로는 독보적인 가집이다. ◎ 가창 양식 정선아리랑이 본질적으로는 사설 중심이라는 것은 가창양식에서도 확인이 된다. 다시 말하면 비교적 느리게 부르는 ‘긴소리’, 빠르게 부르는 ‘잦은소리’, 그리고 ‘엮음소리’는 성음의 세련미나 예능의 유무에 의해 변조(變調) 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사설 표출 능력과 그 효율성을 위해 확대된 것이라고 본다. 이는 1960년대 강릉·삼척·정선 등지에서 녹음된 자료를 통해 볼 때 ‘레·도·라·미·솔’의 메나리토리 5음계와 3소박 6박자라는 구성상의 변화는 거의 없고, 사설의 확대 폭이 훨씬 크고, 사설의 적층현상으로 지역적 차이가 변별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이 된다. 딱히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속성 때문만은 아니지만 정선아리랑은 다른 민요처럼 서양 기보(記譜)로 규정화 하기는 쉽지가 않다. ◎ 아라리 긴소리-이는 일반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창자마다 차이가 있으나 세마치장단으로 악절과 마디와 같은 기본 틀에서는 거의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를 오선보화 하면 9/8박자이다. 잦은소리-긴소리를 하다가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긴소리’에 비해 빠르고 물박장단이나 젓가락장단에 어울리고, 드물게는 후렴을 절마다 넣어 선후창으로 부르기도 한다. 독립적으로 불려지기 보다는 ‘엮음소리’와 같이 ‘긴소리’에 이어 불려진다. 엮음소리-긴소리가 불려지는 중간에 또는 끝에 한 두 편이 불려진다. 2박·3박·4박의 불규칙한 박자로 역어나가다가 뒷부분을 늘어트려 맺는다. 그러나 “시간적인 질서와 음악적인 질서에 규제를 받지 않고 거의 동일한 음으로 단조롭게 이어”가다 ‘긴소리’로 되돌아오는 형식이다. 이는 사설측면에서는 확장현상이고, 음악측면에서는 변조형태 이다. 창민요에서 ‘복는형’ 또는 ‘사설형’이라고도 하는데. 3·4조 내지 4·4조의 율조에 맞춰 빠르게 부르는데 맞게 되었다. 그래서 엮음형으로의 변화는 해학성과 율조성이 표현기법상의 조건이 된다. 그러나 사설의 확장 부분과 악곡의 엮음 부분이 일치하지는 않는다. 연행상황은 주로 호기 있고 개방적인 남자들이 부르는 예가 많다. 이런 점에서 일부 창민요에서 볼 수 있는 ‘잦은’과는 다르게 볼 수 있다. 일부에서는 외지의 전문 소리꾼에 의해 변조된 것으로 주장하나 사설의 확장을 정선아리랑의 속성으로 보는 측면에서는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후렴-정선아리랑에서의 후렴은 논의의 여지가 있다. 경복궁 중수(1865~1872) 이후에 삽입된 것이라는 주장이나 본래적으로 덧붙임(addition)의 기능일 뿐이라는 논란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60년대 녹음된 자료들에서 추정되는 바에 따르면 어떤 시점에선가 하나의 사설(각편)로 쓰이다가 1930년대 쯤 아리랑의 전국적인 두각으로 영향을 받아 후렴으로 정착 되었다고 보게 된다. 그 근거는 현지민의 증언에서 찾을 수 있고, 후렴의 악곡이 본사의 악곡과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 한오백년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불복하여 정선·원주·여주·삼척 일대에 은거한 목은 이 색을 위시한 고려유신들이, 고려(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간 34대)가 5백년을 다 채우지 못하고 망하게 한 이성계를 원망하여 지은 시에 연유했다는 전설이 담긴 소리이다. 이것이 일제시대 때 편곡되어 신민요로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40년대에는 유행가로 불리고, 70년대 와서는 가요로 불려지는 소리이다. 전문 소리꾼에 의해 불려지는 것은 장식음이 많고 고음으로 질러내는 기교가 요구되는 소리로 메나리 선법이 짙다. 곡명은 후렴구에서 유래하며 정선 지역 설화에서는 고려유신들이 고려가 5백년을 채우지 못하고 망 한 것을 표현 한 것이라고 한다. 곡 전체의 분위기는 애처롭다. 미·라·도의 주요 음과 솔·레의 경과음으로 구성되며, 미로 시작하여 라로 끝난다. 장단은 느린 중모리, 전체적으로는 낮은 음으로 부르며, 특히 낮은 음역에서 시작하는 후렴구와 한 옥타브 높은 음역에서 시작하는 본 마루의 대비가 이 민요의 매력이다. 다른 아리랑과 같이 후렴을 먼저 부른다. ◎ 강원도아리랑 원래는 언모리와 비슷한 장단에 메나리토리로 된 강원도 자진아리랑에 연원을 두고 있으나 일제시대 음반화 하면서 경토리로 되어 토속성을 상실, 통속민요가 되었다. 1920년대 초부터 발매된 S·P 음반 중에서도 인기 있는 품목이었다. 이상준의 1921년《신찬속곡집》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1900년대 초에 잡가로 널리 불렸음을 추정케 한다. 선율은 간결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주고 가사에 나타나는 몇몇 단어는 강렬한 이미지로 듣는 이의 가슴을 울려주기도 한다.(한명희) 다음의 사설은 이옥화가 부른 소리의 사설로 리갈(C198)에 수록된 것이다. 각 마루마다 후렴을 달리하고 있다. 뒤의 사설은 소리꾼들에 의해 전승되는 사설이다. ◎ s김옥심제 정선아리랑 강원도 민요 중 백미로 꼽히며 예술작품으로 까지 평가를 받는 아리랑이다.(이혜구·한만영) 1948년 처음 김옥심에 의해 불려지게 된 것으로 알려져 오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1948년 강원도 순회공여 중 정선지역 공연에서 정선아라리를 듣고, 이창배가 이를 ‘무대소리’ 엮어보자며 구성해서, 그 해 김옥심에게 부르게 했다(한성자 증언)는 설이고, 또 하나는 김옥심이 구성하여 이창배 앞에서 불러보자 “그 소리 괜잖구먼”이라고 하여, 그 뒤로 김옥심이 무대에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이춘희·이호연·김영임도 유사하게 이해하고 있다.) 어쨌든 이 소리는 강원도에서 불려진 것이 서울로 온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해방 후 이창배와 김옥심에 의해 불려진 것만은 분명하다. 첫 부분은 엮음으로 사설을 주어 섬기고, 둘째 부분은 느린 한배로 나오는데, 여기부터 세마치 장단을 근간으로 늘였다 줄였다 한다. 셋째 부분은 후렴구로 대개 합창으로 받지 않고 독창으로 받는 특징이 있다. 전승 사설은 담음 세 가지이나 문헌 사설은 상당히 많다. 또한 정선의 아리리 중 엮음의 앞 사설은 모두 이 아리랑의 사설로 전환되어도 무리가 없는 것이다. 이 아리랑은 긴아리랑과 함께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 받고 경기소리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독자성을 인정받지 못하여 일반화 되지 못해 전승이 단절 위기에 있다. 주목해야 할 상황이다. ‘후렴-사설-소리’로 구성되었고, 한오백년과 함께 주요음과 꾸밈음이 같다. 이 두 가지는 음악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특히 설화상으로도 정선아리랑에서 분화되었음이 분명하여 이번에 김순녀를 통해 수록했다. 특히 한오백년은 정선아리랑 사설이지만 한문투여서 잘 불리지 않는 사설들을 가락에 얹었다. ◎ 김순녀의 전승체계 세계가 우리 음악을 주목하는 이유의 하나는 민속음악의 견고한 전승체계와 그것이 현장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세계 유네스코가 을 제정한 것이나 판소리를 으로 선정한 것도 그래서 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랑, 특히 정선아리랑의 전승체계는 우리 스스로에게나 세계에서 주묵 할만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번 음반의 주안점을 바로 이 같은 정선아리랑의 전승체계를 반영하는 것과 문헌 속에만 있는 사설을 되살려 내는데 두게 되었다. 이는 정선아리랑의 중요한 특징이며 속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적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전수·전승체계를 관찰 할 수 있는 대상을 찾는 과정에서 정선군 정선읍 덕송2리(송오리)에서 5대째 살아오고 있는 김연수 가계를 주목하게 되었다. 이 가계는 동네 소리꾼이셨던 남효자 할머니가 88년 작고하기 전까지 아들(김연수)과 딸(김옥자)과 손녀 넷에게 자연스럽게 소리를 전해주어 정서적 기반을 형성케 했고, 3대(1대 4, 2대 4, 3대, 2명)의 소리 층위를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특히, 장녀 순녀와 차녀 순덕 자매가 20대에 여러 경창대회에서 수상을 할 만큼 재능을 갖고 있고 언니는 서울에서, 동생은 고향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 적격으로 보게 되었다. 특히 언니는 유일한 강원도 출신 국악인으로 경기소리제로, 동생은 고향에서 전통적인 메나리제로 소리를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도 순녀는 양식적 경계가 희박 해져가는 시대적 상황에서 ‘퓨젼’ 또는 ‘크로스오버’를 대비해야 한다고 볼 때, 정체성을 갖고 경기소리제로 서울에서 정선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사실은 매우 이채로웠다. 해방직후 김옥심이 정선아리랑을 경기소리제로 불러 “민요라기보다는 예술음악”(이혜구)이라는 극찬을 받으며 정선아리랑의 성가를 높였듯이 ‘제2의 김옥심’으로 성장과 역할을 할 가능성도 있다는 점에서 보배롭다 하겠다. 그리고 동생 순덕은 사투리를 유지하고 기능에 것 넘지 않는 평균적인 성음의 소유로 교수자로 적합하며, 음량이 탁월하여 장시간의 사설치레가 가능하다는 점이 돋보였다. 이번 음반에서는 가족 내 세대별 전승 상황을 확인하기 위하여 3차에 걸쳐 가족 10인을 대상으로 녹음을 했다. 이 중에 두 자매를 제외하고는 현지에서 단 한 차례 자연스럽게 녹음을 하여 즐겨 부르는 사설과 꾸밈음의 차이 그리고 같은 노래를 어떻게 부르는가를 확인 하고자 했다. 그런데 어머니(순녀 중심)와 이모보다 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딸 넷 모두가 나름의 소리를 갖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이 가계의 기질은 모계적임을 알 수 있다. 앞으로 이 가계를 중심으로 한 전승 체계는 10년 단위로 관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자매를 중심으로 한 김연수 가계(家系)는 매우 이채롭다. 남효자(할머니·1899~1988) ↓ 김연수(71) + 전인식(74) 옥자(75) ↓ 귀봉(64) 순녀 순덕 + 김동수 순이 ↓ 순여 상근 상아 ◎ 김순녀(순영) 깁병하(예능보유자)·김진환(김뻑꾹예술단장)· 안비취(경기명창) 사사 1978년 정선여고 졸업 1980년 KBS 민요백일장 최우수상 수상(정선아리랑) 1981년 서울로 이주, 입단, 국악협회 정회원 1985년 제2회 민요경창대회 대통령상 수상(정선아리랑) 2002년 월드컵 기념 공연 출연 ◎ 사설의 주요 내용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 든다 *창밖은 삼경인데 보슬비가 오고요/ 우리둘의 먹은마음은 두사람만이 안다 정선아리랑에서 ‘바로 그 것’으로 인식되어 불려지는 대표적인 사설이 공동체의 생활 경험과는 동떨어진 첫 번째 사설이다. 정선아리랑 ‘제 일절’로 지칭 할만한데, 어떤 노래에서든 제 일절로 불려지는 데는 그 나름의 배경이 있다고 본다. 이는 고려말 이성계 중심의 역성혁명이라는 역사적 체험을 일상의 체험보다 중요하게 받아드린 특별한 계기에서 연유 한 것이다. 이 같은 사설은 전체적으로 소수이지만 정선아리랑의 정체성, 역사와 어원을 파악하는 데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주는 사설들이다. 이 의 일부를 김순녀가 부른 에서 소리화 했다. *한치뒷산에 곤드레 딱주기 님에맛만 같다면/ 올같은 흉년에도 봄살아 나지 *니나 내나 한번 여차 죽어지면 겉매끼 일곱매끼 속매끼 일곱매끼 이칠이 십사 열네 매끼 찔끈 짤끈 꽁꽁묶어 초롱불아 불밝혀라/ 상두꾼아 발맞춰라 어하넘차 떠들러매고 북만 산천에가 폭삭 썩을 인생들 남듣기 싫은 소리는 부디 하지 맙시다 정선아리랑을 ‘삶의 소리’라고 말하는 배경이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사를 노래하는 사설이 거의 전부라고 할 만큼 많고 내용상으로도 비중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애와 고부간의 갈등 같은 가족 관계에서부터 산간농가의 의식주와 관련한 소박한 일상사 까지 다양한 화자에 의해 표출된다. 특히 산간민들만의 화전생활상의 궁핍상과 아무리 먹어도 배탈이 나지 않는다는 곤두래와 딱주기 산나물로 보리고개를 넘겼던 사연 등 산속(山俗)이 그대로 노래되고 있다. 그런데 정선민들은 이러한 곤궁한 생활을 결코 부정하거나 도피하려 하지 않는 긍정적인 심성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정선아리랑을 ‘사랑의 노래’라고 하기도 한다.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올동 박이 다떨어 진다 *정선읍내 물래방아는 사시장철 물살을 안고 빙글빙글 도는데/ 우리집에 저 멍텅구리는 날 안고 돌줄모르나 남녀간의 사랑과 질시 그리고 봉건시대의 악폐로 꼽히는 조혼 문제, 이로 인한 성적 갈등도 희화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주로 여성이 화자일 경우가 많다. 뿐만 아니라 아우라지 처녀 사연의 사설은 산간 처녀 총각의 애뜻한 정한을 담고 있다. 또한 딱따구리의 강한 부리를 대비하여 조로(早老)한 남편의 성적 무능을 나무라는 우의적인 사설도 원망이기 보다는 간절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때 여기에 포함된다. 이점에서 같은 성애를 그렸다 해도 진도아리랑의 대담하고 질박농탕한 성애의 묘사와는 다른 것이다. *이웃집은 다문다문 山은 울울창창/ 山水좋고 人心좋아서 무릉도원일세 *몰운대 방석에는 신선이 놀던 곳이요/ 층대 밑에 맑은 폭포 금상첨화 이루네 생활 주변의 자연경관을 긍정적으로 묘사한 사설들인데, 기암절벽·약수·꽃 등을 그린 것으로 극소수이지만 과 중복되기도 한다. 이는 공동체의 체험에서 그려진 것이기 보다는 외부인의 시각에서 그려진 것이라고 본다. 정선지역민들에게 있어서 주변 자연물은 오히려 생활의 장애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선에서 ‘무릉도원’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역설적으로 그만큼 척박한 사정임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참고문헌과 각주 생략) *정선사십리 발구덕십리에 삼산 한치인데/ 의병난리가 났을때도 피난지로다 *사발그릇이 깨어지면은 두 세조각이 나는데/ 38선이 깨어지면은 한덩이로 뭉친다. 내용상으로는 고려말 격변의 상황으로부터 근대사 까지, 특히 일제강점기 저항적 의식이 표출된 사설들을 말 한다. 아마도 단일 민요에서 우리의 전 역사를 노래한 경우는, 그것도 거의 저항적인 의식으로 노래되기는 정선아리랑이 유일하다고 본다. 이 속성 역시 정선아리랑의 정체성의 한 단면인데, 려말선초(麗末鮮初) 격변의 역사상황을 각별하게 받아드린 체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위의 첫 번째 사설은 구한말 의병전쟁의 한 거점이 정선이었음을 말하는 것이고, 두 번째 사설은 남북 분단상을 생활어로 표출한 것이다. 이렇게 정선아리랑은 국가적 상황을 지극히 일상적인 언어로 표출, 관념이 아닌 체험으로 구체화 하고 있다. 그래서 정선아리랑을 ‘역사의 노래’라고 말하게 된다. 이번 김순녀의 발표를 통해 모든 아리랑의 시원이 정선아리랑에 있고, 한오백년·강원도아리랑·경기제정선아리랑이 정선아리랑의 전 바탕에 함께 있는 것임을 알리는 계기가 되리라는 기대를 갖는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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