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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5)어데예 아니라예 핑계만 찾지 말고 좋으면 좋다고 눈만 껌뻑 하이소.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나는 넘어가네. 감상 "가가 가가?” ‘그 사람이 아까 그 사람이었어?’라는 뜻의 경상도 말이다. 사투리를 다른 지방 사람들이 대뜸 알아듣기는 쉽지 않다. 서울 남자와 대구 아가씨가 데이트 중이다. 남자: 나는 아가씨가 좋은데 그 쪽도 나를 좋아해요? 여자: 어데예 (자기도 ‘그렇다’는 뜻이다.) 부정으로 표현하는 예도 있다. 남자: 우리 나중에 다시 볼까요....? 여자: 언제예(언지예)...? (거절하며 튕기는 말이다.) 남자: (날짜를 정하라는 말로 알아듣고는) 다음 주 토요일에 봅시다. 여자: 어데예...?(이건 진짜 싫다는 뜻) 이 쯤 되면 소통이 먹통이다. ‘아니라예~’도 ‘괜찮다’는 뜻의 긍정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부정과 긍정이 혼용되기 때문에 전체 분위기와 문맥을 이해하지 않고는 알아듣기가 만만치 않은 것이다. 수줍은 아가씨의 감정표현은 더욱 난해하다. 차라리 눈을 껌뻑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사투리는 이해의 차원을 넘어 듣는 것만으로도 정겨움으로 미소가 인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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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얼, 기묘년 설날 새아침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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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6)<br> 백자철화제기보편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이규진(편고재 주인) 할고대라고도 불리는 쪽굽에 돋을무늬 같기도 한 연주문 등이 있는 등 전형적인 17C 관요산 제기의 일종인 백자철화제기보편이다. 보는 곡식을 담아 놓는 제기로 둥근 형태에 귀가 달리고 주로 동으로 만들지만 백자도 있다. 백자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17C로 와 개선되기 시작한 전형적인 제기 중의 하나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도편은 일찍이 지인에게서 양도를 받은 것으로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쪽굽에 양각의 연주문과 그리고 음각의 초화문 등은 상림리 외에도 선동리 등 17C 관요에서 더러 보이는 백자보의 특징이다. 내게는 이러한 도편이 여러 점 있다. 그러면서도 지인을 통해 이 도편을 입수한 것은 철화무늬 때문이다. 17C 백자에서 철화란 흔히 볼 수 있는 장식기법이다. 임란 후 도자기 산업의 급격한 몰락과 구입의 어려움에 따른 청화의 소멸은 대용품으로 철화의 등장을 강요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자철화제기보편에 대한 내 지극한 관심은 단순히 철화가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는 세로로 붙어 있는 연주문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들어 있는데 초화문의 정확한 종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추초문 같은 느낌이 들고는 한다. 추초문이라고 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은가. 즉 금사리 시기 몇 줄의 선을 청화로 그려 넣어 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도자기 애호가들을 매료시키는 그 추초문 말이다. 그런데 백자철화제기보편의 철화무늬가 바로 이를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안료는 달라도 이러한 17C 철화무늬가 18C 청화무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흥미롭고도 귀중한 자료이겠는가.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광주시 일원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가마터 중에서도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도를 벗어나 마차 길로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드문드문 민가가 있는 곳이 바로 상림리인데 이곳에도 백자 가마터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굽 안에서 보이는 간지로는 신미(辛未,1631) 계유(癸酉,1633) 등이 출토되고 있어 17C 관요 중에서는 탄벌리 다음으로 이른 시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에서는 청화는 물론 없고 철화가 보이지만 이 또한 흔치는 않다. 더구나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무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여간 귀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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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즘한글서예가전에서 만난 사할린아리랑사할린아리랑 따뜻한 조선땅을 놔 두고 가라후토엔 내 여기 왜 왔나 풍파 사나운 바다를 건너 한많은 南樺太 징용왔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의 초청을 받고 13일 인사동 한국미술관에 도착했다. 개막식을 마치고 30명의 작가가 내놓은 100점이나 되는 한국 전통문화 서예작품들을 감상했다. 이종선 회장님이 축사를 부탁하셔서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은 바로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가서 해방이 되었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70년을 러시아 국민으로 살아야 했지만 우리는 독자적인 한글이 있어서 당당하게 디아스포라와 고난을 넘길 수 있었다."라는 말이 자연스레 나왔다. 그래서 러시아 전국에서 사할린에서만 한글판 새고려신문이 존재한다. 전국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다양한 작가들의 다양한 서체로 표현 된 아름다운 서예작품이 되어 걸려 있다. 한국 전통문화 '서예'라는 예술분야인데 우리나라를 상징하는 한글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 전시회이다. 아름다운 서체로 쓰여진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서예로 탄생한 다양한 한글 서체는 꽃이 되고 나비가 되어 내게 말을 걸어온다. 전통문화를 지키는 이즘협회 작가들에게 존경심을 보낸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계승이 안되는 분야이다. 북한에는 서예전시회 같은 창조적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들이 국악신문사에 기증이 되어 국내외에서 전시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한얼 이종선 회장님이 직접 '사할린아리랑' 작품 앞으로 안내를 해주셨다. 그동안 국악신문 수요 연재 한글서예로만 받아 보았던 예술작품을 직접 보니 감동이 밀려왔다. 특히 이 작품은 사할린 한국어 교육의 리더 공노원(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선생이 갑자기 세상을 뜨기 5일 전 (2022년 9월 25일자) 수요 연재로 나와서 더욱 스토리를 더하는 작품이다. 당시 9월 28일 양구 두타연에서 개최 되는 PLZ축제에 인천과 양주에 사는 사할린동포들이 초청 되었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이종선 선생의 사할린아리랑 작품을 공노원 선생이 인쇄해서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공선생은 한얼 선생의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 사설' 수요 연재 내용을 자라나는 고려인 학생들에게 한글 수업에서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우리 부모들이 사할린에서 가장 많이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다. 당시 일하면서 힘들때, 고향이 그리울 때, 결혼식 같은 날에 마을 사람들이 모이면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리랑이 유일하다. 그래서 누구나 모이면 작대기로 장단을 두드리며 아리랑을 흥얼거렸다. 러시아나 유럽 어느 민족에게도 하나의 노래로 부를 수 있는 곡은 없다. 우리 민족은 언제 어디서든 아리랑으로 하나가 된다. 올해는 파주에 정주한 150명 사할린 동포들이 귀국 15주년기념 행사로 오는 23일 '파주아리랑 콘서트'를 개최한다. 그날 휘날레에서 사할린 가수들과 이혜솔 명창이 관객들과 '사할린아리랑'을 함께 부르기로 했다. 2017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사할린에는 아리랑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2020년 사할린 정부는 우리에게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앞에 아리랑공원과 아리랑누각을 선사해 주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이 불리는 전국 지역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져있다. 정선, 진도, 밀양, 문경, 상주, 영천 등. 사할린 아리랑공원에도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담긴 이 사할린아리랑이 새겨진 사할린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오늘 이 아리랑 작품들이 사할린 전시장에서 걸리기만을 고대해 본다. 우리 동포들에게 큰 자긍심이 될 것이다. 현재 러시아에서는 한류 열풍으로 한글학과도 생겨나고 한국어와 한글을 배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할린 동포들을 대표해서 이 행사를 개최한 (사)이즘한글서예협회 이종선 회장과 지원을 해주신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에게 감사를 드린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한다. 사할린아리랑 무정한세월 야속하다 청춘시절 날 데려와 팔십삼이 먹도록 여기서 다 늙어 영혼이 되네. 아이구 원통하고도 참말루 싫어 누구게다 한을 다 풀까요.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혼저 자탄 애탄하며 팔십 서이를 살어 나와 누구게다 이런 한을 풀겠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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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이즘한글서예가전시회... '아리랑 특별전'을 축하하며오늘 네번째 맞는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2002년 제2회 이즘한글서예가전을 참관하고, 아름다운 한글서예 매력을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우리나라 대표하는 서예단체 작품답게 다양하고 웅장한 작품을 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문화적 자긍심을 지켜가는 이즘회 회원 작가들의 면모를 보면서 존경심을 감출수가 없습니다. 우리 문화의 정체성은 전통을 지키며 민족적 가치를 발현시켜 나가는 데에서 비롯됩니다. 그런 면에서 국악과 함께하는 서예는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주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글서예는 서예문화권에서 우리 민족의 정체성과 우월성을 나타내는 독보적 분야입니다. 저희 국악신문에서는 국악과 한글서예를 연계시키기 위해 매주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을 주간으로 연재하여 현재 200회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시조 가사. 가곡 종목의 사설로 시작하여 지금은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사설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독자들은 앞으로 신민요 시설은 물론, 창가와 가요 사설까지 이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코너는 주간 접속 수가 가장 높은 연재물입니다. 이는 서예술이 국악신문 독자들을 감동시킨 것이며, 우리 전통예술 서예술과 국악의 융합'이라는 성과로 평가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동안 연재를 맡아주신 한얼 이종선 선생님의 서체의 기운은 물론, 깊고 풍부한 해설의 격조를 국악계가 받아 들이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국악신문 독자들이 한글서예에 다가갈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특히 오늘 이번 전시에는 '아리랑특별전'이 함께 열렸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세계 각지에서 불리는 아리랑이 아름다운 한글서예와 만나 어떤 꽃을 피워낼까? 기대가 큽니다. 오늘 3월 꽃향기를 찾는 셀레임으로 '2004 이즘전' 그리고 그 속에 '아리랑특별전'을 우리 독자들과 전국 아리랑 식구들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아리랑 작품들은 전국 아리랑 전승지역과 국내외 동포사회에 널리 알리는 기회를 마련하는데 힘을 기울이겠습니다. 다시 한번 이즘전을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4년 3월 13일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 기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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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85)<br> 임수정 명무의 '진도북춤' 춤사위(박병천 류)진도북춤 진도북춤은 전남 진도 지역에서 양손에 채를 쥐고 추는 춤으로, ‘진도북놀이’라고도 일컫는다. 북은 몸에 밀착시켜 어깨끈을 메고, 허리끈으로 조여 묶는다. 양손에 채를 쥐고 양쪽 모두 연주한다는 뜻에서 양북이라고도 하고, 채를 쌍으로 들고 춘다고 해서 쌍북이라고도 한다.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 박병천은 북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집(코리아하우스) 악장 시절에 진도의 기교적 춤사위를 곁들인 진도북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인정받았다. 박병천은 서울의 집 때부터 안무하고 재창조한 북춤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대불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전통무용가 임수정은 진도 북춤의 명인이며 진도씻김굿 예능보유자 박병천 선생으로부터 개인이수패와 금으로 만든 정주를 하사 받은 단 한사람이다. 해마다 춤판의 테마를 달리하며 전통춤판을 펼칠 때마다 화제를 모아왔다. 한국무용가로서는 드물게 악(樂),가(歌),무(舞)를 두루 섭렵한 임수정(국립경상대학교 민속무용학과 교수)은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승무), 제97호(살풀이춤)의 이수자이다. 전통춤에 내재된 예혼(藝魂)과 기운생동한 예술세계를 선보이기 위해 오랜 세월 전통춤에 천착하며 여러 대가의 춤을 섬기면서도 그 원형을 잘 전승한 춤꾼으로 인정받고 있다. 또한 한국 전통춤의 진흥을 위해 다양한 공연과 학술활동, 대중화에 앞장서 왔다. 국내외 초청공연 및 전통춤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전통춤에 매진한 활동을 인정받고 있다. 임수정 경상국립대학교 인문대학 민속무용학과 교수 한국전통춤예술원 대표, 박병천류 전통춤보존회 회장, 무용역사기록학회 부회장, 한국전통춤협회 이사,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승무)와 제97호(살풀이춤)의 이수자 제15회 한밭국악전국대회 명무부 대통령상 수상. 2018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선정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전통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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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4)어떤 잡놈이 임 좋다 했냐 알고 보면은 큰 원수로고나 아리아리랑 서리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감상 처음 만나 정이 살가울 때는 웬만한 서운함도 봄눈 녹듯 하지만 정이 식어 버리고 나면 하는 짓, 보이는 것 마다 못마땅하다. 땜장이를 시켜서라도 떨어진 정을 때우고 싶은 것은 남은 정이라도 있으니 그나마 낫다. 하고 한 날 술주정에 밥 먹듯 외도라도 할라치면 ‘웬수’도 이런 ‘웬수’가 없는 것이다. 불 같이 일어난 화는 엉뚱한 사람에게 퍼 부어지고, 사랑 노래 부르는 사람은 이내 쳐 죽일 ‘잡놈’이 되고 만다. 막무가내로 꼬여 버린 심사를 민체로 가로 써서 표현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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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춤협회, 한국전통춤협회, "전통춤문화제 수건춤 100년사" 성료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이사장 한혜경)가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학계에서는 이번 수건춤 100년사 재현은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첫째날 해설을 맡은 원로 전통춤연구가 이병옥 교수는 수건춤은 교방춤, 재인청춤, 무속계열춤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번에 다 보여주는 판이 벌어진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둘째날 해설을 맡은은 양종승 박사는 수건춤 100년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우리 전통춤 뿌리를 알게 하고 전승 유파의 다양성을 알게 하는 귀한 무대이었다. 전통민속예술 수건춤의 지속과 변용을 보여준 학계의 평가다. 이 행사장에서 한혜경 이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Q. 한국전통춤협회 언제 창립되었나요. A. 한국전통춤협회 창립을 위해 2012년 7월 7일 창립추진위원회(위원장 채상묵, 위원 김정녀, 한혜경, 양종승, 김은희, 진유림 등 7명)가 결성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2017년 4월 6일 정부로부터 공식 사단법인이 인가되었다. Q.설립 취지는. A. 한국 전통춤은 한민족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발전되어 온 우리 고유 민족예술의 모체이자 시원이며 한민족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역사이며 철학이다. 따라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춤 계승과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임회원 모두는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전통춤의 무궁한 창성을 위해 전통춤의 체계적 보존전승은 물론 사회교육, 홍보진흥, 학술연구, 인재양성, 공연기획, 국제교류, 대외협력, 춤 콩쿠르 등을 위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Q. 한국전통춤협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한국전통춤창립추진위원회가 2012년 발족되고 위원장으로 채상묵 교수를 모셨다. 한민족예술의 정수, '한국전통춤'을 널리 알리고자 각 장르별 전통춤보존회로 구성되어 창립된 국내 유일한 협회이다. Q. 한국전통춤협회 창립 취지는? A. 전통은 한민족 역사와 함께 탄생하여 발전되어 온 우리 고유 민족예술의 모체이자 시원이며, 한민족 영혼과 사상을 담고 있는 역사이며 철학이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는 민족춤 계승과 발전을 위해 그 역할을 확대해 나가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취지를 펼치고자 전국 전통춤을 전승하고 있는 보존단체가 협력 관계로 뭉쳤다. 2012년 초부터 민족춤의 체계적 보존전승은 물론 사회교육, 홍보진흥, 학술연구, 인재양성, 공연기획, 국제교류를 위해 회합을 갖고 범 전통춤 관련자 모임을 추진하여 왔다. 이러한 결실을 맺고자 우리는 한국전통춤협회 창립과 더불어 시대적 사명감을 안고 전통춤의 무궁한 창성을 위해 더욱 분발하고자 한다. Q. 초대 위원에는 어떤 분이 동참하셨는지요? A. 채상묵교수를 위원장으로 모시고 김정녀(예능), 한혜경(예능), 양종승(연구), 김은희(예능), 진유림(예능)으로 출범했다. Q. 한국전통춤협회은 초대 이사장은 A. 초대 이사장 채상묵, 2대 이사장 이길주에 이어 3대 이사장은 제가 맡고 있습니다. Q.지난 해 얻은 성과는 A. 주요 사업으로 <대한민국전통춤문화제>, <한국춤 차세대전>, <한국춤 학술세미나>, <전통춤 학술총서 발간>, <한국춤 대경연>, <한국전통춤 보물전 해외 공연>, <전통춤 연수회>, <한국춤 전국지부공연>, <대한민국전통춤 예술대상 시상식>, <대한민국전통춤 4대 명무상 시상식> 등이 있다. 전통춤 발전과 보급을 위해 제1회전통춤대경연대회를 개최했다. 참가 부분은 학생부, 일반부, 명인부, 신인부로 나누었고. 김숙자 명인상, 이매방 명인상, 한영숙 명인상을 제정했다. 장르는 전통춤에서 타악춤, 창작무용까지 확장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심사규정을 엄수하고 진행은 투명하게 이루어질 것이다. Q.올해 역점 사업은 A.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첫째날에는 이병옥 교수의 해설과 함께, 최지원의 군무 동초수건춤, 박은하의 살풀이춤, 이지은의 도살풀이춤, 고재현의 군무 교방입춤, 이정애의 쌍수건춤, 김진원의 살풀이춤, 이미숙의 군무 경기수건춤이 펼쳐졌고, 둘째날에는 양종승 박사의 해설과 함께, 윤미라의 달구벌입춤, 채향순의 살풀이춤, 권영심의 교방살풀이춤, 임현선의 즉흥무, 문숙경의 군무 살풀이춤, 김경란의 논개별곡, 이정희의 군무 도살풀이춤이 열렸다. 올해에도 제2회전통춤대경연대회를 개최할 예정이다.한국전통춤협회는 해외 지부를 거점으로 미국 및 유럽과도 연결하여 한국의 전통춤 보급과 전수 활동을 펼치려는 계획하고 있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씀은 A.유구한 역사속에서 우리선조들의 피눈물나는 질곡의 삶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보존및 계승ㆍ발전이라는 사명감에 오늘 날 찬란한 국악발전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작금의 국악계는 온전한 계승의 문제점을 안고있다고 보고있다. 찬란히 빛나야 할 우리의 국악발전은 염두에 있지아니하고 이권 다툼과 계파싸움이 팽배해 있다고 보여진다. 우리의 후학들과 후손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남겨줄수 있을것인가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부분이라고 생각한다.문화유산은 먼저 올곧은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습득하고 터득된 예술세계를 물려줌이 마땅하다고 본다. 서로 일보양보하고 화합하여 개인의 영리보다는 국악계의 발전을 꾀해야 할것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국악유산이 후대에 이르기까지 무궁한 보존 및 계승 발전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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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7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한류문화 컬럼니스트) 지난 회에서 삼국시대의 음악 문화적 배경과 그 안에서 만들어진 ‘어사용 토리(조)’와 ‘메나리 토리(조)’의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어사용 토리’에서 진화(進化)한 ‘메나리 토리’의 음악언어는 우리나라의 각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현재의 민요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메나리 토리’의 음악적 특징은 민요에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판소리, 무가, 범패에 이르기까지 소위 민속악이라 불리는 모든 장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음악들은 고려시대로 넘어가면서 어떤 모습으로 진화하였을까? 궁금해진다. (『신라향가음악』 박상진 지음, 참조) 『고려사』를 보면, 삼국의 속악이 고려조에 사용되었고 또 그것들은 조선조 초기까지도 시용(時用)되었다. 일부 고려가요 중에는 향가의 잔형으로 보이는 작품들이 고악보인 정간보에 실려 함께 전하기도 한다. 주지하다시피 <정읍사>와 같이, 조선조의 많은 음악들은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에서 계승되었던 것들이다. 고려조의 음악들이 삼국시대 음악을 계승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보해주는 기록이 『고려사』에 실려 있다.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4회’에서 간단히 언급했는데, 전문을 소개한다. "신라, 백제, 고구려의 음악은 고려조에 악보를 편성하여 함께 사용되었다. 그래서 여기에 부기한다. 가사는 모두 우리말이다. (新羅百濟高句麗之樂 高麗竝用之編之樂譜 故附著于此 詞皆俚語)” 『고려사』지 권 제25 악2 삼국속악조(三國俗樂條)에 실려 있는 글이다. 위의 기록은 왕조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계속 전승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이다. 그것은 전승예술에 비해 창작능력이나 활동이 그리 활발하지 못하던 시대적 정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겠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면, 향가음악이 고려가요에 자연스럽게 유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예술적 구조는 문법과 같은 무의식적 지식이어서 쉽사리 바뀌거나 완전히 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향가의 음악적 구조를 알기 위하여 고려의 음악, 즉 고려의 가요가 수록되어 있는 고악보(古樂譜)를 통하여 관련 악곡들의 음악적 구조를 분석해 보았다. 이러한 시도는 바로 향가가 고려시대까지 불렸다는 사실에서 착안하였으며, 시대적으로 가장 근린한 고악보를 통하여 향가의 편린(片鱗)을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 고악보는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이다. 『시용향악보』를 선택한 이유는, 연대가 가장 오랜 『세종실록악보』나, 그 직후에 이루어진 『세조실록악보』와 함께 조선 전기에 속하는 고악보에 해당하며, 오음약보(五音略譜)와 정간보를 이용하여 기보된 점에서 악보의 해독이 용이하다는 이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시용향악보』라는 서명(書名)이 갖는 뜻은 "현재(고려시대부터 조선조 성종까지 추정) 사용하고 있는 ‘향악을 모은 악보’”라는 뜻이다. 『시용향악보』는 매 1행 16정간으로 이루어진 정간보이며, 고려가요가 수록된 악보로서는 가장 오래된 정간보(이동복 글 참조)인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향가의 편린을 찾는 분석 작업이 이루어졌는가? 『시용향악보』에는 총 20곡의 악보가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사모곡> <귀호곡(가시리)> <서경별곡> <유구곡> <청산별곡> <풍입송> <정석가> 등 7곡이 고려가요에 속한다. 이 중 국악학계와 국문학계에서 똑같이 고려가요로 인정하고 있는 <사모곡> <귀호곡(가시리)> <서경별곡> <유구곡> <청산별곡> 등 5곡의 고악보를 분석하였다. 이 고려가요의 5곡에 대한 분석 작업을 위해, 제일 먼저 『시용향악보』의 정간보를 현재에 사용하는 오선보(五線譜)로 바꿔 기보하는 역보(譯譜)를 하였다. 그 이유는 오선보는 음악의 높낮이와 음길이, 그리고 조성(調性)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사모곡> <유구곡> <귀호곡(가시리)> <서경별곡> <청산별곡> 등의 5곡 모두 3부형식이다. (2) 5곡 모두 하강종지를 한다. (3) <귀호곡(가시리)> <서경별곡> <청산별곡> 등은 동일한 선율에 여러 절을 얹어 부르는 유절형식으로서 오늘날의 민요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4) <서경별곡> <청산별곡>은 ‘위두렁셩 두어렁셩 다린디러리’이나 ‘얄리 얄리 얄라성 얄라리 얄라’라는 입타령이 반복되는 후렴을 보인다. (5) <사모곡>의 감탄사(차사) ‘아소 님하’는 10구체 향가의 감탄사와 시조의 감탄사와 연결된다. ‘고려가요’를 분석한 결과, 현대의 노래 형식인 3부형식, 메나리 토리 형식인 하강종지, 민요에서 보이는 유절형식과 시조 형식, 향가의 잔형으로 보이는 10구체 향가 등이 나타나 있다. 다음 회에 계속 이어 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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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6) <BR> 狂氣와 執念의 사나이윤대성/희곡작가 무세중의 본명은 김세중이다. 그는 성균관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1962년 드라마센타가 개관되어 거기에 연극 교육기관인 연극아카데미가 생겼을 때 1기생으로 들어온 연극 지망생이다. 필자도 같은 과정에서 김세중과 함께 공부했다. 그때 아카데미 원장은 여석기 교수있고 우리를 가르친분 들은 柳溪 吳華變 金正鈺 梁東君 李杜鉉 등이었다. 약 20여 명의 인구생들은 매일밤 드라마 센타에 모여 강의를 듣고 명동에 내려가 술을 마시며 연극에 관해 토론했다. 이때 김세중과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별로 딴일할 것도 없는지라 매일 낮부터 하루종일 드라마센타에서 공연되는 연극을 보고 연습장면도 참관하면서 연극의 체질을 익혔다. 틈틈히 남산에 올라가 소주도 마셔 가면서. 그러다 얘기가 미진하면 그의 돈암동 집까지 가서 마시고 떠들며 소일했다. 우리의 대화는 항상 연극에 대한 것이었고 나의 작품 구상에 대한 비판이였다. 그는 나보다 늘 앞서가면서 어린 내 생각을 깨우쳐주고 자극을 주었다. 내 초기 작품의 상당수가 그의 조언을 받아 완성된 것들이다. 그때부터 우리는 우리의 전통민속에 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는 드라마센타에서 처음 초빙한 김노인으로부터 봉산탈춤을 배우고 있었다. 아마 그가 운동에 관심을 갖게되고 결국 몸짓을 통해서 목소리를 내는 방법을 자신의 연극표현의 수단으로 삼은 것도 이것이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그는 드라마센타의 극작 WORKSHOP에도 참여하여 작품도 썼다. 그러나 그의 분방한 사고와 열기를 담기에는 원고지란 매체는 그의 사고를 제한하는 속박으로 작용했다. 그는 직접 작품을 제작하고 연출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이 출연하여 그의 몸 속에서 끓어 오르는 열기를 발산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 당시의 연극인들은 김세중하면 좀 돌지 않았나 할 정도로 그의 광기는 점차 도를 더해 갔다. 당시는 박정희 정권이 그 압제의 사슬을 조일때라 김세중의 광기를 용납할리가 없었 다. 그의 작품공연 기도는 번번히 제지당했다. 그는 강열한 메세지가 담긴 공연을 포기해야만 했다. 그는 민속춤, 탈놀이등의 전통연희로 돌아왔다. 이 때 김세중은 그의 성을 무로 바꾸었다. 그리고 민속주점을 경영했다. 그가 가장 어려웠을 시절이면서 또한 각오를 새롭게 한 시절이기도 하다. 성까지 바꿀 정도로 이 나라는 그를 받아들이기엔 너무 독선적인 제도하에 있었고 또한 연극계는 편협했다. 어느날 그는 훌훌 털어버리듯이 나라를 떠났다. 베를린은 그에게 신천지였다. 각국에서 모여든 광적인 정열을 지닌 연극인들과 무세중은 길 어울리는 앙상블을 이루었다. 역시 무세중은 리더였다. 그의 탄탄한 전통예술에 대한 이론과 춤 실력(?)으로 단연 그의 작품은 베를린의 실험극단들 중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마음몇 벗고 마음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곳, 그곳이 베를린이였다. 몇년 후 그는 귀국해서 "통·막· 살" (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이란 작품을 발표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 후 그는 계속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작품을 발표해 언어를 배제하고 몸짓과 소리만으로 강한 메세지를 진부해지고 획일화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 없진 않지만 그는 부단히 실험하는 자세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새 목소리를 갈구하는 관객이 늘고 있다. 무세중에게도 또 한번의 변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새 작품 "上下左右,東西南北을 기대한다. 거기서도 틀림없이 그의 광기가 그 집념을 빛을 낼 것이다. 1988년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