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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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4)<br>서한우 명인의 '버꾸춤' 춤사위버꾸춤 버꾸춤은 전라남도 해안 지역인 완도의 금당도에서 행해지던 농악놀이에 속해 있던 것을 서한우가 무대화 한 춤이다. 버꾸춤은 전라 우도 농악의 판굿 가락을 바탕으로 하는 형식의 작품으로 화려한 가락위에 몸의 호흡과 동작이 얹어져 다양하고 아름다운 동작들로 표현되고 구성 됐다. 버꾸는 농악북보다는 작고, 소고보다는 큰 중북으로, 버꾸에 끈을 만들어 손목에 걸고 움켜쥐어 가락을 치며 버꾸를 돌리고 차올리며 춤을 추는 것이 특징이다. 토속적이며 투박한 마당의 놀이성의 동작들을 무대 예술로 승화시켜 개성 있는 움직임을 창출해 냈고 후반부로 갈수록 폭발적인 역동성은 최고의 신명과 흥을 자아낸다. 복색 또한 삼색띠와 패랭이의 전통 서민복의 조화로 자연스럽고 멋스러우면서도 그 자태의 버슴새가 일품이다. 서한우 명인은 농악인으로 시작했다. 전남 고흥 농고에서 학생으로 농악단을 만들고 친구들을 끌어 모아 농악 전국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하면서, 농악인의 대부 정인삼(경기도무형문화재 제58호 고깔소고춤 보유자)선생을 만나 한국민속촌으로 상경하여 본격적 예인의 길을 걷게 됐다.특히 대학에 타악과가 따로 없던 시절 무용과를 전공, 본격적으로 무용에 심취하게 됐고, 국가단체에서 기라성 같은 예인들을 만나면서 최고의 경험을 갖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만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가지고 싶다는 발상에서 타악의 춤 '버꾸춤'을 복원하게 된다. 이러한 내실은 이미 1982년부터 신기남,김병섭선생에게 설장고 사사를 받으면서 타고난 예술적 기예를 더욱 다지게 된다. 1994년 03월부터 1996년 고 박병천 선생께 진도북춤 및 장단 사사했다. 2023년 대구광역시와 (사)한국국악협회 대구광역시지회가 공동 주최한 제34회 대구국악제에서 버꾸춤보존회 이사장 서한우씨가 버꾸춤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현재 전국에서 많은 국악인들과 일반인들이 버꾸춤을 전수 받으려는 인기도가 높다. 버꾸춤동호회도 지역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서한우(1964년, 완도 출생) 1982년 신기남,김병섭선생에게 설장고 사사 1994년 박병천 선생에게 진도북춤 및 장단 사사 1990~2006년 (재)서울예술단 무용지도위원 겸 타악감독 역임 2007~2008년 (재)국립정동극장예술단 예술감독 역임 2009~2012년 서울국악교육연구소 예술감독 역임 2017~2021년 (사)한국국악협회 농악분과 위원장 2015~현 천안시립흥타령풍물단 예술감독 2010~현 서울국악예술단 예술감독 2010~현 (사)한국농악보존협회 이사 2016~현 (사)전통예술진흥회 이사 2017~현 (사)우리춤협회 부이사장 2018~현 (사)보훈무용예술협회 부이사장 2023~현 (사)한국전통춤협회 부이사장 2014~현 서한우버꾸춤 보존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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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3)<br>무세중 명인의 무사위 춤사위무(巫)사위 우리나라 1세대 전위예술가 무세중 선생이 지역 탈춤을 전수 받고, 탈춤의 기본 동작에 철학적 의미의 '태극'(太極)을 조합시켜 재창작한 춤사위이다. 대학 신입생 20세 무세중은 봉산탈춤(이근성), 양주별산대놀이(김성대), 동래 들놀음(박덕업), 남사당 덧뵈기춤(남형우) 춤사위를 스승에게서 전수 받은 후, 탈춤의 근원을 찾아 또 다시 전국을 누볐다. 1969년 '한국 민속 가면무극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가졌다. 이때 발표한 춤사위가 이후 무사위의 근간이 된다. 이후 연극영화과 강의 후 새내기 학생들에게 무사위를 가르쳤다. 민속악회 ‘시나위’ 창립, 민속극회 ‘남사당’ 결성, ‘동아민속예술원’ 창립, ‘극단 민족’ 창립 등 ‘민예부흥운동’의 최 전위에 섰다. 1971년 동아민속 예술원을 설립하고 극단 민족을 창립하여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의 민예 부흥 운동으로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서 왔다.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男舍堂祭)를 기획 연출,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여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를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무세중은 태생적으로 굿에 열정을 품은 굿쟁이로 태어나 전위 전사의 무당 칼과 창을 들고 민족 분단의 벽을 치고 민족 분열을 용서치 아니하며 민족의 앞을 지키고자 전위(前衛) 행동의 공연을 끊임없이 저질러 왔다.(중략) 또한 무사위(musawee)라는 무세중만의 독특하고 유일한 춤과 연기 양식의 한극을 만들었으며 그의 춤은 혼을 부르는 춤사위로 영적(靈的) 움직임이 그 좌표가 되며 태극 원리처럼 철학적 상징의 즉흥무로 이어지고 있다."(『무세중의 전위 예술 충돌 50년』서평) 무세중(전위예술가)1937년 서울생. 본명 김세중전위 예술가, 시인, 대동전위극회 대표 사단법인 아리랑연합회 명예 이사장 학력서울고등학교,성균관대학교 불문학과,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연극학과 졸업드라마 센터 연극 아카데미 (서울예술대학) 졸업베를린 자유대학 (Freie Universität Berlin) 민족학과 수학경력 1971년 극단 <민족>창단 동아민속예술원 원장 1972년 『한국민속극춤사위연구』(김세중, 동아민속예술원) 1973 민속악회 시나위 정기연주회 1975 마당극제 노비 문서 전시회 무세중 창작 발표회 <전통과의 충돌> 1977 한국 전통 택견 발표회 1969-1976년 사단법인 민속극회<남사당> 대표1977년 독일 Berlin극단 대표 1982-2020년 통일아리랑 (통상100여 회 발표) 통막살(통일을 위한 막걸리 살풀이) 발표 1983년 중앙대학교, 한양대학교, 서울예술대학교, 대진대학교/대학원 연극과 출강(1983-2005)(1987-현재)대동전위극회 대표 2011년 제6회아리랑 상 수상 연출가, 안무가, 통일문화연구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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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2)<br>박홍주 명인의 '문둥북춤' 춤사위문둥북춤 문둥북춤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제5과장 중 제1과장에 연희되는 춤이다. 문둥북춤은 한의 춤이다. 손과 발부터 떨려서 온 몸이 떨림으로 시작되어 처절하기조차 한 신음을 토해내는 춤이다. 죽지 못해 살아온 질긴 목숨줄을 원망하며 춤이라도 추어 본다. 세상을 향해 절규을 하듯이 허공을 향해 한을 표출하는 비애의 춤이다. 경상도에서 친한 지인을 만나면 '아이고 문둥아'라고 인사를 해야 친한 사이인 것이다. 보기 흉한 문둥이를 친구로 이웃사촌으로 품어주는 정이 담겨있다. 그래서 민중들은 이 춤을 보고 슬픔을 뒤로 하고 잠시나마 위안을 받는다. 춤을 추고 나서 문둥탈을 벗으면 눈시울이 젖어 있다고 한다. 춤추면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슬퍼서 울지않을 수 없다고 한다. 굿거리 장단에 문둥탈을 쓰고 등장하여 소고(小鼓)를 기묘하게 어루면서 슬픔과 흥분이 엇갈린 북춤을 한바탕 춘다. 양반의 자손으로서 조상들의 누적된 죄과의 인연으로 불치의 문둥병에 걸려 출세치 못하는 골수에 맺힌 원한과 비분 통탄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지만 그 추한 모습의 문둥이 자신은 그래도 양반이라는 특권에 만족하여 흥겨운 춤으로 한때 자아도취(自我陶醉)하니 이 장면은 추(醜) 속에서 미(美)를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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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1)<br>김진홍 명인의 '동래한량춤' 춤사위동래한량무 동래한량춤은 동래의 지역색이 강하고, 독특한 춤가락이 가미된 남성춤이다. 이 춤은 예로부터 소문난 명무들이 많아서 춤의 고장으로 불리우는 동래지역의 한량들이 추었던 춤이다. 전통적 극형식의 한량무는 경망과 기품, 진지함과 해학성을 넘나들며 해학과 풍자를 담아낸다. 능수능란한 자연스런 몸의 흐름에 따라서 흥과 한을 표출하여 춤의 완성도를 극대화 한다. 한국 남성춤만이 가지는 역동성과 멋이 담긴 춤사위가 지역마다 추는 형태는 조금씩 다르다. 경남지역 진주교방 계열의 김덕명류, 서울경기 지역 한성준류, 김인호 계열의 이동안류, 김덕순 계열의 김숙자류를 들 수 있다. '문장원류 한량춤'은 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되었고, 김진홍이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동래한량무는 동래야류와 동래학춤이 근간이 되어 만들어 졌으며, 다른 지역 한량무보다 풍류의 본질인 놀이적 요소와 자연친화력 요소가 내재된 자유로운 유희성을 담보하고 있다. 김진홍의 '동래한량춤'은 경상도 지역 특유의 배김사위를 구사하는 덧뵈기춤이 특징이다. 이매방의 초기 제자인 김진홍은 1935년 경남 하동에서 태어난다. 어린시절 부모를 따라 일본 오사카로 건너가서 메이지유신의 소산인 신문명·신문화가 꽃피었던 오사카의 도시문화 속에서 서구식 예술장르를 접한다. 1940년대 초반 귀국하여 부산 범일동에 안착, 6.25 전쟁이후 부산을 고향 삼아 정착한다. 이매방과 사승관계를 맺고 전통춤을 사사받는다. 한편 '동래야류'의 예능보유자 문장원 문하에서 '덧뵈기춤'과 '한량무'를 배웠다. 김진홍의 동래한량무는 유장미와 풍류적 의미가 짙게 배인 덧배기 춤사위가 일품이다. 특히 춤사위의 호흡이 맺고 풀리는 원리를 가지면서 그 안에서 자유로운 즉흥성이 조화롭게 순환된다. 무대 형식보다는 마당에서 더욱 돋보이는 춤사위를 펼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진홍(1935~ ) 1935년 경남 하동 출생 1951년 (부산)무용콩클대회 '남방춤' 입상(부산 동구 범일동 삼일극장) 이매방에게 승무 사사 이동안에게 태평무,진쇠춤 사사 1987년 승무 이수자 1998년 이매방류 살풀이 이수자 2006년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후보 선정 2010년 부산시무형문화재 제14호 동래한량춤'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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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0)<br>장금도 명무의 민살풀이춤민살풀이춤 "살풀이춤이 치밀하게 새겨 넣은 청자라면 민살풀이춤은 무심한 맘으로 담담하게 꺼낸 백자였다. 잘 짜인 살풀이춤이 조각보의 화려함이라면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은 채색하지 않은 결 고운 한 필 비단이었다. 장금도의 고립과 고독에는 송구하지만 춤에는 축복이었다. 단지 수건을 들지 않음이 아닌 한없이 흐르며 구사하는 즉흥이 그랬다. 그것은 우리 시대가 새롭게 다시 맞는 위대한 완성이다." - 진옥섭 저서 '노름마치'에서 장금도의 민살풀이를 담백한 맛이 일품인 전통 백김치에 비유하기도 했다. 민살풀이춤 전승자 장금도는 권번(券番, 일제강점기 기생조합) 출신으로 '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라고 회자된다. 이기권, 김준섭, 민옥행 등에게 판소리 다섯 마당을 김백룡에게 검무, 화관무, 포구락 등을 사사했다. 최창윤에게 '승무'를 '기러기춤' 일인자 도금선에게 '살풀이춤'과 '부채춤'을 전수받는다. 장금도는 권번 졸업을 앞둔 열다섯 나이에 군산극장에서 초연(初演)을 하게 된다. 그해 열린 '수재민 돕기 예기 연주회'에서 살풀이와 승무를 선보인 것. 이후 군산의 한량들 사이에 '춤은 장금도다!'는 말이 회자되고 시내 요릿집(요정) 앞에는 '장금도' 명패가 내걸리기 시작한다. 장금도는 예기 자젹시험에서 소리와 춤 모두 수석으로 졸업, 가무가 가장 뛰어난 예기로 인정받는다. 검무, 승무는 물론 소리에 능한 장금도는 열여섯에 명월관, 동양관(근화각), 만수장, 동해루, 쌍성루 등으로 놀음을 나가기 시작한다. 일본군 위안부 피하려고 열일곱 살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고 1945년 상경한다. 금정, 명월관 등으로 놀음을 나가던 그는 전쟁(1950년)이 터지자 그동안 모아놓은 돈을 꼭 싸쥐고 군산으로 내려온다. '큰 행사에는 임방울의 쑥대머리와 장금도의 민살풀이가 있어야 어울린다'고 한마디씩 하였다. '신이 내린 춤꾼'이란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철없는 아들이 춤추는 것을 반대하자 세상에 나오지 않다가 정범태 사진작가의 집요한 설득으로 80년대초부터 대중에게 다시 알려지게 된다. 장금도의 춤사위는 즉흥적인 춤이지만, 살풀이장단, 자진모리장단, 동살풀이장단, 살풀이장단으로 단계를 거치는 기승전결의 흐름을 보이는 등 무대공연으로 체계화 되어 있다. 장금도의 민살풀이춤의 특성은 정적이면서 끊어지지 않는 흐름의 춤사위와 장단과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는 즉흥성과 가변성이다. 절제미와 여성미, 여백미와 담백미라는 손색없는 미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장금도((張錦桃, 1928-2019) 약력 1928년 군산 소화동 출생 (세습무 가계) 1940년 12세 군산 소화권번 입학 1943년 15세 군산극장 초연 1942년 결혼(충청도 부여) 1983년 '한국의 명무'(국립극장) 공연 1990년 '한국인의 넋이 담긴 민족의 춤' 명인전 1998년 제1회 서울세계무용축제 명무 초청공연 2002년 내일을 여는 춤-우리 춤 뿌리 찾기 2004년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 여무(女舞) '허공에 그린 세월' 2005년 남무(男舞) '춤추는 처용아비들' 특별출연 제8회 서울세계무용축제 초청 '전무후무' 2006년 '전무후무' 프랑스 초청공연 2011년 '춤'-이 땅의 숨은 춤- 2013년 작별의 춤 해어화 2016년 군산향토문화유산 제20호 민살풀이춤 선정 2016년 '마지막 예기 장금도의 춤 재발견'사진전 (군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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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9)<br>박동영 명인의 '오북춤' 춤사위밀양백중놀이 매년 음력 7월 보름경에 경상남도 밀양 지방에서 지주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으로 하루를 즐겁게 노는 데서 유래한 성인남녀놀이이다. 머슴들이 7월 보름경 진(辰)에 해당하는 날(용날)을 택하여 지주(地主)들이 마련해준 술과 음식으로 하루를 즐겁게 노는 데서 연유한 두레굿이다. 이러한 놀이는 두레먹기·호미씻기·호미걸이라는 명칭으로 중부이남지방의 농촌에서 흔히 볼 수가 있다.밀양에서는 이날을 흔히 ‘머슴 날’이라고 하며, 이날의 놀이를 ‘꼼배기참 놀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지역은 농경지가 많아 농사가 잘 되고 살기가 좋았기에 촌락공동체로서의 농경의식이 발달하고 시장이 활성화 되어 자본이 모이는 곳이다. 그만큼 밀양은 양반과 천민의 차별이 심한 곳으로 천민들이 풍물에 의지하여 신명나게 놀면서 울분을 해소하였던 것 또한 지금의 백중놀이를 형성함에 있어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기예능보유자로 하보경(하보경, 보유종목 : 양반춤·법무춤)과 김상룡(김상룡, 보유종목 : 오북춤)이 인정되었으나, 1997년 하보경이 작고하여 현재는 김상룡과 하용부만이 남아 있다. 박동영은 경남 밀양 출신, 40년 넘게 춤판을 휘젓는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이다. 1979년 밀양민속예술보존회 가입하면서 밀양백준놀이 전승활동 전개, 하보경 명인에게 양반춤,범부춤, 북춤 전수, 김타업에게서 쇠가락, 장구가락, 병신춤 전수, 김상용에게 오북춤 전수 받았다. 2002년에 '상쇠'와 '오북춤'으로 밀양백중놀이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1999년 제1회 밀양시민대상(예술 부분) 수상, 1989년 제3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문화체육부장관 표창장을 받았다. 보존회장을 맡으며 전승활동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고 있다. 밀양 지역 무형문화재 발전을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가겠다는 포부를 품고 산다. 기예와 함께 기록과 사진이 그의 장기이다. 밀양이 자랑하는 문화재이다. 박동영(朴東暎, 1952~ ) 밀양 출생 1981년 밀양백중놀이 전수장학생 선정 2002년 밀양백중놀이 예능보유자(상쇠와 오(五)북춤)지정 2016년-2020년 밀양백중놀이보존회장 취임 2005년 경상남도무형문화재연합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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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8)<br>김수악 명무의 '진주교방굿거리춤' 춤사위진주 교방굿거리춤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최완자에게 사사받은 기방굿 거리에 김녹주로부터 배운 소고가락이 더해져 한바탕이 이루어진 춤이다. 굿거리는 민속음악과 민속춤의 기본이자 대표적 장단이며 춤으로서는 살풀이의 원판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본래는 굿거리 8마루로만 이루어진 춤이었으나 경남 덧배기의 소고춤이 첨가되면서 흥과 멋이 한층 가미되었다. 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로 지정받은 춤으로 진주검무, 진주포구락, 진주 한량무와 함께 교방의 고유한 레퍼토리이다.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입춤’으로 기본춤의 성격이 강하며 다양한 이름으로 명명된다. 즉, 교방에서 굿거리장단에 맞추어 추는 굿거리춤, 수건을 들고 추는 수건춤, 자신의 감정에 따라 거침없이 추는 즉흥무·허튼춤, 그리고 맨손으로 추는 손춤 등이 있다.진주는 조선시대부터 여기女妓들의 춤과 노래, 그리고 음악이 풍부했던 예향이다. 진주교방굿거리춤은 진주남강의 풍광과 권번에서 마지막 예인으로 지냈던 춘당春堂 김수악金壽岳, 1926~2009에 의해 전승되었다. 김수악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예능보유자이다. 김수악은 8세 때 권번으로 들어가 진주권번 선생인 김옥민으로부터 처음으로 춤을 사사하고, 서울에서는 한성준, 김해에서는 김녹주에게서 소고춤과 살풀이를 배웠다. 김수악의 춤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것은 12세에 권번에서 만난 최완자의 입춤, 기본굿거리, 진주검무 등이다. 김수악은 춤뿐 아니라 소리도 배워 명인으로서 악가무에 능했다. 당대 최고의 명창인 유성준·정정렬로부터 판소리를, 전라도의 김두영으로부터는 구음을, 박세근·여순근·김종기로부터는 기악을 배웠다. 결혼 후 김수악은 잠시 춤을 그만두었으나 1946년 논개 비석 건립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모금 공연 ‘대춘향전’의 출연으로 다시 무대에 복귀했다. 1946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예술제인 ‘개천예술제’에서 춤과 소리로 대중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후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되면서 김수악은 진주 지역의 전통춤을 알리는 명인으로서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김수악 약력 1926년 5자매 중 둘째로 출생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12호 진주검무 기능보유자 지정1969년 목포 유달국악원 지도교수1971년 광주호남국악원 지도교수1973년 김수악민속예술학원장1975년 경성대 기악강사1977년 진주시립국악원 전임지도교수1983년 한국국악협회 경남지회 진주시 지부장1986년 진주시립국악학교 지도교수1997년 경남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기능보유자 지정 수상 경상남도문화상, 경남진주시문화상, 대한민국사회교육문화상 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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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7)<br> 김숙자 명인의 '도살풀이춤' 춤사위도살풀이춤 살(煞)을 푸는 민속무용의 일종으로 경기도도당굿의 영향을 받은 살풀이춤을 가리키는데 주로 김숙자(金淑子)류의 살풀이춤을 지칭한다. ‘도살풀이’는 ‘도당 살풀이’를 줄인 말로서 흉살과 재난을 소멸시켜 안심입명, 행복을 비는 무속 행위이다. 경기도도당굿에서는 각 거리마다 연주되는 도살풀이장단에 맞추어 무녀가 소리를 하며 부채와 방울 등 무구(巫具)를 들고 어정거리며 춤을 춘다. 특히 경기도도당굿 12거리의 마지막 의식에서도 춤을 추는데 이 춤을 도살풀이춤이라 부른다. 그러나 경기도도당굿에서 추는 도살풀이춤은 의식적인 성격이 강해 단순한 춤사위를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것이어서 이를 무용으로 양식화했다고 볼 수 없다. 이에 반해 김숙자류의 도살풀이춤은 경기도도당굿의 무속적 특성들이 전통무용의 내외적 형식미로 양식화되어 있어 전통무용의 범주에서는 이를 ‘도살풀이춤’으로 인식하고 있다. 판소리, 무용, 가야금 등 가무악에 능한 김숙자는 여성이지만 무속계와 재인청과 연계된 전통예능인의 집안 내력을 가지고 태어나 경기무속춤과 재인청춤의 두가지를 무대예술로 발전시켰다. 그의 할아버지는 조선조 고종, 순종 시기에 중고제 판소리 춘향가로 이름을 날리던 충청남도 공주 출신 김석창 명창이고. 아버지 김덕순도 조선성악연구회에서 활동한 춤과 창의 명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모친 정귀성은 세습무가의 전통을 가진 유명한 당골네이다. 경기도 지방의 도당굿에 나오는 춤을 고전무용으로 재창조해 진쇠춤, 터벌림춤, 제석춤, 부정놀이, 도살풀이춤 등을 발표함으로써 무속 예술 보존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도살풀이춤은 목젖놀이, 발차는 사위, 용 사위, 낙엽 사위 등 다른 전통춤에서 볼 수 없는 특징적인 동작을 갖고 있어 경기 무속춤 중 가장 어려우면서도 예술성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숙자(1926〜1991) 경기도 안성 출생. 1932년(6세) 부친 김덕순에게 춤을 전수받기 시작 1937년(11세) 줄타기 학습 시작 1945년(20세) 칠성사에서 부친과 공부 1950년(25세) 대전 민속무용발표회(4회) 1961년(40세) 김숙자고전무용학원 창설 1961년(40세) 김숙자무용학원 창립 1962년(41세) 문화공보부 장관상 수상 1984년(59세)무용예술큰잔치: 민속무용 김숙자의 <도살풀이> (국립극장 대극장) 1990년(65세) 국가무형문화재 제97호 '도살풀이춤' 예능보유자 인정 1991년(66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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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6)<br> 최승희의 아리랑 춤사위최승희의 아리랑춤 한국 현대무용의 개척자, 홍천 출신 최승희(崔承喜)의 대표작 '보살춤'과 '초립동', '도라지'와 함께 알려진 아리랑 춤사위이다. 일본과 1939년 유럽 순회공연에서 선사된다. 당시 조선춤과 전통 춤사위을 근간으로 만든 창작춤 공연은 유럽 현지에서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단기간이나마 한성준으로부터 태평무와 한량무를 배우지 않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춤이다. 우리 전통 음악을 연주하는 최고 기량을 지닌 조선의 악사들의 생음악이 더해져 당시 최승희의 조선춤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시 헤밍웨이, 피카소, 찰리 채플린, 장콕도 등 세계인들에게 신비한 동양의 무희로 알려진 국제적 불세출 무용가이다. 우월한 신체 조건을 최대한 활용해서 남성 춤도 잘 추었다. 노래도 잘해서 영화 '반도의 무희'의 주제가 자작곡 '향수의 무희', 번안곡 '이태리의 정원' 등 음반이 전해진다. 최승희(1911-1969) 1911년 강원도 홍천 출생 북한에서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 무용학교교장,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역임 1937년 세계 순회공연(3년간 150회)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1~1952년 중국 공연예술대 무용과 교수 1929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46년 월북 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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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56) <br> 이동안 명인의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 춤사위이동안류 태평무 격조와 품격의 아름다움이 절도 있게 드러나는 춤이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으면서도 구름 위를 걷듯 출렁이면서 살얼음을 깨뜨리지 않는 사뿐한 디딤은 압권이다. 여기에 긴 한삼자락을 펼치고 뿌려 거둬들이는 팔사위와 의식을 거행하는 제관(祭官) 같은 위엄이 깃든, 그러면서도 무심한 듯한 표정은 절제의 멋을 더해 준다. 장단으로는 긴 호흡을 가다듬는 춤의 첫 장면에서는 ‘길군악’ 음악을 뒤집어 ‘낙궁’이라 부르는 장단으로 시작한다. 구음이 들어가는 행차 걸음으로 의식무로서의 분위기를 잡는다. 부정놀이 장면에서는 24박을 한 장단으로 엮어 제관의 의식처럼 사방을 다니며 인사로 예를 다하는 춤을 춘다. 반서림(터벌림)에서는 5박 x 5박을 한 장단으로 하여 홑박의 묘미인 밝고 경쾌함이 나타나며 ‘흥’의 감정으로 리드미컬한 발동작과 팔사위로 짜임새를 만든다. 엇모리로 넘어오면서 타악기로만 반주하는 음악이 10박을 한 장단으로 하여 기악과 구음이 들어와 떠들썩하게 흥청거리고 비틀거리고 고뇌하며, 서민적인 정서를 엮어 고뇌가 깃들어 있는 관과 민을 아우르는 마음이 드러난다. 갑자기 번개치는 올림채로 넘어가면서부터는 장구와 꽹과리 음악으로 몰아치며 춤이 잘게 쪼개어지고 급박한 다이나믹함으로 숨 막히게도 하지만 결코 위엄을 잃지 않는 속도감 있는 역전의 분위기를 만든다. 잦은몰이 일환인 경상도 엇굿거리, 넘김채, 겹마치기장단이 이어질 땐 급하면서도 질서와 규범이 있는 발동작이 이어지는데, 땅을 꾹꾹 디디는 발놀림이 화려하다. 열정과 신명이 솟는가 하면 넉넉하고 편안한 분위기와 생기 있고 발랄한 분위기가 이어지는데, 하늘을 향하여 한껏 펼쳐지는 한삼은 땅과 하늘이 하나 되듯 연출되며 태평성대를 느끼게 한다. 위의 요소들은 여느 태평무와는 다르게 이동안 선생의 태평무만이 갖는 중요한 특징이다. 그래서 이동안 태평무는 민속무의 대표적 두 줄기인 승무와 살풀이춤 못지않은 극적 요소를 갖춘 춤으로 인정받는다.(재인청춤보존회장 정주미) 이동안(1906-1995) 1920 광무대 생활 시작. 태평무, 진쇠춤 등 공연 1927 일본 전역 순회공연 (태평무, 진쇠춤) 1929 대동가극단의 임방울, 이화중선 함께 중국 순회공연 1983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보유자로 지정 1992 한국명인전 (엇중몰이신칼대신무) 1994 이동안 전통무용 발표회 (태평무, 진쇠춤, 엇중몰이신칼대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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