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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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4)<br>박관용 명인의 '진도북춤'진도북춤 북춤은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지며 크게 경상도 북놀이와 전라도 북놀이로 나눌 수 있다. 전라도의 경우는 다시 외북치기와 양북치기로 나뉘는데, 외북은 전라도 지역 북놀이의 보편적 형식으로 북을 어깨에 매고 한 손으로 북채를 들고 치기 때문에 원박(原拍) 가락에 충실하고 소리가 웅장하다. 양북치기는 진도에 한해서 전승되고 있는데, 양손에 북채를 쥐고 장구를 치듯 하기 때문에 잔가락이 많이 활용되면서 멈춤과 이어짐이 민첩하고 가락이 다양하다. 외북과는 달리 장고가락과 같은 굿거리, 자진모리, 휘모리가락을 구사하여 감정을 풀어나간다는 점과 풍물의 흥겨움과 신명성에 더불어 아름다운 춤사위가 큰 몫으로 자리잡고 있다는 것 역시 진도북춤만의 특징이다. 진도 북춤은 원래 두레굿에서 풍물로 발전되고 다시 춤으로 발전하였다. 진도북춤은 김행원(판소리 명고수 김득수의 부친)이 명인이었는데, 이 분에게서 사사 받은 임장수, 박태주, 김성남(金成南) 등이 그 계보를 이어오다가 박관용(朴寬用), 양태옥(梁太玉), 곽덕환(郭德煥), 박병천(朴秉千) 등이 그 뒤를 잇고, 현재는 전승해오고 있다. 박관용 농화 박관용 선생은 1921년 진도에서 태어나 13세가 되던 해 진도 소포걸군농악으로 처음 국악을 접했다.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걸궁패농악으로 가장해 적진을 탐색하고 작전을 펼친 것에서 유래된 소포걸군농악은 양손으로 북을치는 북놀이가 특징이다. 예능보유자인 박관용이 추는 춤의 춤사위를 보면 그의 북춤은 북으로 추는 살풀이라고 할 수 있다. 까치새로 엮어가는 발사위나 게걸음 같은 옆걸음뛰기, 무섭게 휘돌아가다가 한 장단 슬쩍 먹어버리는 발림 등이 상쾌하고 순수하며 소박하다. 그는 스승에게 배운 북춤 위에 풍류 살풀이의 멋을 얹어 자신만의 북춤을 추고 있다. 박관용은 진도의 부유한 농사꾼 집안에서 태어난 탓에 그의 집안에는 시조의 대가였던 큰할아버지와 퉁소를 잘 하던 작은아버지 등 풍류객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17세부터 본격적으로 춤과 장단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는 박태주와 김행원을 스승으로 모셨다. 그는 특히 농사철에 들노래와 함께 치는 상사북소리가 장기였다. 북춤 말고도 살풀이, 상사소리에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장구나 쇠도 잘 다룰 줄 알 정도로 가무 전반에 관심이 많았다. 호남농악경연대회에서 북춤으로 최우수상을 수상하였고, 1987년에 시도무형문화재 보유자 인정을 받았다. 북춤 명인으로 그의 명성은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2008년 별세하기 전까지 길러낸 1500명 제자가 전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박관용류 진도북놀이'는 이희춘 보유자가 이어나가고 있다. 박관용(朴寬用, 1921-2008) 이력 진도북놀이보존회 3대 회장 1921년 진도 출생 1978년 전주대사습 경연대회 북춤 1980년 광주 금호 예술국악원 경영 1983~4년 국립극장 명무전 출연 1984년 광주 전국 예술제 무용부 장려상 1985년 제14회 남도예술제 북춤 개인 연기상 1987년 시도무형문화재 '진도북춤' 보유자 인정 1987-1988년 전국 순회공연 및 발표회 1987년 진설리 '북놀이전수원' 설립 북춤 후진양성. 1988년 88올림픽기념 공연(서울). 북놀이 1987년 제1회 개인북춤발표회 1990년 신라예술무용학원 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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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3)<br> 유순자 명인의 부포춤부포춤 부포춤은 농악춤의 한 갈래로 풍물악기 꽹과리를 들고 연주하면서 추는 개인놀이 종목의 춤이다. 상쇠만이 출 수 있는 춤이다. 그래서 쇠춤이라고도 한다. 농악에서 상쇠가 벙거지에 달린 부포를 흔들면서 이리저리 돌리는 놀이이다. 무대에서 관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부포놀이 동작으로는 목을 좌우로 돌리는 것, 8자형, 앞뒤로 젖히는 동작, 목놀이 등이 있다. 부포의 움직임은 전령(傳令)의 신호를 나타내거나 꽃과 성행위 등을 묘사하기도 한다. 전령인 경우 부포를 왼쪽으로 돌리면 ‘오늘’을 뜻하고, 부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내일’을 뜻한다. 부포를 세우는 움직임은 꽃을 상징하거나, 새가 움직이는 것, 남성의 성기를 상징한다고 한다. 꽃 상모가 펴졌다 오므라졌다 하는 것은 풍요와 번영을 위한 주술적 행위를 위미하기도 하고, 황새가 걷는 걸음을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유순자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호남여성농악 포장걸립 상쇠 보유자인 유순자 명인은 부포놀음의 대가이자 상쇠놀음의 명인으로 ‘춤추는 바람꽃’으로 불린다. 11세에 유량을 시작하여 호남여성농악단이 해체되던 1979년까지 상쇠 역할을 하며 전국을 누볐고, 이후 호남여성농악을 전수하고 명인전과 같은 공연을 펼쳐 온 여성 농악의 대표적인 산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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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2) <br>김진걸 명인의 '산조춤' 춤사위산조춤 신무용 제2세대 중 독창적 미적 감각 작품 중 역작을 꼽으라면 바로 1957년 첫 선을 보인 김진걸의 '산조춤'이다. "인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산조춤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가장 순수하게 소통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의 키워드입니다. 제 산조는 여러 스승에게 배운 다양한 춤사위들을 아우른 작업인데, 승무·탈춤·무속춤 등을 모두 함축했어요. 새로운 산조를 시도하고 싶어 의상도 비로드로 만들고 버선 대신 맨발에 발레슈즈를 신고 추었습니다.”(김진걸,1953년) ‘산조’는 기악 독주라는 뜻이다. 1953년 성금연의 가야금 산조에서 춤 영감을 얻어 추기 시작했고 1960년 ‘내 마음의 흐름’이라는 제목으로 김진걸류 산조를 발전시켰다. 산조음악과 발생을 같이하여 기방의 입춤 형태에서 파생된 산조춤은 인간 개인의 자유로운 감정을 신체라는 움직임의 매체를 통하여 표출해 내는 인간의 해방, 육체의 해방을 의미하고 있다. 그의 산조는 오른발과 왼팔 위주의 춤사위로 구성된다. 남성적인 춤사위는 탈춤에서 볼 수 있는 오른쪽 다리 직각으로 세워들기와 왼팔 내뻗기 등이다. 발사위가 은근하고 화려해 여성 무용수에게 인기있는 춤이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모든 전통에 그 맥을 두고 있으며, 동작의 시각적인 면에서 선을 강조하고 있다. 산조춤은 모든 한국장단을 갖고 있으며, 한국무용의 많은 춤사위의 표현요소가 내포되어 있는 춤으로써, 가장 즉흥성이 강하고 그만큼 창작의 면모에 있어서도 표현 범주가 광범위하다고 할 수 있다. 김진걸 김진걸(金振傑)은 ‘음악의 무용화’를 화두에 두고 삶의 희노애락을 춤사위에 담아낸 역작 '산조춤'을 발표했다. 192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5세 무렵 춤에 입문했다. 1940년대 초반 일본무용가 요시키(吉木) 문하에서 현대무용을 배웠고, 조택원·장추화·이채옥에게 사사했다. 1955년 동양극장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1959년 시공관에서 신무용적 미감이 짙은 작품을 선보여 주목을 끌었다. 1962년 국립무용단이 창단되자 초대 단원으로 발탁되어 후일 지도위원을 지냈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약 20여년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로 재직했다. 대한민국 평화통일 문화상 대상(1983년), 제 7회 무용대상(1986년), 화관문화훈장(1987년), 예술문화 공로상(1988년) 등을 수상했다. 김진걸 약력1926년 서울적선동에서 8남매 중 막내로 출생 1942년 이채옥 현대무용연구소 입문 1940년 요시카 문화생 입문 1944년 길목 무용연구소 입문1946년 장추화 무용연구소 입문1959년 김진걸 무용연구소 개소1951~1953년 국방부 정훈군 육군 군예대 무용안무 1954~1975년 개인발표회 11차례 1955~1956년 성신여고, 한성여중·고 강사 1961~74년 한국무용협회 이사 1962~80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 1974-1992년 한성대학교 무용과 교수 재직 1978~1985년 한국무용협회 이사장 1989년 『金振傑 散調춤 舞譜-내 마음의 흐름』(은하출판사) 출간 1989년 ‘김진걸 산조춤 무보’ 제작 1998~2008년 전통예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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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1) <br>문일지 명인의 '살풀이춤' 춤사위살풀이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문일지 1945년 출생. 1976년 창단된 서울시립무용단 초대 단장으로 위촉되어, 1989년 말까지 단장직을 역임했다. 전통춤을 발굴하고 재현하는 한편, 다수의 창작 무용극을 발표했다. 문일지의 무용극은 주로 역사적 사실을 그려냈으며, 궁중 정재에 주력해오다가 궁중무용이나 민속놀이 재현 작업에서 다양한 춤사위를 선택하여 호평을 받았다. 또한, 무속에 이용되던 방울과 딱딱이 등을 비롯해 기존 악기의 새로운 연주법을 적용하기도 했다. 주요 안무 작품으로 '바리공주', '땅굿', '맹가나무 이야기', '노', '파도' 등이 있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상임안무가 재임시 창작무용 '벼'(1990년)를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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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0) <br> 박정욱 명인의 '황해도 철물이굿' 춤사위철물이굿 ‘철물이굿’은 황해도 지역에서 정월이나 시월에 행하던 ‘재수굿’으로 집안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고 조상님께 감사 드리며 신께 제의를 올려 복을 비는 집안 굿으로, 1년 또는 3년에 한번, 2-3일에 걸쳐 행해졌다. ‘철물이 굿’은 총 스물 네거리 또는 열둘거리로 논다. 신을 청하는 소리 청배 만수받이, 신을 즐겁게 놀리는 춤, 늦은 거상, 거상타령. 복을 기원하는 공수, 아흔 아홉 방울의 상쇠소리, 해학적인 면이 많은 말명 거리와 불교 의식이 강한 칠성거리, 잡귀를 몰아내는 장수거리. 돈을 벌어들이는 대감놀이. 조상님들을 대접하는 조상거리 등, 볼거리가 풍성한 ‘재수굿’이다. 이은관의 직계제자인 박정욱 명창(서도소리보존회 이사장)이 2021년 3월28일 서도소리의 본향인 평안남도 ‘평안도 배뱅이굿’ 보유자로 지정받았다. 평안도배뱅이굿은 평안도 고유의 음악과 무가의 성격이 잘 드러나며 무형문화재로서의 예술성과 기술성, 대표성 및 사회문화적 가치 등이 높아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신규 종목으로 지정된다. 박정욱 보유자에 대해서는 전승 능력과 전승 환경, 전수 활동 기여도 등이 뛰어나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평안도배뱅이굿 보유자로 인정된다. 배뱅이굿은 이미 국가무형문화재 제29호인 ‘서도소리’ 종목에 수심가와 함께 포함되어 있다. 박정욱의 ‘철물이굿’은 황해도 출신 만신 이선비 선생으로부터 전수받은 무(武)의식과 놀이이며, 이선비 선생의 신 어머니이신 유씨 만신의 문서이고 ‘소놀음굿’은 장보배만신에게서 내려온 문서이다. '황해도 철물이굿'은 서해안 풍어제와 대비되는 굿으로 무형문화유산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한민족 문화유산이다. 박정욱 약력 평안남도무형문화재 제5호 평안도배뱅이굿 보유자 (사)한국서도소리연구보존회 이사장 제57회 서도소리 정기발표회 개최 황해도철물이굿보존회 회장 2000년 국가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이수자(김정연/이은관 사사) 2014년 서울시무형문화재 제32호 재담소리 이수자(백영춘/이은주/안비취 사사) 1991년 제8회 전국민요경창대회 명창부 대상(대통령상) 수상 명창 이은관선생기념관 '낭월국악당' 관장 한국전통문화관 가례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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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9)<br>박설자 명인의 '진주포구락무' 춤사위진주포구락무 1991년 12월 23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음악과 무용으로 채구(彩毬:용알, 공)를 구문(毬門)의 풍류안(風流眼)에 던져 넣는 놀이를 형상화한 궁중가무이다.원래 「포구락무」는 궁중에서 행했던 춤과 노래 중 하나로 공을 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표현한 것이다. 진주포구락무는 채구(彩毬)를 구문(毬門)의 풍류안(風流眼)에 던져 넣는 놀이를 음악과 무용으로 형상화한 궁중정재가 진주권번에서 지역화 된 춤으로서 고종[재위 1863~1907] 때 진주부사를 지냈던 정현석의 『교방가요』에서 비롯되었다. 정재(呈才)가 지방 교방으로 내려오면서 화관, 몽두리, 죽간자를 쓰지 않고, 상벌의 방법과 개수장(開收場)의 창사(唱詞), 세령산(細靈山)의 반주가 생기는 등 진주만의 특성으로 변화하였다. 악사는 박 1명, 대금 1명,피리 2명, 해금 1명, 장고 2명으로 총 7명으로 이루어진다. 음악은 세령산· 타령· 잦은 타령· 향단고주· 경기 굿거리가 주를 이루고, 춤사위로는 평사위· 쌍어리· 절화부· 회수부· 팔수부 등을 춘다. 진주포구락무 (晋州抛毬樂舞)는 궁중에서 행했던 춤과 노래 중 하나인 포구락무가 고종이 재위시 진주에 전해진 것에서 비로된 춤이다. 포구락은 공을 구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표현한 것이며, 포구락무는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들어와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궁중에서는 무희들이 궁중복을 입었고, 머리에 화려한 화관을 썼으며, 벌로 받는 먹점을 빰에 그렸지만, 진주 포구락무는 화관이 없고, 평상복을 입으며, 먹점은 눈 주위에 퉁방울을 그린다고 했다. 죽간자는 당악 정재에만 사용했기 때문에 진주 포구락부에는 사용하지 않고 있다. 궁중 포구락무는 정형화 되어 음악이 매우 느리지만, 진주 포구락무는 서민적이라 음악이 경쾌하며 빠르고 흥겹다. 박설자(81세)박설자 예능보유자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직후 고향인 진주로 오게 됐다. 이후 부산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진주로 다시 오게 되면서 초등학교 옆에 있는 발레학원에 등록에 발레도 했고, 장구며 여러 가지 악기들도 배웠다. 그는 "다른 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포구락무는 연주와 춤과 노래가 함께 가기 때문에 장단 박자를 알아야 잘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수관이나 어린 학생들에게 포구락무를 가르칠 때 장단 박자를 가장 중시하며 진주포구락무 보전회 회장, 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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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8)<br>유영희 명인의 '진주검무' 춤사위진주 검무 진주검무는 진주지방에 전승되는 여성검무로서 검기무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며 대궐안 잔치 때 행하던 춤의 하나이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칼춤을 춘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진주검무는 도드리장단, 느린타령, 빠른타령에 맞추어 조선시대 무사복을 갖춘 8명의 무용수가 2줄로 마주보고 서서 양손에 색동천을 끼고 칼을 휘저으며 춘다. 춤사위의 종류로는 한삼을 끼고 무릎을 굽혀 도는 숙은사위, 앉아서 추는 앉은사위, 허리를 앞으로 엎쳤다가 뒤로 제치며 빙빙 도는 연풍대가락, 맨손으로 팔을 펴는 손사위 등으로 다양하며 독특하다. 반주악기로는 피리, 저, 해금, 장구, 북 등이 쓰인다. 진주 검무는 교방에서 주로 4명이나 6명이 추었지만 흔히들 8검무로 알려져 있는 것은 1967년 제12호 국가무형문화제로 지정될 때 최순이의 제자들이 1대 예능보유자로 한번에 8명이 지정되자 시중에 8검무란 명칭이 입에 익은 것에서 유래되었다. 진주검무는 연출형식, 춤가락, 칼 쓰는 법 등 모든 기법이 과거 궁중에서 열던 검무의 원형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 예술적으로 가치가 높다. 유영희 1947년 산청에서 태어난 유영희 예능보유자는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으로 진주검무를 보급하고 있다. 대학에서 한국무용을 전공했다. 아버지가 진주로 이사해 시조창과 기타를 치고 노래하기를 좋아했고, 어머니도 강순영 선생에게 가야금을 배운 이수자였다. 2대 진주검무예능보유자 성계옥 선생이 집으로 찾아와 검무를 배워 볼 것을 여러 차례 권유했다.그러다 정금순 한량무 예능보유자가 권유하자 한량무로 먼저 시작했다. 2010년 진주검무 예능보유자가 된다. 유영희 선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예능보유자, 진주검무보존회 회장, (사)진주민속예술보존회 이사장, (재)진주문화예술재단 이사, 경상남도 문화예술회관 심의위원, 진주 유네스코 창의도시 추진위원, 진주 유등축제 제전위원회 위원, 진주논개제 제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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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9)<br>배병호 명인의 '쇠놀음' 춤사위쇠놀음(상쇠놀음) 농악대를 이끄는 지휘자라고 할 수 있는 상쇠의 쇠가락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진법놀이를 전개한다. 농악대의 꽹과리 제1주자 꽹과리 연주자 중에서 우두머리인 상쇠(上釗)는 꽹과리 연주자 중 기예가 가장 뛰어난 사람을 지칭하는데, 쇠놀음은 상쇠가 꽹과리를 치면서 상모를 돌리고 춤을 추는 흥겨운 놀이를 말한다. 농악에서 상쇠가 사용하는 부포의 종류는 ‘부들상모’, ‘뻣상모’, ‘종이상모’가 있다. 웃다리 지역에서는 ‘종이상모’를 사용하며 상모의 적자와 물채에 종이를 달아 돌리는 것으로 ‘북상’이라고도 한다. 웃다리 상쇠놀음은 '종이상모'(북상)을 쓰고 일채로 시작해 휘모리, 굿거리, 자진모리 후 다시 휘모리순으로 연행된다. 특히 화려한 굿거리 연주가락과 자진모리장단의 쇠채 발림 몸동작인 봉황걸음, 까치걸음, 오리걸음, 그리고 휘모리장단에 맞춰 연행되는 부포사위인 양상, 찍음상, 이슬털기와 연풍대로 끝맺음하는 것이 상쇠놀음의 특징이다. 구성은 지신밟기굿과 판굿으로 구분되고, 판굿은 열두 마당으로 되어 있다. 장단은 살풀이장단, 덧배기장단, 영산다드래기장단, 호호굿장단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농악과 구별되는 점은 농악을 지휘하며 치는 꽹과리의 두께는 다른 지역의 것보다 얇고, 치는 쇠채는 비교가 될 정도로 크다. 그래서 다른 지역의 꽹과리 소리를 멀리서 들으면 ‘탱 탱’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화천농악의 꽹과리 소리는 저음으로 찰찰 흐르는 시냇물 소리처럼 맑고 고은 소리를 내기 때문에 귀로 금세 구분이 된다. 또, 다른 농악에서 들을 수 없는 삼접엇가락이 있고 다양한 변주가락과 타법이 화려해 쇠가락의 박자로도 구분을 할 수 있다. 화천농악 1대 예능보유자 상쇠 박동욱(1932~2002) 선생, 1963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농악으로는 최초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배병호 배병호 예능보유자는 1969년 함안군 가야읍에서 태어났다. 마을에서 연예인처럼 인기가 좋은 분이 치는 장구소리가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다. 경상대학교 민속문화학과에서 함안화천농악으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이론공부를 더한 후 2010년 상쇠부분 예능보유자 후보가 되었으며, 2014년 40대 중반의 나이에 화천농악 예능보유자가 될 수 있었다. 2015년부터 함안아라문화제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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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8)<br>이윤석 명인의 '허튼춤' 춤사위허튼춤 경상도 지역의 남자들이 마당에서 특별한 순서나 격식 없이 추는 활달한 춤을 ‘허튼춤'이라고 한다. 경상도식 자진모리장단의 이름을 딴 ‘덧배기춤'이라고도 불린다. 허튼춤은 허튼타령에 맞추어 추는 춤이다. 허튼타령은 긴허튼타령과 자진허튼타령으로 구분하는데 전자는 느리고 길게, 후자는 점차적으로 조금씩 빠르게 진행된다. 그리고 긴허튼타령은 경쾌하고 활발하지만 자진허튼타령은 흥겹고 익살스러운 음악적 특징을 띤다. 허튼춤은 이와 같이 허튼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을 말하는 것으로서, 처음에는 느리게 추다가 점차적으로 빠르게 추게 되는 춤이다. 한편, 허튼춤은 애초에 정형화된 형식이나 순서 없이 주어진 공간과 상황에 맞추어 풍취를 신명에 담아 춤꾼의 재간을 최대한 살려 추는 즉흥적인 춤이었다. 그러나 연희가 무대화되는 과정에서 하나의 독립된 춤이 되면서 미적 측면을 한층 극대화하고 정형화한 춤으로 굳어졌다. 그래서 허튼춤은 바깥의 트인 공간으로부터 내부가 막힌 공연장으로 전이하는 공간적 과정을 거쳐 완성된 춤이라고 할 수 있다. 허튼춤은 전승 세대 또는 전승 계보에 따라 입춤, 즉흥춤, 흥춤, 굿거리춤 등으로도 불렸다. 춤추는 농사꾼 이윤석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이자 (사)고성오광대보존회를 이끌었다. 2021년 회장직을 내려놓고 천직인 농사꾼으로, 춤꾼으로 살고 있다. 이윤석은 1949년 고성 마암면 명송마을서 태어나 풍물패 뒤쫓다 1975년 본격 재인의 길 걸어왔다.문둥춤 등 고성춤 명인들에게 전 과정 전수받고, 고성오광대 출발부터 현재까지 전수 시작 이래 오광대전수회관 수료자만 3만 여명이 넘는다. 1968년 결혼, 1975년 군 제대로 본격적인 재인의 길을 걷게 된다. 서울에서의 1년을 제외하고는 지금껏 고성을 지키며 살고 있다. ‘만신의 피’라는 별호를 가진 허종복에겐 말뚝이춤과 기본춤을, 당대의 풍류객 조용배로부터 문둥춤과 승무를, 이윤순에게 호흡의 조율을 익혔다. 1993년 보유자 후보로 지정되었으며 1994년 보존회 회장이 되어 스승들이 떠난 고성오광대를 지켜왔다. 그리고 2003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고성오광대의 장점은 춤의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세대 춤꾼들의 춤동작을 이윤석이 계승무(繼承舞)의 전형을 충실히 따랐다. 그의 허튼춤은 남자가 남자에게 반할정도로 깊은 여운이 서려있다. 뛰다가 급작스럽게 주저앉는 ‘배김새' 동작의 멋스러움과 자진모리에서 앉아 감았다가 일어나며 푸는 동작들이 큰 특징이다. 이윤석 1949년 고성 마암면 명송마을 출생 1968년 결혼 1975년 본격 재인의 길 1993년 국가무형문화재 '고성오광대' 보유자 후보 지정 1994년 고성오광대보존회 회장 2003년 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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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67)<br>박은하 명인의 '쇠춤' 춤사위쇠춤 꽹과리를 맑게 울리며 우아한 몸짓으로 추는 쇠춤 즉흥적이고 다채로운 장단 안에 짝쇠의 신명으로 판을 이루는 ‘쇠춤’ 긴 호흡 속에서 역동성 있는 춤사위가 조화를 이루는 ‘쇠춤’ ‘쇠춤’이란 풍물놀이에서 쇠잽이(꽹과리 또는 징 연주자)가 꽹과리와 함께 추는 춤으로, 신명나는 리듬감과 화려한 춤사위가 압권이다. 박은하 설장구와 쇠춤을 잘 추는 우리 시대 춤꾼 박은하! 특히 사물과 춤을 접목한 ‘쇠춤’의 1인자이다. 꽹과리를 집어들고 쇠춤을 추기 시작하면 신들린 듯 무대를 휘젓는다. 한국 최초 여성 사물놀이 연주자인 박은하 명인의 춤에는 힘과 흥이 넘쳐서 가만히 앉아서 들어도 호흡이 가빠진다. 박은하는 국립국악원 사물놀이 창단 멤버이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악장으로 활동해 온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사물놀이 연주자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3호 '남사당 놀이' 이수자이며 무용학 박사이다. 7살 때 리틀엔젤스예술단에 특채로 입단해 춤을 추기 시작해서 춤 인생 50년을 지켜왔다. 역동적인 움직임 안에서 섬세한 감성이 담겨져 인생의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설장구 춤’ 설장구, 쇠춤 모두 박은하의 장기이다. 특히 일어서서 장구를 어깨에 걸어메고 치는 설장구는 김덕수와 함께 한국을 대표한다는 평판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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