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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박물관 – 삼례 박대헌」 책례冊禮 - 책씨를 뿌리는 사내가 있다. 그는 책 속에서 산 날이 더 많다. 책농부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심례心禮 – 책 나무가 자라도록 애쓰는 사내가 있다. 그는 책 숲을 거닐며 논다. 책꾼 몸짓에 날이 새는 줄도 모른다. 창례創禮 – 책 열매 거두는 꿈에 부푼 사내가 있다. 그는 책신처럼 책마을을 지킨다. 책달인 경지에서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 세명대학교 이창식 교수가 2013년 내게 보내온 시다. 그는 내가 영월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 했는지 잘 알고 있다. 그만큼 삼례에 거는 기대도 컸으리라. 2013년 6월 5일 책박물관이 영월에서 삼례로 옮겨 새롭게 문을 열었다. 삼례책마을의 첫걸음이 시작되었다. 볕이 잘 드는 이층 서재에 수천 권의 장서를 갖추고 책속에 파묻혀 살았으면 하던 것이 내 십대 후반의 꿈이었다. 이때부터 고서수집에 뜻을 두더니 1983년 서른 청년에 고서점 호산방을 차리고, 1999년엔 영월에 폐교를 빌려 영월책박물관을 세우고 잘 나가던 광화문의 호산방도 모두 그곳으로 옮겼다. 그 후 2010년 12월 영월책박물관 문을 닫고, 호산방을 서울 프레스센터로 옮겼다. 파주 출판도시와 인사동을 거치는 사이 2013년에 완주군 삼례읍에 책박물관을 옮겼다. 그리고 2015년 8월 호산방 마저 삼례로 옮기고 책마을 사업에 매진했다. 그러는 동안 『서양인이 본 조선』『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고서 이야기』『한국 북디자인 100년』등 네 권의 책과 몇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여기에 30여 차례의 고서 전시를 기획하였으니 40년 세월을 돌이켜 보면 참으로 책과의 모진 인연이다. 현재는 삼례책마을에서 세 개의 전시를 동시에 기획하여 전시 중이다. 책박물관의 <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 그림책미술관의 <요정과 마법의 숲> 삼례문화예술촌의 <프랑스와 예술의 혁명>전이 그것이다. <문자의 바다-파피루스부터 타자기까지>는 인류 최초의 문자인 고대 오리엔트 쐐기문자를 비롯하여 이집트의 파피루스, 인도네시아 바탁족의 골각문자, 아메리칸 인디언의 암각 그림문자와 세계 여러 나라의 필사본, 타자기 등 모두 186종 2,775점의 전시이다. <요정과 마법의 숲>은 그림책미술관 개관기념으로 준비했다. 1940년대 영국 동화작가 그레이브스(G. Graves)의 미간행 타자 원고와 아일랜드의 나오미 헤더(Naomi Heather, 1911~1989)의 원화 전시다. 책도 출간했다. <프랑스와 예술의 혁명>전은 제1부‘초현실주의 탄생과 사랑의 폭주-아폴리네르와 그의 연인 마리 로랑생’ 제2부 ‘나폴레옹과 「조선 서해안 항해기」’ 제3부 ‘그대 프랑스 화가들의 반란’으로 구성되었다. 아폴리네르 관련 희귀 도서와 세잔과 외젠 부댕 등 벨 에포크 시대의 오리지널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전시유물은 모두 호산방 소장품이다. 나는 전시를 통해 ‘책이란 무언인가’ 말하고 싶었다. 이제 '박대헌의 고서 이야기'(2000.09. 09~2021.06.02/총 39회)는 여기서 끝을 맺는다. 그동안 많은 사랑과 격려를 보내주신 '국악신문' 독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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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8호산방을 서울로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책박물관을 폐관하기 몇 해 전인 2006년 9월, 호산방을 서울시청 뒤 프레스센터로 옮겼다. 이곳을 호산방 자리로 낙점한데는 영월 가기 전 호산방이 있던 광화문 동아일보사 근처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프레스센터는 국제회의장과 기자회견장에 대규모 세미나와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곳으로 문화예술인과 학자, 언론인이 자주 찾는 곳이다. 또 1층의 서울갤러리는 전시공간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전부터 이곳을 고서점 자리로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나는 이곳을 발판으로 다시 서울 생활의 재기를 꿈꾸었다. 갤러리에서는 1년에 한두 번 고서 전시회를 개최하려고도 했다. 이런 생각으로 프레스센터로 자리를 정했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사하고 몇 달 뒤, 서울갤러리가 문을 닫고 이곳에 농어촌특산물 홍보전시장이 들어섰다. 농어촌 지역의 특산물을 이곳에서 홍보하겠다는 취지로 보였다. 전시장 문을 여는 날 전국에서 몰려온 지자체 단체장들로 행사장이 북적거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영월군수를 볼 수 있었다. 당시 시민운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P씨도 만났다. 그날의 주인공은 바로 P씨였다. 그는 대권 주자로 거론되면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순간 그간의 모든 의구심이 풀렸다. 바로 P씨의 작품이었다. 나는 쥐똥 씹은 기분이었다. 나의 새로운 꿈이 초장부터 커다란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P씨는 장안평 호산방 시절부터 아는 사이다. 그러다 2004년경 영월에서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네댓 시간동안 나눈 적이 있다.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지한 인터뷰였다. 그는 작정하고 나를 찾아온 듯, 일행도 물리치고 녹음기를 틀고 노트북에 인터뷰 내용을 받아 적었다. 그는 박물관 운영의 문제점, 특히 영월군과의 갈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후 사석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지만 박물관 얘기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파주출판단지는 80년대 말, 이기운 열화당 대표 등 뜻있는 이들이 출판 공동체를 건립하자는 마음을 모아 2000년대 초부터 경기도 파주시 문발리 일원 48만평 부지에 세운 출판도시이다. 2007년 5월, 파주출판도시 호텔 지지향이 오픈할 때 2층에 호산방을 하나 더 열었다. 이기웅 대표의 권유도 있었지만 박물관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파주에 터를 잡을 요량이었다. 얼마 후에는 파주에 전념할 생각으로 프레스센터 호산방을 접었다. 지지향 1층의 갤러리는 100평 규모의 아담한 공간이다. 사실 나는 이곳을 박물관 적임지로 생각하고 우선 호산방을 옮겼다. 파주에서 전력을 다해 보았지만 영월에서의 후유증이 워낙 컸던지 경제적으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영월에서의 10년 공백이 호산방 사업에는 치명적이었다. 주변여건도 많이 변해 모든 사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거기다 갤러리의 사용도 여의치 않아 주변의 출판사 사옥의 임대를 고려해 보았으나 이것 역시 힘에 부쳐 포기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파주 호산방을 다시 서울 인사동으로 옮겼다. 2010년 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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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7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 책박물관을 돌아보며 내가 영월에서 박물관을 꾸려가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생활의 불편함이나 경제적인 어려움보다도 주위의 무관심과 냉소였다. 김삿갓 가짜 글씨 문제는 그것을 잘 보여 주었다. 의롭지 않은 것을 보고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문화계와 영월군의 태도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책마을이 언젠가는 영월군민을 먹여 살릴 거라는 생각으로 영월에 박물관을 세웠다. 그것이 나의 세대에는 빛을 보기 어려우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산골 폐교에, 폐교만큼이나 옹색한 시설, 이것이 영월 책박물관이었다. 이런 곳을 어떻게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외견상으로는 맞는 얘기다. 내가 영월에서 펼친 박물관 사업은 책마을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 나는 그것을 당당하게 평가받고 싶었다. 책마을의 실현 가능성은 우리 문화계와 영월군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나의 책마을 사업에 뜻을 함께하고 동참한 이들 중에는 각계각층의 전문가가 여럿 있었다. 열화당 이기웅 대표와 정병규 디자이너, 홍동원 디자인너, 김연갑 아리랑 연구가, 한승태 시인, 김광수 사진가, 김정 숭의여대 교수, 전경수 서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이창식 세명대 교수, 교용균 변호사 등이 있었다. 이들 중에는 나처럼 전 가족이 이주하여 이곳에서 제2의 인생을 설계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이들을 대신해 그 가능성을 시험받은 것이다. 2010년 12월 14일. 나는 책박물관 입구에서 지인과 기자 몇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월책박물관을 폐관하면서’라는 성명서를 읽어 내려갔다. 눈이 시렸다. 전날 내린 눈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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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6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군은 2004년 11월, 제5회 자치행정혁신대회에서 ‘박물관을 이미지화한 지역 만들기-세계 최대 지향 박물관 군(郡) 조성사업’이란 사례 발표로 우수상을 수상했다. 여기에서 영월군은 향후 2015년까지 총 20개소 이상의 박물관을 건립하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이어서 영월군은 정부의 신활력사업 정책의 일환인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 지역으로 선정돼, 2005년부터 향후 2009년까지 매년 약 30억 원을 지원받아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는 전국적으로 발전이 낙후된 70개 시·군의 사업계획을 평가한 결과로, 이제 영월군은 지역경제의 키워드를 문화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박물관’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곧, 영월 소나기재 아래에 ‘박물관 고을 영월!’이라는 대형 표지판이 나붙었다. 그 후 영월군의 박물관 사업은 발 빠르게 진행되었다. 나는 영월군 박물관협회를 구성하고 그 첫 사업으로 2005년 11월 「박물관 고을 조성과 발전방향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나는 이 심포지엄을 차후 국제적인 박물관 포럼으로 발전시켜 나가기로 몇몇 지인들과 뜻을 같이하고 전국 규모의 행사로 준비했다. 이 사업의 기획에는 당시 파주출판도시 이기웅 이사장과 서울대 인류학과 전경수 교수, 세종대 사학과 최정필 교수 등 문화계 여러 인사가 도움을 주었다. 주제 발표는 서울대 환경대학원 유병림 교수, 서울대 인류학과 이문웅 교수, 전통문화학교 최종호 교수 등이 맡았다. 전국에서 400여 명의 문화예술인이 참여하여 심포지엄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 이어서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과 대구대학교 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순회전시회 「야! 영월이다」는 영월군이 박물관 고을임을 전국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앞의 심포지엄에서, ‘영월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의 당면 과제로, 영월군의 박물관 업무를 지속적으로 전담하는 관계 공무원과 박물관 전담부서의 신설이 요구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2006년 3월,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 전담부서로 ‘지역혁신단’이 신설되었다. 이때 담당공무원이 바뀌면서 사업체제가 새롭게 갖추어지는 듯이 보였다. 나는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고 나름대로 많은 준비를 해 왔다. 각종 전시사업과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은 물론 중장기 대형 사업계획을 여러 건 마련해 놓고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각 분야의 전문 학자와 현장에서 일하는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준비한 것들이다. 여기에는 「영월책마을 환경설계」(이미경, 서울대 환경대학원 석사논문, 2002)와 중장기 계획인 「영월책박물관 사업계획」, 10여 개의 박물관 타운 건설계획인 「이상한 나라의 박물관 사업계획」등이 포함된다. 그러던 2006년 8월, 영월군은 책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광전리 마을회관에서 책마을 선포식 및 사업 평가보고회를 가졌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책마을’이란 책박물관 주변 마을 일대가 서점과 공연장, 문화예술인의 작업실, 카페 등으로 어우러진 문화마을을 이름이며, ‘책마을 사업’은 박물관을 개관하면서부터 계획하고 준비해 온 사업이다. 이미경 선생의 논문 「영월책마을 환경설계」는 영월군의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의 지침이 되어, 현재의 박물관 사업과 책마을 사업으로 발전되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새로 온 담당공무원은 그 동안 내게 책마을 사업에 대한 어떠한 의견도 묻지 않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예로, 나는 책마을 선포식 개최 사실을 행사 20분 전, 서울 출장길에 마을 주민에게서 전화연락을 받고서야 알았다. 영월군에서 책마을 선포식을 하는데 정작 책박물관 관장인 내게는 이러한 사실조차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책마을 선포식이라면 적어도 선포문 정도는 작성해야 할 것이고, 그 밖의 여러 가지 상의할 일도 많을 텐데 내게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담당공무원은 심지어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책마을 사업과 책박물관은 무관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 일을 계기로, 그 동안 맡고 있던 영월군 박물관협회장 자리를 내놓았다. 영월군의 박물관 고을 육성사업에 깊은 회의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음날로, 개관 이후 8년 동안 단 하루도 문을 닫지 않았던 박물관을 무기한 휴관하고, 고민 끝에 호산방을 서울로 옮겼다. 영월에서 우리 가족이 거처했던 곳은 박물관 한편에 있는 허름한 관사다. 말이 관사지 10여 년 이상 사람이 살지 않은 건물이라 수리를 몇 차례나 했지만 벽과 천장에 온통 곰팡이가 슬고 겨울에는 연탄난로를 두 개씩이나 때워도 거실에서는 물이 얼 정도다. 또 해마다 한겨울이면 수도는 물론 박물관 화장실까지 얼어 터지기 일쑤다. 한번은 영하 20도가 넘는 강추위가 1주일 정도 계속되자 관사로 통하는 수도관이 그만 얼어 버렸다. 박물관의 수도는 지하수를 펌프로 끌어올려 사용하고 있는데, 물탱크는 펌프장에서 150여 미터 거리의 언덕 위에 있고, 이 물탱크가 박물관 화장실과 관사로 연결되어 있다. 그 거리 역시 150여 미터가 된다. 전문가에게 물으니, 다행히 펌프장에서 물탱크까지는 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물탱크에서 관사까지의 150여 미터 구간 중 어느 부분이 얼었는지 찾을 수가 없고, 엄동설한 중에는 암반지형에 포클레인 작업을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또 수도관이 얼기 시작한 지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얼어붙은 범위가 점점 확대되어 사실상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대안으로 내놓는다는 것이, 물탱크에서 엑셀 PVC관을 연결해 땅 위에 그대로 노출시킨 채 겨울을 넘기는 방법밖에 없다고 했다. 이 경우에는 수도꼭지를 겨우내 조금 열어 놓아야 물이 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아 그렇게 하기로 했다. 파이프를 물탱크에 연결하자 하얀 PVC관을 통해 물줄기가 흐르는 것이 보였다. 10여 분이 지났을까. 또다시 물이 나오지 않아 PVC관을 따라가면서 확인해 보니 그 사이에 파이프 안에서 꽁꽁 얼어 있었다. 그날 한낮의 기온이 영하 10도가 넘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나는 언제부턴가 집안에서는 무능한 가장으로 전락했다. 그러는 동안 초등학교 5학년, 중학교 1학년이던 두 아들은 원주와 영월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영월로 이사하면서 무엇보다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에 걱정을 많이 했다. 학교에 가려면, 두세 시간에 한 번 오는 버스를 타고 험한 고갯길을 40여 분이나 달려야 했다. 눈 내리는 날에는 고개를 넘을 수가 없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버스 시간이 맞지 않아 길거리에서 한두 시간씩이나 보내야 했던 아이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아이들을 위해 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산골로 데리고 와서는 마음고생만 시킨 것 같았다. 그래도 어린 시절을 이런 산골에서 보낸 것이 훗날 세상 살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애써 위안해 본다. 언젠가 아이들이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매일 보는 산과 나무들인데 어제 보았던 그 산과 나무들이 아닌 것 같다”고. 자연은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아름다운 마음을 길러 주었다. 그 아이들이 지금은 장성하여 첫째는 시카고 아르곤 연구소 연구원으로, 둘째는 작은 사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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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5산 넘어 산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2003년 3월 16일 일요일 밤, 영월책박물관에 도둑이 들었다. 전시실과 서고를 뒤져, 한적과 양장본 등 모두 이백여 권의 책을 훔쳐갔다. 여기에는 『탐라별곡(耽羅別曲)』을 비롯해, 1539년에 출판된 『몽산화상대도보설(蒙山和尙大道普說)』 목판본과, 율곡 이이의 『석담일기(石潭日記)』 필사본, 『복무정종(卜正宗)』 목판본, 『경주최씨세계』 필사본 등의 한적이 포함되어 있다. 또 『황야에서』와 『아기네 동산』 등 양장본 다수와 개화기 교과서도 도난당했다. 이것들은 대부분이 귀중본으로, 이 중 필사본을 포함한 몇 권은 유일본이기도 하다. 내가 아끼던 책도 여러 권 있었는데, 『탐라별곡』도 그 중 하나다. 이 책은 정언유(鄭彦儒, 1687-1764)가 지은 한글 가사 필사본으로, 표제는 ‘정문침(頂門針)’이라고 되어 있다. 정언유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제주목사를 거쳐 호조참판을 지낸 인물인데, 이 가사는 영조 25년(1749)에 그가 제주목사로 부임했을 때 제주를 소재로 지은 가사로 그의 친필본이다. 耽羅 掘都邑이 몇千年 基業인고 星主王子 긔난후에 物換星移 오라겨다 城郭이 고쳐시니 文物이들 녜랴 聖朝에 臣屬며 命吏을 리시니 조각 彈丸小島 大海에 잇 三邑을 화안쳐 솟발로 버려시니 山南은 兩縣이오 山北은 州城이라 土地는 긔얼마며 人物은 어 하니 이렇게 시작되는 가사는 모두 백이십 행 이백사십 구로, 제주에 대한 첫인상, 제주도민의 어려운 생활상,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목민관으로서의 다짐, 제주 경승지를 돌아본 감회 등을 주 내용으로 하고 있다. 『복무정종』은 인조(仁祖)의 수택본으로 ‘송창(松窓)’ ‘보우명지(保祐命之)’ 등 여섯 종의 낙관이 찍혀 있다. 『경주최씨세계』는 1800년대에 한글 궁체로 씌어진,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진 가승보(家乘譜)로 필사본이다. 아버지가 시집가는 딸에게 만들어 준 친정의 족보다. 『황야에서』는 1922년 김영보가 쓴 우리나라 최초의 희곡집으로, 장정도 저자 자신이 했다. 「나의 세계로」 「시인의 가정」 「정치삼매」 「구리십자가」 「연(戀)의 물결」 등 모두 다섯 편의 작품들이 실려 있는데, 전통인습 타파라는 매우 진보적인 도덕관을 제시한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지금까지 장정가가 알려진 단행본으로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것이다. 따라서 출판미술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되어야 할 책이기도 하다.(*사진 101) 『아기네 동산』은 1938년 임홍은(林鴻恩)이 자신의 글을 포함한 여러 작가·작곡가의 동화·동요·곡보(曲譜) 등을 편찬한 아동도서로, 그가 직접 표지화와 삽화도 그렸다. 표지 그림은 꽃과 나비, 잠자리 등을 의인화한 것으로,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 노랑·연두·분홍·파랑 등의 밝고 경쾌한 색으로 꾸몄다. 면지·목차·서문·본문도, 표지 못지않게 다양한 삽화·문양·타이포그래피로 정성을 들였다. 주로 펜으로 그린 선화(線畵)나 수채물감으로 옅게 채색한 그림들로, 그 내용과 분위기에 어울리는 삽화가 아흔아홉 컷에 이르는, 매우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이다.(*사진 102) 위와 같은 책들이라면 누구의 손에 들어가든 애장서로 대접받기에 충분하다. 따라서 이 정도의 희귀본이라면 어디에서 누가 소장하든지 언젠가는 공개될 수밖에 없다. 머지않아 그 책을 훔쳐간 자가 누구인지는 세상에 밝혀질 것이다. 나는 그 책들을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대부분의 자료들을 사진과 글로 정리해 놓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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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4책마을을 꿈꾸며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사람들은 내가 많은 책을 소장하고 박물관을 세우니 선대로부터 유산이라도 물려받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내가 박물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보통 사람들이 꿈꾸는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포기하고 오랜 시간과 모든 열정을 오직 책에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박물관이라 하면 대도시의 커다란 건물에 잘 갖추어진 시설을 떠올린다. 이런 생각을 하고 영월 책박물관을 찾아온 사람들은 대개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심지어는 화를 내는 사람도 적지 않다. 볼 것이 없다는 얘기다. 지금까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던 박물관하고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는 그저 초라하고 옹색한 시골 폐교로만 보였던 것이다. 물론 내가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박물관을 세우고 꾸려 가는 것은 아니다. 또 우리 박물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문제들은 한순간에 해결될 수 있는 것들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박물관의 외형적인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갖는 문화적 역량과 발전 가능성이다.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것은 문화 역량에 대한 확신 때문이다. 나는 문화적으로 척박한 영월에, 책을 짊어지고 내 발로 찾아왔다. 서울의 호산방도 박물관 개관과 함께 영월로 옮겼다. 이렇게 나의 모든 것을 걸고 모험을 한 것이다. 영월은 나의 고향이 아니다. 또, 아무런 연고도 없다. 그저 이곳이 좋아서, 책이 좋아서 온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영월에 그저 살러 온 것이다. 내가 꿈꾸는 책마을은 책박물관을 중심으로 하는 자생적인 문화마을이다. 고서점과 화랑이 있고 문화예술인의 작업실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는 그런 마을이다. 나는 이를 위해 영월에서 열두 차례의 기획전을 치렀다. 「아름다운 책」 전시를 비롯하여 「음양지(陰陽紙)와 센카지(泉貨紙)」 「홍성찬 일러스트레이션 사십년 특별전」 「어린이 교과서」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근대 종이·인쇄·광고·디자인」 「책의 꿈, 종이의 멋」 「옛날은 우습구나—송광용 만화일기 40년」 「철수와 영이—김태형 교과서 그림」 「영월아리랑—꼴·깔·소리와 김정」 「유리물고기—1930년대 한국어류사진」 「님의 침묵과 회동서관—근대출판의 시작」 「책의 바다로 간다—정병규북디자인」 「우리들 마음에 꽃이 있다면—김정 그림책」 전시 등이다. 2001년에 개최한 「종이로 보는 생활풍경—근대 종이· 인쇄·광고 디자인」은 우리나라에 신식활판 인쇄술이 도입된 1883년경부터 1960년대 사이의 인쇄물 중에서, 포스터·사진·증명서·신문·호외·전단·광고지 등의 생활사 자료를 중심으로, 종이의 쓰임새와 인쇄·광고·디자인의 역사적 흐름을 보여주고자 마련한 전시다. 여기에 사용된 종이는 대부분이 양지(洋紙)이며, 인쇄·광고·디자인 면에서 보여주는 이미지는 한마디로 촌스럽다고 말할 수도 있다. 비록 궁핍한 시대의 산물이지만, 이 시기의 종이 문화를 통해 우리 지난 삶의 진솔한 모습을, 우리 근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전시물 중에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대회에서 마라톤 세계신기록으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孫基禎)의 육성을 담은 「우승의 감격」(콜롬비아 레코드)도 있다. 낡은 레코드판에 붙어 있는 동그란 레이블 종이에도 역사는 기록되어 있다.[*사진98] ‘복장계의 왕좌는 모샤이다’라는 내용의 포스터는 일제강점기 멋쟁이들에게 인기있었던 하늘하늘한 모슬린 천을 광고하는 것으로 당시 풍속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농촌형제여 풍년이 들어 쌀은 만소만은 다른 물건이 업서서 곤난하구려. 도시형제는 식량이 업서 매우 곤난하다. 농촌형제여 쌀을 생활필수품회사로 팔고 회사로부터 필수품구입증명서를 밧으라.”[*사진99] 광복 직후 미 군정청이 만든 포스터 ‘남는 쌀을 팔읍시다’의 내용이다. 정부에 의한 추곡수매라는 것이 없을 때 도시와 농촌 간의 원활한 물자교환을 위해 마련된 조치였다. 〈춘향전〉 〈산유화〉 〈유혹의 강〉 〈사랑〉 〈춘희〉 〈아내만이 울어야 하나〉 〈청춘극장〉 등 국내외 영화 리플릿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대중 인쇄물이다. 플라스틱보다 종이가 널리 쓰였던 시대에는 각종 상품 케이스와 포장에서도 종이가 일등공신이었다. 일제시대 ‘닭표 빈대약’과, 비슷한 시기에 동아약화학공업주식회사에서 만든 ‘강력살충제 구라콘’ ‘금복화투’도 그렇고, 풍년초담배·율곡성냥·대성성냥·백조성냥·유엔성냥 등 담배와 성냥 등의 포장갑도 모두 종이로 만들었다. 또 로맨스백분·장미백분·서가도란·화신장분·서가연지 등 일제시대와 오륙십 년대를 주름잡던 화장품들도 포함되어 있다.[*사진100] 작품의 생성학적 비평전문가인 프랑스의 피에르-마르크 드 비아지(Pierre-Marc de Biasi)는 저서 『종이: 일상의 놀라운 사건(Le papier, une aventure au quotidien)』에서 현대문명에서 종이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이는 도처에 있다. 일상생활에서 순간순간마다 사소하고도 중대한 일을 수행한다. 종이는 그 상태로 머물면서 전달한다. 그때 종이는 언어와 민족의 기억을 소장한다. 종이는 증언한다. 그때는 증거이자 법이 된다. 또 종이는 순환하며 의사소통을 한다. 그때에는 당대의 지적 경제적 교류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재가 된다. 종이는 장식하고 포장한다. 그때 종이는 상품구매를 유혹하는 소비사회의 핵심이 된다.” 나는 종이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책의 또 다른 실체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후 계속된 전시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주제 속에서 이루어졌다. 또 전시와 같은 주제로 세미나와 강연회, 음악회 등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지방의 작은 박물관 행사치고는 과분할 정도로, 각종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곤 했다. 영월 책박물관의 모든 행사는, 개관 당시 디자인 작업이 그랬듯이 순전히 자원봉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문화예술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나의 꿈과 의지를 믿고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많은 도움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책박물관이 어려운 고비를 맞을 때마다 후원을 자청하고 나섰다. 사실 이들이 아니었으면 삼례책마을은 물론 책박물관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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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3폐교를 책박물관으로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책박물관이 자리한 옛 여촌분교는 강원도 영월군 서면 광전 2리, 속칭 ‘뱃말’과 ‘골말’을 내려다보고 있다. 골말의 원래 지명은 ‘고운마을(麗村)’이다. 이는 마을의 경관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후 ‘고울마을’ ‘고울말’ ‘골말’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골말 주변 서강에는 꺽지·어름치·수달·물오리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잘 보존된 성황당과 공개되지 않은 동굴 등이 산재해 있다. 평창강(平昌江)과 주천강(酒泉江)이 만나 흐르는 서강(西江)의 윗줄기에 오도카니 자리잡은 여촌분교는 일견 호젓하고 소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학교가 막 문을 닫은 직후인 1998년 3월이었다. 3월이라고는 해도 음지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다. 적당히 빛바랜 계단을 오르자, 곧 눈앞에 칠팔백 평 규모의 아담한 운동장과 교사(校舍) 두 동이 나타났다. 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말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너머로 커다란 산이 눈에 들어온다. 배거리산이다. 배거리산은 해발 852.5미터의 높은 산이다. 옛날 천지개벽으로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뱃말에 살던 마음 착한 부부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 물이 점차 늘어나 배가 이 산 꼭대기에 걸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영월부읍지(寧越付邑誌)』에는 이 산을 석선산(石船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1년부터 H시멘트의 석회석 광산으로 원형을 잃기 시작했으며, 배거리산 중턱까지 파헤쳐진 광산이 흉물처럼 버티고 있어서 이 학교가 폐교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촌분교는 1962년에 개교하여 1998년에 문을 닫기까지 36회에 걸쳐 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문 닫을 당시에는 4명의 학생이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의 북적거림으로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떠나고 황폐해진 곳. 폐교란 말 그대로 문 닫은 학교, 버려진 학교다. 학교만이 문을 닫은 것이 아니고, 마을까지 문을 닫았다. 그야말로 삶의 시곗바늘이 멈춘 마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로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8월말, 영월교육청으로부터 학교를 임대받았다. 폐교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정이 묻어나는 곳이다. 박물관은 옛 학교 터와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서 산골 분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월 같은 강원도 산골에서 학교가 갖는 의미는 그저 배움의 장소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매년 운동회가 열리고, 그날은 마을의 축제날이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마당이며,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기둥으로 공동생활터의 구실을 해 왔다. 어쨌든 지금 이 문 닫은 학교가 책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꾸며진 것이다. 1999년 4월, 경향 각지의 언론은 연일 강원도 영월의 문 닫은 학교에 책박물관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보다는 우려를 더 많이 했다. 산골 폐교에 박물관을 세운다니 우리의 문화풍토에서 그것은 분명 무모한 짓으로 비쳤을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준비하기 오래 전부터 박물관 운영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역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명함에서부터 로고는 물론 초청장·포스터·입장권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디자인 작업이야말로 박물관의 색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러한 나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할 디자이너를 만나는 것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부담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박물관 개관을 5~6개월 앞두고 나는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디자이너 홍동원 선생이 박물관 개관에 필요한 디자인 일체를 무상으로 제작해 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당시 모 일간지의 편집을 전면 개편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월책박물관의 로고와 개관 당시의 포스터와 브로슈어, 내 명함 등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작업은 3명의 디자이너에 의해 4개월여에 걸쳐 이루어졌다. 개관 이후에는 기획전시를 비롯하여, 세미나·음악회·퍼포먼스 등 수십 차례의 문화행사를 치러냈다. 그때마다 책박물관의 소식은 대처의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특히 매년 5월에 열리는 영월책축제는 8회를 거치면서 전국적인 축제로 뿌리내렸다.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은 박물관 개관 이듬해부터 7년여 동안 10권 이상의 도록과 행사 초청장, 포스터 등 전시회 관련 인쇄물의 디자인을 단 한푼의 수고비도 받지 않고 도맡아 주었다. 언젠가 정 선생이 한 디자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박대헌이란 사람을 잘 알고, 그가 영월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영월의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두고두고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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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2『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30여 년 전, 열화당 이기웅(李起雄) 대표와의 술자리에서 책 표지에 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마침 나는 오래 전부터 장정(裝幀)에 관심을 갖고 이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던 차였다. 무심결에 얘기를 하니, 이 대표는 다짜고짜 열화당에서 책을 내자고 제의했고 나는 엉겁결에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 후 이 사실을 잊을 만하면 이 대표는 어떻게 돼 가냐고 나를 다그치곤 했다. 틈나는 대로 원고를 써 보았지만 좀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진전도 없었다. 그리고 10여 년이 지난 1999년 4월, 영월책박물관 개관에 맞추어 우여곡절 끝에 열화당에서 출간되었다. 사실 이 책이 나오기까지는 이 대표의 조언과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이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담당 편집자였던 이 대표의 따님 수정 씨는 기획에서부터 편집은 물론 원고를 깁고 다듬느라 필자인 나 이상으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책,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에서는 우리나라의 전통 장정과 양장(洋裝)이 처음으로 만난 1883년부터 6·25가 끝난 1953년까지, 즉 우리의 근대 인쇄ㆍ출판 70년간 단행본들의 장정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가를 책에 따라 살펴보았다. 여기에 실린 자료 역시 내가 직접 수집한 것들로, 『서양인이 본 조선』에서처럼 고서 수집과 연구에 이르는 과정에서 주제를 선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사진93) 우리는 어떠한 책에 처음 다가갈 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을 음미하기에 앞서 두 눈을 자극하는 이미지 앞에 놓인다. 그리고 팔을 뻗어 그것의 구체적인 꼴과 감촉을 손안에서 느낀 후에야 비로소 그 내용과 만나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정신·감정·사상을 기록한 책은 단순히 읽히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어루만지는 과정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책의 내용을 만드는 기획·편집 과정 못지않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 물리적으로 존재하게 하는 제작의 과정도 매우 중요하다. 그 중 책의 겉모습을 만드는 작업이 바로 장정으로서, 표지·면지·표제지·케이스 등을 시각적으로 꾸미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장정은 사람마다 각각 개성이 다르듯 책의 내용과 성격에 따라 제각기 어울리는 모습을 가지며, 장정가·저자·출판사의 생각뿐만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지던 시대적 상황과 경제적 여건까지 반영한다. 결국 잘 만들어진 한 권의 책은 그 자체로 독립된 예술품인 동시에, 그 시대의 문화·경제·예술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장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고서 수집을 시작하면서부터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장정이라는 말도 몰랐거니와 그 개념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저 됨됨이가 반듯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책을 보면 왠지 가슴이 설레고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 후 장정이 출판편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체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화적이나 문학적으로 이름난 책들은 대체로 장정도 잘 되어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고, 이런 책을 한두 권 수집하다 보니 어느새 수백 권이 되었다. 우리의 장정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정 하나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기상도(氣象圖)』를 들고 싶다. 『기상도』는 김기림(金起林)의 시집으로, 이상(李箱)이 장정을 했다. 1936년 7월 8일 창문사에서 발행되었다. 모두 424행의 장시로, 「세계의 아침」 「시민 행렬」 「태풍의 기침시간」 「자최」 「병든 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 일곱 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은 현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비판을 담은 기이한 소재와, 기지·해학·풍자·반어 등의 수법을 이용해 모더니즘 시를 시도한 작품이다.(*사진94) 잘 알려진 대로 이상은 시인이며 소설가다. 1929년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하면서 『조선과 건축(朝鮮と建築)』의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당선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1931년에는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자상(自像)」을 출품해 입선하기도 했다. 1933년, 종로에서 다방 ‘제비’와 카페 ‘낙랑’ ‘쓰루’ ‘69’를 경영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 이태준·박태원·김기림·윤태영·조용만 등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특히 박태원이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삽화를 그리는 등,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 방면에도 많은 재능을 보였다. 이상이 김기림의 시집 『기상도』의 장정을 하게 된 동기는, 당시의 문화풍토가 그렇듯이 이상과 김기림의 친분관계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창문사는 서양화가 구본웅의 아버지가 경영하던 출판사로, 구본웅은 이상보다 네 살 연상이었지만 1921년에 신명보통학교를 같이 졸업한 사이였다. 구본웅은 화가이면서 예리한 비평안을 지닌 문필가이기도 했다. 그는 창문사 일을 도우면서 이상 등 여러 문인들과 교우관계를 가졌고, 1936년 구인회의 동인지 『시와 소설』, 1938년 문예잡지 『청색지』를 창간하기도 했다. 이상은 구본웅과의 이러한 인연으로 1936년에 창문사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었는데 『기상도』는 그때 장정한 책이다. 이 책은 두꺼운 합지를 표지로 씌워, 얼핏 한 장의 검은 판지처럼 보인다. 검정색에 가까운 암회색 종이를 씌우고, 그보다 조금 옅은 색의 종이 띠를 약 이 센티미터 폭으로 잘라 앞뒤에 두 개씩 세로로 덧붙였다. 표제 ‘김기림 저 장시 기상도(金起林 著 長詩 氣象圖)’는 보일 듯 말 듯 작은 크기의 어두운 레몬색 활자로 표지 위에 도장 찍듯이 직접 찍었다. 일반적으로 표지 인쇄는 사용하는 표지의 재질에 따라 인쇄를 하거나 금박, 압인(押印) 등으로 처리한다. 그러나 『기상도』의 표지는 위의 모든 작업을 일일이 손으로 해야만 했다. 표제지는 활자의 크기를 이용했는데, ‘기상도(氣象圖)’의 활자를 모두 석 장(張)에 걸쳐 약 9·12·15포인트로 점점 키워 마치 이 시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고, 마지막 장의 저자명 바로 아래에는 ‘장정 이상(裝幀 李箱)’이라 적어 넣었다. 상아색 본문 용지에 작은 글씨로 시행을 촘촘히 배열하고 여백을 많이 살렸으며, 인쇄 상태도 양호하여 전체적으로 깔끔한 편집을 보여주고 있다. 제본은 철사매기로 했다. 당시의 편집은 장정은 물론 본문편집까지 편집자가 거의 혼자 도맡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던 것이 장정에 관심을 둔 몇몇 장정가의 출현으로, 장정과 본문 편집 작업이 비로소 나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상도』의 경우, 장정뿐만 아니라 본문 편집 작업도 이상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석 장의 속표제지와 본문의 편집 양식이 동일인의 솜씨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상은 교정과 조판 등 출판과 관련하여 김기림과 상의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이상은 『기상도』 장정에서, 특정 사물의 형상이나 추상적인 문양에서 벗어나 표지 전체를 암회색 계통으로 일관하면서, 표제 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문자도 보이지 않는 한 덩어리 어둠의 공간을 표현하고 있다. 표지란 독자에게 그 책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정보를 상징적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기상도』는 표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정보인 서명과 저자명의 표기가 거의 무시되었다. 한마디로 장정의 이론과는 거리가 먼 디자인이다. 이러한 장정으로는 『기상도』의 내용이나 김기림 시의 성향을 독자에게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기상도』에 실린 작품들이, 「태풍의 기침시간」 「병든 풍경」 「올빼미의 주문」 「쇠바퀴의 노래」 등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기이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사실, 또는 기지·해학·풍자·반어 등의 수법을 이용해 모더니즘 실험을 시도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면 또 모를까, 설령 이러한 사실을 익히 알고 있는 독자라 하더라도 『기상도』 장정을 통해 이 모든 것을 연상하길 기대하기란 사실 무리다. 그러나 이상은 『기상도』 장정을 한 덩어리의 암회색 공간으로 표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이러한 장정이 나오기까지는 『기상도』의 내용에도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겠지만, 무엇보다도 북디자이너 이상의 정신세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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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1『서양인이 본 조선』 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를 수집하여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수집가에 따라 다르다. 이는 고서 수집을 하기 전에 이미 그 목적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목적이 어떻든 간에,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자연히 그 방면에서는 저절로 많은 지식이 쌓여 전문가가 되기도 한다. 때문에 저술가 중에는 유명한 고서 수집가가 많다. 나는 고서를 수집하면서 『서양인이 본 조선』(호산방, 1996)과 『우리 책의 장정과 장정가들』(열화당, 2008), 『한국 북디자인 100년』(21세기 북스, 2013)이라는 세 권의 책과, 몇 편의 논문을 썼다. 나야말로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저절로 글이 써지고 책이 만들어진 경우라 할 수 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가 서양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이며 또 우리나라를 방문한 최초의 서양인은 누구일까 하는 막연한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 30여 년 전, 서양에서 출판된 한국 관련 자료들을 하나 둘 접하면서부터 우리나라와 서양의 접촉이 어떻게 발전되어 왔는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관련 서양 도서의 수집은 『서양인이 본 조선』을 출간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모리스 쿠랑의 『한국서지』와 마에마 교사쿠의 『고선책보』의 영향을 받아서다. 나는 이 두 책을 알고 난 후 우리의 서지 작업이 외국인에 의해 이렇게 정리되었다는 것에 경외심을 갖게 되었다. 그것이 결국 나로 하여금 서양에서 출간된 조선 관련 서지를 정리하도록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1655년부터 1949년까지 약 300년 동안 서양의 선교사·탐험가·군인·학자들이 조선을 관찰하고 연구한 바를 서술한 188종 261판본 287책의 여러 서양어계 도서들을 서지학적으로 정리한 책이다.(*사진 84) 각 도서의 제목과 저자·출판사·출판지·출판연도·판수·책수·면수·크기와 삽화 수 등을 표시했고, 책에 실린 흑백과 컬러 사진 몇 점을 실었다. 그 다음에는 저자와 책 내용을 소개하면서, 그 동안의 국내 연구 상황을 주석으로 소상하게 밝히려고 했다. 그 다음 장에는 각 책에 들어 있는 목차와 삽화 목록, 사진과 삽화를 수록했다. 목차에는 17세기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영어·불어·독어·네덜란드어·스웨덴어·러시아어 등이 원전 그대로 실려 있다. 따라서 이 목차만 보고도 원전의 내용이 어떠한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설명한 대로, 이 책은 서지에 관한 전문서적인 동시에 역사서이다. 서지는 모든 학문의 기초이자 출발점이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정한 연구대상이 지금까지 어떻게 조명되었고 또 어떤 관련 자료가 있는가를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한다. 어떤 시대에 어떤 내용의 책이 어떻게 출판되었는가를 종합하여 밝히는 일은 모든 학문에 기초를 닦는 작업이다. 더구나 그 자료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희귀본이라면 그 중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양인들이 기록한 우리의 역사적 사실은 한국학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자 민족문화의 자산이라고 할 만하다. 우리 선조들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 주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이 땅의 역사를 제삼자의 시각에서 객관적으로 기록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이 어떤 목적으로 연구되었는가 하는 것은 서양 접촉사와 관련해 큰 의미를 갖는다. 이들 책 중에는 개항 이전 조선의 모습뿐만 아니라, 조선어의 소개, 서양에서 제주를 일컫는 명칭, 서양 술의 조선 전래, 성서의 조선 전래 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 있다. 조선이 나라 문을 걸어 잠근 채 집안싸움만 하고 있을 때 서양 여러 나라들은 앞 다투어 조선을 방문 또는 탐사했으며 그때마다 이러한 사실들을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껏 이러한 사실조차도 잘 모르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이 방면의 자료는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다.(*사진 85~88) 고서 수집에서 수집 대상의 주제는 독창적이어야 한다. 다른 수집가나 박물관에서 미처 관심을 갖지 않은 것이라면 더욱 좋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조선 관련 서양 도서는 매우 매력적인 주제라 할 만하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주제가 정해졌다 하더라도 자료가 저절로 구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유능한 파트너와의 만남이 있어야 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유능한 파트너는 모든 자료를 한곳으로 모으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자료들을 오랫동안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외국에 직접 나가서 구하기도 하고, 국제적인 고서적상을 한국으로 직접 불러들여 구입하기도 했다. 이미 조선 관련 서양 고서가 미국·독일·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스웨덴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판된 관계로 나는 각 나라별로 유명 고서점 또는 중개인을 선정해 이들과 긴밀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는 이들 파트너가 제공하는 자료를 거의 다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을 대여섯 권씩 사기도 했다. 하지만 파트너들이 나를 위해 구해 준 것들이므로, 중복되는 책이 있어도 싫은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가격이 점점 오르는 것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고서에서 초판본은 의미가 각별하다. 당연히 모든 고서 수집가들이 초판본을 선호한다. 그러나 나는 초판본 못지않게 모든 판본의 책이 각각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 관련 서양 고서를 수집할 때부터 모든 판본에 의미를 두었다. 내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앞에서 소개한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은 1897년 뉴욕 플레밍 레벨 출판사(Fleming H. Revell Company)에서 초판본이 간행된 이후, 같은 해에 삼판본까지 출간되었다. 1898년에도 판본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책이 간행되기도 했다. 한편 1898년과 1905년에는 런던 존 머레이(John Murray) 출판사에서도 출간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각 판본의 표지 장정과 편집, 책의 내용이 조금씩 다르다는 점이다.(*사진 89~90)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의 목사이자 동양학자인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가 쓴 『은자의 나라 한국(Korea, the Hermit Nation)』은, 1882년 뉴욕 찰스 스크리브너스 선스(Charles Scribner’s Sons) 출판사와 런던 앨런(W. H. Allen) 출판사에서 같은 해에 출간되었는데, 이 두 책은 내용은 똑같으나 접혀 있는 지도 한 장과 책등 부분에 인쇄된 글자가 약간 다르다. 그후 이 책은 1888년·1897년·1904년·1907년에 각각 증보판이 나왔으며, 여러 차례 중판되었다. 나는 이들 중 1882년 뉴욕과 런던에서 나온 초판본과 또 다른 갈색 장정의 1882년 뉴욕판본, 1888년 뉴욕 삼판본, 1894년 뉴욕 사판본, 1897년 뉴욕 육판본, 1904년 뉴욕 칠판본, 1907년 뉴욕 팔판본을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은 사업성이 없는 책이다. 그러니 어떤 출판사에서도 욕심낼 이유가 없다. 그래서 나는 호산방에서 직접 출간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양인이 본 조선』이 출간되기까지 자료수집에 10수 년, 집필·제작에 5년이 걸렸다. 교정도 스무 번 넘게 보았다. 그러나 이게 무슨 자랑이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모든 면에서 부족하고 아쉬움만 남는다. 그나마 이 책이 이만큼의 모습이라도 갖추게 된 데는 사진의 역할이 컸다. 사진 작업만도 꼬박 삼 개월이 넘게 걸렸는데, 이때 테스트로 찍은 필름만도 한 박스가 넘는다. 사진작업은 구름 사진가로 유명한 김광수 선생이 맡았다. 이 책이 처음 출간되었을 때 반향이 대단했다. 광화문 일민문화관에서 가진 『서양인이 본 조선』 출판기념 전시회는 성황을 이뤘고, 관련 학자들에게도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쑥스러운 얘기지만 이 전시는 우리의 고서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기존의 고서 전시와는 분명 그 궤를 달리했다. 장소부터가 전문 미술관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기획에서부터 디스플레이, 진행에 이르기까지, 고서가 미술의 한 장르에 포함되어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사진 91~92) 지금에서야 고백하지만, 나는 이 책의 출간과 전시를 통해 나의 문화적 역량을 시험해 보고 싶었다. 이때의 모든 전시기획과 진행을 내가 직접 주도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평생의 꿈인 책박물관 설립의 가능성을 미리 점쳐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이렇게 책을 내고 성대한 전시를 하는 것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도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서양인이 본 조선』에 소개된 책들은 고서 수집가들은 물론 학계에서도 잘 모르고 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내 주위의 연구자와 수집가들의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나는 미처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어쨌든 출판기념 전시회의 열기가 구매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예상치 못한 바는 아니었다. 위안이라면, 이 책으로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책을 출판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열정을 바쳤는지 모른다. 또 나의 전 재산을 이 작업과 맞바꾸는 오기를 부려야만 했다. 이제 그 대가로, 내가 지금까지 책을 수집하고 글을 쓰고 또 출판을 하기까지 겪었던 어려움보다 더 큰 고통이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를 괴롭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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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0도서목록에서 인터넷까지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호산방에서는 1988년 1월부터 『호산방도서목록』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를테면 판매가격을 문서화하여 공개한 것이다. 나는 그 첫 호에서, "고서의 공정한 평가를 꾀함은 물론, 고서가격을 공개 전시하여 고서의 유통을 활성화하고 학자 및 수집가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도서목록을 간행하게 됐음을 밝혔다. 이 목록은 멀리 보아서는 훌륭한 학문적 자료가 될 수 있고, 가까이는 호산방의 판촉활동이기도 했다.(* 사진 80~82) 도서목록에는 보통 도서명·저자·출판사·출판연도·가격과 함께 간략한 서지사항 등의 정보가 수록된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은, 내가 고서를 직접 확인하면서 작업하기 때문에 어떤 도서목록보다도 정확한 정보를 보장한다.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도 연구자와 고객에 대한 훌륭한 서비스가 되기에 충분하다. 이와 함께 『호산방도서목록』을 전산으로 정리했다. 여기에는 언제 누구한테 얼마에 구입하여 어디로 판매되었다는 정보가 모두 수록되었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당시로서는 혁명과도 같았다. 정찰제를 실시하면서 도서목록이 발행되자 일부 수집가와 고서점 주인들로부터 빈축을 사기도 했다. 어떤 수집가는 고서의 정보가 공개되는 것을 꺼리는 눈치였고, 특히 흥정의 여지가 없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일부 고서점 주인들은 호산방의 고서 가격을 터무니없이 비싼 것으로 소문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호산방도서목록』은 이들 모두에게 매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도 했다. 수집가들은 자신들이 소장한 책들에 대한 평가가 격상된 것에 내심 흡족해 했고, 다른 고서점들에서는 호산방의 책값을 기준으로 하여 적당한 선에서 판매하니 매우 현실적인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또 이제 막 고서 수집에 발을 들여놓은 수집가는 나름대로의 정보를 얻을 수 있어서 오히려 환영했다. 나는 『호산방도서목록』을 발행한 후 곧이어 고서 경매전을 개최했다. 아직도 대부분의 장서가들은 책을 판다는 행위를 썩 떳떳하지 못한 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경매전은 그같은 부담을 자연스레 덜어 준다. 그후 호산방을 영월로 옮기기까지 『호산방도서목록』을 18호까지 발행했으며, 고서 경매전도 여러 차례 개최했다. 1999년에는 영월책박물관 설립과 함께 호산방도 영월로 옮겼다. 그리고 8년, 호산방은 그 동안 박물관 사업에 밀려 명맥만 이어 왔다. 그러던 2006년 9월, 호산방을 서울 프레스센터로 이전했다. 박물관을 운영한다는 것이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절감한 때였다. 그래서 호산방 사업을 서울에서 재개하기로 한 것이다.(*사진 83) 2007년 5월, 파주출판도시 호텔 지지향 이층에 호산방을 하나 더 오픈했다.(*사진 84~85) 이와 때를 같이하여 『호산방도서목록』을 『호산방통신』이라 제호를 바꿔 근 10년 만에 제19호를 발행하면서 새로운 사업체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간의 고서점가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고서 수집가도 상당수가 바뀌었고, 고서점의 운영 방식에도 인터넷 온라인 서점으로 그 중심축이 옮겨 가고 있었다. 온라인 서점으로 말하면 호산방이 그 원조다. 『호산방도서목록』을 발행하면서부터 이들을 전산관리하기 시작했으니 벌써 20년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영월에서 운영하던 방식으로는 시대의 흐름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호산방 사이트를 개편하여 새로운 변화를 꾀하기로 했다. 이에 앞서 인터넷 고서점의 문제점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온라인 판매의 구조적 특성은 고객과의 의사소통이 거의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 상품 사진과 설명에 의존하여 판매가 이루어진다. 또, 대금 결제에 따른 고객의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하는 점도 지나칠 수 없는 문제다. 결국 이 모든 문제는 고서를 보는 정확한 안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성실함으로 풀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사진과 상품 설명에 보다 사실적으로 접근하기로 했다. 적어도 물건에 대한 의문점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하면 많은 사진과 함께 정확한 설명을 곁들이도록 노력하고 있다. 특히 상태와 관련한 시비를 없애기 위해 흠이 있는 부분을 상세한 사진으로 보여 주면서, 상태에 따라 매긴 등급을 별도로 알려 주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2007년 여름, 미국의 세계적인 경매 사이트에 호산방 사이트를 개설했다. 동시에 기존의 사이트를 전면 개편하여 2008년 1월에 새롭게 오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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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에누리 없는 고서점 ‘엿장수 마음대로’란 말이 있다. 엿장수가 엿을 늘이듯 무슨 일을 제 마음대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을 못마땅한 투로 이르는 것으로, 고서점 주인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고서 가격은 고서점 주인 마음대로란 말인가. 사실 그렇다. 고서점 주인에게는 자기 마음대로 고서 가격을 정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러다 보니 수요자인 수집가가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처럼 사려는 사람과 팔려는 사람의 평가 기준에 많은 차이가 있다면 거래가 이루어질 수 없다. 고서점 주인이 아무리 합당하다고 생각해 제시한 값이라도 그 책을 사려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거래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거래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고서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책의 가격이 비싸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언젠가 그 책이 누군가에게 팔린다면 그 순간 이것은 합당한 가격이 되는 것이다. 결국 고서는 사고파는 값이 정가다. 호산방에서는 고서의 가격을 정할 때 몇 가지 요인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책정한다. 그 요인이란 그 책이 갖고 있는 희귀성·효용성·시장성 등이다. 우선, 희귀성이란 자료의 희귀한 정도를 말하는데 이것은 순전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한 35년 전쯤의 일이다. 하루는 어떤 고서점 주인이 내게 아주 귀한 책을 보여주겠다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이십 년 넘게 고서점을 했지만, 이런 책은 처음 봅니다.” 주인의 이런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책에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얼마냐고 물었다. 순간 주인은 조금 난감해 하는 눈치다. 내가 가격을 너무 성급하게 물은 것이다. 그는 내가 이 책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분명 관심을 보일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데 내가 책을 펼쳐 보지도 않고 대뜸 가격부터 물었으니 맥이 빠진 것이다. 주인은 조금 멈칫하더니, 아주 귀한 책이라 ○○원은 받아야겠다고 한다. 내가 즉시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도리어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 책을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어 보이기만 했다. 서점 주인이 내놓은 책은 1898년 영국에서 발행된 비숍(I. B. Bishop, 1831-1904)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이었다. 비숍은 영국의 여성 작가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조선을 네 차례나 여행했다. 남장을 하고 나귀를 타고 다니며 여행할 정도로 조선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을 갖고 있었다. 이 책은 그때의 여행기로, 당시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던 베스트셀러다. 지금은 많이 알려지고 번역본도 나왔지만, 35년 전쯤만 해도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매우 귀한 책이었다. 그때 나는 이미 이 책을 몇 권 소장하고 있었기에 그 가치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책을 보지 않고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책은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는데, 장정이 매우 인상적이다. 푸른색 천 바탕에 영문 제목과 저자명을 금박으로 처리하고, 붉은색과 검은색의 태극문양을 압인했으며, 그 옆에 다시 붉은색 네모 바탕에 ‘朝鮮’이란 한자 제목을 금박으로 디자인했다. 그런데 한자 제목인 ‘朝鮮’의 ‘鮮’자가 ‘’으로 뒤집혀 인쇄되었다. 이는 아마 외국인이 편집하는 과정에서 한자를 잘 몰라 글씨가 뒤집힌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디자인 차원에서 일부러 뒤집어 놓았다면 이는 대단한 안목이라 할 수 있다.(* 사진 78) 나는 고서를 살 때 여태껏 내 입으로 깎아 달라고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흥정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흥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평소 서점 주인에게 가격만 적당하다면 한 푼도 깎지 않고 책을 살 터이니 꼭 받을 가격만 말하라는 암시를 주어 왔다. 그래서 조금 비싼 듯해도 두말 않고 사기도 한다. 가격이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생각되면 사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면 주인은 긴장하게 마련이다. 설령 눈앞의 책은 포기한다 해도 다음 것들에 대한 흥정을 미리부터 해 놓는 식이다. 이보다 더 효과적인 흥정이 어디 있겠는가. 내가 주인에게 설명할 틈을 주지 않고, 또 책을 살펴보지도 않고 사겠다고 한 것은 주인과의 기싸움이다. 조금 비싸게 사는 것도 기싸움에서 이기는 한 방편이고, 이것이 결국은 싸게 사는 길이다. 위의 예에서처럼 고서의 희귀한 정도가 가격을 결정하는 데 기본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서점 주인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효용성이란 책의 활용성을 고려한 것으로, 고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를 말한다. 이러한 가치 또한 책에 따라, 이용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정가의 수배 내지 수백 배의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이에 대한 평가의 일부도 결국은 고서 가격에 포함되어야 마땅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수필가 박연구(朴演求) 선생이 호산방에서 이태준(李泰俊)의 『무서록(無序錄)』을 사 간 적이 있다.(* 사진 79) 그는 이때의 사연을 『책과 인생』 창간호(1992년 3월)에 「쌀 한 가마니 값과 맞바꾼 수필의 정수」라는 글로 발표했다. 그는 이 수필에서, 수필의 정수로서 김용준(金瑢俊)의 『근원수필(近園隨筆)』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무서록』을, 망설임 끝에 쌀 한 가마니 값으로 구입한 가난한 문사(文士)의 호사를 고백했다. 박 선생이 처음부터 이런 수필을 쓸 생각에 『무서록』을 사 간 것은 아닐 것이다. 책을 가까이 두다 보니까 글의 소재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그 후 『무서록』은 범우사에서 문고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선생이 원고료나 인세를 얼마나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잘하면 이 책값보다 훨씬 더 받았을지도 모른다. 안 받았으면 또 어떠한가. 고서란 이렇게 활용하는 것이다. 한편 박 선생이 고백한 대로, 가난한 문사의 처지에서 이 책의 당시 가격 10만 원은 분명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그럼 만약 이 책의 가격이 2~3만 원 정도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랬다면 이 책이 박 선생에게까지 차례가 갔을까. 아마 박 선생과 만나기 전에 벌써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갔을 것이다. 그래서 고서는 적당히 비싼 것이 좋을 수도 있다. 꼭 필요한 사람을 기다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시장성이란 수집가의 선호도에 따른 시장 논리를 말함이다. 어떤 특정 분야의 책을 찾는 수집가가 많으면 자연 그 분야의 책값은 오르게 마련이다. 또는 앞으로 누가 이 책을 찾을 것을 예측하여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이 기간은 짧게는 1~2년, 길게는 10~20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이 외에도 고서 가격을 결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수 있다. 남들에게는 하찮아 보이는 책이라도 애타게 찾아 헤매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고서점 주인이 이것을 예견하고 준비해 놓았다면 수집가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수집가가 이것을 모두 알아차리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설령 알아차린다 한들 주인의 손에 들어간 이상 어쩔 도리가 없다. 그래서 고서 가격은 고서점 주인 마음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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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8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책의 길을 걸으며 조선시대에 서점은 서사(書肆)·책사(冊肆)라 불렸고,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는 서포(書僩)·책포(冊僩)·서점(書店)이라고도 불렸다. 해방 이후 서점이라 통용되기 시작하면서 현재까지도 그렇게 불리고 있는 책방(冊房)은, 조선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기구였으며, 특히 세종 때는 궁중의 인쇄를 맡아보던 출판기관의 명칭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점은 1908년 고유상(高裕相)이 설립한 회동 서관(匯東書館)이다. 회동 서관은 1897년에 세워진 고제홍 서사(高濟弘書肆)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데, 이해조(李海朝)가 번역한 『화성 돈전(華盛頓傳)』을 비롯해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이광수(李光洙)의 『단종애사(端宗哀史)』 등 이백여 종이 넘는 책을 출판하면서 1950년대 중반까지 우리 근대 출판문화를 이끌어 온 주역이다.(도판 55-56) 회동 서관은 출판사와 서점을 겸했을 뿐만 아니라 문방구류의 물품도 판매했다. 우리나라 초창기 고서점의 역사를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제1부에서 언급한 쿠랑의 기록으로 미루어 회동서관 같은 서점에서 고서도 함께 판매한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오늘날의 고서점은 고서를 사고파는 곳이다. 따라서 일반 서점과는 그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선 서점을 찾는 고객들은 대개 연구자나 고서 수집가들로,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다. 고객의 수에서도 많은 차이가 난다. 또 고서점을 운영하려면 고서에 관해 어느 정도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유럽에는 백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고서점이 수두룩하다. 고서점 주인 중에는 박사학위를 가진 학자나 서지학 관련의 저서를 낸 사람도 많다. 그러다 보니 고서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도 특별하다. 이들 서점들 중에는 여러 방면의 고서를 두루 다루는 곳도 있지만, 문학·역사 등 한 방면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전문서점들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서점 주인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돼야 한다. 서점 경영도 고객 중심이다. 잘 만들어진 도서목록은 학술자료로도 아무런 손색이 없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고서점의 운영 방식은 대부분 주먹구구식이다. 동화책에서부터 한적까지 두루 취급하는 백화점식이다. 또 대부분의 고서점이 헌책방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도서 목록을 제작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뿐 아니라 필요성조차도 느끼지 못한다. 대부분의 서점 주인에게서는, 고서를 취급한다는 자긍심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나는 도자기에 관심이 많아 십 대 때는 도예가가 되기로 마음먹었었다. 한때 도예 학원을 운영하는 등 이십 대 시절의 모든 정열을 도자기에 바쳤지만, 아무런 성과를 이룰 수가 없었다. 그래도 도자기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서른이 다 되도록 방황만 했다. 그 시절 내게 유일한 낙은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중앙도서관 그리고 서울의 여러 고서점을 드나드는 일이었다. 덕분에 나는 도자기뿐만 아니라 고미술 전반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고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봤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서와 고미술품에 관한 약간의 지식, 이것밖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고서점이다. 궁리 끝에 독립문 근처에 작은 사무실을 얻었다. 보증금 없이 월세만 주고 책상 하나만 달랑 있는 사무실이었다. 전화도 월세로 빌렸다. 지금은 전화가 흔하지만, 그때만 해도 백색전화니 청색전화니 해서 전화 놓기도 어려웠고, 가설비도 무척 비싼 시절이었다. 그리고 몇 달 후 장안평 고미술상가에 고서점 호산방(壺山房)을 열었다. 이때가 1983년, 내 나이 서른한 살 때였다. 호산방이라고 이름을 붙인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조선 말기 서화가 중에 우봉(又峰) 조희룡(趙熙龍)이 있다. 그는 추사 김정희의 문인으로 호를 호산(壺山)이라고도 했다. 나는 일찍이 그의 서화에 매료되어 그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러다 도자기에 깊이 빠져들면서, 장차 도자기 가마를 갖게 되면 당호를 호산방으로 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호(壺)’자는 항아리를 뜻하니 도자기 가마의 이름으로는 썩 어울릴 듯했다. 결국 도자기 가마가 아니라 고서점을 차리게 됐지만 고서점하고도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대로 쓰기로 했다. 막상 가게를 차렸으나 고서화 몇 점에 약간의 책이 전부였다. 다행히 그동안 모아 둔 고서가 커다란 힘이 되었다. 한 권을 팔아 두 권을 사고, 두 권을 팔아 다시 네 권을 사는 식으로 사업을 꾸려 나갔다. 처음에는 아주 힘들고 어려웠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눈에 띄게 안정되어 갔다. 그동안 작은 아파트도 하나 장만하고 세 들어 있던 가게도 인수할 수 있었다. 내가 주로 관심을 가진 분야는 필사본과 간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때의 역사와 문학 관련 양장본이었다. 1992년, 장안평 호산방을 광화문으로 옮겼다. 교보문고 건너편 광화문 우체국 옆 한일빌딩 아케이드, 지금은 센트럴빌딩으로 이름이 바뀐 건물이다. 호산방이 보다 발전하려면 시내 중심가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 주위에서는 다들 광화문으로 옮긴 것을 의아해 하는 눈치였다. 광화문과 고서점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런 우려와는 달리 광화문 호산방은 유명세를 치루고 사업이 나날이 번창해 갔다. 호산방이 점점 안정되어 가면서 고서에 대한 나의 애정과 관심도 훨씬 깊어졌다. 취급하는 고서의 수준도 월등히 차이 났다. 단순히 취미로 고서를 수집할 때는 기껏해야 해방 이전의 문학서적 정도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호산방을 시작하고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고 활자본의 감식은 물론 간찰과 필사본의 내용, 더 나아가 누구의 친필인가를 가려내야만 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을 다잡고 한적과 간찰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래야 가르쳐 주는 선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서 이 책 저 책 뒤적이며 끙끙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필사본과 간찰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노력이 호산방 운영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문·호외·육필원고·포스터·광고지·음반·영화필름 따위의 비도서 자료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들 중 일부 자료는 책 박물관 설립을 목적으로 호산방 사업과는 무관하게 수집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말에 ‘에누리 없는 장사가 어디 있나’란 말이 있다. 이 말은 고서점에 딱 어울리는 말인 듯싶다. 고서점 주인은 깎아 줄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가격을 부르고, 수집가는 무조건 반으로 뚝 잘라 깎고 본다. 그래야만 직성이 풀리나 보다. 사실 고서점에서의 에누리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생리적으로 이러한 흥정을 싫어해서 길거리나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는 불안하기 그지없다. 남들만큼 흥정에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단골 고서점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성격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호산방을 운영하면서 처음부터 정찰제를 실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이 과연 손님들한테 먹혀들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처음 호산방을 열고 얼마 되지 않아 한 손님이 들렀다. 한참 동안 책을 살피더니 십여 권의 책을 골라 놓는다. "이거 다 얼마요?” "책 뒤에 가격표가 붙어 있습니다.” 책 가격을 본 손님의 표정과 말투가 곱지 않다. "얼마면 되겠네” 한다. 내가 정색을 하고, "우리 서점은 정찰제입니다”라고 말했더니, 골라 놓은 책들을 휙 내팽개치듯 하고는 돌아갔다. A 선생이었다. 고서 수집가로는 꽤나 알려진 분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에 대한 나의 감정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는 호산방에 몇 차례 더 들르고서야 정가대로 책을 사 갔다. 그때의 표정이 마치 땡감을 씹은 듯했다. 그 후로도 그는 나의 원칙을 무너뜨리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나 나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이렇듯 A 선생과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껄끄러운 사이였다. 나는 책을 팔 때는 분명 고서점 주인이지만 다른 고서점에서 책을 살 때는 손님이 된다. 이때 가격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대로 물러서곤 했다. 그 책과는 인연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미련을 버리는 것이다. 물론 비싸다는 말도 절대 하지 않는다. 고서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인데 어떻게 내 기준으로 남의 물건을 싸다 비싸다 할 수 있겠는가. 다만 내가 생각하는 가치와 차이가 날 뿐인 것이다. 고서점이란 겉모습으로는 매우 고상하고 문화적으로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어설픈 의상을 입히고 그 의미를 확대해석하려 한다. 그러나 고서 매매 행위 자체에는 아무런 문화적 의미도 없다. 고서를 팔고 사는 것은 말 그대로 비즈니스다. 그런 비즈니스에 굳이 문화적 의미를 갖다 붙이는 것은 아마추어의 어설픔일 뿐이다. 나는 당당한 프로를 지향한다. 억지로 의미를 끌어다 붙이기보다는, 고서 매매 행위 자체가 하나의 문화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할 뿐이다. 지금까지 대다수 고서점에서의 고서 매매 행태는 비문화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아무렇게나 쌓여 있는 책 더미에서 손님이 몇 권을 주섬주섬 골라 주인 앞에 내놓으면 적당히 흥정하여 팔고 사는 것이 우리 고서점의 일반적인 풍경이다. 그러다 보니 같은 책이라도 이 손님에게 부르는 값과 저 손님에게 부르는 값이 다른 경우도 생긴다. 이 얼마나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상행위인가. 이래 가지고는 결코 고서점의 위상과 신뢰를 높일 수 없다. 나는 정찰제만이 공정성을 회복하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다. 또 판매가격을 공개함으로써, 고서 자료의 원활한 순환이라는 측면에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판매 가격의 공개는 매입 가격의 암시로도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매물이 나올 수 있도록 통로를 열어 주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사실 고서점은 좋은 고서를 얼마나 확보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말하자면, 개인 수장가들의 서재에 숨어 있는 자료들을 끌어내 그것을 순환시켜야 고서점도 살고 연구자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판매 가격의 공개는 그런 의미에서 매물을 이끌어내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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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7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끝나지 않은 소동 지금까지 난고문학관 소장 김병연 친필 관련 자료 넉 점의 진위에 관해 살펴보았다. 이들 중 「선생부지하」 「금강산」 「반휴서가」는 김병연의 친필이 아닌, 최근에 만들어진 가짜 글씨로 결론 내릴 수 있다. 또 김병연의 친필 간찰 영인본이라 하는 「내우혜서」는 ‘난고 김병연’이 아닌 ‘김병연’과 동명이인의 글씨를 영인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간에는 김병연의 친필이라고 소문난 글씨가 종종 나돌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과문한 탓인지 그의 친필이라고 생각되는 필적을 아직 한번도 만나 보지 못했다. 그렇게 많은 시를 지었으면서도 그의 친필이 아직까지 한 점도 발견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일까. 이 까닭은 평생 방랑생활로 생을 마감한 김병연의 생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어쩌면 김병연의 친필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설령 그의 친필이 세상에 존재한다 하더라도 앞에서 설명한 객관적인 요소를 모두 증명해 보이지 않고는 그의 친필로 인정받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자료의 고증은 냉정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사실을 통해, 모든 역사 연구는 정확한 기록과 자료에 의해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처럼, 역사란 기록이다. 또 기록은 역사가 된다. 그러나 그릇된 기록이 그릇된 역사를 만드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러한 내용의 논문을 발표하자, 2003년 12월 17일자 『강원도민일보』 사설에는 ‘난고문학관의 가짜 김삿갓 친필’이란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방랑시인 김삿갓이 묻혀 있는 영월에 어렵사리 문을 연 난고문학관의 그의 친필 넉 점이 ‘가짜’라는 주장이 제기돼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가짜’를 주장한 이가 한국 고서 연구의 권위자이고, 사석도 아니고 『고서연구』에 논문을 게재하면서 밝힌 것이니까 이를 영월군 관계자의 말처럼 ‘모두 철저한 고증을 거친 진품’이라며 가볍게 일축하긴 어렵다. 난고문학관 측이 일부러 ‘가짜’를 ‘진짜’라고 이제껏 속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문학관 측, 즉 영월군이 친필 넉 점을 사들이는 과정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누가 위작을 진품인 것처럼 속였거나, 가짜를 진짜로 잘못 알고 영월군에 ‘납품’하는 실수 또는 고의가 있었을 것이다. 그 경위를 밝혀내 잘못됐으면 시인하는 것이 지금 이 불을 끄는 최선책이다. ‘가짜’를 제기한 이는 "김병연(김삿갓)의 위작 글씨가 버젓이 난고문학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며 우리 문화의 수치”라고 폭로 배경을 밝혔다. 그의 말처럼 ‘가짜’가 사실이라면, 지역문화를 발굴하고 계승 발전시켜 보려던 지역 역량이 비웃음당한 꼴이다. 그보다, 지역주민들이 누려 보려던 지방문화 향수 그리고 지역의 문화정서에 대한 문화사기꾼들의 폭력이다. 어떻게 만든 난고문학관인지, 그리고 들어간 수십억 원이 누구의 돈인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더구나 난고문학관의 명예가 곤두박질하는 것은 물론 김삿갓의 고장답게 적어도 그의 친필 몇 점을 갖추어 놓았다고 자랑하던 지역주민의 긍지가 먹칠당하는 이 지경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제의 작품을 문학관이 소장하기까지 나름대로 고증과 조언을 받는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 과정에서 있었던 누구의 안목이나 전문성을 비방하거나 원 소장자의 컬렉션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가짜’를 주장한 이가 인용한 문헌자료나 그의 안목에 대해 무조건 동의하자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원군과 추사를 조심하라”는 말이 명언이 되다시피 하고 있는 고문서·고미술품 시장의 흑막에, 전문성이라고는 없는 지자체가 덜컥 걸려든 건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추사의 글씨 오십 퍼센트가 위작이라는 말이 공공연한 마당에 김삿갓 글씨라고 진품만 돌아다닐 리는 없다. 난고문학관의 ‘친필’이 그 시장에 떠도는 ‘가짜’라는 것이 이번 논란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문제의 친필 입수 경위를 밝히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지역의 문화실추를 회복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까막눈일 수밖에 없는 지방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을 봉으로 삼고 있는 고문서·고미술품 거래 관행에 경종의 계기이기 때문이다. 그후 영월군에서는 이렇다 할 입장이나 대책은커녕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다가,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안 보이자 2004년 2월 5일 ‘난고 김삿갓 친필 관련 진위 여부에 대한 답변’을 영월군 홈페이지 등에 내놓았다. 이 사태가 알려지고 50여 일 만에 영월군의 공식입장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밝혀진 것이다. 여기에서 영월군은 "현재 전시된 김삿갓 친필은 총 네 종인데 원본이 두 종, 이미 공개되었지만 원본이 분실되거나 소장자를 알지 못하는 복사본과 영인본이 각 한 종 있다”고 말했다. 즉 "「선생부지하」와 「금강산」은 친필이고, 「내우혜서」는 영인본, 「반휴서가」는 복사본이다”라는 것이다. 이는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반휴서가」 등 세 종은 친필이고, 「내우혜서」 한 종은 영인본이다”라고 했던 종전의 주장과 다른 말이다. 영월군은 「선생부지하」 시문에 대해, "정근호 선생 조부의 유품으로, 이미 KBS 〈진품명품〉 프로에서 진품으로 판정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내세워 친필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진품명품〉은 어디까지나 텔레비전 쇼일 뿐이다. 2003년 9월 24일 『동아일보』 사회면에 ‘케이비에스 〈진품명품〉 칠억 도자기는 가짜’란 제목 하에 "KBS 〈TV쇼 진품명품〉이 최근 역대 최고인 칠억 원의 감정가를 매겼던 도자기가 뒤늦게 가짜로 판명났다”는 기사가 실렸다. 이것은 〈진품명품〉이라는 방송 프로그램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또한 영월군은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가 같은 종이라는 지적에 대해, "「내우혜서」는 영인본이고 「반휴서가」는 복사본”이라며, 「반휴서가」에 대해서는 종전의 친필이라는 주장에서 복사본이라고 번복했다. 그러나 난고문학관 설명문에는 개관 당시부터 친필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며, 또 영월군은 처음부터 이것을 친필이라고 언론에 발표했었다. 그러던 영월군이 이제 와서 복사본이라고 번복하여 발표한 이유는 뻔하다. 이 두 글씨를 진본이라 증명하기 위해서는, 두 곳에 사용된 종이가 서로 다른 종이여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두 글씨의 종이가 같은 종이라면 적어도 둘 중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이 가짜가 될 수밖에 없다. 영월군에서는 뒤늦게 「반휴서가」가 친필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초의 친필 주장을 복사본이라고 번복했다. 그러나 「반휴서가」는 영월군에서 처음 말한 대로 친필임에 틀림없다. 다만 난고 김병연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근래에 쓴 ‘친필’인 것이다. 고서화를 포함한 고미술품의 가짜 소동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것을 만드는 수법도 다양해져 전문가들도 속아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다. 국보 274호였던 ‘거북선 별황자총통(別黃字銃筒)’. 1992년 8월, 해군은 경남 통영 한산도 앞바다에서 거북선 총통을 발굴해내는 개가를 올렸다. 사흘 만에 국보로 지정된 이 총통은 그러나 1996년 6월 가짜로 밝혀졌다. 진급에 눈이 먼 한 해군대령이 골동품상과 짜고 가짜를 만들어 바다에 빠뜨린 뒤 건져낸 것이다. 2003년 10월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 성리학의 세계」전에 출품될 예정이던 율곡 이이와 다산 정약용의 유묵(遺墨)이 가짜로 판명된 일이 있었다. 또 「2005 서울 서예비엔날레」의 출품작 일부가 위작 논란에 휘말려 서울역사박물관 전시장에서 철거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위작들은 각종 전시회에 출품되어, 별 탈 없이 전시가 끝나면 자연스럽게 진품으로 행세하게 된다. 이처럼 국가 차원의 문화행정에서도 실수를 범하는데, 영월군의 행정력과 문화적 안목으로는 김삿갓 가짜 글씨를 알아내기란 애초부터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설령 실수가 있다 해도 고치면 되는 것이다. 17년이 지난 지금, 난고문학관에는 문제의 가짜 글씨 넉 점이 아직까지 그대로 진열되어 있는지는 모르겠다.(*사진 7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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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6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내우혜서(內友惠書)」 간찰과 「반휴서가(半虧書架)」 시문 먼저 「내우혜서」 간찰을 살펴보자.(*사진 71)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김병연이 강릉 김 석사(碩士)에게 보낸 편지로, 1857년 3월 19일에 쓴 편지다(영인)”라고 씌어 있다. 이 간찰에는 ‘김병연(金炳淵)’이란 이름이 씌어 있는데, 이 사실 하나만 가지고 난고 김병연의 간찰이라고 주장함은 억측에 불과하다. ‘병연(炳淵)’이란 이름자는 아주 희귀한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난고 김병연이 살던 시대에 ‘김병연’이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씨를 난고 김병연의 간찰로 단정 짓기 위해서는 글의 내용에서 이 글이 난고 김병연이 쓴 것임을 입증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니면 적어도 편지를 받은 사람과 난고의 친분관계를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 간찰의 내용은 일상적인 안부를 전하는 것으로, 편지를 쓴 이가 난고 김병연임을 입증할 만한 내용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또 김 석사와 김병연의 친분관계를 증명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렇다면 설령 이것이 난고 김병연의 친필 편지라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그것을 입증할 방법이 없다. 실제로 ‘김병연’이라는 이름이 적힌 간찰은 적지 않게 발견되기도 하며, 김씨 집안의 족보를 뒤지다 보면 ‘병연’이라는 이름은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들은 모두 편지 끝 부분에 ‘김병연’이라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글씨는 난고문학관의 설명문대로 영인본이 틀림없다. 영인본이란 책이나 글씨 따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인쇄한 것을 이른다. 영인본을 인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종이가 필요한데, 「내우혜서」의 경우에는 옛 종이를 사용했다. 물론 이것은 아무 문제 될 것이 없다. 도리어 옛 종이를 영인에 사용함으로써 사실감을 높이려 한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서를 전시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인에 사용한 종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사실은 다음에 설명할 「반휴서가」가 최근에 만들어진 글씨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다음으로 「반휴서가」 시문(*사진 72)에 대한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1840년 후반에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서재를 소재로 쓴 시”라고 설명돼 있다. 이는 전남 동복의 향토사학자 M씨의 「김삿갓 초분지(初墳地)에 대한 고찰(考察)」(1999)에 근거하고 있는 듯하다. 이 논문은 제1회 전라남도 향토문화연구논문 공모전에서 입상한 논문이다. M씨는 이 논문에서 「반휴서가」를 김병연의 친필이라 전제하고, "1840년 후반에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 서재를 소재로 쓴 시”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중요한 사실을 하나 놓치고 있다. 「반휴서가」의 내용을 논하기 이전에, 「반휴서가」의 글씨가 김병연의 친필임을 먼저 증명해 보였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약 「반휴서가」가 김삿갓의 친필이 아니라면 그의 주장은 허구가 될 수밖에 없다. 강원대 남윤수 교수는 「반휴서가」 시에 대해 "운자(韻字)도 맞지 않으며, 마지막 결구(結句)는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시 「강촌(江村)」의 일부를 적고 있는데, 이는 시도 아니다”라고 평하고 있다. 여기에 글씨 또한 치졸하여 한눈에 거슬리는 작품이다. 이러한 지적 이외에도 「반휴서가」가 김병연의 친필이 될 수 없는 결정적인 단서가 있다. 나는 앞서 「내우혜서」의 설명에서, 영인에 사용된 종이에서 매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가 같은 지질의 종이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반휴서가」가 최근에 쓴 글씨라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반휴서가」가 옛날에 쓰인 글씨라면 그 종이가 「내우혜서」 영인에 사용된 것과 같을 수가 없다.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종이를 같은 종이로 보는 이유는, 첫째 이 두 종이가 같은 제지소(製紙所)에서 만들어졌고, 둘째 원래 같은 공책에 묶여 있던 종이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위의 두 종이가 같은 제지소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발초자리로 알 수 있다. 발초자리란, 종이를 뜰 때 대나무 발을 사용하는데 이때 밭고 성긴 정도가 줄 모양으로 나타나는 무늬 즉 종이의 결을 말한다. "이 발초자리의 모양은 제지 작업 여건에 따라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같은 작업 조건에서 만들어진 종이는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한지(韓紙) 장인 장용훈(張容熏) 선생의 설명이다. 즉, 「반휴서가」와 「내우혜서」의 종이에서 이 발초자리의 무늬가 같은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또, 이 두 종이가 원래 같은 공책에 묶여 있던 것이라는 사실은 먼저 「반휴서가」의 종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 종이에는 오른쪽 약 일 센티미터 정도 세로로 접혔던 흔적이 길게 나 있다. 또 거기에는 약 팔 센티미터 간격으로 뚫린 네 개의 송곳 구멍 흔적이 있다. 종이의 윗부분은 원래 모습 그대로이고 아랫부분은 찢긴 흔적이 있어, 원래는 이보다 조금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 종이는 공책에서 뜯어낸 종이이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구멍 네 개의 흔적은 한적을 꿰맸던 실 자국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잘려 나간 아랫부분에 구멍 하나를 더해 원래는 구멍이 다섯 개였을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나라 한적은 주로 다섯 바늘로 꿰매는 오침안정법으로 묶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종이의 원래 크기는 세로 약 삼십오 센티미터, 가로 약 이십이 센티미터 정도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난고문학관 진열장에 전시된 자료를 눈대중으로 측정한 것이기 때문에 다소 차이가 날 수도 있다. 난고문학관 이층 전시실에는 「내우혜서」와 「반휴서가」 글씨가 나란히 진열되어 있다. 이제 이 두 종이가 같은 종이라는 결정적인 사실을 증명해 보일 차례다. 「반휴서가」 오른편에 전시된 「내우혜서」 글씨를 시계방향으로 구십 도 돌려 보면 두 종이에 나타난 얼룩 자국을 더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다. 둘 다 마치 어린애가 요에 오줌을 싸 놓은 듯이 얼룩져 있다. 이것은 고서를 보관하는 과정에서 물이나 빗물 따위가 스며들어 얼룩진 것으로, 이 얼룩의 모양은 같은 책에 묶여 있던 종이라면 닮은 모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내우혜서」와 「반휴서가」의 두 종이가 희한하게도 닮은 얼룩 자국을 하고 있다. 다시 정리해 보면, 공책에 묶여 있던 빈 종이에 누군가가 최근에 「반휴서가」를 쓰고, 다른 종이 한 장을 「내우혜서」 영인본에 사용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반휴서가」가 김병연의 친필이 될 수 없다는 명확한 결론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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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5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금강산(金剛山)」 시문 「금강산」 시문의 경우, 난고문학관의 설명문에는 "1850년(1851년의 잘못─저자) 화순 동복에서 금강산 시회(詩會)의 일부를 써 놓은 친필”이라고 씌어 있다. 시문의 말미에는 "道光三十一年金炳淵書于於也同福”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우선, "金炳淵書于於也同福”은 "김병연이 동복에서 쓰다”라는 뜻으로 쓴 문구로, 어법상 맞지 않는다. 여기서 ‘於也’ 두 자가 빠져야 제대로 된 문장이 되는데, 과연 김병연이 이런 실수를 범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이에 대해서는 강원대학교 남윤수 교수에게 자문을 구했다. 다음으로, 이 글은 도광 3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는데 도광 연호는 30년(1850)까지 사용되었다고 한다. 즉 ‘도광 31년’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사용되지도 않았다. 혹시 김병연이 실수나 착각으로 ‘도광 31년’이라 썼다고 하기에는 설득력이 약하다. 난고문학관 설명문에 ‘도광 31년’을 ‘도광 30년’에 해당하는 ‘1850년’이라고 표기한 것은 혹시 이를 염두에 둔 궁색한 변명인지도 모르겠다. 「금강산」 시문은 김병연의 시 「금강산」의 일부로, 노승(老僧)의 시에 답한다는 「답승금강산시(答僧金剛山詩)」의 대구시(對句詩)이다. 시인 정공채(鄭孔采)의 『오늘은 어찌하랴—김삿갓 시의 인생』에는 이 화답시가 모두 열네 번 오갔는데, 난고문학관의 「금강산」에는 다섯 번의 화답이 실려 있다. 알려진 대구시와 비교하면 순서가 뒤바뀌고 많은 부분 생략되었으며, 특히 셋째 연에서는 노승과 김병연의 화답이 서로 바뀌었다. 주인과 객이 뒤바뀐 꼴이 된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이 난고문학관의 설명처럼 모두 김병연의 친필이라면, 우선 이 두 글씨가 같은 사람의 필체임을 판명해야 한다. 필체를 대조하는 데는 예리한 감식안도 필요하지만, 어느 정도 객관적인 여건도 갖추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십대에 쓴 글씨와 오륙십 대에 쓴 글씨를 대조해 보면 같은 사람의 글씨라 하더라도 그것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또 해서(楷書)로 쓴 글씨와 초서(草書)로 쓴 글씨는 대조가 거의 불가능하다. 다행히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은 1850년과 1851년에 쓴 것으로 되어 있어 시차가 거의 없고, 서체도 행서(行書)에 가까워 대조하기가 용이한 편이다. 글씨를 대조하기 위해서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시문에서 같은 글자를 찾아보았다. 「선생부지하」의 끝에서 두번째 행과, 「금강산」의 첫 행과 마지막 행의 ‘金’자를 보자. 첫 획과 두번째 획을 보면, 「선생부지하」에서는 첫 획이 두번째 획 위에 있고 「금강산」에서는 두 자 모두 첫 획이 두번째 획 아래에 있다. 다음으로 「선생부지하」의 끝에서 두번째 행과 「금강산」 끝 행의 ‘書’자를 보자. 「선생부지하」에서는 정자(正字)인 반면에 「금강산」에서는 약자(略字)로 되어 있다. 이처럼 ‘金’자와 ‘書’자를 비교해 보면 「선생부지하」와 「금강산」이 서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道光’ ‘三十’ ‘年’ ‘炳淵’ ‘同福’ ‘山’ 등의 겹치는 글자를 살펴보면 「선생부지하」의 글씨는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쏠리는 경향을 보이고, 「금강산」의 글씨는 오른쪽으로 쏠리고 있다.(*사진 70) 이렇게 「선생부지하」와 「금강산」 글씨를 비교하여 검토해 본 결과 이를 같은 사람의 글씨로 보기에는 문제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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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4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소동의 시작 고서화를 보는 눈에는 터럭만큼의 착오도, 한 점의 용서도 있을 수 없다 해서 선인들은 ‘금강안혹리수(金剛眼酷吏手)’라는 말을 썼다. 즉 ‘금강야차(金剛夜叉) 같은 눈매와 혹독한 관리의 솜씨’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안목이란 고서화의 진위를 가리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그 작품 하나하나가 예술로서 얼마만큼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을 판단하는 능력까지 포함한다. 즉 고서화를 감식해내고 그 참맛을 느끼려면 과연 어느 정도의 수준을 갖추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고서화의 진위를 가려내는 일은 그것을 감상하기 위한 기본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 그만큼 가장 기초적인 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고서 수집가나 연구자들이 고서 수집에서 가장 난감해 하는 경우는 간찰이나 필사본을 대할 때일 게다. 여기에는 물론 내용도 중요하겠지만 누군가의 친필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항상 뒤따르기 때문이다. 또 이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기도 한다. 글씨의 진위를 알아내는 방법에 딱히 비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많은 글씨를 접해 보고 나름대로 연구하는 길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듯싶다. 다만 연구 방법에도 요령은 있게 마련인데, 다음에 이어질 김삿갓 가짜 글씨 사례는 고서를 감정하는 요령에 관한 좋은 본보기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커다란 업적을 남긴 선인들의 시편(詩片) 하나, 간찰 하나에서 우리는 역사와 문화를 본다. 또 이들의 친필을 통해 마치 선인을 직접 마주하는 듯한 마음을 갖기도 한다. 설령 그 글씨가 예술적 경지를 썩 갖추고 있지 못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누구누구의 친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흠모의 정을 느끼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적 기록을 박물관에서 주로 접하게 되는데, 박물관은 인간사회의 문화를 기억하기 위한 장치의 하나로, 학문적 계몽은 물론 사회적 계몽을 위한 곳이다. 2003년 10월 11일 영월군에서는 조선 말기의 방랑시인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시세계를 기리고자 영월군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난고문학관을 세웠다. 이곳은 김병연의 생가 터와 묘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난고문학관 개관식에 참석하고자, 영월읍 내에서 『K일보』 P기자를 만나 함께 길을 나섰다. 고씨동굴을 지나 옥동에 들어서자 가을 들판이 펼쳐진다. 왼편으로 옥동천을 따라 병풍처럼 늘어선 절벽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감흥이 새롭다. 옥동은 고려시대에는 밀주(密州)의 청사가 있었던 곳으로, 그 당시 죄인들을 가두던 ‘옥(獄)’이 있던 마을이라 해서 ‘옥동(獄洞)’이라 했는데 어감이 좋지 않다 해서 ‘옥동(玉洞)’으로 바꿨다 한다. 절벽의 가을 단풍도 좋지만 겨울의 설경도 그만이고 사시사철 자연의 변화가 뚜렷하고 아름다운 곳이다. 옥동을 지나면 곧 고지기재가 나온다. 재를 넘어 이삼 분 달리면 폐교된 와석분교가 있다. 와석분교를 오른쪽으로 끼고 산길로 접어들면 든돌·싸리골·노루목으로 이어지는 약 5~6킬로미터에 달하는 아름다운 계곡이 펼쳐진다. 내가 박물관 터를 잡기 위해 영월을 찾아다니던 34~35년 전만 해도 이곳은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은 숨겨진 비경이었다. 이때만 해도 소달구지 하나 겨우 지날 수 있는 그런 산길이었다. 난고문학관은 이 계곡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데, 영월군에서는 이 일대를 ‘김삿갓 계곡’이라 이름 짓고 관광지로 개발한 것이다. 문학관 광장에서 개관식을 마치고, 건물이 좀 비좁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층으로 올라갔다. 전시실에는 ‘김삿갓 친필 글씨’라는 설명과 함께 모두 넉 점의 글씨가 전시되어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가벼운 신음이 나왔다. 가슴이 뛰고 두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얼굴이 일그러졌다. 쥐똥을 씹은 기분이었다. 동행한 P기자에게 어딘가 마땅찮다는 사실을 알렸다. 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당분간 비밀로 하자고 했다. 다음날 영월군 문화관광과 C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김삿갓 글씨에 대한 나의 의견을 조심스레 말했다. "내 눈에는 글씨 넉 점 모두 어딘가 이상해 보이니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C과장으로부터, 전문가에게 의뢰해 고증을 거친 작품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일이 없을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래도 한 번 더 확인해 보라고 재차 충고했다. 그러나 반응은 냉담했다. 허튼소리 말라는 투였다. 그날 이후에도 그러기를 서너 차례 반복했다. 나는 다시 L계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난고문학관 설립 계획에서부터 개관까지 모든 사업의 실무 담당자였다. 그러나 그의 대답 역시 C과장과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날부터 이에 관한 글을 준비해 그 해 겨울 『고서연구』 제21호(2003년 12월)에 「난고문학관 김병연 친필 관련 자료의 진위에 관하여」란 논문을 발표했다. 물론 원고를 송고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C과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러나 그의 태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김병연(金炳淵)은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김삿갓(金笠)의 본명으로, 순조 7년(1807)에 경기도 양주의 안동(安東)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성심(性深), 호는 난고(蘭皐)이고, 입(笠) 또는 삿갓은 속명이다. 홍경래난 때 선천부사(宣川府使)로 있다가 반군에 항복한 김익순(金益淳)의 손자로, 난이 진압되자 익순은 사형을 당하고 일가는 멸족했다. 이때 병연의 나이 여섯 살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도망가서 숨어 살게 되었다. 그 뒤 익순의 죄가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자 형제는 아버지 안근(安根)이 살고 있는 양주로 돌아간다. 그러나 불과 일 년 만에 아버지는 화병으로 죽고 어머니 함평(咸平) 이씨 슬하에서 자라게 된다. 이후 어머니는 강원도 영월로 옮겨 집안 내력을 숨기고 살았다. 스무 살 때에 장수(長水) 황씨와 결혼하여 장남 익규(翼圭)를 낳았다. 그 후 집안 내력을 알고는 스물두 살 되던 해에 노모와 처자식을 남겨 두고 방랑길에 나섰다. 사 년 만에 귀향하여 일 년 남짓 머물 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집을 떠나 방랑생활을 하다가 철종 14년(1863)에 57살을 일기로 전라도 동복(同福)에서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선생부지하(先生不知何)」 시문 난고문학관에 소장되어 있는 소위 ‘김삿갓 친필’은 「선생부지하(先生不知何)」 시문과 「금강산(金剛山)」 시문, 「내우혜서(內友惠書)」 간찰, 「반휴서가(半虧書架)」 시문 등 모두 넉 점이다.(*사진 68) 먼저 「선생부지하」(*사진 69) 시문을 살펴보자. 난고문학관 설명문에는 "이 친필 시는 이서면 장항리(노루목)가 고향인 서예가 우창 정근호 선생이 조부님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발견된 것으로 95년 5월 21일 KBS 〈진품명품〉 프로에서 김삿갓의 친필임이 확인되었다. 이로써 김삿갓이 유랑하다 생을 마감한 곳이 화순 동복 구암리였음을 뒷받침할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씌어 있다. 우선 이 시문의 말미에는 "1850년에 난고 김병연이 동복여소에서 쓴 시묵(試墨)이다(道光三十年蘭皐金炳淵書于同福旅所試墨也)”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이를 김병연의 친필로 단정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과연 김병연이 자신의 이름을 직접 기록으로 남겼겠느냐 하는 점이다. 김병연은 세상을 등지고 평생 방랑생활을 한 사람이다. 자신의 신분과 집안 내력을 숨기고 살면서, 이처럼 ‘난고 김병연’이라고 호와 이름을 자랑스레 밝힌다는 것은 그의 행적으로 미루어 볼 때 어딘가 어색하다. 둘은, ‘도광(道光)’이란 청나라 연호를 썼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조선사회에서 통용되던 연호로, 관변문서(官邊文書)나 족보의 서문, 발문, 또는 행장(行狀), 비문(碑文) 등 예와 격식을 갖춘 기록문에서 그 사용한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러나 평생 방랑생활을 하면서 사회의 부조리를 글로써 비판하던 김병연이 굳이 중국의 ‘도광’ 연호를 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음으로 「선생부지하」 글씨의 호불호(好不好)에 대해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글씨는 김병연이 쓴 것만큼 결코 잘 쓴 글씨가 아니다. 사실 나는 아직 김병연의 필적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혹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의 글씨가 얼마만큼 잘 쓴 글씨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을 알아보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다. 글씨의 좋고 나쁨을 볼 수 있는 안목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호불호란 글씨의 잘 쓰고 못 쓴 정도를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떤 글씨가 잘 쓴 글씨이고 어떤 글씨가 잘 못 쓴 글씨일까. 이것은 말로써는 표현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다. 이를 분별해내는 심미안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심미안이 어느 정도인 줄도 모르면서 그저 ‘좋다’ ‘나쁘다’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짜 글씨에 속아 넘어가는 것은, 결코 잘 쓴 글씨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잘 쓴 글씨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호불호를 볼 수 있는 심미안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이다. 신석우(申錫愚)는 『해장집(海藏集)』의 「기김대립사(記金笠事)」에서 김병연의 글씨에 관해, "매일 글 읽는 소리가 낭랑히 그치지 않고 제자백가의 글을 베끼는 붓을 쉬지 않았다. 필법이 또한 고아하고 깨끗하여 참 좋았다”고 전하고 있다. 신석우는 한때 김병연과 깊은 교우관계를 가졌고, 훗날 한성부판윤과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문장과 글씨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신석우가 쓴 글의 내용은 신뢰하기에 충분하며, 그의 글씨를 보는 안목 또한 뛰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그가 김병연의 글씨를 "고아하고 깨끗하여 참 좋았다”고 평한 대목에서 김병연의 글씨가 뛰어났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물론 그 품격이라는 것을 계량해 보일 수는 없지만 어느 수준 이상의 글씨임에는 틀림없다. 난고문학관의 「선생부지하」 글씨는 이 수준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이 글씨는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잘 쓴 것이라 볼 수도 있다. 누구의 글씨를 흉내내고자 하여 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체로 자유롭게 썼기 때문이다. 가짜 글씨를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모본(母本)을 모사(模寫)하는 방법이다. 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모본을 참고로 하여 모사하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모본을 유리판 사이에 놓은 뒤 그 위에 종이를 얹고 유리판 밑에서 형광등 불빛을 비추어 그대로 복사하듯이 모사하는 방법이다. 이 두 방법은 이미 알려진 유명인의 글씨 위작에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모두 비벽(鄙僻)과 갈필(渴筆)이 나타나지 않는다. 비벽이란 글을 쓸 때 자신만이 갖고 있는 독특한 습관으로, 일종의 갈겨쓰는 버릇을 말한다. 또 갈필이란 붓에 먹물을 많이 묻히지 않고 글씨를 쓰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달필(達筆)이나 속필(速筆)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그러나 모사한 글씨에서는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글씨의 꼴을 흉내내는 데 급급하다 보니 속도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모본 없이 글씨를 쓰는 것인데, 이 방법은 모본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필체대로 글씨를 쓰기 때문에 매우 자연스러워 보일 수 있다. 김병연의 경우처럼 친필이 존재하지 않아 모본으로 삼을 만한 자료가 없을 때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때문에 어떤 필체로 쓴들 그 인물의 필체라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가짜 글씨는 구별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러나 가짜 글씨에는 앞에서 말한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지 않는다. 「선생부지하」 글씨에서는 비벽과 갈필이 나타나 있지 않다. 필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가짜 글씨를 가장 쉽게 판별해낼 수 있는 부분이 바로 이 비벽과 갈필이다. 물론 이것은 육안으로도 알아볼 수 있으나, 이를 더욱 쉽게 판별하는 방법은 형광등 불빛이나 햇빛에 비춰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때 필력이 있는 글씨는 먹 자국이 거침이 없이 자연스러운 데 반해, 필력이 떨어지는 글씨, 즉 가짜 글씨는 속도감이 없고 필치가 부자연스럽다. 또 더러는 개칠(改漆)한 흔적이 역력히 나타나기도 한다. 「선생부지하」 같은 시문이나 간찰은 봉투에 넣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이 관례이다. 물론 처음에는 봉투에 넣어져 있었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봉투는 분실되고 안의 내용물만 남아 있는 일도 흔하다. 「선생부지하」의 경우에는 봉투는 없고, 접혔던 부분이 군데군데 떨어져 나간 등 손상된 흔적이 있다. 이런 문서는 보통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차례대로 접힌 채 보관되기 때문에, 외부의 여건에 의해 종이가 손상을 입었다면 그 부위가 접혔던 겉 부분이 더 크게 마련이다. 다시 말해 종이를 펼쳤을 때, 겹쳐서 접었던 부위가 규칙적으로 손상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시문은 접혔던 곳의 손상 부위가 규칙적이지 않았다. 이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손상된 것으로는 볼 수 없는 상황이다. 한편 「선생부지하」 시문은 배접이 되어 있다. 배접이란 글씨를 쓴 종이나 천 뒷면에 다른 종이나 비단 따위를 겹쳐 붙이는 것을 말한다. 원래 이것은 표구의 한 과정으로, 작품의 보관 측면에서 보면 굳이 나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하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종이의 상태가 좋지 않아서 배접을 할 수도 있지만, 배접을 하면 그만큼 진위 감정에는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이는 위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법 중 하나다. 「선생부지하」 시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도연명(陶淵明)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의 일부와 김병연의 시로 알려진 두 편의 시가 실려 있다. 그러나 김병연이 자신의 시문을 언제 어디서 썼다는 것을 밝힐 정도로 예를 갖추고 도연명의 시를 함께 적어 놓은 것은 어딘가 어색하다. 또 이 세 편의 시를 구분하지 않고 연결하여 쓴 것도 그렇다. 강원대 한문교육과 남윤수(南潤秀) 교수는 "내용 면에서 볼 때 이 작품을 김삿갓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평했다. 설령 「선생부지하」가 누군가의 친필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김병연의 친필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문제가 또 있다. 이 글씨가 김병연의 친필이라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의 또 다른 필적과의 대조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세간에 떠도는 김병연의 필적이란 하나같이 근거 없는 것뿐이므로 대조 작업조차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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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3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한 삼십 년쯤 됐을까. 호산방 손님 중에 젊은 화가 H씨가 있었다. 하루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책 가운데 한 권을 들고 와 자랑했다. 1955년 10월 산호장(珊湖莊)에서 발행된 박인환(朴寅煥)의 『선시집(選詩集)』이었다.(* 사진 64) 원래 그 책은 1955년 10월에 출간되어 서점에 배포되기 직전, 인쇄소 화재로 모두 불탔다. 그래서 이듬해인 1956년 1월에 다시 제작했는데, 이러한 사실을 아는 사람은 박인환 연구자나 몇몇 수집가 정도다. 박인환의 『선시집』은 1956년 1월에 다시 초판본이 출간되었으며, 표지는 호부장(糊付裝)으로 되어 있다. 호부장은 제본에서 옆을 매는 방식의 하나로, 속장을 철사로 매고 표지를 싼 다음 표지째 함께 마무리 재단을 하는 제본 방식이다. 그런데 H씨가 가지고 있는 『선시집』은 하드커버의 고급 양장이었다. 판권의 발행일자는 ‘1955년 10월’로, 바로 화재 직전에 출판된 오리지널 판본이었다. 물론 나 역시 그 판본은 처음 보았다. 흥미롭게도 그 책에는 저자가 시인 장호강(張虎崗)에게 증정한 친필 서명이 있었고, 그 옆에는 만화가 김의환(金義煥)이 직접 그린 박인환의 캐리커처가 있었다. 또한 면지와 속표지 그리고 뒤표지 면지 등에는 김광주(金光洲) 이진섭(李眞燮) 송지영(宋志英) 박거영(朴巨影) 차태진(車泰辰) 김광식(金光植) 조영암(趙靈巖) 등의 친필 메모와 함께 ‘1956년 1월 16일’에 썼다는 기록도 있었다. 또 같은 날짜의 『한국일보』 서평이 스크랩되어 붙어 있었다. 이로 미뤄 본다면 1월 16일 출판기념회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지인들이 이 책에 친필 축하 메시지를 담았음을 알 수 있다.(* 사진 65~67) 어쨌든 박인환은 화재 직전에 이 책을 인쇄소로부터 직접 전해 받았고, 출판기념회 때 이 오리지널 판본을 장호강에게 기증한 것으로 보인다. 화재를 피한 오리지널 판본이 몇 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이 책이 유일본이 아닌가 싶다. 당시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여러 문인들의 친필 메시지가 적혀 있다는 것은 그때 이미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았음을 잘 말해 준다. 寅煥이 인환이가 冊가게에서 처음 만난 그 寅煥이가 十年을 하로같이 詩 속에서 詩를 찾으며 읊으며 용하게도 오늘까지 뻗혀왔다는게 진정 반갑구나. 소설가이자 당시 언론인이었던 송지영의 축하 메시지다. 이 메모에 등장하는 ‘책가게’란 박인환이 종로에서 경영하던 고서점 ‘마리서사(茉莉書肆)’를 말한다. 박인환은 1945년 해방을 맞자 평양의학전문학교를 다니다 말고 그 해 말 종로에 고서점 ‘마리서사’를 차렸다. 마리서사란 이름은 프랑스의 화가이자 시인인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마리 로랑생은 19세기 프랑스 모더니즘의 선구자인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의 연인이기도 하며, 당시 몽마르트의 젊은 예술가들에게 싱싱한 영감을 불러일으킨 화가였다. 아폴리네르는 로랑생을 만나고 많은 예술적 자극을 받아 시를 썼으며, 연인에게 바치는 시 「마리」를 남기기도 했다. 박인환이 아폴리네르와 로랑생을 통해 프랑스 문학과 그 예술적 삶을 지향했음은, 박인환 아내의 회고나 김수영(金洙暎)의 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후 마리서사는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모태이자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 송지영과 박인환은 이때부터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생활의 방편이라기보다 문학 교류의 한 장(場)으로 여기면서 운영했던 것 같다. 그곳에 진열된 책 대부분은 그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마리 로랑생, 장 콕토와 같은 외국 현대시인들의 시집과 일본의 시 잡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마리서사에는 시인이나 소설가, 화가들이 모여들지 않는 날이 단 하루도 없었다. 김수영은, 박인환이 마리서사를 운영하던 두 해 남짓 동안이 "박인환이 제일 기분 내던 때”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처럼 H씨가 소장한 『선시집』 오리지널 판본은 인간 박인환의 정취가 물씬 배어나는 책이다. 따라서 이런 내력을 갖고 있는 책이라면 누구든 욕심내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그날 나는 안복(眼福)을 누린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나는 이같은 귀한 고서를 소장하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남의 귀한 장서를 내놓으라고 말한 적은 없다. 내가 욕심나는 책이라면 남도 귀하게 여기기는 마찬가질 텐데 어떻게 그것을 내놓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기껏 하는 소리가, "이다음 책을 처분할 의사가 있으면 내게 제일 먼저 알려 주시오” 하는 정도다. 그리고 이삼 년 후, H씨로부터 고서 일부를 정리하겠다는 연락이 왔다. 고서를 수집하다 보니 그림공부를 게을리 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삼사백 권의 문학서적을 입수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박인환의 『선시집』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실 그 책 한 권 때문에 삼사백 권의 책을 산 셈이라 말해도 틀림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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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2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1987년 3월, 어느 고서 경매전에서의 일이다. 『매창시집(梅窓詩集)』이 출품됐다. 매창은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으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부안(扶安) 기생이다. 경매전에 출품된 『매창시집』은 매창의 한시를 1957년에 시인 신석정(辛夕汀)이 번역한 그 친필원고본이었다. 십육절지의 갱지 육십여 장에 만년필로 썼는데, 출품자는 이것이 신석정의 친필원고인지를 모르고 경매에 출품했다. 나는 이 『매창시집』을 보는 순간 부안의 명기(名妓)를 떠올렸다. 매창에 관한 신석정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올라, 혹시 신석정의 원고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치자마자 서문 끝 부분에 "丁酉比斯伐艸舍에서 辛夕汀”이란 서명이 첫눈에 들어왔다. 이 글씨는 흘림체로 씌어 있어 ‘신석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 판독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출품자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경매 마감 시간이 임박해 입찰 신청을 하려고 하니 누군가가 먼저 신청을 해 놓았다. 경합이 되었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경합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석정 원고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자만한 탓도 있다. 모든 경매가 그렇지만 경매에서 이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건이 욕심나면 무조건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최고가를 적어 내야 한다. 『매창시집』은 욕심을 내볼만한 책이라 소신껏 가격을 적어 냈다. 곧 신청이 마감되자 P선생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오늘 신석정 원고본을 구했다!” P선생은 고서 수집에 일가를 이룬 분으로, 특히 금석문(金石文) 감식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분이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P선생이 상당히 높은 가격을 써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P선생은 자신만의 단독 입찰인 줄 알고 경매 접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매장에 한바탕 폭소가 쏟아졌고, 이렇게 해서 나는 『매창시집』을 내정가 이만 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 후 이 책은 S박물관으로 들어갔는데, 가격은 구입가의 수십 배로 뛰어 있었다. 고서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구입 가격의 수십 배 되는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매전에서도 눈이 밝으면 가끔 ‘땡잡는’ 수가 생긴다. 서점 주인이 귀한 책인 줄 알면서도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응당 고마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고맙다는 마음을 갖기보다는 되레 그 주인을 얕잡아 보게 된다. 반대로 별로 가치 없는 책을 귀한 책인 줄 알고 비싸게 부르는 고서점 주인을 신뢰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어찌 보면 고서점 주인은 프로이고 수집가는 아마추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서 수집에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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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1박대헌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우리나라 사진의 역사는 한말의 서양 외교관과 선교사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다큐멘터리 사진들은 거의 이들이 남긴 것들이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1883년 고종(高宗)의 초청으로 우리나라를 내한한 미국의 외교관이자 천문학자인 로웰(P. Lowell, 1855-1916)과, 1900년 내한한 미국의 여행가 홈스(B. Holmes, 1872-?), 1904년에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왔던 영국 기자 매켄지(F. A. McKenzie, 1869-1931) 등이 있다. 로웰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hosö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보스톤, 1886)에서 고종과 왕궁의 모습 등 조선의 풍물을, 직접 촬영한 스물다섯 컷의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사진 50) 이 사진이 바로, 외국 책자에 실린 최초의 우리나라 관련 사진이 아닌가 싶다. 홈스는 『버튼 홈스 사진집(The Burton Holmes Lectures)』(미시간, 1901)에서 백서른네 컷의 사진을 소개하고 있다. 이 사진집은 간략한 여행기와 함께, 사진이라는 매체를 동원해 당시 조선의 모습을 철저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매켄지는 『대한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런던, 1908)에서 ‘의병 사진’ 등 모두 스물일곱 컷의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51~52) 나는 이들을 포함해, 한말을 전후하여 우리나라를 다녀간 외국인들이 남긴 사진들을 대하면서, 혹시 필름 원판이 어딘가에 남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곤 했다. 당시의 필름은 유리판 위에 감광유제(感光乳劑)를 도포(塗布)한 유리필름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를 유리건판 또는 유리원판이라 한다. 내가 소장했던 유리건판으로는, 1906년 공주 영명학교를 세운 미국인 선교사 윌리엄스(F. E. C. Williams)가 소장하던 공주 영명학교 관련 유리건판 구십여 점과, 일제시대 어류학자 우치다 게이타로(內田惠太郞, 1896-1970)가 남긴 물고기 유리건판 천팔십여 점 등이 있다.(* 사진 53~54) 우치다의 물고기 유리건판은 그가 1927년부터 1942년까지 조선총독부 수산시험장에 근무할 당시 한국산 어류의 생활사 연구와 생태학적 조사를 주도하면서 남긴 성과물이다. 이때의 연구 조사를 바탕으로, 한반도 어류의 서식 실태를 자세히 기록한 『조선어류지(朝鮮魚類誌)』(조선총독부, 1939)를 펴내기도 했다.(*사진 55) 우치다는 1942년 일본 규슈 대학 교수직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면서 유리건판을 포함한 자신의 연구자료와 표본, 문헌자료 등을 그대로 남겨 둔 채 한국을 떠났다. 언제라도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해방된 후에는 영영 한국을 다시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한국에 두고 온 유리건판을 포함한 연구자료들에 대한 그리움을 "육신의 일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치어(稚魚)를 찾아서』, 1964〕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 연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자인 정문기(鄭文基, 1898-1995)도 참여했는데, 사진 촬영은 주로 나카노 스스무(中野進)가 맡았다고 전한다. 정문기는 우치다보다 두 살 아래지만 동경제대 수산과 칠 년 후배로, 실제로는 그의 제자로서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유일무이한 조선인 수산 기사였다. 해방 후에는 부산 수산대학장 겸 농림부 수산국장을 지냈다. 저서로는 『한국어보(韓國魚譜)』(1954)와 『한국어도보(韓國魚圖譜)』(1977) 등이 있으며, 1977년 정약전(丁若銓)의 『자산어보(玆山魚譜)』를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 우치다의 유리건판 자료들은 원래 정문기가 소장하고 있던 것들로,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이십오여 년 전 어느 날, 제법 늦은 시간에 서울의 한 고서점에 들렀다. 이 서점은 삼십 년 이상 다녔지만 쓸 만한 책 한 권 구한 적이 없던 곳이다. 그도 그럴 것이, 고서란 서점 주인의 안목에 비례해 좋은 책이 갖춰지기 마련인데, 고서에 대한 식견이 별로 없는 주인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귀중본을 만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느 날처럼 그날도 서점 한편에 마대자루 여러 개가 있었다. 한데, 삐져나온 책들이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두어 권 살펴보니 눈이 번쩍 띌 만한 것들이었다. 보지도 않고 전부 사겠다고 하자 주인은 평소 모습과는 달리 안 팔겠다고 버텼다. 하여튼 쓸 만한 책을 수십 권 골라 값을 치렀다. 주인은 흡족했던지, 길가에 세워 둔 자신의 승용차로 나를 데려갔다. 뒷좌석과 트렁크에 여러 개의 박스가 있었는데 왠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주인이 손바닥만 한 유리 조각 하나를 보여주었다. 유리건판이었다. 거리의 불빛에 물고기 모습이 희끗 비쳤다. 어떠한 사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문기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가 많이 쏟아져 나와 한동안 여기저기 흩어져 돌아다녔다. 나는 지금까지도 이것들을 찾아다니며 계속 수집하는 중이다. 2004년에는 영월책박물관에서 「유리물고기—1930년대 한국어류사진」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우리나라 담수어류·연근해어류의 유리건판 사진과, 이 중에서 이름이 확인된 이백여 점의 물고기 사진을 소개했다. 우치다의 어류 사진 중에는 해부도를 재연한 사진, 발생·성장 사진, 부분·확대 사진도 있었다. 이러한 사진들은 어류형태학 연구에서 사진 활용의 가능성을 실험적으로 보여주었다. 유리건판 위에는 각 물고기의 이름과 채집 날짜, 장소, 크기 등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감돌고기·꼬치동자개·묵납자루·열목어·황쏘가리·흰수마자 등의 천연기념물과 보호대상 어류 사진이 포함되어 있어, 사적(史的) 기록으로서의 학문적 가치는 물론 한국 사진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 이들 자료 중에는 우치다가 관찰과 기록이라는 근대 과학자들의 기본적인 연구방식으로 어류들을 조사 정리한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우치다가 직접 그린 도감용 그림(*사진 56~57)에, 사진기의 전사(前史)로 언급되던 카메라 루시다(camera lucida)를 사용한 것이다. 물론 이때 구입한 자료가 유리필름뿐 만은 아니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 필사본(*사진 58)을 비롯하여 수백여 권의 물고기 관련 도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후 2011년 인사동 호산방 시절. 나는 이 자료들을 모두 해양박물관에 양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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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20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송광용(宋光庸)은 1934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그가 만화일기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일학년 때인 1952년, 학생잡지 『학원』이 창간되던 해였다. 현실은 전쟁통이었지만, 삭막한 와중에서도 산골 소년의 꿈은 피어났다. 송광용은 친구에게 빌려 본 잡지 『학원』에서 김용환의 인기 연재물 「코주부 삼국지」와 김성환의 「빅토리 조절구」 「꺼꾸리군 장다리군」을 보고 흠뻑 빠지게 된다. 1956년 7월 3일 일기에는 ‘국부적’ 만화가들의 모습을 그려 놓고, 고바우 김성환과 코주부 김용환은 우리나라에 없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고 있다.(*사진 46) 그후 1992년 2월까지 그는 사십 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그의 꿈은 오직 만화가가 되는 것이었지만, 우리의 냉혹한 현실은 안타깝게도 그를 만화가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다. 이 일기에는 한국 현대사를 살아온 한 평범한 남자의 꿈과 현실, 희망과 좌절이 그대로 담겨 있다. 우리는 이를 통해 우리 만화사에서 하마터면 묻혀 버리고 말았을, 한 불행한 만화가의 삶과 그의 예술세계를 만날 수 있다. 송광용의 만화일기는 작가가 직접 갱지를 반으로 접어 A4 크기로 제본한 것으로, 표지에는 일련번호 와 각 권의 제목을 붙이고 권마다 일일이 표지 그림을 그렸다. 원래는 모두 백서른한 권이었으나, 1990년 9월 11일 영월지역 홍수 때 서른 권이 물에 잠겨 현재는 백한 권만 남아 있다. 다른 만화작품의 원고도 상당수 있었으나, 이 역시 홍수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2001년 3월, 나는 송광용 화백에게서 이 일기를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받았다. 이것들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숨이 멎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거기에서 그의 한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내 손을 거쳐 간 수많은 책들 중에는 물론 일기도 여러 권 있었다. 그 중에는 십 년 내지 이십 년치의 일기도 여럿 있었지만 그 내용은 대개 메모 수준이었다. 그러나 송광용의 만화일기는 달랐다. 2002년 영월책박물관에서 열린 「옛날은 우습구나—송광용 만화일기 40년」전은 송광용의 한풀이와도 같았다. 나는 전시에 맞춰 이 일기들을 모두 네 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기획에서 제작까지 꼬박 일 년이 걸렸다. 영월책박물관 대부분의 출판물이 그랬듯이 이 책도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이 편집디자인을 해주었다. 처음 정 선생은 한 열 권 정도로 만들어 보자고 제안했지만, 인쇄비며 제작비 관계로 네 권으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가까스로 정 선생을 설득하긴 했지만, 일련의 작업들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정디자인의 식구 일고여덟 명이 모두 참여하여 한 달 이상 걸렸다. 물론 이때의 모든 디자인도 정 선생이 자청하여 무료로 제작해 주었다.(*사진 47~48) 지금 생각하면 그 네 권을 만든 것도 꿈만 같은 일이었다. 정 선생에게 진 마음의 빚이 두고두고 무겁다. 정 선생이 아니었다면 이 책의 출간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 책의 제목인 ‘옛날은 우습구나’는 킬리만자로의 고독한 분위기를 가진 한 남자의 초상화를 표지로 한, 송광용의 만화일기 제83호(1956년 7월 30일)의 제목에서 따왔다. 열병에 걸린 듯 만화에 빠진 송광용, 그에게 만화란 살아가는 이유 그 자체였으며 신앙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의 일기를 보면, "세상에는 신도 하나님도 없다”거나 "아, 세상은 쓸쓸하였다”라는 식의 자조 섞인 어조를 자주 볼 수 있다. 이는 만화가가 되겠다는 꿈을 쉬 이루지 못한 좌절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가 몸담았던 우리 현대사의 풍경을 비춰낸 것이기도 했다. 신발이 떨어져 길을 걸을 때면 절벅절벅 흙탕물이 들어차는 가난, 군 제대 후의 상경, 그러나 ‘가난투성이’ 나라에서 일어난 오일륙 쿠데타, 만화 대신 택해야 했던 직장에서의 실직 등, 그의 개인사는, 「또 가려 하느냐」 「이렇게 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돈 병」 「가시밭 길」 「서울과 또 나와 실직」 등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시대에 부대끼고 이리저리 밀리고 치인 흔적들을 보여준다.(*사진 49) 젊은 시절 송광용에게 만화는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오직 하나뿐인 희망”이었다. "햇필 세상 사람들이 비웃는 그런 희망을 나는 좋아한다”라고 일기(1956년 7월 11일)에 적은 송광용은, 만화를 공부하듯 일기에 집착했다. 그는 하루 일과 중 두서너 시간을 일기 쓰는 데 할애했고, 어떤 날에는 종일 만화 연습으로 일과를 채웠다. 그는 그 시절 만화가로 이름을 날린 김용환·김성환·신동헌·김경언·정한기·박기정·백인수 화백의 그림을 똑같이 그릴 만큼 훈련을 거듭했을 뿐 아니라, 월트 디즈니(Walt Disney)와 칙 영(Chic Young)이 그린 미국 만화의 이야기 구조 등을 스스로 연구하고자 했다. 미술대학을 나온 것도 아니고 누구의 가르침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나, 그는 오직 만화가가 되겠다는 일념뿐이었다. "아마 일기를 쓰지 않는다면, 이미 미쳐서 날뛰는 미치광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중학교 시절 일기에 적고 있으니, 그는 일찍이 만화일기를 통해서 세상을 보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 같다. 만화가로 등단하기 위해 육십 년대까지 학원사 등 출판사를 찾아다녔지만, 결과는 낭패였다. 만화일기를 보면 그의 좌절은 ‘나는 왜 만화가가 되지 못했는가’가 아니라 ‘만화는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문제임을 알 수 있다. "현대사회를 적극적으로 살아가게 만들겠다”던 송광용의 만화 주인공 ‘곱구나’는 바로 그가 찾고자 했던 자신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군대 제대 후 암담한 사회생활 속에서도 그는 만화일기를 통해 끊임없이 자기 어법을 만들어 나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은 만화가, 아니 ‘만화가 지망생’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무한한 표현의 자유를 만화일기를 통해 발산했다. 그러다 나이 오십 이후에는 만화보다 일기라는 매체에 더 의지했다. 그 역시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만화가의 꿈을, "일기 쓰는 것만큼은 계속하면서 찾으려 한 것 같다”고 말한다. 그에게 만화가인가 만화가가 아닌가 하는 것은 처음에는 분명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일기를 모두 불태우려고 여러 차례 마음먹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송광용의 만화일기를 읽다 보면 이런 물음이 종국에 가서 그에게는 이미 아무런 의미도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책이 출간되고 얼마 후인 2002년 10월 5일 그는 세상을 떠났다. 실은 내게 일기를 기증했을 때 그는 투병 중에 있었다. 병원에서는 이삼 개월을 넘기기 어렵다고 했다 한다. 그러나 그는 그후 일 년 반 정도를 더 살았다. 자신의 일기가 활자로 만들어진 것을 보고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