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책박물관이 자리한 옛 여촌분교는 강원도 영월군 서면 광전 2리, 속칭 ‘뱃말’과 ‘골말’을 내려다보고 있다. 골말의 원래 지명은 ‘고운마을(麗村)’이다. 이는 마을의 경관이 아름다워서 붙여진 이름인데, 이후 ‘고울마을’ ‘고울말’ ‘골말’로 바뀌었다고 전해진다. 골말 주변 서강에는 꺽지·어름치·수달·물오리 등이 서식하고 있으며, 잘 보존된 성황당과 공개되지 않은 동굴 등이 산재해 있다. 평창강(平昌江)과 주천강(酒泉江)이 만나 흐르는 서강(西江)의 윗줄기에 오도카니 자리잡은 여촌분교는 일견 호젓하고 소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내가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학교가 막 문을 닫은 직후인 1998년 3월이었다. 3월이라고는 해도 음지에는 아직 잔설이 남아 있었다. 적당히 빛바랜 계단을 오르자, 곧 눈앞에 칠팔백 평 규모의 아담한 운동장과 교사(校舍) 두 동이 나타났다. 계단에서 내려다보이는 골말은 한 폭의 그림이었다. 그 너머로 커다란 산이 눈에 들어온다. 배거리산이다.
배거리산은 해발 852.5미터의 높은 산이다. 옛날 천지개벽으로 온 세상이 물바다가 되었을 때 뱃말에 살던 마음 착한 부부가 가족과 함께 배를 타고 피난을 가다, 물이 점차 늘어나 배가 이 산 꼭대기에 걸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영월부읍지(寧越付邑誌)』에는 이 산을 석선산(石船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1991년부터 H시멘트의 석회석 광산으로 원형을 잃기 시작했으며, 배거리산 중턱까지 파헤쳐진 광산이 흉물처럼 버티고 있어서 이 학교가 폐교된 이유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여촌분교는 1962년에 개교하여 1998년에 문을 닫기까지 36회에 걸쳐 4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문 닫을 당시에는 4명의 학생이 있었다. 한때는 아이들의 북적거림으로 떠들썩했지만, 지금은 모두가 떠나고 황폐해진 곳. 폐교란 말 그대로 문 닫은 학교, 버려진 학교다. 학교만이 문을 닫은 것이 아니고, 마을까지 문을 닫았다. 그야말로 삶의 시곗바늘이 멈춘 마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로 여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8월말, 영월교육청으로부터 학교를 임대받았다.
폐교는 그 이름만 들어도 아련한 추억과 애틋한 정이 묻어나는 곳이다. 박물관은 옛 학교 터와 건물을 그대로 활용해서 산골 분교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영월 같은 강원도 산골에서 학교가 갖는 의미는 그저 배움의 장소만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매년 운동회가 열리고, 그날은 마을의 축제날이다. 마을의 크고 작은 일을 치르는 마당이며, 마을 사람들의 정신적 기둥으로 공동생활터의 구실을 해 왔다. 어쨌든 지금 이 문 닫은 학교가 책박물관으로 다시 태어나, 새로운 문화공간으로 꾸며진 것이다.
1999년 4월, 경향 각지의 언론은 연일 강원도 영월의 문 닫은 학교에 책박물관이 들어선다는 소식을 전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대보다는 우려를 더 많이 했다. 산골 폐교에 박물관을 세운다니 우리의 문화풍토에서 그것은 분명 무모한 짓으로 비쳤을 것이다.
나는 박물관을 준비하기 오래 전부터 박물관 운영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역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명함에서부터 로고는 물론 초청장·포스터·입장권 등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디자인 작업이야말로 박물관의 색깔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이러한 나의 뜻을 이해하고 함께할 디자이너를 만나는 것과, 그에 따르는 경제적인 부담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박물관 개관을 5~6개월 앞두고 나는 이 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다행히 디자이너 홍동원 선생이 박물관 개관에 필요한 디자인 일체를 무상으로 제작해 주겠다고 자청하고 나섰다. 그는 당시 모 일간지의 편집을 전면 개편하는 대형 프로젝트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영월책박물관의 로고와 개관 당시의 포스터와 브로슈어, 내 명함 등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작업은 3명의 디자이너에 의해 4개월여에 걸쳐 이루어졌다.
개관 이후에는 기획전시를 비롯하여, 세미나·음악회·퍼포먼스 등 수십 차례의 문화행사를 치러냈다. 그때마다 책박물관의 소식은 대처의 문화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특히 매년 5월에 열리는 영월책축제는 8회를 거치면서 전국적인 축제로 뿌리내렸다.
북디자이너 정병규 선생은 박물관 개관 이듬해부터 7년여 동안 10권 이상의 도록과 행사 초청장, 포스터 등 전시회 관련 인쇄물의 디자인을 단 한푼의 수고비도 받지 않고 도맡아 주었다.
언젠가 정 선생이 한 디자인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박대헌이란 사람을 잘 알고, 그가 영월에서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디자이너로서 영월의 디자인에 참여하고 있다”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두고두고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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