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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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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38

  • 특집부
  • 등록 2021.05.26 07:30
  • 조회수 1,289

 

호산방을 서울로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영월책박물관을 폐관하기 몇 해 전인 20069, 호산방을 서울시청 뒤 프레스센터로 옮겼다. 이곳을 호산방 자리로 낙점한데는 영월 가기 전 호산방이 있던 광화문 동아일보사 근처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프레스센터는 국제회의장과 기자회견장에 대규모 세미나와 국제회의가 자주 열리는 곳으로 문화예술인과 학자, 언론인이 자주 찾는 곳이다. 1층의 서울갤러리는 전시공간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이전부터 이곳을 고서점 자리로 주목하고 있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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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6] 서울 프레스센터 호산방.(2006년)

 

나는 이곳을 발판으로 다시 서울 생활의 재기를 꿈꾸었다. 갤러리에서는 1년에 한두 번 고서 전시회를 개최하려고도 했다.

 

이런 생각으로 프레스센터로 자리를 정했는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사하고 몇 달 뒤, 서울갤러리가 문을 닫고 이곳에 농어촌특산물 홍보전시장이 들어섰다. 농어촌 지역의 특산물을 이곳에서 홍보하겠다는 취지로 보였다.

 

전시장 문을 여는 날 전국에서 몰려온 지자체 단체장들로 행사장이 북적거렸다. 나는 이 자리에서 영월군수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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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7] 파주출판도시 호산방.(2007년)

 

당시 시민운동으로 이름을 날리던 P씨도 만났다. 그날의 주인공은 바로 P씨였다. 그는 대권 주자로 거론되면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순간 그간의 모든 의구심이 풀렸다. 바로 P씨의 작품이었다. 나는 쥐똥 씹은 기분이었다. 나의 새로운 꿈이 초장부터 커다란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P씨는 장안평 호산방 시절부터 아는 사이다. 그러다 2004년경 영월에서 그와 속 깊은 이야기를 네댓 시간동안 나눈 적이 있다. 그저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아니라 진지한 인터뷰였다. 그는 작정하고 나를 찾아온 듯, 일행도 물리치고 녹음기를 틀고 노트북에 인터뷰 내용을 받아 적었다. 그는 박물관 운영의 문제점, 특히 영월군과의 갈등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후 사석에서 한번 만난 적이 있지만 박물관 얘기는 더 이상 없었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나를 찾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파주출판단지는 80년대 말, 이기운 열화당 대표 등 뜻있는 이들이 출판 공동체를 건립하자는 마음을 모아 2000년대 초부터 경기도 파주시 문발리 일원 48만평 부지에 세운 출판도시이다.

 

20075, 파주출판도시 호텔 지지향이 오픈할 때 2층에 호산방을 하나 더 열었다. 이기웅 대표의 권유도 있었지만 박물관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파주에 터를 잡을 요량이었다. 얼마 후에는 파주에 전념할 생각으로 프레스센터 호산방을 접었다.

 

지지향 1층의 갤러리는 100평 규모의 아담한 공간이다. 사실 나는 이곳을 박물관 적임지로 생각하고 우선 호산방을 옮겼다. 파주에서 전력을 다해 보았지만 영월에서의 후유증이 워낙 컸던지 경제적으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영월에서의 10년 공백이 호산방 사업에는 치명적이었다. 주변여건도 많이 변해 모든 사정이 예전 같지 않았다. 거기다 갤러리의 사용도 여의치 않아 주변의 출판사 사옥의 임대를 고려해 보았으나 이것 역시 힘에 부쳐 포기하고 말았다.

 

우여곡절 끝에 파주 호산방을 다시 서울 인사동으로 옮겼다. 20104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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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8] 서울 인사동 호산방.(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