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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3: 한국전통음악연구회의 창단, 최경만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몇 해 전 프랑스 아비뇽 축제 총감독인 다르시에가 방한했었다. 축제 기간에 한국의 전통예술가를 초청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비디오나 실연實演을 통해 정악합주며 무용이며 무속이며 여러 장르를 살펴봤다. 그때 그는 이매방의 승무를 보고, 저것이 어떻게 전통이냐고 했다. 미국의 전위무용가 머스 커닝햄을 능가하는 ‘현대’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진부하리만큼 늘 보는 승무가 아방 가르드적 현대성을 갖췄다니 놀랍기 그지 없었다. 문화가 다르면 미적 안목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는 사실을 그때처럼 깊이 실감한 적이 없었다. 제 나라에서 홀대받는 국악이 나라 밖에만 나가면 생각외로 상찬賞讚을 받는 이유도 퍼뜩 알만 했다. 그때 일을 계기로 나는 학생이나 후학들에게 소신처럼 되뇌는 말이 있다. 나라 밖의 광활한 세계를 활동무대로 설정하라는 당부가 그것이다. 답답한 동굴 속에만 갇혀서 자기를 알아 달라고 칭얼거릴 일이 아니다. 밖을 보면 쌍수로 환영할 드넓은 무대가 있다. 마침 시대의 조류도 다채로운 개성을 존중하며 다원적인 가치관을 추구하는 세상으로 진입했다. 한국 음악 특성이 세계 속의 개성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는 지평과 개연성이 그만큼 확대된 것이다. 야망을 품고 정진하는 이들에게는 정말 신나는 문화 환경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내내 인도 음악가들이 동양 음악의 대명사인 양 지구촌을 누비고 다녔다. 어려서부터 익힌 공용어인 영어로 자신들의 음악을, 서서히 동양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서구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좋은 타산지석他山之石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다기화 되어 가는 국제 상황과 국악의 함수관계가 새삼 머리에 맴돈 것은, 마침 범상치 않은 공연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튼실하게 내실을 다진 인재들의 모임인 ‘한국전통음악연구회’가 세밑에 선보일 창단 음악회가 그것이다. 우선 많은 분야의 단체들이 모여서 하나의 모임체를 구성했다는 점이 각별해 보인다. 중견 연주가들이 무언가 시대적 조류를 실감한 나머지 의기투합된 것만 같아 더욱 기대가 앞선다. 이들의 젊은 패기와 음악적 열정이 하나로 응집되면 국악계에 괄목할 만한 시너지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이들의 예술적 의지가 세계로 분출되면 명실공히 한국 음악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을 것이다. 분명 이 단체는 그렇게 될 소지가 크다고 나는 믿는다. 연합체를 구성한 단체들의 면면을 보아도 그렇고, 또한 그들이 지닌 음악적 기량이나 예술적 의지 또한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이 아니다. 조직의 성패는 지도자의 역량이 관건인데, 이 연합체를 이끌 최경만 회장의 인생 경륜이나 음악적 성취는 세상이 다 인정하는 바이니 더욱 그러하다. 최경만 명인은 민속음악의 산실이라고 할 국악예술학교 출신이다. 한두 살 선후배 관계이긴 하지만 훗날 국악계 중진들로 활동하고 있는 박범훈 전 중앙대 총장과 최태현 교수, 김영재 전 한예종 전통예술원 교수 등이 모두 비슷한 세대의 재사들이다. 최 명인의 전공은 피리이고 경기토리의 대가였던 고 지영희 선생의 수제자인데, 민속악 계통의 피리 연주에는 군계일학으로 뛰어난 명불허전의 고수다. 내가 국립국악원장으로 재직 당시 중평衆評에 의해 특채를 한 단원은 마당놀이의 지운하와 피리의 최경만, 딱 두 사람 명인뿐이다. 한편 최경만 명인의 배필 역시 같은 국악원 연주단원인 서도소리의 대가 유지숙 명창이다. 그러고 보니 최 명인 부부는 경서도 소리의 합작품인 셈이다. 통일의 물꼬도 이곳에서 발원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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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2: 대금 산조의 달인 이생강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어느 특정 지역의 기후풍토는 그 지역 사람뿐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단적인 예로 서양 음악의 경우 세기적 바리톤은 유럽의 북부지방에서 많이 나오고, 기라성 같은 테너는 남방지방에서 많이 배출되는 사실이 곧 그러하다. 기후가 음습하며 날씨가 흐리고 추운 북구지방에서는 평상시의 사고나 정서가 육중하게 침전되며 내향적이기 십상이다. 일상적 언어생활 역시 차분하게 피치音高가 낮다 보니 자연히 음역이 낮은 저음 가수가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다. 반대로 기후가 따듯하고 햇살이 투명한 남방의 기질은 비교적 낙천적이고 외향적이며 언어 역시 맑은 성색에 음고가 높다. 당연히 음역이 높은 뛰어난 고음 가수가 많이 배출될 수밖에 없는 여건이다. 이 같은 기후풍토와 예술과의 함수관계는 비단 성악에서만도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모차르트와 하이든,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연상해 보면 이내 수긍이 가게 된다. 남구의 기후풍토에서 우러난 전자의 음악이 밝고 명랑하고 낙천적인 데 비해, 북구의 환경에서 배태된 후자의 음악은 검푸른 수림처럼 짙고 육중하고 사색적인 면이 두드러진다. 결국 문화나 예술은 사람이 만들어 가는 것이지만, 그 양자를 모두 지배하는 것은 끝도 쉼도 없는 대자연의 운행 작용이 아닐 수 없다. 이 같은 시각에서 볼 때, 한국 음악 안에도 남방적인 요인의 음악과 북방적인 풍토의 음악이 병존한다는 사실은 자명한 순리라고 하겠다. 딱히 북부권의 고구려 왕산악이 만들었대서만이 아니라, 둔탁한 듯 중후한 음색의 거문고는 영락없는 북방적 여건의 악기이고, 남방 가야나라의 우륵이 만들었대서만이 아니라, 낭랑한 음색의 가야고는 분명 남방적 환경의 구현체가 아닐 수 없다. 정황이 이러하고 보면, 오늘의 화두인 대금 음악은 두말할 나위 없이 대나무가 자생할 수 있는 온화한 기후의 남방계 음악임을 알 수 있다. 대금의 음색이 그토록 부드럽고 온화한 배면의 내력도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화사한 햇살과 온유한 기후를 머금고 자란 죽관이, 역시 심성이 어질고 착한 민초들의 손길을 거치면서 명기로 탄생된 것이 바로 대금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한국의 기후풍토와 한국인의 어진 심성이 어우러져 빚어낸 두어 척 남짓의 죽관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으며, 젓대와 본인이 하나 되어 한 시대의 애락을 위무해 온 사람이 있다. 바로 대금의 이생강 명인이다. 무릇 세상사란 의지와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많다. 하지만 예술의 경우는 의지와 노력만으로 대가의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가 않은 것 같다. 남달리 타고난 바탕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생강 명인은 주위 평판대로 타고난 소질이 있는데다, 초지일관하는 끈기와 노력 또한 남다른 바가 있다. 그동안 그에게 붙여져 온 명성은 결코 우연이나 허명이 아니고 예술적 자질과 노력이 직조해 온 필연적 결실이라고 하겠다. 그의 젓대 음악은 그동안 암울한 시대의 아픔을 달래 오며 우리 생활 속에 포근한 서정의 앙금을 쌓아왔다. 특히 지난 세기 후반 내내 왕성한 활동을 통해 대중의 심금을 달래가며 한국 음악계, 특히 관악 음악에 기여한 몫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업사회의 메마름도 그의 장인기匠人技적 젓대가 있어서 윤기가 흘렀고, 정치적·사회적 번뇌도 그의 자상한 가락이 있어서 한결 위안이 되었다. 그만큼 이생강 명인의 대금 음악이 음악계는 물론 우리 삶에 끼친 공헌은 분명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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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1: 동초제 판소리 정립에 기여한 공적 오정숙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가을은 오곡의 결실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의 열매를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요즘 우리 주변에는 찬연한 문화예술 활동이 즐비하고,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이 물결을 이룬다. 양적인 수치로만 치면 우리 삶은 한층 가며롭고 윤택해야 마땅할 터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공허하기 일쑤다. 결실의 나락에도 쭉정이가 있듯이 문화예술계에도 아마 무지갯빛 거품이 충일해 있기 때문일 게다. 사람人이 재주를 앞세워 억지로 하는 행위爲는 필경 가짜[人+爲+僞]의 거품에 빠지기 십상이다. 발효되고 체화된 제 얘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언巧言이나 영색令色치고 진짜배기가 드물다는 말이 그래서 작금에도 유효한지 모를 일이다. 제14회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들은 우선 예술계에 가득한 거품을 걷어내고 튼실한 알곡을 찾아보려 애썼다. 특히 재승박덕형의 표피적인 화려함보다 진정한 장인 정신을 지향하는 예인藝人을 거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같은 안목의 조망경에 들어선 몇몇 후보들을 대상으로 설왕설래의 숙고 끝에 흔쾌히 결정된 수상자가 곧 오정숙吳貞淑 판소리 명창이다. 각고의 노력 없이 명창의 반열에 설 수 없음은 많이 들어온 상식이다. 오 명창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열네 살 때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오직 한 우물을 파는 데만 정진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배어 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의 고집과 앙기로 남다른 장인 정신이 두드러졌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동초제 판소리의 맥을 이으며 이를 확실하게 정착시켰다는 판소리계의 공적이다. 여기 동초제 판소리란 김연수 명창이 정리한 판소리의 한 판형을 의미한다. 새로운 소리제의 계발이라기보다는 기존 여러 명창들의 좋은 더늠의 대목들을 취사선택하여 모범답안 같은 판소리 한바탕의 정형定型을 이뤄 놓은 것이 ‘동초제東超制’다. 굳이 비유하자면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중구난방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해서 정리했다면, 동초 김연수는 명창들마다 형형색색이던 소리제를 일정한 틀 속으로 형식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초제 판소리는 판소리 특유의 즉흥성은 크게 제약되지만, 익히기나 전승하기에는 많는 장점이 있다. 아무튼 오정숙 명창은 이 같은 동초제 판소리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한층 갈고 닦으며 널리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오 명창은 1972년, 8시간에 걸친 동초제 춘향가의 완창을 시작으로 매년 한바탕씩, 현존 다섯 마당의 판소리를 모두 완창하여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50, 60년대만 해도 판소리 완창은 거의 들어보기 힘들었다. 모두 토막 소리공연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동진 명창에 이어서 여류로는 처음으로 오 명창이 판소리 완창의 관심과 진미를 선구적으로 일깨웠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서도 우리는 오 명창의 소리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끈질긴 프로 기질을 읽을 수 있다. 스승 동초 선생을 닮아서인지 오정숙 명창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교육시키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는 소리 한번 다잡아 해보겠다는 제자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든다. 제자를 일단 받으면 우선 사람이 되고 소리꾼이 될 수 있도록 인정사정없이 몰아간다. 그래서 일단 그의 엄격한 훈도를 거치고 나면, 적어도 될성부른 떡잎 정도는 되기 마련이다. 재주를 조금 인정받으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착각하는 위인들도 많다. 그 같은 경우는 재주가 아까울 정도로 진정한 경지에 들지도 못한 채 중도폐기되기 일쑤다. 그래서 참다운 예술의 밑바탕에는 수기修己와 인격人格이라는 사람의 문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아도 오늘의 수상자인 오정숙 명창은 바른 소리예술의 길과, 바른 사람의 길을 걸어왔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동초 김연수 명창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스승을 그토록 극진히 모시고 흠모해 오던 제자가, 그분의 탄신 백 주년에 동초제 판소리 정립의 공로로 상을 받게 되니 분명 수상의 의미가 배가되는 느낌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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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0: 서도지방의 맛과 멋을 이어 준 고마운 은인 오복녀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전통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오복녀吳福女 명창의 비중은 열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그의 존재는 여러 면에서 독보적이고 진귀하고 막중한 바가 있다. 우선 서도소리의 진수를 체득한 유일한 대가라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오 명창은 서도지방에서 태어나 서도의 정서와 풍물을 온전히 체득한 가객이다. 그의 노래 속에는 자연히 서도 예술의 맛과 멋이 진솔하게 배어나기 마련이다. 수심가나 긴아리에 묻어나는 애잔한 정한이 그러하고, 난봉가나 산염물에 스며 있는 따듯한 삶의 체취가 그러하며, 초한가나 공명가 등을 통해서 펼쳐내는 담담한 인생 경륜이나 고담들이 그러하다. 한마디로 노래 속에 서도적인 삶이 있고 서도적인 인생살이가 내밀하게 농축돼 있다. 그래서 노老대가의 노래는 목청과 기량만을 앞세우려는 문하 세대와도 다르고, 서도 문물을 경험하지 못한 타지역 출신들의 서도 창과도 판연히 다른 것이다. 한편 오복녀 명창의 진가란 비단 음악적 범주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적·역사적 관점에서 그의 존재 의미는 한층 돋보인다. 바로 민족 분단의 현실에서 이산의 아픔을 위무해 준 것이 다름 아닌 오 명창의 서도소리였기 때문이다. 분명 오 명창의 서도소리는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에게는 더없는 위안이요 추억이었으며, 문화적인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는 고맙고도 절실한 존재였다. 그들은 서도 토박이 명창의 노래를 통해 망향의 그리움을 달랬고, 고향의 풍광을 그려봤으며, 외로운 처지들 간의 끈끈한 우애와 응집력을 키워 가기도 했다. 이 점에서 오 명창의 서도소리는 음악의 차원을 뛰어넘는 시대적 의미망을 지니는 것이다. 노래도 예술도 인간의 삶 속에서 싹터 나온다. 따라서 삶의 양상이 바뀌면 노래도 예술도 바뀌기 마련이다. 사는 모습만 아니라 이념이나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뒤바뀐 북한지방에서는 그래서 어제의 전통음악의 모습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 통일이 되어 고향을 가도 옛 듣던 가락, 옛 놀던 연희들을 만나기란 거의 난망하다. 얼마나 안타깝고 허망한 일이겠는가. 바로 이 같은 역사적 상황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재삼 오복녀 명창의 존재 의미와 그 음악의 존귀함을 깊이 통찰하고 소스라쳐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오 명창이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서도소리의 명맥을 실낱같이 이어가며 힘겹게 달려가는 성화 봉송자와도 같은 소중한 예인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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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9: 학문의 바탕 체상體常을 튼실히 한 학자, 송방송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공적을 평가하기는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당사자의 학문적 성취도는 물론 개인적 품성까지도 소상히 알고들 있기 때문이다. 제25회 방일영국악상의 심사도 마찬가지였다. 국악 전공자들이 모여 국악계의 수상자를 선정하는 일이었으니 첨예한 논란이 있을 수 없었다. 거론되는 대상자들에 대해서 심사위원들은 이미 그들을 세세히 숙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가 평가까지 내리고 있는 처지들이니 어려울 리가 없었던 것이다. 설왕설래 끝에 두 사람의 후보로 압축되었다. 한 분은 판소리 실기자였고, 한 분은 이론 분야의 학자였다. 두 분에 대한 토론 끝에, 이번에는 이론 분야에 비중을 두기로 했다. 이론이 받쳐 주지 못하는 실기는 사상누각이 되기 십상인데, 그간 이론 분야 수상자는 고 이혜구 박사와 몇 해 전 이보형 선생 정도로 너무 소외되었다는 사실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이론 분야의 수상자라면 당연히 송방송 교수일 것이라는 짐작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만큼 그분의 공적은 탁월하다. 우선 방대한 저술량은 웬만한 학자들의 기를 꺾고 주눅들게 하기 십상이다. 종류도 다양하지만, 출간이 됐다 하면 보통 700~800쪽이거나1천여 쪽 이상이다. 기실 오늘의 수상자가 학문계의 사표로 칭송받아 마땅한 더 깊은 속뜻은, 송 교수의 거창한 저술량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일이관지 오로지 한 우물만 파며 정진하는 학자적인 자세와 식지 않는 학구열에 있다고 하겠다. 형설지공螢雪之功으로 뜻을 이루던 농본사회도 아니고 얽히고설키며 복잡하게 살아가는 현대 생활 속에서, 이처럼 초지일관 학문에만 침잠하여 큰 성취를 이루기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송방송 교수는 그 같은 길을 의연히 걸어온 보기 드문 호학好學이다. 바로 이 같은 그의 삶의 족적은 학계 동료나 후학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뿐만 아니라, 크게 상찬賞讚받아 마땅한 일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국악계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전통문화계의 튼실한 토대를 마련해 주고 있는 최고권위의 방일영국악상이 때마침 송 교수를 천거하여 자랑스런 영예의 월계관을 씌워 드리게 되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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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8: 월하의 음악 세계가 그립다, 김월하 가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월하月荷 선생이 타계하신 지 벌써 20년이 흘렀단다. 세월이 빠르다는 말은 누구나 입버릇처럼 흘리지만, 월하 선생을 영별한 지도 이미 아득한 옛일이 되었다니, 정말 세월의 무상함을 지울 수가 없다. 월하의 음악 세계를 떠올리자니 문득 교목지가喬木之家의 고색창연한 고택의 잔상殘像이 떠오른다. 고즈넉한 야산 밑에 중후하게 자리 잡은 선비댁의 와가瓦家. 넓은 대청이 있고 주렴이 처져 있고, 뜨락엔 봉선화며 백일홍 꽃밭이 있고, 마당가 한 자락엔 아담한 연지蓮池가 푸른 창공을 품고 있는 전형적인 대갓집 고택. 틀림없는 말이다. 월하 음악의 진수는 바로 지난날 선비댁의 고택 문화에서 발효되고 빚어진 음악임이 분명하다. 그렇듯 월하의 음악 속엔 지난 세월 우리네 선비문화의 원형질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 학처럼 고고하고 수정처럼 해맑고 백합처럼 단아하고 청초했다. 그런가 하면 그 속엔 좀해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있고 격조가 있었으며, 예술의 진경을 흠뻑 느끼게 하는 풍격風格이 있었다. 오호라, 월하 선생 가신 지 20개 성상을 맞아 가슴 한구석이 허전함은 어인 일인가? 짐작하듯 이제는 또다시 천년고택의 정취가 배어나는 고아高雅한 월하의 정가를 만나볼 수 없기 때문이다. 시대가 가면 인걸도 가고 문명도 바뀌는 것이 우리네 삶의 실상이지만, 그래도 월하 없는 오늘의 정가계正歌界는 연지에 연꽃도 없고 기왓장도 낡아 버린 퇴락한 대갓집의 고가古家를 접하듯 소슬한 마음 떨칠 수 없음이 사실임을 어찌하랴! 월하 선생 서거 20주년을 맞아 그분이 부른 ‘황학루’ 시 한 수 들으며, 그분만이 고고하게 걸어간 참다운 예인의 길을 재삼 반추하고 존경하며 추모의 옷깃을 여민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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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7: 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이춘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전통민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노래는 아마 경기민요일 게다. 많이 회자되다 보니 우선 부르기가 쉽고, 가락이나 곡상이 살갑고 경쾌하며 청아하다. 경기민요의 늴리리야나 창부타령을 서도민요의 수심가나 남도민요의 육자배기 등과 비교해 보면 이내 그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만인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민요는 경기민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대중적인 노래는 쉽게 공명되는 정서적 감응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자칫 진중한 감성의 여운을 잃기 십상이다. 경기민요가 갖는 태생적 한계랄까 속성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이춘희 명창을 훌륭한 가객이라고 치부置簿하고 있는 까닭도 다른 게 아니다. 자칫 경박해지기 쉬운 경기민요의 취약점을 그만의 속깊은 내공으로 말끔하게 균형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요즘의 세태는 지나치게 경망하고 부박하다. 대부분의 예인들이 심금은 울리지 못하면서 표피적인 재주만을 팔기 일쑤다. ‘사람 됨됨이’라는 바탕은 닦지 않은 채 기예만을 익혀서 남에게 과시하려 든다. 수기修己를 해야 입신立身도 되고 이인利人도 할 수 있는데, 수신의 토대 없이 성급하게 과실만을 탐내는 세상이고 보니, 예술이건 학문이건 사상누각이요 일회성 거품에 불과할 때가 많다. 마음에 와 닿는 노래나 음악회가 드문 것도 이 같은 풍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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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6: 천진무구한 가섭의 염화미소, 김천흥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지난 한 세기 우리 현대사는 말 그대로 파란만장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굵직한 사건만 돌아봐도, 한일합병과 3·1독립운동, 해방과 정부수립, 6·25전란과 남북분단, 4·19혁명과 5·16군사정권, 광주민주화운동과 88서울올림픽 등 그야말로 숨가쁘게 휘몰아쳐 간 격랑의 시대였다. 사회 풍조나 가치관 역시 상전벽해로 환골탈태돼 갔다. 전통적인 농본사회가 급격한 산업사회로 바뀌어 가고, 서정적인 농촌문화는 삭막한 도회적 일상성으로 환치됐으며, 인륜에 바탕을 둔 유교적 가치관은 자본주의적 물질만능의 풍토로 뒤바뀌어 갔다. 이 같은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동시대인들은 합당한 대안 없이 표류하며 삶에 대한 힘겨운 갈등과 회의에 빠지기 일쑤였으며, 물질적 풍요와 반비례하는 행복지수를 힘겹게 떠메고 살아야 했다. 바로 이 같은 시대 배경이 심소心韶 김천흥金千興 선생 무악예술舞樂藝術과 인생 역정의 무대이자 토양이다. 결코 태평연월의 호시절이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뚜렷한 가치관을 공유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고뇌하고 체념하는 시절이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심소 선생은 소극적으로 ‘사의 찬미’ 같은 엘레지나 부르고 있지 않았다. 해금으로 무용으로, 아니 생불生佛 같은 자애로운 미소로 시대의 병통을 위무하며 구원해 왔다. 같은 시대를 동행한 많은 민초들이 심소의 청아한 가락에 시름을 잊었고, 단아하고 정갈한 심소의 춤사위에 너나없이 동고동락의 희열을 나눴으며, 세사의 달관으로 빚어진 심소의 온유한 미소에는 강퍅剛愎한 세상도 금세 생기를 띠며 봄볕처럼 화사하게 밝아지곤 했다. 시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고[詩言志], 노래는 말로 표현한 생각을 길게 읊는 것[歌永言]이라고 했다. 하지만 사람의 생각이나 정서를 언어나 노래로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 같은 한계상황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대안은 무엇일까? 바로 수지무지 족지도지手之舞之 足之蹈之의 몸짓이다. 어설픈 췌언贅言을 버리고 무궁한 침묵의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다. 무용의 세계, 곧 침묵의 세계는 상호 소통의 궁극적 묘책이자 대도大道이며 지고한 예술의 경지다.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경우처럼, 백 마디 설명이 필요 없다. 눈빛 하나 몸짓 한 동작으로도 만물을 수렴하며 천하를 설파해 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사 돌이켜보니, 심소 선생의 해금은 음악이 아니었고 심소 선생의 춘앵전은 무용이 아니었다. 음악이되 음악이 아니고 무용이되 무용이 아닌 그 너머의 세계, 곧 심소의 인생이며 우주관이자 철학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달관의 체로 걸러지고 정제되어 순수무구한 동심의 세계로 응축된 화룡점정의 원형질이 곧 심소 선생의 미소 세계다. 분명 심소의 미소는 심소 예술의 이데아이자 메타포가 아닐 수 없다. 가섭迦葉 같은 지혜로운 후학들이 있어, 정재무악의 진수인 심소 미소의 정체와 미학 세계를 온전히 풀어내고 널리 펼쳐갈 수 있으면 우리네 삶은 한층 풍성한 살맛으로 싱그러워질 것이다. ‘손만 들어도 흥이다. 발만 옮겨도 멋이다.’ 심소 선생은 그렇게 무애無碍의 춤으로 풍진세상을 어루만져 주셨다. ‘눈빛만 닿아도 자애롭다. 표정만 보아도 화평하다.’ 심소 선생은 그렇게 천진무구한 자비심으로 곤고한 중생을 보듬어 주셨다. 이제 심소 선생은 이승의 소풍을 마치고 아득한 피안으로 떠나셨다. 하지만 심소의 사뿐한 춤사위와 동심의 미소는 파란 창공의 흰구름밭에 보허步虛의 춤으로 새겨져 청사靑史에 길이 빛나고 있다. 은진 미륵불 같은 자애로운 소안笑顔 세월의 속도는 사람 따라 상대적인 게 맞는 것 같다. 인생 고래희라던 기로耆老의 구간을 넘어서니 젊은 날의 속도감보다도 더 빨리 황혼녘으로 가속이 붙는 걸 봐도 그렇고, 더구나 심소 김천흥 선생이 세상을 하직하신 지가 벌써 5년이 흘렀다는 사실 앞에 서고 보니 정녕 늙은 세대가 감응하는 세월은 백마과극白馬過隙처럼 훨씬 더 빠른 것만 같다. 심소 선생을 회상할 때마다 나는 으레 연상하는 선명한 심상心象이 있다. 바로 절대 자유인으로 서라벌 거리를 기인처럼 누비며 살다간 신라의 고승 원효와 그의 무애무無碍舞가 곧 그것이다. 신라의 원효가 종교적 해탈로 무애무를 추었다면, 20세기 한국의 심소는 영락없이 예술적 달관으로 절대 자유의 경지인 무애의 정재무를 추었다고 하겠다. 그만큼 그의 춤은 물 흐르듯, 춤이되 춤사위를 뛰어넘는 무위자연의 예술적 진경眞景이 펼쳐지고 있었다. 심소의 춤에 인위人爲가 없듯이 심소의 언행이나 섭세涉世 역시 상선약수上善若水같은 순리와 지혜와 노숙老熟이 자연스레 배어나고 있었다. 한마디로 예술의 궁극적 이상이랄 지예至藝의 경지에서 노니는 유어예遊於藝의 세계가 곧 심소의 생애요 삶이며, ‘심소무心韶舞’의 본질이자 미학이라고 하겠다. 내가 국립국악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원로 사범으로 계시던 심소 선생이 원장방을 찾아오셨다. 아마도 국악원 뜰에 있는 국악계 명인들의 동상을 옥내로 옮겨서 안치하면 좋겠다는 제의를 하신 걸로 기억한다. 아무튼 당시 상황으로는 어렵다고 말씀드렸다. 그때 심소 선생은 섭섭한 표정은 커녕 오히려 활달하게 웃으시며 내가 민망해하지 않도록 선선하고도 자상한 어투로 위무의 여운을 남기며 방을 나가셨다. 짧은 독대에서 스친 소회이지만, 기실 아무나 쉽게 되는 일이 아니다. 천부적인 낙천성에 호쾌한 호연지기와 세상살이의 속 깊은 달통을 거치지 않고는 흉내 낼 수 없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화통한 경지임을 그때 강렬하게 느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심소 선생은 평생 어린이셨다. 품성도 용모도 마치 동화 속의 선동仙童처럼 천진무구한 동심의 어린이셨다. 기예와 명성이 한 시대를 풍미했어도, 여느 소인들처럼 쓸데없는 허세나 거드름은 아예 발붙일 틈새가 없었다. 천성이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며 세속의 속박을 초탈했으니 세상 공명인들 연연할 리 만무하셨다. 그러니 그분의 행적은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을 수밖에 없었고, 말년의 주름진 노안에서처럼 항상 자애로운 미소와 화평한 용색이 평생 떠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한때 우리는 심소 선생이 계셔서 따뜻했었다. 행복했었다. 5주기를 맞아 후학들이 선생을 더욱 그리워하는 속정도 이와 멀지 않은 연유에서일게다. 세상살이 살맛나게 해 주시던 심소 선생의 인자한 용안을 떠올리며, 선생의 방일영국악상 수상을 축하했던 졸작 시구의 일부를 다시 한번 음미하며 추모의 절절함을 공유해 본다. 늦가을 황톳빛 낙엽따라 툇마루 봉당에 내린 햇살보다 따스하다 그 표정 향교 마을 기와지붕 끝 창공에 헤엄치는 물고기 풍경보다 청징淸澄하다 그 심성 은진미륵불의 귓밥보다도 석굴암 보살님의 눈빛보다도 인자하구나 다정하구나, 그 웃음이 (중략) 방일영국악대상 동짓달 열여드레 심소心韶 선생 다시 한번 눈들어 웃으신다, 가락을 고르신다 춤을 추신다 구름 휘장 사이로 햇님 방실 웃으시듯 ‘내가 무슨 상을 받아, 더더구나 큰 상을’ 티없는 파안대소 함박 같은 너털웃음에 너와 내가 행복하구나 세상 살맛 솟는구나 인생살이 더도 덜도 말고 심소 선생 웃음만 같아여라 웃음만 닮아지여라.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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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5: 끈기와 집념의 화신, 박동진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드는 정은 몰라도 나는 정은 안다’는 속담이 있다. 우리네 사는 일상이 그러하듯 함께 지낼 때는 무덤덤하다가도 떠나고 나면 새삼 빈자리가 커보이고 생전의 소임이 막중했음을 절감하게 된다. 박동진 명창의 2주기를 맞는 자리가 꼭 이와 같다. 평범했던 자리도 비고 나면 허전커늘, 하물며 한 시대의 대중적 우상이었던 박 명창의 위치였고 보면, 오늘 고인의 빈자리를 두고 느끼는 남은 자들의 정회는 만감이 교차하며 통절한 아쉬움과 그리움을 가눌 길이 없을 것이다. 박동진 명창은 소리의 달인이었다. 그러나 나는 고인을 소리 외의 측면에서 더 높이 평가한다. 바로 그의 정신세계다. 소성에 도취되어 부화뇌동하는 얼빠진 대가들이 득실대는 세태 속에서, 그는 올곧고 강인한 예인 정신으로 평생을 일관했다. 군계일학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한결같이, 그처럼 집요하게, 그처럼 근면하게 평생을 소리 공부에 독공을 쏟은 명창은 아마도 판소리사에 전무후무할 것이다. 말년의 국립국악원 시절, 팔십 대 고령에도 고인은 엄동설한이나 삼복더위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골방에서 소리 연습에 골몰했다. 늦은 출근에도 지각을 하는 단원이 있는 풍토 속에서도 고인은 아침 7시면 출두하여 연습하고 다시 귀가했다가 출근하곤 했다. 어느 핸가 고인은 담낭 제거 수술을 받았다. 예정된 지방공연을 극구 만류했지만, 박 명창은 굳이 링거를 맞아가며 합류했다. 과연 오늘날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명인 명창들, 과연 이 같은 투철한 예인정신과 책임의식을 갖춘 이들이 많을까? 아니 있을까 없을까? 아무튼 고인은 노래로 한 시대를 풍미하고 우리를 감동시켰다. 뿐만 아니라 특유의 익살과 풍류적 여유로움으로 각박한 세상살이에 살맛을 불어넣었다. 어디 그뿐이랴. 더 크게는 투철한 예인정신은 후학의 사표가 되었고, 근검한 생활신조는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속물들에게 따끔한 죽비가 되었다. 음악으로, 예술가 정신으로, 검박儉朴한 삶으로 한 시대의 귀감이 되었던 박동진 명창의 오늘의 빈자리에는 그래서 큰 별을 잃은 상실감과 함께, 그분에 대한 사모와 존경의 정념情念들이 밀물처럼 고여들고 있는 것이리라. 한 시대를 풍미한 구수하고 소탈한 예인 짧은 지면으로 박동진의 음악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만큼 그의 음악 세계는 넓고 깊다. 특히 그의 판소리 음악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순수음악적인 측면 말고도 그의 입지전적인 인생 역정을 이해해야 하고, 철두철미한 삶의 소신과 의지를 이해해야 하며, 그가 처했던 20세기 후반의 한국적 시대상을 감안해야겠기 때문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명창이기에 그에 관해서는 할 얘기도 많고, 각자 기준에 따라서 강조되는 내용도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명창 박동진 하면 우선 이런 이미지가 머리를 스쳐간다. 그는 누가 뭐래도 판소리계의 스타라는 점이다. 여기 스타라는 말은 소리 기량도 군계일학으로 뛰어남을 뜻하지만, 그와 동시에 스타적인 끼가 있음도 함축된 말이다. 박동진은 소리도 잘한다.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그는 청중을 매료시키는 능력도 지니고 있다. 스타적인 기지와 해학과 완숙미 없이는 불가능한 그만의 장기다. 사실 박동진의 판소리음악에서 스타적인 매력이 배제되었다면 모르긴 해도 한국의 판소리음악은 판도가 달라졌을 것이다. 우선 판소리는 구성진 소리 위주의 고답적인 무대로 치달으며, 판소리 본연의 종합적인 예술성은 상당히 퇴색되었을 것이다. 한마디로 판소리의 구수한 재미는 되살릴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새삼스레 그의 판소리 무대가 고맙게만 여겨진다. 지리멸렬하던 판소리계에 활력을 불어넣고 생기를 되찾게 해 준 이가 곧 그이기 때문이다. 기실 박동진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판소리가 이처럼 괄목할 만큼 대중들의 아낌을 받을 수가 없었음에 분명하다. 전통예술을 모르는 것이 오히려 교양인인 양 처세하던 시절에 전통예술의 진미를 번뜻번뜻 일깨워 주던 이가 곧 박동진 명창이다. 소리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입담과 재담으로 끌어들이고, 공연을 접해 보지 못한 이들을 위해서는 불원천리 마다않고 찾아다니며 소리로 익살로 뚝심으로 판소리의 진수를 터득시켜 왔다. 이처럼 쇠잔해 가는 판소리를 회생시킨 주역이 곧 박동진이다. 이것만으로도 그는 20세기 후반의 우뚝 솟은 스타요, 명창이요, 한국 음악사의 공훈자다. 한편 그에게는 명창 이전의 인간 박동진으로서의 숙연함을 느낀다. 예술을 향한 그의 불굴의 집념과 초인적 정진 때문이다. 그가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뛰어난 노력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소성에 자족하며 대성에 이르지 못하는 철부지들이 많은 세상에 그의 진지한 삶의 자세는 많은 예술인들에게 하나의 경종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도 박동진 명창은 국악계의 훌륭한 사표요 선구자다. 박 명창은 마음씨 착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체취를 풍긴다. 흔히 인기와 명성을 누리는 인물들이 지니기 일쑤인 자만이나 오만 같은 흔적은 티끌만큼도 없다. 언제나 편안하고 온화하고 겸손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는 이 시대가 그토록 갈구하는 따듯한 인간미가 물씬 느껴진다. 얼마나 우리 이웃과 사회가 그로 하여금 포근해지고 정스러워지는가. 지극히 인간적인 한 예인의 정서적 감화에 우리는 고마울 뿐이다. 음악가적 예도와 인간적 감동을 겸비한 박동진 명창과 함께한 오늘의 동시대인들은 그래서 행복하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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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4: 반듯한 기개 꼿꼿한 자존심, 김소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명창 김소희가 순옥順玉이라는 아명의 길이 아니고 그의 이모가 지어 주었다는 소희素姬라는 명창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라기보다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숙명이 아니었나 싶다. 당시 혜성과 같이 군림하던 여류 명창 이화중선李花中仙의 소리에 매료될 기회가 있었다든가, 광주로 취학을 한 덕분에 송만갑宋萬甲의 문하에 쉽게 들 수 있는 여건이 주어졌었다든가 하는, 긴 인생 여로에서 만남의 우연성도 손꼽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보다도 김소희는 날 때부터 명창으로 대성할 남다른 소질을 타고난 게 사실인 것 같으니, 이는 곧 ‘팔자소관’으로 돌리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만정 김소희는 1917년 12월 1일 전북 고창군 흥덕면 흥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이미 어려서부터 풍류스런 분위기를 흠뻑 마시며 자라난 셈이다. 전라도 하면 자타가 인정하는 예향인데다 고창 지방은 특히 명창의 고을이랄 만큼 수다한 소리꾼을 배출했다.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라도 우선 이 나라 여류 명창 중에서 내로라하던 인물인 채선彩仙, 허금파許錦波, 김여란金如蘭 등이 모두 이 고을의 정기를 타고난 낯익은 이름들인 것이다. 어디 그뿐이던가. 한학에 조예가 깊어 판소리 음악의 사설을 정립하고 스스로 많은 단가를 지어낸 판소리계의 은인 동리桐里 신재효 선생 역시 이 고장에서 평생을 보낸 분이 아니던가. 게다가 만정 김소희의 부친은 단소였든가 피리였든가를 잘 불며 꽤나 풍류를 즐기던 분이었다고 한다. 김소희의 어린 감정은 자연히 이 같은 풍류스런 색깔로 물들어가게 마련이었고, 바로 이 같은 감성의 색깔은 그녀의 타고난 재분才分을 한결 실하게 자랄 수 있도록 작용했을 것이다. 여기에 타고난 재분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 김소희는 확실히 남다른 예술적 재질을 타고났음이 분명한데, 이 같은 심증은 그녀의 몇몇 삽화적인 이력을 일별해 보더라도 이내 알아차릴 수 있다. 거문고에 달통한 사람은 세사世事에도 달통할 수 있다는 말처럼, 하나의 예능에 능통하면 자연히 그 방계의 예능에 수완을 보이는 수가 많다. 김소희의 경우에도 그 폭과 깊이가 남다른 데가 있었다. 국악을 아는 사람은 이해하는 얘기지만, 판소리를 익히면서 정악 거문고를 배운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형세가 아니었는데도 김소희는 소리 외에 거문고도 익혔다. 그의 판소리 음악에 깊이 있는 품도를 싣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전주의 정성린鄭成麟에게는 고전무용을 전수받아 수준급의 정통성을 보여 주고도 있다. 특히 그가 서화에도 능해서 붓글씨로는 국전에 세 번이나 입선했다는 사실은 꽤 알려진 일이다. 또한 이와 같은 예능적 특기 외에도 김소희는 문학에 꽤나 미련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언젠가 만정과의 대담에서도 미당未堂 서정주 씨의 시를 즐겨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영화는 아주 광이었고, 어떤 때는 앉은 자리에서 세 번까지 본 적도 있다고 했다. 소리로 입신해서 이것저것 공연을 하러 다니면서도 늘 공부 타령을 하니까, 한번은 어떤 선배 어른이 통신 강의록을 보라고 해서 그 강의록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쳤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글공부에 대한 김소희의 집념도 대단한 것 같았다. 다시 태어난다면 소리보다는 뭣 좀 써 보는 글공부를 택하겠다고도 했다. 이 같은 만정 김소희고 보면 확실히 그에게는 음악적 재분 외에 문학적 기질도 많았던 것 같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고, 만정은 타고난 재질에다 열성과 집념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흥덕리 구석의 단발머리 순옥이가 당대의 여류 명창 김소희로 대성할 수 있었던 숨은 내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하겠다. 흔히 노력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한다. 그러나 예인의 길이란 노력에 앞서 천부적 재능도 필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양자를 겸비한 김소희도 이 사실은 강조한다. 숱한 제자들을 가르쳐 봤지만 소질이 없으면 영 늘지를 않고 또 소질 있는 아이치고 열심히 하는 놈 드물다고 한다. 이래저래 특출난 예술가란 백에 하나 나기도 어렵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김소희 예술의 비결은 노력과 소질이 함께 조화를 이룬 데 있었음이 틀림없다. 영롱한 불빛 속에도 슬픈 전설이 서려 있듯이 뭇사람이 환호하는 예인의 길이라고 해서 한결같이 낭만적일 수만은 없다. 더욱이 파란만장한 역정을 걸어와야 했던 명창의 길에 있어서랴. 만정 김소희는 그 숱한 공연 과정에서의 우여곡절과 희로애락의 장면들을 이렇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해요. 64년 동경 올림픽 때였는데 나는 그곳 교포들 앞에서 노래를 했는데 공연이 끝난 후 늙수그레한 할아버지가 다가오더니 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잖겠어요. 참으로 오랜만에 폐부를 찌르는 소리를 듣는다며 이화중선 이후 처음으로 긴소리다운 긴소리를 들어본다고 그럽디다. 그때 그 일이 감명 깊었던 것은 뭐 우쭐한 칭찬을 들어서가 아니라, 과연 한 인간의 마음을 그렇게 속속들이 감격시킬 수 있을까 하는 노래의 고마움에서였지요. 소리하는 보람을 새삼 느낄 것 같더군요. 물론 무대 공연을 치르다 보면 별의별 감격도 많았습니다. 창극단을 따라서 전국을 누비던 때의 일, 62년 파리 공연 이래 구주와 미주 순회 공연 등. 그런데 참 이상합디다. 우리나라에선 괄시받던 판소리가 말도 통하지 않는 외국에 가니까 그렇게 인기가 있습디다. 72년 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연주할 때 도중에 기립박수까지 받고는 얼마나 어리둥절했는지 몰라요.” 이런 얘기들만 듣다 보면 명창의 길이란 화려한 동경의 대상일 것만 같으나 역시 영고榮枯가 반반임은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에 만정은 10여 년 넘게 전국을 누비며 창극을 하다 보니 어찌나 소리하기가 지겹던지 북만 봐도 소름이 끼치더라고 했고, 그밖의 갖가지 설움과 역겨운 사연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책이 돼도 몇 권은 된다고 했다. 한편 김소희의 인간적인 측면을 더듬어 보면 한마디로 깔끔하고 정갈한 성품의 예인藝人이다. 그녀 스스로 "성격이 차지요. 내성적이구.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까 성격이 변하데요”라고 실토할 만큼 그녀의 성격은 깔끔한 데가 있다. 그녀의 외모 역시 본인의 평대로 차분하고 단정하며 개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인상이다. 본인은 극구 못생겼다고 하지만 결코 미운 얼굴은 아니다. 곱다는 말보다는 인상적이라는 말이 걸맞으며, 무언가 이성 간에 느낌직한 매력이 연상되기도 하는 독특한 분위기도 풍긴다. 바로 이와 같은 김소희의 인상이 그대로 소리로 연결되어, 그토록 우리를 사로잡고 마는 그의 예술로 승화하고 있다고 해도 과히 잘못된 판단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그의 음악 속에는 그녀의 개성과 숱한 감성의 경륜이 배어난다. 옹골차고도 세련된 그의 성음 하나하나에는 눈꼴신 것을 못 참는 만정의 꼿꼿한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고 찰떡같이 끈끈한 서정으로 청중의 혼을 사로잡고 마는 그녀의 윤기 있는 소리결 속에는 굴곡 있는 인생 역정과 기구한 역사적 시대 상황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이 분명타고 하겠다. 옥색 모시 치마저고리와 옥비녀에 붉은 댕기로 단정히 빗어 넘긴 머리단장으로 차분히 무대에 나와 그가 좋아하는 ‘범파중류’나 ‘옥중가’를 부를 때의 그 기막힌 감동과 여운을 되새겨 보라. 그러면 이내 우리는 그 이지적이면서도 촉촉한 감성이 봇물처럼 흐르는 그의 예술세계를 확인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확실히 김소희는 뛰어난 명창 중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개성이 그렇고 그녀의 음색이 그러하며 호소력 있는 악상의 표출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그녀의 소리 앞에서는 누구나 단번에 하나가 된다. 시름을 잊고 걱정을 잊고 현실을 잊으며, 망아忘我의 세계, 피안彼岸의 세계, 몽환夢幻의 세계로 몰입되어 너와 내가 금세 하나가 된다. 모두가 하나 되어 마음껏 예술의 법열경法悅境을 유영遊泳하다가 문득 우리는 현실로 되돌아와서, 다시금 김소희 소리의 위대함을 확신하게 된다. 풍부한 감성과 음악성이 본질적으로 우수적인 성색과 어우러지며, 천변만화의 예술미는 물론 우리 시대의 서민적 애환을 대변해 온 만정 김소희는 분명 ‘일세기에 한 번쯤 나옴직한 명창’이자 우리 모두가 자랑스럽게 가슴속에 심어 둘 동시대의 보배이자 판소리 음악의 정화精華가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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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3: 놀이마당문화의 파수꾼, 지운하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전래의 마당놀이가 지니는 역사적 의미나 사회적 기능은 여간 막중한 게 아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마당놀이만큼 연륜이 깊은 장르가 없다. 정악도 그렇고, 판소리도 그렇고, 제례악도 그렇고, 모두 후대의 공연물들이다. 그러나 마당놀이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생활화되어 왔으니, 역사적으로도 전통예술의 종가가 아닐 수 없다. 신라 말 최치원의 한시 대면大面이나 산예뼝猊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당시에 사자놀이나 탈춤놀이 등이 신라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사회적으로도 전래의 마당놀이는 민중생활의 에너지요 생명소로 작용해 왔다. 묘기와 익살과 신바람으로 민중의 애환을 달래 왔고, 집단적 놀이를 통해서 분출되는 활력은 낙천적·긍정적 사회 발전의 추동력이 되었다. 그만큼 마당놀이는 삶과 문화와 동의어로 기능하며 전통문화의 원형질이 되어 왔다. 이처럼 전통예술의 중심 영역이었던 마당놀이가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서서히 주변 예술로 밀리며 빛을 잃어가고 있다. 무엇보다도 분석적 서구 문화의 유입 때문이다. 야외적·즉흥적 신명의 예술이, 실내적·규격적 서구의 공연 형태 속으로 편입되면서 생기를 잃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서양의 분석적 잣대로, 하나의 뭉뚱그려진 생명체라고 할 ‘마당놀이’를 음악적인 요소, 무용적인 요소, 연극적인 측면, 문학적인 측면 등으로 분해해서 접근하는 바람에 그 고유한 활력과 상호 통합적 생명력이 망실되고 만 것이다. 여하간 마당놀이 문화는 시대적 추이나 유행의 물결에만 내맡겨 놓을 일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것은 한낱 놀이와 예술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민중적 삶의 에너지나 문화 발전의 잠재력과도 직결된 문제다. 대중적 안목도 이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고 국가적 정책도 여기에 착안해야 마땅한 일이다.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할 때 지운하池雲夏의 예인적 발자취는 여간 의미 있고 소중한 게 아니다. 명멸하는 마당놀이의 명맥을 묵묵히 지켜 오며 역사를 이어가는 이도 그이며, 남다른 소신과 열정으로 마당놀이 예술의 개화에 앞장서는 이도 곧 그이기 때문이다. 지운하는 이미 어려서부터 남사당패의 법구잽이로 뛰면서 마당놀이의 본질과 속멋을 속속들이 익히고 체화했다. 선천적 소양 없이 장성해서 기예를 익힌 재인才人들과는 본질적으로 연희演戱의 질이 다르다. 지 명인은 평생을 그 바닥에서 땀 흘린 사람이다. 누구나 남의 성취를 감상하기는 쉽지만, 그 성취가 있기까지의 세월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지운하의 공연 앞에서는, 우리 모두 무대 위의 성취와 함께 그의 족적에 배어 있는 인고의 시간들을 공유하며 공감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늘진 분야의 예술을 지켜 온 뚝심 있는 예인들의 소중함을 이해하게 되고, 그래야만 수다한 전통예술의 뿌리며 모체라고 할 마당놀이 예술의 중흥이라는 시대적 현안을 실감하게 되겠기 때문이다. 지운하의 의미심장한 무대공연을 재삼 축하하며, 이번 공연을 계기로 국립국악원에 대중적 소망을 대변해 갈 어엿한 전통연희단이 태어나서 우리의 살맛을 좀더 높여 줬으면 하는 꿈도 함께 꾸어 본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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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2: 피리로 세상을 보듬어 온 외곬 인생, 정재국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저만큼 어린 시절만 해도 그랬다. 우수 경칩을 지나 따사로운 양광陽光이 동토를 녹이고 나면, 제일 먼저 봄 기지개를 켜는 것은 뽀얀 솜털을 곧추세우는 냇가의 버들개지들이었다. 초목들 중에서 제일 먼저 봄물이 오르는 것도 버드나무이고, 가을 낙엽 때 제일 늦게까지 잎을 달고 있는 나무도 개울 둑가의 버들이었다. 한마디로 끈질긴 생명력을 상징하는 수종이었던 셈이다. 그래서인지 지난날 농본사회에서는 생명의 계절 봄철이 되면 물오른 버들가지를 꺾어서 호드기를 만들어 불며 찬란한 봄의 정취를 구가하곤 했다. 동장군의 한기가 채 가시지 않은 농촌마을에 울려 퍼지던 호드기 소리는 더없이 청초하고도 싱그러웠다. 그것은 순수무구한 민초들이 어우러지던 한 시절 마을 인심의 적나라한 표출이자 소생하는 만물의 환희의 울림임에 분명했다. 피리는 이처럼 태생적으로 우리 고유의 정서적 텃밭에서 생명의 용트림으로 잉태되고 자라왔다. 이것이 곧 피리가락 속에 유난히 끈끈한 서정과 함께 오월의 신록과 같은 싱싱한 생명의 질감이 일렁대는 소이연이다. 근래의 피리 음악에서는 좀해서 생기가 꿈틀대는 살아 있는 소리를 접하기가 쉽지 않다. ‘산 절로 수 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라던 천인합일적인 문명을 등진 생활 환경 탓도 크지만, 한편으로는 음악을 한갓 재간이나 기교로만 인식한 채 삶의 근원적인 문제들을 간과하는 데서 오는 허물도 적지 않다. 훌륭한 음악이란 천지만물과 더불어 조화와 화목和睦을 이루는 것〔大樂與天地同和〕이라고 했거늘, 어찌 좋은 음악이 혼불 없는 재주부림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나는 피리 음악의 정통을 생각할 때면 으레 정재국 명인을 떠올린다. 우선 수수백년을 이어온 국립국악원 피리 음악의 정수를 이어가는 소중한 존재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반세기에 걸친 숱한 국내외 연주를 통해 피리의 특장과 본령을 여실하게 대변해 온 공적에서도 그러하며, 나아가서는 음악을 예술의 울타리 속에만 가두지 않고 사람 되게 하는 인간완성의 차원으로 연계시키는 자세에서도 또한 그러하다. 뿐만이 아니다. 정재국 명인의 음악은 만인의 가슴을 공명시킨다. 무미건조한 물리적 진동에 의한 공명이 아니라, ‘무기교의 기교’랄 노련한 기예와 피리 고유의 음질인 싱그러운 활기를 뿜어내는 역동성과 생명력에 의한 심금心琴의 공명이다. 일이관지一以貫之의 내공과 경륜과 예지가 없이는 어림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정재국 명인의 음악에서는 조선조 말엽 대금으로 양명한 정약대 명인의 일화와 같은 공력의 앙금이 배어난다. 그래서 그의 피리 음악에는 감흥이 있고 공감이 있고 생명에 대한 긍정의 희열이 있다. 정재국 명인을 지렛대로 삼아 피리 음악계에 일진청풍의 신선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으면 좋겠다. 후학의 입장에서는 정재국 명인의 피리 인생을 사표로 삼아 청출어람靑出於藍의 대성을 다짐하는 전기가 되고, 무미건조한 음향들이 횡일橫溢하는 한국의 악단에는 가산 정재국 명가名家의 음악처럼 농익은 시정詩情과 활력이 훈풍에 봄물 오르듯 풍윤하게 차오르는 계기가 되면 우리 모두의 속 깊은 즐거움이 될 것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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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1: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 정광수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내 뇌리에 각인된 명창 정광수의 이미지는 서너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판소리의 양대 산맥인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른 소리꾼이라는 점이다. 정 명창은 김창환으로부터 춘향가와 흥부가를 익혔다. 서편제의 법통을 깨우친 것이다. 그리고 유성준으로부터는 수궁가와 적벽가를 전수했다. 동편제의 소리맥을 이어받은 것이다. 물론 웬만한 명창이라면 동과 서를 넘나들며 소리를 익히는 게 상례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 명창의 경우는 일상적인 예와는 유와 격이 다르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학 연한으로 보나 사사한 스승들의 면면으로 보나 가히 정통 중의 정통이랄 양수겸장의 명창으로 사료되기 때문이다. 정광수 명창은 어려서부터 서당 공부를 해 한학에도 깊다. 옛날로 치면 비가비 명창인 셈이다. 판소리 사설에는 고사성구가 많고 한문에서 유래하는 낱말들이 부지기수다. 따라서 한학에 깊지 않고는 판소리 사설의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하다. 실제로 명창들의 소리를 들어보면, 한문 투의 가사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노래하기 때문에 실감 있는 맛을 내지 못함은 물론, 때로는 엉뚱하게 왜곡된 발음을 해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할 때 정 명창의 한학 수학은 분명 남다른 장점임에 틀림없고, 그만큼 자신의 판소리 음악의 완성도에도 크게 작용했음이 사실이라고 하겠다. 음악 외적 얘기가 될는지 모르지만, 정광수 선생이 걸어온 생활 반경 또한 개성적인 면이 많다. 정 선생은 광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해 온 명창이다. 얼핏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나는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해득실을 따라서 부화뇌동하는 세태에 보기 드문 예술가적 소신을 만나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특히 20세기 후반의 우리 사회 풍조가 그랬듯이, 국악계의 명인 명창들도 너나없이 서울로 모여들었다. 중앙집권적인 문화구도나 산업사회의 도회적 매커니즘으로 볼 때 어쩌면 당연한 추세들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정광수 명창만은 세태를 추종하지 않았다. 소위 출세에도 명성에도 불리하기 마련인 지방을 고집하며 소신 있는 음악 활동을 솔선해 온 것이다. 세속을 한 수 밑으로 보는 인상적인 예인의 개성이요 소신이 아닐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정 명창의 소리 세계는 중용과 조화의 예술정신을 바탕으로 우리 시대의 소중한 미적 정서와 판소리 음악의 덕목을 직조해 가는 독보적인 위치임에 분명하다고 하겠다. 중앙 중심의 인력권에서 벗어나 문화의 지방화를 실천했으니 시대적 균형감각을 선각했다고 하겠고, 결코 쉽지 않은 한학과 소리 공부를 겸비했으니 금상첨화의 예술적 조화를 꾀한 셈이라고 하겠으며, 전문분야인 판소리의 양대 계보를 두루 섭렵했으니 가히 음악적 중용과 조화와 균형을 구존했다고 하겠다. 정 명창의 음악적 격조와 예술적 개성이 유난히 돋보이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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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0: 장사익 가걸歌傑, 심금을 퉁겨서 노래하는 국민 가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에는 노래를 잘하는 사람들도 참 많다. 노래방 풍경을 보면 전업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자고로 우리 민족은 가무음주가 뛰어났다는 이웃나라의 기록도 있고 보면 당연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 잘한다는 노래들을 보면 대부분 천편일률적이고 서로 오십보백보다. 개성은 뒷전으로 한 채 기존 창법이나 감정을 그대로 되풀이할 뿐이다. 그런데 이 같은 노래 세상의 관행과 타성을 통쾌하게 무너뜨리고 혜성처럼 나타난 소리꾼이 있다. 바로 만인의 심정을 따뜻하게 보듬어 주며 풍진세상의 애락을 영혼에 실어 위무해 주는 장사익이 곧 그 주인공이다. 나는 장사익의 노래를 참 좋아한다. 아마도 한국사람치고 그의 노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장사익의 노래가 있는 곳이면 어데를 가도 열광이요 환호 일색이다. 그러면 만인이 하나같이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백인백색의 답이 있겠지만, 나는 그 뛰어난 소리꾼의 노래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우선 장사익의 소리 빛깔은 소탈하고 털털하다. 목구멍에서 얄팍하게 꾸며내는 가화假花 같은 여느 가수들의 노래와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 전통음악으로 비유하자면 선비계층이나 지체 있는 양반들이 즐기던 정가正歌 계통의 투명한 음색이 아니고, 짚방석에 앉아 막걸리잔 기울이며 흙과 더불어 살아가던 소박한 민초들의 분신이랄 판소리적 성색이 곧 그것이다. 소리색은 평범해 보여도 그 소리 세계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다. 정성을 들여 갈고 다듬는다는 뜻의 절차탁마切磋琢磨라는 옛말이 있다. 옥이나 상아 같은 것을 대충 잘라내고 쪼아내는 것이 절切과 탁琢이며, 이를 더욱 정교하게 갈아 다듬는 것이 차磋와 마磨다. 한마디로 초벌작업이 ‘절탁’이고, 정치하게 가다듬는 과정이 ‘차마’다. 바로 장사익의 성음은 여기 절차탁마에서 초벌작업에 해당하는 절탁의 경지에 비견될 수 있다고 하겠다. 그만큼 그의 성색은 성긴 듯 투박하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따듯한 온정을 느끼며 교감할 수 있는 보석 같은 질박함이 배어 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소리꾼 장사익이 언제 목소리로 노래하던가? 그는 결코 목청으로 노래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의 노래를 두고 성음이 어떻고 하는 얘기들은 모두 겉만 보고 떠드는 자의적인 설왕설래일 뿐이다. 내 말이 틀린 건지 그의 노래를 조용히 음미해 보라. 그는 분명 성색을 앞세워 노래하지 않고, 혼으로 소리를 낸다. 혼과 몸으로 노래하는데 성대를 이용할 뿐이다. 그의 노래가 만인의 마음속 거문고 줄을 그토록 절절히 울려내는 사연도 바로 여기에 있다. 우여곡절의 인생 역정을 거치면서 깨치고 터득한 인간 본연의 순수무구한 정서의 본령을 영혼의 혼줄로 토해 내는 것이다. 아무튼 장사익의 소리가 있어 우리는 행복하고 우리 시대 역시 그나마 살맛 나는 따뜻한 온기를 이어가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 시대의 명가객이자 고마운 은인이 아닐 수 없다. 나는 1996년 현충일부터 지금까지 매년 현충일이면 ‘비목문화제’의 이름으로 호국영령들을 위무하고 기리는 일종의 진혼예술제를 개최해 오고 있다. 그때마다 내로라하는 여러 음악가들이 출연해 왔는데, 20여 년이 넘는 세월이다 보니 장사익 또한 이 행사에 참여한 예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응분의 사례도 못해 온 처지여서 지금도 민망하고 한편 고맙기 짝이 없다. 어느 해였던가, DMZ가 멀지 않은 평화의 댐 북한강 강변에서 현충일 진혼예술제를 거행할 때였다. 그날 장사익은 그 특유의 호소력 있는 창법으로 ‘찔레꽃’을 불렀다. 초여름 햇살이 눈부신 나른한 오후였다. 찔레꽃 가락은 육중한 침묵의 녹음 속으로 파고들며 조국을 위해 산화한 옛 전쟁터의 혼령들을 일깨워 불러냈다. 신록처럼 싱그럽던 못다 핀 인생의 꽃망울들은 우줄우줄 춤을 추며 현신現身했고, 이승의 군중들은 고요한 묵상 속에 잔잔히 밀려드는 비감悲感을 가슴으로 삼키고 있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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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9:소리꾼의 판소리 사설 정립, 송순섭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잔잔한 파도가 단조롭듯 인생살이도 순탄하기만 하면 웬지 밋밋하고 권태롭다. 때로는 폭풍이 몰아치고 눈보라가 휘날려야 나름대로 산전수전 세상 좀 살아봤노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운산雲山 송순섭宋順燮 선생을 떠올리며 가져본 단상이다. 그때 그 시절 우리 모두가 거의 그랬듯이, 운산 역시 지지리도 가난하고 신산辛酸한 시절을 살아왔다. 웬만한 사람들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자탄自嘆하거나 좌절하며 인생을 자포자기한다. 하지만 운산은 역경에 굴하지 않았다. 파상적으로 밀어닥친 고난은 오히려 그를 강철처럼 굳건하게 담금질해 갔다. 오늘의 자랑스런 운산을 있게 한 토양이요, 원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음에 틀림없다. 무릇 소리나 재주를 앞세우는 재승박덕형은 사탕 맛이다. 가슴 깊숙이 심금을 울려 주는 여운이 없다. 그저 한번 여흥삼아 즐거운 체 어울려 볼 뿐이다. 세상이 부박浮薄하다 보니 너나없이 이처럼 표피적인 감각만을 긁어 주는 사탕발림 예술을 선호하고 추종하며, 심지어 그게 예술의 본령인 양 혼동한다. 운산의 소리엔 허세가 없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무늬를 담박하게 가락으로 풀어 낼 뿐이다. 관중들은 그런 신실信實한 소리 속에서 혼연일체의 동질감을 느끼며 깊은 예술적 희열에 잠기게 된다.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고 하듯이, 대가들의 소리는 오히려 싱겁고 어눌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곰곰 음미할수록 그 속에서 진국이 우러난다. 예술의 아름다움뿐만이 아니라 농익은 삶의 얘기들까지 배어나기 마련이다. 마치 운산의 소리가 그러하듯! 팔십 고개를 바라보는 운산의 소리 역정歷程이지만, 단 두 장의 장면을 그려보면 그의 소리 인생의 대성을 누구나 가늠해 볼 수 있다. 마음으로 그려보는 한 장은, 배고픈 소년 시절의 서러운 소리 공부 장면이고, 또 다른 한 장면은 2007년 조선일보 1면 톱에 실린 중국 장강의 적벽대전 터에서 열창한 회심의 적벽가 장면이다. 고흥의 한촌寒村에서 광주, 부산, 서울을 거치며 보옥같이 다듬어 온 소리를, 숱한 영웅호걸들이 명멸했던 먼 옛날 적벽대전 역사의 현장에서 화룡점정으로 기염을 토해 냈으니, 이만하면 운산의 삶의 궤적도 남부럽지 않은 다복한 일생이 아니겠는가!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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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8: 청초한 유덕遺德은 한악계의 등불, 성경린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고란사의 고란초보다 망강루望江樓 죽림 속의 청잎 대보다 더 향기로우셔 속이 곧으셔 검은 학 부려 놀던 왕산악보다 지리산 솔바람에 세월을 잊은 귀금貴金보다 표풍飄風보다, 더 그윽하시여 허허로우셔 고 관재寬齋 성경린成慶麟 선생님 탄신 백 주년을 맞고 보니, 근래에 절감하고 있던 몇 가지 사실들이 새롭게 다가선다. 우선 공경하고 받들 한악계韓樂界의 어른이 없다는 허전함이 그것이다. 이미 나도 칠십 대의 노경으로 접어든 세월의 탓도 있겠지만, 요즘 들어 전통음악계의 앞세대를 바라볼 때 태산처럼 믿고 흠모할 걸출한 어른이 없다는 공허함은 우리 모두의 마음밭을 더욱 고적하게 해 준다.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용렬맞은 후학의 입장에서는 한층 관재 선생님의 개결介潔과 만당晩堂 선생님의 인품과 심소心韶 선생님의 자목慈睦 등이 하늘처럼 느껴진다. 어쩌다 세태는 재승박덕형才勝薄德型의 똑똑이들이 난무하는 풍조이고 보니, 특히 관재 선생님 같은 선대 어른들이 궁행躬行하신 고결한 예도藝道와 풍격風格은 밤하늘의 별처럼 더욱 우러러 그립고 아쉽기만 하다. 난세에는 영웅이 그립고 혼탁한 세상에서는 고절高節의 선비가 그립나니, 관재 선생님 탄신 백 주년을 맞고 보니 새삼 가신 분의 청렴강직한 유덕遺德이 그립고 빈자리가 텅 빈 창공처럼 넓기만 하다. 때마침 금률악회 문하門下들이 심금을 울려 기리나니, 분명 한악계의 경사가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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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7: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해 내는 능력과 수완, 박범훈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무릇 예술 활동에 정답은 없다. 얼핏 옳은 말이다. 그러나 시대마다 지향하려는 좌표는 있었다. 그것을 시대적 풍조래도 경향이래도 추세래도 공감대래도 좋다. 아무튼 대다수가 승복하는 목표는 있었다. 그런데 여기 목표가 오리무중인 현안이 하나 있다. 나의 개인적 문제의식인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이거다라고 하는 정답을 내놓을 수 없는 분야가 있다. 국악관현악의 문제가 곧 그것이다. 소위 ‘전국국악관현악 축제’라는 행사를 10여 년 끌고 오면서 늘 부닥치던 문제의식이 한둘이 아니지만 아직도 선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중지를 모아 진지한 자기 점검을 해 볼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을 뿐이다. 국악관현악단에 대한 긍정 반 회의 반의 저울추가 긍정 쪽으로 약간 이동한 계기는 곰곰 생각해 보니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탄생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국립국악관현악단의 활동을 통해 무언가 국악관현악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관현악의 음량 문제에 대한 가능성이었다. 익히 알듯이 전통음악의 앙상블은 방중악房中樂의 규모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었다. 체질적으로 실내악적 원형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전통에 코페르니쿠스적 격변이 닥쳤다. 서구 오케스트라적 환경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 곧 그것이었다. 전래의 앙상블은 이제 보료방석의 사랑방이 아닌 넓은 스테이지와 수백 수천 석의 관중 앞에서 연주를 해야 할 팔자가 되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할 딜레마였다. 자연히 치기와 부조화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문제가 음향이었다. 수수백년을 아담한 공간에서 자라온 음악을 갑자기 황야의 들판에 내세운 격이었으니, 그 넓은 공간을 충만시킬 음량이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무대에 서는 연주가 수를 확충하는 초보적 방법이 대안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악단이 그 길을 택했다. 하지만 그 같은 대안에는 한계가 있었다. 재정적 측면만이 아니라 음향학적으로도 임계점이 있기 때문이다. 여하간 유수한 악단들이 나름대로의 적정 규모로 인원 확충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흡족한 결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런 진퇴유곡의 상황에서 국립국악관현악단은 원천적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 악기에 대한 반성으로 눈을 돌렸다. 소위 악기 개량 작업이 그것이었다. 물론 유사한 시도들이 간헐적으로 있어 왔지만, 오케스트라 사활의 문제로 인식하며 확고한 목적의식을 전제로 추진한 것은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선택이 효시가 아닐 수 없다. 이때 관현악적 문제 극복의 선봉에 섰던 사람이 박범훈 초대 지휘자다. 그는 비단 국립국악관현악단 제1대 지휘자만이 아니다. 아예 악단 창단을 위해 심혈을 쏟은 산파역이기도 했다. 창단의 주역이자 초대 지휘자였으니, 자신의 이상대로 악단의 개성과 색깔을 빚어 가기에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미 중앙국악관현악단의 창단과 운영에서 터득한 경험과 안목으로 신생 국립악단의 이미지를 참신하게 윤색해 가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같은 조건의 악단을 활용하더라도 박범훈의 작품 속에서는 괄목할 만한 음향 효과가 우러난다. 관현악 구성 악기들 하나하나의 구조와 기능과 장단점을 속속들이 꿰고 있기 때문이다. 실내악적 구조의 악기들을 보듬어 가면서 그만한 음향을 이끌어 내고 요리해 간다는 것은 가히 음향의 달인이 아닐 수 없다. 박범훈 특유의 음향 감각은 후발 관현악단의 위상을 단번에 굳건한 반석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 더욱이 악기 개량을 통한 꾸준한 음량 확충 작업은 국립악단의 체질을 한층 튼실하게 가꿔 갈 수 있었으며, 그 같은 일련의 결실들이야말로 초대 지휘자 박범훈의 남다른 공로요 음악적 가치관의 특징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박범훈 교수는 참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다방면에 걸쳐서 능력과 수완을 발휘하고 있다. 탁월한 지휘자에 작곡가임은 물론 행정이나 경영에도 뛰어나다. 일개 국악인이 굴지의 대학인 중앙대학교 총장이 되는가 하면, 권부에도 발탁되어 청와대 교육문화수석이 되기도 했다. 남들이 뭐라고 입방아를 찧건 그를 아는 나는 모두가 그의 능력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라고 믿는다. 대개 재주가 좀 있는 사람은 노력은 하지 않고 꾀부리기를 좋아한다. 이것이 보편적인 세태요 인지상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박범훈 교수는 이와는 딴판이다. 지독한 노력형인 데다가 바지런하기 짝이 없다. 지난 시절에는 거개가 그러했듯이, 박 교수 역시 가난한 역경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요즘 말로 치면 흙수저 출신이다. 이런 경우 많은 사람들은 비관하거나 자포자기한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오기를 키우며 분발했다. 그 같은 오기와 분발이 곧 훗날 그의 대성의 동력이 되고 자양분이 되었음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작곡가 박범훈과 나는 이런 인연이 있다. 70년대 초의 일이다. 내가 중앙대에 출강하며 음악미학, 한국음악개론 같은 음악이론을 강의할 때다. 서양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이기 때문에 한국 전통음악에는 관심들이 없었고, 시험을 쳐도 60점 내외를 맴돌기 일쑤였다. 그런데 시험 때마다 돌연변이처럼 늘 80점대 이상을 받는 학생이 있었다. 하도 궁금해서 한 번은 그 학생을 따로 불러 정체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는 국악예술고등학교 출신이라 국악 관련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고 답변했다. 그때의 그가 바로 훗날 그 대학의 총장이 되는 박범훈 학생이었다. 하찮은 일이지만 박 교수를 떠올리면 가끔 연상되는 엉뚱한 사연도 하나 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여럿이 모여서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개중에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나 자신이 승복하는 사람에게 신임을 받으려고 필요 이상의 친절을 베푸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교언영색 선인의巧言令色 鮮仁矣’라는 옛 글귀도 있듯이 그런 인물치고 미덥거나 진솔한 사람이 드물다. 아무튼 당시 중앙대 국악과 교수진의 내부 구도가 어땠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만, 그곳 교수 중의 노아무개라는 양반이 한양대 권오성 교수와 내가 박범훈 교수를 흉보고 다닌다며 근거 없는 모함을 퍼트리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내 딴에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오히려 평생 박 교수를 감싸고 믿어오는 처지가 아니었던가. 민속악 계보에 뿌리를 둔 박 교수의 음악 활동을 정악 계통의 인사들이 사시로 볼 때마다 극구 옹호해 왔을 뿐만 아니라, 언젠가 한국일보에서 국악계의 유망주를 소개해 달라고 할 때도 수백 명 신진들 중에서 박범훈을 천거하여 문화면 전면 기사로 소개시킨 추천자도 누구인데, 얼토당토 않게 그를 비방하고 다닌다니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나는 시정의 장삼이사도 아닌 대학 강단의 교육자가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어느 해 연초 KBS 국악관현악단 신년음악회 때 우연히 만난 자리에서 그를 조용히 불러 분명한 사리로 나무라고 훈계한 적이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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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6: 기인처럼 살다 간 풍류객 연정, 임윤수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하늘이 내린 천품이란 인간의 한계 밖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다. 여기 천품대로 바람 따라 물결 따라 천하를 기인처럼 주유하며 살다 간 한 시대의 풍류객이 있다. 연정燕亭 임윤수林允洙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그분의 정체를 제대로 표현할 어휘가 없어서 풍류객이라는 말을 붙여 봤지만, 이 역시 정확한 낱말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연정 선생의 실체는 가변적이며 변화무쌍이다. 붉다 싶으면 붉게 보이고 푸르다 싶으면 푸르게 보인다. 국악계에 남긴 업적을 보면 국악인이고, 사시사철 전국의 사찰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기거하던 행적을 보면 영락없는 재가승에 분명했다. 연정 선생은 십 대 후반에 경주 율방에서 당시 신은휴申恩休 사범에게 거문고 풍류를 배웠다고 한다. 이미 감수성이 예민한 십 대 때 국악의 속멋을 몸과 가슴으로 익힌 셈이다. 이것이 하나의 문화적 DNA가 되어 평생을 국악계와 인연을 맺으며 즐비한 업적들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그분의 업적 중에서 대표적인 것을 하나만 꼽으라면, 나는 1981년 충남 대전에 대전시립연정국악연구원을 설립한 일이라고 하겠다. 국악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중부지방에 어엿한 시립국악단을 창설한 것이다. 연정 선생의 업적이나 위상이 여간하지 않고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더더구나 공공적인 시립기관에 본인의 호인 연정燕亭을 앞세워 단체명을 정할 정도로 당시 그분의 위치는 예사롭지 않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연정 선생을 자주 뵙고 오랜 기간 인연을 이어왔다. 특히 문화예술계에 몸담고 있던 그분의 아드님 임동지 씨와 자별하게 교유해 오던 덕택이기도 하다. 아무튼 연정 선생 역시 내 또래 동년배들과는 달리 나를 각별히 배려하며 챙겨 주셨다. 80년대 초였다. 연정 선생이 이끌던 대전연정국악단이 일본 도쿄 공연을 떠났다. 당시 지방의 신생 연주단이 감히 해외 연주를 도모한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는데, 연정 선생은 그것을 결행했다. 그때 선생은 단원도 아닌 나를 특별히 초청하여 일본 공연에 동행시켰다. 지금도 기억에 새로운 것은, 공연 때 단장으로서 집박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연정 선생은 단원들의 연주가 시답잖다 싶었는지 느닷없이 프로그램에도 없는 시조 한 수를 무대에 나가서 여봐란듯이 불러제꼈다. 이처럼 선생은 원효대사의 무애가無碍歌를 실천하듯 세상사에 구애받는 것을 싫어했고 매사를 훨훨 털며 구름처럼 바람처럼 소요하며 살았다. 법정 스님에 앞서 무소유를 실천한 분도 선생이지 싶다. 서예건 그림이건 들어오는 족족 남에게 주어 버리며 평생을 공수래공수거로 일관했다. 그리고 공자가 칠십에 깨달았다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처럼 천지만물과 교유하며 마음 가는 대로 풍류랑風流郞처럼 한 세상을 일관했다. 여기 그분의 기질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재미있는 인사법을 하나 소개한다. 거침없고 활달한 성품 그대로 연정 선생은 반가운 이들을 만나면 그것부터 움켜잡는다. 여기 ‘그것’이란 남자의 그 소중한 물건을 말한다. 이 같은 인사는 물론 잘 알고 신임해 오는 후학들에게만 한다. 그분 특유의 너털웃음과 함께 "그동안 잘 있었는지 어디 한 번 만져 보자꾸나”라며 이쪽의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날렵하게 그곳을 잡으며 자별한 답례를 보낸다. 교수건 이름난 연주가건 내 또래의 연배 중에서 그분에게 ‘그곳’을 잡혀 보지 않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연정에게 그곳을 잡혀 봐야 비로소 국악계의 괜찮은 인물로 인정받는 격이 되는 셈이다. 요즘 말로 하면 일종의 인증 샷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연정 선생에게 한 번도 그곳을 잡혀 보지 못했다. 아예 깜냥이 안 된다 싶어서 그랬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아무리 깜냥을 키워 본들 고인이 되신 연정 선생께 ‘인증 샷’을 받기는 다 틀린 일이니 말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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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5: 국악교육에 헌신한 선견지명, 박귀희 명창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향사 박귀희 선생은 가야고 병창의 명인이요 명창으로 일세를 풍미한 분이다. 오태석을 중심으로 싹이 돋던 가야고 병창을 더욱 가꾸고 보듬어서 어엿한 전통음악의 한 장르로 반석 위에 올린 분이 곧 박귀희 선생이다. 헌신적으로 가꿔 온 병창 음악이 튼실하게 자리를 잡아가자 향사 선생은 촌각을 아껴야 할만큼 분주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출연, 혹은 일반 무대공연으로 동분서주하며 독보적인 명창 생활로 쉴 틈이 없었다. 이 같은 치열한 연주 생활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일반인들에게 비친 향사의 이미지는 아름다운 한복의 섬섬옥수로 가야고 병창을 하는 순수한 예인의 상으로만 각인되어 있기 일쑤였다. 하지만 향사의 시대적 진면목은 무대예술적인 인기나 인상에만 있지 않다. 어쩌면 그분의 국악사적 공적이라면 대중적 외형에 있지 않고 시대를 꿰뚫어 본 내면적 역사관에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악교육의 문제에 심혈을 기울인 향사의 개척자적인 선견지명이 곧 그것이다. 광복 이후에 민족의 앞날과 국가 장래를 생각했던 우국지사나 선지자들이 교육문제에 집착했듯이, 향사 선생은 일찍이 국악교육 문제에 깊은 뜻을 두었다. 서구 문명의 밀물 속에서 국악을 살려내고 민족 고래의 정서를 지켜내는 일은 교육밖에 없다는 투철한 철학을 신조로 삼고 몸소 궁행한 분이 다름 아닌 향사 선생이다. 1950년대 말엽부터 선생은 국악교육기관의 설립을 추진하는 중심부에 섰다. 내부적으로는 당시 민속악계의 어른이었던 박헌봉 선생, 또한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지기였던 김소희 명창으로 팀을 이루고, 외부적으로는 김은호 화백을 비롯한 이병각, 문용희 등 각계 명사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이끌어 내며 국악학교 설립에 매진했다. 향사 특유의 추진력과 친화력과 결단성은 급기야 국악예술학교의 개창을 이뤄 내는 중심 역할을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남산 위 허름한 건물에서 출발한 국악예술학교는 실개천이 흘러서 장강을 이루듯, 이제는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더불어 한국 국악교육계의 큰 갈래를 담당해 가는 양대 산맥의 하나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박범훈 교수가 이사장으로 있고, 홍윤식 박사가 교장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오늘의 국악예술중고등학교가 바로 그것이다. 향사 박귀희 선생의 역사적 평가는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 여느 예술가들은 무대 활동과 대중적 인기에 매몰되고 자족한 반면, 향사 선생은 예술 활동과 더불어 교육의 중요성을 선각하고 그 씨앗을 몸소 뿌리고 가꿔 냈다. 향사의 남다른 위대성은 바로 이같이 남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남보다 앞서 시대를 읽고 자신의 비전과 신념을 단호하게 실천해 온 점이라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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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4: 사물놀이로 세계를 재패한 선구자, 김덕수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1978년의 일이다. 한국 음악계의 지평에 번쩍 섬광이 하나 일었다. 신천지를 여는 개벽開闢의 신호였다. 개벽의 섬광과 함께 물방울이 하나 생기고 파란 새싹이 돋았다. 물방울은 모여 실개천이 되고 실개천이 모여 강물이 되었으며, 강물은 흘러 오대양을 이루며 도도한 파도를 만들었다. 새싹은 자라 초목이 되고 초목은 자라 우람한 거목이 되었으며, 거목은 밀림을 만들며 지구촌을 온통 싱그러운 초록 포장으로 뒤덮었다. 바로 사물놀이가 걸어온 ‘전설’같은 족적이요 역사다. 사물놀이가 고고성呱呱聲을 울린 곳은 서울 원서동의 ‘공간사랑’에서였다. 당시 공간사랑 소극장에서는 작지만 문화적 의미가 큰 행사들이 많이 열렸었다. 특히 무심한 사람들이 지나쳐 버린 전통문화를 수없이 발굴하고 기획하여 세상에 알린 공적은 한국문화사에 크게 남을 일이다. 앞서가는 문화 안목에다 전통과 개성을 존숭尊崇하던 고 김수근 건축가와 한창기 문화 딜레탕트dilettante의 시대 의식 덕택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민속학자 심우성이 작명했다고 하는 사물놀이는 출생과 함께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켜갔다. 잘 알다시피 사물놀이란 사물四物, 즉 네 가지 타악기를 가지고 신명나게 한판 펼쳐보는 공연물이다. 원래 사물악기는 농악農樂의 기본 악기다. 농악은 멀리 상고시대부터 한국인들의 삶과 고락을 함께해 왔다. 그만큼 역사도 깊고 환기시키는 감성의 스펙트럼도 다채롭다. 농악은 요즘 유행어로 말하면 융복합적인 마당놀이였다. 음악이 있고 춤사위가 있고 기예가 있다. 특히 농악은 리듬의 보고寶庫다. 한국인의 핏줄 속에 흐르는 리듬감은 다 그 속에 있다. 그래서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깃발을 앞세운 농악대가 저만큼 동구 밖에서 징소리를 울리며 다가오면, 이내 온 동리는 신바람의 파노라마로 술렁대기 일쑤였다. 그 후 시대는 상전벽해로 바뀌었다. 농본사회가 산업사회로, 농촌형 환경이 도시형 환경으로 환골탈태됐다. 농악놀이가 설 자리가 없어졌다. 마을마다 있었던 널찍한 마당마저 사라졌다. 전래의 야외 마당놀이가 고사枯死해 갔다. 궁여지책의 대안이 산업사회가 제공한 도시의 실내무대였다. 농악계도 지혜를 짜냈다. 농악의 핵심 악기만으로 음향의 균형을 잡아 사중주의 틀을 짠 것이다. 그것이 곧 오늘의 사물놀이였다. 사물놀이는 출생 당시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우레 같은 음향의 홍수가 듣는 이를 압도했고, 용출湧出하는 에너지는 고목에도 생기가 돋을 듯했다. 이 같은 이단아적인 음향덩이tone cluster는 당시 시대 상황과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60, 70년대는 전통음악의 수난시대였대도 과언이 아니었다. 서구 음악에 밀리고 치이며 우리 음악은 대중의 안중에 없었다. 국악은 느리고 무기력해서 싫다는 것이 일반인들의 핑계였다. 이 같은 통념을 일신시킨 지렛대가 다름 아닌 사물음악이었다. 전통음악 중에도 발랄하고 싱그러운 음악이 있음을 확실하게 주지시켰다. 자연히 대중들의 관심도 높아져 갔다. 농본사회 때 각인된 아련한 추억의 향수와 함께. 사물의 등장 시기는 유신 말기였다. 온 국민이 속앓이하던 울분의 시기였다. 해머로 폐차를 두들겨 부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이때 사물이 적시에 등장했다. 무대에서 꽹과리며 북이며 장고며 징을 땀을 뻘뻘 흘리며 두들겨대는 사물놀이는 일시에 시대적 분노를 날려 버렸다. 리듬이 어떻고 가락이 어떻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지축을 울리는 음향과 신들린 듯 두들겨대는 연주자들의 모습만 봐도 스트레스가 풀렸다. 그들의 한판 놀이에는 십 년 체증이 뚫리고 시대적 공분이 희석됐다. 그러고 보면 사물놀이야말로 음악이되 음악의 범주를 뛰어넘는 다중적 의미가 응축된 역사적 산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막중한 의의를 지닌 사물음악의 중심에 바로 김덕수라는 타고난 재질의 장인匠人이 있다. 알다시피 김덕수는 농악 집안의 후손이다. 농악적인 정서와 리듬감이 골수에 배어 있다. 게다가 유년기부터 무동舞童 역을 하며 놀이판을 누볐다. 뒤늦게 기교만을 익혀서 활동하는 연주가들과는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감동적인 예술이란 숙달된 기교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몸 속에서 솟아나는 감과 끼가 받쳐 줘야 한다. 한마디로 기량 이전에 예술적인 유전질, 즉 토양이 비옥해야 한다. 김덕수는 그들을 두루 갖춘 명인이다. 거기에 남다른 추진력과 기획력도 돋보이는 인재다. 그러기에 사물음악 오늘의 튼실한 결실을 창출해 낼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곧 이변이었다. 놀람이요 감동이었다. 명맥이 끊겨 가던 농악이 사물놀이로 중흥되며 지구촌의 음악으로 확산되었으니 세상사 새옹지마랄까, 진실로 뭉클한 감격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새로운 문화 조류 하나를 조성해 낸 주역이 김덕수다. 마치 서양 고전·낭만시대의 현악사중주처럼, 한국의 타악사중주percussion quartet 음악을 국내는 물론 세계 만방에 ‘한류’의 효시를 이루며 확산시켜 간 이가 바로 김덕수다. 이 같은 관점에서도 김덕수는 문화사적으로 깊이 조명받을 인물이 아닐 수 없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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