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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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7) <br> 차지언 명무의 '황해도 화관무'화관무 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된 '화관무'의 계보를 살피면, 대일항쟁기 해주와 개성 권번의 사범 민천식에 의해 완성된 춤이다. 황해도 해주지역을 거점으로 전승된 화관무는 춤의 기원을 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신을 맞이하며 국가의 안녕과 민족의 영원을 염원하던 제의의 의식무인 원진무로 보며, 춤의 양식적 발전은 궁중 유입이 잦았던 해주 관기들이 그들이 향유한 춤에 궁중의 형식을 더해 상연하며 전개되었고, 지금의 형식으로 완성되었다. 민천식의 화관무는 해서지역 특색을 담은 교방춤에 구조화된 궁중춤의 양식과 탈춤의 춤사위까지 공존한다. 무게 있는 호흡을 바탕으로 정갈하고 귀품 있는 춤사위와 호방한 한삼뿌림, 유연한 몸놀림을 결합하여 완성된 민천식 화관무는 화관을 쓴 화려한 복색과 한삼을 활용한 춤사위의 어울림으로 지역을 대표하는 민속춤으로 정립된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하하여 인천에 정착한 민천식은 인천국악원을 설립하여 해서지역 전통예술 전승과 복원에 앞장서며 후계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로 인해 인천지역 전통춤 전승의 토대가 되었으며, 해서탈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제자들도 국가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해서지역 예술 전승의 뿌리가 되었다. 그 중 유일하게 민천식 전통춤의 계보를 이어 온 김나연이 그 전승의 의지가 높이 평가되어 민천식의 화관무로 2011년 예능보유자 지정이 되었다. 김나연의 후계자 차지언은 모친인 김나연에 의해 복원된 민천식의 전통춤들을 체계화하고 학술 연구를 통해 역사성과 예술성을 입증하며 민천식 춤의 맥을 계승한 공로를 인정받아 2021년 '황해도 화관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차지언 '황해도 화관무' 예능보유자 차지언은 다양한 공연 활동을 추진하며 전통춤의 복원과 계승에 주력한다. 더불어 재해석을 통한 재창조와 의미와 사상에 기반한 창작작업 등으로 관객과 소통하며 전통춤을 알리고자 다양한 공연 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2022년 '이북5도무형문화재연합회' 이사장으로 임명되어 이북5도 무형문화재의 전승 환경 개선과 위상을 제고(提高)하는 데에 노력하고 있다. 차지언(車知彦) 1969년 인천출생 현)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 화관무 예능보유자 현)나연무용단 대표 현)이북5도무형문화재연합회 이사장 현)한양대학교 에리카캠퍼스 무용예술학과 강사 현)(사)대한무용협회 학술분과위원장 현)(사)한국전통춤협회 인천광역시 지부장 현)(사)한국무용학회 이사 현)(사)무용역사기록학회 이사 현)(사)보훈무용예술협회 이사 현)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 이사 현)융복합 공연예술축제 PADAF 조직위원 숙명여자대학교 졸업 무용학학사 춘천교육대학교교육대학원 교육학석사 상명대학교대학원 예술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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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위원장, "실제적 아리랑고개는 문경새재"인류무형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 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위원장 이만유)에서는 문경시의 지원을 받아 '아리랑도시 문경'의 정체성과 위상 확립 및 '문경새재아리랑'의 저변 확대와 대중화에 기여하기 위해 '2021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개설, 운영하고 있다. 지난 코로나 기간에서는 방역상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방역지침을 지키며 문경을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문경새재아리랑 알리기와 아직 문경새재아리랑을 제대로 알고 부르지 못하는 시민들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시행해 오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이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는 사실과 아리랑사에서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전승, 보급하지 못하였고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에 비교해 전 국민은 물론 시민들에게도 인지도가 낮은 상황이다. 특히 지난 2020년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만들어(작사, 작곡) 발표한 ‘코로나아리랑’을 함께 교육하고 불러온 아리랑으로써 코로나19의 방역을 계도하고 코로나를 극복할 수 있게 노력했다는 점은 주목해야 한다. Q: 지난 해를 회고하신다면? A: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2017년 창립된 이후 꾸준히 참여하고 추진해 온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관광지 1위 ‘문경새재' 등 유명 관광지에서 개최하여 총 5회에 걸쳐 921명이 함께 전통 춤사위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참석자들은 단순 관광객을 넘어 ‘문경새재아리랑’을 전파 확산하는 전도사이면서 아리랑홍보대사로서 역할을 하게 한 것입니다. 특히 지난해 세 번째 ‘찾아가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을 사할린동포와 함께 한 것입니다. 사할린 귀국 동포 100여 명이 새 둥지를 틀어 살고 계시는 경기도 양주시 율정마을을 찾아가 디아스포라(이산)의 아픔을 아리랑으로 풀어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난 연말에 (주)국악신문이 주관하여 추진한 ‘사할린 동포 청소년 장학금 지원사업’에 우리가 작지만 100만 원을 후원하여 아도위 42명 모두 뜨거운 동포애를 나눈 기억입니다.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간 조선인 중 68 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는 것을 듣고 너무나 가슴이 아펐습니다. 처음 만나서 손잡고 아리랑을 부르면서 가슴이 벅차 올랐습니다. 아리랑으로 70년 동안 겪으신 이산의 아픔이 치유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날 함께한 행사가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기사가 2번이나 나간 것을 받아 보고 진정한 동포애를 느꼈습니다. Q: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A: 궁극적인 목적은 같지만. 기존하는 각 지역의 ‘아리랑보존회’와는 조금 다른 성격을 지닌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는 아리랑의 주인이며, 아리랑을 향유하는 주체(민초, 백성, 국민)인 순수 민간인들로 구성된 국내 유일 자발적 전승단체입니다. ‘문경새재아리랑’은 역사적, 문화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고, 많은 아리랑에 영향을 주고 여러 아리랑을 파생시켰으면서도 정선, 진도, 밀양 등 유명 아리랑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2012. 12. 05.),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 지정(2015. 09. 22.),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문경, 세상의 모든 아리랑을 품다”라는 주제로 ‘아리랑 도시 문경’을 선포함(2015. 12. 13.)에 이르러게 됨에 이에 호응하여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2017. 06. 29)를 창립하여 아리랑에 대한 조사, 연구, 발굴, 보존, 전승, 보급에 역점을 두고 교육과 공연, 아리랑 관련 콘텐츠 개발, 학술발표회 등에 힘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시민위원회의 활동 목표는 모든 아리랑을 품으면서 ‘근대 아리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문경새재아리랑’을 대한민국 5천만 국민이 모두 알고 즐겨 부를 수 있도록 하며, 아리랑고개가 우리 민족의 심성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경새재’가 ‘아리랑고개’임을 인식하게 하여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가 될 때까지 진력할 것이며 그 상징으로 꺼지지 않는 ‘아리랑의 불꽃’이 영원히 타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Q: 문경시 보호문화유산 문경새재아리랑 제정 이후의 변화와 기대는? A: 2022년 ‘문경새재아리랑(송옥자)’이 ‘문경시보호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아리랑도시 문경’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환영합니다. 아직은 보호문화유산 지정 이전이나 이후의 변화는 희박합니다. 한가지 바램은 전수자, 이수자 등은 문경지역에 뿌리를 둔 문경지역 정서를 지닌 사람이 선정되어 토속민요의 전통성을 이어갔으면 합니다. Q: 문경새재아리랑축제의 2년 연속 휴면 상태에 대해? 타개책은 무엇인가요? A: 우선 선결과제로 ‘대동, 상생, 저항’이라는 아리랑 3대정신을 망각하고 아리랑이란 이름 앞에 아리랑을 욕되게 하고 아리랑 관련인들의 상호 화합을 저해하고 분쟁과 편 가르기를 일삼는 사람이 아리랑을 주무르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또 내외부 인사들이 그런 류의 사람과 뇌동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지역 내 아리랑 관련인 모두 하나 되길 기원해 봅니다. 문경시는 2015년 ‘아리랑도시 문경’을 선포하는 등 적극적인 사업을 추진하여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아직도 관에서는 제한적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아도위는 문경시 일원 중 유명 관광지, 휴식처 등 시민, 관광객이 즐겨 찾는 곳으로 직접 찾아가서 문경새새아리랑 이론 교육과 노래 교습, 다듬이 체험 등으로 누구나 직접 참여하고 부를 수 있는 마당을 펼쳐 문경새재아리랑을 보급하고 있다. ‘문경새재아리랑축제’가 2년 연속 개최되지 못함의 원인과 대책은 이렇습니다. 첫째, 내분, 편 가르기, 내 아니면 안 된다는 잘못된 우월 의식, 분쟁 조성자의 망동입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아리랑 관련인들의‘대동, 상생, 저항’이란 아리랑 정신의 회복과 의식의 변화가 필요합니다. 둘째, 관련 기관과 리더가 아리랑에 대한 가치와 인식의 부족함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또 문화예술 분야의 장르 편향이 아주 심합니다. 예를 들면 축제의 공간에서 트롯트에 치중하고 아리랑은 소홀히 하는 것이지요. 이제 아리랑의 가치 회복과 리더와 관련자들이 균형감각을 유지하고 예산의 편중 지양과 아리랑축제의 쥐꼬리 예산을 해소해야 합니다. 셋째, 아리랑축제 주관 단체를 한 곳에 고정하여 안일, 나태로 변화를 추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정체성과 전통을 지키면서 시대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이 미흡한 것도 문제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축제 주관단체를 공모제로 전환하고 예산하마인 셀럽형 축제를 지양하고, 주민이 주체가 되는 축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내 공연 위주의 축제에서 야외 공연(실제적 아리랑고개=문경새재)으로 전환해야 하고, 지역 내 모든 아리랑 단체 및 전문가가 모인 ‘아리랑축제추진위원회’를 구성해야 합니다. Q: 귀 단체의 새해 역점 사업은? A: 변화를 추구하면서 ‘찾아가는 아리랑학교’를 지속해서 추진할 것입니다. 그 일환으로 울릉도와 독도를 찾아가서 ‘독도는 한국 땅’이다. ‘근대 아리랑 시원'은 문경새재아리랑이다.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란 깃발 아래 '제3회 문경새재아리랑 공연과 문경아리랑 알리기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독도를 가는 여정에서 거리에서 '문경새재아리랑 버스킹'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전국 지역 아리랑답사, 전국아리랑경창대회 참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참가는 계속 이어지는 아도위의 여정입니다. 아도위 자체 사업의 일환으로 문경새재아리랑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알리기 위해 ‘관광객과 함께하는 '아리랑 버스킹' 공연을 관광 시즌에 문경새재에서 열 계획입니다. 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통해 회원들의 친목 도모와 역량 강화를 더욱 강화하겠습니다. Q: 기타 하시고 싶은 말씀은? A: 우리 아도위는 ’문경새재는 실제적 아리랑고개’라는 역사적 사실과 명실공히 ‘아리랑 도시 문경’이란 이름이 빛나기를 바랄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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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5)만주나 벌판에 솥 때우는 저 영감 우리 내우야 정 떨어진 것은 때울 수가 없느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주게 인제아리랑 한얼거사 감상 사뭇 설레고 가슴 달뜨던 사랑도 세월이 가면서 무뎌지고 서먹해진다. 세월의 흐름에 감정의 모서리가 닳아 긴장감이 사라지고 바람도 색이 바랬다. 친한 관계일수록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니, 매사 익숙함은 타성을 부르기 때문이다. 없으면 죽고 못 살 것 같던 부부도 그 가까움으로 해서 관계가 뜨악해지는 것이다. 우리 내외의 정도 떨어진지 오래. 늙어 가면서 젊어서의 사랑이 더욱 그립다. 땜장이 할아버지의 손을 빌려서라도 소원해진 사랑을 잇고 싶다. *거사(居士): 벼슬하지 않고 은거하여 한가하게 지내는 사람을 말하며, 같은 의미로 처사(處士), 초부(樵夫), 어부(漁夫), 산인(散人) 등이 있다. 출가하지 않았으면서 법명을 가진 재가불자를 일컫기도 한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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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창관의 ‘국악-신반’ <17>윤은화 정규 2집 <Fe> 윤은화 연주자의 2번째 정규음반이다. 윤은화는 양금연주자이며 양금제작자, 작곡가, 교육자로서 왕성한 대외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개량하여 만든 양금으로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다. 또 국내 유일한 전자양금으로 루핑기법과 더불어 한국 전통음악과 현대음악의 균형 및 조화를 지향하고 양금을 국내는 물론 세계에 알리는 데에 계속 이바지하고 있다. 이번 음반은 <Fe>, 철이다. 철을 주재료로 사용한 악기를 소재로 만든 작품집이다. 비, 바람, 숲 등 자연에서 받은 다양한 영감을 토대로 곡을 창작하였으며 양금, 운라, 핸드팬, Udu드럼 악기를 사용하고 있다. 주로 연주자의 작곡.연주로 ‘갈색여름’, ‘족장들의 춤’ 등 모두 8곡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 ‘개량양금산조’도 있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단모리, 휘모리로 구성된 산조로 개량양금만이 보여줄 수 있는 넓은 음역을 이용하여 풍성한 산조를 들려주고 있다. 빠르고 리드미컬한 화려한 연주로 산조를 더욱 화려하게 만들어 준다. 처음 선보이는 양금산조 음반이다. 일청을 권한다. 양금이 독주 악기로써 더 많이 활용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시도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된 음반이다. 연주자의 포스를 느낄 수 있다. 포항공대 정재훈 교수 <포항 AI 풍류> 포항공대 정재훈 교수가 인공지능을 이용하여 제작한 풍류음반이다. 그래서 음반명이 <포항 AI 풍류>이다. 부제는 ‘위상수학과 인공지능으로 만든 우리음악, 도드리’이다. 필자가 이해한 바로는 AI에게 ‘밑도드리’를 교육시켜 다양한 형태의 ‘밑도드리’를 생성하게 한다. Algorithm 2 Sequence 5, Scale 5, Scale 6 등으로 생성된 오선보 악보를 연주에 맞게 편곡을 한 후 연주하는 것이다. 음반의 첫곡으로 풍류 연구의 시점이 되는 ‘해금 밑도드리’ 원곡을 김정림 연주자가 연주한다. Algorithm 2 Sequence 5라는 ‘밑도드리’는 해금 김정림, 풍류가야금 송영숙, 양금 민혜인의 3중주이다. Scale 6라는 ‘밑도드리’는 해금 김정림, 기타 김중회의 2중주이다. 모두 6곡이 수록되어 있다. AI가 생성했지만, AI가 연주가 ‘밑도드리’가 아니고 사람이 연주한 것이다. 일반 연주에 비해 매우 정형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해설서를 열심히 읽고 감상하는 하는 것이 필요하다. 2023 국악창작곡 개발 <제17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 국악방송이 주관하는 2023 국악창작곡 개발 <제17회 21C 한국음악프로젝트>가 지난 9월 7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되었다. 매년 출반하는 그 결과물이다. 21C 한국음악프로젝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고 재단법인 국악방송이 주관, 국립국악원이 후원하는 창작 국악곡 개발 경연대회로 많은 국악스타들을 배출해 왔다. 국내외에 활발하게 활동을 펼치는 신예 국악인들의 등용문이다. 2023년에는 77개 팀이 지원하여 10개 팀이 겨룬 경연대회이다. 음반에는 대상을 수상한 3인조 앙상블 공상명월이 연주한 ‘순라꼭질’이 차지하였다. 거문고와 다양한 타악기로 재즈와 국악의 다양한 시김새, 리드미컬한 전통장단의 대비를 통해 모던한 음악을 연주했다고 한다. 금상은 4인조 앙상블 풍류공작소가 연주.노래한 ‘나리소서’가 받았다. 이 외에도 은상 2개, 동상 2개, 장려상 4개 등 모두 10개 부분의 수장 자를 배출하였다. 해설서에는 10개 팀의 설명과 곡 설명이 영어로도 수록되어 있다. 비매품이지만, 그 관련 영상은 Youtube에서 감상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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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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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6)<br> 청자용머리편즐겁고 신나고 안복 또한 이규진(편고재 주인) 2024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았다,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도 극대화 되는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맘때만 되면 작심삼일로 공수표를 남발할망정 누구나 한 번 쫌은 일 년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각오를 새롭게 다짐해 보기도 한다. 더구나 금년의 갑진(甲辰)은 육십간지의 41번째로 푸른색의 갑(甲)과 용을 의미하는 진(辰)이 만나 청룡(靑龍)의 해가 되다보니 그 어느 때보다도 꿈과 희망에 가슴 부푼 한 해의 시작을 알리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용은 신화와 전설, 무속과 민속, 종교와 풍습, 역사와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연관을 맺고 있다보니 그 도상(圖像)도 다양한 편이다. 그런 가운데 용은 도자기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특히 조선 백자에서 흔히 보이고 있는 청화로 그려진 것은 그 자체로 청룡이다 보니 갑진년 새해에 꼭 어울리는 도상이 아닐까 생각된다. 하지만 도자기에서 용은 백자에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국보 제61호로 용의 머리와 물고기의 몸을 가진 청자어룡주전자(靑磁魚龍形注子)와 국보 제259호로 몸통에 용무늬를 새기고 있는 분청사기구름용무늬항아리(粉靑沙器象嵌龍文立壺)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청자나 분청에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청자용머리편(靑磁龍頭片)이 내게 와 있는지는 꽤 오래 되었다. 그러면서도 늘 궁금했던 것은 무슨 용도로 만들어진 것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었다. 몸체는 없고 머리만 남아 있다 보니 아무리 상상력을 동원해 보아도 어디에 어떻게 붙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기존에 알려진 도자기의 용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 보이기 때문이라고나 할까. 쩍 벌어진 입과 날카로운 잇빨, 부릅뜬 눈과 작은 귀, 그리고 그 사이로 뻗어 있는 쁠 등 용머리의 모습은 확연하지만 뒤로 이어진 부분들이 잘려 나가 전체적인 윤곽을 짐작해 보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비색과 남아 있는 형태의 정교함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청자가 아닌 명품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자용머리편, 청자도 따지고 보면 푸른색이고 보면 청자용머리편 또한 청룡(靑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갑진년 청룡의 해에 청룡의 청자용머리편을 소개하는 뜻은 세상의 모든 분들, 특히 도자기를 사랑하고 애호하는 모든 분들이 이 세상의 온갖 시름을 내려놓고 금년 한 해만큼은 즐겁고 신나고 안복(安福) 또한 넘치게 누릴 수 있는 그런 날들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뜻에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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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국악협회 이용상 이사장, “회원 국외 공연 지원, 돕겠다”㈜국악신문은 신년기획으로 ‘국악 단체장에게 듣다’라는 난을 마련하였다. 새해는 국악계가 코로나 이전으로 회복이 된 데다 국악진흥법의 시행으로 어느 해 보다도 기대가 큰 상황이다. 이에 즈음하여 전국 국악단체장들의 새해 인사 겸 주요 현안을 짚어 공유함으로써 상호 동력을 추동하고자 기획하였다. 첫 회는 (사)한국국악협회 이용상 이사장의 인터뷰를 싣는다. 코로나로 움츠렸던 국악인들의 해외공연 기회를 확충하는 데 기여하겠다는 메세이지를 전했다. 이번 기획에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부탁드린다.(편집자註) 특집부: 바쁘셨지요. 단체장이라서 행사도 많고 지부, 지회 행사에도 참석해야 하니까요? 지난해를 회고해 주시지요? 이사장: 예, ‘대한민국국악제’, ‘대한민국예술축전’, ‘전국학생국악경연대회’, ‘전국국악대전’ 같은 큰 행사가 있었습니다. 또 예술단원 실기 운영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무국이 목동 예총 건물에서 종로 3가 국악로로 다시 이사를 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정부 보조금과 기업 협찬금 확보를 위해 바쁘게 뛰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여건상 협회 사무국은 목동 예총 건물로 가고, 종로 국악로에는 분원을 두려고 합니다. 국악로를 지킨다는 생각에서입니다. 특집부: 우선 최근 떠도는 문제부터 짚겠습니다. 24년이 임기 만료가 아니냐는 얘기입니다. 어떤 상황인가요? 지난번 선거가 보궐선거였던 건가요? 이사장: 큰 오해입니다. 저를 당선시킨 선거는 선거무효로 새로운 제27대 이사장을 뽑은 선거를 한 것입니다. 절대 잔여임기를 위한 보궐선거가 아니었습니다. 법원 등기에 4월 21일부터 대표권은 이용상 이사장에만 있다고 되어있고, 법인설립허가증, 고유번호증 등의 기재 내용도 이를 반영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제27대 이용상 이사장의 임기는 분명히 2022년 4월 21일부터 4년이라는 사실입니다. 세 곳의 법무법인으로부터 유권해석도 받아 놓은 상태입니다. 소문으로 들었다면 낭설입니다. 꼭 시정하여 주십시오. 특집부: 취임 이전의 송사에 이어 지금도 같은 처지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소송 상황은 어떤가요? 이사장: 예, 우선 회원 여러분께 송구하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매듭을 지어야 하는데, 상대측이 실익이 없는데도 계속 소송을 걸어 괴롭히고 있네요. 지난 소송 건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현재의 소송 건은 2022년 4월 21일, 제가 당선한 임시총회 결의에 대해 무효확인 소송을 낸 것입니다. 상대의 주장은 자격이 없는 대의원들로 선거를 개최했으니 무효가 아니냐는 것이고, 또 제가 국악협회 정회원이 아니고 준회원이니 후보 자격이 없었는데 당선이 된 것 아니냐는 관리 규정 위반을 들어 억지를 부리는 것입니다. 또 제가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전통예술진흥회’의 사직 시점을 갖고 유사 단체장 겸직을 한 것이라고 문제를 삼은 것입니다. 앞에 것도 그렇지만 이 건은 판례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사직은 사표 수리 여부와 관계없이 사직원을 접수한 시점을 그만둔 시점으로 간주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있습니다. 길게 말씀드릴 필요 없이 이제 3월 8일이며 결과가 나오니까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승소를 자신합니다. 전혀 개의치 않고 새해 계획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특집부: 이미 국악신문이 몇 차례 기사화 한 바가 있는데, 국악진흥법 통과 이후 시행령 마련을 위한 협회의 준비 상황은 어떤가요? 이사장: 이 문제는 참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래서 우리 협회는 물론 국회, 문광부, 문화재청, 국립국악원 그리고 새로 결성된 한국국악진흥예술연합 등이 좋은 안을 내기 위해 고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협회는 ‘국악진흥법 발전위원회(위원장 박상진)’라는 기구를 결성하여 전문가 TF팀을 가동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해 11월 8일에는 제5차 회의를 개최하고, 22차까지 진행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각각 10명의 고문과 자문위원을 두어 활발한 토론을 통해 정책안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예정하기로는 늦어도 1월 안에 국회에서 많은 전문가들과 함께 그동안 마련한 안을 갖고 정책토론을 펼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전 국악인에게 골고루 혜택이 돌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악의 날’ 제정도 중요합니다. 이미 우리가 낸 보도자료에도 썼습니다만 우리 위원회에서는 정악계와 민속음악계가 모두 동의할 수 있는 고려한 의미 있는 날로 정해져야 한다는 원칙에서 각계의 의견을 수렴하고 있습니다. 국회 정책토론회에서 윤곽을 보일 것입니다. 특집부: 새해 24년 역점 사업을 꼽는다면 어떤 일들이 우선인가요? 이사장: 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최하는 학교예술강사 지원사업입니다. 안타깝게도 협회가 2년간 혼란을 겪는 시기 모 대학에 빼앗긴 ‘잃어버린 예술강사 지원사업’을 다시 확보해야 합니다. 반드시 회복시켜서 주관 단체로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는 국악협회 회원 전용 공연 공간 마련입니다. 이 문제는 서울시 전 시장 때부터 논의해 온 것으로 아직은 협의 단계입니다만 다각도로 노력하여 결과를 내려고 합니다. 구체적인 장소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세 번째는 국악진흥법 시행령에 국악협회 안이 반영되어 전국 국악인들에게 혜택이 골고루 전해지도록 할 예정입니다. 지난해 문체부 장관과 국악인들의 대화 모임에서도 제가 이 시행안 마련에 국악협회가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료를 통해 전했습니다. 이 시행령에 반영될 수 있도록 안(案)을 마련하여 협회가 전문가위원회를 결성하여 정책토론회를 해 오고 있으며, 곧 국회에서 그동안 마련한 안을 갖고 최종 토론회를 개최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네 번째는 국악협회 주최의 ‘대한민국 국악제를 권역별로 나눠 개최하려고 합니다. 서울권, 전라권, 영남권, 충청권, 강원권으로 개최하여 지역 국악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생각입니다. 물론 예산의 뒷받침이 문제입니다만, 보조금을 받는 전문단체가 되어 여러 기업과 MOU 등을 통해 관계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특집부: 국악인들의 해외 활동 지원 사업비를 확보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어떤 경로와 목적으로 확보하셨고, 그 목적 사업 수행의 구체적인 계획은 무엇인지요. 이사장: 그동안 회원들을 만나 확인한 것은 코로나로 인해서 해외 공연이 막힌 것을 이제는 가야 하지 않는냐는 호소였어요. 지난 해 후반기부터 수 없이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이제 활로를 터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협회 관심 사업을 삼아 추진했습니다. 바로 회원들의 국외 공연입니다. 그래서 후반기 들어 제가 관계 기관에 호소를 했지요. 그 결과 일단 첫 해외공연 목적 기금으로 3억 정도를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 예산이 확정되리라는 소식을 듣고부터 조사를 했더니, 가장 많이 공연을 가고 싶어 하는 나라가 일본이고, 다음이 대만이더라고요. 그래서 현재 예상하기로는 첫 공연으로 일본 2개 도시와 대만 공연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국가 예산을 쓰는 만치 꼼꼼하게 준비해서 성과를 거두려고 합니다. 아마 이 두 나라 공연 성과에 따라서는 후반기 예산을 확대하여 받을 수도 있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공연 내용은 협찬금 확보를 하여 풍성하게 개최할 예정입니다. 참여 국악인들에게는 보람을 갖게 하고, 보시는 해외 동포들에게는 조국의 국악 맛을 흠뻑 느끼게 하려고 합니다. 우리 회원 인재들을 동원하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자신합니다. 특집부: 끝으로 못하신 이야기나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하시지요. 이사장: 메일로 5가지만 질문을 주셨기에 더 드릴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 하나는 첨부하고 싶습니다. 국악신문에 부탁하는 것입니다. 한국국악협회가 잘되어 국악인들과 소통이 잘되면 국악신문에게도 이익이 되지 않습니까? 잘 되게 좀 밀어주십시오. 잘된 일과 잘못된 일이 있다면 공정한 잣대로 다뤄야지, 한쪽에 치우쳐 잘못된 것만 키워 곧 어떻게 될 것처럼 다루지는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자리를 빌어 국악신문 독자분들께 새해 가정에 행복이 깃드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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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4)구월단풍 두견이 울음 아리랑 아리랑 아리아리 아리랑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 주소. 아리랑 강남은 천리나 언덕 정든 님 올 때만 기다린다네. 아리 아리 넘어 넘어서 구월단풍 좋은 시절에 두견이 음 음 음 우지를 말라 감상 강남 간 님 오기만을 봄부터 여름 지나도록 언덕에 올라 기다리는데, 오마던 이는 소식이 없고 어느덧 구월에 단풍만이 곱구나. 세월을 재촉하는 두견이 울음에 가슴이 철렁한다. ‘가을단풍 두견이 울음’을 주제어로 뽑아 부각시키고 본문을 흘려 써 하단에 배치하였다. 작품구성을 위한 장법으로 노래의 내용과 상치될 수 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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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2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류문화컬럼니스트) 크리스마스 이브 날 반가운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영화 ‘서울의 봄’이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는 소식이다. 그 뉴스를 접하는 순간 영화의 영상이 눈앞에 스쳐지나갔다. 김성수 감독과 정우성 배우의 인터뷰가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한마디로 영화가 1000만 명을 돌파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는 것이다. 어리둥절하다고 말한다. 만들어 놓고 보니까 1000만 명 짜리 영화가 된 셈이다. 비교적 영화의 창작 과정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 정해진 원칙이 지금까지 잘 지켜지고 있는 장르 중의 하나이다. 특히 정부의 간섭은 거의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서울의 봄’ 같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그러한 힘이 가능했던 바탕에는 숱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독특한 사회적 배경과 역동적인 사회의 특성, 국민성(DNA), 그리고 디지털 강국이라는 강점이 자리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수천 년의 역사, 근대의 일제 강점기와 군사독재, 민주화 투쟁 등 굴곡 많은 한국사회의 역사가 스토리를 풍부하게 만들어 준 결과라고 영화평론가들은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 외에도 결정적으로 영화 발전을 이끈 것은 ‘스크린쿼터제’이다. 1966년 8월 3일에 이루어진 영화법 제2차 개정은 67년 1월 1일부터 영화관에 대해 연간 90일 국산 영화의 상영을 의무화하는 ‘스크린 쿼터제’를 도입했다. 이후 몇 차례 상영 제한의 축소와 확대를 반복하면서 85년 한국영화 의무 상영일수는 연간 146일로 정해졌다. 그리고 현재는 상영일수가 73일로 줄어들었으나 헐리우드 영화에 대항해 자국 영화를 지켜낸 모범적인 제도라는 데는 이의가 없다. 이 모두는 영화인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 덕분이라고 사료된다. ‘스크린쿼터제’는 영화발전을 위한 단순한 정책을 넘어서 많은 긍정적인 효과가 파생되기도 했다. 그것은 회계의 투명성인데, 극장의 관객 수를 체크하는 시스템이 구축됨으로써 제작자들이 표를 빼돌리는 일이 없어지고 그럼으로써 투자자들이 안심하고 투자를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투자자들이 영화에 대한 투자에 신뢰가 생기기 시작했고, 투자조합들이 영화에 뛰어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악공연계는 물론, 연극, 뮤지컬 등 다른 공연예술 분야는 아직도 공짜표로 관객을 채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영화계가 글로벌 수준으로 발전을 하게 된 것은 역시 ‘스크린쿼터제’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의 ‘스크린쿼터제’를 언급한 것은, ‘국악진흥법’이 공포된 이후 국악진흥법의 ‘시행령’에 반영될 수 있는 정책에 영화계의 ‘스크린쿼터제’와 비슷한 내용의 정책이 개발되었으면 하는 바램 때문이다. 지난 22일 날 개최된 한국국악협회 전문가위원회는, 국악진흥법의 비전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미션 또한 젊은 국악인들의 다양한 창조정신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는 취지의 ‘정책토론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2024년 1월에 개최될 ‘정책토론회’는 미래세대 비전에 대한 시스템 구축, 미션에 대한 다양한 창조적 시스템이 국악진흥법 시행령에 반영되고 구축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미래세대 비전에 대한 시스템 구축이라는 것은 영화계에서 보여준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시스템 즉, 공영방송 등에서 ‘국악쿼터제’를 도입해서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것들이 국악진흥법 ‘시행령’에 반영되어야 할 것이다. 국악은 영양가 높은 한류음악의 원형자산이다. 국악에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제도가 도입된다면, 전반적인 국악의 발전은 물론 젊은이들을 위한 중장기적 비전이 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젊은이들의 미션은 다양한 창조정신을 발휘하여 더욱 풍성하고 다색다양한 한류음악을 창조하는 것으로 실현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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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6)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용보다 소사 아저씨"용을 때려잡은 소사 이야기는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맥락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귀한 것보다는 하찮은 것들의 부상과 의미를 읽는 시대정신이 용좌의 관념보다 우세한 시대다. ” 2024년을 청룡의 해라고 한다. 음력으로 쇠는 단위이고, 역(易)으로 따지면 입춘을 기점 삼는다. 요즘은 양력과 병치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고대의 설날로 따지면 동짓날을 기점 삼기도 한다. 하지만 관념이나 제도 모두 늘 재구성되어온 것이라, 핏대 올리며 따질 이유까진 없다. 지구의 공전이나 고대로부터의 역학이 그렇다는 것이다. 열두 개의 해마다 상징을 넣어 의미를 부여한 것은 동서양이 마찬가지다. 한 해를 ‘띠’라고 부르는 것은 고리, 매듭, 환대(環帶) 따위와 상관된다. 자세한 것은 따로 다룬다. 열두 띠 중에서 용띠가 이야기가 가장 많다. 아홉 가지 상징이 모여 만든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가 그것이다. 이외 81개의 비늘 등 덧입힌 이데올로기가 무수하다. 용좌(龍座) 즉 왕이나 대통령, 높은 자리로 관념하는 전통이 생각보다 유구하다. 동남아시아의 나가(Naga)에서 동양 전반의 용(龍), 서양의 드래곤(dragon)이 편차도 심하지만 같은 점도 많다. 용의 출처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해왔지만 명료한 답변을 고를 수는 없다. 어느 시점에선가 지금의 모습으로 재구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한가지 근원으로 좁히려는 시도 자체가 무망하다. 내가 여기서 문제 삼고 싶은 것은 수천 혹은 수만 가지 용의 형용이나 의미보다는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다.용전우야 기혈현황(龍戰于野 其血玄黃)용들이 싸우는 들판에 검고 누런 피들이 튀긴다. 주역 곤괘 6효에 대한 설명이다. 지난 82회 칼럼(2018. 3. 16)에서 봄비를 기다리는 심정에 기대어 내가 읊조려본 대목이다. 다시 인용한다. 상전에 이르기를 용이 들판에서 싸운다는 것은 곤음(坤陰)의 도가 절정에 이르러 건양(乾陽)에 대적하여 다툰다는 뜻이다. 겨울은 캄캄한 하늘이자 밤이다. 밤을 지배하는 용, 아침을 데려올 용의 비유가 모두 들어있다. 피가 검고 붉다는 것이 이를 은유한다. 자연의 이치는 검은 피를 뿌리는 용이 이전의 세상을 물려주고 새로운 세상을 내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 전투는 계절의 변곡점에서 반드시 일어난다고 해석된다. 시대의 변곡점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를 준비하는 단서에 있다. 상전에 이르기를 용육(用六) 상태에서 영원히 참고 견디며 정도를 지키는 것이 이롭다 하였다. 무슨 뜻인가? 곤음(坤陰)이 한겨울이라면 건양(建陽)은 한여름이다. 예컨대 봄의 전령 매화가 어찌 봄비 한 번 내린다고 피겠는가. 참고 견디며 정도를 지켜내지 못하면 아침에 이르지 못하고 봄에 이르지 못하며 한 송이 매화를 피우지 못한다. 기회가 되면 풀어 쓰겠지만, 지금 우리가 관념하는 용의 아홉 가지 상서로운 조합은 서로 결이 다른 것들의 재구성이고, 각각 인고(忍苦)의 절정 혹은 최상과 정점에서 획득된 것들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뜬금없이 유무형의 무력으로 용좌를 얻는다면 어느 누가 그것을 용인하겠는가. 용이라고 하지만 토룡(土龍), 지룡(地龍) 곧 지렁이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용을 때려잡은 소사(小使) 아저씨용을 한방에 물리친 캐릭터가 소사 아저씨다.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초등(국민)학교를 다녔던 중년의 사람들이 소풍 가는 날 비가 오면, 소사가 용을 때려잡아 그렇다고 수군거렸다. 이무기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 시원은 훨씬 거슬러 올라간다. 후백제의 견훤을 지렁이에 비유한 설화나, 영산강의 시원이라고 주장되는 담양 용둠벙(龍沼)에 승천하다 떨어져 죽은 용, 지리산의 산신이 점지했던 아기장수 우투리 설화 따위가 그것이다. 지렁이, 이무기, 지네 등이 모두 용의 전신(前身)이거나 용의 대체물로 관념된다. 소사 아저씨의 비유가 일제강점기에 유포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용좌를 차지할 영웅이 태어났는데 이를 알아차린 마을 사람들이 닥쳐올 피해를 막기 위해 아이를 죽인다는 아기 장수 설화가 아니다. 이보다는 강압적 권위 혹은 원치 않는 용좌에 대한 전복으로 읽어야 한다. 유구하고도 존엄한 용좌를 하찮은 직업 소사 아저씨가 그것도 삽으로 내려찍어 죽였다는 설정을 주목하자. 소사는 조무직 공무원, 학교나 회사의 허드렛일을 하는 이다. 그야말로 이름도 빛도 없이 살아가는 민중, 그 존재의 상징이다. 일제강점기의 환경을 전제하지 않더라도, 용을 때려잡은 소사 이야기는 시대적 패러다임의 변화라는 맥락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이야기 발전의 역사에 비유해 말한다면, 신화에서 전설로, 전설에서 민담으로, 민담에서 소설로 이행되어 온 나(自我, 주체)와 세계(他我, 객체)와의 겨루기 같은 것이다. 지금은 소설의 시대다. 서양보다는 동양, 남성보다는 여성, 큰 것보다는 작은 것, 귀한 것보다는 하찮은 것들의 부상과 의미를 읽는 시대정신이 용좌의 관념보다 우세한 시대다. 이를 실천하는 기술은 마땅히 조동일이 말했던 생극(生剋) 정신에 있다. 증오와 경멸 혹은 적대와 전쟁의 유혹이 늘 노회한 변장술로 우리 곁에 나타나기에 그 진위를 다만 알아차리기 어려울 뿐이다. 내가 가진 기준으로는, 용보다 소사 아저씨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길 위에 김대중, 지금 DJ라면남도에서 김대중을 빼놓고 용좌(龍座)를 생각하기 어렵다. 갑진년,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는 노력들이 분주하다. 1월 10일부터 다큐멘터리 영화 <길위에 김대중>이 개봉된다. DJ의 일생을 시대순으로 담담하게 나열한 작품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서사나 영상에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한 인간, 현대사의 한 본보기가 되었던 일대기를 두 시간 넘게 경청할 수 있어 좋은 작품이다. 군데군데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들이 나온다. 때를 맞춘 것인지 박지원의 책 <지금 DJ라면>(메디치, 2023)이 출판되었다. 지금 DJ라면 어떤 문제의식으로 어떤 실천을 할 것인가, 현 시국의 진단에서부터 사통팔달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밝혀주는 내용이다. 물론 앞서 참고해야 할 책은 <김대중 자서전1, 2>(삼인, 2010)이다. 여기에 보면 2006년 영남대학교 강연에서 한 학생의 질문에 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생적 문제의식, 즉 원칙과 철학의 확고한 다리를 딛고 서서 그 기반 위에서 상인적 현실감각을 갖추어야 합니다.” 어찌 이것이 정치에만 국한되는 얘기이겠는가. 박지원의 지적대로 국가 재난 시대, 국민 수난 시대, 윤석열 정부의 4대 위기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실천해야 할까? 위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김정은이 신년사를 통해 이제는 통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했다. 김여정이 조롱조의 추가 담화문을 냈다. 참담하다. 노벨평화상과 햇볕정책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하의도 빈촌의 아이가 올곧이 자라 시대를 구원하는 지도자의 반열에 이르렀던 것은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끊임없이 일궜기 때문이다. 박지원이 이를 받아 평생의 꿈이라고 고백한 대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라면 문지기라도 자처하는 것이, 해양은 물론 대륙을 품을 수 있는 시대적 비전이자 전략이며 실천방안이다. 뜬금없이 북·중·러 네트워크를 후퇴시키고 점진적이었던 역사의 발전마저 퇴행시키는 시대, 어디 문지기뿐이겠는가. 양두구육(羊頭狗肉), 지록위마(指鹿爲馬), 용의 탈을 쓴 지룡 까짓것 한 삽으로 찍어버리는, 용보다 소사 아저씨가 갑진년의 시대 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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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사할린아리랑/정성애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내가 왜 왔나 내가 왜 왔나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일본놈들무숩어 내 여기왔지우리 조선은 따뜻한데그 땅에 못살고 내 여기왔나우리 영감님은 왜 왔다던가나만 혼자두고 자기만 갔네 추천인: 권경석(전국사할린귀국동포회장) 유즈노 사할린스크 살던 정성애 할머니가 부른 아리랑이다. 할머니는 경남 삼천포시가 고향인데 1939년 18세 때 사할린 도로샤흐조로스끄 탄광에 징용으로 끌려온 남편을 따라왔다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음반으로도 나오고, 2016년 사할린에서 개최된 제1회사할린아리랑제에서 신마이아(12세)가 불렀다. 2019년 양주 사할린영주귀국동포회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금상'을 받았다. 1년 동안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지도해 준 이예솔 회장에게 감사드린다. 이후 전국아리랑전승단체가 불러주고 있다.우리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담긴 사할린아리랑은 아리랑과 함께 기억되기를 바란다. 오늘은 우리가 파주에 영주귀국한지 15주년이 되어 오후 5시부터 기념식을 할 예정이다. 이날 다시 한번 불러 보고자 한다. 사할린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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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5)<br> 분청명문접시편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이규진(편고재 주인) 성탄절 연휴에 집에서 TV를 돌리다 현역가왕이라는 프로를 잠시 보았다.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니어서 유행가의 제목도 원래의 가수도 알 수는 없었는데 그 날은 경연에 참가한 김소유라는 가수가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노래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나는 그 구절 앞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엄마라는 그리운 이름 앞에 가슴 먹먹함 말고 또 무슨 감정이 있으랴.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여년이 되어 온다. 밥술깨나 뜨던 집안에서 삼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우리 집으로 시집을 오면서 고생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전사를 하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 위로는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어린 나와 동생, 그리고 삼촌도 없는 집안에 여섯이나 되는 고모들,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하고 암담하셨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꿋꿋하게 일어서서 우리 집을 흔들림 없이 지키셨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하지만 내가 성장을 해서도 가정이 온전치 못하다 보니 어머니를 모시기는커녕 따뜻한 밥 한끼 제대로 해드리지를 못했다. 그런 회한이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라는 유행가 구절 앞에서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던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후회가 없으랴. 살아오는 동안의 마디마디가 어찌 아픔 아닌 것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만은 그 마디마디가 더욱 아프고 시린 것만 같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왜 이런 노래 구절이 있어 내 마음을 울리고 또 울리려 드는가. 나는 사실 어머니뿐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고모들의 사랑을 너무도 분에 넘치게 받고 자랐다. 세상에 나와서도 그런 인복(人福)이 지속된 탓인지 주변에 척을 지고 살거나 미워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내가 도편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을 것을 알고 도와주려는 지인들 또한 내게는 인복이지 안았을까. 지인으로부터 일찍 선물로 받은 분청명문접시편 또한 그런 인복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분청명문접시편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태기리(台機里)에서 지인이 직접 습득한 것을 얻은 것이다. 울주군 삼동면에는 태기리와 하잠리 분청 가마터가 있는데 이 곳은 과거 언양현에 속했던 곳으로 언양인수부(彦陽仁壽府)와 장흥고(長興庫) 등 관사명이 출토되고 있어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분청명문접시편의 글자가 온전치 않다는 점이다. 글자는 백상감으로 양(陽)자가 분명한데 앞의 부수가 떨어져 나가고 역(易)자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언양현 소속이었던 태기리에서 지인이 직접 습득한 것이 확실하고 보면 언양<彦陽)의 양(陽)자 중에서도 역(易)만 남았지만 언양에서 만들어 중앙 관서에 납품을 하고자 했던 공납용 자기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때 아닌 유행가 가사 한 구절 때문에 잊고 지냈던 가족들의 사랑과 지인들의 관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랴. 어느날 문득 애절한 선율 속에 가슴을 파고들던 아!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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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3)서방인지 남방인지 어서 잠들어라. 보리밭에 섰는 총각 찬이슬 맞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고개로 날 넘겨 주게. 감상 사랑이 떠나면 마음에 찬바람이 쌩쌩 분다. 세상 가장 높은 담이 돌아누운 여인의 등이란다. 이미 서방이랄 것도 없다. 동방이든 남방이든 알 바 아닌 것. 눈이 맞아 정분 난 옆집 총각만이 절박하다. 바람난 여인네의 달뜬 숨소리가 물씬 느껴지는 아리랑을 민체로 가로쓰기 하였다. 가로쓰기에 대하여 서예는 통상 오른쪽에서 부터 세로로 써 내려간다. 한글, 한문서예가 모두 같은데, 글자의 흐림이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쓰기에 무리가 없고 전체적인 조화도 자연스러워 오래 전부터 그리 써온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가로로 쓰고 읽기 때문에 서예적 필사는 낯이 설다. 그래서 어떤 이는 가로쓰기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서예는 읽기에 편한 것보다 보기에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예술이라서 보편적으로 세로쓰기의 오른쪽에서 시작하는 전통의 방식을 따라 작품을 한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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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점점 조절되고 길이 들어 달리 마음 쉬어지고, 물 건너고 구름 뚫어 걸음걸음 따라오나, 손에 고삐 잡아 조금도 늦추지 않고, 목동이 종일토록 피곤함을 잊어라." 명언 같은데 알쏭달쏭하고 오래된 시어 같은데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연초 배냇소와 더불어 소개했던 십우도(十牛圖)의 한 장면이다. 본성을 찾는 것을 소에 비유한 선화(禪畵)이기에 심우도(尋牛圖)라고도 한다. 종교적 깊은 뜻을 두루 알 수는 없지만, 쇠고삐 틀어쥐고 소를 이끄는 것 정도는 이해하겠다. SNS에 걸어둔 내 표제어, '깔 비고 소 띠끼고'의 의미라고나 할까. 항간에 회자 되는 '소는 누가 키우나'라는 언설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른다. 산으로 들로 나가 소에게 풀을 뜯기고, 꼴(말이나 소에게 먹이는 풀) 베어 망태기에 담아오던 것이 소싯적 일상이었던 이들에게는 너무도 선명한 풍경, 이를 남도에서는 '소뜯긴다'고 했다. 시골에서 자란 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어린 시절 날마다 산으로 들로 나가 소에게 풀 뜯기는 일이 일상이지 않았는가. 이를 불교 선종(禪宗)에서 본성을 찾는 깨달음에 비유했으니 그윽한 은유, 나아가 지극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소 부리는' 일이 그렇게 심도 있는 일일까? '부리다'는 기계나 기구 따위를 마음대로 조종한다는 뜻이다. 소나 말(馬)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시켜 일하게 하는 데도 사용하는 말이다. 소를 키워보지 않은 이들은 궁금해할지 모른다. 그렇게 덩치 큰 소를 어린이가 어떻게 다룰 수 있나? 하지만 소는 간단한 명령어를 잘 알아듣고 행동한다. '이랴!'하고 고삐를 당기면 오른쪽으로 가라는 뜻이고 '자라!'하고 고삐를 찰싹거리면 왼쪽으로 가라는 뜻이다. '워워!'하고 고삐를 잡아당기면 정지하라는 뜻이다. 본래 소의 성품이 그러한가? 그렇지 않다. 어린이에게도 순종하는 이유는 고삐 때문이고 고삐에 연결된 코뚜레 때문이다.쇠코뚜레(牛鼻环) 매어 길들이는 법언제 시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쇠코뚜레의 역사는 매우 깊다. 쇠코뚜레라는 뜻의 한자 권(桊)이 있으니 적어도 한자 발명 이전일 것이다. 어쩌면 인간이 소를 가축으로 다루기 시작한 기점인지도 모른다. 사전에서는 '소를 순조롭게 잘 다루기 위해 소의 코를 뚫어 끼우는 둥근 나무테'라고 코뚜레를 정의한다. 본래 소는 힘이 세고 고집이 세어 말을 잘 듣지 않는데, 이를 제압하기 위해 코뚜레를 꿰어 잡아당기면 아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순종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역에 따라 '코꾼지', '코빼이', '군들레' 등으로 부른다. 노간주나무, 박달나무, 물푸레나무, 다래나무, 소태나무, 이게 모두 쇠코뚜레 재료들이다. 이 나무들은 껍질을 벗길 때 물기가 적당하여 잘 벗겨진다. 껍질을 벗겨낸 표면이 매끈하여야 소의 콧구멍을 뚫을 때 고통이 적다. 또 나무가 잘 휘어져야 한다. 박달나무는 견고하기에 아예 삶아서 사용하기도 한다. 코뚜레를 언제 하는가? 출생 후 5~6개월 정도다. 계절로는 여름철이 좋고 적어도 1년 안에 해야 한다. 1년이 넘어가면 소가 새끼를 밸 정도로 성장하기 때문에 제압하기 힘들다. 대개 오월 단오에 쇠코뚜레 뚫기를 한다. 상처는 일주일쯤 지나 아물게 된다. 코뚜레를 뚫은 소는 길들이기를 해야 한다. 멍에를 지우고 무거운 돌을 달아 끌게 한다. 장차 소달구지나 쟁기를 끌게 하기 위해서다. 이때 간단한 명령어를 습득하면서 점차 사람에게 순응하게 된다. 이 소 길들이기가 단순하지 않다. 선종의 심우도에 깃든 과정들이 난해하긴 하지만 소 길들이기 과정, 잃어버린 소를 찾는 과정들이 지극한 은유로 설정되어 있지 않은가.씨압소의 코뚜레와 깨달음연초, 소의 해를 맞는 의지를 씨압소 전통으로 소개한 바 있다. 이미 설명하였으므로 코뚜레와 관련된 행간만 요약해둔다. 씨압소는 씨앗이소 즉, 씨를 잉태하는 소라는 뜻이다. 그래서 배냇소라고 했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입히는 옷을 배내옷이라고 하는 이치와 같은 것이다. 열네 살이 되면 씨압소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입학생부터다. 무상으로 분배받은 송아지가 생후 6개월이 되면 '목매기' 즉 목에 고삐걸이를 한다. 이후 뿔이 나오고 생후 1년이 지나기 전에 코뚜레를 뚫어 채운다. 생후 13달 정도 되면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이 280일로 사람과 거의 같다. 생후 2년이면 새끼를 분만하게 된다. 통상 이 새끼를 씨압소 받은 소년이 갖고 어미소를 씨압소 준 이에게 갚는 것이 씨압소 전통이다. 소년은 16세가 되어 자기의 소를 갖게 된다. 혼인할 수 있는 자격도 얻게 된다. 성년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는 소를 생구(生口)라고 했다. 왜 그리 불렀을까. 사전에서는 '집에서 기르는 짐승, 소, 말, 돼지, 닭, 개 따위를 통틀어 이른다'고 풀이한다. 하지만 지금의 반려동물에 비추어보면 가족을 식구(食口)라고 부르는 것에 견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소와 개, 고양이 따위는 가축보다 반려동물로서의 의미가 훨씬 크기 때문이다. 지난번 개의 목줄 혹은 개목걸이를 소개하면서 그것이 제압이나 복종만을 위한 매개인지 재삼 질문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소의 코뚜레도 마찬가지다. 이것이 벽사진경의 한 상징으로 활용되었던 사례를 보면 더 명료해진다. 그러지 않고서야 불교의 지극한 깨달음의 과정에 잃어버린 소를 찾고 길들이며 종국에는 흰소 타고 피리 불며 들어오는 동자를 상정했겠는가. 물론 코뚜레를 깨달음의 과정에 중요한 제재로 등장시키는 온전한 이유를 다 알기는 어렵다. 단순히 짐작할 뿐이다. 잃어버린 소를 찾아 길들이고 종국에는 미련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과정을 그린 그림이 심우도라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 곽암의 심우도와는 다르게 보명의 심우도에서는 수제(受制)로써 규칙을 따르는 것을 세 번째 단계로 설정한다. 보명의 다섯 번째 단계인 목우(牧牛)가 바로 그것이다. 소싯적 일상으로 돌아가 소 풀 뜯기던 일과 견주어 본다. '깔비고 소띠끼고' 이것을 한자로 바꾸면 목우(牧牛)다. 농담조로 말하자면 누가 시키거나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어린 시절부터 깨달음의 도(道)를 닦기라도 했던 것일까? 비유를 달리해보면 이 생각이 좀 더 명료해진다. 키우라는 소는 키우지 않고 헛짓만 해대는 이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묵묵히 자신의 영역에서 꼴 베어 소 키우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의 과정을 걷는 이들 아닐까.쇠코뚜레와 반려동물 목줄의 행간구례 운조루 대문 한 가운데에 소의 코뚜레가 걸려 있다. 남도뿐 아니라 전국에 산재한 풍속이다. 입춘첩을 붙이고 소코뚜레를 걸어놓거나, 정초에 엄나무, 복조리와 함께 코뚜레를 벽에 거는 풍속이 모두 그렇다. 성질이 고약한 소를 길들이는 것이기에 사악한 귀신도 길들일 수 있다는 믿음의 발로일지 모른다. 나쁜 것을 물리친다는 생각은 벽사진경 즉, 나쁜 것은 몰아내고 좋은 것을 불러들인다는 관념으로 이어진다. 쇠코뚜레와 고삐를 포함해 목줄의 사전적 의미는 개나 고양이 등의 동물 목에 둘러매는 줄을 말한다. 하지만 영혼의 끝을 지키는 체로키족의 개로부터 이집트 신전을 지키는 개, 민화로 그려져 대문을 지키는 문배도의 개까지 그 의미는 더욱 확장되었다. 쇠코뚜레가 갖는 벽사진경의 의미가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각자의 전공으로 묵묵하게 소 키우는 일이야말로 벽사진경의 진정한 부적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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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당신을 사랑하기에/헤르만 헤세추천인; 이승한/고판사 대표 고판사는 '고법과 판소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란 명칭입니다. 우리는 판소리를 사랑합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는 '판소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인이랍니다. ~고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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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2)만경창파 거긔 둥둥 떠가는 배야 거긔 좀 닷 쥬어라 말 무러 보자.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띄여라 노다 가세 감상 파도치는 푸른 물결에 배를 띄워 임은 떠나려 하네. 가는 이, 보내는 이 할 말이 어찌 없으랴만 벙어리 냉가슴으로 속만 태우다가 배가 떠나려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닻을 내려라. 말 물어 보자. 날 버리고 어딜 가느냐. 갈 수 밖에 없다면 언제 다시 오려느냐‘ 그러나 말은 입안에서 돌고 배는 무정하게 떠나간다. 아! 이별의 무정함은 언제나 가슴을 엔다. 찐 고구마 베어 문 답답한 마음을 순지에 고체로 표현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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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76)<br> 이선경 명인의 살풀이춤살풀이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이선경에게 "춤이란 마음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라고 한다. 이선경숙명여대 졸업 이선경무용단 단장 국가무형문화재 처용무 전수자- 2003 제4회 경남무용제 안무상 수상2006년 제7회 경남무용제 안무상 수상 2009년 제10회 경남무용제 안무 제20회 창원야철전국국악대회 국회의장상을 수상 공연작품<아랑, 나비 되어...>, <마른꽃, 길 위에 서다>,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나-飛>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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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싸구려 어허허 굵은 엿이란다 정말 싸다 파는 엿/ 강원도 금강산 일만이천봉 팔만구암자 석달 열흘 백일삼제/ 화초가리 더덕가리 동삼가리가 다 들어간 엿/ 열아홉살 먹은 크내기가 동삼물로 제조를 했다 지름이 찍찍 흐른다~" 2009년 중앙대학교 전통예술학부 졸업식 발표회 장면 중 하나, 객석의 뒷자리에서 갑자기 엿판을 든 엿장수가 등장하더니 관객들을 훑으며 무대로 올라온다. 엿가위로 리듬을 맞추며 해학적인 엿타령을 구수하게 뽑아낸다. 저자에 흘러 다니는 말은 '엿장시 맘대로'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격조 있고 운율 있는 노래이니 '엿장수 가락'이라고나 할까. 무대에 오르자 걸쭉한 입담이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이어진다. "에, 이 엿장시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멀리 진도에서 올라온 엿장시인디, 오늘 엿을 쪼깐 많이 폴아서 진도 갈 여비를 해야 쓰거쏘!" 객석에서 웃음이 터진다. 자그마한 키에 귄 있는 몸짓, 엿타령을 한 주인공은 졸업생 조유아다. 엿타령 하며 객석을 돌았는데 엿판에 수북이 돈이 쌓였다. 자그마치 진도를 십수 번 다니고도 남을 금액이었다나. 그뿐 아니다. 당시까지는 이름이 조은심이었던 송가인이 씻김굿으로 졸업 공연을 준비했으니 관객들의 폭발적인 호응이 어쨌을 것인가는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후 조유아는 전공 판소리보다 엿타령 가수로 더 많이 알려져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고 송가인은 트롯트 가수로 전향하여 이미 국민가수가 되었다. 박색구, 조오환, 조유아로 이어진 삼대 엿타령 국립창극단 정단원으로 근무하고 있는 조유아가 엿타령을 잘하는 데는 그만한 내력이 있다. 아버지 조오환이 엿타령의 명인이기 때문이다. 무형문화재 닻배노래(전남도지정 제40호) 보유자이기도 한 조오환은 엿타령 뿐만 아니라 만년필타령, 뱀장수타령, 비손소리 등 못하는 소리가 없다. 일찍이 고향 민속문화의 보전 전승에 눈을 떠, 진도북놀이며 사물놀이, 상여소리 등에 주도적으로 관여해왔다. 조오환의 엿타령은 어머니 박색구로 거슬러 올라간다. MBC민요대전(한국민요대전)에 고 박색구의 엿타령과 민요가 여러 곡 실려있다. 명실상부한 삼대의 엿타령이다. 뿌리를 추적하면 아득한 조상으로 연원을 좇아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들 엿타령이 현장을 담보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찍 남편을 여읜 박색구는 좁쌀 등으로 엿을 만들어 오일장인 진도군 의신면 돈지장이나 읍장에 내다 팔았다. 친척이나 이웃들의 비웃는 소리를 감수하며 목포, 무안 등 서남해 일대를 유랑하며 엿을 팔기도 했다. 그 현장에서 엿을 팔면서 불렀던 노래가 지금의 조유아 엿타령이다. 조오환은 이 현장성을 중요하게 생각하여 '진도민속예술단'이라는 연희단체를 만들어 활동한다. 진도읍에서 실제 엿을 만들어 팔면서 엿타령 공연도 하고 전수도 한다. 무쇠솥에 장작을 지피는 등 엿 만드는 과정도 전통방식 그대로를 고집하고 있다. 농업이나 어업의 맥락이 사라져 노래만 남은 문화재들에 비하면 컨텍스트까지 보존하고 전승하는 명실상부한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장시(場市)와 엿타령 엿타령은 엿판을 지고 엿을 팔면서 부르던 노래다. 엿장수타령, 엿파는 소리 등 지역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다르다. 통칭하여 엿타령이라 한다. 어떤 시점 이후에 유흥을 위한 노래나 현장 맥락이 소거된 민요로 정착했다. 근대 이후 무대화되어 유희 민요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북한 민요집이나 전국 각지의 민요자료에도 엿타령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잘 알려진 정보 중 하나는 김홍도의 씨름 그림이다. 엿판을 지고 엿을 파는 엿장수가 그림의 포인트다. 당대 풍속을 소상하게 알려준다. 엿판 지고 엿을 팔기에 통상 시장을 배경 삼는 상업풍속으로 해석한다. 상업민요니 상업노동요니 하는 이름이 그래서 나왔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15년(1520) 3월 21일자 기사를 참고한다. "신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을 때 철저하게 금지했는데도 지금은 전일보다 심하여 시장에 나오는 자가 몇만 명에 이르니 (중략) 장시(場市)는 근년부터 생기기 시작하여 시장이 열리는 날에는 남녀간에 주육(酒肉, 술과 고기)을 마련하여 시장에서 팔아 그 이(利益)를 취하고 있으니..." 이 행간에 엿장수가 있다. 엿의 문화사를 추적해보면 명절떡과 조청엿에 닿고 장시의 엿장수에 닿는다. 16세기 이후 서울 중심으로 급속하게 확산된 장시(오일장)가 엿장수의 배경이라는 점 명백해 보인다. 엿파는 행위만 있는게 아니다. 예컨대 농사를 지어 좁쌀을 생산하고 무쇠솥과 장작 등 전통적인 방식으로 엿을 만들며 또 오일장에 내다 팔면서 엿타령을 연행하는 것은 명백한 종합장르다. 개별단위가 아닌 종합장르를 무형문화재 지정 등의 방식을 빌어 보존 전승할 필요가 있다. 장시의 맥락을 전제하면 장타령, 각설이타령까지 포괄한다. 생산, 유희, 소비까지 포섭한다. 더구나 김치, 식혜, 주류 등 우리 발효문화의 중요한 키워드라는 점에서 엿타령이 재조명되어야 한다. 조유아(들)의 활동을 응원한다. 어뜬 엿장시/이윤선 우리집 모방에 총각 엿장시가 한 분 살았습니다. 쌀엿 좁쌀엿 호박엿 감자엿 통째로 엿 한 통을 솥에 곱고는 손뿌닥 철석철썩 때래감시로 가락엿을 맹글았습니다. 양짝에서 질게 엿을 느래 잡고 고운 가루 무채 찰싹찰싹 때래 니리믄 크내기 허벅지만하던 것이 쫑쫑한 가락들이 됩니다. 귀갱삼아 문을 빼꼼이 열믄 어서 들온나. 어서 문 다채라. 바람 따라올라 조막만한 나를 다그채며 문을 닫아걸었습니다. 가락엿 맹글 때 바람 들어오면 안 된담시로요. 어짜다 한골목에서 총각 엿장시 만나믄 가락엿을 냉큼 집어 고사리 내 손에 쥐어주었습니다. 쥔집 귀한 아들래미라 그러했을 것입니다. 버짐한놈 코흘린놈 종기난놈 내 동무들 앨곤하니 쳐다보믄 어찌 나 혼자 먹을 수 있겄습니까. 대가리 큰놈부터 척척 나놔주고 엿치기를 합니다. 딱 부러띠래갖고 끊어진 자리 훅! 불고서는 모도 벌어터진 손꾸락 사이 삐죽삐죽 엿가락들을 대봅니다. 어뜬 날은 똘똘말이 몰아주어 한 입 못 먹을 때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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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동지 팥죽 / 이문조어머니의 팥죽이 먹고 싶다 맛있는 찹쌀 새알이 들어있는 어릴 적 동짓날 나이 수만큼의 새알을 먹었지 그때는 나이를 빨리 먹고 싶어 새알을 많이도 먹었는데 쉰 개도 더 먹어야 하는 지금 먹어야 할 새알이 너무 많구나 나이 더 먹기 싫어 좋아하는 팥죽도 많이 먹지 못하네. 추천인:진미애(진미애국악원장) 어머니가 해주시던 팥죽이 먹고 싶다. 그때는 왜그리도 맛있는지 모르겠다. 어릴 적엔 새알을 더 많이 먹고 나이를 더 먹으려고 형제들과 경쟁하기도 했다. 며칠 안남은 동지날에는 무릎 수술을 하시고 불편하신 어머니께 팥죽을 쑤어드려야겠다. 마을 친구분들도 모셔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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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4) <br>청자귀면장식편소박함과 정겨움 때문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에 위치한 칠갑산을 언제 찾아보았던가, 아니 넘어 보았던가. 칠갑산 휴게소에서 차를 마셔 보았던 적은 또 언제였던가. 휴게소에서 고지대에 위치한 천장호 저수지를 우측으로 끼고 급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면 좌우로 길게 형성된 계곡을 만나게 된다. 이 계곡을 우측으로 올라가면 몇 채의 민가가 어우러진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천장리다. 천장리 끝 민가와 밭 경계를 이루는 턱이 진 곳에 돌무더기가 있는데 이곳이 가마터인 듯 도편들이 보이고는 했었다. 이 천장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아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천장호 저수지에는 그새 출렁다리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고 보면 가마터를 찾아보았던 것이 언제쯤이었는지 이제는 가늠조차 쉽지가 않다. 청자귀면장식편은 천장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만난 것이다. 청자 하면 우선 고려 시대를 떠올리게 되지만 조선 시대에도 만들어졌다. 조선청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입힌 이른바 백태청자라고 하는 것과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분청 태토에 분을 안 입힌 채 만들어 지는 청자가 그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는 고려 시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 지는 청자와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천장리에서 만난 청자귀면장식편 또한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청자귀면장식편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는 내면은 무문이고 외면에는 파도문 같은 음각이 있고 위로 꺽이는 부분에는 돌대가 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도대체 어떤 기형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향로일까 수반일까. 그러나 더욱 궁금한 것은 입술 부위에 붙어 있는 귀면장식이다. 편리한대로 귀면장식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간략화 된 뿔인지 귀인지에 입과 코가 있고 가로로 쭉 찢어진 입이 있는 이 것은 도깨비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토끼 같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이 또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조선 시대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청자귀면장식편. 귀면인지 무엇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간략환 된 표정만은 여간 애교스럽고 정겨운 것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귀면을 그릇에 올린 도공의 마음은 또 얼마나 여유로워 보이는지 그 넉넉한 심성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여하튼 기형을 알 수가 없는 청자귀면장식편. 발굴조사보고서 같은 것을 보면 용도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이형청자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지만 그렇게 얼버무리기에는 무언가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청자귀면장식편이 주는 그 소박함과 정겨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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