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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십여 년 전 내 논문을 통해 주문했다. 한국의 민요를 메이저 무대에 세우는 또 하나의 '하지메치토세' 혹은 판소리기법 그대로 메이저 무대에 승부하는 '아사자키이쿠에'가 출현할 수 있는 인식전환 말이다. 그 대답의 일부를 송가인이 해주었음을 지난 칼럼에 명토박아두었다. 송가인의 트로트가 독창적이라는 언설에 대답이 들어있다. 나는 판소리를 비롯한 남도민요의 독특한 시김새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송가인 열풍이 지닌 사회현상은 따로 분석하겠지만 그 신드롬을 가능하게 한 기술 중의 하나가 남도풍 시김새라는 의미다. 남도풍이라니? 송가인의 엄마는 진도 혹은 남도를 대표하는 무당이다. 송가인은 본래 판소리 전공자였다. 엄마를 도와 씻김굿 의례를 도운 적도 있다. 남도의 무가, 판소리, 민요의 시김새들이 고스란히 트로트의 발성에 이입되었다. 혹은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실제 그녀의 노래 창법이 그러하다. 시김새는 음을 장식하는 기술을 말한다. 연전 본 칼럼을 통해서 자세하게 논의해둔 바 있으니 참고 가능하다. 지면을 달리하여 논의하고 싶은 것은 이 시김새 중심의 창법을 아예 남도 트로트로 명명하는 것. 트로트 장르의 하위 분류라고나 할까. 판소리 등 남도소리꾼들이 트로트를 부르면 대개 이런 음색들이 나온다. 내가 제이팝까지 진출한 일본의 시마우타를 주목했고 그 바탕 혹은 배경이라고 하는 우타아소비를 연결해보고자 하는 이유다. 우타아소비(歌遊び)는 무엇인가. 남도 산다이 혹은 민요놀이, 민속놀이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시마우타를 낳은 어머니라고 해도 좋다. 일정한 규모로 동료들이 모이면 교환창(번갈아 가면서 부르는 노래)으로 자연스럽게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가 이야기조이기 때문에 매우 길다. 축제(마쯔리)나 축하 등의 이벤트에도 노래(시마우타)는 빠지지 않는다. 아마미(奄美)의 나제시(名瀨市) 코미나토(小湊)의 하찌가쯔오도리(八月踊)가 매우 유형적이다. 우타아소비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우이도의 홍어장수 문순득이 최초로 표류했던 지방이기도 하다. 나제시에는 작은북(치진)을 치며 시마우타를 부르는 동상들을 세워두었다. 이 지방의 상징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4~5명이 북을 치면서 나온다. 점점 인원수가 많게 되면 작은 원과 큰 원을 만들게 된다. 치진(ジジン, 북)을 든 사람들이 북소리와 발동작 리듬을 맞추면서 춤을 춘다. 오키나와의 요아소비(夜遊び, 밤놀이)도 유사하다. 결혼 전 청소년들이 마음에 드는 이성과 함께 사탕수수를 짜는 맷돌 근처에서 혼숙하며 노래하는 풍속이 있었다. 음력 8월 15일 벌어지는 쥬고야아소비(十五夜遊び) 놀이판도 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미혼 남녀들이 노래를 주고받으며 춤을 추는 풍속인 모아소비(毛遊び)가 전형적이다. 여자들만의 노래춤판인 우시데크(ウシデーク)와 남자들만의 노래판인 에이사(エイサー, 흔히 북춤으로 알려져 있다)등도 노래하면서 노는 놀이라는 맥락은 크게 다르지 않다. 모두 우타아소비 범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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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본래 농악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가 아니다. 상모를 돌리고 오방색 유니폼을 입으며 사물악기들을 울리는 방식은 근대기에 재구성된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도 차후에 설명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민간의 풍속을 다양하게 포착했던 단원 김홍도나 신윤복의 그림에 왜 현재 형태의 농악이 단 한 번도 그려지지 않았을까. 이상하지 않은가? 농악은 정읍의 신흥종교 보천교를 겪으면서 급속하게 연예장르화 되었고 근대기에 접어들어 발빠르게 연예농악으로 성장하였다. 양옥경은 우도지역 농악의 전문 연예화 과정을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근대의 출발로부터 해방 직전까지는 우도지역 농악역사에서 연예농악 형태의 농악 공연문화 형성 시기다. 군악성격을 강조한 내용과 공연 논리로 구성한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둘째, 해방 이후부터 1960년대 직전까지의 시대는 농악사에서 연예농악의 양식화 및 정형화의 출발 시기다. 가장 상징적인 문화 사건은 농악경연대회의 출현이다. 셋째, 1960~ 1980년의 시간대는 초기 문화산업형 농악 공연양식의 출현과 이와 관련된 향유문화가 형성된 시기다. 여성농악단의 흥망성쇠, 남성농악단의 쇠락, 산업근대화의 침투로 인한 전반적인 민속예술양식의 추락이 있었다. 넷째,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직전까지의 시대는 무형문화재 제도와 지역 중심주의에 영향 받아 지자체 기준으로 범주화 및 고착화되는 경향을 낳았다. 198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도농악이라는 포괄적 이름으로 불렸던 농악이 문화재제도의 직접적 영향권에 들면서 김제농악, 정읍농악 등 지자체 행정단위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 주요 원인의 하나가 무형문화재제도다. 판소리의 동편제 서편제의 구분법도 그렇지만 좌도농악 우도농악 등으로 나누는 구분법도 조만간 다시 정리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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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나는 호남우도농악에 속하는 무안읍 양림마을의 잡색 복식을 주목하고 있다. 대개 농악단 잡색으로서의 양반 캐릭터는 게으른 논주인 정도의 컨셉이다. 하지만 양림마을의 잡색 양반은 한편으로 '살보'를 들었다. 일반적으로는 살포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살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살포갱이(경남 영산)', 살피(경북), 논물광이(강원), 살보(전남), 삽가래(전남 보성), 손가래(경북), 살보가래(전남 강진)' 등으로 불린다. 손바닥만한 날에 비하여 자루는 길어서 2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대나무를 자루로 박아 쓰는 일이 많다. 날의 형태는 네모난 날 끝을 위로 두 번 구부리고 괴통을 단 것, 깻잎 모양으로 앞이 뾰족하고 끝이 위로 두 번 구부러져서 괴통이 달린 것(이를 오리살포라 한다), 말굽쇠형 따비처럼 직사각형의 몸채에 말굽쇠형의 날을 끼운 것, 괭이의 날처럼 위로 한번 구부리고 괴통을 단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이상하게 생긴 이 도구를 어디에 쓰는가?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 중의 하나다. 논에 나갈 때 지팡이 대신 짚고 다니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용기(龍旗) 혹은 농기(農旗)로 호명되는 농악단의 깃발을 보면 염제 신농씨가 들고 있는 살보가 보인다. 주지하듯이 염제 신농씨는 신화시대의 상제(上帝) 즉 하나님이다. 농업과 의약을 최초로 재배하고 발명한 신이기도 하다. 강진 용소마을의 농기를 보면 염제신농씨가 용을 타고 살보를 든 형상이 그려져 있다. 거북이와 물고기 등을 포함해 다양한 민화적 해석은 차후 지면을 기약한다. 신농씨가 들고 있는 살보는 수도작의 키워드라고나 할까. 농업의 코어코드라고나 할까. 농사의 신이 들고 있는 핵심적인 농사도구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무안우도농악에서는 담뱃대나 들고 거드렁거릴 주제의 잡색 양반이 왜 살보를 들고 다니는 것일까? 무안우도농악이 바로 두레풍장 농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이보형에 의하면 이 두레농악 또한 당산제 등의 의례음악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농악대는 농신을 받아 들에 나가 한 바퀴 돌고 마을마당에서 농신제를 지내기도 하고 농사풀이라는 농사짓는 모양새를 꾸미기도 한다. 이러한 농신제나 김매기 할 때의 풍농제 농악을 두레굿이라 한다. 진행 형식이 당산제와 같으므로 종교적인 농악이 두레농악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후 여러 용례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무안읍 양림마을의 농악은 정월 당산제와 김매기 두레 풍장이 마치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살보는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많으며 임금이 하사하기도 했다. 나는 이를 두레풍장과 관련하여 주목하고 있다. 장차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편의주의적 구분법에 대해서도 이의제기를 할 요량이지만 마당밟이와 두레풍장을 변별하여 논의해왔던 저간의 관행에도 문제제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 살보를 든 농악의 잡색 양반이 농기 민화로 들어갔거나 농기의 신농씨가 농악의 잡색 양반으로 뛰쳐나왔거나, 남도의 두레풍장과 농악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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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지역뿐만이 아니라 장르 간에도 교섭 혹은 분리가 있었다. 예컨대 두레 풍장은 농악의 범주로 넣어야 할까 말아야 할까. 김현숙은 주장한다. 사실 큰 범주로서의 농악은 섣달 그믐날의 매굿, 정월의 마당밟이, 걸궁, 김매기철의 두레굿, 백중날 호미씻이 등이 포함된다는 것. 사례가 있다. 무안읍 이계선의 제보에 따르면, 부잣집 논을 매거나 모내기를 할 때는 20~30여 명씩 농악단을 꾸렸다. 이들이 농악 연주를 하고 노래도 불렀다. 마을에서는 여러 사람이 부르는 들노래의 후렴 소리를 듣고 일이 언제 끝나는지 알았을 정도였다. 농악은 정월 마당밟이뿐 아니라 농사일에도 함께 하였던 것이다. 모심을 때는 못방구라 하여 북을 양손으로 치는 북놀이를 하였다. 현재 진도지역에서 추는 북놀이 형태다. 진도지역 들노래에도 논에 들어가서 쌍북을 치는 못방구가 있다. 여기서의 방구는 반고, 벅구 등의 이름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는 중형 크기의 북이나 연행 장르를 말한다. 동경대 이또아비토교수가 1970년 초에 찍은 사진을 보면 진도지역에서도 여럿이 반고를 들고 모내기 풍장놀이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레패의 농악도 마당밟이와 비슷하게 농기, 영기, 꽹과리, 징, 북, 장고 등의 편성을 갖는다. 농기(農旗)는 긴 대나무에 꿩장목 깃을 달고 깃발이 너덜너덜 달린 큰 기폭을 달았다. 농기는 용기(龍旗)라고도 하는데, 민화(民畵)의 양태와 많이 닮아 있다. '신농유업', '농자천하지대본' 등의 글자를 쓰기도 한다. 농군들이 김매기 하러 논에 들어갈 때 치는 굿을 두레풍장굿이라 한다. 처음 논에 들어갈 때는 들풍장이라 한다. 김을 맬 때도 풍장을 치고, 김매기를 마칠 때는 날풍장이라 하여 농악놀이를 한다. 참고로 김매기가 끝나는 하루 날을 잡아 농군들이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하여 나누어 먹으며 당산에서 농악을 치고 노는데 이 놀이를 지역에 따라 '백중놀이', '술멕이', '호미걸이'라 한다. 농기(農旗) 그림에서 뛰쳐나온 잡색 양반. 나는 호남우도농악에 속하는 무안읍 양림마을의 잡색 복식을 주목하고 있다. 대개 농악단 잡색으로서의 양반 캐릭터는 게으른 논주인 정도의 컨셉이다. 하지만 양림마을의 잡색 양반은 한편으로 '살보'를 들었다. 일반적으로는 살포라고 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살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 '살포갱이(경남 영산)', 살피(경북), 논물광이(강원), 살보(전남), 삽가래(전남 보성), 손가래(경북), 살보가래(전남 강진)' 등으로 불린다. 손바닥만한 날에 비하여 자루는 길어서 2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남부지방에서는 대나무를 자루로 박아 쓰는 일이 많다. 날의 형태는 네모난 날 끝을 위로 두 번 구부리고 괴통을 단 것, 깻잎 모양으로 앞이 뾰족하고 끝이 위로 두 번 구부러져서 괴통이 달린 것(이를 오리살포라 한다), 말굽쇠형 따비처럼 직사각형의 몸채에 말굽쇠형의 날을 끼운 것, 괭이의 날처럼 위로 한번 구부리고 괴통을 단 것 등 매우 다양하다." 이상하게 생긴 이 도구를 어디에 쓰는가? 논의 물꼬를 트거나 막을 때 쓰는 농기구 중의 하나다. 논에 나갈 때 지팡이 대신 짚고 다니기도 한다. 그것뿐일까? 용기(龍旗) 혹은 농기(農旗)로 호명되는 농악단의 깃발을 보면 염제 신농씨가 들고 있는 살보가 보인다. 주지하듯이 염제 신농씨는 신화시대의 상제(上帝) 즉 하나님이다. 농업과 의약을 최초로 재배하고 발명한 신이기도 하다. 강진 용소마을의 농기를 보면 염제신농씨가 용을 타고 살보를 든 형상이 그려져 있다. 거북이와 물고기 등을 포함해 다양한 민화적 해석은 차후 지면을 기약한다. 신농씨가 들고 있는 살보는 수도작의 키워드라고나 할까. 농업의 코어코드라고나 할까. 농사의 신이 들고 있는 핵심적인 농사도구라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데 무안우도농악에서는 담뱃대나 들고 거드렁거릴 주제의 잡색 양반이 왜 살보를 들고 다니는 것일까? 무안우도농악이 바로 두레풍장 농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이보형에 의하면 이 두레농악 또한 당산제 등의 의례음악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농악대는 농신을 받아 들에 나가 한 바퀴 돌고 마을마당에서 농신제를 지내기도 하고 농사풀이라는 농사짓는 모양새를 꾸미기도 한다. 이러한 농신제나 김매기 할 때의 풍농제 농악을 두레굿이라 한다. 진행 형식이 당산제와 같으므로 종교적인 농악이 두레농악으로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향후 여러 용례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무안읍 양림마을의 농악은 정월 당산제와 김매기 두레 풍장이 마치 하나의 시스템으로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살보는 지배층의 무덤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많으며 임금이 하사하기도 했다. 나는 이를 두레풍장과 관련하여 주목하고 있다. 장차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편의주의적 구분법에 대해서도 이의제기를 할 요량이지만 마당밟이와 두레풍장을 변별하여 논의해왔던 저간의 관행에도 문제제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다. 살보를 든 농악의 잡색 양반이 농기 민화로 들어갔거나 농기의 신농씨가 농악의 잡색 양반으로 뛰쳐나왔거나, 남도의 두레풍장과 농악은 하나의 시스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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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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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1)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음악의 맛을 내는 전통적인 남도소리의 기술. 시김새를 맛에 비교해 설명하는 것이 적절하다. 나는 이를 젓갈, 김치와 비교해 오랫동안 고찰해왔다. 시김새는 악기로 말하면 농현(弄絃)이다. 성악에서 시김새로 소리를 장식하듯이 기악에서 음을 흔들거나 꺾어 장식함을 말한다. 앞선 칼럼에서 술을 삭힌다는 데서 마음을 삭인다는 뜻으로 치환되는 흔적을 추적한 적이 있다. 이른바 남도의 씻김굿 의례 중 '이슬털이'가 그것이다. 그 음악적 총체는 '겨루기'와 '끼어 넣기' 방식이 만들어낸 시나위에 들어 있음도 살펴본 바 있다. 예컨대 남도의 씻김굿 시김새 중 최다출현 빈도를 보이는 것이 꺾는 음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이다. 꺾는 음 즉 <꺾는 목>은 통상 단2도 정도를 미끄러지듯 하강시키는 기술이다. 이를 겹겹이 이어서 발성하는 방식을 남도소리의 '거드렁제'라 한다. 시김새의 꺾는 음은 일정한 유형을 가진 판형 즉 템플릿(Template)이다. 시김새는 음식을 삭히는 기능과 연결되어 있고 마음을 삭이는 기능과 연결되어 있다. 시대적 배경을 신드롬이라는 이름으로 살펴보았지만, 이 발성 기능 또한 그러하니 송가인의 노래를 애호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떤 특정한 시기에 발달한 시대적 특성이기도 하다. 나는 항용 판소리와 민요를 통해 이를 설명해왔는데 송가인이 힌트를 주었다. 이 기술의 반복과 프렉탈 구조, 나아가 시대적 배경들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다시 송가인의 트로트를 주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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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2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이구동성 송가인의 노래는 특별하다고 한다. 트로트의 특징 중 꺾는 테크닉 이른바 '꺾기'의 명인이라는 것. 우리나라 트로트의 시작이라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 꺾는 테크닉이 많이 나온다. 음악으로만 보면, 목포사람 이난영이 토대하고 있던 것도 남도소리라는 뜻이다. 꺾기는 무엇인가? 판소리를 포함한 남도소리 이른바 3음계 음악에서는 이를 '꺾는음'이라 호명해왔다. 나는 일찍이 이를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반음계(크로마티크)에 빗대어 설명해오곤 했다. 브라질 인디언이 무지개에 고통과 죽음을 연계시키는 것처럼 서구인들 역시 반음계 장르는 슬픔과 고뇌를 표현하기에 훌륭하다고 생각했다는 것. 강화된 반음계가 고조되면 영혼을 할퀸다. 저하되더라도 힘이 없어지는 것 아니다. 사람들은 진정한 비탄의 소리를 듣는다. 미분화음을 떠는 방식으로 조율하는 기법을 통해서 장식하는 남도소리의 기술들이 있다. 윗음은 꺾고 가운데 음은 평으로 흘려내며 아랫음은 심하게 떤다. 특히 윗음을 꺾는 다양한 방식을 '다루친다' 혹은 '타루친다'고 한다. 이를 반복해서 꺾는 기교를 '거드렁제'라고 한다. 일반적인 바이브레이션과는 결이 다르다. 진도무악 명인 박병천의 구음이나 송가인의 첫 스승 강송대의 민요 및 트로트에서 드러나는 특징들이 모두 이 기교다. 이를 거듭 반복해 발성하거나 연주하는 프렉탈 구조가 황해로부터 남도에 이르는 황해문화권 혹은 한반도 전반을 관통해온 시김새 곧 삭임의 방식이다. 시김새가 삭힘에서 왔다는 정보는 여러 차례 이 지면을 통해 말해두었으므로 지난 내 글들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사정이 이러하니 판소리나 남도민요를 전공한 이들이 '꺾기'를 특징 삼는 트로트에 강할 수밖에 없다. 감성을 가장 잘 전달해주는 방식이라고나 할까. 더군다나 송가인은 수리성 창법까지 곁들였다. 목청이 곰삭아서 조금 쉰듯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 판소리에서도 제일로 치는 소리목 말이다. 그래서다. 트로트의 근원에 엔카보다는 사실 남도소리가 있다는 점, 다시 분석해볼 수는 없을까? 장유정이 말했든 트로트의 정서가 우리의 민요와 시적 정서를 계승하고 담보하고 있다는 점 불문가지다. 그렇다면 이난영으로부터 온 국민이 사랑했던 국민가수 이미자를 거쳐 송가인에 이른 트로트의 제 몫을 어떻게 찾아주어야 할까? 그 대답으로 나는 '남도트로트'를 제안한다. 판소리와 남도민요를 통칭하는 남도소리의 '남도'와 그 음양의 세례를 받아 지속된 '트로트'를 통칭하는 방법이다. 송가인이 새삼스럽게 그 문을 열어주었다. 내 주장에 동의한다면, 이 땅의 베이비부머세대가 열광하는 트로트의 세계가 선대로부터 이어진 남도소리의 토대로부터 계승된 것이라는 점 인정한다면, 이후 오랫동안 남도트로트의 시대가 지속될 것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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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트로트에 대한 비하격의 호명, 뽕짝에 대한 비난의 강도를 높였던 시절이 있었다. 뽕짝은 일제 40년 동안 친숙해지도록 강요된 거짓노래였다는 것. 노동은의 주장을 빌려본다. "일본민족은 대체적으로 '요나누키'음계와 '미야코부시'음계에다 4분의 2박자로 된 '밥그릇'을 역사적으로 만들어내고, 여기에다 여러 곡조의 밥을 담았다. 그 밥이 다름 아닌 일본식 유행가나 가곡, 기악곡 등이다. 여기에다 일본 민족의 한과 정서를 의미화 시켰던 것. 그런데 이러한 일본민족의 밥그릇을 우리에게 종용시킨 것이 을사오조약부터였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분노는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은은 나아가 우리가 어렸을 때 불렀던 동요들 예컨대 '학교종이 땡땡땡'이나 '퐁당퐁당', '여우야 여우야' 등도 일본식 음계와 장단을 따른 노래들이라고 비판했다. 재고의 여지는 없을까? 일본노래를 번안한 사례를 들어 한국 트로트 전체의 뿌리를 엔카에 비유하는 것이 온당한 것일까? 하지만 한국트로트를 일제강점기의 엔카와 판소리 특히 남도민요와의 융합으로 설명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위키백과사전’에서도 트로트 혹은 뽕짝을 엔카의 요나누키/미야코부시 음계와 남도민요의 영향을 받아 떠는 창법이 특징인 장르로 설명하고 있다. 왜색의 수입가요, 가장 천한 노래 등으로 폄하했던 그간의 시선들과는 사뭇 다른 평가들이다. 장유정 교수는 지금까지 '왜색'과 '천박'의 그늘에 가려서 제대로 가치를 받지 못했던 대중가요의 한 양식이라고 성찰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한국 트로트의 정체성에 대한 일고찰, 구비문학연구, 2003). 임의 부재에서 비롯한 '동경과 그리움의 정서'가 우리 전통의 계승이라는 것과, 임에 대한 과거 지향성이나 임에 대한 시적 자아의 수동성이 민요에 이어 트로트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고바야시 다카유키(小林孝行)는 그의 글 ‘일본 엔카와 한국 트로트 비교를 위한 기초적 관점’(아시아문화연구, 2018)을 통해 그간의 엔카와 트로트 논쟁을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1945년 이후 한국에서는 일제잔재 청산이라는 분위기 속에서 해방 전의 대중가요는 왜색가요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956년에는 '왜색 가요 잔재에 의한 독소를 제거하고 국민 음악을 신흥하자'는 구호 아래 문교부와 국민개창운동 추진회의 공동주최로 '왜색풍 가곡 배격, 계몽강연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만들어져 큰 인기를 얻은 '굳세어라 금순아', '이별의 부산 정거장', '단장의 미아리고개'는 훗날 6.25 3대 트로트로 불리게 된 곡이었지만 금지되지 않았다. 이와는 반대로 1965년 대히트했던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는 왜색가요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엔카와 트로트를 제대로 비교분석 해보지 않고 한일간 민족감정 혹은 국제환경 등의 논리가 앞서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주장이다. 지면상 보다 소상한 설명은 따로 준비하겠지만 떠오르는 의문을 떨쳐버릴 수 없다. 사회적 현상의 하나로 부상한 송가인 증후군, 트로트 신드롬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송가인에 열광하는 베이비부머세대들 모두가 설마 왜색을 추종하거나 찬양하는 것일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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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8)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심신정화 송송태풍(心身淨化 宋頌太風)이란 말이 있더라. 고대로부터 전해오는 의미심장한 사자성어일까? 아니다.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되는 신조어다. 송가인의 노래바람이 심신을 정화시킨다는 의미로 만들었다나. 삼행시 짓기에서부터 열성팬클럽 회원들에 의해 직조된 조어들이 저자에 넘친다. 건배사까지 장르를 뛰어넘는다. 송가인의 본명은 조은심(曺恩心)이다. 예명을 지은 이유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엄마 송순단의 성 송(宋)과 노래 가(歌) 혹은 아름다울 가(佳)에서 따왔다. 송(Song)이 노래라는 뜻이니 일석이조다. 본 이름이 촌스러워 예명을 만들었다는데, 열성팬들은 조은심(좋은 마음)이라 추켜 세운다. 가히 송가인의 시대다. 지난 회 나는 이 지면을 통해 묻지 마라 갑자생으로부터 베이비부머 세대까지 송가인 열풍의 진원지를 분석한 바 있다. 사회 현상의 하나라는 뜻이었다. 연전에는, "송가인의 엄마는 왜 무당이 되었을까"라는 제목으로 송가인의 토대를 분석해보기도 했다. 유행인기에 영합하거나 묻어가자는 것 아니다. 왜 송가인 현상이 폭발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어떤 목마름들이 이 현상을 만들었는가에 대해 주목하는 것이 시대를 주목하는 문화학자의 본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칼럼니스트 최영균은 '커버의 전성시대'라는 화두로 빅히트곡 없는 송가인을 풀이한다.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부르는 커버 활동으로 톱가수가 먼저 되고 히트곡이 나중에 나오는 SNS시대의 풍토를 주목한 셈이다. 송가인의 무엇이 특별한가? 무명가수에서 일약 톱스타로 도약한 송가인, 자고 일어났더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는 언설 그대로다. 백건우는 송가인의 특별함을 탁월한 가창력, 전라도 진도, 판소리와 씻김굿, 엄마 송순단 등 가족, 송가인의 개성과 태도 등으로 분석했다. 다소 과장되거나 현장 상황을 모르고 기술한 부분들이 눈에 띄지만 공감되는 분석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예컨대 탁월한 가창력을 주목한 점. 트로트의 특징 중 '꺾기'가 판소리의 기교와 닮아있어서 판소리를 전공했던 송가인에게 유리하다는 주장,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들이다. 고향 진도가 남도소리의 본고장이라고들 하니 진도나 남도를 내세우는 것은 불문가지다. 송가인 노래의 토대가 되었을 씻김굿에 대해서는 나 또한 지난 칼럼을 통해 소상하게 추적한 바 있다. 어머니 송순단과 외할머니, 외증조할아버지 등에 대한 내력은 지난 내 글을 참고하면 도움이 된다. 송가인의 트로트는 이미 우리 사회를 평정해버렸다. 엠넷 음악 프로그램 '더 콜' 관련 영상 중 최단 기간 동안 100만뷰를 돌파해버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트로트는 마이너 장르였다. 인디음악, 록/메탈에도 밀리는 등수였다. 촌스런 구닥다리 전형적인 뽕짝이었던 트로트가 다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송가인이 그 발원지가 되어버린 셈. 가히 폭발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송가인의 노래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대중음악평론가 김작가(주간동아)의 분석을 빌려본다. 한이 맺힌 목소리, 구성진 음색과 흥이 넘치는 호흡, 정통 중의 전통 트로트라는 호평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한이 맺힌 소리? 구성진 음색과 흥이 넘치는 호흡? 그렇다. 우리 판소리 혹은 민요에 대한 언설 아니던가? 우리는 판소리와 민요를 포함하여 언필칭 남도소리라 한다. 사전적 풀이로는 남도잡가 곧 남도민요를 지칭하지만 판소리를 포함하는 통칭으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의문이 든다. 그렇다면 송가인의 노래가 남도소리라도 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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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7)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증산 강일순은 왜 천지굿이라 이름하고 손수 장구를 메고 춤을 췄던 것일까? 그 이유를 내가 정확히 알 수야 없지만, 증산교가 표방했던 선천과 후천의 개벽사상 혹은 주문 태을주(太乙呪)와 관련해서 해석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태을주는 모든 질병을 내쫒고 선계(仙界)의 개벽을 '태을천상원군'에게 기원하는 주문이다. 이 글씨를 써놓으면 부적이 된다 했다. 충청도 비인에 살았던 도인 김경흔이 50여 년간 공부한 후에 이 주문을 얻어 증산에게 주었고 이를 다시 차경석이 보천교(普天敎)로 가져간 셈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현재 호명하는 우도농악 즉 마을농악에서 연예농악으로 변화된 형태의 농악이 발흥한 곳이 보천교를 중심으로 하는 정읍이라는 점이다. 단체로는 전라도걸궁패, 정읍농악단, 협률사 등이 있다. 양옥경의 글 '근현대시기 호남 우도지역 연예농악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의미'(한국음악사학보 61집)를 인용한다. 보천교는 농악을 의례음악 곧 예악(禮樂)으로 삼고 전국의 농악인들을 총 결집하여 큰 농악판을 벌였다. 1930년대 보천교 교당 뜰에 전국의 쇠잽이, 장고잽이들이 자주 모여들었다. 모두 모집, 선발된 자들이었다. 우도농악의 명인 김오채의 구술에 의하면, 정읍 입암면 대흥리 보천교 교당을 짓고 낙성식할 때도 그랬고, 일명 차천자(차경석을 天子로 불렀음) 집에서 농악판을 많이 벌였던 것 같다. 이때 차천자가 앉아서 구경하곤 했다는 것. 전북대 김익두교수가 차용남의 어린 시절 목격담을 구술 받아 증언한 바에 의하면, 차경석 교주가 십일전 좌상에 좌정한 가운데, 화려한 복색으로 차려 입은 여러 무리의 농악대가 현란한 진법과 율동 및 연주를 선보이면서 서로 경합을 벌였다는 것 아닌가. 지금으로 말하면 농악의 진법(陣法), 악기 겨루기 등이다. 천운을 돌리기 위해 했다는 열두 발 상모놀음, 도둑잽이굿 등도 같은 맥락이다. 보천교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상쇠들은 지금 우도농악의 초창기 명인들로 손꼽힌다. 우도농악이 그만큼 보천교의 천지굿에 영향 받은바 크다는 뜻이겠다. 하지만 농악의 본래 기능은 마당밟이 곧 정초의 지신(地神)을 밟고 지기(地氣)를 울리는 일이다. 축귀(逐鬼)하니 증산의 입장에서는 태을주를 연주하는 일과 같았을까? 아니면 오방색, 삼색 띠, 열두 발 상모, 십이 채 등의 용어에서 보듯이 증산도에서 보천교에 이르는 '정역'의 이치를 연출했던 것일까? 이들 교리나 철학이 어떻게 농악의 진법이나 장단 구성에 활용되었는지 추적하는 일이 난망하지만 누군가는 추적해야 할 일이다. 증산 강일순이 천지굿을 열며 스스로 장구를 메고 노래를 부른 것이나 그 맥을 이어받았다는 차경석의 보천교가 농악을 의례음악으로 삼은 맥락이 연결된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신앙촌의 박태선이 구원파의 유병언, 영세교의 최태민으로 분파되고, 호생기도원의 김종규를 거쳐 장막성전의 유재열이 신천지의 이만희로 연결되는 맥락은 물론, 이들이 행하는 의례음악 편성의 정통 혹은 이단을 분석하는 데도 유용하리라 본다. 이래 저래 그동안 전통이라 여겨오던 것들에 대한 비판적 논쟁이 시작되려나. 인적 뜸한 거리, 어쩌면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풍경들을 대면하는 대한민국의 처지가 옹색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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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6)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당시 600만 신도였던 보천교는 불과 몇 십 년 만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졌다. '한국신종교대사전'(김홍철 편저, 2016)에 의하면, 1860년 수운 최제우의 동학 이후 창립된 신종교만 700여개에 달한다.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이렇게 많은 종교를 재구성하고 소비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라도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는 응당 이단(異端) 논의가 뒤따른다. 굳이 표현하자면 가짜종교 논쟁이라고나 할까. 이단은 전통이나 권위, 세속적인 상식에 반하는 주장이나 이론을 말한다. 코로나19 사태로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신천지'도 그 중 하나다. 신천지가 이단인지 아닌지는 보는 이의 입장에 따라 견해를 달리할 수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가 가지는 전통이나 권위와 상식에 반하는가 조응하는가다. 전체 공동체의 안위에 심각한 피해를 끼치는 종교집단이라면 그것이 신천지이든 개신교 일반이든 혹은 불교의 어떤 종파든 이단의 범주에 넣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번에 무안군 현경면 물바위를 소개한 바 있다. 국가적 위난에만 바닷물이 넘친다는 신비한 바윗돌이다. 다시 한 번 가봤다. 아직 물이 넘치지는 않은 모양이더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까? 세상이 어지럽고 균형이 안 잡히니 풍설(風說)만 요란하다.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 삼아 판단하고 행동해야하는데 요설에 더 귀를 기울이거나 국가의 정책 결정에 불만을 토로한다. 고작 물바위 전설이나 바라보는 꼬락서니랄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왜 사람들이 이 바위에 현실을 투사하는가에 있다. 내가 도참바이러스라 이름 짓고 현상을 훑어봤던 이유다. 도참(圖讖)은 설화나 루머로 유포되는 예언들이다. 앞날의 길흉에 대한 예언을 믿는 사상이다. 대표적인 것이 정감록(鄭鑑錄)이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어온 유사본들이 있다. 주로 사회가 불안할 때였다. 위정자의 말을 인정하지 않거나 반발하는 것은 사회가 불안정하다는 얘기다.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빈부의 격차가 심할 때 융성한다. 이것이 극에 달하면 혁명이 일어난다. 백성(시민)이라는 이름의 배는 위정자들을 싣고 순항하다가도 어떤 격절(隔絶)에 이르면 태풍 불듯 배를 뒤집어 버린다. 지금 유행하고 있는 코로나19 여파를 보니 상황이 만만치 않다. 물리적인 병균만 문제가 아니라 루머에 현혹되는 도참 바이러스가 다시 소환되는 게 문제다. 가짜뉴스를 넘어 가짜 종교까지 소비하는 사회라고나 할까. 20세기 초입, 700여개의 종교를 만들면서까지 고군분투했던 우리네 조상님들을 그려본다. 처연(悽然)하다. 무엇이 그들의 심령을 그리 갈급하게 했던 것일까. 다시 21세기 초입, 우리는 1세기 전과 얼마나 달라졌거나 성숙했을까. 동학과 증산교, 그리고 보천교의 신종교들을 후천개벽으로 호명하는 시대정신의 응전이라 할 수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는 이른바 이단으로 호명되는 종교들의 준동 또한 정통종교와 정치 등 사회 시스템에 대한 고발일 수 있다. 정통이라 호명되는 종교가 그만한 역할과 권위를 갖고 있는지 혹은 이단보다 더 이단이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일이 중요해진 셈이다. 코로나19 진정국면이 오면 아마도 담론화 될 종교적 이단(異端)논의의 밑자락을 우선 신종교 증산교와 보천교를 예증삼아 깔아둔다. '신천지교'가 더 융성할지 '보천교'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전염병의 창궐 못지않게 가짜뉴스와 종교 이단의 소비에 대한 논쟁을 촉발시킨 것은 틀림없는 듯하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에 기생하는 기생충, 가짜뉴스와 가짜종교에도 전염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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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5)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하루는 걸군(지금의 농악)이 들어와서 굿을 친 뒤에 천사께서 부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를 들어 메고 노래를 부르시며 가라사대, '이것이 곧 천지굿이라. 나는 천하 일등 재인이요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 가서 빌어야 살리라' 하시고 인하여 부인에게 모당도수를 정하시니라. 하루는 천사께서 반듯하게 누우신 뒤에 부인으로 하여금 배 위에 걸터앉아 칼로 배를 겨누며, '나를 일등으로 정하여 모든 일을 맡겨 주시렵니까?' 라고 다짐을 받게 하시고, 천사께서 허락하여 가라사대, '대인의 말에는 천지가 쩡쩡 울려 나가나니 오늘의 이 다짐은 털끝만치도 어김이 없으리라' 하시고 이도삼, 임정준, 차경석 세 사람으로 증인을 세우시니라" '대순전경'(증산교본부, 1947)에 나오는 대목이다. 1908년 1월 정읍 입암면 대흥리에서 벌어진 일명 천지공사(天地公事) 풍경이다. 강일순(姜一淳)과 고판례(高判禮)가 행한 굿판, 이를 '천지굿'이라 한다. 이때 강일순의 나이 30대 후반이었다. 풍경은 살벌하게 이어진다. 마당에 유교, 불교, 기독교 등의 책들을 찢어놓고 고판례가 그 위를 밟으며 칼춤을 추었다. 억눌려 살아온 여성들을 해방하는 굿이었다고나 할까. 이때 고판례가 받은 수부(首婦)라는 호는 여성의 우두머리란 뜻이다. 고판례의 칼춤 아래 찢긴 제반 종교 서적들은 여성, 나아가 천한 계급들을 억압하는 상징이었던 셈이다. 마치 역병과 가뭄에 벌이는 여성 전유의 도깨비굿이라고나 할까.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을 중심 세우는 사회로의 선언이니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뒤집히는 개벽굿이었던 셈이다. 동학혁명의 발생지 전북 고부에서 태어난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이 제창한 증산교의 시작은 1901년 20세기 벽두였다. 증산교를 초기에는 훔치교(吽哆敎)라 했다. 훔(吽)은 태을주(太乙呪) 주문을 시작하는 말이다. 소(牛) 울음소리(口)를 상징하는데, 창조의 근원 소리라고 주장한다. 무속, 선교, 불교, 유교, 도교, 기독교적 요소들을 포함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 천지굿, 증산교(甑山敎)에서 보천교(普天敎)까지. 신흥종교들이 매양 그렇듯이 창시자를 메시아로 받드는 경향이 있다. 강일순을 옥황상제와 미륵불로 치부하는 것도 그렇다. 옥황상제는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하느님이다. 미륵보살은 내세에 성불하여 사바세계에 나타나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보살이다. 일종의 메시아 신앙이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을 시발 삼아 일어났던 1894년 동학혁명 때, 강일순은 불과 24세였다. 불같던 나이에 겪은 동학혁명의 참상이 주었을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강일순은 유, 불, 선, 음양참위 관련 서적들을 탐독하였으며 충청도 비인에서 김경흔에게 태을주(太乙呪) 주문을 받고 연산에서 '정역(正易)'의 저자 일부 김항을 만나 시대를 논의한다. 31세 때인 1901년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를 시작한 지 며칠 만에 천지대도를 깨달았다 한다. 이후 신통묘술 예언을 하고 병을 치료하는 등 기적을 행하니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유, 불, 선을 융합했으며 기독교적 요소들까지 포괄한데다 신통력까지 발휘하니 어지럽던 세상에 주목을 끌 수 있었겠다. 24절기에 따라 24종도가 있었다거나 경전 28장에 따라 28종도가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내용은 추적해보지 못했다. 차경석과 그의 이종 누나 고판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이른바 수부공사를 하게 될 때까지 수련과 수양의 시절이었겠다. 불안한 시대 탓인지 교세는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많은 이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1909년 39세의 짧은 나이로 죽게 되자 교세가 기울게 된다. 침잠기를 거쳐 1914년, 증산 강일순을 교조(敎祖) 삼고 고판례를 교주(敎主) 삼는 선도교(仙道敎)가 재출발한다. 교세가 번창하게 되자 이종 동생이었던 차경석이 다시 보천교(普天敎)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분리한다. 고판례는 1919년 다시 태을교(太乙敎)라는 이름으로 교파를 분리한다. 이후 안내성이 여수에서 선도교(仙道敎, 1913)를, 이치복이 원평에서 제화교(濟化敎, 1916)를, 김형렬이 전주 모악산에서 미륵불교(1919)를 세운다. 이외에도 박공우, 문공신, 김광찬 등이 각각 교파들을 세우며 분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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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4)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이들이 상징으로 내세운 '치우천왕기'는 2002년 월드컵을 정점으로 전국화 되기에 이른다. 국가에서 채택하지 않았을 뿐, 일반인들에게는 한국을 나타내는 엠블렘(emblem, 전형적인 상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뉴밀레니엄을 기점으로 급변한 관광문화 측면의 국가적 이미지를 생각해보면 붉은악마 치우천왕의 이미지가 얼마나 현격하게 부상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1970에서 1980년대 산업부흥기에는 아리랑, 고궁, 전통춤 등의 이미지들이 한국을 상징했다. 1990년에서 2000년에 이르는 밀레니엄 말기에는 레져, 스포츠, 쇼핑 등 체험과 관광형태의 이미지로 변화된다. 이것이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붉은악마, 축구, 정보기술, 태극기나 '대~한민국'이라는 구호 등으로 재구성되기에 이른다. 때마침 한 천년이 가고 새 천년이 오는 기점이었다니 이 얼마나 오묘한 조화란 말인가. 국가 이미지로 등극한 여러 가지 것들 중에서 매우 현저하게 밀레니엄을 가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 명징한 장면 전환으로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을 손꼽아보면 '다시 천년'을 충족할 그 무엇이 부상할 수 있겠는가? 하다못해 한 편의 드라마 서사라도 어떤 분기점을 지날 때는 스펙터클한 장면을 구성하지 않는가 말이다. 일년의 한 기점 설날을 보내기 위해서는 설빔을 입고 조상에게 제례하며 묵은 한 해를 씻어 보낸다. 하물며 일백년도 아니고 천년이 가고 다시 천년이 오는 기점이지 않은가. 자연발생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알지 못할 기운들의 추동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바로 이때 '치우천왕기'가 나타나고 '붉은악마'를 외쳤던 것이다. '도깨비'들을 능가하는 명실상부한 도깨비 같은 획기적인 장면전환, 이보다 더한 장면이 있을까 싶을 만큼 스펙터클한 장면들이었다. 이전의 레드콤플렉스를 순식간에 벗어 제치며 새로운 시대 패러다임으로 부상하였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이 현상은 분명히 '다시 천년'을 가르는 장면 전환이었다. 헌 천년을 보내고 새 천년을 맞이하는 통과의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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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붉은악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붉은악마는 다 계획이 있었구나! 2020년 아카데미 4관왕을 휩쓸며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영화 '기생충'에서 아버지 기택(송강호)이 아들에게 불쑥 던지던 말을 생각한다. 농담처럼 던지는 이 언설이 가지는 아우라가 깊다. 코믹으로 가장한 이 중층적인 우문(愚問)의 형식은 이미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정착한 것 같다. 천년이 가기 전 계획을 세워두고, 새로 올 천년의 시작으로 월드컵 2002년을 맞이했다고나 할까. 공식적인 국가대표팀 응원단이 아니었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2006년 운영진 해체를 결정하지만 이들이 남긴 여운이 생각 이상으로 방대하다. 의도하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1997년부터 2017년까지라는 엠블렘의 표기가 주는 파장들이 있다. 20세기를 넘기고 21세기를 맞이하는 뉴밀레니엄의 분기점을 시사해준다고나 할까. 붉은악마라는 별명은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이 먼저 사용하고 있던 호명이다. 문자 그대로 직역해보니 붉은 세 자매 복수의 여신이다. 머리카락은 뱀이고 날개를 달았다. 그리스와 로마신화를 통해 알려진 이 신화는 호머의 일리아드 등에 나타난다. 죽은 자의 분노에 대한 초자연적인 의인화다. 그런데 이 분노의 세 여신을 왜 붉은악마로 번역했을까? 성격을 같이 하는 우리의 여신 특히 분노하는 여신이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PC통신을 통해 제안되었다던 명칭들에서 대강의 고충이 보인다. '레드월리어', '버닝파이터즈', '레드헌터', '레드맥스', '레드컨쿼리', '쿨리건', '레드타이거', '레드에코', '레드유니온', '레드일레븐' 외에 '꽹과리부대', '도깨비' 등 주르르 쏟아진다. 이들이 어떤 이미지들을 연상했는지 대강의 윤곽이 보인다. 태극기를 앞세운 에너지라든가 기운생동을 포괄하는 이미지가 대표적으로 채택되었다. 그 핵심이 치우천왕 깃발이다. 그들이 제안했던 꽹과리부대나 도깨비의 이미지에 가장 어울리는 캐릭터였을 것이다. 붓글씨 도안이나 숫자 12, 국악장단 등의 기획이 모두 이 아이디어와 연결되어 있다. 다시 천년, 개인들의 새로운 공동체로 뉴밀레니엄의 변화들이야 각계각층 각 장르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나현신,김현주의 「뉴밀레니엄시대 패션에 나타난 '페이크 펀(fake fun)' 디자인」을 참고한다. 2000년 이후 기성복 컬렉션을 보면 오브제의 쓰임새를 엉뚱한 위치로 이동시키거나 착용 위치를 뒤바꾼 스타일 등의 위치 왜곡, 의복의 일반적 형태를 왜곡하고 정상적인 착장 형식을 파괴하는 형태 왜곡, 눈속임 기법 등 현실 세계에서 불가능한 조합과 부조화를 통한 일탈 등이 일상화된다. 보는 이에게 유쾌한 감정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 '페이크 펀'이 뉴밀레니엄 시대의 주요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했을까? 기왕의 패러다임을 전복시키거나 희화화 시키는, 그래서 새 시대를 보다 즐겁고 재미있게 맞이하는 태도들이 두드러졌음을 보여준다. 마치 장난을 좋아하는 도깨비들의 심성이라고나 할까. 이제는 누구 눈치 보지 않고 권세에 주눅 들지 않으며, 기성의 양식과 제도를 비틀어 조롱하거나 비판하고, 그것을 당당하게 패션이나 각 장르들의 전면에 내세우는 시대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월드컵 축구 응원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일사 분란한 동원 체제를 강조하는 듯 보여도 사실은 페이크 펀에서 보여주는 놀이의 수단이기도 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월드컵 응원에 놓인 이 중층적이고 양가적인 태도는 이후 벌어질 촛불집회로 승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러나 이것이면서 저것이기도 한 복합적인 존재의 의미를 거리낌 없이 쏟아낼 수 있는 준비를 하였던 시기였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기왕의 좌파, 우파의 구분법을 뛰어넘어, 붉은 치장을 두르고 붉은악마가 되었다가 광장의 촛불이 될 수 있었겠는가. 이제 2000년 뉴밀레니엄을 맞이하고 두 번의 십년을 보내고 있다. 이전의 천년과 새로 온 천년은 시간의 분절이라는 관습적 기점의 어떤 비전들을 설정하였나? 만약 설정하였다면 그 비전은 어떻게 이행되고 있나? 한국의 크고 작은 광장을 가득 메우면서 뉴밀레니엄을 열었던 붉은악마와 함께 분노의 여신, 페이크 펀, 내셔널리스트 치우의 등장을 다시 주목해보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 붉은 흐름이 어찌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톺아보는 것도 놓치지 않으려 한다. 왜 '다시천년'의 기점에 이들이 등장하게 되었으며 그 의미는 또 무엇일지 추적해보는 시간을 마련해보려 한다. 거듭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야말로 통과의례였다는 것, 이 의례를 통과하지 않으면 뉴밀레니엄을 도저히 열 수 없었던 불가피한 놀이였다는 점이다. 고작 일 년이 그렇고, 한 세기도 그럴진대 아무려면 한 천년이 그냥 올수야 있겠는가. 나는 지금 유쾌한 반란, 다시천년 벽두의 붉은악마를 애틋하게 추억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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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2)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광장 한복판으로 한 무리의 도깨비들이 쏟아져 나왔다. 낮밤을 가라지 않았다. 낮도깨비, 밤도깨비들이 섞여 나오니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들 붉은 옷을 입었다. 머리에도 붉은 띠를 둘렀다. 얼굴에도 붉은 칠을 했다. 태극기를 몸에 두르거나 치장을 했다. 모든 것이 붉은 색이었다. 아이 도깨비, 어른 도깨비 남자 도깨비, 여자 도깨비, 반상의 구별이 없었고 지위의 고하가 없었으며 성별의 차이도 없었고 빈부의 격차 또한 따져 묻지 않았다. 개별적으로 나왔으니 개인이었고 함께 뭉쳤으니 공동체였다. 2002년 한국의 모든 광장에서 일어난 괄목할 만한 풍경. 어떤 이들이 도깨비 무리라고 표현했던 이 현상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 없으리. 이들을 자타가 붉은악마라 불렀다. 악마라니! 고지식한 어떤 이들은 악마라는 낱말에 불쾌해 하기도 했다. 아무려면 붉은 천사라고 부를까? 그러나 상관치 않았다. 페이크 펀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천년' 뉴밀레니엄을 기획한 어떤 도깨비들의 장난이었을지도 모른다. 붉은악마로 호명되던 광장의 물결, 많은 연구자들은 이 현상을 레드 신드롬이라 불렀다. 남북 분단의 시대를 거치며 불온한 색깔의 대명사였던 붉은색이 관습적 대표성을 탈각했던 것일까? 공포와 두려움으로 포장되었던 반공, 빨갱이, 불조심 따위의 적색 기호가 순식간에 열광의 색깔로 바뀌어버렸으니 말이다. 분단모순이 일시적이긴 했지만 사라졌던 것 같기도 하다. 혹은 붉은색에 대한 기호와 경계에 대한 세계의 시선들이 그리고 그 흐름이 바뀌었던 것 같기도 하다. 사람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지만 붉은색에 대한 금기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뉴밀레니엄의 시작과 보조를 맞춘 기획이라니. 오래된 천년이 가고 새로운 천년이 오는 길목을 장식한 명백하고도 확실한 기호였다고나 할까. 기업들은 이때로부터 붉은색을 소재 삼아 마케팅에 열을 올렸고 국가도 본의 아니게 우리나라를 상징할 만한 정체성(아이덴티티)으로 수용하기에 이르렀다. 도깨비와도 같은 이 어처구니없는 현상이 '다시천년'의 도도한 기점을 통과했던 의미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 자발적이고도 충동적인 붉은 색깔의 축제를 도대체 누가 추동하였던 것일까? Be the Reds! 2002년 월드컵 4강을 달성하며 거리로 쏟아져 나온 붉은 물결, 이름을 어떻게 짓든지 이 현상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획기적이고도 자발적인 사건이었다. 누가 나오라고 해서 나간 것도 아니고 붉은 옷을 강요해서 입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능동적인 에너지들이 분출한 문자 그대로 창조적 축제였다. 일시적이긴 했지만 지역과 성별을 넘어 세대와 계층을 넘어 '우리'를 외쳤다. '대~한민국'이란 구호를 국악장단의 하나로 해석하느라 바빴다. 리듬의 격절을 핑계 삼아 엇모리장단이라고 주장한 이들이 있었다. '오~필승 코리아'로 단일민족의 함성이 삼팔선 남쪽 전역에 울려 퍼졌다. 마치 집단최면에 걸린 듯 했다. 붉은 옷, 붉은 머플러, 아이들에서 노인들까지 페이스페인팅(face painting, 얼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했다. 붉은색의 본질적 색감 성향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대한민국의 모든 세대들이 마치 붉은 혈기가 분출하는 것처럼 몇 달간 흥분에 휩싸인 시기였다. 가장 현저했던 구호는 'Be the Reds!' 비틀즈의 'Let it Be!'를 연상하게 하는 이 구호는 문자 그대로 빨간 색의 실천이었다. 이를 두고 누구 하나 6.25전쟁의 북한군 깃발이나 혐오와 배제의 '빨갱이'를 떠올리지 않았다. 박영철씨가 디자인한 글씨는 전형적인 붓글씨였다. 'R'자는 숫자 12를 상징하는 등 민족적인 의미부여도 각별했다. 언제부터 이 낮도깨비들이 나라를 지키는 정령이라도 되었던 것일까? 태극기, 엇모리장단, 오~필승 코리아, 숫자 12, 이들 키워드를 관통하는 주제는 나라 혹은 민족 따위의 그런 개념들이었다. 그것도 불온의 대명사 붉은 색깔로 도배를 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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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1)이윤선(문화재 전문위원) 한자어 '민요(民謠)'는 성종실록에 한 차례 나온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민요'보다 '민속가요(民俗歌謠)'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세종실록, 성종실록, 중종실록, 명종실록, 효종실록에 각 1회씩 5회 출현한다. 지배 권력을 갖지 못한 백성들이 불렀던 노래를 지칭하는 개념어는 민요가 아닌 '이요(俚謠)'였다. 속된 노래라는 뜻을 갖는 '이요'는 한자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한글로 지어 부른 노래를 지칭하는 말이라 해석된다. 배인교가 <일제강점기 민요의 개념사적 검토>라는 논문에서 자세하게 논의해 두었다. 여기에서의 '민속가요'가 속가(俗歌) 혹은 민요(民謠)다. 그렇다면 '이요'로 호명되던 노래가 어찌 민요라는 이름으로 정착하게 되었는가. 선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한 바는 1920년대 민요의 발견 혹은 재발견이다. 민족과 민중이란 이름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따라서 이 용어의 남상(濫觴)과 태동은 가요와의 병립 속에서 추적해야만 한다. 20세기 초 계몽의 시대를 거치며 종묘제례악에 쓰이는 의례용 음악에서부터 여자 기생들의 노래와 민간의 노래를 두루 일컫던 명칭은 '가요'였다. 고려민요라고 하지 않고 고려가요라 하는 데서 이를 엿볼 수 있다. 임경화는 그의 논문 <'민족’에서 ‘인민’으로 가는 길: 고정옥 『조선민요연구』의 보편과 특수>에서 가요와 민요의 분화 과정을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 호명은 점차 서민예술에 기반한 전통적 노래 양식을 지칭하는 말로 의미의 전환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가요를 '민풍(民風)'의 차원에서 접근했던 시기였다. 이때의 가요에 대한 생각은 '풍(風)'의 요체를 민속가요의 시 혹은 여항(閭巷)의 노래에서 기원한 노래로 규정한 '시경(詩經)' 이래의 전통이다. 주지하듯이 '시경'의 50% 이상이 '풍(風)'이라는 민요다. '민요'라는 용어는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나긴 하지만 사실상 새로 발명된 용어다. 민속, 민예, 민중 등 1900년대 초반 수입된 용어들을 일본어를 거쳐 번역했다. 'Volkslied'의 번역어가 민요인데 두 가지 뜻이 있다. 타민족과 구별되는 우리 '민족의 노래'라는 의미가 첫째요, 문명의 상징인 문자를 향유해온 특권계층에 대해 구술의 세계에 머물러 있는 피지배 계층으로서의 '민중의 노래'라는 의미가 두 번째다. 일본어의 번역어로 식민지 조선에 이식되어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이 용어는 당초부터 지방성이나 계급성, 문화적 차이가 민족으로 수렴되는 '민족의 노래=민중의 노래'로 일원적으로 파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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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신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신청은 전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昌才都廳案)'과 '경기재인청선생안'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건륭 사십구년에 작성되었으므로 1784년이다. 남도지역에서는 나주장악청, 장흥신청, 여수 악공청, 진도장악청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내가 참여해 이경엽 교수와 함께 연구 출판했던 '여수 영당 풍어굿, 악공청'(민속원, 2007)을 참고해보면 여수악공청의 중건은 1939년이다. 신청의 선생들 내력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이 1928년에 작성되었으므로 여수 또한 역사를 조선시대로 올려 잡을 수 있다. '선생안'은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이경엽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장흥신청은 1832년(순조 32)에 '신청완문(神廳完文)'이 작성되는 것으로 보아 그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해체되었다가 1919년 중건되었고 1921년에는 외청 세 칸을 더 지어 신청 기능을 복원하게 되었다.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갹출하여 음악전수를 할 수 있게 된 내력을 적은 장악청중건기가 전한다. 악공청, 장악청, 신청 등의 용어가 병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동아일보 기사는 진도 장악청 정보를 전해준다. 당시로부터 약 300여 년 전부터 진도읍 성내리 장악청(?樂廳) 속칭 신청(神廳)이 있어 일반 광대들에게 조선음악을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한자표기는 달라도 속칭 신청이라 했다는 언술이나 기타 내용들은 모두 신청(神廳) 관련 정보들이다. 이 언급을 적용해보면 신청의 존재가 1630년대로 소급된다. 광해군 일기 10년(1618) 10월 16일 기사도 참고가 된다. 재인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산주재인(山主才人), 도산주(都山主)라는 호칭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호명은 재인 집단의 존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재인청, 신청, 광대청 등 전문음악인들의 집단과 생활을 추정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정보들을 보면 신청이 전국적으로 존재했으나 전라도지역이 가장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청의 역사를 고려말 진도 장악청으로 올려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추적이 필요해보이지만, 이른바 무계들의 집단이자 공사의 음악업무를 담당했던 신청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뿌리, 나주신청의 복원 지난 5월 25일, 나주에서 뜻 깊은 자리가 마련되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 행사였다. 이경엽교수와 윤종호 나주시립국악단 예술감독의 발표를 통해 그간 묻혀있던 보물 같은 자료들이 소개되었다. 나는 토론을 통해 그 의미와 역사를 짚어봤다. 이경엽은 1937년 발간된 아키바 다카시(秋葉隆)와 아카마쓰 지조(赤松智城) 공저 <조선무속연구>를 통해 나주신청에 보관되어 있던 여섯 종류의 문서를 설명해주었다. 선생안(1800년)과 절목(1882년), 대동보안(1899년) 등이 그것이다. 이 자료들은 경성제국대학을 거쳐 서울대박물관에서 유리건판 사진으로 보관되어 있다. 주목할 것은 선생안에 수록되어 있는 정원길(1834~1903)과 정원실(1838~?)이다. 정원길은 정재근의 아버지다. 정재근은 박유전을 시조삼고 있는 서편제를 보급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아들 정응민 대에 이르러 판소리의 중흥기라고나 할까, 이른바 보성소리라는 유파로 불리는 서편제의 큰 맥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이 선생안에 수록되지는 않았지만 판소리 후기 5명창 중 한사람인 김창환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종 40주년 칭경식의 대표를 맡아 행한 업적들이 다대하기 때문이다. 1902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극장 협률사가 설립되었는데 전국의 판소리 명창, 가기(歌妓), 무동(舞童) 등 170여명을 모아 전속단체를 만들고 공연을 주도한 인물이다. 이때 합류하거나 소속되었던 예인들의 창발이 오늘날 전통음악을 재구성하는 큰 흐름이었다는 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협률사와 이후 연계되는 원각사의 명암들이 짙은데, 무안사람 강용안과 더불어 만든 창극이며 삼현육각 등 관련한 자료와 인물연대기는 따로 후술하겠다. 어쨌든 정원길의 대를 이은 정재근이 정응민과 정권진으로 다시 안채봉, 조상현, 성우향, 성창순 등으로 이어지고 또 한 사람의 획기적인 인물 정창업의 예술을 정학진과 김창환이 이어받아 김봉이, 김봉학으로 다시 오수암, 정광수, 임방울 등으로 이었다는 점 괄목할 만한 풍경이다. 가히 서편제의 맥을 나주신청에서 총괄하고 확산한 셈이라고나 할까. 그 뿐인가, 가야금산조의 창시자 김창조를 잇는 안기옥과 정남희 등은 월북하여 북한 전통음악을 재구성하기도 한다. 이 음악들이 오늘날의 트로트나 가요로 확산된 맥락도 흥미롭다. 천년도읍지라는 점을 떠나서도 나주신청의 개관이 갖는 현대적 의미가 막중하다. 판소리 서편제와 남도 삼현육각의 맥을 좇아 전남도립국안단은 물론, 진도, 여수, 무안 등지의 예술단과의 네트워크, 미래전략으로서의 연구와 공연 확장 등 과제가 산적해 있다. 나주신청문화관의 개관을 누구보다 축하한다. 남도의 음악을 넘어 우리나라 나아가 아시아의 음악을 총괄하고 확산하는 센터로 기능해주기를 바라는 마음 나 뿐 만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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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진도에 고려 궁궐 '장악청'(掌樂廳) 전통이 이어져 왔을까? 도리 기둥을 한 여섯 간(약 20평)의 조선 기와집이었다. 방이 셋이고 봉당, 대청, 정지 등이 있었다. 주위에는 26~27호 정도의 당골 집안이 살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집지을 때의 각서가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 무신도나 초상들이 걸려있지는 않았다. 조선말엽에 이 건물을 중수하기 위해 헌금을 한 한참사, 임참사, 박참사 등의 이름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지난 토요일 나주 신청문화관 개소식에서 발표한 목포대 이경엽 교수의 "왜 신청인가, 무엇을 어떻게 주목할까"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신청을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다는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인용한 정보다. 설명은 이어진다. 장악청에 출입하던 사람들을 '고인, 공인, 재인'이라 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다. 주야를 막론하고 항상 십여 명이 모여 예능을 닦고 놀이를 하였다. 당골 무계이기 때문에 무업에 종사한 것도 주요 일과 중의 하나였다. 장악청의 대동계를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석하여 음악기량을 익혔다. 신청에서 사용했던 악기는 북, 장구, 쇠,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젓대, 해금 등이었다. 향유한 노래는 판소리 단가를 비롯해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등이었다. 전북대 정회천 교수가 흥미로운 발상을 추가했다. 다른 지역에서 신청이라 부르던 공간을 왜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을까? 삼별초에 의해 또 하나의 정부가 세워졌던 곳이기에 고려 이래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제기였다. 장악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음악을 담당하던 국가기관 장악원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악원(掌樂院)은 고려시대에는 태악서(太樂署)라 하다가 전악서로 바꾸었고, 조선 초기 아악서, 전악서, 악학, 관습도감을 합쳐 세조 12년(1466)에 장악서로 통합하였다. 예종 원년에는 다시 장악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청을 재인청, 광대청, 공인청, 공인방, 악공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던 내력을 상기해보면 진도의 장악청을 고려 말까지 소급하는 상상이 그리 엉뚱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 현재 진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된 것은 아닐까? 신청(神廳)이란 무엇인가 신청(神廳)을 알기 쉽게 말하면 전통시대 민간연예인협회 정도일 것이다. 무업을 하고 공연활동을 하거나 각종 음악을 연마하고 전수하는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연예인협회보다는 훨씬 기능이 막중한 단체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적인 단체였으면서 공적인 기능도 담당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천민 집단에 속하는 무계였지만 중앙이나 지방 관아에 악공, 취고수, 세악수 등 공적인 음악을 담당하기도 했고, 선생안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예술 선배이자 조상격인 선대들의 제사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필영 교수가 집필한 위키실록에서는 신청(神廳)을 신당(神堂)과 동일한 개념으로 풀이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 숙종대에 신청(神廳)이라는 이름이 3건 확인되는데, 무당이 여러 신령을 모시고 굿을 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숙종대 장희빈의 인현황후 저주 사건에 등장하는 활과 화살 등을 신청 내부 물건들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신청은 이 굿당과는 다른 개념이다. 나주의 역사를 기록한 <금성읍지>(1897년)에 보면 통인청, 훈련청 등의 이름과 함께 교방청(敎坊廳)과 신청(新廳)의 이름이 나온다. 특이한 것은 귀신 신(神)자를 쓰지 않고 새로울 신(新)자를 썼다는 점이다. 교방청은 춤, 검무 따위를 가르치던 기녀양성 기관이고 신청은 악공소(樂工所)라는 설명이 따로 붙어 있는 것처럼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을 가르치고 공적인 공연을 연행하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무계 집단의 공간이자 협회적 성격이라는 점에서 통칭 신청(神廳)이라 호명하는 것을 두고 무굿을 하는 굿당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권문세족들의 다양한 전통에 견주어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판소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전통음악이 신청이라는 공간과 관련 선생들을 통해 보존되고 전승되었음을 이해한다면, 나아가 천한 것으로 이해되던 문화들이 오히려 장대한 전통으로 전승 보존되는 시대정신을 주목한다면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굿당도 존재가치가 인정되고 존중받는 공간이지만 여기서 말하는 재인청, 장악청 등의 신청과는 성격이 다르다는 점 강조해둔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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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 (8)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벽오동 심은 뜻은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제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아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디 모습 남아 있고 버드나무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삼척동자라도 외고 다닐만한 우리 한시의 정수다. 조선 중기 신흠(1566~1628)의 '상촌선생집'에 나온다. 비유대로 선비의 지조와 충정을 강조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정의 문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황은 이 시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예로부터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잣나무를 심으라 했다. 딸을 시집보낼 때 오동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혼수를 장만하고 잣나무는 관을 짜는 데 사용했다던가. 지조와 정조 따위의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속담이나 시의 행간에 당대인들의 욕망이 빼곡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오동 중의 오동은 벽오동(碧梧桐, 푸른 오동나무)이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시인 묵객들이 벽오동을 소재 삼아 풍월을 읊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트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 가지에 걸렸어라." 작자 미상의 시로 김도향이 이 시를 인용한 가요를 불러 유명해지기도 했다. 벽오동의 그리움에 대한 정조는 생각 이상으로 광범위하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계량을 그리워하며'라는 유희경의 시다. 여기서의 계랑은 물론 전북 부안의 매창(이향금)을 말한다. 매창과 유희경의 정열적인 사랑, 허균과 나누었던 십여 년간의 정신적인 사랑은 아직까지도 고금을 횡단하는 전설로 남아 있다. 여기 등장하는 오동나무들은 못다한 사랑, 그리움, 기다림의 정조를 대변한다. 도대체 무엇이 오동나무에 대한 이 지극한 감성들을 촉발했던 것일까. 전설은 다시 전설을 낳는다. 매창이 38세의 나이로 죽을 때 거문고와 함께 묻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안겨 천년의 깊은 잠에 든 거문고 벽오동은 아직도 청정한 성음을 가지고 있을까. 성음(聲音) 품은 나무를 찾아서 나무는 성음을 품는다. 성음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의 음성으로 하는 음악이라 풀이해두었다. 종류에 따라서는 창가, 민요, 가요, 가곡 따위로 구분하고 연주 형태에 따라서 독창, 중창, 합창, 제창으로 구분한다. 목소리나 음성을 넘어 음악 전반을 지시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판소리 등의 성악을 감상할 때 성음이 좋니 나쁘니 한다. 절대음감으로의 톤이나 키만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의 성음은 그 단계를 넘어선다. 높고 낮음, 맑고 탁함, 깊고 얕음, 슬프고 기쁨, 화나고 차분함 등을 넘어, 소리에 투영한 휴머니즘의 융숭 깊음과 그 지극함을 따지기 때문이다. 절대 음가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 음가(音價)라고나 할까. 성음이라는 기표에 함의된 미학의 세계가 매우 광범위하다. 악기의 성음을 따져 묻기 전에 나무의 성음을 먼저 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주시 지정 무형문화재 이복수(1953~본래 이름은 이준수다) 장인의 주장은 단호하다. 우리 악기를 만드는 제일차적인 일은 좋은 나무를 고르는 일이다. 좋은 나무는 어떻게 고르는가? 산이나 들에 들어서면 토양과 산세의 지형을 보고 바람과 구름의 흐름을 듣는다. 동남쪽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와 서북쪽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는 성질이 다르다. 계곡에서 자라는 나무와 산 정상에서 자라는 나무가 확연하게 다르다. 우거진 숲과 메마른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가 또한 다르다. 눈에 보이는 풍경만이 풍경이 아니요, 귀에 들리는 바람만이 바람이 아니다. 햇볕이 잘 든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음지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나무가 좋은 성음을 품는 것은 천지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경우다. 오동나무가 선호되는 것은 다른 나무에 비해 성장의 균형과 가치 음가의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돌밭에서 자라는 이른바 석산오동(石山梧桐)이 선호되는 것도 재질의 장력이 견고해서만은 아니다. 벼락 맞은 오동나무에 대한 환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 나무에 스며든 햇빛과 달빛과 별빛들, 수많은 가뭄과 장마를 반복하며 단련되었을 그 호흡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나무를 잘라보면 안다. 나이테와 수분의 함량과 옹이와 가지들의 향방이 그것을 말해준다. 손으로 만져보면 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배어든 성음들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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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 (7)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벽오동 심은 뜻은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제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아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디 모습 남아 있고 버드나무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삼척동자라도 외고 다닐만한 우리 한시의 정수다. 조선 중기 신흠(1566~1628)의 <상촌선생집>에 나온다. 비유대로 선비의 지조와 충정을 강조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정의 문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황은 이 시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예로부터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잣나무를 심으라 했다. 딸을 시집보낼 때 오동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혼수를 장만하고 잣나무는 관을 짜는 데 사용했다던가. 지조와 정조 따위의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속담이나 시의 행간에 당대인들의 욕망이 빼곡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오동 중의 오동은 벽오동(碧梧桐, 푸른 오동나무)이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시인 묵객들이 벽오동을 소재 삼아 풍월을 읊었다.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트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 가지에 걸렸어라." 작자 미상의 시로 김도향이 이 시를 인용한 가요를 불러 유명해지기도 했다. 벽오동의 그리움에 대한 정조는 생각 이상으로 광범위하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계량을 그리워하며'라는 유희경의 시다. 여기서의 계랑은 물론 전북 부안의 매창(이향금)을 말한다. 매창과 유희경의 정열적인 사랑, 허균과 나누었던 십여 년간의 정신적인 사랑은 아직까지도 고금을 횡단하는 전설로 남아 있다. 여기 등장하는 오동나무들은 못다한 사랑, 그리움, 기다림의 정조를 대변한다. 도대체 무엇이 오동나무에 대한 이 지극한 감성들을 촉발했던 것일까. 전설은 다시 전설을 낳는다. 매창이 38세의 나이로 죽을 때 거문고와 함께 묻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안겨 천년의 깊은 잠에 든 거문고 벽오동은 아직도 청정한 성음을 가지고 있을까. 성음(聲音) 품은 나무를 찾아서 나무는 성음을 품는다. 성음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의 음성으로 하는 음악이라 풀이해두었다. 종류에 따라서는 창가, 민요, 가요, 가곡 따위로 구분하고 연주 형태에 따라서 독창, 중창, 합창, 제창으로 구분한다. 목소리나 음성을 넘어 음악 전반을 지시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흔히 판소리 등의 성악을 감상할 때 성음이 좋니 나쁘니 한다. 절대음감으로의 톤이나 키만을 말하는 것일까? 여기서의 성음은 그 단계를 넘어선다. 높고 낮음, 맑고 탁함, 깊고 얕음, 슬프고 기쁨, 화나고 차분함 등을 넘어, 소리에 투영한 휴머니즘의 융숭 깊음과 그 지극함을 따지기 때문이다. 절대 음가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 음가(音價)라고나 할까. 성음이라는 기표에 함의된 미학의 세계가 매우 광범위하다. 악기의 성음을 따져 묻기 전에 나무의 성음을 먼저 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주시 지정 무형문화재 이복수(1953~본래 이름은 이준수다) 장인의 주장은 단호하다. 우리 악기를 만드는 제일차적인 일은 좋은 나무를 고르는 일이다. 좋은 나무는 어떻게 고르는가? 산이나 들에 들어서면 토양과 산세의 지형을 보고 바람과 구름의 흐름을 듣는다. 동남쪽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와 서북쪽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는 성질이 다르다. 계곡에서 자라는 나무와 산 정상에서 자라는 나무가 확연하게 다르다. 우거진 숲과 메마른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가 또한 다르다. 눈에 보이는 풍경만이 풍경이 아니요, 귀에 들리는 바람만이 바람이 아니다. 햇볕이 잘 든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음지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나무가 좋은 성음을 품는 것은 천지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경우다. 오동나무가 선호되는 것은 다른 나무에 비해 성장의 균형과 가치 음가의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돌밭에서 자라는 이른바 석산오동(石山梧桐)이 선호되는 것도 재질의 장력이 견고해서만은 아니다. 벼락 맞은 오동나무에 대한 환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 나무에 스며든 햇빛과 달빛과 별빛들, 수많은 가뭄과 장마를 반복하며 단련되었을 그 호흡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나무를 잘라보면 안다. 나이테와 수분의 함량과 옹이와 가지들의 향방이 그것을 말해준다. 손으로 만져보면 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배어든 성음들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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