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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5)<br>분청상감연당초문호편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이규진(편고재 주인) 근래 아사카와 노리타카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다. 평소 갖고 싶던 사람의 그림이어서 여간 반갑고 즐거운 일이 아니었다. 노리타카의 그림은 더러 옥션에 뜨기는 하지만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산수화들이어서 관심 밖의 일이었는데 이번 것은 내 마음에 꼭 드는 도자기 그림이어서 구입을 한 것이었다. 항아리 위에 그린 그림은 원경으로 산이 있고 근경 좌우로 협곡의 바위가 있고 중경에 배인 듯한 것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원산수를 나타내고자 한 것 같은 느낌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 그림을 그린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누구인가.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조선도자명고'와 '조선의 소반'을 남겼으며 한국을 무척이나 사랑해 조선의 흙이 된 일본인이라는 찬사를 들으며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아사카와 다쿠미의 친형이다. 그 뿐 아니라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청화백자추초문각호(호가 아니라 지금은 호리병의 윗부분이 잘린 것으로 알려짐)를 선물함으로서 그가 조선 공예품에 관심을 갖게 만든 장본인. 하지만 동생인 다쿠미 보다는 한국에서 덜 알려진 인물이다. 내가 그런 아사카와 노리타카에 대해 주목을 하고 있는 것은 그가 도자기 전문가라는 사실 때문이다. 노리타카가 현해탄을 건너 와 경성 생활을 시작한 것은 1913년 남대문공립심상소학교 교사로 부임하면서 부터다. 1919년 교직을 퇴임한 후에는 일본으로 잠시 건너가 조각과 회화 작업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러다 1922년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 노리타카는 조각과 회화 작업을 계속하는 한편 전국의 도요지 답사를 시작하면서 도자기 연구에 몰두하게 된다. 1930년에 나온 '부산요와 대주요'는 왜관에서 일본이 주문해간 고려다완에 관한 저술로 이런 연구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 후에도 1년여 체류허가를 받아 야나기 무네요시와 다쿠미와 함께 수집한 조선민족미술관의 소장품을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이전하는 작업을 완료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1957년 '이조의 도자'를 발간하는 등 그 후에도 도자기에 대한 연구는 계속되었으며 1964년 세상을 하직했다. 노리타카는 체계적으로 우리나라 도요지를 답사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분청사기가 고려 때의 것이 아니라 조선조의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낸 인물이기도하다. 그렇다고 하면 노라타카가 전국의 도요지를 답사하며 수집한 도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후 1년여를 더 머물며 조선민족미술관에서 국립민족박물관으로 이전시킨 소장품은 공예품이 총 2,904점이었다고 한다. 이 때 노리타카가 수집한 도편 50상자도 함께 맡겨졌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노리타카가 수집한 도편은 이 것 뿐일까.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의 초대 관장을 지낸 이토 이쿠타로의 증언에 의하면 일본의 교토국립박물관, 도쿄예술대학교, 국립역사민속박물관에도 일부가 있다는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카운티박물관에도 경매를 통해 구입한 노리타카의 수집 도편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노리타카가 수집한 도편들은 현재 한 곳에 모여 있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흩어져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구나 일본에 있는 도편들은 라벨이 떨어진 것들이 있어 출토지가 불명해진 것들이 있다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국립민족박물관을 이어받은 국립중앙박물관의 형편은 어떨까. 노리타카가 귀국 전에 맡겨다는 기록만 보일 뿐 도편에 대한 정황이나 내용이 밝혀진 바가 없고 보면 이곳의 상황도 결코 녹록치 않으리라는 염려를 떨쳐버릴 수가 없다. 이런 걱정은 내 부질없는 기우일까. 그렇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 도자기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아사카와 노리타카를 회상하다보니 그에게 도편을 헌정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 찾아낸 것이 분청상감연당초문호편이다. 이 도편을 구입한 것은 답십리 고미술상에서였는데 출토지는 알 수가 없다. 기형은 안쪽의 물레자국 흐름으로 보아 호가 아니었을까 짐작이 될 뿐이다. 그런데 이 도편에서 주목되는 것은 연당초문으로 보이는 문양이다. 굵은 선으로 백상감한 문양이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어 꽉 찬 느낌이다. 이처럼 굵은 선도, 이처럼 전면을 가득 채운 문양도 일찍이 본바가 없거니와 담청색 바탕과 흰색의 문양이 어울려 너무도 생동감 넘치는 신비로움을 느끼게 한다. 만약에 도요지에서 이 도편을 보았다면 아사카와 노리타카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국경과 시대를 초월해 도편에 대해서만큼은 교감이 이루어질 것만 같은 느낌 때문에 나로서는 더욱 그의 행적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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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4) <br>백자인화문제기편17세기에 와 변형된 형태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기도 광주 일대의 백자가마터 중 가장 먼저 발굴조사를 한 곳은 도마리1호다. 다음이 번천리5호와 선동리2,3호 순이다. 그런데 문제는 발굴보고서 발간이 순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이 1964년에 발굴한 도마리1호는 1995년 12월29일에 "광주군 도마리 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서"라는 이름으로 발간이 되었고 1985년에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이 이루어진 번천리5호와 선동리2,3호는 1986년 10월15일에 "광주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보고"라는 명칭으로 발간이 된 것이다. 따라서 발굴이 도마리1호보다 10여년이나 늦은 번천리5호와 선동리2,3호가 조사보고서는 10여년이나 앞서 발간됨으로서 순서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물론 나름의 사정이야 있었겠지만 정보의 공유라는 점에서 결과만을 놓고 보면 여간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부고속도로변에 위치한 선동리2호는 사실 정식 발굴조사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가마 유구를 찾아 발굴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속도로 건설 이전에 논정지작업시 노출된 도편과 고속도로 배수로 좌우 경사면에서 채집된 도편의 양이 많아 이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실들이 밝혀지기도 했다. 그 중 중요한 것으로는 선동리3호와의 관계를 통해 관요의 주요와 종속요의 연관성이 주목되었으며 1640년부터 1649년까지의 10년치 간지를 통해 관요의 10년 이동설을 뒷받침하는 결과를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17세기 관요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굽에 간지가 보이지만 10년치가 출토된 곳은 선동리2호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그 의미는 자못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오늘 여기서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그런 것들보다도 백자인화문제기편이다. 이 제기편은 유색이 회색이 약간 섞인 흰색인데 굽은 부분적으로 잘라낸 쪽굽이며 입술은 손상되고 없지만 이 시대의 다른 제기들로 유추해 볼 때, 넓은 전이 꺽여 경사지면서 벌어졌던 형태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세로로 나 있는 거치형 돌기띠와 꽃과 잎을 도장을 찍듯 하고 있는 점이다. 쪽굽에 전이 벌어지고 거치형 돌기띠가 있는 기형은 조선 초기 관요 청자에서도 보이고 있는데 다른 점은 꽃과 잎이 인화가 아니라 백상감이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하면 제기편의 인화문은 17세기에 와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도자기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것이 제기들이다. 이는 대부분의 제기들이 중국 청동기 시대의 유물들을 전범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17세기에 오면 금속 제기의 원형을 탈피해 일부 과거의 특성만을 남긴 채 독창적인 백자제기로 변모가 시작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인화문, 거치형 돌기띠, 벌어진 전, 쪽굽의 형태 등이다. 하지만 17세기 제기들에서 거치형 돌기띠는 많이 볼 수 있지만 인화문은 보기가 쉽지 않다. 선동리2호에서도 인화문이 들어간 제기편은 서너 점이 출토되었을 뿐 아니라 그 크기도 백자인화문제기편보다 훨씬 작은 편들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자인화문제기편은 여간 재미있고 의미 있는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부고속도로를 차로 달리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선동리를 지나다 보면 좌측으로 마을이 보이고 우측으로는 산기슭 밑에 작은 밭이 하나 보이는데 이곳이 선동리2호다. 고속도로가 나기 전만해도 이 일대는 논과 산사면에 도편들이 널려 있던 곳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곳이 되어 버렸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도요지에 대한 관심도 관심이지만 신선이 사는 동쪽이라는 뜻의 선동리 지명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신선이 사는 동쪽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 왜 이곳에서는 또 10년 동안 관요가 위치해 명품 백자들을 만들었던 것일까. 관요가 10년마다 옮겨 다닌 것은 화목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렇다고 하면 과거 이 선동리에는 또 얼마나 많은 수목으로 인해 주변이 울창했던 것일까. 두께가 두꺼워 제법 묵직한 백자인화문제기편을 보고 있노라면 그러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구 선동리를 향해 달려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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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3) <br>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꽃과 잎은 면상감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전라북도 부안하면 어디가 먼저 떠오를까.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채석강,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직소폭포, 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내소사가 아닐까. 그러나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천리가 생각나지 않을까. 유천리야말로 청자의 대표적 도요지로서 강진청자와 쌍벽을 이루는 부안청자의 대명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부안청자가 유천리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진서리에도 대규모 요장이 있다. 하지만 질 면에서 아무래도 유천리가 뛰어나다보니 부안청자하면 이곳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부안이라고 해서 청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부안에는 우동리라는 널리 알려진 분청사기요지도 있다. 우동리분청사기요지가 널리 알려지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의 역할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958년 박물관에서는 유천리 출토 고려도자편을 대량으로 일괄 구입한 적이 있는데 당시 우동리분청사기요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분청사기편들도 함께 구입을 한 것이 있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흐른 1983년 12월과 1984년 3월 박물관에서는 두 차례에 걸쳐 우동리분청사기요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조사를 통해 얻은 도편과 전해 구입해 두었던 도편 중 서로 맞는 제짝의 것이 여러 점 발견되었다. 따라서 우동리분청사기요지 것으로 전해지던 도편들이 이 도요지에서 나온 출토품이라는 사실이 실물을 통해 확실히 입증된 것이다. 박물관에서는 이 도편들을 1984년 5월 28일에 발간된 '분청사기' 부록에 부안 우동리요 출토품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함으로서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우동리는 청자요지가 있는 유천리에서 차로 5분 정도면 가 닿을 수 있는 가까운 마을이다. 개울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 마을을 감불, 왼쪽 마을을 우신이라고 하는데 분청요지가 있는 곳은 감불이다. 요지는 우동저수지 못 미처 우측의 계곡 쪽 밭과 면한 산사면에 위치해 있는데 고급품을 번조했던 흔적으로 갑발편이 많이 쌓여 있다. 이곳에서는 각종 기형과 각종 문양의 도편들이 보이지만 그 중에서도 어문과 면상감이 특색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내가 전에 이곳을 찾을 때는 차를 이용한 경우도 물론 있었지만 유천리 청자도요지를 돌아본 후 지금은 청자박물관이 있는 뒤쪽의 밭을 경유해 지름길의 작은 산 언덕길을 넘어 걸어서 찾아 가고는 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특별히 재미난 도편을 만난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이다.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은 좌측에 약간 남아 있는 문양대와 연판문만 흑백상감일 뿐 모란문은 전체가 백상감이다. 전면을 뒤덮다 시피 한 모란문의 꽃과 잎은 시원스럽게 면상감을 하고 있으며 유약은 투명유에 유색은 회청색을 띠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태토다. 태토는 약간 회색인데 수비가 잘 되지 않아 구멍과 같은 기포가 보이는 등 엉성해 보인다. 그와 관련이 있는 탓인지 아니면 저화도에서 소성을 한 탓인지 태토가 자기질화 되지 못한 채 이상할 정도로 무척 가볍다. 모란문이 있는 바깥쪽은 정상적인 자기질화를 보이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보면 여간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여하튼 면상감이 시원스럽게 들어 있는 이 분청상감모란문편병편은 우동리분청사기요지의 특색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보여진다. 우동리는 오른쪽 마을을 감불, 왼쪽 마을은 우신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도 밝힌 바 있다. 우신에는 반계 유형원 유적지가 있고 감불 입구에는 4백여 년이 된 당산나무가 있는데 정월 보름이면 이곳에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당산제가 열리기도 한다. 우신 마을 뒤쪽에 위치한 우동리분청사기요지를 찾으려면 마을 앞의 이 당산나무를 지나야 하는데 그 곳에 똬리를 튼 동아줄이 감겨 있는 것이 흥미로워 보이던 일이 어제 일 같기만 하다. 우동리는 근래 전통마을 건강장수마을 쉼터마을 선진마을의 네 가지 테마로 새롭게 조성중이라고 하니 전에 내가 찾아보았던 때의 그 조용하고도 적막하던 우동리의 모습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는 한다. 그 뿐이 아니다. 우동리분청사기요지는 관계기관의 조사를 통해 가마터가 여러 곳이 확인된 모양이지만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가 없다. 한 가지 추억 삼아 옛이야기 하나를 덧붙여 보자면 우동리분청사기요지에서 습득한 내섬명접시편을 갖고 있는 선배가 있었다. 내섬명이야 호남 쪽 도요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이지만 선배가 갖고 있던 것은 백상감이 아니라 흑상감이어서 아주 귀한 것이었다. 흑상감 내섬명접시라니 이 얼마나 탐이 나는 자료랴. 그러나 끝내 이 내섬명접시를 양도받지 못한 채 선배는 유명을 달리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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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2)<br>청자화형접시편비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니 이규진(편고재 주인) 꽃에 대한 고려인들의 관심과 사랑은 청자에서도 많이 보이고 있다. 상감으로 된 국화문이라든가 연화문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오늘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꽃을 형상화한 상형청자 즉 청자화형접시에 대한 것이다. 청자화형접시는 전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의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용인 서리 시흥 방산동 배천 원산리 등 벽돌가마에서 보이는 청자화형접시들이다. 가장 이른 시기의 이 접시들은 완만한 사선을 그리는 기벽의 외면을 세로로 길게 도구를 이용해 깊이 눌러 요철이 생기게 만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화형접시는 중서부 지역의 벽돌 가마 뿐 아니라 강진 용운리와 해남 신덕리 등의 초기 청자요지에서도 보이고 있어 당시 전국에 걸쳐 공통적으로 제작된 기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화형접시는 내저 원각이 있으며 굽에는 네 곳에 내화토 받침을 하고 있다. 중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청자화형접시가 있다. 구연을 여러 개의 꽃잎으로 크게 오려내어 꽃모양을 표현한 것과 구연부의 일부분만을 살짝 잘라내어 꽃모양의 흔적만을 보이고 있는 경우다. 따라서 초기 것처럼 기다란 모양으로 깊게 누른 자국이 없어지는 등 화형이 훨씬 완만해지고 부드러워진다. 굽에는 전성기답게 규석받침을 하고 있다. 전기와 중기를 지나 후기로 넘어오면 도범으로 찍어내는 것이 유행을 하게 된다. 따라서 크기는 작아지고 꽃잎은 많아져 앞 시기의 것들보다 훨씬 아담하면서도 오밀조밀한 맛이 느껴지는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이밖에도 변형된 청자화형접시들이 더러 있지만 앞에 소개한 기본형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고 볼 수 있다. 전에 내가 구해 두었던 청자화형접시편은 후기 것이다. 말하자면 도범으로 찍어낸 것이다. 그런데 화형의 꽃잎이 무려 16개나 되어 눈길을 끈다. 거기에 유약이 비색에 가깝다. 내저원각이 있으며 세 곳에 내화토 받침 흔적이 있다. 후기에 와서도 이처럼 아름다운 빛깔의 비색의 흔적이 남아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청자화형접시편은 꽃잎이 많은데다 비색의 색감을 그대로 보여주다 보니 여간 앙징스럽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아니다. 어느 가게 구석에 놓여 있던 이 것이 내 눈을 끌어당긴 이유도 바로 그런 아름다움에 원인이 있었을 것이다. 비록 부분적으로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그 것을 뛰어넘는 아름다움이 분명 있다고 해야 옳은 것이다. 내 기분인지는 몰라도 올봄에는 꽃이 피는 듯싶더니 유난히도 빨리 저버린 느낌이다. 그래도 그 틈새에 꽃구경을 한 번 하긴 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잠실5단지를 찾아 만개한 벚꽃을 구경한 것이다. 벚꽃의 아름다움은 사실 5일 정도다. 꽃이 활짝 피어 아직 꽃잎이 떨어질 낌새도 안 보이고 더구나 새 잎은 얼굴을 내밀 기미조차 없을 무렵의 고 며칠이 피크인 것이다. 그런 벚꽃은 이제 철이 되면 어느 곳에서나 쉽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주변에 널리 퍼져 있다. 그런데 그 모습에 환호하는 세태가 싫다는 사람도 더러 있다. 일본의 국화여서 모두 뽑아버리고 싶다는 국수주의자의 푸념이지만 꽃 자체에 무슨 죄가 있으랴. 국경과 인종을 뛰어넘어 아름다울 수 있는 것 중에 꽃과 비교할만한 것이 어디 또 있으랴. 꽃은 다만 꽃일 뿐인 것이다. 봄이 와 꽃이 피고 지는 시절이 되면 내게는 생각나는 시가 한 편 있다. 홍사용 시인의 <가더이다>라는 시다. 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봄은 오더니만 그리고 또 가더이다 / 꽃은 피더니만 그리고 또 지더이다 / 님아 님아 울지 말어라 / 봄도 가고 꽃도 지는데 / 여기에 시들은 이 내 몸을 / 왜 꼬드겨 울리려 하느냐 / 님은 웃더니만 그리고 또 울더이다. 가는 봄 지는 꽃, 올봄도 임 탓이 아니건만 나를 꼬드겨 마음을 심드렁하게 해놓고 봄은 그냥 또 가버리려는 모양이다. 청자화형접시편을 그동안 사무실 진열장에 놓아두었더니 여러 사람이 관심을 보였다. 그 중에는 양도를 원하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자료가 될 만한 도편들은 고지식하게 갈무리를 하는 편이어서 아직도 내 곁에 남아 있게 되었다.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 그러고 보면 이 청자화형접시편은 손상을 입어 상품 가치는 떨어지지만 일반인들의 미감에 호응할 수 있는 매력은 남아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고려인이나 오늘을 사는 우리나 꽃은 누구에게나 향기를 전하는 전령사 같은 것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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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1)<br>청자운학문접시편꼬리 미자에 뫼산자를 쓰는 미산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강진 청자는 왜 사당리 미산에서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일까. 이는 내 오래 된 의문이다. 미산은 바닷가이다 보니 포구가 있다. 따라서 강진의 청자가 개성을 비롯해 타 지역으로 가려면 이곳에서 배편을 이용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상하지 않은가. 미산은 왜 초기 청자가 아니라 대미를 장식한 끝물의 청자를 만들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자. 강진군 대구면의 청자는 계곡 저 위쪽의 정수사가 있는 용운리에서 시작해 계율리를 거쳐 사당리로 내려온다. 사당리 중에서도 당전부락에서 정점을 이루었던 청자는 길 건너 미산부락으로 이동해 마지막 임종의 순간을 맞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도자기를 굽는 일은 특공대처럼 적의 후방으로 침입해 작전을 벌리는 일이 아니다. 교통이나 수운이 편리한 곳부터 개척해 입지를 넓혀가는 것이 순리다. 그렇다고 하면 포구로서 청자가 외지로 나가는데 창구 역할을 했던 미산은 마지막이 아니라 최초로 가마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점차 길도 넓혀가며 도자기를 굽다 점차 사당리 당전으로 진출해서 계율리를 거쳐 용운리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정반대인 것이다. 설혹 화목을 위한 나무 때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몇 백 년 후를 감안해 교통이나 수운이 좋은 인근의 나무들은 남겨두고 특공대처럼 교통이 불편한 계곡 깊숙한 곳으로부터 시작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여기에는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아주 오래 전 미산 포구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던 적이 있었다. 물이 빠져 갯벌이 꺼멓게 드러난 포구에는 끼룩 거리는 갈매기 한 마리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강진청자가 성황을 이루었던 시절의 이 포구는 얼마나 분주하고 떠들썩했을까. 세월은 그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듯 조용하기만 한데 그 침묵 앞에서도 나는 자꾸만 왜 미산이 강진청자의 대미를 장식할 수밖에 없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때의 추억을 되살리기라도 하는 듯 내게는 미산에서 만난 '청자운학문접시편'이 한 점 있다. 접시편은 굽는 과정에서 밖으로 주저앉은 듯 배가 약간 불러 보인다. 질적으로 하락한 말기청자답게 고급청자를 생산하던 시절에 사용하던 규석받침과 갑번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굽은 모래받침에 유색은 갈색을 머금은 어두운 청색이다. 문양 또한 흐트러지기는 마찬가지다. 중앙에는 두 줄의 원 안에 흑백상감의 쌍학문을 배치하고 원 밖으로는 구름이 퇴화된 우점문 안에 여기에도 세 마리의 학을 배치하고 있다. 전체적인 인상은 청자라기보다는 흡사 분청을 보는 듯한 느낌이다. 사실 이 시절을 경계로 강진요 도공들이 자기소를 이탈 전국의 여러 곳으로 흩어지며 강진 유형의 청자를 생산하다 분청으로 이행했던 과정을 생각하면 이러한 유사성은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말기 청자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아직도 아쉬운 점이 많다. 서해안 무안 도리포 해저유물로 출수된 청자들이 사당리 10호 요지와 관련이 있다거나 간지나 정릉명 청자 등 출토품에 대한 연구는 있어도 실제 강진청자의 대미를 장식한 미산부락에 대해서는 발굴은 물론이거니와 연구도 거의 없는 편이다. 명품 청자들을 생산한 곳이 아니기 때문에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나는 궁금하다. 왜 미산이 청자의 시작이 아니라 끝물이었는지, 그리고 말기라고는 하지만 명맥을 근근이 이어가다 왜 어느 날 갑자기 여기서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는지. 물론 왜구의 노략질과 중앙정부의 통제력 약화 등이 청자 쇠퇴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지만 더 의문인 것은 꼬리 미자에 뫼 산자를 쓰는 미산은 그 이름 때문에 운명처럼 청자가 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지명이요 장소였는지도 지금으로서는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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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40)<br> 조선청자편일찍이 세상에 없었기 때문 이규진(편고재 주인) 고향이 경기도 용인이다. 용인 중에서도 동쪽 끝이다보니 이천시 경계와 가깝다. 따라서 자가용이 있던 시절에 고향을 가려면 읍내를 거치지 않고 중부고속도로에서 곤지암 나들목을 빠진 후 도척을 거쳐 산길을 이용하고는 했었다. 그런데 곤지암에서 도척으로 직진을 하지 않고 우측의 궁평리롸 도웅리를 지나면 상림리를 거치게 된다. 상림리 사기막에는 17세기 관요 가마터가 있어 전에 고향을 오가는 길에 자주 들려보고는 했었던 곳이다. 하지만 상림리가마터 답사를 처음 한 것은 자가용도 없던 아주 오래 전 일이다. 한 번은 곤지암에서 택시를 대절해 처음으로 상림리가마터를 찾았는데 마침 기사가 그 곳 출신이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중에서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이 마을 입구에 도자기로 만든 말이 세워져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른들로부터 전해 들었다는 이 이야기가 가능한 일이었을까. 마을 입구에 세울 정도라면 크기 또한 적지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달항아리조차 한 번에 못 만들고 아래 위를 따로 만들어 붙여야 했던 시절에 그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는 관요 백자 가마터가 있었던 자부심이 마을 사람들로 하여금 그와 같은 전설을 만들어 이야기로 전해오게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여하튼 진위를 떠나 당시 재미있고 흥미롭게 들렸던 것만은 사실이다. 상림리가마터는 17세기 관요답게 도편들을 보면 굽에 간지가 있으며 철화도 보이고 해무리굽도 보인다. 이른바 백태청자라고 하는 조선청자도 보인다. 이런 것들이 다 중요하지만 상림리 가마터 하면 내게는 이것들보다도 아주 더 궁금한 것이 한 점 있다. 조선청자편이 그 것이다. 조선청자답게 이 도편 또한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씌우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도편에 있는 무늬다. 무늬의 장식기법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특이한 형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백자의 무늬로는 청화 철화 동화 안료를 사용한 것 외에 흑상감이 있다. 그런데 조선청자편에 들어 있는 무늬는 도대체가 이런 것들과는 달리 조선조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인 것이다. 클로버처럼 생긴 잎 세 개와 줄기 하나를 음각으로 파낸 후 백토를 분장하고 있는데 상감을 하듯 메꾼 것이 아니라 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러한 방식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 것일까. 이 도편을 두고 '조선청자백상감편'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조선청자편은 크기가 작아 현재로서는 기형도 알 수가 없다. 휘어진데다 안팎으로 유약이 고루 묻어 있어 병이나 호는 아닌 것 같고 사발이나 푼주 같은 것은 아닐까 추측을 해볼 뿐이다. 봄철에 새싹이 돋아나는 연초록 산빛과 같은 푸른빛을 띄고 있는 색감에 흰빛의 문양이 어울린 도편을 보고 있노라면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아 답답해지고는 한다. 답답한 원인이야 물론 이 도편과 같은 것을 일찍이 세상에서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상림리 가마터하면 고향을 오가던 길에 자주 들리고는 했던 곳이라 아무래도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고는 한다. 전사하신 아버지 때문에 20대에 혼자 되시어 집안을 일으키시느라 평생 고생만 하시다 만년에도 외롭게 쓸쓸히 혼자서 고향집을 지키시던 어머니. 그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서라도 가고 오는 길에 자주 찾았던 곳이 상림리 가마터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뜨신 지도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림리 가마터와의 인연은 그보다도 더 오래 전에 끝나버린 추억이다. 세월은 그처럼 추억과 더불어 유수처럼 아득히 흘러가 버렸건만 조선청자편에 대한 궁금증만은 오늘도 남아 해소될 기미가 없으니 이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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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9)<br>백자지(地)자명접시편먹물이 없는 붓글씨를 보는 듯 이규진(편고재 주인) '천자문(天字文)'은 4언절구의 한시로 된 대표적인 한문 교본이다. 중국 남북조 시대 양무제 때의 학자인 주흥사(周興嗣)가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여기에는 일화가 있다. 주흥사가 양무제의 노여움을 사 주살 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용서 받는 조건으로 하룻밤에 4자씩 250구절의 시를 짓되 한 글자도 중복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노심초사 끝에 이를 만든 주흥사는 얼마나 힘이 들었던지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세어 그 후 백두(白頭)또는 백수(白首)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천자문 또한 일명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자문은 원래가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한문을 배우기 위한 입문서로 널리 쓰이게 되어 우리에게도 친숙한 것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내용이 중국을 배경으로 해 어려운데다 일반적으로 잘 쓰이지 않는 글자도 많아 초심자 교육용으로는 적당치 않다는 지적도 많다. 다산 정약용도 천자문 교육의 비효율성을 강하게 비판 '아학편(兒學編)'이라는 아동용 교재를 직접 집필한 바도 있다. 여하튼 교육용으로 널리 쓰이다 보니 천자문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고 친숙해 보이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천자문의 첫구절은 천지현황(天地玄黃)이다. 하늘은 검고 땅은 누렇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첫구절에 대한 일화도 많이 전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학생이 스승에게 하늘이 어찌 푸르지 검으냐고 대드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해와 별들을 지우고 보면 하늘은 검은 것이 아닐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와 같은 천자문의 첫 구절인 천지현황은 도자기에서도 보이는데 이 것이 의미하는 바가 알려져 있지 않아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초기 관요백자의 굽에서 보이는 천지현황은 도대체 무엇을 표시하고자 한 것이었을까. 백자에서 보이는 천지현황은 관요 설치 이후의 명문들이다. 각각 한 글자씩만을 굽 안바닥에 새기고 있다. 초벌구이를 한 기명 위에 유약을 시유한 후 뾰족한 기물로 유약을 긁어내듯 음각기법으로 글자를 새긴 것이다. 이러한 천지현황명 백자는 경기도 광주 일대의 우산리를 비롯해 도마리 오전리 귀여리 번천리 무갑리 학동리 열미리 등 초기 관요 백자를 중심으로 확인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천지현황의 의미는 확실치 않지만 한 가마에서 함께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그릇의 구분을 위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러한 백자의 명문은 16세기 후반에는 좌우(左右)명이 보인다는 점에서 천지현황은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전반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천지현황명은 끝이 뾰족한 도구로 유약을 긁어내듯 음각을 한 것임으로 글자는 가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글자가 가늘지 않고 획이 굵은 것이 있어 주목된다. 백자지(地)자명접시편이 그것이다. 이 접시편은 오래 전에 도마리에서 만난 것이다. 1호 요지가 있는 외딴집 뒤쪽에 산기슭으로 올라가는 소로가 있는데 전에는 비포장이어서 비라도 내리면 흙이 씻기며 도편이 더러 보이고는 했었다. 그 곳 밤나무 밑에서 만난 것이 바로 백자지자명접시편이다. 다른 천지현황명들과 마찬가지로 지명은 굽 안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데 주목되는 것은 뾰족한 도구로 유약을 긁어내듯 음각을 한 것이 아니라 무슨 손가락이나 붓 같은 것으로 유약을 훑어내듯 글씨를 새기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지명은 음각이 아니라 먹물이 없는 붓글씨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백자지자명접시는 관요에서 만든 기명답게 역삼각형굽에 모래받침을 하고 있으며 정선된 태토에 색감은 눈부시게 하얀 설백색이다. 굽보다 약간 큰 내저원각이 있으며 붓글씨로 쓴 듯한 지명이 굽안 중앙에 의젓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왜 이 백자지자명접시편의 지자는 통상의 가는 음각이 아니라 붓글씨 형태의 것으로 새기고 있는 것일까.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해서체의 단정한 지자명 글씨는 흡사 한석봉의 <천자문> 글씨를 보기라도 하는 듯 우아함 마저 느끼게 하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겠는가. 그런데 지(地)자와 관련해 고백을 해보자면 내 호가 지산(地山)이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호가 정말이지 호일까 하는 의문은 들지만 이런 호를 갖게 된 되는 사연이 있다. 전라북도 부안엘 가면 저 유명한 내소사가 있다. 그 내소사 옆에 김영석 시인이 살고 있다. 김시인이라면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썩지 않는 슬픔> 등의 시집이 있는 중견 시인. 대학교수를 정년 후 이 곳에 그림 같은 2층 집을 지어 살고 있는데 몇 해 전 김시인과 친한 서정춘 시인을 앞세워 지인 몇이 집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도다리쑥국이란 것을 얻어먹어 보는 등 하룻밤을 묵으며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는데 그 때 한학에 밝은 김시인이 방문 기념으로 지어준 호가 바로 지산이다. '주역' 64괘 중에서 15괘가 지산겸(地山謙)이다. 형태를 보면 위에 있어야 할 산이 땅 아래 있는 상이다. 이 괘를 얻은 사람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주변을 살피며 말과 행동을 삼가하는 자세 즉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상경 후 김시인은 정성들여 쓴 작호기를 보내왔는데 여기에도 그런 의미로 호를 지어준 뜻을 밝히고 있다.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록 호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 뜻만은 늘 가슴에 새겨 실천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는 한다. 그런데 지산의 지자는 백자지자명접시가 있지만 그렇다고 하면 산(山)자는 없는 것일까. 산자도 마땅한 것이 있다. 전에 계룡산에서 만난 것인데 작은 분청접시편이다. 그런데 이 분청접시편에는 분이 접시 중앙에 뭉치며 기가 막히게 음각으로 산자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 있다. 백자지자명접시와 지산과 분청산자명접시편. 이 절묘한 어울림과 계시를 통해 운명처럼 겸손을 늘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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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8)<br>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감사 감사 또 감사 이규진(편고재 주인) 실물을 볼 수 없는 도편을 만나면 고질병인지 가슴부터 울렁거린다.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을 처음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처음 본 것은 핸드폰이었다. 메일로 보내 준 사진을 본 것인데 첫눈에 세상에 없는 유일무이한 도편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러니 가슴이 울렁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전화를 받고 그 즉시 달려가 실물을 보았는데 내 예감이 맞는 것이었다. 청자철채에 상감으로 시문이 들어간 매병은 국내에서 아직까지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터여서 여간 흥분되는 일이 아니었다. 청자에서 철채는 철유와 혼동하기가 쉽지만 전혀 다른 기법이다. 철채는 산화철 안료를 그릇 표면 전체에 골고루 바른 후 그 위에 유약을 시유해 번조한 것이고 철유는 산화철 성분 자체의 유약을 그대로 시유한 것이다. 따라서 깨진 단면을 볼 것 같으면 철채는 철채와 유약의 두개 층이 보이지만 철유는 철유 한층만 보여 구분을 할 수 있다. 청자철채로 현재 국내에서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철채퇴화삼엽문매병이 있다. 보물 제340호인 이 매병은 전면에 철화 안료를 바르고 몸체 양면에 삽엽문을 얇게 파낸 뒤 그 위에 백토를 발라 문양을 장식하고 있다. 따라서 검은 철채와 백토 삼엽문의 강렬한 대비가 어울려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이는 것이 특색이다. 청자철채 중 상감이 들어간 것으로는 호림박물관 소장의 청자철채상감운학문매병이 있다. 각이 진 반구형의 입술에다 목은 짧으며 어깨 부분은 급하게 부풀어 올랐다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굽으로 이어진다. 표면 전체에 철채를 한 후 몸통에는 학과 구름을 상감으로 그려 넣고 있다. 굽은 안다리굽이며 접지면의 유약을 훑어낸 후 내화토 받침을 하고 있다. 이와 거의 비슷한 것이 지금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으로 넘어가 있는 아타카컬렉션에서도 한 점 보이고 있다. 그런데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을 떠올리다 보니 이곳에 기증된 이병창 컬렉션이 불현 듯 생각나는 것이 아닌가. 매병은 아니지만 청자철채상감시명병이 벼락처럼 머리에 떠오른 것이다. 시명병은 반구형의 입술에 어깨가 벌어졌다가 동체가 거의 일직선으로 내려가는 원통형에 가까운 기형인데 동체 양면에 술과 관련된 시를 두 줄씩 백상감으로 넣고 있다. 굽은 안굽으로 바닥이 접지면보다 기형적으로 높이 위치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저부 네 군데에 구멍이 나 있는데 끈으로 매달아 쓰기 위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비록 매병은 아니고 통형병이기는 하지만 청차철채에 백상감의 시문이 들어간 것은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이 것이 유일하다.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 또한 시문이 들어간 청자철채매병으로는 이 것이 또 유일무이한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청자철채상감시문매병편은 현재 두 조각으로 남아 있다. 한 점은 아무런 문양이 없지만 안다리굽 쪽이어서 이를 살펴보면 도편이 매병편임을 알 수 있다. 또 한 점은 매병의 몸체답게 배가 부른 둥그스럼한 형태인데 여기에 백상감으로 시문을 그려 넣고 있다. 남아 있는 글자를 보면 모두 다섯 글자인데 강어약(江魚躍)과 노마(路馬)다. 강에는 물고기가 뛰고 길에는 말이라는 뜻인데 없어진 부분이 많아 전체적인 시의 내용은 알 수 없다. 따라서 앞으로 알아보아야 할 연구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시문 옆에는 늘어진 버들가지 같은 것도 한 줄기 보인다. 청차철채상감시문매병편은 현재 표구가 되어 액자 속에 들어 있다. 이 말은 원 소장자가 이 도편의 가치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 도편이라고 해서 값이 만만치 않았던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오래간 만에 가슴 울렁거리는 희열을 맛보았는데 어찌 주머니 사정만을 고려하고 있을 수 있었으랴. 비록 출혈은 있었지만 소중한 인연에 감사 감사 또 감사하기만 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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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7)<br> 청자상감연당초문발편장엄한 아름다움은 없을지라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정점을 찍으면 내리막길이다. 모든 문화가 그렇듯이 12세기에 아름다움의 정점을 보여 주었던 청자도 마찬 가지다. 14세기 고려 말에 이르면 비색은 유명무실해져 유색은 탁해지고 상감을 통해 정교함과 화려함을 뽐내던 문양도 맥없이 흐트러진다. 도(陶)는 정(政)이라는 말도 있듯이 저무는 고려와 더불어 청자 또한 쇠락의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쇠락의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 중의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청자상감연당초문정릉명발이다. 청자상감연당초문정릉명발에는 내저 중앙에 백상감으로 정릉(正陵)명이 들어 있다. 정릉은 노국대장공주의 무덤을 말하는 것으로 따라서 이 발은 노국공주가 사망한 1365년부터 공민왕의 마지막 재위년도인 1374년 사이에 제작된 기물임을 알 수 있다. 발은 안과 밖을 4단과 2단으로 구분해 무늬를 넣고 있는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연당초문이다. 전성기와는 달리 연당초문이 흐트러져 선의 흐름이 툭툭 끊어지는 듯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 이런 연당초문의 특징은 조선시대 초기의 분청에서도 보이고 있어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말하자면 청자에서 분청으로 확산되는 과도기적 도자기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근래 청자상감연당초문발편 한 점을 구했다. 편고재가 있는 상가 같은 층의 고미술상에서 만났으니 지근거리에서 구입을 한 셈이다. 그런데 이 발편은 기형의 2/3정도가 남아 있는 것이어서 조각으로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이 발편은 아주 오래 전에 북한산 밑의 가마터에서 이와 비슷한 문양의 도편을 습득한 일도 있어서인지 눈에 익은 느낌이 들어 보자마자 군말 없이 구입을 한 것이다. 청자상감연당초문발편은 내저원각이 뚜렸한 가운데 안을 4단으로 구분 백상감으로 문양을 배치하고 있다. 내저쪽으로는 연판문을 바깥쪽으로는 뇌문과 연주문을 돌리고 그 사이에 형성된 넓은 문양대에는 연당초문을 넣고 있다. 연당초문은 정릉명발에서 볼 수 있듯이 흐트러진 모습인데 그 사이에는 흑백상감으로 활짝 핀 연꽃 세 송이를 배치하고 있으며 그 사이 사이에는 또 반쯤 핀 연꽃을 배치하고 있다. 외면은 2단으로 구분해 연판문과 초문을 배치하고 있으며 초문 사이에는 세 송이 흑백상감의 국화를 넣고 있다. 발의 기형은 측면이 안으로 휘였고 유색은 짙은 회청색이며 굽은 죽절굽에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14세기말의 퇴락한 유색과 흐트러진 문양, 그러나 이런 선입감을 버리고 청자상감연당초문발편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면 나름의 아름다움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정형에서 벗어난 이탈감이 주는 자유로움과 여유로움, 꼭 격식을 갖추어야만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보면 비록 마지막으로 황혼을 벌겋게 물들이는 노을의 장엄한 아름다움은 없을지라도 애잔히 저무는 고려의 뒷모습을 살펴보듯이 조용히 감상할 여지는 충분히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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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6)<br> 청자동화모란문편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화려한 느낌 이규진(편고재 주인) 전라남도 보성에서 둥근 축구공 모양의 완전한 공룡알이 발견된 적이 있었다. 약 8700만 년 전의 이 공룡알 속의 공기를 빼내어 조사해 보니 산소 농도가 높았다. 현재 지구 대기 속 공기의 산소 농도는 21% 정도인데 이 알 속에 들어있는 산소 농도는 무려 29.5%에 달했던 것이다. 허민의 '공룡의 나라 한반도'를 보면 이 정도의 산소량이라면 비가 와도 산불이 날 수 있는 엄청난 양이라고 한다. 백악기 후기 한반도 대기에 산소가 이토록 많았다면 공룡은 수시로 일어나는 산불이나 들불에 타 죽거나 쫒겨 다닐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공기 중의 산소는 이처럼 지구의 생명 있는 것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지만 도자기 제작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울 때 공기의 차단 여부 즉 환원염이냐 산화염이냐에 따라 유약의 색깔에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청자의 비색이 환원염의 소산이라면 황색이나 갈색은 산화염의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가장 큰 영향은 동화의 발색에서 볼 수 있다. 선홍빛 빨간색은 환원염이 잘 이루어졌을 때의 일이요 산화염일 때는 동화가 빨간색이 아니라 녹색이나 아예 증발해 버리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화가 기술적으로 어렵다 보니 도자기에서 보이는 것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따라서 값 또한 동화가 들어가면 일단 비싸지는 것이 상식이다. 오랜 세월 도편에 관심을 가져왔지만 내가 소장하고 있는 청자 동화편은 의외로 적어 몇 점이 되지 않는다.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은 청자동화모란문편이다. 답십리에서 고미술상을 하다 금동불상의 진위 문제로 시끄럽다가 결국은 사업까지 접은 모 사장에게서 구입을 했던 것이라 더 기억에 남는지도 모르겠다. 당시만 해도 내가 직장에 몸담고 있을 때였으니 참으로 오래전 일이다. 당시 몇 점의 청자편을 일괄 구입했었는데 청자동화모란문편도 그때 함께 구입한 것이다. 그런데 이 청자동화모란문편은 남은 부분이 작아 기종을 추정하기가 애매하다. 입술이 큰 것으로 보아 나팔형의 긴 목이 달린 대형 항아리가 아니었을까 추측을 해볼 뿐이다. 턱이 진 입술에는 백상감으로 격자무늬를 돌리고 있으며 입술 아래 목에 해당하는 부분에도 백상감의 초문을 새기고 그 속에 동화로 모란문을 넣고 있다. 위의 모란문은 꽃송이가 제대로 살아 있는데 반해 아래 것은 약간의 흔적만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입술 바로 아래에 이 정도의 동화로 모란문을 삽입할 정도라면 대형의 목이 긴 항아리가 제대로 남아 있었더라면 동화가 얼마나 아름답게 사용되었을지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화려한 느낌이다. 청자동화는 청자에 산화동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채색을 하는 것이다. 원래 기술적으로도 어렵고 지난하다 보니 상감이 들어간 곳에 악센트로 점을 찍는다던가 할 뿐 온전한 그림을 나타내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청자동화모란문편의 모란문은 선홍색의 발색도 좋아 상당히 귀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을 요하는 것은 청자동화와 관련된 도요지 문제다. 아직까지 강진에서는 발굴조사는 물론이거니와 지표조사에서도 동화가 발견된 바가 없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동화를 만든 곳은 부안의 유천리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필자도 전에 유천리에서 아주 작지만 청자 전체를 동화로 채색한 도편을 만난 적이 있고 보면 이는 어느 정도 확실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청자에 그림을 그리거나 채색을 할 수 있는 것으로는 철화와 동화가 유일하다. 백자로 넘어오면 청화도 있지만 청자에서는 이것은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청자에서 철화는 비교적 흔한 편이지만 동화는 흔치가 않다. 청자를 제대로 굽기 위해 최대한 적정 온도로 올릴 경우 동화는 이미 비등점을 지나게 되어 엇박자가 나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 조정이 필요한데 이 기술이 만만치 않은 것이다. 이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은 중국보다 백여 년은 앞서 동화를 사용했다니 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고마운 일인가. 동화는 전에는 진사(辰砂로도 불렸던 것이다. 이 명칭은 20세기 초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이름으로 시중에서는 현재까지 일부 통용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진사는 적색유화수은(赤色硫化水銀)으로 도자기에서 사용하는 동(銅)과는 성질이 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자에서 동화가 사용된 것은 12세기경으로 추정되지만 현존하는 유물들은 대부분 13세기의 것들이다. 청자동화모란문편 또한 13세기를 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청자에서 동화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지난한 일인가를 생각하면 비록 조각난 청자동화모란문편에 불과하지만 새삼 반갑고 귀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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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5) <br>분청상감용문매병편유구한 세월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근래 우리 사회에서 윤동주 시인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도 흔치 않은 것 같다. 이처럼 인기가 있다 보니 해방 후 발행된 책 치고는 윤시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또한 값이 만만치 않다. 정음사에서 1948년에 나온 3주기 초판본은 천만원을 넘은 지 오래고 같은 출판사에서 1955년에 나온 10주기 증보판 또한 시중에서 백만원을 홋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초판본과 증보판은 장정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수집가나 장서가라면 적어도 두 권 모두를 갖고 있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듯싶은 책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귀하기로 말하면 초판본이나 증보판보다도 더 귀한 것이 있다. 3주기 추도회를 맞추어 만들고자 한 초판본 표지가 완성이 안 되어 급히 10부를 만들어 증정한 최초본이 있는 것이다. 전에는 나도 최초본은 아니지만 초판본과 증보판 시집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 책들을 정리할 때 모두 내 손을 떠났던 것 같다. 그 후로는 값도 만만치 않아진데다 옛날 같은 열정도 없다보니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거니 하고 관심을 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근래 우연찮게도 1955년 10주기 증보판으로 나온 이른 바 재판본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시>를 구입했다. 이처럼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구입한 것은 표지가 너무 많이 헐어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는 등 손상이 심해 값이 헐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다행인 것은 그나마 내용이 온전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남루를 보면서는 많은 생각이 들고는 한다. 오래 된 귀중본이라고해서 깨끗한 것만이 능사일까. 잘 펼쳐 보지도 않아 곱게 보관하는 것만이 애정이요 사랑일까. 그것보다는 보고 또 보고 이웃에게도 빌려 주고는 해서 닳고 헤어지다 못해 남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오히려 책을 사랑한 애정의 증표는 아닐까. 청춘남녀가 결혼을 해 오래 살다보면 그 곱던 얼굴도 주름진 얼굴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정상적인 결과이듯이 책 또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보면 운명처럼 낡아져야 되는 것은 아닐까. 어찌 책뿐이랴. 어찌 도자기라고해서 그런 점이 없으랴. 깨지고 금가고 해서 원래의 제 모습을 잃은 채 버림받고 있는 도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의 험난했을 여정과 세월이 손에 잡힐 듯 보여 안타까워 지고는 한다. 남들처럼 온전하게 살아남아 박물관 진열실에라도 의젓이 앉아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니 소장가의 애무를 받으며 뜨거운 눈길과 애정으로 고임을 받아야 마땅했을 것들이 버림받고 잊혀진 채 편고재에 와 뒹굴고 있는 것을 보면 눈물겹도록 마음이 짠해지고는 한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다. 용이란 왕권의 상징이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관요에서도 사번이 성행함에 따라 용충이니 용병이니 하는 것들이 일반인들에게도 흘러 들어갔지만 분청이 성행한 15,16세기에는 용이란 왕실 말고는 감히 시중에서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분청상감용문매병이 어쩌다 많은 부분 손상이 되어 조각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도대체 그동안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험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일까. 분청매병은 전성기의 청자매병과는 달리 입술이 반구형이 아니라 밖으로 벌어지는 형태다. 어깨가 부풀어 올랐다 굽으로 이어지는 S선 또한 청자매병보다 굴곡이 심한 편이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은 윗부분이 몽땅 사라져 버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와 같은 분청매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상체를 잃어버린 불구의 몸이지만 남아 있는 부분의 문양을 보면 온전했을 때의 그 당당하고 화려했을 모양이 상상되고는 한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은 몸체 중간부터 윗부분이 몽땅 달아나고 현재는 아래 부분만 남아 있다. 굽은 평굽인데 굽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받쳤던 듯 가운데가 둥글게 유약도 안 묻어 있고 흙기운이 그대로 살아 붉은 태토를 보이고 있다. 휘어져 굽 쪽으로 벌어지는 밑 부분에는 백상감의 연판문을 장식하고 있으며 세 줄의 선으로 구분을 지은 남은 윗부분에는 흑백상감으로 용무늬를 새겼는데 몸체와 다리와 꼬리만 보일 뿐 머리는 날아가 버리고 없다. 그래도 남은 부분만 보아도 상당히 고급의 분청상감용문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유약이 안 묻은 안쪽은 물레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태토가 두꺼워 전체적으로 무게도 상당히 나가는 편이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은 어디서 사용되었던 것일까. 산화의 흔적으로 보아 도요지에서 파손된 것 같지는 않고 일단 무덤에 묻혔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하면 사용하다 무덥에 넣었던 것인지 아니면 생것 그대로를 묻었던 것인지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궁금한 일이 어디 그뿐이랴. 애초에는 성했을 몸이 어디서 어떤 이유로 파손된 것인지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상체를 잃고 하체만 남은 이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을 보고 있노라면 5백년 유구한 세월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 고단했을 세월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안타까워 지고는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랜 세월을 감안해 사랑과 애정으로 보듬어 안지 않으면 안될 우리 조상의 체취요 유산이 아니겠는가. 사족이지만 장서가나 수집가들은 대개 책의 보관 상태를 중히 여긴다. 깨끗해야 시중에서는 값이 더 나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조금만 흠이 있어도 기피하는 결벽증 환자들도 더러 있다. 책뿐이 아니라 도자기도 마찬가지여서 개중에는 깨지고 금간 것에 대해 아예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다. 그 자체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처럼 청탁을 가리다 보면 맑은 물에 물고기가 안 꼬이듯 좋은 물건을 만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름다움이 어찌 젊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겠는가. 주름지고 허리 꼬부라진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도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움은 있고 보면 헐은 책이나 깨진 도자기에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완전한 것에만 연연해하는 조급성을 탈피해 넉넉하고 푸근한 포용력은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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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4) <br>분청흑백상감접시편도편의 여섯 가지 즐거움 이규진(편고재 주인) 근래 글씨도 좋고 각도 좋은 육낙정(六樂亭) 현판 한 점을 구했다. 그런데 이를 통해 여섯 가지 즐거움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궁금해졌다. 자료를 찾아보니 목은 이색이 노인의 다섯 가지 좌절을 이야기 한 것이 있었다. 내용인즉, 첫째 낮에는 꾸벅꾸벅 졸지만 밤에는 잠이 오지 않고 둘째 곡할 때는 눈물이 없고 웃을 때는 눈물이 나며 셋째 30년 전 일은 기억하면서 눈앞의 일은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넷째 고기를 먹으면 뱃속에는 없고 이빨 사이에 다 끼고 다섯째 흰 얼굴은 검어 지는데 검은 머리는 희어지네. 이에 반해 다산 정약용이 노인의 여섯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 한 것도 있었다. 목은이 노인의 부정적인 면을 논했다면 다산은 이와는 반대로 긍정적으로 즐거움을 논하고 있는데 이는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일을 해학적으로 풀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짜피 나이 들어 일어나고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다산처럼 긍정적으로 보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다산의 여섯 가지 즐거움이란, 첫째 대머리가 되니 빗이 필요치 않고 둘째 이가 없으니 치통이 사라지고 셋째 눈이 어두우니 공부를 안해 편안하고 넷째 귀가 어두우니 세상 시비에서 멀어지며 다섯째 붓 가는대로 글을 쓰니 손 볼 필요가 없으며 여섯째 하수들과 바둑을 두니 여유가 있어 좋다. 그런데 다산의 여섯 가지 즐거움 중에서 셋째의 눈이 어두우니 공부를 안해 편안하고는 글을 안 읽으니 편안하고로 고치는 것이 더 맞지 않을까. 다섯째와 여섯째도 나이가 들어 몸과 마음에 여유가 있다는 의미 같은데 내게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점도 있다. 그렇다고 하면 도편으로 인한 즐거움은 없는 것일까. 그래서 여섯 가지를 만들어 보았다. 첫째 크기가 작아 간수가 용이하다. 둘째 가격이 저렴해 구입하기가 쉽다. 셋째 탐내는 사람이 적어 도둑맞을 염려가 없다. 넷째 이미 깨져 있어 더 깨질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다섯째 온전한 것과는 달리 속살인 태토를 볼 수 있다. 여섯째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할 수 있다. 억지춘향이 격으로 여섯 가지 즐거움을 만들어 놓고 여기에 맞는 도편이 없을까 궁리를 하다 찾아낸 것이 분청흑백상감접시편이다. 이 접시편은 사방으로 손상이 심했던지 주변을 자르고 갈아내 둥근 모습으로 남아 있다. 무슨 받침 같은 것으로 사용하기 위해 손을 댄 모습인데 너무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하지만 이 분청흑백상감접시편은 잘라 낸 모습이 너무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무늬만 놓고 보면 허술히 볼 그런 물건은 아니다. 접시 중앙에는 국화문을 새기고 이를 두 개의 선으로 둘러싼 후 흑백의 연주문을 돌린 후 또 다시 두 개의 선으로 감싸고 있다. 그 밖으로는 철사를 말아 돌린 듯한 특이한 백상감의 무늬가 있고 그 사이사이에는 흑상감의 무늬를 빼꼭히 채워 놓고 있다. 한 마디로 심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지는 그런 도안이다. 이 분청흑백상감접시편은 도편의 여섯 가지 즐거움에 모두 해당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지만 글쎄, 여섯째 가벼운 마음으로 선물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나 자신 아직은 미지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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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3) <br>분청경주명대접편조선의 그릇 앞에서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주에는 신라만 있고 고려나 조선은 아예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더러 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보이느니 신라의 유적이요 유물들뿐이니 그럴 만도 한 일이다. 하지만 경주라고 해서 어찌 고려와 조선이 없으리요. 다만 신라 천년의 역사가 켜켜이 쌓여 너무도 강렬한 인상을 풍기다 보니 아무래도 고려와 조선의 역사는 그 그늘에 가려 미미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가뭄에 콩 나듯이 보이는 고려나 조선의 유물을 보면 신기해 보이기조차 한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그런 가운데 분청사기에 경주를 의미하는 유물이 남아 있어 남다른 관심을 끌 경우가 있는데 경주장흥고나 경주인수부 등의 관사명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분청에 관사명은 왜 들어가는 것일까. <태종실록> 17년 4월조에 보면 장흥고나 사옹방에 공납되는 사기들에 대한 폐해가 거론되고 있다. 말하자면 공납용 도자기들 중에는 중간에서 분실되는 사고가 발생하고 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에 따라 1417년(태종 17년) 이후부터 분실을 방지하기 위해 상납되는 자기에는 관사명을 새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관사명으로는 공안부 경승부 인수부 덕녕부 사선서 장흥고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 등이 있는데 이런 관사명들은 영남지방에서 많이 사용된 가운데 호남에서는 내섬이 충청 지역에서는 예빈이 주로 보이고 있다. 이에서 보듯이 관사명은 주로 영남지방에서 활성화되었음을 알 수 있거니와 이 지역에서는 또 관사명과 더불어 지방명도 함께 보이고 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할 수 있다. 강경숙 교수가 정리한 자료를 보면 지방명은 40여 곳이 보이는데 이중 31곳이 경상도라고 하니 이 지역에 집중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관사명과 관련해 경주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는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내태리에 있는 분청사기 도요지다. 내태리는 경주에서 한 20여리 떨어진 곳인데 마을 뒤편의 동산을 가로질러 넘어가는 소로가 보이는데 도요지는 바로 길을 내며 잘려 나간 바로 그 곳에 위치한다. 하지만 아주 오래 전 방문했을 때 보니 이곳에서는 도편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았다. 도편을 본 것은 오히려 도요지 아래 동산 기슭과 밭이 면한 사이에 작은 도랑이 있는데 이곳에서 볼 수 있었다. 당시 본 것으로는 경주장흥고 등이었다. 그런데 경주장흥고는 박물관이나 시중에서 보이는 온전한 실물이든 손상된 도편이든 이상하게도 글자를 순서대로 늘어놓은 것이 아니라 제멋대로 뒤섞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왜 이처럼 순서를 무시하고 뒤섞어 혼란스럽게 해 놓은 것인지는 아무래도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내태리 분청사기도요지에서 주목되는 것은 물론 경주장흥고다. 경주라는 지명이 확실하고 장흥고라는 관사명이 뚜렷하니 공납용 도자기를 굽든 도요지를 증명하는데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내태리와 관련해 더 관심을 갖는 것은 경주(慶州)명만 있는 분청경주명대접편이다.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연판문을 돌린 내저 한 가운데에 우점문과 더불어 큼직하게 백상감으로 경주명이 들어 있다. 글자만 해도 6x5Cm이니 지방 명으로 이만한 크기는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다. 굽 안에 비짐돌받침의 흔적이 보이고 외면으로는 우점문의 흔적이 보이는데 깨어져 달아난 부분이 살아 있었더라면 장흥고나 인수부가 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실제 그런 유형의 분청완이나 접시 등이 현존하고 있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경주에는 신라만 있고 고려나 조선은 아예 없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더러 있다. 내태리에서 분청을 만들던 도공도 그런 느낌이었을까. 따라서 나는 조선의 경주에 살고 있는 도공이다 하는 뜻에서 분청 대접에 경주명을 크게 새겨 넣은 것일까. 물론 그런 일이야 없었겠지만 경주하면 하도 조선의 색채가 엷다보니 조선의 그릇인 분청경주명대접편 앞에서 엉뚱한 생각마저 해보게 되는 것을 어쩔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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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2) <br>청자말머리편모질게 인연을 끊는 일만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80년대 후반 어느 날 강진군 대구면 청자도요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강진읍내에 있는 영랑생가를 방문하고 나선 길이어서 용운리로 시작해 계율리를 거쳐 사당리를 주마간산격으로 돌아보고 나니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귀가를 위해 당전 부락 앞 행길로 나와 마량 포구 쪽에서 나오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자니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버스가 올 시간을 알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이 얼마나 피곤한 일인가. 마침 때가 가을이어서 행길 옆에는 채마밭을 고른 둔덕이 있었는데 무심코 보다보니 작은 도편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웬일인가 하고 집어보니 청자말머리편이였다. 반갑다기보다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청자에서 귀면이니 사자니 기린이니 하는 것들은 더러 보았어도 말은 사실상 처음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머리 파편을 만났으니 하루의 피로가 말끔히 가시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반갑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고 그 쾌감은 이루 다 말로 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청자말머리편은 내게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일본인들이 주문해간 다완 중 굽을 손가락으로 헤집은 듯 힘차게 돌아간 재미있는 도편을 가지고 있는 선배가 있어서 이것과 교환을 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는 수 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얼마 전 답십리 고미술상가 어느 집을 들려보니 이 도편이 다른 것들과 뒤섞여 있는 것이 아닌가. 반갑기로 말하면 죽었던 친구를 꿈속에서라도 만난 듯 그렇게 반갑고 황홀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주인이 일괄 판매를 원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주인이어서 며칠을 조르고 졸라 결국 청자말머리편만을 입수할 수가 있었는데 그 때의 그 기분이란 다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도편을 처음 만났던 그 옛날의 그 강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었다. 한국 문화 특히 공예품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야나기 무네요시의 '수집이야기'에는 수집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수집에 얽힌 일화들이 들어 있다. 그중에서도 눈길을 끄는 것은 ‘합자이야기’다. 1945년인 오늘부터 따져 근 40년 전 조선을 방문한 야나기는 경성의 한 골동품점에서 청화백자에 동화로 복(福)자가 들어간 작은 합을 발견한다. 너무도 마음에 들어 구입을 약속한 야나기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보름쯤이 지나 귀국 전에 들려보니 이미 다른 사람에게 팔리고 없더라는 것이었다. 변명인지는 몰라도 주인 말로는 자신이 없는 동안 종업원이 실수로 팔았다는 이야기였다. 이유야 어떻든 야나기로서는 얼마나 안타깝고 화가 났었을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그로부터 2년쯤 후의 일이다. 다시 경성을 방문한 야나기는 도미타 기사쿠 옹과 가까워졌고 어느 날 옹으로부터 수집품을 보여 주겠다는 초대를 받는다. 그런데 그 수집품들 속에 전에 안타깝게 놓쳐 버렸던 청화백자동화문합이 있는 것이 아닌가. 지난 시절의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면 옹이 양보해 줄 것도 같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한 것은 옹 또한 그 청화백자동화문합을 무척 소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옹은 가까운 시일 안에 모든 수집품을 공개할 예정이라고 하는 데는 더 말문을 열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몇년 뒤 옹은 세상을 떴고 수집품은 뿔뿔이 흩어졌는데 그 청화백자동화문합의 행방에 대한 궁금증만은 끝내 잊혀 지지를 않았다. 그로부터 또 10년 아니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야나기는 하버드대학에 부속된 포그미술관의 초청을 받아 1년간 강의를 위해 미국 케임브리지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런데 가까운 거리에 있는 보스턴에 야마나카상회가 점포를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느 날 찾아간다. 가게 직원의 안내로 지하실의 물건들을 돌아보게 된 야나기는 그곳에서 골동품점에서 놓쳐 버린 후 도미타 기사쿠 옹의 수집품에서 보았던 그 청화백자동화문합을 다시 만나게 된다. 이 얼마나 기막힌 인연인가. 대금을 지급하고 이것을 손에 넣은 야나기의 심정이 얼마나 황홀했을까는 능히 짐작이 가는 일이다. 이런 인연으로 살아 생전 야나기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청화백자동화문합은 '공예' 제111호에 원색으로 실려 소개되었으며 그 후 민예관에 소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생각해 보면 야나기의 청화백자동화문합에 얽힌 인연만은 못하더라도 청자말머리편과 나와의 인연 또한 결코 작은 것은 아니다. 생각해 보라. 내가 직접 강진에서 습득을 했고 다른 물건과 바꾸어 수 십년 간 내 품을 떠나 있던 것이 다시 내 것이 되었으니, 이 어찌 작은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청자말머리편은 그런 인연이 아니더라도 재미있는 도편이다. 입과 코가 있고 철화를 찍은 눈이 있고 손잡이로 이어졌을 줄도 보인다. 이런 앙징스럽고 귀여운 청자말머리편을 보고 있노라면 어렵게 다시 만난만큼 이제는 다시 옛날처럼 제발 모질게 인연을 끊는 일만은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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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1) <br>청자향꽂이편그윽한 그 향내음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산사엘 다가가면 갈수록 느껴지는 것은 바람에 실려 오는 풍경소리와 그윽한 향내음이다. 절과 향과 불전과 향불은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는 아닐까. 부처님이 계신 불전에서 향을 피운다는 것은 잡냄새를 제거한 향기로움뿐이 아니라 잡념을 제거한 청정무구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진실 된 정성의 표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례 때 사용하는 향불 또한 마찬가지다. 이처럼 의례용으로 사용되던 향은 그러나 개인 취향의 풍류 세계로 진입하면서 더욱 널리 민간으로 퍼져 나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향목(香木)과 연향(練香)이다. 향목은 향나무를 잘게 썰어 태우는 것이고 연향은 향을 분말로 뭉쳐 가늘고 길게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다. 전에는 향목을 많이 사용했으나 요즘은 주로 연향을 사용하는데 재료의 특성상 도구로는 향목에는 향완과 향로가 연향에는 향꽂이가 주로 쓰인다고 할 수 있다. 고려는 불교와 관련이 깊은 나라다. 그렇다보니 고려청자에서도 향과 관련된 도구들인 향완과 향로와 향꽂이 등이 보인다. 그러나 청자로 된 향완과 향로에 비해 향꽂이는 그 수량이 비교적 적은 것 같다. 그 적은 향꽂이 중에서도 내가 소장하고 있는 청자향꽂이편은 일부 손상된 것이기는 하지만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형태라는 점에서 참으로 귀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청자향꽂이편의 형태를 보면 나팔형으로 벌어진 안쪽에 작은 돌기가 있고 그 돌기 가운데는 작은 구멍 모양의 홈이 파져 있다. 나팔형으로 벌어졌던 형태는 밑으로 좁아지며 마무리 되어 남은 모양만 보면 그대로 손에 들고 다니는 마이크와 같은 모습이다. 그런데 밑 부분을 보면 돌아가며 깨진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뒤집어 보면 밑바닥에 유약이 그대로 살아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추론은 간단하다. 나팔형 안쪽의 돌기에 보이는 구멍 형태의 홈에는 향을 꽂을 수 있도록 한 향꽂이가 분명하며 아래에는 턱이 진 밑바탕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없어진 밑바탕은 박산향로의 밑부분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청자향꽂이편의 유색은 완전한 비색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상급이며 유약 또한 유리를 들여다보듯 투명하고 말갛게 잘 살아 있다. 굽 밑을 보면 이 부분만 황갈색의 특색을 보이고 있어 눈길을 끈다. 몸체는 서너 조각이 난 것을 제살 부침 한 것으로 외면에는 음각으로 의미를 알 수 없는 추상무늬가 들어 있기도 하다. 나팔형의 향꽂이라니, 한 마디로 실물은 물론이거니와 도록이고 어디서든 본 적이 없는 귀한 형태인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 청자향꽂이편은 몇 년 전 인사동 고미술계 후배가 구해 준 것이다. 후배뿐이 아니라 내가 도편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지인들이 도와주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 향기로운 마음에 감사를 드리며 향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요즘은 향하면 향목이나 연향보다도 주로 침향(沈)이 거론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워낙 귀하고 값도 비싼데다 방송을 통해 한약재 선전에도 많이 보이는 탓이리라. 침향은 베트남과 남중국 밀림에서 나는 침향나무의 수액을 향으로 정제한 것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볼 수 없는 것이다 보니 대용으로 향나무를 잘라 땅에 묻었다가 나중에 꺼내 쓰기도 했는데 이를 두고 매향(埋香)이라고 한 기록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침향으로 불리던 것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즉 향나무를 깊은 우물이나 강 같은 곳에 깊이 넣어 두었다가 백여 년이 지난 후 꺼내 쓴 것을 말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먼 훗날 후손들을 위해 마음을 갈무리하는 방법이었으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습인가. 하지만 속도를 중시하는 세태와 더불어 이제는 영영 사라져버린 옛 추억이 되어 버렸으니 정말이지 아쉽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사실 향과는 인연이 없다. 물론 어려서 집안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워 본 적은 있으나 추도 예배로 대체가 되며 이마저 없어져 버렸다. 더구나 개인적으로 집안이나 사무실에서 향이나 향불을 피워 본 적은 더더구나 없다. 그런 내게 귀하고 귀한 청자향꽂이편이 생겼으니 이 무슨 인연인가. 이 소중한 인연을 통해 비록 향이나 향불은 피우지 못하더라도 산사엘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느껴지던 그 그윽한 향내음처럼 나도 이웃들에게 향기를 풍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도록 노력은 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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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30)<br>청화백자산수문합뚜껑편김용진 옹이시여! 부디 이규진(편고재 주인) 김광균 시인의 우두고(雨杜考)란 수필을 보면 구룡산인(九龍山人) 김용진(金容鎭) 옹이 저자의 계동 뒷집에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가끔 찾아뵙고 고서화에 대한 이야기도 듣고 저자의 집에 놀러 오시기도 했는데 하루는 방 안에 놓인 몇 개의 이조자기를 보고는 부엌에서 쓰던 것을 어찌 사랑방에 놓아두느냐고 못 마땅해 하셨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사실 청자나 분청이나 백자 등의 전통도자기들은 대부분 실용을 위한 그릇일 뿐 감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부엌에서 사용해야 할 그릇들이 사랑방에 버젓이 놓인 것을 보고 조선조 마지막 문인 화가이기도 한 김용진 옹이 언짢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오늘의 우리는 이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 것일까. 도자기들은 그릇으로서의 용(用)뿐만 아니라 다소의 경중은 있을망정 나름의 미(美)를 지니고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전통사회에서 치중되었던 용의 기능은 대부분 사라지고 이제는 그동안 등한시되었던 미적 대상으로서의 의미만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자기들이 결국은 고미술품의 지위를 얻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이와 같은 저간의 사정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현실에서 그 기능을 상실해 버린 용의 의미만을 강조해 금이 갔다거나 깨졌다고 해서 무작정 평가절하하는 오늘의 시장 생리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재고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제 과거에 만들어진 온전한 사발이나 대접이 있다고 해서 여기에 밥을 담거나 국을 담아서 먹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이처럼 실생활에서 용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면 남는 것은 미적인 부분일 수밖에 없다. 온전한 도자기의 경우도 그럴진대 하물며 도편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따라서 도편이 의미를 지니려면 나름의 자료적 가치나 미적인 아름다움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도편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갖고 들여다보는 이유도 그 작은 가치들을 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청화백자산수문합뚜껑편은 전형적인 19세기 분원산이다. 옆으로 두 줄의 청화선을 두르고 윗면 전체에는 분원산수를 그렸던 듯싶은 데 남은 부분은 원경의 산 일부와 협곡의 좌측 바위와 중경의 배 한 척이 보일 뿐이다. 그런데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여백의 미가 돋보인다. 넓은 강 한가운데 한가롭게 떠 있는 배 한 척에서는 무언가 여유와 멋스러움이 넘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온전했더라면 하늘에는 둥실 달이라도 떠있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이 도편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다 보면 나는 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가 은연중 생각나고는 한다. '적벽부'는 소동파가 필화 사건으로 호북성 황주에 유배되었을 때 황주성 밖 적벽에서 배를 타고 노닐면서 지은 작품이다. 1082년 음력 7월에 지은 것이 '전적벽부'이고 음력 10월에 지은 것이 '후적벽부'다. 전적벽부는 이렇게 시작된다. 임술지추칠월기망(壬戌之秋七月旣望)에 적벽강(赤壁江)에 배를 띄워 임기소지(任其所之) 노닐 적에 청풍(淸風)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 그런데 이 적벽부는 한글로 쉽게 풀어 번역한 것도 요즘은 많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들보다는 한문을 혼용한 한문 투의 것이 더 마음에 와닿는다. 내가 지나간 세대의 인물이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내가 처음 접했던 적벽부가 한문 투였고 그 인상이 아직도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김광균 시인의 집에 놓여 있던 이조자기를 보고 언짢아했다는 김용진 옹이 만약 살아 계셔서 깨지고 부서진 도편 조각들에 집착하고 있는 나를 보았다면 무어라고 했을까. 할 일도 없는 사람이라고 나무라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청화백자산수문합뚜껑편 그림을 보며 소동파와 적벽부에서 술이라도 한잔 마시며 놀고 있는 꿈을 꾸고 있으니.... 이를 어쩌랴. 지하에 계신 김용진 옹이시여! 부디 용서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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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29)<br>백자주름문화형접시편청화백자십장생문주병 이규진(편고재 주인) 우리나라 도자기를 읊은 시 중에서 어느 것이 좋으냐 하는 것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많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초정 김상옥 시인의 <백자부>를 가장 좋아한다. 나는 이 시조가 좋아 선배의 달항아리 그림을 엷게 카피해 바탕에 깔고 서예가인 선배 사모님의 글씨를 받아 편고재에 걸어놓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1947년 4월 15일 수향서헌에서 발행한 초정 시인의 첫시집 <초적>에서 원문 그대로 시를 인용해 보기로 하자. 찬서리 눈보라에 절개 외려 푸르르고 바람이 절로 이는 소나무 굽은 가지 이제 막 백학 한쌍이 앉아 깃을 접는다 드높은 부연끝에 풍경소리 들리던 날 몹사리 기달리던 그린 임이 오셨을 제 꽃아래 비진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 갸우숙 바위틈에 불로초 돋아나고 채운 비껴 날고 시내물도 흐르는데 아직도 사슴 한마리 숲을 뛰어 드노다 불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 흙속에 잃은 그날은 이리 순박하도다 시는 절창이다. 그런데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시를 자세히 보면 제목과 내용이 잘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 든다. 물론 백자라고 하면 청화 철화 동화 흑상감 등이 들어가도 백자로 통칭이 된다. 하지만 이런 명칭들과 함께 쓰지 않고 그냥 백자라고만 하면 우선 순백의 백자를 연상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백자부'에서도 우선 연상되는 것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백자다. 그런데 '백자부'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백자는 순백의 백자가 아닌 것이다. 백자부를 살펴보면 소나무 학 불로초 사슴 등이 보인다. 꼭 열 가지가 아니더라도 이런 것들이 들어가면 십장생이라고 부른다. 그런가 하면 ‘꽃아래 비진 그 술을 여기 담아 오도다’에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을까. 술을 담아 오는 것은 당연히 술병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면 백자부는 내용으로 보아 '청화백자십장생문주병'이어야 맞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이런 지엽적인 문제들이 작품의 가치에 크게 손상을 준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차제에 십장생문이 들어간 청화백자 도편이 없을까 하고 자료를 찾아보니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래 포기를 하고 돌아서려다 보니 전에 답십리에서 구해 두었던 백자주름문화형접시편이 보이는 것이 아닌가. 정선된 태토에 약간 청색이 가미된 흰빛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깔끔해 <백자부>에서 보이는 ‘불속에 구워내도 얼음같이 하얀 살결, 티 하나 내려와도 그대로 흠이 지다’에 걸맞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 백자주름문화형접시편은 색깔도 눈부시지만 모양 또한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안쪽에서 들어간 부분이 밖에서는 상대적으로 불거진 모습인데 일정하게 간격을 두고 펼쳐진 주름무늬는 눈부신 색깔과 어울려 그 모양이 너무도 아름다워 백자의 진수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시와 도자, 도자와 시. 오늘은 초정 김상옥 시인의 백자부로 인해 도자에 대해 그리고 도편에 대해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보게 되는 그런 날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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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28) <br>백자철채뚜껑편유독 백자철화호를 주목하는 것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한국미술수선'이라는 책이 있다. 재일교포 이병창이 1978년 동경대학출판회에서 자비로 발행한 세 권짜리 책이다. 1권은 미술사개론 2권은 고려청자 3권은 이조백자로 꾸며져 있는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국 도자기 명품들을 집대성해 놓은 것이다. 총 2000부 한정본으로 이중 시판은 500부 한정이니 보통 귀한 책이 아니다. 당시로서는 외국에 나가 있는 한국 도자기들을 볼 수 있는 책이나 자료가 전무한 때여서 내용도 놀랍지만 장정 또한 최상급이다. 각 권은 양장본에 미농지로 보호를 하고 세 권을 헝겊으로 만든 포갑에 넣은 후 이를 또 종이판지로 싼 후 다시 종이판지 상자 케이스에 넣고 있다. 총 1160페이지에 달하는 책은 종이 지질 또한 최고급품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 한국미술수선을 내가 처음 본 것은 80년대 중반쯤이었을 것이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답십리 고미술상을 찾아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찾아온 손님 한 분이 한국미술수선 중 고려청자편을 들고 온 것이었다. 책을 펼쳐보니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보도 듣도 못한 명품 도자기들이 그야말로 즐비한 것이 아닌가. 호기심이 발동해 주인과 동경대학출판회로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러나 요행이도 재고는 있었으나 값이 만만치 않아 포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세월이 좀 흐른 뒤의 일이다. 한 번은 신촌에 있는 헌책방엘 들려보니 서가 위쪽에 한국미술수선이 박스채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반가워 책은 살펴보지도 않고 값을 물어본 후 통장을 털어 구입을 해버렸다. 그 때의 기분은 적지 않은 책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황홀하기만 한 것이었다. 후일 그 헌책방을 다시 들렸더니 주인의 말이 걸작이었다. 책은 좋은 책 같은데 손님들이 값만 물어보고 사가지는 않아 내게는 값을 낮춰 팔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막상 내게 책을 팔고 나니 전에 보고 간 손님 중에 사러 온 사람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물각유주(物各有主)라고 해서 모든 물건은 임자가 따로 있다고 하는 것일까. 재일교포 이병창은 한국미술수선 책 하나만으로도 한국도자사에서 기억할만한 인물이지만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자기 수집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가 평생 수집한 도자기 컬렉션은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을 했는데 이를 기념해 1999년 '우아한 색 순박한 형태'라는 이름으로 도록이 발행되었다. 대형판 436 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을 보면 이병창의 뛰어난 안목을 짐작할 수가 있다. 고려청자 초기부터 시작해 조선백자 후기까지 체계적으로 일목요연하게 수집이 되어 있어 그야말로 한국도자사를 유물로 일별한다는 느낌을 줄 수 있을 정도이니 그 수준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많은 이병창 컬렉션 중에서도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것은 백자철채호다. 높이가 30.6Cm로 제법 큰 것인데 입술이 밖으로 말리고 통통한 몸체가 밑으로 내려가며 좁아지다 안굽으로 마무리된 전형적이 초기 백자항아리의 모습이다. 이 백자철채호는 당당한 모습도 모습이지만 몸체 윗부분은 백자 그대로인데 반해 아래 부분만이 철채로 되어 있는 점이다. 철채는 어두운 회색빛의 흑갈색으로 엷게 입혀져 있다. 이처럼 백색과 흑갈색으로 위와 아래를 구분한 것은 음양이나 해와 달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정확한 의미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많은 이병창 컬렉션 중에서도 내가 유독 이 백자철채호를 주목하는 것은 이와 비슷한 백자철채뚜껑편이 한 점 있기 때문이다. 백자철채뚜껑편을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어느 선배로부터 양도를 받은 것도 같은데 확실치가 않은 것이다. 보주형의 꼭지가 달린 손잡이에 옆으로 퍼져 나간 뚜껑은 안쪽으로는 백자 그대로이고 바깥쪽으로는 철채가 되어 있다. 따라서 백자철채호가 위 아래로 구분이 되어 있는데 반해 이 백자철채뚜껑편은 안과 바깥으로 구분이 되어 있는 것이 다르다. 말하자면 항아리와 뚜껑이라는 기물에서 오는 차이일 뿐 그 구분 방식은 같다고도 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같은 초기 백자임을 감안할 때 이 둘은 같은 도공의 솜씨로 같은 가마에서 만든 것은 아닐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왜 이런 상상만으로도 나는 마음이 한없이 즐겁고 유쾌해 지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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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27)<br>청화백자동화완편강물 또한 말이 없으니 이규진(편고재 주인) 분원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보면 저 멀리 가물가물 마현이 보인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두물머리에서 만나 흐르다 두미협에서 팔딩댐으로 막혀 강물이 호수처럼 질펀하게 차오른 물길 저 너머로 보이는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은 늘 아련한 그리움 비슷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마현은 다산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곳이자 그가 뼈를 묻은 유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면 다산도 내가 바라보듯이 마현에서 분원을 바라보고는 했었을까. 바라보았다면 도자기를 굽느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며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그 것이 자못 궁금하지만 분원에 대한 다산의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으니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따지고 보면 분원은 다산이 의식적으로 외면하지 않는 한 모를 수가 없는 곳이다. 강 건너 저 멀리 도자기를 굽느라 시도 때도 없이 피어오르는 연기도 연기지만 다산은 천진암도 자주 찾았기 때문에 그 길목에 위치한 분원을 지나다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왜 그토록 다방면에 걸쳐 호기심이 많았던 다산은 분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을까. 천민들의 삶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백성의 고통과 민생에 관심이 많아 <목민심서>라는 불후의 명저를 남긴 다산이 아니었던가 그런데도 왜 다산은 분원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까. 치밀하고 꼼꼼했던 다산이 분원에 관심을 갖고 보고 들은 그 일들에 대해 기록을 해두었더라면 분원을 이해하는데 얼마나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었으랴. 따라서 분원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마현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그리움과 더불어 안타까움에 마음이 저려오고는 한다. 도자기에 대한 관심과 열정이 넘치던 젊은 날 분원은 자주 찾던 곳 중의 하나다. 그러나 내게는 가마터가 있던 분원초등학교 쪽 보다는 인근의 마을 곳곳을 돌아보는 일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왜냐하면 분원에서 도자기를 만든 것이 오랜 세월이고 보니 가마터가 아니더라도 마을 곳곳에 도편 조각들이 흩어져 있고는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밭을 갈거나 집터를 파헤친다던가 하는 등 지형의 현상 변경이 이루어지는 곳이면 더러 도편들이 보이고는 했었다. 청화백자동화완편도 그런 과정에서 우연히 인연을 맺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원초등학교를 왼쪽으로 끼고 우측의 작은 도랑을 따라 깊지 않은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민가들이 끝나고 밭이 나온다. 아주 오래 전 그 우측 도랑에서 만난 것이 청화백자동화완편이다. 이 청화백자동화완편은 비록 도편에 불과하지만 그 생김새며 문양이 참으로 보기 힘든 귀한 자료다. 몸체 외면에는 청화로 모란절지문과 벌 한 마리와 도안화된 복(福)자가 들어 있다. 이 복자는 굽 안에도 또 다른 형태의 도안으로 들어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굽 위로 바로 이어진 나뭇잎 모양의 장식이다. 놀랍게도 이 문양은 조선 백자에서도 귀하다고 하는 동화인 것이다. 하지만 이 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릇 안쪽의 내저에도 잘려져 무슨 글자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화로 도장이 찍혀 있는 것이다. 보도 듣지도 못한 이 청화백자동화완편을 보고 있노라면 나와의 인연 자체가 너무도 고맙고 소중해 감사함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다산이 끝내 침묵했던 분원백자가마터는 2001년과 2002년 2차에 걸쳐 이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 조사보고서가 <광주분원리백자요지>라는 이름으로 2006년 8월 출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관요 시절과 민영화 이후 도편들의 구분과 경계를 선명하게 보여주지 못하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점에서 아쉬움이 많다. 아쉬움이 어찌 그 것 뿐이랴. 하지만 많은 세월이 흐르며 지워진 흔적이 너무도 많기 때문에 한계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원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 살았던 다산의 침묵은 더 아쉽고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흐르는 강물은 그 침묵의 사연을 알고 있으련만 그러나 강물 또한 말이 없으니 내가 안타까워한들 이제 와 무슨 소용이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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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26) <br>분청쌍학문대접편돌무더기 속에서 발견한 분청쌍학문대접편 이규진(편고재 주인) 황간은 충청북도 영동군에 속하는 추풍령 아래 아주 오래 된 고을이다. 경부선 열차가 지나가는 역이 있어 일제강점기에는 근방의 목재 등을 실어내느라 번창했던 시절도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은 한적한 그저 그렇고 그런 간이역 같은 풍경이다. 80년대 후반 이 황간을 찾았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봉사활동을 많이 하는 의료인을 매달 발굴 소개한 후 연말이면 심사를 거쳐 이들 중 한 분에게 상을 주던 일의 실무를 맡고 있었는데 황간을 찾은 것도 대상자인 의료인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의료인의 안내로 인근의 한천8경을 처음 구경한 것도 그때였다. 황간은 그 것으로 끝은 아니었다. 당시 방문을 통해 얻어 들을 바도 있고 해 그 후에도 황간을 서너 차례 더 찾은 바 있는데 도요지 답사를 위해서였다. 그 때가 언제였는지는 지금 와 기억이 아물아물 하지만 마지막 찾았던 날만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답사를 마치고 귀경을 위해 터미널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TV에서 김일성 사망 소식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은 1994년 7월 8일이었다. 하지만 김일성 사망 소식을 들으면서도 별다른 감회는 없었던 것 같다. 그저 한국 현대사에 한 획을 그은 독재자도 우리네 장삼이사와 마찬 가지로 결국은 죽고야 마는구나 하는 감상 정도였다고나 할까. 황간에서 김천 방향으로 국도를 따라가다 좌측 길로 접어들어 군부대를 지나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추풍령면 황보 부락에 이르게 된다. 가마터는 다리 옆 민가 근처와 다리를 건너 마을 끝 민가와 사격장 밑 과수원 그리고 골짜기를 한참 더 올라간 산기슭 등 네 곳에 있다.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충북지방 도요지 지표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다리 옆 민가 근처의 가마터에서는 분청접시 외면에 백상감 된 덕녕(德寧)명 도편이 수집되어 관심을 끌고 있다. 덕녕부란 단종과 관련된 관청으로 1455년부터 1457년까지 짧은 기간 존속했음으로 인해 편년자료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황보 일대의 가마터는 15세기 중반에 공납용 도자기를 제작했던 곳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덕녕명 도편이 수집된 다리 옆 민가 옆 가마터는 내가 방문했을 당시만 해도 작은 도편들만 보여 별다른 관심을 끌지는 못했던 것 같다. 재미난 도편을 본 것은 오히려 사격장 밑 과수원에 위치한 가마터에서였다. 사격장과 과수원 경계에는 가시덤풀이 어우러진 얕으막한 돌담이 있었는데 그 돌무더기 속에서 발견한 것이 분청쌍학문대접편이다. 굽은 거친 모래받침에 외면으로 올라가며 연판문과 국화문을 백상감하고 있다. 안쪽 둘레에도 연판문과 벌집 형태의 문양을 백상감하고 있는데 문제는 내저 중앙에 큼직하게 흑백상감으로 처리한 쌍학문이다. 학이야 원래 청자에서 많이 보이는 문양이지만 여기서 보이는 학은 이것들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두 마리의 학은 서로 엇갈려 있는 모습인데 몸체는 백상감에 부리와 날개와 다리는 흑상감으로 처리하고 있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보면 사실적이라기보다는 반추상의 형태인데 흡사 도안화 된 태양이 방사선으로 빛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는 듯한 현대적인 모습이다. 이제 와서 보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으나 숙부인 세조에게 왕좌를 빼앗길 수밖에 없었던 비운의 왕 단종과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점도 흥미롭거니와 김일성의 사망 사실도 떠올려 보게 되는 황간과 황보 마을과 분청쌍학문대접편. 도편도 도편이지만 언젠가 황보 마을을 찾았을 때는 가을이라 과수원의 사과들이 먹음직스럽게 붉게 익어 가고 있던 모습도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 속의 영상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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