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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5)<br> 분청명문접시편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이규진(편고재 주인) 성탄절 연휴에 집에서 TV를 돌리다 현역가왕이라는 프로를 잠시 보았다. 처음부터 본 것이 아니어서 유행가의 제목도 원래의 가수도 알 수는 없었는데 그 날은 경연에 참가한 김소유라는 가수가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노래 중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나는 그 구절 앞에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지고 말았다. 엄마라는 그리운 이름 앞에 가슴 먹먹함 말고 또 무슨 감정이 있으랴.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10여년이 되어 온다. 밥술깨나 뜨던 집안에서 삼남매 중 막내딸로 태어난 어머니는 우리 집으로 시집을 오면서 고생이 시작되었다. 아버지가 일찍 전사를 하셨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 위로는 연로하신 시부모님과 어린 나와 동생, 그리고 삼촌도 없는 집안에 여섯이나 되는 고모들, 어머니는 얼마나 답답하고 암담하셨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꿋꿋하게 일어서서 우리 집을 흔들림 없이 지키셨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외롭고 힘드셨을까. 하지만 내가 성장을 해서도 가정이 온전치 못하다 보니 어머니를 모시기는커녕 따뜻한 밥 한끼 제대로 해드리지를 못했다. 그런 회한이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라는 유행가 구절 앞에서 그만 눈물을 왈칵 쏟고 말았던 것이었다. 사람이 어찌 후회가 없으랴. 살아오는 동안의 마디마디가 어찌 아픔 아닌 것이 어디 있었던가. 그러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회한만은 그 마디마디가 더욱 아프고 시린 것만 같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왜 이런 노래 구절이 있어 내 마음을 울리고 또 울리려 드는가. 나는 사실 어머니뿐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물론 고모들의 사랑을 너무도 분에 넘치게 받고 자랐다. 세상에 나와서도 그런 인복(人福)이 지속된 탓인지 주변에 척을 지고 살거나 미워한 사람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내가 도편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을 것을 알고 도와주려는 지인들 또한 내게는 인복이지 안았을까. 지인으로부터 일찍 선물로 받은 분청명문접시편 또한 그런 인복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분청명문접시편은 울산광역시 울주군 삼동면 태기리(台機里)에서 지인이 직접 습득한 것을 얻은 것이다. 울주군 삼동면에는 태기리와 하잠리 분청 가마터가 있는데 이 곳은 과거 언양현에 속했던 곳으로 언양인수부(彦陽仁壽府)와 장흥고(長興庫) 등 관사명이 출토되고 있어 공납용 자기를 제작하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제는 분청명문접시편의 글자가 온전치 않다는 점이다. 글자는 백상감으로 양(陽)자가 분명한데 앞의 부수가 떨어져 나가고 역(易)자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과거 언양현 소속이었던 태기리에서 지인이 직접 습득한 것이 확실하고 보면 언양<彦陽)의 양(陽)자 중에서도 역(易)만 남았지만 언양에서 만들어 중앙 관서에 납품을 하고자 했던 공납용 자기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때 아닌 유행가 가사 한 구절 때문에 잊고 지냈던 가족들의 사랑과 지인들의 관심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랴. 어느날 문득 애절한 선율 속에 가슴을 파고들던 아! 부를수록 먹먹해지는 그 이름,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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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4) <br>청자귀면장식편소박함과 정겨움 때문일까 이규진(편고재 주인) 충청남도 청양군 정산면에 위치한 칠갑산을 언제 찾아보았던가, 아니 넘어 보았던가. 칠갑산 휴게소에서 차를 마셔 보았던 적은 또 언제였던가. 휴게소에서 고지대에 위치한 천장호 저수지를 우측으로 끼고 급경사진 비탈길을 내려가면 좌우로 길게 형성된 계곡을 만나게 된다. 이 계곡을 우측으로 올라가면 몇 채의 민가가 어우러진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천장리다. 천장리 끝 민가와 밭 경계를 이루는 턱이 진 곳에 돌무더기가 있는데 이곳이 가마터인 듯 도편들이 보이고는 했었다. 이 천장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찾아보았던 적이 언제였던가. 천장호 저수지에는 그새 출렁다리가 생겼다고 할 정도로 많은 세월이 흘렀고 보면 가마터를 찾아보았던 것이 언제쯤이었는지 이제는 가늠조차 쉽지가 않다. 청자귀면장식편은 천장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만난 것이다. 청자 하면 우선 고려 시대를 떠올리게 되지만 조선 시대에도 만들어졌다. 조선청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입힌 이른바 백태청자라고 하는 것과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분청 태토에 분을 안 입힌 채 만들어 지는 청자가 그 것이다. 따라서 후자의 경우는 고려 시대 지방가마에서 만들어 지는 청자와 구분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천장리에서 만난 청자귀면장식편 또한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청자귀면장식편에는 두 가지 의문점이 있다. 첫째는 내면은 무문이고 외면에는 파도문 같은 음각이 있고 위로 꺽이는 부분에는 돌대가 있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도대체 어떤 기형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향로일까 수반일까. 그러나 더욱 궁금한 것은 입술 부위에 붙어 있는 귀면장식이다. 편리한대로 귀면장식이라고는 했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간략화 된 뿔인지 귀인지에 입과 코가 있고 가로로 쭉 찢어진 입이 있는 이 것은 도깨비라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토끼 같은 형상이라고나 할까. 이 또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한 것인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조선 시대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만들어진 청자귀면장식편. 귀면인지 무엇인지 정확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간략환 된 표정만은 여간 애교스럽고 정겨운 것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귀면을 그릇에 올린 도공의 마음은 또 얼마나 여유로워 보이는지 그 넉넉한 심성을 헤아려 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여하튼 기형을 알 수가 없는 청자귀면장식편. 발굴조사보고서 같은 것을 보면 용도가 명확하지 않을 경우 이형청자라고 치부해 버리고 말지만 그렇게 얼버무리기에는 무언가 아쉽고 허전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 청자귀면장식편이 주는 그 소박함과 정겨움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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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3) <br> 청자양각동자문완편고질병도 이런 고질병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강진과 쌍벽을 이루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는 젊은 시절 여러 번 답사를 해본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변산반도 해안도로가 지금처럼 포장이 잘 되어 있어 관광도로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포장의 마차길 밖에 없을 때였다. 줄포에서 유천리를 들어가는 길 또한 마찬 가지였다. 그런데 유천리 청자 가마터를 여러 번 답사를 해본데 반해서는 기억에 남는 도편이 별로 없다. 그런 가운데 구지 기억에 남는 것을 찾아본다면 아마도 그 중 하나가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자에서 포도에 동자를 곁들인 문양은 생각보다 아주 보기 힘든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포도와 동자는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까. 포도넝쿨은 이어지는 줄기로 인해 연속성을 의미하고 포도송이는 다산을 상징한다는 것이 속설이다. 따라서 연속적인 다산을 의미한다는 것인데 거기에 동자를 곁들이니 미래 세대에 대한 꿈과 희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출산율이 낮아져 인구 절벽을 걱정하고 있는 오늘의 시점에서 본다면 새롭게 관심을 가져보아야 할 문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청자에 포도와 동자를 곁들인 문양은 병이나 주전자 그리고 잔 등에서 볼 수 있다. 대부분 흑백상감이지만 개중에는 포도송이를 동화로 처리하고 있어 아름다움이 배가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동자는 주로 포도넝쿨 사이를 뛰어놀거나 포도송이를 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청자에서 보이는 인물 자체가 귀한 것이다 보니 동자라고는 하지만 이런 문양이 있으면 비교적 고가에 거래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동화라도 첨가된다면 그 가치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청자에서 보이는 포도와 동자가 보통은 흑백상감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했지만 도범으로 찍어낸 압출양각의 것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적 제14161호 청자동자무늬조각이 바로 그런 종류다. 그런데 문제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에서 오래 전에 인연을 맺었던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이 바로 이와 같은 양식의 것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도편은 강진 것인데 반해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은 유천리 것이니 지역을 달리하는 것에 비슷한 양식의 것이 있다는 것은 여간 주목을 요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양각동자문완편은 포도와 동자가 들어간 일반적인 문양과는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외면은 무문이고 안쪽만 압출양각의 문양인데 우선 이 도편에서는 포도가 보이지 않는다. 연꽃 사이를 뛰어놀고 있는 동자의 모습이 보일 뿐인 것이다. 안과 밖 모두 녹청색의 유약이 두껍게 입혀져 있으며 굽에는 내화토 받침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하지만 내저에는 내화토 받침의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포개어 굽는 과정 중에서 맨 위에 놓고 소성을 한 고급품으로 보여 진다, 강진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 이제 이곳에는 반갑게도 박물관 까지 들어서 있어 그동안의 역사를 어느 정도는 조망해 볼 수 있는 명소로 등장했다. 몇 해 전 이곳을 방문해 보았는데 내 눈길을 끈 것은 청자종에서 떨어져 나온 양각의 부처님상과 청자바둑판편이었다. 아무리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개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하더니 온전한 것은 젖혀놓고 깨진 도편에만 눈길이 가니 고질병도 이런 고질병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눈과 마음이 그리로만 향하니 나 또한 이를 어쩌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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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2)<br>분청양산명접시편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우리가 고미술을 아끼고 좋아하고 사랑한다는 것은 옛것을 오늘에 되살려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하자는데 그 뜻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미술이라는 것이 재화와 관련이 있다 보니 생각보다 불미스러운 일이 흔치 않게 생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름다움을 통해 만나고자 하는 고미술 때문에 오히려 심성이 망가지고 생활이 어지러워 질수도 있다는 것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이겠는가. 고미술을 좋아는 하대 끊임없이 조심하고 경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평소 가깝게 지내던 사이로 고미술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던 선배가 있었다. 그런데 평생을 모았던 고미술품으로 인해 끝내는 송사까지 벌려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말았다. 하지만 법이라는 것이 그렇게 녹녹한 것이 아니어서 결국은 결론 없이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이 일 때문에 크게 실망을 했는지 선배는 그 후 고미술계와는 완전히 발을 끊고 산과 들로 사진을 찍으로 다닌다는 소문이 들려오더니 그마저 끝내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그 선배에게서 오래 전 선물로 받았던 것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가산리에는 분청사기 가마터가 두 곳 있다. 상리마을 뒤편 계곡과 호포부락 뒤편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가 바로 그 것이다. 두 곳 중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호포가마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여기서는 다양한 종류의 분청사기는 물론이거니와 명문도 발견이 되는데 양산장흥고(梁山長興庫)와 장흥고 등이 그 것이다. 이로 보아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양산에서 중앙 관서에 상품을 납품하던 중요한 공납용 자기 제작소였음을 알 수 있다. 분청양산명접시편은 훼손이 심해 작은 조각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선배가 호포가마터를 찾아 직접 습득한 것인 듯 95.2.9라는 날자와 양산이라는 글자가 명기되어 있어 출토지가 분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접시편은 굽부터 몸체로 거칠게 인화분청이 시문되어 있다. 접시 내저에는 국화문이 상감되어 있는데 이 또한 거칠어 문양은 뚜렷하지가 않다. 그러나 이 접시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무래도 내저 중앙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양산(梁山)명이다. 비록 삼수변은 훼손되고 없으나 선배가 남긴 기록으로 보아 양산명을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선배와 소식이 끊긴지도 꽤 오랜 세월이 흘렀다. 선배는 지금도 카메라를 메고 산과 들을 누비며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을까. 그러나 나보다 손 위인 선배의 나이를 생각하면 장담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사실 양산 가산리 호포가마터는 선배보다도 내가 더 일찍 답사를 했던 곳이다. 그러나 별다른 소득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고, 그런 내 이야기를 듣고 선배가 건네 준 것이 바로 이 분청양산명접시편이다. 따라서 훼손이 심해 아주 작은 도편에 불과하지만 이것을 보고 있노라면 이런저런 추억들이 흘러가는 구름이 손짓이라도 하듯이 가슴을 스쳐지나가고 또 지나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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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1)<br> 청자사자형문진편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에서 백수의 왕으로 불리는 사자는 아주 보기 드문 동물은 아니다. 주로 향로나 베개 등에서 볼 수 있는데 가장 유명하다고나 할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형뚜껑향로(靑磁獅子形蓋香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밖의 것으로는 근래 들어 눈길을 끌고 있는 청자사자형뚜껑향로 2점이다. 2007~2008년 충남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수중발굴을 통해 출수된 것으로 지금은 보물로 지정이 되어 있다. 보물 청자사자형뚜껑향로는 몸에 비해 머리가 크다. 목에는 방울이 달려 있고 앞발은 두 개의 보주를 밟고 있다. 몸에는 소용돌이 털이 새겨져 있고 벌린 입 사이로는 날카로운 송곳니와 내민 혀가 보이고 있다. 다소 파격적이고 거칠게 표현된 형상은 세련된 조형성으로 널리 알려진 고려청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따라서 이질적이며 해학적인 자태는 고려인들의 또 다른 미감을 엿볼 수 있는 것이어서 여간 흥미로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뚜껑향로가 보물로 지정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죽간 등을 통해 태안 대섬 앞바다에서 출수된 도자기들이 강진에서 만들어져 개경으로 가다 난파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를 통해 제작 시기와 출토지 및 사용처를 분명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의 이유로는 해학적이고 독특한 조형미, <선화봉사고려도경>의 산예출향을 연상시키고 있다는 점, 고려청자의 다양성과 우수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국보 제60호나 보물로 지정된 청자사자형뚜껑향로의 사자가 모두 향로의 뚜껑이고 여타의 사자들이 베개와 같은 유물들에서 장식용으로 몸체에 붙어 있는 것이 보통인데 반해 청자사자형문진편(靑磁獅子形文鎭片)은 이런 것들과는 유형을 달리 하고 있어 주목된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은 현재 몸체의 앞부분만 살아 있고 뒷부분은 망실되고 없다. 말하자면 뒷다리와 엉덩이와 꼬리 부분이 훼손되고 없는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남은 형체만으로도 어떤 기물에 부착시켜 장식되었던 것이 아니라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한 마리의 사자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기존의 청자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형문진편의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몸체를 지탱하고 있는 두 개의 다리가 무척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크게 벌린 입으로는 가지런한 이빨이 보이고 들창코 같은 코에 튀어나온 두 눈알에는 검은 점을 찍고 있다. 옆으로는 소용돌이 모양의 갈기 흔적이 보이고 머리 위로는 없어진 뒷부분에서부터 시작되었을 꼬리 일부분이 붙어 있다. 거기에 온몸에는 비색의 유약이 두텁게 입혀져 있다. 반 토막이 나 앞부분만 살아 있지만 이것만으로도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어떤 기물에 장식용으로 붙어 있던 것이 아닌 독립된 한 마리 사자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물론 편리한대로 청자사자형문진편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면 보기 좋게 청자로 만들어진 장식용 사자였을까.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는 특수한 형태의 것이어서 주목을 요하는 귀중한 청자 자료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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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0) <br> 청자귀면장식기대편즐겁고 황홀해 지는 심사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기대(靑磁器臺)는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드물다. 그러나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부안 유천리 청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도편들 중에는 의외로 청자기대편들이 많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그런데 문제는 완형이 잘 보이지 않다보니 용도에 대해서도 확실치 않은 점이 많다는 사실이다. 화병이나 매병 그리고 향로 등을 받쳤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는 것이 청자기대의 도편만 해도 종류가 여러 가지가 보이기 때문이다. 청자기대는 부안의 유천리 청자가마터에서만 보이는 것도 아니다. <강진 사당리 도요지 발굴조사 보고서>를 보면 여기서도 도편들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유천리에서 볼 수 없는 귀면이 장식된 청자기대 도편이 사당리에서 두 점이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는 점이다. 귀면은 기대의 하단부 옆면에 붙어 있는데 부릅뜬 눈과 벌름거리는 코 그리고 입술 밖으로 내민 이빨 등이 인상적이다. 그러니까 귀면 중에서도 다른 것은 생략된 채 안면만이 노출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청자기대편에 대해 관심이 갈 수 밖에 없는 것은 양식이 비슷한 도편을 한 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청자귀면장식기대편은 아래쪽으로 풍열의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여의두형 다리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리 위에는 연판문을 장식하고 있고 위로 올라가며 투각이 있는 원통형의 대가 층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손상이 있어 원형을 유추해 보기는 쉽지 않다. 귀면은 여의두형 다리와 연판문 장식 경계에 걸쳐 양각으로 조각이 되어 있는데 눈알을 검게 칠해 액센트를 주고 있다. 두드러진 코도 인상적이지만 이 귀면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넓게 벌리고 있는 입을 가득 메우고 있는 돋을무늬의 날카로운 이빨이 아닐까 생각된다. 도편은 산화가 심한 편이어서 원래의 색감을 알 수 없지만 언뜻언뜻 내비치는 푸른빛의 유색이며 귀면장식으로 보아 강진 사당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청자기대는 아무래도 독자적인 아름다움 보다는 그 위에 올려놓는 기물의 모양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에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청자기대는 여의두형 다리에 투각이 있는 대가 단을 이루는 등 그 자체로 정성을 들여 만든 고급품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하면 그 위에 올려놓기 위한 기물들은 또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것이었을까. 따라서 청자귀면장식기대편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위에 올리고자 했었을 기물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화분이었을까 매병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향로였을까. 그 것이 어떤 기물이요 기종이 되었던 범상치 않은 아름다움을 뽐냈을 것이 분명하고 보면 이를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황홀해 지는 심사를 금할 수가 없다. 아, 그 아름다움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이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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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9)<br> 청자상감국화문발편가을의 냄새 가을의 정취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 중에서도 발(鉢)은 완(碗)과 더불어 흔히 볼 수 있는 기종이다. 발은 무문도 있지만 도범으로 찍어낸 양각도 있고 상감도 있다. 흑백상감의 경우 여의두문과 국화문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청자상감국화문발편 또한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문양이 복잡한데다 다른 발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 여간 주목되는 것이 아니다. 청자상감국화문발편은 내저의 원 안에 국화를 배치하고 이를 여의두문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입술에 이르는 안쪽으로 휘어진 완만한 곡선 안에는 6등분한 칸을 만들고 백상감과 흑상감의 국화문을 교차해 넣고 있다. 외면을 보면 접지면의 유약을 훑어낸 자리에 내화토 받침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전면에 걸쳐 당초문을, 그리고 그 안에 원으로 둘러싸인 흑백상감의 국화문이 네 곳에서 보이고 있다. 약간 흐트러진 문양이며 전성기의 비색을 벗어난 듯한 녹청색의 유약 등 13C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근래 나는 사정이 있어 병원에서 한 일주일 정도를 쉬고 나왔다. 커텐으로 둘러싸인 병실 한가운데 자리가 위치해 있다 보니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아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시절은 천지가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이 무슨 감옥살이인가 하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하였다. 이제 퇴원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치고 단풍 구경을 나설 처지는 아니다. 그런 아쉬움이 더욱 도편 중에서도 눈길이 간 것이 국화문이 들어간 청자상감국화문발편이었을까. 사실 국화야말로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다. 지금이야 온실에서 키운 국화들로 인해 사시사철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 이름 모를 산기슭이나 들녘에 함초롬히 피어 있는 청초한 들국화의 매력에 비할 수 있으랴. 사군자 중의 하나인 국화는 송나라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국화를 은자(隱者)로 지칭하면서부터 고결한 인격과 품격의 상징으로 보편화 된 느낌이다. 이름 모를 산기슭이나 쓸쓸한 들녘에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피어 향기를 풍기고 있는 그 고아한 모습은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한 한가함을 즐기고 있는 은일군자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우리 같은 장삼이사의 삶속에서 은일한 삶만이 능사일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해보게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다 보면 자연적으로 알던 사람도 자연 멀어지거나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년은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귀중한 시간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생일이었는데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30년도 더 전에 같은 직장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후배인데 평소에는 죽은 듯이 소식이 없다가 나도 잊고 지내는 생일만 되면 해마다 안부 전화를 해주니 고맙다 못해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무슨 사람 냄새가 난다고 이런 인복(人福)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지울 수가 없다 아, 바야흐로 천지는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발이 묶인 아쉬움을 일부는 찌그러지고 일부는 깨져 손상을 입은 청자상감국화문발편에 제주도 친구가 보내 준 노란 귤이나 두어 점 얹어놓고 깊어지는 가을의 냄새 가을의 청취나 마음으로나마 마음껏 소리쳐 느껴 볼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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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8) <br>청자상형용문편(靑磁象形龍文片)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용(龍)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아마도 강력한 왕권(王權)이 아닐까 생각된다. 용이 이처럼 왕권을 상징하다 보니 왕의 얼굴은 용안(龍顔)이요 왕의 평상은 용상(龍床)이요 왕의 옷은 용포(龍袍)로 불리기도 한다. 왕이 즉위하는 것을 용비(龍飛)라고 하는데 <용비어천가>의 제목은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용은 왕권만을 상징하는 것도 아니다. 용은 민간신앙에서는 비를 가져오는 우사(雨師)이고, 물을 관장하고 지배하는 수신(水神)이며, 나쁜 귀신을 물리치고 복을 가져다주는 벽사(辟邪)의 선한 신으로 인식되어 용신제 및 용왕굿 등이 행해지기도 한다. 용은 또 무소불위의 권능과 천변만화의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되기도 한다. 따라서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상징성을 보이다 보니 그 모습도 다양하다. 중국의 삼정구사설(三停九似說)에 의하면 낙타의 머리, 사슴의 뿔, 토끼의 눈, 소의 귀, 뱀의 목, 개구리의 배, 잉어의 비늘, 매의 발톱 등을 가진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 뿐 아니라 자유자재한 초월적인 존재를 암시하기 위해 구름 속으로 숨었다 나타났다 하는 운룡문(雲龍文) 형태로 그려지기도 한다. 용은 순수한 우리말로는 미르라고 하며, 용이 되려다 못되고 깊은 물속에서 사는 큰 구렁이를 이무기라고도 한다. 이러한 용은 조선조에서는 백자항아리에 청화로 운룡문이 많이 그려지지만 청자와 분청에서도 보이고 있다. 비색청자나 상감청자의 문양이나 상형청자의 용은 대개 최상급의 품질을 보이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물결과 함께 표현된 수룡(水龍), 용두구신(龍頭龜身)의 구룡(龜龍), 용두어신(龍頭魚身)의 어룡(魚龍) 등이 그 것들이다. 조선조 백자청화에서 많이 보이고 있는 운룡문은 청자에서는 후기에 와서야 상감청자에서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라면 특징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청자 중 용이 장식된 대표적인 기명은 무엇이 있을까. 그런 청자는 적잖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명품 중의 명품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일본의 야마토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靑磁陽刻濤文九龍淨甁)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전라도 어느 고분 석관에서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정병은 고려 12C 것으로 높이가 33.5Cm나 되는 당당한 크기로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이 되어 있다. 첨대(尖臺)와 목 그리고 주구{注口)에 아홉 마리의 용머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입을 크게 벌려 이를 드러내고 있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포효하는 무시무시한 모습이 정교하고도 정성스럽게 조각을 해 형상화 되어 있다. 몸체 전면에도 용이 휘감기는 모습을 음양각 기법으로 박진감 넘치게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일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있는 청자를 통 틀어서도 명품중의 명품으로 꼽을만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에서 보이고 있는 아홉 마리의 용이다. 아홉 마리의 용중 목이 보이는 것은 주구와 첨대에 장식된 것뿐이다. 다른 것들은 용머리가 몸체에 바짝 붙어 있다 보니 목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주구의 것도 흔적만 보일 뿐 비늘에 덮인 목을 제대로 뽑아 올리고 있는 것은 첨대에 장식된 용뿐이다. 왜 아홉 마리 용중에서도 첨대에 장식된 이 용머리가 내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것일까. 그 것은 내가 소장하고 있는 청자상형용문편 때문이다. 형태적인 면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뽑아 올린 목, 쩍 벌리 입, 뒤로 날리고 있는 갈기, 거기에 눈이며 비늘 등을 음각으로 처리한 점, 비색의 색감 등이 동일한 양식으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 청자상형용문편이 정말이지 청자양각파도문구룡정병의 첨대에서 보이고 있는 용머리 조각과 같이 청자정병첨대에 붙어 있던 장식이라고 하면 이 얼마나 귀하고도 희한한 자료인가. 하지만 나로서는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추측을 떠나서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지가 전혀 없고 보면 오로지 신나고 즐겁고 감격스럽기만 할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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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7) <br> 청자사자향로뚜껑편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일찍이 고려의 개경을 방문했던 송나라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 비색(翡色)이라는 단어를 세 번 사용하는데 그 대상이 비색소구(翡色小甌) 과형주존(瓜形酒尊) 산예출향(狻猊出香)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산예출향에 대한 다음과 같은 언급이다. "산예출향 역시 비색이다. 위에는 짐승이 웅크리고 앉아 있고 아래에는 벌어진 연꽃 문양이 이를 받치고 있다. 여러 물건 가운데 이 물건만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산예란 원래 용의 아홉 아들 중 하나로 연기를 좋아하여 앉아 있기를 잘하고 사자의 형태를 하고 있는 상상의 동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하면 산예출향에 걸 맞는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산예출향에 근접한 것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 중의 하나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蓋香爐)다. 뚜껑은 사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이를 받치고 있는 대좌에는 꽃무늬를 장식하고 있다. 사자는 입을 벌린 채 한 쪽 무릎을 약간 구부린 상태에서 앞을 보고 있는 자세이며 두 눈은 검은 점을 찍고 있다. 몸체에서 피워진 향의 연기가 사자의 몸을 통과한 후 벌려진 입을 통해 내뿜도록 된 구조다. 이 청자사자유개향로는 기형도 기형이지만 유색 또한 비색으로 맑고 깔끔하다. 서긍이 <고려도경>에서 주목해 볼만한 상품의 청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예출향과 관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게도 사자를 장식한 청자 향로가 한 점 있다. 향을 피우는 몸체는 없지만 둥근 받침 위에 향의 연기를 뿜어내게 속을 비운 사자 형태를 하고 있는 청자 뚜껑이 있는 것이다. 세부적으로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국보 제60호인 청자사자유개향로와 동일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유색도 녹청의 비색이 곱게 입혀져 있어 서긍이 언급한 비색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색감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손상이 있어 수리를 했던 것이다. 도자기 수리에 있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손상 부분을 알 수 있게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충 보아서는 아예 모르도록 정교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은 후자 쪽으로 이른 바 호마이카 수리라고 해서 고가로 수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점이 못마땅한데다 어느 정도의 손상이 있는 것인지 궁금도 해 수리 부분을 모두 제거해 보았다. 그랬더니 아래턱이 없어지고 꼬리부분이 잘려 나갔는가 하면 다리와 엉덩이 쪽에 뚫린 부분이 있었다. 사자를 지탱하고 있는 받침 부분은 훼손할 수가 없어 그대로 두었는데 여기에는 돌려가며 장식한 음각의 뇌문이 보이고 있다.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의 수리한 부분을 제거한 후 나는 몹시도 즐거웠다. 그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손상이 적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소의 손상이 있기는 하지만 원형의 받침대 위에 몸을 세우고 있는 사자는 금방이라도 사자후를 토해낼 듯 당당하고도 위엄이 있는 모습이 아닌가. 거기에 유색 또한 비색을 보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즐겁고도 감사한 일이랴. 소장 중인 적지 않은 도편 중에서도 그야말로 애지중지해야 할 귀물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자는 우리나라뿐이 아니라 중국도 서식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우리나라 공예품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와의 관련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자사자향로편 또한 예외는 아니어 불단에 향을 피우기 위해 만들어진 기물은 아니었을까. 비록 향을 피우던 몸체는 없어지고 향을 뿜어내던 사자 뚜껑은 손상이 있지만 그래도 청자사자향로뚜껑편을 보고 있노라면 현세와 내세에 대한 염원이랄까 고려인들의 그 간절한 마음이 이토록 아름다운 형태와 빛깔로 나타난 듯싶어 마음이 숙연해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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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16)<br> 백자음각지석편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로 만든 지석이 중요한 것은 제작 연도를 알 수 있어 편년 자료가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흥녕부대부인묘지석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 지석은 윤번(1384~1448)의 부인인 인천이씨(1383~1456)의 묘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인천이씨는 조선 7대 임금인 세조의 장모이자 정희왕후의 모친인 흥녕부대부인으로 지석은 6장이 석함에 담긴 채로 2001년 5월18일 묘역을 사초하던 중 발견이 되었다고 한다. 덮개 구실을 하는 것으로 보이는 순백자 지석 2장과 청화 글씨가 새겨진 4장의 백자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경태 7년(병자년)인 1456년 7월14일 대부인이 사망 10월8일에 매장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여기서 보이는 1456년은 지금까지 알려진 기년명 백자청화의 제작 시기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1467년경의 관요 설치 이전에 이미 높은 수준의 백자청화 제작기술이 실재하였음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도자기 지석이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는 이 뿐이 아니다. 청자에서 진사(동화)가 사용된 것은 12세기 후반 경으로 중국보다 백여 년이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조선조로 넘어 와서는 실물을 볼 수가 없다. 그러다 처음으로 보이는 것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숭정후갑자명(1684년) 백자진사접시형지석 3점이다. 따라서 이를 통해 늦어도 17세기 후반 경부터는 백자에서 진사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자기로 만들어진 지석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편년 자료로서 귀중한 역할을 할 때가 많다. 따라서 도자기에 관심이 있다면 어찌 한 점의 지석인들 소홀히 할 수가 있겠는가. 백자음각지석편은 상단에 장일(張一)이라는 표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장 중 첫째장임을 알 수 있다. 지석 중에는 한 장짜리도 있지만 여러 장짜리도 있는데 여러 장 중에서는 마지막 장이 중요한 것은 간기가 있어 제작 연도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첫째장이어서 제작 연도가 확실치는 않다. 하지만 적혀 있는 내용만으로도 여러 가지 중요한 사실들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는 있을 듯싶다. 백자음각지석편은 유명조선통훈대부사섬시정조공묘지명(有明朝鮮通訓大夫司贍寺正趙公墓誌銘)이라는 제목을 갖고 있다. 주인공은 본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평양조씨 유형(有亨)이라는 사람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제목에서 주목되는 것은 사섬시(司贍寺) 정(正)이라는 것이다. 사섬시란 태종1년(1401년)에 설치한 사섬서(司贍署)를 세조6년(1460년)에 개칭한 것으로 저화(楮貨)의 제조 및 지방 노비의 공포(貢布) 등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이다. 여기서 정(正)이란 사섬시에서 가장 높은 정 3품의 직위를 말하는 것으로 백자음각지석편의 주인공은 바로 이 사섬시를 총괄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본문에 들어가서는 평양 조씨 인물들이 몇몇 보이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무래도 6대조 인규(仁規)다. 조인규라고 하면 .한미한 가문의 출신이었으나 몽고어 통역관으로 출세해 충선왕의 장인으로 권문세가의 반열에 올라 문하시중 등의 벼슬을 지냈다. 그러나 조인규는 이런 사실 외에도 한국 도자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주목되는 인물이다. 일찍이 화금청자를 원나라 세조에게 가져가 받치며 대화를 나누었던 일화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백자음각지석편은 기본적으로는 세로로 된 장방형이지만 네 모서리를 약간씩 눌러 각을 죽인 형태다. 상당히 무게가 나가는 두께에 평저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세로로 기준을 잡기 위해 가는 선을 긋고 그 위에 해서체로 음각의 글씨를 선명하게 새기고 있다. 관요가 아닌 지방 가마에서 제작한 것으로 깔끔한 맛은 없어도 오히려 묵직해 보이는 것이 위엄과 품위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이 백자음각지석편은 실제 부장했던 것일까. 내가 보기에 첫 장만 남아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과 아래 위가 깨져 분리되어 있는 것을 수리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에서 건너 왔다는 사실 등을 미루어 볼 때 가마터에서 부적격으로 판단되어 폐기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정확한 제작연도는 알 수 없지만 음각의 글씨나 지석의 형태로 볼 때 조선 전기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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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5) <br> 백자양각포도문주전자편분원(汾院)명이 음각으로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 앞강은 강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호수 같은 느낌이다. 팔당댐을 막은 후 강물이 가득 차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호수처럼 변해 버린 분원리 앞강을 가장 아름답게 바라 볼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내가 권하고 싶은 곳은 아무래도 분원초등학교 자리가 아닐까 싶다. 이곳 운동장에 서서 보면 호수 같이 질펀하게 차오른 앞강을 품어 안으며 좌로부터 검단산 팔당댐 예봉산 그리고 우측으로 다산의 생가가 있는 마현과 저 멀리 운길산 및 두물머리가 파노라마처럼 가득히 펼쳐진다. 아름답다 못해 가슴마저 펑 뚫려 오는듯한 시원함마저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풍경들이다. 거기다 앞강에 자욱한 물안개라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날이면 풍경은 차라리 몽환적인 아름다움 속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하지만 원래부터 분원초등학교가 지금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25년 이른 바 을축년 대홍수로 전국이 물난리를 겪을 때 분원초등학교(당시 공립학교)도 예외는 아니어 물에 침수 되는 등 큰 피해를 입게 된다. 이로 인해 현재의 자리로 옮기면서 산을 깍아 부지를 만들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분원리 백자가마터들이 사라져 버리게 된다. 1883년 사옹원의 분원인 관요가 폐지된 후 1884년 민영화가 되어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백자가마터들이 이 시기에 이르러 끝내 임종을 고하고야 만 것이다. 분원리 앞강을 그 어느 곳보다도 아름답게 바라 볼 수 있는 분원초등학교 자리에는 이런 역사의 아픔과 안타까움도 함께 묻혀 있는 것이다. 분원이 민영화 된 후 전통을 고수하는 데는 아마도 한계가 있었던 듯싶다. 구주(九州)의 쿠다니(九谷)로부터 도자기 기술자가 들어온 적도 있으며, 이효순이라는 사람이 역시 규수의 아리타 지방으로부터 성형공과 화공을 데려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 일본인 기술자들은 석고형을 사용하는 대량 생산 기법과 아리타 등지에서 들여온 값싼 코발트 안료 사용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민영화 이후 도자기에서 관요 시절과는 또 다른 면을 발견할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자 현상인지도 모를 일이다. 민영화 이후 도자기에서 눈에 뜨이는 것 중 하나가 굽에 청화로 분(汾)자가 들어간 것이 있다는 점이다. 이 것이 들어가 있는 항아리들은 대개 청화와 녹색으로 발색되는 크롬을 함께 사용한 모란문이 들어 있어 누가 보아도 민영화 이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분(汾)자는 일종의 분원리산임을 증명하는 표지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분원(汾院)의 분자가 나눌 분(分)이 아니라 클 분(汾)자를 쓰고 있다는 점인데 그 이유는 알려진 바도 없거니와 현재로서는 알 수도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오늘 분원리 관요의 폐지와 민영화 이후에 보이는 분(汾)자 등에 대해 내 나름의 관심을 피력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 것은 근래 구입한 백자양각포도문주전자편 때문이다. 뚜껑의 손잡이 일부는 떨어져 나가고 주전자 몸체의 손잡이는 아예 완전히 사라져 버렸으며 주구는 일부 달아나 버리고 없다. 말하자면 몸체만 동그마니 남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색감만은 일품이다. 짙은 물색을 연상시키는 청백의 유약이 곱게 입혀져 있으며 양각의 포도문이 전면을 돌아가며 장식하고 있다. 관요 시절의 청화에서 보이는 포도문과는 달리 포도알은 보이지 않고 줄기와 잎만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도 특이하다면 특이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청백의 유약도 양각의 포도문도 아니다. 굽 없이 굽 안쪽을 파낸 자리에 음각으로 분원(汾院)명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분원명도 처음이거니와 청화가 아닌 음각명도 못 보던 것이어서 이채롭다. 이 분원명으로 인해 백자양각포도문주전자편은 민영화 이후의 분원리산임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확실한 민영화 이후의 도자기를 어디서 볼 수 있다는 말인가. 이 것은 단순히 민영화 이후의 도자기 연구뿐이 아니라 20세기 초의 우리 도자기를 알아보는데 있어서도 더 없이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자양각포도문주전자편의 가치는 크고도 무거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분원초등학교 운동장에 서서 물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앞강과 그 앞강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검단산과 팔당댐과 예봉산 그리고 다산의 마현과 운길산과 두물머리를 아득히 바라보며 몽환적인 감상에 젖어 보았던 적도 오래 전 일인 것 같다. 세월은 자꾸 흘러만 가는데 이제는 추억을 만드는 일보다 추억을 더듬어 보는 일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조금은 마음이 허전해 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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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4) <br>백자철화어하문편(白磁鐵畵魚蝦文片)물고기와 새우도 당시로서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기도 광주시 곤지암에서 개울 건너로 보이는 마을이 신대리다. 한국 도자사에서 신대리가 나름의 중요성이 있는 것은 17C 관요인 백자 가마터가 운집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청자에서는 강진과 부안, 그리고 분청에서는 학봉리와 운대리 등에서 가마터가 운집한 것을 볼 수 있지만 17세기 백자 가마터로 대단위로 모여 있는 데는 이곳 신대리가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조선관요박물관의 조사에 따르면 신대리에는 총 27개의 가마터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지만 같은 해 성남 장호원 간 도로건설공사 중 구간 내 터널공사에서 가마 유구 및 관련 유구가 노출되어 새롭게 명명된 29호를 경기도자박물관에서 발굴함으로서 지금은 총 29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대리에서 현재까지 알려진 간지명은 갑신(1664) 기사(1665) 병오(1666) 무신(1668) 등이다. 이로 보아 신대리 가마터는 1664년부터 1668년경에 운영되었던 가마터임을 알 수 있다. 유물은 대부분 오목굽에 굵은 모래받침을 한 상번이 많아 상대적으로 죽절굽이나 도립삼각형은 적고 이에 따라 갑번과 예번도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양으로는 철화가 대부분이며 청화가 한 점 보고 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언급이 없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오래 전 답사를 통해 내가 이곳 신대리에서 느꼈던 것은 18세기로 넘어가면서 부터 청화로 내저에 들어가게 되는 제(祭)자명이 이 곳에서는 철화로 굽 안에 명기된 것을 볼 수 있어 신기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하튼 신대리의 특징은 대단위 백자 가마터가 운집해 있다는 사실과 문양으로 철화가 많이 보이고 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신대리는 오래 전 답사를 몇 번 한 기억은 있지만 특별한 추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17세기 관요답게 철화가 더러 보이는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근래 '도요지 사랑'이라는 닉네임을 쓰는 후배로부터 신대리 것이라는 도편 한 점을 선물 받았다. 기형을 알 수 없는 작은 도편이었는데 그 철화 문양이 몹시 흥미로운 것이었다. 위에는 물고기 조각의 비늘인 듯한 것이 보이고 아래 오른 쪽으로는 머리만 남은 작은 물고기가 새우를 물고 있는 형상이니 처음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에는 분청장군 중 철화로 새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 것이 보이지만 물고기가 새우를 물고 있다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남아 있는 물고기에 비해 새우의 덩치가 커서인지 물고기가 물고 있는 것은 새우의 몸체가 아니라 앞발 같은 것이어서 더욱 흥미롭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물고기와 새우는 한자로 어하(魚蝦)라고 하거니와 이는 물고기를 통칭하는 말로도 쓰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물고기와 새우는 어류 중에서도 그만큼 흔한 대표적인 종류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하문의 철화는 소성시 온도 탓인지 검은색이 많이 가미된 색감이다. 기형을 알 수 없는 백자에 철화로 그려진 물고기와 새우, 인터넷에는 어하복집이라는 곳도 보이고 있어 시중에서는 물고기와 새우의 어울림이란 그렇게 생소한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여하튼 도자기에서 자유롭고 활달한 문양을 이야기 하자면 주로 분청이 거론되지만 청자철화나 백자철화에서도 자유분방한 맛이 느껴지는 것들이 의외로 많다. 그것은 철화 안료가 주는 거친 맛 때문에 붓을 빨리 놀려야 하는 속도감과도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렇다고 하면 청화가 주는 안정되고 사실적인 문양과는 달리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멋을 풍기는 것이 철화 문양의 매력이자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백자철화어하문편의 물고기와 새우도 당시로서는 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해학과 풍자적인 의미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알 수가 없으니 일찍이 본 적이 없는 문양이라는 점에서 그 신기함만으로 만족하는 수밖에는 별도리가 없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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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3)<br> 백자소문주전자편이 정도의 술 주전자였다면 이규진(편고재 주인) 18세기 후반과 19세기는 백자에서 청화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15세기부터 백자에 시문되던 청화는 임란 후 도자 산업의 위축과 더불어 거의 명맥이 끊긴 듯싶다가 18세기 전반 금사리 시기에 이르러서야 조금씩 다시 되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렇든 것이 18세기 후반을 거쳐 19세기 그 것도 분원리 말기 쪽으로 가면 청화의 남발로 인해 문양이 오히려 혼탁해 지는 경향마저 보이고 있는 것은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저 초기의 순백과 저 중기의 설백을 통해 순수함을 뽐내던 사대부 취향의 문기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그런 아쉬움 속에 아직도 순수한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고 외치기라도 하듯이 자신의 몸매를 한껏 뽐내며 나타난 것이 바로 백자소문주전자편이다. 백자소문주전자편에서는 청화도 철화도 동화도 볼 수가 없다. 문양 자체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색감만으로 승부를 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청백의 빛깔이 그야말로 깔끔하면서도 고급스럽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사대부 취향의 미감을 되 살려 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청화로 문양을 나타낸 이 시기의 다른 백자들과는 차원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손잡이 전체가 없어지고 주구 일부도 손상을 입은 데다 몸체에는 다른 기물의 조각이 붙어 있는 등 흠결이 있다. 그러나 그런 아쉽고 부족한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극도의 순수한 순백의 아름다움이 이처럼 그 형태와 빛깔에서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고 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고려청자에서 더러 보이던 주전자는 조선조에 오면 오히려 줄어든 느낌이다. 조선 후기에 와서야 비로소 금속기를 모방한 다양한 주전자들이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백자소문주전자편은 백자항아리에 손잡이와 주구 등을 접목시킨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각이 진 주구와 손잡이 연결부에 덧댄 연주문 장식의 마감판 등 고풍스러우면서도 높은 품격을 보여주고 있다. 정선된 태토에 엷은 담청색의 투명유를 입혔으며 굽 접지면에는 모래받침을 하고 있다. 손상을 입어 다소의 아쉬움은 있지만 현 상태만으로도 단아한 가운데 엄격한 풍모를 느끼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 백자소문주전자편은 온전했더라면 어디에 사용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술이다. 술을 담았던 술 주전자로서 선비들이 모여 앉은 담론의 현장에서 그 매개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닐까. 이 정도의 술 주전자였다면 여기에 사용된 술잔 또한 티 하나 없이 맑고 깨끗한 순백의 백자잔이었으리라. 백자주전자와 백자잔, 그리고 모여 앉은 선비들의 기백과 형형한 눈빛이 한데 어울려 풍기는 분위기는 어떤 것이었을까. 백자소문주전자편은 19세기 분원리 산이다. 이 시기만 해도 조선 왕조는 세도 정치에 의해 서서히 석양의 노을이 짙어져 가던 시절이다. 해일처럼 밀려들던 외세에 아무런 대응책도 없던 시대의 아픔을 선비들은 어떻게 느끼고 감당하고 있었을까. 울분이었을까 좌절감이었을까. 그 속 쓰림을 한 잔의 술에다 실어 보내며 마음을 달래지는 않았을까.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한 점의 백자소문주전자편 앞에서 뜬금없이 그 시대를 살았던 선비들의 마음가짐이 궁금해지는 것은 알면서도 실천의 길이 안 보이는 좌절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한 일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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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12) <br> 청자상감양각귀면호편듣도 보도 못한 큰 사이즈 이규진(편고재 주인) 호림박물관에는 청자상감모란문학문귀면장식대호라는 긴 이름을 가진 청자호가 있다. 호림박물관이 자랑하는 청자 중의 하나로 구경이 32.5 저경이 23.5 높이가 48.8Cm에 달하는 크기로 조선백자 달항아리에 비견할만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청자호는 크기만 큰 것도 아니다. 어깨에는 여의두와 연주로 연결된 술이, 그리고 틀로 찍어 만든 양감이 풍부한 귀면이 네 곳에 붙어 있다. 굽 쪽에는 연판문을 돌리고 몸체에는 운학문을 그리고 여의두 원 안에는 모란문을 장식하고 있다. 한 마디로 기형의 크기며 다채로운 문양이며 뛰어난 색감 등이 청자 중에서도 자랑할 만한 명품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청자호가 부럽지 않다. 그 것은 근래 구입한 청자상감양각귀면호편 때문이다. 청자상감양각귀면호편은 청자호가 손상을 입어 일부만 남은 것이다. 유약은 산화되어 태토가 거의 드러나 있고 상감의 흔적도 희미하게 흔적만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호림박물관의 청자호가 부럽지 않다고 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크기다. 밖으로 도톰하게 말려 벌어진 주구와 몸체로 돌아가는 완만한 곡선을 감안하면 그 크기가 호림박물관의 청자호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크기임을 알 수 있다. 둘째는 귀면이다. 호림박물관의 청자호에서 보이는 귀면과는 아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귀면이 양각으로 붙어 있는 것이다. 뿔에서 턱까지의 높이가 11, 귀에서 귀까지의 넓이가 12.5Cm로 청자귀면으로서는 듣도 보도 못한 큰 사이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청자상감양각귀면호편은 크기뿐이 아니라 양감도 풍부하다. 2중으로 솟아오른 뿔, 큰 귀, 부릅뜬 왕방울 눈, 돼지 코, 쩍 벌린 입과 날카로운 이빨 등은 금시라도 청자호편에서 뛰쳐나와 금 나와라 뚝딱 은 나와라 뚝딱 장난이라도 칠 듯이 생동감이 넘쳐흐른다. 그런데다 턱 밑에는 둥그런 손잡이도 달려 있다. 대문 같은 곳에 쇠붙이로 된 귀면을 장식하고 손잡이를 매달아 이를 두드려 내방을 알리도록 한 것을 흔히 볼 수 있는데 고려청자에서 이미 그 아이디어가 보이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청자호편의 귀면에 달린 손잡이는 고정되어 있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귀면(鬼面)의 귀신 귀(鬼)자는 유(由)와 인(儿)과 사(厶)가 합쳐진 글자다. 유(由)는 기괴한 얼굴을 상형한 것이고 인(儿)은 인(人)자를 변형한 것이며 사(厶)는 사(私)자의 원형이다. 따라서 인간의 사사로운 마음속에 괴상한 형상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귀(鬼)인 것이다. 이와 같은 귀면을 와당이나 공예품 등에 새기는 것은 귀의 초월적이고 자유자재한 능력을 빌려 벽사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해코지하고 역병을 옮기거나 나쁜 기운을 퍼뜨리는 귀신들을 색출해 내야 하다 보니 귀면의 눈은 왕방울처럼 커야 하고 상대방이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게 표정은 위협적으로 무서워 보여야 하는 것이다. 귀면은 결국 인간의 꿈과 희망과 바람 같은 것이 뒤섞여 만들어진 벽사를 위한 귀신의 얼굴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상상을 초월해 보이는 엄청난 크기의 청자상감양각귀면호편은 완전했더라면 무엇을 담고자 했기에 이처럼 큰 귀면을 만들어 붙였던 것일까. 금덩이나 은덩이였을까. 그도 아니면 금보다도 은보다도 더 귀한 것으로는 무엇이 있었을까. 잡귀들로부터 고려인들이 지키고자 했던 귀중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오늘도 청자상감양각귀면호편 앞에서 세월의 간극과 더불어 궁금증만 쌓여갈 뿐이어서 조금은 아득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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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1) <br>조선청자문어문접시편고려청자에서도 본적이 없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빤질빤질한 머리통에 무수히 많은 흡반과 여덟 개의 다리가 달린 문어가 흐느적거리며 바다 밑을 헤집고 다니는 것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징그러운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식재료로는 윗길에 놓이며 그 맛을 즐기는 사람들도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문어(文魚)는 사실 글을 아는 동물이라는 뜻의 이름이 말해 주듯이 똑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것은 아마도 피부 색소를 주위 환경에 맞추어 변화시킬 수 있는 생태학적 특성에서 연유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문어는 낮에는 바다 밑 굴이나 돌 틈에서 쉬다가 밤에 활동하는데 갑각류나 조개 등을 잡아먹고 산다. 문어는 타우린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혈액의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피를 맑게 해 혈관에 탄력을 준다. 간의 해독작용을 도와주며 피로 해소에 좋으며 심장병과 당뇨 등을 예방해 준다. 타우린은 또 망막의 기능을 도와주어 눈 건강에 좋을 뿐만 아니라 단백질이 풍부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좋다. 문어는 각종 요리에 사용되며 갓 잡은 것은 삶아 먹고 말린 것은 구워 먹기도 한다. 경상도에서는 차례나 제사상에 올리는 식품이기도 하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을 지니다보니 문어를 삶아 먹이면 쓰러졌던 황소도 벌떡 일어난다는 민간의 속설이 결코 허황된 말만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앞서 문어가 바다 밑을 흐느적 거리며 헤집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징그러운 느낌이라고 했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모양이다. 근래 예쁘고 귀여운 문어 한 마리를 만난 것이다. 그 것도 바다도 아니요 육지도 아닌 접시 속에 살짝 들어앉은 문어를 만난 것이다. 문어가 들어앉은 곳은 조선조에 만들어진 청자접시다. 이른 바 백자 태토에 청자 유약을 입힌 백태청자라고 하는 바로 그 청자접시다. 그 청자접시에 둥근 머리통에 눈과 코가 달려 있고 다리도 벌려 있는 문어가 보이는 것이다. 반 양각으로 조각을 한 듯 접시 속에 들어앉은 문어가 보이는 도자기라니 이 얼마나 신기하고도 희한한 귀물인가. 조선청자문어문접시편은 사실 고려청자로 알고 있는 상인에게서 구입을 한 것이다. 그러나 확대경으로 보았을 때 바글바글 물이 끓어오르듯이 무수히 보이는 유약의 기포, 그리고 유약이 얇게 입혀진 곳에서 비치는 흰색의 바탕 태토 등 전형적인 조선조에 만들어진 백태청자인 것이다. 이 조선청자문어문접시편은 사실 도편이라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터진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온전한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너무도 신기한 마음에 그 즐거움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 보고자 하는 바람이 있어 여기에 안 올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조선청자문어문접시편은 직각으로 된 수평의 전이 달려 있고 이 곳에는 네 곳에 구름무늬가 들어 있다. 굽에는 굵은 모래받침 흔적이 보이며 유색은 수려한 산골짜기에 깊이 고인 물처럼 엷은 녹색이 가미된 맑고 푸른 색감이 너무도 아름답고 정겹다. 그리고 접시 안 쪽의 물속에 헤엄이라도 치듯이 문어 한 마리가 들어 있는 것이다. 백태청자라고 하면 화염문 정도가 익히 알려진 것인데 고려청자에서도 본 적이 없는 문어가 조선청자에서 보이고 있다니 기적도 이런 기적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디 문어 요리라도 잘하는 곳을 찾아가 이 즐거움과 쾌감을 미각으로나마 더 보태여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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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10) <br>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편다시 만나기 어려운 귀물임에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는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청자 중에서도 명품이 있다. 그렇다고 하면 군계일학의 명품이 될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첫째는 색감이다. 둘째는 형태다. 셋째는 문양이다. 이 세 가지를 고루 갖추고 있다고 해서 명품이 되는 것도 아니다. 희귀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까다로운 조건을 갖춘 것이 얼마나 있으랴. 따라서 명품은 귀할 수밖에 없고 귀할 수밖에 없으니 명품인 것이다. 도편에도 명품이 있다. 그러나 도편은 조각이다 보니 형태에서는 한 수 접어주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온전한 것이 있을 수 없으니 형태를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색감이나 문양에서 뛰어난 것이 더러 있다. 거기에 희귀성이 가미된 것도 있다. 이 정도만 되어도 명품으로 보아 주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도편에 관심을 가져 보지만 이 또한 어찌 쉬운 일이랴. 근래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편(靑磁象嵌梅竹鳥文梅甁片)을 한 점 구했다. 대나무가 힘차게 서 있는 가운데 그 사이사이로 매화가 얼굴을 내밀고 있다. 대나무 가지 위에는 반만 남은 새도 한 마리 앉아 있다. 색감은 비색과 녹청색이 어울린 모습이다. 이런 도편도 명품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것까지는 장담할 수 없어도 이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편을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이만한 크기에 이처럼 시원스럽게 문양이 들어간 것은 청자상감에서도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이런 유형의 것으로는 1965년 경남 밀양시 영원사지(瑩源寺址)에서 출토된 청자상감화조문매병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밖으로 말린 주구 밑에서 어깨로 부풀어 올랐던 몸체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가 굽으로 마무리된다. 주구 밑 어깨와 하단에는 연판문대를 두고 몸체에는 대나무와 매화 그리고 새들을 새기고 있다. 새들 중에는 학도 있고 이름 모를 새도 보이는데 이 것은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편에 보이는 새와 비슷한 양식이어서 주목된다. S자가 무너진 기형이며 다소 엉성해 보이는 문양 등 전성기 것은 아니고 14세기에 만들어진 매병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이와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편은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이 또한 문양이 활달하고 시원스러운 맛은 있어도 섬세한 면이 부족한 것으로 보아 14세기에 만들어진 매병편으로 보인다. 문제는 도편의 크기다. 안쪽으로는 유약 없이 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매병임이 분명한데 몸체를 돌아가는 완만한 곡선을 감안하면 그 크기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큰 기물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강진보다도 더 대형의 그릇들을 제작했던 부안의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까. 청자상감매죽조문매병편은 사실 손에 넣는데 생각보다 애를 먹었다. 원주인이 상당히 귀한 도편으로 소중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의 소중한 물건을 양도받는 일이 어찌 쉬운 일이랴. 그러나 상상을 뛰어넘을 것만 같은 크기며 시원스러운 문양 등은 도편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만나기 어려운 귀물임에 틀림이 없다. 따라서 어렵사리 구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소중한 인연에 오직 감사 또 감사하기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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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9) <br>청자상감갈대문매병편평소 차곡차곡 쌓아두는 습관이 이규진(편고재 주인)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근래 갑자기 이 생각을 떠올린 것은 한 장의 사진 때문이었다. 흑백인 이 사진 속에는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한 여성이 보인다. 그런데 이 여성의 자태와 표정이 재미있다. 가슴을 풀어헤쳐 들어난 젖을 아이가 열심히 빨고 있는 가운데 여성은 이 상황은 잊어버린 채 무언가에 도취된 듯 어딘가를 열심히 바라보고 있다. 여성뿐이 아니라 둘러싸고 있는 여자들 또한 마찬 가지다. 이 모두의 시선이 약간 위쪽을 향한 것으로 보아 아래를 굽어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연단 위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 대상은 무엇일까. 사진과 함께 이 것이 실린 사진집도 함께 구했는데 70년대에 발행된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설명이 없지만 60년대나 70년대에 찍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 시기는 이른 바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때의 중요한 선거라면 박정희와 윤보선, 박정희와 김대중이 맛 붙었던 대통령 선거를 들 수 있다. 사진은 그 중 어떤 선거에서 유세 장면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선거란 나와 내 미래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고 보면 아무리 정치와 무관한 일반 민초라 해도 관심이 안 갈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젖을 빠는 아이 자체를 잊어버린 채 어떤 대상에 대해 넋을 잃고 몰두하고 있는 여성의 표정은 무척 재미가 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학적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예술작품을 통해 미적 경험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데 이는 예술 작품을 감상할 때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과 조화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 것은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대상을 인지할 수 있는 내 안의 지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상은 결국 내 안의 경험이나 지식과 감응해 일어나는 현상이지 맹목적으로 누구에게나 똑 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결국은 이러한 사실들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과 더불어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법정 스님이 하루는 해인사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경판각에서 방금 나온 어떤 여인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 여인이 스님에게 물었다. 팔만대장경이 어디에 있느냐고. 방금 보고 나오지 않았느냐고 하자 여인이 말했다. 아, 빨래판 말인가요? 팔만대장경에 대한 경험이나 지식이 없다면 결국 그 것은 빨래판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이 일화에서처럼 실감나는 경우가 어디에 또 있으랴. 청자상감갈대문매병편은 굽과 몸체 일부만 남아 있는 도편이다. 밖으로 벌어진 굽 위에 연판문을 흑백으로 새기고 백상감으로 구분한 선 위 몸체에는 흑백으로 갈대와 꽃을 새겨 넣고 있다. 약간 엉성한 무늬로 보아 14세기 전반 것으로 보이는데 따라서 주구는 전성기의 반구형이 아니라 밖으로 벌어진 입술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입술에서 어깨로 벌어졌던 몸체는 S 곡선을 그리며 굽으로 이어지는 형태였을 것이다. 유색은 불을 받은 영향에 따라 비색과 청갈색이 섞여 있다. 세로로 길쭉한 형태의 매병은 아무래도 시선을 아래다 두는 것보다는 위에다 놓고 보는 것이 더 감상의 포인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청자상감갈대문매병편 또한 마찬 가지다. 그런데 기존의 형태가 마음속에 들어 있는 것이 없다면 이 매병편은 어떻게 보일까. 도편에 불과한 이 것이 과연 매병으로 보일까. 푸르딩딩한데다 희고 거뭇거뭇한 문양이 들어간 이 것을 보았다면 팔만대장경을 빨래판이라고 했던 여인은 무엇이라고 했을까. 일거에 사금파리나 사기조각이네 라고 치부하지는 않았을까. 그렇게 부른다고 해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빈구석이 있는 듯 서운하고 아쉽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도자기를 제대로 알고 보기 위해서라도 우리 마음속에 도자기의 아름다움을 평소 차곡차곡 쌓아 두는 습관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고 아름다움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결국 무심한 경지에서 그 무엇을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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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8) <br>백자접시편도요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이규진(편고재 주인) 경기도 광주 일대에 설치되었던 사옹원의 분원, 즉 관요는 기본적으로 왕실용 진상자기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진상자기는 예번(例燔)과 별번(別燔)으로 나누어지는데 예번은 궁중에 연례적(정기적)으로 진상했던 자기를 말하며 별번은 별사기(別沙器) 또는 별번사기(別燔沙器)라고 하는 것으로 가례나 사신 접대 등의 용도로 특별히 제작된 것을 말한다. 정조 19년(1795) <일성록(日省錄)>에 예번은 가마 천정까지 쟁일 수 없고 별번은 가마 천정까지 쌓을 수 있다는 기록으로 보아 별번과 달리 예번은 갑발에 넣지 않고 포개 굽지도 않았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기록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예번을 일률적으로 갑발에 넣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명색이 궁궐에 보내던 진상자기인데 예번 중에도 갑발에 넣어 만든 고급품은 얼마든지 가능했던 일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왕실자기를 제작했던 관요에서는 예번과 별번만 있는 것도 아니다. 상번(常燔)도 보이는 것이다. 이 것은 갑발에 넣지 않을 뿐만 아니라 포개어 굽는 것이 특징이다. 이처럼 포개어 굽는 방법은 고려청자나 분청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대량생산을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번조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처럼 포개어 굴 경우 그릇끼리 들러붙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 따라서 굽 밑에 내화토나 모래를 깔든가 태토빚음받침을 받치게 되며 따라서 그릇의 내저에는 흔적이 남게 된다, 백자접시편은 조선 초기 관요 중의 하나인 우산리 9호 출토품으로 전형적인 상번백자다. 죽절굽 안에 떼어내지 않은 공기돌만한 크기의 태토빚음받침이 4개 붙어 있으며 그릇의 안쪽에는 또 커다란 내저원각 안에 4개의 태토빚음받침을 떼어낸 흔적이 보이고 있다. 백자접시편은 예번이나 별번처럼 상품의 백자가 아니다보니 색 또한 밝지 않고 탁한 느낌의 흰색이다. 그렇다고 하면 예번이나 별번이 아닌 이 상번의 백자접시편은 어디서 누가 사용키 위해 만든 것일까. 도자사를 보면 귀족문화를 연상케 하는 고려청자와는 달리 분청사기는 흔히 서민문화와 연결시켜 보려는 경향이 농후하다. 하지만 정말이지 분청은 서민문화의 아이콘일까. 아니 조선 초기의 백자들 또한 하품이라고 하면 서민이나 하층민들의 전용물이었을까. 조선 초기의 도자기들은 하품이라고 해도 서민들까지 흔히 쓸 수 있도록 그렇게 흔한 것은 아니었다. 서민 전용이라면 왜 궁궐터에서도 예번이나 별번이 아닌 하품의 도편들도 많이 보이고 있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런저런 여러 가지 의문들을 종합해 보면 나로서는 도자기 하품과 서민들을 동일시하는 것은 대단히 성급하면서도 위험한 생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말하자면 예번이나 별번이야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상번이나 하품이라고 해서 서민들에게 까지 두루 쓰일 정도로 도자기가 흔했던 세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백자접시편은 손상을 입은 상태이지만 불구의 몸이 아니더라도 인기를 끌만한 것은 아니다. 완전하다 하더라도 탐을 낼만한 물건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백자접시편이 만들어지던 조선 초에도 이런 정도의 도자기는 지금처럼 관심 밖의 물건이었을까. 그런 것은 아니라고 보여 진다. 이 정도의 도자기만 하더라도 당시 이를 만들 수 있는 나라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 중국과 우리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이런 도자기들을 예번이나 별번이 아니라고 해서 무시하고 관심 밖에 두어야 하는 것일까. 가령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이 도자기를 보았다면 지금의 우리처럼 시큰둥한 표정이었을까. 미루어 짐작컨대 이 정도만 하더라도 감지덕지 감사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까. 민요도 아닌 관요에서 만들어진 하품의 백자접시편 앞에서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해보다 보니 오리무중으로 빠져드는 느낌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조선 초의 도자기들, 그중에서도 관요에서 만들어진 상번은 어디서 누구에게 사용되었을까 하는 것은 좀 더 세밀한 연구와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들을 잠시 접어두고 현재 있는 그대로의 백자접시편을 보아도 무척 재미가 있다는 느낌이다. 특히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굽에 붙어 있는 태토빚음받침은 도요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흔히 볼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흥미로워 보인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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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7) <br>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논어' 자한편에는 공자가 이규진(편고재 주인) 사람이 하루 세끼 식사를 하려면 숟가락과 젓가락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이것들은 언제부터 사용되었을까. 모르면 몰라도 인간이 수렵시대를 접고 농경문화를 통해 정착 생활을 시작하고부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숟가락과 젓가락의 용도는 변하지 않고 있다. 이런 것을 두고 과학적 용어로는 완전한 발명품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세월과 상관없이 숟가락은 음식을 떠먹는데 젓가락은 반찬 등을 집어먹는 도구로서 그 기능을 상실한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외형의 변형은 다소 있을 수 있자만 그 본래의 의미나 용도에 변화가 있을 수 없는 것을 과학적으로는 완전한 발명품이라는 이름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완전한 발명품 중의 하나인 숟가락과 젓가락이 왜 도자기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것일까. 도자기로 만든 사발과 대접 등이 많은 것으로 보아 그에 준하는 정도의 숟가락과 젓가락은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물론 도자기로 만든 숟가락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청자에서도 보이고 국립중앙박물관 동원 선생 기증품 중에도 다섯 점 한 세트의 백자로 만든 숟가락도 보인다. 하지만 절대적 빈곤이라고나 할까. 간혹 보이기는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이 아주 귀하고도 귀한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의 동원 선생 기증품인 다섯 점의 일괄 백자 숟가락은 일반적으로 흔히 보이는 모양이 아니라 흡사 서양의 수프를 떠먹는 스푼처럼 작은 주걱 같은 형태를 보이고 있다. 근래 내가 구입한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도 바로 그런 형태의 것이어서 주목을 요한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분원리산인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현재 손잡이 부분이 결실되고 몸체만 남아 있다. 유색은 맑고 깨끗한 청백색인데 밑 부분은 유약을 훑어내고 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U자형으로 깊게 패인 내저에는 색감도 고운 청화로 봉황문을 그려 넣고 있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하고 2006년 8월에 펴낸 '광주 분원리 백자요지'를 보면 여기에도 백자청화숟가락편이 한 점 보인다. 그런데 이것은 아쉽게도 몸체는 없고 가운데가 U자형으로 얕게 패인 손잡이 부분만 남아 있다. 따라서 이것과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을 대조하면 완벽한 원형을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는 삼촌이 없는 대신 고모가 여섯 분이나 된다. 6.25때 전사한 아버지를 생각해서인지 나는 고모님들의 사랑을 참으로 많이 받고 자랐다. 그런 고모 여섯 분 중 넷째 고모까지가 고향집에서 차일을 치고 혼례를 전통 방식으로 치렀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넷째 고모 때뿐이다. 뜬금없이 고모 결혼식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 혼례식에서 본 숟가락이 바로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과 같은 모양으로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사실 가운데가 U자형으로 깊게 팬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 같은 백자 숟가락은 밥 등을 떠먹기에는 불편한 구조다. 오히려 국물 같은 것을 떠먹기에 적당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실생활에서보다는 결혼식 같은 데서 의례용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청화로 그려진 봉황문이 그런 추론을 더욱 뒷받침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봉황이야말로 전통사회에서 용과 더불어 상서롭게 인식되던 대표적인 상상 속의 동물이 아니던가.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지인에게서 지인 가게로 넘어 가 있던 것을 근래 구입한 것이다. 원 주인인 지인의 이야기로는 분원리 인근의 밭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설명이 아니더라도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19세기 분원리 산이 분명하다. 태토며 유약이며 청화의 그림 솜씨 등 어느 것 하나 분원리 전성기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는 유물인 것이다. 사실 이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다가 근래에 와서야 구입을 한 것이다. 도편에 불과한 것이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그만큼 흔치 않은 물건이어서 충분히 이야기 거리가 된다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도자기 특히 조선 후기 백자청화에서 봉황문은 생각보다 그리 귀한 문양은 아니다. 봉충이라고 해서 특히 항아리에서 많이 보이는데 이처럼 선조들이 봉황에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것은 용과 더불어 행운을 가져다주는 새 중의 왕으로 숭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용도 그렇듯이 봉황도 상상의 동물이지 실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 생김새도 특이하다. 봉황의 형상은 기러기의 앞모습에 기린의 뒷모습, 뱀의 목에 물고기 꼬리, 황새의 이마에 원앙의 뺨, 용의 무늬와 호랑이의 등, 제비의 아래턱과 닭의 부리, 그리고 오색의 깃털을 갖추고 있는 등 여러 가지 새들의 특징을 한 몸에 모아놓은 복잡한 구도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만들어진 새들 중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백자에서 봉황은 흔히 볼 수 있는 문양이라고 했지만 모든 기종에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백자 숟가락에 청화로 봉황이 들어간 것은 나로서는 백자청화봉황문숟가락편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용이 남성을 상징한다면 봉황은 여성적인 면이 강하다. 이런 여성의 이미지는 진시황 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진시황은 궁중의 비빈들에게 봉황 비녀를 꽂고 봉황 머리 모양의 신발을 신도록 했다고 하니 여성 이미지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논어> 자한(子罕)편에는 공자가 ‘봉황도 날아오지 않고 황하의 그림도 나오지 않으니 나도 이제 끝인가 보구나’라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봉황의 상서로운 길조로서의 남다른 의미는 여기서도 강하게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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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06) <br> 분청덤벙다완편다완으로서는 규격품에 해당 이규진(편고재 주인) 바다 저편에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루고 있는 바위섬으로는 홍도와 백도가 쌍벽을 이루며 널리 알려져 있다. 두 섬 모두 기암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경관이 뛰어난 가운데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기도 하다. 80년대 중반 나도 홍도는 한 번 찾아보았지만 백도는 아직까지 실견을 하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홍도를 찾았을 때는 유람선으로 섬을 한 바퀴 돌아본 후 흑산도로 나오는 일정이었지만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오갈 데 없는 작은 섬에서 이틀 저녁을 묵을 수밖에 없었다. 백도 관광도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었다. 80년대 후반쯤으로 기억되는데 휴가철을 이용해 여수에서 거문도까지는 들어갔으나 여기서도 풍랑을 만나는 바람에 포기를 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정이 틀어지는 바람에 귀로에 대안으로 찾아 본 것이 보성 도촌리 분청사기 요지였다. 분청 중에는 덤벙 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기물 전체를 빠짐없이 백토로 분장한 것을 말하는데 가마터로는 보성 도촌리와 고흥 운대리가 알려져 있다. 요즘에야 분청덤벙이라고 하면 고흥 운대리를 떠올리지만 원조는 보성 도촌리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부터 일본인들이 분청덤벙을 두고 보성 고비끼라고 할 정도로 그 연원이 깊은 것이다 사실 고흥 운대리 분청사기 요지가 세간에 알려진 것은 80년대 들어와서 부터의 일이고 보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가마터의 수나 규모면에서 압도적이다 보니 요즘에는 조심스럽게 그 중심이 고흥 운대리로 옮겨지고 있는 느낌이다. 보성 도촌리에는 분청사기 요지가 두 곳 있다. 학동 분청사기 1호와 가장 분청사기 2호가 그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성 도촌리를 찾았을 때는 이런 구분 자체가 없을 때였는데 택시 기사의 안내를 받아 찾아 갔던 곳은 학동 분청사기 요지로 생각된다. 가마터는 저수지 뚝이 있는 곳에서 좌측 산기슭에 위치해 있었는데 도편은 많지 않았지만 보이는 것은 거의 분청덤벙편들이었다. 이때 인연을 맺은 것이 분청덤벙다완편이다. 고려다완 중에서 이도다완 등에 비견할 바는 못 되지만 그래도 분청덤벙다완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다완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 것은 다른 다완에 비해 비교적 구하기가 어렵지 않은데다 분장 기법으로 인해 오래 사용을 하다보면 찻물이 배어들어 변화하는 경색의 미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여하튼 인기가 있는 다완 중의 하나이다보니 분청덤벙의 요지가 있는 고흥 운대리에는 일본인들이 단체로 몰려와 가마터를 헤집고 다닌 적도 있었다고 한다. 보성 도촌리에서 만난 분청덤벙다완편은 다완으로서는 규격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다완은 입지름이 15Cm 내외가 선호되고 있는데 이에 근접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굽은 죽절굽에 모래빚음받침이 여섯 곳 있는데 내저에는 다섯 군데에 받침 흔적이 있다. 백토 분장은 좀 거친 편으로 이는 비교적 곱게 입혀지는 운대리 것과 비교되는 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분청덤벙다완편은 그래도 소장하고 있는 것들 중에서는 손상이 있다고는 해도 가장 다완으로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어서 내가 아끼는 도편 중의 하나다. 분청덤벙다완편을 보고 있노라면 백도를 향하다 풍랑을 만나 포기를 하고 대안으로 도촌리를 찾았던 일이 어제 일처럼 새삼스럽기만 하다. 무더위와 함께 휴가철은 또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는데 어디 몸이나 풀러 백도나 한 번 찾아볼까. 풍랑을 만나 실패를 하면 옛날처럼 또 행로를 보성으로 바꾸어 도촌리를 찾아보면 되지 걱정할 일이 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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