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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기록학회장 양종승, "민속을 기록한다"최근 한국전통춤협회가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둘째날에는 양종승 박사의 해설과 함께, 윤미라의 달구벌입춤, 채향순의 수건춤 등 100년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우리 전통춤 뿌리를 알게 하고 전승 유파의 다양성을 알게 하는 귀한 무대이었다. Q. 민속기록학회는 무슨 연구를 하시나요. A. 민속기록학회는 2014년 10월에 결성되었으며 2015년부터 매년 학회지를 발간해 오고 있습니다. 민속기록학회는 민속의 기록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민속의 기록과 보존, 활용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학문적 전문성을 가지고 접근하자는 뜻에서 민속기록학회를 결성하였습니다. 민속기록학회는 민속학과 기록학의 노하우와 마인드를 결합하여 민속기록학 분야를 발전시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금년이 2024년이니 벌써 민속기록학회도 10살이 되었네요. Q.지난해 얻은 성과는 A. 2023년에는 외국인들에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교육할 때 민속학과 민속기록의 중요성에 대한 논의나 경기도 지역음식에 대한 민속기록학적 접근 등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학문적 시도가 돋보였습니다. 또한 민속기록학을 지자체에 알리기 위해 지역문화 아카이빙 교육에 민속기록학의 성과를 활용한 일은 고무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지자체 마다 지역문화 아카이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시민교육을 하려고 하나 적당한 학문분야를 찾지 못했는데 민속기록학은 여기에 적합학문입니다. Q.올해 역점 사업은 A.민속기록학의 저변 확대를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특히 지자체의 지역문화 아카이빙에 민속기록학이 널리 활용될 수 있도록 홍보를 하려고 한다. 민속의 기록, 보존, 활용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민속기록학은 지역문화 아카이빙에 있어서 적절한 맞춤형 학문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 또한 지역기록화 사업에 역점을 두어 체계적인 지역기록화에 노력할 계획이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씀은 A.국악을 둘러싼 민속에도 관심을 가지고 기록, 보존, 활용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국악을 둘러싼 민속이란 국악인들의 일상생활, 국악인을 중심으로 한 생활사 이런 것을 다루어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 국악인들은 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 특별히 어떤 음식을 먹는가. 국악인들이 입는 한복의 시대별 변화, 국악인들이 좋아하는 주거형태 등도 주목할 수 있다. 또한 국악을 통해 본 민속 즉, 국악의 가사 내용을 통해서 엿볼 수 있는 민속 등도 재미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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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게이머 홀린 '검은사막' 속 국악 제작 비결은"국악과 서양 음악을 게임 음악에 효과적으로 접목해 녹여낼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국내 게임사 펄어비스[263750]에서 게임 음향 작업을 총괄하는 류휘만 오디오실 디렉터는 21일 국립국악원에서 열린 '국악 전공생을 위한 직업 아카데미' 강연에서 '검은사막' 속 창작 국악 작업 과정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펄어비스는 지난해 '검은사막'에 신규 콘텐츠 '아침의 나라'를 선보였다. '아침의 나라'는 조선시대를 모티브로 한국의 전통 건축, 한복, 민속놀이 등 전통문화와 각종 전설, 설화, 민담 등이 어우러진 신규 지역이다. '아침의 나라'는 출시 후 국내는 물론 북미·유럽 등 서양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검은사막의 흥행을 견인했다. 류 디렉터는 자신을 포함한 제작진 대다수가 서양 음악을 전공했고, 국악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다며 "인터넷과 국립국악원 자료를 참고해 민속악부터 창작 국악까지 가리지 않고 공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물놀이에 쓰이는 여러 타악기를 한 음씩 연주하면서 컴퓨터에서 작업할 수 있는 가상 악기로 샘플링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류 디렉터는 자신이 작업한 '아침의 나라' 사운드트랙을 하나하나 국악 전공생들에게 들려주며 각각의 제작 과정과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사물놀이 장단을 바탕으로 대금, 가야금, 거문고 같은 전통 악기와 판소리의 요소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이 특징이었다. 류 디렉터는 "서양 음악 전공자로서 본 국악의 특징은 '곡선이 화려한 음악'이었다. 분할된 음이 연결된 것이 아니라, 곡선이 한 선으로 장단을 타고 변화하며 이어지는 멜로디"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 악기의 농현(弄絃)이 숨 쉴 수 있는 여유로운 리듬과 멜로디, 서양식 화성에 국악의 리듬을 결합하는 시도, 펑크·블루스·소울 같은 장르와의 협주가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펄어비스가 개발 중인 '아침의 나라' 파트 2 업데이트 '서울'의 내용도 언급했다. 류 디렉터는 "파트 1을 만들며 성장한 펄어비스만의 국악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시도를 하며 곡을 써 보려고 한다"며 "왕, 양반 등이 나오는 한양이 배경인 만큼 정악(正樂)을 모티브로 한 곡을 써 보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류 디렉터는 'EZ2DJ', 'DJMAX' 등 2000년대 초를 풍미한 리듬게임 시리즈에서 'CROOVE'라는 닉네임으로 여러 인기곡을 작업한 베테랑 게임 작곡가다. 류 디렉터는 NHN게임스가 2009년 출시한 'C9' 작업에 참가하며 당시 게임 프로듀서를 맡고 있던 펄어비스 창립자 김대일 의장과 인연을 맺었고, 이후 펄어비스에 합류해 대표작 '검은사막' 사운드트랙을 작업해왔다. 류 디렉터는 "국악은 현 시대에도 예술적, 대중적으로 살아 숨쉬는 '미래의 음악'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강연을 듣는 국악 전공생들을 격려했다.(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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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3) <br> 청자상감매병편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이규진(편고재 주인) 부안 유천리는 강진과 더불어 청자 가마터들이 대규모로 몰려 있는 곳이다. 그렇게 운집해 있는 유천리 청자 가마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12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곳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8년 노모리 켄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명종 지릉의 청자여지넝쿨무늬발과 같은 도편이 출토되어 유천리 청자 가마터 성격에 대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적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 못 미처 좌측 외딴 민가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는데 전에는 이곳 일대가 과수원이었고 12호는 이곳에 위치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화여대 박물관은 유천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많은 양의 명품 청자편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곳 12호와 인근의 가마터 출토품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12호 인근의 외딴 민가에서 건너다보면 논과 밭을 오른쪽으로 휘돌아 흐르는 둔덕이 보이는데 큰길에서 유천리 마을로 들어가는 마차길이 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건너편 끝자락에 좌측으로 흘러내린 야산이 보이는데 여기에 면한 비탈진 밭이 하나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로 기억이 되는데 농부가 밭갈이를 하고 있었고 뒤집힌 흙더미 속에서 발견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의문점이 많아 아직도 혼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안쪽을 보면 물레자국이 선명하다. 거기다 기물 자체가 휘어져 있어 매병의 일부였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해 볼 수 있다. 문제는 강진보다도 더 큰 기물들을 제작했다고 전하는 곳이 유천리 청자 가마터인데 이 청자상감매병편 또한 그런 추세에 힘입어 대형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증거로는 완만하게 휘어져 돌아간 곡선율을 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편의 두께라고 할 수 있는데 무려 1.5Cm가 넘는 것이다. 말하자면 휘어진 곡선의 비율이나 도편이 두께로 보아 전후좌우가 잘려나갔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은 대형의 기물이었음을 짐작하기에는 조금도 부복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청자가 대형이라고 해서 무조건 명품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매병편의 무늬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흑백상감으로 전체를 빼꼭하게 채우고 있는 문양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잘려나간 부분에 비해 남은 것이 너무도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상감의 국화문과 연판문에다 알 수 없는 무늬는 물론 능화창에 역상감의 흔적도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완전했더라면 화려하기가 짝이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궁금증을 해결키 위해 유천리 청자 가마터 도록과 책자는 물론이거니와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도편들도 꼼꼼이 챙겨 보았지만 이처럼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문양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특이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양을 지닌 명품의 매병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상자나 박스에 넣어두는 등 내 시야에서 벗어나 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거실에 있는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어 수시로 꺼내 보고는 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문양의 실체도 알 수 없는 도편에 대해 이처럼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일까. 그 것은 보기만 해도 황홀해 지는 문양의 모습이 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쏱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의 유천리 청자 가마터의 추억 속으로 나를 늘 인도하며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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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4) <BR>巫世衆- 그의 명인(嗚咽)과 몸부림 통일을 위한 <br> '反 그리고 통·막·살'(2편)무세중씨는 그의 예술적 입장이 쉬르리얼리스트임을 자처하고 있다. 일찌기 쉬르리얼리즘을 무대에서 확인한 사람은 詩人 기욤 아폴리네르였다. 1917년에 공연된 장 꼭도의 '빠라드'와 아 폴리네르의 타이레시아스의 젖가슴 공연에서 超現實主義 演劇이라는 말이 사용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쉬르리얼리즘 演劇이 처음으로 공연되기 1년 전인 1916년 4월, 취리히에서는 트리 스탄츠아라, 한스 아르프, 리챠드 홀젠벡크 등 세 사람이 詩人, 그리고 畵家들과 超現實主義藝 術運動의 母胎가 되는 dada演劇을 공연한 적이 있다. 이 일이 있은 후 1918년 츠아라는 그의 유명한 Dada宣言文을 발표하게 된다. 그 宣言文의 내용을 간추려보면 무세중 연극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Dada는 사회적 계급의 타파이다. Dada는 충돌의 美學이다. Dada 는 未來의 추방이다. Dada는 본능적이며 자연발생적인 모든 점을 절대적으로 믿는다.' 이들은 이같이 宣言하고 反藝術,反理性,反思想의 깃발을 내걸었다. 다다이스트들(The Dadaists)은 한스 아르프가 주장한대로 '미쳐버린 時代'의 소산이다. 그래서 藝術家들은 근원적인 개혁과 변화를 요구하게 되었고, 이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으로 '人類의 苦惱를 슬퍼하고 憤怒하는 일'에 헌신하게 된다. 다다이스트들은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로테스크 심볼리즘 (grotesque symbolism)의 美學을 발전시켜 나갔다. 이 일이 진행되는 동안 앙드레 브루통, 루이 아라공, 필립 스포가 새로운 超現實主義運動을 전개해 나갔다는데 아라공이 한 말은 무세중씨와의 관련에서 중요하다. '우리들은 여러분들에게 친근한 이 매우 편리해야 하고 어리브드의 이 무며 소에 마치 혈암(頁巖) 속에 갇힌 화석마냥 사로잡혀 있다. 서구世界 속에서 여러분들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우리들은 서구의 맞춤들인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포의 대상인 東洋이 우리들의 목소리에 답할 것이다. 여러분들의 공부르타일리스트와 다다이스트들이 하고자 했던 알파한 것이고통 마살에서 실천해 보였다. 반의 빛을 내 건것이 그러했고 쏘의 타부를 타파한 것이 그러했고, 이 時代 를 개혁하려는 의지가 그러했고, 歷史의 비극과 인간의 무력함을 슬퍼하고 분노하며 크로테스크 심볼리즘에 의지하는 일이 그러했으며, 혼란과 불안의 충격적인 조성이 그러했고, 각성의식의 商가 그러했다. 이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그의 歷史습들이 투철했기 때문이며 社會的反抗性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그의 소해 레퍼터리였던 '역사의 후회', '말하는 벙어리', '종이전쟁', '왜 삽니까' 등에서 이같은 特性은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무세중씨는 아르또의 해학을 올바르게 수용하고 있다. 그는 肉體言語의 효과적인 創造를 통해 꿈들로 얼룩진 시의 內面的 어둠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아르또의 행은 강렬성을 의 미한다. 그는 동작, 음악, 고함소리, 신음소리, 울음소리, 웃음소리, 음향효과, 그리고 스펙타클 을 통해 드라마의 강렬성을 관객으로 하여금 체험케 했다. 아르또는 그의 宣言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우리들은 무대와 객석의 구분을 없애 고 배우와 관객의 공통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관객들을 참여케 함으로써 관객과 공연사이의 장벽을 철폐한다. 무세중씨는 이번 소회을 통해 드라마를 쓰는 사람과 드라 마를 행하는 사람의 구분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는가 하는 측면의 實驗을 시도했다. 관객 모두가 쌀부대를 뒤집어 쓴다든가, 극장 무대에 들어서면 입구에 누워있는 배우의 몸을 건너가게 한다 든가, 관객들이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공존하면서 관객들이 무대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든가, 공연현장을 돌아다니며 본다든가 하는 시도를 통해 관객은 연극적 액션의 중심에 어느 정도까지 접근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실험해 보였다. '곡의 소리'에서 배우들이 관객들 한 사람 한 사람 면 전에 접근해서 관객들의 손을 잡으며 이들의 슬픔에 동참해 줄것을 종용한다든가, '종이 전쟁'에 서 관객이 종이 인간을 향해 종이 뭉치를 던지면서 야유를 퍼붓게 하고, 종이인간을 찢고, 종이 에 불을 당기도록 하는 일등이 이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공연 중간 중간 인터밋션 때 관객들의 合唱을 선도하는 노래도 이 일에 기여하는 책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르또는 1933년 4월 6일 소르본느에서 演劇 강연을 했을 때 "나는 관객들에게 가혹한 질병 의 체험을 주고 싶다. 그래야만 그들은 공포 속에서 각성하고 깨어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각성 시키고 싶다. 그들은 그들이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죽음은 귀가 멀고 눈이 먼 것처럼 완벽하다. 이것이 내가 표현하려는 꿈인 것이다. 나는 탄생의 투쟁을 그리고 싶다." 무세중씨의 작품 '아편', '나는 개가 되고 싶다'는 육체와 인간의 목소리를 통해 인간 체 힘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고 있다. 죽는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동물이 된다는 사실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느정도 병들고 있는 것인가. 이같은 죽음 속에서 탄생을 위한 투쟁은 어떻게 가능한 것 인가 하는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지극히 아르또적인 발상이라 할 수 있다. 비웃고 헐뜯고, 헐뜯고 비웃는 행위를 보여줌으로써 관객이 해방되어, 정신의 淨化을 성취할 수 있도록 만든 이 공연은 演劇의 이론을 탁월하게 무대에 실천한 공연이 되게 만들었다. 쫓는 그가 살아가는 일에 대해 어떤 해답을 지니고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죠셉 체이킨은 말한 적이 있다. 배는 그가 체험한 일에 말없이 의문을 던지면서 무대에 서고, 그가 하는 작업 과정을 통해서 그 자신을 재창조한다. 무세중씨가 이번 공연을 통해서 이룩한 빛나는 성과는 그가 쉬르리얼리즘의 演劇을 시도했다. 거나, 아르또의 殘酷演劇論을 무대에 실천했다는 데에도 있지만, 더욱더 큰 수확은 군대 현대연 극의 理論的 모태가 된 이 두 演劇潮流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우리나라의 과 의 연회 전통을 의식하고 그 표현수단에 크게 의지했다는 데 있다. '한의 소리', '곡의 소리', '통·막· 살 등은 이 점을 명확히 해준 공연이었다. 특히 南北의 장벽이 힐리는 감동적인 순간을 한 통·막 살은 그 祭儀性이나, 空間構成이나, 권인 음악과 소리에 있어서는 소도구 및 대 도구면이나, 동작과 춤에 있어서나, 그리고 액션에 있어서 序幕 부분에서 발휘된 쉬르리얼리즘 과 아르또가 우리의 巫俗과 民俗 속에서 하나로 융화되는 강렬한 무대를 창출해 내었다. 무대 한복판에 흰 광목이 팽팽하게 우뚝 쳐져 南北을 가로막고 있는 '통·막·살' 무대에서 무 세중씨는 거의 알몸이 되어 막걸리 통속에 들어가 몸을 씻고, 황토 진흙과 시래기로 온 몸을 바른 후, 광목벽을 향해 몸을 부딪히고, 머리로 박고, 이로 물어뜯고, 손톱으로 후비며 몸부림친 다. 광목벽 북쪽에 자리잡고 있던 화가 金丘林씨는 붓으로 그의 몸이 닿는 곳에 색을 칠한다. 무세중씨가 광목벽에서 몸을 때면 그의 몸이 닿았던 흰 광목벽에는 그의 苦惱가 피빛이 되어 찍혀 있다. 이 동작을 여러번 반복하고 난 다음 그가 흰 광목벽을 찢는 순간, 그는 찢어진 틈새에 몸을 걸치고 오열한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북으로 건너가 북쪽에 서있는 金丘林씨를 끌어안는다. 두 사람은 얼싸안고 운다. 다시 돌아서서 흰 광목벽을 완전히 제거하는 순간 朴倫初씨는 분단의 비극 때문에 희생당한 원혼을 달래는 진혼가를 판소리로 애달프게 부른다. 북소리, 징소리, 배우들의 통곡소리, 관객들의 뜨거운 눈물 속에서 統一을 위한 이 살풀이는 끝난다. 무세중씨는 한 사람의 배우로서 이 나라의 歷史 社會와 그리고 分斷의 비극에 대해서 깊은 의문을 던지며 이 무대에 발을 붙이고 섰다. 그는 무대행위 속에서 그 자신도 예상치 못한 어떤 변용이 이룩되었다. 이 변용 속에서 그는 자의 재창조가 가능해진 것이다. 그의 재창조 과정은 무대 전체에 파급되었다. 배우들을 변용시키고, 관객들을 변용시킨 것이다. 그의 '反, 그리고 통·막·살은 우리 모두가 체험한 歷史 속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었고, 죽음의 恨을 달래는 鎮魂曲이었고, 새로운 탄생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로토흐스키의 명언은 이런 공연에 해당될 수 있을 것이다. "俳優는 자기의 全存在를 기증한다. 그것은 '황홀(恍惚)'의 기술이다. 이 때 俳優의 肉體와 本質의 深部에서 일종의 '透視光線'이 분출한다." 우리는 俳優의 빛이 歷史의 빛이 되는 이 무대에서 우리 자신이 무자비하게 폭로되는 공포를 느꼈다. 1982년 이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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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83)<br> 최승희 명무의 모던댄스모던댄스 20세기에 발생한 무대 무용으로, 전통적인 고전 무용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개성적이면서 독창적인 표현력을 강조한다. 모던댄스는 기교적이고 형식적인 발레에 대한 문제 제기에서 시작되었다. 인간의 영혼과 정신세계에 대한 보다 자유로운 탐구가 모던댄스라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몸에 꼭 끼는 의상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무대에 나타난 이사도라 덩컨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며 마리 비그만(독일)과 마더 그레이엄(미국)에 의해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전개, 확립된 무용이다. 최승희(1911-1969) 1911년 강원도 홍천 출생 북한에서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 무용학교교장,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역임 1937년 세계 순회공연(3년간 150회)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1~1952년 중국 공연예술대 무용과 교수 1929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46년 월북 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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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br> 김재호 명무의 나비춤나비춤 나비춤은은 작법무(作法舞) 중 하나로 작법무는 춤의 동작과 형식 등에 따라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타주춤 등이 있으며, 이 춤들은 여러 가지 의식절차에서 추어진다. 나비춤은 나비 모양의 의상을 입고 춤추는 것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착복무(着腹舞)라고도 한다. 나비춤을 출 때 입는 춤옷인 도포는 이른바 육수가사(六垂袈裟)라 하여 앞으로 세 가닥 뒤로 세 가닥 등 여섯 가닥으로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의미한다고 하며 사바세계(괴로운 것)에서 극락세계(좋은 곳)로 건너간다는 뜻을 가진 법복이라 일컫는다. 나비춤은 승무(僧舞)와 비슷하며, 그 연원이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시대에 민속무용으로 널리 성행하였다 한다. 장삼과 고깔 차림으로 겉에 붉은 가사(袈裟)를 걸친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반주 없이 큰 법고(法鼓)를 치며 추는 춤으로, 보통 2인이 하지만 때로 4인이 하는 수도 있다. 손에는 연꽃을 들고 마치 나비가 꽃에 내려앉는 듯한 느낌과 고기가 움직이는 것 같이 춤추기 때문에 선녀의 춤같기도 하다. 춤동작은 완만하고 느린 동작으로 일관된다. 나비춤은 쓰이는 용도에 따라 도량게작법(道場偈作法), 향화게(香花偈)작법, 운심게(運心偈)작법, 지옥고(地獄苦)작법, 백귀의불(白歸依佛)작법, 만다라(曼陀羅)작법, 기경(起經)작법, 삼귀의(三歸依)작법, 목단찬(牧丹讚)작법, 구원겁중(久遠劫中)작법, 오공양(五供養)작법, 타주(打柱) 등의 15가지 작법이 있으며 범패 중의 ‘흣소리’나 태징을 사용하여 춤을 추거나 경우에 따라서 반주 없이 추기도 한다. 이재호(일응스님, 작법무_2003년 5월 11일 사망으로 보유자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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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음악사랑 이야기 "우리 음악 어디 있나"문화 전문기자 이동식의 음악사랑 이야기 '우리 음악 어디 있나'. 2011년에 발행 된 이 책은 당시 한류열풍이 세계를 휩쓸고 있는 K-팝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우리 음악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한다. 진양조,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 등 우리 고유의 가락에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문화적 문법을 더해 해석하고 있다. 저자는 지금처럼 우리 음악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과거 유산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뻔하다고 말하면서, 이제 서양인이 펼쳐놓은 판에서 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판을 만들어 우리의 심성과 예술혼을 보여줘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문화전문 이동식 기자의 K-팝의 뿌리 찾기우리나라 최초로 방송에서 백남준을 소개했고, 이우환, 이응로, 윤이상 등 세계적인 예술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문화전문 기자의 음악사랑 이야기다. 저자는 동양의 고전과 서양 철학 속에서 음악의 역할과 본질을 깊숙이 걸터듬어 내려온다. 런던과 북경에서의 기자생활은 저자에게 우리 문화, 그중에서도 우리 음악에 대해 한발 비껴나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 사유의 시간을 제공했으며 그것이 "우리 음악 어디에 있는가”라는 자문으로 이어진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문화적 문법을 자신만의 해석 위에 우리 음악 사랑을 더하여 보여준다.공자의 음악에 대한 조예, 그리고 세종대왕이 발견한 기보법 ‘정간보’ 이야기에서 성인들의 통치철학에서의 음악의 역할을 잘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일례로, 기장이라는 곡식이 음가를 정하는 기본이 되는데, 풍년이 들었을 때에는 기장을 세로로 세우고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기장을 가로로 눕혀 음의 높낮이는 물론 도량형의 단위로 조절했다고 한다. 풍년에는 사람들의 마음이 우쭐하고 들떠있기 쉬우니 음을 낮추어 평안하게 하고, 흉년에는 음을 높이어 사람들의 가라앉은 마음을 위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파리나 런던, 뉴욕에서 소녀시대, 슈퍼주니어, 에프엑스(f(x) 등의 연장공연을 요구하는 플래시몹이 열렸다는 뉴스들이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한류열풍의 발아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새싹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한국음악이 세계에 튼튼히 뿌리 내릴 수도 있고 일년생 풀로 그냥 시들어버릴 수도 있다. 지금처럼 우리 음악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과거 유산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뻔하다. 이제 서양인이 펼쳐놓은 판에서 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판을 만들고 우리의 심성과 예술혼을 보여주는 그런 음악판을 펼쳐야 한다고 저자는 목소리를 높인다.저자의 우리 음악에 대한 깊은 통찰을 읽어낸 대한민국예술원 황병기 부회장과 한국예술종합학교 이강숙 석좌교수는 일독을 추천한다.저자는 "우리 민족사에서 20세기만큼 변화가 많았던 세기는 없었던 것 같다. 20세기에 일어난 한 세기의 변화는 몇천 년에 걸친 변화보다도 크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변화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부분에 걸친 것이었다. 우리 민족이 격랑과 소용돌이를 헤쳐오면서도 20세기 말에는 컴퓨터, 철강산업, 토목건설, 조선업 등에서 세계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보면 민족의 우수성이 돋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문화면, 특히 음악에서는 20세기를 실패의 역사로 볼 수 있을 정도로 암울한 세기였다는 백대웅의 지적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비유해서 말하면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무엇이 묻었는지, 거울을 들여다볼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생존에 급급한 시대를 살아온 것이다.이제 우리는 음악에서 우리의 얼굴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을 그려내고 우리의 느낌을 노래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서 처음부터, 근본부터 새로 시작하자! 그렇게 해야 우리들은 일찍이 김구 선생이 그토록 염원하던 대로, 우리의 문화로 세계에 이바지하는 보람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이동식)황병기(대한민국예술원 부회장, 이화여대 명예교수,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음악은 공기 중에 파동으로 일어나는 순간 동시에 사라져버리기에 철저하게 덧없는 예술이지만, 음악만큼 사람들을 순수한 시간 속으로 인도하며 몸과 마음을 붙들고 풀어주는 예술은 없다. 음악은 우리를 즐겁게 위로해 주기도 하고 우리를 이끌어올려 완성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게 하는 위대한 힘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의 음악은 너무 적다. 도처에 음악은 넘치지만 진정으로 한국인의 심성과 예술혼을 보여주며, 세계인들도 사랑하는 그런 음악은 많지 않다. 외제 가구에다 값비싼 외제 술과 음식, 그릇도 외제, 생각도 외제, 거기에다 외국 음악을 들어야 잘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양 사람이 펴놓은 음악적 멍석 위에서 언제까지나 우리가 춤을 추고 있어야 하는가? 왜 자동차다, 반도체다 하면서 세계 일류로 발전했으면서 음악은 우리 것이 아직도 없는가?우리의 음악전통은 아득히 높고 찬란했다. 그런 그것을 덮어버리고 과거의 유산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한 우리 음악은 나오지 않는다. 벌써 반세기 전에 내가 가야금으로 첫 창작곡을 만들어 세계의 절찬을 받았지만 우리 음악을 되찾는 일은 몇몇 음악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옛날의 음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넘어서서 영원으로 연결되는 우리 음악을 만들려면 우선 전통의 틀과 정신을 알고 이것을 현대라는 시간의 축 위에서 재해석해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 내야 한다. 그것은 음악에서 우리가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되어야 막 세계에 퍼져나가는 한류를 계속 확산시켜 나갈 수 있다.중진 방송인이자 언론인인 이동식 기자가 그러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온 데 대해 무척 놀랐다. 이 책이야말로 전통문화의 단절현상 속에 스스로를 비하하는 사조에 자신도 모르게 빠져 있는 현대의 한국인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일찍이 우리 문화예술에 대한 많은 보도와 프로그램을 제작방송한 유명한 문화전문가인 이동식 기자의 목소리는 바로 수십 년 동안 우리 문화계가 추구해 온 목표이기도 하다. 음악은 가장 대중들에게 가깝고 직접적이어서 사회 각계에 미치는 영향력과 파급효과도 크다. 요즈음 ‘음악을 통한 스타 되기’에 열광하는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우리 음악이 태동하려면, 또한 우리 음악의 현실과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진단 아래 새로운 길을 찾으려 할 때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과 공명을 받을 것이라 믿는다.이강숙(한국예술종합학교 석좌교수, 전 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함량 미달의 책이 쏟아져 나오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이런 저자가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나를 놀라게 한 책이 있다. 내가 새로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까지 들게 한 책이다. 이동식의 이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은 어설픈 전문가의 뺨을 치고 있다. 음악에 대한 폭 넓은 지식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음악에 대한 사고의 넓이와 깊이가 참으로 대단하다. 책의 말미에서 우리는 지금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라고 쓰고 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의 마음에 옹기를 줄뿐만 아니라 그 말 자체가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동식은 이 책에서 음악적 혁명을 세 번이나 암시한다. 우리 음악을 찾는 일은 그냥 절대로 되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이 암시를 통해서 심도 있게 설파한다. 동서고금의 철학과 예술음악 대중음악을 포괄하는, 음악을 대하는 그의 태도, 그리고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서 자기의 주장을 펼쳐나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그의 설득력 역시 나를 놀랍게 한다. 한마디로 음악애호가와 음악전문가는 물론이고 한국을 이끌어가는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 번만이라도 이 책을 꼭 읽어주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황종음을 찾는 것은 단순히 음의 높이를 찾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당시에는 기본음을 내는 율관(대나무 관악기 튜브)의 길이가 일상생활에서 길이를 재는 자〔尺〕의 기준이 되고, 그 대나무관의 빈 공간에 가득히 채워지는 기장의 양은 부피를 재는 양(量)의 척도가 되며, 그 기장의 무게는 곧 모든 물건을 다는 무게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황종’이라는 기본음을 만들어내는 죽관(竹管)은 소리를 내는 기능만이 아니라 백성들의 일상생활을 좌지우지하는 도량형(度量衡)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황종음을 내는 기본율관의 길이를 얼마로 정하느냐의 문제는 단지 음악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의 차원에서도 더없이 막중한 일이었던 것이다. 바로 이처럼 중요하고도 근원적인 문제이기에 세종은 심혈을 기울여 이를 정리했다. ‘아악’에 사용되는 여덟 가지의 악기 중에는 쇠로 만드는 편종(編鐘)과 돌로 만드는 편경(編磬) 같은 악기가 있는데, 특히 편경을 만드는 재료인 돌은 보통의 것은 안 되고 특수한 돌이어야 하기 때문에 편경악기는 만들고 싶어도 마음대로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마침 세종대왕 때 서울 근교의 한 지방에서 편경을 만드는 돌이 발견되어 결국 세종이 편경을 만들 수 있었는데, 이를 두고 당시의 기록들은 세종 같은 훌륭한 왕이 음악을 정비하고 발전시키려고 뜻을 세우니 하늘도 감복하여 기꺼이 도와준 결과라고 적고 있다. 편경은 돌을 일정한 모양과 크기로 깎고 단지 두께만을 달리해서 여러 가지 높이의 음들을 내게 하는 타악기(percussion Instrument)다. 한 번은 신하가 이 편경 한 틀(set)을 만들어 세종 앞에서 연주를 했는데, 세종은 그중의 어느 음이 높이가 아주 조금 높다고 지적했다. 신하가 그 음을 내는 돌을 자세히 살피니 석공이 돌을 덜 깎아내어 돌에 깎아내도록 지정해 준 먹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먹줄을 다시 깎아낸 후에 연주를 하니 음높이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세종의 음악적인 귀가 그만큼 밝았음을 짐작케 하는 일화다. (본문 127쪽)옥중에 있으면서 겪은 쓰라린 체험은 그를 〈장자〉 ‘제물론’편의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에 나오는 한 마리의 나비가 되도록 했다. 수감중이던 1967년 10월, 옥중에서도 작곡을 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 오페라 〈나비부인〉을 1968년 12월에 완성한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성과였다. 그리고 해가 바뀐 1969년 하랄드 쿤츠, 조르지 리케티, 한스 베르너 헨체,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지그프리드 팔름,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오토 클렘페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등 161명에 달하는 세계적 예술가 및 그의 동료 그리고 독일정부의 항의로 윤이상은 석방되고, 2월 말에 베를린으로 돌아가게 된다. 2월 23일에는 그의 2부작 오페라 〈류퉁의 꿈(1965)〉, 〈나비부인(1967/68)〉이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초연된다. 그 음악이 초연될 때의 반향은 정말로 엄청난 것이었다.4년 후인 1972년 뮌헨 올림픽이 열린다. 윤이상은 오페라 곡을 위촉받아 오페라 〈심청〉을 작곡했고, 무대에서 초연된 후 다시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킨다. 비로소 우리의 전래설화가 음악을 통해 세계로 부상한 것이다.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동양이자 한국이다. 그렇기에 그가 성공했을 것이다. 어설픈 독일의 음악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확실히 우리 이야기를 음악으로 형상화했으며, 그것은 전후 갈 길을 잃고 고민하던 서양음악계에 한 줄기 서광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작품의 제목을 봐도 알 수 있다. 〈나모〉, 〈요정의 사랑〉, 소관현악을 위한 2중협주곡 〈견우와 직녀 이야기〉, 대관현악을 위한 무용적 환상 〈무악〉, 하프와 현악 합주를 위한 〈공후〉 등 우리가 다 아는 소재를 음악으로 올려놓았다. 그가 한국에서 자라며 듣고 배운 모든 것이 다 그의 음악의 자산이 되고 원료가 되고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심지어는 미신이라고 치부되던 무당굿까지도 말이다.(본문 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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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3)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용과 용둠벙"용 같지 않은 용은 때려잡고,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아픔을 다듬어주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그런 철학을 가진 이들을 마땅히 등용시켜야 진정한 용의 해일 것이다. ” 지난 설날 광주교통방송 아침 인터뷰를 했다. 올해가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이니 남도의 용을 설명해 달라는 취지였다. 갑진년 양력설 본 지면에 ‘용보다 소사 아저씨’라는 제목으로 남도의 용을 소개한 바 있는데 종종 질문해오는 사람들이 계시기에 답변 삼아 다시 언급한다. 갑진(甲辰)은 60갑자 중 하나다. 우리 조상님네들은 세상의 주기를 60년으로 계산했다. 하늘의 수 천간(天干) 즉 10간과 땅의 수 지지(地支) 즉, 12지를 서로 교직시켜서 최소공배수인 60을 만들었다. 갑자년, 을축년 등으로 조합해 열 번이 끝나면 10간의 첫째를 12지의 열한 번째부터 조합해 순환하는 방식이다. 갑진년(甲辰年)의 갑(甲)이 육십갑자 41번째인 푸른색을 뜻하고, 땅의 수 진(辰)은 용을 뜻하기에 청룡의 해라고 한다. 하지만 모든 용이 청색인 것은 아니다. 동서남북 방위를 설정할 때 동쪽을 담당하기에 그리 구분하는 것이지, 우리 사상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오행(五行)의 중심은 오히려 황룡(黃龍)이다. 용 자체가 상상 속의 캐릭터라 어떤 근원으로부터 변화하면서 생성되어왔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용은 존재한다. 인간 욕망의 투사물이라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용(龍)을 dragon으로 번역하고, 동양에서는 dragon을 용(龍)으로 번역한다. 서양에서는 용을 악마화하고 동양권에서는 용을 최고의 권좌, 가장 권위 높은 캐릭터로 상정한다. 용을 바라보는 시선이 극단적이다. 힌두교의 나가(Naga)도 용이다. 코브라처럼 생긴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동양권의 용 중에서는 지렁이도 토룡(土龍) 곧 용이다. 견훤 탄생설화를 통해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문화권, 문명권별로 용이라는 캐릭터를 서로 다르게 설정했음을 알 수 있다.남도에 용(龍) 관련 지명이 전국 대비 가장 많은 까닭용 관련 지명은 전국에서도 광주 전남지역이 가장 많다. 올 초 전라남도가 조사를 한 모양인데, 전국 1,261곳 중에서 310곳으로 25%를 차지한다. 전국 최고다. 아마 마을 이름이나 산 이름 정도를 조사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국지명총람>의 광주전남을 참고해보면 마을 이름, 산 이름, 강이나 하천 이름, 계곡이나 못 이름뿐만 아니라 바위, 산등성이, 둠벙에 이르기까지 천여 개가 넘는다. 조사에서 밝힌 바로는 순천이 가장 많고 해남, 영암, 무안, 나주 순으로 많다고 한다. 실제는 지금의 영산강 권역에 용 설화나 용 지명이 가장 많이 분포한다. 예컨대 전남지역에 보고된 74편의 용 설화중에서 영산강 유역 설화가 57%를 차지한다. 이중 대표적인 지명이 장성 황룡강이다. 용은 용 자체의 지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용소(龍沼), 용연(龍淵), 용지(龍池), 용담(龍潭), 등 이른바 ‘용둠벙’과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둠벙은 갱(坑)이다. 강 혹은 갱번이란 이름이 여기서 왔다. 한자의 뜻대로라면 용소는 늪, 용연은 연못, 용지는 연못이나 도랑, 용담은 연못이나 물가 정도이다. 모두 물과 관련되고 장차 용왕(龍王)의 뜻으로 확대되어 사해 바다를 관장한다. 당골의 노래에서 나타나듯이 동해는 청제용왕, 서해는 백제용왕, 남해는 적제용왕, 북해는 흑제용왕 등으로 호명된다. 물론 남도에만 용 이야기나 지명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가 다 그러하다. 예컨대 제주도의 용담(龍潭)은 천지창조 후 만들어진 것으로 전승되었다. 태초에 바다 한가운데서 한라산이 솟아올랐는데 백록담에서 큰 내(川)가 두 줄기 흘러내려 바다와 만나는 곳에 용연(龍淵)을 이루었다.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도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뜻을 깨치고 포교를 시작했다. 용담가(龍潭歌)는 물론 천도교(동학) 성전(聖典)인 용담유사(龍潭遺詞)가 여기서 나왔다. "용둠벙에서 전하신 가사(歌詞)”이다. 광주는 용봉동을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반룡동과 봉곡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반룡이 반룡희주형(盤龍戱珠形-용이 구술을 가지고 논다는 뜻)풍수 명당이었다. 지금은 대부분 전남대에 편입되었다. 광주 어룡동은 어등산과 황룡강을 합하여 만든 이름이다. 용진산, 복룡산 등의 이름 중 어등산은 물고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의미로 민화로 말하면 등용문(登龍門, 잉어가 여의주를 물고 승천한다는 의미)의 산이라 할 수 있다. 황룡강의 하류에 있는 산이기에 어룡이란 이름이 생겼다. 그렇다면 왜 전국 대비 남도에 용 관련 지명이 가장 많을까? 전남설화 분포를 통해 언급했지만,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설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영산강 문화권을 중심으로 고려 건국을 둘러싼 시기의 용 설화나 지명이 넓게 분포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황해도 해양세력이던 왕건이 전라도 토호 세력 견훤을 물리치고 고려를 건국할 당시에 지금의 영산강을 중심으로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다. 나는 적어도 영산강권역의 용 관련 지명이나 전설은 이 사건을 배경 삼고 있다고 생각한다.남도의 용은 왜 피를 토하고 떨어지기만 하는가?영산강의 시원이라는 담양 용소의 설화는 용이 승천하려다가 피를 토하고 떨어져죽었다는 내용이다. 이를 아기장수 설화에 대입해보면, 승천하지 못하고 떨어져 죽었으니 왕건이 아니라 견훤일 것이다. 참고로 아기장수 설화는, 신분이 미천한 집안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아기가 장차 역적이 될 것이라 하여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 내용으로 구성된다. 이본(異本)이 매우 많다. 순천시 주암면 운용 마을의 용소(용물소라고도 한다) 이야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어떤 옛날 마을 처녀가 용둠벙에 가서 목욕을 하고 있다가 마침 옥황상제의 아들 용이 유배를 와있던 차에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마침내 승천하는 날, 하필 처녀의 친구가 용오름 광경을 보고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용은 떨어져 죽는다. 다른 지역이라고 크게 다르겠는가만, 왜 남도의 용은 피를 토하고 떨어져 죽어야만 했을까? 답변 대신 전남대학교 용둠벙 이야기를 전한다. 용봉동에 위치한 전남대학교의 용지(龍池)는 유기춘 당시 전남대 총장 등에 의해 1970년에 인공으로 조성되었다. 장차 승천할 용을 배려했기 때문이다. 당시 전남대 구성원들은 담양 용소 혹은 순천의 용 설화를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고, 용좌(龍座) 재구성을 상상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용둠벙을 만든 지 한 갑자가 도래하는 지금쯤, 이 어간에서 대통령 한 사람 정도는 나와야 하지 않나? 어쩌면 수많은 용을 재구성하는 일을 담당했는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광주에서, 소풍 가는 날 하필 비가 오면 소사가 용을 때려잡아 그런다는 얘기는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다. 백마 타고 장흥 석대들을 지휘했다는 동학 여전사 이소사를 투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아무리 영험한 용일지라도 가장 낮은 직급의 민중이 한 삽에 때려잡는 곳이 남도라는 메시지다. 그렇기에 나라가 어지럽고 힘들 때마다 떨쳐 일어나 시대를 이끌었던 곳이 광주이고 남도다. 문화는 어떤 시대 어떤 수요들이 있어 재구성되는 것이다. 마치 전남대 용지를 새로 만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용좌라는 것이 결국 무엇이겠나? 지배해서 권력을 누리던 용은 전제정권 시대의 용이다. 우리 시대의 용은 백성을 섬기는 용이어야 한다. 장차 남도는 어떠해야 하는가. 용 같지 않은 용은 한 삽으로 때려잡고, 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아픔을 다듬어주며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주는 그런 철학을 가진 이들을 마땅히 등용시켜야 진정한 용의 해일 것이다. 용 관련 가보고 싶은 명소를 질문하기에 장성 입안산 황룡강 발원지를 소개했다. 극락강의 발원인 담양 용추산(용소), 드들강 발원인 화순 화학산과 더불어 세 개의 영산강 시원 중 가장 길다. 내려오다가 동학군 전승지인 황룡강전적비를 참배해도 좋다. 전설에 기대어 말하자면 남도의 용은 청룡보다는 황룡이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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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갑진년(甲辰年), 문경의 용(龍) 이야기이만유/향토사연구원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푸른 용의 해’라 한다. 올해는 육십갑자(六十甲子)의 41번째로 갑진년(甲辰年)이 된다. 다시 말해 ‘푸른 용의 해’라 함은 천간(天干) 10개 중 갑(甲)으로 푸른색에 해당하고, 지지(地支)의 12개 중 5번째로 용을 뜻하는 진(辰)이 되어 갑진년(甲辰年)‘청룡(靑龍)의 해’가 되는 것이다. 용(미르)은 권위를 상징하는 전설 속 신수(神獸)로서, 기린·봉황·거북과 함께 사령(四靈)에 속하는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이다. 인간을 초월하는 강력한 힘과 신통력을 지녔으며 특히 비와 물과 관련된 신령스러운 동물이다. 청룡은 동서남북을 지키는 벽사신(辟邪神)으로 사신도(四神圖)나 풍수지리상 명당으로 보는 좌청룡(左靑龍)·우백호(右白虎)·남주작(南朱雀)·북현무(北玄武) 중의 하나이고 동쪽을 지키는 신이다. 용의 모습은 ‘머리는 낙타,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81개)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영묘한 구슬, 여의주(如意珠)를 지니게 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지게 된다. 우리 민족은 오랫동안 농경 생활을 영위하면서 우순풍조하길 바라며 풍농(豊農)과 풍어(豊漁)를 빌기 위해 용왕제·용왕굿·용신제·기우제를 지내는 등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기도 하였다. 용은 조화능력이 무궁무진하며, 물을 지배하는 수신(水神)으로 용왕·용왕할머니 등으로 부르며 모시는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이다. 또한, 신화와 전설에 등장하는 용은 상서로운 힘을 지녀 호국(護國)과 왕권이나 왕위를 상징하는데, 우리나라 역사상 성인의 탄생, 군주의 거국적인 대사(大事)에 여러 차례 용이 출현하는 기록이 보인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동명성왕이 황룡을 타고 승천했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태조 왕건은 용의 핏줄이라고 해서 왕씨 성을 가졌으며, 이 때문에 고려 왕 씨 후손의 겨드랑이에는 용의 비늘이 돋아 있다고도 한다.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우고,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것이나, 만파식적(萬波息笛)에 얽힌 설화 등에서 호국룡임을 엿볼 수 있다. ‘문경새재오픈세트장’에 있는 사정전(思政殿) 안에는 ‘용상 체험장’이 있다. 거기에는 용상(龍床)과 왕이 입는 의대(衣帶)가 준비되어 있는데, 임금과 관계되는 것에는 거의 빠짐없이 ‘용(龍)’이라는 접두어를 붙인 호칭을 쓴다. 이를테면 용상(龍床)은 물론이고 용좌(龍座), 용포(龍袍), 용안(龍顔), 용루(龍淚), 용음(龍音), 용선[龍扇] 등이 있다.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할 때 위의 용과 관련된 낱말을 다 말하고 난 뒤, "그럼, 왕이 누신 응가(대변)는 무엇일까요?”라고 질문하면 "용똥”하는 대답이 나온다. 그래서 한바탕 웃음꽃을 피우는데, 정답은 ‘매화’라고 한다. 변기는 ‘매화틀’이라 하고요. 그리고 용포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왕을 상징하는 용문(龍紋)을 수놓은 용보(龍補)를 가슴 ·등 ·양어깨에 장식하였는데, 왕과 왕비가 입는 의대(衣帶)에는 오조룡(五爪龍-발톱이 5개 있는 용), 왕세자와 왕세자빈은 사조룡(四爪龍), 왕세손은 삼조룡(三爪龍)을 붙여 발톱 수로 지위를 나타냈다. 일설에는 중국의 황제만이 오조룡을 쓸 수 있고, 조선의 왕은 사조룡을 쓴다고도 하였다. 문경에는 대승사, 김룡사, 봉암사 등 전통사찰이 7곳 있다. 사찰마다 범종(梵鐘)이 있고 범종의 가장 위쪽에는 용의 모습을 한 고리가 있다. 이것을 종뉴(鐘紐) 또는 용뉴(龍鈕)라고 하고 이곳에 쇠줄을 연결하여 종을 매달 수 있다. 용생구자전설(龍生九子傳說)에 의하면 용이 낳은 아홉 자식에는 비희(贔屭), 이문(螭吻), 포뢰(蒲牢), 폐안(狴犴), 도철(饕餮), 공복(蚣蝮), 애자(睚眦), 산예(狻猊), 초도(椒圖)라는 용이 있다. 범종의 고리에 있는 용은 포뢰(蒲牢)라고 하는 용이다. 포뢰는 소리 지르는 걸 좋아하는 용인데, 특히 바다에 사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고래를 보기만 해도 놀라 비명을 크게 지른다고 한다. 그래서 장인들이 포뢰 형상을 만들어 종의 윗부분에 장식하고 고래 모양의 당(경당-鯨撞)으로 종을 쳤다. 그렇게 하면 고래를 만난 포뢰가 경악하여 큰소리를 지를 것이고, 그에 따라 종소리도 멀리까지 크고 우렁차게 들리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범종 소리를 일명 경음(鯨音)이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021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간한 ‘띠 지명 이야기’에 따르면 전국 고시 지명 약 10여 만개 중 십이지(十二支) 동물 관련 지명은 4,109개인데 용과 관련 지명이 가장 많아 전국에 1,261개나 되며, 경상북도는 174개가 된다고 한다. 그중 문경에는 어룡산(魚龍山) 1개만 조사되어 있으나 필자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우리 지역의 용 관련 지명은 수십 개 있다. 그럼, 지금부터 문경에서 용과 관련된 지명과 용(龍)과 얽힌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하겠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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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1)콩밭에 원수는 비둘기요 우리네 원수는 삼팔선 이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가세 감상 살다 보면 가는 곳 마다 걸림돌이 있다. 외나무다리 위의 원수도 있고, 오월동주가 그렇다. 미운 것일수록 눈에 자주 띄니 얄궂기 그지없다. 없었으면 하는 것이 어디 비둘기와 삼팔선뿐이랴. 그러나 이들도 내 인생의 동반이며, 엄연한 실상이다. 탓한다고 알아서 사라져 주지 않는다. 비둘기에게도 기꺼이 콩 한 톨 보시하며 삼팔선이 허물어지는 날을 기다릴 밖에 작위 없이 편하게 가로쓰기 하였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