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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0)<br>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전국에 걸쳐 유튜브 경매가 난리지만 나와는 관련이 없다. 아니, 유튜브 경매 자체를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팔불출이라고나 할까, 그런 문외한이 얼마 전 우연히 지방 경매를 들여다보게 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이다. 그러나 이 것은 팔기 위해 경매에 붙였던 것은 아니다. 경매사(사장)가 다른 물건을 진행하며 본인은 돈 안 되는 이런 것도 산다는 식의 에피소드로 잠시 보여 주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것을 전화를 해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엉뚱한 점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을 듯싶다. 전화를 통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 대해 엉뚱한 일을 벌린 것은 아무래도 평소 도편 중에서도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것을 선호한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나는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도편들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편이다. 젊은 시절 가마터에서 직접 습득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보이는 대로 욕심을 부린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소장품 중에서는 분청이 많고 청자는 비교적 적은 편인데 그런 아쉬움이 이번처럼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된 원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의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굽 안은 유약을 훑어내고 있으며 굽에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있다. 외면은 담청색의 유약이 두껍게 입혀져 있으며 평평하게 벌어진 몸체 밑 부분은 전으로 꺽이는 부분부터 손상을 입어 없어지고 없다보니 흡사 둥근 연못 중앙에 굽이 섬처럼 동그마니 떠 있는 모습이다. 안쪽을 보면 전으로 돌아가며 꺽였던 부분들이 깨어져 달아난 흔적을 보이고 있다. 중앙에는 두 줄의 백상감 안에 물고기 두 마리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눈동자만은 흑상감으로 점을 찍어 액센트를 주고 있다, 바깥쪽으로도 두 줄의 백상감 원을 배치 중앙의 원과의 사이 여백에는 초화문을 넣고 있다. 초화문은 중앙에서 바깥쪽을 향해 방사선 형태로 줄기는 흑상감으로 꽃은 백상감으로 처리 흑백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유약과 흑백상감의 배치 등으로 보아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전국에 걸쳐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유튜브 경매에 대해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편이다. 고미술품은, 특히 도자기는 재화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그 것 못지않은 역사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문화적인 요소도 있기 마련인데 경매를 통해서는 현금 대상으로서의 즉물적인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서 보이는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고 해서 예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거나 방비하고자 하는 벽사의 의미가 강하며 많은 알을 낳는다고 해서 다산의 의미도 강조되고 있다. 새해 벽두에 만난 물고기 두 마리가 나를 건강으로부터 지켜주고 다산의 의미처럼 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그런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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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9)<br> 백자중첩편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를 소성하기 위한 가마는 일정한 공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것은 가마 안에 도자기를 재임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령 가마 바닥에 고급의 갑번이나 예번을 늘어놓았을 때 그 수량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급품이 아닌 하품이나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그릇과 그릇 사이에 받침을 넣어 포개어 굽게 된다. 이 경우 굽은 물론이거니와 그릇 내저에도 흔적이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받침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 것일까. 청자와 백자에서 쓰인 받침은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 우선 같은 종류를 보면 가는모래받침, 굵은모래받침, 내화토빚음받침, 모래빚음받침 등이 있다. 다른 것으로는 청자에서는 규석받침이 있고 백자에서는 태토빋음받침이 있다. 청자에서 내화토+모래받침이나 백자에서 흙물+굵은모래받침 등도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받침을 이용해 포개어 굽는 과정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백자중첩편이다.굵은모래받침을 이용해 그릇을 포개어 굽고 있는데 그 수량이 무려 여덟 점이나 된다. 아래쪽에는 발 다섯 점이 틈 없이 들러붙어 있고 중간에는 흔적만 남은 것 그리고 위쪽으로는 완 안에 잔이 들어 있어 모두가 여덟 점이 되는 것이다. 유색은 회백색에 잔 안에 내저 원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C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런데 백자충첩편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흡사 청자의 잔탁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미소가 절로 머금어 지고는 한다. 받침 중에서도 백자중첩편에서 보이는 굵은모래받침은 지저분해 보이는 등 보기에 깔끔하거나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민과 싼값의 대량생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갑번이나 예번이 지닌 수량의 한계, 이를 극복키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하면 나름의 의미는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굵은모래받침의 백자중첩편이 그나마 들러붙고 깨지는 등 훼손이 심해 서민들의 손에조차 다가가지 못하고 좌절한 점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도자기 중에서 갑번이나 예번 등 상품만이 사랑 받는 존재였겠는가. 하품이기는 하지만 백자중첩편이 온전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이 또한 그들에게서 애지중지 사랑 받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래서인지 끝내 제 몫을 못하고 좌절한 백자중첩편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고급품에서 느끼는 저 특별한 미감과는 달리 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더욱 쓸쓸하면서도 애잔한 감정이 느껴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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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79)<br> 최승희 명무의 '화랑무'화랑무 화랑무(花郞舞)는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崔承喜)가 1937년 발표한 작품으로, 신라의 화랑의 모습을 무용화한 작품으로 남성적 춤사위가 주를 이룬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안성 향당무'에서 신라 시대 때부터 화랑무가 봉황금란무와 함께 전승되어 오고 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안성 장시를 주 무대로 발전했다. 최승희(1911-1969) 1911년 강원도 홍천 출생 북한에서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 무용학교교장,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역임 1937년 세계 순회공연(3년간 150회)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1~1952년 중국 공연예술대 무용과 교수 1929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46년 월북 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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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7)백운동 마당에는 신선이 놀고 학포동 중허리에 실안개가 떠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성인봉 장재로 넘어간다. 감상 울릉도에 대한 지명은 신라 512년(지증왕 13)에 우산국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 태조 때 우릉도(芋陵島), 덕종 때 우릉성(羽陵城), 인종 때 울릉도(蔚陵島) 등의 지명이 등장하고 울릉도(鬱陵島)·우릉도(于陵島)·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렸다.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라 하고 독도를 송도(松島: 마쓰시마)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메이지 정권 전후에 울릉도를 마쓰시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였다. 울릉도는 자연환경이 빼어난 소중한 우리 영토로서 3無(도둑, 공해, 뱀) 5多(향나무, 물, 바람, 미인, 돌)의 전화를 입지 않은 평화의 땅이다. 형제봉, 미륵봉, 나리령 등 크고 작은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 울릉도의 진산 성인봉과, 낮은 지대에서 보면 이곳에는 항상 흰 구름이 자욱한 백운동과 장재는 울릉도의 별천지이며, 학포동 마을 뒷편으로는 노인봉이 보인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울릉도의 평화로운 모습을 문양지에 고체로 옮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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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신용하의 음흉(陰凶)함신용하 교수의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설' 관련 글은 두 편이 있다. 첫 편은 ‘대한민국학술원통신’ 2018년 4월 1일자, 제297호에 발표한 ‘愛國歌 作詞는 누구의 작품인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2018년 4월 16자 통신사 ‘뉴시스’에 ‘애국가는 절대 도산 안창호의 작품일 수 없다’로 반박한 바 있다. 두 번째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2021년 08월 26일 발표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작사에 대하여’의 결과물이다.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 첫 머리에 수록된 원고로써 이번 비판의 대상이다. 신교수의 이번 글의 핵심은 안창호가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했다는 주장이다. 나름의 근거를 들긴 하였다. 그러나 모두 필자에 의해 검토되어 용도 폐기된 것들의 조합 정도인데다, 한 건도 자신이 발굴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한 대목은 없다. 그런데도 강연을 하고, 10여년 이상 안창호 주장자들을 뒤로 밀고 첫 번째에 원고를 수록한 것은 흥사단이 ‘신용하’라는 권위와 명성을 이용한 것이고, 신교수는 이를 알면서도 응한 것으로 본다. 애국가 작사자를 이렇게 쉽게 진영논리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 신교수에게는 다소 지난친 감이 있지만 비판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 가관이다. 신교수의 주장 배경이기도 하고, 상상력으로 구축한 가설이기도 하다. 이 가설로부터 전개 과정의 논지를 들어 비판하고, 결론으로 신교수의 간교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해의 편이를 위해 주요 문제 대목을 인용하고 구체적으로 반박하기로 한다. #1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나라의 자주독립과 애국사상 배양에서 ‘애국가’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하고 애국계몽 운동가들과 지식인 학생들에게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적극 권장하였다.” 애국계몽운동가, 지식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적극 권장하였다.”고 전제하였다.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전제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어떤 기록을 통해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권장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이후에 제시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는 허위이다. 분명히 근거 없는 가설이다. 다만 귀국하면서 국가(애국가)에 대한 기능(상징조작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안창호가 국내 사정을 잘 몰랐던 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독립신문은 이미 논설을 통해 이를 피력해 왔고, 지면을 통해서는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 등을 실천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는 안창호만의 인식은 아닌 것이다. 이의 증거가 ‘태극학보(太極學報)’ 1908년 3월 발행 제18호를 통해 발표한 ‘讚愛國歌’의 실체이다. 이를 통해 안창호는 이미 그 효용성을 발휘하고 있는 어떤 애국가를 찬(贊)하였기 때문이다. #2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이 ‘국가’로서 부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는 자료를 검증해본 결과 도산이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한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안창호가 귀국하면서부터 대성학교를 개교하는 시점에 한정하여 현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판단’하였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추정을 하였을 뿐이다. 사실 약 1년 반이라는 시기를 제시한 것이니 이 자체가 막연한 추측인 셈이다. 신교수는 이 상황은 이렇게 진전시킨다. 즉, 1907년 2월 20일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후 3월 1일 균명학교 외 3개교 연석 귀국강연회에서 애국가에 대해 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각주(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자)로 제시하여 근거로 삼았다. #3 "國旗拜禮 西署 萬里峴 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얏든 美國儒學生 安昌浩氏가 生徒에게 대하야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鐘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매일 上學전에 國旗에 拜禮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즉 其開明模範을 令人感昻이라. 然則 凡吾학교도 從今施行하자 하므로 該校에서 去月曜日로 爲始하야 拜旗唱歌禮를 擧行한다더라” 안창호가 귀국한지 한 달만에 학생들에게 첫 강연을 하였는데, 미국의 학교 상황으로 조회 때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국가)를 창함을 보고와서 권한 결과 균명학교에서 3월 18일 월요일 조회에서 "拜旗唱歌禮를 擧行한다더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교수는 ‘拜旗唱歌禮’를 국기 경례를 했는데 애국가는 부르지 못하고 애국적인 창가를 불렀다고 했다. 애국가와 창가를 구분하였다. 그 이유를 "아직 조선에서는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애국적 창가(唱歌)로 제창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미국학교에서 "國旗에 拜禮하고 愛國歌를 唱함”에 대한 강연 결과로 의무균명학교에서도 그대로 했다는 뜻으로 ‘拜旗唱歌禮’를 하였다는 것인데, 애국가가 정해져 있지 않아 다른 창가로 대신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상상이며 가공이다. 대성학교 개교(1908년 9월 26일) 전에는 현 애국가가 없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억지일 뿐이다. 특히 "아직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라는 표현도 터무니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1902년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가 관립학교와 국가적인 행사에서 연주된 데에다 교회 등에서도 여러 애국가를 부른 기록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정’이란 용어 사용도 전혀 학술적이지 못한데다 사실도 아니다. 왜냐하면 1908년 9월 이전에 "애국가”가 불렸음은 1907년 11월 14일 ‘황성기독교청년회관신건축 상량예식’ 식순에 ‘愛國歌’가 있음은 물론, 안창호가 강연자로 참석한 1907년 7월의 한 행사 기사에서 ‘애국가’의 존재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는 데서도 그렇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女子敎育의 視察>이란 기사 일부이다. "광무 11년 7월 8일에 본지 명륜당 내에서 녀자교육연구회를 개하였는데 각학도는 방학의 시를 당하여 7, 8백 명이 참회(參會)하였고, 교회 부인 급 려염부인(閭閻婦人) 4, 5백은 서편으로 참석하였고 일반사회는 1천 8, 9백 명이 동편으로 방청하는데 대황제폐하 만세의 황태자전하 천세와 엄귀비전하(嚴貴妃殿下) 천세(千歲)를 삼호(三呼)한 후에 진명녀학교 생도는 애국가로 축사를 쟁창(爭唱)하고 차제로 열좌(列坐)한 후 부인 연설원은 황부인 몌례 씨와 금부인 혈넌씨와 12세 녀자 옥어진(玉於鎭) 씨요 남자 연설원은 안창호와 김희경인데 박수갈채함은 난가진언(難可盡言)이고…” 이 두 행사에서 불린 것이 어떤 애국가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에케르트 작곡 ‘大韓帝國愛國歌’이거나 현 애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아직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로라는 주장이나 1908년 9월 이전에는 현 애국가는 물론 "애국가”가 지정되지 않아 부를 수 없었다는 주장은 가당치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단락에서 "1908년 8월까지 애국계몽기에 부른 애국가는 주로 ‘무궁화노래’라는 이름의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였다.”라고 하여 이미 다른 "애국가”가 있었음을 시인하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신교수의 문해력을 의심하게 한다. 그리고 억지는 계속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4 "도산이 신민회를 1907년 4월 창립한 뒤, 이듬해 구국교육운동의 모범학교로 1908년 9월 26일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을 바로 이때 ‘애국가’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도산이 새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창작 보급하기 시작하기 이전 1908년 8월까지 애국계몽기에 부른 애국가는 주로 ‘무궁화노래’라는 이름의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였다.” 신교수의 #2에서 "도산이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한 것”이란 주장에 이어, 안창호가 지어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에 발표하였다고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정리하면 지은 시기는 약 1년 반 동안, 이를 세상에 알린 것은 대성학교 개교 후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사 동기는 개교 이전에는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만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새 애국가가 필요해서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현 애국가와 동일 후렴을 쓰는 ‘무궁화노래’(별칭 황실가)는 독립신문 1997년 7월 13일자에 서재필이 "계관시인 윤치호가 지은 것”이라고 한 사실을 수용하며, 현 애국가의 탄생(?)을 서사적으로 이렇게 기술하였다. 5# "대성학교 개교 직후 그(안창호)가 추대한 대성학교 교장 윤치호가 평양의 대성학교로 내려오자, 도산이 이전의 <애국가>(무궁화노래)는 황실 중심이어서 적당치 아니하므로 새로이 한 절을 지어보시라고 윤치호에게 요청하였다. 윤치호는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서 넣어 두었던 것을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유하사 우리나라만세’의 애국가였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 되었다고 찬성하여 대성학교에서(안창호 작사의) 새 가사의 애국가가 제창되기 시작하여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따라가다 보니 "증언이 있다.”로 끝났다. 이는 그동안 필자의 논증으로 전문(傳聞)에 전문으로 유포된 이야기를 답습한 내용이다. 신교수가 #2에서 "판단하고 있다.”를 가능케 한 것이 겨우 이런 ‘증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신교수 판단의 근거는 바로 인용한 5# 뿐인 것이된다. 이를 분절하여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현 애국가와 동일한 후렴의 ‘무궁화노래’를 작사한 윤치호가 교장이 평앙 대성학교 에 내려왔다. 둘은 안창호가 이미 자신이 지어 놓은 상태에서 황실찬양 내용의 애국가를 지은 윤치호에게 정당치 않으니 다시 지어달라고 하였다. 셋은 윤치호가 좋은 생각이 아니 난다고 하였다. 이에 안창호가 지어놓았던 애국가(현 애국가)를 보여 주니 윤치호가 좋다고 하였다. 넷은 윤치호의 찬성하에 안창호가 지은 것 현 애국가를 대성학교에서 보급하였다. 핵심은 1908년 9월에 안창호가 지은 것을 윤치호의 찬성하에 세상에 처음 알렸다는 점이다. 이상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현 애국가 가사는 1908년 9월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연히 대성학교 안창호의 서랍에서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신교수는 이런 사족(蛇足)을 달았다. #6 "새 애국가의 본 가사는 도산의 작품이지만 후렴은 ‘무궁화노래’의 후렴을 차용했음으로 도산은 새 애국가를 자기 작품으로 밝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애국가를 도산의 작품이 아니라 윤치호의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도 나오게 된다고 본다.”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후렴을 차용하였기 때문에 안창호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역시 신교수의자신의 가설을 강화하는 주장인데, 이런 정도는 윤치호가 이미 1906년 10월 3일 한영서원 개교 후 입학생들을 위해 1907년에 들어 새로 작사했다는 증거인 ‘자필 가사지’의 존재를 대입하면 내세울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정도는 너무 궁색한 논지이다. 이어서 신교수는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이미 필자가 ‘찬미가’ 수록 3편의 창작 작품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주제 지향과 가사의 응결성’을 발표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이 애국가 가사와 안창호의 다른 작품과의 분석을 한 것인데, 2절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 1절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는 ‘東海’와 같은 시어, "바다가 변하여 돌이 된들”과 같은 영원성의 비유 등을 들어 공통점이 있으니 안창호 작품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비교 대상인 안창호 작품들의 출현 시기의 문제이다. 즉, 남이장군(南怡將軍) ‘북정가(北征歌)’의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나 유길준 ‘독립기념경절회창가’의 "장백산 높다해도~동해물 깊다해도”나 윤치호의 ‘찬미가’ 14장(현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출현 이후의 소작이란 문제다. 이 시기의 문제는 안창호의 비교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시어나 비유 등이 바로 앞서 열거한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다음 대목도 실효를 거둘 수 없음은 알게 한다. #7 "여러 사람의 증언들에 차이가 있을 때에는 작품의 내용 분석이 작가를 밝히는 좋은 방법이 된다. ‘동해문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애국가 가사의 내용과 표현을 다음과 같이 도산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면, 이 애국가의 본 가사는 도산 작품임이 분명해진다.” 내용 분석을 통해 작가를 판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독창적인 노래 가사를 지었다고 해도 전 세대 또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에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작가만의 독특한 핵심어의 대비가 아니고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신교수는 이러한 문제, 즉 작품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신교수가 애국가 가사와 안창호의 다른 작품과의 분석 결과 제시 정도로 작자를 규명 하려 했다면 옳은 방법은 아니다.문제는 작품의 외연과 내연을 관통하는 주제와 핵심어의 여부이다. 애국가 가사의 핵심어는 바로 ‘하느님’(하나님)이 된다. 필자는 앞장에서 현 애국가의 주제를 제1절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들어 ‘충군 애국적 신앙’이라고 학인 한 바 있다. 그런데 안창호는 ‘하느님’을 쓴 바도 없고, 신앙고백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안창호는 이런 신앙적 표현을 어떤 노래, 아니 어떤 강연이나 담화에서도 하였다는 기록이나 증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단 하나의 핵심어 사용 여부로 안창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다. 앞의 #1~#6까지의 신교수 주장도 결정적인 한 가지 증거로 전면 부정을 하게 된다. 아니 전복이 된다. 왜냐하면 "동해문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가사의 애국가는 이미 대성학교 개교 3개월 전인 1908년 6월 25일 광학서포에서 발간한 윤치호 역술 ‘찬미가’(재판) 15쪽 제14장 ‘Patriotic Hymn’에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신교수가 그렇게도 강조한 안창호가 지어놓았다가 윤치호의 찬성으로 1908년 9월에 서랍에서 꺼내 발표하였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사실 하나로 신교수의 너절한 주장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으로 신교수는 알면서 숨긴 것이 있다는 점이다. 매우 충격적인데, 자신의 주장 시점보다 절대 시간 3개월이 빠른 기록 증거이다. 바로 ‘찬미가’ 수록 14편 ‘Patriotic Hymn’이다. 이는 결코 몰라서가 아니다. 존재를 알고 있었음이 자신의 글 곳곳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12쪽 "이 ‘무궁화노래’는 윤치호가 편찬한 ‘찬미가’에서 <Patriotic Hymn>(애국가)으로 번역해 수록~”이라고 한 것과 15쪽 각주7의 참고문헌 "① 尹致昊 譯述, 찬미가, 1908”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20쪽 각주8은 결정적인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윤치호 ‘찬미가’(재판 1908년)에서 ‘무궁화가’의 영문 제목을 ‘애국가Patriotic Hymn’으로 번역한 것은 윤치호임이 분명함으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그의 ‘애국가’는 이 ‘무궁화노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교수가 "그의 ‘애국가’는 이 ‘무궁화노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한 ‘무궁화가’는 ‘애국가Patriotic Hymn’이며, ‘찬미가’ 수록 제10장이며, 또한 ‘애국가Patriotic Hymn’ No[1]이기도 하다. 제10장의 ‘No[1]’이란 표기 의미는 제14장을 같은 ‘애국가Patriotic Hymn’ 두 번째, 즉 ‘No[2]’로 변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교수가 단 각주8의 논리대로 하면 제14장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그의 ‘애국가’는 이 제14장 ‘애국가Patriotic Hymn No[2]’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같은 곡조에, 같은 곡명을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교수는 스스로가 인정을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안창호가 끼어들 여지는 없게 된다. 3개월 전이란 절대 시점상으로나 ‘No[1]’이란 변별의 면밀함에서 윤치호 작이 아닐 수가 없게 된다. 신교수가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감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5 쪽에 수록된 ‘제14장’(현 애국가)의 존재를 왜 숨겼을까? 학술원 회원이란 권위로 자신의 가설(억지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강연료(원고료)를 받기 위해서? 하여튼 어떤 이유에서건 불리한 사안을 숨긴 것은 매우 음흉한 짓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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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 <BR>"전통과의 충돌"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무세중은 한국의 전위예술가로,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 광산 김씨를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세중 선생의 첫 출판 '무세중과 전위예술'에 담긴 '전위예술'을 연재하기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편집자 주) 어느 젊은 날 여름,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잠결에선가 끄적대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종이 위에 쓴것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렇게 자고 먹고 싸고 살다가 언제 어디서 내가 왜 자고 먹고 사는지 모른채 살고 먹고 싸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치 살고 있는 것이 죽기위한 연습같이 느껴져 몸서리 친적이있다. 나라는 고기덩어리 몸둥아리는 그저 편안한것만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채울것 다 채우고나서 가라 앉으려들고, 마음일랑 속절없이 내팽개쳐 놓을량이면 한없이 달아나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개한 곳으로 날아가 까불어대고....... 생겨나길 내 의지대로가 아니어서 인지 운명, 팔자에 몸을 실어 사랑에 속고 돈에우는 가련한 인생에 목을 매고 자폭 자살하는 삶을 살거냐, 어쩌다 지은 德이 있어 있을것 없을것 다 차려놓고 홍이야 청이야 세월가는 줄 모르고 제속을 파먹어가니 제껍데기에 파묻혀 스스로 숨이 막혀 떠나는거냐. 내가 태어난건 내 뜻대로가 아니드라도 돌아가는 길의 선택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는 길을 道, 그것을 엮고 묶고 펼치고 행하는 것을 劇이라하여 道劇이라고 칭하고 삶을 깨 고 삶을 깨닫고 삶을 깨우치는 분골쇄신의 道劇작업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意識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62년 연극아카데미(드라마센터)에 들어간 이후 1977년 내 개인 창작발표회를 갖기까지 15년간은 자기 발견을 위한 民族本質追求로서의 民俗劇研究와 民藝復興을 제창하여 民衆精神을 모색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傳統을 克服하기 위하여서도 '傳統과의 衝突'를 시도하였고, 새로운 進步 的自我와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再創造라는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에서 나는 자연 서구 '空間과의 衝突'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밤'이라는 어둡고 차고 잔인한 이중인격적인 白人文明社會에서 충격을 받고 그들 幕 위의 際媒와 횡포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돌아와 反이데올로기 · 反테크놀로지 · 反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살풀이'(통·막·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하였고 超現實主義 그림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의 내면 세력으로 유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얼빛(눈빛, 얼굴빛, 몸빛 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등 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새로운 몸짓(손짓, 발짓 등 精氣를 몸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움직임)들을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의 道劇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이 움추려드는 자기의 벽을 깨고, 항상 生存하는 까닭을 깨닫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道劇思想이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 될때는 마치 人道 의 회복에 도극사상의 근본이 있듯이 새로운 민족의 빛, 새로운 민족의 소리, 새로운 민족의 짓을 깨우쳐 나오게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統一과 民主에 이바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테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以小事大 즉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룰때 우리 씨름의 원칙처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가 스스로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이 外勢에 침을 놓고 맥을 끊는(Hit and Run) 충격요법으로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야기로 뒤집어 씌워 눈물을 안고 쓸어지는 리얼리즘이나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번갯불처럼 氣와 氣가 교류되고 以心傳心으로 통하고 그리고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퍼포 밍 아트(Performing Art)의 퍼포먼스(공연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음), 무엇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이야기 없는 상황전개에서 느껴지는 암시와 이해되는 상징. 또한 즉흥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순간적인 눈빛, 몸짓, 목소리의 교합 그리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서 생을 풍요롭게 자극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이후의 창작활동은 내가 봐도 왕성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8년 간의 독일 체류기 간동안 직·간접으로 의식해온 합리주의 사고와 나의 다혈질 정열이 묘하게 어울려 창작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또 정치사회 상황인식에 철저하게 가졌던 나는 내 작품들을 고통, 잔혹의 상황극작품으로 이끌게 된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 쉰셋. 나이 먹으니 헛배도 나오는 몸둥아리로만 추나. 다만 몸을 빌릴뿐인데 머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내 道劇의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다. 내 모든 바램은 이 나라를 수호하시며 나를 지켜주는 단군 산신령 할아버님과 바다를 지키시는 용신령님의 끝없는 배려 하에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1988년 12월 무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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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선의 "한글 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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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족음악원 이사장 이광수, "국악계가 상생(相生)의 길로 나아가야"사물놀이 창시자, 비나리 명인 이광수 선생이 운영하고 있는 민족음악원이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이한다. 사물놀이는 1978년 농악기 치배의 핵심 악기인 꾕가리, 장구, 북, 징을 가지고 농악가락을 정리해서 발표하여 새롭게 탄생한 농악 장르이다. 열광적 농악 연주의 대명사 '사물놀이'는 가락에 집중하고, 농악 가락을 서서 연주하던 것을 수정하여 앉은 형태로 만들었다. 최근 '2024사물놀이 겨울캠프 1기'를 마치고 다음 갬프를 준비하고 있다. 전국에서 이광수 선생 수업을 받기 위해 국악인들이 예산을 방문하고 있다. Q.이사장님 지난 1년 동안 (사)민족음악원 어떻게 전승 활동을 하셨는지요. 회장님 사적인 일도 알려주세요. A. 안녕하십니까? (사)민족음악원 이사장 이광수입니다. 먼저 물심양면으로 대한민국 국악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국악신문사 기미양 발행인과 직원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새해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해(癸卯年)의 전승 활동에 대해 답변드리자면, 기나긴 ‘코로나19(COVID-19)’의 터널이 지나가고 드디어 여름, 겨울로 이어지는 ‘사물놀이 계절 캠프’와 매달 마지막 주에 진행되는 ‘사물놀이 월말캠프’ 등 일상적인 전승 활동이 재개(再開)되었던 한해였습니다. 그리고 올해(甲辰年)로 24회째를 맞이하게 되는 ‘예산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도 비대면 영상심사에서 대면대회로 전환되어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사물놀이 경연대회는 각축(角逐)을 벌이는 경연의 장이기도 하지만, 전승 현황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전승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전 지구적 재난을 겪고, 다시 시작된 사물놀이 캠프와 경연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우려되는 사항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열정적인 참여와 향상된 경연 수준이 확인되는, 가슴 뿌듯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고희(古稀)를 넘어선 나이에 날로 발전하는 후학(後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앞으로 인생의 지향(志向)으로 삼고 살아갈 계획입니다. Q. 단체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A. (사)민족음악원은 저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1999년에 설립한 단체입니다. 돌이켜보면 사물놀이를 세상에 내놓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수많은 공연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국악을 세상에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국빈(國賓)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만큼 우리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K-POP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고, 국가 위상을 드높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여정 속에 서서히 자리 잡게 된 생각은, 내 고향 예산에 뭔가 공헌할 방법과 후학 양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산군과 예산 지역 인사들이 저의 뜻을 헤아리고 협조해 주셨습니다. 현재 민족음악원은 설립 25주년을 맞이하고 있고, 공연 활동과 전승 활동, 그리고 대한민국 전통예술 전반에 관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단원이 30년 이상의 전승활동 경력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지난 해 얻은 성과는 A.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연 활동과 교육 활동의 중단을 초래했던 ‘코로나19’가 지나가고, 서서히 일상적인 활동이 재개되었습니다. 일단은 3년 정도의 휴지기(休止期)를 지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그 자체로 반가운 일이었고, 원활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내적 정비와 점검, 그리고 진행을 해왔던 지난해였습니다. 그간 적잖은 변화가 있었더군요.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 예술 활동을 포기하는 예술가도 있었고, 지속적이었던 교육의 대상이 새로운 인원으로 교체되기도 하고, 신생팀들이 등장해서 새로운 예술의 장을 열어가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변화와 재난이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합리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전통예술의 맥을 이어가는 데에 주력하겠습니다. Q.새해 역점사업은 A. (사)민족음악원은 협력 기관인 ‘충남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과 손잡고 ‘비나리 자격증’과 ‘사물놀이 자격증’을 발급하려 합니다. 체계적인 예술 교육과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물놀이를 올곧게 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해, 일정 시간의 자격검정 연수 과정을 수료하면 응시 자격이 부여되고, 자격검정 시험을 통해 공신력 있는 자격증을 발급할 계획입니다. 이것은 ‘사물놀이’를 만들고 세상에 내놓은 당사자인, 제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자격증 발급기관 인증은 끝난 상태이고, 자격검정 연수 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일상적인 공연 활동, 교육사업, 그리고 사물놀이 경연대회를 더욱 내실 있게 진행하는 것이 변함없는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 A. 종종 안팎으로 소란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대부분은 공적(公的) 태도를 가지느냐, 사적(私的) 태도를 가지느냐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즉, 공적 이익에 힘써야 할 위치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술 활동은 기본적으로 이타적(利他的) 행위라 생각되고, 문화는 한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기적 행위와 그릇된 소유욕은 문화예술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입니다.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모두가 상생(相生)의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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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9)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한강의 끝자락 조강포에서 터울림을 한 것이 4년 전이다. 주지하듯이 조강포는 마금포, 강령포와 더불어 한강 하류의 3대 포구였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염하(鹽河)가 만나 한길을 이루고 서해로 접어드는 물길이다. 전라 충청의 모든 물류가 한양으로 나들던 길목이요 대중국 교류의 대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쉬었다가 한물을 올라가면 서울 마포다. 지금은 철책으로 막아버려 북쪽 땅끝이 되어버린 곳이다. 2018년 당시 나는 이곳을 중심으로 풍물활동을 하던 노나메기팀과 합류하여 조강포 나루표지석 앞에서 신년 마당밟이를 하였다. 땅을 울리니 터울림이요 바람을 더불어 울리니 공명(共鳴)이었다. 아시아문화연구원 김용국 원장과 만나 내가 제안을 하였고, 노나메기 대표가 응대하여 이루어진 쾌거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조강포를 울렸던 쇠북소리는 북녘땅 어디까지 울려 퍼졌을까. 지난 2003년 장두석, 박병천, 박사규(기천 문주)선생님을 따라 백두산 정상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천제를 모셨던 기억이 새롭다. 땅이란 무엇일까. 국토란 무엇일까. 조강포에서 바라보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이 모두 북한이다. 우리의 울림이 얼어붙은 한강을 그윽하게 울려 평안도로 황해도로 울려 퍼졌을까. 분단 이후 최초로 울린 조강포의 터밟이, 울림(共鳴)이란 무엇인가 지난해 말 (사)나라풍물굿의 요청으로 특강을 하였다. 대주제는 '전환기의 풍물굿: 풍물굿이 변화하는 이 시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해 갈 것인가'였고, 내 강의 주제는 '울림이란 무엇인가-대동의 공명론'이었다. 질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리토르넬로'를 소개하며 우리 농악의 '울림', 그 정체에 대해 설명한 강의였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의 대동(大同)이 집단주의나 전체주의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하고많은 다른 표현들 놔두고 왜 농악을 '울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통상 서양에서는 '새가 노래한다'고 하고, 우리는 '새가 운다'라고 하는데, '운다'라는 표현이 '울음을 운다'의 뜻일까? 이론이야 많이 있겠지만 내가 주장해 온 결론을 말한다면, 더불어 울리는 일 곧 공명(共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맞울림과 더불어 울림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여러 번 소개했으므로 구체적인 리뷰는 생략한다. 내 강의는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 농악의 기원, 특히 '울림'이란 공명의 본질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땔나무꾼 나를 초청한 (사)나라풍물굿은 2021년 나라터밟이 행사를 주도하고, 만북울림이라는 이름으로 광화문 등 나라터 울림을 주도했던 그룹이다. 지난해 이들은 한강, 낙동강, 섬진강, 금강, 영산강 등 5개 강의 발원지와 하구를 찾아 샘굿이라는 이름으로 상생의 울림을 도모하기도 했다. 농악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 시선이자 일종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나는 이들을 일러 천만 농악꾼(풍물꾼)이라고 표현한다. 본래 마을굿에서 연원한 농악을 염두에 둔다면 천만 아니라 이천만 삼천만 동호인을 보유한 집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다. 이들이 행하는 활동과 운동이 사실은 '농악'의 본질을 연행해 온 것이고, 곧 공명의 울림을 실천해왔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지면상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농악(農樂)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만 붙여두기로 한다. 농악(農樂)이란 이름에 대하여 농악(農樂)이란 이름이 일제강점기 우리 풍물을 농사(農事)에 제한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들 한다. 농악의 바이블이라고 하는 정병호의 '농악'에서도 그렇게 주장했고, 여타 전문 연구자들도 그렇게 주장해왔다. 그래서 대안으로 사용한 이름이 '풍물'이다. 과연 그러한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풍물을 축소하여 농악이란 이름으로 호명한 것이 아니라, 농악을 오히려 축소하여 풍물이란 이름으로 호명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물론 '풍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온 저간의 역사와 활동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농악이란 이름 혹은 울림이라는 정체를 올바로 지적해두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정초의 마당밟이와 지신밟기에 포섭된 벽사(闢邪)적 기능뿐 아니라 대지와 천상의 신을 울리는 신명의 기능을 염두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남도 문화재위원 김희태가 오랫동안 이를 주장해왔다. 나는 그가 발굴한 여러 자료를 통해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뿐만 아니라 그 맥락에 대해 더욱 견실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농악이란 용어가 사용된 내력을 몇 가지만 살펴본다. 장흥사람 안유신(安由愼, 1580~1657)이 지은 '유두관농악(流頭觀農樂)'은 보성에서 농악을 보고 지은 시다. 16세기에 농악이란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890년대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농악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충청도 서천 유생 최덕기(崔德基, 1874~1929)가 쓴 향촌일기 <갑오기사(甲午記事)>에도 농악이 나온다. 김제출신 근대학자 석정 이정직(1841~1910)의 저서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에는 시 제목을 아예 '농악'으로 뽑았다. 1914년까지 살았던 보성선비 이교문(李敎文, 1846~1914)의 <일봉유고(日峯遺稿)>에도 '농악'이란 제목의 7언 율시가 있다. 동학과 관련한 석남역사(石南歷史) 및 후손들의 증언집에도 농악이란 이름이 빈출한다. 여기에 마당밟이 지신밟기를 포함한 마을굿(당산굿), 두레풍장, 나례희, 군사 훈련, 유랑 연희, 무격의례 혹은 탈놀이 등 수많은 장르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 오늘날의 농악이다. 관련 내용은 차차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강상헌은 지난해 농민신문 칼럼에서 갑골문 농(農)자를 천문(天文)에 빗대어 설명한 바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농사는 살림의 다른 이름이다. 죽임의 반대말이 살림이다. 글농사, 밥농사 등 한 해 농사에 비유하는 수많은 언설들이 이를 말해준다. 농사와 농악을 농업만으로 이해했던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터울림 혹은 땅울림이라는 공명의 방식을 제대로 인식하는 첩경이다. 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지난해 칼럼에서 해남의 소농지원 사업을 소개한 바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왕에 해왔던 지력 약탈농업, 소농 수탈농업 등 땅의 기운을 빼앗고 마을의 정기를 빼앗고 종국에는 지역이 소멸해가는 기왕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농악이란 이름을 너무 농업에 의존한 호명으로 격하시켜온 것 아닌가? 농사의 효용만을 따져, 땅을 수탈하는 농업, 소농과 가족농을 죽이는 농업구조로 재편해온 것처럼 말이다. 어디 농업만 그러하겠는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이 다르지 않다. 예컨대 농악이 가진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맥락을 살피지 못한 채 어떤 주된 기능만을 내세우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와 공명의 본질에 대해 극구 이야기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악의 출처가 그렇고 생성의 역사가 그러하며 재구성된 맥락이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꿈꾸어 본다. 혹여 이번 대통령에 당선된 누군가 취임식 할 때, 덩더꿍 꽹과리 들고 덩실덩실 춤추고 나올 수는 없을까?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가 취임할 때, 저들 고유의 춤을 추며 나왔듯이, 자신을 괴롭혔던 교도관과 그의 친구들을 귀빈석에 모셔 자랑스럽게 소개했듯이, 그런 농악 한마당 취임식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편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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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선사인(先史人) 주거지로 추정되는 ‘바위그늘 유적’ 발견향토사연구원 이만유 낙동강 상류 금천(錦川)이 흐르는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일대에는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필자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남아 있다. 그중 2020년 4월 2일 ‘청동기시대 상징 고인돌, 성혈(性穴) 또 발견’이란 제목과 ‘북두칠성 별자리 성혈, 남근석(男根石)으로 추정되는 돌도 발견’이란 부제를 달아 언론에 보도한 바가 있는데 이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행정당국에 보존 대책을 건의한바 관련 부서에서 현지 확인하고 보존 가치와 청동기 유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난 1월 13일 고고학 전문가이신 세종문화재연구소 유병록 박사를 모셔서 현지 조사를 할 때 필자도 동행하였다. 이날 왕태리 청동기 유적 현지를 보고 난 뒤, 유병록 박사와 여운황 문경시 문화예술과 문화재관리팀장과 함께 금천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기존 청동기 유적을 탐방하기로 하여 필자가 현지로 안내하였다. ‘연소리 대형 성혈석’ ‘ 녹문리 성혈석 군집지’ ‘현리 성혈석 너럭바위’ ‘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천변 현리 야산 남쪽에 있는 대형 바위를 살펴보든 유병록 박사께서 "암음(岩蔭-바위그늘)이다”하는 외침이 있었다. 깜짝 놀라 셋이 모여 움푹 들어간 바위 밑과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도자기편(분청사기, 백자)과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었다. 선사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나 지형이 덮이고 묻혀있어 그때와는 지금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으므로 쉽사리 ‘암음’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과연 이곳 대형 바위와 그 주변이 선사시대인들의 주거지인‘바위그늘’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발굴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바위그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바위그늘유적’은 동굴유적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존재하는 대형 바위 아래 그늘을 이용한 선사인들의 주거지다. 자연 절벽에 그늘이 진 곳, 풍화작용에 의해 오목하게 형성된 곳, 하천이나 바다의 절벽에 파식작용에 의하여 움푹 파인 곳으로 햇빛이 잘 들어오고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남쪽으로 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늘 내부와 그늘의 트인 앞에 선사인들이 사용한 유물이나 생존을 위해 취했던 동·식물 등을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위그늘유적’이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곳은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부산 금곡동 율리, 경북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유적 등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적이 외국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주로 발견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삼국,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만약 문경에서 ‘바위그늘유적’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얼마 전 중부내륙고속철도 문경읍 마원리 문경역 주변 공사장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소수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리 문경지역의 역사가 청동기시대에 머물다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확실하고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분포된 금천 일대는 지금으로부터 삼천여 년 전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의 집단 거주지다’라고 말해 왔는데 이곳의 대형 바위가 발굴 과정을 거쳐 ‘바위그늘’로 최종 확정되는 결과가 나온다면 필자의 추정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하루빨리 당국에서 ‘현리 바위그늘 선사유적’ 발굴 계획을 수립, 추진하여 묻혀있는 역사가 햇빛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아울러 필자가 이제까지 주장해 온 문경시 전체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과 성혈석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훼손을 방지하는 보존 대책도 함께 세워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