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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편집위원 구성
국악신문 특집부
신문사 기자들의 기본 업무는 기획, 취재, 편집, 고정 코너 집필 등이다. 그리고 이를 지원 또는 자문하는 팀이 고문이나 각종 위원회이다. 이는 상임이 대부분이나 비상임일 경우도 있다.
「국악신문」의 고문과 편집(자문)위원은 비상임으로 운영되었다. 이 기구의 존치는 「국악신문」의 운영상을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즉, 광고 수주, 특집기획안(案) 제공, 취재 협조, 고정란(연재 코너) 집필진 확보, 교정 및 교열 지원 등에 직 간접적인 관여를 하기 때문이다. 이의 구성은 전문성을 전제로 하지만 대대는 사주의 인적 네트워크에 의지한 것이다.
「국악신문」의 고문과 편집자문위원단 구성은 창간부터 있었겠지만 명시적으로 지면에 표기한 것은 제37호(1996년 4월 2일자)부터이다. 이 때부터 제호 밑에 발행 일자와 호수를 기입하고 그 밑에 판권란을 두는 편집 형태가 이뤄졌다. 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發行編輯人 金浩奎 인쇄인 김영재 사진 정범태 고문 고정패널 편집위원 이명준 오형록 채치성 우실하 변영호 그림 삽화 남소유”
이상과 같이 고문과 편집위원과 삽화 담당을 표시하였다.
이 판권란은 다음 호인 38호에서는 우실하가 편집국장으로, 직위가 바뀌게 된다. 이로부터 운연과 편집 체제면에서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다. 창간 후 2년만이다.
고문 정범태에 대해서는 3회, 편집국장 우실하에 대해서는 1회에 걸쳐 이미 언급하였다. 이번호에는 가장 오래 동안 판권란에 표기 된 채치성 위원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이들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부는 전문성을 활용하기 위해 위촉한 이들이 있으나 대개는 발행인 김호규의 주변 인물들로 주요 취재 대상이거나 고정 필자들이다.
전문성 활용을 위해 위촉한 이는 사진가 정범태 고문과 삽화를 담당한 남소유 화백, 그리고 편집국장 우실하이다. 이 중 남소유 화백은 소위 ‘인사동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유명 화가 중 한 분이다. 특히 현장 누드 크로키로 명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명준 위원은 지난 해 김호규 사장의 1주기 추모행사 ‘씻김’에 참여하기도 한 오랜 지우이다. 변영호 역시 지우로 제42호부터 잠시 편집인 직위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형록은 이력이나 활동상이 미상이다. 채치성은 제98호(2000년 10월 25일자) 까지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채치성(蔡致誠, 1953년생)은 당시 KBS라디오 국악 담당 프로듀서로 국악계의 위치에서 「국악신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본보 제43호 제1라디오 ‘흥겨운 한마당 소개’에 따르면 1980년 서울대 음대 졸업 후 서울 미림중학교 음악교사로 활동하다.
1981년 KBS 공채 9기로 입사, 제1FM ‘흥겨운 한마당’ 담당 PD로 재직했다. 그리고 1997년 사직하고 프리랜서 PD와 MC로 활동했다. 비록 50분 정도의 주간 프로그램이지만 KBS의 전국 대상으로 권위와 인기를 갖고 있었다.
이후 국악FM 방송 개국으로 편성팀장, 본부장, 그리고 2013년 국악방송 사장 취임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악방송 사장 취임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국악의 대중화·세계화’라는 화두에 기여하는 계기였다.
단순히 ‘관 주도’로만 전통한류의 세계화를 밀고 가는 것에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한 자원, 새로운 생각들을 더해 전통문화 콘텐츠로 승부를 걸 수도 있는 계기였다. 취임을 즈음한 그의 발언에서 이에 대한 의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자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꽃분네야’ 등 국악가요 작곡과 음반 출시, 지휘자, 대한민국 작곡가상, 제15회 대한민국국악제 연출, 제37회 전국민속예술제 총연출 등의 활동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본보는 ‘흥겨운 한마당’ 소개 기사, ‘채치성 편성팀장을 찾아서’ 같은 탐방 기사를 통해 권위를 확대시켰다. 현재는 유튜부 채널 ‘채치성의 국악가요TV’(GugakgayoTV)를 운영하고 있다. 채치성 편집위원은 국악신문 운영에 영향력을 준 대표적인 국악이론가이며 언론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