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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된 날,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을 보다광복절날 오후 4시 대일항쟁기 강제징용을 당하여 사할린 섬으로 끌려가서 돌아오지 못한 동포들의 생활상을 기록한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전이 열리는 인사동 갤러리 인덱스를 찾아갔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위해 1938년부터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약 6만 명의 한인들을 사할린으로 강제동원으로 보내 탄광촌과 벌목장에서 강제노역시켰다. 일본이 패망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러시아의 강제노역에 시달렸으니,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고향이 그리워, 두고 온 자식이 보고 싶어 밤마다 저 언덕에 올라 바다를 향해 아무개야~ 아무개야~ 하고 통곡을 하니 그 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온 동네에 퍼져 이불 안에서 다들 울었다우.” 라고 증언한 코르사코프 바자르 할머니의 증언이 떠올라서 가슴이 미어졌다. 이젠 대부분 강제동원을 당한 사할린 동포 1세가 세상을 떠나, 많은 역사적 사실이 묻혀가는 안타까운 실정에 있다. 뒤늦게 알려진 사할린 한인 학살사건도 역시 그 실체조차 제대로 기록되지 못하지 않았던가? 전시를 보기 위해 힘겹게 전시장을 올라가니, 이미 ‘작가와의 만남’은 진행되고 있었다. 막 들어서니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주)국악신문 기미양 대표가 축사를 하고, 경상도에서 온 지역 소리꾼이 부를 사할린아리랑을 소개하고 있었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한인 중 68퍼센트가 경상도 사람이라서 구미와 대구에서 참석했다는 것이다.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이었다. 사할린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내가 여기 왜 왔나. 왜 왔나 우리 님 따라서 내 여기 왔지 사할린이 좋다고 내 여기 왔나. 일본놈들 무서워 따라왔지 따뜻한 조선을 놔두고,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 왔던가 우리집 영감님은 왜 가셨나 나만 혼자두고 어데를 가셨나” 전시장에는 소련 시절부터 한민족 풍습을 지켜 온 사할린 동포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예식 기자를 비롯하여 전시를 준비한 ‘Kin지구촌동포연대’ 최상구 대표와 사진가 김지연씨, 김상열 ‘한국이민사박물관’장, 김연갑 ‘아리랑연합회 이사장, ‘사할린동포후원회장'인 기미양 (주) 국악신문 대표이사, 경산아리랑보존회 배경숙 회장과 홍희연, 구미의병아리랑보존회 임규익 회장과 배부근, 새롬출판 송남숙 대표가 자리를 채워주었다. 특히나 인천, 서천, 안산, 파주에 영주귀국한 사할린동포들이 함께 해주었다. 이규상 ‘눈빛출판사’대표, 사진가 김문호, 안해룡, 정영신, 곽명우씨 등 70여 명이 전시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시작가 이예식씨는 1949년 사할린 마카롭시에서 출생하여, 1998년부터 지금까지 ‘새고려신문’ 사진 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사할린1세였던 부친의 애환을 바라보며 성장한 2세로서 꾸준히 사할린동포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이예식 작가는 인사말에서 "두 시간이면 오는 거리를 먼 길로 우회하여 왔다”는 말로 한국과 러시아 교류의 어려운 현실을 표현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사진작가 김지연씨는 "시대를 증언하는 이미지는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다." 며 "광복절을 맞았지반 사할린 동포는 진정 해방이 되었는지 묻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사할린의 그 날을 기억하는 전시는 오는 21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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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크, '전 세계 한인 재외동포 이주사 사이트 구축!사이버외교사절단 반크가 세계 각지 한인 동포 이주역사를 알리는 '재외동포 뿌리 교육 사이트'를 구축했다.반크는 "많은 재외동포가 전 세계 널리 퍼져 있지만 여전히 많은 국민이 재외동포의 존재와 역할의 중요성을 못 느끼고 있고 이를 알릴 콘텐츠가 부족하다"며 "해외 한인 이주역사를 제대로 알리기 위한 뿌리 교육 사이트를 구축했다"고 밝혔다. 반크에서 구축한 사이트는 재외동포의 첫 이주의 시작과 그들이 겪은 역사와 현재를 기억하기 위한 공간임을 소개하고 있다.'정의' 섹션에는 재외동포, 재외국민, 외국국적동포 등 해외 한인 동포들을 부르는 명칭에 대한 정의를 모았다.'이주 역사의 시작과 과정' 섹션에는 처음 국경을 넘어 생활한 한인이 기록된 시점인 1860년대부터 현재까지 과정을 소개한다. '각주'에는 대륙별로, 국가별 이주 역사를, '참고문헌'에서는 공증된 자료들을 담았다. 5개 대륙에 한인이 이주한 대표 나라들을 각각 정리했고 그 나라에서 한인 관련 역사적 사건, 한인 단체, 독립운동가, 동포이야기, 주요 한인 동포 거주지, 유명인사로 나눠서 구축했다.반크는 "이 사이트를 전세계 한인동포의 정체성 교육과 뿌리교육에 활용할수 있도록 홍보할 예정"이라며 "해외 동포들의 참여를 통해 더욱 발전시켜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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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리 창극인들이나 고수 할 것 없이 제일 호사스러운 때가 언젤꼬? 그야 물론 원각사 시절이겠지요. 이동백이 묻고 한성준이 답하는 장면이다. 이동백이 말을 잇는다. 나도 그러이. 이전까지는 천시를 받아온 우리였지만, 고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대우를 받았고, 그때는 소리하고 춤도 출만 하였지. 순종을 한 대청에 모시고 놀기까지 했으니까....한성준이 받는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군요.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잘못하여 바로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을 때, 큰 벌이나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했는데, 순종께서 도리어 기쁘게 웃으시지 않았습니까? 그 당시 형님은 순종의 귀여움을 상당히 받았을 거요. 원각사에서 형님이 소리를 할 때면 순종께서 전화통 수화기를 귀에 대시고 듣기까지 하셨으니까요. 이동백이 다시 받는다. 그랬었지. 그때 창극조로 <춘향전>을 했지만, 그 규모가 지금보다는 훨씬 컸고, 또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좀 많지 않았소. 그러니 무대에 오르는 사람도 절로 흥이 날 수밖에 없었지."(한성준,1941년) 1941년 '춘추' 3월호에 실린 이동백과 한성준의 대담이다. 한인호가 두꺼비 재주를 넘다가 순종의 무릎에 떨어졌다는 얘기를 들으면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가? 연극 <이(爾)>에서 출발한 영화 <왕의 남자>, 장생과 공길이 연산군 앞에서 극을 펼치는 장면? 이벽화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패왕별희>에서 청데이(장국영 분)와 단샬로(장풍의 분)가 경극을 펼치는 장면? 아마도 연극 <이(爾)>의 지은이 김태웅씨는 <연산군일기>는 물론 창극의 일면들을 공부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위 대담에서 '창극조'라고 말하는 것이 이른바 판소리 창극이다. 창극은 언제 누가 어디서 시작한 것일까? 최초의 극장 원각사(圓覺社)와 창극조 판소리 <어사와 초동>이라는 초기 창극이 있다. 1909년 8월 이응일의 투자로 완공한 광주 북문 앞의 극장에서 9월 7일부터 공연되었다. 월북 명인 박동실의 광주 양명사 회고에 의하면 창극 <춘향전> 공연에서 가장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레퍼토리였던 것 같다. 백두산의 연구에 의하면 이는 1908년 봄 원각사에서 공연하였던 창극 <춘향가>를 모체로 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각사(圓覺社)는 광화문 새문안교회 부근 야주현(夜珠峴, 야조개)에 세워졌던 개화기의 사설극장이다. 1902년 협률사(協律社)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이 극장은 1906년 문을 닫는다. 1908년 7월 박정동, 김상천, 이인직 등이 원각사라는 극장으로 리모델링한다. 이때 소속된 명기명창들이 백칠십 여명(박황의 증언)이었다. 판소리, 민속무용 등을 공연하다가 판소리를 분창하는 형태인 이른바 창극이 시도된다. 1909년 5월에는 전속 창부(唱夫), 공인(工人)들이 일본연극(아마도 가부끼일 것이다)을 널리 알리는 연습을 했다. 이보다 앞선 1908년 11월에는 이인직의 <은세계>가 신연극이라는 이름으로 공연된다. 이외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화용도> 등이 공연된다. 신연극과 구연극, 판소리와 창극을 버무리는 그야말로 고금합작이 이루어지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창극을 만든 사람, 무안의 강용환 <춘향가>를 분창 형태의 '소리극'으로 꾸민 <어사와 초동>은 누가 구상한 것일까? 이 초기창극에 대한 관심은 100여년 이상 지속되어 왔다. 협률사와 포장극단 시대를 거쳐 국립창극단은 물론 진도 다시래기 예능보유자 강준섭이 즐겨하는 레퍼토리라는 점이 이를 말해준다. 박황은 <창극사 연구>에서 강용환을 구체적으로 거론한다. "강용환은 1900년에 상경하여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광무대협률사에 참가하고 그가 전공한 옥중가 한 바탕으로 장안에 이름을 떨쳤다. 그 당시 서울에는 지금의 청계천 2가에 수표교가 있었고 그 다리 건너에 청나라 사람들의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에는 '창극관'이 있었으며 이 창극관에서 날마다 '창우가 창극(경극을 말함)을 연희하였다. 강용환은 틈만 있으면 이 청국인의 '창극관'에 살다시피 하였는데 청국의 창희를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를 창극으로 발전시켰다." 원각사 시절 강용환이 중국의 경극을 모방하여 판소리 춘향가와 심청가를 창극화하였고 무대 예술로서 첫발을 내딛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비교적 명료하게 밝힌 연구는 최근 출간된 '창극의 전통과 새로운 방향'(지우출판, 2021)에 실린 백두산 교수의 <무안출신 명창 강용환의 생애와 예술 활동 기록의 검토>다. 나도 토론을 맡아 몇 마디 보태긴 했지만 연구의 탁월함을 응원한 정도니 언급할 가치는 없다. 강용환의 사망시기와 관련들을 조목조목 규명한 대목이 눈에 띤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다룰 수는 없지만 요약하자면 호적이나 족보 등의 자료에 나타나는 강용환 사망 시기 이후의 창극 활동들을 규명했다는 점이다. 즉 1902년 사망설 이후 활동들이 광범위하게 포착되기 때문에 1903년에서 1907년까지의 서울 공연활동이나 1908년 원각사의 <춘향전>, <은세계>, <심청전> 등의 공연에서의 강용환 활동을 증명한 것이다. 이때부터 구성작가-연출가 면모의 자생적 창극개량 과정이 시도되었다. 동·서편제는 물론 고제 판소리 중에서 인기 대목을 취사선택하고 재담과 잡가 등을 섞어 희극적 장면을 고안하며 '연출'의 역할에 대한 인식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김창환이나 이동백, 이인직 등에 비해 강용환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번에 학술적으로 규명된 것은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이사장 서장식)가 18년여 동안 집중적으로 추적한 성과이기도 하다. 창극은 명실상부한 근대극이다. 어찌 보면 자생 근대극의 시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시기 모든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창극이 이제는 뮤지컬 오페라, 악극, 소리극 등에 비해 열세를 면치 못한다. 시대의 요청에 부응하라는 뜻일까? 무안의 강용환을 매개삼아 창극이 발아하고 발전했듯이 이제 또 다른 관점의 음악극이 시도되어야 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그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법고창신의 지혜로 고금합작을 꾀하는 예술가들을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무안출신 강용환 국악명가 일명 강윤학 3대 국악명가라고 한다. 강윤학은 친척 강백천과 교우하며 남원 운봉 박만순에게 소리를 배운다. 아들 강용환(강용안이라고도 함, 1866~1938)은 정정열, 이동백과 교유했다. 어전광대(왕 앞에서 판소리하는 이)다. 의친왕에게 장단을 가르쳤다. 우리나라 창극의 창시자로도 불린다. 강용환의 아들 강태홍(1891~1957)은 경주권번, 달성권번 등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강태홍류 가야금 산조를 창시했다. 부산지역 제자로 원옥화, 강남원, 박차경, 김춘지(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신명숙(부산시 무형문화재) 등이 있다. 강남중(1900~1972)은 숙부 강용환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오태석, 송만갑, 정정열 등을 사사했다. 일본에서 창극을 할 때 일본말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하여 고문을 당해 귀머거리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백범 김구에게 오현(悟峴)이라는 호를 받는 등 독립운동에도 관여했다. 이외에도 강준안, 강태종 등 명인이 있다. 아쉽게도 강용환 사진자료 등이 전무하다. 승달우리소리고법보존회에서 관련 창극 '명인의 봄'을 초연한 바 있다. 강윤학 집안의 3대 명인들을 모태로 출발 한 것이 무안 군립국악원이다. 현재는 3명의 상임단원과 6명의 비상임 단원뿐이지만 더 큰 활약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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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한인회총연합회, '세계 한인 모국 기여 사례' 모집세계한인회총연합회는 전 세계 한인회를 대상으로 '세계한인 모국 기여 사례'를 모집한다고 6월 15일 밝혔다. 이번 모국 기여 사례 모집은 세한총연이 오는 9월 21일 개최할 예정인 '세계한인 모국기여 현황 발표 세미나'에서 발표할 한인회의 공적을 찾기 위함이다. 모집 사례는 ▲독립과 건국 기여 ▲경제적 기여 ▲정치외교적 기여 ▲영사조력 기여 ▲사회문화적 기여 ▲기타 모국 위상을 높인 기여 등에 한인회가 함께하거나 관여한 활동이며, 복수 지원도 가능하다. 응모 방법은 오는 7월 14일까지 사례 신청서와 관련 자료를 세한총연 이메일(info@waka2021.org)로 제출하면 된다. 세한총연은 "'세계한인 모국기여 현황 발표 세미나'는 세계 한인회가 모국의 독립과 건국, 산업화 및 민주화 과정에서 기여한 공적과 공공외교 등 모국을 돕기 위한 각종 노력을 취합해 이를 널리 알림으로써 국민의 재외동포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고 우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재외동포정책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한편, 재외동포들에게는 자긍심과 공동체 의식을 고취하기 위함"이라고 밝혔다. '세계한인 모국 기여 현황 발표 세미나'와 사례 모집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세한총연 홈페이지(www.waka2021.org)를 참고하거나 전화(02-523-0336)로 문의하면 된다. [출처] 2023년 6월23일(음력 5월6일)새고려신문 (사할린 새고려신문) | 작성자 bplus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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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한미 동맹 70주년 기념' 조수미 콘서트11일에 로스앤젤레스로 넘어가 LA 문화원의 후원으로 월트디즈니 홀에서 공연한다. 총영사관 측은 "올해 한미 동맹 70주년과 한인의 미국 이민 120주년을 맞아 특별하게 조수미 콘서트를 열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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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 한인 삶과 역사 기록한 사진전, 이예식 작가지구촌동포연대는 일제 강점기 러시아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됐다가 돌아오지 못한 한인 1세대와 후손의 삶을 담은 사진전을 개최한다고 3일 밝혔다. '사할린,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주제로 오는 12일부터 21일까지 서울 종로구 갤러리 인텍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이예식(74) 사할린 새고려신문 사진기자가 찍은 작품으로 꾸며졌다. 부친 고향이 옥천인 한인 2세인 이 기자는 대학 졸업 후 구소련 매체들의 지역 통신원으로 활동하다가 1999년부터 새고려신문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고 있다. 부친이 탄광으로 강제 징용된 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한인 2세다. 2016∼2017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한인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을 담아 사진전을 열었고 사진집도 발간했다.지난해에는 사할린주기자협회 추천을 받아 사할린주가 사회공헌자에게 포상하는 기념배지를 받았다.이 기자는 "사할린 한인은 일제 강점기에 끌려와 패전 후 남겨졌고, 냉전 시대에는 귀향길이 막힌 채 힘들 삶을 살아오면서도 정체성을 지켜왔다"며 "이들의 삶을 역사로 남긴다는 사명감으로 힘닿는 데까지 기록하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전시에서는 구소련 시절에도 한민족 풍습을 지켜왔던 사할린 한인들의 생활상과 영주귀국 모습 등이 소개된다. 지구촌동포연대는 12일 개막일에는 작가와의 대화 시간도 마련되었는데. 사할린 태풍 경고로 한국 도착이 미루어져 15일 오후 4시로 연기가 되었다고 전한다. 지구촌동포연대 관계자는 "1990년 러시아와 수교를 맺기 전까지 귀향길이 막힌 채 힘든 삶을 살면서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온 한인들의 존재를 알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이산의 아픔을 소개하는 전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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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한국전쟁과 아리랑(下) <br>지구상 마지막 분단국가 코리아# "UN참전 군인들은 애환이 담긴 애조의 아리랑을 전쟁 참상의 현장에서 가슴에 담았다. 일부는 아름다운 한국처녀의 아리랑으로, 일부는 처참한 어린 고아의 아리랑으로, 또 어떤 군인은 승전가 아리랑으로 담았다. 이들에게 아리랑은 영원한 한국 참전 인식표(認識票)이다.” # "유엔군은 한국군 전우에게 아리랑을 배웠고, 나라마다 다른 군가 대신 아리랑으로 연대하였다. 아리랑이 행진가와 진혼곡으로도 연주되기도 하여 한국의 국가로 아는 군인들도 많았다.” # "참전 유엔 정보 담당 군인들은 오끼나와 기지에서 기초적인 생활어와 아리랑을 배웠다. 한국전 포로 식별을 위한 정보교육이었다. 포로 중 아리랑을 부르지 못하면 중공군이고, 아리랑을 잘 부르면 북한군으로 분류하는 것이다. 또한 전투 중 고립되었을 때 아리랑을 부르면 한국인들이 공포심이나 거부감을 갖지 않고 보호해 준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 "유명한 재즈 뮤지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들은 아리랑에 영감을 받아 귀국하여 째즈 ‘아디동 부르스’을 취입해 인기를 얻었다. 오스카 페티포드는 40년대와 50년대 초 미국 재즈계에서 베이스와 피아노 연주자로 유명하였다. 그는 1953년 초 일본 오끼나와 미군기지에 위문공연을 왔다 한국 위문공연을 하고 있는 미국 뮤직션들과 합류하여 귀국하기 위해 인천의 야전 부대에 머물게 되었다. 이때 야전 화장실에서 일을 볼 때 밖에 있던 한국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부는 노래를 듣었다. 일을 본 뒤 통역병에게 휘파람 연주에 대해 물었다. 이 때 ‘아-리-랑’을 ‘A-DEE-DONG’으로 듣게 된 것이다. 그가 취입한 SP음반에는 연습곡(take) 2곡까지 수록하여 처음 들었던 당시의 영감을 표현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읽을 수 있다.” # "지난 4월 24일 90세로 별세한 룩셈부르크 레미히 성당의 질베르 호펠스(Gilbert Hauffels)씨의 장례식에는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인구 20만의 나라에서 100명이 파병된 군인 중 19세의 청년으로 1952년 3월 참전하였다. 최후까지 휴전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하여 또한 철원평야를 확보하기 위해 격전을 벌인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전투에서 생존한 이다.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의 전투에서 고지 주인이 12번이나 바뀐 전투로 포탄 27만발로 ‘395 고지가 무너져 내려 마치 누워 있는 흰말’(白馬高地)로 보일 정도로 되었다는 최고, 최후의 전투였다. 그는 조카에게 남긴 유언장에 ‘아리랑을 들려 달라’는 유언에 따른 것이다. 아리랑은 룩셈부르크 한인회 박미희 회장이 불렀고, 반주는 참전 후 재직한 세관의 관현악단이 맡았다. 이 나라도 독일에 점령되었다가 미국 등의 우방국 참전으로 해방이 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의 한국전 참정 일기는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에 전시되어있다.” # "전우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영국 참전 용사 콜린 새커리(93)옹이 부산에서 열린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1950년 9월 19세의 청년으로 영국군 제30야전포병대 소속 포병으로 참전했다. 같은 소대 전우 4명을 잃고 327고지 전투에서 생환했다. 4명의 전우가 잠든 부산 UN공원에서의 기념식에 그들을 위해 아리랑을 부르겠다는 의사에 따른 것이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배로 부산에 도착했을 때 뜻은 모르지만 선율이 너무나 애잔하고 아름다워 금방 기억하였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한국전을 생각할 때마다 아리랑을 흥얼거렸다고 한다. 이제 혼자의 흥얼거림이 아닌 세계를 향해 평화를 기원하며, 전우의 죽음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부른 아리랑이다.” # "70년 전,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정전협정 서명식을 마친 후 유엔군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은 한국전쟁의 가장 극적인 순간에 빛을 발하는 노래이다. 지루하고 적군의 전략으로 오르내린 휴전 회담은 유엔군을 지치고 격분시켰다. 가장 길고도 이목을 끈 국제적인 정전 협정 조인식임에도 악수도 없고, 박수도 없고, 웃음기도 없는 조인식이었다. 그리고 동서 문을 통해 갈라졌다. 그런데 문을 나서는 순간 양측의 군악대가 연주한 곡이 아리랑이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한민족이며, 전쟁의 최후 종결 주도자도 남과 북은 한민족이라는 것을 적과 동지가 공감한 결과이다. 아리랑이 남북간의 만남에서 연주되는 이유이다. 이제 아리랑 연주는 종전의 순간일 것이다. 그때는 악수하고 박수치고 웃으며 맺는 조인식이며 부등켜 함께 합창하는 아리랑일 것이다. 그 아리랑을 염원한다.” 룩셈부르크 아리랑 *유언장에 '아리랑을 불러달라'고 할 정도로 아리랑을 좋아했던 호펠스 씨는 아리랑을 들으며 떠나셨다. 인구 2o만의 룩셈부르크가 6.25 전투에 100명을 파병했다니, 그동안 몰랐는데 놀랍고 감동스럽다. 여러 나라의 넘치는 도움을 받고 선진국으로 우뚝선 대한민국이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지키는데 결코 인색해선 안될 것이다. 호펠스씨의 명복을 기원한다 아리랑의 국제화가 이뤄진 게 6·25 전쟁부터다. 한민족의 국가보훈부에 따르면 미 7사단은 아리랑을 사단 공식 행진곡으로 채택하기도 했다. 1951년 위문공연 차 방한한 유명 재즈 가수 오스카 페티포드는 우연히 아리랑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이듬해 앨범을 발매해 인기를 모았다. ‘아디동 블루스’란 이름인데 아리랑을 아디동으로 오인한 것이다. 수많은 용사들이 종전 후에도 아리랑을 잊지 못했다. 지난 4월 24일 별세한 룩셈부르크의 질베르 호펠스씨는 "장례식 때 꼭 아리랑을 불러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6·25 당시 미 해병대 병장이던 이는 지난해 한국 정부로부터 ‘평화의 사도 메달’을 받으며 아리랑을 불렀다. 오늘 부산에서 열리는 ‘정전협정 70주년 기념식’에서 직접 아리랑을 부를 예정이다. 참전 용사 60여명이 참석한다. 70년 후 체제 경쟁에서 승리한 남한에서 울려퍼질 아리랑을 듣는 노병들의 감회가 남다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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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문화연구소,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세계민속축제 참가풀뿌리문화연구소(대표 강신구)가 한국 민속예술 단체들을 인솔해 지난 7월16일부터 7월 20일까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에서 열린 세계민속축제 참가했다. 이 행사에는 김포농악보존회, 서초구늘춤무용단, 송경숙무용단, 김기숙, 김경초 민요팀 등 총 24명의 예술팀과 총 30명의 공연단을 꾸려서 한국팀으로 참여했다. 세계 각국의 민속예술단이 참가해 경연을 벌이는 이 축제에는 올해 인도·스리랑카·필리핀·우즈베키스탄·그리스 등 16개국이 참가했다. 인도네시아 수라바야는 자카르타 동남쪽 650km 거리에 있는 도시로 인구 350만명이 거주하는 대도시다. 김포농악보존회(회장:장미화)는 농악과 잡색(악기 없이 흥으로 판을 휘어잡는 놀이꾼)문화, 태평무·진도북춤·흥춤 등을 선보였다. 개최 도시인 수라바야시는 참가국 중 유일하게 김포농악보존회에만 감사패를 수여했다. 김포농악보존회는 필리핀·말레이시아 등으로부터 축제에 참가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올해 연말 인도네시아 한인회 축제에도 초청받았다고 전한다. 강신구 대표는 "한국 참가단이 수라바야 한인회(회장 이경윤)와도 교류했으며, 현지에서 한국의 전통예술 가무악을 소개하고 지난 7월 23일 귀국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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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 광부·간호사 60주년 새겨보는 무대, '한국의 미'작곡가이자 음악 감독인 이병욱(72세) 서원대 명예교수는 내달 19일 독일 카스트로프-라우셀의 극장 유로파할레에서 파독 광부·간호사 60주년 기념 공연 ‘한국의 미(美)’를 펼친다고 2일 전했다. 1963년 12월 한국과 독일간 체결된 기술협정에 의해 많은 청년들이 독일로 집단이주가 시작되었다. 당시 치열한 경쟁을 통해 선발된 첫 출발이었다. 뒤이어 1966년 10월, 광부에 이어 간호사도 파견되어 1977년까지 1만 371명이 환자를 위해 헌신했다. 파독광부와 간호사의 파견이 어느새 60년이 지났다. 오는 19일(토) 오전 11시(현지시간) 독일 Castrop-Rauxel Europahalle에서 파독 광부· 간호사 60주년 기념 공연 ‘한국의 미(美)’가 펼쳐진다. 이번 공연은 제78주년 8.15 광복절 및 한·독 수교 140주년 기념을 겸한 행사로 작곡가 이병욱(서원대 명예교수) 이 이끄는 실내악단 ‘이병욱과 어울림’과 ‘어울사랑예술 단’이 주축을 이루는 공연이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 분들이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공연을 만들 것입니다.” 한·독 수교 140주년 기념을 겸한 공연은 그가 이끄는 실내악단 ‘이병욱과 어울림’과 ‘어울사랑예술단’이 주축을 이룬다. 이번 공연은 재독한인총연합회에서 그에게 ‘자랑스러운 재독한인동포여’(장순휘 시)라는 노래의 작곡을 의뢰한 것이 계기가 됐다. 한인 총연에서 재작년에 저에게 편지를 보내와 간곡히 요청했지요. 작곡료는 없다고 했지만 기꺼이 응했다고 한다. "그분들이 이국에서 흘린 땀과 눈물이 오늘날 대한민국 발전의 초석이 되었으니까요.”이 교수는 독일 카를스루헤(Karlsruhe) 국립음대에서 유학(1984∼1988)할 때 독일에 광부, 간호사로 일하러 온 동포들을 만나며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간호사 분들은 독일인들이 기피하는 험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해냈다며, 독일사회에서 칭찬하더군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특히나 재독동포들이 만나면 조국을 그리며 아리랑을 부릅니다.”그는 지난 2015년 파독 광부들이 일한 딘스라켄의 옛 광산터에서 자신이 작곡한 노래 ‘땅 속에서 뜨는 별’(임병길 시)을 초연했다. 재독 한인들인 청중이 모두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객석이 눈물바다가 됐다는 것이 그의 기억이다. 이번 공연은 ‘자랑스러운 재독한인동포여’(장순휘 시)를 초연하고 ‘달항아리’ ‘우리는 사랑으로’ ‘평화를 위한 2023’ 등 그가 작곡한 곡들을 들려준다. 서양의 현대 음악에 한국 고유의 정서를 가미한 이병욱류의 작품들이다. "독일 유학 때 스승인 볼프강 림 교수께서 서양 음악을 흉내 내려 하지 말고 오랜 전통을 지닌 너희 나라 판소리, 가야금 산조 등에서 현대 음악을 찾으라고 말씀하셨어요. 그게 제 음악의 길이 됐지요. 1988년 서울올림픽 행사에서 선보인 성화 봉송 곡과 '한강의 노래 '등이 그 길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번 공연은 그의 작품뿐만 아니라 ‘새타령’ ‘경복궁 타령’ 등 우리 민요와 함께 장구솔로, 태평무 등을 다채롭게 선사한다. 최경하 테너를 비롯한 재독 한인 성악가 9명과 독일 NRW 주립 아카데미 청소년 합창단이 함께한다. 이 합창단은 독일에서 활약하며 이름을 떨치고 있는 정나래 지휘자가 이끈다. 마침 유럽을 순회 공연하는 대전 DMC 어린이합창단도 이번 무대에 동참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전언이다."이번 공연을 통에 우리 얼이 깃든 전통음악 공연으로 이제 고령이신 파독 광부, 간호사 분들의 생애와 디사스포라의 아픔를 어루만질 수 있게 됐습니다.” '어울사랑예술단’은 2013년에 창단하여 황경애 예술감독의 지휘 아래 올해 10주년을 맞이한 전통춤 예술단이다. 단원들은 후원자들로 구성되어있는데, 매년 발표회를 가지며 실력을 키워가 밀라노, 독일, 루마니아 등 해외공연도 성료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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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인쇄본 애국가 가사 전승 실상현 애국가의 전승 과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애국가 작사자 규명에도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연대와 출전을 명확히 하기 위하여 필사 자료보다는 인쇄본 자료를 통해 살필 필요가 있다. 필사본은 유일본일 경우 진정성 측면에서 가치가 있지만, 대개 사적 기록이란 점에서 필사 시점과 기록 배경이 명확하지 않다는 약점이 있다. 그런데 인쇄본은 단행본의 경우 판권을 통해서, 잡지나 신문은 발행 일자나 내용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다만 상업적 매체의 성격에 따라 게재 내용의 배경을 달리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약점이 있다. 그럼에도 인쇄본은 전승 년대, 즉 수직적 전승 과정을 명확히 알 수 있다는 점과 객관적 대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채택하게 된다. 지금까지 확인되는 인쇄본 애국가 가사 자료는 대략 다섯 종 정도로 볼 수 있다. 첫 문헌 기록은 연활자본 1908년 재판 ‘찬미가’에 수록된 가사이다. 이 문헌은 현재까지 역술자(번역과 작사자)와 인쇄 연대가 명확하게 밝혀진 최초(最初)의, 최고(最古)의 문헌 소재라는 점에서 주목이 된다. 수록(인쇄) 시점, 작사자 기록 여부, 곡명의 차이, 표기법 문제를 중심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1. 1908년 재판 찬미가 제14장 4절 가사 이 판본은 1908년이란 시점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윤치호가 직접 ‘자필 가사지’를 통해 밝힌 ‘1907년 작사’ 후 재판 ‘찬미가’에 수록한 것이란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헤 저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날 공활한대 구름업시 높고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님군을섬기며 괴로오나 질거우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현대철자법으로 표기하였다. 舊철자법(국어정서법)이 아닌, 1937년 이후 쓰게 된 오늘날의 철자법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작사자 윤치호의 선각자적 역량을 보여주는 것으로, 자필 ‘가사지’와 함께 이미 철자법을 30여 년 앞서 ‘아래 아’같은 구(舊)철자를 쓰지 않은 것이다. 이 표기 문제는 1955년 애국가작사자 조사 때는 물론 최근까지도 제기되는 문제이다. 윤치호는 ‘독립신문’ 편집에서부터 ‘찬미가’ 발행 때까지 언문일치를 실현하여 ‘아래 아’ 같은 표기를 철폐하여고 띄어쓰기를 계몽하였다. 1907년 학부에서 7월 8일 개설한 국문연구소(國文硏究所)에서 ‘ㅣ’와 ‘ㅡ’의 합음으로 ‘ㅏ’(阿)음과 같음으로 폐지하자는 주장을 하게 되는데, 이를 주도한 인물이 사촌 동생 윤치오(尹致旿)이다. 이 기관은 주시경과 지석영 등을 위원으로 구성하여 약 3년 동안 한국어 정서법 통일을 토의한 곳이다. 이 연구소 설립과 연구는 당연히 윤치호의 영향인 것이 분명하다. 당시 윤치호의 한글 사용과 그 표기에 대한 앞선 실천의지는 외무아문 참의로서 통역업무를 맡았던 시절의 한 회고에서 확인이 된다. 즉, 영문을 번역하거나 통역하는데 난삽한 한문을 쓰는 것보다 한글을 사용하는 것이 편리함을 안 것이다. "언문을 보급시킬 생각만은 간절하여 나라의 형편을 공사에게 자세히 보고하고 또한 언문을 보급하여야 조선 사람이 속히 깨이겠다는 뜻을 누차 진언하였다.” 당시 미국공사도 긍정하여 외무독판 김홍집에게 외교문서에 언문을 사용하자고 하였으나 "나는 조선 언문을 못 배웠소.”라고 강하게 거부하여 실천하지 못했다는 회고이다. 분명한 한글 사용론자의 면모이다. 이런 위치였음으로 1907년 한영서원과 뒤 이어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언문(諺文)이라는 일부 계층어를 일반 국민어(생활어)로 전환시켰고, 말하기와 쓰기의 일치, 즉 언문일치를 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은 작사자 표기 여부이다. 이 ‘찬미가’ 재판 판권에서 "譯述者 尹致昊”로 나온다. 이 기록은 일부의 주장처럼 ‘번역자’로, ‘편집자’로, ‘감수자’로 해석을 하든 윤치호가 첫 인쇄 기록자란 위치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후의 문건과 증언 등에서 "작사자 윤치호”로 말하고 기록하고 있다면, ‘역술자’에 대한 번역은 ‘譯’과 ‘述’, 즉 "일부의 번역과 일부의 지음”의 합성어로 보아야 제14장을 비롯한 2편은 작사로 보는 것이 옳다. 만일 살핀 세 가지 의미로 쓴 용어라면 각각의 용어가 더 간명하고 정확한 표기인데, 왜 실용주의자이며 한글 사용론자이기도 하고, 이런 용어를 쓰는 다른 나라를 유학한 인물이 이를 구분하지 못하여 함부로 썼겠는가. 2.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이 자료는 1910년 9월 21일 자 미주지역 교민신문 신한민보 소재 ‘국민가’(윤티호작) 신문 활자본 4절 가사이다. 기사 내용의 전후 맥락으로 작사 후 3년 ‘찬미가’ 발행 2년 후라는 시점은 분명하다. 노래로든, 출판물에 의해서든 유포, 확산의 맥락이 확인된다. 여기에는 ‘애국가’나 ‘찬미가 제14장’이 아닌 ‘국민가’로 표기되었다. 당시 미주지역 교민단체이며 안창호가 선도하던 ‘국민회’의 단체가로 개명한 듯하다. 안창호이든 신문 편집자이든, 아니면 국민회 간부이든 간에 이 4절 가사를 인식하고 ‘국민회가’(國民會歌)로 개제(改題)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이 시기 ‘찬미가’를 텍스트로 했다면 이런 곡명으로의 전환은 가능한 것이다. 신한민보 수록 ‘국민가’ 4절 가사 1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히 보전하세 2절 남산위에 저소나무 철갑을 둘은 듯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기상일세 3절 가을하날 공활한데 구름 업시 높고 말근달은 우리 가삼 일편단심일세 4절 이긔상과 이맘으로 민족을 모흐며 괴로우나 즐거오나 나라사랑하세 가사는 ‘찬미가’와는 다르게 구(舊)표기법인 ‘아래 아’자를 썼다. 그리고 4절에서 ‘님군을 섬기며’(현 ‘충성을 다하여’)가 ‘민족을 모으고’로 개작되었다. 그러나 4절에서 ‘기상’을 ‘긔상’으로 1908년 ‘찬미가’와 같게 쓰고 있어 근본적으로 ‘찬미가’가 텍스트였음을 추정하게 된다. 이는 ‘찬미가’가 국내외에 영향을 미쳤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작사자를 ‘윤티호’로 명기했다. 매우 주목되는 기록이다. 왜 안창호가 주도하는 ‘국민회가’의 작사자로, 안창호가 모를 리 없는 신한민보가 이 4절 가사를 윤치호라고 했겠는가? 당시 미주지역에서는 안창호의 명성이 윤치호 못지않았다. 이는 윤치호가 명백한, 아니 굳이 이를 따질 필요가 없는 기독교적 애국가의 작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부에서는 이 노래의 보급을 위해 윤치호의 명성을 이용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데 이는 궁색한 변명일 뿐이다. 3.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월간 잡지 ’신한청년‘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그 취지를 널리 알리기 위해 발행한 잡지이다. 1919년 11월 27자 임시정부 발행 ‘독립신문’ 1면에 신한청년당에서 월간 잡지 ‘신한청년’ 창간호를 12월 1일 자로 발행한다는 광고를 하기도 했다. 이는 임시정부와 그리고 독립신문과 같은 체제에 있음을 알게 하는 것이다. 전체적인 집필과 편집은 이광수가 맡았다. 발행 주체인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중화민국 상하이에서 동제사(同濟社) 단원들을 주축으로 조직한 한국 독립운동 단체로 한국 최초의 근대 정당으로 꼽힌다. 당수는 여운형이며 당원으로는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 조동호, 안창호였으며, 1919년 4월에 서병호, 김구, 이광수, 신규식 등도 관여하였다. 일본·만주·연해주·서울 등 국내외로 동지를 파견하여 파리강화에 대표를 파견하였음을 알리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고, 나아가 국내외에서 거국적인 독립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1923년 신규식의 명령에 의해 자발적으로 해체되었다. 바로 이 당에서 발행한 기관지 ‘신한청년’ 창간호 제1면에 태극기와 함께 애국가 4절이 수록되었다. 1919년 ‘新韓靑年’ 창간호 수록 愛國歌 4절 1. 東海물과 白頭山이 마르고 달토록 하나님이 保佑하사 우리나라 萬歲 無窮花三千里 華麗江山 大韓사람 大韓으로 기리 保全하세(후렴) 2. 南山우에 져 소나무 鐵甲을 두른 듯 바람이슬 不變함은 우리 氣象일세 3. 가을하늘 空豁한데 높고 구름업시 밝은달은 우리 가슴 一片丹心일세 4. 이氣象과 이맘으로 忠誠을 다하야 괴로오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특징적인 것은 가사에 한자를 썼다는 점이다. 이는 문사인 이광수의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부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이해를 위한 방식인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4절 "님군을섬기며”가 오늘날과 같은 "忠誠을 다하야”로 바뀐 것이 확인된다. 이는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부의 주장처럼 안창호가 개작했다고 하는 부분이라 주목이 된다. 이 부분의 개작은 1919년 12월 이전에 이뤄진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광수는 상해에 오기 전 일본 체류 시 조선유학생 총회에서 "새로운 윤치호 작사 애국가”를 부르게 된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상해에 와서는 3.1 독립운동사 등을 집필하면서 윤치호가 작사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했다면 이 창간호에 "작사자 안창호”라고 표기하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이 기록에 작사자가 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보게 된다. 앞서서 살핀 임시의정원 회의 기록이나 김구 제 ‘대한애국가’ 악보에 반영된 입장이 이미 이 시점에 공유된 것임을 알게 하기 때문이다. 즉, 작사자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윤치호 작사 사실을 알고 부정적인 의사를 표하는 이들에게는 안창호 작사설을 내비치거나, 또는 아예 무응답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이다. 5. 안익태 작곡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2절 가사 세 번째 자료는 1935년 11월 안익태 작곡의 ‘대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가사이다. ‘대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HYMN, EA KOOK KA) 악보는 국한문과 영문으로 1935년에 발행되었다. 표지 1장과 악보 2장으로 합창 및 피아노 반주부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서 발행했다. 신한민보가 주 판매처였다. 가격은 1부당 20센트이다. 1면에는 애국가 1절과 2절이, 2면 악보에는 후렴 가사가 인쇄되어 있다. 이 악보가 1940년 미주 대한인국민회에서 임시정부에 사용 허가를 신청할 때 동봉한 것이기도 하다. 1.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도록 하나님이 보호하샤 우리 나라만세 2. 남산 위에 뎌 소나무 ㅅ덜갑을 두른 듯 바람 이슬 불변함은 우리 긔샹일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히보젼하세(후렴) 이상과 같이 2절 만을 기록하고 있어 가사를 대비하는 자료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다만 역사적 의미에서는 악보 소재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가치를 지닌다. 이 가사에는 ‘하샤’, ‘뎌’, ‘ㅅ덜갑’ 같은 구철자를 사용하였다. 이는 앞에서 살핀 ‘국민가’ 보다 늦은 시점임에도 구철자를 썼다는 점에서 ‘찬미가’를 참고한 것이 아니라, 구술을 옮긴 것이거나 구철자로 표기한 가사를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악보에는 "안익태 작곡, 김준성 목사(John Starr Kim) 영역”이 표기돼 있다. 작사자는 밝히지 않았다. 이 역사적인 출판물에 작곡가와 함께 작사자를 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외가 아닐 수 없다. ‘애국가와 안익태’의 저자 김경래의 기록처럼 "안창호가 작사자라고 황사성 목사로부터 들어 알고~ ”있었다면 악보의 완벽성을 위해서나 가치를 위해서나 이를 표기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더욱이 명색이 태극기와 애국가와 독립선언서로 3.1운동 시위에 참가하고, 일본에서 유학을 한 음악도로서, 더욱이 윤치호로부터 유학비 일부를 도움 받은 자로서 자신이 작곡한 가사의 작사자를 모르고 작곡했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결과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안익태는 작사자를 모르지는 않았다고 보는 경우이다. 왜냐하면 정말 몰랐다면 ‘미상(未詳/Unknown)’이라고 표기하여 악보의 완벽성을 갖췄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악보 발행 후원체인 미주 한인단체와 신한민보 측의 의사를 반영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안창호가 작사자라면 이미 작고한 이후임으로 일제의 탄압을 염려한 조치라고는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윤치호라면 임시정부의 입장처럼 밝히지 않는 편이 보급이나 판매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한국애국가’ 악보 소재 애국가 가사 4절 이 악보는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한국애국가(KOREAN NATIONAL ANTHEM)’이다. A調 4/4 Andante, 오선보와 숫자보를 병기한 악보는 '한중영문중국판(韓中英文中國版) 악보에 부기되었다. 중국 충칭(중경)에서 발행된 김구의 장서인과 친필로 표제를 쓴 표지 왼쪽에 ‘金九 題(김구 제)’와 ‘金九之印(김구지인)’이라는 인장과 김구 친필로 ‘一九四五 十月十八日’(1945년 10월18일)이 쓰여 있다. 뒷면 중앙에는 중사장(中山裝)의 김구 사진이 있고, 사진 아래쪽에서는 ‘한국애국가 고사(故事)’와 작곡자 그리고 번역자(중역/민석린, 영역/정한범)를 소개하였다. 악보집은 충칭의 ‘음악월간사(音樂月刊社)’에서 이사소(李士釗)가 편집, 발행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역사성과 변천 과정을 담고 있는 ’한국애국가‘에 법적 위상을 부여한 문건이다. 또한 법통을 이어받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경에서 발행한 마지막 출판물이며, 동시에 임시정부 주석 명의로 출판된 첫 공식 악보이다. 김구 제 ‘한국애국가’ 소재 4절 가사 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말으고 달토록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대한만세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二 남산우에 저솔나무 철갑을 두른 뜻 바람이슬 불변함은 우리긔상일세 三 가을하늘 공활한데 높고 구름없이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편단심 일세 四 이긔상과 이 마음으로 정성을다하야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사랑하세 "이 애국가는 ①50년 전에 한 ②한국애국지사의 수필(手筆)로 창작되었는데, 이미 ③일명(佚名)해 버렸다. 처음에 서양 명곡을 채용하여 가사를 메워 노래를 불렀는데, 그 후 한국의 인사들이 안된다고 생각하여 10년 전에 ④한국 청년음악가가 새로운 곡조를 지음으로 말미암아 곧 한국 건국운동 중에 국가를 대신하게 되었다.” 1945년 50년 전의 상황으로 말했다. 이를 풀이하면 50년 전으로서 ①1895년이다. 이 때 작사된 애국가의 작사자를 1919년 임시정부 수립초기 또는 악보를 발행하는 해방직전인 1945년 시점에서 ‘佚名’했다고 했다. ④작곡 시점을 10년 전이라고 했으니 1935년이 된다. 이 안익태 작곡 시점은 이 시기 우리로서는 알 수 없었던 시점이다. 국내에 알려진 것은 1981년 미주 교민 양주은이 ‘신한민보’ 40년 발행분을 국사편찬위원회에 기증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②의 "50년 전”이란 표현은 정부와 독립협회의 공동 행사인 1897년 ‘조선개국 기원 505회’ 기념식에서 윤치호가 동일 후렴의 ‘무궁화가’가를 발표한 시점과 1년 차이이다. 그리고 ‘수기’란 공식 문서로 발표한 것이 아니라 ‘사적인 작사’라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일치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윤치호가 독립협회 또는 서재필의 요청으로 행사를 위해 준비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이 시기 윤치호는 분명 ‘한 한국애국지사’였음으로 일치하는 표현이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주창하며 외부와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발간에 적극 참여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③의 ‘일명’이란 표현은 주의가 요구된다. 윤치호는 1915년 2월 13일 ‘105인 사건’으로 영어(囹圄)의 몸에서 특사로 출감하며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일제에의 협조 의사를 내비쳤다. 이 때문에 많은 이들을 실망시킨 시점에다 이후 4년 후인 1919년 ‘3.1운동’ 직후 임시정부가 상해에서 수립되면서 윤치호의 망명(亡命) 내지는 동참(同參)을 요청한 바 있었으나 응하지 않아 크게 원망을 하게 된 시기이다. 정리하면 "김구의 이 기록은 윤치호 작사 동일 후렴 ‘무궁화가’또는 ‘찬미가 제10장’ 작사 사실을 애국가의 시원으로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은 것을 안타까워하여 단지 작사자를 ‘일명’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이상에서 1908년부터 1945년까지 발행된 인쇄 자료에서 곡명, 작사자 표기 여부, 가사의 변이를 살폈다. 그 결과 주목하는 작사자 표기 여부에 대해서는 네 가지 형태로 나타났음이 확인되었다. 하나는 1908년 발행 재판 ‘찬미가’의 경우 윤치호를 ‘역술자’로, 둘은 1919년 신한민보 ‘국민가’ 기록으로 윤치호 작사로 명확히 밝혔다. 셋은 작사자를 ‘미상’ 등으로도 표기하지 않고 아예 밝히지 않은 경우이다. 1919년 ‘신한청년’ 창간호와 1935년 안익태 악보의 경우이다. 마지막은 1945년 중국에서 발행된 ‘김구 제 대한국애국가’의 ‘일명(佚名)’ 표기이다. 그런데 ‘찬미가’의 ‘역술자’ 중 ‘술’은 윤치호의 작사를 반영한 것이고, ‘국민가’는 윤치호를 작사자로 표기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적어도 안창호 작사는 아니다”를 명확히 한 것으로, 윤치호가 작사자임을 역설한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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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의 독립운동가 최재형한말의 독립운동가.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였다. 러일전쟁 후 국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고, 의병을 모집했다. 폐간되었던 《대동공보》를 재발행하고 한인학교를 설립하였다. 1919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했다. 이듬해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때 재러한인의병을 총규합하여 시가전을 벌이다 순국하였다. 최재형의 집안은 극심한 가난으로 당시 하산에 있는 한인학교에도 다닐 형편이 되지 못해서 러시아학교에 다녔다. 11세 때 집에서 가출하여 상선의 선원이 되었고 상선을 타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페테르부르크까지 항해했고 이때 많은 견문을 넓혔다. 7년간의 선원생활로 러시아 뿐만아니라 세계문물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최재형은 러시아 군대의 통역으로 일했으며 이때문에 러시아 군관계에 폭넓은 인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한인들의 자녀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졌으며 러시아어와 문물을 공부하도록 지원하였다. 그리고 고등소학교를 개설하여 학생들이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한인마을의 정교회 학교를 32개나 세웠다. 조선인들은 최재형을 페치카(따뜻한 난로)라고 불렀다. 1908년 4월 얀치혜에서 이범윤, 이위종, 엄인섭, 안중근 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하여 총장으로 추대되었으며 항일의병 활동자금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금을 내놓았다. 1919년 4월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초대 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그 해 11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新韓村)에 본부를 둔 독립단을 조직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1920년 4월 일본은 니항사건을 빌미로 연해주 일대에 출병하여 시베리아 혁명군과 한인의병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최재형은 우수리스크에서 체포되었으며 이송 도중 탈주를 시도하였다가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헌병대가 시신을 수습하지 않아서 최재형의 유해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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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김치의 날’ 세계 최초 국가기념일 제정주아르헨티나 한국문화원은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서 세계 최초로 ‘김치의 날(11월 22일)’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동 문화원이 주재국 상원의원 막달레나 솔라리 킨타나(Magdalena Solari Quintana)와 함께 3년간 공들여 이뤄낸 노력의 결과이다. 현지 시각 7월 6일 자정 경, 연방 하원 본회의 표결에서 찬성 171명, 반대 2명, 기권 6명으로 최종 가결되면서, ‘김치의 날’은 아르헨티나 법 27770호를 부여받고 즉시 효력이 발생 되었다. 동 법에서 "한국의 전통문화 유산으로 상징되는 김치를 소개하면서, 한국문화와 한국 이민자의 아르헨티나 내 사회・문화적 공헌에 대한 보답으로 ‘김치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이를 통한 한-아르헨티나 우호적 관계를 강화한다"고 법률 제정의 취지를 담았다. 동 법은 김치로 상징되는 한식과 한국문화를 효과적으로 홍보하고, 한국문화 향유층의 지평 확대를 위한 실질적인 발판을 마련하며, 이를 통한 양국 유대관계를 증진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동 문화원은 2015년도부터 매년 ‘한식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상대적으로 대중의 관심이 적은 한식을 ‘건강한 음식’이라는 이미지 확산을 통해 한식의 대중화에 주력했고, 2023년 현재,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중심가의 한식당 숫자가 1,000% 성장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 현지 한류의 열풍에 한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한식문화의 현지 안착을 위해 법안 제정을 기획하였고 한국문화의 열성 팬으로 자처하는 막달레나 솔라리 킨타나(Magdalena Solari Quintana) 상원의원이 법안 발의를 흔쾌히 수락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보화 문화원장은 ”각고의 노력 끝에 이룬 소중한 결실에 감사한다. 이 법안 제정을 계기로 양국의 유대관계 증진과 민간차원의 다양한 교류 활성화에 긍정적 역할을 기대한다”며 "아르헨티나 김치의 날은 세계 최초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기에 보다 큰 의미와 상징성을 갖는다” 강조하였다. 또한 "동 법 제정을 위해 면담했던 의원들 중 대다수가 김치의 날 법 제정에 긍정적이었으며, 특히 하비에르 밀레이(Javier Milei) 하원의원과 안나 카를라 카리소(Ana Carla Carrizo) 법제사법위원회 부의장은 한국문화의 우수성과 한국의 놀라운 발전상에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며 소회를 밝였다. 문화원은 주재국 정부와 민간, 국내 유관기관, 현지 진출 기업, 한인 사회와 협력하여 ‘국가기념일’ 지정 축하 기념 ‘김치의 날’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또한 ‘김치의 날’ 기념행사를 정례화하여 ‘한식’을 통한 양국 우호 증진을 촉진하고, 문화원의 한식강좌 확대 개설 등 한식의 현지 정착을 위해 노력할 계획이다. 김치의 날 법안을 발의한 솔라리 킨타나 상원의원은 평소 한식을 즐길 뿐만 아니라 김치를 직접 만든다고 하며, 한국문학에도 관심이 많은 한국과 한국문화의 열성팬으로 알려져 있다. 동 의원은 "세계정치에서의 한국의 중요성과 한국문화의 우수성, 아르헨티나 교민들의 근면과 성실함은 이민자의 나라인 아르헨티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주기에 충분하다”며 법안 발의 제안을 수락했다. 1968년생 여성으로, 이과수 폭포가 있는 아르헨티나 북부 미시오네스(Misiones) 주 지역 초선 상원의원으로 2017년에 선출되었다. 천주교 신자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였다. 국회 입성 전, 미시오네스 주도 포사다(Posada)시 산하의 문화예술기관장으로 근무하면서 한국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전해진다. 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은 2006년 중남미 최초로 한국문화원을 개원하였다. 당시 한인이 3만 명 이상 거주하였지만,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한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으며, 특히 한식은 중심에서 벗어난 한인촌에서 한인만의 것으로 인식되었다. 2015년부터 매년 ’한식페스티벌‘을 개최하면서 5성급 호텔과 협력을 통해 ’건강한 음식‘이라는 이미지와 함께 건강하고 균형 있는 한국의 식단 및 식문화를 홍보하였다. 2018년 문화원의 시내 중심으로 이전 개원과 함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한류 열풍의 시너지 효과로 한식 수요는 점차 증가하였고, 문화원은 현지 언론홍보와 민간협력을 통한 한식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판로가 막힌 한식당과 협력하여, 온라인 한식페스티벌을 개최하고, 전국 TV 시청률 1위의 ‘마스터셰프 아르헨티나-한식편’의 방송 프로그램을 약 200만명이 동시 시청하면서 한식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을 거두는 쾌거를 이루었다. 또한 유명 조리전문학교에 정규 한식 강의를 설치하여 미래 요식업계의 꿈나무들에게 우리 한식을 전수하였다. 2021년 11월 상원의 법안 가결을 계기로 문화원은 첫 ‘김치의 날’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동 행사에 5,000명 이상이 참여했으며, 시식으로 준비한 김치 500kg는 행사 중반에 모두 소진될 정도로 현지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2023년, 현재,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 중심에는 현지인을 대상으로 하는 한식당 수는 2015년 대비 약 1,000% 이상 성장하였으며, 또한 ”김치 가루를 뿌린 감자튀김" ”불고기 엠파나다" 등 한식 고유의 재료를 사용한 퓨전 음식을 현지 식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한류의 주 향유층인 청년들은 K-드라마와 한국 영화에서 본 한식을 체험하고 싶다며, 도심 외곽의 한인촌의 한식당을 자처하여 찾는다. 이번 ‘김치의 날’은 지난 10여 년간 아르헨티나 내 한식 사업의 결과물이며, 한국의 식문화가 현지인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활로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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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한마당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장 (현 석관중학교장)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현지 사할린 동포들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인사를 나눈다. 시시각각 소식들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퇴근길에서 열어 보고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하트를 보낸다. 지난 11일 주말 아침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의 초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귀국하고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영주귀국동포들이 사시는 경기도 양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찾아가는 아리랑 학교"가 열린 것이다. 서울에서 양주까지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면서, 지난 3년 간 임기를 마친 사할린한국교육원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 중 많은 추억들 중 '사할린아리랑'은 기미양 대표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3년 전 7월 중순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과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사할린 비자 갱신차 일시 귀국했다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행사를 준비하는 문제로 종로에서 만난 것이다. 현재는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된 상태이지만 2016년부터 매년 아리랑연합회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공동주최로 사할린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연을 수 차례 지속적으로 주관해 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국내외 55개 아리랑전승단체와 연구단체로 구성된 순수 시민운동단체이다. 그후 일시 귀국 때마다 국악신문사에서 보내주는 한복과 태극선 부채, 태극상모(이담농악), 아리랑음반,국악음반 등을 사할린 한민족예술동포단체에 전달했고, 아리랑학회에서 주관하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에 수강하기도 했고, 돌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 특강과 새해 첫날 우리말방송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미양 대표와는 아리랑 관련 자료와 행사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화상통화로 10월에 내린 사할린 첫눈 소식을 건내 주어서 국악신문 포토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에서 지어준 '아리랑누각'과 '아리랑공원' 건립 소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국제적 사정으로 매년 사할린아리랑축제 및 아리랑 예술공연 단체가 준비하는 사할린 방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사할린에서 탈춤과 소고춤, 사할린아리랑, 밀양아리랑, 어부놀이 등 민속춤과 아리랑배우기 등을 통해 사할린 동포 및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2022년 3월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 50명과 함께 특별초청 되어 동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22년 KBS방송 한민족수기공모전 수상자 인터뷰, 한민족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서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KBS한민족수기공모전 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사할린 동포의 존재와 이산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지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러시아어 대화가 들려서 참으로 신기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말 걸고 싶은 기분이랄까. 문경에서 도착한 대형버스에서 앰프와 악기, 다듬이, 박스 등이 리어카에 실려서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할린 어른들도 함께 손수 나르시고 계셨다. 떡과 수박 등 다과회까지 준비를 해오셨다. 공연 식전 행사에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게 되면, 1세대 어르신들께 큰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양주 율정마을 동포 1세대분들께 바닥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이어 "아직도 3년간 살다 온 사할린 기억이 생생해서 자다가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글을 쓰며 추억한다. 그리고 영주귀국 신청 전에 부모가 사망하시면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2세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가슴이 울컥해져서 머리 속이 먹먹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닫혀진 대강당 문이 오늘 3년만에 처음 열게 된 것이다. 한쪽 면은 대형 사이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비치는 공간이라서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무덥지는 않았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관람객이 늘어나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다소 습기가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할린에서 살다오신 어르신들께는 부담이 되는 기온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체질이 형성된 분들이라 한국의 무더운 여름은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는 사할린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9월 말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고 했는데....이제는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3년간이나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회장:이만유)가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모두 아리랑판이다. 율정마을 어르신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의 '왕십리아리랑',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동두천아리랑'이 불려졌다. 2부는 문경에서 오신 40여 명의 아도위 회원들이 준비했다. 아도위합창단과 아도위연주단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 주시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단이 트롯트를 선사했다. 동포들이 무대에 나와서 우리 전통 춤사위와 러시아 민속 춤사위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신명을 높여 주었다. 트롯트에서 빠른 비엔나 왈츠, 불루스 등을 망라한 춤판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노래보다 춤을 더 즐긴다. 우리가 노래방을 좋아하는만큼 그들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휘날레 춤판에는 많은 어른들이 춤을 추시고 기뻐하셨다. 코로나가 때문에 너무나 오랜만에 모여서 추어보는 춤이라고 하시면서....이러한 자연스런 파티 풍경은 사할린에서 근무하는 동안 너무나 낯익은 어울림이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운 사할린 추억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문경시민들은 동포 분들께 드릴 정성이 담긴 선물도 듬뿍 가져 오셨다. 문경시장이 보낸 아리랑 책자, 문경특산물 오미자 와인, 오미자김 등을 뒷풀이에서 풀어 놓기도 하셨다. 직접 만든 생강조청을 준비하신 문은자 여사님의 정성이 대단하다. 기미양 대표님은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장으로서 '아리랑'을 매개로 현지 사할린 동포와 전국 여러 지역의 사할린 영주귀국동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분들의 성함과 얼굴, 모스크바에서부터 사할린에 사는 친인척 관계에서 겹사돈 관계까지 거의 알고 계신다. 그동안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고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안간, 인천 등 에 사시는 많은 사할린 사람들을 만나서 강제동원과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표님과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2017년 사할린 이산의 역사가 다큐로 방영되고,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참가를 널리 알려오고 계신다.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공중파와 출판을 통해 소개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매년 대상 수상작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의 고통이 담긴 가족사이다. 작년 대상 역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글학교 수강생 김경순(77세) 어른이 수상했다. 201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간 개최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사할린아리랑무용단과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대상과 금상을 받았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앙상블(단장:박영자), 오늘 만난 양주 율정마을 사할린 동포로 이루어진 사할린아리랑보존회 합창단이 수상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게나김 단장도 초청되어 무대에서 '카레이스키아리랑'을 부녀가 같이 불러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는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리랑을 매개로 활발한 개방과 교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판데믹의 여파과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의 중단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아리랑을 매개로 문경시민들과 사할린이 연결된 오늘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의욕을 신선하게 일으키는 날이다. 순수 시민운동단체로서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의 활동이 놀랍다. 이만유 회장의 특강에서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온 국민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진정성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먼 길을 와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동두천아리랑보존회, 한편 이혜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님은 병원 입원 중에도 양주까지 오셔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재입원하셨다.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할린아리랑보존회 및 율정마을 어르신들, 오늘 사할린과 문경의 만남을 순조롭게 이어주신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동행 등,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귀한 다음 만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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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크, 11월22일 '김치의 날' 제정 캠페인 착수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는 11월22일을 전 세계 재외동포 거주국에 '김치의 날'로 제정하도록 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반크는 19일 자체 인스타그램에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aT)와 미국을 중심으로 제정된 김치의 날의 성과와 의의가 전 세계 곳곳 모든 나라에서 김치의 날이 제정될 수 있도록 글로벌 캠페인을 착수한다"고 밝혔다."전 세계 750만 한인 동포들이 자신들의 거주국가와 지역에서 김치의 날 제정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한국어와 영어로 디지털 포스터를 만들어 SNS를 통해 반크 회원들과 함께 널리 배포한다"고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가 처음 김치의 날을 제정했다. 이어 미국 버지니아주, 뉴욕주, 워싱턴D.C., 브라질 상파울루에서도 김치의 날 제정 결의안이 의회에서 통과됐다. 한국에서는 2020년 11월22일을 '김치의 날' 로 지정했다. 반크가 이날 2가지 홍보포스터를 공개했다. 첫 번째 포스터에는 "김치의 날 제정해 함께해주세요! 한국의 맛을 세계로! 한국의 맛을 알릴 수 있는 김치의 날, 전 세계 친구가 김치의 날을 즐길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세요!"라는 내용이 담겼다.두 번째 포스터에는 김치의 날이 제정된 외국의 결의안을 바탕으로 지구촌 곳곳에서도 전 세계 750만 한인동포들이 협력해 김치의 날이 제정되는 꿈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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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춤협회, 미국에서 전통춤을 꽃피우다.2023년 5월 28일 일요일 오후 6시 미국 텍사스 주 코펠아트센터 메인 홀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명무가 선보이는 한국 전통춤 무대가 펼쳐젔다. 한국전통춤협회 텍사스 지부(지부장 박성신)의 창단 기념으로 진행되는 이번 공연에서 17명의 한국 무용가가 춘앵무, 호남산조춤, 즉흥무, 태평무, 밀양덧배기춤, 검무, 진주교방굿거리 등 7개 종목의 전통춤을 선보였다. 주최측의 박성신 지부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번 공연은 한국 전통춤을 사랑하시는 분들뿐만 아니라, 한국 문화에 관심이 있는 분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번 공연을 통해 푸른 초여름의 신록과 함께, 한국의 전통문화를 새롭게 발견하고, 전통이라는 아우라가 뿜어내는 깊은 고혹미와 아름다움에 빠져보시기를 바랍니다.”며 "이길주, 김은희, 임현선, 배주옥 등 실력있는 무용가들과 그의 제자들이 무대를 꾸릴 예정”이라고 전했다. 박 지부장은 "전통 춤으로만 구성된 만큼 전통 춤사위의 선과 색깔을 더욱 집중해서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본 공연의 관전 포인트를 전했다. 한국전통춤에서는 춤과 함께 숨소리를 이용하는 기법이 사용된다. 이러한 숨소리는 춤의 움직임과 함께 호흡을 조절하여 강조하거나, 춤의 음악적 흐름에 맞춰 살아 숨쉬는 듯한 느낌을 연출하는 역할을 한다. 무대 구성과 관련해 그는 "미국에 사시는 동포와 외국인들의 문화를 반영하여 공연을 기획했다. 특히, 음향과 조명 부분에....”며 "특히 한인 2세들이 한국 춤에 대한 이해력을 높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미국인((한국전쟁 참전용사)은 "이 매혹적인 공연은 미국에서 한국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였으며, 관객들을 색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안내했다."고 전했다. 재미동포는 "한국을 떠난지 오래되었다. 영상물로만 보다가 오늘 이 공연을 통해 한국 전통춤의 우아함, 기품,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었다."고 소감을 전했다. 휘날레에서는 5분여 동안의 관객들의 기립박수 갈채를 받았다. 케롤톤 시장은 "이번 무대에 오르는 무용가들을 ‘하늘이 내린 춤꾼들’"이라는 극찬을 해주었고 내년에도 기대를 한다고 전했다. 이번 공연에는, 케롤톤 시티 스티브 베이빅(Steve Babick) 시장과 코펠 부시장 전영주 및 행정위원들 및 케롤톤 시티 행정 위원들과 한국전쟁 참전용사들, 또한 다수의 현지인들과 한인들, 400여 명의 관객들이 관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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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묘선 명인의 '승무' 춤사위."승무는 우리 전통춤의 가장 기본적인 춤이자 모든 춤사위를 담고 있습니다. 승무를 모르면 한국춤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죠. 장단의 변화가 다 담겨있어요. 그럼에도 어렵지 않습니다. 호흡부터 배우면 누구나 쉽게 터득할 수 있습니다.” 평생을 춤과 함께 살아온 김묘선 명인의 승무 예찬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승교육사 김묘선 명인이 미국에서 한국 전통예술 알리기에 앞장서며 국내외에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20년 코로나가 전 세계를 멈추게 했지만 일본과 미국 전수소에 모인 교육생들을 놓고 비대면으로 강습을 진행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올해 연초부터 ‘워싱턴 김묘선 전수소’에서 제자들과 승무 이수교육 기간 동안 워싱턴 미주한인재단이 버지니아 페어팩스고등학교에서 연 ‘미주 이민 120주년 기념행사’와 ‘제18회 한인의 날 기념 축전’에서 공연도 수행했다.미국에는 5곳의 김묘선 전수소가 있다. 워싱턴, 휴스턴, 뉴저지, LA, 오스틴에 이른다. 일찍이 ‘한국춤의 세계화’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로 2008년부터 미국에서 공연과 워크숍을 이어왔다. 내면의 열정이 뜨거운 불처럼 타오르는 불새. 김 묘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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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예술, 5월 남미 쿠바 투어 공연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예술한류 선도사업단은 쿠바 최대의 음악축제인 ‘2023 쿠바 디스코 페스티벌(Cuba Disco 2023)’의 공식 초청을 받아 5월 9일(화) 쿠바 국립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여는 등 쿠바 투어 기간에 총 4회 공연한다. 이번 쿠바 투어에는 전통예술원 이동연 교수를 단장으로 연희과 김원민 교수, 음악과 진윤경 교수, 타악 연주자 박범태, 해금연주자 천지윤, 가야금연주자 서정민, 타악 연주자 김소민, 윤여주, 김현희, 현정석 총 10명의 예술가가 참여한다. 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015pixel, 세로 1440pixel 이번 쿠바 투어는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예술한류 전통예술 선도사업> 3년차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최근 한류가 글로벌 열풍을 몰고 오면서 남미 대륙까지 크게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예술원의 이번 투어는 한류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전통예술의 남미진출과 한류의 글로벌 확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전통예술원은 이번 쿠바 투어에서 전통음악과 전통연희의 진수를 보여줄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구성하였다. 9일 저녁 8시 30분에는 쿠바 디스코 페스티벌의 메인공연 프로그램에 선정되어 쿠바에서 가장 권위 있는 국립극장에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다. 전통예술원 연주단은 단독 콘서트에서 "쿠바시나위”, "삼도설장고”, "호적풍류", ”경성의 노래", ”버나와 사자춤", ”판굿" 등을 쿠바 및 해외 관객들에게 들려줄 예정이다. 단독 콘서트에 앞서 7일에는 올드 아바나에 위치한 건물 옥상에서 일몰 시간에 맞추어 쿠바 유일의 인디레이블인 구암파라뮤직과 전통예술원 연주단이 루프탑 합동 콘서트를 개최한다. 10일 오후 5시에는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올드아바나 오비스포(Obispo) 거리에서 비나리, 판굿, 버나, 사자춤 등 연희공연을 펼치고, 5월 11일(목) 5시에는 올드 아나바에 위치한 '멜라 시어터 가든'에서 가야금, 해금, 창작타악, 태평소와 사물놀이 등 가든 콘서트를 개최한다. 이번 투어의 단장을 맡은 전통예술원 이동연 교수는 12일 ‘쿠바 디스코 페스티벌’ 국제 컨퍼런스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한류의 글로벌 확산을 위한 한국음악산업의 현황과 정책과제”를 주제로 발표한다. 쿠바 음악위원회와 페스티벌 조직위원회의 도움으로 쿠바투어 기간 동안 쿠바 국영 TV 인터뷰와 해외 언론과 인터뷰를 진행하며, 쿠바 전설의 레이블사인 <애그램EGREM> 음악스튜디오, 국립서커스학교, 국립민속무용학교를 방문한다. 또한 쿠바 투어 기간 동안 쿠바음악인들과 한국-쿠바 음악인의 장기교류에 대해 대담이 진행된다. 또한 100년 전 쿠바로 이민간 한인들의 후손들이 모여 있는 쿠바 한인 후손회 회원들을 만나 아리랑 등 우리 음악을 함께 연주할 예정이며, 한류의 남미 열풍으로 인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아바나 한글학교 방문하여 한국문화를 사랑하는 쿠바 현지인들과 한류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전통예술원의 이번 쿠바 투어는 '네이버 나우', '원더월' 등 다양한 케이팝 컨테츠 제작에 참여한 송지욱 감독과 애비뉴(avenew) 영상제작팀이 참여하여 쿠바의 아름다운 경관과 쿠바디스코 페스티벌에서 전통예술원 연주단의 각종 공연과 음악교류 행사들을 영상에 담아 음악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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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 영웅의 마지막 길, 아리랑이 울려퍼졌다8일(현지 시각) 오후 룩셈부르크 남동부 레미히의 한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 미사 도중 ‘아리랑’이 울려퍼졌다. 지난달 24일 별세한 룩셈부르크의 6·25 참전 용사 질베르 호펠스(90)씨를 위해서다. "장례식 때 꼭 아리랑을 불러 달라”는 유언장을 그의 조카 파스칼 호펠스(62)씨가 서재에서 발견, 현지 한인회에 연락했다. 고인은 19세이던 1952년 6·25에 참전했다. 최대 격전지였던 백마고지 전투 등에 참전했다. 불과 10m 거리에 포탄이 떨어지는 생사의 고비를 수차례 넘겼다. 6·25 당시 인구가 약 20만명이던 룩셈부르크는 연인원 100명을 파병했다. 참전 22국 가운데 인구 대비 가장 많은 전투병 파병으로 기록돼 있다. 이 중 15명이 전사하거나 다쳤다. 이제 남은 생존자는 2명뿐이다. ‘장례식에서 아리랑을 불러 달라’고 당부한 룩셈부르크의 6·25 참전 용사 호펠스씨는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조차 몰랐고, 부모도 참전에 반대했지만, ‘침략당한 나라의 자유를 되찾는 데 기여하겠다’며 자원했다. "아이랑, 아이랑, 아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감다.” 호펠스씨는 생전 ‘아리랑’을 유독 좋아해 서투른 한국말로 따라 부르곤 했다. 그에게 아리랑은 애락이 담긴 노래였다. 자녀가 없었고 수년 전 아내도 먼저 떠났다. 작년 11월 그의 생일 파티에서도 ‘아리랑’이 연주됐다. 8일 열린 장례식에서는 아리랑을 박미희 룩셈부르크 한인회장이 노래 부르고, 연주는 고인이 참전 후 재직한 현지 세관의 관악단이 맡았다. 이날 장례식에 참석한 박성호 주벨기에 유럽연합 대사관 무관은 국가보훈처에서 제작한 추모패를 유가족들에게 전달했다. 조카 파스칼씨는 "지금으로 치면 우크라이나 전쟁에 참전했던 것과 비슷한 것”이라며 "삼촌이 정말 자랑스럽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한국인들이 참전 용사의 헌신을 잊지 않아 감사하다”고도 했다. 룩셈부르크도 독일에 점령됐다가 미국 등 우방국의 도움으로 해방된 역사가 있었다. 1951년 5월 자국군에 입대한 호펠스씨는 군 복무가 끝나갈 때쯤 한국전에 자원해 1952년 3월 부산에 도착했다. 이후 1953년 1월 룩셈부르크로 복귀할 때까지 벨기에와 통합대대 소속의 일등병 기관총 사수로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치열했던 하루하루를 일기로 기록, 현재 룩셈부르크 전쟁박물관에 사료로 전시돼 있다. 그가 참전한 철원 백마고지 전투(1952년 10월 6~15일)에서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3개 사단이 맞붙어 국군이 승리했다. 열흘간 고지 주인만 12차례 바뀌었고, 중공군 1만4000여 명과 국군 3500여 명이 숨지거나 다쳤다. 전투 당시 포탄 27만 발로 고지의 수목이 완전히 사라져, 마치 하얀 말이 누워있는 듯 보여서 ‘백마고지’라는 이름이 붙었다. 호펠스씨는 참전 뒤 10여 차례 한국을 찾았다. 몇 년 전까지 룩셈부르크 참전용사협회장으로 활발히 활동했고 한국 역사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2019년 한국전쟁유업재단(KWLF)이 진행한 인터뷰에서 지난 1975년 첫 방한 당시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오래된 기차역들이 아직 있었지만, 동시에 새로 지어진 역들도 많았다”면서 "우리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아직 사과하지 않았다. 한국에 사과해야 한다”면서 한국 역사에 대한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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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이소 보이소', 태국에서 만나는 2030 부산세계박람회주태국 한국대사관과 한국문화원은 2일 11시 30분 문화원에서 '2030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홍보 특별전 - 영화 속 부산 관광과 음식 체험전'을 개최했다. 이번 전시는 현지에서 인기를 모은 한국드라마 '마이네임', 'D.P.', '더킹, 영원의 군주' 등의 배경이 된 부산 관광지 소개와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인 돼지국밥, 밀면, 부산어묵 등 체험으로 6월 30일까지 계속 된다. 개막식에 앞서 참가자들은 개막식 전 부산세계박람회 유치를 기원하는 글을 전시장 벽에 남기고 방탄소년단과 한덕수 총리의 국제박람회기구(BIE) 3차 총회 영상을 함께 시청했다. 개막식에는 부산 출신으로 부산 지역 대학에서 후학을 양성해온 신민원 소프라노가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응원곡 ‘함께’와 ‘신아리랑’을 부르며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후 삼성, 현대차, LG, 포스코, 효성, 아시아나, 에어부산, 진에어, 제주항공 등 태국 진출 기업 대표들과 한인단체장들이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지원 결의를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행사 직후 참가자들은 태국 내 3개 한식당이 마련한 돼지국밥, 부산어묵, 밀면, 떡볶이 등 부산음식을 시식했다. 조재일 문화원장과 이상우 관광공사 지사장은 참석자들에게 돼지국밥, 밀면을 직접 건네고 맛있게 먹는 법 등을 설명하며 부산세계박람회 유치와 부산관광을 홍보했다. 이번 행사에는 태국 내 유력 언론인 방콕포스트, PPTV, 타이랏, 타이포스트, 데일리뉴스 등이 참석해 열띤 취재 경쟁을 펼쳤다. 문승현 대사는 "부산세계박람회는 전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변화 등 도전과제에 대해 소통하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플랫폼이 될 것이며 BCG(바이오-순환-그린) 모델을 통해 탄소중립 방안을 모색하고 있는 태국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부산 세계박람회는 단순한 과학기술의 전시를 넘어 태국인들을 포함한 전 세계가 공감하고 열광할 수 있는 글로벌 문화 축제의 장이 될 것이다”고 밝혔다. 한국문화원은 이번 전시 외에도 올 하반기 관광대전과 한류 엑스포 등 다양한 대형행사를 통해 부산세계박람회 유치 지지를 태국에 지속 홍보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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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늦게 알려진 백악관 한인2세 합창 '아리랑'29일 뉴저지 한국학교 등에 따르면, 이 학교 어린이 합창단은 지난 26일 백악관 사우스론에서 열린 윤 대통령 공식 환영 행사에 초청받고 정식 공연을 진행했다. 최근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 부부의 공식 환영식 당시, 조 바이든 대통령 부부가 한인 2세로 구성된 합창단의 노래를 듣고 감동했다는 소식이 뒤늦게 전해졌다. 이후 합창단은 백악관 내부 메인홀로 이동해 양국 정상 내외만을 위한 비공개 추가 공연을 준비했다. 발코니에서 행사를 마치고 들어오는 한미 정상 부부에게 45초분량의 짧은 아리랑을 선사하기로 한 것이었다. 분홍빛 한복을 입고 머리를 곱게 땋은 아이들이 아리랑을 부르자, 바이든 대통령 부부는 걸음을 멈추고 감상했다. 합창단의 노래가 끝나자 질 바이든 여사는 탄성과 함께 박수를 보냈다. 바이든 대통령과 윤 대통령 부부도 박수갈채를 보냈다. 바이든 대통령이 아이들에게 다가가 악수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했다고 한다. 이에 백악관 관계자가 ‘노래를 한 곡 더 듣자’고 제안했고, 아이들은 공식 환영식에서 불렀던 뮤지컬 애니의 주제곡 ‘투모로우’를 다시 불렀다고 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이들이 뉴저지주 버겐카운티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 쪽을 잘 안다. 난 델라웨어주 아내는 뉴저지주 남부에서 자랐다. 우리 모두 비슷한 곳에서 왔다”며 반가워했다고 한다. 또한 아이들을 보며 "너무 재능이 뛰어나고 예쁘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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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매헌 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 개최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이 오는 29일 개최된다. 국가보훈처는 오는 29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 강당에서 (사)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매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91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고 28일 밝혔다. 이날 나치만 서울지방보훈청장, 각계 인사와 기념사업회 회원, 독립유공자 유족 등 200여 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이번 기념식은 국민의례와 약전봉독, 기념 식사 및 기념사, 유시봉독, 축하공연, 유족대표 인사, 윤봉길의사 노래,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1908년 충남 예산에서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윤봉길 의사는 1931년 중국 상하이에 도착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 의열투쟁의 결의를 다졌다. 이후 1932년 4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에 가입했다. 1932년 4월 29일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맞아 일본군의 상하이 점령 전승 경축식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리자 윤 의사는 오전 11시 40분경 수통형 폭탄을 단상 위로 투척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가와바타 거류민단장이 사망했고 노무라 중장과 시게미쓰 공사 등이 중상을 입었다. 윤 의사는 의거 직후 현장에서 일경에게 체포돼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그해 5월 상하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25세 나이로 총탄을 맞고 순국했다. 윤 의사의 유해는 김구 선생의 요청에 따라 이봉창·백정기 의사의 유해와 함께 봉환해 1946년 효창공원(삼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정부는 의사의 공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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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화천농악보존회, 22일 경남 국가무형문화재, 함안화천농악 시연함안화천농악은 경남 함안 칠북면 화천리에서 전승되어 오는 농악이다. 화천마을은 본래 들 앞에 능수버들이 울창하게 늘어서 있어서 마을 이름을 유정리라 하였는데, 그 뒤 화천이라고 부르다가 광려천이 마을 앞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하여 오늘의 화천리가 되었다. 화천마을에는 오래된 고목이 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나무를 서낭나무로 삼고 해마다 정성을 다해 모셨다.화천마을에서 연중 제일 먼저 농악을 치는 날은 정월 초삼일에 마을 집집을 돌면서 행하는 지신밟기 매구이다.이때는 각각의 잽이들과 흥이 많은 마을 장정 남녀들이 참여하여 사대부, 팔대부, 포수와 같은 잡색을 꾸미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며 놀았다.5월 단오에는 능수버들의 그늘에서 마을 사람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한바탕 놀며 곧 다가올 농사 채비를 했다. 본격적인 농번기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두렛일’의 행사써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농기를 선두에 세우고 풍물을 울리면서 일터로 나갔다.이때 연행되는 농악은 모든 일꾼들에게 일할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과 동시에 흥(사기)과 활력을 불어넣어 주어 마을 사람들을 단결시키는 기능을 하였다. 7월 백중날(7월 15일)에도 마을 사람들과 농군들은 넓은 능수버들 그늘에서 제각기 분수대로 술과 안주 등 음식을 차려 놓고 마을 어른들을 대접하며 농악놀이를 펼쳤다. 이날은 마을의 남녀노소가 즐겁게 어울리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화합을 다지는 날이다. 9월 그믐날에는 추수를 마치고 풋살이라 하여 마을 사람들이 한바탕 농악을 쳤다. 10월 초하룻날에는 전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지성을 다해 당제를 올리고 농악을 울렸으며, 섣달 보름날(12월 15일)에도 제사는 없지만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며 역시 서낭나무 주위를 돌면서 농악을 울리고 밤이 깊도록 한바탕 놀았다. 이처럼 함안화천농악은 세시 풍속의 하나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화합하는 중심체로서 기능을 하였다. 이 고장에서는 언제부터인가 남녀가 혼성으로 어울려 지내며 농악을 울렸는데, 이때 ‘매구친다’ 혹은 ‘쇠친다’라고 하였다. 함안화천농악은 세시 행사의 하나로 마을굿으로 연행되어 오다가, 광복 후 농악단이 조직되어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함안화천농악은 화천리 출신의 농악꾼 박정길을 중심으로 전승되던 것을 무안 출신의 한인시와 1960년대 명인이었던 칠서 계내 출신의 윤판옥, 합천의 유문향, 임태규에게 사사받은 상쇠 박동욱으로 이어졌다. 현재는 배병호(2014년), 박철(2017년)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함안화천농악은 함안농악으로 출발하여 1963년 10월 7일부터 9일까지서울 창경궁에서 열린 제4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1991년 12월 23일에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되었다. (주소 : 경남 함안군 칠북면 화천1길 14 전화 : 055-586-0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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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청소년중앙연맹, 제22회 청소년 통일백일장 전국대회 개최남북청소년중앙연맹(총재 정경석, 鄭京碩)은 2023년 4월 24일 ‘제22회 청소년 통일백일장 전국대회’를 공고 및 개최한다고 밝혔다. 기존의 백일장 대회는 코로나19의 세계적 여파로 기존 참여형 프로그램을 공모전 방식으로 진행해 왔으나, 이번 대회는 방역수칙이 완화돼 참여형으로 대회를 개최하고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통일부, 교육부, 행정안전부 및 14개 시·도광역교육청의 지원으로 시행한다. 올해도 전국 초·중·고등학교와 해외 한인학교, 각 기관 및 단체에서 예선 대회를 주관하고, 예선에서 입상한 상위 작품을 연맹 대회조직위원회에 8월 14일까지 추천하면 부문별 및 종합심사를 거쳐 최종 입상자를 선정한다. 최종 입상자는 9월 13일 발표되며, 10월 말 시상할 예정이다. 우수작품은 올해 발행할 작품 모음집에 수록하여 국내외에 배포할 계획이다. 이번 대회는 헌법기관인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와 정부 기관인 통일부, 교육부, 행정안전부를 비롯해 KBS 한국방송 및 14개 시·도광역교육청이 후원·지원·승인했다. 백일장 대회는 제1회부터 제7회까지 ‘남북청소년교류 편지쓰기 전국대회(1회~6회는 편지쓰기, 7회는 편지쓰기 및 그림그리기 구분)’로 진행했다. 제8회는 ‘한민족 통일염원 청소년 백일장(편지쓰기, 그림그리기)’으로, 제9회와 제10회는 ‘통일염원 청소년 백일장 전국대회(편지쓰기, 그림그리기)’로, 제11회(2012년)부터는 ‘청소년 통일백일장 전국대회(편지쓰기, 그림그리기)’로 시행하고 있다. 본선에서는 편지쓰기 및 그림그리기 분야별로 유치부, 초·중·고등부·해외부문(기관 단체 추천 포함)등 청소년 199명, 우수지도 교사 20명, 우수지도기관 6개 등 총 225명을 시상한다. 최고대상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상과 국회의장상을, 종합대상에는 사회부총리겸 교육부장관상과 통일부장관상, 부문별 대상에는 통일부장관상, 국회외교통일위원장상이 수여된다. 금상에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정무직)상과 전국 시·도광역별 초·중·고등부 교육감상을 비롯하여 남북청소년중앙연맹 총재상을 각각 시상한다. 연맹은 유튜브(정경석 총재 이야기)를 통해 청소년들이 행사에 더욱 쉽게 참여 할 수 있도록 정보를 공개할 계획이다. 대회 공고는 연맹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북청소년중앙연맹 대회조직위원회와 통일한반도교육원(이사장 김갑재, 원장 모광용)이 대회 본선을 주관한다. 예선은 연맹 산하의 지방(해외)본부연맹, 관련 기관 및 단체 등이 주관하며, 시·군·구 교육지원청 및 각급학교와 해외 한인 학교가 협력한다. 미래통일세대 육성을 위해 국내 최초로 설립된 남북청소년중앙연맹은 현재까지 146만1737명의 청소년에게 통일교육·국가관교육·역사교육을 실시했다. 또 청소년 통일백일장 전국대회에는 국내외 청소년 165만8070명 참여함으로써 권위 있는 프로그램으로 정착했다. 남북청소년중앙연맹은 남북청소년 한민족공동체 동질성 회복을 목표로 하여 청소년의 투철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건전한 통일관과 역사관 및 세계관을 함양해 미래 통일 세대를 육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연맹은 대한민국 정부의 1990년 5월 대한민국 청소년헌장 선포를 계기로 미래통일 세대육성을 위해 정경석 총재가 2000년 11월 설립했다. 1995년 7월부터 연맹 설립을 추진해 2000년 11월 통일부장관의 허가를 받아 통일분야 청소년 전문단체 법인을 최초로 설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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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멜버른 한인회, 아리앤랑댄스컴퍼니 김채원단장의 한국 전통춤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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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세계 여성의 날' 알아보기세계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날로, 1908년 3월 8일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여건 개선과 참정권 등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인 것에서 시작됐다. 이후 유엔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하고 1977년 3월 8일을 특정해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2018년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돼, 관련 단체들이 다양한 행사들을 진행한다. 1908년 3월 8일 미국 1만 5000여 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뉴욕의 루트커스 광장에 모여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때 시위에서 노동자들은 '우리에게 빵과 장미를 달라'고 외쳤는데, 여기서 빵은 남성과 비교해 저임금에 시달리던 여성들의 생존권을, 장미는 참정권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여성 노동자들은 먼지가 가득한 최악의 현장에서 하루 12~14시간씩 일해야 했으나, 선거권과 노동조합 결성 자유 등 기본적인 권리도 부여받지 못했다. 이에 봉기한 전 의류 노동자들의 시위는 결국 1910년 '의류노동자연합'이라는 조직 창설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러다 1911년 유럽에서 첫 행사가 개최된 이후 세계 각국에서 남녀 차별 철폐와 여성 지위 향상 등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확산됐다. 이에 유엔은 1975년을 ‘세계 여성의 해’로 지정하고 1977년 3월 8일을 특정해 세계 여성의 날로 공식화했다. 한편, 전 세계적으로 3월 8일 여성의 날이 되면 빵과 장미를 나눠주는 행사가 실시된다. 우리나라에서는 1920년부터 나혜석·박인덕 등이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해 왔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맥이 끊겼다가 1985년부터 공식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8년 2월 20일 여성의 날을 법정기념일로 지정하는 내용의 '양성평등기본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2018년부터 3월 8일이 법정기념일인 '여성의 날'로 공식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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