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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5국악신문 특집부 제13회에서 밝힌대로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 수립’은 국악신문의 대표적인 사업이다. 1996년 신년호 1월 23일자 제33호에 발표한 ‘96국악신문 기회사업’에 의하면 제1사업이 ‘예능보유자 인물사진 및 전통문화사진 자료 학교 보급’이다. 사업 반향이 교육에 방점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공식화 한 것은 96년 들어 시작된 사업이지만 사실은 국악신문의 기조이기도 했다. 이 사업의 기본은 역대 국악인들, 그 중에서도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正位)시키는 일과 그 위상을 현장의 교육과 공연을 통해 재정립시키는 일이다. 이를 위해 국악신문은 세 방향을 취했다. 하나는 민속놀이에 민속음악을 위치시키고 이를 ‘국악’으로 일반화 하는 논리이고, 둘은 기사를 통해 민속음악의 역사와 가치를 제고시키고, 셋은 민속음악 명인의 추모와 기념사업 추동(推動)이다. 이는 창간호로부터 유지시켜온 기본 방향이다. 이번 회에서는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국악사에 정위시키는 일을 주목하기로 한다. 국악신문이 민속음악 대가들의 업적을 정리하는 것은 역대 명인들의 존재를 사진과 해설을 통해 국악의 기둥임을 제시하였다. 지면 기사로는 <명인>을 게재하고, 명인들의 기록(사진)을 수집하고, 자료를 교육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창구 역할을 했다. 이 중에 <명인>은 표3 전면을 통해 연재를 했다. 사진의 작품성(Quality)로나 해설의 내용면에서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다. 사진과 해설을 정범태 선생이 맡았는데, 최고 명성의 기록 사진가로서 1세대 명인들을 직접 촬영한 원로라는 점에서 특징이며 강점이었다. <명인>은 씨리즈 넘버링(Numbering)이 되어있지 않고 결호(缺號)가 있어 정확하진 않지만 현재로서는 제40호부터 연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 40호를 전후하여 신문사는 종로구 와룡동에서 동대문구 용두동으로 이전하고, 편집은 당시 연세대학교 박사과장에 있던 우실하 선생이 편집국장으로 함께 활동했던 시기이다. 신문사의 이런 변화 중에서도 단영 지면의 개선이고 그 중에서도 <명인> 면은 연재는 돋보인다. 소위 와이드 기사로 전면 통이다. 우선 사진이 내용의 보완재가 아니라 주제로 처리되어 시원하여 가독성을 높여 준다. 사진과 해설 집필은 편집고문 정범태이다. 제40호의 16면 <명인>은 "민초의 한 안고 유랑 예인 생활 60년 김재원”이다. 명인은 중요무형문화제 제3호 남사당놀이이다. 사진은 김재원 선생이 담배대를 물고 두 번째 과장인 버나 접시를 돌리는 장면을 게재했다. 제41호는 "설장고 명인 김병섭”이다. 김병섭은 우도농악의 꽂깔설장고의 명인으로 김호규 대표의 부친이다. 9년 전의 생전활동 사진을 수록하고 정읍 고향에서 11살부터 농악의 길을 걷고 30여년을 우도농악 2세대 명인으로 산 역정을 기술했다. 제42호는 "진도씻김굿 중요무형문화재 제72호 김대례”이다. 제42호는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다. 이후로 가야금 병창 박귀희, 호남농악 채상소고 백남윤, 진도북춤 박병천 명인 등으로 이어졌다. 여기에서 재확인이 되는 것은 <명인>의 대상은 정악 보다는 민속악에 중심을 두었다는 사실이고,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여부를 떠나 실질적인 세평(世評)의 명인까지 포괄 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제도권적 시각과는 달리 비교적 자유로웠음을 을 알 수 있다. 해설 내용은 필자 자신이 직접 만난 명인들에 대해서는 이력보다는 종목의 고유 가치나 유사 종목과의 변별성을 중심으로 기술했고, 선대 명인의 경우는 기존 이력과 사승(師承)관계, 당대 평가 등을 저널리즘적인 토픽 위주로 기술했다. 1997년 3월 16일자 제50호에서 "판소리 흥보가 명창 장월중선”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이 <명인> 코너는 장기 기획물임을 알 수 있다. 이같이 역대로부터 현역의 명인 명창을 주목한 기사는 이후 다양한 코너와 특집형식으로 계속 기사화 되었다. 주요 편집 방향이기 때문이다. 이 <명인> 기획 기사는 당시 다른 매체 기획 기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의미있는 기사이고, 오늘의 빅데이터 시대에도 주목되는 텍스트이다. 결국 이 <명인> 코너는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이면서 국악신문의 독보적인 기획기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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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온 길 13국악신문 특집부 신문사의 사시는 창간이념이다. 신문사 사주의 경영철학이나 경영 이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신문사의 경영방침이나 사원들의 행동지침으로 구체화된 것이기도 하다. 대중을 대상으로 한 언론사임으로 대개는 진실, 공정, 정의 등 언론의 역할과 관련된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일반 회사 사훈(社訓)과는 다르다. 예컨대 인화(人和)라든지 단결, 사랑 등의 키워드로 이익창출을 독려한다. 신문사 사시는 대개 단문형(슬로건형)과 문장형으로 이뤄진다. 전자는 1면 제호 위나 밑에 매일 싣고 있으나 설명체 사시는 특별히 제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사시는 대부분 창간 때 제정된다. 창간사와 함께 창간호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이다. 그래서 창간 당시의 시대상황과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통일이라는 단어는 옛 신문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지만 88년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창간된 일부 신문은 사시로 채택한 예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종교재단과 관련된 신문의 경우에는 당연히 종교적 색채를 드러내기도 한다. 문제는 자신들이 내세운 사시가 실제 보도에 있어 얼마나 충실히 지켜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두 말할 나위 없이 사시가 종사자들의 개인적 가치관과 합치되고 신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날 때 의미를 갖는다. 사시를 통해 그 신문의 어제와 오늘을 가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소위 10대 일간지(조선일보·동아일보·중앙일보·한겨레신문·문화일보·한국일보·경향신문·서울신문·국민일보·세계일보)라고 하는 메이져(major)급 신문사의 사시는 독자에게 신뢰를 얻고, 소속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기능도 하기에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단문형과 문장형 사시를 갖고 있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를 살펴본다. 조선일보는 "독립운동가 조만식(曺晩植/1883~1950) 선생과 방응모(方應謨/1883~1950) 선생이 주도해서 만들었습니다. 이 사시는 지난 세월 동안 조선일보의 흔들림 없는 이념과 지향점이 되었습니다.” 제정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정의옹호(正義擁護) 문화건설(文化建設) 산업발전(産業發展) 불편부당(不偏不黨) 자신들을 ‘민족지’로 내세우고 정의를 통해 문화를 새롭게 세우겠다는 의지와 산업발전에 기여하기 위해 어디에 치우침이 없겠다는 네 가지 슬로건을 사시로 하였다. 이는 1920년 창간 단시 제정한 사시를 100년간 유지하고 있다. 다음 중앙일보 사시다. 사주 이병철(1910~1987)에 의해 ‘정치보다 더 강한 힘’으로 사회의 조화와 안정에 기여하자는 뜻으로 제정했다고 한다. 1. 사회정의에 입각하여 진실을 과감 신속하게 보도하고 당파를 초월한 정론을 환기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밝은 내일에의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고취한다. 2. 사회복지를 증진시키기 위하여 경제후생의 신장을 적극 촉구하고 온갖 불의와 퇴영을배격함으로써 자유언론의 대경대도를 구축한다. 3. 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이성과 실용을 겸비한 건전하고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이 될 것을 자기한다. 이 중앙일보 사시는 설명형 사시의 전형이다. 1965년 창간 당시로부터 현재까지 유지되는 사시다. 진실을 통해 밝은 미래를 이끌고, 경제후생으로 복지사회를 견인하며, 품위있는 민족의 목탁역할을 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살핀 두 신문의 창간이념대로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는 독자의 평가일 뿐이다. 국악신문의 사시는 창간호에서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란 단문형이 제시되었고, 산발적으로 유사한 메시지가 제시되었다. 이와 함께 창간사와 발행인의 발언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시는 창간 당시의 시대상에 그 배경을 두고 있음은 물론이다. 1993년의 판소리 소재 영화<서편제>의 흥행 여파, 1994년 ‘국악의 해’와 ‘국악의 거리’로 제정, 첫 ‘한국방문의 해’ 제정이 그것이다. 국악의 재발견, 국악의 가치 발현, 그리고 국악의 세계화를 이슈화 한 시대였다. 이런 배경에서 창간함으로서 사시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에 기여한다. 2. 놀이문화를 중심으로 한 국악을 중흥시킨다. 3. 민속음악의 생활화에 기여한다. 4. 국악인 공동체를 지원한다. 이 사시는 제호와 창간사 내용과 발행인의 발언, 그리고 산발적으로 제시한 캐치프래이즈를 통해 정리한 것이다.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6’에서도 언급했듯이 ‘전통놀이=민속음악=국악’이란 개념과 국악협회를 중심으로 한 민간단체를 국악 전승 공동체로 이해한 기조에 기인 한다. 결국 국악신문 사시는 민속음악을 국악의 중심에 두고, 교육과 생활화에 기여하며, 국악 공동체 지원 실천을 표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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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4수집가 천태만상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서 수집의 목적은 사람마다 모두 제각각이다. 또한 고서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다르다 보니 수집하는 방식이나 태도 역시 서로 다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여기에서는 고서 수집의 태도를 유형별로 살펴보기로 한다. 나는 정보탐색형·자기만족형·패가망신형·자기주도형 등으로 분류하곤 한다. 정보탐색형 수집가는 대체로 고서 수집보다는 고서가 매매되는 여러 가지 주변 정보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전시회며 경매전 등 각종 고서 모임은 물론 여러 서점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고서에 관한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 또 여러 수집가와 교류하려 노력하기도 한다. 어찌 보면 매우 바람직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러한 과다 정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들 중에는 도리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거나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많다. 고서를 수집하면서도 자신의 수집 분야와 컬렉션의 질에 항상 불안해 하는 모습을 보이며 다른 수집가의 눈치를 살핀다. 소신이 없기 때문에 구매를 결정해야 하는 순간에도 망설이기 일쑤다. 이런 수집가들은 귀하고 좋은 책을 만나더라도, 이 책이 정말 귀하고 좋은 책이라면 다른 수집가가 놔두고 가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해 버리기도 한다. 또 지금 막 고서점에 입수된 책을 자신이 제일 먼저 만났어도 이를 구입해야 좋을지 선뜻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수집 초기의 한 과정으로 일시적으로 하는 생각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큰 문제다. 호산방을 15년 넘게 드나들었으면서 단 한 차례도 고서를 구입한 적이 없는 C씨. 그는, 호산방에는 소위 고서의 대가들과 전문연구자들이 수시로 드나드니, 좋은 책은 자신의 차례까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곤 했다. 그리고 어쩌다 살까 말까 망설이던 책이 팔린 뒤에야 두고두고 후회하곤 했다.(*사진 30) 그러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도 좀체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나는 이따금 청계천이나 변두리 고서점에서 그와 심심찮게 마주치곤 한다. 나는 아직도 그가 어떤 분야의 책을, 왜 수집하려고 하는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 어떤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든 간에 즐거움을 느껴야 하는데, 그는 정보 수집에만 관심을 쏟다가 그 때문에 도리어 스트레스만 받는 것 같았다. C씨와 비슷한 경우로 은행 임원 P씨가 있었다. 내가 그를 안 지는 35년도 넘었다. 그는 오래 전부터 고서에 관심을 갖고 몇몇 고서점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나를 만나기만 하면 고서에 관해 이것저것 묻곤 했다. 금융인답게 고서 수집도 경제논리로 이해하려는 것 같았다. 또한 그는 고서의 유통구조에 심한 불신감을 갖고 있는 듯했다. 같은 책이라도 서점마다 가격이 제각각인 고서의 유통형태를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고, 그러다 보니 고서 수집에 적극성을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차라리 고서 수집을 하지 않는 게 낫겠다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그가 찾아와서,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려고 하는데 좋은 책을 권해 달라고 했다. 취미생활 겸 노후를 위한 투자로 고서를 수집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 후 몇 차례에 걸쳐 책을 사 갔는데 주로 50~60년대 창간호와 문학 서적이었다. 나는 이왕이면 육이오 이전의 책으로 수집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책들은 가격이 비싸니 그냥 50~60년대 책을 수집하겠다고 했다. 앞으로 10~20년 후에는 이것들도 비싸질 것 아니냐는 얘기도 했다. 그때 나는 ‘개 꼬리 삼 년 묵어도 황모(黃毛) 되지 않는다’는 속담을 떠올렸다. 이후 그는 여러 고서점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듯 보였다. 이따금 나를 찾아와서 다른 서점에서 구한 책을 평가해 달라곤 했다. 이런 경우 나는 대부분 잘 샀다고 말해 준다. 그러나 값에 대해서만큼은 무어라 할 말이 없었는데 그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답답했던 모양이다. 채 1년이 지나지 않아 그는 고서 수집을 포기했다. 그가 고서 수집을 그만둔 까닭은, 그때까지도 고서계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그 후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그는 고서 수집을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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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온 길 12「국악신문」 시대(1) 국악신문 특집부 제8호부터 ‘신문’으로 총 11편의 ‘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에서는 주간 전문신문 《놀이문화》의 창간배경으로부터 수익구조까지를 살폈다. 그 기간은 1994년 9월 07일 창간호 발간으로부터 동년 12월 21일 3개월간의 제7호 발간까지이다. 이 기간은 국악신문의 도약기로 수익구조상 주간신문 운영 구조로는 열악하였다. 매우 심한 산후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서 새로운 개혁을 모색해야 할 상황으로 개혁을 단행했다. 그 개혁의 일단이 제호 변경이다. 바로 ‘놀이문화’에서 ‘국악신문’으로의 개제(改題)이다. 1995년 12월 28일, 드디어 제8호 「국악신문」 이 발행되었다. 이후 2020년 9월 7일 26년, 총 293호를 달린 것이다. 사실 ‘놀이문화’라는 제호는 잡지(誌)인지 신문(紙)인지 성격 구분을 애매하게 했다. 이 결과는 우선적으로 광고 수익에 결정적인 장애가 되었다. 잡지이냐 신문이냐에 따라 광고료 책정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격상 시사적인 뉴스 중심이냐 전문적 내용 중심이냐에 따라 잡지냐 신문이냐가 분리됨으로 관장 부서와 독자 타깃(target) 자체도 다르다. 수익구조 개선은 결국 창간이념을 실현하느냐 포기하느냐의 기로임으로 새 이름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제호 변경에 대해서는 최종호인 제7호에서나 개제호인 제8호에서도 의도나 절차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 다만 그 단서는 남겨놓았다. 제7호 15면 하단 5단통 광고면에 독자에 대한 신년인사 ‘근하신년’에 "국악신문 놀이문화가 독자 여러분께 송년인사 드립니다.”라고 하여, ‘국악신문’을 앞세운 것이다. 또한 제8호에서 캐치프레이즈를 "전통예술의 보급화를 위해 앞서가는 국악신문사 놀이문화”라고 하였다. 전자에서는 국악신문사의 놀이문화인지, 놀이문화라는 국악신문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국악신문’이란 제호가 등장한 것만은 분명하다. 후자에서는 ‘국악신문사’라는 사명을 써서 신문을 발행하는 업체임을 밝힌 것이다. 이는 ‘국악’을 이슈(issue)로 뉴스를 전하는 ‘신문’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로서 「국악신문」은 ‘신문’(新聞/Newspaper)의 본령을 전제로 하게 된 것이다. 신문은 다른 매체와 다른 네 가지 고유한 특성을 갖고 있다. 하나는 접촉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으며, 둘은 기록성(記錄性)을 가지고 있어 반복해서 접촉할 수 있으며, 셋은 내용이 새롭고 시사적이며 시의성(時宜性)을 지니며, 넷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발행되는 정기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특성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제한성도 갖고 있다. 그것은 문자를 해독할 수 없는 이들에게는 아예 접촉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는 약점이다. 신문은 네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하나는 보도기능이다. 독자들에게 사회에서 일어나는 제반 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능이다. 둘은 논평기능이다. 사회현상에 대한 해설과 논평을 가하는 기능이다. 셋은 오락기능이다.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기능이다. 넷은 광고기능이다. 독자들에게 상품 및 시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주고 광고주가 그들의 상품이나 경제활동을 대중에게 알려주는 기능이다. 이 때문에 신문은 현대사회의 우리 생활에 중요한 일상배체 구실을 한다. 신문 기사문은 소위 3C의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정확하고(correct), 간결하며 (concise), 명백하여야(clear) 한다. 이러한 기사문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음의 9개 요건을 갖춰야 한다. ① 표준어인 일반 관용어를 쓴다. ② 상용한자와 부득이한 외래어는 표준기준에 맞추어 쓴다. ③ 수식어(부사·형용사)를 쓰지 않으며 문장은 짧게, 내용은 단순하게 쓴다. ④ 주어와 술어의 관계를 명확하게 한다. ⑤ 주어와 술어를 되도록 가깝게 한다. ⑥ 단락을 자주 둔다. ⑦ 문장기호를 쓴다. ⑧ 같은 말(용어)은 두 번 쓰지 않는다. ⑨ 전문어·약어·약자를 피한다. 신문의 표현문장이 뉴스기사문이라고 할 때 문장으로서의 구문형식을 갖춰야 한다. 내용이 세 번 되풀이되는 표현형태로 써야 한다. 그것은 표제( headline)·전문(lead)·본문(內容)의 3단계 구문이다. 이 기술 순서는 결과를 앞에 두고 뒤로 가면서 중요 부분이 약해진다. 이는 ‘도역삼각형서술법(倒逆三角形敍述法)’이다. 또한 뉴스기사의 표제와 전문도 그렇지만 본문은 뉴스의 구성요건인 5W1H, 누가(Who), 언제(When), 어디서(Where), 무엇을(What), 왜(Why), 어떻게(How)라는 표현요소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어야 한다. 이상의 요건을 갖춘 기사문은 다음의 기본으로 편집하게 된다. 통일(unity)·조화(harmony)·균형(balance)·비율(proportion)·대조(contrast)·생동감(movement) 등의 기본을 맥락적으로 만족시켜야 한다. 당연히 이러한 요건들은 항상 서로 연관을 맺고 있으며 기사내용에 따라 적절하게 배합하게 된다. 이상은 종이 신문 ‘국악신문’이 갖춰야 하는 제 요건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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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1《놀이문화》 시대(7)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의 수익구조 《놀이문화》는 제호 옆에 ‘주간’으로 표기했고, 상단에는 ‘국악종합신문’ 또는 ‘주간생활신문’으로 표기하여 놀이문화(국악레포츠) 전문 신문임을 밝혔다. 포맷상 타블로이드판(380 mm × 300 mm/5 × 11¾ 인치)의 반 컬러형이다. 신문(新聞/Newspaper)은 소식과 사건을 전달해주는 정기 간행물의 하나이다. 뉴스를 신문 기사와 사진 등의 형태로 값이 싼 신문지에 인쇄하여 발행하는 매체이다. 이는 모든 종류의 신문의 일반적인 형태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모든 신문은 제호 밑에 "이 신문은 신문윤리강령 및 신문윤리 실천 요강을 준수한다.”를 표기하고 있다.총 7호까지의 《놀이문화》는 이상의 조건에 합치한다. 한국ABC협회 2019년 통계에 의하면 전국에서 발행되는 주간신문은 총 633종이다. 열독률과 구독률의 최전성기였던 1990년대 《놀이문화》 시대는 훨씬 더 종류가 많아 매체간의 경쟁이 심했음을 추정한다. 전통적인 미디어 기업의 글로벌 브랜드는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지만 그 명성과 위력은 변하고 있고, 소규모의 매체는 명멸하였다. 그런데 이들 신문은 당시나 지금이나 전적으로 광고료에 의지하는 기업이다. 그러므로 신문 발행의 기본 운영은 광고수주률에 따라 결정되었다. 결국 모든 신문 광고료 확보라는 수익구조는 미디어 변화를 급속하게 이끌어냈다. 타임워너나 디즈니, 뉴스 코퍼레이션 같은 전통적인 미디어 기업의 글로벌 브랜드는 유지되고 있지만 그 명성과 위력은 변하고 있다. 대신 구글, 애플, 페이스북, 트위터와 같은 새로운 플레이어들이 미디어 영역의 강자로 부상하고 있다. 미디어산업 지형 자체가 변하고 있는 현실에서 전통적인 비즈니스 모델과 관행을 고수하는 미디어 기업은 생존 자체가 점점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디어 기업들에게 필요한 것은 급변하는 환경에서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변화에 적응하고 대처하기 위해 어떠한 혁신을 채택하여 실행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평가가 중요하게 되었다. 미디어 역사에서 백여 년 이상 독점적 지위를 누리며 광고라는 안정된 수익모델을 유지해 왔던 신문사들이 맞고 있는 변화는 다른 어느 미디어보다 더 급격하고 충격적이다. 오랫동안 사회적 공기(公器)로서 뉴스와 정보 생산과 배급의 중추였던 신문은 이미 그 중심적 지위를 잃어 가고 있다. 디지털 기술로 인해 뉴스와 정보를 둘러싼 생산과 유통, 소비방식이 전면적으로 변하는 환경에서 위기에 처한 신문사의 혁신은 더욱 중요하고 민감한 주제다. 이런 상황에서 모든 신문은 경영방침을 다변화하며 생존을 꾸렸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광고수주 방침이다. 방침이란 어떤 조직이나 그 조직의 일을 목적에 맞게 이끌어 경영하는 원칙으로 반복하여 일어나는 같거나 비슷한 문제에 대한 의사 결정에 일관성을 유지하는 원칙이나 실행 절차이다. 과연 광고 수주를 기본으로 한 수익구조 창출을 위한 운영 방침은 무엇일까? 《놀이문화》 총 7호까지의 광고 게재는 일반 신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광고는 광고주 입장에서 "판매를 목적으로 상품에 대한 정보를 매체를 통해 소비자에게 알려 구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고료를 지불하고 게재하는 선전물”이다. 이를 수용자인 신문사 측에서 보면 "생산자의 의뢰로 소비자와 연결시켜 독자를 소비자로 연계시키기 위해 게재료를 수익구조로 삼는 행위”가 된다. 모두 경제행위로 고도의 의도된 거래이다. 다만 광고도 정보라는 사실에서 공익성이 있기도 하다. 결국 이 광고가 신문사의 기본 수익구조이며 경영방침에 의해 선택과 집중이 이뤄진다는 것이다. 《놀이문화》 광고란은 이 신문의 수익구조와 영업 방침을 합리적으로 추론케 한다. 크게 4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번째, 가장 큰 광고 부분은 신문 첫장 전면광고이다. 가로 36.2cm, 세로 15단(50cm)이다. 특별히 양면 '15단 스프레드 광고'가 있지만 7호까지 확인되지 않는다. 전면 광고는 1~5호까지 배면에 한국국악사 악기제작사 광고이다. 이 광고는 오늘의 종합일간지 기준으로는 단가가 1억원에서 1억5천원정도이다. 두번째, 큰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광고 부분은 5단통 광고란이다. 1면의 경우가 가장 고가인데, 1~3호까지가 한국정보통신주의 신용카드조회기 광고이다. 수주율은 30%이다. 다음 2~15면까지 하단 5단통 기사와 반 5단 광고이다. 유료 전체 광고 수주율은 55%정도에 머물고 있다. 세번째, 다음으로 많은 광고가 자사 광고이다. 전국 협력사 모집과 객원기자 모집이다. 이는 광고료 같이 크진 않지만 독자확대와 발송 시스탬상 수익을 창출할 수 있어 협력사 유치는 중요하다. 그리고 놀이문화 이용안내와 광고전문가 모집 광고가 있다. 이 광고는 20% 정도인데, 이는 유료 광고 수주율이 매우 낮은 실상을 메우기 위한 대체수단이기도 하다. (*사진1 참고) 네번째, 마지막 부분은 자사 운용 부대사업 광고이다. ‘정통우도정읍농악 강습’과 ‘이영상 설장구 강습’ 안내인데, 강습이 독자확보와 수익에 도움이 된다. 약 10%정도가 되는데 이 역시 유료광고 수주율이 낮은 결과로 대체 광고이다. 이외에 제호 좌우측 돌출광고와 지면 줄광고가 있다. 기사와 연계된 광고로 효과가 크다. 약 15%정도 수준이다. (*사진2 참고) 정리하면 《놀이문화》의 수익구조는 세 가지 광고 수익에 의존했다. 하나는 상업 유료 광고 수주다. 둘은 자사 고유사업 운영이다. 셋은 지역 지사(협력사) 확충에 의한 사세확장이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수익구조는 주간신문 운영 구조로는 매우 빈약한 편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개혁을 모색해야 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3개월 총 7호 발간은 매우 심한 산후통을 겪은 것이다. 이 산후통은 성장통을 최소화 시켜주는 예방책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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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0《놀이문화》 시대(6)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민속악을 대변하다 《놀이문화》 총 7호의 발행 시기(9월~12월)는 ‘94 국악의 해’ 정점에 있었다. 창간의 시대적 배경과 그 영향권에서 발행되었다. 지난 호에서도 총 7호까지의 기사 방향은 ‘국악의 해’ 주요 프로그램 소개 중심이라고 밝혔다.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창간호-10면 <94 국악의 해 소식>(세종국악관현악단 중국 공연, 표어 3종 소개, 경기도 민속예술경연대회) -15면 <국악의 해 기념 민속예술 대공연>(국악협회 소식) 제2호-제7면 <94 국악의 해>(마당놀이 심청전 미국순회 공연,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제3호-제7면 <94 국악의 해>(국악협회 주최 제14회 대한민국국악제 서울 대국 부산 공연, 세계사물놀이 겨루기대회) 제5호-제8면 <국악의 해 소식>(제35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제4회 동리대상 시상식 및 축하공연, 아태민족음악학회 학술대회, 조선조 왕세자 국혼 재현, 대한민국 종교음악제,제5회 춘향가 및 민요발표회) 제7호-제7면 <국악의 해 대담>(전통공연예술협의회 발족에 관한 보고, 국악의 해를 이끈 사람임헌영, 94국악의 해 실시사업 현황 자체사업과 지원사업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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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0수집도 알아야 한다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취미와 기호를 갖고 있다. 바둑이나 장기를 즐기는 사람, 낚시·골프·여행을 즐기는 사람 등 그 유형도 다양하다. 이처럼 취미란 마음이 끌려 특정한 방향으로 쏠리는 흥미를 말한다. 다시 말해 취미란 본업으로 그리고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것이지만, 때때로 그 대상의 아름다움과 멋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능력이 요구되기도 한다. 우표 수집이나 화폐 수집처럼 무언가를 수집하는 취미도 있는데 고서 수집도 그 중 하나다. 고서를 수집하면서 교양과 지식을 높이고 삶의 풍요로움과 멋을 느끼는 것이다. 또 남이 갖고 있지 않은 귀한 책을 자신만이 소장하고 있다는 데서 강한 자기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물론 이 정도 단계에 이른 수집가라면 단순히 취미라고만 말할 수 없다. 이는 고서 수집이 이미 취미를 넘어서 어느 정도 전문가의 안목을 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구나 어떤 분야의 책을 오랫동안 꾸준히 수집하다 보면 특별히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그 방면의 지식이 쌓여서 전문가가 되게 마련이다. 이런 경우 책을 수집하지 않는 그 방면의 전공자나 학자보다 더 많은 지식을 가질 수도 있다. 수집한 고서에서 얻은 지식을 활용해 국가와 사회에 봉사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자신이 수집한 고서를 바탕으로 연구하고 저술을 내는 일도 포함된다. 더 나아가 박물관이나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도 사회적인 봉사에 속한다. 한편, 수집한 고서를 매도해 경제적인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이것은 처음부터 그러한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했다기보다는 취미와 연구 목적으로 시작한 것이 나중에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다. 또한 고서점 주인처럼 고서의 수집과 판매를 직업으로 하면서 즐거움과 보람을 느낄 수도 있다. 이처럼 고서 수집에는 여러 가지 즐거움이 따른다. 군인이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총을 다루고 쏘는 법을 익혀야 함은 기본이다. 이에 앞서 자신이 왜 전장에 나가는지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있을 때 사기는 충천할 것이다. 고서 수집도 이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수집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갖춰야 할 것들이 있다. 고서를 수집하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이고, 또 있어야 한다. 오랜 시간과 적지 않은 돈, 그리고 열정이 따라야하기에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내가 만나 본 대다수의 수집가들은 수집 목적이 분명치 않아 보였다. 목적이 뚜렷하지 않은 컬렉션은 십중팔구 질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결국에는 애써 모은 책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고서를 수집하는 목적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그저 책이 좋아서 수집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여가를 즐기기 위해, 읽기 위해, 저술을 위해, 박물관이나 자료실 설립을 위해, 또는 투자 등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어느 것이라도 좋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정하고 수집을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을 경우 고서를 수집하다가 중도에서 그만두게 되는 일이 보통이다. 여기에는 대개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고서 수집가가 어느 정도 고서에 눈을 뜨면 자신의 컬렉션을 되돌아보게 마련이다. 이때 대부분의 수집가는 자신의 컬렉션을 보고 깊은 회의에 빠진다. 그동안 내가 정성 들여 수집했다는 게 고작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실망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고서 수집 경력이 십오 년이 넘은 Y씨는 이십 대 시절부터 수집을 해 왔다. 젊은 시절에는 왕성한 활동력으로 서울 변두리 헌책방을 이틀이 멀다 하고 부지런히 다녔다. 수집 대상은 잡지 창간호였다. 대부분의 수집가가 그렇지만,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자신의 관심 분야 외의 책도 사들이게 마련이다. 책이 좋아서 구하기도 하고, 모처럼 들른 서점에서 그냥 나오기가 뭐해서 한두 권 사기도 한다. 그 역시 이렇게 모은 책이 칠팔천 권이 넘었다. 말이 칠팔천 권이지 집 안이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어 움직일 틈도 없었다. 대부분의 수집가가 이와 비슷한 처지일 것이다. 호산방이 장안평에 있던 시절, K씨에게서 잡지 수천여 권을 구입한 적이 있었다. 해방 이전의 창간호와 귀중본 잡지가 상당수 포함된, 매우 수준 높은 컬렉션이었다. 이 책들을 본 Y씨가 의기소침해진 것은 당연했다. 자신의 장서하고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이었으니 얼마나 맥이 빠졌겠는가. 그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얼마 후 고서 수집을 그만두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찌 보면 그로서는 그만한 시점에서 결심을 잘한 것이라 생각한다. 수집 목적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취미로 시작했지만 수집하다 보니 수천 권이 된 책을 어찌할 것인가. 관리도 그렇고 활용 방안도 마땅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절망하게 만든 것은 장서의 질이었다. 수천 권의 장서 가운데 육이오 이전의 희귀 잡지는 불과 몇 권 안 되었으니, 고서 수집가의 장서로 내세우기에는 빈약한 수준이었다. 나는 이와 비슷한 경우를 여러 번 보았다. 취미로 시작했다 해도 수천 권을 수집했다면 이것은 이미 취미가 아니다. 취미란 여가를 이용하여 정신적 육체적 즐거움을 얻기 위한 것인데, 도리어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뭔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취미로 하기에는 애당초 잡지 창간호라는 주제부터 목적에 적합하지 않았다. Y씨는 그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나는 수집 목적이 분명치 않다면 고서 수집을 그만두라고 단호하게 권하고 싶다. 다시 말하지만 목적이 분명치 않은 수집은 질 좋은 컬렉션을 기대할 수 없고, 컬렉션의 질이 좋지 않으면 활용 효과 역시 기대할 수 없다. 또 이로 인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막심하여 결국에는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 수집의 목적이 정해졌으면 그에 맞는 수집 방향으로 철저하게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큰 기관이라도 여러 분야의 책을 동시에 수집하는 것은 무리다. 특히 개인의 경우 수집과 보관에 따르는 한계가 분명히 존재하기 때문에 규모가 작을수록 좋고, 주제는 독특할수록 좋다. 이는 경제적인 문제와도 직결되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어떤 분야의 책을 수집할 것인지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이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입장과 상황에 알맞은 주제의 선정이다. 한 연구자가 연구논문의 주제를 무엇으로 정하느냐가 그 논문의 성과를 결정짓는 것과 같은 이치다. 수집 대상의 주제를 정해 놓았어도 수집하다 보면 범위가 자꾸만 넓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이를 조절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애당초 이런 계획 없이 수집을 시작했다면, 어느 시점을 넘긴 다음부터는 수집가 자신도 주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자신과 연관 있는 주제라면 더욱 좋다. 직업·고향·종교·취미·전공 등과 관련짓는 것도 한 방법이다. 가령 박물관 설립 같은 큰 목표를 세우고 고서 수집의 뜻을 두었다면 주제를 정하는 단계부터 전문가와 상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어떤 주제의 박물관을 설립할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미 누군가가 수십 년 전부터 이와 유사한 주제의 박물관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면 어떡하겠는가.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기에 전문가라면 이러한 정보까지 꿰뚫고 있어야 한다. 앞에 예로 든 것처럼 주제를 출판미술 또는 출판디자인 등으로 정했다면, 다음은 수집 대상의 범위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한정 지어야 한다. 우선 수집 대상을 1950년대 이전 자료로 한정하고, 그것을 다시 조선시대 자료와 개화기 이후의 근대 자료로 구분한다. 조선시대 자료는 도서와 비도서로 나누고, 도서는 또다시 판화가 실린 도서, 목판 지도, 활자본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비도서는 판화가 실린 목판과 시전지판(詩箋紙板), 능화판(菱花板) 등 판화 관련 실물자료와 인쇄 관련 유물 따위로 구분한다. 근대 자료도 도서와 비도서로 구분하여, 도서는 장정가가 표기된 도서와 편집디자인이 우수한 도서, 교과서 삽화 등으로 나누고, 비도서는 포스터·광고지·증명서 등 일상 속의 출판디자인 자료로 다시 구분한다. 특히 장정에 사용한 표지그림이나 삽화의 원화 등은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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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9《놀이문화》 시대(5)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의 주요기사 전 회에서는 《놀이문화》창간호에서 7호까지의 지면 분석을 통해 사시나 편집방향 등을 수립하지 못하였음을 지적했다. 이번 회에서는 이의 연장선상에서 주요기사를 살펴 현 단계의 상황을 구체화 하고자 한다. 우선 전체 7호까지의 주요 기사를 일별(一瞥)한다. 대상은 고정 지면으로 일종의 섹션화를 이룬 기사만을 대상으로 하였다. 창간호-<농악이란 무엇인가?>(2면), <소리/춤>(11면), <굿>(12면) 제2호-<전라좌도 중평굿 1회>(2면), <서도소리>(11면), <경사남도 제3호 한량무>(12면) 제3호-<전라좌도 진안 중평굿 2회>(2면), <봉산탈춤>(12면) 제4호-<강령탈춤>(2면) 제5호-<은율탈춤>(2면), <밀양백중놀이>(6면) 제6호-<동래들놀음>(8면), <경기안성 풍물놀이>(11면), <평안도소리>(13면) 제7호-<수영들놀음>(3면), <전라우도 정음농악>(10면), <경기도소리>(13면) 이상에서 확인되는 것은 민속음악(5회), 민속춤(6회), 민속놀이(5회), 굿(1회)을 다루었다. 이 4개 종목은 모두 ‘민속’에 속한다. 이는 궁중음악, 정재, 제례의 상대적의 종목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서 《놀이문화》의 편집방향은 민속음악, 놀이, 춤(연희)에 편향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놀이문화》의 특집성 기사로 볼 수 있는 지면이 있다. ‘94 국악의 해’ 관련 기사이다. 《놀이문화》 창간 배경의 하나가 ‘국악의 해’ 제정에 여론지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발의하였다고 살핀 바 있다. 이 거국적인 행사는 당연히 최대의 기사 대상이다. ‘94국악의 해 소식’과 ‘국악계 동정’란인데, 총 6회를 다뤘다. 내용상으로는 ①‘국악의 해’ 조직위원회 소식 ②해외공연 ③국립극장과 국립국악원 공연 소개 ④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대회 소개 ⑤국악협회 소식 ⑥조직위원회 사무국장 인터뷰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지면과 내용으로는 전문지로서는 매우 빈약한 편이다. 이런 사정은 당시 일간지와 비교하면 확연하게 들어난다. 우선 1월 주요 신문에서는 사설에서 ‘국악의 해’에 대한 기대와 실행을 추동했다. <국민의 국악이 돼야>(조선일보. 1994, 01. 06. ), <국제화 시대의 국악의 해>( 국민일보, 1994, 01. 20.), <국악, 생활화, 세계화의 해>( 서울신문,1994, 01. 21), <국악의 우리의 신명>(한국일보, 1994, 01. 21. ) 등이다. 그리고 특집 기사로는 「서울신문」 1월 22일자 임영숙 논설위원이 <수제천에 우는 아이와 국악교육>, 「국민일보」 2월 17일자 는 정진기 논설위원이 <국악의 해에 거는 기대>라는 기사를 올렸다. 더욱 돋보이는 것은 연중 연재물이다. 「조선일보」는 1월 10일부터 <명사들의 국악 이야기>를, 「문화일보」는 <우리소리의 뿌리>를, 「경향신문」은 <가락 따라 소리 따라>를, 「한국경제신문」은 <명인명창>을, 「국민일보」는 <소리의 맥-명인명창의 고향을 찾아>를, 「일간스포츠」는 <국악 365>를, 「세계일보」는 <94국악의 해 맞아 살펴본 우리악기 우리풍류>를, 「동아일보」는 <한명희의 국악교실>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방송에서도 연초에 비중있는 프로그램이 제작되었다. 1월 22일 KBS TV <심야토론-국악의 해>를, 2월 3일 SBS의 <시사기획-버려진 소리꾼들>을, 2월 10일 EBS <국악의 해 기념 특집기획-가얏고에 실은 민중의 정서>를, 2월 13일 KBS 1TV의 <문화가 산책-박동진 명창의 득음> 등을 방영하였다. 이 같은 언론의 반응은 1월 20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선포 기념식의 응답이었다. "우리의 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국제화는 결코 세계인들로부터 존경도, 경쟁력도 가질 수 없으므로 올 한 해 동안 모든 국악인이 뜻을 모아 국악의 원형보존과 재창조에 힘써 달라"는 대통령의 메시지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하면 《놀이문화》 두 달 동안 5회에 단신 정도의 내용은 매우 빈약했다고 본다. 그럼에도 《놀이문화》가 게재한 3가지 형태의 기념 표제(標題, title)는 그나마 아쉬움을 달래주는 다음 기록이다. "올해는 국악의 해, 신명나는 밝은 사회” "우리 가락 겨레의 얼” "얼씨구 우리가락 좋을시고 우리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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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8《놀이문화》 시대(4)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의 지면구성 지난 회에서《놀이문화》창간호를 분석하여 대체적 성격을 밝혔다. 이를 통해 7호까지 발행된 《놀이문화》 전체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번회에서는 7호까지 《놀이문화》지면을 여론지로서 형태와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시(社是)는 신문사의 창간이념이다. 일반적으로 제호를 중심으로 상하 또는 좌우에 배치하는데, '…하자'는 식의 슬로건형이나 진실·정의·정론 같은 키워드 제시형이 있다. 《놀이문화》사시는 제호 위에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이 창간시의 사시는 제2호에서 "국악 레포츠 주간 생활신문”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머지 호에서는 "국악인을 위한 국악 종합신문”으로 다르게 제시된다. 결국 사시에서 변화상은 창간 기획단계에서 확고한 방향을 세우지 못한 결과이다. 면수는 16면(창간호, 2, 3, 6, 7호)형태가 5회, 8면(4, 5호)형태가 2회이다. 색도는 4호부터 7호까지 1면과 최종면만 컬러 인쇄로 했고, 나머지는 흑백 인쇄이다. 이 색도에 대해서는 제4호 1면 자사 광고에서 예고했다. 이는 광고 수주와 광고료 책정에 관한 것임을 알게 한다. 3호 1면 자사 광고에서 ‘박스 광고’와 ‘줄 광고’에 대한 각각의 광고료와 10월 5일 발행의 제4호에서 컬러로 인쇄한다고 예고한 것이다. 제2~4호까지의 1면에는 기사 없이 모두 광고로만 구성했다. 제2호는 한가위 인사와 추석 휴간을 알리는 사고(社告)로 배치했다. 제3호는 광고 가격과 제4호부터 컬러로 발행한다는 사고를 냈다. 제4호는 지면 개선을 알리는 사고를 배치했다. 이 사고에서 두 가지를 제시했다. 하나는 8면의 ‘과감한 지면 개선작업’을 통해 놀이 전문지의 기능을 다하겠음을 밝혔다. 다음은 "지면의 컬라화를 이룸으로써 기존의 광고에 비하여 탁월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광고를 한 것이다. 제5호는 ‘신라 귀침 효과’라는 기사형 광고를 냈다. 문의 전화번호를 명기에서 광고라는 것은 확인된다. ‘지면 개선작업’의 결과는 제6호와 7호 1면 구성에서 확인된다. 기사 관련 사진 1컷과 광고성 공연 예고 사진 2컷으로 배치했다. 이는 제2~5호 까지의 전체 광고로 배치한 것과 전혀 다른 형태이다. 제6호 1면은 슬기둥 공연 사진(관련기사 6면)과 ‘고 김숙자 추모공연’(문예회관대극장)과 ‘품바’ 공연 사진이다. 제7호는 김연수(金演洙/1907∼1974)의 판소리 음반 복각 CD 사진(관련 기사 12면)과 왕기석의 수궁가 공연(국립극장) 광고와 김덕수패/래드썬 공연(호암 아트홀) 안내 사진으로 배치했다. 이는 제7호 ‘국악신문’으로의 개제호(改題號) 체재로 이어졌다. 이미 살핀 창간호를 제외하고 제2호에서 6호까지의 지면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각 호의 공통 고정 지면은 ‘풍물기행’, ‘동호인 동정’, ‘한국의 탈춤’ 세 분야이다. 창간호의 ‘문화계 소식’이 제2~4호에서는 ‘문화가 산책’으로 바뀌었다. 제6호와 7호에서는 제2면에서 ‘국악계 동정’난을 배치시켰다. 이 난도 지면 개선 작업으로 신설된 것이다. 이상에서 제7호까지의 지면 형태와 편집방향을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하나는 사시를 확정하지 못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창간의 당위(當爲)만을 앞세우고 편집방향 등은 확곡하게 수립하지 못한 결과이다. 둘은 고정 지면의 섹션(Section)화를 확립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역시 사시나 편집방향 등을 수립하지 못한 결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셋은 4호부터 지면 개선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이는 나름의 자체적 판단의 결과에서 개선한 것이다. 마지막은 제1면 광고에서 관련사진으로 대체한 것과 컬러인쇄 전환 등의 개선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광고료에 의지한 운영상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을 다소 극복하기 위해 조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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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7《놀이문화》 시대(3) 국악신문 특집부 창간호의 지면구성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을 구현하는 신문’이란 이념으로 발간한 창간호는 총 16면이다. 제1면은 신문의 얼굴로 제호와 창간사를 중앙에 배치하고, 지면 안내와 하단 광고로 구성했다. 그리고 자사 구독신청과 광고게재 안내하고, 제호 우측에 주간신문임을 ‘수요 서울 전역판’으로 표기했다. 지면 안내에서는 각 면의 기사를 소개했다. 하단 5단 통 광고는 신용카드 조회기 한국정보통신주식회사이다. 제2면은 ‘풍물기행’ 난으로 농악을 다루었다. 개념, 명칭, 유형으로 제시한 글은 기사이기 보다는 학술문 성격이다. 집필자나 기자명은 밝히지 않았지만 기존 발표자료의 전문 게재로 본다. 주요 내용은 농악을 연주예능, 종교예능, 노동예능으로 구분하고 명칭과 개념을 각각 제시했다. 유형에서는 기원농악, 노작농악, 걸립농악, 연희농악으로 4개 분류하고, 지역적 분류로는 영동농악, 영남농악, 호남우도농악과 호남좌도농악으로 4개 분류했다. 결국 제2면은 종합 일간지 섹션개념으로는 학술난이기도 하다. 학술난 성격의 면수가 11면과 12면에 연속된다. 11면은 ‘민요란 무엇인가?’란 개설적 논제로 경기민요, 서도민요, 남도민요, 전통민요로 분류하여 기술했다. 12면은 ‘1 동해안 무속의 특징’의 제하로 연재물이라는 것을 밝혔다. 주 내용은 2장의 사진과 함께 굿 중심으로 수록했다. 이 2면의 형태 역시 무기명으로 기존 학술자료의 인용인듯 하다. 제3면은 ‘여행스케치’란 타이틀로 경기도 가평군 ‘명지산 계곡’을 상세한 안내도와 함께 다루었다. 경춘가도를 통한 접근 방법과 인근 춘천댐과의 연계 코스를 소개했다. 같은 성격으로 10면과 연결된다. ‘주말산행’에서 강원도 철원군 상해봉을 다루었다. 15면도 같은 성격으로 ‘모험적인 레포츠 래프팅’에서 한탄강을 대상으로 장비 사용 등을 제시했다. 이상에서 언급한 3, 10, 15면은 종합지 셱션(Section) 개념으로는 문화면 중 ‘레져/오락’란으로 볼 수 있다. 제4면은 ‘동호인 동정’란이다. 1983년 흥사단이 운영하는 탈춤 동호인단체 ‘탈벗’을 두 장의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제5면은 ‘창작 뮤지컬 꿈꾸는 기차’라는 작품을 소개했다. 이 뮤지컬은 동학 1백주년 기념작으로 권오성 연출로 바탕골 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작품이다. 6면은 국내 영화와 비디오 소개란이다. 조정래 원작 장선우 감독의 ‘태백산맥’을 소개했다. 특히 동일 영화사인 태흥영화사와 ‘서편제’의 주인공 김명곤 주연을 주목해서 기술했다. 더불어 국내 비디오 작품의 공급 유통과 수집 방법 등을 안내했다. 14면은 해외 ‘금주의 비디오’란으로 ‘방탄자들’과 ‘찰리 채플린’ 작품해설에 할애했다. 이상의 4, 5, 6, 14면은 취미란으로 볼 수 있다. 제7면은 ‘문화가 산책’으로 공연과 전시회 안내난이다. 무용은 유니버셜발레단 공연을 소개하고, 연극은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소개했다. 전시회는 서양화가 전병현 작품전을 소개했다. 이 난은 종합지의 공연 및 전람회란의 성격이다. 제13면 상단은 《놀이문화》 지사, 대리점, 직원 모집 광고로 구성했다. 이 같은 광고는 7면 객원기자 모집, 12면 광고 의뢰 방법 등을 소개하는 형식과 같다. 자사 광고가 전면 또는 하단 광고난에 게재한 것은 창간호로서 매체를 소개할 필요성 때문에 배정한 것이다. 제16면은 8면과 함께 전면 광고이다. 16면은 한국국악사와 판매 악기 광고이고 8면은 희조산업의 각종운반기구 광고이다. 그리고 전 지면의 하단에 광고를 배치하는 것은 오늘의 종합일간지의 굳어진 관행이다. 이 광고란은 운영 측면에서 중점 배치됨으로서 신문사와 사주 영업 방침 성격과 관련이 있어 별도의 분석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광고란을 분석하면 상업적 광고, 사업적 광고, 공익적 광고로 분류가 된다. 관련사업 광고와 공익성 광고는 부연할 필요가 있다. 사업적 광고는 2면 하단 ‘우도정읍농요 강습’, 5면 하단 ‘편집대행’, 9면 하단 ‘국악강습안내’가 있다. 이 중 2면의 우도농악 강습안내는 이영상 선생의 설장구 강습이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주최 발표회는 국악신문의 지속적 사업이라는 것은 주목해야 한다. ‘국악강습안내’ 역시 최근까지 ‘국악로 전통문화학교’(교장 안숙선)라는 형태로 지속해 온 사업이다. 이는 모두 《놀이문화》의 부대사업으로 전통문화 보급과 수익을 위한 광고이다. 공익광고는 10, 11, 15면 하단 5단 통 광고이다. 이 중 "사회를 좀 먹는 사이비 기자를 우리 손으로 신고합시다”를 내세운 공보처 광고이고, 두 편은 ‘94 국악의 해 소식’과 국악협회 국악의 해 기념 ‘민속예술 대공연’ 안내이다. 공보처 광고는 당시 언론환경을 알 수 있게 하고, 두 편에서는 "올해는 국악의 해 신명나는 밝은 사회"라는 표어 등을 통해 ‘국악의 해’ 사업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어 유용하다. 이상과 같이 전체 지면 구성과 기사 내용, 그리고 광고면 분석을 했다. 이를 통해 제호 《놀이문화》에서의 ‘놀이’는 연행 중심의 민속놀이고, ‘국악’의 중심을 민속놀이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지난 호에서 살핀 창간사 분석 결과와도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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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6《놀이문화》 시대(2)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창간 이념 1984년 09월 07일 창간, 제호(題號) 《놀이문화》, 캐치프래이즈(Catchphrase)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 창간사(創刊辭) 발행인 김호규 명의 6개 문단 17개 문장, 총 지면 16면, 이에 의한 창간이념(創刊理念)을 다음과 같이 표방했다. ‘삶의 풍요를 인도하는 정보를 담아 공동체 결속을 구현하는 신문’ 새마을운동 성취에 의한 ‘한강의 기적’,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성공적 개최에 의한 국제적 위상 제고, 이의 자부심으로 선포한 ‘국악의 해’와 ‘한국방문의 해’에 대한 희망이 표방된 창간이념이다. 그래서 ‘삶’, ‘정보’, ‘공동체’가 키워드로 제시된 것이다. 창간사는 17개 문장 6개 단락으로 구성되었다. 첫 문장은 "농경문화에 뿌리를 두고 생활해 온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흥겹고 신명나는 각종 놀이문화를 생활 속에서 구현해 왔습니다.”로 시작한다. 그리고 "소리만 요란하고 겉모습만 화려한 빈 수레이기를 거부하고, 비록 규모는 작지만 풍성한 수확물로 그득찬 소쿠리 역할을 당당히 해 나가겠습니다.”라는 다짐으로 끝맺는다. 삶의 풍요는 농경문화의 신명을 현재화 하는 것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풍성한 정보를 담는 언론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겠다는 각오의 피력이다. 첫 문단은 우리의 마을 공동체 결속은 농악·탈춤·마당놀이·백중놀이 등의 춤과 소리에 의한 신명에서 비롯됨을 강조하고 이의 구현을 ‘삶의 풍요’로 규정했다. 두 번째 문단은 ‘우리의 춤과 소리에 의한 전통문화가 서양문화 선호 인식에 점령당한 것은 아닌가’라는 자책과 함께 이의 ‘보존과 전승을 재주꾼들의 기교에 맡겨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세 번째 단락은 《놀이문화》는 이 지적을 해결하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려고 창간한다고 밝혔다. 네 번째 단락은 ‘전통과 현대의 이상적 조화’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다섯 번째 단락에서는 대안 제시와 실천을 촉구하는 매체로서 ‘변변한 국악 관련 잡지나 신문이 없다’고 하며 국악계의 관심으로 신문을 창간하다고 부연했다. 여섯 번째 문단에서는 문화예술 ‘균형 발전을 위해 정서함양 및 가치관 확립을 위한 전문지를 꾸려간다’고 했다. 최종 단락에서는 ‘규모는 작지만 풍성한 정보를 담는 소박한 신문을 지향한다’고 선언했다. 이상의 창간사를 요약하면 다음의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나는 1990년대 중반 전통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수용하여 창간하였다는 사실이다. 둘은 전통문화의 핵심인 공동체 결속 요소를 춤과 소리에 의한 신명으로 보고, 그 중심을 농악·탈춤·마당놀이·백중놀이 같은 놀이문화로 보았다는 점이다. 셋은 다소 편중된 시각에서, 88올림픽경기 개회식 공연 고싸움놀이와 1993년의 영화<서편제> 흥행 성공에 의한 민속놀이나 판소리에 대한 관심이 정중한 정재(呈才)나 장중한 정악(正樂)보다 신명나는 민속놀이와 음악을 더 선호한 배경을 반영한 것이란 점이다. 마지막은 우리의 전통적 가치인 신명(神明)을 오늘의 풍요로운 삶에 불어넣는 도구가 바로 전문지(專門紙)임을 확신하고, 그 소임을 사명(社命)으로 한 사실이다. 이상의 네 가지 사실은 《놀이문화》 창간사가 담은 시대정신인 것이다. 창간호의 백호(白蒿)는 창간사이다. 창간사는 수정(修訂)과 수정(修整)에 의한 수정(水晶)이다. 창간사의 생명은 시대정신에 있다. 《놀이문화》는 나름의 시대정신을 사시(社是)에 반영한 언론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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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5《놀이문화》 시대(1) 국악신문 특집부 《놀이문화》 창간호 2020년 9월 7일, 《국악신문》은 지령 26년을 맞았다. 1994년 09년 07일 창간으로부터 기산한 나이다. 그런데 창간 당시의 제호는 《국악신문》이 아닌 《놀이문화》이다. 이 제호는 제7호까지 유지되다가 제8호부터 《국악신문》으로 변경하였다. 지령을 승계한 것이다. 제호가 변경되면 성격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지령을 승계하면 동일체로 인정한다.* 창간호는 첫 번째 발간호로 초호(初號) 또는 수호(首號)라고도 한다. 이런 의미가 포함된 것은 그만큼 창간호에는 간행물의 정체성과 미래상을 제시하며 정성과 노력과 실험성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인데, 창간시기와 창간사가 가장 중요하다. 우선 1994년 9월을 창간 시기로 잡은 배경을 살펴보면 이 신문의 성격이 좁혀진다. 네 가지가 중첩된다. 하나는 1993년의 판소리 소재 영화<서편제>(임권택 감독)의 흥행 여파이다. 단성사에서 4월에 개봉하여 196일 동안 1백만 관객을 동원시키는 저력을 일으켰다. 이에 의해 판소리 같은 민속음악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지는 시기였다. 둘은 1994년 10월부터 2달간 ‘국악의 해’ 로 제정되어 대대적인 행사가 있었다. 전국적인 국악공연과 경창대회가 붐을 이루었다. 셋은 이 ‘국악의 해’와 연계한 첫 ‘한국방문의 해’(위원장 황병기)가 제정되어 모든 해외공관이 동원된 해이다. 국악이 우리 민족의 정서를 진솔하게 담고 있으면서도 개방화의 물결을 타고 들이닥친 서양음악에 밀려 오랫동안 방치된 채 홀대를 받아왔다는 점에서 국악을 통해 한국을 알리고 이를 관광객 유치의 계기로 삼자는 취지에서다. 넷은 종로3가 단성사와 창덕궁 중간의 4거리 일대를 ‘국악의 거리’로 제정, 선포하는 해이다. 이미 1992년부터 준비되어 온 것을 공식화 한 것으로, ‘국악의 해’ 조직위원회에서 10월에 선포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국악 부흥의 계기를 맞은 1994년은 국악계로서는 한국의 정체성에 전통음악은 있는가라는 자성과 함께 대대적인 잔치를 준비하게 되었다. 국악이 전통문화 분야에서 존재를 확인시킬 수 있는 계기였으니 활성화를 위한 여러 방안이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국악인의 한 사람으로 창의적 발상을 한 것이 전통음악 전문 대변지의 창간이었다. 이 시기 유형문화재 중심의 전통문화 관련 잡지와 팝송과 서양 클래식 전문지는 있었어도 전통음악 전문지는 없던 상황이다. 《놀이문화》의 창간은 이런 정황에서 탄생한 것이다. "삶을 풍요롭게 인도하는 주간신문”이란 사시(社是)를 표방한 《놀이문화》 창간호는 타브로이드판 흑백 총 16면, ‘발행인 김호규’ 명의의 창간사가 제1면을 장식했다. 발간 배경과 취지는 물론 발행인으로서의 경영방침도 담겼다. 제1면은 창간사와 목차 그리고 3개의 광고를 배치했다. 제2면은 <풍물기행>이란 제하에 ‘농악’에 대해 해설했다. 3면은 <여행 스케치>로 경기도 가평의 관광지 명지계곡을 안내했다. 4면은 <동호인 동정>난으로 탈춤 단체 ‘탈벗’을 소개했다. 5면은 공연소개 난으로 동학 100주년 기념작 뮤지컬 <꿈꾸는 기차>를 소개했다. 6면은 영화와 비디오를 소개하는 난으로 영화<태백산맥>을 소개했다. 7면은 <문화가 산책>으로 미술분야 행사 등을 소개했다. 8~10면은 레져 분야 전면 광고와 관련 기업체를 소개했다. 11~12면은 학술면 성격으로 민요와 굿 음악을 소개했다. 13면은 본지 《놀이문화》를 소개하고 지사 모집을 안내했다. 14~15면은 오락과 스포츠난으로 배정했다. 16면은 광고성 기사로 ‘한국국악사’를 소개했다. 모든 기사는 무기명이다. 전 16면 모두 하단은 5단 통광고로 배치했다. 이렇게 《국악신문》 창간호는 우리 국악사 초유의 국민적 관심 속에서 옥동자의 하나로 탄생하였다. 국악인 35세 청년 김호규라는 한 선각자의 발상으로부터다. 이후 제호를 변경하여 정체성을 다지며 4반세기를 넘겨왔다. * 예를 들면 1945년 11월 23일 창간한 《서울신문》이 1998년 11월 11일 《대한매일》(大韓每日)로 변경하였다가 다시 2004년 1월 1일 《서울신문》으로 환원했다. 이 같은 변경과 환원에 있었어도 그 지령을 승계하여 동일체로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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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성공 이끈 「인천 팔미도 등대」 사적 지정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인천 팔미도 등대」를 국가지정문화재(사적)로 지정하고, 「독립신문(獨立新聞) 상해판」 등 2건은 문화재로 등록 예고하였다. 사적 제557호로 지정되는 「인천 팔미도 등대」는 1903년에 세워진 국내 현존 최고(最古)의 근대식 등대다. 이 등대는 6·25전쟁 당시, 수도 탈환의 성공적 발판으로 평가받는 ‘인천상륙작전’(1950.9.15.)에서 연합군 함대를 인천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여 전쟁의 국면을 일시에 뒤바꾸는 데 이바지한 역사·상징적인 가치가 있다. 특히, 사적 지정일인 9월 15일은 인천상륙작전 70주년 기념일이기도 하여 의미가 있다. 이번에 문화재로 등록예고하는 「독립신문(獨立新聞) 상해판」은 1919년 8월 창간부터 1926년 11월 폐간까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국한문으로 발행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로서, 국제 정세, 임시정부 활동상, 국내외 독립운동 동향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임시정부의 역할과 존재가치를 실증하는 귀중한 사료인 해당 유물은 전체 198개 호 중 창간호와 마지막 호를 포함한 총 170개 호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존에 확인되지 않았던 5개 호(제177~180호, 제195호)도 포함하고 있다. 이는 총 177개 호를 소장하고 있는 기존의「독립신문(獨立新聞) 상해판」(국가등록문화재 제510호, 2012.10.17 등록)과 더불어 학술연구·전시·교육 등에 있어 가치가 높다고 판단하였다.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은 강당 건물로서의 필요한 층고 확보를 위해 사용한 ‘맨사드 지붕’ 등의 건축 수법을 잘 보여주는 특징을 가지고 있고, 대구 구 도심의 오래된 학교시설로서 근대기 도시 공간 구조와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도시 역사와 교육사, 지역사 면에서 의미를 크다고 판단하여 등록예고하였다. * 맨사드 지붕(mansard roof): 지붕 상부와 하부의 지붕면에서 경사를 완급 2단으로 한 형식 이번에 등록 예고한 「독립신문(獨立新聞) 상해판」 과 「대구 동인초등학교 강당」은 30일간의 예고 기간을 거쳐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최종 등록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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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사] 故 김호규 사장님 영전에. 속없고 철없는 사람故 김호규 사장님! 국악신문 김호규 사장님, 272일 만에 늦은 추모식을 올립니다. 2019년 12월 13일, 추도문 낭독도, 노제도 없이 보내드렸습니다. 너무나 급작스러워 황망한 탓이었습니다. 오늘 2020년 9월 7일, 사장님의 영혼이 담긴 국악신문의 창간 26주년을 맞았습니다. 이에 하늘문공원에서 사장님의 피속에 흐르던 ‘김병섭류 설장고’ 가락과 혼이 담긴 국악신문 창간호, 제10호, 제100호를 올립니다. 영원히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더불어 영전에 삼가 보고 드립니다. 특별한 국면과 새로운 언론환경에 대응하기 위해 그동안의 지면 신문에서 인터넷신문으로의 전환으로 재창간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그동안 준비한 인터넷 국악신문 9월 7일자 첫 입력 기사로 사장님의 늦은 추모사와 재창간 축사를 올립니다. 많은 분들의 격려와 관심으로 새 활로를 찾았습을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이제 출범하는 ‘인터넷 국악신문’에서는 사장님을 ‘故 김호규 사장님’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명복을 비옵니다. 2020. 09. 07 삼가 양주 하늘문추모공원에서 직원일동 드립니다. 故 김호규(金浩奎/1959~2019) 사장 1970~1987년 김병섭(1921~1987)선생께 설장구 및 우도농악 사사 1978년 서울국악중고등학교 졸업 1994~2019년 25년간 국악신문 대표/발행인 1995년 국악예술단 창단 2000~2016년 어린이국악명인전 개최 2001년 서울실버국악제전 주최 2006년 (주)국악엔터테인먼트사 설립 2006~2012년 (사)한국국악협회 이사 2008년 문화부장관상 수상 2010년 한국구악협회 공로상 수상 2010년 평화기원 전국국악경연대회 주최 2011~2016년 한국춤제전 차세대명무전 개최(5회 개최) 2016~2019년 국악로전통문화학교 설립 운영(교장 안숙선) 2017년 서울특별시장상 2018년 한국국악사 개업 2017~2018년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수상 2019년 문화계 대표단 일원으로 청와대 간담회 참가 2019년 12월 11일 소천 [추도사] 속없고 철없는 사람 박종철(극작가, 연출가) 전문예술단체 한국창극원, 창덕궁소극장 대표, 문인협회(희곡) 연극협회(연출)회원 사람이 명을 달리하여 세상에서 헤어진다면 어떤 사람은 가슴에 묻고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그 사람을 추억하고 기억한다. 그런 삶을 살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오늘 국악신문사를 운영하였고, 국악평론가로, 실연자로 살다 간 김호규 사장을 추억하고자 한다. 나는 그 사람을 사장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냥 철없는 형과 철없는 동생이었다. 필자에게 형이라 부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국악계에서, 국악로와 행사장, 공연장에서 나에게 형- 부르며 나를 챙기고 찾던 정겨운 사람이었다. 어느 날 그가 사람으로서 대화하지 못할 길을 떠났다는 부고를 받게 되었다. 올해 나이 70에도 속없고 철없이 살아가는 나에게 더 철없이 살던 그 사람이 술잔을 건네며 다소 엉뚱한 제안과 또는 나의 작품 활동을 기사로 쓰겠다며 정답게 굴던 그의 생전모습이 문뜩 문뜩 또 보고 싶어진다. 전생과 사후세계가 있는 것일까!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을 것인가! 사람의 인연은 맺고 끊어짐이 계속되고 있기에 살아생전 그 이별을 수 없이 겪고 사는 것을 막을 수 없으련만, 왜 이리도 그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지는지! 그는 뼈 속 깊이 국악인이었다. 국악예술계를 제일 깊이 알고 이해하며 그 분야의 발전에 책임을 지고자 노력한 사람이었다. 철없어 보이겠지만 그가 떠난 국악로는 활기를 잃은 것이고, 어느 날 그가 툭 튀어나와 형 하고 부를 것 같은 그리움으로 남는 사람이다. 그립다 왜 떠나면 더 그리운 것인가! 그동안 그렇게 살다 간 기인으로 김호규 망인의 부인과 자제들의 마음고생 등을 위로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 그의 활력과 추진력, 뿌리 깊은 국악인으로 평생 국악신문을 만들고 기획하고 그 지면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국악발전에 기여하였으니 오랜 동안 그의 생을 기억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행히 자제가 국악신문의 역사를 이어간다니 각별한 관심과 지원, 국악가족으로 국악예술인 이 함께 기뻐할 일이다. 계승은 순수 전통음악의 발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동생 하늘에는 코로나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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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국립무형유산원『무형유산』지 창간호 원고 모집무제 문서 2016년 국립무형유산원『무형유산』지 창간호 원고 모집 안내 국립무형유산원은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2016.3.28.)의 시행에 맞추어 무형유산의 조사연구방법론, 공연전시기획, 교육, 문화콘텐츠 개발, 국제교류, 아카이브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연구자의 의견을 담아 『무형유산』지를 연 2회 발간하고자 합니다. 이에 무형유산의 심층 연구 기반 마련 및 활성화에 기여하고 무형유산 전반에 걸친 홍보와 학술 교류 확대를 위해『무형유산』지 창간호를 간행할 예정이오니, 관심 있는 연구자들의 많은 투고를 바랍니다. □ 모집분야 및 발간일정 1. 모집분야 : 무형유산 관련 제분야 2. 원고마감 : '16년 10월 20일 * 원활한 발간을 위해 신청서(붙임2 참조)를 9월 30일까지 담당자에게 송부 요망 3. 발간일자 : '16년 12월 20일 □ 신청 내용 1. 제출사항 : 투고 논문 및 신청서 등 2. 투고방법 : 이메일(E-mail) 전송 또는 우편접수 3. 접수주소 : (55101) 전북 전주시 완산구 서학로 95 국립무형유산원 조사연구기록과 『무형유산』학술지 담당자 앞(전화 : 063-280-1512, 이메일: dmsrkd08@korea.kr) 4. 기타사항 : 심사 후 등재가 확정된 원고에 한하여 소정의 원고료 지급 자세한 내용 및 다운로드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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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동리대상’이보형 선생판소리 분야 이론 정립 기여 공로 판소리 악조 연구 등 200여 편 논문 발표 및 판소리 진흥 기여판소리 부문 최고 권위의 상인 고창군의 ‘제28회 동리대상’ 수상자로 이보형 판소리 연구가가 선정됐다. (사)동리문화사업회는 동리대상심사위원회를 열어 판소리 진흥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이보형 판소리 연구가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17일 밝혔다. ‘동리대상’이 판소리 연구가에게 돌아간 것은 ‘제3회 동리대상’에 강한영 선생이 선정된 이후 처음으로, 이보형 판소리 연구가는 1960년대부터 200여 편의 논문을 왕성하게 발표하며 판소리 진흥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보형 선생은 1935년 전라북도 김제군 만경면에서 출생하여 연세대학교 및 동 대학원에서 음악을 전공, 나운영 교수에게 서양음악 작곡을 배웠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우리 전통 음악을 모국어로 하는 문화에서 자랐던 만큼, 우리 음악에 관심을 갖고 한국국악학회, 국립국악원, 국악예술학교에 드나들며 한국 전통음악 이론을 연구했다. 특히 우리 전통 음악 전 분야를 아우르며 평생 연구에 매진해왔으며, 판소리 음악학 연구의 선구자라 할 수 있다. 1971년 한국민속극연구회에서 발간되는 학술지 『서낭당』의 창간호에 ‘판소리 경드름에 관한 연구’를 발표한 이래로, ‘판소리 팔명창 음악론’, ‘판소리 사설의 극적상황에 따른 장단·조의 구성’, ‘판소리 고법, 호남지방 토속 예능조사’, ‘고음반에 제시된 판소리 명창제 더늠’, ‘판소리 내드름이 지시하는 장단 리듬 통사 의미론’ 등 총 50여 편의 판소리 관련 글을 발표했다. 여러 글 중에서도 ‘판소리 경드름에 관한 연구’, ‘판소리 권삼득 설렁제’, ‘판소리 염계달 추천목론’과 같은 연구는 판소리 악조에 대한 첫 연구로서, 이후 ‘판소리와 산조에서 우조와 평조 연구’ 에 이르기까지 그가 세운 판소리 악조 이론은 판소리를 분석하는 큰 틀이 됐다. 1978년에 쓴 논문 ‘판소리 붙임새에 나타난 리듬론’은 판소리 리듬 분석에, 1982년의 ‘판소리 제에 관한 연구’는 판소리 유파 연구에 각각 시초가 됐다. 이보형 선생은 판소리 음악 연구의 전 분야의 이론을 정립하여 오늘날 대부분의 후속 연구들은 그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판소리 분야에서 그의 업적은 비단 연구 분야에만 그치지 않는다. 1970년대 월간 『뿌리 깊은 나무』의 발행인 한창기의 후원으로 매주 실시되었던 판소리 감상회(총 100회까지 진행)를 주도함으로서, 판소리 완창(完唱) 이라는 새로운 공연 문화의 흐름을 이끌어 내었다. 이 과정에서 잡지 『뿌리 깊은 나무』에 게재하였던 글은 1970년대 후반의 판소리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 귀중한 자료가 되며, 2013년 그의 평론집 『비로소 알려진 보물』(민속원)로 출판됐다.이보형 선생은 1990년부터 1993년까지 판소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1990년부터 현재까지 한국고음반연구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20세기 전반의 SP음반을 발굴·연구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1970년대 중반부터 최근까지 서울대, 한양대, 부산대, 한국학 중앙연구원 등에서 음악학을 강의하며 후학양성에도 매진하여 평생에 걸친 그의 판소리 관련 연구는, 판소리가 인류무형문화재로 우뚝 서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편, 고창군(군수 유기상)과 (사)동리문화사업회(이사장 이만우)은 동리 신재효 선생의 문화예술사적 업적을 계승·발전시키고 판소리 진흥에 업적을 남긴 연창자, 고수, 판소리 연구가를 선정하여 매년 상장과 상금을 수여해 오고 있다. ‘제28회 동리대상’ 시상식은 지난 11월 6일 오후 2시 고창 동리국악당에서 열리며 화려한 축하공연도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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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국악 소식지 '국악누리'2010 국제비즈니스대상(IBA) 대상 수상2006년부터 꾸준히 국악을 비롯한 한국 전통 예술 관련 소식을 전해온 국립국악원(원장:박일훈, www.gugak.go.kr)의 소식지 ‘국악누리’가 지난 9월 27일, 터키 이스탄불 리츠 칼튼 호텔에서 열린 2010 국제비지니스대상(IBA:International Business Awards)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악누리'는 대상 부문 25개 카테고리 중 ‘Communications or PR Campaign of the Year - Community Relations’ 카테고리의 대상 수상과 동시에 공기업, 정부기관, 협회 등을 대상으로 최고의 사보(기관지)를 선정하는 사외보부문(Best House Organ - For General Audience)에서 본상을 차지하는 등 큰 영예를 안겨줬다. 이번에 개최된 2010 IBA에는 전 세계 40여개 나라에서 1천 7백 여 편의 작품이 출품,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심사를 거쳐 국립국악원을 포함한 우리나라는 금년도 대상 25개, 본상 23개를 수상해 전 세계 2위의 수상국이 되었다. 2006년 1월, 창간호 발행 이후 ‘국악누리’는 한국 전통 음악 및 무용에 대한 다양한 소식과 잊혀져가는 소중한 전통 문화 예술의 가치를 전하고, 심층취재와 관련 분야의 최근 소식까지 담으며 그 동안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2010년 9월까지 총 115호를 발행, 격월로 매 호별 5,000부를 제작, 무료 배포하고 있다. 국립국악원 누리집 www.gugak.go.kr 을 통해서도 창간호부터 발행된 모든 ‘국악누리’를 무료로 원문서비스 하고 있어 편리하게 이용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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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동리대상 성창순 명창(대한전통보존회 이사장)동리대상선정위원회는 지난 2일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심청가’ 보유자인 성창순(71)명창에 대한 제14회 동리대상 시상식과 광주시립국극단의 축하공연이 6일 전북 고창군 고창읍 동리국악당에서 거행되었다. 동리대상은 근대 판소리를 집대성한 고창출신 동리 신재효(1812∼1884) 선생의 업적을 기리는 판소리계의 최고상으로 동리연구회는 동리 신재효 선생의 문화적 업적을 계승하고 이를 전승 개발함으로써 동리 선생을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문화의 실상을 이해하고, 나아가 우리 진통문화의 진가를 밝히기 위하여 1990년 12월 31일 창립됐다 창립이래 연구 조사활동과 발표, 상설국악교실의 운영, 명창초청 발표회 및 발표회 등을 통하여 연구회의 내실과 판소리 보급에 앞장서 왔다. 또한 1993년 논문 집 동리연구 창간호 간행을 시작으로 매년 연구집을 출간하고 있다. 동리연구회는 특히 판소리 진흥에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연장자, 고수, 판소리 연구가 중 한분을 선정하여 동리대상을 수여하는 일을 연구회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확정하고 1991년 12월 9일 제1회 동리대상 수상자로 국창 칭호를 받았던 당대 최고의 명창인 김소희 씨를 선정 수상 하였다. 제2회 강도근 명창, 제3회 강한영 박사, 제4회 박동진 명창, 제5회 정광수 명창, 제6회 장월중선 명창, 제7회 한갑주 명창, 제8회 정철호 고수, 제9회 오정숙 명창, 제10회 성우향 명창, 제11회 홍정택 명창, 제12회 조상현 명창, 제13회 박송희 명창이 선정되었고, 금년 제14회 수상자는 성창순 명창이 선정되었다. 성 명창은 광주 출신으로 1955년 판소리에 입문한 뒤 지난 64년까지 공기남·정응민·박녹주·김소희 등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부터 심청가·춘향가·수궁가를 사사했다. 성 명창은 지난 75년 남원 춘향제 장원을 시작으로 78년 전주 대사습 장원으로 뽑혔고, 91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5호 지정된데 이어 대한전통예술보존회를 설립했으며 93년 KBS 주최 제1회 국악대상과 94년대한민국 문화훈장 동백장을 각각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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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의 문화인물 “정지용”문화관광부(장관 : 이창동)는,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개척한 '향수(鄕愁)'의 작가, 정지용 선생을 2003년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하고 기념사업을 전개한다. 정지용은 1902년 5월15일(음력) 충북 옥천군 옥천면 하계리 40번지에서 약종상을 하는 아버지 정태국과 어머니 정미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지금 죽향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선배인 홍사용, 박종화, 김영랑, 후배인 이태준을 만나 글 쓰기의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박팔양 등 8명과 함께 동인을 결성, 동인지 《요람》을 10여호 까지 펴낸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교내문제로 야기된 휘문사태의 주동으로 이선근과 함께 무기정학을 받아 수업을 받지 못했다. 이 해 12월《요람》창간호에 그의 첫 발표작이자 하나뿐인 소설을 싣는다. 1922년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첫 시을 썼으며 이듬해 휘문학교의 교비생으로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재학기간동안 시 등을 썼으며 1926년 《학조》창간호에 등 9편의 시를, 그리고 《신민》《문예시대》에 등을 발표 시인으로 등단한다. 1929년 도시샤대학을 졸업하고 고국에 돌아와 모교의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정지용을 기다리던 박용철, 김영랑과 함께 동인지《시문학)》을 창간, 순수시운동의 물길을 튼다. 1933년 《가톨릭청년》창간부터 편집고문을 맡아 신앙시를 발표하고, 이태준, 이무영, 김기림 등과 함께 반 카프적 입장에서 순수문학의 옹호를 취지로 한 『9인회』를 만든다. 정지용은 일본 강점기의 문인탄압과 회유에도 꺾이지 않은 민족시인이었다. 해방공간인 1948년 《문장》에 발표한 에서 그는 「친일(親日)도 배일(排日)도 못한 나는 산수에 눕지 못하고 들에서 호미도 잡지 못하였다. 그래도 버릴 수 없어 시를 이어 온 것인데 이 이상은 소위 '국민문학'에 협력하던지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시를 쓴다는 것만으로는 신변의 위협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고 고백한데서 그의 투철한 민족애를 읽을 수 있다. 그의 첫 시집 《정지용 시집》(1935)에 수록된 등은 일찍이 우리민족이 체험하지 못한 모국어의 눈부신 개척을 이뤘거니와 조국광복의 불빛이 보이지 않을 때 빼앗긴 조국을 '고향'의 이미지로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로 각인시키고 일깨웠던 것이다. 정지용은 일제강점기에 높은 문학성과를 거둔 《문장》의 시 추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하여 뒷날 『청록파』라는 한국시사의 한 유파를 형성한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을 발굴하였으며 이밖에도 이한직, 박남수, 김종한 등 역량 있는 시인들을 시단에 내놓는데 기여했다. 이 가운데 《문장》(1940년 9월호) 의 추천평에서,「박목월 군, 북에는 김소월이 있었거니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만하다. 소월의 톡톡 불거지는 삭주 구성조(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 아니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고 북의 소월과 남의 목월을 비교하기도 했다. 1941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백록담》에서 정지용은, 백록담으로 상징되는 조국의 자연에 대한 깊은 탐험을 내면의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높은 경지를 보여준다. 「물도 마르기 전에 어미를 여읜 어린 송아지는 움매―움매 ―울었다. 말을 보고도 등산객을 보고도 매여 달렸다. 우리 들도 모색(毛色)이 다른 어미에게 맡길 것을 나는 울었다」는 대목에서 시인은 다음 세대가 이민족에게 말과 글을 배우게 되는 불행에 대해 통곡을 터뜨리고 있다. 1946년 이화여전 교수를 사임하고 경향신문 주간직을 맡아, 이 해 《지용시선》을 펴낸다. 그리고 다음 해 경향신문을 나와 다시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복직했다가 1년 만에 그만두고 녹번리 초당에서 시작에 전념한다. 1948년에 37편의 시, 수필, 기행문이 수록된 《문학독본》을 출판한다. 이태준이 북으로 넘어가자 그는 "소설가 이태준 군 조국의 서울로 돌아 오라"는 글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6·25전쟁이 일어나고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한 그는 정치보위부에 체포,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납북된다. 1988년 정지용문학이 해금되자 지용회가 결성되어 올해까지 옥천지용제 16회, 서울지용제 3회, 연변지용제 6회, 지용문학상 15회가 거행되고 정지용문학 연구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2003.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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