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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희 예비역 소위 육군 제2군단장 표창장 60년만의 전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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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목은 말한다"625 전쟁의 총성과 포화가 멈춘지 12년이 지난 1965년 가을 밤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하고 초급 육군장교가 된 청년은 북한 땅이 내려다 보이는 휴전선 GP에서 근무하면서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눈 밑의 골짜기와 저 앞 산등성이는 전쟁 막바지에 가장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곳. 서로가 고지를 뺏느라 남북 양측의 청년들이 비 오듯 쏟아지는 총탄 속을 뚫고 산비탈을 기어오르던 곳이 아닌가? 여기저기 터지는 포탄에 바위가 깨져 흙이 되고 그 흙 속에 젊은이들의 피가 흐르고 배어들었던 곳이었는데 밤이 되니 교교한 달빛 속에 저 아래 흐르는 냇물 옆에 작은 노루 한 마리가 물을 마시러 나왔구나. 노루는 여전히 남북의 군사들이 경계근무를 하며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데도 여기서 죽어간 그 많은 영령들의 비명과 눈물을 아는 듯 모르는 듯 물만 마시고 있구나. 그 옆에는 이름 모를 꽃들이 무심히 피어있고 벌나비들은 그 꽃 동산에서 인간들의 슬픈 욕망과 고통과 비탄을 비웃듯이 평화롭게 날아다니고 있구나. 밤하늘에는 청춘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스러져 간 젊은이들의 슬픈 눈망울이 가득 차 있는 듯하구나. 낮에 병사들과 함께 군사분계선을 따라 금성천변의 능선 자락을 순찰하였는데 거기에 다 썩어가는 나무 푯대 하나가 나딩굴고 있었지. 그 옆에는 작은 돌무더기가 있었고. 12년 전 전쟁 막바지 때 옆의 전우가 갑자기 쓰러지자 차마 그냥 두고 나올 수가 없어서 야전삽으로 대충 땅을 파고 주위의 흙을 끌어올려 덮어주고는 푯대 하나를 꽂아놓았던 것 같구나. 그 전우의 이름도 새기지 못했는데, 무덤 밑의 전우는 이미 흙이 되어버렸구나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비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 친구 두고 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 마디 이끼 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 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해마다 6월이 되어 이 땅을 지키다 숨진 영령들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그 노래 ‘비목’의 노랫말은 이렇게 해서 태어났다. 그 때 그 아픔을 노랫말로 써 낸 분이 국립국악원장을 지낸 국악인 한명희 씨다. 군대를 나온 후 방송국에 들어가 피디를 하면서도 마음에 새겨진 그 비탄과 아픔은 없어지지를 않아 한 편의 시로 살아남았고 그것이 장일남 씨의 곡을 받아 불멸의 노래로 태어난 것이다. 이름하여 ‘비목’인 것이다. 이 노래만큼 우리 민족의 심금을 울린 노래가 또 있을까? 이 노래를 듣고 부를 때마다 민족의 비극, 젊은이들의 한숨과 눈물, 그 유족들의 아픔, 아직도 계속되는 분단과 대치의 암울한 현실이 우리들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도록 하고 눈가를 축축하게 한다. 우리 마음 속의 거문고 줄이 저절로 울려 슬픈 소리를 내며 우는 것 같다. 한명희 님은 작사가도 작곡가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노래말을 토해냈을까? 대학 초년생이던1960년 당시 서울음대 학장이며 작곡가였던 현제명 선생이 돌아가셔서 영결식이 거행될 때 누군가가 고인의 작품인 '고향생각'이란 노래를 조가(弔歌)로 부르자 장중이 울음바다로 변했다는데, 그 때 충격과 감동이 그에게 평생 멋진 노랫말을 하나 만들어놓겠다는 결심으로 맺어졌다고 한다. 우리들이 영원히 기억할 노래는 그 순간의 감동이 불을 당긴 것이다. 한명희 님의 그 때의 감동의 기억은 서울시립대학 교수, 국립국악원장을 거쳐 대한민국예술원 회원과 부원장을 거치는 긴 세월동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악인으로서 빛나는 활동을 하면서도 더 진해져서, 전쟁의 참화를 다시 겪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작업에 평생 심혈을 기울이도록 했다. 국악인 한명희 님에게 DMZ는 그런 비목이 남아있던 곳이었고 동시에 우리 민족의 아픔의 상징이자 그 아픔을 극복해야 할 공간이었다. 이 DMZ가 비목으로 대변된 민족의 비극을 극복하고 남북이 평화로운 하나로 되어 대한민국의 국운의 창성의 현장으로 다시 태어나야한다는 염원이 계속 살아서 알알이 영글어왔다. 새들의 낙원 DMZ에 녹음이 짙어지면 날짐승들 편편 날아 장기자랑 펼치는데 고향소식 전갈하는 산까치에 산제비들 호국원혼 달래주는 쑥국새에 두견새라 머루랑 다래 익는 벽산이 온통 법석일세 ............ 3편 「상좌다툼」 애당초 부질없는 짓들이랑 하지 말자고 금단의 줄 철조망은 미리 말을 했지요 하지만 몽매한 저 자들이 알 리 있나요 산하의 한 허리가 두 동강 난 후에야 피 묻은 후회만이 허공에 나부낌을 ..........9편 「녹슨 철조망」 한명희 소위가 휴전선 DMZ에서 그러한 귀한 경험을 함으로써 민족의 가슴에 불을 당긴 지도 내년이면 60년이다. 한명희 님은 그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가슴 속에 담고 키워온 감동과 감상과 염원을 14편의 시로 다시 걸르고 응축해서 토해 내었다. 전쟁 이후 아무도 훼방하지 않은 순수한 자연, 금단의 땅이 된 DMZ가 여전히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를 하나하나 짚어보았다. 그러한 마음 하나하나 장면 하나하나를 회상할 때마다 원로 미술가인 이동표 님이 얽히고 꼬인 수 많은 감성을 추려서 펜으로 붓으로 그려내었다. 전쟁의 아픔을 상징하는 어두운 색이 배경이 되었다가 새로운 생명의 색이 나타난다. 과거의 아픈 기억과 상념들이 없어지지 않는 가운데 나뭇꾼이 내려오던 곳, 궁노루가 물가를 찾던 곳, 녹슨 철조망이 다시 되살아나고 땅에 묻힌 백골들이 자신들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외치기도 한다. DMZ의 흙 한줌 나무 하나에 그런 아픔과 염원이 담겨있는 것이다. 그 땅이 이제는 세계인들에게도 교훈의 장이 되고 있다. 우리들은 그 아픔을 이기고 당당히 세계 속으로 일어서 떨쳐나갔다. 그러기에 이런 우리만의 경험을 우리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이 보라고 영어와 일본어와 중국어로 번역을 해서 같이 실었다. 국제 시화집인 것이다. 625 전쟁, 우리 땅에서 벌어진 동족끼리의 전장(戰場)에서 60년을 넘게 이어져 오며 세계에 그 아픔을 전하는 불멸의 노래인 '비목(碑木)', 그 속에 담겨진 민족의 아픔과 극복의 연작시집의 이름은 이랬다: 'DMZ는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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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장편소설 '흙의 소리' 출판기념회지난 11일 오후 2시 악성 박연의 삶과 꿈을 그린 장편소설 '흙의 소리'(도서출판 국악신문)출판기념회가 서울 대학로 예술가의집'에서 개최되었다. 신현득아동문학가 장윤우 엄한정 시인 이명재 평론가 외 많은 문인 작가들 음악인들 화가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기념식은 김치홍 평론가의 진행으로 시작되어 오현승(서도명창)의 영동아리랑이 축가로 메아리쳤다. 이어서 축시를 선사한 김영숙 시인의 서시 '풍경' 이 낭송되었다. 기미양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의 인사말, 한명희(전 국립국악원장) 이미시 서원 좌장과 정영철 영동군수의 축사가 있었다. 이에 대한 답사를 한 이동의 작가는 "박연이 충북 영동 출신이어서 군수를 비롯하여 재경 영동 인사들이 많이 참가하였고 아리랑도 영동아리랑 공연을 하게 되었다"라고 전했다.. 이어서 김운향 시인 소설가의 소설 낭송 '못다한 이야기' 조규수 시인의 '흙을 쌓아 산을 이루었네' 시낭송이 진행되었다. 특별 코너로 최경호 평론가의 '흙의 소리' 소설 평론으로 '박연의 삶과 꿈 형상'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영동이 고향인 이동희 작가는 "영동 답사에서는 박연이 쓴 시에 있듯이 '흙을 쌓아…'에서 주제를 파악하고자 하였고, 집필 과정에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유배 생활과 그 당시 남긴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낙기고자 하였다. 특히 우리나라 3대악성 우륵, 왕산악, 박연 중에서 두 사람은 신화 전설적 인물인데 비해, 박연은 뚜렷한 족적을 남긴 예와 악의 실천자"라고 강조하였다. 소설 속 삽화를 그린 원로작가 이무성 회백은 "원색 삽화를 그리게 된 일화와 영동 시민들이 박연의 인물에 대해 다시 한번 주목해야 한다고 전했다. 박윤규 시인의 시조창 '10년을 경영하여'이 메아리치고, 휘날레는 이혜솔 명창의 아리랑 공연으로 이날 출판기념회를 끝맺었다. '흙의 소리'는 도서출판 국악신문 기획으로 2년 2개월 동안 111회에 걸친 발표한 연재소설로 난계 박연의 말년 전남 고산 유배 등 새로운 사실을 밝혀 작품화 한 것이다. 다음은 영동군수 축사 전문이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산비탈을 화려한 색으로 물감칠하고 있습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나라의 3대 악성 중 한 분인 난계 박연 선생의 삶을 생생하게 연출한 장편소설 「흙의 소리」가 출간하게 되어 영동군민의 한 명으로서 무척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이번 「흙의 소리」 출간을 위해 노력하신 이동희 단국대 명예교수님과 기미양 (주)국악신문사 대표이사님 그리고 관계자분들께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그동안 우리는 악성이라는 음악적 업적에 가려진, 난계 박연의 삶에 관해서는 별다른 논의도, 의문도 없었습니다. 난계 박연의 삶과 꿈을 연출한 「흙의 소리」 출간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영감 주고, 박연 선생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난계 박연의 고장인 충북 영동에서 우리나라 최초 전통국악분야 국제행사인 ‘2025 영동 세계국악엑스포’유치가 확정되어 2025년 9월 12일부터 10월 11일까지 30일간 레인보우힐링관광지와 국악체험촌 일원에서 개최될 예정입니다. 30개국 97만명의 내·외국인 관광객이 방문하는 국제적인 문화행사에 예술가분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앞으로도 이동희 단국대 명예교수님과 (주)국악신문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며, 이 자리에 함께해주신 여러분들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길 기원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11월 11일 영동 군수 정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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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장편소설 '흙의소리' 출판기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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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창립 초대회장에 이종선씨 취임한국서예술협회(회장 이종선)가 지난 3월 31일 창랍총회를 거쳐 7월10일 서울시로부터 사단법인 설립허가를 받아 활동에 들어간다. 7월 28일 법원 등기를 마친 한국서예술협회는 우리 전통문화얘술인 서예의 진흥발전을 위해 첫째,서예창작활동을 위한 전시사업 둘째, 서예인 양성을 위한 공모전 사업, 셋째,서예교육을 위한 학술사업, 넷째. 서예저변확대를 위한 대중화 사업 등을 추진한다. 임원과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장-이종선, 부회장-이은설, 상임이사-임종현, 학술이사-김재봉, 이사-정혜영, 김현선, 이정철 감사-강승일, 선점숙 사무국장-김문희 회원- 강미정 강승일 강정이 고옥희 고유석 권선종 김경연 김문희 김상화 김석권 김순임 김순환 김윤숙 김율의 김은석 김은정 김재봉 김재용 김진용 김차연 나웅인 박광양 박연하 박영섭 박정완 박종식 박중근 박지애 박희철 배영희 백진빈 변관섭 서정선 선점숙 손창수 송순행 신석균 신선경 신영상 안미자 안태옥 오현옥 유영민 유창숙 윤문중 이강준 이세영 이순규 이순이 이양숙 이영선 이영자 이옥재 이은설 이은주 이재찬 이종선 이종세 이태길 이현배 이현주 이혜수 이화숙 임종현 장인오 장주희 전애선 정구삼 정미숙 정상진 정안심 정혜영 조미향 조순제 지달승 진용찬 진준호 채수철 채호순 최낙순 최세섭 최영무 최영애 최창은 하태모 한경희 한명희 한재근 한지연 한현자 허선례 허원선 허희정 현해용 황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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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유지숙' 전수교육조교 제자 발표회 ‘A+’# 국가무형문화제 서도소리 유지숙 전수교육조교 제자 발표회 청출어람, 사단법인 향두계놀이보존회 추최/주관, 한국문화의집코우스, 7월 9일 월 오후 4시. # 청출어람 초대의 말씀 "제가 유지숙 선생님을 존경하고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소리에 반하여 모신 시간이 어느덧 27년, 세월 바람 같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서 제 인생의 서도 소리를 싹 틔울 수 있었고 늘 채찍과 또 격려와 사랑으로 오늘 이 자리에 오게 되었음을 생각하니 한없이 감사하는 마음뿐입니다. (제자 대표 오현승/향두계놀이보존회 이사장) # "어련하겠어요. 평소 자태나 소리가 깔끔하니~.이제 국악계 어른 축에 드니 그 위치만큼 실력과 지도력을 발휘하리라 기대합니다.”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 "잘 하잖아? 좋잖아? 든든해요. 서도소리 장래가~. 그러나 전승 생태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요. 기관의 관심이 필요해요.” (서한범/前 단국대 교수) # "최경만 선생과 함께 한다는 것이 서로 행운이지요. 유지숙 선생도 인사에서 밝혔지만 생태적 결합에다 화학적 결합이어서 시너지가 극대화 된 결과입니다. 현장에서도 외조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요. 이런 잔치는 제자들이나 스승이나 지켜보는 우리나 다 보람있고 든든하게 해 주었어요.” (정문교/前 신나라 대표) # "공연 측면에서도 노력과 연출력이 돋보였어요. 제자들의 연조와 목구성을 구분해 그에 맞는 곡을 배치해서 떼창인데도 가사가 전달될 정도였으니까요.” (박상진/前 동국대 교수) # "1935년 7월, 이혜구 교수가 하규일 명인으로부터 가곡을 이수를 하고, 이에 감사드리는 ‘배반’ 행사를 명월관에서 했다는 기록이 떠올랐습니다. 90여년 전의 아름다운 국악계 전통을 재현한 행사였습니다. 스승 유지숙 선생은 몰라도 관객은 ‘올 100’을 주었습니다. 청출어람! 말이 아닌 현실 가능함을 보았습니다.” (기미양/(주)국악신문 대표이사) # "최경만 선생님과 함께 우리 소리의 깊이를 아시고 전승에 기여하시는 모습이 좋습니다. 늘 건강한 모습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회갑을 축하드리며 9순 잔치 때는 꼭 참석하겠습니다.” # "20대에 철 없이 서도소리가 좋아 나선 세상에서 운명적으로 오복녀 선생님을 만났고, 행복하게 소리를 배운지 어언 40년~. 제자들은 저의 전 재산입니다. 이제 제자들 덕분에 오늘날까지 많은 일들을 해 올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고맙고 고마운 제자들을 위해 남은 날들도 사명감을 다하겠습니다. 모든 제자들과 특별히 각 지역 지부장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김광숙 이춘목 이춘희 선생님께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감사함을 드리고, 학문의 길로 이끌어 주신 서한범 교수님과 균형을 보여주시는 경임순 문화재위원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면구함에 위 어르신들께는 연락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따로 안부 올리겠습니다. 변치 않고 성원해 주시는 오늘 오신 관객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열심히 (민족유산을) 전승하며 가꾸어 가겠습니다.”무대 인사에서 (유지숙/국가무형문화재 '서도소리' 전수교육조교). 주최 측이나 관객 모두가 만족스러워 하는 행사는 흔하지 않다. 제자들의 진행도 진정성이 배어있고, 스승의 뜻에 따라 겸손함과 소박함이 묻어 있었다. 참, 실용적인 기념품도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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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합창단, 김소월의 '못잊어'로 시작하는 '가곡시대'서울시합창단이 22일과 23일 세종문화회관 체임버홀에서 쁘띠 콘서트 '가곡시대'를 공연한다.'작다'는 뜻의 프랑스어 '쁘띠(Petit)'를 담은 쁘띠 콘서트는 서울시합창단이 2019년부터 선보인 프로그램이다. 매년 가곡, 오페라 아리아로 프로그램을 구성해 합창단원들의 독·중창으로 펼치는 성악 콘서트다. 지난해에 이어 올리는 '가곡시대'는 시(時)가 있는 무대(臺)를 뜻하며 '가곡'으로만 구성되는 시리즈다.공연은 100년의 세월을 품어온 우리 가곡을 시대 흐름으로 풀어낸다. 양일간 연주곡이 다르며, 아나운서 출신 이금희가 해설자로 나선다. 가곡이 전성기를 누리던 1980년대를 기준으로 첫날은 1930년대부터 1970년대, 다음날은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 우리 창작 가곡을 연주한다.1925년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된 김소월의 시 '못잊어'로 공연 첫날 연주가 시작된다. 동일한 시를 작곡가 김동진(1957)과 조혜영(2010)의 작품으로 한 무대에서 만날 수 있다. 1932년 발표된 정지용 시에 채동선이 곡을 붙인 '고향', 1947년 출간된 가곡집 산유화에 담긴 김소월 시 '산유화'를 이현철의 곡으로 들려준다.1950년 가곡집 달무리에 수록된 조지훈 시에 윤이상이 작곡(1948)한 '고풍의 상', 한상억 시에 최영섭이 곡을 붙인 '그리운 금강산'과 1969년 발표된 '비목'(한명희 시·장일남 곡)이 연주된다. 교과서에 수록된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시)도 있다.둘째 날은 정지용이 1927년 발표한 시를 노랫말로 해 김희갑이 작곡하고 성악가 박인수와 가수 이동훈이 부른 '향수(1989)', 송길자 시·임긍수 곡의 '강 건너 봄이 오듯'(1992년)', 노영심의 '시소타기'(1995) 등이 연주된다. 작곡가 김효근의 '첫사랑'(2011)과 푸시킨 시를 바탕으로 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2015)' 등 창작 가곡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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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단신] 강원일보사 '아리랑의 세계화'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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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복녀 명창 추모시] 서도소리의 진수를 체득한 유일한 대가가을하늘 높이 날던 기러기 자매 보일 듯 잡힐 듯 휴전선 넘어 가슴에 봉숭아물 못내 그리운 고향마을 궁초댕기 그 시절 사연 애달파 멍이 되어 뚜루룩 낄룩 해맑은 서도창도 목이 메더니 통한의 분단 녹슨 철조망 망향노래 인이 박인 기러기 하나 어느날 나래 접어 구름 밖을 떠나고 외 남은 기러기 외로움 곱절되어 하염없이 때도 없이 창공을 날아 아스라이 고향 땅 두고 온 가락 오동의 복판 장고의 북채, 터져라 울렸지 신명껏 두드렸지, 대 잡아 신 내린 듯 ‘눈물은 겨워 대동강 우덕에 백운탄(白雲灘)되고 한숨은 쉬어 모란봉 위에 딴 봉을 돋히네‘ 봄 구름 자욱한 노을 진 하늘가로 늦은 한배 긴아리에 서리서리 엉킨 한 고향노래 불렀지, 이산의 아픔 심금 울려 읊었지, 시대의 서름 조개는 잡아 젓 저리고 가는 님 붙잡아 정들이 듯 아, 붙잡아 정들일 서도의 예인 아직도 오위들 가슴속엔 관서의 속 멋 여울 되어 달빛 되어 무늬져 흐르는 데 정매화 피던 날 홀연히 가신 서도소리 어머니 겨레의 명창 위의 추모시는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의 오복녀 선생에 대한 추모시다. 11월 7일 오후 7시,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에서 ‘김광숙서도소리전수소’가 주최하는 행사에서 낭송된다. 출연자는 다음과 같다. 김광숙, 이춘목, 한명순, 유지숙, 유춘랑, 오희연, 이현정, 김민경, 박준길, 이나라, 강미경, 민명옥, 정연경, 정미야, 오세정, 전효정, 김준식, 류지선, 김유리, 김무빈, 박지안, 임수아이다. 연주자는 장구 강형수, 피리 이호진, 대금 김선호, 해금 김기범, 가야금 김나영이다. 공연은 滿堂 오복녀 선생의 추모 20주기를 맞아 선생의 간절한 바람이었던 서도소리의 보존과 발전의 뜻을 기리며, 동시대의 서도소리인들이 지향해야 할 예술혼과 가치를 조명한다. 그리고 서도소리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노래하다. 생전 선생의 서도소리 즉, 과거의 서도소리와 선생의 서도소리 전승에 대한 열망과 바람으로 이 시대에 남겨준 김광숙·유지숙 두 명의 서도명창이 걸어 온 소리의 길 즉, 현재의 서도소리를 돌아본다. 그리고 내일의 서도소리 즉, 미래의 서도소리의 방향성을 재고하여 이를 무대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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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社說] 사설 오복녀 명창 소리, ‘소스라쳐 절감’하자우리 국악계는 아름다운 전통을 갖고 있다. 바로 ‘추모(追慕) 공연’을 한다는 사실이다. 제자들이 스승의 덕과 공로를 그리워하여 정성으로 올리는 제의(祭儀)의 일종이다. 올해의 이 추모 공연은 ‘서도소리’·‘대동강 물 맛본 소리’라는 키워드로 상징되는 오복녀 선생 추모공연을 두 제자 김광숙과 유지숙이 마련한 행사다. ‘滿堂 吳福女 선생 20주기 추모 공연-서천에서 불어온 만당의 바람...’이다. 이미 본보가 보도한 대로 11월 7일 서울남산국악당 크라운해태홀에서 개최하는데, 두 제자의 슬픔을 넘은 공경의 제의이다. 이런 추모 공연은 고인이 된 예인을 회상(回想 recall)하여 행하는 행사이다. 회상은 기억된 것을 다시 떠올려 생각해 내는 일, 심리학은 이를 ‘뇌 속에 저장된 정보의 재생’이라고 한다. 오복녀라는 기억, 이를 기억하게 하는 그 단서는 무엇일까? 바로 이 단서를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은 이미 1999년 제6회 방일영국악상 수상자 오복녀에 대한 축사에서 제시한 바 있다. 한 좌장은 이제 통일이 되어 고향을 가도 옛 듣던 가락, 옛 놀던 연희들을 만나기란 거의 난망이고, 그래서 안타깝고 허망하다고 한탄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명창의 이력을 간결하게 내세웠다. 서도지방에서 태어나 서도의 정서와 풍물을 온전히 체득한 가객으로, 노래 속에는 자연히 서도 예술의 맛과 멋이 진솔하게 배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예찬하였다. 수심가나 긴아리에 묻어나는 애잔한 정한이 그러하고, 난봉가나 산염불에 스며 있는 따듯한 삶의 체취가 그러하며, 초한가나 공명가 등을 통해서 펼쳐내는 담담한 인생 경륜이나 고담들이 그러하니, 한마디로 노래 속에 서도적인 삶이 있고 서도적인 인생살이가 내밀하게 농축돼 있다고 하였다. 북녘에 고향을 둔 실향민들에게는 위안이요 추억이라고 하며 문화적인 정체성과 동질성을 확인시켜 주는 고맙고도 절실한 존재로서의 가치를 거듭 내세웠다. 그래서 오 명창이야말로 풍전등화와 같은 서도소리의 명맥을 실낱같이 이어가며 힘겹게 달려가는 성화 봉송자와도 같다고 칭송했다. 그리고 이렇게 맺었다. 바로 회상의 단서를 제시해 주었다. "오 명창의 서도소리는 음악의 차원을 뛰어넘는 시대적 의미망을 지닌다. 이런 상황을 떠올릴 때 우리는 재삼 오복녀 명창의 존재 의미와 그 음악의 존귀함을 깊이 통찰하고 소스라쳐 절감하지 않을 수 없다.” 22년 전 생전의 축사가 영서(永逝) 20년을 지난 오늘, 국악계 큰 어른이 ‘소스라쳐 절감’하게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오복녀 명창을 회상하게 하는 단서이지 않겠는가. 1913년 12월 평양에서 태어났다. 16세 무렵 장금화 선생으로부터 서도소리를 시작하여, 하규일 선생에게 배반(盃盤)치레를 하고 가인으로 활동하였다. 2001년 1월 타계할 때까지 70 성상을 서도소리 원형 보존과 전파에 기여하였다. 이 가을의 마지막을 서도소리로 빛나는, 그리고 두 제자를 계승자로 남긴 한 예인을 회상하는 기회를 갖는 것도 뜻깊을 듯하다. 혹시라도 소스라쳐 절감하여 영감을 얻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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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당 오복녀선생 20주기 추모기념공연만당 오복녀(吳福女) 선생의 추모 20주기를 맞아 서도소리의 보존과 발전의 뜻을 기리며, 동시대의 서도소리인들이 지향해야 할 예술혼과 가치를 조명하는 무대가 마련 된다. ‘서천에서 불어온 滿堂의 바람...’공연이다. 예술감독 김광숙, 연출 이재성, 극작 홍석환이 맡는다. 이 무대는 ‘김광숙서도소리전수소’가 주최하고 크라운해태가 후원한다. 서도소리 명인들이 총 출동한다. 김광숙, 이춘목, 한명순, 유지숙, 유춘랑, 오희연, 이현정, 김민경, 박준길, 이나라, 강미경, 민명옥, 정연경, 정미야, 오세정, 전효정, 김준식, 류지선, 김유리, 김무빈, 박지안, 임수아 등이 출연한다. 연주는 장구 강형수, 피리 이호진, 대금 김선호, 해금 김기범이 맡는다. 공연은 총 3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 ‘바람...서천에서 일다’에서는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선생의 추모시 낭송이 무대를 연다. 이어 ‘어린복녀’가 등장하고, 제자 김광숙과 유지숙이 서사를 이끈다. 서도소리 전승에 대한 열망과 바람으로 이 시대에 남겨준 김광숙·유지숙 두 명창의 선생님에 대한 회고, 그리고 미래를 무대화 하였다. 조개는 잡아 젓 저리고 가는 님 붙잡아 정들이 듯 아, 붙잡아 정들일 서도의 예인 아직도 오위들 가슴속엔 관서의 속 멋 여울 되어 달빛 되어 무늬져 흐르는 데 정매화 피던 날 홀연히 가신 서도소리 어머니 겨레의 명창 제1장 ‘바람...서천에서 일다’는 선생이 서도소리에 처음 입문하던 어린 시절, ‘어린 복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두 제자 김광숙과 유지숙이 등장, 좌담으로 선생의 예술혼을 회고한다. 이어 관산융마, 수심가·엮음수심가, 몽금포타령, 개성난봉가, 연평도난봉가, 산염불, 잦은염불이 이어진다. 제2장 ‘바람...울림으로 꽃 피우다.’는 소리의 길을 걷고 있는 어린복녀, 그리고 다재다능했던 예술인으 로서의 선생의 모습이 재연된다. 이어 선생의 생전 영상으로 만나는 애창곡 <개타령>이 긴아리, 자진아리, 풍구타령, 날찾네, 방아타령, 양산도 등으로 이어진다. 제3장 ‘바람...멈추지 않겠습니다.’는 ‘서천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선생이 걸어온 격정의 시대와 꿋꿋 함, 그리고 소리, 그 역경과 곧은 소리가 ‘소녀 복녀의 노래’로 재탄생 한다. 초연작 ‘소녀 복녀의 노래’가 초로인생, 긴난봉가, 잦은난봉가, 병신난봉가, 사설난봉가로 이어져 무대를 여민다. 이번 20주기 공연은 지난 2011년 선생의 10주기 추모공연에서는 ‘대동강으로 날아간 기러기 명창을 기리며’ 라는 주제로 개최에 이은 공연이다. 이 번 20주기는 "선생의 생전 바람이 우리의 바람이 되어 현실화 되는 것을 준비해야 한다”를 주제로 하였다. 민요학계에서는 경기민요, 남도민요, 동부민요라고 한다. 그러나 유독 서도민요는 ‘서도소리’라고 한다. 이는 경기의 잡가나 남도의 판소리와는 또 다른 특징과 멋을 지녔음을 강조한 것이다. 이 가을, 오복녀선생을 추모하며 제자들이 꾸미는 서도소리의 향연을 누릴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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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2)멋, 속에서 배어나는 난숙한 일탈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또 다른 키워드로 ‘멋’이라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대상을 보는 느낌이 좋아서 전적으로 공감할 때, 우리는 ‘멋있다’ 혹은 ‘멋지다’라고 표현한다. 이 멋이라는 개념 또한 간결하게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이라는 단어가 한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중하다. 멋에도 농도의 차이가 있다. 흔히 어설픈 멋은 ‘겉멋’이라 하고, 농익은 멋은 ‘속멋’이라 한다. 겉멋은 경멸의 대상이고, 속멋은 상찬의 대상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멋은 ‘속멋’이다. 멋이 무엇인지를 어렴풋이 가늠해 보기 위해서 내 나름의 주관적인 윤곽을 더듬어 본다. 흔히 우리는 올곧게 뻗은 나무보다는 구부정하게 휘어 자란 소나무가 멋있어 보인다. 똑바로 흘러가는 강줄기보다는 한 번 휘청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에서 멋을 느낀다. 일망무제一望無際로 펼쳐진 들녘에서도 봉긋 솟은 언덕이 있어야 제격인 듯싶고, 비스듬히 내려 뻗은 기와지붕에서도 살짝 위로 향한 상승곡선이 있어서 근사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멋을 유발하는 근원은 상도常道나 정형定型에서 약간 벗어나는 경지임을 알 수 있겠다. 상도나 상궤常軌에서의 일탈, 일상성이나 정체성停滯性에서의 일탈, 속박성이나 규격성에서의 일탈, 진부한 관행이나 상투적인 인위에서의 일탈, 그것은 곧 한국의 멋을 창출해 내는 지렛대들임에 틀림없다. 무용의 춤사위에서는 고요한 한 동작의 끝부분에 가서 살짝 강세를 주곤 한다. 허공으로 큰 포물선을 그리던 수건을 마지막 순간에 살짝 잡아채는 살풀이춤의 율동이 그렇고, 속으로 물결치는 내면의 흥을 간간이 어깨로 들썩 표출해 내곤 하는 한량무閑良舞의 춤사위가 그렇다. 고요한 정靜의 세계를 바탕으로 하다가 사뿐하게 화룡점정畵龍點睛의 동적動的인 변화로 흥을 돋우고 정서적 클라이맥스를 마련하는 것, 그것은 마치 서예에서 끝을 살짝 반대 방향으로 삐치는 운필運筆의 묘미처럼 전형적인 일탈의 예이자 멋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음악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모체가 되는 기본적인 악흥으로 일관하던 악곡이 어느 대목에 가서는 전혀 이색적인 분위기로 살짝 탈바꿈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악곡의 진미와 유현幽玄한 멋을 한층 실감하게 된다. 서사적인 가락들로 일관하다가 좀 더 서정적인 수심가愁心歌 가락으로 끝을 여미는 서도잡가西道雜歌의 돌출성이 그 예며, 구수한 사설로 흘러가다가 창부타령 선율로 한층 흥을 돋우는 경기잡가京畿雜歌의 종지형이 그 예다. 판소리 연창에서 간간이 튀어나오는 재치 있는 재담이나 질펀한 육두문자들이 그러하고, 유장하게 노래해 가던 선율을 단칼에 동강내듯 아무 예비 없이 종지하는 평시조의 창법이 그러하다. 조용히 흘러가는 거문고의 음향 속에서 간간이 투박하게 대모玳瑁, 공명통을 보호하기 위해 씌운 가죽를 내려치는 술대거문고를 뜯는 가는 막대의 타현음打絃音도 일종의 음악적 일탈이랄 수 있고, 부드럽고 유순한 대금 가락에 짐짓 청공淸孔에서 울리는 갈대청의 파열음으로 긴장을 고조시키는 수법 또한 일탈의 멋 부리기에 다름 아니다. 모르긴 해도 일탈이 빚어낸 한국의 멋으로는 전통음악의 엇몰이장단만 한 게 없을 것이다. 엇몰이의 ‘엇’이란 삐뚤거나 어긋난 상태를 가리킨다. 엇시조가 그 좋은 예다. 마흔다섯 자의 정형시가 아니라 그보다 사설이 좀 길게 첨가된 시조가 엇시조다. 정형시조에서 어긋난 시조인 셈이다. 일종의 일탈이다. 따라서 엇몰이장단이란 곧 일상적인 장단과는 달리 일종의 변용을 추구한 이색적인 장단임을 알 수 있다. 정규적인 장단에서 짐짓 어깃장을 부려 본 장단이다. 이 어깃장 장단의 속멋이야말로 한국 문화의 멋의 핵심이자 진수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엇몰이장단의 멋을 알면 이는 이미 한국 문화의 멋의 진미를 터득한 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엇몰이 장단의 리듬을 그 변화형과 함께 서양의 음표로 소개한다. 긴 가로선의 밑부분 음표는 장고나 북의 왼쪽 면을 왼손바닥으로 치는 리듬이고, 윗부분의 음표는 오른손으로 장고채나 북채를 들고 우측면의 중앙이나 변죽을 치는 리듬이다. 양손으로 각자의 무릎을 치며 따라 해 봐도 엇몰이장단의 윤곽이 잡힌다.(속으로 〈라 쿰파르시타 La Cumparsita〉의 리듬도 연상해 가면서) 우선 엇몰이장단에서는 자유자재의 원숙미가 넘친다. 분명 그것은 통상적인 규칙성에서의 일탈임에도 괴리감이 느껴지거나 격格이 깨지지 않는다. 득도의 경지에 이른 예인藝人의 일필휘지가 신품神品이 되듯, 그것은 탈선하듯 어깃장스럽게 짚어 가는 고법鼓法인데도 오히려 난숙한 흥과 멋이 넘친다. 해탈한 고승의 무애無碍의 세계랄 수도, 혹은 마음 가는 대로 따라 해도 결코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의 경지에 비견될 수도 있다 하겠다. 그러고 보면 우리 멋을 유발하는 일탈의 개념이란 일단 원숙과 노련을 전제한다고 하겠다. 설익은 멋을 위한 억지의 이탈이나 거역을 위한 의도적인 탈선이 아닌, 속에서 배어나는 난숙한 일탈, 그것이 곧 한국의 멋을 양조釀造시키는 효모酵母로서의 일탈이라고 하겠다. 예컨대 때가 되어 숙성되면 석류가 익어 터지고, 밤송이가 무르익어 알밤이 떨어지듯이, 난숙한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불거져 나오는 일탈, 바로 그 자연성과 완숙성이 멋의 원천인 일탈의 본질인 것이다. 한편 멋과 풍류風流는 상친관계相親關係가 아닐 수 없다. 일탈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특히 그러하다. 관념적인 틀에서 벗어나고 진부한 일상성에서 탈피해 무소기탄無所忌憚의 해방감을 누리는 경계, 세속의 영욕을 떠나 거문고와 함께 기인처럼 살다 간 신라시대 물계자勿稽子의 행적과 같이 예술의 경지를 넘나드는 유어예遊於藝의 세계, 명산대천을 찾아 가악歌樂으로 인생을 다듬어 가던 화랑花郞들의 경우처럼 인위의 구각舊殼을 벗고 합자연적인 섭리를 좇아 행운유수行雲流水와 같이 처세하는 달관의 경지, 끼니가 없어도 음악으로 자적自適했던 백결百結의 일화처럼 바다만큼이나 넓은 도량의 낙천적인 세계관, 바로 이런 경지로의 감성적 혹은 정신적 일탈에서 오는 흥취와 자족이 풍류의 본 모습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멋과 풍류적 흥취를 빚어내는 일탈은 노련미의 결정체이자, 새로운 창조의 동인動因이라고 하겠다. 나뭇등걸에서 새순이 일탈하여 새로운 거목이 되고, 작은 씨앗에서 새싹이 일탈하여 새 생명을 만들고, 동일한 산조지만 개인적인 시김새나 더늠으로 일탈하여 새로운 자기류의 음악을 형성해 내는 사례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일탈은 곧 새로운 세계, 새로운 생명체로의 창조과정임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일탈이되 이질감을 느끼지 않음은 조화와 균형을 잃지 않기 때문이며, 일탈이되 소멸이나 파괴가 아님은 진眞·선善·미美를 바탕으로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연계되기 때문이며, 일탈이되 치졸稚拙이나 겉멋이나 부조화로 전락되지 않음은 곰삭은 원숙미와 풍류적 기품氣稟이 전제됐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탈이 빚어내는 한국의 멋은 생명순환적인 창조의 원의지原意志에 다름 아니고, 우리 존재를 긍정해 주는 삶의 진체眞體이자 원형질이며, 한국적 자연관이나 인생관에서 발효된 희한한 향취의 미적 감흥이요 문화적 정서지대라고 하겠다. 결국 음악을 통해 본 우리의 멋은 난숙한 일탈, 풍류적 일탈에서 오는 일련의 ‘일탈의 미학’인 셈이다. 한국 문화를 표상하는 미적 개념의 마지막 단계는 운치韻致이다. 인생으로 비유하자면 흥은 청년기에, 멋은 장년기에, 운치는 노년기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정서적 흥취를 있는 그대로 발랄하게 드러내는 흥이 혈기 방장한 청년기를 닮았다면, 자신의 감성을 십분 숙성시켜서 은유적으로 넌지시 드러내는 멋은 산전수전 겪어내며 인생의 내면을 음미해 가는 장년기에 흡사하다. 이에 비해 흥도 아니고 멋도 아니면서 격조 있는 미감을 표출하는 운치는 영락없이 결삭고 곰삭은 삶의 지혜들이 응축된 노년기의 풍취를 대변한다. 운치라는 개념은 우선 품격과도 통한다. 품격이 높아야 운치가 생긴다. 또한 귀티가 있어야 한다. 단아하고 고급스런 분위기가 있어야 운치를 느낀다. 뿐만이 아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절조節操도 있어야 하고, 고도로 정제된 균제미均齊美가 있어야 한다. 또한 티 없는 창공처럼 속기俗氣가 없어야 하고, 경중미인鏡中美人의 표정 같은 맑음이 있어야 한다. 이 같은 몇 가지 요건들이 용융되어 더없이 우아하고 청초한 고품격의 예술미를 담아내고 있는 게 곧 운치의 세계다. 운치라는 한국 문화 특유의 미감을 확인하려면 전통사회의 선비문화를 일별해 보는 게 상책이다. 그만큼 선비문화 속에는 운치라는 개념의 미감美感이 두루 편재해 있다. 조선시대 평균적인 선비의 일상을 한번 되돌아보자. 온돌방 기름 먹인 장판 위에는 화문석 돗자리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선비의 서안書案이 놓여 있다. 의관을 단정히 한 선비는 보료방석에 앉아서 서안에 놓인 경전을 읽어 간다. 고요히 앉아서 천하를 주유하고 천지를 요량해 보는 것이다. 깨우침의 희열이 있을 때는 잠시 끽다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은은한 차향이 중후한 고서들의 서권기書卷氣와 어우러지며 묘한 분위기의 운치를 더해 준다. 드디어 밤이 되자, 사위는 고요하고 무주공산에는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른다. 교교한 달빛이 완자무늬 창호로 새어 들면 분위기는 한층 정감적이다. 서가에 기대 놓은 거문고를 가져다가 줄을 고른다. ‘싸랭 덩 딩 슬기둥’ 하고 술대로 유현遊絃과 대현大絃을 애무하듯 아는 가락을 탄주해 본다. 심산유곡의 낙락장송이 우줄우줄 춤을 추듯, 고색창연한 음향이 잔물결을 이룬다. 때마침 창밖에는 산들바람이 지나가는지 하얀 창호지에는 벽오동 잎새들이 달빛에 어른대며 맞장구를 친다. 이래저래 주인공은 달빛에 취하고 거문고에 취하고 그윽하게 밀려드는 난향蘭香에 취해서, 이내 벽에 걸린 산수화 속의 풍경들과 물아일체가 되어 반신선半神仙이 되고 만다. 지난날 선비들의 서재에는 으레 문방사우가 갖춰져 있었다. 글 읽는 선비들의 네 가지 필수품으로, 붓과 먹과 벼루와 종이가 곧 그것이다. 심오한 경전에 몰입하다가 자못 한유閑裕한 흥취라도 일게 되면 지체 없이 지필묵을 마련하여 일필휘지로 유어예의 몽상여행을 떠나 보기 일쑤였다. 이럴 때 즐겨 그리던 전형적인 소재가 매·난·국·죽의 사군자였다. 이들 사군자는, 몸체는 단순해도 개성은 뚜렷하다. 매화와 난초는 그윽한 향기로 선비들의 총애를 받았고, 국화와 대나무는 굽히지 않는 오상고절의 지조로 선비들의 상찬을 받았다. 한결같이 선비의 품도와 절조를 닮은 자연물들이다. 생각해 보면 사군자가 선비적인 성향을 닮은 게 아니라, 평생을 벗 삼아 온 이들 사군자의 개성이 그처럼 운치 있고 지조 있는 선비 기질을 조성해 왔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만큼 사군자와 선비의 일상은 떨어질 수 없는 바늘과 실의 관계였다. 지금까지 전통문화를 꽃피워 온 선비생활의 몇 가지 편린들을 더듬어 보았다. 이들 몇몇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된 예술적 향취가 다름아닌 운치다. 비록 선비생활의 단면을 통해서 운치의 개념을 그려 보았지만, 기실 운치의 미감은 전통문화의 도처에 스며들어 있다. 서화가 그렇고, 가구가 그렇고, 도예나 건축 등이 모두 그러하다. 특히 윤기가 자르르 한 자개장의 단아하고 고졸한 귀티는 가히 세계적 보물감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운치라는 화두를 가지고 한국의 고급스런 전통문화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한결 정확하게 그들의 진수를 포착해 볼 수 있다. 그만큼 운치는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화두다. 한국 속담 중에 ‘오동나무 씨만 보아도 춤을 춘다’는 말이 있다. 한국인의 기질을 아주 정확히 집어낸 표현으로, 한마디로 흥이 많다는 뜻이다. 잘 알다시피 오동나무는 가야금이나 거문고를 만드는 재료다. 그 같은 악기의 재료인 나무의 씨앗만 보고도 그 나무가 자라서 악기가 되어 멋들어지게 뽑아낼 가락을 연상하며 미리 춤을 추게 된다니, 도대체 얼마나 흥이 많기에 그러하겠는가. 실로 기막힌 신명기의 소유자들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한국인의 기질은 이지적이기보다는 감성적이다. 냉철한 지성보다는 따뜻한 감성을 선호한다. 머리의 기능보다는 가슴의 효용에 친근감을 느낀다. 요즘에 와서는 20세기 후반 서구 문화의 본격적인 수용을 통해서 이상적인 균형을 이뤄 가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의 전통문화는 주로 감성을 기반으로 한 감성의 문화였대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여기 가슴속 깊은 심저心底에 용암처럼 고여 있던 감성이 어떤 계기를 만나 화산처럼 분출하는 것이 다름 아닌 흥이요 신바람이다. 이 역동적이고 원색적인 흥이나 신바람이 서서히 내면화되면서 은근한 흥으로 변용된 감성이 곧 멋이다. 한편 운치란, 감성의 텃밭에 뿌리를 두었으나 감성의 색깔이 크게 희석되고, 오히려 지성적 미감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단아하게 정련된 경지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까지 한국 문화, 특히 전통예술에서 본질처럼 드러나는 몇 가지 개념어들을 소개했다. 흥과 멋과 운치가 곧 그들이다. 이 세 가지 어휘가 내포하는 미적 개념 간에는 공통점도 있지만 숙성도에 따른 편차 또한 크다. 공통점이란 물론 삼자 모두 예술적 감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고, 다름이 있다는 것은 미적 질감의 섬세한 차이를 말한다. 한국 전통예술의 미적 질감의 진행과정은 흥에서 멋으로, 멋에서 운치로 이행한다. 물론 주관적 견해다. 이미 언급했듯이, 흥이 감성의 원색적인 표출이라면, 멋은 이를 감싸서 내면화시킨 단계라고 하겠으며, 운치는 지성의 체로 감성의 원료를 걸러내어 한 단계 더 승화시킨 경지라고 하겠다. 이 같은 설명은 결코 이들 간의 질적 우열을 뜻하는 게 아니다. 시간의 경과와 함께 축적돼 가는 숙련미와 그에 따른 개성을 지적하는 것일 뿐이다. 앞서의 비유로 말한다면, 노년기가 장년기보다, 장년기가 청년기보다 더 좋다고 말할 수 없는 바와 마찬가지다. 각각의 단계마다 모두 개성이 있고 특질이 있다. 흥과 멋과 운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무튼 흥과 멋과 운치는 한국의 전통예술을 이해하고 감상하는 키워드이자 길라잡이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복잡한 안내서를 읽을 필요 없다. 이 세 가지 낱말의 개념만 몇 번 음미해 보자. 동트는 새벽처럼 한국 전통예술의 정체가 서서히 드러날 것이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독자들에게 귀한 글을 보내주신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지출판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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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추천 휴일의 시 39: 비목 (한명희)비목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1939~)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 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 지친 울어 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 추천인 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6월이면 숙연하게 부르는 가곡 비목. 그 작사가 한명희님을 6월이면 뵈어 왔는데, 금년은 못 뵈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일까요, 폭염 때문일까요?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파/ 서러움 알알이 돌이 되어 쌓였네”를 혼자 불러 봅니다. 선생님 건강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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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노래 ‘비목’ 새 곡조, 52년 만에 재탄생한명희 전 국립국악원장은 매일 아침 ‘호국의 불’에 묵념한다. 방문객이 물으면 "나라를 지킨 영웅들의 정신을 후세에 교훈으로 남겨야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라고 답한다. (사) 이미시문화서원 건물 앞에 모셔져 11년간 지켜 오고 있는 촛불이다. 해마다 6월이면 떠오르는 ‘국민 가곡’이 있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 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이름 모를 비목이여.’ 6·25전쟁 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노래 ‘비목(碑木)’이다. 1969년 발표된 이 노래가 52년 만에 새 옷을 입는다. 한명희(82) 전 국립국악원장이 지은 가사는 그대로 두고 작곡가 이영자(90) 전 이화여대 교수가 새로 곡을 붙였다. 22일 경기도 남양주의 자택에서 한 전 원장은 "6·25전쟁 71주년을 맞아 새로운 비목을 만나게 돼 나도 감회가 새롭다”라며 감격스러워했다. "나라를 위해 헌신한 무명용사들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DMZ(비무장지대)에서 군 복무를 했어요. 그때의 경험 때문에 6·25를 기억하는 일을 멈출 수 없었죠.” 한 전 원장은 1960년대 강원도 화천에서 군 생활을 할 당시 무명용사의 돌무덤과 녹슨 철모를 보고서 ‘비목'의 노랫말을 떠올렸다. 그의 시에 장일남이 곡을 붙여 1969년 발표했다.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아온 곡을 재작곡하게 된 이유는 뭘까. "은퇴하고 제대로 6·25 용사들을 기리고 싶었어요. 지난해 6·25 70주년을 맞아 DMZ를 주제로 한 ‘6·25 연가곡(連歌曲)’ 12곡의 가사를 썼죠. 그중 핵심인 ‘비목’ 역시 재단장하게 된 거고요.” 12곡 중 ‘비목'을 포함한 6곡을 23일 오후 2시 서울 한남동 일신홀에서 발표한다. 연가곡의 주제는 ‘전장(戰場)의 애가, DMZ는 이렇게 말한다’이다. 메조소프라노 김지선이 노래를 부른다. 한 전 원장은 "악보는 받아봤지만 나도 아직 들어보지는 못했다”라며 기대감을 내비쳤다. 한 전 원장은 오랫동안 6·25전쟁을 기리기 위한 노력을 해왔다. "20대 젊은이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우리가 그걸 잊으면 안 되잖아요.” 1996년부터 25년간 현충일 추모 문화제를 직접 기획했다. 지난해엔 자신이 좌장을 맡고 있는 이미시문화서원에서 6·25전쟁 추념 음악회를 열었다. ‘격전의 산골에도 세월이 쌓여가니/ 포탄 터진 구덩이엔 오랑캐꽃 피어나고/ 파편 박힌 수목에도 새 가지는 무성하네.’ 열두 번째 연가곡 ‘화전터의 폐가’ 가사다. 6·25가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걸 안타까워하는 그의 마음이 묻어난다. 한 전 원장은 "온고(溫故)를 해야 지신(知新)도 할 수 있다. 전쟁 영웅들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라고 했다. 6·25 참전 용사들을 기리기 위한 의식도 11년째 꾸준히 하고 있다. 지난 2010년 6·25 60주년 진혼제에서 채화한 향불을 꺼뜨리지 않고 보존하면서, 매일 아침 그 앞에서 묵념하는 것이다. 그는 "나는 애국자도 아니고 뭣도 아니고 그냥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국민”이라며 "움직일 수 있는 날까지 묵념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죽는 날까지 매년 6·25 추념 음악회를 하는 게 바람이다. 하지만 행사 비용 등 문제와 체력적 한계가 발목을 잡고 있다. 향후 계획은 불투명하지만, 일단 연가곡 12곡과 삽화를 담은 시화집을 다음 달 초 출간할 계획이다. 한 전 원장은 마지막으로 참전 용사에 대한 예우를 강조했다. "나라 위해 헌신한 참전 용사들을 존중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진정한 공동체가 될 수 있어요. 6·25를 맞아 ‘진짜 영웅들’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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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1)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전통예술을 감상하면서 흔히 쓰는 어휘가 있다. 바로 ‘흥’과 ‘멋’과 ‘운치’라는 낱말들이 그것이다. 음악을 듣거나 춤을 보거나 그림을 감상하고 나서도 흔히 이 세 가지 말 중의 어느 단어로 각자의 감동을 표현한다. 그만큼 흥과 멋과 운치는 한국 전통예술을 관류貫流하는 공통된 미감美感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들 세 가지 용어의 개념을 잘 파악하면 한국 전통예술의 남다른 특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정서적인 느낌을 담아내는 추상적인 어휘의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들 몇몇 용어에 대해서는 관심 있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단서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흥은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평상적인 감정을 어떤 행위와 상황을 계기로 기분 좋게 고양시킨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흥은 한자로 興이라고 표기한다. 일어날 흥, 즉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논어》에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들의 순박한 정서가 두루 담긴 《시경》의 좋은 시들을 많이 익혀서 오탁汚濁되지 않은 사무사思無邪의 마음을 북돋워 가라는 것이 곧 ‘흥어시’다. 또한 순수한 감성이라도 지나치면 탈이 생기니, 일정한 절제와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입어례’요, 조화를 본질로 하는 음악을 통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균형 잡힌 경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이상적인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게 ‘성어악’이다. 흥이란 일단 좋은 감정이 흥기興起됨을 말한다. 희로애락 등의 여러 감정 중에서도 유쾌하고 화락和樂한 감정이 유발될 때 우리는 흥을 느낀다. 따라서 흥이란 문학적 시심詩心이나 예술적 희열로 연결된다. 우리 전통예술 속에 유난히 난숙한 흥의 색조가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 음미할수록 흥취 있는 시조가 있다. 졸다가 낚싯대 잃고 춤추다가 도롱이 잃어 늙은이 망령이라 백구白鷗야 웃들 마라 십 리에 도화桃花 발發하니 춘흥春興 겨워하노라 한겨울 추위가 지나고 새봄이 돌아왔다. 바람은 보드랍고 햇살은 따뜻하다. 온 천지가 연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십 리나 뻗어 있는 복숭아꽃도 빨갛게 만발했다. 겨우내 움츠렸던 감성이 아지랑이처럼 스멀대기 시작한다. 음산한 방안에만 박혀 있을 수가 없어 일단 자연 속으로 봄나들이를 나간다. 얼음 녹은 물가에서 낚싯대도 드리워 본다. 하지만 고기잡이는 안중에 없다. 깜박 졸다 낚싯대를 놓친다. 따사로운 햇볕은 잠자는 춘흥春興을 서서히 흔들어 깨운다. 절로 수지무지手之舞之 족지도지足之蹈之의 어깨춤이 나온다. 일할 때 입던 도롱이가 벗겨져 나간다. 이런 광경을 지나던 백구白鷗가 봤다. 일면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빨간 복숭아꽃이 십 리 길이나 피어 있는데. 그래서 "창공을 배회하는 흰 갈매기야, 늙은이 주책이라고 비웃들 마라. 모두가 주체하지 못하는 봄날의 흥취 때문이 아니더냐” 하고 말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흥이라는 말 외에도 ‘신’이나 ‘신명’ 또는 ‘신바람’이라는 말들도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흥이 났다’는 말을 쓸 자리에 ‘신이 났다’, ‘신명이 났다’, ‘신바람이 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흥이란 곧 신기神氣와 같은 핏줄임에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한국 전통문화의 기층이자 원형질이라고 할 샤머니즘적인 토양에서 자라난 문화 인자다. 한국 고대국가의 풍속을 기록한 중국의 옛 사서史書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부여의 영고迎鼓와 예맥의 무천舞天을 설명한 기록이 그것이다.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의 축제에서는 한결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무음주歌舞飮酒했다는 사실이다. 영락없이 굿판의 상황과 닮아 있다. 많은 군중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밤낮을 이어가는 정경을 가상해 보자. 감성이 넘쳐서 질펀하게 펼쳐지는 놀이굿 한판의 정취, 그것이 곧 흥과 신바람의 산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흥과 신바람을 빼면 한국 예술은 박제품에 불과하다. 특히 감성 표출의 진폭이 큰 민속예술이 그러하다. 민속예술에는 추임새라고 하는 독특한 장치가 있다. 산조를 연주하거나 판소리를 할 때 반주자가 연주가의 흥을 돋워 주기 위해서 발성하는 몇 마디 말들을 추임새라고 한다. 연주만이 아니라 줄타기 같은 마당놀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추임새가 있어야 제대로 된 연주나 놀이가 된다. 추임새란 말 그대로 추켜세워 준다는 뜻이다. 칭찬해 주는 것이다. ‘얼씨구’, ‘잘한다’, ‘좋지’ 등의 입말로 분위기를 고양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야 창자나 연주가는 더욱 악흥이 고조돼 가며 감동적인 공연을 해낼 수 있다. 그만큼 추임새의 기능은 민속악 공연의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그러고 보면, 민속예술 공연에 추임새라는 장치가 있다는 사실은 민속예술의 본질이 흥이나 신바람에 뿌리내려 있음을 방증하는 또 다른 실마리가 되는 셈이다. 신명기가 넘치는 분야는 비단 노래나 연주만이 아니다. 춤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다. 장고춤이나 북춤 같은 무용이 그러하고, 한량춤이나 강강수월래 같은 춤이 그러하다. 마당놀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당패의 놀이판이 그러했고, 해학과 풍자와 재담이 번뜩이는 탈춤이 그러하다. 모두가 흥을 바탕으로 치러지는 흥겨운 놀이판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풍속화가들의 그림을 봐도, 흥의 정체를 가시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그림 속에도 한국 예술의 공통분모 중 하나인 흥의 실체가 은연중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기질 속에는 지성보다는 감성이 농후하다. 사소한 얘기 같지만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지성적인 문화권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씨앗이라도 토양에 따라서 외양이 달라지듯이, 같은 계보의 예술이나 문화라도 그들이 싹트고 자라난 바탕색에 따라서 그 결실은 현저하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문화의 그 중요한 바탕색 중의 하나가 곧 흥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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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40: 한악계의 은인, 조선일보 방일영국악상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에는 상도 참 많다. 갖가지 상들이 넘쳐나고 있다. 상들이 지천이다 보니 개중에는 뒷말이 개운찮은 상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그 많은 상 중에서 과연 좋은 상이란 어떤 것일까. 사람마다 입장이 다르겠지만, 내가 보는 좋은 상이란 우선 권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시상의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상금의 과다에서 오는 것일까? 아니면 주최측의 명성이나 위엄에서 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상의 권위는 공평무사한 운영에서 온다. 아름아름 주고받는 상에는 권위가 쌓일 리 없다. 주는 자와 받는 자 공히 그저 주기적으로 치르는 요식행위에 불과할 뿐이다. 주는 자도 받는 자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받는 자도 수상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 어렵다. 시를 쓰는 어느 지인의 말이다. 자기가 아는 문인이 얼마 전 어느 문학상을 받았단다. 그런데 상을 받은 대가로 주최측이 발간하는 정기 간행물을 상금 이상으로 팔아줘야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상이 문학계에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는 수상자가 얼마를 내겠다고 먼저 언질을 주고 상을 받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시상제도가 하나의 생계수단으로 전락한 셈이다. 상 받았다는 것을 시큰둥하게 보거나 우습게 알기 십상이다. 이 같은 폐단은 전통음악계에서도 간간이 들려온다. 심사위원으로 선정되면 은연중에, 어떤 때는 아예 드러나게 자기 제자나 지인이 수상자가 될 수 있도록 서슴지 않고 부끄러운 짓들을 한다. 꽤 오래전 일이다. 전남 고흥에서 김연수 명창을 기리는 제1회 김연수국악상 심사를 위촉받고 참여한 적이 있다. 김 명창의 수제자를 자임하고 남들도 그렇게 인정하는 오 아무개 명창이 심사위원장 역할을 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국악 전공자도 아닌 인물을 수상자로 극구 추천했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인데 전주에서 국악계를 위해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수상 조건에도 맞지 않는 사람이라며 나부터 적극 반대했다. 결국 안숙선 명창을 제1회 수상자로 선정했다. 선정 회의가 끝난 후 은밀히 알아보니 오 명창이 열렬히 추천했던 인물은 바로 자기 남편이었다. 이 같은 전통음악계의 시상 풍토를 일거에 쇄신하고 등장한 시상제도가 다름이 아닌 방일영국악상이다. 하기사 방일영국악상은 기존의 여느 국악상들과 같은 지평에서 운위할 대상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만큼 격이 다르고 차원이 다르다. 이 상은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조선일보를 한국 대표 신문으로 키워 낸 우초愚礎 방일영方一榮 선생이 1994년에 제정한 국악상이다. 기억하는 분들도 많겠지만 1994년은 소위 ‘국악의 해’라고 해서 정부가 한 해 동안 국악계를 집중적으로 지원한다는 취지로 출범한 해다. 이어령 문화부장관 시절 그분의 아이디어로 한 해에 예술계 어느 한 분야를 당시 10억 원씩 특별 지원한다는 정책을 실행했는데, 무용과 문학에 이어 세 번째로 국악의 해가 선포된 것이다. 아무튼 유달리 국악을 좋아하며 국악인들을 자별히 배려해 주셨던 우초 선생은 국악의 해를 맞이하여 명실상부한 상다운 상을 출범시켰다. 지난해로 4반세기를 맞이한 방일영국악상은 그동안 전통음악계에 적지 않은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어 왔다. 사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들이라면 누구나 내심 수상을 소망하는 선망의 대상으로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방일영국악상의 권위와 위상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다. 그간의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누구나 그 상의 존재가치를 십분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 제1회 때의 수상자부터 순차적으로 열거해 본다. 제1회 판소리 명창 김소희, 제2회 국악학자 이혜구, 제3회 판소리 명창 박동진, 제4회 정재무 김천흥, 제5회 종묘제례악 성경린, 제6회 서도소리 오복녀, 제7회 판소리 명창 정광수, 제8회 정가 정경태, 제9회 배뱅이굿 이은관, 제10회 가야고 황병기, 제11회 경기민요 묵계월, 제12회 대금 산조 이생강, 제13회 경기민요 이은주, 제14회 판소리 오정숙, 제15회 판소리 고법의 정철호, 제16회 민속음악학 이보형, 제17회 판소리 박송이, 제18회 피리 정재국, 제19회 판소리 성우향, 제20회 판소리 안숙선, 제21회 경기민요 이춘희, 제22회 거문고 김영재, 제23회 사물놀이 김덕수, 제24회 가야고 이재숙, 제25회 한국음악학 송방송. 이쯤 되고 보면 방일영국악상은 상이되 상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를 증언하는 한국문예사의 거대한 물줄기이자 척추 같은 산맥이다. 따라서 그 상은 곧 음악상이되 하나의 독특한 문화현상이자 역사의 실록이라 할 수 있다. 이 같은 영예로운 국악상에 나는 직간접적으로 꽤 자주 연계돼 온 셈이다. 직접적으로는 심사위원이나 심사위원장을 했고, 간접적으로는 수상자들이 부탁한 축사의 글들을 시상식 유인물에 기고해 왔다. 총 25회에 걸친 시상 중에서 16회에 걸쳐서 나의 심사평이나 축하의 글이 실렸으니 이 상과의 인연도 적지 않은 연륜이 쌓였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국악신문 독자들에게 귀한 글을 보내주신 한명희 이미시문화서원 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이지출판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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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9: 유어예(遊於藝)의 귀명창, 호암 이병철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연주자와 청중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하겠다. 연주자 없는 청중이 있을 수 없고, 청중 없는 연주자도 존재 의미가 없다. 전통음악계에서도 사정은 여일하다. 좋은 명인 명창 뒤에는 반드시 귀밝은 애호가가 있기 마련이다. 자신이 스스로 노래는 못하지만 듣고 즐기는 데는 일가견이 있는 사람을 일러 귀명창이라고 한다. 여기 진실로 국악을 아끼고 애호하던 ‘귀명창’을 한 사람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고 호암湖巖 이병철李秉喆 선생을 앞세울 것이다. 전공이 아닌 사람이 어떤 특정 분야의 예술을 관심 있게 알기만 해도 세간의 화제가 되기 일쑤다. 그런데 호암 선생은 국악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쳇말로 가히 마니아 수준이었대도 과언이 아니다. 늘 국악을 듣고 즐기며 생활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논어》에서 말하는 ‘지지知之’와 ‘호지好之’의 단계를 넘어 ‘낙지樂之’의 경기에 들어 ‘유어예遊於藝’의 세계를 소요逍遙했던 분임에 틀림없다. 호암 선생의 국악 애호 덕분에 나는 그분을 자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수시로 나를 불러 국악 관련 심부름을 시켰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에서 일해 본 사람이면 잘 알 것이다. 조직 내에서 호암 선생의 위상이란 가히 소왕국의 황제격이었다. 사장단도 만나 뵙기 힘든 처지인데, 하물며 평사원이 호암 회장을 만난다는 것은 거의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요행히도 나는 대학에서 국악을 전공했다는 이력 때문에 그 ‘지엄한 회장님’을 때때로 대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TBC에 입사하기 전만 해도 호암 선생에 대한 나의 선입견은 세간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우선 그분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었으니 세평을 그대로 공유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분에 대한 세간의 별칭은 ‘돈병철’이었다. 돈 많은 기업가라는 뜻의 속칭이었다. 나도 그 같은 평소의 인상을 지닌 채, 당시 중앙매스컴센터 공채 3기로 호암 선생 회사에 발을 들여놓았다. 지금도 그때 정황을 떠올리면 얼굴이 화끈해지는 민망스런 일이 하나 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을 그대로 실천했구나 싶은 자괴감이 앞서기도 했던 장면이다. 사내 물정을 모르던 입사 초년생 때의 일이다. 이 회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당시 중앙일보 사옥이었던 서소문동 9층짜리 건물 3층에 호암 선생의 방이 따로 있었다. 물론 호암 선생의 집무실은 당시 소공동 반도호텔 맞은편 삼성 본사 건물에 있었지만, 갓 창설한 중앙매스컴센터에 애착이 많았던 호암 선생은 중앙일보사 회장실을 자주 사용했다. 아무튼 집무실 옆에 응접실이 있고, 거기에 여섯 사람이 서로 대좌해서 앉을 수 있는 낮은 탁자가 길게 놓여 있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여섯 자리에 다섯 분이 앉아 있었다. 호암 선생이 그곳에 들를 때마다 종종 배석하는 멤버들이었다. 중앙에는 이 회장이 앉아 있고, 그분 좌측에는 홍진기 중앙일보 사장, 우측에는 김덕보 동양방송 사장이 앉아 있었다. 호출된 나는 이 회장님 맞은편에 앉았고, 내 우측에는 당시 승계 수업을 받고 있던 이건희 씨가 있었으며, 좌측에는 비서실장이 있었다. 이어서 여비서가 차를 날라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였다. 무언가 지나치게 엄숙하다는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나는 용감하게(?) 차를 마셨다. 당시 이십 대 젊은 혈기에, 또한 치열한 경쟁을 뚫고 들어갔다는 내 나름의 우쭐함도 있던 터라 그랬는지, 아무튼 나는 속으로 ‘아니, 먹으라고 주는 차인데 왜 못 마셔’라는 객기와 함께 차를 마셨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그 자리에서 차를 마신 사람은 나를 제외하면 딱 두 사람밖에 없었다. 물론 이 회장과 홍진기 사장이었다. 아들 이건희 씨도 김덕보 방송 사장도 차를 그대로 보고만 있다가 물렸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나 역시 차를 마시지 못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을 알아채고 세상눈을 뜬 이후였다. 내가 겪어 본 이병철 회장은 실로 걸출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그분만큼 우리 전통문화예술을 아끼고 귀히 여기는 명사를 나는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전문가가 민망할 정도로 문화적 소양이 풍부하고, 좋은 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기 위해서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를 꿰뚫고 있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70년대 초였을 것이다. 당시 해군에서는 문명의 혜택을 못 누리는 섬 지방을 순회하며 의료봉사를 하곤 했다. 나는 해군본부와 협의해서 그 순회선을 타고 낙도를 돌며 민요 채집을 하기로 했다. 이 계획을 이 회장께 말씀드리니 아주 반색하며, "그 같은 일은 문공부 사람들이 해놔야 하는데 아직 꿈도 안 꾸니, 뉘 할 수 있으면 하그라. 그런데 돈은 운현궁 홍두표에게 얘기해라.” 아니, 국악을 우습게 알던 시절에 낙도의 민요까지 소중히 여겨 채록을 반기며 흔쾌히 허락을 하다니! 호암 선생의 전통문화 사랑은 이처럼 넓고도 깊었다. 며칠 후 나는 작업복에 배낭을 챙겨서 승선 준비를 하고 출근했다. 갑자기 이사실에서 호출이 왔다. 훗날 삼성그룹을 떠나 대원외국어학교를 창설한 이원희 이사의 호출이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다짜고짜 험한 소리로 화를 부리며, 캐비넷을 열더니 서류철 하나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뭐 당신만 민요 채집할 줄 알아? 나도 다 계획이 있어. 그리고 당신 라디오 소속이야 텔레비전 소속이야? 왜 텔레비전 쪽 사람하고 일해?” 그러고는 당장 운현궁에서 근무하던 텔레비전 파트 홍두표 국장을 부르더니 민망할 정도로 몰아붙였다. 같은 방에 나란히 책상을 하고 있던, 후일 삼성전자를 일으킨 강진구 이사와 최당 이사는 불편한 듯 말없이 외면하고 있었다. 아마 그날 이후 홍두표 국장은 내심 어금니를 물고 와신상담하며 훗날을 도모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 같은 소동의 속내는 뻔한 것이었다. 서로 눈치껏 이 회장에게 잘 보여 빨리 출세 좀 해 보려는 심산이었음은 불문가지였다. 호암 선생의 특출난 문화 안목 외에 또 다른 개성이라면 나는 그분의 명쾌하고도 단호한 성품을 손꼽고 싶다. 한 번은 민속악 계 원로였던 박헌봉 선생한테 가서 국악곡을 하나 복사해 오라는 분부였다. 정남희 산조를 구할 수 없느냐고 말씀했을 때도 그랬고, 그 후 백낙준 거문고 산조를 수소문해 보라는 지시에도 얼른 대안이 안 보여 막막했지만, 이번에도 악곡명이 내겐 익숙한 게 아니어서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당시의 곡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흔히 알려진 곡이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아무튼 나는 정릉의 박 선생 댁을 찾아가 회장님 뜻을 전했다. 그런데 박헌봉 선생도 연세가 높아 노망기가 있었는지, "아, 이건 내가 진주에서 얼마나 어렵게 채록해 온 건데…’라는 등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며 복사를 기피했다. 그 후의 상황은 불을 보듯 뻔했다. 호암 선생은 모든 것을 단칼에 결론낸다. 한 번의 지시로 결론이 나야 한다. 재고나 두 번 다시라는 말이 있을 수 없다. 바로 저런 성품이 큰 기업을 일군 비결이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쾌도난마의 명쾌한 과단성이 있었다. 키가 작고 가냘픈 체구에 목소리는 작고 조용했으며, 안경 너머 입가로는 늘 자애로운 미소가 잔잔히 흐르던 호암 선생이었지만, 이때만은 아주 단호한 어투로 내게 잘라 말했다. "니 다시 한번 그 집에 가면 내한테 혼난다!”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예다. 복사본을 받으면 그냥 있을 이 회장이 아니다. 더구나 그 이전부터 당시 8백여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남산에 국악예술학교를 지어 주는 등 갖가지 배려를 해 주던 상대가 아니던가. 그러니 호암 선생이 느꼈던 배신감은 여간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고, 사람의 평가는 사후에 제대로 드러나기 마련이라는데, 유명幽明을 달리한 호암 선생의 진면목이라면 역시 내게는 여일하게 국악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꼈으며, 겪어 보지 않고는 예상할 수 없을 만큼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전문가가 부끄러울 정도의 탁월한 ‘귀명창’이었다는 사실이다. 지금 와 생각해도 아쉽기 짝이 없는 사연이 있다. 한 번은 이 회장님께 명인 명창들이 더 늙거나 돌아가시기 전에 그분들이 부를 수 있는 모든 곡들을 전부 녹음해서 후세에 남겼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물론 호암 선생은 흔쾌히 공감했다. 우선 생각나는 대로 이은관 선생을 모셔다가 배뱅이굿을 필두로 그분의 노래를 수록했다. 그리고 박녹주, 박초월, 김연수, 신쾌동 같은 명인 명창들도 틈틈이 모셔서 녹음했다. 그 후 김소희 명창을 모셔서 그분이 부를 수 있는 민요와 단가들을 전부 녹음했다. 그런 다음 판소리 전 바탕을 녹음 기록할 차례였다. 그런데 국악사의 한 흐름은 거기서 끝났다. 언젠가는 따로 언급할 계기가 있을지 모르지만, TBC와 나와의 인연은 거기까지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호암 선생의 문예 사랑의 열정은 시정市井의 상식을 초월한다. 여기 그분의 다방면에 걸친 국악 사랑의 진정성을 방증할 몇 가지 좋은 사례를 소개한다. 앞서 정남희와 백낙준의 음악을 구해 보라는 호암 선생의 언급이 있었다는 얘기는 얼핏 했다. 글로 전하는 얘기들이니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누군지도 모르고 찾을 길도 없는 사람의 음악을 복사해 오라는 지엄한 회장님의 주문을 받은 당사자의 입장은 실로 당혹스럽고 막막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상상이 되겠지만 차도 제대로 못 마시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정남희가 누구고 백낙준이 누구냐고 언감생심 반문해 볼 수도 없는 일이고, 일단은 "네, 알았습니다” 하고 무조건 복창하고 나오는 길밖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리저리 수소문을 해 보니 정남희는 월북 음악가였다. 당시로서는 알 길이 없는 인물이었다. 월북자는 이름조차 거론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시절이니 더더욱 안개 속의 인물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의 가야고 산조를 구해 온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그 일은 성사되지 못했다. 정남희 명인의 얘기가 나온 김에 그가 월북하게 된 동기를 전해 두는 것도 좋을 성싶다. 어느 날 박동진 명창이 내게 직접 들려준 얘기다. 정남희의 월북은 한마디로 애정 관계 때문이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속담처럼 사귀던 애인을 빼앗긴 홧김에 월북을 했다고 했다. 당시 그는 요정에 나오던 한 여인과 사랑에 빠졌는데, 그 시절 서슬이 시퍼렇던 서울경찰청의 총책 장택상이 그녀를 채갔다고 한다. 찍소리도 못한 정남희는 분통을 참지 못하고 월북을 결행했다. 다시 국악 얘기로 돌아가서, 난감하던 백낙준의 거문고 산조는 어렵사리 수소문 끝에 유성기 녹음을 복사해다가 호암 선생께 진상했다. 그때 그 난제를 해결해 준 사람이 후일 민속음악계에 큰 업적을 남긴 이보형 선생이다. 이 선생은 당시 신촌에 살고 있었는데, 어렵게 집을 찾아가서 통성명을 하고 백낙준의 음반을 빌려다가 복사했다. 그 같은 인연으로 이보형 선생과는 그 후 꾸준하게 동학의 길을 걷게 되었으니, 사람의 관계란 참으로 묘하다는 느낌도 떨칠 수가 없다. 한 번은 당시 미술계 원로였던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 선생을 모셔다가 시조음악을 녹음해 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물론 당시 나는 김은호 화백이 어떤 사람인지 알 턱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즐겨 듣던 민요나 판소리 같은 음악도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졸립다며 외면하는 시조창을 녹음해 보라니, 내심 의아하게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만큼 호암 선생은 국악 전반에 달통해 있었고, 모든 분야를 두루 즐기며 감상했다. 한편 그분 덕분에 나는 ‘한국 언론의 사표’니 ‘민족 지성’이니 하는 호칭으로 뭇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 선생 댁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호암 선생이 직접 청암 댁 방문을 지시했는지, 아니면 호암 선생이 원하던 음악을 수소문하던 끝에 청암 선생 댁을 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한 시대를 이끌던 최고의 지성이요 대언론사동아일보 편집국장의 집 치고는 상상외로 초라했다는 사실이다. 그분의 가옥은 동작동 국군묘지 산자락과 연결된 흑석동 왼쪽 능선 비탈배기에 있었다. 주변의 집들도 유사했지만 청암 선생의 거처도 영락없이 퇴락한 빈촌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가 오면 새는 비를 피하려고 방 안에서 삿갓을 쓰고 살았다는 황희 정승의 얘기처럼, 청암 역시 야와육척夜臥六尺의 허름한 집에서 오상고절의 선비정신을 궁행하며 간고한 시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음을 그분의 청빈한 삶 속에서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 같은 한 시대의 사표를 뵐 수 있었던 연분 또한 호암 선생 덕이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어느 해 여름방학 때였다. 당시 국립국악원에서는 전국 중고교 음악 선생들에게 하계 국악 강습을 시키고 있었다. 교육기간이 끝나자 나는 국악원의 협조를 얻어 음악 교사들을 중앙일보사로 초청하여 사옥 9층 라운지에서 다과회를 열어 주었다. 호암 선생이 챙겨 보라는 소리음반의 정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그분들에게 한 가지 청을 했다. 각자의 지역 학교로 돌아간 후 혹시 국악 유성기 음반이 눈에 띄면 내게 연락 좀 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 후 전남 강진인가 어느 지방에서 SP판 몇 장을 보내왔다. 임방울의 쑥대머리가 수록된 유성기판이었다. 그 음반을 정성껏 스트레오로 재생했다. 당시 그 같은 일을 함께 한 엔지니어는 훗날 삼성 르노자동차 사장이 된 임경춘 텔레비전 기술국의 사우였다. 아무튼 재생된 노래는 지글지글하는 소음 소리만 요란했지, 임 명창의 소리는 저 뒤편 속에서 개미소리만 하게 들렸다. 웬만한 사람이면 두 번 다시 들으래도 고개를 저을 판이었다. 그러나 호암 선생은 그 잡음 투성이의 소리를 벤츠600 안에 장착해 두곤 수시로 즐기셨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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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8: 화정 김병관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동아일보 발행인으로 존함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가 화정化汀 김병관金炳琯 선생을 직접 뵌 것은 딱 한 번이다. 언젠가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였다. 나는 안국동 쪽에서 인사동 네거리 방향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는데, 반대 방향에서 올라오던 이수성 총리를 우연히 만났다. 그때 이 총리와 동행하고 있던 분이 바로 화정 선생이었다. 그때 이 총리는 내게 "한 교수, 인사드려. 동아일보 김 회장님이셔”라며 선선한 어투로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이수성 총리는 자칭 호형호제하는 사람이 수만 명이 된다는 한국의 마당발이다. 잔정이 많으면서도 호방한 데가 있어서 많은 지인들이 그분을 따랐다. 나보다 2년 위인 그를 나는 이런저런 인연으로 대학 때부터 알고 지냈기 때문에 격의 없이 그를 좋아했다. 아무튼 이 총리를 통해서 나는 화정 선생을 뵙게 되었는데, 내가 느낀 첫인상은 유난히 온후하고 과묵하다는 느낌이었다. 언론계 인사들은 아무래도 이지적이고 예리한 구석이 있으려니 여겨오던 선입견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화정 선생의 분위기는 눈에 띄게 소탈하고 후덕하다고 느꼈던 경험이 지금까지도 완연하다. 화정 선생과의 해후는 이렇게 일회성으로 끝났지만, 세상만사 인연의 실타래는 누구도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화정 선생과의 인연도 이와 같아서, 나는 훗날 그분의 장례식에서 조창弔唱 가사를 쓰게 되었으니 참으로 인생살이 인연의 고리들이란 도시 그 정체를 가늠할 길이 없다. 고려대학 영결식장에서 내 조사에 안숙선 명창이 가락을 얹어 진양조의 비탄 조로 조가를 부르자 장내는 이내 눈물바다가 되었다. 인사동에서 스친 인연이 화정 선생의 마지막 이별 예식에서 일종의 해로를 통해 다시 이어졌으니, 참으로 인연이란 현묘玄妙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다. 정녕 가시나이까 화정 선생님 만경 들 고창 골에 봄비 내리고 진국명산 삼각산에 서설瑞雪이 내리며 온누리 삼라만상 생명의 물결 가득하니, 김 회장님 당신께서도 연년익수延年益壽 만수무강 누리시리라 믿었는데, 이 무슨 비보란 말씀이외까. 이 무슨 대경실색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외까. 존경하는 화정 선생님! 나라가 어려울 때, 겨레가 곤고困苦할 때 항상 민족의 희망으로 국체를 지켜내던 민족언론 동아 가족, 국내외 자랑스런 민족의 대학 고려대에 모여든 천하 영재들, 고려중앙학원의 요람 속에서 웅지를 키워 가는 나라의 동량지재, 이들 모든 화정 선생 평생의 분신들은 어찌하라고 이처럼 홀연히 모습을 숨기시나요. 이렇게 황망히 작별을 고하시나요. 제 소리 제 장단을 아끼시며 민족문화 창달에 헌신하신 화정 선생님, 안중근 의사와 홍범도 장군 같은 신작 창극에, 중앙아시아 알마티와 타슈켄트, 러시아 모스크바, 조국의 선율 아리랑 가락으로 촉촉이 위무하던 고려인의 눈물! 이제 어느 누가 그들의 외로움을 보듬어 주고, 이제 어느 누가 문화국민의 품격을 이토록 드높여 가며 이끌어 주시나요. 안 되지요. 안 되지요. 이건 정말 아니지요. 인자하고 후덕하신 화정 선생님! 정녕 무정하게 가시나이까. 만경창파에 배 띄워서 총총히 가시나이까. 산지니 수지니 해동청 보라매도 쉬어 넘는 고봉 장성령 고개, 그 너머 피안의 세계로 정녕 가시나이까. 선조 선친 혈육의 정이 그다지도 그리우셨나이까. 비익조比翼鳥 연리지連理枝라 사모님의 자애로운 모습이 그다지도 애틋하게 사무치셨나이까. 추월이 만정할 때 청천靑天을 울어예는 외기러기처럼, 창졸간에 홀연히 이승을 하직하시니, 남은 자들 하염없이 진양조 이별가로 목이 메어 우옵니다. 언젠가 김소희 선생께 배우신 소리라며 흥타령을 부르셨지요. ‘아깝다, 이내 청춘 언제 다시 올거나. 철따라 봄은 가고 봄따라 청춘 가니, 오는 백발 어이할까! 아이고 대고 흥 성화가 났네 흥’ 그렇습니다, 화정 선생님. 사람이 비록 백년을 산대도 인수순약격석화人壽瞬若擊石火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를 왜 아니 모르리까만, 화정 선생님 남기신 업적 너무 높고도 커서, 화정 선생님의 후덕한 감화 더욱 깊고도 두터워서, 못내 아쉽고 애통할 뿐입니다. 동원도리東園桃李 편시춘片時春을 언제 다시 맞을 게며, 백천百川이 동도해東到海면 언제 다시 서쪽으로 되돌아오겠나이까! 부디 하늘나라 선계에서 명복을 누리소서. 천복天福을 누리소서. 영생을 누리소서.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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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7: 서암 권승관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세상살이 어찌 보면 장강의 물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통상 우리는 표면만 보며 그 대상을 이해하기 마련이다. 동시에 흘러가는 물줄기련만 그 저변에 흐르는 물살은 알 길이 없다. 우리 인생살이도 이와 같아서 세상에 널리 회자되는 인물만 기억하고, 초야에 묻힌 인재는 비록 그가 보옥 같은 존재라도 좀처럼 알아채질 못한다. 전통음악계에도 그 같은 사례가 있다. 그분만큼 국악을 사랑하고 그분만큼 국악을 몸소 익히며 심취한 예가 드묾에도 불구하고 중앙 한악계에서는 까마득히 모르고 있었다. 초야의 보옥을 알아볼 정보나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모든 문화예술 분야가 대동소이했지만, 전통음악 역시 일제 문화말살정책에서 가까스로 기사회생했다. 바로 그 기사회생의 생기가 움트고 뿌리내린 텃밭이라면 누가 뭐라든 남도의 예향 광주 고을이라 하겠다. 여유 있는 집안 자녀들이 일본 유학을 거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전통예술의 소중함과 그 남다른 진가를 선구적으로 터득한 덕분이기도 하지만, 일제 암흑기에도 광주 유지들은 유달리 국악을 사랑하고 국악을 육성하려고 애써 왔다. 고장의 몇몇 명인 명창들을 찾아가서 직접 배우고 교유하면서 다 죽어가는 환자에게 미음물을 떠먹이며 원기를 회복시켜 주듯, 살뜰히도 보듬으며 국악의 명맥을 이어냈다. 바로 그 같은 고마운 선각자 중의 한 분이 곧 서암瑞巖 권승관權昇官 선생이다. 전북 김제 출신인 서암 선생은 한국기계공업의 선각자요 개척자라고 할 기업인이었다. 6·25전쟁 와중에 화천기공사라는 합명회사를 차려 기계공업 분야의 초석을 놓았는데, 오늘날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화천貨泉그룹이 바로 그 후신이다. 서암 선생이 한국의 기계공업 육성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쳤느냐 하는 평가는, 정부가 그분에게 어떠한 예우를 해 드렸는가를 살펴봐도 자명해지는 일이다. 한마디로 정부는 그간 그분에게 금탑산업훈장을 포함해서 훈·포장만 여덟 번 수여했다. 이처럼 서암 선생은 한국 굴지의 저명한 기업가였다. 하지만 이에 못지않게 광주 지역 국악 발전의 태산북두泰山北斗였다. 광주국악진흥회 초대 이사장이라는 직함이 단적으로 증언해 주듯, 서암 선생은 당시 그곳의 뛰어난 예인들과 교유하고 후원하며 광주 지역 국악 진흥의 견인차 역할을 한결같은 열정으로 해 왔다. 나남출판사에서 나온 《기계와 함께 걸어온 외길》이라는 서암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그분이 광주 지역에서 교유했던 국악인 중에는 훗날 서울 중앙무대로 올라와서 크게 양명揚名한 명인 명창들이 한둘이 아니다. 대충만 돌이켜봐도 판소리에 임방울, 정광수, 김연수, 김소희, 박초월, 조상현 등이 있으며, 고수에는 김득수, 김명환 등이 있다. 또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국악인이나 애호가들로는 병신춤의 대가 공옥진의 아버지 공대일, 진도 지방의 명창 양홍도, 광주기예조합의 소리꾼 안채봉, 그밖에 박동실, 임세균, 김비현 등 뛰어난 예인들이 줄을 잇는다. 서암 선생은 국악을 사랑하며 후원하던 애호가나 독지가에만 머문 분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소리북의 달인인 명고수였다. 북장단 몇 가지 익혀 본 정도가 아니었다. 북장단의 속멋을 속속들이 터득한 경지였다. 그래서 그분의 장단에는 전통음악의 총체적 맛과 멋이 배어 있고, 소리꾼의 소리 길도 자연히 그분의 북가락을 따라서 흐를 수밖에 없었다. 임방울 명창이 말년의 광주 공연에서 서암의 북장단을 주문했던 사실은 널리 회자되는 일화다. 또한 서암 선생은 어려운 이웃을 배려하고 널리 장학사업을 펼쳐 온 독지가이기도 하다. 나는 지난 세기 90년대부터 4반세기 이상을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등지를 매년 순회하며 그곳 고려인 동포들을 위한 위문공연도 하고 한글도 가르쳐 주는 일을 해 왔으며, 그 나라 유력 인사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양국의 가교 역할을 했다. 그 무렵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한국의 광주 분들이 그곳에 와서 고려인들에게 한글도 가르쳐 주는 등 여러 가지 고마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내심 반갑기도 놀랍기도 했다. 나만이 선각자인 양 실천해 오고 있는 일들을 어떻게 지방 도시인 광주 분들이 그 같은 일에 앞장설 수 있었을까 심히 의아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웬만한 한국인들은 중앙아시아가 어디쯤 붙어 있는지도 모를 때였다. 더구나 그때는 직항로도 없어서 멀리 모스크바를 경유해야 했다. 그 같은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광주 분들은 고생하는 핏줄들이 안됐어서 머나먼 타슈켄트까지 찾아간 것이다. 훗날 안 사실이지만, 그 같은 미담의 주역이 곧 서암 권승관 선생이셨다. 《논어》에 ‘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는 말이 있다. 일언이폐지해서 서암 선생의 한평생은 일찍이 십 대 때부터 이미 기업보국企業輔國의 대망을 마음속에 새겨 분기시켰으며[興], 편법이 아닌 정도 경영에 입각해서 이상적인 기업인상을 확립했으며[立], 결국에는 조화와 균형으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아우르는 음악의 속성 그대로 기업과 사회와 인생과 예술을 하나로 용융시켜 세상이 우러러 칭송하는 이상적인 인물상을 체현하며[成], 한 시대를 덕인德人이자 대인大人으로 사셨다고 하겠다. 덕 있는 부모 밑에서 효자 나듯이, 서암 선생의 덕성과 가치관을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이어받은 권영열 화천그룹 회장은 선친의 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 독일, 인도 등 세계로 뻗어가는 탄탄한 중견 기업의 기틀을 다졌으니, 가문의 융성은 물론 묵묵히 기업으로 나라에 보답하는 신실信實한 기업인의 모범적 사례가 아닐 수 없다. 더욱이 권영열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기여에도 남다른 소신이 있어서, 선친의 호를 딴 서암문화재단을 설립하고 전통예술의 본향이랄 전남 문화예술 발전에 각별한 애정과 열정을 쏟고 있다. 그 중의 한두 사례가 곧 이 고장의 인재들을 선별해서 장학금을 수여한다든가, 혹은 전통문화예술에 공적이 많은 호남지역 예술인을 선정하여 매년 ‘서암전통문화대상’을 시상해 오고 있는 예들이라고 하겠다. 특히 금년이 벌써 9회째인 서암상은 회를 거듭하면서 호남 예술인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음으로 양으로 확실한 격려와 분발의 기폭제가 되고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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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 송축시(頌祝詩)다음은 본지 ‘한악계의 별들’을 집필하는 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명희 님의 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 송축시(頌祝詩)이다. 국악신문은 개원 70주년을 축하하며 독자들과 그 뜻을 함께하고자 게재한다. 본지 수록을 허락한 국립국악원에 감사 드린다.(편집자 주) 국립국악원 개원 70주년을 송축하며 한명희(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대체 그대는 누구이더냐 아시아의 동쪽 단군의 땅 이끼 푸른 가락으로 장단으로 곱게 곱게 물들여 낸 그대는 대체 누구이더냐 그대는 도시 무엇이더냐 ‘동방의 등불’ 코리아의 존엄을 천년의 음향 억겁의 음색으로 서리서리 빚어낸, 그대 정녕 누구이더냐 무엇이더냐 전화戰禍의 잿더미 속에서 죽어서 태어나는 불사조처럼 십이율려 기둥 삼고 영산회상 들보 삼아 팔음극해八音克諧 이풍역속移風易俗 예악세상 용케 세운 조화옹의 소리궁궐 그대 진정 누구이던가 무엇이던가 이제사, 가늠이 가오 짐작이 가오 구름밭에 잠겨 있던 그대의 정체 부산 피난 용두산과 운니雲泥, 남산, 우면자락 고희古稀의 광음光陰 거쳐가며 절차탁마切磋琢磨 조탁해 낸 소리의 진주 겨레의 영보靈寶임을 시대의 영락榮落 겨레의 애환 굿거리의 어깨춤과 애원성의 여운 속에 풀어내고 녹여내 온 대한의 혼줄 역사의 명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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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31흙의 소리 이 동 희 진출 <6> 황종은 한국의 전통음악 율명으로 첫 번째 음률이다. 낮은 음으로부터 시작하여 황종 대려 태주 협종 고선 중려 유빈 임종 이칙 남려 무역 응종 12율이며 이는 일년 열두 달에 배속시켜 양陽의 기운이 처음 생기는 동짓달부터 시작하여 황종은 11월 달에 해당된다. 양의 기운이 땅 속에서 움직여 만물을 소생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방위는 자子, 처음 시작의 뜻이 담겨 있는 음율이다. 율관의 길이를 재던 자를 황종척黃鍾尺이라고 하였다. 황종율관은 우주의 중심이 라 할 수 있는 황종음률의 높이를 표출해 내는 죽관의 길이는 일상적인 길이가 되고 잣대가 되고 기준이 되었다. 황종율관의 내경 속에 채워지는 기장의 양은 생활의 부피의 단위가 되고 기장의 무게는 무게의 단위가 되고 기장의 길이는 또 길이의 단위가 되었다. 그래서 황종율관은 도량형의 기준이 되었다. 황종의 높이-황종율관의 길이-를 얼마로 정하는냐의 문제는 그대로 생활의 기준이 되고 삶의 척도가 되었다. 박연의 악기 제작은 단순히 악기의 제작에 그친 것이 아니고 삶과 직결된 것이고 일상의 삶과 시간과 우주 땅의 기운이 융합된 철학이 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오성을 고르고 저울로 헤아려 보고 살펴보고 한 이유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박연의 음악적 업적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것이 율관 제작의 시도이다. 국악인 한명희는 먼저 인용한 「난계의 업적」에서 말하고 있다. 얼핏 율관 제작이라면 한갓 악기의 제작쯤으로 치부하기 일수이겠지만 기실 황종율관의 제작이란 나라의 기틀을 좌지우지하는 근원적이고도 중차대한 행위인 것이다. 그리고 박연의 음악적 공헌으로 연결되는 동양적 음악관에 대하여 말하였다. 나라가 바뀌면 음악도 바뀌는 것이다. 치세지음治世之音이니 망국지음亡國之音이니 하는 일상용어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라가 망한다는 것은 곧 음악제도의 붕괴를 뜻하기도 했다. 난세지음亂世之音이 횡행하면 백성들의 심성이 사악해지고 사회기강이 문란해서 결국은 나라가 망한다는 논리였다. 시대적 관점이 이러했기 때문에 왕조가 바뀌면 음악 제도를 바꾸는 것이 상례였다. 망국의 음악을 새로운 왕조에서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서서히 사회분위기가 안정되자 악정樂政에 관심을 기울인 세종의 치적도 이 같은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고 박연의 음악적 공헌도 같은 관점에서 보다 큰 역사성을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든 박연은 음악의 원초이자 생활의 척도라고 할 수 있는 한 틀에 12개 달린 석경, 황종율관을 정확하게 만들기 위해서 몇 차례 치밀한 시도를 하였고 그러고도 흡족한 자위를 하지 못하였다. 그것은 박연의 음악에 대한 치열한 집념이자 누구나 할 수 없는 율관 제작의 어려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황종율관의 제작이 세종의 중요한 음악적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는 이유이다. 영동 난계국악당에 있는 편경編磬을 둘러보았다. 종묘제례악의 등가登歌에 편성된 아악 악기였다. 두 층의 걸이가 있는 틀에 경쇠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세종 때 남양에서 소리가 아름다운 경돌을 발견하게 되어 새로 만든 경은 중국의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음색을 가졌고 또 그 음율도 정확하였다고 설명을 붙여놓았다. 경돌은 ㄱ자 모양으로 깎아서 만들며 두께에 따라서 음율의 높낮이가 다르다고 하였다. 이 악기를 간직하는 고직庫直이가 혹 실수하여 한 개라도 파손하였을 때에는 곤장 100대에 3년 유배라는 엄벌에 처한다는 경국대전의 얘기도 있다. 박연의 숨결이 이곳저곳에 서려있는 것이 느껴졌다. 괴나리 봇짐을 지고 여기를 떠나 문과에 급제하고 집현전 교리를 거쳐 지평 문학을 역임하다가 세종이 즉위한 후 악학별좌에 임명되어 음악의 일을 맡아보기 시작하였다. 당시 질서가 없는 악기 조율調律의 정리와 악보 편찬의 필요성을 상소하여 허락을 얻고 새로 편경 12장을 만들었다. 이 획기적인 음악사적인 사건을 정리하여 다시 말하지만 처음에 중국에서 보내온 황종을 삼분으로 조정해서 12율관을 만들었고 옹진의 기장과 남양의 석경으로 조화를 이루어 드디어 종묘조회의 악기를 갖추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가을 종묘의 영녕전永寧殿의 여러 제사 때 편경을 통용하게 했다. 그리고 다음 해 5월 편경과 특경特磬을 완성했다. 또 그 다음 해 여름 자작한 12율관에 의거하여 음율의 정확을 기하였다. 말 그대로의 정확을 이루는 대장정이었다. 이러구러 난계 박연은 51세 지명知命의 나이가 되었다. 하늘하늘 약하지만 부러지지 않고 강가 빈 터에 씨를 뿌리고 가꾸듯이 소걸음으로 느릿느릿 그러나 멈추지 않고 나아갔다. 그 이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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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6: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작곡가, 황병기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전통음악계에 문화사적인 자긍심을 심어 온 방일영국악상이 올해로 열 돌을 맞았다. 유구한 민족음악사의 맥락에서 볼 때 10년의 시간이란 하나의 작은 눈금에 불과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한국 음악계의 시대 상황을 감안할 때, 그 작은 시상 경력 10년의 눈금은 결코 예사롭지 않음을 우리는 이내 간파할 수 있다. 그것은 외래문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전통문화의 소중함을 묵시적으로 일깨워 온 하나의 시대적 계도啓導였고, 국제화의 조류 속에서 민족예술이 지향해야 할 원대한 좌표와 체질을 확고하게 제시하는 역사적 선언의 뜻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언간 20세기 문화적 격랑의 시대도 갔다. 주객전도의 부끄러운 문화 구도도 눈에 띄게 바로잡혀 가고, 법고法古 없이는 창신創新도 어렵다는 자각에서 주체적 문화의식도 점점 높아가고 있다. 명실상부한 문화적 과도기를 넘어서고 있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한국 문화사의 한 굵은 마디竹節를 형성해 가는 시점이라고 하겠다. 이 같은 시대적 변이의 마디에 상응하여 방일영국악상 10년의 마디에서도 작은 변화를 꾀해 보았다. 일부 심사위원들을 교체하여 새로운 감각과 가치관을 보안했고, 수상 대상도 연령층을 낮추고 현재 활동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신을 모색해 본 게 그것이다. 이러한 일신된 체제로 제10회 방일영국악상 심사회의가 열렸다. 이보형, 정재국, 황준연, 안숙선, 박범훈, 한명희 6명의 심사위원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회의에서는 먼저 방일영국악상의 발전적 운영을 위한 자유 토론이 있었고, 이어서 제10회 수상자로 황병기 교수를 선정했다. 황병기 교수가 만장일치로 선정된 이유는 그분의 공적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가야고 연주가로 국내에서는 국악의 위상을, 해외에서는 한국의 국위를 선양했고, 불모의 창작계에 현대적 감각을 접목한 주옥같은 신작을 만들어 냄으로써 가야고 음악의 신지평을 개척한 공로 등은 비단 국악계만이 아니라 온 국민이 인정하는 황 교수의 공적이 아닐 수 없다. 황 교수는 본디 법학도였다. 한때 엘리트 코스의 대명사처럼 회자되던 경기고에 서울법대를 나왔다. 하지만 그는 학창 시절부터 국립국악원에 드나들며 가야고를 배웠다. 그 덕에 당시 60년대 초부터 서울음대 국악과 강사로 출강했다. 이처럼 취미로 시작한 가야고가 대학 교단으로 연계가 되었고, 끝내는 법조인이 아닌 음악인으로 업을 삼으며 평생을 이바지하게 된 것이다. 연주자로 출발한 황 교수는 또 한 번의 변신을 한다. 이번에는 작곡가로의 새로운 지평에 들어선다. 물론 그가 작곡 활동을 시작한 60년대 초반 이전에도 국악 작곡 활동은 있었다. 특히 40, 50년대에는 당시 국립국악원에 봉직하고 있던 김기수 선생이 거의 독보적인 활동으로 종래 정악풍의 신작을 발표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음대에 국악과가 창설되면서 전통음악 작곡계도 환골탈태되기 시작하는데, 다름 아닌 서양 음악의 작곡어법을 매체로 한 창작곡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황 교수의 작곡 활동도 기지개를 펴기 시작했는데, 특히 그는 당시 서양 현대 음악기법으로 작곡 활동을 활발히 하던 서양 음악 전공의 강석희, 백병동 등과 교유하며 서구적인 작곡기법으로 가야고 음악의 신곡들을 창작해 내기 시작했다. 이런 경위로 시작한 황 교수의 작곡 활동은 ‘비단길’, ‘미궁’, ‘가라도’ 같은 자기류의 신곡을 만들어 내며 가야고 음악의 레퍼토리를 획기적으로 확충해 갔다. 결국 황병기 교수의 일생은 법학도로 출발하여 가야고 연주가로, 가야고 작곡가로 변모해 가며 다채로운 삶을 살아간 셈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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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5: 정악 가야고의 법통을 잇는 최충웅 명인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국립국악원에서 평생을 봉직하며 가야고 정악 음악의 법통을 이어온 최충웅 원로사범이 자신의 음악 세계를 총정리하는 소중한 음반을 출간했다. 수록 곡목도 영산회상과 가곡만년장환은 물론 여민락, 도드리, 천년만세, 취타, 황하청, 경풍년에 이르는 방대한 내용으로 명실상부하게 정악 가야고 음악의 전 분야를 망라했다. 실로 필생의 업적으로 칭송할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간 시중에는 한악韓樂 관련의 여러 가지 음반이 많이 나와 있고, 정악 음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최충웅 원로의 연주로 출간된 음반은, 그의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는 난숙한 기량이나 풍진 세월을 거쳐 온 달관된 곡 해석을 미루어 볼 때, 단연 정악 음악의 표본으로 삼을 만한 군계일학의 압권이 아닐 수 없다. 따지고 보면 음악도 학문도 결국은 각자 인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고, 또한 자기 완성을 위해 이를 연마하고 궁구窮究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저간의 세태는 이 같은 상식적인 진리가 뒤바뀌어 있다. 인간 완성을 위한 예술이요 음악에서, 인간의 문제는 증발되고 오로지 음악을 위한 음악, 기교를 위한 예술만이 횡행한다. 한마디로 자기 완성을 위한 음악이기보다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음악에만 매몰되어 무한경쟁으로 치닫고 있다. 자연히 허세와 분식과 위선으로 포장되기 마련이며, 그만큼 지고지순해야 할 음악의 정체는 속물주의적 욕망의 도구로 전락되고 있다. 사람 됨됨이는 박덕하면서도 음악적인 재승才勝만을 앞세우며 대가연 행세하는 명사들이 지천인 세상에서, 묵묵히 음악을 통한 수기修己의 경지까지 염두에 두는 예인을 만나기란 흔치 않은 일이다. 내가 최충웅 원로의 가야고 음악에 남다른 관심이 쏠리는 까닭은, 바로 이 원로야말로 음악과 인성을 구분하지 않고 양자간의 조화와 상승 작용을 통해서 이상적인 자기 완성을 추구하는 음악가라는 심증을 평소에 지녀왔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발간된 주옥같은 정악 음반들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유별함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과연 정악正樂이란 무엇일까? 글자 뜻대로라면 ‘바른 음악’이란 뜻이 되겠는데, 한마디로 좋은 음악이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좋은 음악’은 또 어떤 음악을 지칭하는 것일까? 정답이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역사 속에서 그 윤곽을 찾아볼 수 있다. 일찍이 신라의 우륵은 가야고 음악 열두 곡을 작곡했다. 그런데 우륵의 제자들계고, 법지, 만덕은 선생의 음악이 번잡하다고[繁且淫] 불평하며 이를 다섯 곡으로 압축하여 개작했다. 우륵은 자신의 음악을 함부로 개작한 제자들의 행위에 크게 노여워했지만, 개작된 제자들의 음악을 거듭 듣고 나서는 오히려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때 우륵은 ‘즐거워도 방종에 흐르지 않고, 슬퍼도 비탄에 빠지지 않으니[樂而不流 哀而不悲]’ 가히 ‘바르다 하겠다[可謂正也]’라며 제자들의 개작곡을 칭송했다. 여기 우륵이 ‘바른 음악’이라고 평가한 기준으로 내세운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는 일찍이 《논어》에 그 원형이 담겨 있다.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이 곧 그 원조다. 아무튼 우륵의 ‘낙이불류 애이불비’이건 《논어》의 ‘낙이불음 애이불상’이건, 양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핵심은 한마디로 과過하지도 않고 불급不及하지도 않은 중용中庸의 정서 지대를 의미한다고 하겠다. 중용과 중화의 경지가 곧 정악의 분령인 셈이다. 급변하는 시대 사조는 한국 전통음악계에도 상전벽해의 변모상을 초래했다. 감정의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던 정악의 위상은 퇴조한 반면, 희로애락의 적나라한 표현을 기조로 하던 대중적인 음악은 날로 번창하고 있다. 이 같은 세태의 변천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던 경천동지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방송사 PD로 일하던 60년대 후반의 일이다. 당시 거문고의 명인 임석윤林錫胤 선생을 모셔다가 가곡 반주 음악을 연주할 때였다. 당시 임 명인은 정악곡 외에는 어떠한 음악도 거문고에 올리지 않는다고 했다. 당시에 유행하던 산조 음악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것이다. 하기사 광복 전후쯤의 기록물에서도 우리는 감정을 절절히 노출시키는 산조 음악의 대두를 개탄하는 글들을 드물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 가히 당시의 시대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세상은 바뀌어 유현심수幽玄深邃한 정감의 정악보다는 감각적이고 재기발랄한 대중적 음악이 우리 생활 주변을 풍미하고 있다. 감정을 우아하게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되도록 과장되게라도 감정을 백일하에 분출하는 것을 음악의 본모습이요 자신의 남다른 기예인 양 착각하는 예가 비일비재할 만큼, 세상은 바야흐로 감성의 노출 시대로 변모하고 있다. 따라서 음들을 아끼고 절약하지 않고 쓸데없이 남용해 가면서 되도록 자극적이고 선동적인 기법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유혹하려 한다. 이 같은 표피적이고 자극적인 음악들은 결국 우리 시대의 배면에 깔려 있는 물질 만능의 상업주의와 맞물리면서 야금야금 사람의 심성을 상하게 하고, 급기야는 사회를 병들게 하기 일쑤다. 옛말을 빌리자면 치세지음治世之音이 아닌 난세지음亂世之音이 곧 오늘의 우리 일상을 포박捕縛해 가고 있는 게 숨김 없는 저간의 음악계 실상이다. 이 같은 음악계 풍조를 감안할 때 최충웅 명인의 독실한 정악 음반 출간은, 작게는 수신修身과 정심正心의 의미와 크게는 이풍역속移風易俗의 사회적 효능면에서 한층 돋보이는 경사가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평생 정악계에 몸담아 오면서 정악의 정통적 맥을 이은 원로 명인이 정악 음악의 정수를 진솔하게 음반에 수록하여 역사에 남기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둘째로는 요즘 음악치료학music theraphy이라는 장르가 각광을 받아가고 있듯이, 번잡한 음악들로 오히려 황폐해져 가는 우리 시대의 심성을 청결한 샘물 같은 단아한 정악의 음율로 한층 정화시켜 가며 정악의 본질은 물론 예술의 고마움을 새삼 일깨울 수 있겠기 때문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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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4: 영년퇴은이 유발하는 무정세월 조운조 교수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소암素庵 조운조 교수가 벌써 정년을 맞았다니, 세월의 속절없음이 다시 한번 새삼스러워진다. 특히 곱살한 인상의 조 교수도 영락없이 노인세대로 편입된다는 사실 앞에 서고 보니 마치 화개화락의 덧없는 세상살이를 곱씹는 듯싶어 절로 마음이 공허해지기도 한다. 나의 뇌리에 각인된 조 교수의 이미지는 우선 매사에 부지런하고 적극적이었다는 점이다. 나 역시 인생을 비교적 폭넓게 적극적으로 살아왔다고 자임하는 처지이기에, 바로 이 같은 조 교수의 진취적인 삶의 자세에 내심 많은 공감대를 느끼곤 했다. 여기서 세세하게 나열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동안 조 교수는 교육자로 연주가로 문필가로 사회활동가로 누구보다 폭넓은 인생을 살아왔다. 이 같은 행적은 물론 조 교수의 인생관에 기반한 삶의 유형이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에서 그를 그만큼 필요로 했다는 반증임과 동시에, 또한 조 교수가 그만큼 남다른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조운조 교수가 한국 음악계에 참 좋은 업적을 남겼다고 생각되는 일 중에서, 나는 무엇보다도 한국정악원의 맥을 이어온 것을 높이 사고 싶다. 정악원에 열정을 쏟은 일은 누가 뭐래도 역사의 맥을 잇는 일이었다. 통시적인 역사의식이 앞서지 않고는 될성부른 일이 아니었다. 그 일을 조 교수는 묵묵히 해냈다. 한편 모르긴 해도 조 교수의 체질이나 품성은 ‘정악적’이지 않나 싶다. 물론 내가 겪은 이심전심의 주관적 느낌이다. 과연 정악이란 무엇일까. 작게는 조선조 5백년을 뻗어내렸고, 넓게는 유교사상의 근간으로 수수백년을 풍미하며 시대적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정악禮樂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선 음악적으로는 《논어》의 낙이불음 애이불상樂而不淫 哀而不傷, 즉 우륵의 표현을 빌리면 낙이불류 애이불비樂而不流 哀而不悲의 경계가 아니던가. 한마디로 그것은 곧 유학의 핵심사상이랄 중용의 세계가 아니던가. 이렇게 볼 때 조운조 교수는 영락없이 정악적인 인물임을 공감하게 된다. 그의 인품에서 스며나는 인간적 따듯함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내게는 그 수다한 일들을 소화해 가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견지해 가는 항상성恒常性이 유달리 눈에 띄기 때문이다. 조 교수의 그 같은 인생 행로를 지켜보며 문득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는 어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학자로 예술가로 다양한 삶을 살아가면서도 한결같은 인상과 처세와 평판을 잃지 않고 있는 그 굳건한 내면의 신념은 곧 천변만화의 세파를 겪으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수시처중隨時處中의 의연함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맥락에서 조 교수의 품성은 다분히 정악적이요 예악적이라는 표현이 걸맞지 않을 수 없다. 소암 조운조 교수가 드디어 대학교수직을 졸업한다. 서양에서 졸업(Commencement)이라는 말은 ‘시작’을 뜻한다. 하나의 단원을 마침과 동시에 다음의 새로운 단원으로 이행하는 것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대나무도 생육하면서 마디節를 하나 만들고, 그 마디를 발판으로 다시 쭉 뻗어나간다. 삼라만상 대자연의 이치다. 소암 선생도 이제 영년퇴은盈年退隱이라는 하나의 옹골찬 인생의 마디를 만들었다. 이 소중한 마디 다음에는 다시 제2의 광할한 인생 드라마 무대가 펼쳐져 있다. 2모작 인생 드라마에서도 성실하고 존경받는 주인공으로 명연기를 해내길 고대한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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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3: 학덕과 인품을 겸비한 음악학의 태두, 이혜구 박사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속알 있는 글은 못될망정 어줍잖은 글줄은 가끔 써본 처지였는데도 막상 만당 선생에 관한 글을 써보려 하니 도무지 어떤 측면을 어떻게 언급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말할 나위 없이 종지만 한 식견으로 물동이만 한 그분을 거론하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학문 세계가 너무도 크고 높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혜구 박사는 큰 학자요. 높은 선비다. 우선 학문적 세계로 눈길을 돌려 보면 한국음악학계 구석구석까지 그분의 학덕이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반세기 전인 1948년에 한국국악학회를 창립하여 전통음악의 학문적 묘포를 마련했는가 하면, 1959년에는 한국 최초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하여 국악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말이 쉬워 학회 창설이요 학과 개창이지, 당시 주객전도적 서구 문화 중심의 시대 상황 속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으며 멸시와 비아냥을 보내던 국악계를 위해 학회를 설립하고 학과를 개설하여 이끌어 왔다는 것은 여간한 선각적인 소신이요 용단이 아니다. 만당 선생의 올바른 역사 인식과 학문적 공적의 크기는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대변되고 실증되고 상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분이 난해한 《악학궤범》을 번역해 내고, 심혈을 기울인 논문집들을 끊임없이 발간해 왔으며, 수시로 훌륭한 글들을 해외 학계나 음악사전 등에 영문으로 발표해 온 사실 등 구체적인 학문적 결실들을 구구히 소개하는 것은 오히려 지엽말단의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세세한 실적들을 열거할 필요도 없이 만당 선생은 누구나가 승복하는 대석학이요 한국음악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해 낸 학계의 태두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혜구 박사의 학문 세계를 운위하는 입장이라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실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분의 학문적 성과가 아닌 내면의 학문적 정신을 짚어 보는 사려 깊은 통찰력이 곧 그것이다. 한마디로 평생을 한결같이 궁행해 오고 있는 그분의 호학 기질과 철두철미한 학자적 양심을 공감해 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만당 선생은 학문적 정진을 늦추지 않는다. 주먹만 한 자루 달린 돋보기로 자료를 독파해 가며 꾸준히 논문을 써내는가 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후학들을 모아 놓고 미진한 분야에 대한 특강을 마다않는다. 쥐꼬리만 한 지식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허세가 팽만한 세태 속에서, 귀납과 연역의 논리체계를 바탕으로 철두철미하게 한국음악학을 정립해 가는 그분의 학문 세계는 재삼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터다. 만당 선생의 진정한 학문적 크기는 바로 이 같은 호학 정신의 학자적 자세에 있는 것이다. 만당 선생을 만인이 우러러 마지않는 것은 비단 그분의 학문적 업적에서만이 아니다. 한 발 더 진실에 가까운 이유라면 오히려 그분의 높고 맑은 인품에서일 것이다. 우리 주변에 지식이 많은 석학들은 많다. 그러나 고매한 인격까지 겸비한 참다운 스승은 흔치 않다.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요즘 같은 세태 속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야 있을까 말까 하다. 이혜구 박사는 우리가 등불을 밝히며 힘겹게 찾아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드문 인격자요, 청빈한 학자 중의 한 분이다. 한마디로 학문과 덕성을 겸비한 높은 선비요 사부다. 만당 선생이 어떠어떠한 점에서 높은 인격자요 청학 같은 선비인지를 나는 필설로 예시할 수 없다. 오직 마음과 오관으로 분명히 그렇게 느낄 뿐이다. 그분을 뵈올 때마다 엄습해 오는 무형의 덕기德氣는 딱히 논리적 근거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우리를 압도해 버린다. 그것은 마치 난초의 향기를 표현할 수 없으되 청순하고 그윽한 분위기에 속절없이 매료되고, 봄볕의 따사로움을 설명할 수는 없되 대지에 가득한 훈기에 만물이 화육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옛글에 일창이삼탄壹倡而三歎 해도 은은한 여운이 있고 대갱불화大羹不和 해도 은근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만당 선생의 학문과 일상 생활에서 우러나는 인격의 향취도 이와 같아서 후학들에 대한 감화력은 더없이 은은하고 온화하며 가없이 막중하다. 이혜구 박사에 대한 이 같은 언설은 결코 추호의 과장도 없는 진솔한 느낌의 일단이다. 비록 나만이 아니라 만당 선생을 아는 분들은 너나없이 그분의 학문적 업적과 인품을 칭송한다. 이 같은 중론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몇 년 전 그분은 서울대학교 동창회에서 주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기도 했다.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이 곧 그것이다. 10만여 명의 서울대 졸업생 중에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즐비하다. 권부에 군림하는 사람, 재계를 주름잡는 사람, 문화예술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사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석학과 재사들이 줄을 잇는다. 바로 이들 고명하고 현란한 이름 중에서 서울대 총동창회는 만당 선생을 엄지의 인물로 간택하여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제1회 수상자로 시상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선생의 학문적 위상과 인격의 수위는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는 일이기에 그분에 대한 더 이상의 부연은 오히려 부질없는 짓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지악至樂은 무성無聲이고 대음大音은 희성希聲이라고 선현들은 일러 왔다. 진실로 지극한 음악은 청각적인 현실음의 저편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여기 외형적으로 확인되는 만당 선생의 학문적 업적만 해도 범상함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분이 진실로 이 시대의 큰 학자요 높은 선비이자 우리 모두의 사표師表인 이유는 그 같은 외관적이며 일상적인 공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같은 즉물적인 지평을 뛰어넘는 고답적인 차원의 청징하고도 고매한 학자적인 정신과 선비적인 기풍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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