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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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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예술을 이해하는 키워드(1)

흥, 감성의 원색적인 표출

  • 특집부
  • 등록 2021.07.09 07:30
  • 조회수 13,607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한국 전통예술을 감상하면서 흔히 쓰는 어휘가 있다. 바로 운치라는 낱말들이 그것이다. 음악을 듣거나 춤을 보거나 그림을 감상하고 나서도 흔히 이 세 가지 말 중의 어느 단어로 각자의 감동을 표현한다. 그만큼 흥과 멋과 운치는 한국 전통예술을 관류貫流하는 공통된 미감美感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이들 세 가지 용어의 개념을 잘 파악하면 한국 전통예술의 남다른 특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물론 정서적인 느낌을 담아내는 추상적인 어휘의 개념을 정확히 설명하기란 지난한 일이다.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들 몇몇 용어에 대해서는 관심 있게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이해하는 좋은 단서가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화면 캡처 2021-07-01 224231.jpg
[국악신문]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가 구연하는 고유 민속악이다. 판소리의 디바. 안숙선 명인

  

흥은 재미나 즐거움을 일어나게 하는 감정이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평상적인 감정을 어떤 행위와 상황을 계기로 기분 좋게 고양시킨다는 뜻이라고 하겠다. 흥은 한자로 이라고 표기한다. 일어날 흥, 즉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논어흥어시興於詩 입어례立於禮 성어악成於樂이라는 말이 있다. 대중들의 순박한 정서가 두루 담긴 시경의 좋은 시들을 많이 익혀서 오탁汚濁되지 않은 사무사思無邪의 마음을 북돋워 가라는 것이 곧 흥어시. 또한 순수한 감성이라도 지나치면 탈이 생기니, 일정한 절제와 규범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입어례, 조화를 본질로 하는 음악을 통해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균형 잡힌 경지에 도달해야 비로소 이상적인 인재가 될 수 있다는 게 성어악이다.

 

흥이란 일단 좋은 감정이 흥기興起됨을 말한다. 희로애락 등의 여러 감정 중에서도 유쾌하고 화락和樂한 감정이 유발될 때 우리는 흥을 느낀다. 따라서 흥이란 문학적 시심詩心이나 예술적 희열로 연결된다. 우리 전통예술 속에 유난히 난숙한 흥의 색조가 두드러진 것도 이 때문이다. 여기 음미할수록 흥취 있는 시조가 있다.

 

졸다가 낚싯대 잃고 춤추다가 도롱이 잃어

늙은이 망령이라 백구白鷗야 웃들 마라

십 리에 도화桃花 하니 춘흥春興 겨워하노라

 

한겨울 추위가 지나고 새봄이 돌아왔다. 바람은 보드랍고 햇살은 따뜻하다. 온 천지가 연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십 리나 뻗어 있는 복숭아꽃도 빨갛게 만발했다. 겨우내 움츠렸던 감성이 아지랑이처럼 스멀대기 시작한다. 음산한 방안에만 박혀 있을 수가 없어 일단 자연 속으로 봄나들이를 나간다. 얼음 녹은 물가에서 낚싯대도 드리워 본다.


하지만 고기잡이는 안중에 없다깜박 졸다 낚싯대를 놓친다따사로운 햇볕은 잠자는 춘흥春興을 서서히 흔들어 깨운다절로 수지무지手之舞之 족지도지足之蹈之의 어깨춤이 나온다일할 때 입던 도롱이가 벗겨져 나간다이런 광경을 지나던 백구白鷗가 봤다일면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다그러나 어쩌랴빨간 복숭아꽃이 십 리 길이나 피어 있는데그래서 "창공을 배회하는 흰 갈매기야늙은이 주책이라고 비웃들 마라모두가 주체하지 못하는 봄날의 흥취 때문이 아니더냐” 하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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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사물놀이 명인 이광수 선생의 영혼을 울리는 신명의 울림 

 

한국 사회에서는 흥이라는 말 외에도 이나 신명또는 신바람이라는 말들도 같은 의미로 쓰고 있다. ‘흥이 났다는 말을 쓸 자리에 신이 났다’, ‘신명이 났다’, ‘신바람이 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고 보면 흥이란 곧 신기神氣와 같은 핏줄임에 분명해 보인다. 다시 말해서 한국 전통문화의 기층이자 원형질이라고 할 샤머니즘적인 토양에서 자라난 문화 인자다.

 

한국 고대국가의 풍속을 기록한 중국의 옛 사서史書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고구려의 동맹東盟과 부여의 영고迎鼓와 예맥의 무천舞天을 설명한 기록이 그것이다. 공통적으로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의 축제에서는 한결같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가무음주歌舞飮酒했다는 사실이다. 영락없이 굿판의 상황과 닮아 있다. 많은 군중이 모여서 노래하고 춤추고 술 마시며 밤낮을 이어가는 정경을 가상해 보자. 감성이 넘쳐서 질펀하게 펼쳐지는 놀이굿 한판의 정취, 그것이 곧 흥과 신바람의 산실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흥과 신바람을 빼면 한국 예술은 박제품에 불과하다. 특히 감성 표출의 진폭이 큰 민속예술이 그러하다. 민속예술에는 추임새라고 하는 독특한 장치가 있다. 산조를 연주하거나 판소리를 할 때 반주자가 연주가의 흥을 돋워 주기 위해서 발성하는 몇 마디 말들을 추임새라고 한다. 연주만이 아니라 줄타기 같은 마당놀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추임새가 있어야 제대로 된 연주나 놀이가 된다.

 

추임새란 말 그대로 추켜세워 준다는 뜻이다. 칭찬해 주는 것이다. ‘얼씨구’, ‘잘한다’, ‘좋지등의 입말로 분위기를 고양시켜 주는 것이다. 그래야 창자나 연주가는 더욱 악흥이 고조돼 가며 감동적인 공연을 해낼 수 있다. 그만큼 추임새의 기능은 민속악 공연의 중요한 필요조건이다. 그러고 보면, 민속예술 공연에 추임새라는 장치가 있다는 사실은 민속예술의 본질이 흥이나 신바람에 뿌리내려 있음을 방증하는 또 다른 실마리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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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진도의 강강수월래 (1891년)사진이다. 강강수월래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되었다 (2009년)

 

신명기가 넘치는 분야는 비단 노래나 연주만이 아니다. 춤도 그렇고 그림도 그렇다. 장고춤이나 북춤 같은 무용이 그러하고, 한량춤이나 강강수월래 같은 춤이 그러하다. 마당놀이 역시 마찬가지다. 사당패의 놀이판이 그러했고, 해학과 풍자와 재담이 번뜩이는 탈춤이 그러하다. 모두가 흥을 바탕으로 치러지는 흥겨운 놀이판들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조선시대 풍속화가들의 그림을 봐도, 흥의 정체를 가시적으로 그려 볼 수 있다. 그림 속에도 한국 예술의 공통분모 중 하나인 흥의 실체가 은연중에 배어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기질 속에는 지성보다는 감성이 농후하다. 사소한 얘기 같지만 문화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지성적인 문화권 사람들이 한국 문화를 이해하는 데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일한 씨앗이라도 토양에 따라서 외양이 달라지듯이, 같은 계보의 예술이나 문화라도 그들이 싹트고 자라난 바탕색에 따라서 그 결실은 현저하게 다를 수 있는 것이다. 한국 문화의 그 중요한 바탕색 중의 하나가 곧 흥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