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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패랭이 쓰고 큰북 메고~얼쑤, 그리운 김법국 단장님기미양(아리랑학회 이사) 지난 3월 초 한 여성 국악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움과 애석함을 담은 간절한 목소리였다. "우리 김뻑국 선생님 가신지 2주기가 이번달 18일인데, 아무도 몰라주네요. 국악신문이 기념식 같은 것 못 하나요? 코로나도 끝났는데~” 아마도 2022년 3월 21일 자 국악신문 부고기사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다. 세상을 멈추게 하는 코로나 중이어서 유일하게 국악신문만 부고 기사를 냈기 때문이다. 그동안 종로 3가 국악로 로터리 ‘김법국예술단’ 사무실은 최고 원로 송해 선생으로부터 10대 소리를 배우려는 아이까지 사랑방처럼 들리는 곳이었다. 언제나 빙그레 웃으며 맞아주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이 가신지 2년을 맞는 시기에 전화를 받은 것이다. 2주기가 되는 3월 18일 몇몇 지인들과 이 소식을 나눴다. 모두 공감을 표했다. 그래서 금년에 국악신문이 앞장서서 기념사업을 하자는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더 많은 지인들의 뜻을 모아 기념사업회든 기념 시상제도든 결성하자고 합의하였다. 4월 중순경 ‘아리랑연합회’가 나섰고, 이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가 나섰다. 이렇게 하여 국악신문을 포함하여 3자가 만났다. 그 결과 첫 회는 조직과 기금 마련 등이 어려우니 국악신문 주최의 기념상을 제정하여 첫 회 수상자를 배출하고, 내년에 기념사업과 제2회 시상을 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상명은 ’김법국국악상‘으로, 수상은 5월 중 공고하고 심사하여 5월 중 시상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래서 지난 5월 1~4일까지 공고를 하고, 응모자 4인을 대상으로 12일 심사를 하고, 26일 시상식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급하게 기념상 일정을 잡고 나니 선생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선생과 필자는 20여 년 전 CD 10장짜리 음반 ‘3代 정선아리랑’(신나라 레코드)을 내고, 이를 기념하여 ‘SBS토요무대 김순녀 정선아리랑’이란 발표회 겸 특집방송을 하게 되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음반의 주인공 김순녀 선생이 ‘김법국예술단’ 주역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사무실은 스승 이창배 선생의 탑시(塔詩) 액자를 중앙으로 하고, 역대 국악 명인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속에서 국악인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곳이었다. 그 특유의 제스처를 써가며 배꼽잡게 하는 약장사 시절의 에피소드며, 가슴을 찡한 배고픈 시절 웃음 품앗이 ‘딴따라’ 시절 얘기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을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선생의 정확한 연대기를 아는 이들은 드물다. 선생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늘 만날 때마다 메모를 하고, 오랜 교유 관계의 지인이 전 종로문화원 반재식 원장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아리랑연구가 김연갑 이사의 얘기 대로라면 대략 이렇다. 50년대 이전, 60, 70년대 인천 생활, 80년대 이후 김법국예술단 운영, 2000년대 말년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선생의 본명은 김진환(金鎭煥)이다. 송해 선생의 증언으로는 1962년 KBS 성우로 잠시 일했는데, 효과음으로 뻐꾸기(암수 각각 우는 소리와 과부 뻐국이가 우는 소리)소리를 잘 내서 별명으로 부른 것이 ‘김뻑국’이라고 불려졌고, 이를 한자로는 ‘김법국(金法國)’으로 쓰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은 일본이고 1937년생이다. 9살 때 원폭투하를 목격한 뒤 귀국, 부친의 출생지인 충남 보령에 정착했다. 초등학교를 다녔으나 우리말이 서툴고 일본에서 왔다고 하여 ‘왕따’를 당해 졸업도 못하고 서울로 왔다. 기차를 타고 무작정 서울역에 내려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뚝섬 근처에서 국악인 이충선 씨를 만나 1년6개월 동안 머슴생활을 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용인으로 피란을 갔다. 전쟁말기 서울로 다시 올라왔다. 그리고 국악인들이 모이는 탑골공원에서 노숙을 했다. 여기서 공연 중인 국악인 최경명 씨에게 일을 시켜달라고 매달렸다. 그래서 장구와 피리를 어깨 너머 배우면서 ‘약장수’ 생활을 했다. 주로 경기도 일대를 돌며 ‘구루무’(크림) 등을 팔며 공연을 하였다. 이 시기 틈틈이 이창배 선생한테 경기민요를 배우고 배뱅이굿으로 유명한 이은관 선생을 만나 무대도 섰다. 이렇게 유년의 50년 대는 험란한 시기지만 국악을 배우고, 국악인들을 만나 활동을 하게 된 시기이다. 1960~1970년대 초까지 인천 내동과 신포동의 신흥목공소에 주소를 두고 주로 인천지역의 인천극장, 문화극장, 현대극장에서 소리와 만담을 소시민들에게 전했다. 동행은 만담 콤비 장소팔과 고춘자, 재담가 김영운과 배뱅이굿의 이은관, 탈춤의 양소운, 소리는 이창배 문하의 김옥심, 이은주, 최창남 등이었다. 선생은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쇼를 알리는 포스터를 벽에 부치러 인천 시내는 물론 주안 일대까지 다녔다. 그리고 표를 팔고 무대청소를 하고 출연까지 했다. 이때부터 패랭이 쓰고 몸집만 한 큰북을 앞으로 매고 만담과 소리와 코로 대금을 부는 등 장기를 발휘했다. 이 것이 인천시대이다. 1980~1970년대 중반에 들면서 ‘김뻑국’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는 시기이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한 직후였다. 김 선생은 이은관 선생과 함께 종로 3가에 있는 요정으로 나오라는 초대를 받았다. 이 부장이 북한을 무사히 다녀온 기념으로 파티를 열었는데, 김지미·서수남·하청일 등 유명 연예인들과 함께 돌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다들 얌전하게 불렀다. 그러나 김 선생은 "네가 먼저 살자고 옆구리 쿡쿡 찔렀지, 내가 먼저 살자고 계약에 도장을 찍었나."라는 청춘가 한 대목을 불러 분위기를 바꿔 놓았다. 이에 이 부장은 "바로 이거야, 이런 사람 세 사람만 있으면 남북통일도 문제가 없지.”하면서 김법국 선생을 옆자리에 앉힌 뒤 백지수표(100만 원 이하짜리) 한 장을 손에 쥐어 주었다. 이 돈은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다. 바로 이 돈으로 ‘김뻑국예술단’을 차렸다. 그리고 묵계월·최창남·김덕수·임이조 등 이름있는 국악인들을 출연시킬 만큼 명성을 얻었다. 이 시기 특히 전방부대와 노인단체 위문공연을 하는 봉사활동을 많이 했다. ‘김뻑국예술단’의 활동은 90년 대까지 이어졌다. 이때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로 ‘재담의 명인’으로 불렸다. 이때 노인들이나 소외 계층을 위한 자선공연을 열면서 재능을 사회에 환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부 활동에 대해서 노태우 대통령 표창장(1998년), 자랑스러운 서울 시민상(1994년), 국방부 장관상(1996년), 김대중 대통령 감사패(1998년) 등 많은 표창장과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자신의 공연보다는 후배들의 무대를 마련해 주는데 힘썼다. 그리고 ‘정선아리랑전수소’를 거의 무료로 운영하여 아리랑 붐을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다. 특히 기획사 업무도 하며 노년을 보냈다. 이 시기 특별히 주목되는 활동은 반재식 원장을 통해 ‘국악로’를 제정하게 한 일과 최창남 선생을 보유자로 지정받게 하는데 역할을 해주셨고, 1996년 만담보존회를 꾸려 김용운 선생을 회장으로 모셔 전승활동에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 시기 두 번이나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완쾌후 건강을 되찾고 20여 년 활발한 활동을 하시다가 2022년 3월 코로나로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셨다. 마지막 제자로는 정선아리랑 명창 김순녀 여사가 있고, 슬하에 딸 하나를 두었는데 홍익대 미대를 나와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고 전한다. 이렇게 주마간산 격으로 2주기를 보내며 선생의 생애를 되돌아봤다. 아, 김법국 선생님. 내일 오후 쯤 종로3가 지나서 '국악의 거리'에 나가면, 그 텁텁한 목소리와 인자한 미소에 패랭이 쓴 모습으로 마주칠 것 같다. 국악로 거리를 지나면 생각이 나는 분이다. 지나가다가 마주치면 "식사는 하셨습니까"라고 먼저 인사를 하시는 분이다. 한 없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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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 성료사단법인 한국전통춤협회가 한국 전통춤 큰잔치 ‘2024년 대한민국 전통춤문화제-수건춤 100년’을 오는 23-24일 2일 동안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했다. 둘째날에는 양종승 박사의 해설과 함께, 윤미라의 달구벌입춤, 채향순의 살풀이춤, 권영심의 교방살풀이춤, 임현선의 즉흥무, 문숙경의 군무 살풀이춤(백수연, 하수연, 김주연, 유지숙, 나현아, 임정민, 김희영, 임예린), 김경란의 논개별곡, 이정희의 군무 도살풀이춤(이주원, 장보름이, 김영찬, 송창현, 김율희, 이병근, 엄아라, 이유담)이 무대를 열었다. 둘째날 선사된 7인 7색 수건춤 작품은 수건춤 100년의 역사적 전개 양상과 우리 전통춤 뿌리를 알게 하고 전승 유파의 다양성을 알게 하는 귀한 무대이었다. 양종승 박사는 "수건춤은 거슬러 올라가면 신앙 의례로 시작된 춤이었고, 그것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무대 예술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하여 전문 예인집단의 놀이춤, 교방-권번 기녀의 향연춤 그리고 오늘날 무대 예술의 문화재춤으로 거듭났다. 이어 "이번 공연은 그러한 전통 수건춤의 역사적 흐름과 시대적 전승과정에서 미학적으로 꽃피어진 면모를 살필 수 있는 감동적 무대이기도 하였다. 무엇보다도 옛 정신을 기반으로 현대적인 시대적 가치를 담아낸 지혜로운 춤판, 그 속에 큰 세상으로 나아 가려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았기에 더욱 의미있었다"고 전했다. 1990년 국가무형문화재 지정된 수건춤은 즉흥적인 춤을 말하며, ‘도살풀이춤’ 또는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첫째날 해설을 맡은 원로 전통춤연구가 이병옥 교수는 "살풀이는 무속 의식(巫俗儀式)에서 액(厄)을 풀어낸다는 뜻인 곧, 살(煞)을 푸는 춤으로 일명 도살풀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그 해의 액을 풀기 위하여 굿판을 벌이고 살을 푸는 춤을 추어 왔으므로 무속(巫俗)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한다. 수건춤은 교방춤, 재인청춤, 무속계열춤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번에 다 보여주는 판이 벌어진 것은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수건춤은 행사에서 빠지지 않은 우리 민족의 정서를 대변하는 춤으로서 예술성을 인정하여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학계에서는 이번 수건춤 100년사 재현은 학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는 평을 받았다. 독무와 군무로 웅장하게 펼쳐진 무대는 우리가 지켜 나아갈 전통춤의 지속과 변화에 대한 많은 관심과 기대를 가지게 하였다. 행사를 마치고 한국전통춤협회 한혜경 이사장은 "전통춤 전승자, 연구자, 지도자들이 힘을 모아 결성한 한국전통춤협회가 준비한 한국의 수건춤 100년 역사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값진 무대이다. 독무과 군무 무대를 구성하여 수건춤의 예술성과 진수를 선사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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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음악, 巨木’ 오마주! 당연히 感動도오늘의 민속음악 전형성(종목의 세련미)이 형성된 1960~70년대, 큰 그림자를 드리운 이들. 이름하여 巨木! 산조의 서용석, 민요의 안향련, 남해성, 오정숙, 춤 임이조, 호남여성농악이다. 28일 이들의 예술혼을 계승하여 승화시킨 무대가 있었다. 2023 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 정기공연 ‘민속음악, 巨木’은 이 명인들의 오마주(Hommage)다. 분위기도 스타일도, 당연히 감동도! 예술감독은 조용안(국악연주단 예술감독), 산조합주 구성은 심상남(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초대단원), 민요연곡 구성: 방수미(창극단 악장), 살풀이 구성은 : 진유림(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살풀이 이수자),연희 구성은 유순자(전라남도무형문화재 호남여성농악 포장걸립 보유자),무대디자인은 박은혜(용인대학교 연극학과 무대디자인 강의교수)가 맡았다. ‘거목’들에 대한 헌사(獻辭)다. "민속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서용석, 여류 명창의 시대를 연 안향령 남해성 오정숙 명창, 그리고 선운이라 불리는 임이조 명무의 살풀이, 유랑의 꽃 여성농악까지, 작고한 민속음악의 거목들과 레파토리를 추억하며 오늘의 민속음악으로 다시 만나는 무한한 감동의 무대 한민족 '민속악'의 진수와 신명을 세계로~ ” 산조합주 무대는 1970년대 후반 서용석의 대금과 윤윤석의 아쟁 합주 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특별한 무대였다. 산조의 특성상 유파별로 다양하여 하나의 산조를 위주로 선율의 짜나가는 형태라 이뤄지기가 쉽지 않다. 이 번 무대는 심상남 선생의 구성으로 서용석류의 대금 아쟁 피리 해금산조로 빚은 다성(多聲)의 합주 진가를 보여주었다. "불리는 이름이 많은 아이는 사랑 받는 아이다.”란 말대로 ‘살품이’는 이름이 매우 많다. 더욱이 무속적 연행에서 ‘내면의 춤’이라는 무대예술로 선 것도 사랑받으며 온 결과이다. 임이조((林珥調, 1950~ 2013)선생은 살풀이 보유자. 2013년 11월 30일 세상을 뜨셨으니 딱히 금년 이즈음이 10주기이다. 오마주의 참뜻이 반영된 무대이다. 이번 ‘살풀이’ 무대는 가히 ‘살풀이 진유림’이란 성가로 활동하는 진유림 선생이 구성하고 함께함으로서 백색 명주의 신성함과 합무의 유려함을 수놓았다. 6인에 의한 여성 민요연곡 무대는 60년대 흑백시대 TV무대로 이끌었다. 한복의 색감과 헤어스타일이 특히 그랬다. 한 때 김소희 선생 제자들 중 두각이었던 안향련의 매력을 오늘의 무대로 재현하였다. 여기에 남해성과 오정숙의 남도적 성음을 더해 세련된 민요 연곡을 선사했다. 마치 60, 70년대 음반 자켓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김치켓’으로 상징되는 서구풍 가요시대의 시간여행을 하게 했다. 그럼에도 힘찬 민속악기 반주가 단순한 유행 재현이거나 유행(통속)의 복고가 아닌, 이 시대 무대예술로 보여준 점이 여운을 크게 하였다. 호남여성농악 무대는 호남좌도풍물의 독특하고 여성적인 풍미를 보여주었다. 오늘의 ‘여성농악대’가 갖고 온 나름의 서사는 ‘상쇠 유순자’의 것이지만, 늘 하이라이트를 장식하는 부포놀이는 대가다운 진가를 보여준 무대였다. 객석의 추임새로 마무리되었다. 기자의 오랜만의 남원 취재는 한마디로 "남원 답고 국립민속국악원다운 무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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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국악원 국악연주단 정기공연 '민속음악, 거목' 오마주국립민속국악원(원장 김중현)은 오는 28일(토) 오후 3시,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2023 국립민속국악원 국악연주단 정기공연 '민속음악, 거목'을 개최한다. 이번 정기공연은 한 시대를 풍미하여 살다 간 민속악 명인들의 숭고한 예술혼을 뜻하는 ‘거목’을 주제로 선보인다. 민속악의 아버지라 불리는 서용석 명인, 여류 명창의 시대를 이끈 남해성, 오정숙, 안향련 명창, 전통춤의 대가인 임이조 명무, 마지막으로 유랑의 꽃이라 불린 호남여성농악을 주제로 거장들의 예술 세계를 조명하고 예능을 이어받아 무대에서 승화시키는 공연이다. 공연의 시작은 민속음악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산조합주’ 이다. 기존 서용석류 산조합주를 기본으로 악기별 독주에 서용석 명인의 대금, 아쟁, 피리, 해금산조를 주선율로 심상남 명인과 함께 연주한다. 이어지는 무대는 1960-1970년대 여류 명창의 시대를 이끈 남해성, 오정숙, 안향련 명창의 음반과 음원을 바탕으로 새롭게 구성한 레트로풍의 ‘민요연곡’과 올해로 추모 10주기를 맞이한 임이조 명무를 오마주한 살풀이 무대를 진유림 명무와 함께 한다. 마지막으로 호남여성농악의 산증인 유순자 명인과 국립민속국악원 연희부 단원들이 전라남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호남여성농악을 오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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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타고난 안무가 전황의 춤인생과 예술세계국악계로 지평 넓힌 정통파 무용가 이매방(1927-2015.8.7, 국가무형문화재 97호 살풀이춤 보유자, 27호 승무보유자), 강선영(1925-2016.1.21., 국가무형문화재 92호 태평무보유자), 김덕명(1924-2015.10.24, 경남무형문화제 제3호 한량무보유자) 전황(1927-2015,5,16,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국립창극단장)등 원로무용가들과 중견무용가 정재만(1948~2014), 임이조(1950~2013), 지희영(1949~2015) 등의 작고는 격동기 근대무용사의 산증인들이자 역사적인 인물들, 과거사를 증언해주고 알려줄 대영박물관과 같은 역사자료가 소실된 것 같은 안타까운 현실이 되었다. 전황선생님은 80대에도 청년같은 외모와 건강한 모습으로 공연현장에서 유일한 원로관객으로 뵙던 분으로 가장 장수하실 것 같았는데 지난해 갑작스런 비보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간 전황선생님을 뵐 때마다 늘 말쑥한 양복차림, 반듯한 자세로 빼어나게 멋진 노신사의 모습에 부러움과 존경을 가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과 불가사이한 점도 많은 분이라는 데 누구나 공감하면서도 궁금증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80대 고령임에도 청년같이 건강하고 멋지고 미남인 신사로 사셨던 비결은 무엇이었는가? 둘째, 세계적인 근대무용가 최승희의 정통파 제자이면서 몇 안 되는 남성 한국무용가인데 어찌하여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국립창극단 단장으로 활동하면서 국악인들을 이끄는 수장이 되었는가? 타고난 공연예술의 스타집안과 성장배경 전황(全璜, 본명 전두황)은 1927년 3월8일 함경남도 함흥시 남문리에서 전영술과 신명이의 5남3녀 중 7번째로 태어났다. 부친 전영술은 함흥시 재판소 앞에서 사법서사를 하며 유복한 가정을 꾸렸다. 부친은 해방 직후에 작고하였고, 모친은 6·25전쟁 직전에 작고하여 어려움도 겪었지만 형제자매들이 대중스타로 우뚝 솟아 있었기에 전황은 많은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맏형 전두옥은 역시 함흥출신 무용가 조택원과 고향친구였고, 영화 ‘아리랑’의 감독 나운규와 절친으로 영화배우 겸 권투선수였으며, 중국에서 배운 18기 무예를 이 땅에 처음 들여왔고, 승용차를 팔로 끄는 차력도 자랑했다. 누나 전옥(全玉, 배우, 본명 전덕례, 1911~1968)은 ‘눈물의 여왕’으로 무대와 스크린의 톱스타인 그녀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셋째형 전두철은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사촌형 전운봉은 남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하였고 북쪽에서도 인민배우로 대접을 받았다. 누나 전옥과 매형 강홍식(姜弘植, 1902~1971, 이시이 바꾸의 제자, 해방공간 당시 북조선영화촬영소 부소장, ‘봄타령’을 처음 부르고 유성기음반 취입한 가수)의 딸 강효실(姜孝實, 1932~1992)도 다 아는 영화배우이며, 강효실의 아들 최민수도 현재 유명한 영화배우로 활동하고 있어 전황의 가계가 한국 근현대공연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전황의 딸 전미례는 본래 한국무용을 전공하였지만 아버지처럼 분야를 바꾸어 ‘재즈계 여왕’이라 불리는 재즈무용가로 활약하고 있다. 전황의 어린 시절 누나 전옥이 함흥 진사관에 공연하러 고향이 오면 집 앞에는 스타 전옥을 보려는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그때 열서너 살 된 전황은 자랑스런 누나의 연극을 보기위해 친구들과 공짜손님으로 극장을 드나들곤 하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황은 1941년 함흥 제일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44년 함흥상업학교를 졸업하면서 예인의 삶 속에 젖어들어 갔으며, 맏형 전두옥의 영향을 받아 1946년(19세)까지 권투선수생활을 하면서 강인한 체력과 민첩한 몸동작을 단련하였다. 이러한 가계내력과 성장배경에서 알 수 있듯이 우선 국가적인 스타가 될 만큼 수려한 외모를 선대로부터 물려받았으며, 형제들과 친척들이 예술가들이 많다 보니 전황도 자연스럽게 그런 무용, 국악 등 전통문화를 익힐 수 있는 가정환경이었다. 또 새로운 문물, 스포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문물과 예술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여 뛰어난 연기력, 체력의 유전적 DNA가 흐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황선생님의 인물치레가 범상치 않은 점은 이러한 천부적인 집안내력에서 알 수 있는 것이지만 유명 연기자들과 예술스타들이 타고난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 후천적인 환경과 노력이 가미될 때만이 보석의 빛을 발산하는 것이다. 말년까지 정정하고 강건한 자태와 인품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맏형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권투선수의 기초훈련에서 익힌 날렵한 잽 동작과 발 스텝과 빠른 호흡과 민첩성 등으로 무용가로서의 유연성과 리듬감, 손놀림과 발놀림 등의 신체적 바탕을 갖추게 된 것임도 알 수 있다. 최승희 제자로의 입문배경과 공연활동 전황의 춤인생은 당시 아시아는 물론 세계무대에도 잘 알려진 무용가 최승희와의 조우에서 비롯하였다. 1947년 3월 최승희가 전황의 고향 함경남도 함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을 때 마침 남녀무용수 단원을 한명씩 뽑는다는 소식에 명성을 듣고 전국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응시하였다. 전황은 젊은 혈기에 한번 도전해보자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모하여 오디션을 받았는데 뜻밖에 최승희의 눈에 들어 많은 젊은이들을 모두 물리치고 남자로는 유일하게 합격통지를 받고 평양으로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으로 무용경력도 없었던 전황은 1등 합격으로 운명적인 춤인생이 시작되었다. 권투선수로 다져져 손발이 빨랐고 눈썰미가 좋아 최승희의 춤시범을 센스있고 날렵하게 잘 따라 추어 무용수의 가능성을 인정받아 평양의 최승희무용연구소(1946년 8월 개소) 3기 연구생으로 입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집에서는 ‘하고많은 거 놔두고, 남자 놈이 춤을 추냐’고 반대했었다. 전황은 집에 있는 공기총과 아코디언을 팔아 평양 최승희무용연구소로 갈 여비를 만들었다. 최승희무용연구소에서 받는 국비 400원과 전옥누나에게 받은 용돈 50~100원, 어머니가 보내주는 100원으로 생활비를 삼아 알뜰하게 살면서 열심히 춤을 추었다. 얼마 되지 않아 30여명의 연구생이 묵는 기숙사생 중에서 최승희의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배우는 수제자로 발탁됐으며 이로 인해 국비를 300원씩 더 받게 되었다. 당시 북측 정부에서 최승희에게 국비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최승희와 안막선생님께 면회를 요청하여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활비가 부족하다고 전하니 국비 중에서 추가로 200원씩 더 지급해 주었다. 이곳에서 전황이 신흥(新興)무용(지금의 현대무용), 조선춤, 남방춤, 러시아춤, 발레 등을 배울 때 바로 위 선배로 김백봉도 있었다. ‘딴 딴 따따딴, 딴 딴 딴딴딴’ 최승희선생이 북을 치면 그대로 발맞춰 따라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빨리 배웠다. 반주악사가 없을 땐 리듬감각이 탁월하다며 북과 장구를 치게 했던 것이 국악을 섭렵하는 시초가 되었으며, 이렇게 국악에 눈떠 훗날 국악협회 이사장을 지낸 바탕이 이때부터 형성된 것이었다. 그 후 전황은 국비 외에 800원의 월급도 받았는데, 그에겐 금전적인 수입보다 4년 동안 허실없이 배운 최승희 안무법과 음악선택법이 소중할 뿐이었다. 최승희 안무의 ‘초립동’은 안성희에게 배워 1947년(20세)에 추었다. "최승희 선생은 히스테리가 많았어요. 1948년 평양예술극장에서 제가 안성희·김백봉과 3인무 ‘옥중투사’를 추는데, 객석에 앉아 계신 어머님과 사람들이 ‘황아! 황아!’ 부르며 야단이셨죠. 그 소리에 저는 춤순서를 잊어버렸죠. 결국 최선생께 혼나고 긴 손톱으로 꼬집혀 살이 뭉개졌죠.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셨고, 기억력, 창작력, 음악적 감각이 뛰어나셨구요” 전황은 1948년 고된 훈련 중에도 단원들 누구보다 동작과 자세, 그리고 순서익히기에서 남다른 끼와 천부적인 표현력을 인정받아 최승희무용단원으로 중국순회공연을 처음으로 다녀왔다. 중국순회공연을 하던 중 매란방의 〈손오공〉을 보게 되었는데 분장실의 매란방은 남성인데도 춤출 때는 여자같이 곱게 추었다고 하였다. 당시 최승희는 안무작업을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두 달 동안 몰래 숨어 ‘노사공’ 안무를 보던 전황이 결국 최승희에 발각되었다. 그러나 의외로 스승은 ‘재주있는 놈’이라며 악사 옆에 앉아서 보라고 승낙하였다. 이렇게 1947년부터 1950년 사이 4년 동안 최승희의 작업, 공연, 생활 등 모든 것을 전황과 김백봉만이 가장 소상히 알고 있는 산증인이 되었다. 1950년 6월 7일에는 100명 규모의 방소예술단원으로 출국하여 9일 걸려 러시아 모스코바에 도착했었다. "하루 종일 달려야 역 하나가 나와요. 치타에 도착하니 거지 떼들이 몰려들어 돈 달라, 빵 달라고 아우성을 쳤다. 우리도 기차 안에서 빵과 과자를 배급받아 먹었을 뿐인데...” 이런 우여곡절 끝에 러시아(당시 소련) 모스크바 공연 중에 6·25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허정숙 단장이 ‘조국전쟁이 일어났다. 남한이 쳐들어왔다’고 하더군요. 지금 생각하면 방소예술단은 정치적 색채를 띤 단체였어요. 러시아 공연도 이미 약속된 공연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허정숙은 전쟁 중에도 예술단을 이끌고 공연을 감행하였지요. 러시아에서 기억에 남는 곳은 노보시비르스크에 있는 공연장이었어요. 러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고 했는데, 무대에서 탱크가 돌고 10마리의 말이 거니는 규모였습니다.” 그 후로 예술단은 밤마다 이동해 귀국길에 올랐다. 평양으로 돌아온 후에 전황을 비롯하여 최승희무용단원들은 춤연습을 하다가도 폭격이 오면 최승희연구소의 지하실에 피하곤 하였다. 전쟁의 와중에 인민군이 점령한 서울 구민관에서 ‘해방의 노래’를 공연했다. 어수선하고 자유롭게 나다니지도 못했는데 장추화, 송범 등이 구경을 왔었다. 전황은 군인으로 위장하고 동양극장에 출연하는 전옥의 충정로 집으로 갔는데, 누나는 없고 그 집은 민청사무실로 사용 중이었다. 전황은 이산의 고통을 억누르며 ‘초립동’과 ‘목동과 처녀’를 추었다. 춤출 때는 이산의 고통을 잊었다. 무대에서 내려오면 평양으로 돌아가 가족과 만날 꿈만 꾸었다. 1950년 8월 예술단은 광주. 목포(여기서 이매방이 안성희와 전황의 춤을 봤다는 생전 증언을 들었다), 군산을 순회공연하고 평양으로 돌아가던 길인 조치원에서 북한 군표와 남한 돈을 한 뭉치씩 받았다. 전황은 남한 순회공연을 하다 철수 명령을 받고 평양으로 되돌아가던 중 최승희의 딸 안성희 일행과 헤어졌다. 중도에 안성희는 인민군에 붙잡히지만 최승희의 딸이어서 평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 가을 전황은 최승희딸 안성희와 헤어져 빨치산 잔류들과 산을 타고 군화 소리 난무하는 평양에 겨우 도착하였다. "최승희 무용연구소로 가니 러시아에서 공연할 때 사용하던 물건들이 그대로 있는 겁니다.” 그러나 가족은 없었다. 양복과 구두 등을 챙겨 스승 최승희가 있는 자강도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그때 전황의 운명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평안도 석암에서 과일을 사러 가다 예술단 악사가족을 만났다. 그들은 "최승희도 여기 있다. 자강도로 가면 중국으로 갈 수밖에 없다. 누나가 있는 남한으로 가라”하였다. 그때 안성희와 김백봉도 만났다. 그리하여 전황은 석암의 악사네 집 지하에 숨어버렸다. 순수예술가로 살 길은 남한이라는 신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울 가는 산길에서 사흘을 굶고 허기져 살길이 막막해 허리띠를 나무에 걸었다. 목을 매 자살하려는 순간에 드라마같은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연주자 최옥삼(가야금산조 명인, 최승희 반주자)이 "어떡하든 살아야 한다”며 말렸다.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숨어 있다가 숨은 사람들 대표로 전황이 미국 제일기갑사단 대적선전대를 찾아가 "최승희 제자지만 전옥의 동생”이라 하여 도움을 받으며 지냈다. 1951년 1·4후퇴 때 평양에서 서울까지 걸어서 내려왔다. 그때 조카 강효실(당시 20세)은 작가 이서구(백조가극단 작품 집필)가 지프차에 태워 서울로 보냈다. "충정로 누님댁에 가니 누님과 재혼한 매형 최일이 있더군요. 후에 누님댁은 트럭을 빌려 부산으로 피란가고 저는 국민제일 군위병으로 뽑혔으나 늑막염으로 군면제를 받고 뒤늦게 부산으로 갔죠.” 전옥은 백조가극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당대스타인 김승호, 허장강, 배삼룡, 고복수, 황금심 등 백조가극단장 전옥의 밥을 먹지 않은 이가 없었다. 작고 전에 현재 육군사관학교 뒤 남양주시 별내면 덕송리에 배밭을 소유했는데 남편 최일이 훗날 그 땅을 많이 팔았다고 한다. 전쟁은 함흥부자인 전황의 가족을 뿔뿔이 흩어지게 만들었고, 북한에 생활기반을 둔 채 남한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힘겨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전쟁 중부터 안무가로 인정받은 남한생활 1951년 부산피난시절 전황은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개소하여 전옥누님이 단장으로 있는 백조가극단과 무관하게 활동했다. 정인방이 전황을 찾아와 부산극장에서 공연할 무용극 〈처용랑〉의 마귀역할을 이인범(발레)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한다고 대신 출연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대본도 없이 음악을 맡은 나운영의 집에 가 피아노곡을 듣고 안무하여 마귀옷을 입고 현대무용같은 발레를 추었는데, 안무를 잘했다는 평을 받았다. 1953년 박녹주, 박귀희, 김소희, 박초월, 임춘앵 등이 주축인 여성국악동호회(여성국극의 효시, 1948년 창단)에서 활동하는 최승희 반주악사였던 박성옥을 따라 동래온천장에서 창극연습에 참가하여 유치진 작 창극〈가야금〉 초연 때 아쟁(박성옥으로부터 이미 배웠음)을 연주하였다. 그때 전황은 박성옥의 연주를 돕다가 한영숙의 춤 〈가야금의 노래〉를 보는데 안무적인 관점에서 아쉬운 춤판이었다. 그것을 눈치 챈 햇님창극단장 김주전이 한영숙에게 전황이 최승희 제자니 한번 시켜보라는 귀뜸을 주었다. 이 말을 들은 한영숙이 전황에게 안무해보라고 부탁해 인정받은 것이 오늘날까지 안무가로 자신감을 갖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특히 여성군무인 만큼 춤은 추지않고 안무에만 열중하여 여성국악동호회의 후신인 햇님창극단은 잘 나가게 되었고 전황은 안무가로 유명세를 얻게 되었다. 작품 〈햇님달님〉에서 라이벌인 박귀희(햇님)·김소희(달님)가 노래하고 안무는 전황의 몫이었다. 국악을 듣는 귀가 있으니 다른 이가 일주일 걸릴 안무를 하루나 이틀에 완성했다. 동래온천장 공연은 자금이 넉넉해 신선놀음이었지만, 여성국극단이 예닐곱 개씩 생기다보니 서로 제살깎기식 경쟁을 했고 결국 해체를 거듭하다 국립창극단이 태동하게 되었다. 당시 출연료는 명창이 1만원, 악사는 9천원, 안무가는 6천원 정도 받았다. 돈을 벌게 된 23세 전황은 1951년 11월 이조판서를 지낸 집안의 딸 다섯 살 연하의 김봉선과 금정사에서 결혼하였다. 여성국극에 반한 동래여고 출신 김봉선이 햇님창극단 오디션에 뽑혀 무용수로 투입되면서 사귀다가 눈이 맞았었다. 처형이 예기 김강남월로 7세에 레코드를 취입한 천재소녀 명창이었다. 그가 소리한 뒤 순서에는 서로 무대에 나가길 꺼릴 정도였다고 하였다. 당시 누님 전옥은 예술가가 일찍 결혼하면 신세망친다고 반대했었지만 결혼 후에는 처가살이를 했다. 첫아이는 출생 직후 죽었고 5년 후 태어난 전미례(52·서울전미례 재즈무용단대표), 죽은 딸의 이름 ‘미례’를 다시 붙였다. 전황의 2남2녀 중 맏딸 전미례만 춤을 물려받았다. 펄펄 나는 힘과 예술적 열정을 미국 재즈유학에 쏟았고 국내 재즈무용계 무용학 박사 1호를 기록했다. 6·25 전쟁 후 부산에서 북한 출신들이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살 때 최승희 제자인 전황은 전옥의 신원보증으로 안무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당시 이인범, 송범은 활동하지 않았고, 김백봉도 북한출신의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조용했었다. 생업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터전이 국극판이었다. 김백봉, 강선영 등도 여성국극단에서 안무했었다. 국극에는 오프닝춤, 상징춤, 경사춤, 피날래춤 등 적어도 너댓 가지 춤이 필요했다. 전황은 국극을 안무하며 창을 계속 들었기에 귀명창이 되었다. 희로애락이 녹아있는 창을 들으며 누구보다 빨리 안무했다. 50여년 이상 국악을 들으며 입으로는 안 되지만 손하고 가슴 속으로는 연주가 가능했다. 〈벌에 쏘인 꽃〉 등 수많은 국극과 창극을 안무했다. 대표작은 첫 작품인 〈가야금〉.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우륵을 따라간 가실왕과 그를 사모한 배꽃아기의 사랑이야기 자체가 건전해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무용작품도 전황류 〈부채춤〉, 〈장구춤〉, 〈소고춤〉, 〈장검무〉, 무용극〈황우와 우미인〉, 〈시집가는 날〉 등 셀 수 없이 많았다. 당시 명창 박귀희와 김소희는 형님아우 하면서 잘 지냈지만 서로 최고이고 싶어 했고, 서로 전황에게 하소연했었다. 박귀희의 명성이 더 앞섰기에 김소희는 늘 불만이었다. "내가 나이도 위고 소리도 잘 하는데 왜 밤낮 박귀희 다음에 김소희냐?”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박귀희는 스스로 김소희만큼 소리가 못하다는 걸 깨닫고 가야금병창으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 김소희는 판소리로 지정받았다. 북한출신이고 최승희의 제자라는 이유로 소외시켰지만 실력으로 춤을 인정 전황은 최승희 선생에게 배운 춤을 바탕으로 창작했으니 내 몸에서는 항시 최선생님의 춤냄새만 난다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자 무용만으론 생활비가 되지 않자 영화사 일도 하고 백조가극단도 봐주고 돈이 되는 일이면 창극단 안무도 하는 등 최승희선생님으로부터 배우고 익힌 춤실력과 안무력을 바탕으로 바쁘게 살았다. 또한 늘 북한콤플렉스가 있었다. 예를 들어 흰 의상과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 빨간색이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보자고 하여 누가 안무했느냐? 왜 빨강색 의상이 가운데로 몰리느냐? 꼬치꼬치 따져 마음대로 창작할 수 없었다. 또 남한 무용가들은 '이북에서 온 주제에 어디를 넘봐' 하는 식으로 질투하기도 했다. 부산피난시절 여성국극단 안무를 할 때 "전황이가 누구냐” 고 하더니 무조건 쇠고랑을 채운 적도 있었다.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간 그에게 "왜 남한으로 넘어왔느냐”면서 간첩취급을 했다. 물론 매번 누나 전옥이 보증을 서서 풀려났지만 그 후로도 국가보안법으로 경찰에 잡혀가기도 했다. 그렇지만 다른 이들은 북한출신임을 숨겼지만 전황은 스스로 떳떳하게 밝히곤 하였다. 자신뿐만 아니라 당시 김백봉과 남편 안제승도 종로경찰서에 불려갔으며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받았다. 올림픽 때 안무를 맡고 싶었는데, '전황이는 이북에서 왔다'며 그를 추천하지 않아 참여를 못한 적도 있었다. 초기의 무용가들은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행사안무를 추천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능력과 실력을 인정받아 자리를 얻었다. 문화관광부 등 정부에서는 실력 있다고 알아주었다. 한국민속예술단원 및 안무자로서의 왕성한 해외활동 1958년 국극의 전성기까지 안무가로 활동한 전황은 결혼 후 서울로 이주하여, 1963년 광화문에 신흥무용학원을 내었고, 체계적인 춤교육 덕분에 조교를 두 명이나 두고 지도하였다. 1963년 서울민속무용단 활동과 더불어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합창단, 무용단, 관현악단 등 300명의 단원들은 운영에 어려움이 있어 해체와 재창단을 거듭하며 예그린도 100명으로 줄었다. 이렇게 말기 멤버로 동참한 전황은 권려성의 후임으로 예그린 무용부장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64년 일본 도쿄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 및 안무·연출을 맡았으며, 1964년에는 명동국립극장에서 이틀 동안 제1회 춤 발표회를 가졌다. 이틀 공연은 대박이었다. 흥행사가 붙은 공연은 대전에도 초청됐다. 당시 김백봉은 필동에 연구소를 차렸고, 장추화의 제자 송범은 현대무용을 추었다. 그 후에도 1967년까지 매년 전황 민속무용 발표회를 가졌다. 1967년 정일권 국무총리 때도 계속 민속예술단에서 활동했다. 1968년 한국민속예술단 지도위원 및 출연자로 멕시코 올림픽·일본 공연을 하였다. 송범, 김백봉, 김문숙, 전황 등과 함께 조택원을 중심으로 구성된 그들은 세계 각국을 순회공연을 하였다. 그 때 전황은 〈부채춤〉 〈농악〉 〈장고춤〉 〈무당춤〉 등 동적인 춤을 안무하고 추었다. 1970년 정부문화사절단 지도위원으로 일본 및 동남아 순회공연을 하였고, 1971년 정부문화사절단으로 네덜란드 영국 스페인 레바논 일본 등 순회공연, 1972년 정부문화사절단 무용총감독으로 유럽·중동·아프리카·동남아 등 24개국 순회공연, 1973년 문공부 파견 일본 신주쿠 고마극장에서 〈춘향전〉 안무와 국립창극단 〈배비장〉 안무를 하였다. 1976년 국립무용단 지도위원으로 문공부 파견으로 일본 도쿄국제극장 쇼치구가무단의 〈심청전〉을 안무하였다. 1977년 정부문화사절단 유럽 11개국 순회공연을 가졌다. 1978년 하와이이민 75주년 기념 한국민속예술단 연출·안무를 맡았으며, 1981년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기념 공연 및 대예술제에 연출·안무로 농악을 올렸다. 이처럼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국가적 행사와 해외공연의 안무자로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한 무용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특히 전국적으로 흩어진 〈농악〉을 무대화한 주인공이 바로 전황이다. 한두 시간씩 치는 농악을 15분 정도로 압축해 많은 가락과 춤사위를 정리했다. 김덕수와 최종실 등 사물놀이패가 구성되기 전 좌도농악과 우도농악의 좋은 점을 뽑아 50~60명이 오르는 무대농악으로 구성했다. 처음 선보인 건 1963년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공연에서다. 교방춤과 마당춤을 극장예술로 다듬으면서 극장양식의 변화를 주도했다. 한국국악협회 이사장과 국립창극단 단장을 역임한 전황 최승희 제자로 안무가와 무용가로 활동한 전황이 어찌하여 무용협회 활동을 하지 않고 국악협회로 발을 돌렸을까 의문이 든다. 1964년 한국국악협회 무용분과위원장을 맡고 14년 동안 국악협회 활동을 하다가 1988부터 1991까지 한국국악협회부이사장으로 활동한 배경도 무용계에서는 북한출신이라는 배타성, 남성이 남성춤을 추지 않고 여성춤에만 치중하는 모습, 성정체성의 문제를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1992년부터 1994년까지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이 된 그는 한국방송광고공사에서 하는 대한민국국악제를 협회 주최로 이끌어 오는 등 40여 년 동안 한국국악협회에서 역동적인 남성춤을 안무하였을 뿐만 아니라 탁월한 타악과 현악과 성악을 터득하여 국악계에서 활동한 것이다. 국립창극단과의 인연은 1973년 〈배비장〉 안무를 맡으면서부터였다. 물론 여성국악창극단이 활동한 1950년대와 1960년대까지 창극에서의 역할은 거슬러 올라가지만 1996년부터 1997년까지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게 된 것이다. 이어서 1999년 중국 베이징 국극공연 〈황진이〉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그해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고법(鼓法) 이수자가 되었다. 고법은 창극단 시절 한일섭과 정철호로부터 조금씩 배워 연주에 참여했던 것을 인정받아 이수증을 받게 된 것이다. 2000년 창작민요극〈진도에 또 하나의 고려 있었네〉와 창무극〈해상왕 장보고〉를 안무했다. 일본어능력시험 1급 자격도 땄다. 일본공연을 자주 가고 일본작품 〈제비〉도 번역할 정도였다. 2002년 문화재청 파견 한·일문화교류의 해 〈천년의 소리〉 일본순회공연 예술총감독도 맡았다. 그리고 2004년 국립창극단 자문위원을 위촉받아 자문하였고,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겸임교수로 10년을 출강하여 마지막까지 춤열정을 후학들에게 쏟았다. 그리고 2014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의 대상으로 춤과 국악 생애를 증언하였다. 다만 장년 이후 춤을 많이 추지 않고 안무를 주로 했기 때문에 제자가 많지만 어려서부터 춤을 배워온 윤성주와 딸 전미례 등이 있고 말년의 제자로는 김지원, 백선희 등이 있을 뿐이다. 전황의 예술세계 전황은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문하에서 사사했고, 1951년 한국민속무용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64년 일본 동경올림픽 경축파견 한국민속예술단 총감독과 안무연출을 맡는 등 정부 문화사절단으로 각국에서 '춘향전', '심청전' 등 여러 작품을 선보였다. 그는 한국민속예술단원과 안무자로 유럽 3회, 동남아시아 2회, 미국, 러시아, 중국, 중동, 일본 등 당시엔 한 번 나가기도 힘들다는 외국 공연을 수십 차례 다녔다. 덕분에 국민훈장인 동백장도 받았다. 1988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부이사장을 거쳐 1992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으로 취임했고, 1996~97년 국립중앙극장 국립창극단 단장 겸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무용계뿐만 아니라 국악계에서도 널리 업적을 남겼다. 전황이 남긴 예술혼과 예술철학은 몇 가지 굵직한 교훈과 한국공연예술사에 족적을 남겼다. 첫째, 최승희의 가르침에서 터득한 창작력과 뛰어난 안무력을 바탕으로 민간예술을 민족적 무대예술로 승화시킨 점이다. "저, 최승희 제자예요. 최승희! 최승희 무혼(舞魂)의 흐름이 제 춤에 들어 있다고요. 그 자부심 하나로 이 땅에서 타협하지 않고 외롭게 홀로 투쟁하며 살았습니다.” 음악적 소양이 뛰어났던 최승희가 전통악기를 개량한 악기반주에 맞춰 민족무용과 국극을 안무하고 창작하던 것을 이어받은 전황은 안무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 ‘마당농악’을 ‘무대농악’, ‘민간춤’을 ‘무대춤’ 등으로 민족무대예술을 발전시켰다. 둘째, 북한출신 콤플렉스를 딛고 일어서 이념갈등 속에서도 남한예술가로 자리매김하며 본인만의 순수공연예술작품을 창작하였다. "북한콤플렉스가 있었어요. 예를 들어 빨간 의상을 입고 추던 무용수들 가운데로 몰리는 춤이 나오면 임검석에서 저를 보자고 하여 마음대로 창작할 수도 없었죠.” 때로는 쇠고랑도 채웠고, 합동수사본부에 끌려가 간첩취급도 당하는 등 북한출신이어서 차별도 많이 받았으며, 북으로 넘어간 최승희 제자라는 이유로 편견이 상존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리운 고향마저 버리고 자유로운 영혼의 예술을 펼칠 수 있는 남한을 택했고, 굴하지 않은 신념으로 자신만의 예술혼을 살려보고자 각종 공연예술에 전념하였다. 셋째, 여성편향적 경향과 비중에 편향된 사조에 맞서 외롭게 역동적인 남성예술의 복원과 추구에 앞장서 남녀예술의 균형발전과 공존사상을 심어주었다. "우리는 최승희 선생께 남성춤, 여성춤을 확연히 구분해 배웠는데, 왜 남성들이 그리 여성스럽게 추는지‥‥‥‥” 여성춤은 곱고 이쁘지만 남자는 남자다운 춤을 추어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살풀이춤, 입춤같은 춤을 춘 적도 없고 장검무, 소고춤, 장고춤, 농악춤 등 남성성이 강한 춤을 추고 가르쳤다. 혼자의 힘으로 대세를 역전시키기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는 남성은 치마(여성)춤만 추지 말고 바지춤을 추어야한다며 남성예술과 여성예술의 균형발전을 도모하는 일념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황은 이매방이 가장 춤을 잘 춘다고 했다. 60여년 친구이지만 전황은 남자가 여자처럼 춤추는 게 싫었다. 최승희 문하에서 수년 동안 남성춤과 여성춤을 구분해야 한다는 사상이 골수에 박힌 그는 춤추는 남성들의 대부분이 여성화된 춤을 추는 게 못마땅했다. 그때부터 그는 무대가 좋지만 무대에 가급적 서지 않았다. 여성적인 춤을 추는 이들과 동일시되는 게 싫었다. 게다가 딸 전미례가 아버지의 성정체성과 취향을 의심하는 듯한 발언을 해 그때부터는 가끔 서던 무대마저 무대화장을 전혀 하지 않다가 전두환 대통령취임식 때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선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넷째, 한민족예술의 본질인 가무악(歌舞樂) 일체사상과 악무극(樂舞劇) 합체사상을 표방하고 심어주었다. "국악을 알아야 무용을 창작할 수 있어! 특히 장단의 귀가 뚫려야 산조를 들을 줄 알아야 춤을 만들 수 있지!” 우리 민족은 원래 국악따로 무용따로가 없이 악가무 일체의 예술적 특성을 지닌 민족이다. 전황은 이러한 민족예술과 춤의 본질적 특성을 올곧게 지닌 예술가였다. 서구예술의 전공분화시대에서 소외됨을 무릅쓰고 총체예술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하였다. 전황이 한국예술계에 남긴 것 한국 신무용의 핵심이 최승희에서 비롯됐기에 스승 최승희에 대한 기억을 소상히 간직한 전황의 자부심은 귀하고도 올곧았다. 최근까지 남한에 생존해있는 최승희의 대표제자로는 김백봉과 전황뿐이었는데, 유일한 남자제자인 전황선생님의 작고는 신무용시대의 대표적인 적통자이며 전승자의 인맥단절을 의미한다. 그는 평생 최승희의 춤사상을 실천하고 끊임없이 남성춤을 추구해온 근대무용의 산증인이었으며, 무대농악의 창시자이고 국극과 창극에서도 영원한 안무자로 자리매김하여 국악계의 수장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등 한국 근대예술사의 한 획을 긋고 떠났다. 끝으로 전황은 예술계의 간디라는 생각이 든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 무저항, 평화주의자이였듯이, 전황은 빼어난 외모와 타고난 스타집안의 피를 이어받았고 당시 세계적인 한국무용가 최승희의 남성제자였기에 한국무용계에서 스타반열과 직책에 오를 수도 있었지만, 여러 정체성 문제로 혼돈의 시대를 살면서도 묵묵히 세태에 복종하지 않았고, 이념전쟁의 희생양이었지만 본인만의 색깔과 예술혼을 불사르며 국가, 사회, 문화계에 무언의 항거를 보여주었다. 국악계로 발을 돌려 커다란 족적을 남기면서 끝까지 무용계를 탓하지 않았다. "전황류 소고춤, 전황류 검무, 전황류 쌍검무, 전황류 농악을 만들었지만 최승희 선생의 혼이 들어가 있다는 거죠. 남자는 남자답게 씩씩하게 ! 그래서 저는 절대로 무대에 오를 때 화장하지 않았습니다. 미례가 나의 성정체성에 의심을 품을 때부터 완전히 화장을 그만두었죠.”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아쉬움도 남는 법이어서 전황선생님이 마지막 남긴 말씀이 떠오른다. "피리 등 관악기만 못해보고 타악과 현악은 웬만큼 해봤지! 그런데 아쉬움이라면 거문고 산조를 못해본 것이 가장 한이 맺혀! 술대로 현을 드르렁 긁는 소리가 마음을 후벼 파는 듯한 멋을 느낄 수 있는데 말이다.” 〈수상〉국무총리표창(68년), 문화공보부장관 표창(69·70·71·72년), 국민훈장 동백장(73년), 문화공보부장관 감사장(81년), 한국국악협회 이사장 공로패(82년), 한국국악협회 국악대상(98년), 문화재청 공로 감사장(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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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 임이조 10주기 공연 '한이 깊으니 흥도 깊더라'탁월한 춤 사위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한국전통무용의 대가 선운 임이조(1950~2013) 선생을 추모하는 공연이 펼쳐진다.한국전통춤연구회와 선운임이조춤보존회는 오는 10월1일 서울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10주기 추모공연 '한이 깊으니 흥도 깊더라'를 개최한다.중요 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전수조교이자 제97호 살풀이춤 이수자였던 임이조는 인간문화재 이매방(87)옹에게 40년 가까이 춤을 배운 전통춤 계승의 대표주자다. '개벽의 북소리', '월인천강', '신무Ⅰ&Ⅱ', '백조의 호수', '춘향전' 방북 공연을 연출·안무하는 등 다양한 창작 작품을 선보였다.이번 10주기 무대는 '승무'로 시작된다. 이어 임이조류 '입춤', '한량무', '살풀이춤', '화선무'와 '교방살풀이춤'으로 이어진다. 공연 사이사이 명인 '이야기 손님'들이 초대돼 임이조 선생과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를 풀어놓는다.주최 측은 "임이조 선생이 추구했던 길과 춤 세계를 관통하는 '소통'의 의미를 재발견하자는 취지로 10주기 무대를 꾸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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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생강 명인, '팔도강산 아리랑' 독주국가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 이생강(86세) 명인이 오는 11일 서울 강남구 민속극장 풍류에서 '만파식적 연주 81주년-죽향(竹香)'을 무대에 올린다. 이번 공연의 제목 '만파식적'은 신라시대 전설로 전하는 신비스러운 피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이 들면 비가 오고, 장마 때는 비가 개며, 바람이 불 때는 그치고 물결이 평온해졌다. 그리하여 이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역대 임금들이 보배로 삼았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이번 공연은 대금산조 전승 교육사 이광훈과 이수자(조계동, 최명호, 전기도, 문철오, 천희영, 류강빈), 전수교육생(이종환, 김기성, 신지후, 임정현, 최윤혜, 한창희, 변상엽, 강성부, 윤진무, 강병하, 장재혁, 이범영, 김보민)이 이생강류 대금산조 합주로 막을 연다.이생강 명인은 전국에서 불리는 지역 아리랑을 선정하여 엮은 '팔도강산 아리랑'(장고:최명호)을 독주로 선보인다. 퉁소 독주로 '퉁소 시나위'(장고:천희영) 도 들려준다.특별출연으로 한국 무용가 정명자가 '살풀이춤'을 선사하며,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제9호 살풀이춤 이수자 홍순이가 '권명화류 소고춤'을, 오만종이 '임이조류 한량무'를 각각 선보인다. 휘날레로 이생강 명인이 이생강류 대금산조를 독주하며 공연의 대미를 장식한다. 안무 예술감독은 김정민, 사회는 양재열이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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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풀이춤~버꾸춤까지 차세대 춤꾼 16인..'팔일' 공연한국문화재재단은 오는 13일과 20일 한국문화의집 코우스에서 2023년 '팔일(八佾)' 공연을 개최한다.전통춤의 명인을 선별하여 집중조명하는 무대로 국가무형문화재 종목으로 지정된 살풀이춤, 승무, 태평무, 버꾸춤 등 각 유파의 계보를 잇는 차세대 춤꾼 16인이 자웅을 겨루는 춤의 향연이 펼쳐진다. 2009년에 시작된 '팔일' 시리즈는 올해로 15년을 맞이한다. 차세대 춤꾼들의 춤판을 통해 류(流)와 파(派)의 경계를 허무는 다양한 전통춤을 한 자리에서 즐길 수 있도록 기획된 공연이다.이번 공연에는 지난 1월 공모에서 선정된 차세대 춤꾼 16명이 출연해 살풀이춤, 태평무, 경기수건춤, 버꾸춤, 소고춤 등 전통춤의 향연을 펼친다.13일 공연에는 이매방류 승무(문희철), 한영숙류 살풀이춤(정민근), 경기수건춤(김지은), 정재만류 태평무(이윤정), 강선영류 태평무(이유진), 임이조류 화선무(임현지), 화랭이춤(이정민), 서한우류 버꾸춤(이세이)이 무대에 오른다.20일 공연에는 한영숙류 승무(이효민), 정명숙류 살풀이춤(우한웅), 김숙자류 도살풀이춤(장보름이), 강선영류 태평무(유영란), 강선영류 즉흥무(김하림), 교방굿거리춤(장인숙), 권명화류 소고춤(제갈숙영), 진유림류 대신무(나현아)가 펼쳐진다. 음악감독은 김영길 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예술감독이 맡았다. 국가무형문화재 가사 이수자 김용우와 국가무형문화재 가곡 이수자 하윤주가 사회자로 전통춤의 류(流)와 파(派)의 특징을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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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서 109회 ‘한국의 명인명무전’오는 26일 광주 남구 빛고을시민문화관 대극장에서 제109회 ‘한국의 명인명무전’을 연다. 이번 공연은 ‘태평무 한삼과 판소리가 하늘과 내통하다’라는 주제로 구성됐으며 이색적인 콜라보 형태의 춤사위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예정이다.공연은 △강선영류 태평무(한민정 태평무 이수자 외 1명) △입춤소고(김영옥 무용숲 무용단 단장 △초립동(박야림 대전살풀이춤 이수자) △가야금산조(선영숙 인간문화재·장고 박시양 인간문화재) △한진옥류살풀이춤(유명숙 사단법인 한진옥류호남검무보존회 이사장) △배띄어라, 신고산타령, 자진뱃노래(이애자 민요가수) △변검(노은정 하누리예술협동조합 대표) △임이조류허튼춤(최미애 대구국악제 종합대상 대통령상 수상) △춘향가 중 ‘동헌경사’(전인삼 전남대학교 교수·고수 김동현 광주교대 명예교수) 순으로 예정돼 있다.특히 이번 공연 중 ‘가야금산조’ 순서에서 장고를 맡은 박시양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보유자다. 또 ‘춘향가(동헌경사)’ 순서에서 고수를 맡은 김동현은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이수자다.박동국 동국예술기획 대표는 "이번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동국예술기획 창립 34주년 기념해 각별한 의미를 더한다. 무대에 서는 분들 모두 원로 및 중견무용가로 명품 전통공연을 선보일 예정이다”고 말했다.공연은 오는 26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되며 당일 현장 구매 또는 전화로 예약 구매 가능하다. 한편 이번 공연에서 예술감독 겸 해설은 박동국 동국예술기획 대표가 진행한다. 공연 구성과 기획은 정지희 동국예술기획 기획이사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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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임이조 선생의 '살풀이'를 만나다…'예인열전'한국문화재재단은 오는 7일 서울 강남구 한국문화의집에서 '예인열전 - 故 선운 임이조 10주기 추모공연'을 개최한다.'예인열전'은 2011년부터 이어진 이 시대 예인의 삶을 집중 조명하는 공연 시리즈다. 이번 공연은 임이조 선생의 타계 10주기를 기념해 그의 무용 세계를 들여다보는 추모공연이다.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승교육사이자 살풀이춤 이수자였다.이번 공연은 살풀이, 승무, 화선무 등 임이조 전통춤의 정수를 대중에게 선보인다.특히 이번 무대에서는 '선운 임이조 춤보존회'가 제공하는 고인의 삶과 가족⸱스승과의 추억에 관한 영상이 처음으로 공개된다. 실황 공연에 비하인드 영상을 더해 예인의 일생을 기억·기록하고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인간 임이조의 삶을 집중 조명한다.공연의 하이라이트인 '임이조류 한량무'는 선비의 내면적 심성을 한과 흥으로 표현한 춤으로, 특유의 호방한 춤사위를 보여줄 예정이다.이외에 임이조 선생의 자녀 임현종, 임현지의 승무, 진유림의 살풀이춤, 선운 임이조 춤보존회의 교방살풀이춤, 입춤, 신향발무, 화선무 등 다양한 공연도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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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질을 지키며 내실을 다지는, 소리꾼 김금미지난 18일 미국 문화예술기관 브루클린음악원(BAM, Brooklyn Academy of Music)에서 초청받은 ‘트로이의 여인들’, 뉴욕 하워드 길만 오페라하우스 공연은 큰 성공을 거뒀다. 어제 서울돈화문국악당 카페에서 소리꾼 김금미 선생을 국악신문 정수현 기자가 만났다. 귀국한지 얼마 되지 않아 피곤할 법도 한데, 인터뷰 내내 소리와 창극에 대한 따뜻하고 열정 가득한 눈빛을 보여주었다. 화제의 작품 '트로이의 여인들'로부터 시작하여 판소리와 창극에 대한 열정, 그리고 앞으로 펼치고자 하는 그녀의 음악세계에 대해 들었다. 정수현 기자= '트로이의 여인들'은 전쟁의 비극에서 소외됐던 평범한 여인들을 주목한 작품으로,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한 이들의 강인함과 용기를 그렸지요. 3천 년 전 고대 그리스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우리 고유의 판소리와 만나 세계인의 보편적 공감과 환호를 이끌어낸 것이지요. 이 작품에서 어떤 배역을 맡았나요? 김금미=왕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시대적으로 그 당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흔하진 않았지만, 각본, 각색을 통해 여왕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지요. 여덟 명의 여인들과 여왕의 개인적인 삶을 포함하여, 상황과 환경을 극복해 가는 모습을 그려냈는데, 강인한 여성상의 모습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Q.여성이자, 왕이자, 어머니이자 아내인 그 역할은 시대를 불문하고 다양한 책임을 떠안아야 하는 모습이겠지요? 공감을 불러일으키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요? A. "아무래도 내면의 연기가 가장 힘들었어요. 여자이자 왕을 대변해야 하고, 국민들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모든 걸 담아야 하기에 신경 쓸 것이 많았지요. 왕도 인간이기에 자식과 남편이 다 죽고 혼자 남았을 때의 슬픔과 힘겨움이 있었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임감을 가지고 마지막 남은 국민들을, 여인들을 지켜내야 했기에 그 감정을 삼켜내고 묵묵히 강해야만 했습니다. 그 배역을 잘 소화해 내기 위해 내면의 연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아들이 죽임을 당했을 때의 처절한 감정을 삼키고 나라를 지켜내야 하기에 꾹꾹 눌러 담는 어머니이자 왕으로서의 모습을 연기할 때에는, 특히 감정적으로 많이 아프고 아렸습니다. 또 연기적인 측면을 넘어 소리에서도 에너지와 힘을 백 퍼센트 쏟아 부어 왕의 역할을 소화하는데 모든 정성을 쏟았습니다. 감정을 억누르며 연기하는 동시에 통성으로 내지르는 판소리를 부르는 것이 어렵기도 했지만, 그게 바로 이 작품의 묘미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부분이 아마 미국의 대중들에게도 와 닿았던 것 같습니다. 전쟁, 가족, 사랑은 모든 인류가 겪어왔기에, 모두가 아픔을 알고 있기에, 보편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Q.창극은 다양한 감정을 연기해 내는 동시에 통성으로 판소리를 함께 보여주는 것이 창극이 가진 힘이겠지요? "중국, 일본과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는 우리 K-MUSIC, 창극” A. "판소리를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 소리의 발성이 큰 힘을 갖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외국에도 뮤지컬이나 오페라 등의 극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판소리만이 가지고 있는 부르짖는 발성의 에너지는 특별한 것입니다. 일본의 가부키, 중국의 경극이 대표적인 극이라면, 그와 견주었을 때...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전통 가·무·악을 모두 활용하는 창극이지요. 창극을 우리나라에서 내로라 하는 장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극에 전통 판소리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소리가 우직하게 이 극을 받쳐준다는 것이 큰 멋이자 매력이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Q.오늘의 창극을 만들어 나가고 있는 국립창극단이 추구하는 창극의 가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나요? A. "국립창극단 단원으로서, ‘국립다운 국립’이라는 슬로건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니다. 이는 바로 ‘전통’ 그 자체인데, 전통은 유지하고 보존하면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지요. 요즘은 재창조라고 하여 전통 예술 분야에서 창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것을 각색하고, 한 쪽으로 치우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보존 가치를 충분히 유지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해 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국립창극단의 창극은 예술감독에 따라 추진 방향이 달라지긴 합니다만, 너무 치우치지 않는 것이 핵심이란 사실은 분명합니다. 오직 창작에만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전통을 확실하게 잡고 융화시키는 것. 그게 바로 세계화에 걸맞는 국립창극단만의 창극 작품으로 적합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Q. 창극주의자’라고 해야 되겠네요. 그러면 창극단원으로서의 포부와 계획은 어떠신지요? A. "무엇보다 내실을 다지는게 중요하기에 계속하여 내실강화와 자기관리에 시간을 투자할 예정입니다. 오로지 그것 뿐입니다. 특히 창극은 소리뿐이 아닌 연기나 무용 등 준비하고 공부해야 할 것이 많은 장르입니다. 무대인은 무대에서 살아야 하기에 오로지 그 무대만을 위해 집중하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판소리는, 몇 시간이고 빠져들어 할 수 있는, 또 다른 나 자신” Q. 이제 그간의 공력에 대한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검색 자료를 보니까 어머니께서는 대표적인 여성국극인이시더군요? 그 어머님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국악과는 친숙했다고 했는데, 판소리가 아닌 전통무용으로 국악에 입문하셨더라고요? A. "1982년 전통 무용으로 국악의 길에 입문하여 임이조 선생님께 살풀이, 승무까지 사사하고 전주대사습놀이전국대회, KBS 국악경연대회에서 입상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소리를 하기 위해서는 다방면으로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아셨기 때문에 저에게 무용을 먼저 배우게 하신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게 무용을 하다가 성창순 선생님께 심청가를 배우기 시작했고, 소리꾼의 길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Q.결과적으로 전통 무용을 한 것이 창극과 판소리를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말씀이시군요? 체험적인 설명을 부탁드린다면? A. "무용은 소리를 하는 데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판소리에는 ‘발림’이 있는데, 나의 판소리 무대를 보시는 많은 분들이 발림할 때의 선이 아름답다고 칭찬을 해 주시곤 합니다. 또한 창극에서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데, 연기적인 부분을 넘어서 나 스스로가 어떠한 그림을 연출하고 만들어 낼 때에 필요한 몸짓, 동작이 오래 했던 무용의 영향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Q. 판소리를 말씀하셨는데, 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는 ‘완창’은 고수의 북장단에 맞춰 몇 시간 동안 오롯이 소리꾼의 목소리로만 무대를 채우잖아요. 이건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쉽지 않은 것인데, 많은 완창 경험이 있으시더라고요? A. "판소리 이수자로서 심청가는 기본으로 했고, 유성준제 수궁가 완창 무대도 올렸습니다. 그리고 현재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적벽가 완창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적벽가는 힘차고 우렁찬 우조 계열이지요. 적벽가를 완창 해 내는 것이 소리꾼으로서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준 높고 까다로운 소리이지요. 소리꾼으로서의 자존심을 걸고 해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소리는, 내가 몇 시간이고 앉아서 할 수 있고, 언제든 빠져들 수 있는 나만의 작업입니다. 재미와 즐거움을 넘어 모든 희로애락을 담아 표현할 수 있는, ‘또 다른 나’라고나 할까요?” Q.현재까지 많은 국악 창작곡이 나왔지요. 또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고 있기도 합니다. 특히 판소리도 다양한 시도가 계속되며 그런 작품이 나오고 있다고 봅니다. 앞에서 확신에 찬 판소리에 대한 애기를 들었습니다만, 다시 듣고 싶습니다. 선생님은 판소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과 방법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A. "어떤 작품이 되었든 본질을 잘 가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본질만 잘 갖추고 있어도 창작, 각색 등 그 어떤 것도 가능하니까요. 하지만 본질이 제대로 갖추어져있지 않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댐이 잘 갖추어져 있어야 물이 넘치지 않고 흘러야 할 때 흐를 수 있듯이, 소리의 본질을 잃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나는 현재까지 무대에 서고 있고, 앞으로도 서고 싶은 사람인데, 만일 내가 판소리의 본질을 잊고, 우직하게 정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까지의 나는 없었을 것이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새로운 시도와 아이디어는 언제든 생겨난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술의 본질. 우리 판소리의 정통성을 어떻게 가져 가느냐에 있다고 봅니다.” "국악, 과거, 현재, 미래의 또 다른 김금미" Q.인터뷰를 진행하며 느낍니다만, 개인적인 포부나 목표를 물어도, 판소리와 창극이 더 많이 발전하고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강하게 피력하시니 다른 소소한 질문을 하는 것이 불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리와 창극, 더 나아가 국악은 김선생님에게 분명한 "또 다른 김금미”임에 분명하네요. 여독도 다 풀지 못한 상황에서 귀한얘기 전해주어 감사합니다. 더 하실 말씀이~ . A. "예, 앞으로 창극이 지금보다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판소리가 교육적 부분에서도 대중적 부분에서도 더 많이 듣고 감상할 기회가 생겼으면 합니다. 국민들이 어릴 때부터 성장하고 나서까지 국악, 판소리를 가까이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대한민국 하면 판소리’ 라는 슬로건까지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을 위해, 무대에서 소리꾼으로서 할 수 있는 나의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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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가 김태호, 무안승달국악대제전 대통령상 수상사천 곤명면 완사 출신 무용가 김태호(84년생)씨가 6월 26일 전남 무안에서 열린 제20회 무안 승달국악대제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한편 전국승달국악대제전은 무안군 출신 한국의 국악명가 강윤학 일가(강용안, 강남중, 강태홍)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2003년부터 매년 개최되는 우리나라 최고의 명인‧명창 등용문 중 하나로, 올해 20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현악, 관악, 판소리, 무용, 가야금 병창, 판소리 고법 등 6개 부문(명인부, 노인부, 신인부, 학생부, 장애인부)으로 나눠 진행된 이번 대회에서는 명인ㆍ명창을 꿈꾸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500여명의 국악 지망생들이 열띤 경연을 펼쳤다.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에는 명인부 무용부문에 출전한 김태호(남, 경남사천), 종합최우수상인 국무총리상에는 명인부 판소리부문에 출전한 김나영(여, 서울시 용산구)이 수상했고 그 밖에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교육과학기술부장관상, 보건복지부장관상, 국회의원상, 전라남도지사상, 전라남도교육감상, 무안군수상 등 총 77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500여 명의 국악 지망생들이 열띤 경연을 펼친 가운데, 김태호 씨는 무용 부문 명인부에 이매방류 승무(임이조 사사)로 출전해 최고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단은 김태호 무용가의 섬세한 동작과 예술혼을 높게 사 최고 점수를 부여했다.대통령상을 수상한 김태호 무용가는 "지난 2013년 작고하신 스승 故 임이조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선생으로 인해 진정한 춤의 세계에 눈을 떴고 지금까지 무용가로 살아갈 수 있었다”며 "이번 대회 일주일 전에 아버지께서 지병으로 작고하셨다. 대회 참가를 많이 고민했는데 아버지 생전에 대통령상 받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하셨다. 수상 소식을 알게 된 순간 아버지가 제일 먼저 떠 올라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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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제20회 무안 전국승달국악대제전 대통령상 수상자 김태호초등학생 시절 그저 춤추는 것이 좋아 들어가게 된 무용동아리에서 한국무용을 처음으로 접하고 지금까지 벌써 2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으로 무용을 전공하게 되면서 故임이조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이 제 춤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자 축복이었습니다. 전통 호흡과 춤길, 몸의 쓰임새, 예인으로서의 자세를 아주 체계적으로 알려주신 참 스승님이셨습니다. 10여년전 선생님께서 갑작스레 지병으로 작고하시고 춤 인생에서 큰 산을 잃은 저는 정말 힘겹게 선생님의 춤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선생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온전히 잘 지켜왔다고 하늘에 계신 선생님께서 도와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영광을 하늘에 계신 故임이조선생님께 먼저 돌리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대회 일주일 전에 아버지께서 지병으로 갑작스레 작고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 대회 참가를 많이 고민하였는데 아버지 생전에 제가 큰 예인이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 하셨고 이번 대회도 기다리셨던 터라 어머니께서 꼭 나가서 좋은 성적 얻어 아버지께 올려드리라는 말씀에 힘을 얻어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좋은 결과로 아버지 영전에 대통령상을 올려드릴 수 있게 되었고, 저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항상 응원해 주신 어머님과 가족들 이 영광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경상국립대학교 민속무용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면서 제 인생의 절대적인 두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끼는 제자로 때론 엄한 부모님처럼 이끌어 주신 경상국립대학교 민속무용학과 강인숙 교수님과 임수정교수님입니다. 두 분으로 인해 제가 지금까지 춤을 놓지 않을 수 있었고, 무용가로서 학문적으로, 실기적으로 그 영역을 확장해 나가는데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 은혜 평생 마음에 간직하겠습니다. 이렇게 큰 영광을 누릴수 있게 이번 대회를 만들어 주신 무안군수님, 무안 전국 승달국악대제전 대회 관계자분들과, 항상 저의 춤을 좋아해 주시고 응원해 주신 춤 벗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살아가면서 그 감사함 잊지 않고 갚아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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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인 명창 부채 80여점, 구경합시다국립국악원은 전통공연예술의 부채를중심으로 명인 명창의 예술세계와 그들의 이상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획전시 ‘명인 명창의 부채-바람에 바람을 싣다’를 오는 6월 29일(수)부터 9월 25일(일)까지 국립국악원 국악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개최한다. 판소리, 전통춤, 줄타기, 탈춤, 무속 등 명인 58명의 부채 80여점을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선보여 국립국악원은 판소리를 비롯한 전통춤, 연희, 무속 분야 전통예술의 명인 명창 58명의 부채 80여점을 수집했다. 전통예술에서 부채는 판소리뿐 아니라 한량춤, 부채산조, 부채춤과 같은 전통춤과 줄타기, 탈춤, 굿 등 연희에서도 필수적으로 활용하는 소품이다. 이번 전시는 소품으로서의 부채를 넘어 다양한 명인 명창들의 삶과 이야기를 담아 기획했다. 부채에 담긴 글과 그림을 통해 명인 명창의 예술에 대한 열정과 이상도 엿볼 수 있다. 마치 예술과도 같이 대대로 이어지는 부채 故오정숙 명창(전 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은 아천(雅泉) 김영철 화백에게 받은 사슴이 그려진 두 개의 부채 중 하나는 이일주 명창(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에게 또 하나는 김소영 명창(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수궁가 예능보유자)에게 물려주었다. 이일주 명창에게 물려준 부채는 다시 제자인 장문희 명창(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에게 물려져 스승의 마음을 담은 소리는 부채를 통해서도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줄타기 김대균 명인(국가무형문화재 줄타기 예능보유자) 역시 그의 스승인 故김영철 명인(전 국가무형문화재 줄타기 예능보유자)의 부채를 물려받아 부채살을 손수 고쳐가며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판소리 명창 채수정(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교수)의 부친은 진도 출신의 서예가인 오당(悟堂) 채원식 선생이다. 오당 선생은‘청풍명월본무가(淸風明月本無價,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본래 값이 없어 한 푼을 내지 않아도 무한히 즐길 수 있다.)’라는 글귀를 적어 딸에게 선물하며 좋은 소리를 많은 이들에게 들려주길 바라는 그의 마음을 전했다. 부채에 담긴 예술 故임이조 명인(전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승교육사)은 한량무의 명인이었다. 그가 춤추는 모습을 본 누군가는 "춤추는 모습이 마치 학과 같다.”라는 의미인 학무학(鶴舞鶴)이라는 글을 써주었다. 故정재만 명인(전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예능보유자)은 그가 창작한 작품인 ‘청풍명월’의 첫 공연에 쓰일 부채의 그림을 직접 고안해 아직까지 제자들이 그 부채를 사용하고 있다. 정순임 명창(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흥보가 예능보유자)은 유관순 열사가로 유명하다. 정순임 명창이 유관순 열사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무궁화가 그려진 부채 역시 이번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노래와 춤, 부채를 통한 예술인들의 교유(交遊) 명인 명창과의 많은 교유로 유명한 아천(雅泉) 김영철 화백은 故오정숙 명창의 소리를 들으며 부채에 그림을 그렸고, 故이매방 선생(전 국가무형문화재 살풀이춤, 승무 예능보유자)의 춤을 보고 학을 그려 선물하기도 했다. 전 동래야류 예능보유자인 증곡(曾谷) 천재동 선생은 같은 부산 지역의 김온경 명인(부산광역시 무형문화재 동래고무 예능보유자)이 승무를 춤추는 모습을 부채에 담아 선물하기도 하였다. 유영애 명창(전라북도 무형문화재 판소리 심청가 예능보유자)의 심청가를 들은 청봉(靑峰) 유기원 선생은 부채에 심청가의 눈대목인 추월만정(秋月滿庭)의 가사를 담아 선물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서로 다른 장르의 예술가들이 서로를 존경하고 아끼며 함께한 교유(交遊)의 순간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의 행복을 기원한 100년 부채 그리고 8폭에 담긴 명창의 시간 남해안별신굿에서 무당은 이상세계를 담고 있는 부채를 들고 사람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한다. 남해안별신굿보존회에는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1987년) 되기 전 큰무당(대모) 故유선이(1881~1952) 명인이 사용하고 故정모연(남해안별신굿 초대예능보유자)과 故고주옥(남해안별신굿 예능보유자)으로 이어져 온 100년이 넘은 부채가 소중히 보관되어 있다. 신영희 명창(국가무형문화재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은 소리인생 70년간 사용한 부채 중 닳아 사용할 수 없는 부채 24점을 모아 8폭 병풍에 담았다. 병풍에 담긴 부채 한 점, 한 점에는 신영희 명창의 70년 소리 인생과 부채에 대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번 전시를 총괄한 서인화 국악연구실장은 "명인 명창들의 이야기와 바람이 담겨있는 그리고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소중한 부채를 전시를 위해 기증 또는 대여해 주신 모든 명인 명창분이 계셨기에 이번 전시가 가능했다.”고 밝히면서 "명인 명창의 이상과 예술에 임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예술의 경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전시가 될 것이다.”라고 기대했다. 또한 전시 명 ‘명인 명창의 부채, 바람에 바람을 싣다’의 붓글씨는 한글서예가로 유명한 소리꾼 장사익이 직접 써 전시의 의미를 더욱 빛냈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전시와 관련한 연계 특강을 오는 8월부터 진행할 계획이다. 이번 ‘명인 명창의 부채-바람에 바람을 싣다’는 9월 25일(일)까지 국악박물관 3층 기획전시실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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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문화재의 춤인생을 담다”...‘무형유산 기증자료집’ 발간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은 30일 승무·살풀이춤 보유자 고(故) 이매방과 승무 전승교육사 고(故) 임이조의 유족이 기증한 자료를 정리한 ‘무형유산 기증자료집’을 발간했다고 밝혔다..국립무형유산원은 2013년부터 인간문화재의 생애가 담긴 자료를 수집?정리해 그 결과를 기증자료집으로 발간해 오고 있다. 이번에 발간한 자료집은 전통춤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매방, 임이조 전승자의 유족들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기증한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다.이매방(1927∼2015)은 1987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1990년에 살풀이춤 보유자로 각각 인정됐다. 승무, 살풀이춤뿐만 아니라 검무, 입춤 등 다양한 전통춤을 널리 알린 한국 전통춤의 거목이다. 임이조(1950∼2013)는 1992년에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승교육사로 인정됐으며, 이매방에게 승무를 사사했다. 전통춤을 기본으로 한 다양한 작품을 창작한 안무가이기도 하다.이번 기증자료집에는 이매방의 1970년대 공연 사진 및 홍보물, 전승현장에서 실제 착용한 살풀이춤 복식, 직접 사용한 재봉틀과 의상 제작 도구 등 그의 춤인생과 전승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 1073건을 실었다. 아울러 임이조의 1970년대 공연 사진, 승무 복식, 공연 소품 등 그의 다양한 활동상을 담은 자료 2728건을 수록했다.‘무형유산 기증자료집’은 누구나 쉽게 열람하고, 학술연구 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국립무형유산원 누리집(www.nihc.go.kr)에 공개할 예정이다. 앞으로도 국립무형유산원은 인간문화재의 생애가 담긴 기증자료를 지속적으로 수집해 나갈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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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무용단김채원 약력현재: <아리&랑>무용단 단장 (www.arirang21.net) -(고)임이조선생께 전통문화예술공연장(승무)이매방류의 살풀이, 승무,교방살풀이,삼북,장고 춤등 사사-(고)송화영선생께 무산향,춘앵전,부채춤,검무등 사사-유영희 선생께 진주검무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사사- 한양대학 및 동대학원 석사/원광대학교 이학박사 김채원(김은선), 한국전통춤의 시대 변화에 따른 사회적 위상에 관한 연구, 한양대학교육대학원, 1998 김채원(김은선), 한국무용수련이 중년여성의 혈중지질 및 호르몬 반응의 미치는 영향, 원광대학박사논문, 2009.-전)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무용학과 교사-동국대학교,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중앙대학교 국악대학원 강사역임-아리랑학회 공연예술분과 편집위원-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자문위원 - (사)보훈무용예술협회 상임이사(현재) 1999년 <한민족아리랑제전>(정선) 예술감독 2000년 <진도아리랑축제>(진도) 예술감독 2001년 <북한아리랑축전>(서울) 예술감독 2016년 <2016사할린아리랑제>(러시아 사할린) 예술감독 2017년 <2017사할린동포와 함께 아리랑>예술감독 2018년 <디아스포라 아리랑>제11회문경새재아리랑제 예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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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온나라 전통춤 경연대회 대통령상 "이윤정" 씨국립국악원은 지난 11월 6일(월)에 전통예술 진흥과 우수한 전통춤 분야 인재를 발굴 육성하기 위한 「제1회 온 나라 전통춤경연대회」를 개최했다. 경연은 궁중춤, 민속춤 부문으로 진행되었으며, 민속춤 부문에서 살풀이춤을 춰 금상을 받은 이윤정이 궁중춤 부문 금상 수상자인 이선희와 겨뤄 대상을 차지했다. 대통령상 수상소감으로 이윤정 씨는 “국립국악원에서 올해 처음으로 개최한 경연대회에 ‘대통령상’이라는 크나큰 상을 받게 된 것을 무한한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나이도 어리고 미숙하지만 얹나 ‘최선의 노력이 최고의 춤꾼으로 만들어 준다.’는 신념으로 늘 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것을 심사위원 여러분들께서 어여쁘게 봐주신 결과라고 생각하며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히 모교인 중앙대학교를 빛낼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지도 교수님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춤의 기초를 마련해 주시고 틀을 잡아주신 임이조 선생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또한 오늘이 있기까지 저의 춤 인생에서 가장 큰 스승이 되시는 진유림 선생님께 깊은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끝으로 모든 뒷바라지를 아낌없이 해 주신 어머님께 사랑과 감사를 드리며 이 패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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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전통가무악 전국제전 영예의 대통령상 이채희 씨무제 문서 장흥 전통가무악 전국제전 영예의 대통령상 이채희 씨 서편제의 본향인 장흥군에서 지난 달 28일과 29일 제8회 전통 가무악 전국제전이 장흥군, 장흥전통가무악추진의원회의 주최로 개최됐다. 장흥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이번 행사는 명인명창부, 일반부, 신인부, 고등학생부 등 각 부문별로 펼쳐졌으며 대통령, 국무총리, 국회의장, 문화관광부장관 및 전남도지사상 등 20개 부문에 62명에게 수여하고 3천여만원의 상금이 전달됐다. 제전 첫날인 28일에는 총 120여명이 출전해 고법 등 4개 부문 예선을 실시하고 본선진출자 24팀을 선발했으며 29일에는 예선을 거친 24팀이 각 부문에서 열띤 경합을 벌였다. 이날 영예의 대통령상은 무용 부문에 이채희(48세, 하와이) 씨가 이매방 류 살풀이 춤으로 영예를 안았고, 종합최우수상인 국무총리상에는 판소리 부문의 박미선(39세, 전주시) 씨가, 종합우수상인 문화관광부장관상에는 기악부문의 정선옥(34세, 광주시) 씨와 고법 부문의 권은경(25세, 대전시) 씨가 각각 차지했다. (사)판소리고법보존회 정철호 이사장은 올해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심사의 공정성이였다며, “인간문화재와 학계의 저명인사들이 지역안배에 따라 심사위원에 고루 위촉되셨습니다. 여러차례 검증을 거쳐 위촉된 분들이니 심사의 공정성 만큼은 자신한다”고 말했다. 국내 최고의 명인명창들이 모처럼 열띤 자웅을 겨뤄낸 자리인 만큼 이날 종합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채희 씨의 감회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특히 돌아가신 정광수 명창이 외할아버지로 어렸을적부터 판소리와 춤을 배웠던 그는 이번 종합결선에서 심사위원 35명 전원으로부터 높은 점수를 받아 최고의 기량을 뽐냈다. 수상 소감을 묻자. “지금 이순간 무척 행복하며, 정말 감사합니다. 저는 소리 집안에서 자라며 소리와 춤을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대통령상이 명인에 반열에 오르는 매우 큰 상이며 그 고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굉장히 어렵고 힘들다는 사실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감히 그 큰 상에 도전한다는 것이 무척 두렵고 떨렸습니다. 앞으로‘이제 부터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또한 춤 길의 한 전환점이라 여기고 더 열심히 정진하며 노력하겠습니다. 지켜봐 주시는 모든분들에게 실망시켜 드리지 않는 춤꾼이 되겠습니다. 가르쳐주신 임이조 선생님께 말로써 다 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리며, 또한 이러한 큰 상을 주시고 그에 대한 책임감을 실어 주신 모든 분들께 머리숙여 감사를 드리다.”고 말했다. 2005년 인천국악제에서 국회의장상, 2004년 부천국악제전에서 장관상을 수상한 이채희 씨는 현재 하와이 국악협회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하와이지부에서는 연례행사로 한국의 명인들을 초청하여 국악제와 국악강습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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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실버국악제 전국제전 종합대상 / 김복임 씨제4회 실버국악제 전국제전 종합대상 / 김복임 씨, 동작문화원 실버 국악제는 노인문화예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동시에 신명 국악을 통해 현대사회에 찌들어 왔던 어르신들의 심신의 기운을 새롭게 가다듬어 힘찬 생동감을 느끼게 하며, 국민들의 생활과 동떨어진 음악이 아니라 일반 대중의 감정과 정서가 자연스럽게 호흡될 수 있는 ‘생활국악’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출하여 ‘국악=옛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깨며, 이를 바탕으로 어르신들의 삶과 의식 속에 친숙한 음악으로 새롭게 태어나고 개최되는 전국 유일의 실버국악경연대회이다. 국악신문사 주최, 서울시 후원으로 개최된 제4회 실버국악제가 지난 12월 16일 중구구민회관에서 300여명의 참가자들의 열띤 경연 속에 마쳤다. 이날 최고상인 종합대상(서울시장상) 개인 부문은 김복임 씨, 단체 부문은 동작문화원(지도 김정임) 무용반에서 출전한 박영희, 최란욱, 장연자, 유용숙 씨 등이 수상했다. “너무 너무 기쁨이다. 지금까지 춤을 추기 위해 살아온 것 같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하고 춤을 출 수 있도록 도와주신 가족들과 스승이신 고선아, 김정림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리다”는 박영희 씨, 문화원 식구들을 대신하여 수상 소감을 밝힌다. 개인부문 종합대상을 수상한 김복임 씨에게 소감을 묻자. “먼저 나이 먹은 사람들을 위한 잔치를 마련해 꾸준한 행사를 주관하고 있는 국악신문사에 감사를 보냅니다. 실버국악제에 참가해보니 수상의 기쁨에 앞서 세월의 흐름에 서글픈 생각이 드는 것은 어찔 수 없나 봅니다. 저는 이런 행사가 있는지조차 몰랐습니다. 이우호 선생님의 권유로 신청서를 내게 되어 갑자기 실버 국악제에 나가게 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종합대상을 받게 되어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한국무용은 취미로 또 건강을 위해 춤을 배우게 됐고 없는 시간을 내어 일주일에 한번씩 수업을 하는 국립극장 문화학교에 적을 둔지 십여 년이 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간 여러 우리나라 최고 명무선생님들께 배우면서도 바쁘고 시간적 여유가 없어 건성으로 배웠었으나 2년 전 임이조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면서 시선처리나 여러 가지 춤동작 하나하나의 깊이와 새로운 춤의 세계에 빠져들게 되어 지금의 대상을 받게 된 것 같습니다. 임이조, 이우호 선생님께 감사하며, 고마운것은 내 아들, 딸의 적극적인 응원입니다. ‘어머니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항상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자식들의 전폭적인 지원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국립극장 문화학교 전체 학생들과도 이 기쁨을 함께 하겠다”는 인사를 전했다. 올해는 나에게 상복이 터진 것 같습니다. 국립극장 문화학교 학생회장으로써 “문화관광부장관의 표창”과 “강남문화원 예술제 금상”, 그리고 “실버국악제 대상”까지 받았으니 참으로 기쁜 한해라는 김복임 씨, 이밖에 수상자는 개인부문 대상은 강정록(판소리) 씨, 단체부문 대상은 성남문화원(이춘재 외 19명)이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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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명랑국악대제전* 초등무용부문대상 김예지 * “평소에 예지는 다른 어떤 어린제자보다 특별히 무용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는 아이입니다. 앞으로 10년 후면 무용계의 촉망받은 인물이 될겁니다. “ 최근 전남 해남군에서 열린 ‘제9회 청소년을 위한 국악제 명랑국악대제전’에서김예지 (11·해남서초 4년)가 초등부 무용부문 최우수상을 차지한 것. 이 대회는 (사)한국국악협회 해남군지부가 주최하고 문화관광부와 전남도, 해남군 등이 후원한 전국대회로 널리 알려져 있기에 가족과 선생의 기쁨이 더 큰 것이다. 춤과 인연이 벌써 5년이 된다는 예지는 춤 중에서도 살풀이 춤을 유난히 더 좋아한다. 어린 일곱살 나이에 지금의 김영자 선생을 만나 지금껏 춤을 배웠다. 김영자 선생은 해남 출신으로 임이조 선생께 전통 춤 전반을 사사받았으며, 장흥가무악 전국대회와 법성포단오제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진도북춤 이수했으며, 고려대학교 대학원에 재학중이다. 이런 선생 밑에서 배운 예지는 해남과 전남에서 알아주는 어린이 춤꾼이다. 선생을 따라 다니면서 무대에서 춤을 춘것이 벌써 30여 무대. 이 과정에서 예지는 자연스럽게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런 예지를 바라보는 김영자 선생은 “무용만 잘하는 것이 아닌 먼저 무용을 사랑하는 춤꾼으로 자라길 바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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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우리 춤 경연대회 수상자 명단김문숙 - 대한 민국예술원 정회원 김정녀 -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조교 임이조 - 중요무형문화재 전수조교 정재만 - 숙명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 양성옥 - 한국예술종합원 전통무용원 교수 전은자 - 성균관대학교 교수 한국무용 부문 수상자 명단 대 상 - 정 현 도 - 승무 (문화부 장관상 및 상금 100만원) 최우수상 - 허 은 영 - 살풀이 (한국문화예술진흥원장상 상금 30만원) 금 상 - 정 진 이 - 승 무(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장상) 은 상 - 주 민 정 - 살풀이(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이사장상) 동 상 - 김 종 우 - 한량무(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이사장상) 장려상 - 양 혜 선 - 진도북춤(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이사장상) 장려상 - 오 정 희 - 살풀이 (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 이사장상) 대 상 - 지 정 은(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 살풀이 (한국문예진흥원장상) 최우수상 - 박 해 슬(세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 승 무(한국예술문화단체 총연합회장상) 금 상 - 김 미 선 (청원여자고등학교 3학년) - 태 평 무(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이사장상) 은상 - 하 수 현(공주금성여자고등학교 3학년) - 살풀이(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이사장상) 은상 - 김 민 조(선화예술고등학교 3학년)- 살풀이(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이사장상) 동상 - 김 유 빈(선화예술고등학교 3학년)- 살풀이(사단법인 우리춤예술원 이사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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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선운임이조춤보존회 제82차 하계연수릴레이특강무제 문서 사단법인 한국전통춤연구회 / 선운 임이조 춤 보존회 제 82차 하계연수 릴레이 특강 사단법인 한국전통춤연구회는 古 선운 임이조 명무의 명맥을 이어가며 전통춤의 계승․발전에 이바지 하고자 설립되어진 전통예술 및 무용분야 전문 단체입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리며 한국전통춤연구회 각 지부 하계 릴레이 특강을 개최하오니 많은 분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 일 정 : 수업시간 10:30 ~ 16:00 일시 종목 장소 7월 2일(토) - 3일(일) 임이조류 교방살풀이 춤 광주지부 연습실 7월 9일(토)- 10일(일) 임이조류 한량무 서울 연습실 7월 16일(토) - 17일(일) 임이조류 기본무 (입춤) 서울 연습실 7월 23일(토) - 24일(일) 임이조류 화선무 서울 연습실 7월 26일(화) - 28일(목) 임이조류 춤 특강 뉴욕지부 연습실 8월 6일(토) - 7일(일) 임이조류 교방살풀이 춤 서울 연습실 8월 20일(토) - 21일(일) 승무(염불 두마루 총 7분) 서울 연습실 ◇ 주 최 : (사)한국전통춤연구회/선운 임이조 춤 보존회 http://blog.naver.com/kysdance ◇ 장 소 : 서울- 한국전통춤연구회 연습실 (자하문로10길 7 지하1층, 경복궁역 3번 출구) 광주- 광주지부 연습실 (광주광역시 남구 주월동 1247-9 보라빌딩 5층) 뉴욕- 뉴욕지부 연습실/뉴욕한국국악원 (192-15 Station Road Flushing NY 11358) ◇ 강사소개 : 권영심 (사)한국전통춤연구회/선운 임이조 춤 보존회 회장 무용학박사 우봉 이매방, 선운 임이조 선생님께 사사 국가지정문화재 제97호 살풀이 춤 이수자 문화재청 국립 무형유산원 출강 ◇ 참가자격 : 한국무용을 사랑하는 남녀노소 누구나 ◇ 연수회비 : 종목당 20만원 (점심 제공, 각 종목 음악CD 제공) 국민은행 810101-04-035822 (사)한국전통춤연구회 ◇ 준비물 : 짧은 살풀이 수건, 부채, 장삼, 연습복, 버선 ◇ 문 의 : 02-722-1477 / 010-6379-0459 / 010-2640-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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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임이조류 전통춤 하계 연수회* 2014년 임이조류 전통춤 하계 연수회 그동안 보내주신 성원에 감사드리며 (사)한국전통춤연구회 : 선운 임이조춤보존회에서는 2014년 하계 연수회를 개최하오니 임이조류의 전통춤을 사랑하시는 많은 분들의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일정: 1차: 내용:임이조류 교방살풀이춤 일시:2014년 8월9일~10일 ,오전:10시~오후:4시 준비물:짧은수건, 연습복, 버선 2차: 내용:임이조류 입춤(기본무) 일시:2014년 8월16일~17일, 오전:10시~오후:4시 준비물:연습복,버선 3차: 내용:임이조류 화선무 일시:2014년8월23일~24일, 오전:10시~오후:4시 준비물:부채,연습복,버선 *주최:사)한국전통춤연구회:선운 임이조춤보존회 *장소:임이조춤 전수원_(경복궁역 3번출구) (서울시 종로구 자하문로10길7(창성동)) *참가비:20만원(중식제공);계좌 810101-04-035822 (국민:(사)한국전통춤연구회) *문의:02-722-1477, 010-2640-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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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전통춤연구회 2010년 하계 연수회무제 문서 (사)한국전통춤연구회 2010년 하계 연수회 1차 연수회 /강사:임이조 일 시 2010년 8월14일(토)~15일(일) 시 간 오전 10시30분~오후6시 준비물 북가락,장삼 2차 연수회 /강사:임이조 일 시 2010년 8월21일(토)~22일(일) 시 간 오전10ㅅ;30분~오후6시 준비물 짧은 살풀이수건 참가자격: 한국무용을 사랑하고 관심이있으신 학생 및 일반인 참 가 비: 1인(25만원) ※연수회 시작전 입금 바랍니다. 입금계좌:국민은행 810101-04-035822 (사)한국전통춤연구회 장 소: 충무아트홍 스포츠센터 ※참가자 전원에게 음악 CD및 중식이 제공됩니다. 문 의: 02-722-1477 오시는길: 지하철6호선 신당역9번출구에서 동대문운동장 방향으로 50M 지하철2호선 신당역 1번출구에서 동대문 운동장역 방향으로 150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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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 영예의 무용부문 장원 / 임 주 미 양제26회 전주대사습놀이 학생전국대회에서 임주미(충북오창고등학교 3) 학생이 무용부장원을 차지했다. 임주미은 8일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대회에서 장원에 영예을 안았다. 임주미은 “장원을 차지할 줄 몰랐다. 너무 기쁘다”며 “앞으로 열심히 하겠으니 지켜봐 달라”고 소감을 밝혔다. 임주미을 사사한 임이조 선생은 “이번 학생전국대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주미는 어떤 제자들보다 춤를 배울 때 열심이 했던 아이다”며 제자의 장원을 축하했다. 춤을 배우게 된 계기를 묻자.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수상은 좋아하는 춤으로 받은 상이기에 저에게 두 배의 기쁨을 전해주는 좋은 선물이었습니다. 여자아이들이 발레 하는 모습이 예뻐 보인다며, 엄마께서는 4살 때 저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 주셨고, 그것을 계기로 저는 춤의 세상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었습니다. 단순한 취미 활동의 하나로 한두 해 춤을 추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소개해 주신 무용은 이미 제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다른 특기 활동보다도 유난히 무용을 좋아하는 저에게 어린 나이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았다는 것에 의미를 두시고 엄마께서는 초등학교 마칠 때 까지만 다녀보라고 하면서 어른들과 같이 춤을 배우는 한국전통무용연구소에 보내주셨고, 발레와는 전혀 다른 전통춤을 접하면서 요란하지 않은 춤이지만 강약이 조화되면서 한국인의 정서를 제대로 표현하는 데에 매력을 느끼게 되면서, 그곳에서 저는 춤과 행복한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처음으로 해보는 살풀이, 입춤, 승무와 같은 우리 고전무용에 크게 매료되어 몇 시간씩 연습을 하고도 지치지 않는 제 자신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춤이야말로 제 삶의 좋은 친구라는 것을 느꼈기에 가족들의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지금까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이조 선생과의 인연을 묻자. “지난 고 2 여름방학 임이조 선생님께 춤을 배우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춤 지도를 받고 싶다고 말씀 드렸을 때, 너무 늦게 왔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실망도 했으나 부모님과 저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간곡히 부탁드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지난 일 년은 저에게 많은 변화를 주었고, 고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하셨던 선생님의 말씀처럼 고된 일정의 연속이었습니다. 늘 부모님 밑에서 어리광만 피우던 저는 청주와 서울을 오가며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값진 훈련을 하였으며, 지금까지 오랫동안 춘 춤보다 1년동안 선생님에게 배운 춤이 훨씬 많을 정도로 선생님은 저에게 강하고, 혹독하게 가르쳐주셨고, 저 또한 어렵게 지도를 허락해 주신 선생님께 보답코자 최선을 다해 연습했었습니다. 제가 힘들때마다 “너는 잘할수 있는 근성을 가지고 있으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라. 너는 학문을 겸비한 춤꾼이 될 수있는 아이”라며 저에게 힘을 주시고 늘 열성적으로 지도해 주신 선생님의 관심과 격려가 오늘 같은 날을 맞이 하게 된 이유인 것 같습니다. 또한 “주미가 선생님 제자여서 너무 행복하다,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라고 말씀하셨던 오창고 3학년 6반 문현숙 선생님, 너무 부족한 저에게 “ 항상 너는 특별하고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고 믿어주시는 엄마, 대회때면 힘든줄도 모르고 저의 로드매니저가 되어주신는 아빠, 이 모든분들께 부족하지만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말씀을 대신 전합니다. 전날 예선에 이어 이날 본선에서는 판소리와 농악, 관악, 현악, 무용, 민요, 가야금병창, 어린이 판소리 등 8개 부문에 모두 183개팀 463명이 참가해 열띤 경쟁을 벌였다. 각 부문별 장원은 △판소리 심소라 △농악 광주중앙고 △관악 최신 △가야금병창 신아름 △민요 이소나 △현악 장연수 △어린이 판소리 조정규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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