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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화 김대환선생에 대한 회고, 네 장면(下)삼목 #깜작 놀란 오스카 패티포드 ‘아디동 부르스’ 오사카 카페 ‘사브’에서의 김대환 선생이 서예 ‘아리랑’ 작품을 남기게 된 사연은 매우 흥미로웠다. 김경원 선생이 오사카에 거주하며 들어 안 사실이었다. 얘기를 하는 동안 방송 팀은 장비를 테이블 위에 놓고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김경원, 김병수 선생과 함께한 테이블에는 주스와 커피 두 잔을 주문했다. 김병수 선생은 오사카에서 태어나 자란 탓에 우리 말 발음이 완전하진 못하지만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김경원 선생에게서 이야기 바통을 이어 받은 김병수 선생은 일본이 ‘아시아의 재즈 왕국’임을 설파했다. 제시한 근거는 실력 있는아티스트들이 많고, 확고한 재즈 마니아들이 있고, 방대한 음반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J 퓨전’이라 불리는 일본인들만의 퓨전 재즈의 수준은 세계적이라는 데서 그렇다고 했다. 이에 대해서는 재즈의 고향인 미국마저도 극찬을 아끼지 않는 사실에서 입증이 된다고 강조했다. 이런 일본 재즈계의 상황은 흥미로웠다. 세계 재즈계에 일본의 재즈 뮤직션들이 거의 상위에 올라있었다는 것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긴 일본은 전 세계에서 배토밴 음악을 제일 좋아하고, ‘심포니 9 합창’은 1만명이 함께 무대(‘1만명의 제9’)를 꾸미는 웅장한 스케일의 공연을 자주 열고, 송년음악회는 거의 이 작품을 빼놓지 않는다고 한다. 이에 대한 배경이 있다. 하나는 1824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초연되고 일본에서 초연된 것이 세계 제1차 대전 독일군 포로들에 의해 1918년이란 역사성을 든다. 동양 최초의 연주였다. 둘은 1943년 12월 학도병출진 음악회에서 이 작품을 연주했고, 이듬 해 12월 돌아오지 못한 학도병을 위한 음악회에서 추모음악으로 이를 연주했다는 사실을 든다. 마지막은 이 작품 코러스 부분의 합창단원을 아마추어들로 출연시켜 이들을 통해 테켓 판매를 유리하게 하기 위한 사실 등을 든다. 어찌 되었든 이런 사실조차도 우리가 보기엔 의외이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얘기 끝에 김병수 선생이 깜짝 놀랄만 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 얘기 역시 일본이 재즈가 세계적인 곳이라는 이야기의 연속에서 나온 것이다. "아리랑 재즈 버전 ‘아디동 부르스’도 이 카페에서 처음 들었어요. 일본에는 세계적인 재즈 음반은 거의 다 있어요. 이 카페는 세계적인 베이스 연주 음반은 엄청나요. 오스카 패티포드가 4, 50년대 베이스 텍크닉 최고 연주자 였잖아요.” 김병수 선생의 말에 귀가 번쩍했다. 아리랑 재즈 버전이라니! 또 아디동 부르스라니! "이 카페 주인 싸브 선생이 일본에서 알려진 베이시스트예요. 그래서 해외 연주여행을 할 때면 개런티를 음반 사는데 다 쓰고 오는 분이래요. 10여년전 미국에 갔었는데, 역시 음반 구입을 했다고 해요. 이 때 일본에서 연주를 한 재즈 뮤직션들의 앨범을 구입해 왔다고 해요. 그 중에 베이시스트 오스카 페티포드(Oscar Pettiford, 1922~1960년)의 앨범 ‘Discovry’가 있었답니다. 그리고 귀국하여 카페에서 이 음반에 수록된 ‘AH DEE DONG BLUES’듣는데, 부인이 ‘어 이거 한국의 아리랑인데?”라며 놀랬다는 거예요. 부인이 한국인이라서 아리랑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거지요.” 이 얘길 들은 옆 테이블의 방송 스탭들이 그 음반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김병수씨는 작년에 누군가가 녹음을 한다면 빌려가고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한 시간 쯤 후 색션들이 오면 ‘아 디 동 부르스’를 연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모두 박수를 쳤다. 아리랑에 매달려 그를 추적하여 오사카 까지 온 상황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미국 제즈 뮤지션의 재즈 아리랑이 있다니. 그것도 ‘아 디 동 부르스’라는 이색적인 이름으로 존재한다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들은 얘길 대충 정리하면 이렇다. 이 카페에 있는 음반은 1981년 LP 음반 ‘Discovry’에 담긴 것인데, 원래는 1952년 SP 음반 의 'MUSIC OF THE FUTURE'에 수록된 것이 오리지널이다. 이 음반은 재즈 전문 레이블 ‘Royal Roots’사가 발매해서 유명한 음반이다. 여기 참가한 섹션으로 당시 거의 동급인 찰스 밍거스가 참가하여 널리 팔린 싱글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이야기는 한 시간 쯤이 지나 출근한 주인 싸브가 김선생의 통역으로 전해준 이야기이다. "오스카 패티포드는 1051년 한국전 참전 병사들의 위문공연으로 일본 오끼나와 기지에 왔다. 한 달 정도의 공연을 마치고 귀국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공연을 한 다른 연예인들을 태우고 함께 귀국하기 위해서였다. 하루 정도 체류를 했다. 그런데 통역병과 함께 야전 화장실을 가게 되었다. 그 때 밖에서 기다리던 한국 통역병이 휘파람으로 노래를 불렀다. 오스카 페티포드는 일을 보던 중이었는데, 휘파람 소리가 너무 아름다워서 문을 열고 물었다. 그 노래가 어떤 노래냐고. 통역병은 ‘아리랑’이라고 답했다. 싸브씨가 의미심장하게 톤을 높이고 제스쳐를 써가며 들려준 부분은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오스카 페티포드는 화장실에서 한국 통역병의 휘파람 소리에 영감을 얻어 귀국해서 편곡한 것이 ‘아 디 동 부르스’이고 통역병이 ‘아리랑’이라 했지만 ‘아 디 동’을로 듣고 곡명을 그렇게 단 것이라고 봐요. 나는 오스카는 이미 1959년 비행기 사고로 이듬해 죽었기 때문에 확인할 수가 없었고, 베이스로 연주한 찰스 밍거스에게 들어 보려고 노력했지만 만날 수가 없었어요. 어떻든 이 곡은 명곡에 명연주입니다.” 싸브씨는 드럼 치는 세선이 아지 오지 않았지만 김병수선생 트펌펟과 자신의 베이스만으로 ‘아 디 동’ 부르스를 연주하자고 혀며 자리를 잡았다. 모두 두 사람의 연주로 향했다. 정식 촬영은 드럼이 참가할 때 하지고 하여 듣기만 하기로 했다. 4분 정도의 연주다. 생음악을 하는 카페치고는 좁았다. 카메라 설치로 좌석을 밖으로 내놓는 등의 소란을 격과 3인조의 ‘아 디 동 부르스’를 촬영했다. 삼목으로서는 그 선율이 머리에서 떠내 보낼 수가 없었다. 어딘지 중국적인 색채가 느껴지고 저음의 베이스가 이끄는 선율이 심장을 두드리는 듯 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오사카 공항에서 미국 케네디 공항으로 향하는 기내에서도, 다시 하와이행으로 갈아타는 시간에도, 언제 어디에서 그 음반을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데 골몰했다. 당연히 하와이에는 음반샵이 있으리라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이었다. ‘아 디 동 브르스’, 이 특별한 아리랑 재즈곡은 김대환 선생의 이름으로부터 연유되어 알게 되었다. 아리랑의 사연은 곡진하지 않을 수 없다. * 2000년 기찬숙 선생, 미야즈까 도시오 교수, 김도형 선생 등과 ‘아디동 부르스’를 생음악으로 듣기 위해 오사카 사브를 들렸는데, 그 사이 싸브 선생은 작곡한 뒤였다. 너무 아쉬웠다. 주인 없는 베이스만 사진에 담아 왔다. * 삼목은 2009년 1952년 발매된 SP음반을 고가로 구입했다. 1981년 발매된 LP음반과 ‘아 디 동 부르스’를 수록한 촬스 밍거스의 CD 전집을 2010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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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화 김대환선생에 대한 회고, 네 장면(中)삼목 作 # 오사카 카페 ‘싸브’ 의 아리랑 1987년부터 1990년대 말까지 매년 일본을 방문했다. 북한 전문가 미야즈카 도시오宮塚利雄 前야마나시山梨학원대 교수를 만나거나 가이드를 받는 방문이고, KBS와 MBC 특집 프로그램 제작팀 일원으로 가기도 했다. 물론 모두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아리랑 관련 방문이었다. 특히 1994년에는 MBC특집팀과 작가 김경원씨의 가이드로 아리랑 필름 소장자로 알려진 아베安部씨의 인터뷰를 위해서 방일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의외의 인물을 만났고 의외의 성과를 거두었다. 의외의 인물은 오사카 거주 동포 트럼펫 연주자 김병수씨다. 한국 재즈 뮤지션들의 일본 활동상과 아리랑 서예 작품에 대한 이야기와 해외 첫 아리랑 재즈 편곡작인 오스카 패티포드(Oscar Pettiford)의 ‘아디동 부르스(Ah Dee Dong Blues’의 사연을 만나게 해 준 인물이다. 김병수씨를 섭외한 것은 오사카 지역 저명인사로 아베씨가 우익계 인물이어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자는 뜻에서 동행을 청하게 되었다. 그동안 아베씨는 남측 인사들을 피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병수씨는 만나자 마자 역도산力道山 선생의 증언자라며 "역도산 선생이 술에 취해 혼자일 때는 아리랑을 불렀어요. 그 아리랑이 어떤 아리랑인지를 알기 위해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라며 취재 동행에 선뜻 응해주었다. 사흘 내내 시간을 함께 내주었다. 이틀간의 오사카 공식 일정을 마쳤다. 취재 목적인 아베씨에게서 ‘영화’아리랑‘ 필름 소장所藏 경위와 공개 시기 등에 대해 인터뷰를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필름을 찾게 되면 남북의 관계자들에게 공개하겠다는 등의 기존 주장을 되풀이 하였을뿐이었다. 다음 날 미국으로 이동하기 위해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그래서 김 선생이 식사를 겸할 수 있는 좋은 카페로 안내하겠다며 "한국의 째즈 뮤직션 강태환과 김대환이 자주 오는 곳이에요. 나도 가끔 셰션으로 연주하는 곳이지요.”라며 앞장서 갔다. 깜작 놀랐다. 김대환이 거명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반색하여 물었다. "드럼 친다는 김대환을 말하는 건가요?”라고. 그러자 당연하다는 듯 "맞아요”라고 짧게 대답하며 까페 ‘싸브SABU’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카페는 테이블이 4개로 좁았다. 그런데 카운터 겸 스탠드 구석에 드럼과 베이스가 세워져 있고, 음반 자켓 서너 장이 벽면을 장식하여 재즈 카페임을 보여주었다. 앉자마자 물었다. "여기에 드럼 치는 그 김대환이란 분이 자주 왔다는 말입니까?” "예, 그래요. 여기 주인 싸부 선생이 베이스 연주자예요. 김선생과 강태환과 여러 투어를 하였지요. 오사카에서는 여기가 재즈뮤지션들의 거점이지요.” 김경원 선생, PD, 카메라맨, 음향담당자를 따돌리고 그저 김대화선생에 대해서만 물었다. 의외의 사연들을 들었다. 너무나 중요하고 놀라 운 이야기들이다. 먼저 오사카예술대학을 졸업해서 다년 간 오사카에 거주했던 김경원 선생이 한 아리랑 글씨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오사카에 김대환 선생의 아리랑 글씨가 많아요. 애국가도 있고 아리랑도 있어요. 그런데 지난해 서울에서 봤는데 거꾸로 한자를 쓴 것도 있더라구요? 우수右手 글씨라고도 하던데요?” 이 말에 먼저 김병수 선생이 거들었다. 옆의 테이블에서는 차를 시키지도 않고 우리를 보고 무슨 얘기가 그렇게 진지하냐고 바라봤다. 김병수 선생이 말을 받았다. "이 카페에도 김대환 선생의 글씨가 있었어요. 작년까지 저쪽에 하나 붙어있었는데?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라고 쓴 것이 있었어요.” 김병수 선생의 얘기대로라면 ‘애국가’의 후렴을 쓴 것이 분명하다. 김선생이 애국가 후렴을 썼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다. 이에 대해 김경원 선생이 의외의 사실을 알려주었다. 김대환선생이 처음 일본에서 재즈투어를 하며 팬들에게 써준 것은 ‘애국가’ 후렴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에 대해 조총련 측 팬들이 문제를 삼았다. 당연하였다. 그래서 북한 애국가를 쓸 수는 없고 해서 대신하여 쓴 것이 아리랑이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본 아리랑은 세 가지라고 했다. "민족의 노래 아리랑”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고 발병난다” 서울 인사동 까페 ‘청동시대’에서 본 아리랑 글씨의 존재 배경과 저자에 대해 알게 되었다. 정리하면 김대환 선생의 아리랑 서예 작품은 일본에서 팬들에게 서비스로 써주기 시작한 것으로 ‘애국가’ 대신으로 선택된 것일 뿐이다. 그렇다 해도 독특한 필체의 작품 아리랑은 일본인들에게는 한글의 아름다움과 아리랑을 알리는데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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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김대환선생에 대한 회고, 네 장면(上)‘마음대로의 음악’을 하며 살다 간 드러머이며 미각세서가微刻細書家 김대환 선생. 3월 1일 기일忌日이다. 열아홉 번째 추모 공연이 ‘한국문화의 집(KOUS)’에서 열렸다. 입구에서 오랜만에 남소유 화백를 뵈었다. 너무나 반가웠다. ‘인사동 문화’를 쌓아 온 어른들 중 한분이기에 남다르다. ‘쌀밥이 맛있는 집’ 부산집 식당 주인으로부터 고서점 한국서적 사장까지 또래의 어르신들을 먼저 보낸 헛헛함이 꾸민 모습에서 진하게 느껴졌다. 매번의 추모공연이 그러했듯이 사물놀이 명인 이광수의 비나리 축원덕담과 김대환 선생에 대한 회고담으로 문을 열고, 소리꾼 장사익의 노래와 인사말로 여몄다. 인사말에서는 삼일절 일본 출연자가 함께하는 이유를 "음악은 모든 것을 초월하여 함께 어울려 할 수 있는 예술"이라며 함께 아리랑 합창으로 여몄다. 그 안에는 김선생과 소시적부터 함께했던 원로 뮤지션과 연배는 차이 있으나 이런 저런 인연을 맺은 젊은 뮤지션들, 일본에서 활동하던 시절 인연을 맺어 매년 추모행사에 참여하는 일본 노가쿠와 부토 연주자의 무대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외의 출연자가 있었다. 영화 1968년 개봉된 명화 ‘미워도 다시 한 번’의 여주인공 문희(본명 이순임李順任)여사의 무대가 있었다.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의 창으로 출연한 것이다. 그 자태와 함께 떨림이 담긴 청은 남다른 매력을 발산했다. 영정 사진과 포스터를 이젤 거치대에 올린 단촐한 무대, 오늘 행사 주제와는 너무 먼 사회자의 너스레, 퓨리 뮤직Free music이란 80년대 일본 재즈계의 이색적인 풍경, 제1회부터의 난해성 짙은 추모행사다. 아니 어쩌면 19년전 연세대학병원 김대환 선생 장례식장에서부터 시작된 ‘장송 굿판’ 그대이다. 무대 전환마다 다가오는 화면 속 김선생의 모습. 회상은 과거로 달려갔다. # 인사동 ‘청동시대’의 ‘아리랑’ 액자 1985년은 아리랑운동의 출발인 ‘모임 아리랑’이 활동을 시작하던 때이다. 사무실도 없고, 명확한 조직 체게도 없었지만 아리랑운동의 필요성과 전개에 대한 의지는 분명했다. 자료수집과 현장 답사를 중심으로 하는 활동이었다. 근거지는 박희준 형이 운영하는 인사동 관훈클럽 지하 까페였다. 회원들이 차茶나 한지韓紙 같은 전통문화 연구자들이고, 전국 답사 중심 단체인 ‘민학회’ 회원들이 많았다. 거의 매일 저녁이면 모여 아리랑운동에 대한 논의를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인사동 찻집 ‘청동시대’에 특이한 ‘아리랑’ 서예작품 액자가 있다는 얘기가 들렸다. ‘청동시대’는 통문관과 수도약국 사이에 있는 찻집으로 50년대 명동의 ‘공초 오상순과 청동 다방’에서 딴 것으로 짐작되어 주인은 꽤나 낭만적인 신사일 것이란 상상이 더해져 매우 궁금했다. 또한 이 시기 아리랑 서예 작품이 알려지지 않은 터여서 더욱 그랬다. 그래서 몇몇 회원과 함께 날을 잡아 오후에 찾아가게 되었다. 아리랑 후렴과 1절 가사를 작품화 했다. ‘아’자와 ‘랑’자를 독특하게 표현하였다. 낙관도 격에 맞게 찍혔다. 마침 한문학을 전공한 박희준 형이 낙관을 읽어냈다. "김대환”이다. 함께한 누구도 이 분에 대해 알지 못했다. 일행 중 한 사람이 종업원에게 물었지만 모른다며 주인이 오후에 나오니 그때 물어보라고 했다. 이렇게 서예 작품 아리랑의 존재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작품의 주인공과 그가 누구인지를 사흘 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김대환은 서예가가 아닌 드러머로 알려진 분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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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문경새재’도 아리랑?삼목 作 "선생님, 제가 보낸 카톡 사진 보셨어요? 점촌 버스터미널 사거리에 걸린 프랭카드인데요, 내일 강연 안내인데, 아리랑연합회 김** 선생 문경에 온다는 내용만 있어요. 아리랑 강연 내용은 없고요. 점촌 시내 곳곳, 문경읍 면 단위에는 200개나 부쳤다고 합니다. 재밌네요.” 문경시가 주최하는 시민 대상 아리랑 특강 안내 프랭카드. 내용이 아리랑을 강의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아리랑 연합회 김**가 문경에 온다는 식의 표현이라서 어색하고 재미있다고 기찬숙 선생이 알려온 것이다. 이 시기 문경아리랑은 물론 아리랑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부족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20012년 6월이다. 문경새재아리랑이 부상하는 계기를 마련한 강연이었다. 강연 주제는 아는 이들이라면 센세이션을 일으킬만한 내용이다. 70분간의 강연은 다음의 세 문장으로 요약이 된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 나오는 ‘아리랑고개’는 바로 ‘문경새재’입니다. 문경새재가 바로 '아리랑 고개'라는 말입니다. 문경은 아리랑의 고향입니다.” 이 요지의 강연을 계기로 문경지역에서는 소위 ‘문경아리랑 붐’이 일어났다. 당시 송옥자 회장이 문경아리랑을 알려오고 있었지만, 시청과 문화원과 일반인들에게 "문경에도 아리랑이 있다”는 인식이 번지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2020년까지 문경지역에서 아리랑을 주제로 행해진 사업과 행사를 보면 그야말로 획기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망하게 이뤄졌다. 정선이나 밀양 또는 진도 지역에서 20여년간 이뤄진 것들이 한 시장의 5년 임기 내에 이뤄진 것이다. 대충 추려도 이럴 정도이다. 첫째는 문경새재아리랑제‘가 대규모, 정례화, 대외 행사로 확대, 개최 둘째는 국립아리랑박물관 건립을 공식화, 국회 정책발표회, 아리랑 가사 서예 작품화 셋째는 문경새재아리랑과 다듬이 소리 브랜드화 행사(광화문 천명 다듬이 행사) 넷째는 문경시 ‘아리랑도시’ 선포 다섯째는 경복궁 중수 후의 아리랑과 문경새재아리랑의 연결고리 학술 담론화 여섯째는 헐버트 채보아리랑과의 연결, 독일 홈볼트 아카이부 독일포로 고려인 유리콜라이 아리랑 음원 전시 및 관련자 초청 행사 일곱째는 최초의 통속아리랑 H. B. 헐버트 채보 아리랑악보비 건립 여덜째는 문경시장 사할린아리랑제 동행 및 해외 연주자 초청 공연 아홉째는 민요학회 주최 문경새재아리랑 주제 학술대회 등 개최 열 번째는 전승단체 문경새재아리랑보존회와 아리랑문화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양립 이상의 과정에는 문경시청이라는 관官의 지나친 주도로 전승주체가 소외되는 이율배반적 상황이 10여 년간 점령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 ‘아이디어만 빼 먹는 관’이라는 구태도 구설에 올랐다. 이 중심에 삼목이 있었다. 삼목은 이 아리랑 공사公事에 스스로 "공도 있고 과도 있다.”고 평가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 기간에 드러나게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크게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와 그 위상이 정립 또는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즉, 문헌과 음반 기록으로 그 실체를 밝혀냈다는 사실이다. 1896년 H. B. 헐버트가 기록한 -아르랑 아르랑 아라리오/ 아르랑 얼싸 배 띄어라//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라는 대표사설은 이후 ‘구아리랑’에서부터 1926년 밀양아리랑과 '주제가 아리랑'까지 전승된다는 사실에서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다. 즉, 경복궁 중수(1865~1872)7년 기간에 문경의 새재에서 나는 특산물인 박달나무가 공사장 도구 자루로 다 베어져 나간다는 상실감을 표현한 것이고, 또한 이 새재는 경복궁 중수 기간 삼남의 부역꾼들이 반강제적으로 오가며 넘었던 고개이다. 여기에서 ‘새재’는 ‘고개’로, 고개는 ‘고난’의 상징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이는 곧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삼목은 1985년 헐버트 기록을 발굴, 소개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1905년 오키타 긴조(㳞田錦城)의 ‘한국의 이면韓國 裏面’ 소재 아리랑 기사, 1925년 동아일보의 ‘박달나무 민요’. 1929년 ‘개벽開闢’의 ‘문경요聞慶謠’, 1930년대 이재욱의 ‘영남민요조사자료’의 문경지역 민요자료 등을 발굴하여 존재를 밝혀냈다. 이러한 문헌 전승을 통한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 확인은 거의 삼목의 몫이었다. 한편 이 시기 더불어 거둔 성과가 또 있다. 그것은 일제시대 발매된 지역 아리랑 음반의 발굴이다. 즉, 1936년 밀리온 레코드사가 발매한 최계란 소리 ‘대구아리랑(1936년)’이 2008년에 발굴되고,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가 발매한 서영신 소리 '동래아리랑(1937년)’이 2009년 발굴 되고, 같은 해 '신밀양아리랑(1936년)' 등이 신나라음반 자료실에서 발굴되었다. 이미 장소성을 부여한 강원도아리랑과 밀양아리랑과 진도아리랑이 널리 알려진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의 지명 아리랑이 뒤늦게 발굴됨으로써 다른 지역의 지명 아리랑도 발굴 가능성이 있다는 기대를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동안 음반 수집가들에 의해 또는 대학 연구소 음원 아카이브가 주목한 장르는 판소리 명창 음반이나 월남 이상재 선생이나 손기정 선수 같은 역사인물의 육성 음반 등이었다. 지역 아리랑에 대한 관심은 그리 두지 않았다. 그러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12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전국적인 아리랑 신드롬과 함께 지역 아리랑 음반들에 관심을 보여 발굴되었다. 이에 의해서 ‘경주’, ‘춘천’, ‘문경’ 지명의 아리랑도 음반으로 발매되었으리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삼목으로서는 당연한 기대였으며, 국내와 일본 및 해외의 음반 판매사의 싸이트를 주목하고, 1930, 40년대 신문 광고도 살피게 되었다. 2017년 11월 초, 제10회 문경새재아리랑제 개최를 준비하기 위해 문경을 바쁘게 오가던 시기이다. 고속버스가 충주를 거쳐 점촌을 향하는 중에 기 선생 특유의 높은 톤이 들려왔다. 기 선생이 안국동 아리랑연합회 사무국에서 일제시대 신문기사 색인 작업을 통해 ‘아리랑연표’를 작성하다 찾아낸 것이다. "포리돌 음반 광고에 ‘문경새재’라는 것이 나옵니다. 이건 분명 문경새재아리랑인 것 같아요. 왜냐면 오태석과 정남희 반주에 조앵무와 임소향이 부른 것으로 나오기 때문에 확실합니다. 분명 이건 문경아리랑 음반입니다.” 나는 문경문화원 일을 보면서도 건성이었다. 마음 한쪽은 빨리 서울에 들어가서 기록을 보고 싶어서 다. "일제강점기 문경아리랑이 음반으로 나왔다?”는 기대는 했지만, 실제 그 존재가 드러날 줄은 몰랐다. 요 몇 년 동안 추정한 것이 실제 현실로 드러난 것이니 신비하기도 했다. 급한 마음으로 서울에 돌아 온 삼목은 기 선생이 출력해 놓은 조선일보 1939년 1월 19일자 ‘포리도루 조선음반 신보’ 광고를 보았다. 분명하게 2월 신보 광고란에 ‘聞慶새재’가 들어있다. 반주자 두 분과 노래한 두 분도 분명히 나와 있다. 다만 ‘아리랑’이라는 단어가 없을뿐이다. 그러나 삼목은 확신을 했다. 여러 문헌에서 ‘아리랑’이 붙지 않은 ‘문경요’나 ‘박달나무 민요’가 모두 문경아리랑이었기 때문이다. 1949년 성경린과 장사훈이 펴낸 ‘朝鮮의 民謠’에서도 ‘聞慶새재’로 곡명을 달았는데, 그 가사는 문경새재아리랑이다. 그런데 이 광고만으로는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가지 의문을 갖게 되는데, 하나는 실제 음반이 발매되었다는 기사와는 다르게 광고 게제 일시와는 시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음반은 발매 되지 않고 광고만 나왔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광고만 나오고 발매는 되지 않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70여년이 지나도록 실물이 확인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이 두 가지 의문을 염두에 두고 음반을 찾기 시작했고 관련 기록을 수소문 했다. 이 과정에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매일 색인 검색을 하는 김종욱 선생에게 부탁한 결과 의미있는 자료가 왔다. 그것은 매일신보 1938년 7월 17일자와 9월 25일자 경성방송국(JODK) 국악 프로그램에서 ‘문경새재’가 송출되었음을 확인했다. 여기에 따르면 부른 이는 다르지만 같은 반주자에 의해 방송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는 음반 발매 여부와는 또 다르게 ‘문경새재’가 국악인들에 의해 연주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삼목과 기 선생은 광고자료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음반 존재 가능성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발굴을 독려하는 차원에서 이를 언론에 알리고자 했다. 그러자 기 선생은 "우리가 음반을 찾고 발표해야지 이 자료만 알리면 안된다"라는 의견을 냈다. 이어 "그 음반 찾게 되면 가격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이 기사를 보고 찾았으면서도 마치 자신의 눈이 밝아서 '최초 발굴'이라고 떠들면서 찾았다는 기사를 내는 노략질을 할 것이라는 이유에서다"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삼목으로서는 누가 찾든 빨리 음원을 확보하여 문경아리랑의 위상을 제고하고, 연구 자료화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의견을 달리했다. 드디어 2017년 11월 3일, 문경문화원 고성환 사무국장을 통해 문경매일신문과 대구매일신문에 자료를 공개했다. "문경새재아리랑 전국 확산…방송·음반 발매 기록 발견. 한민족아리랑연합회와 아리랑학회는 2일 문경새재아리랑이 1938년 7월 17일 오후 8시 KBS라디오 전신인 조선방송(JODK)에 방송됐고, 영국의 레코드사가 취입해 음반으로도 내놓았다는 당시 조선일보 기사와 광고를 비롯한 방송자료를 발견해 매일신문에 공개했다.” 기사의 말미는 이렇게 여몄다.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문경새재아리랑은 헐버트 선교사가 서양 악보로 채보하기 시작한 1890년대부터 1930년대 방송을 타고 임소향이 음반을 낸 이후인 1940년대까지 서울 경기 지역에서 널리 보편화된 것으로 보인다"며 "만일 임소향이 월북하지 않았다면 문경새재아리랑은 해방 후에도 전국에서 널리 불렸을 것이다-고 했다.” 이 기사는 ‘문경새재’라는 음반명과 곡명을 아예 ‘문경새재아리랑’으로 특화, 단정하였다. ‘문경새재’는 ‘문경새재아리랑’ 또는 ‘문경아리랑’으로 특정, 검색 키워드로 제시했다는 사실에서 음반이나 기타 문헌에서 문경새재아리랑을 찾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했다. 이 기사로 문경과 소장자들에게 전해져 반향이 컸다. 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정창관 선생이 공감을 표해왔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이만유 회장도 "문경아리랑이 다른 지역 아리랑과 함께 중요한 위치였음을 확인시켜 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받기도 했다. 드디어 기사의 결과가 나왔다. 존재에 대한 기사가 나간지 1년, 국악음반박물관 노재면 관장이 소장 자료를 공개했다. 광고 문안과 동일했다. "Polydor X-517-A(10386BF) 南道雜歌 梅花打鈴·聞慶세재 吳太石·丁南希·曺鸚鵡·林素香 伴奏 韓成俊·金德鎭·鄭海時” ‘南道雜歌 聞慶새재’ 불은 라밸의 폴리도루 음반, 너무나 반가운 음반이다. 그리고 2년 후 역시 노재명 관장이 가사지歌詞誌까지 발굴, 공개했다. 획기적인 발굴이다. 이로서 3절의 가사가 분명하게 밝혀졌다. "(중모리) "문경새재는 웬 고갠고 구부야 구부 구부야 눈물이 난다.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밭을 매고 저 논 갈아 양친 부모님을 봉양허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아리랑 장단에 노래허여 아리랑 고개 고개로 넘어가세.이 물을 건너고 저 산 넘어 우리 님 계신 곳을 찾어가세.아르르르르르 아르르르르르 아라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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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시노부 준뻬이 ‘아라란アララン’삼목 作 1984년 들어 삼목은 한국잡지협회 협회보 기자로 요란스럽게 살 때다. 언론 분야와 국학분야 학술세미나 참가, 전국 헌 책방 순례와 아리랑 기행, 매달 20일 전후에는 협회보 편집, 출간을 위해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날밤을 새우기 일수였다. 헌 책방 순례 목적은 잡지 창간호와 발행인과 편집인 관련 자료, 그리고 아리랑 자료 수집을 위해서다. 이때 일간지에 발굴 자료를 공개하고 협회보에 ‘한국잡지인 열전’을 연재하기도 했다. 2월 초, 동경한국연구원東京韓國硏究院에서 전화를 받았다. 최서면 원장의 배려로 일본 진보초 고서점에 삼목이 찾는 책이 입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온 것이다. 지난 연말 최서면 원장과의 통화에서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헐버트가 쓴 아리랑에 관한 논문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구입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한 후 3개월만에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일본 중년 여성의 정중한 톤의 서툰 우리말이 수화기로 넘어왔다. "최원장님께서 전하랍니다. 진보초 키타자와 서점에서 연락이 왔는데, 연갑선생이 최원장님께 구입을 부탁한 코리아 레포지토리 1896년과 97년 2년분이 입수되었다고 합니다. 직접 구입를 하신다면 연락처를 드리겠고, 아니면 저에게 연락을 주시면 대행해 드리겠습니다. 가격은 2년치 합본임으로 고가입니다.” 너무나 기뻤다. 당장 어떻게 하겠다는 말은 하지는 않고 바로 연락을 하겠다고만 했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지난 해 말 최원장과의 통화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1896년 헐버트씨가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아리랑에 관한 글을 발표했는데, 구입 기회를 놓쳐서 연구원이 갖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 자세히는 기억이 없네만. 분명한 것은 아리랑 악보하고 가사 둬 페이지가 있었네. 구입하겠다면 내가 아는 서점에 주문을 해놓겠네. 1896년 2월호 아니면 3월호일 걸세” 그동안 최 원장이 방송과 신문에 발표한 발굴 자료를 보면 주로 독도 영유권 문제, 안중근 의사 기록과 유묵 존제, 독립운동 관련 사료이지만,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특수 자료를 일본은 물론 미국 등에서 구입 한 장서가 2만여 권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이 허튼 소식을 전할 리가 없으니 이것은 분명 획기적인 아리랑 문헌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부터 이 번 전화를 받기 까지 삼목은 틈만 나며 이런 생각으로 혼자 미소를 띠기 일 수였다. "악보가 있다? 분명 아리랑 악보가 포함된 최고最古의 문헌기록이다. 악보를 재현한다면 획기적이다. 구입하면 어디에 발표할까? 조선일보? KBS?” 이런 기분에서 삼목은 ‘코리아 레포지토리’에 대해 기독교 자료에 밝은 청계천 경안서점 김시한 장로와 나까마 김연창 선생과 단국대 공연자료연구소 김종욱선생 등에게 방訪을 냈다. 나오면 무조건 고가로 사겠다. 그리고 한 턱 내겠다고. 이런 들뜬 기분에 책값이 얼마인지는 생각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특별해도 잡지 한 권 값 정도야 못 감당하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번 전화에서 한 권이 아니라 2년치 24개월 합본이며, 가격이 1년 원급이었다. 전화를 받고 3일간을 고민했다. 결국 구입을 포기해야 했다. 너무 큰 가격 때문이었다. 국내 서점이라면 해당 호수만 사자고 조르거나 외상을 하거나, 계약금을 내고 기다려 달라고 사정을 하겠지만, 일본의 서점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경 최 원장 비서실에 솔직하게 전달했다. 경제적 부담이 너무 커 구입을 포기하겠다고 했다. 삼목은 아쉬움 속에서 ‘코리아 레포지토리’를 놓지 않았다. 그래서 국립도서관은 물론 대학도서관 장서목록과 장서가로 널리 알려진 중대 김근수 교수와 공주대 하동호 교수의 목록 까지 확인하였다. 그러던 여름 장마통에 인사동 고서점 통문관을 들렸다. 몇 번 인터뷰로 뵌 바 있는 이겸로 선생께 최원장과 통화한 이야기를 전하며 그렇게 비싼 것인 줄 몰랐다는 푸념을 했다. 그러자 선생은 자신이 10여년전 취급한 바가 있는데 어디로 납품을 했는지 기억이 없다고 한 뒤 빨간 색 하드커버의 책 한 권을 빼 주었다. 참고할 만 하다며 건네주었다. ‘외국어 표기 간행물 목록’이란 책이다. 퇴근 후 펼쳐 본 이 책에는 ‘KOREA REPOSITORY’의 존재는 물론 총 목차 1896년 2월호에 ‘KOREAN VOCAL MUSIC’이란 아티클이 있음을 확인했다. 최 원장이 2월호 아니면 3월호라고 했으니, 이 글에 아리랑이 언급되었을 것이란 확신이 든 것이다. 그리고 큰 것을 깨우치게 되었다. 그것은 1800년대 외국인이 쓴 한국관련 기사가 의외로 많다는 사실과 아리랑 같은 노래를 언급한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기록 보다는 외국인의 기록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후 삼목은 헐버트는 물론 알렌, 비숖, 같은 선교사들의 자료와 1800년대 말 한국에 왔던 일본 지식인들의 자료까지 검토하기 시작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첫 수확도 거두었다. 단국대 김원모교 수실에서 확인한 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1871~1962)가 동경당서점에서 1901년 발행한 ‘한반도韓半島’를 보게 되었다. 국제법 전공자로 1876년 한국에 와 인천이사청仁川理事廳 이사관으로 근무한 시절을 회고한 책으로, 여기에서 "한성사범학교 교사 헐버트씨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진 아리랑 악보~”라고 언급한 사실을 찾아냈다. 일부 원문을 인용하고 번역을 하면 이렇다. 아리랑의 음조音調가 ‘망국적亡國的’이라고 하여 비관적으로 이해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곧 한국관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若し夫れ夜半月を踐んで南山の麓, 倭將臺の 邊を逍遙するあらんか, 無邪氣なる少年か意味なく謠ふ 「アララン」の哀歌は, 東西相聞ゆる擊杵の音と相和し, 歷史の興廢と人事の悲哀とを語るものに似て無量の感慨を生せしむ, 詞藻を解せさる予まで之れを聞ひて一句湧くを止むる能はさるなり. 繫絃已歇仙風生.殘雲搖曳木覔城.天暗夜深人將睡.何處沈沈砧杵聲.韓家婦女何黽勉.獨伴孤燈坐三更.君不聞悠悠掠耳阿蘭曲.悲調自具無限情. 혹시라도 한밤중에 달빛을 밟으며 남산 기슭 왜장대 주변을 산책하는 일이 있다면 그 곳에서 순진무구한 소년들이 따라 부르는 아리랑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와 잘 어우러져, 역사의 흥폐(興廢)와 세상살이의 비애를 이야기하는 듯하여 무망함을 느끼게 된다. 문학적인 시문(사조詞藻)으로 표현하는 것은 잘 못하지만, 이것을 듣고 있노라면 가슴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는 시 한 수 쓰는 것을 자제하기는 어렵다. 거문고 타는 소리 이미 그쳤고 시원한 바람 부네하늘에 떠있는 조각구름 목멱성 남산 위를 오가네날 저물고 밤 깊어져 사람들 잠자리에 들 시각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한국의 부녀자들은 그 얼마나 부지런한가?홀로 외로운 등불 앞에 삼경이 되네그대는 들어보지 못했는가 멀리서 들려오는 아리랑을구슬픈 곡조 속에 저절로 무한한 정 담겨있네” 아리랑관觀도 일본적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를 확인한 것은 큰 소득이다. 곁들어 ‘아라란(アララン)’ 또는 ‘아란곡阿蘭曲’이란 표기 확인도 큰 소득이었다. 일본인의 기록 키워드를 확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1984년 여름으로부터 이듬해 여름까지 삼목은 외국인의 아리랑 기록을 찾는 일로 뜨겁게 살았다. 그 사이 결혼도 했고, 한국잡지협회를 나와 ‘한국출판정보센타’라는 기획사를 꾸려 본격적인 사료 수집과 컨텐츠화 작업을 하게 되었다. 그 덕에 1901년 시노부 준뻬이의 ‘한반도’ 기록에 이어 1908년 N. 알렌의 'Things Koreans' 소재 아리랑 기록 등을 찾아냈다. 이는 삼목의 아리랑 인식을 전환시키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다음 세 가지를 인식한 것이다. 하나, 아리 또는 아라리와 다르게 아리랑은 민요가 아니고 민중의 노래이다. 둘, 그 기점은 1800년대 중반이다. 셋,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와 다르게 문헌으로 전승하고 확산되었다. 이런 인식을 확신으로 갖게 된 것은 삼목이 문헌 소재 아리랑을 집요하게 매달린 이유이다. 그 첫 결과는 구본희 부국장(2014년 작고)의 권유로 8월 26일자 스포츠조선에 "아리랑 樂譜 最古가 바뀐다”란 제하의 기사를 내게 되었다. "1901년 발간 한반도에 수록 발견 정설로 알려진 총독부자료보다 10년 앞서 ‘아리랑’으로 표기, 4분의 4박자로” *추록-시노부 준뻬이信夫淳平의 ‘한반도韓半島’는 1990년 경인문화사에서 영인본이 나왔다. 삼목이 원본을 구입한 것은 1997년 2월 일본 신보초 한 고서점에서 구입했다. 시노부 준뻬이는 경제학을 전공한 자로 한말韓末 우리나라에서 일본 총영사總領事로 3년 간 근무했다. 서양인들의 저술보다 구체적이다. 발문(跋文)을 쓴 유명인사가 6명이나 된다. 이 책이 국내에서도 읽혔음은 1909년 10월호 ‘대한흥학회보’ 제6호 ‘지역상소역地歷上小譯’(MH生)에서 인용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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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1/694쪽’의 아리랑(하)묘한 여운을 간직한 채, 접어둔 이 책은 책장 속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2년 여가 지난 어느날, 삼목은 아세안게임행사시 많은 문화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삼목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행사의 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발표회’라는 프로그램의 첫 순서 ‘선구자’, 그 옆에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으로 되어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설 부분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1963년 12 30 시민회관, 조두남(1984년 작곡) 작곡 발표회에서 바리톤 김학근 불러 유명해진 곡. 이후 7년간 기독교방송의 ‘정든 우리 가곡’ 시그널뮤직으로 우리에게 친근해진 가곡이다. 작시는 작곡가와 함께 중국에서 활동한 시인 윤해영의 작품이다.” 그리고 선구자 3절이 병기되어 있었다. ‘제2의 애국가’로도 표현되는 가사이다.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분명 애국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그러나 삼목은 곧 출판 할 아리랑 사설집 편집 최종 교정을 보면서도 미심쩍어 한 ‘滿洲 아리랑’과는 상반된 시상詩想이에서 일종의 불안감마저 들었다. 분명 만주 아리랑‘은 ’오족五族‘이란 어휘에서 친일시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짖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목은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이 제공해준 정보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제16號’로만 출전을 밝히고, 윤해영 작품임은 명기하지 않은 채 수록했다.(‘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 현대문예사, 1986. 214쪽)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났다. 삼목은 당시 국립극장 허규 극장장, 기획자 이광수, 회원 원재식씨 등과 ‘아리랑축제’를 추진하는 등 동분서주할 때다. 그 와중에 몇 년 만에 다시 윤해영을 되살려 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으로부터다. "예상했던 대로 만선일보에 안수길, 윤해영 같은 이들의 자료가 많이 나왔어요. 아세아문화사에서 만선일보 영인본을 냈어요. 그런데 김형이 우려했듯이 윤해영은 문제가 있어요. 아리랑만주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확실해요. 그 가요 ‘아리랑 만주’와는 또 다른 작품이요. 윤해영은 결국 아리랑을 세 편 쓴 것이 되는데. 저녁에 만납시다. ‘滿洲 아리랑’ 복사했으니까.” 1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2 말발굽 소-리 끊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3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아리랑 만주’ 보다는 간결한 작품이다.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 1941년 1월 1일자에는 신춘문예 민요부에 당선된 작품이다. ‘아리랑 滿洲’ 제1절의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와 이 작품의 3절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는 같은 맥락이다. 만주국의 이념인 ‘五族協和’의 표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삼목은 강원대 박민일 교수에게 윤해영의 작품 사본을 송부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아리랑을 친일 도구로 쓴 것인가!” 삼목은 차마 윤해영의 아리랑 작품들을 언급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리랑의 변절, 이런 막다른 표현이 겁이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박민일 교수로부터 ‘친일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받았다. 읽지 않고 뒤처 놓았다. 그럼에도 ‘친일 아리랑’이란 표현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여운으로 따라왔다. 1995년 중반은 국학연구 붐이 절정에 이른 시기다. 이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각종 간행물들이 국가기관이나 연구단체 등에서 수집하여 각 도서관에 비치됨으로서 가능했다. 만주지역에서 간행 된 출판물과 정기간행물도 이 시기 전후 영인 되어 연구 자료화가 가능했다. 만선일보(1936~1948)나 흥아협회 기관지 ‘재만조선인통신’,‘중국조선족문학사’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결과로 만주지역 조선인 문학에 대한 학계의 조명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윤해영이란 시인에 대한 작품도 조명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95년 중반 이 시를 비롯한 윤해영의 시가 총 9편이 있음이 드러났다. 인천대 오양호 교수가 논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대의식 고찰’에서 밝힌 것이다. 9편은 다음과 같다.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발해고지, 사계, 척토기, 낙토만주 이 논문의 결론은 "9편의 시에 나오는 선구자는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와는 정반대다. 결국 윤해영이 선구자 작시 이후 변절한 증표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대비는 이미 가곡 ‘선구자’가 받고 있는 평가 때문이다. 예컨대 1990년 연변인민출판사가 간행한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이런 평가이다. "선구자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몸에 지니고 나라와 미녹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 되여 불리우고 있다.” 이것이 1990년대 중반의 윤해영의 시에 대한 평가였다. 이로부터 윤해영은 ‘선구자’ 외의 작품은 친일 시로서 혐의嫌疑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외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1984년 조두남선생이 작고할 때 까지도 문제가 없던 것으로, 1982년 세광출판사 발행 조두남 수필집 ‘그리움’에서 기술한 짧은 진술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1932년 목단강의 허름한 여관에 묶고 있었을 때 한 젊은이가 내게 ‘용정의 노래’를 주며 작곡해 달라고 사라졌다. 아마도 이 젊은이는 독립군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하고 해방이 되어 돌아와 선구자로 곡명을 바꾸어 발표했다.” 조두남은 이 책을 낸 2년 후 작고했다. 그런데 해방 전 까지 조두남과 함께 음악활동을 한 재 중국 음악인들이 한국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진술이 거짓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조두남이 ‘징병령 만세’ 같은 친일 작품을 작곡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그랬으며, 윤해영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함께 음악활동을 했음은 물론, 친일 시를 썼다는 사실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급기야 한국에 유학을 온 연변 음악가 류연산씨가 2004년 ‘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라는 책에서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 음악활동상을 밝혀 조국에 알린 것이다. 이런 결과로 조두남과 윤해영은 친일 음악가로 규정되었다. ‘선구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슨 윤해영은 아리랑을 친일의 도구로, 민족 정서를 팔아먹은 반역의 시인이 되었다. 아리랑의 역사에서나 한국문학사에서나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쓴 이는 윤해영이 유일함에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04년까지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 ‘용정의 노래’를 ‘선각자’로 바꾸고 시도 일부 개작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윤해영의 ‘용정의 노래’는 애초부터 친일 시였다는 것이다. 삼목으로서는 자료적인 관심 외에는 어떤 해석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책장 속에 넣은 ‘半島史話와 樂土滿洲’를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2005년 11월 3일자 삼목의 일기장에는 여러 메모 한 모퉁이에 이렇게 쓰여 있다. "어제 산 김연수의 ‘몽상의 시인 윤해영’을 대충 읽었다.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친일시인이 아니라 진솔한 민족시인"이란 규정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적 해석 영역에서 이런 구절은 논의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다섯 문장을 인용하여 놓았다. 저자 김연수의 주장이다. *"낙토만주는 고구려와 발해의 환유로 민족의 꿈이고 기도이며 또 기도가 소원하는 파노라 마의 내용이다.” *"만주국을 찬양하는 시가 아니라 만주가 사실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으니 의당 지금도 우리의 땅이라는 저의가 담긴 시이다.” *"오색기(五色旗)도 만주국의 국기인 오색기가 아니라 고구려의 오색기다.”*"낙토, 오색기, 오족 등 그의 어용적 자세를 추정하게 하는 낱말들을 쓴 것은 실은 저의를 감추고 검열 등에 선수를 치기 위한 (검열관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시를 외향적 의미로 단정 짓는 무지한 현상이 안타깝다. 윤해영이야 말로 일제 강점기 재 만 시인 가운데서 가장 특출한 방식으로 저항정신을 구현하면서 저항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저항시인이다. 그것은 민족의 꿈을 이렇게 아리랑 정서에 담아 검열과 감시의 장애물을 넘어 민족을 향해 읊은 진솔한 시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011년, 삼목은 ‘한국의 아리랑문화’(국제문화재단 편)를 공동 집필했다. 그 중에 ‘훼절의 아리랑, 악극 아리랑’ 항목에서 1940년대 일제 국민총동원 체제 악극 상황을 파악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나니오부시 아리랑’ 같은 작품이 그 하나인데, 유독 아리랑을 표제로 내세운 작품들이 악극화 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연예단을 동원하여 군수공장 같은 곳의 위문공연용이었다. 이 현상에 대해 삼목은 이런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소수민족이나 식민지 상황에서 외세에 대한 최후적인 대항에서는 가장 민족적인 정서로 대응한다. 저항력과 결속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의 말기적 상황에서 아리랑을 내세워 저항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삼목은 오랜만에 윤해영의 아리랑 시를 떠 올렸다. 그리고 나름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윤해영도 당시 만주국의 군사적 팽창의 위협 하에서 아리랑이라는 민족적인 정서를 내 세워 최후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이다. 삼목의 청춘시절 ‘1/694쪽’의 아리랑, 30여 년을 앓고 있다. 아리랑의 해석은 간단하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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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1/694쪽’의 아리랑(상)삼목 作 1984년 초, 삼목은 경기도의 한 사립중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86아시안 게임 개최가 발표되면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담론 속에서 아리랑, 김치, 태권도, 호랑이 같은 민족 상징에 대한 의미화 논의가 문화계 전반에 화두가 되어 있을 때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목도 열열하게 아리랑 자료 수집과 자라매김에 매진하고 있었다. 삼목이 새 학기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 출석부를 위치시키고 돌아설 즈음, 교무주임이 전화 받으러는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아 김씨, 나 장승백이 김이요. 오늘 서울에 오나요? 아리랑 자료가 나왔어요. 어, 비싸서 권하기는 좀 뭐 한데, 이게 만주국에서 나온 귀한 책이에요. 오늘을 넘기면 돌려주어야 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 거요. 가격은~” 삼목은 어차피 토요일이라 서울 집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부리나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대지극장 앞에서 내려 다시 노량진행 버스를 타고 진오서적(당시 고가의 문학서적 위주로 판매하던 고서점) 근처 다방에서 여차저차한 사정을 들어 월급 날 값기로 하고 양도를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여러 번 망설이고, 많은 생각 끝에 한달 원급에 반을 더한 가격으로 샀다. 문헌 소재 ‘아리랑’은 거의 부속적으로 존재한다. 표제標題가 ‘아리랑’인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제가 다른 컨텐츠 속의 하나로 끼어있거나 일부로 언급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끼어있는 경우는 잡지 속에 수필이나 시나 단편 소설 한편이 들어있는 경우이고, 일부로 언급 되는 경우는 어떤 이의 수필 속에, 회고기 속에 에피소드로, 또 아니면 ’아리랑을 불렀다‘ 정도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입수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전체 값을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억울한 여건을 감수하고 값을 치르는 것이다. 삼목이 구입한 책 중에 거의가 이런 경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값을 치루고 산 것이 바로 ‘장승백이 김선생’(고서 중개인 중에는 매우 신사다운 분으로 일본어 번역에 능통한 분, 1990년대 말 작고)에게서 구입한 ‘半島史話와 樂土滿洲’이다. 1943(강덕10)년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만선학해사滿鮮學海社가 발행한 책이다. 이 출판사는 당시 만주국의 지원으로 발행 되던 ‘만선일보’ 필진들과 만주국 조선인 문인들이 정주하던 곳이다. 시기상으로 한반도에서나 만주에서 낸 책으로는 순 한글로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사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목차 첫머리는 대일본제국총리대신 장경혜, 중화민국정부주석 왕정위, 前조선총독 남차,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 사회 지도자 윤치호의 서문을 필두로 한 148항목의 방대한 책이다. 내용에서는 오세창의 기념 휘호를 비롯하여 역사학자 이병도, 만주건국대교수 최남선, 법학자 유진오, 작가 이광수, 민속학자 고유섭, 시인 이은상, 음악학자 함화진, 기자 차상찬, 신학자 채필근, 시인 윤해영 등의 그과 작품을 수록한 총 694면, 오늘날의 A3 싸이즈 대형 판형 책이다. 이런 책에 ‘아리랑’이 들어있었다. 속된 말로 148항목 중 1편의 시속에, 694면 중 단 한 면에, 끝에서 두 번째 쪽에서, 그것도 딸랑 ‘14줄 중에 아-리-랑’ 3자가 들어있을 뿐이다. 시 ‘樂土滿洲’, 윤해영尹海榮 작품이다. 낙토만주樂土滿洲 一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 광이 두르자 三끝없는 地平線에 五穀金波 굽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先驅者 한 千年 歲月後에 榮華萬歲 빛나리 제3절 2행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에서 ‘아리랑’이 나온다. "이렇게 작품의 표제에서도 아니고 시행의 한 어휘로 나온다. 이것도 아리랑 자료로 취급할 수 있나? 또 가치가 있나? 윤해영은 어떤 사람인가?” 삼목이 이 책을 살 때 수 없이 머리 속으로 되물었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목은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미군정청 발간 독도 자료 수록 잡지 창간호와 사운 이종학 선생과 맞바꾼 ‘解放歌謠’라는 노래책 속 윤해영 작사 ‘滿洲 아리랑’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윤해영이 ‘아리랑’을 일회적인 시어로만 인식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인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1947년 발간된 ‘해방가요’의 ‘滿洲 아리랑’은 이렇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一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二 말발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三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윤해영 시, 김기진 작곡, 백년설(1915~1980) 노래로 태평레코드사에서 1941년 12월에 음반으로 나왔다. ‘나그네 설음’과 ‘번지없는 주막’으로 명성을 날린 백년설의 유명세로 보면 만주와 한반도에서 ‘아리랑 만주’도 널리 불렸음이 짐작된다. 그런데 두 편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만주 봉천’, 삼목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두 분 있었다. 어린 시절 설 명절이 되면 두 분이 사촌들과 함께 설을 지내러 서울에서 왔다. 3일 정도 들은 이야기들이지만 화로를 감싸고 듣던 대부분은 만주 봉천에서 살다 해방이 되어 평안도 남시(사촌 형 중에 ‘봉천’과 ‘남시’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데, 그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란다.)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 온 이야기다. 삼목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4촌 누이는 눈물을 훌쩍이며 듣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삼목이 또랑한 기억으로 담고 있는 것은 "왜놈들에게 속아서 만주로 간 거지”라든가 "그때 만주 신경은 지금 서울보다 더 좋고말고”라든가, "만주가 망하지 않았다면 일본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됐을거고, 설 쇠러 그 곳으로 왔을 것인데~ ”이다. ‘낙토만주’와 ‘만주 아리랑’, 두 작품의 여운이 묘했다. ‘속았다’와 ‘좋았다’로 읽혀지며 아리랑의 정서를 흔들었다. 이상한 이런 감정은 왜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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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本調가 뭐야?”(하)삼목 作 이튿날 상기된 얼굴로 奇 선생이 찾아왔다. 이어 시인 최(광린) 선생도 관심을 갖고 찾아와 비좁은 원서동 자료실의 분위기는 후끈 달아올랐다. 奇 선생은 K교수 주장의 부당성을 논문화하겠다며 몇 년 전의 스터디노트를 펼치며 본론으로 직진했다. K교수가 ‘조선의 민요’에서 본조를 "처음 사용된 명칭”이란 것을 "처음 본조아리랑을 확정하였다”로 오독誤讀한 수준이고, 갑작스럽게 "서울시를 엄두에 두고 서울아리랑을 들고 나선 것은 불순하다"는 주장이다. 奇 선생의 다소 감정적인 대응 논리에 최 선생이 그것보다는 더 본질적인 문제로 장사훈 교수의 본조아리랑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 주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겠냐는 의견을 냈다. 장사훈 교수! 삼목에게 30여 년 전의 기억을 소환하게 했다. 30대 중반, 사방팔방을 다니며 애국가와 아리랑 자료를 추스르던 시기, ‘예술인의 마을’에 살던 장사훈 교수댁을 오갔다. 1982년 서울대에서 정년을 마치고 청주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시기였다. 삼목의 관심사인 ‘대한제국애국가’ 작곡가 에케르트(譽啓爐/汝巨多/어: Franz Eckert, 1852~1916)에 대한 자료와 당연히 아리랑에 대한 자료를 구득하기 위해서였다. 특히 1951년 국악개론서 ‘국악개요’ 내용에 대한 민요자료와 관련 에피소드를 얻는 목적으로 한 계절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그 덕으로 1991년 작곡했을 때 KBS라디오 ‘장인백선’ 프로그램을 집필할 때 추모특집을 제작하기도 했다. 삼목의 과거 행적을 奇 선생이 현실로 불러냈다. "장사훈 교수로부터 들었던 얘기를 다시 해 주세요. 여기 메모에는 장례식도 참가했고, 추모 프로그램도 제작했었다면서요. 그때 아리랑에 대해서도 얘기했다면서요?” "그야 당연하지, 꼭 찝어서 질문한 건 아니지만, 중요한 얘기를 많이 들었지. 당시 성경린 선생님이나 자신은 아리랑에 대한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거야. 해방직후 개론서가 필요해서 국악 전반을 알리는데 주력을 했다는 거지. 그러면서 하는 말이 아리랑 같은 민요는 음반업 종사자나, 공연 연출가, 연주자, 경기민요 창자 정도나 관심을 가졌던 상황이란 것야, 그런데 핵심적인 얘기를 하셨어, 뭐냐면, ‘본조’라는 말은 자신들이 한 말이 아니라 공연계 연출가들이 한 말로 연극, 무용, 만담 같은데서 중심적으로 쓰는 영화‘아리랑’ 주제가를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지. 당시는 아리랑하면 바로 주제가‘아리랑’을 말하는 정도였다는 것이지” 이에 두 사람은 공감을 표했다. 그리고 기 선생이 이를 방증하는 자료라며 석사논문에서 인용했다는 두 가지 자료를 내놓았다. "아리랑이 완성되어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영화 <아리랑>과 이 영화 주제가 <아리랑>과 함께 조선 영화계에서 보지 못한 센세이슌을 일으키었으니 지금도 그 ‘아리랑’ 노래 소리 들리지 않는 곳이 없고, 춤에도, 연극에도, 지금의 영화에도 이용되고 있음은 누구나 아는 일…”(조선일보, 1940, 2, 15. ‘걸작 아리랑 만들고 마음대로 살다간 나운규’) "아리랑의 민요가 혹은 무용화가 되고 혹은 영화화가 되었으나 극화가 된 것은 토월회의 금번 공연이 처음이라 하겠다. 첫째 제재를 거기에서 취한 것부터 매우 기민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름만이 얼마나 많은 흥미를 끄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사람으로 누구든지 친함을 가진 민요이다. ‘아리랑고개’ 조선을 상징하는 것이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 그것이 공리적으로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은 별문제라고 하더라도 ‘아리랑고개’는 마음 깊이 우리들에게 하소하는 바가 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이쯤은 어찌함인지 조선 땅의 모든 것과 빈틈을 발견할 수 없이 꼭 들어 맞는 감을 준다. 가장 조선 정조를 대표한 것이다.”(동아일보, 1929, 11, 26) 매우 의미있는 자료이다. 영화주제가‘아리랑’이 왜 ‘본조’라는 위상을 얻게 되었는가라는 배경을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최 선생도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했다. "그러면 서울대 교수로 가서 국악연구로 유명세를 얻는 장사훈 교수의 아리랑론이라고 볼만한 어떤 체계나 흐름 같은 것은 확인되지 않나요? 그게 궁금하고, 그 중에 본조아리랑을 어떻게 기술했는지가 궁금하네요.” 삼목은 책장에서 미리 빼 놓은 장 교수의 국악개론서 ‘국악개요’·‘한국음악사’·‘국악개론’·‘국악총론’을 내보이며, 본조아리랑에 대한 기록을 제시했다. "사실은 아리랑에 관한 글은 장교수님이 가장 많이 썼어요. 내가 확인한 것만 봐도 토막 글을 포함해서 5편이나 있으니까요. 이 시기에는 양주동 박사나 임동권 선생보다 더 많아요. 이 중에 앞에서 거론한 공편 ‘朝鮮의 民謠’ 이후에 초초의 단독 저서인 ‘國樂槪要’(1951년 정연사)를 보면 매우 의미가 있어요. 뭐냐면 이 책의 아리랑 대목은 3쪽 정도로 확대하여 거론하였는데 언급한 대상 아리랑은 문제의 ‘朝鮮의 民謠’와 같아요. 本調아리랑·新아리랑·아리랑세상·別調아리랑·긴아리랑·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 이렇게 9종이예요. 그런데 본조에 대한 해설이 이래요. 한번 비교해 봐요”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요새 우리가 부르는 아리랑과 같은 곡조이나 이 밖에도 밀양아리랑·진도아리랑·아리랑세상·별조아리랑·긴아리랑·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 등 그 종류가 많다.” 분명히 1951년 시점에서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은 같은 곡조로 널리 부르는 아리랑이라고 했다. 곧 1949년의 ‘朝鮮의 民謠’나 이 책의 본조아리랑은 곧 오늘의 본조아리랑과 같은 것으로 결코 K교수가 주장하듯이 헐버트 채보 아리랑(舊아리랑)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는 장 교수가 덕성여대 교수시절 본격적인 아리랑론으로 ‘민요해설 아리랑의 유래’를 1958년 ‘교통’ 44호에 발표했는데, 여기에서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총 7쪽 분량의 논고 중 해당 부분은 이렇다. "이 아리랑에는 이른 바 본조아리랑이라 하여 우리가 항용 듣고 부르는 아리랑이 있고, 그 밖에 밀양아리랑~ ” 1958년 시점에서 "우리가 항용 듣고 부르는 아리랑”이 본조아리랑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이 시기 헐버트 채보 아리랑(舊아리랑) 곡조가 항용 불리는 아리랑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오늘의 본조아리랑임을 말한 것이 분명하다. 장 교수의 일관된 본조아리랑관觀을 재확인 시켜주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이상을 들어 정리하면 이렇다. 즉, 성경린과 장사훈이 ‘본조’를 처음으로 언급한 문제의 ‘朝鮮의 民謠’ 중 ‘본조아리랑’은 영화주제가‘아리랑’으로 오늘의 ‘본조아리랑’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이후 장사훈 교수의 글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확인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영화주제가‘아리랑’에의 ‘서울아리랑’ 명명 부여는 이미 헐버트 채보 아리랑(구아리랑)을 ‘京卵卵打令’(서울아리랑타령)으로 음반화 하였기 때문에, 이 역시 불가한 것이다. 그러므로 K교수나 이에 동조한 Y교수의 주장은 오독과 오판임으로 폐기되어야 한다. 세 사람의 두 시간 정도의 논의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문제는 K교수와 Y교수의 주장이 이상과 같은 오독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서울아리랑’의 특화를 위한 목적에서 한 주장인지를 판단하기가 어렵고, 두 전직 회장의 발언이 학술회의에 함께한 회원들이 어떻게 수용될지도 문제이다. 기 선생의 논문이 이를 잠재울 수 있을지가 더욱 궁금하다. 2023년 2월 말쯤 아리랑학회 정기 학술회의에서 발표한다니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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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本調가 뭐야?”(상)삼목 作 "朝鮮에도 民謠가 있다. 四千年의 오랜 歲月을 두고 이 겨레의 착한 性情이 純一하게 發露한 게 곧 우리의 民謠이다.” "朝鮮民謠 중에서 가장 널리 普及된 것으로 적어도 朝鮮 땅에 발을 디디고 있는 사람이면 이 노래(아리랑)를 모르지 않는다.” 겨레의 착한 성정으로 부르는 것이 민요이고, 그 민요 중에 모두가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이라고 하였다. 이는 1949년 발행된 ‘朝鮮의 民謠’ 공편자共編者인 성경린成慶麟과 장사훈張師勳의 인식이다. 전자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로 이미 ‘조선의 아악’(1947), ‘조선음악독본’(1947)을 지은이요, 후자 역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수료한 거문고 연주자이다. 그리고 함께 현 KBS의 전신인 경성방송국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런 이력으로서 당시로서는 민요나 아리랑뿐만 아니라 국악 전반에 대한 해석권解釋權을 갖고 있는 분들이다. 그런데 최근 한 학회에서 ‘‘朝鮮의 民謠’를 들어 기존의 아리랑 명칭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여 논란을 촉발시킨 바가 있다. 이로서 삼목의 ‘한국의 아리랑문화’ 외에서는 거의 인용되지 않았던 이 책의 아리랑 언급이 오랜만에 소환되기에 이르렀다.(문제를 제기한 이도 삼목의 책을 보고 반론으로 제기한듯하다.) 2022년 10월 초, 기奇(찬숙) 선생의 통화음이 다급했다. "혹시 학술회의 소식 들으셨어요? 방금 끝났는데요. K교수가 논평하면서 '본조아리랑'은 주제가 아리랑이 아니라, 1894년 헐버트 채보 아리랑이고, 주제가 아리랑은 '서울아리랑'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는 얘깁니다. 그 근거가 제가 듣기로는 성경린과 장사훈 공편 ‘조선의 민요’를 거론한 것 같아요. 그런데요~?” 기 선생이 다급한 어투와는 다르게 조금은 미심쩍은 투로 말끝은 흐렸다. "그런데라니요? 그게 뭐요? 또 뭐가 있었나요?” 기선생이 이 본조아리랑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한 것은 바로 한국민속박물관이 펴낸 ‘한국민속문학사전’ 표제어 ‘본조아리랑’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당시 삼목과 함께 ‘아리랑 스터디그룹’에서 많은 논의를 한 주제로, 다양한 전거典據를 들어 스터디했던 내용이다. 그런데 그 사전 편찬의 책임자 중 한 분이 뒤늦게 자신이 참가한 사전의 내용과 다른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해당 항목의 본문 일부는 이렇다. "본조(本調)아리랑은 주제가‘아리랑’으로 출발하여 ‘신민요 아리랑’, ‘유행가 아리랑’으로 불리다가 ‘신아리랑’ 또는 수식 없이 ‘아리랑’으로 부르게 된 것을 말한다. 본조아리랑은 성경린·장사훈이 최초의 민요 개론서 ‘조선의 민요’에서 처음 사용된 명칭이다. ‘본조’는 1940년대 말 국악계에서 사용한 용어로, 음악적 원류(源流)나 본류(本流)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랑의 확산 장르에서 본(本)·원(元)·중심(中心)이라는 의미로 불리는 용어이다.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이라는 의미에서 다른 아리랑과의 변별을 위해 1960년대에 일반화된 것이다.”(기미양, 본조아리랑,한국민속문학사전) 분명히 본조아리랑은 1926년 개봉된 나운규 감독 영화‘아리랑’의 주제가를 지칭함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그 ‘본조’의 의미는 음악적 본류의 의미가 아니라 ‘각 장르 아리랑 표제 작품에서 중심적으로 사용하는 아리랑을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는 지금까지의 학술상에서나 공연분야에서 일반화된 사실이다. 그런데 이를 틀렸다고 한 것이다. 삼목은 기 선생이 말끝을 흐린 것이 마음이 쓰여서 다시 되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 또 뭐가 있어요? K교수가 몇 년 전 갑작스럽게 서울시의 지원을 받는 학술대회에서 서울아리랑으로 하자는 주장은 있었는데, 또 다른 문제가 있어요?” 주장한 바가 있는 거 아녜요? "예 그렇긴 한데요. 이번에는 좀 감정이 실렸어요. 100% 정확한 워딩은 아닌데, M학회가 있는 한 이는 바로잡아야 한다는 거예요. 논리나 팩트에 의한 학술적 성과가 아니라 마치 M학회가 유권해석을 가져야 한다는 식으로요. 그리고~” "또 뭐가 있어요? 하필 내가 전화를 받느라 컴퓨터 이어폰을 귀에서 빼고 있어서 듣지 못했는데. 참. 뭐예요?” "예, 그에 대해서 논평자로 참가한 Y교수도 동의를 했어요. 두 전직 학회장이 이런 식의 발언을 한 것은 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그렇다. 우선 감정적인 부분은 두고, 팩트를 다시 체크하기로 했다. 삼목은 다시 서고에 들어가 해방 후에 간행된 국악개론서들에서 아리랑 언급 부분들을 체크했다. 특히 ‘본조아리랑’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성경린·장사훈의 민요 사설집 ‘朝鮮의 民謠’를 찾았다. 이 책의 일러두기에는 참고한 서명이 나오는데, 속가집·조선민요선·가곡보감·가요집성·가요집 등에서 사설을 간추렸다고 하였다. 그리고 기존의 민요집이 사설 중심의 것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음악적 창을 주안主眼으로 본 가사, 후렴, 구호 등 확연하게 구별하여” 수록했다고 밝혔다. 여기서 분명히 전제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기 선생의 집필에서 분명히 한 것이 이 가사집에서 ‘본조아리랑’ 명칭을 처음 사용했다고 한 것이지, 이 책의 ‘본조아리랑’ 기록(해석과 사설)이 반드시 본조아리랑임을 밝힌 최초의 기록이란 뜻은 아니다. 주관처에서 원고 내용을 줄여달라는 요청에 의해 그 부분은 삭제 된 것이라고 한다. 이제 실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자. 이 책의 첫 아리랑은 경기도편의 本調아리랑·新아리랑·아리랑세상·別調아리랑·긴아리랑, 5편이다. 이어 강원도편의 강원도아리랑·정선아리랑, 평안도편 긴아리·경상도편의 밀양아리랑, 전라도편의 진도아리랑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본조아리랑과 신아리랑, 그리고 긴아리랑이다. 우선 문제의 세 편의 사설과 해설을 그대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本調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이요/ 아리랑 띄여라 노다가세 ①이씨의 사촌이 되지 말고/ 민씨의 팔촌이 되려므나 ②남산 밑에다 장충단을 짓고/ 군악대 장단에 받들어 총만 한다 ③아리랑고개다 정거장 짓고/ 전기차 오기만 기다린다 ④문전의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쪽박의 신세가 웬말이냐 ⑤밭은 헐려서 신작로 되고/ 집은 헐려서 정차장되네 ⑥말 깨나 허는 놈 재판소 가고/ 일 깨나 허는 놈 공동산 가네 ⑦아 깨나 낳을 년 갈보질 가고/ 목도 깨나 메는 놈 부역을 간다 ⑧신장로 가장자리 아카낢은/ 자동차 바람에 춤을 춘다 ⑨먼동이 트네 먼동이 트네/ 미친님 꿈에서 깨여나네 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新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만 가고/ 인간의 청춘은 늙어만 간다 ②성황당 까마귀 깎깍짖고/ 정든님 병환은 날로깊어 ③무산자 누구냐 탄식마라/ 부귀와 빈천은 돌고돈다 ④감발을 하고서 주먹을 쥐고/ 용감하게도 넘어간다 ⑤밭 잃고 집잃은 동무들아/ 어데로 가야만 좋을가보냐 ⑥괴나리 봇짐을 짊어지고/아리랑고개를 넘어 간다 ⑦아버지 어머니 어서 오소/북간도 벌판이 좋답디다 ⑧쓰라린 가심을 움켜잡고/ 백두산 고개로 넘어간다 ⑨감발을 하고서 백두산 넘어/ 북간도 벌판을 헤메인다 ⑩원수로다 원수 로다/ 총가진 포수가 원수로다 ⑪일간 두옥의 우리 부모/생각할수록 눈물이 난다 ⑫아리랑고개는 얼마나 멀게/ 한번 넘어가면 영 못오나 ⑬우리의 성립 군아/ 뜻과 같이 성공을 하세 긴아리랑 후렴-아리랑 아리랑 아라리로 구료/ 아리랑 고개로 나를넘겨주소 ①만경창파 거기 둥둥 뜬배/ 게 잠깐 닻주어라 말 물어보자 ②기차는 가자고 왠 고동을 트는데/ 님은야 팔을 잡고 낙루만 한다 ③우연히 저 달이 구름 밖에 나더니/ 공연한 심회를 더욱 산란케한다 ④달도 밝고 별도 총총한데/ 임은 날 버리고 왜 아니 찾노 ⑤물속에 뜬 달과 낭군의 맘은/ 잡힐 듯 하고도 내 못 잡아 ⑥누구를 보고자 이 단장했나/ 임가신 나루에 눈물비 운다 이상 세 편에서 해설이 있는 것은 두 편이다. 그런데 이 중 유의미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본조아리랑-"서울의 것을 본조아리랑 그 밖에 밀양아리랑~ ” 긴아리랑-"아리랑에서 가장 일쯕이 생긴 거라고 하지만~ ” 이상과 같이 매우 소략하다. 여기에서 ‘본조아리랑’의 정체성을 발견하기란 부족하다. 그 이유를 짚어 보자. 첫째는 본조아리랑의 해설에서 단지 서울에서 불리는 아리랑이란 정도일뿐이라고 했고, 긴아리랑 해설에서는 헐버트 채보 아리랑 즉 구아리랑 또는 京卵卵打令(서울아리랑타령)의 존재를 무시하고 가장 오랜 긴아리랑이 가장 오랜 것이라고 했다. 정리하면 전자는 지역적 분류 정도이고, 후자는 분명한 오류인 것이다. 둘째는 제시된 本調아리랑과 新아리랑의 사설에서도 '구아리랑'인지 '본조아리랑'인지의 정체성을 명료하게 구분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이는 奇선생이 본조아리랑 사설로 제시한 것을 대비하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본⑩-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 난다 청천 하늘에 별도 많고/ 우리네 살림살이 말도 많다 본⑪-풍년이 온다네 풍년이 와요/ 이 강산 삼천리 풍년이 와요 신①-산천에 초목은 젊어나 가고/ 인간에 청춘은 늙어가네 본④-문전에 옥답은 다 어디로 가고/ 동냥의 쪽박이 왠말인가 이상에서 대비한 바와 같이 ‘긴아리랑’을 빼고는 사설만으로는 독자성을 갖지 못함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이 책의 첫 자료 ‘본조아리랑’은 명칭만 본조아리랑이지 실제는 구아리랑과 또 다른 아리랑 사설들의 모음일 뿐이다. 물론 후렴과 일부 사설들이 ‘구아리랑’ 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온전하지는 않은 것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이 명칭들은 특별한 인식 없이 편의적으로 부여한 것일 수밖에 없다. 즉, ‘신’이나 ‘긴’에 대해 변별로서의 ‘본조’를 부여한 것일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K교수가 이 책을 보고 ‘구아리랑’(헐버트 채보 아리랑)을 ‘본조’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그 곡명을 ‘서울아리랑’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 살폈듯이 이 책이 명명한 본조아리랑은 그 정체성이 불분명한 것임으로 타당성이 없다. 또한 음반 역사에서는 이미 ‘구아리랑’을 ‘서울아리랑’(‘京卵卵打令’/1913년 N6170/1928년 V49047)으로 명명하였음으로 주제가‘아리랑’을 본조아리랑이 아닌 서울아리랑으로 명명해야 한다는 것도 부당한 주장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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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最古 아리랑(?), ‘만천유고 아로롱’삼목 作 청계천 8가 ‘수蒐’ 다방 계단을 오르는 삼목의 발걸음은 기대에 차서 유쾌하기까지 했다. 1970년대부터 90년대까지 소위 ‘나까마’(무허가 중간 매개자)로 최고의 명성을 갖고 있는 김연창 선생으로 부터 1년간이나 벼르던 자료를 전달받기로 했기 때문이다. 외부인 연람을 규제한 데다 이미 등록 당시부터 ‘특수 귀중자료’로 지정한 것을 복사한 것이다. 김연창 선생은 ‘연박사’로도 불린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어써 오세요”라는 낭랑한 유마담의 인사와 함께 특유의 검은색 가방을 멘 김선생 미소를 띠며 들어왔다. 앉기도 전에 X자로 맨 가방을 벗으며 생색을 냈다. "에이 세상에 도둑질하기보다 더 어려우니, 원 참. 매산梅山(김양선) 목사님만 계섰어도 이렇게 고생을 안해도 됐을 텐데, 그래도 김형이 끈질기게 매달려서 1년 만에 복사를 했우다. 자~” 제목 ‘農夫詞농부사’와 중간중간에 ‘啞魯聾아로롱’이 분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A4 용지 3쪽 분량. 가는 붓글씨로 달필임이 느껴진다. 말로만 듣던 ‘최고의 아리랑 (아로롱) 기록’이다. 삼목에게는 많은 생각들이 밀려왔다. 우선 낼 아리랑 사설집에 수록할 수 있다는 충족감은 물론, 이의 해석이 곱씹어지기 때문이다. 이에 연박사는 삼목을 어지럽히는 얘기를 이어갔다. "김형이야 잘 모르겠지만, 우리 같은 선수들이 보기에는 깜짝 놀라기도 했지만, 이상한 점도 있어. 뭐냐 하면 다산 정약용이 이승훈이란 천주교사 개척 인물의 저작을 정리한 ‘만천유고蔓川遺稿’ 같은 깜짝 놀랠 자료 12종을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했고, 또 왜 전문공개를 꺼리느냐는 의문이야. 1967년 가톨릭신문인가 하는 신문에 공개했을 때 본 이들이 알음알음으로 전한 내용이거든. 아리랑이 있다는 것도 그렇게 알려진 거 일 뿐야.” 삼목에게는 김 선생의 이어지는 얘기가 잘 들리지 않았다. 김양선 목사에게 좋은 자료를 많이 양도했다는 등등의 얘기가 이어졌지만. 그러나 삼목의 머리속에서는 우선 ‘경자춘庚子春’이란 간지干支를 계산하여 만천 이승훈蔓川 李昇薰(1756~1801)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기 4년 전부터 지은 시를 연대순으로 배열한 것이고, 25세이던 1780년에서 27세인 1782년까지 3년간 지은 것이란 해석. ‘아로롱啞魯聾’이란 어휘가 후렴으로 있는 이 시편으로 가치가 엄청나다는 생각이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아리랑 역사에 어떻게 자리매김시킬지. 이런저런 생각뿐이었다. 필사본이긴 하지만 분명 아리랑 기록 중 최고最古의 자료이기 때문이다. 이 ‘농부사’는 2년여의 탈초 작업과 번역을 거처 1986년 발간한 ‘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현대문예사 간)에 수록했다. 책머리의 첫 사진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그리고 번역문은 261~262쪽에 수록했다. 삼목이 가장 힘들게, 그러면서도 가장 뜻깊은 자료로 수록한 것 중의 하나다. 이 책은 고은, 박재삼, 나운영, 김연길 같은 아리랑 이해가 깊은 이들과의 간담회도 수록하는 등 성의 있는 편집을 한 아리랑 사설을 조사, 수집한 단행본으로는 첫 책이다. 원문의 일부를 사진판으로 수록하고 번역 전문을 게재한 것은 이 책이 처음이다. 곡명에 대한주註는 ‘庚戌年里農請書農旗故作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이라고 병기하여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와 경술년(1790년) 평택현감 재직 시 농부들의 농사 현장에 감화를 받아 지은 작품임을 밝혔다. 원문 대조를 하고 시인 박재삼 선생 등에게 자문을 받아 완성하여 수록한 번역문은 이렇다. 농부사農夫詞-아로롱 아로롱 어히야啞魯聾 啞魯聾 於戲也 신농후직(神農后稷)이 처음 밭을 갈고 김을 매니 민생(民生)을 그 근본으로 삼았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잠깐 말하노니 우리의 모든 짝을 부르세 啞魯籠 啞魯籠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생을 힘써 길러 수고로워도 개탄하지 않을세 이윤같은 성인도 유신 땅에서 밭을 갈았고 도연명같은 처사도 전원으로 돌아 갔다네 旗들어라 旗들어라 북과 징소리가 행하는 마을 동문으로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태평만사가 농부의 마음이로다 밭을 갈고 풀을 뽑는 것은 공이 이루어지는 것일세 호미 드러라 호미 드러라 한결같이 앞을 향하여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아침에 윗 뜰에서 김을 매고 저녁에 들에서 떠나 온다 들북과 삿갓이 하늘에 가득하니 비바람도 홀로 근심이 없도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슬픈 노래를 그대는 하지 마소 어히야 세상 일이 어느 곳을 연유하였던가 한낮이 되니 안주인은 밥을 가져오는도다 아 아 농사를 권하는 벼슬아치는 언제 돌아왔을까 旗세워라 旗세워라 그대에게 돌아와 술 삼배를 드리노라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배를 두드리며 흥겹게 노래 불러 즐겨보세 녹두잎 바람에 날리니 일기는 상쾌하고 벼꽃이 물에 젖으니 들녘이 풍요롭다 호미 씻어라 호미 씻어라 옥같은 산이 스스로 조수에 비치어 붉도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옛 곡조로 새로운 소리 섞어 부를 때 곡식 낱알 하나하나 천신만고 끝에 얻으니 가색의 어려움을 아는 사람 적을세 징과 북을 울려라 징과 북을 울려라 들밭 긴 이랑 날은 더디고 더디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이해가 다하도록 경영함이 이 한때로다 농사짓기 어려운 땅이라도 때때로 이용하여 내 직분을 다하고 비탈밭 밭갈이는 천옹의 책임이라 旗 내려라 旗 내려라 가을의 결실이 나의 가색과 동일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군자를 크게 기른 것은 누구의 공인고 소떼와 풀꽃에 청산이 저물고 오리와 따오기 있는 모래밭에 이슬이 차구나 호미 너어라 호미 너어라 황혼에 달빛이 깃대에 가득하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석양에 농사 이야기 술 싣고 돌아오네 악기를 치며 김을 매는 두레풍장 모습이다. 기세배나 호미씻이 같은 농사 유풍이 그려졌다. 유학자적 입장에서 권농勸農 의식이 지배적이며 농사 과정을 낭만적으로 그렸다. ‘啞魯聾 啞魯聾 於戲也’가 각련 끝에 반복 배치된 것으로 보아 후렴구임이 분명하다. ‘아리랑 아리랑 얼싸’의 음차音借인 것으로 尹善道의 ‘漁父四時詞’에 쓰인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같은 형태다. 이 작품이 1790년 작임을 전제한다면, 유명인사의 ‘아리랑’ 관련 한시 最古작이며, ‘아로롱’에서 ‘아리랑’까지의 어휘 음전音傳 현상을 보여주는 중요 자료이다. 경기도 평택일대의 농요에서 아리랑계 노래가 불렸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이후 이 기록은 삼목의 다른 저서에서는 물론, 여러 글에서 재인용되었고, 다른 연구자들의 글에서 재해석되기도 했다. 이런 탓인지 2010년대 들어 경기도 천주교 성지에는 ‘아리랑노래비’가 세워지기도 했다. 천주교와 아리랑 관계, 토착화 과정의 사례로도 해석되기도 한다. 이는 대종교와 아리랑과 같은 관계이다. 그런데 2014년 여름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너무나 뜻밖의 소식이었다. "선생님 저서에 이승훈의 만천유고 소재 아리랑 자료가 가짜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습니다. 참고하세요. 제 학위 논문도 수정을 할 수밖에 없네요. 참 어이가 없네요.” "예? 가짜라니요? 만천유고가요? 농부사 아리랑도요?” "예, 농부사도 그렇다는 거지요. 가짜인지 위작인지 아직은 분명하지 않으나 어떻든 문제가 제기 됐네요. 저도 좋은 자료라고 생각하여 전문을 분석하여 논문에 반영했는데, 삭제해야 할 형편이네요.” 청천벽력이었다. 전화를 한 분이 누군지도 묻지도 못하고 끊었다. 낙담했다. 그날 거의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급한 김에 두 정거장을 걸어가 가판대에서 주요 일간지를 샀다. 그런데 산 신문에서는 관련 기사가 없었다. 궁금증은 여전했다. 그래서 교계 학술부분에 도움을 받는 기독교문사 이덕주 교수에게 문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또 의외의 말을 들었다. "예, 어제인가요? 아니면 며칠 전에 윤민구 신부 그분이 발표한다고 한 것이 있어요. 이승훈의 ‘성교요지’는 사기다 뭐 이런 것이지요. 그러니 김 선생이 끔찍이 애지중지하던 그 아리랑 기록도 문제가 되지요. 하긴 이 뿐입니까? 박사학위 논문이 6편이나 나왔잖아요. 그게 더 심각하지요. 정확한 일자는 다시 확인하고 알려드릴게요. 그런데 김선생이 아직 모르고 있었을 텐데 사실은요 문제가 제기된 적이 있어요. 2003년에 이미 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에서 김양선 목사가 1930년대 수집해서 보관하고 있는 관련 자료는 모두 위작이란 판정을 내렸던 거예요. 다만 공론화하지는 않았을 뿐이지요.” 삼목으로서는 자괴감이 들었다. 나름으로는 학계 모임에 그래도 쌀쌀 거리고 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10여년 전에 가짜 판정이 났다는 사실을 이제야 듣다니. 이튿날 이덕주 목사의 주선으로 윤민구 신부가 발간한 ‘초기 한국 천주교회사 쟁점 연구’를 받았다. 부리나케 해당 부분을 읽었다. 기가 막혔다. 요지는 ‘사학징의邪學懲義’(1801년 천주교 박해에 관한 정부 측 기록을 수집하여 정리한 천주교서)에 ‘만천유고’가 없다는 문제제기 정도가 아니라 이승훈의 저작으로 알려진 자료들이 모두 타인의 작이며, 교묘하게 관련 인물들과 지명 등을 바꿔 넣어 꾸민 것들로 특히, 가장 중요한 ‘성교요지聖敎要旨’는 이렇게 단정하고 있었다. "성교 요지는 중국에서 활동한 미국 개신교 선교사 윌리엄 마틴이 1897년에 쓴 ‘쌍천자문(雙千字文)’의 일부를 베낀 위작이다. 문건의 전체 용어 등으로 보아 1930년대 전후 시점에서 위작한 것이다.” 아! 그러면 그동안 우리가 만찬유고의 발문을 정양용이 쓴 것으로 믿고 인용한 이런 구절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강과 산은 옛 그대로이고 푸른 하늘과 흰 구름도 그림자 하나 변하지 않았으나 옛 선현과 벗은 어디로 갔는고. 나무와 돌의 신세가 되어 세상에 붙이지 못하고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중, 슬프다! 모두 뜻밖에 세상을 떠났구료! 만천공(蔓川公)의 행적과 아름다운 글이 결코 적지 않으나, 불행히도 불에 타 버리어 한 편의 글도 얻어 보기가 어렵더니 천만 뜻밖에도 시고(詩稿)와 잡록(雜錄)과 몇 조각의 글이 남아 있기에 내 비록 졸렬하게나마 초(抄)하여 기록하고 만천유고(蔓川遺稿)라 이름하였다.” 정약용이 강진 유배지에서 쓴 발문이란 믿음이 깨진 것은 엄청난 충격이다. 그러나 이 충격은 이어졌다. 한양대 정민 교수도 이에 확대된 논지를 내놓았다. 한시 70수가 수록된 ‘만천유고’를 양헌수梁憲洙 장군의 문집 ‘하거집(荷居集)’에서 베낀 "악마의 편집”이라고 한 것이다. 이어 서강대 서종태 교수도 또 다른 시편은 홍석기洪錫箕의 ‘만주유집(晩洲遺集)’ 등에서 옮긴 시들이라고 밝혀냈다. 연구자들은 이를 위작한 이는 단순히 이승훈과 정양용이란 이름을 팔아 돈을 벌려고 지난한 작업을 할리가 없었다고 보았다. 그 배경은 1930년대 유난히 기승을 부렸던 유사종교 집단과 무관치 않다고 보았다. 토착 신앙뿐 아니라 메시아니즘의 치장을 두른 ‘정감록鄭鑑錄’ 계통 신앙 전파 세력과도 모종의 관련이 있으리라고 분석했다. 그 사례로 1930년대 대종교 계통의 ‘규원사화(葵園史話)’와 ‘환단고기(桓檀古記)’, 유교 쪽의 ‘화해사전(華海師傳)’같은 위서들의 출현을 든 것이다. 이들은 이제껏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있어 심각성을 경고하였다. 당연히 ‘농부사 아로롱’도 이승훈의 소작일 수가 없고, 그 해악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입론과 논거가 타당한 연구결과이니. 그렇다면 ‘농부사 아로롱’에 대한 해석을 수정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삼목은 오랜 시간 이 자료의 처리를 놓고 고심해야 했다. 그리고 새로 발행할 ‘우리 아리랑 문화’에 새로운 해석으로 정리를 하기로 했다.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작품의 작자를 이승훈이 아닌 ‘미상未詳’으로, 시기를 경술년 1790년이 아닌 20세기 초로 한다. 둘째, 작품성을 인정하여 두레풍장 유습이 연행되던 20세기 초 농부와 농사를 그린 작품으로 본다. 셋째, ‘아로롱’이란 어휘는 ‘아리랑’의 음차가 아니라 ‘아리랑’이란 어휘로 정리되는 한 과정의 하나로 본다. 아리랑에 심취하여 고은선생, 박희준 형 등과 ‘아리랑기행단’을 꾸려 전국을 답사하고, 직원 4명과 함께 ‘한국방송출판정보센타’의 문을 열고 문헌 수집과 조사에 매달렸던 시기, 삼목의 열정의 일부는 ‘만천유고’ 수록 ‘농부사 아로롱’에 닿아있다. 의외의 사연과 충격을 담고.... 그런데 세월이 지나 수다방 유마담의 얼굴도 흐릿하고, 최고의 나까마로 위세를 부리던 김연창 선생도 위작 자료를 거래하다 전과자로 생을 마쳐 거론하기를 꺼리는 지금, 불현듯 복사본을 넘겨주던 때 한 말이 다시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40여 년이 지나서야 늦게 공개를 하고, 전문 공개를 꺼리는 이유가 뭐요.” 혹시, 김연창 선생은 이미 이 자료가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지는 않았을까? 이 말로 내게 암시를 준 것은 아닐까? "가짜를 판별하는 능력은 가짜를 만드는 능력을 동반한다”는 말처럼, 김 선생이 선수이기 때문에 이미 알만했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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