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삼목 作
1984년 초, 삼목은 경기도의 한 사립중고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당시 86아시안 게임 개최가 발표되면서 ‘한국인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담론 속에서 아리랑, 김치, 태권도, 호랑이 같은 민족 상징에 대한 의미화 논의가 문화계 전반에 화두가 되어 있을 때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삼목도 열열하게 아리랑 자료 수집과 자라매김에 매진하고 있었다. 삼목이 새 학기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들어서 출석부를 위치시키고 돌아설 즈음, 교무주임이 전화 받으러는 소리를 듣고 수화기를 건네 받았다.
"아 김씨, 나 장승백이 김이요. 오늘 서울에 오나요? 아리랑 자료가 나왔어요. 어, 비싸서 권하기는 좀 뭐 한데, 이게 만주국에서 나온 귀한 책이에요. 오늘을 넘기면 돌려주어야 해서 결정을 해야 하는 거요. 가격은~”
삼목은 어차피 토요일이라 서울 집으로 갈 계획이었기에 부리나케 가방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갔다. 대지극장 앞에서 내려 다시 노량진행 버스를 타고 진오서적(당시 고가의 문학서적 위주로 판매하던 고서점) 근처 다방에서 여차저차한 사정을 들어 월급 날 값기로 하고 양도를 받았다. 삼목으로서는 여러 번 망설이고, 많은 생각 끝에 한달 원급에 반을 더한 가격으로 샀다.
문헌 소재 ‘아리랑’은 거의 부속적으로 존재한다. 표제標題가 ‘아리랑’인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제가 다른 컨텐츠 속의 하나로 끼어있거나 일부로 언급될 경우가 대부분이다. 끼어있는 경우는 잡지 속에 수필이나 시나 단편 소설 한편이 들어있는 경우이고, 일부로 언급 되는 경우는 어떤 이의 수필 속에, 회고기 속에 에피소드로, 또 아니면 ’아리랑을 불렀다‘ 정도로 언급된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것을 입수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전체 값을 치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매우 억울한 여건을 감수하고 값을 치르는 것이다.
삼목이 구입한 책 중에 거의가 이런 경우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억울하게 값을 치루고 산 것이 바로 ‘장승백이 김선생’(고서 중개인 중에는 매우 신사다운 분으로 일본어 번역에 능통한 분, 1990년대 말 작고)에게서 구입한 ‘半島史話와 樂土滿洲’이다. 1943(강덕10)년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에서 만선학해사滿鮮學海社가 발행한 책이다. 이 출판사는 당시 만주국의 지원으로 발행 되던 ‘만선일보’ 필진들과 만주국 조선인 문인들이 정주하던 곳이다. 시기상으로 한반도에서나 만주에서 낸 책으로는 순 한글로 조선과 만주와의 관계사 중심으로 구성된 특별한 책이 아닐 수 없다.
목차 첫머리는 대일본제국총리대신 장경혜, 중화민국정부주석 왕정위, 前조선총독 남차, 만주국 총리대신 장경혜, 사회 지도자 윤치호의 서문을 필두로 한 148항목의 방대한 책이다. 내용에서는 오세창의 기념 휘호를 비롯하여 역사학자 이병도, 만주건국대교수 최남선, 법학자 유진오, 작가 이광수, 민속학자 고유섭, 시인 이은상, 음악학자 함화진, 기자 차상찬, 신학자 채필근, 시인 윤해영 등의 그과 작품을 수록한 총 694면, 오늘날의 A3 싸이즈 대형 판형 책이다.
이런 책에 ‘아리랑’이 들어있었다. 속된 말로 148항목 중 1편의 시속에, 694면 중 단 한 면에, 끝에서 두 번째 쪽에서, 그것도 딸랑 ‘14줄 중에 아-리-랑’ 3자가 들어있을 뿐이다. 시 ‘樂土滿洲’, 윤해영尹海榮 작품이다.
낙토만주樂土滿洲
一五色旗 너울너울 樂土滿洲 부른다
百萬의 拓士들이 너도나도 모였네
우리는 이 나라의 福을 받은 百姓들
希望이 넘치누나 넓은 땅에 살으리
二松花江 千里언덕 아지랑이 杏花村
江南의 제비들도 봄을 따라 왔는데
우리는 이 나라의 흙을 맡은 일꾼들
荒蕪地 언덕우에 힘찬 광이 두르자
三끝없는 地平線에 五穀金波 굽실렁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
우리는 이 나라의 터를 닦는 先驅者
한 千年 歲月後에 榮華萬歲 빛나리
제3절 2행 "노래가 들리누나 아리랑도 興겨워”에서 ‘아리랑’이 나온다.
"이렇게 작품의 표제에서도 아니고 시행의 한 어휘로 나온다. 이것도 아리랑 자료로 취급할 수 있나? 또 가치가 있나? 윤해영은 어떤 사람인가?”
삼목이 이 책을 살 때 수 없이 머리 속으로 되물었던 질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목은 거금을 주고 구입했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미군정청 발간 독도 자료 수록 잡지 창간호와 사운 이종학 선생과 맞바꾼 ‘解放歌謠’라는 노래책 속 윤해영 작사 ‘滿洲 아리랑’의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감적으로 윤해영이 ‘아리랑’을 일회적인 시어로만 인식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시인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1947년 발간된 ‘해방가요’의 ‘滿洲 아리랑’은 이렇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一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二 말발굽 소-리 끈어지면
동-리 삽살개 잠이 드네
三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윤해영 시, 김기진 작곡, 백년설(1915~1980) 노래로 태평레코드사에서 1941년 12월에 음반으로 나왔다. ‘나그네 설음’과 ‘번지없는 주막’으로 명성을 날린 백년설의 유명세로 보면 만주와 한반도에서 ‘아리랑 만주’도 널리 불렸음이 짐작된다. 그런데 두 편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묘한 감정에 빠져 들었다.
‘만주 봉천’, 삼목에게는 작은 아버지가 두 분 있었다. 어린 시절 설 명절이 되면 두 분이 사촌들과 함께 설을 지내러 서울에서 왔다. 3일 정도 들은 이야기들이지만 화로를 감싸고 듣던 대부분은 만주 봉천에서 살다 해방이 되어 평안도 남시(사촌 형 중에 ‘봉천’과 ‘남시’를 이름으로 갖고 있는데, 그 곳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란다.)를 거쳐 고향으로 돌아 온 이야기다. 삼목보다 여섯 살이나 위인 4촌 누이는 눈물을 훌쩍이며 듣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삼목이 또랑한 기억으로 담고 있는 것은 "왜놈들에게 속아서 만주로 간 거지”라든가 "그때 만주 신경은 지금 서울보다 더 좋고말고”라든가, "만주가 망하지 않았다면 일본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됐을거고, 설 쇠러 그 곳으로 왔을 것인데~ ”이다.
‘낙토만주’와 ‘만주 아리랑’, 두 작품의 여운이 묘했다. ‘속았다’와 ‘좋았다’로 읽혀지며 아리랑의 정서를 흔들었다. 이상한 이런 감정은 왜일까?(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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