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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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문학관” 그 정체성과 미래를 위하여전 문경문인협회 회장 이만유 지난 12월 4일 문경시 산북면 소재 문경문학관이 개관 3주년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지역 문화 창달과 문학 저변 확대를 위하여 사재를 들여 문학관을 설립한 것에 대해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문경문학관 설립을 계획할 때 지역 문인들에게 문경문학관이 개관되면 적절한 시기에 문경시에 기부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났는데도 아직은 그대로 설립자가 운영하고 있다. 그동안 지역 문학 진흥을 위해 다소 성과를 내었지만, 문학관 이름을 문경문학관으로 하는 것과 운영하면서 지역 문학회나 문인들과의 마찰과 갈등이 있는 등 문제점을 안고 있다. 설립 당시 시민들의 공공 소유 지명인 "문경”을 개인 문학관이 쓴다는 것에 대해 일부 지역 문인 등이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고, 이 문학관은 거기에 이름을 올린 개인들의 문학관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생존작가의 이름을 걸고 문학관을 세우는 것도 예가 없는 것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다(이곳은 13명 이름으로). 그 유명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라는 시를 쓴 국민시인 안도현 시인도 공개석상에서 내 생전에 내 이름으로 문학관을 세우거나 이름을 올리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개관할 때 "문경 문학의 빗장을 여는 사람들”이라는 구호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경문인협회가 창립된 지 50여 년의 역사가 흘렀고 문경에 살면서 문경을 노래하며 문경에서 문학 활동을 하신 문인들께서 50여 년 전에 이미 빗장을 열었고 그 후배 문인들이 대를 이어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해 왔는데, 지금에 와서 현재 생존해 있는 대다수 출향 문인과 소수 지역 문인의 사진과 이름을 걸고 마치 지금까지 문경에는 문학도 문인도 없는 것처럼 하며 문학 불모지 문경이라는 의미가 내포된 듯한 용어를 사용하여 울분을 자아내었고,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문인들께서 어려운 시기에 정말 문경문학의 빗장을 열고 열심히 문학 활동을 하신 분들이 많다. 아마, 이미 돌아가신 원로 문인들 혼령께서 저승에서 이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며 통곡할 것이라고 하는 이도 있었다. 소위 문경문학의 빗장을 열었다는 문학관에 걸린 생존 문학인 중 다수는 문경문인협회 회원도 아니고 외지에 살면서 문경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한 바가 없고 심지어 출향 문인들까지 참여하는 문경문인협회 문예지 "문경문학”에 원고를 청탁해도 잘 응해주지 않던 분들이 대다수였다. 물론, 이분들은 훌륭한 문인들이다. 그러나 이분들이 문경문학의 빗장을 열었다는 것은 어불성설 말이 되지 않으며 어이없는 일이다. 과연 이분들 말고 문경문학관에 문경문학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사진을 걸 문인은 없을까? 물론 문학관 이름에 문경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으면 설립자 개인의 것이니 누구의 사진을 걸던 누가 뭐라 하겠는가? 지역 유림에서 서원에 배향하는 인물을 모실 때 신중에 신중을 기하듯 문학관에도 문경을 대표하는 문인을 선정할 때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고 합리적인 잣대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선정해야 하는데 몇몇 추진위원들이 선정했는지 설립자가 임의로 선정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무형의 가치를 지닌 문학을 누가 어떤 기준으로 저울에 달아 좋다 나쁘다를 구분 선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매년 시행하는 문경문학상에도 문제가 있었다. 문경문인협회가 주관하고 문경문학관 설립자가 상금을 후원하였는데 지난해 문경문학상 시상식 개최 후 보도자료를 보면 이 사업이 문경문학관 사업으로 보도가 되었다. 슬쩍 주인이 바뀐 것이다. 그래서 이를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였더니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편이 갈라지는 등 이로 인해 문경문학회가 혼란과 갈등으로 풍비박산의 위기에 처했다. 문학이 무엇인가. 문학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는 문인들이 스스로는 물론이고 시민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야 하겠는가?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지냈는데 이 무슨 변고인가. 남을 돕거나 후원을 하는 사람은 남이 모르게 하고 앞에 나서지 않고 뒤에 있어야 빛이 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 지역 원로 문인께서 문경문학관의 미래를 걱정하여 이미 기부하겠다는 약속도 있었고 개관한 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는 문경시에 기부하시던가 법인화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는 건의성 의견도 설립자에게 제시한 것으로 안다. 결론적으로 문경시민의 공유, 무형문화자산인 "문경”이라는 이름을 가진 "문경문학관”을 개인이 계속 소유하고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비록 개인이 사비로 설립했다 하더라도 문경이라는 이름을 쓴 이상 사유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미 문학관 2층에 설립자의 조상인 퇴경당 권상로의 유물 등으로 전시실이 개설되어 있고, 12월 4일 행사 시 설립자의 대형 석재 시비 제막식이 있는 등 사유화가 진행되고 있다. 이에 문경문학관의 미래를 위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결단이 필요하다. 그래서 해결책으로, 아래 3가지를 문경문인협회 전직 회장이며 사람 시민이며 문인의 이름으로 제안한다. 첫째, 약속한 대로 문경시에 기부한다. 둘째, 법인화한다. 셋째, 문학관 이름을 변경('문경'이란 명칭을 제거하고)한다. 이를 위한 문경문학관 설립자의 결단이 필요하며, 여의치 않으면 시민들과 문인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청회를 개최하고, 여론조사를 하던가 해서 이른 시일 내에 지역 현안의 하나를 원만히 해결하기를 바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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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고향만들기공동체, 북녘 음식 ‘꼬리떡’ 나눔 행사지난달 31일 내고향만들기공동체에서 용인시의 후원을 받아 고향음식체험 꼬리떡 만들기 행사가 근현대사미술관 담다 2층에서 진행되었다. 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내 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하고자 만들어진 단체이다. 지역주민과 이웃이 되기 위해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고향 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행사를 많이도 했다. 행사에 앞서 그동안 단체의 활동성과를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2020년 1월에 만들어졌으며 지역주민들과 협업하여 지역 답사 등 여러 활동을 했다. 경험을 기초로 올해 용인시와 남북통합문화센터의 후원을 받아 총 11회 고향음식을 만들고, 나누는 행사를 진행했다.앞으로 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내고향으로 만들기 위해 지역주민과 함께 함으로써 사회적 역할을 담당하는 활동을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 경제적, 정서적 자립을 이루고 사회에 유익한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누구나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여 마을활동가로, 봉사자로 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행사에는 그동안 꾸준히 후원해오신 분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떡은 우리의 오래된 문화로 떡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의례나 행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떡이다. 굿을 하려고 해도 떡이 있어야 하고, 개업을 하거나 이웃에게 인사할 때도 떡을 돌린다. 떡은 만들고 나누는 전통적 관습으로 지난 1일에는 ‘떡 만들기’ 문화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루 내고 쪄내고 삶은 과정이 번잡한 떡 만들기 중에서 꼬리떡은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고 맛과 멋을 동시에 낼 수 있어 선물해도 손색이 없는 떡 종목 중 하나이다. 가장 손쉽게 만들고 선물하기 좋은 것이 꼬리떡이다. 꼬리가 있어 꼬리떡이다. 꼬리떡은 익어가는 가을처럼 색의 조화로 운치를 더하는 떡 종류 중 하나이다. 쌀가루는 찰지게 반죽하여 모양은 잎사귀 모양으로 손으로 비벼 꼬리를 만든다. 반죽이 무르면 꼬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 거기에 문양이 새겨진 떡쌀을 박기도하고 동그랗게 말아 왕사탕 모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다른 떡에 비해 만들기도 쉽고 선물로 이웃에 나누어도 손색이 없다. 색의 조화를 넣어 멋을 내는 것은 결혼이나 의례 행사가 있을 때이다. 고향이 북쪽인 나에게 꼬리떡은 반갑고 익숙한 음식이다. 일상적으로 쌀가루가 아닌 옥수수 가루로 만들어 식으면 굳어져 꼬장떡이라 하기도 한다. 가루만 있으면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고 모양도 동글납작하게 만들어 세 손가락 도장을 찍기도 하고 잎사귀 모양으로 꼬리를 뽑기도 한다. 옥수수 꼬리떡은 쪄내지 않고 반죽하여 가마에 빙 둘러 붙인다. 김을 올리면 구수한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다 익었다 싶으면 떡을 떼어내는데 꼬리떡은 밑면이 과자처럼 바삭해있다. 불의 세기를 잘 조절하고 익어가는 냄새를 잘 알아야 맛있는 꼬리떡을 먹을 수 있다. 남쪽에서는 쌀가루로 만드는데 만들기도 쉬워 아이들도 따라서 체험해 볼 수 있다. 내고향만들기공동체에서는 2020년에 꼬리떡 만드는 행사를 어른과 아이와 같이 했고, 지난달 31일에도 꼬리떡 만들기 행사를 진행했다. 전통적인 관습이 있으므로 떡은 음식을 넘어 나눔과 배려, 정(情)을 주고받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남쪽의 생활은 살아있는 순간 모두가 선물이다. 받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고향 정서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적은 것이다. 고향에서 일상으로 만들었던 꼬리떡을 만들고, 나누어 모두가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해도 서럽다 아니할 것 같다. 가을 단풍이 향수를 자극하고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스치면 더욱더 그리운 사람들이 생각난다. 꼬리떡을 만들어 이웃과 이웃에게 나누고 싶어지는 계절이다. 뒤이어 꼬리떡 만들기 행사가 진행되었다. 꼬리떡은 고향에서 익숙히 해먹던 음식으로 남쪽에서는 색다른 음식이기도 하다. 재료와 만드는 방법은 같지만 떡에 꼬리가 붙어 있는 것이 다르다. 쌀가루가 귀하기 때문에 색깔의 조화가 있는 꼬리떡은 잔치상에나 오르고 일반적으로 옥수수가루로 만든다.떡을 담아보내는 봉투에 나눔의 정서를 공유할 수 있는 시가 씌여진 것이 이색적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 앞으로도 봉투에 시를 계속해서 인쇄를 해서 사용하려고 한다.내고향만들기공동체는 앞으로도 봉사와 체험 활동을 지속적으로 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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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한민족체험수기 대상,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1부)KBS라디오 한민족방송은 '제23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전'의 성인 부문 대상에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시의 박영자 씨(1951년생)를 선정했다고 30일 밝혔다.공모전은 북방지역 동포의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하고, 우리 말과 글을 보존해온 것을 격려하기 위해 1998년부터 매년 열리고 있다. 중국·러시아·독립국가연합(CIS) 등의 조선족·고려인·사할린 한인 등이 응모했고, 이 가운데 6개 부문 22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소속 한국어 교사로 활동하는 박 씨는 일제강점기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이중 징용을 당해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하고 타국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찾아가는 가족사를 담은 '3대에 걸친 어머니의 약속'으로 상을 받았다. 박 씨는 수기에서 70여년이 지나서 우연한 기회에 오사카에 묻히신 외할아버지 묘를 찾게 돼 70년만에 외할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게 된 사연을 소개했다. 박 씨는 "사할린에 들어와서 뿌리를 내린 밀양 박씨 가문의 영광이지만, 동시에 강제징용 역사를 지닌 사할린 한인의 이산의 아픔을 위로하는 상"이라며 "이중징용으로 일본 탄광에 끌려갔다가 사할린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 현지에 묻힌 외할아버지에게 이 상을 바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한민족방송은 올해 코로나19로 별도 시상식을 거행하지 않고 수상자에게 바로 전달하기로 했다. 수상작은 KBS라디오 홈페이지에 공개된다. 다음은 수상작을 3부로 나누어서 연재한다. 이산(Diaspora)과 나의 외할머니(1부) 나는 작년에 세계를 멈추게 한 코로나에 걸려서 죽음의 고개에서 헤매다가 살아났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어머니이셨다. 꿈에서 만난 어머니에게 "지금 너무 아퍼요. 살고 싶어요. 살려주세요”라고 매일 기도를 했다. 20여일 동안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다가 기적적으로 완치가 되어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나는 살아 생전에 못 다한 고조할머니.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 이어지는 긴이야기를 남기려고 한다. 4대에 걸쳐서 가라후또(사할린)에 살게 된 조선인의 이야기이다. 사할린 강제징용에 인한 이산과 다시 일본 땅으로 끌려가는 이중징용을 당하게 되는 슬픈 가족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할린에서 태어났지만 나의 어머니 현민제(현남열,1928년생)는 제주도가 고향이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1944년 우리 어머니는 16세가 될 무렵에 사할린에 강제징용으로 끌려 오신 아버지를 찾기 위해 홀로 제주 본가 할머니 곁을 떠나 사할린으로 건너오셨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은 어린 아들과 남편은 강제징병으로 끌려가고 어린 딸들과 주부들까지 정신대로 일본이나 남영군도나 사할린으로 강제징용이 되어 가는 시대라서 할머니는 어린 손녀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부모가 있는 사할린으로 보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에게는 외조부님이 되시는 우리 어머니의 부모님은 두 딸을 본가에 맡기시고. 두 분은 1940년 겨울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을 맞으며 아들 하나만 데리고 계약기간 2년만 마치고 돌아오겠다고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기다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사할린으로 끌려가신 것이다. 우리 외조모는 일제에 의해 가족이 헤어지는 첫 번째 이별을 당한 것이다. 제주도 친할머니 집에 남겨져 함께 살던 언니가 시집가서 어린 두 아들들을 돌보고 있게 되자, 할머니는 손녀에게 "얘야, 가라후토 아버지를 찾아가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몰린 일제가 조선 어린 여자들을 정신대로 끌고 가는지라 할머니가 겁이 나서 손녀딸을 부모가 있는 사할린에 보내려고 한 것이다. 꽃같은 16세를 맞이한 소녀는 늘씬하고 고와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쳐다 볼 때마다 더욱 불안해진 할머니는 너 혼자라도 가야 한다고 떠밀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소녀는 독한 마음을 먹고 미수가루를 뱃속에 차고 홀로 배를 타야만 했다. 아니면 정신대로 끌려갈 판이다. 배 밑바닥에서 간신히 20여 일 지내고 나서야 일본땅을 통해 사할린에 도착을 해서 천신만고 끝에 어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사할린 우글레고르스크(에수토루) 구역의 탄광에서 일했던 아버지는 바로 며칠전 일본으로 이중징용을 당해 17살 어린 아들까지 데리고 가라는 일제에 의해 이미 일본 고베의 한 탄광으로 강제동원 되어 떠나버린 뒤였다. 그리운 아버지는 다시는 만날 수가 없었다. 낯설은 사할린에 남겨진 가족들을 뒤로 하고 2년만 있다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시고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떠난 후였다. 당시 일제는 한 가정의 아버지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까지 전쟁 물자를 생산하기 위해 일본 탄광으로 강제로 끌려가야만 하는 세상이었다. 외할머니는 졸지에 남편과 아들을 빼앗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이 되셨다. 남겨진 두 딸과 함께 평생 동안 힘들고 외로운 여생을 사셨다. 고향에서 끌려갈 때는 2년만 일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살다가 이중징용으로 다시 일본으로 내몰린 것이다. 1년 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부자는 일본으로, 모녀는 사할린으로....... 갈라지고 찢어져야만 했다. 남의 나라 전쟁을 위해서 한 개인이 당해야만 하는 ‘이산의 이산’을 겪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두 번째로 당하는 가족의 이별인 것이다. 사할린에 도착한 어머니는 가족을 만난 기쁨보다는 꿈에도 그리운 아버지와 오라버니를 만날 수 없다는 슬픔으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하신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까지 일본 탄광으로 끌려갔다고 외할머니가 통곡하시는 모습이 늘 생생하다고 하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일본땅에서 돌아온 사람들만 만나면 "하늘 같은 남편과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샛별같은 아들을 일본에 빼앗겼다. 이런 사람을 아십니까"라고 찾고 찾으셨다.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우리 가족과 친척들은 더 슬펐다고 한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남편을 기다리다가 젊은 나이에 평생 수절하신 외할머니는 생전에 그리워 하시다가 돌아가시면서 딸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민제야 너는 반드시 나 대신에 일본 땅에 묻히신 아버지를 찾아가서 인사를 꼭 해야 한다”라고 하시며 손을 꽉 잡으셨다. 죽는 순간까지도 너무나 억울해서 눈도 못 감고 떠나가신 어머니의 두 눈을 감겨드리며 "네”하고 굳게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마지막 그 모습을 평생 가슴에 안고 사셨다. 1945년 해방이 되었지만 조국은 우리를 외면하고 결국 외할머니와 어머니는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지 못하고 자식들과 함께 이국땅에 묻히게 된다. 이별과 고향, 이 두 가지가 외할머니에게 뼈아픈 한이 되어 살아오셨다. 그래서 우리 엄마는 반드시 외할머니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드려야 한다고 내 귀에 못이 박히게 중얼거리셨다. 돌아가시는 날 하얀 눈이 많이 내렸다. 나를 불러서 바라 보시면서 "영자야. 내가 지켜드리지 못한 나의 어머니와의 약속을 너는 지켜야 한다. 반드시 외할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라고 유언을 남기시고 눈을 감으셨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이산의 고통은 외할머니에서 어머니로 그리고 나에게 대물림이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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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 “아리랑은 역(易) 사상에서 나왔다”국중성/익산향토사학자 아리랑은 우리민족의 애환과 정서가 담긴 민족의 노래로 이어왔다. 그런데 그 노랫말이 어디서 나왔으며 그 뜻이 뭔지 일삼 궁굼했는데 알고 보니 아리랑은 주역(周易)의 하도(河圖)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역이란 우리 선사세대적부터 학문의 최고 경전으로 읽혀왔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선유학자들이 평생을 이에 종사했어도 일가를 이루지 못하였다는 것이 이 역이다. 그런 가운데 조선시대 학문적 이념이 되었던 퇴계 이이의 이기론(理氣論) 형성에 교량적 역할이 되었다는 서경덕 선생은 별에 하도를 걸어 놓고 3년 동안을 고심했다는 것은 하도가 우리 전통사회에 끼친 영향의 파급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 오게 되었던 것이다. 요즈음 역이라 말하면 때 지난 옛 것으로 치부할지 모르나 이는 고유한 우리 정신문화의 본 모습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할 것이다. 역에서 말하길, "하늘에서는 상(像)을 이루고 땅에서는 형(形)을 이룬다.(在天成象 在地成形)”라고 하였다. 이 말은 세상 물상이 먼저 있은 후에 수(數)가 있다는 뜻이겠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형체가 있는 물상으로 이루어져 있음으로 만물은 수로서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의 근원이라 하는 하도의 수리(數理)에 의하면 천체 우주만상이 존재하는 과정은 1에서 10까지의 수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만물의 생존과정은 1에서 9까지 이루는 과정을 거쳐 10(十)에서 완성이 되니, 10까지 이루는 과정의 행로는 수많은 고난의 역정을 극복해야 10에 이른다는 것이 하늘의 뜻이라고 한다. 그래서 10이라는 수는 숫자의 끝이요, 그 다음에 오는 수는 1로부터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이것이 세상만상의 순환 이치로서 곧 태극의 진리라 한다. 이와 같은 수론은 서구의 학설에서도 있다. 그리스 철학자며 수학자인 피타고라스는 우리가 일상 쓰는 수는 실용적인 면보다 이론적인 천문학적 수론으로 본다하여 "10이라는 수는 이미 완성된 수이고 그 다음에 오는 수는 1부터 새로 시작이 되니 10은 새로운 시작을 상징하는 완전수이므로 10의 근원은 1이다.”라 하였다. 그래서 역의 하도 수리에서 세상사는 시작에서부터(1~9)의 과정에 대한 수련을 거쳐야 10에서 완성이 된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을 상징하는 수이므로 이는 유(有)의 극이라 무(無)의 시작이니, 이것이 천체 우주만상의 근원인 태극(태극)의 진리라 한다. 그래서 자연의 현상계는 계절의 순환체계가 새로운 봄이 시작되면 여름에서 성장하고 결실하는 가을을 거쳐 겨울로 마감이 되는데 거기서 끝이 아니라 다시 봄으로 새로이 시작되니 이러한 순환체계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변함이 없다. 같은 체계 안에 속해 있는 인간도 태어나면 성장하고 늙어지면 죽는데 그 죽음으로 끝이 아니라 이어서 새로 태어남이 계속되는 이러한 순환의 질서 속에 우리가 존재하여 있다는 그것을 거쳐야 할 과정일 뿐 그 과정의 순환은 쉼도 끝도 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천체 우주의 생성소장하는 순환체계는 변하면서 변하지 않는 그것은 과정의 계속일 뿐 세상사는 끝이 없음으로 하여 역에서도 64괘 중 마지막 괘는 끝 괘라 하지 않고 미제괘(未濟卦)라 하였다. 이 같이 만물의 생성소멸하는 순환작용이 계속 되는 것을 함축적으로 도식화 하는 것이 하도이며 이 중앙의 핵심을 일러 태극이라 하였다. 이 태극을 상형화한 도문이 한문글자 아(亞)자와 맒은 모양이라는 뜻에서 그 아(亞)자는 곧 천지만유의 이치가 들어있는 태극이라 상징하였고, 그 아(亞)자 속에는 백십자 (十)가 들어 있다하여 이로부터 十자 논리가 형성되었고 그 十자(太極)에 이르기 위해서는 1에서 9까지의 고난의 고개를 넘어야 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에서 글자 풀이로 아(亞)자 속에 리(裏)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고개와 고개(嶺)을 넘어야 한다는 이 세 글자를 합하여 아리령(亞裏嶺)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아리령이란 인생역정의 과정이 이 아(亞)자 속의 十자에 대하여는 인간세대 학문이 있기 이전부터 인생 역정을 十자로 표현한 것은 멀리 원시 선민들이 남긴 암각화나 갑골문 등에서 찾아 볼 수가 있었으니 이 十자의 의미는 그 때부터도 인생 삶의 표현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十자의 태극은 천체우주 순환체인 염력은 만물이 대상임으로 인간만의 것이 아닌 것이라 하겠다. 그러한 광대무변한 태극의 아(亞)자에 대한 이 뜻을 세상에 파급시킨 것은 남사고(南師古)의 격암유록(格菴遺錄)이었다. 그러나 그가 전한 형식을 보면 아(亞)자를 파자문자(破字文字)로 하여 가사체(歌辭体)로 노래를 지어 전하였는데 궁(弓)자가 등을 맞대면 아(亞)자가 된다는 뜻으로 우리가 어릴적부터 ‘짝자궁’ 노래를 가르쳐 왔고, 그것은 하늘이 내린 도리(道理)라 하여 ‘도리 도리’하며 고갯짓을 시켜왔고, 성년이 되어서는 아(亞)자 속의 十자의 진리를 떠나서는 십리(十裏)도 못가서 발병(發病)이 난다는 노래로 아리랑(랑)을 부르게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은유적인 파자문 형식에 되어 대중적인 파급이 순조롭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아(亞)자를 구비전승으로 이어왔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가 있는 아(亞)자는 상징적으로도 창호문살이나 가구 장식에 이르기 까지 이어왔으며 그 이면에는 태극사상이 우리의 정신문화에 끼쳐온 증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리랑의 아자는 역의 구도에서 나왔으며 그 의미는 천체 우주관적인 광대무변한 원리가 담겨있다는 그 뜻이 아리리령(亞裏嶺)이었다. 하도가 중국에서 건너온 낮선 학문이었으나 우리의 생활풍토에서 여과의 세월을 거쳐 우리 모습으로 나타난 아(亞)자 속의 十자의 과정은 저 멀리 원시선민적 부터 고난의 고개와 고개를 넘어 이어온 행로가 한반도에 이르러 아리령(亞裏嶺)의 고개를 넘어 아리랑으로 승화 되었던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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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영금의 시선] '미나리김치'위영금(도산통일연구소 연구위원) 요즘 ‘미나리’영화가 인기몰이다. 지극히 평범한 이 영화는 미국으로 이주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에 비교되는 인기몰이를 하며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코로나로 텅 빈 영화관을 독차지 하고 ‘미나리’ 영화를 보면서 정이삭 감독이 ‘미나리’를 호명하여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했는지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네 얼굴은 왜 그렇게 납작하니?’ 데이빗(엘런 김)에게 건네오는 낮선 곳에서 친구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된다. 막내딸이 이주한 이국땅에서 한국인이 애호하는 화투를 손자에게 가르쳐 주고 가지런히 칫솔질을 따라 하며 어느새 서로를 닮아가는 그곳, 척박하지만 인간미 있는 그곳, 하지만 영화를 보면서 울컥했던 것은 모니카(한예리)가 한국에서 온 어머니를 눈물로 포옹하는 장면이다.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감동적인 설정인가? 그리고 어머니가 꺼내 놓는 붉은 고추가루를 받고 또 다시 울컥해 하는 딸, 그리고 고향의 언어는 잊혀진 것을 기억하게 하는 백 마디 말보다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어머니는 고향땅에서 가지고 온 미나리 씨를 미국 땅에 뿌린다. 어디서나 뿌리를 내리는 미나리 약효인지는 모르지만 어린 손자의 병은 기적적으로 호전되지만 대신 할머니가 병을 얻고 가족들이 집을 비운 날에 정신을 잃어 실수로 그동안 일궈온 모든 농작물과 집을 태워버린다. 병원에서 손자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 가는 할머니, 그곳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가족이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고통을 이겨내고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감독의 의도이다. 그리고 그 힘은 가족이라는 의미로 전달된다. 영화에 몰입하면서 고향에서 늘 먹었던 ‘미나리 김치’가 떠오른 것은 아마도 탈북민이라는 존재의 본능 때문인지도 모른다. ‘미나리’는 번식력이 뛰어나고 식용과 약용으로도 경제적 가치가 있는 식물이다. 그리고 너무 흔하게 널려 있어 기억에서조차 사라진 고향음식이다. 미나리는 고산지대를 제외하고 습지나 음지에서 잘 자라고 항암작용과 염증치료에도 좋고 특히 간에는 특효이다. 해독제로 쓰인 미나리는 생선을 잘못 먹어 부작용이 있을 때 이것을 처방하기도 한다. 북한에서는 국가정책으로 미나리밭 조성까지 했으니 지천에 널린 것이 푸른 미나리이다. 봄부터 시작하여 가을까지 자라는 미나리는 냉국이나 무침으로 먹기도 하고 김치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미나리 김치’는 한약 같은 특이한 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절임으로 봉인했다가 며칠 뒤에 발효가 되어 숙성이 되면 꺼내 먹는다. 이제는 그 맛도 잊혀진 ‘미나리 김치’ 가족이라는 구성원으로 미나리처럼 척박한 땅에도 뿌리를 내려 살아가는 모습은 전 세계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냈다. 그러나 북에 두고 온 가족을 만날 수 있는 희망조차 없는 탈북민의 소망은 무엇일까? 영화는 바퀴달린 집이라도 가족이 모여 사는 것이 고통을 희망으로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타국 멀리 있더라도 어머니를 만날 수 있고 고향의 맛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4월 25일에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외국인이 서툴지만 ‘미나리’라고 부르는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나도 이 사회에 속해 있는 구성원으로서 누군가에게 호명되는 것 같아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 필자 소개 위영금: 경기대학교 대학원 북한학 박사 시집 '두만강 시간' 출간(2020) 도산통일연구소 연구위원 내고향만들기공동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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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문경새재아리랑 이 지경, 누구 탓인가?이만유/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 지난 4월 6일 지역 모 신문사 사설에 "문경새재아리랑,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제하의 기사를 읽고 문경시민들로 구성된 순수 민간단체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 위원장으로서 한 마디 하려고 한다. 사설에는 문경새재아리랑의 현 상황과 문제점에 관해 기술하고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라고 했는데 진정 그 이유를 모른단 말인가? 반문하고 싶다. 그리고 ‘아리랑도시 문경’은 존재하는 건지? 묵은 질문을 문경시에 던져본다.”라고 했는데 지금 이 사태는 문경시의 책임만 아니고 누구도 아닌 모두의 잘못이다. 아니 사설에서 말한 아리랑의 주역이고 주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더 크다. 갈라지고 찢어지고 서로서로 인정하지 않고 조그마한 기득권만 있으면 그것도 권력이라 생각하면서 편 가르기하고 배제하고 다른 사람이나 단체가 아리랑 전승, 보급 사업을 하면 방해하면서 누가 누구를 탓하는 것인가? 문경새재아리랑에 애정을 가지고 문경새재아리랑의 뿌리를 찾고, 학술적 탐구로 문경새재아리랑의 존재 가치를 높이려고 찾아온 외부 인사들까지 실망하게 되었고 한 민간단체가 시대에 부응, 정성을 다해 활동하면서 코로나 19 방역을 위한 '코로나아리랑'을 만들어 발표회를 할 때, 외지 아리랑 전승 단체와 국내 국악계에서 큰일 보람찬 일, 아리랑 역사에 남을 일을 했다고 극찬할 때 문경시도 문화원도 전승자도 지원과 격려는커녕 관심 가져 주지 않았고 외면했다. 아리랑 관련 단체에 대한 지원을 7년째 끊고 올해 아리랑제 예산 1억 원이 반으로 줄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이즘 문경시의 아리랑 정책이 어쩌면 한때의 지자체장 치적을 위한 일회용 도구로 존재했다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스러움을 가지지만 그 원인은 아리랑 전승, 보급 단체의 내부 갈등에 의한 것이고 아리랑제도 모든 아리랑 관련인과 관련 단체가 모이고 힘을 합쳐 추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에 기인한 것이다. 아리랑제 예산 1억 원이 내실 있고 더 다양성 있는 프로그램이 되어 추진되었어야 했는데 문경새재아리랑이 아닌 헐버트아리랑을 중심에 두었고 아리랑을 부르는 국악인이 아닌 일반 대중가수를 초청하는 등 정체성을 잃은 행사와 축제와는 무관한 아리랑 표시도 없는 부채를 선물용으로 구매 배부하는 등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이런 비효율적 예산집행이라면 1억 원도 많은 것이며 올해 예산이 감액된 원인 제공을 했고, 줄어도 할 말을 못 할 지경에 처한 것인데 무슨 남 탓을 하는지 시민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다. 아리랑도시 문경이 빛나고 문경새재아리랑의 보급과 전승을 제대로 하자면 내가 최고구나 아니면 안 되고 내 입맛에 맞으면 인정하고 나만, 우리 단체만 아리랑을 위해 일했다. 일한다라는 아집과 편견과 소아적인 자세는 결코 버려야 한다. 문화나 아리랑이 어느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 소유물인양하는 그런 의식이나 행동을 한다면 그건 문화인으로 수치고 자격 미달이고 문화예술 도시 문경의 격을 낮추는 일이 될 것이다. 아리랑 관련 일부 리더, 단체의 이런 행태와 문화에 대한 인식 결여는 물론이고 아리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독선적, 편향적인 시각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독이 되어 오늘 문경새재아리랑이 빛을 잃게 되고 내부 갈등에 의해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마음이 무겁고 가슴이 답답하다. 이제라도 아리랑 정신을 살려 너도, 나도 아리랑의 주역임을 인정하고 모두 하나 되는 아리랑도시 문경이 되길 바라며 문경새재아리랑이 7만 시민, 5천만 모든 국민이 알고 부르는 세상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한 조직이 붕괴하는 것도, 외부의 적보다 내부의 적 때문이며, 정의롭지 못하고 내부 분란이 원인이 된다. 아리랑 관련 관민 단체 모두가 내 팔 네 팔 따로 흔들지 말고, '대동/상생'이라는 아리랑 정신을 다시 되새기면서 자기반성과 각성을 필요로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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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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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시]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고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고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박동진 중사를 추모하며 - - 이만유 - 피 끓는 나이 약관, 스무 살에 장렬히 산화하신 6·25전쟁 호국영웅 님이시여! 그날,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님이 있어 오늘 이 땅이 있고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 그 운명이 걸린 "인천상륙작전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첩보대의 지상명령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야 하는 막강한 임무를 부여받은 님은 불타는 용기와 애국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셨으니 장하도다 그 이름 특수 상륙부대, 해군 육전대 1소대 1분대장 박동진 중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를 점령하고 이어 8월 20일 새벽 영흥도 탈환 작전에 돌입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시다 마지막 발악하는 잔당을 맞아 부하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나가 첫 번째 수류탄에 이어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순간 애석하게도 적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 장렬히 산화하시니 아! 슬프도다 님이시여! 님의 불타는 가슴에서 애국의 붉은 피 솟구치던 그날, 고향 주흘산도 울고 영강도 울었습니다 님이시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 승전의 북소리 지금도 높이 울리고 충무무공훈장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문경의 아들 대한민국의 건아여! 6·25전쟁 영웅이시여! 이제 고이 잠드소서 비록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대한민국이 있는 한 님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영웅으로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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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역사 100년 그들의 증언] 진도군 편: 강송대, 남도잡가의 '명창'흥타령 등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34호 '남도 잡가'의 기예능보유자. 남도잡가는 보렴, 화초사거리, 육자배기, 흥타령, 성주풀이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 말기 번창하다 서양풍 노래에 밀려난 조선조 마지막 서민들의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강송대는 창에 소질이 있어 어머니 이근녀 선생에게 육자배기를 배웠다. 어머니에서 강송대 그리고 손녀까지 이어지는 4대 국악 집안이다. 어머니 이근녀는 일제강점기 명창인 이화중선의 제자였을 정도로 소리에 뛰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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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그들은 우리의 땅도, 역사도, 문화도 빼앗아 갈 것이다이용수(판소리 이수자, 서울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교수) 참으로 걱정이 된다. 머지않아 일어날 일이 눈에 환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과 중국은 앞으로 계속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할 것이다. 우선 중국부터 따져보자. 중국은 무서운 나라다. 몇년 전 사드보복 하는 것을 보라. 그들은 그간 동북공정을 하면서 우리나라의 땅도 이미 자기들 수중으로 들여놓고 있다. 자신들의 땅 안에서 일어난 역사는 모두 자기네의 것이라고 하고 만리장성도 확장하여 다시 만들어 놓고, 이제는 한강 이북은 자기네의 지배를 받았던 제후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상고사도 왜곡하고 있다. 몇 년 전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미국대통령에게 이미 그런 뜻으로 자신 있게 말하지 않는가? 우리의 상고사도 자기들 위주로 만들고, 우리의 배달환국의 조상인 태호복희씨, 신농씨, 치우천황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이제는 단군상마저도 크게 만들어 놓고 자랑하고 있다. 아리랑도 자신들의 문화재로 등록하고, 한복도 자기네 옷이라고 하고, 또 요즘은 김치도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의 민족음악이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까지 자기네들의 문화재로 등록하여 놓았다. 이것은 앞으로 우리문화를 뺏을 시초가 되는 것이다. 우리네의 조상인 태호복희씨가 만든 8괘의 태극기도 앞으로는 자기네 조상이 만든 것이니 우리가 쓰지 못하게 할 것이고, 우리의 판소리도 자신들의 문화라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왜냐? 판소리는 대대로 내려오면서 우리 선조들이 지역과 시대를 초월하여 범세계적으로 글로벌하게 만들어 놓은 문학의 보고요, 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대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 9000년 전부터 내려온 반고니 노고할미니 하는 모든 신화적 인물은 물론 앞에서 거론한 환인시대, 환웅시대, 단군조선 시대의 7,200년 우리 조상의 인물들이 다 나오고 중국의 요임금, 순임금을 비롯하여 우, 탕, 주문무 등 군주와 영웅시되는 인물들이 다 등장한다. 아시아의 역사이기도 하고 세계 역사이기도 하다. 역사뿐만이 아니라 문화와 정신세계의 모든 영역까지를 총괄한다. 철학가와 시인 등 잘 알려진 인물은 물론 지리적으로도 치우천황시대 우리가 지배하고 살았던 중국대륙 전역은 물론 아시아 남방전역과 한반도를 다 대상으로 하여 소설과 판소리로 만든 것이다. 수궁가는 인도의 불교이야기 ‘전등신화’에서 시작하여 중국 남해바다를, 적벽가는 중국의 적벽강에서 시작하여 오, 위 촉 3국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역사적 사실 외에 판소리 속의 해학과 세세한 작품구성은 모두 우리 식으로, 흥부가와 심청가도 중국 일대와 한반도를 대상으로 지역과 시대를 구분하지 않고 폭넓게 설정하였다. 물론 춘향가는 주로 한반도와 남쪽지방을 대상으로 만든 것이고. 이제 중국은 그럴 것이다. 판소리 속의 인물과 지역의 소재가, 그리고 한시를 비롯하여 문화적인 요소가 주로 중국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니 판소리는 자기들이 만든 중국의 것이라고 언젠가는 주장할 것이다. 지금 우리 판소리 하는 세대가 가고 조용해지면 반드시 그럴 것이다. 중국의 문화가 오래 전부터 이렇게 훌륭했다고 선전할 것이다. 진짜 판소리 속에는 어마어마한 우주가 다 들어있고, 모든 세계의 문학과 음악이 다 들어있는, 그래서 우리 민족이 앞으로 먹고 살아갈 콘텐츠의 보고인 것이다. 보아라, 판소리의 위력을! 전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지금 BTS의 한류에 이어 ‘이날치밴드’의 ‘범 내려온다’가 전 세계 젊은 층의 유튜브 3억 뷰를 달성하여 또 하나의 한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또 한국의 방송국마다 진행되는 트로트의 참가자들 중에 잘한다는 평을 받은 참가자는 예외 없이 그간 판소리로 목청을 틔웠거나 목구성을 제대로 잘하는 경연자였다. ‘범 내려온다’는 수궁가를 그대로 옮겨 춤과 함께 공연한 것이 히트를 친 것이지만 주요 원인은 바로 그 장단이 바로 우리 민족에게만 있는 ‘엇모리장단’이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이 시절 ‘땅따먹기’놀이와 같이 땅 위에 선을 그어놓고 두 발로 서 있다가 왼발로 내딛고, 다시 또 왼발로 뛰는 깨금발 식의 장단이다. 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장단이 아니고, 약간 엇박자를 내어 불안전 하는 듯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흥을 돋워주는 징단이다. 마치 지난 2002한일월드컵 때 응원박수 치는 것과도 같은 장단이다. "대-한민국!” 하며 소리내어 응원하면 이어서 "따단- 따. 단-따-!”하며 약간의 텀을 두고 엇박자로 나가는 그 장단을 말한다. 이 장단의 응원으로 당시 응원기에 무서운 얼굴상으로 그려진 우리 배달환국의 14세 천황을 ‘붉은 악마’라고 해서 자손들이 버릇없이 이름을 붙였지만 조상님은 그것도 어여삐 보아 우리나라를 월드컵 4강에 오르는 기적을 만들어 주셨다. 이번에도 같은 장단이라 할 수 있는 ‘범 내려온다’도 우리만의 엇모리장단이다. 이 장단은 어디에고 함부로 나오는 장단이 아니고 판소리 3, 4시간을 하는 한바탕에서 한 두 번 나올 정도의 장단이다. 언제나 상서로운 일이 생길 징조일 때, 예를 들어 하늘에서 흰 수염을 기른 도사나 혹은 천사가 내려온다거나, 산에서 영험한 짐승인 호랑이가 내려온다거나, 고승이 나타나거나 무서운 장수, 예를 들어 관우나 장비 또는 조자룡 같은 무서운 장수가 나타날 때 위엄있게 하는 소리가 바로 이 장단이다. 우리민족을 앞으로 먹여 살릴 콘텐츠는 바로 판소리요,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이런 장단으로 흥을 잘 살려야한다. 그러니 이처럼 판소리 속에 젖어있는 문화들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그간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고, 상고사를 알려고도 하지 않고, 우리문화를 정립하여 확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못 박아 놓지 않으니 이런 일이 생기는 이유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 정부가 앞장서서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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