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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저 유명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이미자는 1964년 이 노래를 불러 일약 국민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한다. 한산도(한종명) 작사, 백영호 작곡, 하지만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이게 된다.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가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붉은색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전문 연구자들에 의하면 왜색이나 빨갱이라는 배경 보다는 박정희정권의 '한일국교정상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한다. 한일수교 반대, 저자세 외교논란을 미연에 차단했다고나 할까. 이 노래는 우여곡절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된다. 왜색의 혐의를 입었던 것은 트로트 자체에 대한 이율배반이랄까, 뽕짝은 무조건 요나누키 음계이고 일본의 것이라고 폄하했던 시대적 풍조가 한몫을 했다. 민요 등 전통음악의 쇠잔, 트로트와 가요의 병존, 급속한 산업화, 농촌인구의 와해 등 상황들이 얽히고설킨 시대이기도 했다. 이즈음 트렌드이기도 한 트로트 열풍을 보면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트로트에 대한 시선 자체가 염세나 비관, 저급이나 신파의 정조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동박새가 꿀물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 '동백아가씨'는 남해안 혹은 섬지역을 중심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동백꽃을 아가씨에 대입한 것이다. 하지만 동백에 대한 전통적 시선은 비관과 좌절, 애수와 연민 보다는 오히려 고결과 숭고, 절개와 지조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민화(民畵)나 묵화(墨畫) 특히 화조도(花鳥圖)의 소재 중 하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춘수가 그랬다. 이름을 불러주어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아무리 아름다운 대상일지라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극한 고백 아닌가. 한걸음 나아가 동백은 새가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이다. 그래서 조매화(鳥媒花)다. 북한에서는 '새나름꽃'이라 한다. 새에 의해 꽃가루가 매개되는 꽃이라는 뜻이다.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는 동박새가 꽃가루 옮겨주는 기능을 한다. 동박새는 동백꽃의 꿀을 먹고 살고 동백꽃은 동박새가 꿀을 옮겨주어야 수정을 한다. 그래서 '동백새'라고도 한다. 동박새는 한국, 일본 등지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분포하는 텃새이다. 섬이나 연안 등지 동백숲에서 살기에 울릉도나 제주도, 서남해 섬지역에서 볼 수 있다. 몸의 길이는 11cm정도, 등은 연한 녹색인데 날개와 꽁지는 녹갈색이다. 배는 흰색이고 눈 가장자리가 은색의 흰고리 모양이다.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여 식물성 꿀과 열매를 먹는다. 또 에벌레나 거미, 곤충류 등의 동물성 먹이를 먹고 산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가 공생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동백꽃과 동박새의 관계는 명실상부한 공생이다. 옆구리에 붉은색을 띠고 있는 동박새를 김치자국이라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애수와 비련에서 휴머니즘과 고결까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살았다. 자식이 없어 자리를 물려줄 수 없었기에 동생의 두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욕심 많은 왕은 그것이 싫어서 조카들을 죽일 궁리를 하였다. 동생이 이를 알고 아들들을 멀리 피신시켰지만 이내 들켜버리고 말았다. 왕은 동생에게 두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동생은 죽어 동백나무가 되었고 아이들은 동박새가 되었다. 동박새가 동백나무에 둥지를 틀고 동백꿀을 따먹으면서 사는 내력이다. 울릉도나 대청도 등지 섬에는 육지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섬의 아내가 죽어 꽃이 되었다는 설화들이 전해온다. 설백의 배경에 마치 핏덩이처럼 새빨갛게 핀 동백이 사람들의 심성을 그렇게 움직였을 것이다. 섬지역에 깃든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이런 이야기로 창조되었을 터인데 기왕이면 좀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싶다. 동백을 한편에서는 산다화(山茶花, 산의 차꽃)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기동백꽃(춘백)이다. 동백꽃차의 애용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 역사가 꽤 깊은 모양이다. 겨울에 피면 동백(冬柏), 봄에 피면 춘백(春栢)이라 하니 바람 속에 피면 풍백(風柏)이요, 눈 속에 피면 설백(雪柏), 마음속에 피면 심백(沈柏)이랄까. 어쩌면 심중의 꽃 심백(心柏)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남도지역 특히 섬지역에서 긴요하게 쓰인다.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 마주하는 교배례의 경우, 신부집에서 마당에 초례청을 세우고 갖가지 장식을 한다. 대개 꽃병에 송죽(松竹)이나 사철나무를 꼽는데 남도지역에서는 동백꽃을 사용한다. 굳은 절개의 의미로 해석한다. 사철 푸르다는 것 외에, 시들지도 않고 꼭지 채 떨어져 내리는 낙화의 이미지도 한몫 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달기 때문에 다산의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엉덩이를 치면 남아를 잉태할 수 있다는 등 임신을 돕는다는 속설이 그래서 나왔다. 이런 심미안은 그림으로도 나타난다. 묵화(墨畫)가 사군자를 그리는 것이라면 민화(民畵)는 초충(草蟲, 풀과 벌레)을 그린다. 민화라고 사군자의 소재를 그리지 않겠는가만 고고하고 절절한 기풍보다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성을 강조했다고나 할까. 그 중 매화, 수선화 등과 함께 즐겨 그렸던 것이 동백꽃이다. 문자 그대로 겨울(冬)에 피는 꽃이기에 정절이나 고결의 의미를 내포한다. 뜻으로 보면 사군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조와 절개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동백아가씨와 동백꽃 그림을 넘어 해안마다 지천인 동백숲이 그립다. 동백꽃 모가지 채 뚝뚝 떨어져 내리는, 마침내 바뀔 계절 기다리며 다음 졸시 한편으로 대신한다. 섬동백(島冬柏) 이윤선 너 어쩌자고 꽃술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송이송이 꼭지 채 떨어지느냐 순백의 한겨울 무슨 곡절 그리 깊어 홑꽃잎마다 검붉은 멍들 우그린 채로 왕의 명을 받을 수 없어 스스로 자결하고선 동생은 동백나무 되고 그 아들들 동박새 되었다지. 육지나간 남편 무슨 일로 늦게 돌아와 동백으로 변한 아내 찾는 동박새 되었다지. 비로소 이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 하더라만 동박새 꿀물 날라주어야 피는 동백꽃만 하겠느냐 겨울마다 계절마다 순백의 풍경으로 스며들어 세상 모든 가슴앓이 감아 안는 설백(雪柏)만 하겠느냐 계절 가면 간단없던 북풍한설 지나고 세월 가면 생채기 난 나이테도 아물어지는데 당산 남쪽 조산숲으로 서고 갯골 동편 우실로 서서 바람 눈비 맞서고 물결마저 헤쳐 왔는데 너 어쩌자고 홑잎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야속하단 한 마디 없이 댕강댕강 떨어지느냐 사철 푸른 잎가지 가없는 백설 풍경으로 두고 붉은 입술 붉은 심장 그저 초연히 떨어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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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고래 꿈을 꾸었다. 고래 뱃속으로 들어갔던 것 같은데, 집채만한 그 안에 또 하나의 마을이 있었다. 신년 벽두의 어떤 기다림이 있었던 것일까? 휴식이 필요하다는 무언의 경고였을까? 기억을 뒤져 옛 칼럼을 찾았다. 2017년 이 지면을 통해 고래 고기를 먹지 않는 흑산도 사리 사람 박유석씨 집안의 고래 이야기를 썼더라. 작년에는 한 종교 월간지에 고래의 신화세계를 다루기도 했다. 그랬구나. 고래에 대한 지극한 생각들은 왜 내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던 것일까. 깊디깊은 고래 뱃속, 넓디넓은 고래 등에 대한 무슨 함의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고래에게 잡아먹혔다. 뱃속을 들어가 보니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곁에서는 옹기장수가 옹기지게를 세워두고 도박구경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박을 하던 사람이 옹기 짐을 잘못 쳐서 박살이 났다. 옹기 파편에 찔린 고래가 날뛰다가 죽고 말았다. 고래 뱃속에 있던 사람들이 옹기파편으로 고래의 배를 째고 탈출하였다." 손진태가 조선 각지의 민담을 모은 '조선민담집'(1930)의 한 내용이다. 이보다 앞선 기록이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제6권 만물문(萬物門)이다. '한 어부가 고래 뱃속으로 삼켜졌고, 그 속에서 칼로 창자를 그어 고래가 토해내는 덕분에 살아나왔으며 이후로 머리가 벗겨져 다시는 털이 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탄주어(呑舟魚)' 즉 배를 삼킨 물고기라는 별칭이 그래서 나왔다. 큰 인물을 비유할 때 '탄주지어(呑舟之魚)라 한다. 배를 삼킨 물고기, 고래에 대한 전언(傳言) "울진 둔산진에 사는 한 백성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전복을 작살로 찔러 잡다가 고래를 만나 배와 함께 고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래 배속에 들어가 보니 작살을 휘두를 만큼 넓었으므로 온 힘을 다해 사방을 찌르자 고래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를 토해냈다. 그가 밖으로 나와 보니 온몸은 흰 소처럼 흐물흐물해졌고 수염과 머리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구십이 넘도록 살다가 죽었으니, 천명이 다하지 않았기에 고래 배 속에 들어가서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대중(1732~1809)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성대중은 서얼가문 출신으로 박지원, 박제가, 남공철 등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100여 편의 국내외 야담을 모아놓은 책이다. 취언, 질언, 성언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병도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1964년 잡지 '도서' 제6호에 김화진이 전문을 소개하였고,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 살이 흐물흐물해지고 수염과 머리털이 하나도 없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다시 태어났다는 비유일까? 마치 갓 태어난 아이를 설명하는 듯하다. 고래 뱃속에서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일까? 고래가 생명을 구해준 이야기를 연전에 소개했으나 그 일부를 다시 옮겨둔다. 흑산도 사리에 살았던 박유석씨 얘기다. 한번은 혼자 물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배가 망가져 표류하게 되었다. 그 때 고래 한 마리가 다가와 박유석씨 배를 등에 태우고 왔다. 박씨를 해안에 안전하게 내려준 고래는 유유히 풍랑 속으로 되돌아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부터일 것이다. 박씨 집안은 고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생명의 은인인 고래를 고기로 먹을 수 없어서였으리라. 이 어둠이 내게로 와서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요나의 고기 속에/ 나를 가둔다./ 새 아침 낯선 눈부신 땅에/ 나를 배앝으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나의 눈을 가리운다. /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더 깊고 부드러운 품안으로/ 나를 안아준다./ 이 품속에서 나의 말은/ 더 달콤한 숨소리로 변하고/ 나의 사랑은 더 두근거리는/ 허파가 된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밝음으론 밝음으론 볼 수 없던/ 나의 눈을 비로소 뜨게 한다!/ 마치 까아만 비로도 방석 안에서/ 차갑게 반짝이는 이국의 보석처럼/ 마치 고요한 바닷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김현승의 시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전문이다. 재론의 필요가 없는 성경 요나의 물고기(요나 2:10)와 부활을 노래한 시다. 시인의 죽음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요나의 상징적인 죽음과 고래의 의미들을 적절하게 읊었다. 고래는 이미 문학적으로나 설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종의 은유가 되어 있다. 포경수술을 고래잡이에 빗대는 이유는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로 고래 경(鯨)자에는 고래의 수컷, 들다, 쳐들다 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불렀던 것일까? 베트남의 고래 제사 사례와 페로어의 잔인한 고래 사냥 사례도 연전 언급해두었으니 참고 바란다. 우리도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있고 동해를 경해(鯨海) 즉 고래의 바다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또 문화권마다 내면화된 고래들이 있다. 신화와 문학으로 고래를 노래한지 오래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고래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셈이다. 새해 벽두에 고래 꿈을 꾸었던 것은 성경의 요나를 염두에 두고 재생하는 고래를 톺아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고래에 투사된 이름은 모든 문명권을 횡단하여 추출하더라도 '재생'의 의미들을 포획할 뿐이다. 여러 가지 신화와 의례들, 종교적 상관물을 관통하는 고래의 속성이 재생과 부활의 은유라는 뜻이다. 코로나로 인한 곤핍과 경제적 궁핍이 가중된 시절을 가로지르며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꾸는 것은 이 어둠이 내게로 와서 건네는 한 마디 주문인 것일까.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고래의 섬 흑산도 고래 하면 누구나 장생포를 떠올린다. 울주 반구대가 있고 고래축제까지 하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나주사람 백호 임제도 <풍악록(楓岳錄)>에서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며 눈발 같고 소 울음소리를 내는" 고래를 언급했다. 강원도 간성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동해 외에 남도에서 고래가 거론되는 지역은 어디일까? 대표적인 곳이 흑산도다. 사람을 살린 고래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다. 다시 인용해 둔다. 1900년도 초기 흑산도는 참고래, 대왕고래, 귀신고래, 혹등고래 등 대형 고래들을 포획하는 기지였다. 이주빈이 쓴 학위논문을 보면 일제가 설치한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1926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 1/4이 넘는 27.4%의 고래를 포획했다. 주강현의 논의를 빌어 독도의 강치 멸종사와 흑산도 고래 집단 학살사건을 동일한 의미로 독해하고 있다. 관련 근거들이 많다. 고래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흑산도 예리 뒷산은 지금도 곤삐라산(金比羅, 비를 오게 하고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신)이라 부르는데, 이곳에 신사를 세우고 도리이(鳥居)의 좌우 양 기둥을 고래턱뼈로 세우기도 했다. 흑산도를 다시 고래의 섬으로 부르게 하자는 이주빈씨의 제안은 단지 마을역사 추적이나 마을 가꾸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얘기다. 지금의 황폐해진 어로환경과 해양환경을 뒤집어보는 성찰의 제안이다. 환경을 생태나 경제로 읽는 눈이 필요한 것처럼 풍경을 문화로 읽는 눈이 필요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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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이라~, 자라~, 어이~' 일종의 소모는 소리다. 관련 음영민요는 주로 한강 이북지역에서 채록된 것이 많아 남도지역 농요의 전통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명령어에 운율을 넣는 경우는 공통적인 듯하다. '이라~'는 오른쪽으로 '자라~'는 왼쪽으로 돌라는 뜻이고 '어~'는 서라는 뜻이다. 스무 살 되기 전부터 소 쟁기질을 하고 써레질을 해 본 탓인지, 나에게 소는 더없이 친숙하다. 전답이 없던 늙으신 아버지는 순전히 괭이로 서마지기 아홉 배미 산전답을 일구셨다. 한 이랑 쟁기질을 하면 막걸리 한잔을 해야 할 정도다. 산전 옹타리 치고는 사래가 너무 길고 논둑은 어른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비탈졌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언 땅이 풀리기 전에 초벌갈이를 한다. 초벌에 갈아둔 이랑을 양옆으로 갈라치기하며 쟁기질하는 것이 두벌갈이다. 이렇게 이랑과 고랑을 반복해서 갈라치기하여 일곱 번을 갈아야 비로소 논둑을 붙일 수 있다. 일곱 번 갈이 논둑 붙이는 법이라고나 할까. 그제야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하며 몽근 흙들이 골라지면 모내기를 한다. 이런 환경 때문일 것이다. 내 카카오톡 이름이 '깔비고 소띠기고'다. 가입할 때부터였으니 근 10여년 써왔다. '소꼴을 베고 소에게 풀을 뜯긴다'는 우리 고향 말이다. 소를 뜯기는 일은 사실 나라의 모든 소년들이 행했던 통과의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산과 들에 나가 소가 풀을 뜯어 먹도록 시키고 꼴망에 풀을 베어야 한다. 외양간에서는 '쇠죽(粥)'을 끓인다. 회갑을 넘긴 이들 중 상당수는 소 풀 뜯기는 일과 꼴 베는 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196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소 키우기가 그 중심에 있고 그 안에는 마치 관례처럼 씨압소 즉 배냇소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깔비고 소띠끼고', '씨압소'의 전통 "씨압 갖다 키워서 새끼 낳먼 쉬앙치 받기도 허고, 아니먼은 어린 쉬앙치를 가져다 한 2년 정도 키워서 고놈을 팔아갖고 주인하고 절반썩 돈으로 나누기도 허고 그래. 돈으로 나눈 것보고 '바넷소'라고 그러고..." 이기갑 교수 등(「새로 발굴한 방언13」, 한국방언학회, 2014)이 정리한 '씨압소' 용례다. '씨압소'의 표준말은 '배냇소'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남의 소를 송아지 때 가져다가 길러서, 다 자라거나 새끼를 낳으면 원래 주인과 그 이득을 나누어 가지기로 하고 기르는 소라고 풀이해두었다. 제주에서는 '벵작쉐' 혹은 '멤쉐'라고 한다. 유사한 형태로 '반작소'가 있지만 배냇소와는 좀 다르다. 경남에서는 '배내이세' 혹은 '배내기소'라 하고, 경북에서는 '배미기', 또 일부지역에서는 '어울이소'라고도 한다. 진도에서는 '어시소', 영암에서는 '도짓소' 보성에서는 '배냇소' 곡성에서는 '씨압소/갈라먹기' 등으로 부른다. 남도지역에서는 '씨압소'가 보편적으로 통용되기에 나는 이를 준거 삼는 편이다. 송아지를 주고 어미소를 받거나 어떤 지역에서는 기른 사람이 어미소를 갖고 새끼를 낳아 주는 경우도 있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입히는 옷을 '배냇저고리'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갓난 새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씨'는 의심의 여지없이 '종자'를 뜻하는 말이다. '압'의 출처는 약간 불분명한데, 이기갑 교수는 '아비'의 '압'에서 왔다고 풀이한다. '종자소를 줄 수 있는 부모 소'라는 뜻이다. 남도지역에 전하는 말 중에 씨아부지, 씨아부니, 씨압씨, 씨애비, 씨엄씨, 씨어매, 씨아자씨(시동생) 혹은 씨아잡씨, 씨숙(媤叔), 씨아재 등이 '압' 즉 부모라는 시댁(媤宅)을 넘어 '종자' 즉 '씨'와 연결된다. 씨압소의 전통은 우리나라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전통이었다. 흰소의 해에 생각하는 십우도(十牛圖), 소는 누가 키우나 열네 살이 되면 씨압소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입학생부터 그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다. 무상으로 분배받은 송아지가 생후 6개월이 되면 '목매기' 즉 목에 고삐걸이를 한다. 이후 뿔이 나오고 생후 1년여 후에 코뚜레를 뚫어 채운다. 생후 13달 정도 되면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이 280일로 사람과 거의 같으므로 생후 2년이면 새끼를 분만하게 된다. 통상 이 새끼를 씨압소 받은 소년이 갖고 어미소를 씨압소 준 이에게 갚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소년이 16세가 되면 자기의 소를 갖게 되는 것이고, 혼인할 수 있는 자격이랄까 성년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청년창업자금 정도로 퇴화되었지만 절대인구가 농업에 종사할 시기만 해도 통과의례와도 같은 중요한 일이었다. 나랏일을 맡아하는 이들은 이 점 눈여겨 두었다가 '배냇소 정책'을 펴도 좋을 듯하다. 물론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이들에게도 씨압소 시스템은 가동되었지만 성년에 진입하는 아이들에게 무상 분배되는 이 맥락을 주목할 일이다. 그러하니 소년들이 어찌 허투루 소풀을 뜯기며 소꼴을 베겠는가. 오만 정성을 다 들여 일종의 씨드머니를 키우고 가꾸지 않았겠는가. 2021년 올해를 신축년 흰소의 해라 한다. 사방에서 흰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원대한 비전들을 얘기한다. 흰소에 의지해 팬데믹에서 탈출하자는 소망들일 텐데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신축년 남편 찾듯, 무진년 팥방아 찧듯', 비교적 잘 알려진 속담의 재현이랄까. 1661년 신축년 그해에도 이랬던 모양이다. 천재지변과 재난, 흉년이 겹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부부도 떨어져 서로 찾아다녔다는 데서 유래한 속담 아닌가. 기후위기와 역병의 창궐, 언택트와 비대면 활동들의 데자뷰 같다. 3~4년 주기로 이 환란이 반복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최재천 교수는 주문한다. 일시에 처방하여 환란을 끝내는 백신은 없다. 주기적으로 반복되거나 혹은 더 강한 역병 팬데믹에 대한 행동백신으로 나가야 한다. 어떤 행동으로 백신을 삼아야 할까. 언택트 비대면이 기본이다. 향후 모든 정책은 이 기조로 수립되어야 한다. 그래서다. 흰소는 누가 공짜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십우도를 우리 같은 땔나무꾼들이 풀이하자면, 그저 묵묵하게 '깔비고 소띠끼'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 검은소가 흰소 되지 않겠는가.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자 주문이다. 씨압소와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 십우도를 인간이 깨달아 가는 과정으로 풀이하고 심우도(尋牛圖)라 얘기하니, 숭고한 영성을 어찌 우리 촌부들이 이해하겠는가만, 이를 씨압소에 기대 생각해보고 싶다. 열네 살의 소년이 씨압소를 받아 열여섯에 새끼를 낳게 하여 씨압을 갚고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는 과정, 소 키우는 일에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뜻이다. 1. 심우(尋牛), 동자승이 검은소를 찾는다. 2. 견적(見跡), 동자승이 검은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3. 견우(見牛), 검은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4. 득우(得牛), 검은소를 붙잡아서 고삐를 건다. 5. 목우(牧牛),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데 검은소가 머리부터 흰색으로 변해간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 흰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7. 망우재인(忘牛在人), 흰소도 없고 동자승만 앉아있다. 8. 인우구망(人牛俱忘), 흰소도 동자승도 없다. 9. 반본환원(返本還源),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꽃이 절로 핀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의 저잣거리로 들어가 중생에게 손을 드리운다. 십우도의 지극한 과정을 보니 알겠다. 역병 창궐의 해일지언정 그저 묵묵하게 '깔비고 소띠끼'는 것이 정녕 행동백신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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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참요(讖謠) 파랑새 동학의 노래라 불리는 '파랑새요' 같은 조 같은 가락 달라진 노랫말 시대적 맥락 속 숨은 뜻 들어 있어 세상 모든 소리 들어 아는 '관음조' 천리 밖 소리 들어 길흉화복 꿰뚫어 봉건사회 뿌리째 뒤흔든 동학운동 다시금 파랑해 노래를 흘얼거린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지었다. 벽화를 그려야 할 차례였다. 마침 한 노인이 찾아왔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리겠다.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주지스님이 수락은 하였지만 보지 말라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살짝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림 그린다던 노인은 온데 간 데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주지스님이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짝 놀란 파랑새가 붓을 입에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진 무위사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림을 그리던 파랑새가 날아가 버렸으니 화룡점정(畵龍點睛), 점안식을 못한 셈이랄까. 그래서 지금도 무위사 극락보전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사찰의 파랑새 설화는 전북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 설화나 낙산사 및 홍련암 등이 유명하다. 의상대사가 한 곳에 참배를 하다가 푸른 새를 만났다. 갑자기 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상이 그곳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비로소 바다에 붉은 빛의 연꽃이 솟아올랐다. 관음보살의 현현(顯現)이었다. 지금의 낙산사 혹은 홍련암이 생긴 내력이다. 내소사에는 호랑이가 사찰을 짓고 파랑새가 단청(丹靑)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남녀노소 모르는 이 없이 잘 알려진 우리 민요다. 대개 '파랑새노래'라고 한다. 항간에서는 여기서의 파랑새를 1894년 아산만에 상륙했던 청나라 군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나라이니 파란색이라는 뜻으로 이해한 듯하다. 녹두밭은 동학당이고 청포장수는 서민대중이며 녹두꽃은 전봉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전봉준의 어릴 때 이름이 녹두였다니 녹두꽃을 녹두장군에 비유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풀이들은 견강부회적 말맞추기일 가능성이 높다. 대개 한자말을 우리식으로 풀어쓸 때 이런 잘못을 많이 범한다. 청나라는 푸를 청(靑)이 아니라 맑을 청(淸)을 썼다. 발음의 유사성을 고려하더라도 청나라군사에 비유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노래는 이렇게도 불린다. "새야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파랑새'의 자리에 '녹두새'가 배치되었다. 이 노래로 보면 녹두새(파랑새)는 전봉준을 가리킨다. 정 반대의 해석인 셈이다. 같은 곡조 같은 리듬인데 여러 가지 노랫말들을 바꿔 불렀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노래여서일까? 당대 민중들의 수요와 욕망들이 달라서였을까? 그래서다. 동학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파랑새요'를 상고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단순한 댓구로 가져다 쓴 용어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인용하는 배경, 행간의 숨은 뜻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랑새와 관음조(觀音鳥)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이해 내 콩 밭에 머물렀던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 밭의 파랑새야......" 필사본에 나오는 '청조가' 즉 파란새 노래다. 가사를 보면 동학의 '파랑새노래'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랑새가 그렇고 콩밭이 그렇다. 여기서의 파랑새는 사다함의 연인 미실이다. 정민 교수는 이 노래가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자체의 위작 가능성이 분분하니 크게 강조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파랑새노래의 연원은 신라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설화적 맥락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황해북도 고달굴 전설에 관음조(觀音鳥)가 나온다. 여기서의 관음조가 곧 파랑새다. 낙산사와 홍련암이 우리나라 관음의 최대 도량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가 천부관음을 조성하고 얻은 아이가 자장이라는 이야기와 경덕왕 때 천수관음에게 빌어서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6세기 무렵이니 어쩌면 '파랑새 노래'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설화적 내력으로만 본다면 강진 무위사나 부안 내소사 등도 관음도량이다. 관음(觀音)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이다. 청진기를 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소리 들어 사람의 길흉화복을 꿰뚫어본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생겨난 당대 민중들의 조바심이 직조해낸 것이 동학의 파랑새 노래 아닐까? 김익두가 펴낸 〈전북의 민요〉에는 또 다른 노랫말이 소개되어 있다. "새야새야 무당새야 미륵산에 앉지 마라 샛바람이 부는 것이 눈동자를 가릴러라." 무위사에서 점안식을 하지 못하고 날아 가버린 파랑새가 저잣거리에 들어 무당새가 되었던 모양이다. 식자들이 지어 좀 어렵긴 하지만 이들 모두를 참요(讖謠)라 한다. 여기서의 무당새, 미륵산, 눈동자는 전봉준, 녹두꽃, 동학으로 소급되며 곤핍한 이승을 구원할 관음으로 환원된다. 좌절된 혁명, 실패한 전쟁이었을까. 봉건사회를 뿌리 채 흔들었던 그 정신이 유효하다면 어쩌면 동학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파랑새 노래를 흥얼거려봐야겠다. 오월의 참요(讖謠)흔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뿌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봉건사회에서 근세사회로 넘어가는 절절한 전쟁이었다면 5.18 또한 부조리한 군부의 압제와 질곡으로부터 민주사회로 넘어가는 치열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기 불린 노래들을 에둘러 참요(讖謠)로 해석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주제삼은 노래다.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노랫말들로 구성된다.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나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 동학혁명기의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5.18 기간에 불린 수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을 참고한다. 김선출 진술서에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 우리들은 정의파다 등의 노래가 불렸다. 최병진 수사조서에는 정의가, 투사의 노래, 봉선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흔들리지 않게, 내게 강 같은 평화, 새 나라의 어린이, 그 때 그 사람 등이 이른바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어 부르기)로 불렸다. 이외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불린 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항쟁이 끝나고 김종률이 지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정태춘의 '5.18(잊지 않기 위하여)'까지 또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렸다. 다시 파랑새를 생각한다. 갑오년 농민들은 왜 파랑새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단지 전봉준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염려였을까. 처형에 대한 애절한 반응이었을까. 적어도 이 노래를 참요의 범주에 넣고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라로 거슬러 오르는 관세음보살과 고려의 건국, 조선의 건국을 암시했던 민요들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기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시방 5.18의 노래를 어떻게 소비하거나 재구성하고 있는 것인지. 구시대를 비판하고 새 세상을 준비했던 그 노래, 참요 말이다. 다시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 것인지 녹두장군 파랑새 노래에 비춰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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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몸으로 체화되고 맘으로 발원된 몸짓과 소리들이 소박한 타악기들에 얹혀 시공을 가른다. 땅의 조건과 하늘의 이치를 목으로 풀어낸 소리를 정가(正歌)라 했지만, 오로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로 풀어내는 이 소리야말로 천지를 왕래하는 아정한 소리임에 틀림없다. 아정(雅正)이란 무엇인가? 기품이 높고 바르다는 뜻이다. 정가에 비해 속가(俗歌) 그 중에서도 천한 계급이 담당하던 씻김굿의 소리를 어찌 기품이 높고 바르다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악(樂)의 격조는 계급의 대물림이나 신분의 귀천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귀천의 이데올로기가 가리고 있던 행간을 들추면 비로소 보인다. 어떤 선율이 흉금을 털어내며 어떤 리듬이 격조를 재구성하는지. 나는 본 지면을 통해 "송가인의 엄마는 왜 무당이 되었나", "송가인 신드롬", "남도 트로트" 등 개인사를 넘어선 노래 기반의 사회현상을 여러 차례 주목해온 바 있다. 근자에 당골 송순단 선생이 음반작업을 한다기에 몇 줄 보태면서 이렇게 썼다. "송순단의 굿소리를 수리성이나 천구성을 넘어 귀성(鬼聲) 곧 신에 이르는 소리라 하는 것은 그녀의 영육에 베어든 삶의 서사를 두고 나온 말이다." 아름다운 동행, 운명의 굿판 숙명의 소리 기억을 되살려 정보 몇 오라기를 소환한다. 송순단의 소리는 진도 지산면지역 무당이었던 친정어머니 여금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나주출신 외할아버지로 거듭해 올라간다. 열다섯에 시작한 식모살이를 시작으로, 어머니, 오빠, 동생, 아이, 아버지 등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으로부터 그녀가 상속받은 것은 지상의 어떤 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암울한 것이었다. 외눈봉사 아버지와 가난한 집, 이 땅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심청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절절한 가족사를 넘어 지역의 역사에 깃든 그녀의 서사가 대하를 이룬다. 죽음을 딛고 일어나 오보살의 법제를 받고, 진도씻김굿 준보유자였던 이완순의 율격을 받았다. 남도씻김굿의 대표 연행자로 현장을 누비며 남도 전통의 소리 법제와 부채(負債)를 또한 한 몸에 받았다. 운명이었을까. 그 아스라하던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야 비로소 작은 음악 하나를 기록했다. 장구 하나 허리에 대고 온갖 역신들을 마주하는 담대함의 소리다. 징 하나 엷게 울려 지상의 혼령들을 일깨우는 소리다. 가곡과도 같고 남도전통의 '흥그래'와도 같은 선율이 고이 잠든 영성을 일깨운다. 차원을 넘어서는 공명의 소리요 죽은 자와 산자들이 더불어 가는 동행의 소리다. 웅장한 오케스트라보다 더 깊은 귀성(鬼聲)으로 백만군사 이끄는 북소리보다 더 넓은 몸짓으로 맞서는 담대함의 소리다. 이제 외동딸 송가인이 국민가수로 등극해 이 땅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다. 나는 연이어 이렇게 썼다. 지극한 가슴 열고 어깨 겯고 가는 송순단의 소릿길, 이 소리 닿는 심연의 저 끝에, 우리 모두에게 이를 축복 있으리니. 만조상해원경(萬祖上解寃經) 만조상해원경, 본 이름은 옥추경(玉樞經) 또는 옥추보경이다. 독경할 때 읽는 경문 중에서 으뜸으로 친다. 1831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간행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외 출간본들이 몇 권 있고 그 뿌리는 중국 도교까지 이어진다. 영화 '사도'의 OST로 인용된 후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다. 압도적인 시퀀스, 정신병에 걸렸던 사도세자는 미친 듯 외는 옥추경을 배경삼아 칼을 휘두른다. 임오화변을 기록한 대천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무작정 죽인 중관, 내인, 노속들이 100여명에 이른다.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원인이다. 옥추경의 본래 기능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몸에 달라붙은 귀신을 쫓아내는 굿거리인데 사도세자는 이마저도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송순단의 만조상해원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망조상 후망조상 부모좌우조상 혼령님과 다생사자 다생남녀 형제숙백 숙질남매 원근친척 무주고혼 금일영가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만반진수 흠향하고 일배주로 감응하시고 살다 남으신 명과 복록은 자손궁에 전하시고~" 근자의 진도씻김굿에서는 연행되지 않는 장르이지만 송순단의 굿에서는 인용된다. 무경 연행은 친정어머니 여금순의 굿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뭇 사람들은 만조상해원경 자체의 의미를 높게 치지만 송순단의 경우, 영육으로 체화되고 발원된 장단과 선율의 의미가 더 크다. 흰쥐의 해, 잔뜩 계획을 세우고 포부를 가졌던 한 해가 기울어간다. 반백년을 더 살고도 항상 세모에 들면 후회가 남는다. 후회 중 가장 큰 일은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집값의 폭등과 경제난으로 자영업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쳤으니 고대사회라면 왕살해가 일어날 상황이다. 하지만 원통한 마음 푸는 해원(解寃)뒤에는 상생(相生)이 달라붙는다. 해원상생, 맥락 없고 명분 없는 노래라면 희망고문이겠지만 적어도 핍진(乏盡)한 개인사를 극복해낸 송순단의 노래 아닌가. 화려한 반주음악도 수려한 무대도 없다. 그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 들고, 천만군사 호령하는 담대함을 율격에 담을 뿐이다. 바라건대 이 소리가 해원일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도 포부도 다 잃어버린 경자년 세모(歲暮), 타악기 하나 들고 외는 송순단에 그저 기대는 마음 처연하다. 가장 낮은 땅 이곳으로 해원이여 오라. 가진자 못가진자 우호(友好)하는 상생으로 오라. '안당'에서 '종천맥이'까지 안당굿: 조상이나 성주 등 가신에게 굿의 시작을 아뢰는 신고식이다. 큰방이나 대청마루에서 연행한다. 굿하는 날이 조왕(부엌의 신)과 관련 있는 날이면, 조왕반이라는 굿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징을 가볍게 두드리며 굿하는 장소와 의뢰자의 정보 등을 노래한다. 신들과의 교감을 상상하며 눈을 지그시 감으면 송순단 특유의 아정(雅正)한 성음들이 지상과 천상의 심연에 기우는 풍경을 접할 수 있다. 손님굿: 진도지역에서는 손굿이라고도 하고 마실이굿이라고도 한다. 천연두와 홍역 등 마치 손님처럼 임하는 질병들을 퇴치하는 굿이다. 손님으로 대별된 신격들을 받아들이고 모시고 보내드리는 절차로 구성되어 있다. 송순단의 손님굿은 스승이기도 했던 고 이완순의 법제를 상속 받은 것이다. 스승 특유의 탁성과 송순단의 성음이 교합되어 절묘한 복선율이 탄생되었다. 장고 하나 들고 오로지 선율에 의지해 역신들을 맞이하는 자태가 장엄하다. 희설: 불교 색채를 가장 강하게 담은 무가다. 선율의 행로에 빼곡한 것들은 웅장한 천상의 계곡을 처연하게 걸어가는 한 영혼의 그림자임이 틀림없다. 안당굿처럼 당골 홀로 징을 가볍게 두드리며 연행하기에 그 심연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진도지역에서는 당골에 따라 회심곡을 부르거나 저승육갑을 푸는 노래를 하는데, 송순단의 희설은 전자의 이완순 법제를 이은 것이다. 극락에 이르는 동안 거쳐야 하는 여러 가지 관문을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종천: 종천맥이 혹은 중천이라고도 한다. 문밖으로 나가 사자맥이, 대신맥이 무가를 부르며 망자의 옷가지 등을 태운다. 타오르는 연기는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고, 불꽃을 타고 오르는 징소리와 무가의 선율은 극락이며 천당일 안식의 공간에 가 닿는다. 배송하는 것이 어디 한 사람의 영혼뿐이겠는가. 이승과 저승을 오로지 선율 하나로 횡단하는 송순단의 동행이 오히려 아름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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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1)1832년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극동아시아 여정 "공충감사 홍희근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죽선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국은 영길리국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중략), 조선까지는 수로로 7만리인데 법란치, 아사라, 여송을 지나고 지리아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순조실록 32권 7월 21일 기사 내용이다. 개신교의 최초 선교사라는 귀츨라프 일행이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에 속하는 고대도 뒤편 바다에 정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32년이니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1884년에서 1885년보다 50여년이 빠른 시기다. 본래의 장계가 그러하듯이 배는 어떻게 생겼고, 싣고 있는 물건은 무엇이며 누가 타고 있는지 등 상세하게 조사한 정보들을 나열하고 있다. 총 67인이 타고 있었으며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 8좌 등 무력을 갖춘 상선이었다. 귀츨라프 일행은 왜 이 시기에 충남의 작은 섬(들)에 도착하였던 것일까? 이른바 대항해시대로 불리는 격동의 시기,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유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동양을 침탈하던 때이다. 무역을 빌미삼고 통상을 요구하며 때로는 전쟁을 일으켰고, 기독교 전파와 식민지 확장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동양세계 전반을 압박해왔다. 귀츨라프 일행도 선교여행 혹은 무역이라는 명분을 목적으로 한 무리들이었다. 그가 타고 있던 배의 이름은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다.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는 독일(프러시아) 출신으로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 선교사다. 첫 번째 여행은 1831년 6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6개월여 기간이다. 목적지는 천진(텐진)이었고 출발지인 마카오로 귀환한다. 이때 만주 타타르지역을 방문한다. 타타르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달단족이라 한다. 민족이 분화한 후 우리나라에도 대거 유입되어 유랑민으로 활동하다가 정착한 바 있다. 두 번째 여행은 1832년 2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다. 마카오를 출발해 산동반도에 갔다가 귀환하는 여정 중 우리나라에 도착한다. 7월 26일 군관 텡노라는 사람과 서기관 양씨의 안내로 애머스트호에서 내려 어떤 섬에 상륙했다가 8월 11일 떠났지만 처음 도착은 7월 17일이므로 약 3주간에 걸친 체류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여정은 아편 운반선 실프(Sylph)호에 승선해 1832년 10월 20일부터 1833년 4월 29일 다시 마카오로 귀환한다. 중국 동부 연안을 거쳐 요동(랴오둥)까지 갔다가 주산군도(쩌우산)를 거친 행로다. 귀츨라프의 서해안 여정과 도착지 논란 귀츨라프 일행이 도착했다는 곳은 어디일까? 순조실록에서 고대도 뒤편 바다라고 명시해두었기 때문에 정박지를 의심할 여지는 적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한시적 용선 계약을 맺은 애머스트호가 507톤의 상업용 범선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얕은 항구나 섬의 내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순조실록에서 적시한 고대도 뒤편은 장고도 앞쪽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감독 관리가 있었던 곳은 인근의 원산도다. 관아가 지금의 원산도 관가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군 우후 등이 나가서 조사하고 또 이런저런 교류를 한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마카오에서 출발한 귀츨라프 일행이 중국의 여러 섬들을 거쳐 조선에 도착한 곳은 조니진 지금의 몽금포 앞바다다. 귀츨라프는 이를 몽금도(대도) 근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남하하여 외연도 근처에 도착하고 녹도를 거쳐 볼모도에 도착한다. 볼모도는 삽시도에 속하는데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7월 17일 조선에 도착한 귀츨라프 일행이 처음 만난 것은 어부들이다. 이들에게 책과 단추 농어 등을 선물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올릴 통상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이후 천수만 내륙 창리까지 방문하여 전도 책자를 전달한다. 비록 한문으로 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개신교 최초의 성경이라고들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귀츨라프의 일기에 나타나는 여러 섬들 중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전도했던 섬이 어디일까를 두고 논란이 많다는 점이다. 천수만 내륙까지 방문했다는 점으로 보면 어느 한 섬만을 특정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귀츨라프 관련 논문들이 수십 개가 넘고 고대도설, 원산도설을 주장하는 단행본들이 여러 개 나올 정도로 논란이 되었던 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고 또 최초의 한문성경이 전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의 여정에 사용되었던 배가 아편 운반선이라는 점, 이후 중국의 아편전쟁에 통역을 맡거나 식민지 관리를 역임하는 등 깊이 관여하였다는 점을 아울러 살피지 않으면 귀츨라프의 조선 최초 선교사라는 본질적인 맥락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어느 한 섬을 특정하는 데 열을 올려 논쟁하는 것만큼 귀츨라프 행적의 과오를 함께 살피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츨라프 도착지는 고대도일까 원산도일까 논자들이 문제 삼는 부분은 조선 관리들로부터 조사도 받고 전도도 했을 지역이 어딘가에 있다. 혹자는 고대도라고 하고 혹자는 원산도라고 한다. 고대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귀츨라프의 일기 기록에 도착지를 강갱(Gan-Keang)이라고 한데서 근거를 찾는다. 귀츨라프의 표기방식 중, 예컨대 오키나와 나하항을 기록하며 나파갱(Na-Pa-Keang)이라고 한다는 점 등을 들어 고대도 안항이 도착지라는 주장이다. 여기서의 갱(Keang)은 강을 말한다. 남도지역에서 바다를 갱번이라고 하는 점, 갯골 물길을 개옹(개펄의 웅덩이라는 의미)이라고 하는 점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원산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당시 수군과 관리들이 주둔하였던 원산도로 데려와 조사도 하고 체류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정조실록 등에 나타나는 '충청 우후로 하여금 원산도에서 선박을 점검하게 하다' 등의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다. 실제로 서해 연안의 해상 고속도로였을 물길로 보면 원산도 앞바다가 사통팔달의 요지였고 원산도 선소에서 조운선이나 기타 선박들의 점검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독 관리의 장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임시 조운창의 기능을 했던 사창이 있어 세곡의 관리도 이루어진 곳이다. 또한 원산도도 강경이라는 마을이 있어 귀츨라프의 기록 강갱과 발음상 유사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관리 주둔지가 원산도의 남서쪽 마을인데 비해 강경마을은 반대편이기 때문에 관리감독의 맥락으로 주장하는 입장에서 마을이름을 덧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맥락상으로 보면 애머스트호가 정박했다는 고대도 뒤편 바다가 장고도 앞바다와 같다는 점에서 장고도일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실마리는 강갱이라는 귀츨라프의 표기일테데, 남도지역의 '갱번'이나 '개옹'의 호명처럼 바다의 갯고랑이나 포구라는 보통명사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강갱이란 말을 좀 더 폭넓게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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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0)장생포는 지금의 여수 선소를 포함한 포구 이름이다. '곡(曲)' 혹은 '가(歌)' 등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생포는 어떤 포구였으며 어떤 노래였을까? "시중 유탁(柳濯)이 전라도에 출진함에 위엄과 은혜가 겸비하여 군사들이 장군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왜구가 순천부 장생포에 이르자 유탁 장군이 구원하러 감에 왜구들이 바라볼 뿐이었다. 장군이 곧바로 붙잡았다가 놓아주니 군사들이 매우 기뻐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고려사악지'(1454년)의 기록, 이 노래가 <장생포>다. '전라도에 출진함'은 전라도 아닌 곳에서의 출진 예컨대 '합포(지금의 마산 합포구)만호'였을 때를 추정하게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준옥 교수 등이 밝혀두었다. 유탁장군이 '합포만호'였던 충혜왕 때는 왜구 침입이 없었고 '전라양광도 도순문사'였던 충정왕 때와 전라도 만호로 임명된 공민왕 때 즉, 장생포 전투는 유탁 장군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이라는 것이다. 1344년(충혜왕) 원나라로부터 '합포만호'로 임명되었고 1352년(공민왕 원년)에 전라만호가 되었다. 한편 다른 기록도 있다. "장성포(長省浦), 부의 60리에 있으니 고려 때 왜인이 침입해서 여기에 이르자, 유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니 적들이 쳐다만 보다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노래를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의 기록이다.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는 기록이 핵심 정보다. 선학들이 밝혀둔 장생포의 위치를 추적해본다. 순천부 동쪽 60리 포구, 장생포의 위치 문헌에서 언급한 (순천)부 동쪽 60리 전후한 지역의 포구들은 만흥포(萬興浦), 기질을포(其叱乙浦), 탄잠포(呑潛浦), 성창포(城倉浦), 조음포(助音浦) 등이다. 용문포(龍門浦)는 부의 동쪽 55리, 며포(㫆浦)는 부의 동쪽 61리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장생포가 몇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정보는 전후맥락을 고려한 위치와 거리 정보다. 이런 점에서 유탁 장군의 이전 거처였던 합포만호를 포함, 울산 남구 장생포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수의 문헌자료들을 검토한 선학들의 견해는 지금의 여수반도 내 포구에 집중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시대의 포구 검토가 도움이 된다. 변남주 교수가 발품을 팔아 전국의 포구를 조사했다(고석규 외, '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 참고). 옛 기록에서 위치를 비정할 때 방위 호명은 해로(물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위상 남동쪽이라도 물길에 따라 동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서에 여수지역 포구를 모두 순천부의 동쪽으로 표기한 이유다. 용문포(龍門浦)는 『읍지』에도 부의 동쪽 55리로 나와 있는데 용인포, 용개라고 불렸으며 현재 '고돌산포'에 해당한다.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다음은 『읍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동쪽 60리라 한 곳이다. 만흥포(萬興浦)는 만흥개라고도 하는데 만흥동 만성리 해수욕장 부근이다. 탄잠포(呑潛浦)는 화양면 장수리 자매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조음포(助音浦)는 종화동의 종포, 종개, 쫑개로 추정하고 있다. 기질을포(其叱乙浦)는 모사포로 추정한다. 성창포(城倉浦)는 현재 어느 지역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중에서 장성포를 당연히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순천부(팔마비)에서 여수 선소(장생포 내안)까지 동남향 직선거리를 재보니 27.46Km다. 60리는 관례적 환산법으로 계산하면 24km, 도량형법에 따르면 25.2Km에 해당한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지리서의 설명과 부합한다. 『한국지명총람』15(전남편Ⅲ)에 의하면, "장생포는 장성포, 장성개와 같다. 쌍봉명 안산리, 소호리, 선원리, 학룡리, 시전리, 웅천리에 걸쳐있다. 고려 30대 충정왕 2년(1530년 표기는 1350년의 오기) 5월에 왜구가 병선 66척을 이끌고 침입하여 노략질 하는 것을, 전라 양광도 도수문사 유탁 장군이 정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왜적의 배 한척을 무찌르고 왜적 13명을 죽이니, 그들이 놀라 달아나서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으므로 유장군이 스스로 장생포 노래를 지어 부르고, 군사들이 기뻐하여 동동곡(動動曲)을 불렀으므로 더욱 이름났다." 장생포(長栍浦)라는 이름은 벅수(남해안 지역에서 장승을 부르는 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 여수에 벅수가 많은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다. <장생포>는 북소리와 관련된 노래이자 연희(演戱) 여수시 쌍봉면 시전리 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둥둥골'이라 한다. 둥둥골 뒤편이 고락산(鼓樂山)이다. 한국향토문화대전에 의하면 북소리에서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최인선 교수에 의하면, 고락산성은 중간에 본성이 있고 산의 정상부(해발 335m)에 보루를 갖추고 있는 백제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으로 산 자체가 성이었다는 뜻이다. 한편 여수 진남관 북쪽은 종고산(鐘鼓山)이다. 한산대첩 때 산이 스스로 울어 충무공 이순신이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웅웅웅 소리를 낸다 한다. 이 또한 북소리 울려 진군하는 진남(鎭南) 혹은 승전고(勝戰鼓)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니 <장생포>를 북과 연결 지어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고락산성(鼓樂山城)에 왜 북 고(鼓)자를 붙였는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장생포>의 발생이 유탁 장군과 그 군사들의 승전가였다는 점을 참고하면 자연스럽게 북(鼓)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할 만하다. 괘락산(掛樂山)이라고도 하는데 테뫼식 즉,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 발권식 산성, 시루성, 머리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는 점 참고하면 고락산성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산 자체가 큰 북의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수 장생포를 배경으로 고려말엽에 지어져 대중 사이에 유포된 노래가 <장생포>라고 주장하는 배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 때의 산성이기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호명의 의미가 크다.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다는 장생포 노래, 그와 관련하여 불려지거나 춤으로 추었다는 장소를 현재의 여수 장성마을로 비정한 것은 이런 전거들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장생포라는 노래에 대하여 <장생포>는 고려 후기 유탁(柳濯, 1311~1371)장군이 장생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던 노래다.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김준옥 교수가 장생포곡, 장생포의 창작자, 창작연대, 창작지 등을 분석한바 있다. 장생포 전투는 유탁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에 일어났으며 노래 <장생포>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를 유탁장군과 군사들이 전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함께 불렀던 대중가요라고 했다. 동의한다. 민요가 작자 없이 구전 전승되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일명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를 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승전 내용을 기왕의 민요 리듬이나 선율 예컨대 오늘날로 말하면 산아지타령 등에 맞춰 노래하고 연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장생포, 장생포가, 장생포곡, 장룡성포, 장생곡, 특히 장생포 등곡은 장생포 외 다른 곡이라는 뜻일 수도 있으니, 모두 노래 이름이 달리 표현된 것일 뿐 넓은 범주에서는 같은 곡이다. 사실 노래만이 아닌 콘텍스트로서의 '장생포'다. <장생포>와 고려가요 <동동>의 상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는 시간을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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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수년 전 본 지면을 통해 초분을 다룬 바 있다. 최길성이 보고한 전북 위도의 증골장(蒸骨葬) 사례를 다시 주목한다. 초분에서 뼈를 추려가지고 집으로 와서 시루에 넣고 찌면서 당골이 굿을 한다. 발목 묶인 제물(祭物) 수탉이 울면 영혼이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굿을 중지한다. 비로소 시루에서 뼈를 꺼내어 깨끗이 한다. 최덕원은 시커먼 뼈라도 시루에 넣고 찌면 새하얗게 고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임산부일 때는 반드시 초분을 한다고 증언한다. 빈(殯)이라는 초분의 장례법 모두가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독장 즉,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아이들의 주검처리 형태와 연관된다. 왜 뼈를 찌거나 닦아내어 다시 매장하는 것인가? 초분으로 대표되는 이차장례에는 살보다 뼈를 중시하는 어떤 관념 즉 영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주검 자체를 자궁의 메타포인 동굴에 넣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고 썩어 없어지는 살보다는 오랫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뼈에 거듭남과 재생 등의 관념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초분장을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러한 스토리텔링 또한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한 측면을 다룬다. 뼈와 살의 분리,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증류해내는 방식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로부터 장례식을 인간의 몸으로부터 영혼을 증류해내는 기술로 독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창익은 그의 연구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에서, 장례식은 부패하는 신체로부터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일련의 세밀한 절차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단일한 장례식이 몸의 장례식과 영혼의 장례식 혹은 살의 장례식과 뼈의 장례식으로 이중화되는 사례들이 예시된다. 내가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민속원)에서, 장례를 두 개의 단위 즉 주검의 처리와 영혼의 처리로 나누어 분석했던 것도 이런 일환이다. 예컨대 살의 장례식을 일차장례식으로, 뼈의 장례식을 이차 장례식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일차장에서는 영혼이 깃든 뼈를 살로부터 구분해내는 작업을 하고 이차장에서는 영혼의 귀천 혹은 재생의 염원 등을 담은 서사극 축제, 특히 씻김굿의 영돈마리를 통해 증류주(음복주)를 만든다는 것이 내 책의 요지다. 망자가 더 오래도록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어떤 형태로든 재생을 염원하는 표현이 바로 망자의 주검을 다루는 방법과 절차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레이저가 보고한 『황금가지』의 다양한 사례들은 우리들에게 방대한 영감을 선사해준다. 캄보디아의 외딴 밀림 속 신비스러운 '불의 왕'과 '물의 왕이 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이 나라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이 신비스러운 두 왕은 화장(火葬)을 한다. 손톱과 이빨, 뼈 같은 것은 부적으로 경건하게 보관한다. 시체를 장작더미에 태우는 동안 죽은 주술사의 인척들은 왕이라는 싫은 직책에 오르게 될까봐 숲으로 달아나 숨는다. 사람들이 가서 그들을 찾는데, 은신처를 제일 먼저 들키는 사람이 다음 차례로 왕이 된다. 1891년 2월 한 프랑스인 장교가 이 외경스러운 왕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치 우리가 단군신화를 설화로 대하듯 서구는 물론 인류사에 하나의 우화로 남았을 법한 이야기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장속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세 개의 복주머니를 준비한다. 한 주머니에는 손톱을 다른 주머니에는 발톱을, 또 다른 주머니에는 머리칼을 담는다. 육신은 죽었어도 손톱발톱 그리고 머리칼은 일정 시간 자라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손톱발톱이 피부의 하나이긴 하지만, 죽어서도 죽지 아니하는 뼈에 대한 관념의 대신이라고 나는 풀이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승려들이 다비식을 마치고 획득하는 사리(부처나 성자의 유골)도 뼈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 아니겠는가. 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지극한 관념 뼈에 대한 이 지극한 관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썩는 살과 오랫동안 보존되는 뼈에 대한 분리 관념 말이다. 이 생각들이 좀 더 확장되면서 육신과 영혼의 분리 혹은 영혼의 구제나 재생, 부활을 따지는 종교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일차장으로서의 육신을 탈각하고 이차장으로서의 영혼을 좀 더 오래 혹은 영원히 존재하게 하는 장법으로 발전된 셈이다. 이차장으로서의 초분장이 살과 뼈의 장례를 분리하는 대표적인 장례법이다. 내가 현지 조사한 자료를 포함해 여러 선학들이 보고한 자료들에도 초분장에 대한 현지인들의 구술은 대동소이하다. 자연적으로 육체의 살을 없애고 뼈를 좋은 곳(선산 등)으로 모시려고 초분을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뼈에 영혼이 담겨 있다는 영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검 자체를 동굴에 넣거나 혹은 고인돌이라는 인공굴에 넣었다가 점차 육탈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하는 장례법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난 칼럼에서 고인돌과 옹관을 인조굴로 해석하고, 독(瓮)이라는 용어 자체가 도가지, 도가니 등의 용례로 알 수 있듯이 돌(독)과 관련 있음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고인돌 아래 매장 혹은 풍장(風葬)되었을 주검이 살과 뼈를 분리하는 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의 현답을 좀 더 추적해봐야겠다. 진도군 덕병리 장승제에서 소의 턱뼈를 바치는 이유 뼈에 대한 관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고분에서 발굴되는 동물의 뼈들을 고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이저의 보고는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해준다. 예컨대 돼지 형태의 곡물정령은 추수 때와 파종기에 각각 등장한다. 코울란트의 노이아우츠에서는 그 해에 처음으로 보리씨를 뿌릴 때, 농장주의 아내가 돼지 등뼈와 꼬리를 삶아서 밭에서 씨 뿌리는 일꾼에게 가져온다. 일꾼들은 꼬리를 잘라서 밭에다 꽃아 놓는다. 곡식 이삭이 그 꼬리만큼 길게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파종기에 미혼 남자를 밭에서 잔인하게 살인하는 사례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 돼지의 형상으로 그는 파종기에 땅에 묻히며, 추수 때 무르익은 곡식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미혼 남자보다는 주로 처녀가 이런 시작이나 증식, 생산의 기제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돼지뼈를 재생과 생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즉,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영혼력으로 관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레이저의 이 이론들을 유감주술(혹은 모방주술)과 접촉주술이라고 한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효과를 내며 그것과 접촉하면 비슷한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당산제(거리제로 호명한다)에서는 두 기의 석장승에 해마다 소 턱뼈를 바친다. 인근의 군내면 세등마을 당산제에서도 소턱뼈를 바친다. 벌교읍 대포리 당제에서는 도깨비고사라고 해서 끄렁치에 소뼈(한 마리라고 여기는 분량)를 담아 개펄에 헌식한다. 분화된 생각들이긴 하지만 모두 뼈에 대한 지극한 관념들을 뿌리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문이다. 화장(火葬)이 보편화된 현재, 이것이 영혼관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거친 풍속인지 인류사의 한 지점에 내 질문을 던져둔다. 죽음관과 영혼관은 곧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며 또한 삶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늦가을 문턱 가로수 아래 나는 그저 무심한 아파트숲을 응시할 뿐이다.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는 저급한 관념들이 진중한 논의도 없이 우리들의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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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고인돌은 '굄돌'을 놓아 만든 무덤이라는 뜻이다. 굄돌 위에 대형의 판석을 덮었으니 사실은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라는 이름이 정확할지 모른다. 세운 돌을 '선돌', 한자말로 '입석(立石)'이라 한다. 세운 돌과 대칭관계를 이룬다고 봤을 때 서있는 돌과 대칭되는 개념은 '누운돌' 혹은 '덮은돌'이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으로 호명한다. 석붕의 붕(棚)이 시렁이나 선반 같은 것을 말하므로 '돌선반'이나 '윗덮개' 즉 '덮은 돌'에 의미를 둔 것으로 보인다. 'Dolmen'의 'men'이 돌이라는 뜻이고 'dol'이 탁석(卓石)이라는 뜻이니 테이블 모양의 돌 즉 이것도 위의 덮은 돌에 의미를 둔 호명 방식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위에 덮은 판석보다 밑에 고인 굄돌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인돌'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한자말 지석묘(支石墓)의 지(支)가 지탱하다 버티다 괴다 등의 뜻이 있으므로 이 또한 굄돌의 의미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분포가 세계적이라고는 하지만 그 거석들과는 다르게 왜 우리는 덮개돌보다 굄돌에 의미를 더 두었을까. 덮은돌과 고인돌, 한반도를 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니 고인돌을 한반도 특유의 묘제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풀이해두었다. 그런데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으로, 프랑스, 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연안지방,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복건성, 절강성, 산동반도, 요동반도, 길림성 남부를 거쳐 한반도 전역,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다. 거의 세계적이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지 않았겠는가.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다. 넓은 평야지대보다는 산과 구릉이 가까운 약간 높은 평지와 해안지대 등지에 많다. 시기적으로 보면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 무덤양식이다. 대개 유력자의 무덤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문제제기 하나, 고인돌을 세계적인 거석문화의 하나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으나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 또는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 등을 한 그룹에 넣어 해석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광의의 맥락에서는 예컨대 누운돌이나 덮은돌의 개념이라면 돌멘(Dolmen)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협의의 맥락 즉 '굄돌'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격이 다르지 않을까? 무덤의 구조로 봐도 한반도의 고인돌이 가장 확실하고 수량도 가장 많다고 한다. 고인돌은 함경북도의 일부 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특히 고창, 화순 등 남부지역에 유달리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많이 없어지거나 훼손되었다지만 아직도 15,000개에서 20,000여개가 남아있어 심지어 한반도를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중 대부분이 남도에 있으니 바꾸어 말하면 남도지역을 사실상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러도 무방할까? 고인돌은 굄돌을 통해 만든 인조동굴이다 문제는 왜 그냥 덮지(덮은돌) 않고 돌을 고였(굄돌)을까 하는 점이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 땅에 있는 구조물을 이용하거나 평지 혹은 땅을 파고 돌을 덮으면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 된다. 굄돌을 사용한 이유는 돌을 고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떤 환경 즉 판석과 굄돌간의 공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굄돌을 괴면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은 지상으로부터 떠 있기도 하고 혹은 지표 아래 조성되기도 한다.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의 할아버지당을 사례 삼아본다. 쭈뼛쭈뼛 세운 거석들 위로 마치 고인돌처럼 판석을 덮은 형국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은 청동기시대의 잔존물을 후대에 마을당(堂)으로 삼은 것일까? 이런 형식은 서남해안 특히 섬지역에서 산견되는 '고려장' 혹은 '고린장'이라고 부르는 묘제에서도 발견된다. 하나같이 돌을 좌우로 쌓아 올리고 판석이나 흙을 덮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난 칼럼에서 옹장(甕葬)과 석장(石葬)의 아우라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게 보면 동굴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지면을 통해 자연토굴에서 인위적 토굴로 이어지는 맥락을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같은 동굴의 이미저리는 고인돌에서 옹관으로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독장으로 이어져왔다고 본다는 점도 밝혀두었다. 이천년을 지나고서도 유독 아이들의 주검을 독담 혹은 독장 형식으로 처리하는 이유를 상기해보면 한편의 답이 주어질 수 있다. 주체세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선대는 고인돌로 후대는 옹관으로 장묘제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초분과의 관련은 차차 설명해나간다. 어쨌든 '굄돌'을 강조하여 고인돌이라 호명한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돌을 괴서 만든 인조동굴, 여기서 말하는 동굴은 자궁 모티프이며 고대인들의 생산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즉 고인돌은 무덤 양식이면서 생산을 하는 재생의 동굴이기도 하다. 고인돌에 그려진 북두칠성이나 윷판바위, 불교의 관음설화는 물론 수많은 여음굴 설화들도 관련된다. 고대인들은 고인돌에 어떤 신화들을 투사하였던 것일까. 단군신화, 웅녀가 탄생한 동굴은 어디에 있을까? 동굴 관련 설화의 역사는 깊고도 넓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단군신화다. 이들 설화소는 남근바위와 대칭을 이루며 음양론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동굴 자체 즉 음기(陰氣) 만으로 출산 혹은 생산의 의미를 완성하기도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천부인 3개를 받아 3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 태백산 정상에 내려왔으며 무리 3000을 거느리고 정상의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를 열고 환웅천왕이 되었다. 3이라는 숫자를 주목하자. 단군신화 동굴의 삼칠일에 대해서는 대개 7일이 세 번 거듭된 날짜로 해석해왔다. 현재까지 전승되어온 세이레 습속에 착안한 해석이다. 예컨대 아이가 출생하면 7일째 되는 날은 초이레, 14일째 되는 날은 두이레, 21일이 되는 날을 세이레라 한다.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착안하면 이것이 세 번의 칠일임을 알 수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 삼는 부족이 3이라는 숫자를 상징 삼는 세력과 연대했을까?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 불문가지다. 특히 동양권 예컨대 우실하에 의하면 몽골리안의 3이라는 숫자는 다시 그것을 3번 더하는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긴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이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제기, 그렇다면 웅녀가 태어난 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난 칼럼에서 다룬 중국 지린성의 국동대혈이나 수많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천연동굴 곧 여음굴일까? 단군신화가 지극한 상징이고 비유라면 동굴 또한 지극한 상징과 비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동굴)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곳도 동굴 무덤이었다.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착안하면 이것이 세 번의 칠일임을 알 수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 삼는 부족이 3이라는 숫자를 상징 삼는 세력과 연대했을까?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 불문가지다. 특히 동양권 예컨대 우실하에 의하면 몽골리안의 3이라는 숫자는 다시 그것을 3번 더하는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긴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이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제기, 그렇다면 웅녀가 태어난 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중국 지린성의 국동대혈이나 수많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천연동굴 곧 여음굴일까? 단군신화가 지극한 상징이고 비유라면 동굴 또한 지극한 상징과 비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동굴)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곳도 동굴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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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9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일제강점기 야마다만키치로우(山田萬吉郞)라는 일본인이 1910년부터 1945년까지 35년여를 무안지역에 살면서 가마터와 분청사기를 연구했다. '미시마하끼메(三島刷毛目)'란 이름의 책이다. 무안문화원에서 무양향토문화총서 9호로 '야마다만키치로우가 바라본 무안분청사기 귀얄문'(2020년)이라는 번역본을 출간했다. '삼도'는 분청(粉淸)을, 쇄모(刷毛)는 귀얄을 말한다. 분청은 조선시대 자기의 하나다. 청자에 백토로 분을 발라 다시 구워낸 양식이다. 회청색 혹은 회황색을 띤다. 귀얄은 풀이나 옻칠할 때 쓰는 솔의 하나로 수수붓이라고도 한다. 주로 돼지털이나 말총을 넓적하게 묶어서 만들기에 그 문양이 투박한 느낌을 준다. 책의 목차들을 보니 무안의 분청, 무안출토 분청 고찰, 무안분청을 통해서 본 조선도자기 등 모두 무안지역의 분청사기를 추적하고 분석한 글들이다. 무안지역이 분청사기의 중심이었다는 뜻일까? 하지만 당시의 무안분청은 광주군(광주시), 보성군, 나주군, 함평군, 무안군 등을 포괄하는 광역 개념이다. 고유명사처럼 사용했던 무안분청은 사실상 영산강 일대의 분청이었던 것이다. 이들 지역을 포괄하는 맥락으로 호명하였으니 영산강 분청사기의 핵심이 무안이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무안분청일까 영산강분청일까? 조선 분청사기의 성립과 삼도(三島, 미시마)의 발산 조선분청사기의 요모조모를 개괄적으로 풀이해둔 연구가 있다. 「조선분청사기 '귀얄문'에 나타난 직관적 '즉흥성'에 관한 연구」(방창현, 이헌국, 2014)가 그것이다. 여기 그 성과를 간략하게 요약해두고 공부자료로 삼는다. 고려시대에는 상감청자가 유행했다. 상감(象嵌)은 금속이나 도자기, 목재 따위의 표면에 여러 가지 무늬를 새겨서 그 속에 같은 모양의 금, 은, 보석, 뼈, 자개 따위를 박아 넣는 공예기법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감청자와 나전칠기가 발달했다. 근대기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었던 자개농이 상감기법을 활용해 만든 것이다. 조선전기에는 분청사기가 발달한다. 청자의 시문기법을 계승한 양식이다. 분청사기라는 이름은 일제강점기 일본의 학자들이 미시마(Misima, 三島)라고 부르던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고유섭(1905~1944)이 잡지 '조광(朝光)' 1941년 10월호에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라고 언급하며 분청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분청의 기법은 화장토(clay slip)를 도자기에 바른 후에 장식하는 기법이다. 조선에서 자생한 고유양식은 아니고 중국 육조 후기인 6세기 월주요(越州窯)에서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문기법이 조선의 것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삼강기법이나 분청 즉 귀얄기법은 다른 나라에서 생산되지 않은 조선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인정받고 있다. 세종 이후에는 주로 국가에 진상하는 공납용으로 제작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전국에 자기소 139개, 도기소 185개 등 모두 324개의 도자소'에서 대부분 분청사기를 생산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5세기 중반 지배층 사이에서 백자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관요라는 관청이 설치되고 백자의 수요가 급증하자 분청사기의 생산은 쇠퇴하게 된다. 하지만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일본으로 끌려간 사기장들에 의해 분청의 기술이 일본에 소개되고 전수된다. 16세기 후반 야마노우에소지(山上宗二)는 조선의 분청 다완(찻그릇)을 천하제일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이 선호하던 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분청의 기법은 상감, 인화, 박지, 철화, 조화, 덤벙, 귀얄 등이 있는데 이 중 귀얄기법을 가장 선호하였던 것 같다. 무안분청의 세계관과 서민예술로서의 미학 무안분청의 세계관을 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을까? 위 논문을 쓴 방창현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무기교의 기교'라는 맥락으로 분청의 세계관을 분석한다. 이것이 회화로 바뀌면 달마도처럼 직관적인 표현으로 그려진다는 것이다. 과감한 생략과 절제, 무욕과 해탈, 여백의 미를 톺아낸다. 작위적인 기교가 없으니 도교적 세계관과 통하는 것이요 무욕의 심미안을 표상했으니 불교적 맥락과 통하는 것이다. 불교에서의 공(空), 도교에서의 자유의지의 표현이라고나 할까. 이 심미관이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양식으로 분청사기에 표현되었으니 그 융숭깊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일본의 지배층을 통해 세계 최고의 다완(tea bowl)로 인정받은 조선의 분청사기, 특히 무안분청이 일본의 차문화에 끼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김인규에 의하면 미국과 캐나다의 도예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야나기무네요시(柳宗悅)는 조선의 다완을 동양미의식을 넘어 종교와 사상의 차원으로 끄집어 올린다. 오래 전 내가 도쿄 외곽의 야나기무네요시 생가를 꾸며 만든 민예박물관을 찾았을 때 놀랐던 이유이기도 하다. 박물관 입구에 들어가면 현관 가운데 딱 한 개의 옹기만 놔두었다. 남도 도처에서 볼 수 있는 흔하디흔한 질그릇, 그것도 약간 비대칭인 투박한 항아리 말이다. 야나기가 종교와 사상으로 확대시킨 분청과 옹기는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무안분청의 기능을 배태한 영산강 유역의 흙과 불과 땔감과 무엇보다 이 예술적 미감을 표현해낸 남도사람들을 상고해보면 양반예술과 대비되는 서민예술의 그윽함을 추적해볼 수 있다. 여기 표현된 도교적 자유의지나 불교적 공(空)의 심미안은 영산강 사람들의 생태적이고 호방한 세계관의 지향 속에 생성된 것들이다. 내식으로 말하면 남도풍류와 남도 미학의 발흥이다. 어찌 무안분청이 뿌리 없이 생겼겠는가.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일 것이다. 영암의 도기와 해남의 초기청자, 강진의 청자, 무엇보다 영산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옹관까지 거슬러 오르는 장대한 줄기,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유분방하고 호방한 작품들과 세라믹산업의 세계들 말이다. 남도인문학팁무안분청에서 생활도자 세라믹산업까지 강진청자, 여주백자와 함께 무안분청을 우리나라 3대 도자기 발상지라 한다. 무안과 목포는 분청과 옹기 등 생활자기, 강진은 청자 중심지다. 이외 해남은 초기청자의 발상지, 영암은 도기로 특화되어 있다. '목포대학교헬스케어도자명품화사업단(단장 조영석 교수)'에 의하면 무안지역 도자산업벨트는 전국 최대의 생활도자클러스터다. 양질의 점토와 풍부한 땔감, 무엇보다 영산강을 활용한 해상운송로의 특질을 배경삼아 발현했던 무안분청이 목포의 행남자기로 이어지며 오늘날 생활도자클러스터를 이뤘던 것이다. 행남자기가 이전해가긴 했지만, 도자기의 일관 체계를 갖춘 전국 유일의 특성화지역이고 10인 이상의 도자업체 중 전국의 55%, 전남의 80%가 무안지역에 집중해있다. 전남도에서 역점을 두고 실천하고 있는 남도문예르네상스 조성사업 중 하나가 도자와 차라는 점에서도 주목되는 지점이다. 도자기산업은 인공치아는 물론 세라믹 일반으로, 건축물에서 첨단공업제품까지 확장되고 있다. 특히 차의 중흥조이자 다성(茶聖)으로 불리는 초의선사(무안군 삼향 출생)와 관련되어 있으니 도자산업과 차산업은 일석삼조의 콘텐츠이자 향토산업인 셈이다. 지역문화 창발과 재구성의 임무를 맡은 곳은 어디일까. 영산강 토대의 유구한 무안분청을 토대삼고 제4차산업혁명의 시대 첨단산업까지 이끌어내는 곳 아니겠는가. 남도의 르네상스 그 중흥의 역사를 선도해나갈 클러스터, 목포대학을 중심으로 한 관학산업계에 거는 기대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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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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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잃어버린 도깨비, 항간에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한다. 도깨비를 몰아낸 이들은 누구인가? 어두컴컴한 밤에만 출몰하던 도깨비들이 밤을 낮처럼 쓰는 전깃불에 밀려 산으로 바다로 도망 다니다 종내는 사라지고 말았다. 탄소문명이 도시 밖으로 몰아낸 것들이 어찌 도깨비뿐이겠는가. 밤이면 밤마다 마을이면 마을마다 도깨비들과 함께 살았던 우리들에게 이 상실의 무게는 얼마큼일까? 밤도 없고 낮도 없으니 만물이 소생하는 아침도 없고 만물이 죽는 저녁도 없다. 시작과 끝이라는 시간의 경계가 모호해지니 삶과 죽음의 경계까지 모호해지는 것 같다. 여러 나라들 중 자살률 일등한지가 십 수 년이 넘었고 고독사율마저 그 상위를 점하려 한다. 잠들지 못하는 도시는 거대한 공룡처럼 웅크리고 앉아 도대체 도깨비들의 출몰 따위에는 관심조차 없다. 이 문명의 공룡들은 들과 늪을 메우고 야산과 숲을 깎아 빌딩들을 세우고 길을 냈다. 디지털문명을 앞세워 광선과 광음으로 시간과 공간을 단축하니 마을의 안과 밖이 또한 사라져 버렸다. 이 공룡이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끝이 어딘지 흐리멍덩한 내가 알 길이 없다. 선과 악을 명료하게 분별한다는 이들만이 도심을 배회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나 같은 땔나무꾼들은 어디 낄 자리가 없다. 나는 이 문명의 끝이 두렵다. 단지 소망할 뿐이다. 그저 도깨비처럼 다소 멍청하고 혹은 익살맞고 때로는 엉뚱하게 서있고 싶은 소망, 흑도 아니고 백도 아닌 그저 마을과 숲, 이것과 저것의 경계에 서 있는 먹빛의 존재 말이다. 왕도깨비, 그 많던 도깨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문자 없던 구술시대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도깨비 이야기가 정보전달의 전부였다. 문자 있던 시대에도 문자로부터 소외된 민중들은 입에서 입으로만 도깨비를 이야기했다. 어느 시기에는 불교를 중심으로 한 조각과 도상과 부조들의 형상이 도깨비의 일부 기능을 대신했다. 하지만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어서 접하는 도깨비가 우리 문화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는 점, 큰 이견을 내기 어렵다. 문자가 생기고 문자를 독점하는 지배세력들이 각종 도상과 문양으로 도깨비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더러는 이데올로기를 얹고 더러는 지배집단의 욕망들을 뒤집어씌워 사람살이에 대한 해석을 가하거나 올가미를 씌워 구속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숲과 늪과 도랑과 둠벙들, 바위와 돌과 나무와 더러의 인공물들에 투사했던 도깨비에 대한 애니미즘적 관념들이 쉽게 바꾸어진 것은 아니었다. 무랴야마지준이 기록한 '조선의 귀신'이나 초기 민속학자들의 연구를 보면 도깨비라는 맥락으로 모을 수 있는 이름들이 수백 개, 아니지 천여 개를 웃돈다. 모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청각 중심의 도깨비들이었다. 상상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도깨비들이 되었거나 엉뚱한 장소에서 탄생했던 존재들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의 오니가 막중한 영향을 끼쳤다. 불교적으로 도덕적 징치나 공간 경계의 문지기를 맡았던 관념들이자 형상들이었지 않나. 사실은 대부분 형상 없던 도깨비들이 방망이를 들고 나타나거나 도깨비감투를 쓰고 나타나기도 하고 큰 혹을 달고 나타나기도 했다. 머리에 뿔이 두 개 달렸느니 하나 달렸느니 다투기도 하고 외다리 독각귀였던 도깨비들이 멀쩡한 두 다리로 달리기를 하는 등 이미지를 강조하는 방면으로 크게 변화되었다. 한국 민화의 중시조라는 조자용은 귀면와에서 장승까지 유사 형상들을 모두 포섭해버렸다. 일본의 오니에 대해 한국의 이미지가 강조되고 여성적인 귀신에 대해 남성성으로서의 도깨비가 강조되며 민족이나 나라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붙인 이름이 '왕도깨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청각 중심의 도깨비 이미저리가 시각 중심으로 급변하게 되는 시대를 마치 한 계절의 바람처럼 그렇게 지나왔다. 경계의 스토리텔러, 호모나랜스들을 기다리며 한동안 나는 의심했다. 그 많던 도깨비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던 것일까?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확인했다. 청각의 시대, 시각의 시대를 거쳐 이제 스마트폰 시대로 접어들면서 지구별 너머 어딘가, 아니면 마을 숲 바위틈 어딘가, 아니면 지금은 없어져버린 마을 둠벙과 늪과 개펄 어딘가에서 발신해오는 도깨비들의 수런거림을. 거대한 산악의 신들과 장대한 바다의 신격들 틈바구니에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전이지대에 출몰했던 마치 우리네 민중 같은 도깨비들 말이다. 거기에는 도깨비들에게 투사했던 우리들의 추억과 회상과 욕망들, 누군가에게 전가했던 책임과 의무들, 아! 무엇보다 지극하고 그윽한 사랑들이 겹겹이 포개져있다. 누구에 대한 사랑인지는 보고 듣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아니 전혀 엉뚱한 결론을 만들어내는 녀석이 도깨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웅장함과 비장함에 가려 존재감을 잃어버렸던 하찮은 것들에 주목할 뿐이다. 쓰이지 않은 행간과 그려지지 않은 여백을 읽는 이유라고나 할까. 이제 보이는가. 저기 저만치 북장구 들쳐 매고 낄낄대며 걸어오고 있는 이들. 찢어진 청바지에 히피복색을 두른 저 도깨비들. 탄소문명의 세례를 듬뿍 받은 도심에서 밀려나 개펄과 숲과 늪에서 당당하게 걸어 나오는 저들 말이다. 이들은 남자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자들이고, 불과 기둥이라기보다는 물과 하찮은 나무 조각들이다. 서양이라기보다는 동양이고 중국이나 일본이라기보다는 한국이며 도심보다는 시골마을이고 가진자들 보다는 못가진자들 아, 무엇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흐리멍덩한 먹빛의 사람들이다. 나는 기다린다. 끊임없이 스토리텔링하는 호모나랜스(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폰깨비, 스마트폰 안으로 들어간 도깨비 더 획기적인 변화는 새천년을 시작하던 벽두 월드컵의 붉은악마와 올림픽과 촛불집회 등을 겪으며 우후죽순 나타났던 도깨비들이다. 그 많던 이미지들이 치우라는 캐릭터에 집중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민족주의니, 국수주의니 해명한다고 해서 도깨비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치우가 도깨비가 아니라고 외친들 도도한 영상시대의 이미지 중심 시선들이 변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스마트폰 시대를 맞이해서는 앞서거니 뒷 서거니 도깨비들의 지형이 변하기 시작했다. 다시 청각의 시대, 혹은 다중시각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일까? 이 또한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그래서 나는 스마트폰을 '폰깨비'라 부르고자 한다. 밖으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고 낄낄대거나 겉으로는 들리지도 않는 소리를 들으며 조잘거리는 것, 이것이 전통적인 도깨비들의 특징 말고 무엇이란 말인가. 이 도깨비들은 그동안 얼마나 웅얼거리거나 조잘거리고 싶었을까? 말하고 싶어서 몸이 달아있는, 말하지 않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호모나랜스들임에 틀림없다. 몸과 분리된 혼들이 밤마다 우리를 따라다니는 공포를 이겨내며, 혼잣말하는 미친 사람들을 이웃으로 두고 살던 그 풍경들이 제4차산업시대라는 세기의 벽두에 다시 소환되고 있는 셈이다. 폰깨비, 이 용어는 근자에 트렌드가 된 '인싸용어(줄임말)'이기도 해서, 가상세계의 캐릭터들을 호명하는 방식으로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우리가 전깃불을 들여와 몰아냈던 도깨비들이 사뭇 다른 형국으로 소환되는, 이것은 분명히 또 하나의 도깨비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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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남도풍속의 지형은 넓고도 깊다.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도 어렵고 풀어서 설명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도 아니다. 삼국시대의 향가로부터 오늘날의 가요까지, 영산강이며 섬진강에서 한라 백두까지 남도에서 발원하고 재구성된 문화들이 켜켜이 쌓이고 확산되었다. 이 스펙트럼을 가늠하기란 어린 날 운조리(망둥어) 잡으러 개옹에 나갔다가 잊어버린 검정고무신짝 찾는 일보다 어렵다. 전문적인 연구자라도 그럴진대 일반인들이야 말할 것이 없다. 그래서다. 어딘가 혹은 무엇인가 샘플이 필요하다. 다행이 우리는 다양한 장르가 국가의 강제나 지방정부의 요청에 의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도 하고 더러는 잔존 유산으로 남아있는 지역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진도다. 전국 유일이라고 말하면 다른 지역에서 오해하겠지만 인구 삼만 안팎의 작은 섬에 강강술래, 씻김굿, 다시래기, 만가, 들노래, 남도민요 등 십 수 개가 넘는 무형유산들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탄탄하게 보존 전승되어 오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중의 다섯 가지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내가 줄곧 주장해왔던 상가의 윷놀이나 유네스코 지정 매잡이 풍속 등은 거의 세간에 알려져 있지도 않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겪는 전통적인 통과의례, 씨줄날줄로 엮는 의례와 놀이, 들과 산과 바다에서 행하는 생업의 풍경들이며 그림과 글씨, 몸짓과 소리 예술들이 마치 한편의 소설을 축약해놓은 듯, 거대 보고서를 압축해놓은 듯 구성되어 있다. 우리 시대에 시, 서, 화, 창의 각 장르들을 이처럼 압축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지역을 갖고 있다는 점이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즐겨 말해왔다. 남도풍속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를 보라. 진도지역 판소리 소사(小史), 이병기와 신치선에서 신영희까지 진도문화 중에서 그 위상에 비해 덜 알려진 것이 판소리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를 이어받은 인간문화재가 진도사람 신영희라는 점을 놓고 보면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여기 그 일단을 소개해두기로 한다. 판소리에 전념한 예인들로 박동준, 신치선, 이병기, 양상식, 허회, 최귀선 등을 들 수 있고, 고수로는 김득수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진도지역 판소리를 말하기 위해서는 신영희의 부친 신치선과 이태백의 부친 이병기(본명 이병규)를 거론해야만 하다. 신치선은 1899년 전남 담양에서 신창연(申昌連)과 나주임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유년을 담양에서 보내고 소년기는 목포에서 성장했다. 당시 명창이던 김정문(송만갑의 제자)에게 흥보가와 수궁가를 배웠다. 1920년대 20세에 협률사에 들어가 활동했다. 나이 40에 진도군 지산면 인지리에 정착하여 신영희를 낳았다. 1946년 임회면 석교리로 이사하여 진도사람들에게 판소리를 가르쳤다. 1948년 의신면 초사리로 옮겨 아들 하나를 더 두었다. 이때 제자들이 안득윤, 박연수, 박옥수, 신홍기, 신천행, 회동리의 허휘 등이었다. 제자 중 지산면 인지리의 박병두는 촉망받는 명창이었으나 1960년대에 요절했다. 초사리에서는 흥보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기도 했다. 제자 안득윤은 군산, 인천 등지에서 크게 알려진 소리꾼으로 경기명창인 전숙희(全淑姬)를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목포로 옮겨 안향년의 부친 안기선을 도와 목포 판소리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춘향전을 창극화하여 전국순회공연 및 만주공연 등을 했다. 1959년 지병의 악화로 타계했다. 이병기는 진도군 군내면 정자리 사람이다. 해방 직후 정의현이 설립한 진도 최초의 국악원에서 판소리 강사생활을 했다. 진도 전역을 돌며 판소리 강습 및 창극지도 및 활동을 했다. 특히 지산면 지역 제자들을 많이 길러냈다. 판소리 강습생이었던 이임례와 혼인하여 지금의 아쟁 명인 이태백을 낳았다. 이 스토리를 토대로 만든 것이 영화 '휘모리(1994년작)'다. 최근 국가지정 판소리 문화재로 지정된 이난초, 해남씻김굿 명인 이수자, 우수영 부녀요 보유자 이인자, 광주시 지정 판소리 문화재 이임례 등이 모두 형제 조카 사이다. 이병기 작곡이라고 전해지는 해물유희요 <빈지래기타령>을 포함하여 <숙영낭자전> <봄이 오면> 등이 전해진다. 진도사람 신영희는 김소희 수제자로 판소리 인간문화재가 된 국창이다. 1942년 2월 6일 지산면 인지리에서 신치선의 딸로 태어났다. 인지리에서 성장하다가 의신면 초사리로 이사하였고 다시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했다. 어려서 부친 신치선에게 판소리를 배웠다. 이후 안향련의 부친 안기선, 정순임의 모친 장월중선, 이난초의 스승 강도근 등 수많은 명창에게 소리를 배웠다. 1975년에 서울에 올라가서 김소희에게 판소리를 배워 명창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소희 문하에서 수업하여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 예능보유자 후보로 있다가 인간문화재로 인정되었다. 흔히 신영희, 안향련, 김동애를 판소리 삼걸이라고 했다. 1976년부터 국립창극단 단원, 1979년 연극'다시라기'로 배우 데뷔를 했다. KBS코미디 쇼비디오자키-쓰리랑부부(도창역)로 장기간 출연하여 판소리의 확장에 힘을 쓰기도 했다. 한승석, 주호종, 조유아 등 지금 한국을 휘두르고 있는 소장 소리꾼들 중 진도출신들이 50여명 된다. 여기에 트로트의 여왕으로 등극한 송가인까지 있으니 가히 소리의 고장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진도는 육자배기나 흥타령, 진도아리랑 등 민요 전승이 활발하다. 대금․아쟁과 같은 기악전승 활동도 활발하다. 이런 사정 때문인지 판소리가 진도 내의 독자적인 유파를 구성할 만큼 활발하게 전승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판소리를 배우고 익히는 자생적인 활동들이 활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신치선, 이병기, 김득수 등이 소리선생으로 활동하면서 마을별로 아마추어 소리꾼들을 많이 양성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진도의 구비문학 및 국악 전승의 기반이 되었다. 국립국악원이 진도에 생기고, 문화예술특구로 지정된 이유이도 하다. 이 지점에서 주목할 데가 진도신청이다. 판소리를 포함한 오늘날의 민속문화를 한군데 갈무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한국 민속문화의 정체를 확인하려면 남도로 와야 하고 남도 민속문화의 핵심을 보려면 진도로 가야하는데 그 중의 핵심이 신청이라는 뜻이다. 문제는 지금 진도에 신청 혹은 그와 유사한 기능을 하는 곳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늦게까지 신청이 남아 있었고 그 기능을 하던 곳이 진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지면상 자세한 얘기를 늘어놓을 수는 없지만 지난 칼럼에서 나주신청 복원을 거론하며 자세하게 설명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전국적으로 보면 나주신청 복원에 이어 경기도가 <재인청>을 복원한다고 한다. 남도지역에서는 화순 능주, 장흥지역에서 움직임들이 일고 있다. 현재의 국립남도국악원이나 진도군립예술단의 수준하고는 결이 많이 다른 공간이다. 신청의 단순 복원이 아니라 미래지향적 열린 공간으로의 신청을 말하는 것이다. 교육과 체험과 체류와 힐링 등 본원적 노스탤지어로서의 안식이 발현되고 확장되는 그런 공간 말이다. 코로나 19이후 진도에 가면, 친정 딸 맞이하듯 명절에 막내아들 맞이하듯 맨발로 달려 나오시는 어머니와 남도지역 태내의 소리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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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전라도 진포 바깥 군산바다에 나타난 진언상, 1406년 8월 11일 태종실록의 기록에 나오는 이름이다. 2017년 이맘때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했던 풍경이기도 하다. 그 한 장면을 다시 소환한다. 나주바다, 지금의 신안군 북쪽 언저리를 돌아 왕등도에 도착한 것은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안 방향에서 왜구들의 배가 쏜살같이 달려들었다. 모두 열다섯 척이었다. 조류 흐름을 타고 있던 터라 왜구의 배들이 순식간에 이물에 이르고 말았다. 대비할 틈도 없었다. 뱃전으로 뛰어오르는 왜구들을 향해 결사항전을 벌였다. 긴 칼과 삼지창이 무용지물이었다. 복부가 터지고 머리가 잘려 물속에 곤두박질치며 비명을 질러댔다. 피투성이가 되어 물에 떨어진 자들이 고물 너머로 쏜살같이 밀려났다. 들물 받은 배들이 엉키면서 지금의 고군산 관리도 깃대봉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왜구들이 함성을 지르며 깃발로 신호를 했다. 다행이랄까. 황급히 선두를 돌리는 왜구들을 뒤로 하고 뱃전의 모든 돛폭을 폈다. 앞섬을 향하여 전력 질주했다. 군산도에 이르니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청정해졌다. 파도만이 호흡을 멈추지 못하고 갯바위에 부딪치며 헐떡댔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고작 40명이었다. 실록에 나오는 진언상은 인도네시아 사람일까? 태종실록에는 진언상을 조와국(지금의 인도네시아)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조흥국 등의 연구에 의하면 태국의 사신들인 장쓰다오의 예를 들며 남중국해 및 동중국해에서 무역활동을 하던 중국 상인 즉 화교일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 진언상이 처음 등장하는 1394년 조선왕조실록에 그에 관한 상세한 언급이 없는 점으로 보아 사신이라기보다는 무역상인 쪽에 비중을 두는 셈이다. 이후 1405년 진언상이 다시 조선을 찾게 되는데 사신이든 상인이든 그 성격을 명확하게 할 수 있는 근거는 약해 보인다. 진상품이라는 약재와 각종의 남방 조류, 물품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도 관건이다. 스위스의 역사학자 우르스 비테를리의 분류로는, 14세기 말-15세기 초 우리와 인도네시아 혹은 인도차이나 여러 지역들 간의 교류는 문화접촉 차원에서 끝나버려 문화관계로 발전하지 못했다고 한다. 조흥국은 이를 동중국해의 해상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해적의 위협과 조선 정부의 무관심이 가장 두드러진 요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언상을 비롯한 동남아 해역을 누리던 이들이 조와국 즉 자바국의 사신이었을지 중국계 상인이었을지는 향후 후학들이 풀어야 할 숙제로 남겨둬야 하는 것일까. 이보다 앞선 여러 가지 문화적 유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것일까. 해양실크로드, 남해로(南海路)를 따라 온 것들 뱃길을 통해서 인도로부터 동아시아 전반으로 전래된 불교를 사례 삼아 본다. 수많은 물질과 문화의 교류를 수반했기 때문이다. 동인도에서 불교경전을 익힌 법현(337~420)이 스리랑카를 거쳐 중국 광동성으로 가는 배를 탄다. 하지만 200여명이 승선한 배가 폭풍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에 표류한다. 이곳 야바제(耶婆提)가 자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지금까지의 해석대로라면 진언상이 왔다는 나라일텐데 수마트라 동부 해안의 어느 도시라는 해석에 비중이 실리는 듯하다. 이후 다시 광동으로 향한 배가 폭풍우에 밀려 410년 산둥반도 칭저우(靑州)에 귀착한다. 나는 이 뱃길이 1394년이나 1406년 진언상이 지났던 뱃길이며 1831년부터 귀츨라프가 만주 타타르족을 만나러 지나갔던 뱃길이라고 생각한다. 심재관의 연구에 의하면 4세기에서 6세기경 사이에는 푸난-광주-남경루트 즉, 인도-스리랑카-푸난-광주-남경 항로를 이용하는 승려들이 늘어난다. 이 항로가 법현의 항로와 같다. 현장과 동시대인이었던 의정(義淨, 635~713)은 해로를 이용해 인도를 왕복한다. 광주에서 출발해 수마트라 팔렘방을 거쳐 인도로 들어갔다가 20여년 후 다시 동일한 해로를 통해 귀환한다. 강희정의 연구에 의하면, 남해로(南海路)로 일컬어지는 해상 실크로드는 한 번에 실어 나를 수 있는 물동량이 육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방대했기 때문에 역사적인 기복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확대되었다. 불교과련 물품 즉 불상이나 보살상, 사리탑, 기타 불구뿐만 아니라 향로에 피우는 향, 음식, 약재를 만드는데 쓰는 각종 식물, 불교관련 용품의 재료가 되는 광물질, 정향, 설탕, 용뇌, 후추, 침향 등의 식물, 대모, 비취조, 앵무새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진언상의 기록에 나오는 항목들과 비교해 봐도 비슷한 것들이 많다. 특히 '삼국유사' 탑상편에 나오는 바, 인도에서 아육왕(Asoka)이 황철 5만7천근과 금 3만금을 인연 있는 땅으로 실어 보냈고 이것이 마침내 경주 땅에 이르러 황룡사 장육존상을 만드는 재료로 쓰였다는 것 아닌가. 이처럼 철광석이나 구리와 같은 광물질이 이 시기 중요한 해상 교역물품이었다는 것이다. 445년 베트남 중부에 있던 참족의 나라 임읍에서 금 만근, 은 10만근, 동 30만금을 중국에 조공했다는 기록도 인용하고 있다. 2004~2005년 사이에 인도네시아 치르본(Cirebon)에서 발굴된 난파선에서 주석괴, 납괴 등 여러 종류의 광물 덩어리가 다량 발굴된 것도 이와 관련하여 해석하고 있다. 기록되지 않은 동남아간 해상교류의 흔적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뜻이니 불교가 수입되었듯 이들 교역품도 한반도와 거래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아직은 오리무중, 시간을 거슬러 옛 자바에서 온 편지를 읽으려는데 무심한 동남풍만 내 마당 가득하다. 슈리비자야에서 황룡사까지 강희정은 동남아시아 교역루트를 황룡사 설화와 연결시킨다. 단순한 인연설화가 아니라 그 이면에는 배를 통해 특정한 물질이 오고갔고 그 가운데 일부는 불교문화를 구성하는 물질적인 요소였다는 것이다. 기록에 나오는 433년의 가라단(呵羅單, 자바 혹은 Kelantna 추정)이나 435년 사파파달(闍婆婆達, 자바 추정)의 사절도 사례 중 하나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지금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동남아의 여러 나라와 그 산물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각주로 빼서 기록해두긴 했지만 신라인들이 국제항구로 발돋음 하던 천주와 광주 등지에서 동남아시아 상인들과 활발하게 교역했을 가능성들을 열어두고 있다. 이들 교역의 중심에는 신라초, 신라방 등이 있는 동중국의 여러 포구들뿐만 아니라 불교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중심지였던 슈리비자야 즉 지금의 말라카 해협을 둘러싼 말레이시아 남부와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자바섬 등이 있다. 인도에서 한반도까지의 물길을 고려해보면 구법승들이 자연스럽게 수리비자야를 들렀을 것이다. 이주형의 논의를 인용한 조흥국은 불교의 동아시아 전래 이후 경전을 얻거나 불적을 답사하기 위해 인도로 떠난 아시아 구법승의 숫자는 대략 695명이라고 주장한다. 이중 이름이 알려진 경우만 해도 165명에 이른다.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승 혜초(慧超, 704~780)도 인도로 출국할 때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고인돌 등의 고고유적, 벼농사권 등 우연이나 자연환경의 영향으로 치부되는 유사성들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말라카해협을 포함한 인도네시아와 한반도와의 물길교류는 충분히 검토 가능한 항목이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슈리비자야에서 온 광물과 종교가 황룡사를 만들었듯이 오늘날 또 무엇이 서로 교류되어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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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9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유네스코 지정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등재된 것은 2003년 11월 7일이다. 2001년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이 지정되고 나서 두 번째 맞이한 경사였다. 이에 앞서 1964년 다섯 번째로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바 있다. 그만큼 판소리가 갖는 국내외적 위상이 크다고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지정 판소리의 영문명은 'Pansori epic chant'이다. 에픽은 장편서사시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고 챈트는 구송(口誦)이라는 점을 강조한 번역이다. 춘향전 심청전 등 예로부터 전해져 온 장편 이야기를 노래로 꾸민 장르임을 분명하게 해두었다. 또 챈트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비롯해 불교의 독경이나 범패 등 성가 혹은 송가를 말하는 것이어서 반복적인 곡조로 부르는 노래 양식임을 알 수 있다. '판'은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 또는 그 장면을 말한다. 처지, 판국, 형편 등의 뜻을 지닌 말이다. '마당'이라고도 하고 '장(場)'이라고도 한다. 판소리가 마당에서 비롯된 예술양식임을 짐작하게 해준다. 따라서 판소리는 어떤 마당에서 옛이야기를 지어 부르는 노래 양식의 하나라고 정의할 수 있고, 여러 과정과 변모를 거듭해 오늘날 독립된 음악양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바닷길 따라 걷는 판소리 마실, 고창 후포에서 보성 율포까지 판소리의 음악적 기원을 전라도 무가로 여기는 연구자들의 주장이 '무가 기원설'이다. 하지만 고전소설이라고 하는 거대 서사가 있고, 판소리꾼으로 불리는 광대들의 활동내력이 있다. 문학적 지형과 음악적 재구성을 두루 살펴야 실체에 더 접근할 수 있다. 두부 자르듯 이것이다 저것이다 일방적인 규정을 하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전라도의 억양과 말하기 방식, 노래하고 의사소통하는 방식 등이 주요하게 채택된 장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거창하게 판소리 미학까지 따질 필요도 없이 소리 자체가 그렇다. 예컨대 '니 광한루 댕개왔노!'라고 아니리를 하면 어색한 것과 같은 이치다. 고창의 바닷가에서 나들이를 시작한다. 우리 판소리의 자존심이라는 김소희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며 판소리를 정리한 신재효의 고을이기도 하다.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후포는 지금도 줄포, 우포, 사포 등 포구 혹은 옛 포구들에 쌓여 줄포만을 형성하는 지류 중 하나다. 김소희 생가는 마을로부터 포구 쪽으로 분리되어 있다. 지금은 바닷물길이 끊겨버렸지만 고대로 거슬러 오를수록 서남해 물길과 맞닿는 공간이다. 후포의 물길을 거슬러 오르면 동학혁명의 주요 인물인 전봉준이 나고 자랐던 고을에 이르고 판소리를 정리하고 가르쳤던 신재효의 고을 고창읍에 이른다. 법성포와 변산반도를 눈앞에 두고 줄포만을 나온 배들은 서남해의 크고 작은 섬들을 거쳐 영산강에 닿고 나주에 닿는다. 김소희는 나중에 박석기가 마련한 담양 지실마을 초당에서 박동실로부터 판소리를 연마하게 되지만 광주가 영산강의 상류라는 점에서 그 문화적 맥락은 서남해 바닷길과 무관하지 않다. 서편제와 여성 판소리꾼의 탄생에 주요한 역할을 했던 흥선 대원군과 신재효의 드라마틱한 삶도 어쩌면 이 물길들을 통해서 탄생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재효의 아버지가 수도한양에 건정(말린 물고기)물류 사업을 하며 큰돈을 벌었다는 점, 신재효 땅을 밟지 않고는 고창 땅을 지날 수 없었다는 항간의 이야기도 조선후기 판소리 후원자들의 지형을 설명해주는 풍경들이다. 고창에서 물길을 따라 내려오면 영광, 함평, 무안, 목포를 거쳐 나주 영산포에 이른다. 서편제의 확산이 사실상 나주사람 정재근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 인정한다면 이 물길을 더욱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나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서편의 판소리는 광주를 비롯해 여러 바닷길들을 돌며 한 지형을 형성했던 것이다. 근대기 진도와 목포에서 형성한 판소리의 맥락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일일이 거론할 수는 없지만 목포의 장월중선과 안향련, 진도의 신치선과 이병기를 기억해둘 일이다. 다시 뱃머리를 돌려 해남, 완도, 강진, 장흥, 고흥으로 향하면 우리나라 판소리의 거대 지류와 형성사를 만나게 된다. 우리 판소리를 크게 동편제와 서편제로 나누고 그 하위분류로 보성소리와 동초소리로 나눈다. 동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동초제는 고흥 거금도 사람 김연수가 재구성한 양식이다. 그의 호를 따서 동초제라고 한다. 동초제를 평생의 업으로 보듬고 살았던 오정숙은 그녀의 소원대로 일면식도 없는 땅 거금도 스승의 곁에 묻혔다. 서편제의 중요한 줄기 중 하나인 보성소리는 나주사람 정재근의 법통을 이은 정응민이 지금의 보성에서 재구성한 양식이다. 순창사람 박유전을 서편제의 시조로 삼긴 하지만 나주와 보성을 빼면 그 맥락을 제대로 좇기 어렵다.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면 구례의 송흥록으로부터 남원, 전주의 소릿길로 이어진다. 하지만 바닷길만 통해서도 우리 판소리사의 많은 부분을 설명할 수 있다. 전라도의 해안을 나들이하며 철썩이는 파도와 탁한 뻘물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섬들을 마주한다. 판소리를 품은 움직이는 그림, 아니 이 풍경은 어쩌면 판소리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남도의 판소리 마실을 가려면 바닷길을 따라 둘러보기를 권한다. 판소리의 탄생과 형성 판소리의 시작은 통상 숙종 연간으로 본다.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가 1754년(영조 30년)이라는 점에서 그 앞 시기인 1674년에서 1720년 사이(숙종 재위기)에 발생한 장르로 보는 것이다. 이에 앞서 광대들이 지어 부르던 노래나 연극 연행을 토대로 보는 견해에 의하면 조선 전기로 소급해 올라갈 수도 있다. 광대들의 연행 '광대소학지희'를 근거 삼은 해석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판소리로 정착된 것은 19세기 말경으로 본다. 문학적 내용이 풍부해져 형식이 완성되었고 양반층을 포함한 여러 지층의 동호인들을 양산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후원자(패트런)들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양반층의 이념과 기호가 반영된 시기를 전기판소리라 하고 중상인 계층의 부상과 후원을 받게 되는 시기를 후기판소리라 한다. 판소리 연행 시기를 굳이 나누자면 형성기, 전기 판소리, 후기 판소리, 무형문화재와 유네스코 지정기 등이 되겠다. 판소리를 고려시대로 소급해 이야기하지 못하는 것은 노래 양식이나 이야기의 편성 혹은 연행 문법들이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명의 고수와 한명의 소리꾼이 짝을 이루는 양식이 언제부터 고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시기부터인가 판소리의 고유한 법제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일고수 이명창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고 소리꾼, 고수, 관객을 3요소로 보는 관점도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장단과 선율에 싣는 소리, 말로 설명하거나 묘사하는 아니리, 몸짓으로 표현하는 발림(너름새라고도 한다) 등이 판소리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정착되었다. 판소리 창법은 아정한 음악이라고 하는 가곡이나 가사, 시조와는 판이하게 다르게 탁성을 강조하는 편이다. 수리성이니 천구성이니 하는 발성 관련 용어들이 그래서 나왔다. 수리성은 쉰 목소리처럼 껄껄하게 내는 목소리를 말하고 천구성은 타고난 명창의 틔어 나오는 소리를 말한다. 판소리를 경상도 방언이나 평양 방언으로 노래하면 그 맛이 살지 않는 이유와 견주어 살피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판소리 문법이나 발성의 토대는 전라도 방언 혹은 전라도 말하기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또랑광대 판소리, 영어로 부르는 판소리, 현대음악들과의 콜라보레이션 등 다양한 시도들이 일어나고 있다. 또 다른 예술장르로 발전할지, 판소리의 무한한 확장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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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1)"아버지는 어린 내게 글쓰기를 시키셨다. 선거 때마다 나누어주던 한 장짜리 달력의 뒷면이며 어쩌다 얻은 빛바랜 종이들이 내 공책의 전부였다. 아버지, 무슨 글자를 쓸까요? 무슨 글이든 써라. 글자라고 생긴 것이면 무엇이든 좋다. 일자무식 아버지는 내가 쓰는 것이 무슨 글자인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하셨다. 단지 여백을 채우기를 바라셨다. 희거나 빛바랜 폐지들이 까맣게 채워지는 것을 흡족해하셨다. 마을 구장께 쌀섬 져다주고 수학했던 천자문, 일찍 깨친 한글들, 아무런 의미 없는 그림들을 마구 그렸던 것 같다. 망뫼산 꼭대기 성근 별 같던 글자들은 그렇게 우리집 마당에 내려앉았다." 내가 2020년 목포문학상(남도작가상) 소설부문을 수상하면서 남긴 소감 중 일부다. 글을 쓴다는 것, 그것이 소설이든 시이든 혹은 논문이든 내게는 이 땅 민중들의 삶을 추적하는 일이었고, 그 행간과 여백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이 섬 저 섬, 30여년 넘게 동아시아 사람들을 좇아 민속풍정을 기록했다. 내 글쓰기의 연원이랄까. 어쩌면 낙서에 불과하였을 습관들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구름 같던 문자들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내게 이른다. 고금의 시간을 거스르고 안팎의 공간을 횡단한 언어들이 내 아둔한 정수리에 내려앉는다. 긴 밤 지새우며 이들을 조우한다. 아직 동이 트지 않았다. 미명의 시간들을 상고한다. 내가 들었던 붓(筆)은 어떤 색깔이었을까. 지금 들고 있는 붓은 어떤 색깔일까. 작은 권력에도 꺾이고 마는 졸필과 시퍼런 칼날마저 오히려 베어내는 대필의 어느 모퉁이였을까. 관용구들이 있다. 붓을 던지다. 붓을 놓다. 붓을 대다. 붓을 들다 등이 그것이다. 흔히 칼(총)보다 붓(펜)이 강하다는 말을 한다. 문학이나 언론의 영향을 빗댄 언설이다. 기원전 7세기 아시리아 설화에서 아히칼은 '말은 칼보다 강하다'고 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유리피데스는 '혀는 칼보다 강하다'고 했다. 모두 같은 말들이다. 지극한 문학적 수사만은 아니다. 김대중 정부시절 제창했던 '햇볕정책' 또한 무관하지 않다. 이솝우화 '북풍과 태양'에서 따온 말이다. 어느 날 거리를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벗길 수 있는지를 놓고 북풍과 태양이 힘겨루기를 한다. 다 아는 대로 북풍은 나그네를 더욱 움츠리게 하였지만 태양은 외투를 벗게 만든다. 무력을 무력으로 대응하지 않는 방식, 여기서의 태양이 곧 붓이다. 사례들은 고금을 관통하여 디지털시대로 이어진다. 댓글이나 언어폭력으로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늘어난다. 칼보다 붓이 무섭다는 증거다. 붓의 위력이 칼보다 크다는 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광주 진다리붓, 태모필에서 모유필까지 붓은 무엇인가? 문방사우(붓, 먹, 종이, 벼루)서화용구의 하나다. 재료에 따라 짐승의 털을 모아서 만든 모필, 대나무를 잘 두드려서 만든 죽필, 볏짚을 골라서 만든 고필, 칡뿌리나 넝쿨로 다듬어서 만든 갈필 등으로 나눈다. 모필은 청설모, 족제비, 양, 토끼, 너구리, 사슴, 족제비, 노루 등의 털을 이용한다. 족제비 꼬리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과 염소털로 만든 양모필(羊毛筆)을 제일로 친다. 그 중에서도 전남 서남해지역 나주, 영암, 영광, 함평 특히 진도 완도 신안 등 섬지역에서 생산된 염소털이나 강원도 등 추운지역 생산품을 최고로 친다. 암염소보다는 흰색의 숫염소털이 좋다. 광주 백운동 진다리에 붓 만드는 이들이 대거 몰려 타운을 이루었던 까닭이기도 하다. 숫염소털은 가늘고 길다. 암염소털은 짧고 굵다. 암염소털은 새끼에게 양분을 뺏기는 이유 때문인지 털끝이 갈라지기에 양질의 붓을 만들기 어렵다. 양모필, 황모필 외에 토끼털로 만든 토호필(兎毫筆), 노루의 앞가슴과 겨드랑이의 흰털로 만드는 장액필(獐腋筆),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 , 돼지의 털로 만든 돈모필(豚毛筆), 말의 꼬리와 갈기로 만든 마모필(馬毛筆), 개털로 만든 구모필(狗毛筆), 청설모 꼬리털로 만든 청모필(靑毛筆), 소의 귀속 털로 만든 우이모필(牛耳毛筆), 닭털로 만든 계모필(鷄毛筆), 꿩털붓, 오리털붓 등이 있다. 식물성 재료인 초필로는 모필 이전부터 사용하던 대나무 붓 죽필(竹筆), 찰볏짚과 오지 볏짚으로 만든 고필(稿筆), 칡넝쿨로 만든 갈필(葛筆), 띠풀로 만든 띠풀붓, 갈대로 만든 노필(蘆筆) 등이 있다. 붓대롱으로는 신우대, 마디대, 오죽대는 물론 옥관, 금관, 은관, 동관이나 도자관, 상아관, 소뿔(牛角)관 등이 있다. 도모칼, 치게(빗), 체, 저울, 작편판, 봉밀, 불솔, 지짐대, 다리미, 한천(우뭇가사리)풀, 가위, 신주방망이, 대잡이틀, 목침, 대칼, 호비칼, 치죽칼 등의 도구들이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방식으로 만든 붓들이 있는데 광주시지정 무형문화재 문상호씨의 경우, 죽필, 고필 등 특허 받은 붓 외에 태모필과 모유필까지 제작해두었다. 태모필(胎毛筆)은 태아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자란 머리털 붓으로 일본에서는 탄생필이라고 한다. 이 붓으로 공부를 하면 크게 성공한다는 속설이 있다. 모유필(母乳筆)은 어머니의 머리털을 머리빗을 때마다 십수년간 모아서 만든 붓이다. 자르거나 손대지 않은 즉 낭자머리 같은 본래의 머리칼이어야 가능하다. 태모필이나 모유필은 관상 혹은 기념용이기 때문에 실제 사용하려면 다른 털과 함께 제작해야 한다. 태고 이래 인류가 고안한 문자나 그림과 함께했을 붓의 생명은 언제까지 이어질까. 디지털시대를 맞아 필기구 자체의 수요가 둔화된 지금이지만, 캘리그래피(Calligraphy)의 부상 등 붓은 또 다른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붓으로 환유되고 문학으로 은유된 인문학의 힘은 변함없이 칼보다 위에 서있다. 이 땅의 수많은 이들이 붓을 드는 이유일 것이다. 내 붓끝은 지향한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고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은 이름도 빛도 없는 사람들 혹은 이름 모를 들풀과 곤충과 나무와 숲들, 그 행간과 여백을. 나는 위의 소감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폐지의 여백이 영문 모를 낙서로 채워졌던 유년으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리 와버렸을까. 어느 해 한 장짜리 달력 뒷면을 절반가량 채우던 즈음, 아버지는 꿈길로나 오실 길을 떠나셨다. 삼십 여년을 훌쩍 넘겼다. 돌아와 거울 앞에 선다. 소설이라곤 공부해본 바 없는 내게 뜬금없이 덧씌워진 이 무게를 어찌 감당해야할까. 동아시아 나들이를 천명처럼 여기고 살았지만 새로운 이 여행은 두렵고 떨리기만 하다. 내 삶의 마지막 순례이리라. 다시 채비를 한다. 쓰여 지지 않은 지상의 시간, 다만 아버지 일러주신 흰 종이가 놓여있을 뿐이다. 무색의 여백이 가없이 넓다." 필장(筆匠) 문상호(1942~, 광주시지정 무형문화재 제4호)는 전남 장흥 출신이다. 1969년 광주 남구 백운동 진다리로 이사 오면서 필장 일을 배우게 되었다. 27세 때였다. 진다리는 긴 돌다리가 있다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근대기 이후 붓 제작 명소 중 한 곳이다. 지금의 방림동, 봉선동, 백운동, 양림동을 이어주는 다리로 벽도교 진다리라 했다. 만주 대동필방에서 붓 만드는 일을 하다가 고향에 정착한 박순씨와 제자 최유일씨에게 장인 일을 배웠다. 조선후기로부터 이어진 전통이다. 1970년대 전후에는 염소털붓을 가장 많이 만들었다. 붓을 만드는 일 중 재료를 구하러 다니는 일이 절반이다. 양질의 재료를 구해야 좋은 붓을 만들 수 있다. 서울에서 대신당 필방을 운영하하기도 했고 경남 밀양의 박무현씨에게 기술을 배우기도 했다. 죽필, 고필 등 특허도 가지고 있다. 제자로 오복자, 문홍주씨 등이 있다. 문상호씨와 함께 고 안종선의 아들 안명환이 아버지를 이어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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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0)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리 집 제사상이나 차례상의 구성은 늘 본상과 정체모를 상, 그리고 성주상 등이었다. 물상들에 대한 지각이 생긴 후였을 것이다. 어머니께 정체모를 상에 대해 여쭸다. 작은아버지 말씀을 하셨다. 혼인하지 못한 채 돌아가신 내력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늘그막에 나를 낳으셨으니 1900년생인 작은아버지를 내가 알 리 없었다. 아버지는 동생을 잃고 수년간을 자다가 울고 자다가 울고를 반복하셨다고 했다. 친형제라지만 무엇이 그토록 아버지를 애달프게 하였을까? 작은아버지는 도회지에 나갔다가 돌아오자마자 격리되셨다.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병막이었다. 지금은 알 수 없는 어떤 전염병이었던 모양이다. 거적과 마람(이엉)으로 둘러친 병막에서 얼마 견디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바람 숭숭 뚫린 거적때기, 죽은 자들을 뉘는 초분 같은 병막에서 홀로 겪었을 스무 살 남짓 총각의 쓸쓸함, 어떤 수사를 동원한들 그 절대고독을 형용할 수 있으랴. 혼인하지 못했으므로 형인 아버지가 동생의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제주도에서는 '후손이 없는 망자의 영혼을 위한 제사'를 '까마귀 모른 식게(제사)'라 한다. 제주도 무가 '차사본풀이'에서 까마귀는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존재다. 까마귀도 모르게 조용히 지내는 제사라는 뜻이다. 한센병을 포함한 온갖 역병에 대한 대응이나 처방은 격리에 방점을 두었던 것 같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소록도처럼 하나의 섬에 환자들을 가두거나, 병막을 설치해 격리하는 방식이다. 처방만 달라졌지 지금의 코로나19에 대한 대응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대면을 강조하는 것도 사실은 간접적인 격리방식의 하나다. 심각한 역병에 그나마 격리조치를 할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랄까. 그렇지 않으면 공동체 다수가 피해를 입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경신대기근이다. 경신대기근 경신대기근은 1670년 경술(庚戌)년부터 1671년 신해(辛亥)년에 일어난 기근(饑饉)으로 두 간지의 앞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 18대 현종 때 일이다. 역병이 돌고 흉년이 들어 굶어죽는 정도를 훨씬 뛰어넘는 참상이 발생한다. 코로나19사태를 두려운 마음으로 대할 수밖에 없는 역사적 경험이라고나 할까. 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의 기록들이 끔찍하다. "기근이 이미 극에 달하여 살해하고 약탈하는 변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만 무덤 도둑에 있어서는 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보성군의 교노(校奴) 일명과 사노 최일과 남원부의 어영군 김원민과 사노(私奴) 철석 등이 남의 고장(무덤)을 파 옷을 벗겨서 버젓이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었는데 추위에 다급하였기 때문이라 하며 군말 없이 자복하였습니다." 입을 것이 부족하여 무덤을 파고 죽은 자의 옷을 벗겨 팔았다는 것 아닌가. 전쟁기에 죽은자들의 이불을 걷어내 빨아서 다시 사용했다는 구술보다 참혹한 풍경이다. 이 참상은 급기야 잔혹스런 풍경을 향해 달린다. 제주 목사 노정이 기근에 대해 치계한다. "본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천2백60여 인이나 되고 남은 자도 이미 귀신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먹었기 때문에 경내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어서 마소를 잡아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 현종실록 19권 4월 3일의 참혹한 보고서다. 어디 제주뿐이겠는가. 전국의 모든 지역에서 기후재앙, 가뭄, 홍수, 지진, 태풍, 역병이 확산되고 전국은 죽은 자의 시체로 덮이기 시작한다. 심지어 자신의 아이를 삶아먹었다는 보고가 올라올 정도로 천륜과 인륜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조선인구의 10%에 달하는 150~200만 명이 죽어나갔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이 참 지혜다. 경신대기근이 저편에 있다면 이편에 코로나19의 전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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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8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마을'은 'ᄆᆞᆯ'과 'ᅀᆞᆯ'의 합성어다. 'ᄆᆞᆯ'은 모으다, 모이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마을'을 '말'이라고 부르는 곳은 강원, 경상, 충남, 평안, 함경, 황해, 중국 동북삼성 등 광범위하다. 모였으니 '떼거리'다. 예컨대 여러지역에 분포한 '말무덤' 유적들은 '말(馬)'의 무덤이 아니라 어떤 떼거리의 무덤을 말한다. 유사한 말이 '무리(group)'다. 달무리, 해무리 등의 용례가 남아있다. 영어권의 Village, 중국의 촌(村)이나 툰(屯)이다. 일본의 무라(むら/村)가 흥미롭다. 우리말 '말(마을)'의 고어가 '모라'이기 때문이다. 단국대 남풍현교수에 의하면 탐라의 옛 이름은 탐모라(耽牟羅)다. 울진 봉평리 신라비(524년)에도 거벌모라(居伐牟羅)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일본서기에는 백제의 구례모라성(久禮牟羅城), 등리지모라(騰利枳牟羅), 포나모라(布那牟羅), 모자지모라(牟雌枳牟羅) 등을 열거하고 있다. 모두 마을이란 뜻이다. 'ᅀᆞᆯ'은 '슬'이나 '실'의 고어다. '마실간다' 할 때의 '마실'이 용례로 남아 있다. 곡성 돌실나이의 '돌실'이나 전국에 분포하는 '밤실', '닭실' '비실' 등도 그러하다. 모두 계곡(谷)을 낀 들판, 곧 넓은 '골짜기(고을)' 형국이다. 배산임수(산을 등지고 물을 품은 형세)의 공간에 어떤 주체들이 모인 형국을 '마을'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ᅀᆞᆯ'은 특정한 공간이요 'ᄆᆞᆯ'은 유동하는 주체들이다. 문제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화해온 마을의 실체를 주목하는 일이다. 유기적인 네트워크의 확장이나 생산소비구조의 전복, 절대인구의 감소와 관계인구로의 전환 등이 대표적이다. 고정된 공간과 유동하는 주체들간의 네트워크를 주목해야 마을의 실체를 볼 수 있다. 전통적인 마을의 이미저리 속에 함정이 있다. 대동계니 상포계니 품앗이니 따위의 공동체 안에 은닉된 이데올로기들이다. 대동의 마인드와 지주 소작 관계, 남존여비 따위를 구분하는 일이 중요하다. 근자에 유행하는 도시재생이니 마을만들기니 어촌뉴딜이니 하는 따위의 새로운 디자인들속에서 산견되는 오류들이다. 수축사회의 수렴을 담아내지 못하고 호혜평등의 민주를 담아내지 못한 채 끊임없는 증식과 재화의 확장만을 꾀하고 있다. 비전 없는 달리기, 브레이크 없는 무한욕망에 대한 질주를 멈주치 않으면 군중 속의 외로움들은 늘어갈 수밖에 없다. 새로운 마을을 만드는 것보다 본래적인 마을의 기능을 되찾는 일이 시급해보인다. 아이들을 위한 공동육아의 전통, 삶 자체로서의 마을학교, 요양원에 끌려가지 않고 내 마을에서 임종할 권리, 관계인구의 회복 등이 해답을 줄수 있다. 진도 가사도에서는 초상이 나면 전국에 흩어져 있는 갑계원 동창계원들이 모두 와서 상례를 치룬다. 마을에 거주하지는 않지만 마을 구성원임을 알 수 있다. 해남군 농촌신활력플러스 추진단을 이끌고 있는 박상일 대표에 의하면, 이러한 관계인구와 마을 커뮤니티케어, 가치농어업 등으로의 전환이 마을 회복운동의 필수 요건들이다. 나도 마을의 정체와 비전에 대해 배워가며 이 실험을 주목하고 있다. 거향(居鄕)에서 유향(留鄕)으로, 노마드시대 유향(流鄕)민들이 막다른 벼랑에 몰렸을 때 비로소 회향(回鄕)할 수 있는 노스탤지어의 재구성, 내가 구상하는 마을은 대체로 이런 디자인이다. 나는 끊임없이 꿈을꾼다. 적어도 현대인들에게 이 땅 어딘가 마음의 고향마을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남도인문학팁 잃어버린 본향(本鄕) 레퓨지움(Refugium) 레퓨지아(refugia)는 빙하기와 같은 대륙 전체의 기후 변화기에, 다른 곳에서는 멸종된 것이 살아 있는 지역을 말한다. 영국 본머스대 연구팀에 의하면,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날 때 빙하기가 닥쳐 다양한 고대 인류들이 '레퓨지아'라는 곳으로 모였다고 한다. 유발 하라리는 보이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능력 때문에 인류가 지구별의 주인공이 되었다고 말하지만, 이 과학적 분석은 빙하기 때문에 인류가 지구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하는 중이다. 유기체가 소규모 제한된 집단으로 생존하는 지역 또는 거주지라는 말이다. 레퓨지움(refugium)은 광범위하게 분포했던 레퓨지아의 복수형이다. 이들 지역에서 생존을 지속가능하게 했던 요인은 기후적, 지형적, 생태적, 역사적, 그리고 문화적 특성들이다. 레퓨지(refuge)는 피신처, 은신처, 난민들의 도피시설 등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바꾸어 말하면 레퓨지아가 아니면 인류는 멸종되었다는 뜻이다.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가 레퓨지아이고, 내가 회향(回鄕)이라 명명하고 복원 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전통마을 운동이 겨냥하는 곳이기도 하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 했다. 여우도 죽을 때 머리를 향한다는 동굴의 의미가 곧 본향(本鄕)으로서의 마을에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 전반에 분포되어 있는 홍수설화의 발원지다. 홍수로 세상 모든 것들이 물에 휩쓸려 죽고 마지막 남은 음양의 남녀가 새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세설화의 표본이다. 내가 말하는 본향(本鄕)은 나의 시조가 태어난 본토의 의미를 넘어서는 마음의 고향이다. 그것을 레퓨지움 본향이라 명명해본다. 세파에 시달리고 죽을 것만 같은 역경들을 무수히도 견뎌내며 살아왔던 우리들이 잃어버린 곳, 피난처처럼, 어머니의 품처럼, 인류 시원의 동굴처럼 영육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본향 마을이다. 이 마을이 살아야 사람이 살고 나라가 살며 지구별이 산다. 나는 오늘도 마을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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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일 년여 전 나는 이 지면을 통해 '어머니란 무엇인가'를 말한 적이 있다. 아들 없던 예순여섯 내 아버지에게 씨받이로 오셔서 나를 낳으셨지만 족보에도 그림에도 그 어떤 글에도 기록되지 않은 어머니 얘기였다. 더불어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 가신 이 땅 민중들에 대한 행간을 읽어내려 했던 노정이기도 했다. 내 생모의 호명은 '개골네'였다. 고길(개골)마을의 여편네라는 뜻이다. 갯가의 골짜기 마을이었으니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아들딸 넷을 낳았으나 본 남편이 병사하였다. 병수발로 작은 재산마저 거덜 난 어머니는 입에 풀칠하기조차 어려웠다. 두 딸은 식모살이 보내고 작은 아들은 고아원으로 보냈다. 큰 아이 하나 부둥켜안고 살았다. 아들 낳아주면 밭뙈기를 떼어주겠다는 아버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굶어죽는 일은 면하게 되었다. 하지만 자미원의 궁문을 열어 나를 이 땅에 내려놓으신 순간, 치욕적인 호명 씨받이가 덧붙여졌다. 재작년 졸저 <산자와 죽은자를 위한 축제>(민속원, 2018)를 내며 서문에 그렇게 써두었다. 음력 5월 24일 유시(酉時) 내 생일날이자 내가 태어난 바로 그 시간에 운명하신 뜻이 무엇일까라고. 참으로 기묘한 일시에 운명하신 어머니를 재삼 묵상한다. 바리데기가 막내딸로 태어나 버림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온 내력을 닮아서일까. 탈북녀 바리가 천변만화의 역경을 넘어 구사일생하는 내력과 같아서일까. 자식 없던 노인에게 몸이 팔려 아들자식 낳아준 또 하나의 당금애기여서일까. 한 몸 희생하여 자식들과 눈 먼 세상을 구원한 또 하나의 심청이어서일까. 내 묵상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민중신학자 안병무가 남긴 유작 '선천댁'에 가 닿는다. 이 또한 그의 어머니 이야기가 소재다. 구미정 교수는 그의 글 '데기-되기: '선천댁'에 나타난 안병무의 '민중 구원론 다시 읽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안병무의 어머니 선천댁은 비문자 계층의 여성으로, 당대 거의 모든 여성들이 그러했듯이 가부장적 가족제도 안에서 차별과 희생을 겪었다. 식자인 남편의 모진 학대와 냉대 속에서 부엌데기로, 소박데기로, 바리데기로 살았다. 그러나 그녀는 자기를 버린 남편과 그 남편을 빼앗아간 첩에 대해 분노와 증오의 감정을 품기는커녕 연민과 자비로 보듬었다." 안병무의 민중신학이 선천댁의 '연민의 윤리'에서 발견한 민중의 자기초월적 단초라는 얘기다. 14세기 독일 신비주의 사상의 대가였던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하느님-아기를 낳음'에 견주어서도 설명한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본질을 '낳음'이라고 말한다. 오구굿 바리데기를 빌어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하느님의 본질은 '또 낳음'이고 '되기'이며 다시 살아오는 그 무엇 아닐까. 그래서일 것이다. 오구굿의 말미는 "되아 오소 되아를 오소서"라고 노래한다. 죽은 자가 살아서 그 어떤 무엇으로 살아오는 과정이라는 함의다. 나는 내 어머니를 묵상할 때마다 늘 이 지점을 서성인다. 내 운문적 정조가 머물러 있거나 어쩌면 방황하는 경계일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버림받았지만 재생과 환생의 화신이 된 바리데기가 있고 당금애기가 있으며 연꽃으로 환생한 심청이 있다. 남도인문학팁 바리데기의 복선(伏線), 오구굿의 배후 남도지역의 오구의례를 위한 장치들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무속의례 자체가 매우 소박한 지역적 특색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리듬과 선율, 곧 장단과 노래를 중심에 두는 심미안의 발로 때문이다. 당골은 작은 시루에서 넋당석을 거쳐 긴 실을 뽑아내며 바리데기의 내력을 읊는다. 실은 생명줄이기도 하고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다리이기도 하다. 정월이라 초하룻날 납채(納采)를 들이고 이월이라 열이렛날 사성(四星)을 들인다. 삼월이라 삼짇날 부부인연을 맺었더니 태기가 생긴다. 한 달 두 달 이슬 모아 삼석달에 입덧 나더니 연이어 달을 거치고 열 달 만에 바리데기를 낳는다. 일생의 서사에 다름 아니다. 긴 출생의 여정 과정에서 일곱이라는 7수와 막내딸의 버림, 아버지의 병듦과 바리데기의 서천서역 여행이 융숭 깊게 노래된다. 부모를 구하기 위한 약수는 아홉 해 동안의 혼인생활과 아홉 아들을 낳아주는 조건으로 완성된다. 이후 아홉 아들과 더불어 좌정하니 오구 시왕(十王)이다. 내가 주목하는 이 드라마의 미장센들은 실과 시루와 넋당삭과 알곡들의 배후에 직조된 씨줄과 날줄의 은유들이다. 바리데기가 구하는 약수는 환생초이자 불로초이고 거듭남의 핏물이자 재생의 떡 덩어리다. 이승과 저승, 현실과 환상, 과거와 현재, 시공을 넘나드는 무가의 사설들이 촘촘하게 배열되어 노래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불교 수용 이후 많은 변화들을 거쳤거나 재구성되었겠지만 바리데기 이야기가 죽은 자의 넋을 위무하는 절차로 연행되는 이유를 나는 여기서 찾는다. '되아 오소서' 오구굿 사설의 말미가 이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망자의 재생 혹은 부활에 대한 염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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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속내우 걷어 입고/ 은동우 옆에 끼고/ 은또가리 팔에 걸고/ 앵도쪽박 손에 들고/ 수양산을 물으실제/ 양월공산 깊은 밤에/ 승냥이 슬피 울고/ 호포는 왕래하니/ 보리데기 놀라/ 산신님께 축수하니/ 명명하신 황천후토/ 사해용왕 신령님네/ 일개 여자/ 정성을 살펴서/ 시왕산 가는 길을/ 어서 급히 득달하야/ 소원성취 하오리다. "목포대 이경엽 교수가 중심이 되어 채록 집필한 '해남씻김굿'(민속원, 2018)의 오구굿 중 한 대목이다. 버림받은 바리데기가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여 서천서역국으로 떠나는 장면을 동서고금의 고사들을 차용해 노래하고 있다. 서천서역국은 저승이다. 하지만 백이숙제가 절의를 지키다 죽은 수양산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진시황 때 난리를 피해 숨어 바둑 두던 상산사호(商山四晧)의 상산(商山)으로 소환되기도 한다. 바리데기 신화는 진도지역을 제외한 우리나라 전 지역 무속의례에서 연행된다. 이를 오구굿이라 한다. 왜 진도지역이 제외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지면을 달리해 소개하겠지만, 바리데기를 주인공 삼은 오구굿의 깊이와 넓이를 쉽게 재단하기 어렵다. 우리나라 무속의례의 중핵이자 융숭 깊은 이면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죽은 이의 넋을 위무하는 사령제(死靈祭)의 하나다. 남도지역의 씻김굿, 서울지역의 지노귀굿, 함경도지역의 망묵굿 등이 한 통속이다. 사람이 죽어서 행하는 것을 '진오구굿'이라 하고 죽은 지 일정한 기간이 지나 행하는 것을 '마른오구'라 한다. 남도씻김굿에서 초상에 치루는 굿을 '곽머리씻김'이라 하고 일정한 기간 이후에 행하는 것을 '날받이굿' 혹은 '마른씻김'이라 하는 것과 같다. 해남 무속의례를 참고해보면 부정, 안당, 선부리, 오구굿, 제석굿, 손님굿, 넋올리기, 고풀이, 씻김, 길닦음, 퇴송 등의 순서로 연행한다. 남도지역에서는 오구굿을 오구물림이라고도 한다. 의문이 든다. 망자를 천도하는 의례 중에서 왜 바리데기라는 주인공이 등장할까. 여러 연구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바리데기는 아들을 희구하는 세상에서의 버림받은 존재이며 남성으로서의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는 여성 캐릭터일까? 황석영이 탈북녀 바리를 처참한 어선 물고기칸에서 건져내듯, 바리데기 신화의 이면, 그 배후에는 어떤 상징과 뜻들이 도사리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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