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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20가야금병창이란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연주형태로 단가나 판소리 중에서 몇 대목 또는 민요를 가야금 반주와 함께 노래하는 음악으로 성악과 기악이 어우러진 음악이다. 박귀희 명창은 가야금병창을 일러 ‘가야금은 가야금대로, 노래는 노래대로 잘해야 되기 때문에 어려운 음악’이라고 하였다. 가야금과 소리의 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다. 가야금병창의 발생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김제철 명창이 가야금병창제라는 석화제 판소리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고종 때 명창 박팔괘에 의해 발전되어 오태석에 의해 유성기음반으로 처음 선보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황의 <판소리 소사>에 ‘현행과 같은 형식의 병창의 김창조가 그의 전용 고수가 갑자기 없어지자 소리를 가야금 반주에 얹어 불러본 것이 최초이다.’라는 설이 있지만, 한, 두 사람에 의해서 가야금병창이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음반은 유채진의 2017년 1집 <춘향가>에 이은 2번째 음반이다. 단가 ‘호남가’와 ‘명기명창’, 심청가 중에서 10대목과 민요가 2트랙에 수록되어 있다. 연곡으로 이어진 첫민요 ‘휘모리-노들강 초록물-박꽃 핀 내 고향-님 그린 회포-어부의 노래’와 2번째 민요 ‘들국화-사철가’는 강정숙 명창(스승)과 송영숙 연주자가 같이 참여하고 있다. 장구는 김청만 명고가 잡았다. 유채진 연주자는 추계예술대학교 국악과, 용인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국악과를 졸업하였다. 국가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산조 및 병창 이수자로 2016년 제27회 김해 전국가야금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강정숙 명창을 사사하였다. 사단법인 가야금병창보존회 이사로 여러 대학에 출강하고 있다. 연주자는 가야금병창은 영혼의 선물이자 삶의 원동력인 동시에 끝이 안 보이는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설파하면서 이 음반 작업을 했다고 한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야금병창 음반이다. 가야금병창은 ‘단가를 부르면 담담하고 정감어린 화기가 감돌고, 판소리 대목을 부르면 소리의 다른 멋을 느끼게 해주며, 민요를 부르면 흥겨운 춤사위가 깃들어 진다.’라고 하였다. 이 음반에서 이것을 느낄 수 있는지는 감상자의 몫이다. *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ADCD-025&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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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를 읽다’(1)‘이춘희를 읽다’는 인간문화재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자전적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를 요약, 소개하는 글이다. 경기민요 명창의 고난과 영예의 역정을 통해 동시대 국악인들에게 참 명인의 지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함께하기 위해서다. 3회에 걸쳐 전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이춘희를 읽다’(1) 1. 소리에 눈뜨고, 소리 길에 들다 경기소리 명창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발간되었다. 영어로는 "The Life and Art of Lee Chun Hee, Master of Gyeonggi Folk Songs”이라고 하여 ’경기민요 명인 이춘희의 삶과 예술’이라고 풀어 표현했다. 기존의 서사체 전기(傳記)의 틀을 벗어나 현재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오늘에 이른 지난 길을 정리하고, 다시 가야할 길을 열어 보이는 생생한 보고서이다. 이런 성격은 서명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전해 준다. 선생의 호(號) ‘旦聲’(아침의 소리)의 의미를 문장화 한 것인데, 아직도 새날의 아침을 기다려 맞으며 해야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책머리 발간사는 단 1쪽으로 간명하다. 네 토막의 글 중 세 번째 토막이 직접적인 발행 목적으로 읽힌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에게 소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목숨과도 같은 여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스승으로서 경기민요인으로서 잘 살아야하겠다는 책임감과 생각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제자, 둘째는 여식(서정화)에게, 그리고 관객(펜)들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이렇게 책임을 스스로 내세운 것은 어느 정도는 할만큼 했음을 드러낸 자신감이며 권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춘희’를 읽는 무게감을 갖게 해 준다. 곧 "나처럼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나처럼 노력해라. 그러면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라는 단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분의 평가를 발간사에서 제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 생전에 자전적 구술서를 낸 다는 것 자체가 자신감의 표현 아닌가. 우리가 부러워해야 하는 명인의 자부심이다. 우선 서연호(고려대)교수가 성음에 대해 "어떤 고음에도 잡티가 전혀 없는 잘 훈련된 목과 탁월한 성량, 음처리에 빈틈이 없는 완결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고음과 성량은 천성이지만 ‘완결성’과 ‘잘 훈련된’ 것에 방점을 두었다. 소리하는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은 김해숙(前 국립국악원) 원장의 진술이다. "경기민요에 어눌하던 나의 귀를 확 트이게 한 경험을 하게 하였는데, 경기민요를 그토록 고졸하고 품격있게 느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찬사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와 찬사는 결코 과장되거나 이 분들만의 취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 오래전에 한 축사에서 규정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대가의 이만한 평가와 찬사는 이 책의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해 준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어린 시절 소리 인연과 입문 과정을 담았다. 출생지가 서울 본토박이 한남동 부군당(府君堂) 근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매년 정월 초하루 날의 마을굿을 보며 자랐다. 무당집에서 당집까지의 행렬에 끼어 악기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으며 한살 한살 자랐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사발가’를 가슴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들은 ‘사발가’의 굿거리장단이 ‘소리병’의 씨앗이 되어 각인되었다. "어린 춘희가 만난 것은 노래였다. 노래에 대한 끼를 발견하고 난 이후에 노래와 함께 찾아오는 밝은 기운과 생동감은 어린 춘희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건의 시작은 한남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음악시간에 부른 ‘봄 아가씨’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라디오를 소리선생으로 삼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요와 민요와 대중가요는 청각이 예민한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특히 장안의 화제였던 일일연속극 ‘장희빈’의 주제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민요조 구성진 창법의 황금심을 동경했다. 대중적인 노래의 매력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18세가 되던 1968년, 김부해(金富海,1918~1988)가 운영하는 가요학원을 찾았다.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악보를 받아 피아노 반주에 의한 반복 연습을 하는 과정이다. 희망을 갖고 2년을 다녔다. 선생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김부해 작곡의 ‘백령도 처녀’라는 곡을 가수 최숙자가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 코러스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갑지 않았다. 자신에게 만족감 같은 것이 없었다. 가요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마음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문득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대중가요가 아니라 민요라는 것을 깨닫고 민요학원을 찾게” 된 것이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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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薄色, 소리는 絶色 -귀명창의 연인 李花中仙일제시대의 판소리는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기는 하였으나 이전 황금기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시대의 판소리는 5명창으로 알려진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이들의 뒤를 이어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김여란. 김연수 등이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이화중선의 소개로 송만갑을 만나 국창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심청가 한 대목을 듣고는 온통 혼을 빼앗겼다고 고백할정도로 당시 이화중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화중선은 명창 박녹주와 달리 그녀의 탄생과 죽음 대목이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고향만 해도 부산 동래, 전남 보성 벌교, 전남 남원 등 설이 분분한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부산 동래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화중선 1898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했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李鳳鶴이었으며 아주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가 전설의 새인 봉황과 학처럼 오래 살라고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99년 「영남음악사연구」란 논문집을 펴 낸 향토음악사 연구가 손태룡씨는 "이화중선은 다섯살때 동래에서 전남 보성군 벌교면으로 이사갔고, 전남 남원군 수지면 호곡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 ,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서의 삶을 보내던 중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협률사 공연에 반해 시집을 뛰쳐나와 소리꾼이 됐다”고 주장했는데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1918년, 송만갑의 협률사가 들어와 흠실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협률사의 국창과 여류 명창들을 구경하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화중선도 그 틈에 끼어서 구경을 하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판소리와 창극 춘향전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날 밤 화중선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상하게도 어쩐지 자신의 길은 촌부생활이 아닌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3일간 계속된 협률사 공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경하는 동안에 마음의 동요는 더하였다. 그곳에서 받은 감동과 충격으로 인하여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화중선의 소리에 대한 열정을 일깨웠으며, 자기도 판소리를 배워서 여류명창으로 입신양명해 보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난 것이다. 화중선은 밤마다 번민에 사로잡혀 미칠 것만 같은 심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화중선은 남편도 가문도 체면도 저버리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화중선은 덮어놓고 남원으로 달려왔으나 판소리를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울 것인지 목표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남원거리를 방황하다가 어느 노파의 안내로 들어 간 것이 무당집이었다. 화중선은 그 집에 있으면서 무당이 가르쳐 주는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무당은 화중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주색가에게 몸을 팔도록 끈덕지게 졸라대어 할 수없이 그 집을 나오게 된다. 그 당시 남원에 거주한 장득주(장재백의 조카)는 명창은 못되어도, 본래 명창의 문하에서 이수하였던 만큼 조격이 높고 남원에서는 일류라는 평판이있었다. 화중선은 소문을 듣고 장득주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였으나 하인들이 문전박대를 하고 들여보내 주질 않았다. 어떻게 하든 소리를 배우고 싶었던 화중선은 장득주의 동생이 아직 총각이며 술독에 빠져 지내느라 장가를 들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장득주의 동생과 혼인하는 것이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는 장득주의 동생 장혁주와 맞선을 보고 결국 혼인을 했다. 장득주는 자신이 소리를 할 때마다 화중선이 문밖에서 한창동안 기웃거리다 들어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또 부엌에서 몰래 숨죽이며 소리하는 모습도 보았다. 장득주는 동생의 아내가 소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 함께 그녀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차렸다. 음악성이 높고 배우려고 하는 열정이 남다른 것을 높이 샀으며, 장차 명창이 될 큰 재목감이라는 것을 알고는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화중선은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운지 몇년만에 <춘향가>,<심청가>,<흥보가> 세 마당을 완전히 습득했다. 그 후 화중선은 장혁주와 이혼하고 어느 부자 모씨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5백석의 재산을 얻게 된다. 더이상 물질에 어려움이 없게 된 화중선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선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남편과 가정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朝鮮券番에 妓籍을 두고 공부를 하는 한편,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창극단인 협률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화중선의 소리를 들은 송만갑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소리란 본래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명창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법인데, 화중선은 스무살이 넘어서야 소리를 배웠어도 그렇듯 곱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도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 타고난 소리꾼이 틀림다는 것을 알아챈 까닭이었다. 화중선의 얼굴은 박색이었으나 그 성음만은 월등하게 아름답고 샘물 솟듯이 막힌 데가 없었다. 소리를 조작하지 않고 나오는대로, 부르는대로 하여도 규범에 틀림없이 유창하게 잘 불렀다. 그러한 그녀의 청아하고 감정이 어린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화중선의 이같은 타고난 소리는 다른 명창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그녀만의 특징이었다.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대회」가 열렸다. 그녀도 서울에 올라와 그런 큰 무대에 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당시 판소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배설향도 참가해서 긴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심청의 마음을 애끊는 가락으로 불러 명창대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일등으로 뽑힌 화중선은 당시 '소리의 왕'이라고 불리던 박기홍으로부터 '화중선'이란 예명을 받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배설향이 여왕이라면 이봉학은 가히 꽃중의 선녀로세. 내 자네를 위해 이름을 하나 지어주겠네. '꽃중의 선녀'라는 뜻으로 '화중선'이라 함은 어떨까? 지금부터 이봉학이란 이름 대신에 '이화중선'이란 이름을 사용하려무나" 이때부터 이봉학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화중선이라는 예명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명창이 되어서 서울의 창극 무대에 서기 위해 세 번씩이나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온갖 고생을 다했던 화중선은 그 보답으로 송만갑의 협률사에서 활동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화중선이 잠을 설치며 꿈꿔왔던 명창의 길로 드디어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위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중선은 인기와는 반대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삶을 고민하여 살았다고 전해진다.1935년 장안사, 연흥사와 같은 창극 전문 극장이 일제의 치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활동사진의 보급으로 인한 경영난이 겹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 창극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협률사에서 더 이상 소리를 못할 걸 안 화중선은 정식 남편으로 알려진 林完元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들어가 판소리와 창극을 계속했다. 대동가극단에는 강남중, 임방울 등의 명창과 박초선, 박초홍 등이 가담해 판소리 창극의 토막극, 남도민요, 줄타기 등을 펼치며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1943년에는 일본의 한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레코드를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동가극단의 단원 모두를 초청해서 일본 순회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청이 아니라 위문단이란 이름의 반강제적인 공연이었으며 출연료도 주지 않고 여비와 숙식비 정도로만 지불하려는 일제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일제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건 예술인이건 적당한 명목을 만들어 마구 부려 먹고 있었다. 대동가극단 단원들은 억울함을 속으로 삼키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공연을 떠나게 되었다.이화중선은 전국 각지와 일본 등지를 여행하며 맑고 청아한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한없이 밀려드는 고독감과 잔병치레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허약해져가기만 했으며,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 극단 생활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화중선은 본래 약한 체질인데다가 너무 무리하여 유랑 극단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건강상태가 최악의 상태로 나빠졌다. 화중선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알고는 큰 슬픔에 잠겨있었다. 동료 명창들이 힘들어 하는 화중선을 위로하기도 했지만, 이미 깊은 병마와 싸워 지쳐버린 화중선에게 별로 큰 용기를 주질 못했다. 화중선의 입에선 죽음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 규슈에서 세도 나이카이를 항해 중이던 여객선에 가극단 일행은 지친 몸으로 올랐다. 화중선은 항해중인 배의 갑판에 올라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화중선의 몸이 힘없이 나풀거리며 바다에 떨어졌다. 그렇게 억새풀같이 한 많은 화중선의 예술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시신은 사가현 앞바다에서 인양 됐는데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때 화중선의 나이 46세였다. 참으로 극적인 소리인생을 살았던 화중선은 20여년간의 예술혼을 불태워 국악사의 전설적인 여류 명창으로 남겨지게 되었다.이화중선의 삶은 가끔 아편을 즐겼고, 혈육을 남기지 않고 이승을 떴다는 측면에서 박녹주의 삶과 비슷했다. 하지만 소리의 질감은 박녹주와 확연히 달랐다. 박녹주는 동편제 판소리의 정통을 따랐지만 이화중선은 판소리를 대중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의 소리는 일반인들한테는 듣기에 더없이 좋았다. 자연 레코드회사들이 그녀를 붙잡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화중선은 당대 여류명창 중에서 가장 많은 205장의 유성음반을 남겼다. 한때 달성권번 측에서 대구로 내려와 후학 지도를 권했지만 그녀는 소리하는 사람은 공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지도는 하지 않는 것이라며 전국순회공연에 청춘을 바쳤다. 그녀의 친동생 李中仙(1901∼32)도 명창이었다. 중선은 언니의 유명세에 가려 명창임에도 대중적 인기를 별로 얻지 못했다. 언니가 ‘추월만정 ’ ‘사랑가’(‘춘향가’의 한 대목) 등으로 사람들의 얼을 빼앗을 때, 중선은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으로 서민들의 한을 달래주었다. 먹고살기가 너무도 힘겨웠던 일제시대를 살아야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이들 자매는 큰 위안이며, 힘이 되어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남보다 늦은 20세가 되어서야 소리의 인생을 시작한 화중선이었지만, 타계하던 그날까지 귀명창들의 연인으로 존재하면서 김초향과 더불어 여류 창악계의 쌍벽으로 화려한 명성을 남기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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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민속박물관장에 김종대 중앙대 교수 임명문화체육관광부는 18일 국립민속박물관 김종대 관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인사혁신처 개방형 직위 공모를 통해 선발한 신임 관장의 임기는 2024년 1월 17일까지다. 김종대 신임 관장은 1984년부터 2004년까지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민속연구과장, 전시운영과장 등을 거친 박물관 전문가다. 또한 중앙대학교 민속학과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마을 제의와 한국 도깨비에 대한 많은 연구 성과를 쌓아온 대표적 민속학자다. 한국민속학회 회장과 한국박물관교육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속학계와 박물관계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문체부 박양우 장관은 "신임 관장이 그동안 현장과 학계에서 쌓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국립민속박물관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 것으로 기대한다"라며 "국립민속박물관의 세종 이전 건립을 위한 준비도 차질없이 진행해 지역 간 문화균형 발전에도 힘써주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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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종환 의원, ‘저작권법’ 전부개정안 대표발의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장 도종환 의원(더불어민주당, 충북 청주흥덕)은 문화체육관광부를 비롯한 저작권 관련 전문가 및 현장 관계자들과 1년여간 논의한 끝에 ‘저작권법’ 전부개정안을 15일 대표발의했다. 이번 전부개정안은 변화된 창작환경을 반영하고 각종 기술발달과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 속에서 저작권 보호에 필요한 제도들을 수정·보완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2006년 전부개정 이후 콘텐츠 창작 및 유통환경이 크게 변하면서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수차례 개정을 거듭해 온 ‘저작권법’은 창작자와 이용자의 균형을 맞추고 인공지능·디지털 기술 발달에 따라 창작 및 저작물 이용 환경의 변화를 반영할 필요성이 제기됨에 따라 전반적인 재개정이 추진되었다. 이번 개정안에서는 창작자의 공정한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 ‘추가보상청구권’을 도입하고 업무상저작물에 창작 기여자를 의무적으로 표시하는 규정과 함께 미분배된 저작권보상금을 공익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정비했다. 또한 불법복제물을 제공할 목적으로 운영되는 ‘불법링크사이트’를 저작권 침해행위로 규정해 온라인 상에서의 고질적인 저작권 침해사례를 처벌할 근거를 마련했다. 한편 보다 안정적인 저작물 이용환경 조성을 위해 비신탁저작권을 포괄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확대집중관리제도’를 도입하고, 비영리·비상습 등 일정조건에 해당하는 경미한 저작권 침해사건의 경우 형사처벌 대신 침해액 3배 범위 내에서 피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와 더불어 OTT 등과 같은 새로운 플랫폼에서의 저작권을 규정하기 위해 ‘디지털동시송신’ 개념을 도입하고, 일명 ‘퍼블리시티권’으로 불리는 초상등재산권을 법에 명시해 디지털기술 발전, 확장된 한류 영향력 등 변화된 콘텐츠 소비환경에서도 저작권자들의 권리가 공정하게 보호될 수 있도록 했다. 도종환 의원은 "15년 만에 정비되는 ‘저작권법’이 창작자의 권익과 공정한 이용의 균형을 회복하고, 새로운 디지털 환경에 맞는 저작물 이용과 유통기술 변화를 반영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국내외적으로 뛰어난 경쟁력을 확보한 우리 문화콘텐츠의 저작권 보호와 저작권산업 발전을 함께 도모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다양한 입장의 의견을 듣고 적극적으로 수렴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저작권법’ 전부개정안은 도종환의원 블로그(https://blog.naver.com/djhpoem)에서 확인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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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500명 신규 모집문화체육관광부(장관 박양우, 이하 문체부)는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조현재,이하 국학진흥원)과 함께 우리 옛이야기를 어린이들에게 전달하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500명을 새롭게 선발한다. 2009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13년째를 맞이한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전통문화를 매개로 세대 간 소통 기회를 확대하는 데 기여해 왔다. 특히, 여성 어르신들에게는인생 이모작 활동을 지원하는 양질의 일자리를, 어린이들에게는 전통문화 교육 기회를 제공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까지 이야기할머니 총 5,664명이 함께했고, 그중 4,130명이 계속 활동하고 있다. 문체부와 국학진흥원은 2021년에도 ‘13기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를 500명규모로 추가 선발하고, 일정 교육 기간을 거친 후 올해 10월부터 현장에 파견한다.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방역 지침을 철저하게 준수하고 화상시스템을 활용한 비대면 방식으로 안전한 환경 속에서 이야기할머니 활동을지원할 계획이다. 이번 13기에는 만 56세부터 74세까지(1947년 1월 1일~1965년 12월 31일 출생)의 대한민국국적 여성 어르신으로서 어린이를 사랑하는 마음과이야기 구연에 필요한 기본 소양과 재담을 가진 분이라면 누구든 지원할 수 있다. 지원자는 ‘이야기할머니사업단 누리집(www.storymama.kr)’에서 선발 공고문을 확인하고, 1월 18일(월)부터 2월 22일(월)까지 지원서를 작성해‘국학진흥원 이야기할머니 사업단’에 우편(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퇴계로 1997)또는 전자우편(storymama@koreastudy.or.kr)으로 접수하면 된다. 문체부와 국학진흥원은 1차 서류심사와 이야기 구연 능력을 포함한 2차 면접 심사를 통해 예비 합격자를 결정하고, 예비 합격자들은 5월부터 9월까지 60여 시간의 교육과정(1회당 교육 수당 3만 원 지급)을 이수한 후 평가를 거쳐 ‘13기 이야기할머니’로 최종 선발된다. 선발된 이야기할머니는 올해 10월부터 현장 실습을 하고, 향후 5년간 거주 지역 인근의 어린이집, 유치원에서 활동(1회당 활동 수당 4만 원 지급)하게 된다. 지원서 접수 등 ‘13기 이야기할머니’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문체부(www.mcst.go.kr)와 국학진흥원(www.koreastudy.or.kr),이야기할머니 누리집에서 확인하거나이야기할머니사업단 대표전화(☎ 080-751-0700)로 문의하면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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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길 17「국악신문」이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에서 박헌봉 선생의 업적을 소중하게 기리는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선생의 <國樂運動 半生記>를 정리, 조명하는 두 번째 글이다. 박헌봉 선생은 해방전후 민속음악 학자로는 거의 유일한 분이다.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하며 민속음악가들을 배출시키고 세상에 국악의 맛과 멋을 되찾아 주기에 열성을 다했다. 그래서 이 분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민속음악의 길을 찾는 것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국악계의 큰 스승’, ‘국악교육의 선구자’, ‘국악계의 태두’라고 불리는 소이(所以)인데, 그런만큼 민속음악의 길로 가는 이들은 선생의 생애를 동경하게 되었다. 그 생애를 처음으로 스스로 정리한 것이 <國樂運動 半生記>이다. <國樂運動 半生記>는 월간 시사잡지 신동아(新東亞) 1968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연재된 것을 국악신문 제98호 2000년 10월 25일자부터 분재(分載)한 글이다. 당시 국악신문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이제 주요 내용을 정리하여 선생의 국악운동 업적을 되돌아보기로 한다. ‘반생기’란 자전적인 표현이다. 작고(作故) 10년 전에 쓴 글이라는 시점으로 볼 때 사실상 전 생애를 기술한 전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 선생은 이 글 외에 회고적 진술은 없었다는 사실에서 입증이 된다. 이 ‘반생기’ 첫 회 ‘樵童의 노래 듣고 樂에 눈떠’는 태어난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서 망추정(望楸亭)이라는 서당을 다니던 시절의 소리를 가슴에 담는 과정을 그렸다. 9세 때의 어느날, 서당 가는 산모루에서 나무꾼의 지게목발 소리 "골짝 골짝 산골짝에 줄기 줄기 비묻어 온다~”를 듣게 된다. 이후 흥겨움에 겨워 이 소리를 입속으로 따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 해 마을에 굿패가 들어와 서당길을 멈추고 소리판에 빠져들게 되었다. 17세쯤 사내의 가야금 병창 ‘새타령’에 정신을 빼앗긴 것이다. "그 소년의 가야금 병창을 들은 뒤부터 전보다 더 한층 악을 동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선생의 성향은 서당 선생과 가족들에게 노출되어 강하고 심하게 질책을 받게 되었다. 두 번째 ‘3.1운동 후에 書堂을 하직’에서는 3.1운동을 겪고 서당 다니는 것을 작파한 이후의 정황이 진술되었다.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회의를 갖게 된다. 서당과 가정에서의 수업에서는 순임금은 오현금(五絃琴) 여주를 즐겼고, 공자는 "예와 악은 잠시도 사람이 멀리해서는 않된다(禮樂不可作須去身)”고 했음에도, 왜 소리를 좋아하는 것을 금기시하는 지에 대한 반감으로 부터이다. 그래서 어린 나이이면서도 서당 공부에 등한하게 되었다. 그런데 다행이도 이를 이해한 5살 위의 형이 부모님을 설득하여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한성강습소’에서 6개월 만에 초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중동학교에 입학했다. 이어 1년 만에 휘문고보 2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때 수업은 1주일에 한 시간 음악 시간이 있었지만, 서양음악 중심이어서 만족할 수가 없었다. 서당 시절에 경험한 민속음악만한 매력을 얻지 못함은 물론이어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울에서의 학업은 지식을 얻는 과정이었다. 이로서 서울에서의 생활 중에 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음악에 대한 열망인 것이다. 당시 진주에는 가야금으로 유명한 김덕천, 장단 신고주, 가야금 병창 김종기씨가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이분들에게 가서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배우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해 가족들은 물론 종친들도 격노(激怒)하여 음악을 연구한다는 것을 극구 말리고 나선 것이다. 3회분 ‘族譜에서 除名당할 뻔’한 진술에서는 가족과 종친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음악에 매진한 과정을 그렸다. "나는 의연했다. 우리민족의 고유한 예술인 민속악을 연구하겠다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반상의 계급을 타파하여 세상에서 버림받은 광대들과 더불어 이 민족예술을 지켜나가겠다는 나의 의지는 오히려 더 굳어가기만 했다.” 가사(歌詞)를 연구하여 와전(訛傳)된 부분을 바로잡고, 가야금과 창(唱)을 공부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다. 그런데 일제가 지방의 전통음악 활동까지 규제하고,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인들의 횡포도 심해져갔다. 이에 따라 가족들의 만류도 말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암암리에 들어 안 상해(上海)로 가 임시정부 활동에 가담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한 의협심이었다. 결국 관부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그러나 일본 하관(下關)항구에서도 상해행 배를 탈 수 없었고, 오사카에까지 가서 뱃길을 모색했으나 열리지 않았다. 두 달을 허송했다. 후회를 하였고, 상해 행을 포기하고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귀국하여 여러 가지를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진주의 음악인들을 규합하여 ‘진주음율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이 활동에 2년을 동분서주했다. 이 활동 과정에서 우리음악을 더 깊이 공부해야 한다는 자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12년 만에 다시 상경하여 음악공부를 하기로 하였다. 처음 찾아 간 곳이 ‘정악전습소’였다. 8개월 동안 많은 공부와 음악적 교류를 하였다. 그리고 이어 ‘이왕직아악부’에 들어가 4개월간 공부했고, 이어 민속악의 총본산격인 최고 명창들의 조직체인 ‘朝鮮聲樂硏究會’에 입회했다. 여기서 이름 있는 이동백, 정정열, 송만갑 등의 명창들과 2년간 창법을 연구하였다. 이어서 역시 민속음악무용단체인 최경식과 박춘재가 주관하는 ‘朝鮮歌舞硏究會’에도 가입하여 경서도 가무(歌舞)를 연구하였다. 이렇게 하여 "4년 동안 정악, 아악, 민속악 등의 여러 분야를 연구하고 나니 내 나이 벌써 34세~”가 되었다. 실무경험과 당대 조선음악 명인 명창들과 함께 활동한 시기이다. ‘日帝時에 朝鮮樂部를 組織’은 선생의 활동상이 더욱 분명히 진술된 내용이다. 친일적인 단체인 ‘朝鮮音樂協會’에서 활동하며 함화진(咸和鎭/1884~ 1948) 선생과 함께 ‘조선음악부’ 신설을 추진하여 이를 성사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남도 음악단과 경서도 가무단을 포함시킨 의미있는 업적이다. 이는 세 번의 시연(試演) 끝에 종로경찰서장 조선인 이사카(井坂)를 설득하여 허가를 받아 낸 결과였다. 그러나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모든 계획에 직접적인 난관을 맞아야 했다. 조선어, 그 중에서도 남도 성음을 중심으로 하는 ‘춘향전’ 같은 판소리조차도 일본어로 고처 공연하라는 압력이 닥쳐 온 것이다. 더 이상 견디는 것은 헛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단체를 해산하자는 합의를 하고, 선생은 진주로 낙향을 하게 되었다. 이 때가 해방 17일 전인 1945년 7월 29일이었다. 감격의 해방을 맞았다. 8월 19일, 선생은 곧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그리고 민속음악인들의 대동단결체를 표방한 ‘國樂建設本部’ 창설에 중심 멤버로 참여하였다. "오랫동안 민속음악을 천시해온 사람들의 그릇된 인식을 깨우침으로서 민속음악을 제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國樂)’이라는 어휘를 최초로 사용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인식에서 단체명을 ‘국악원(國樂院)’으로 고치게 되었다. 원장은 함화진, 선생은 부원장으로 취임했다. 이 단체를 중심으로 실질적이고 본격적인 국악 중흥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활동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마침 귀국한 ‘재미한족연합회’ 미주 대표단 김호(金乎/1884~1968)씨 등으로부터 후원금을 받은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힘을 얻어 다양한 연주자들과 행정인력을 확보하여, 미군정청 간부 56명을 초청하여 국악을 소개하는 특별공연을 준비하여 막을 올렸다. 이렇게 해방 직후 민속악 중심의 국악단체를 구성하고 주도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연히 선생이 조직과 진행에 적극 앞장선 것이다. 5회분인 ‘해방된 조국에서도 냉대 받아’에서는 적극적으로 시민 대상 국악부흥운동을 전개하나 양악(洋樂)의 수입으로 입지가 축소되는 국악계의 처지와 이를 타개하려는 선생의 노력이 진술되었다. 그 첫 작업은 빚을 내서 최고의 공연장인 명동 시공관(市公館)에서 국극(國劇) ‘대춘향전’과 ‘선화공주’를 공연한 것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애초의 시민 대상 국악을 알리는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비록 무거운 빚을 지었지만 우리는 무한히 기뻤다. 일반 대중이 국악을 외면하지 않는 한 국악의 장래는 어둡지 않다는 신념을 얻었기 때문이다. 암담하던 앞길에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고 국악인들의 파리한 얼굴에 생기가 감돌았다. 계속되는 공연 준비에 여러 날을 새워도 피로한 줄을 몰랐다.” 그러나 미군정의 세월이 길어짐에 따라 서양음악이 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물론 모든 공연 등에서 주객을 전도시켰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적극적인 운동으로 국악학교의 존재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국악을 이해하는 정부 고관들을 찾아다니며 호소해야 했다. 우선 서울시경 장택상(張澤相/1893~1969) 청장을 찾아가 논의하는 동시에 명월관(明月館)에서 국악감상회를 열어 기금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 첫 감상회는 당시 서울시장 김형민, 경무부장 조병옥 같은 관료와 박흥식, 백낙승, 조준호 같은 갑부와 군정청의 미군 장교 등을 초청하여 김소희, 박귀희 선생의 판소리를 내세워 갈채와 후원 약속을 받아냈다. 명월관 감상회 성공을 계기로 큰 계획이 수립되었다. 곧 ‘國樂學校設立期成會’ 결성이다. 크고 실직적이고,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다목적의 학교 설립 사업이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컸던 것일까. 예상했던 제반 사항이 기대와는 미치지 못하였다. 기성회 중요 참여자 중에 이탈자가 생기게 되었고, 당초 약속한 기부금 액수도 크게 차이가 나는 등 의외의 난관이 이어졌다. 본격적인 국악중흥운동 열기가 크게 흔들리고 혼동을 겪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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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가에 실려 온 70년, 영원한 소리꾼, 묵계월백이숙제 착한 이와 도척 같은 몹쓸 놈도 죽어지면 허사로다.역려건곤에(逆旅乾坤) 부생이 약몽(若夢)하니 즐거움도 얼만고병촉야유(秉燭夜遊)하며 독서담론 자락하니 한가하기 측량없다 ······.일생이 이러하니 상산사호(商山四皓) 죽림칠현 한가롭다.이만하면 적송자(赤松子) 안기생(安期生)을 부러하랴범려(范蠡)의 오호주(五湖舟)와 장자방(張子房)의 사병벽곡(謝病辟穀)소광의 산천금(散千金)과 도연명의 귀거래는 모두 다 작은 일이 아니로다 ······. 깊은 밤, 은근한 석유 등잔 불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한동네 또래 할머니들 대여섯이 둘러앉아 ‘이 집’ 며느리가 읊는 알듯말듯한 소리를 내 신세와 견줘 가며 듣고 있다. ‘소리’하는 며느리가 지칠까 봐 이따금씩 ‘그려!’ 하며 추임새로 부추긴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 뭐가 뭔지도 모르며 골똘히 듣고 있던 손자 녀석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이 때 구슬픈 듯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 대던 ‘며느리의 소리’가 바로 ‘삼설기’다.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같은 얘기책에 청을 넣어 구성지게 읽었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게 책 읽고 편지 읽는 투의 바로 그 ‘목청’이었다.삼설기는 수많은 경기잡가 중에서도 엄연히 ‘족보 있는 소리’다. 잡가에 능한 소리꾼이 많건만 묵계월(墨挂月ㆍ72,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씨의 삼설기는 단연 독보적이며 발군이다. 그래서 묵씨는 ‘묵계월의 삼설기가 기막히다’는 칭송을 들을 때마다 16세 적 수양모(이정숙) 집 사랑방까지 찾아와 그 소리를 가르쳐 준 이문원(李文元) 선생을 잊지 못한다.인간문화재 묵계월 씨는 또래 소리꾼 이은주, 안비취 씨와 함께 꽤나 알려진 이름이다. 설이나 정월 대보름, 추석 등 민족 고유 명절 때면 TV를 통해 ‘묵계월과 그 문하생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늘 깨끗한 한복에 쪽머리나 찌고 만단 시름없이 소리만 하고 살 것 같은 묵씨에게도 인생의 우여곡절은 깊다. 그가 살아 온 ‘한 생애’는 묵씨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동시대를 살아 온 동료, 선ㆍ후배 국악인들과도 연관지어 가볍게 지나칠 내용들이 아니다. 바로 국악 1세대들의 현장 육성이기 때문이다.묵씨는 서울에서 나고(중구 광희동 2가 357번지) 자란 순 서울 토박이다. 아버지(이윤기)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억도 없고, 열 한 살 때 만난 양어머니(이정숙)에 의해 한 소녀의 운명은 반전해 버리고 만다."그 집에 살던 양언니 이름이 묵계홍이었어요. 소리는 별로였지만 얼굴이 예뻤습니다. 계월이라 지으면 팔자가 좋아질 것이라며 그 집 성을 따 묵계월이라 부르게 된 겁니다.”그 때가 열 두 살 적. 본명 이경옥(李瓊玉)을 버리고 예명 묵계월이라 써온 지 60년이 넘었다. 웬일인지 이씨 집안에는 남자가 귀해 족보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수양어머니는 소리 선생 이광식(李光植) 씨를 불러 개인 학습을 시켰다. 1년여 동안 여창 지름, 남창 지름, 시조, 가사 등 기초를 익혔지만 뛰어난 소리는 아니었다고 회상한다.양모 손에 이끌려 조선 권번에 입적한 것이 13세. 여기서 주수봉(朱壽鳳) 씨를 만나 경기12잡가를 속속들이 배우게 된다. 이 때 조선 권번에는 70~80명의 예기들로 붐볐고 하규일(河圭一) 씨가 가곡을 가르치고 있었다. 기악, 무용부도 있었지만 묵씨는 오직 경기잡가에만 몰두했다. 권번 학습이 끝나면서(14세) 과장에도 더러 나가고 사랑놀음에 자주 불렸다. 자그마한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다부진 소리에 사랑어른들은 매료됐고 가는 곳마다 ‘묵계월뿐’이었다고 한 시절의 풍류를 떠올린다. "기왕에 소리해 먹고살 팔자라면 이골나게 배워야 되겠더군요. 독선생(김윤태)을 모셔다 붙임새를 새로 보태고 최정식(崔貞植) 선생을 찾아가서는 자청해서 경기민요를 배웠습니다. 무슨 짓이든 해야 먹고사는 세상, 확실한 ‘자기 일’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18세에 ‘화초머리’ 얹은 채 인력거를 타고 명월관, 국일관, 천향각을 주름 잡던 일, 쌀 한 가마니에 7원씩 할 때 놀음채를 25원씩이나 받던 전성기 얘기 등은 행간에 접어 넣자고 한다. 해방(25세), 6ㆍ25 등 민족의 격동기를 살면서도 묵씨는 목청을 지켜 내기 위해 개인 놀음청에도 응했고, 또 그것이 먹고사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도 그랬고 수복 후 서울에 다시와서도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목소리만은 생명처럼 아껴야 했다.이래서 묵씨는 상ㆍ중ㆍ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특히 중ㆍ상청 부분에서 꺾어 올려치는 끝막음 소리는 그의 제자들만이 이어받아 낼 수 있는 일품의 경기민요다.임정란(林貞蘭ㆍ50, 준문화재)ㆍ고주랑(高柱琅ㆍ46)ㆍ임수연(34)ㆍ조경희(趙慶姬ㆍ33)ㆍ김운경(32)ㆍ정경숙(30) 씨 등이 이수생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는 문하생들이며, 박순금(38)ㆍ최근용(32)ㆍ김진희(28)ㆍ최근순ㆍ최보물(32)ㆍ김덕례(29)ㆍ이명희(25) 등은 전수생.서울 중구 무학동 5번지 중부소방서 건물 앞 ‘경기12잡가 묵계월 전수소’에는 문선진(37), 배미숙(28) 씨 등 교습생만도 30명이 넘어 묵씨의 경기민요 맥은 탄탄하다. 다만 소리좀 할 만하면 결혼과 함께 작파해 버려 들인 공력이 아까울 때가 많다고 늘 아쉬워한다. 풋고추 절임김치 문어 전복 곁들여황소주 꿀 타 향단이 들려 오리정으로 나간다 ······.이제 가면 언제 요료 오만 한을 일러 주오.명년 춘색 돌아를 오면 꽃 피거든 돌아를 볼까 ······.곤히 든 잠 행여나 깨울세라등도 대고 배도 대며 쩔래쩔래 흔들면서일어나오 일어나오 겨우 든 잠깨어나서 눈떠 보니 내 낭군일세······. 경기민요 중 출인가(出引歌)의 소절들. 경기잡가는 ①유산가, ②적벽가, ③제비가(연자가), ④소춘향가, ⑤집장가(집장 사령), ⑥형장가, ⑦평양가, ⑧선유가, ⑨출인가, ⑩십장가, ⑪방물가, ⑫달거리(월령가) 등 크게 12가지로 나뉘어져 있다.이 중 묵계월 씨는 적벽가ㆍ출인가ㆍ선유가ㆍ방물가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1975년 7월 12일), 이은주(李銀珠) 씨는 집장가ㆍ평양가ㆍ형장가ㆍ달거리로, 나머지는 안비취 씨 몫으로 구분돼 있다. 1971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김옥심, 이소향 씨 등이 만든 민요연구회는 이들 경기민요꾼의 권익을 증진시키며 사회적 예우도 격상시켰다."배운 게 소리였고 살기 위해 잡가를 불렀지요. 누가 인간문화재 같은 거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미국도 구경하고 일본에도 다녀왔습니다. 인생사라는 게 꼭 잘돼야 되겠대서 잘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이제는 여자 나이 70이 넘다 보니(1920년 10월 19일생) 별 생각이 다 든다고 했다. 아차 하면 한 달이고 문득 깨어 보면 한 해가 가 버리고······. 곱던 얼굴 생각하며 젊은 제자들이 찾아들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수시키려 사정하며 가르친다. 22세에 결혼하여 1남2녀를 두고 지금은 손자, 손녀, 외손자, 외손녀를 둔 할머니지만 시름에 겨워 홀로 뒤척이는 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청춘에 짓밟힌 애끊는 사랑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나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묵계월 씨는 임과의 사랑, 인생무상이 듬뿍 담겨져 있는 강원도 민요도 즐겨 부른다고 했다. 애틋하면서도 홀로 서려는 기개가 확실한 애곡(哀曲)이어서 더욱 그렇다고 한다. • 묵계월 경기12잡가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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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추천 휴일의 시 16: 그랬다지요 (김용택)그랬다지요 김용택(金龍澤/1948~ )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사는게 이게 아닌데 이러는 동안 어느새 봄이 와서 꽃은 피어나고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그러는 동안 봄이 가며 꽃이 집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았다지요 그랬다지요 추천인:김연광(민족음악연구원 이사) "이맘때쯤이면 기억나는 시. 누군가가 그립다. 만나고 싶다. 또 꽃이 지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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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는 'Song of Arirang'(2)기찬숙 아리랑학회 연구이사 80년 전인 1941년 뉴욕 존데이 출판사에서 발행된 ‘Song of Arirang’은 1965년 일본에서 안도지로의 역으로 ‘アテテソ-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이어 1987년 마쓰데라 이오꼬 번역으로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11판까지 발행했다. 그리고 1972년 미국 파나 프레스에서 ‘Song of Arirang’재판이 발행되었다. 중국에서는 1987년 연변역사연구소에서 한국어판 '백의동포의 영상'으로 발간되었고, 중국어 번역본은 홍콩 난유애 출판사에서 ‘白衣同胞 影像’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서야 아리랑이란 표제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6년 보유판 '아리랑 2-김산 생애 보충'이 발행되었다. 김산에게는 자신의 격한 항일 투쟁적 삶이 적국 일본에게 먼저 전달된 셈이다. 역설인가 당연지사인가? 필자는 2007년에 음반 ‘김산아리랑’(신나라 뮤직) 제작에 참여했다. 이 때 ‘Song of Arirang’소재 김산 구술의 ‘아리랑’ 관련 기록을 꼼꼼히 분류한 바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1930년 초부터 중반에 이르는 기간의 정황에서 진술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첫 번째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1930년 11월 "나는 일본 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심리상태에 대한 압력을 최악의 방법으로 실험 받았다고 진술했다. 나에게 그 이상의 어떤 시련이 또 있었겠는가?”로부터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 형을 마치는 1934년 4월 전후가 된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김산은 영화 ‘아리랑’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동포사회에까지 상영되어 반향을 일으키는 정점인 1930년을 전후하여 체험하고 인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In Korea we have a folksong, a beautiful ancient song which was created out of the living heart of a suffering people. It is sad, as all deep-felt beauty is sad. It is tragic, as Korea has for so long been tragic. 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김산) 이 명징한 아리랑 인식의 결정체, 김산의 진술 중 하나이다. 과연, 이 시기 이 땅의 지식인 중 누가 ‘민요 아리랑’, ‘노래 아리랑’, ‘그 넘어의 아리랑’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다행히 여기에 꼽을 수 있는 이가 있긴 있다.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한 사람, 영화감독 나운규(羅雲奎.1902~1937)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견주기는 격이 떨어지지만 정치학자 고권삼(高權.1901~?)을 한 사람 더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다. 민족성이랄까 할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아리랑고개, 그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 이런 일관된 정신을 거기 담지(擔持)한 것이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이외다. (중략)영화가 문화사업의 하나라면 민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백 리 밖에서 아무리 기를 흔들어야 그 기가 민중의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언제나 우리는 민중보다 보(步)만 앞서서 기를 흔들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나운규) 나운규가 작고하기 1년 전인 1936년, 영화 '아리랑'의 감독 당시를 회고한 대목 중 일부이다. 영화 ‘아리랑’을 고개를 넘는 활기찬 패기를 넘는 남성상을 그리려 했지만 그런 역할을 했는가를 스스로 회의하고, 영화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중들에게 가파를 현실을 극복하자고 추동한 것이다. # "비폭력 비협동의 理想의 정치적 가치는 문화적으로 진보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조선의 ‘아이롱(아리랑)主義’는 근본적이요 적극적인데 더욱 가치가 있다. 이 <아이롱主義>는 정치사상에 있어 위대한 존재요 또 조선의 정치사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요소다.(중략) ‘아이롱主義’의 철학은 평화주의이다. 평화가 없고는 건설이 없고 건설이 없고는 문화가 없고 문화 없는 데는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평화의 使徒요 인류평화의 指導者이다.”(고권삼) 정치학자 고권삼이 1933년 일본 발행한 ‘近世朝鮮興亡史’로부터 1947년 서울에서 발행한 '朝鮮政治史'에 기술한 ‘아리랑主義’ 중 일부이다. 정치학자임으로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33년이란 시점의 ‘평화’와 ‘행복’은 천황 지배하의 순응에 따른 것임으로 친일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거기다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강사와 제주도에서 좌악계열 정치가로 활동(1949년 월북하여 생사불명) 하면서도 이 친일적 인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든 나운규는 영화론과 민중론을 투영해, 고권삼은 정치론을 적용해 아리랑의 성격을 재규정한 의미있는 인물들이다. 모두 풍전등화의 1910년대 초에 때어나 민족적 수난의 극점에 이르는 1930년대를 자신만의 길에 투신하여 굴곡진 삶을 산 이들이기에 아리랑을 남달리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산 이로 유독 진지하고 실천적인 아리랑론을 진술한 김산은 언제 아리랑을 체험하여 옹골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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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을 말한다] '정선아리랑의 사회문화적 이해'저자: 박관수(민속연구가) 이 책은 정선아리랑에 담긴 사회문화적 모습을 채록하고자 했다. 기존의 입장과 달리 가사만을 채록하지 않았다. 문학적인 입장에서만 정선아리랑을 접하려고 하지 않았고, 정선아리랑의 존재양상을 다각도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구자의 입장에서만 소리를 대하지 않았고, 소리들이 전승하는 그 자체를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정선 사람들의 삶과 함께 존재하는 정선아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사를 채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구나 그 가사의 존재를 연구자의 입장에서만 해석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정선아리랑은 본래 가창자들의 삶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창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신이 부르는 소리의 단어나 구절,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다. 이를 ‘향유의미’라고 부를 수 있다. 그 향유의미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 의미의 다름은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존재가치가 있다. 가창자들은 정선아리랑을 ‘지어서 부른다’고 말한다. 모든 가창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가사를 만들어 부른다. 자신이 부르는 가사가 다른 사람이 부르는 가사와 동일하더라도, ‘지어서 부른다’고 말한다. 그런 가사를 선택해서 부른 것도 지어서 부른 것에 포함된다. 자신의 삶과 관련된 소리를 부르면, 그것이 바로 ‘지어서 부르는’ 것이 된다. 이러한 드러냄은 자유로움이 바탕을 이룬다. 그러니까 ‘지어서 부른다’는 것은 가창자가 소리를 부를 때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가창자들은 곡조도 마음대로 부른다. 동일한 가사인데도 사람들마다 부르는 곡조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높은 음으로 내지르면서 소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낮은 소리로 부른다. 동일한 사람이 불러도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와 젓가락으로 소반 장단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가 다르다. 나물을 뜯으며 건넛산에서 나무를 하는 총각이 들으라는 소리와, 해가 너웃너웃 넘어갈 때 밭에서 부르는 소리는 같을 수가 없다. 정선아리랑은 고정된 틀에 자신의 소리를 맞춰가며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상황 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부르는 소리가 정선아리랑이다. 남녀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회적 관습으로 이를 제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 삶에서 사회적 금기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남녀 간에 육체적인 성적인 만남도 있었고, 정신적인 연애도 있었다. 이러한 가사에는 남녀 간의 만남도 담겨 있지만, 과거 사회의 모습도 담겨 있다. 정선아리랑은 구전되었다. 그러다가 일제시대에 들어 일본 노래에 그 자리를 조금씩 내줬다. 나아가 ‘노랫가락’, ‘창부타령’, ‘청춘가’ 등은 물론, 유행가에 자리를 내줬다. 이러한 노래들은 주로 전축이나 라디오를 통해 유행이 되었고, 주막에서도 많이 불렸다. 그러다 보니, 정선아리랑은 부르지 못하고 유행가만을 부르기도 했다. 8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정선아리랑을 부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선아리랑은 그와 같은 문화를 접하지 못하는 노인들을 통해 전승이 되었다. 산골에서 밭만 맸던 노인들,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노인들을 통해서나마 과거의 소리가 전승되었다. 그러니까 해방 이후가 될 즈음에는 정선아리랑은 가늘게 명맥을 유지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선군에서는 정선아리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선아리랑제’를 통해 정선 사람들은 물론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정선아리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예능보유자 4명이 전수관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전수조교들은 여러 마을 노인회관등에 가서 소리를 가르치고, 장날에는 소리를 하면서 정선 사람들이 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정선아리랑에 담긴 향유의미, 소리를 부를 때 일어나는 가창자들 간의 역동, 소리에 담긴 사회문화적 함의 등을 아는 분들이 드물다. 80세 중반 정도는 되어야 그런 말씀을 해 줄 수 있다. 70대들도 가사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몸소 체험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이 드신 분들이 세상을 뜨신다. 정선 구석구석을 좀 더 다녀야겠다. 외롭더라도 갈 길을 가야겠다. 이 책은 정선아리랑에 담긴 사회문화적 모습을 채록하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가사만을 채록하지 않았다. 문학적인 입장에서만 정선아리랑을 접하려고 하지 않았고, 정선아리랑의 존재양상을 다각도로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연구자의 입장에서만 소리를 대하지 않았고, 소리들이 전승하는 그 자체를 드러내려고 노력했다. 다음은 「정선아리랑의 사회문화적 이해」의 주요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1. 소리와 일상생활의 연관성 이해 정선아리랑은 가창자들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 중 하나다. 이 ‘소리’는 삶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존재한다. 사람들이 하루 일을 마치고 친구들과 함께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노래방에 가서 부르는 가요와는 다르다. 노래는 일상생활과 밀접한 연관이 없다. 정선아리랑은, 소리를 부르는 그들의 삶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정선 사람들이 정선아리랑을 ‘신세타령’이라고 말하는 것을 자신들의 삶의 처지를 한탄하는 정도만으로 그 의미를 한정할 수는 없다. ‘신세’는 일상생활과 연관지어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정선아리랑은 밭을 매면서도 부른다. 나물을 뜯으러 가서도 부른다. 모를 심으면서도 부르고, 짐을 매면서도 부른다. 나무를 하러 올라갈 때 작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면서도 부른다. 주막에서 소반장단을 치면서도 부른다. 우물에 물을 길러가서도 부른다. 부엌에서 밥을 하면서 부르기도 한다. 시어머니에게 얻어맞고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면서도 부른다. 남편에게 얻어맞고 힘든 삶을 노래하기도 한다. 마실돌이를 하면서 즐거워 부르기도 한다. 어머니나 할머니들이 모여 놀 때 그들에게 밤참을 해 주면서 옆에서 듣고 배우기도 한다.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다가 배우기도 한다. 옆집 총각을 생각하면서도 부른다. 이웃집 여인을 생각하면서도 부른다. 시집을 간 뒤에 자신이 좋아하던 남자 친구를 그리워하면서도 부른다. 잔칫집에 가서도 부른다. 호미씻이를 하면서도 부른다. 이처럼 정선아리랑은 삶의 일부다. 2. 가사의 향유의미 이해 정선 사람들의 삶과 함께 존재하는 정선아리랑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가사를 채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구나 그 가사의 존재를 연구자의 입장에서만 해석할 수도 없다. 그 이유는 정선아리랑은 본래 가창자들의 삶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가창자들은 각자 나름대로 자신이 부르는 소리의 단어나 구절, 주제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있다. 이를 ‘향유의미’라고 부를 수 있다. 그 향유의미는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 그 의미의 다름은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다. 각자 나름대로 존재가치가 있다. 정선 사람들은 서로의 소리가 다름을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의 소리가 나와 다르다고 공박하지 않는다. ‘향유의미’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 다름을 수용한다. 다른 사람의 삶이 자신과 다름을 인정하듯이, 소리의 다름을 받아들인다. 다음 가사를 보자. 시어머니 산소를 까투리봉에 썼더니 지집아새끼 낳는쪽쪽 콩밭골로 긴다 위 소리에서 ‘까투리봉’은 암꿩의 형상을 닮은 봉우리라고 가창자들은 말한다. 대부분의 가창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일부 가창자들은 ‘까투리봉’이라는 가사 대신에 ‘거친 봉’이라고 불러야 된다고도 말한다. ‘까투리봉’을 ‘팔풍받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콩밭골로 긴다.”라는 가사는 여자 아이들이 콩밭골에 들어가 연애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다른 가창자는 여자 아이들이 크면, 일을 하기 위해 콩밭골에 들어간다고도 말한다. 어떤 사람은 ‘콩밭골’은 ‘공알’을 의미한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가창자에 따라서는 제2행을 "우리 삼동세 팔난봉이 난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처럼 하나의 소리를 두고 각 가사의 조합이 다르기도 하지만, 그 향유의미가 다르기도 한다. 그렇지만 가창자들은 그 다름을 배척하지 않는다. 서로의 다름을 용인하면서, 소리를 즐기기도 하지만 소리가 불리는 상황도 즐긴다. 3. 소리의 자유로움 이해 가창자들은 정선아리랑을 ‘지어서 부른다’고 말한다. 모든 가창자들이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가사를 만들어 부른다. 자신이 부르는 가사가 다른 사람이 부르는 가사와 동일하더라도, ‘지어서 부른다’고 말한다. 그런 가사를 선택해서 부른 것도 지어서 부른 것에 포함된다. 그러니까 ‘지어서’는 소리를 개인적으로 창작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신의 삶과 관련된 소리를 부르면, 그것이 바로 ‘지어서 부르는’ 것이 된다. 자신의 삶을 드러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소리에 실어 드러내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것을 소리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드러냄은 자유로움이 바탕을 이룬다. 그러니까 ‘지어서 부른다’는 것은 가창자가 소리를 부를 때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가창자들이 정선아리랑을 통해 자유로움을 즐기는 것은 가사만을 마음대로 불러서가 아니다. 곡조도 마음대로 부른다. 동일한 가사인데도 사람들마다 부르는 곡조가 다르다. 어떤 사람은 높은 음으로 내지르면서 소리를 하는데, 어떤 사람은 낮은 소리로 부른다. 동일한 사람이 불러도 지게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와 젓가락으로 소반 장단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는 다르다. 나물을 뜯으며 건넛산에서 나무를 하는 총각이 들으라는 소리와, 해가 너웃너웃 넘어갈 때 밭에서 부르는 소리는 같을 수 없다. 정선아리랑은 고정된 틀에 자신의 소리를 맞춰가며 부르는 소리가 아니다. 상황상황에 따라 이렇게도 부르고 저렇게도 부르는 소리가 정선아리랑이다. 4. 소리의 사회적 모습 이해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말이 있다. 가창자들 모두 이런 말을 한다. 남녀는 12살 정도가 되면, 만남이 금지된다. 과거의 사회적 관습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이를 지키도록 강요한다. 가창자 대부분이 이를 지켰다고 말한다. 하지만, 남녀의 만남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회적 관습으로 이를 제어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제 삶에서 사회적 금기를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남녀 간에 육체적인 성적인 만남도 있었고, 정신적인 연애도 있었다. 아래 소리가 그러한 경우를 드러낸다. 간난이아버지 질떠나면서 잘뒀다달라 했는데 이웃총각 구구한사정에 잘뒀다 주지못했네 한질담너메 두질담너메 꼴비는에 저그대 눈치만 있거시거든 내손에외받어 잡숴요 이러한 가사에는 남녀간의 만남도 담겨 있지만, 과거 사회의 모습도 담겨 있다. 과거에는 딸자식을 이름 대신에 ‘간난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걸어서 다녔기 때문에 길을 떠나면 오랜 시간이 걸렸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조그마한 담 너머에서 꼴을 비는 남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오이에 담아 건네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집안에 건네줄 게 없으니, 울에서 자라는 오이라도 따서 자신의 마음을 담는 것이다. 둥둥재말랑 맷둔재말랑 새밭파지말구 당신하구 나하구야 화전놀이갑시다 위 소리를 부르는 사람은 ‘둥둥재’나 ‘맷둔재’가 정선에 있는 재 이름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다른 가창자들이 부르는 대로 불렀기 때문이다. 단지 ‘말랑’이라는 단어 때문에 높은 재라는 사실 정도밖에 모른다. 하지만, ‘새밭’이라는 단어는 자세하게 설명한다. 이는 화전을 말한다. 화전은 나무를 불태워 만들기 때문에 거름을 주지 않아도 곡식이 잘 자란다고 한다. 화전을 할 때의 고달픔도 얘기한다. 새밭을 만드는 방식도 말하고, 새밭에는 서숙을 뿌리기도 하지만, 조를 뿌르는 것이 좋다는 말도 한다. 조는 씨앗에 비해 소출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를 심은 새밭을 맬 때는 다른 곡식을 심은 밭을 맬 때보다 힘은 많이 든다고 한다. 그래서 새밭을 ‘새조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밭은 몇 년 정도를 일구다가 묵밭을 만든다고도 말한다. 둥둥 두만아 새밭파지말고 대화방림 멋다리로 들병장사가세 제1행은 자신의 마을에 사는 두만이라는 사람에게 말하는 형태로 가사를 바꾸었다. 두만이는 실명이라고 한다. 그는 성실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가사는 그를 놀리는 모습을 띠고 있다. 그래도 그는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가사는 두만이처럼 열심히 일을 하지 말고 대화, 방림, 멋다리에 가서 들병장사를 하자고 말하고 권하고 있다. 보따리장사나 두부장사보다는 술장사를 하는 것이 돈 벌기에 가장 손쉬웠다고 말한다. 이 가사는 용탄리나 가수리 인근에서 채록된다. 정선의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화나 방림을 모른다. 대화나 방림에는 술집이 많다. 원주에서 정선이나 강릉을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거쳐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이었다. 그래서 술집이 많았고, 장사도 잘됐다. 이처럼 정선아리랑 가사에는 과거 사회의 모습이 응축되어 있다. 5. 소리의 문화적 모습 이해 정선아리랑은 구전되었다. 그러다가 일제 시대에 들어 일본 노래에 그 자리를 조금씩 내줬다. 나아가 ‘노랫가락’, ‘창부타령’, ‘청춘가’ 등은 물론, 유행가에 자리를 내줬다. 이러한 노래들은 주로 전축이나 라디오를 통해 유행이 되었고, 주막에서도 많이 불렸다. 그러다 보니, 정선아리랑은 부르지 못하고 유행가만을 부르기도 했다. 80대 중반임에도 불구하고, 정선아리랑을 부르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선아리랑은 그와 같은 문화를 접하지 못하는 노인들을 통해 전승이 되었다. 산골에서 밭만 맸던 노인들, 지게를 지고 산을 오르내리는 노인들을 통해서나마 과거의 소리가 전승되었다. 그러니까 해방 이후가 될 즈음에는 정선아리랑은 가늘게 명맥을 유지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선군에서는 정선아리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선아리랑제’를 통해 정선 사람들은 물론 다른 지역 사람들이 정선아리랑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예능보유자 4명이 전수관에서 소리를 가르치고, 전수조교들은 여러 마을 노인회관등에 가서 소리를 가르치고, 장날에는 소리를 하면서 정선 사람들이 소리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정선아리랑을 채록하는 동안 여러 모로 도와주신 가창자들이 고맙다. 집에 찾아가도 커피를 타 주시면서 다양한 질문에 답변을 해 주시는 분들이 고맙다. 10여 차례 찾아가도 짜증을 안 내신 분들이 고맙다. 한 마디라도 더 일러주시려고 했던 분들이 고맙다. 정선군청 군수님, 아리랑 계장님이 고맙다. 정선문화원 원장님, 사무국장님이 고맙다. 정선아리랑에 담긴 향유의미, 소리를 부를 때 일어나는 가창자들 간의 역동, 소리에 담긴 사회문화적 함의 등을 아는 분들이 드물다. 80세 중반 정도는 되어야 그런 말씀을 해 줄 수 있다. 70대들도 가사에 담긴 다양한 의미를 몸소 체험하지 못했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나이 드신 분들이 세상을 뜨신다. 정선 구석구석을 좀 더 다녀야겠다. 외롭더라도 갈 길을 가야겠다. *책을 필요로 하시는 독자게서는 정선문화원(033 562 5471)으로 연락하시면 무료로 보내드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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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7: 노래와 인품이 교직된 경기민요의 대가, 이춘희 명창전통민요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노래는 아마 경기민요일 게다. 많이 회자되다 보니 우선 부르기가 쉽고, 가락이나 곡상이 살갑고 경쾌하며 청아하다. 경기민요의 늴리리야나 창부타령을 서도민요의 수심가나 남도민요의 육자배기 등과 비교해 보면 이내 그 차이점을 느낄 수 있다. 아무튼 만인이 부담없이 즐길 수 있는 민요는 경기민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대중적인 노래는 쉽게 공명되는 정서적 감응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자칫 진중한 감성의 여운을 잃기 십상이다. 경기민요가 갖는 태생적 한계랄까 속성도 바로 이런 점에 있다고 하겠다. 내가 이춘희 명창을 훌륭한 가객이라고 치부置簿하고 있는 까닭도 다른 게 아니다. 자칫 경박해지기 쉬운 경기민요의 취약점을 그만의 속깊은 내공으로 말끔하게 균형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요즘의 세태는 지나치게 경망하고 부박하다. 대부분의 예인들이 심금은 울리지 못하면서 표피적인 재주만을 팔기 일쑤다. ‘사람 됨됨이’라는 바탕은 닦지 않은 채 기예만을 익혀서 남에게 과시하려 든다. 수기修己를 해야 입신立身도 되고 이인利人도 할 수 있는데, 수신의 토대 없이 성급하게 과실만을 탐내는 세상이고 보니, 예술이건 학문이건 사상누각이요 일회성 거품에 불과할 때가 많다. 마음에 와 닿는 노래나 음악회가 드문 것도 이 같은 풍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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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허프의 영감어린 피아노 아리랑, 음반 수록중국이 그 연원이 한반도라는 사실을 적시하라는 우리의 주장을 무시하고 아리랑을 자기네 것이라며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그러더니 최근에는 중국 김치가 세계에서 기준이라며 세계에 떠벌이기 시작했다. 이는 분명한 문화 도용(盜用,cultural appropriation)으로, 다른 나라 문화의 독자성을 도둑질해 유용하는 절도 행위이다. 이런 이웃의 떼쓰기에 우울하던 참에 상쾌한 뉴스가 들려왔다. 14일 영국 음반사 하이페리온은 세계적 피아니스트 스티븐 허프(59세,Stephen Hough)의 독집 음반 ‘덧없는 인생(Vida Breve)’에 아리랑(본조아리랑)이 수록되어 발매된다고 밝힌 것이다. 허프는 영국 출신 작곡가로 60여 장의 음반을 내놓은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30곡이 넘는 자작곡을 발표한 작곡가이다. 또한 음악과 종교에 대한 책은 물론 소설까지 펴낸 작가이기도 했다. 세계 클래식 전문지 ‘그라모폰’에서는 ‘박식한 피아니스트(polymath pianist)’라고 불러왔다. "한국 공연을 앞두고 말레이시아에서 친구와 점심 식사 자리에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가 뭔지 물었다. 특별한 걸 들려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때 그 친구가 ‘아리랑’의 악보를 건네줬다. 단순한 아름다움(simple beauty)에 첫눈에 반했고 앙코르용으로 편곡했다. 아시아 각국에서도 이 노래를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유튜브에서 들어보았는데 멜로디가 자연스럽고 순수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예상 가능한 듯하면서도 놀라움을 선사하는 선율의 모양새와도 연관이 있다. 편곡할 때도 원곡의 단순함과 전통적 아름다움을 지키고자 했지만, 몇 군데에서는 서구적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올 6월 방한하여 공연을 예정하고 있으나 코로나로 구체적인 실행은 담보할 수 없다. 스티븐 허프의 첫 눈에 반한 ‘단순한 아름다움’의 영감어린 연주를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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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김병준(‘전통으로 소리길로’ 작가) 국내 애청자와 북한과 중국 일본 등 해외동포들을 대상으로 라디오를 통해 찾아가는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는 우리 고유한 전통문화 돌아보며 국악을 감상하는 프로그램이다. 서기철 국장님이 기획한 우리 것 사랑 뜻이 담긴 이 ‘전통으로 소리길로’는 남상일 명창이 MC로 나서 준 덕분에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AM 972KHz. 1170KHz방송되고 있다. 휴대폰에서 앱을 깔아 들으면 더 간단히 청취할 수 있다. 폰에서 ‘KBS-Kong’ 다운 받아서 ‘한민족방송’만 선택하면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으니 휴대폰으로 청취하는 걸 추천한다. 김병준 작가가 방송을 한지 40여년이 된다. 1981년 KBS-3TV에서 ‘시조와 창’이란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후, KBS 1라디오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흥겨운 우리가락’을 김성녀 교수 진행으로 12년을 했었고, 국방홍보원 국군방송에서는 라디오 사극을 8년간 2천 4백여 편을 집필했고, 국악방송은 개국 초기부터 15년 동안 ‘우면골 상사디야’ ‘상암골 상사디야’ 일일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름 우리 것과 국악에 대한 사랑을 꾸준히 방송을 통해 알려 본 셈이다. 그 40여년 기간 동안 국립극장 무대에서 창극 ‘백범 김구’, 국악원에서 국내 최초 경서도 소리극 ‘남촌별곡’ 같은 전통 뮤지컬도 올렸고, KBS 1TV를 통해 마당놀이 ‘뺑파전’을 올리고, 공연무대며 이런 저런 전통관련 행사에도 동참해 왔다. 그 여정 속에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라 하겠다. 그래서 KBS한민족방송에 남북한 동포들이 함께 들으면 좋을 프로그램이 뭘까? 해외 교민과 동포들이 같이 들으면 의미 있고 흥미도 있을 프로그램은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다 남상일 명창이 진행을 맡아 주면서 일사천리로 내달리게 됐다. 늘 자주 말했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이 우리 것을 방송으로 담고 싶었기에 진행자가 국악예술인이었으면 했고, 막간 사극 코너도 소화해야 하니 연기력도 뛰어나야 했는데, 남상일 명창이 진행을 맡으면서 성우들과 함께 우리 역사 속에 흥미로운 사건들, 잊혀서는 안될 서민들 생활사와 문화예술 이야기가 흥미롭게 풀려나갔다. 리포터를 통해서 우리 문화계 분들을 폭넓게 취재해 미술, 음악, 민속, 유무형 문화재 관련 전문가 분들 이야기를 전해 드릴 수 있었고, 작가는 우리 것 우리소리 사랑하는 이웃사촌들을 찾아 나서서 한분 한분 이야기와 그분들 소리와 연주도 소개해 주는 코너도 계속해 오고 있다. 그리고 방송국 스튜디오로 자리해서 남상일 명창과 13분 대담을 하는 초대석까지 마련하고 보니, 매주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에다가 꽤 많은 살림살이를 차린 셈이다. 진행자 남상일 명창이 연기하며 소리하며 전체를 이끌고 있다, ‘실록 만화경’이란 사극코너로 우리 옛 생활상과 역사를 흥미롭게 돌아보고, 리포터가 취재해 온 ‘문화예술인 한마디’도 소개하고, 우리 국악계 뿐 아니라 문화계 인사들을 스튜디오로 초대해서 대담을 나누고, 작가가 일반 애청자와 국악 동호인들을 만나 국악사랑 이야기며 한 곡조 부른 걸 소개하는 코너며, 우리 전통 속에 소중한 것들을 하나 하나 다시 새겨보는 ‘사랑채 뜨락에’ 같은 인문학적인 코너도 있고. 현재 우리네 지역에서 어떤 일이 화제인가. 지역 생활상을 전해주는 ‘고향 나루터’ 같은 코너며, 우리소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 둘 풀어 나가는 ‘사설마다 사연이’ 코너 까지 참 욕심도 많게 1시간 짜리 프로에 가득 채운 모습이다. 그걸 매주 2편씩 제작하며 달려오고 있다. 해마다 특집프로그램도 제작해서 지난해 추석 무렵은 코로나씻김 마당놀이 ‘떴다 소리꾼 상사디야’ 2부작을 올렸고, 북한인민배우들이 부른 민요를 특집으로 소개한 ‘대동강수 한강수 민요로 만나다’ 같은 작품도 올려졌으며, 삼일절 무렵에는 ‘열사여 항일의 깃발이여’ 같은 특집으로 겨레의 나라사랑 얼을 되돌아 보기도했다. 우리 프로그램은 그냥 허공에 날리지 않는다. 한편 유튜브 다시보기 영상으로 제작해 올리고 있다. 유튜브에서 ‘남상일 명창 전통으로 소리길로’ 검색해 보면 무수히 많은 영상물이 떠 오를 것이다. 이리 기록하는 뜻은 우리 것 사랑, 국악사랑 마음을 미디어로 올려 나누고 남겨 보자는 마음이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라면 우리 것 사랑하는 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 남상일 명창 프로그램에 동참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 공개하니. 나도 국악사랑 한마디 하겠다. 나도 배운 소리가 있고 배운 가락이 있으니 자랑한번 해보고 싶다. 이런 국악 동호인 여러분. 김병준에게 연락만 주시면 여러분 이야기와 노래며 연주를 녹음해서 남상일 명창이 소개해 드리는 이 ‘전통사랑 이웃사촌’ 코너에 적극 동참해 보시라는 말씀 전하니, 아무쪼록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와 함께 우리 것 사랑 함께 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히 전하며 새해 복 많이 나누시고 건강하시길 빌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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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한류 팬 1억명 돌파 KF,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 발간2012년부터 매년 전 세계 한류현황을 분석하여 책으로 펴내고 있는 KF(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이근)가 외교부와 함께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을 발간했다.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은 전 세계 총 109개국의 한류 현황, 문화적 특성, 문화교류 시 유의사항 등을 비롯하여 98개국의 한류 동호회 및 동호회원 현황을 포함하고 있다. 2020년 9월 기준 전 세계 한류 동호회 수는 1,835개, 한류 팬 수는 전년의 99,328,297명 대비 약 545만 명이 증가한 104,777,808명으로, 사상 최초 1억 명을 돌파하였다. 동호회 당 회원 수도 전년 대비 약 2천명이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어, 경쟁력 있는 동호회를 중심으로 점진적 통합 및 성장 양상임을 보여준다. 2020년 팬데믹 위기 속 한류의 소프트파워가 여실히 드러나, 초연결 사회에서 진가 발휘 2020년 유례없는 팬데믹의 확산 가운데에서도 전방위적으로 약진한 한류의 저력은 ▲다양한 플랫폼 및 채널 특성에 맞게 체계적·전략적으로 운영되는 동호회 활동들(‘번역’, ‘해석’, ‘리액션’, ‘커버댄스’), ▲대중문화 콘텐츠의 향유에 큰 장벽이 되는 언어적 한계의 극복 가능성을 증명한 성공 사례들(영화 < 기생충 >의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 방탄소년단의 한국어 음악 빌보드 차트 진입), ▲디지털 플랫폼에 최적화된 미디어 기술로 구현해낸 세계 최초 유료 온택트(Ontact: 온라인을 통한 대면 방식) 콘서트 ▲웹 환경에 최적화된 한국식 포맷을 창조하여 신 한류 장르로 자리 잡은 세계 최초 웹툰 플랫폼 등에 힘입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류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 한류 팬의 열정이 식지 않는 러시아 등 한류의 지속 성장세 지역별로는 조사 이래 최초로 아시아 지역에서 동호회 수가 감소하였다. 일본의 혐한류, 중국의 한한령, 그리고 한류 스타들의 윤리적 문제가 이슈화된 영향으로 분석된다. 반면 미주,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 아시아 외 모든 지역에서 동호회 수가 증가하여 지역 편중이 완화되는 긍정적 신호를 보이기도 했다. 미주 지역에서는 한류가 지속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동호회들이 회원 수 평균 100만 명에 달하는 체계적인 조직 시스템으로 성장, 한류 강국이 되었다. 영화 < 기생충 >의 아카데미 4관왕 쾌거, < 킹덤 > 등 드라마의 흥행, < 핑크퐁 > 등 어린이 캐릭터의 인기에 더불어 웹툰, 게임, 한식까지 미국 내 시장의 파이를 키워가고 있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에서도 K-pop과 K-drama를 중심으로 활발한 동호회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힘입어 미주 지역 동호회원 수는 전년 1,215만 명 대비 30%가 증가한 1,580만 명을 기록했다. 유럽 지역의 동호회원 수는 한류 열기가 가장 뜨거운 러시아를 중심으로 1,504만 명에서 1,879만 명으로 25% 증가하였다. 러시아인들의 한국문화 사랑은 K-drama와 K-pop에서 영화, 클래식, 음식, 한국어, 전통문화 등 전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타 문화권의 대중문화가 쉽게 자리 잡기 어려운 아프리카·중동 지역에서도 K-drama와 K-pop을 필두로 한류가 상승세를 탔고, 이집트와 요르단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 동호회원 수는 전년 32만 명 대비 119만 명으로 3.7배 급증하여 향후 한류의 행보가 기대를 모은다. 괄목할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류의 전진기지였던 아시아 지역의 한류 성장 위축, ▲한류 팬이 러시아에 편중된(동호회원 수의 80% 차지) 유럽 지역, ▲지나치게 ‘상업적’이거나 ‘선정적’인 한류와 ‘맹목적’인 한류 팬에 대한 반감 역시 관찰됨에 따라 실효성 있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철저한 원인 분석과 한류의 입지 유지를 위한 새로운 전략이 요구된다. "높은 완성도의 한류 콘텐츠가 글로벌 플랫폼에서 선전, 한국 콘텐츠에 대한 세계적 관심으로 선순환” 이근 KF 이사장은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은 어려운 시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한류의 확산을 수치와 보고서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언급하며 "국내외 문화예술 및 한류 관련 유관 기관에서 사업 방향을 수립하고, 우리 국민이 한류 현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KF는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을 정부, 언론, 문화예술기관 등에 배포할 계획이며, 한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온라인(http://ebook.kf.or.kr)으로 편리하게 책자를 열람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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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가장 한국적 음악으로 ‘21세기 음악’을 창조한다. 서울예대 한국음악 전공 입학안내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미래 예술가라면! 주목할 예술대학, 눈여겨볼 전공이 있다. 바로 서울예술대학교(총장 이남식) 한국음악전공이다. 한국음악전공은 전통예술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현대적 예술장르와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새로운 융합형 예술가를 양성하고 있다. ‘민족 예술혼의 현재화, 세계화’라는 서울예대의 창학이념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예술을 온몸으로 체현할 수 있는 인재라면 한국음악전공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한국 전통음악+대중음악+서양 클래식+Jazz 결합 ‘21세기 음악’ 창조 21세기 세계 음악계의 동향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실제 세계시장에 한국의 전통음악을 인식시키는 과업이 가능한, 또 필요한 시기로, 현재 문화예술계는 한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실험적인 새로운 음악콘텐츠를 원한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문화예술장르와 융합해 실제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이며 예술적인 뉴 폼 아트를 구현,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BTS의 <아리랑>이나 BTS 슈가의 <대취타> 등이 그렇다. 서울예대 한국음악전공은 한국 전통음악, 대중음악, 서양 클래식, Jazz를결합, ‘21세기 음악’을 창조한다는 이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음악교육을 병행하고자 다양한 음악커리큘럼을 도입해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우리 음악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음악 전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와 실기의 연마를 통해서 연주가, 작곡가 등의 창작예술인을 양성하고 있다. 기악·성악·타악·작곡·이론 등 각 전공별 전문성을 함양하고 전통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며 세계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글로벌 예술인을 기르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음악 전공은 기악전공과 작곡전공은 악기별로, 성악전공은 장르별로, 타악전공은 고법과 풍물연희의 각 악기별 세부전공을 둔다. 각 세부전공은 전공과정과 아울러 인접 학문에 대한 다층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순수음악은 물론 무용음악, 극음악, 배경음악, 실용음악의 음악장르는 물론 영상, 영화, 연출, 사진, 광고 등 다양한 장르와 융합함으로써 한국음악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k-Traditional Music・k-Crossover Music 분야 조합 통한 융합예술 교육 전통음악의 세계화를 목표로 민족예술의 혼을 담은 전통음악의 명맥을 이어가는 k-Traditional Music과 21세기 세계 음악계의 동향을 반영해 다양한 음악과의 융합으로 새 음악장르를 창출해내는 k-Crossover Music 등 두 분야를 적절히 조합해 각자의 장점을 살린 1인 콘텐츠 제작 및 문화예술 공연을 제작, 국내 및 해외에서 활발하게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융합예술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음악전공 교육과정의 강점 한국 전통예술의 보편화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화를 통해 더욱 혁신적인 21세기 음악의 흐름에 앞장설 수 있으며, 세계 수준의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음악콘텐츠를 제작, 실제 연주가 가능하다. 한국 전통악기와 서양 클래식악기의 융합은 더 나아가 인접 과목과의 교류를 확대해 여러 예술장르와 융합할 수 있는 음악예술가로의 자질을 향상시킨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현재 음악계의 동향을 파악해 다양한 예술과의 통섭을 이루며 창작할 수 있는 안목과 예술 감각, 실기능력을 동시에 향상시킨다. 2021 정시에서 총 10명 선발...정원내 일반전형 학생부 40, 실기 60 서울예대 한국음악전공은 2021학년도 정시에서 기악 5명, 타악 2명, 성악 2명, 작곡 1명 등 총 10명을 정원내 일반전형으로 선발한다. 아울러 전문대졸 11명, 농어촌 1명, 장애인 1명, 외국인 3명 등 총 16명을 정원외 특별전형으로 선발한다. 정원내 일반전형과 정원외 특별전형 농어촌 및 장애인은 학생부 40, 실기 60으로 성적을 반영하며, 정원외 특별전형 전문대졸 및 외국인은 실기 100%로 선발한다. 학생부 반영 교과는 국어, 영어이다. 서울예대 정시모집 원서접수는 1월 7일부터 1월 18일까지다. 실기고사는 1월 23일부터 24일 사이에 실시되며 자세한 일정은 1월 20일 오후 6시 서울예대 홈페이지에 공지된다. 홍보팀장 윤치호 (☎) 031-412-7187, 010-9173-0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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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못 잊도록 생각이 나거든 이십오여 년 전 언론인 L씨로부터 시인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이 쓴 엽서와 편지 이십여 통을 얻었다. 이 편지는, 평북 철산(鐵山) 출신으로 중국 상해와 봉천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주필·부사장을 지낸 유봉영(劉鳳榮, 1897-1985)에게 보낸 것들이다. 안서는 고향 정주(定州)에서, 철산과 경성, 중국 봉천으로 옮겨 다닌 친구 유봉영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냈는데, 1919년 편지에는 ‘안서용고(岸曙用稿)’라는 글자가 인쇄된 오백칠십육 자(24×24) 전용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다.(*사진 42~43) 또 다른 이백사십 자(12×20) 원고지에 쓴 1922년 3월 23일 편지에는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의 「못잊어」를 연상케 하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다.(*사진 44) 「못잊어」풍의 시가 들어 있는 안서의 편지는 모두 넉 장이다. 안서는 여기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다고 시시콜콜하게 적고 있다. 문제의 시는 안서가 친구에게 자신의 심각한 고민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면서 소개됐다. 狂人? 泥醉? 戀愛熱中? 이 세 가지만이 現實世界의 모든 苦痛에서 自由롭게 하여 주는 듯합니다. 眞正한 告白을 하면 나는 그 동안 웃읍은 로맨쓰를 가젓읍니다. 그것은 아모것도 몰으는 十七歲의 所謂 生離別리와 놀앗읍니다. 한데 그것이 郭山一周에 갓득히 所聞이 낫읍니다. 하고 저 便에서는 共同生活을 請하여, 참말로 ᄯᅡᆨ하엿읍니다. 만은 그것도 이제는 지내간 ᄭᅮᆷ되고 말앗습니다. 온갖 힘을 다하야 다른 곳으로 살님 가도록 하엿읍니다. 罪를 지엇읍니다. 그러나 엇지합닛가. 사람의 맘이란 물과도 갓고 바람과도 갓튼 것이매. 그것을 엇지합니가. 日前에 이러한 말을—그말은 쓰지 안읍니다—듯고 卽興으로 詩하나 지여주엇읍니다. 안서가 열일곱 살짜리 애인을 떠나 보내며 즉흥으로 지은 시에는 제목이 없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못닛도록 사모차게 생각이 나거든, 야속하나마 그런데로 살으십시구려, 그려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못닛도록 살틀하게 그립어오거든 설으나마 세월만 가라고 합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럿케 말하겠지요, "사모차게 생각나는 못니즐 당신을 그대로 생각을 안는다고 니저바리며, 살틀하게 그립어오는 못니즐 당신을 그런대로 세월을 보낸다고 닛겠읍닛가?” 소월은 이와 비슷한 시를 1923년 5월에 발간된 『개벽』 35호에 처음 발표했다. 발표 시기는 안서의 편지보다 두 달가량 늦다. 『개벽』에 발표된 시는 「사욕절(思慾絶) I,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라는 제목으로, 『진달래ᄭᅩᆺ』에 수록되기 전의 작품이다.(발표 당시 제목)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歲月만 가랍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닛치겟지요, 아수운대로 그러케 살읍시구려. 그러나 당신이 니르겟지요, "그립어 살틀이도 못닛는 당신을 오래다고 생각인들 떠지오릿가?” 그리고 이는 다시 1925년 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에 「못니저」(발표 당시 제목)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니칠날 잇스리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니저도 더러는 니치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럿치요, "그립어 살틀히 못닛는데, 어찌면 생각이 떠지나요?” 안서의 편지에 실린 시와 『개벽』에 발표한 소월의 시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 그리고 『진달래꽃』에 수록한 「못잊어」는 시어와 리듬에서 차이가 날 뿐, 같은 시가 개작을 통해 변모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만큼 내용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안서는 소월에게 특별한 스승이다. 안서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소월의 시재(詩才)를 발굴해 키웠으며, 그를 문단에 데뷔시키고, 소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안서는 소월이 쓴 대부분의 시를 미리 받아 첨삭(添削)·정서(正書)한 다음 잡지사에 넘겼다. 이런 작업은 소월 사후에까지 이어져, 소월의 유고를 손질해 각종 잡지에 발표하고, 『소월시초』(1939), 『소월민요집』(1948)을 펴내기도 했다. 안서가 편지에 쓴 문제의 시는 소월이 『개벽』에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를 발표했을 때보다 두 달가량 앞섰고 시를 쓴 동기가 분명한 만큼 원작자가 안서일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점은 안서의 또 다른 편지에 실린 시 「사향(思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5월 15일 경성에서 쓴 이 시는, 안서의 첫 시집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에 같은 제목으로 조금 변형되어 실려 있으며, 『진달래꽃』에 수록된 소월의 시 「제비」와 비슷하다. 「사향」의 첫 행 "공중(空中)에 나는 제비의 몸으로도”와 「제비」의 첫 행 "하눌로 나라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는 거의 똑같다.(*사진 45) 소월의 대표작인 「못잊어」와 「제비」의 원형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점 외에도, 안서의 편지들은 근대문학사와 관련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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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19한산셤 달 발근 밤의 수루에 혼자 안자 큰 칼 녀픠 차고 기픈 시람 하난 적의 어듸서 일성호가난 남의 애를 긋나니 이충무공의 시를 쓰니 때는 경자세모라 취월당 주인 한얼 이 선 작품해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작품감상 중과부적의 팽팽한 긴장 속에 홀로 잠 못 이루는 한산도의 밤. 망루를 비추는 밝은 달빛은 망연하고 속절없다. 백척간두의 나라 걱정에 잡은 칼자루에 힘을 주어 보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한 가락 풀잎 피리소리에 장군의 애간장은 이내 끊어져 녹는다. 국한 고문을 고체와 예서로 이순신 장군의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헤아려 엄정하게 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한얼과 醉月堂 등을 호로 쓰고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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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19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산조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기악 독주곡이다. 가야금에서 시작한 산조는 대금, 거문고, 아쟁, 피리, 해금, 퉁소, 태평소 등 많은 국악기의 연주에 수용되어 현재 매우 중요한 레퍼토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음역이 좁은 피리는 1960년대 지영희와 이충선 명인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무대 독주곡으로서 맨 처음 선 보인 것은 1970년대 정재국 명인에 의해 연주된 산조이다. 본 음반에는 지영희류, 이충선류, 정재국류 피리산조(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수록되어 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초기 피리산조를 짚어 보고 21세기 피리산조의 나아갈 방향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출반하였다고 한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지영희류 피리산조는 명인이 남긴 산조 악보를 정리한 박승률의 악보를 분석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진양-중모리-도살풀이-자진모리의 이충선류 피리산조는 국악사 양성소에서 발행한 등사본 악보, 김기수가 채보한 악보, 서한범에 의해 재구성된 악보 3종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선율이 조금 차이가 있다. 3종의 악보를 분석한 후 재구성하여 연주한 것이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정재국류 피리산조는 명인이 고등학교 때 배운 스승인 이충선의 가락과 전라도에서 피리 잘하기로 유명한 오진석의 가락을 바탕으로 완성되어 1972년 최초의 피리독주회에서 발표되었다. 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정악의 영향을 받아 꿋꿋한 힘과 웅장함을 지니고 있다. 장고는 국립국악원 단원인 양재춘 고수가 잡았다. 진윤경 연주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을 거쳐 현재는 부산대학교 한국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음반은 2010년 J_ONE <Memento Mori>에서 이어지는 연주자의 5번째 음반이다. 연주와 이론에 열정적인 연주자로 연주력만으로 이런 음반이 나올 수가 없다. 무척 크고 고운 피리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박범훈류 피리산조도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GGC-20030&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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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다큐)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 씻김굿 명인 박병천예향의 고장, 진도 민속예술의 고장, 진도 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씻김굿 명인 박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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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일본 서점가 ‘K북 페어’ 'K탈춤 공연' 열풍 이어가문화체육관광부 해외문화홍보원이 매주 월요일 발행하는 <한 장에 담은 외신 속 한국 문화> 47호이다. K-드라마·K-팝에 이어 한국 문학이 일본 서점가에서 ‘K북 페어’ 열풍을 이어가며 큰 인기라는 소식과 함께 BTS가 2020년 스포티파이에서 최다 스트리밍된 아티스트로 선정되었다는 반가운 뉴스를 외신이 전했다. 교토통신은 한국 탈춤 공연이 일본 대중들에게 코로나를 이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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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새로운 이정표를 쓰다2020년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19로 세계 각국은 미증유의 늪에 빠졌다. 경제적 충격도 국가를 가리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백신과 치료제의 소식이 들리기는 하나 코로나와의 전쟁이 언제 끝날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가운데서도 지난해 한국은 K-방역을 바탕으로 경제적 충격 방어는 물론, 국제적 위상까지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성과를 거뒀다. 이에 정책브리핑이 ▲글로벌 트렌드를 선도하는 한류 ▲G7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 경제력 ▲국제사회를 선도하는 리더십 발휘로 나눠 차례로 소개한다. (편집자 주) 지난해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감염병으로 인한 세계적 대위기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K-팝·K-웹툰·K-드라마·K-뷰티·K-푸드 등은 일명 K-신드롬을 일으키며 새로운 한류 시대를 열었다. 세계 음반·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 방탄소년단(BTS)은 지난해 2회 연속 빌보드 메인 싱글 차트 핫(HOT)100 1위를 차지했다. 디지털 싱글 ‘다이너마이트(Dynamite)’는 지난해 8월 31일, 뒤이어 11월 발표된 앨범 ‘비(BE)’와 타이틀곡 ‘라이프 고스 온(Life goes on)’은 발매 주에 ‘빌보드 200’과 ‘핫100’에서 나란히 정상에 다시 올랐다. 이로써 지난 2018년 5월부터 BTS 발매 앨범은 5장 연속 빌보드 핫200 1위를 차지하는 기록을 남겼다. BTS 발매 앨범은 2018.5월부터 5장 연속 빌보드 HOT 200(앨범차트) 1위 차지 외신들은 BTS가 지난해 미국 팝의 새 역사를 썼다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수년간의 노력과 예술적 진화, 팬덤과의 파트너십 관계의 절정”이라며 "서양 음악 팬들이 비서구권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꿨다”고 밝혔다. 또한 영국의 로이터 통신은 "케이팝의 미국 진출 최전선”, 프랑스 AFP통신은 "미국의 거물 가수들을 제치고 글로벌 지배력을 확고히 하는 이정표”라고 평가했다. 영화 ‘기생충’은 비영어권 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에 오르며 세계 영화사를 새로 썼다. 특히 작품상과 국제장편영화상을 동시에 수상한 것은 아카데미 역사상 최초이며, 비영어권 영화로 각본상을 수상한 것은 17년만이며, 2019년 5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동시 수상한 것은 역대 두 번째로 경이로운 기록에 빛났다. 기생충은 세계 62개국 개봉, 202개국으로 수출됐으며 2019년에는 미국 개봉 외화 매출액 1위를 기록했다. 이에 국제사회는 "한국영화가 아시아를 넘어 미국, 유럽 등 세계 주류 영화의 중심에 서게 됐으며, 한국문화로 시야가 확장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모건 오테이거스 미국 국무부 대변인은 지난해 2월 11일 "한류는 확실히 도래했다”고 말했다. 아울러 기생충은 비영어권 영화, 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백인·영어권 위주였던 오스카상의 새 역사를 기록한 만큼 세계문화 다양성에 기여했다. AP통신은 "비영어권 영화로 작품상을 받은 것은 세계의 승리”라 전했으며, 미국 CNN은 "아시아 영화의 거대한 진보”라고 밝혔다. BTS·기생충 효과…콘텐츠산업 수출액 10조원 돌파 최근 5년간(2015년~2019년) 콘텐츠산업 수출은 16.4%의 높은 성장세를 기록했고, 2019년 수출액이 최초로 100억 달러(103억 9000만 달러)를 돌파했다. 콘텐츠산업 수출은 최근 5년간(’15년~’19년) 16.4%의 높은 성장세를 기록, ’19년 수출액이 최초로 100억 달러 돌파(103.9억 달러) 한류 콘텐츠는 전례 없는 성과를 창출하며, 국제적 경쟁력을 입증했다. 영국의 세계적인 월간지 모노클(Monocle)은 지난해 7월 16일 한국 소프트파워를 독일에 이어 세계 2위로 평가했다. 모노클은 "한국이 엔터테인먼트와 혁신에 있어 다른 나라를 위한 기준을 세웠다”며 "한국 영화·TV·음악은 한국의 강력한 소프트파워의 핵심이며 세계인들이 박찬욱,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고 K팝을 듣는 등 명실상부한 문화 수출품이 됐다”고 전했다. 한국 콘텐츠시장 규모는 623억 달러로 세계 7위 규모(2018년 기준, PwC)이며 콘텐츠 수출이 한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전 세계 한류 애호층 수는 약 1억 명에 육박(2019년 국제교류재단)했다. K-웹툰, 일본·미국 디지털만화 시장 1위 달성…저작권 무역수지 역대 최고 한류는 일본·미국 디지털만화 시장에서도 승승장구 하고 있다. 먼저 카카오재팬의 웹툰 플랫폼 ‘픽코마’는 일본 구글플레이·앱스토어에서 매출 1위를 기록했다. 또 작년 7~11월 일본 월간 만화앱 부문 매출 1위, 11월 전세계 만화·소설앱 부문 매출 1위, 비게임 부문 매출 7위(매출은 앱스토어·구글플레이 합산 기준)의 기록을 세웠다. 작년 3분기 거래액은 전년 같은 기간 대비 247%(1300억 원) 증가, 연간 누적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168%(2700억 원) 늘었다. 미국 월간 만화앱 부문에서 네이버웹툰은 2019년 1월부터 작년 11월까지 매출이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4월 미국 경제 전문지 포브스는 ‘신의탑’을 원작으로 한 네이버웹툰의 애니메이션에 대해 "에피소드가 끝날 때 어떻게 이 이야기가 주간 500만 명의 독자를 사로잡았는지 이해하게 됐다”고 칭찬했다. 저작권 무역수지는 반기별 역대 최대 흑자를 달성해 약 1조 2000억 원(10억 4000만 달러)을 벌어들였다. 반기별 총 수출액 50억 달러(약 5조 8000억 원)를 돌파했고, 반기별 영화·음악 등 문화예술저작권 분야는 무역수지 사상 최초 흑자로 전환했다. 한국의 소프트파워(Soft Power 30) 순위 역대 최고 한국의 소프트파워(Soft Power 30) 순위는 2019년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미국 포틀랜드커뮤니케이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 2016년부터 한국의 소프트파워 순위가 지속적으로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국제사회는 디지털(5위), 기업(9위), 교육(12위) 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는 평창올림픽 등 국제협력, 다자주의 등이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순위 향상을 위해서는 K-팝 외 다양한 한국문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2019년 조사결과). 전 세계 7000개 언어 중 ‘한국어’ 사용 인구 14위 ‘신한류’ 확산으로 한국문화의 정수, 대표 상징인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급증했다. 이에 세종학당이 200곳을 돌파하는 등 전 세계 한국어 학습규모 또한 증가했다. 유엔(UN)에서는 지난 2007년 한국어를 세계 10대 실용어 중 하나로 평가했으며, UN 산하 세계지식재산기구(WIPO)는 9번째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IBM은 2016년 개발한 인공지능 왓슨의 8번째 언어로 사용했다. 이밖에도 인도(7월), 러시아(9월)는 한국어를 교육과정 내 제2외국어로 채택했고, 베트남은 채택계획을 발표(11월)하고 한류스타 한국어 학습 콘텐츠 개발을 확대했다. 한류 기반 K-푸드, 세계적 확산 지난해 농식품 수출은 영화 ‘기생충’ 오스카상 수상, BTS 빌보드 차트 1위 등 한류 확산에 따른 K-푸드 인지도 상승으로 코로나19 팬데믹에도 불구하고 큰 폭으로 성장(11월말 기준 전년 대비 6.8%)했다. 특히 ‘짜파구리’ 인기와 함께, 짝꿍 식품인 김치가 작년 3분기 역대 연간 최고 수출액을 경신하고 건강·발효식품(김치·장류·인삼) 수출도 호조를 보였다. 우리 조미김은 건강·간편식 트렌드에 따라 세계 김 수출시장의 87%를 점유했고, 신남방 지역이 사상 처음 일본을 제치고 1위 수출권역으로 부상하는 등 수출국도 다변화되며 전세계로 K-푸드가 확산됐다. 라면은 간식에서 식사대용으로 위상이 바뀌었고, 김치는 건강식품으로 인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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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사로잡은 #한류올 한해를 집어삼킨 단어는 ‘코로나19’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라는 새로운 감염병이 불러온 위기 속 대혼란에 빠졌다. 국내 상황도 마찬가지다. 많은 것이 멈췄고 직격탄을 맞았다.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겪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 부단히 애썼던 2020년, 우리의 1년을 되돌아 본다.(편집자 주) 2020년은 코로나로 시작해 코로나로 끝났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전세계 코로나19 위기 속에서도 ‘한류’는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며 많은 이들에게 감동과 힘을 줬다. K-브랜드는 영화·음악·드라마·스포츠·게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신한류 열풍을 몰고오며 글로벌 시장에서 입지를 굳건히 했다. 한국 문화 역사상 그리고 한류 역사상 이보다 빛날 순 없었다. 영화 ‘기생충’, 방탄소년단(BTS), ‘킹덤’·‘사랑의 불시착’ 등 한국드라마, 핑크퐁 아기상어 ‘싱앤댄스’, 국악밴드 ‘이날치 밴드’, K-푸드 세계적 확산, 손흥민·류현진·고진영 선수 등 코로나19 위기 속에서 빛났기에 점수를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졌다 정부도 코로나19라는 복병을 비롯한 한류를 둘러싼 환경변화에 맞서 지난 7월 16일 ‘신한류 진흥정책 추진계획’을 관계 부처 합동으로 발표했다. 기존 한류와 달리 한국 문화 전반에서 한류콘텐츠를 발굴하고 연관 산업과의 연계를 강화하고 상호 문화교류를 지향해 지속성과 파급효과를 높이겠다는 취지다. 이렇게 올 한해 한류의 위상은 단순히 후발자에서 선발자로 인식되는 것을 넘어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을 실감토록 했다. ‘기생충’ 아카데미 4관왕…BTS 발매곡, 빌보드 핫100 2차례 1위 올해 한국 음반·영화사뿐 아니라 세계 음반·영화사에 기록될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바로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의 세계적 흥행과 BTS의 미국 빌보드차트 석권이다. 먼저 ‘기생충’은 국내에서 천만 관객을 동원했으며 전 세계 202개국에 판매돼 한국영화 역대 최다 판매 기록을 세웠다. 또한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받고 제92회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장편영화상 등 4관왕을 차지하면서 영화 주류 시장인 북미권을 파고들어 한류의 정점을 찍었다. BTS의 한국대중음악(K-pop) 열풍은 세계시장으로 뻗어나가 월드클래스의 면모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국내 가수가 핫100에서 1위를 차지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는데, BTS는 디지털 싱글 ‘다이너마이트’가 빌보드 핫100에서 총 3회 1위를 했고, 뒤이어 발표된 앨범 ‘비(BE)’와 타이틀곡 ‘라이프 고스 온(Life Goes On)’이 같은 주에 각각 ‘빌보드 200’과 ‘핫100’에서 나란히 정상에 오르며 세계적인 가수답게 기록적인 성과를 써내려갔다. 또한 BTS의 온라인 콘서트 ‘방방콘 더 라이브’는 75만 명의 시청자가 몰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본 스트리밍 음악 콘서트로 기네스 기록에 등재됐다. 기생충·BTS 효과, 음반·영상물부터 라면·김치까지 수출액 ‘역대 최대’ 기생충·BTS의 효과는 상징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경제 효과로도 이어졌다. 한국은행이 9월 18일 발표한 ‘2020년 상반기 중 지식재산권 무역수지(잠정)’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우리나라 저작권 무역수지는 1억 6000만 달러 증가한 10억 40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다. 특히 문화예술저작권 중 음악·영상 저작권의 괄목할 만한 성장세가 돋보였다. 케이팝의 인기에 음반과 영상물 수출액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관세청 올해 1~11월 음반·영상물 등 음반류 수출금액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94.9% 증가한 1억 7000만 달러(약 2030억 원)로 집계됐다고 발표했다. 또한 문체부는 9월 7일 한국문화관광연구원과 함께 BTS의 ‘다이너마이트’가 빌보드 핫100 차트’ 1위 정상에 오르면서 불러올 경제적 파급 효과가 1조 7000억 원에 이를 것으로 분석한 바 있다. 이후 ‘다이너마이트’는 2번 더 1위를 차지했고, 후속곡 ‘Life Goes On’도 정상에 올랐으니 경제적 파급 효과는 더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와 함께 K-푸드 인지도 상승으로 농식품 수출이 큰 폭으로 성장했다. ‘기생충’의 해외 영화상 수상으로 ‘짜파구리’ 인기와 함께 한류의 인기가 확산되고 코로나19 장기화로 가정 내 간편식 소비가 증가하면서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 중심으로 매운 라면과 김치의 소비도 함께 증가했다. 한국인이 즐겨 먹는 대표적인 짝꿍 식품인 라면과 김치의 수출액이 올해 9월 기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각각 36.3%, 38.5% 증가해 역대 최고 실적을 경신했다. 또 고추장은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 세계규격으로 채택돼 수출의 비관세 장벽이 낮아져 세계시장에 한국 식품의 우수성을 폭넓게 알릴 수 있게 됐다. 비대면 시대, OTT 시장 등에 업고 세계시장 접수한 ‘K-콘텐츠’ 영화·음악뿐만 아니라 드라마 부문도 전 세계에서 한류 위상을 드높였다. 그 중심에는 넷플릭스와 유튜브 등 OTT(인터넷으로 각종 영상을 제공하는 TV서비스) 서비스 시장의 다양성과 코로나19로 OTT 시청 시간의 급증 등 요인이 있다. 이로 인해 한국 드라마를 비롯한 K-콘텐츠가 아시아를 넘어 전 세계로 뻗어나가 명실상부한 한국을 각인시켰다.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좀비 드라마 ‘킹덤’ 연속 기획물은 세계적인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를 통해 190여 개국에 27개의 언어로 제공돼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 열도를 관통했으며, ‘사이코지만 괜찮아’와 JTBC ‘이태원 클라쓰’는 넷플릭스에 공개되자마자 아시아권 국가에서 상위 10위 안에 들었다. 구글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베트남 누리꾼이 가장 많이 검색한 TV 프로그램에서 한국 드라마가 상위 10위 내에 4개를 차지했다. 영화 부문에서는 한국 영화가 1위를 차지했는데, ‘기생충’이 단연 주인공이었다. 아울러 한국관광공사 해외홍보 영상 ‘한국의 흥을 느껴라(Feel the Rhythm of Korea)’는 다양한 모방댄스와 ‘1일 1범’ 등 신조어가 등장할 정도로 국내외에서 소위 대박을 터뜨렸다. 특히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관광공사의 홍보영상 중 서울편에 등장하는데, ‘하루에 한 번은 꼭 <범 내려온다>를 보고 듣는다’는 의미의 ‘1일 1범’ 열풍을 만들었다.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로 송출된 이 영상은 총 5억 4700회의 기록적인 조회 수를 세웠다. 홍보 영상이지만 광고로 느껴지지 않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우리나라 ‘K흥’을 잘 보여줘 국악팝의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밖에도 애니메이션 캐릭터인 ‘핑크퐁 아기상어’ 체조영상(싱앤댄스)이 전세계 유튜브 74억 뷰(11월 기준)를 기록해 역대 최다 조회 영상 1위에 올랐다. 이는 3년 넘게 1위를 차지한 미국 가수 루이스 폰시의 ‘Despacito(데스파시토)’를 제쳐 의미가 컸다. 또 게임 분야에서는 ‘크로스파이어’·‘에픽세븐’·‘로스트아크’ 등이 전 세계 80개국 이용자 6억 7000만 명을 확보하고 누적 사용료(로열티) 수출액 약 3조 5000억 원 달성이라는 성과를 이뤄냈다. 손흥민·류현진·고진영 선수, 스포츠 한류로 세계 무대 호령 한국 스포츠 스타들도 올해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속에서 세계 무대를 호령했다.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의 주전 공격수 손흥민 선수는 지난 7일 ‘더 베스트 FIFA 풋볼 어워즈 2020’ 시상식에서 한국인 최초로 ‘푸슈카시상’을 받으며 코로나19로 지친 국민들에게 큰 감동과 자긍심을 줬다. 손흥민은 아시아 선수 최초로 EPL 득점왕에도 도전한다. 문체부는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과 함께 손흥민 선수의 경제적 파급효과 규모가 1조 9885억 원에 이를 것이라고 추산했다. 전성기에 접어든 선수라는 점에서 이번 추산치는 최소치로 분석되며 향후 경제적 파급 효과는 더욱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미국프로야구 메이저리그(MLB)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에이스 류현진 선수는 아시아 선수 최초로 ‘워렌스판상’을 받았다. 이 상은 메이저리그 역대 좌완 최다승을 기록한 워렌스판의 이름을 딴 상으로 지난 1999년부터 매 시즌 가장 뛰어난 좌완 투수 1명에게 수여된다. 류현진은 MLB 최고의 투수에게 수여하는 ‘사이영상’도 노린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고진영 선수는 올 한해 세계랭킹 1위로 시작해서 1위로 마무리했다. 더 놀랄만한 것은 김세영, 박인비 선수가 세계랭킹 2위, 3위에 오르며 세계 정상 자리를 모두 한국 선수들이 싹쓸이했다. 특히 고진영은 지난해 7월 말부터 현재까지 74주간 세계랭킹 1위 자리를 굳걷히 지켰다. 내년에는 역대 한국 선수 최장 세계랭킹 1위 기록도 노려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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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6지난 회에서 살핀 정범태 선생의 사진과 해설로 연재된 <명인>은 이후 <정범태의 사진으로 보는 명인명창 이야기>로 100호에서 이어졌다. 이를 전후하여 또 하나의 중요한 연재물이 기획, 연재가 시작되었다. 이 역시 ‘국악의 위상정립과 대중화 방안 수립’이란 취지에 맞는 기획물이다. 바로 기산 박헌봉(岐山 朴憲鳳/1906~1977)의 <國樂運動 半生記>이다. 제98호 2000년 10월 25일자부터 분재(分載) 되었다. 이 글은 원래 신동아(新東亞) 1968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연재된 것이다. 42년 전의 기록임으로 재수록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결과이나, 더 직접적인 이유는 국악신문의 국악관(國樂觀)과 일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박헌봉은 민속음악 학자이면서 교육자의 상징적인 인물로 1947년 국악원(國樂院)을 선립하여 그 원장에 취임하고, 1960년 국악예술학교(國樂藝術學校)를 설립, 교장을 맡은 인물이다. 박헌봉과 국악예술학교에 대한 관심은 2000년 4월 5일자 장연희 기자의 탐방 기사 <21세기 전통문화예술을 주도할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찾아서>에서도 확인되나 김호규 대표의 시론(時論) <서울국악예술학교의 미래와 희망>(2005. 5. 10. 제150호)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가 있다. "해방 전부터 국악진흥을 위해 남다른 노력을 한 국악이론가 기산 박헌봉과 당대의 명창인 향사 박귀희, 만정 김소희를 중심으로 국악인들이 민속악을 중심으로 전문교육기관을 건립하고 체계적인 보존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는 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국악예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국악예술학교의 설립 배경과 함께 한 이들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리고 이 학교의 기본적인 국악 교육관을 기술했다. 이는 김호규 대표의 국악관이기도 하여 의미가 있다. "국립국악원이 1951년 개원하고 현재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의 전신인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가 1955년 설립되었으나 국립국악원이 구왕궁아악사들로 중심이 되어 있었고, 민속악을 함께 가르쳤다고는 하나 국악사양성소가 그들이 주축이 되어 아악 중심의 교육과정을 운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속음악인들은 그들이 민속악 보존과 계승 발전의 주체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갖은 역경을 이겨내고 뜻있는 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1960년 3월 현재의 서울국악예술중고등학교의 전신이자 한국 최초의 사학 국악전문교육기관인 국악예술학교를 개교한 것이다.” 이 기술에서 두 가지가 확인된다. 하나는 정악 중심의 국립국악원 부설의 국립국악중고등학교와 민속악 중심의 국악원(국악협회) 관련 국악예술중고등학교의 뿌리 깊은 반목(反目)의 배경을 알 수 있다. 또 하나는 국악신문의 재수록 배경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점이다. 제1회 연재 리드기사는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핀 의도가 재확인 된다. "국악신문은 우리 음악사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우리 국악사에 큰 줄기를 마련하신 박헌봉 선생의 회고록을 입수하여 연재합니다. 평생을 우리 음악과 함께 살아오며 남기신 발자취를 요악, 정리하여 연재합니다.” ‘신동아’에 처음 연재할 당시 <國樂運動 半生記> 9회 분재 제하(題下)는 다음과 같다. 이토록 민속음악의 위상 정립을 위해 노력한 이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1) 樵童의 노래 듣고 樂에 눈떠 (2) 3.1운동 후에 書堂을 하직 (3) 族譜에서 除名당할 뻔 (4) 日帝時에 朝鮮樂部를 組織 (5) 해방된 조국에서도 냉대 받아 (6) 초대 內閣에서도 國樂을 外面 (7) 자유당 때 大統領에게도 呼訴 (8) 괴로워 心火로 病席에 누워 (9) 한국 初抄로 國樂학교 設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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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이 추천하는 휴일의 시 15 : 개세가(牧隱 이색)개세가(慨世歌) 목은 이색(牧隱 李穡/1328∼1396)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 있어 갈 곳 몰라 하노라 추천인: 이한구(시조연구회 회원) 며칠 전 해질녘 폭설로 갈길 몰라 했다. 문득 포근한 눈, 매화를 티우는 살폿한 눈이 그리워졌다. 선조의 시조 한 수가 입김과 함께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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