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1 (금)

아리랑 發生說 김연갑/(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아리랑 發生說 김연갑/(사)한민족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

  • 김지연
  • 등록 2008.11.21 15:43
  • 조회수 3,217
아리랑 發生說 1930년 백당 김지연에 의해 최초로 아리랑 발생설 6가지가 정리되었다. 이는 이 시기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학문적으로 일어났음을 알려주는데, 1930년 6~7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조선》지에 2회 게재한 <조선민요 아리랑>과 이를 바탕으로 1935년 단행본으로 나온 『조선민요 아리랑』에 수록된 발생설을 간략하게 살펴본다. 甲-歌謠大方 南道山氏說 榮州郡 풍기면 거주, 남도산씨의 설로 경복궁 중수시 기원설로 “富豪民 중 글짜나 하는 이가 ‘但願我耳聾하야 不問願納聲’이란 作詩를 作한 것이 其時 賦役軍의 입으로 노래를 唱하게 되었다. 아이롱(我耳聾) 漢字音을 無識한 賦役軍이 고뜨는 音이 轉變하야 ‘아리랑’이 되어 卽 노래에 先소리(掛聲)이 되었다”했다. 乙-八能堂 金德長氏說 부역군들의 원한을 방지하기 위해 舞童 등을 불러다 각 지방의 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이때 ‘我離娘’이 불렸다. 丙-尙州 姜大鎬氏說 진시황 만리장성 축조 時 부역민들이 ‘魚遊河 我多苦’라 한 것을 경복궁 부역군들이 ‘魚遊河 我亂離’ 한데서 ‘아난리’가 음전하여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이다. 丁-密陽居住 金載德氏說 ‘畿百年前 密陽郡守 李某의 令孃이 我娘’인데, 이 아랑이 정절을 지키려고 자결, 이후 귀신이이 되어 신임군수가 오면 첫 날밤 나타나 원한을 풀어달라는 이야기에서, 정절을 기리는 노래가 생겼고, 그 노래에서 令孃 명칭 我娘이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이다. 戊-尙玄李先生의 說 家屋을 건축할 때의 上樑文 中 恒例 ‘兒郞偉 抛樑東’····하는데, 터주가 세세년년 번창하기를 기원하는 주문인 ‘兒郞偉’에서 ‘아리랑’이 되었다는 설이다. 巳-新羅舊郡慶州傳說에 因한 說 石窟庵 부근에 ‘閼英井’이 있고, 주변에 ‘아리랑고개’가 있다. 이 알령정에서 龍이 나와 그 옆꾸리에서 ‘알령부인’을 낳고 그녀가 박혁거세의 婦人이 되었다. 이 부인이 많은 백성에게 惠澤을 주어 사람들이 부인을 讚揚하느라 ‘알령 알령’한 것이 노래가 되었다는 설이다. 그러므로 이 아리랑 노래는 新羅때부터 불린 것이라는 설이다. 이상의 기원설은 1930년『조선』誌에 2회에 걸쳐 발표된 6가지 설(①我耳聾說, ②我離娘說, ③我難離說, ④我娘說, ⑤兒郞偉說, ⑥閼英說)과 동일한데, 이렇게 정리된 것은 이글이 처음이다. 이후 김태준 등에 의해 인용되며 어원설과 결합하여 확대 재생산되었다. 그런데 이중 밀양아리랑에 대한 문제는 어느 정도 합의된 논의로 전개된다. 즉 영남루 밑의 <아랑각> 주인공 아랑 처녀와 관련된 설화(아랑形 怨靈傳說)와 밀양아리랑의 연관성은 문헌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노래 <밀양아리랑>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각종 기행문류 등을 살핀 것이데, <밀양명물 영남루의 승경>(동아일보, 1926, 7, 28), <밀양부사가 갚다, 밀양 아랑각>우이동인(이학인, 동아일보, 1927, 8, 28.), <스케취 영남루 하에서>(약산인, 동아일보, 1929, 3, 27), <전설의 조선, 밀양부사 갚다. 밀양 아랑각>(우이동인(李學仁), 상·중·하, 동아일보, 1927, 8, 30),(<嶺南樓와 아랑각>(『삼천리』, 1940년 10월호, 114쪽) 등, 다만 1936년 본조아리랑의 후렴과 사설 1절을 제시하고 “이 노래는 항간을 풍미하고 있어서 모르는 이 없건만 오늘 밤에 영남루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한창 더 새롭고 처량하다. 아리랑노래의 유래가 어디서 왔는지는 모르지만 이 지방 사람들은 이 아리랑과 건련된 줄 안다.”라며 <밀양아랑제의>와 연결하고 “아리랑의 출처도 이곳?”이란 의문 제기 정도가 있을 뿐이다. 현재 이런 설은 김소운(1907~1981)에 의해 ‘我日英’訛音說 청산별곡 여음 ‘얄라성’發生說이 더해졌고, 해방후 양주동·이병도 임동권 등의 가세, 이후 강무학·김재수·박민일·김연갑 등의 주장이 더해져 그야말로 ‘語源百說’로 확대되었다. 이런 설들의 난무는 모두 아리랑에 대한 애정과 관심의 결과임은 물론이다. 참고문헌 1 김태준이 1933년부터 1943년까지 <朝鮮歌謠槪說>을 당시 학계 유례가 없는 최 장기 연재물이다. 총 74회에 걸쳐 <가요와 조선문학>(1~19), <근대가요론>(20~22), <시조론>(23~44), <별곡편>(45~46), <현대가요론>(47), <가사론>(48~55), <민요편>(56~67), <동요편>(68~70), <유행가편>(71~74)로 전 가요를 다루었다. 그리고 <詩歌>에서 <조선민요는 어데로>(1934, 4, 25~27), <조선민요의 개념>(1934, 7, 24~8, 4)을 연재했다. 이 과정에서 발생설을 언급했다. 2 김소운, 『언문조선구전민요집』, 1933, 일한서방, 576쪽. 3 이러한 고대 발생설은 제기되었어도 ‘俄美日英說’(외침을 경계하며 세계 대세의 동향에 주목하여 대처하라는 참요적 성격, 崔永珠, 본조아리랑의 변형에 관한 비교 분석연구, 1984, 6쪽) 이나 영화<아리랑>과 관련된 사실은 언급하지 않았다. 아마도 논자의 학문적 엄숙주의의 결과로 보게 된다. 어떻든 기원의 문제는 기원 당시의 동기보다는 현재 민중들이 인식하는 상황과 감흥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기원에 대한 탐구열의는 아리랑에 대한 사랑의 결과일 것임은 분명한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